나폴레옹 보나파르트/생애

 


1. 유년기
2. 군인
2.1. 프랑스 혁명과 내전
2.2. 1793, 툴롱 반란 진압: 장군 승진
2.2.1. 1793: 툴롱 포위전 참여
2.2.2. 장군으로 진급
2.3. 1794, 테르미도르 반동
2.4. 바라스와의 인연
2.5. 1795년, 방데미에르 13일 사건
3. 통령
3.1. 이탈리아 전쟁: 성공
3.2. 이집트 원정: 실패
3.3. 1799, 쿠데타
3.4. 종신통령 취임
3.4.1. 나폴레옹 법전 편찬
3.4.2. 자유주의
4. 황제 즉위
4.1. 오스트리아 격파
4.2. 1804, 황제 선포
4.2.1. 대관식
4.2.2. 결과
4.2.2.1. 베토벤, 헌정 교향곡 표지를 찢다
4.2.2.2. 식민지
4.3.1. 영국과의 해군경쟁
4.4. 영국과의 전쟁
4.4.1. 1805년, 영국에게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배
4.4.2. 1806, 대륙봉쇄령
4.4.3. 스페인 점령
4.5. 1807 ~ 1814, 영국의 이베리아 반도 파병: 나폴레옹 측 30만의 병력 상실
4.6.1. 청야전술
4.6.2. 10월 18일, 퇴각
5.1. 대불동맹 재결성: 트라헨베르크 작전
5.2. 1813, 라이프치히 전투: 패배
5.3. 1814 4월, 퇴위후 투항
5.3.1. 엘바섬 유배
5.4. 엘바섬 탈출과 백일천하
5.4.1. 1815, 워털루 전투
5.4.2. 재퇴위
5.4.3. 세인트 헬레나 유배
6. 1815, 세인트 헬레나에서의 말년
6.1. 주거지: 브리아스 → 롱우드
6.2. 영국 총독, 허드슨 로
6.3. 최후까지의 측근
6.3.1. 라스 카즈(1766~1842), 1816년 12월까지
6.3.2. 구르고(1783~1852), 1818년 까지
6.3.3. 몽톨롱(1783~1853), 1821년까지
6.3.4. 베르트랑(1773~1844), 1821년까지
6.3.5. 오미어러(1786~1836), 1818년까지
6.3.6. 프란체스코 안토마르치[1](1789~1838)
7. 1821년, 죽음
8. 1840년, 나폴레옹 1세 유골의 귀환(Retour des cendres)
9. 독살설


1. 유년기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에서 태어났다. 코르시카는 1768년까지 제노바의 소유였으며 나폴레옹의 집안도 랑고바르드족에서 내려온 부오나파르테 가문[2]의 후예로 토스카나 출신의 이탈리아 혈통이다. 코르시카 독립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여기에 참여했던 나폴레옹의 가문은 프랑스로 전향해 보나파르트 가문[3][4]이 된다.
출세하려는 하급 귀족이 대체로 그렇듯이 나폴레옹도 유년 사관학교에 보내져 자랐다.[5] 물론 코르시카에서는 나폴레옹의 집안도 명문가였지만, 이 시기 사관학교는 프랑스 혁명 이전 대귀족 자제들의 경연장이었다. 당연하게도 코르시카라는 벽촌의 출신의 하급 귀족 자제에 지나지 않았던 그는 사관학교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코르시카 사투리를 쓰는 촌놈으로 놀림받았다.[6] 동기들에게도 죄다 무시당했는데 유일하게 동기생에서 브리엔이라는 학생이 그와 친하게 지냈고, 이 인연으로 브리엔은 밑에서도 서술하듯이 나폴레옹의 부관이 된다. 이 시절에는 괴롭힘도 당하고 힘들었지만 통념과 달리 못생겼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잘 먹지 못해서 창백하고 야위긴 했지만 나폴레옹의 통령 시절이나 그 외 젊은 시절의 초상화들을 보면 나름대로 잘 생겼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반항심으로 더욱 독하고 끈기있게 자라난 듯하다.
물론 프랑스 본토에서도 상류층인 귀족 자제들만 모인 사관학교 내에서야 촌동네 섬자락 출신이라 상대적으로 좀 없어 보였던 거지, 원래 부오나파르테 집안은 코르시카에서는 잘나가는 명문가 집안이다. 명문가인 것과는 별개로 집안 재산이 아주 넉넉치는 않아서 나폴레옹 본인도 좀 꾀죄죄한 옷차림을 하는 등 따돌림을 당할 만한 면은 있긴 했다. 그래서 그런지 하급 장교 시절 말 많고 월세를 독촉하던 하숙집 여주인과 사이가 매우 안 좋았는데, 황제가 되어서 찾아온 적이 있다고 한다. 이때도 하숙집 주인은 나폴레옹을 몰라봤다고 한다.[7]
하지만 확실히 군사적 재능은 일찌감치부터 있었다. 일화에 따르면 한번은 폭설이 내렸고, 유년학교 재학생들은 두 편으로 갈려 눈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나폴레옹의 편은 몰리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자기 편이 위기에 몰리자 스스로 지휘관을 자처하여 "지금 상황이 긴박하니 내가 우리 편을 지휘하겠다.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눈덩이를 뭉치기만 하고 나머지는 눈덩이를 던지기만 하라. 내가 가리키는 쪽을 집중적으로 공격해라."하며 자기편을 이끌었다. 나폴레옹은 선택과 집중을 이용하여 적을 무너뜨리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부터 유년 학교에서 나폴레옹의 이름은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의 학업 성적은 졸업석차만 보면 58명 중 42등으로 낮은 편이었지만 이 성적은 나폴레옹이 1학년 때 3학년들과 경쟁한 성적이다. 나폴레옹은 학교생활 중 아버지 샤를이 위암으로 39살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가장을 맡아야 했는데, 이 상황에서 1학년에 3년 과정을 마스터하고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오히려 지금도 그렇지만 포병은 수학과 물리 지식이 상당히 요구되었다. 그가 단순히 군사적 재능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후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나폴레옹 본인은 사실 육군이 아닌 해군에 지원하고 싶어했다. 포병으로 분류되자 이에 분통해하여 '''영국 해군에 자원할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8] 그 유명한 라페루즈 백작항해에도 참가 직전까지 갔었다.
초급장교 시절에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하며 쥐꼬리만한 월급의 상당 부분을 책을 사는 데에 소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순전히 자기개발을 위해서 책을 읽은 것은 아니고, 연애소설 등도 꽤나 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젊은 시절에 루소의 광팬이었음은 자인한 바 있고, 심지어 심취해서 연애소설을 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 샤를이 부관으로 재직하면서 잘 알던 코르시카 독립운동 거물인 파스콸레 파올리(1725~1807)와 갈등을 빚게 된다. 파올리는 코르시카 해방군을 조직해 코르시카를 착취한 제노바로부터 코르시카를 해방시킨 독립운동가로 제노바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제노바로부터 코르시카를 구매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운동이 무력으로 프랑스에게 막히자 영국으로 망명한 파올리는 샤를이 요절한 뒤 프랑스를 증오하는 친영파로써 코르시카에 돌아왔다. 그는 프랑스 총독과 사이좋게 지내던 전 부관 샤를에 대하여 배신감을 느껴 보나파르트 가를 박대했고 이에 나폴레옹 일가는 할 수 없이 완전히 코르시카를 떠나 프랑스로 가게 된다.
나중에 프랑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파올리에 대하여 이 앙금을 잊지 않아 코르시카로 쳐들어갔고 어제 애송이로 무시하던 나폴레옹이 오늘 당당하게 프랑스 황제가 되어 돌아온 것에 파올리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게다가 코르시카 여론도 나폴레옹에 대하여 감탄하고 이제 프랑스 놈들이 우리 코르시카 무시 못하겠다라며 기뻐하니, 파올리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결국 파올리는 믿었던 영국으로 망명하여 거기서 죽는다. 그래도 그 역시 코르시카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위인이었던 만큼, 코르시카에는 파올리의 흉상이나 추모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 역시 위인으로 대우받고 있다.

2. 군인



2.1. 프랑스 혁명과 내전


1785년 16세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불과 4년 뒤인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터진다. 나폴레옹은 휴직한 후 코르시카로 귀향하여 지원병대대의 장이 되었으며, 휴직기간이 경과되도록 복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792년 7월에는 정규군 대위로 승진한다.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유럽의 여러 군주제 국가들은 이를 두려워해서 '대(對)프랑스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프랑스는 홀로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의 군사강국과 맞서게 되었다.
이 와중에 나폴레옹이 몸담고 있던 프랑스 제1공화국 또한 내부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었다. 온건파인 지롱드파와 과격파인 자코뱅파의 대립이 그것이었다. 1793년 5월 31일, 자코뱅파가 지롱드파를 쓸어버리게 된다.
그러자, 이에 반발하여 지롱드파가 많았던 리옹, 아비뇽, 님즈, 마르세유에서 반란이 터지고 만다.
이러한 혼란속에서 이번에는 툴롱에서 왕당파가 혁명파들을 쫒아내고는 영국군과 스페인군을 받아들여버린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이 바로 '툴롱 포위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마침 그 직전인 1793년 6월, 나폴레옹과 그의 가족들은 코르시카의 실력자 파스콸레 파올리와의 의견대립으로 코르시카를 탈출한 상태였다.

2.2. 1793, 툴롱 반란 진압: 장군 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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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 때 나폴레옹의 초상화
1793년 5월부터 지롱드파 의원이 체포된 이후로 각지에서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프랑스 해군의 주요 기지이자 항구도시인 툴롱에서도 이 상황에 휩쓸려 영국 해군을 등에 업은 왕당파가 반란을 일으켰다. 코르시카를 탈출한 나폴레옹은 여기서 포병을 집중적으로 운용하는 전법으로 상륙한 영국군을 몰아내고 반란군을 진압했다.
나폴레옹이 지휘관이 된데는 기존의 장군, 제독들이 왕당파로 몰려 망명하거나 처형당해 많은 고급 장교 보직이 공석이 된 것도 한몫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나폴레옹이 대표적인 정치군인이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자그마치 당시 자코뱅당의 총수였던 로베스피에르와 연이 닿아 있었다![9] 앙시앵 레짐과 거리를 두는 이 스탠스는 엄청난 변화를 가지고 온다.

2.2.1. 1793: 툴롱 포위전 참여


'툴롱 포위전' 이전의 나폴레옹은 장군은 커녕 부대 참모도 아니었고 보케르라는 작은 도시에서 보급대를 이끄는 하급 지휘관이었을 뿐이었다.
나폴레옹은 '보케르에서의 저녁식사(Le Souper de Beaucaire)'라는 짧은 정치 팜플렛을 작성했다. '왕당파와 공화파가 서로 사상논쟁을 하다가 결국 공화파가 이긴다'라는 내용의 이 팜플렛을 나폴레옹이 만든 이유가 혁명에 대한 지지 때문인지, 출세 목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툴롱 포위전이 벌어지는 1793년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기 때문이다.[10] 하지만 이 팜플렛을 보고 감탄한 인물이 등장했으니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1763~1794), 즉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동생이다.
이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가 나폴레옹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어준다. 나폴레옹이 툴롱 포위전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의 빽 덕분이었다.
'툴롱 포위전'에 참여한 이후 나폴레옹은 또다시 가까운 군대에서의 빽을 만드는데, 역시 코르시카 출신으로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던 파견의원 살리세티(Antoine Christophe Saliceti)였다. 포병대 지휘관이 부상당하자 살리세티는 그 자리에 나폴레옹을 천거해서 낙하산으로 꽂아준다.

2.2.2. 장군으로 진급


이후 툴롱 포위전에서 나폴레옹은 사령관 카르토와 공적을 다투었고, 결국 정치적 빽을 동원해서 카르토가 파리로 소환되게 만들었다. 참고로 이 카르토는 화가였다. 바뀌어진 사령관은 피 공포증이 있던 내과의사 '도페' 장군이었다. 따라서 한 번 더 바뀌고, 3번째로, 실전파였던 뒤고미에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나폴레옹은 툴롱 포위전을 사실상 지휘하게 된다.
상급자가 여러 번 바뀐 것도 나폴레옹에게는 천운이었는데, 거의 지휘관이 바뀔 때마다 승진을 했던 것. 카르토가 경질되기 전에 대대장으로 승진하고, 마지막 일제공격 당시에는 이미 대령이 되어 있었다. 툴롱 포위전이 4개월도 되지 않아 종료되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거의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폭풍승진이었던 것.
이후 나폴레옹의 전략이 맞아들어가서 툴롱을 점령하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왕당파를 학살하였으며 나폴레옹은 장군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오귀스탱은 파리 수비 사령관을 제안했는데 나폴레옹은 이를 거절하고 '이탈리아 방면 포병 사령관'을 맡았다.

2.3. 1794, 테르미도르 반동


그런데 여기서 정치적 대격변이 벌어지는데,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나서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가 몰락한 것이다.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는 형인 막시밀리안, 동료인 생쥐스트 같은 이들과 단두대로 갔고, 나폴레옹은 자기가 자코뱅이 아니라고 변명해야 하는 처지로 몰렸다.
이때 한발 더 빠르게 움직였던 '살리세티'는 나폴레옹을 '자코뱅 주의' 혐의로 감옥에 집어넣었다. 나폴레옹의 부하들은 나폴레옹에게 탈옥을 권유했으나, 나폴레옹은 좀 더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투옥된지 2주 만에 살리세티에 의해서 풀려난다.
하지만 목숨만 건진 상황이었고,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돌아갔지만 단지 부대참모로 왕따를 당하는 처지였다.
자코뱅 문제는 이후에도 꾸준히 남아서 코르시카 원정군 참여 요청을 해봤으나 거절당했고, 방데 반란 진압에 참여하라는 정부의 요청은 나폴레옹이 거절하면서 나폴레옹은 직위해제당한다.
참고로, '방데 지방'은 가장 대표적인 '왕당파 세력'으로 이 지역의 반란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이후는 물론이고, 나폴레옹이 100일 천하로 재집권한 시기까지 이어졌다. 말 그대로 답이 없는 상황.

2.4. 바라스와의 인연


이 상황에서도 나폴레옹은 인맥을 만드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툴롱 포위전 이후 왕당파를 학살했던 대표적인 장군 중 하나이자 테르미도르 반동을 주도하여 실권을 잡은 권력자 바라스였다.
알려진대로 바라스는 훗날 나폴레옹의 아내가 되는 조제핀의 내연남이었다.
이 시기에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의 처제인 데지레 클라리(Desiree Clary)와 약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리스와의 관계를 위해, 혹은 진정으로 조제핀을 사랑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조제핀과 결혼하게 되면서 클라리와 파혼하게 된다.
클라리는 이후,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와 결혼해서 스웨덴 왕비가 된다.

2.5. 1795년, 방데미에르 13일 사건


이런 나폴레옹을 복권시킨 것이 바로 방데미에르 13일 사건이다.
1795년 9월 아르투아 백작이 영국 육군과 해병대, 망명 귀족의 병력을 포함하여 약 3,000여 명을 이끌고 프랑스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친가톨릭-반혁명 왕당파들이 파리로 몰려들었고, 왕당파 시위대는 3만까지 그 숫자가 불어나게 된다.
이에 당시 중앙정부는 방데 반란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고 평가를 한 므뉴(Jean-François, baron de Menou)를 진압사령관으로 임명했으나, 당시 파리의 병력은 5천이었고 므뉴는 이 상황이 어렵다고 본 것인지 원래 왕당파 성향이 있었는지, 타협안을 제시하고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정부는 다시 므뉴를 파면 및 구속하고, 새로운 사령관을 임명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바라스였다. 나폴레옹은 바라스에 의해서 현장지휘관이 되었고, 므뉴에게 얻은 정보에 착안, 한 기병 장교를 시켜서 파리 외곽에 배치되어 있던 대포를 파리로 끌고 오게 된다. 이 기병 장교가 바로 '조아킴 뮈라'이다. 그리고 이렇게 끌고 온 40문의 대포를 튀르리 궁 인근 교차로에 배치해서 파리 시내에서 '포도탄'을 쏴대는 강경 진압을 시작했다. 이후 왕당파 시위대는 300여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해산했고, 나폴레옹은 육군 중장 진급과 동시에 포도탄 장군이라는 멸칭을 얻게 된다.
왕당파의 시위는 단순한 폭력시위 정도가 아니었다. 차라리 쿠데타에 가까웠다. 왕당파 반군의 병력과 기세가 워낙 드세서 대포라도 쏘지 않는 이상 진압은커녕 혁명정부가 전복될 상황이었다. 나폴레옹은 혁명 초기의 카오스 속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의 흐름을 통해 민중 봉기의 과격성과 이에 대한 강경 진압의 효과성을 알고 있었고 이를 십분 활용했다. 물론 성공해서 그는 다시 출세길을 걷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아니었다면 정통성과 안정성이 극히 취약했던 파리의 혁명정부(당시엔 총재정부)가 이때 전복되었을거라는 평가가 중평이다.

3. 통령



3.1. 이탈리아 전쟁: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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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년 그려진 초상화
이 전공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이 되어 이탈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쳐부수고, 그 결과 체결된 캄포 포르미오(Campo Formio) 조약으로 프랑스는 벨기에와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3.2. 이집트 원정: 실패


나폴레옹은 인도에 식민지를 가진 영국을 견제하고자 이집트 원정을 원했고, 혁명정부도 나폴레옹의 인기가 높아지자 견제하려는 속셈으로 이를 수락한다.
당시 이집트를 장악하고 있던 맘루크를 쉽사리 격파하며 카이로까지 승승장구하는 와중에, 프랑스 해군이 호레이쇼 넬슨의 영국 해군에게 박살나 퇴로가 끊기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 재탈환을 위해 선전포고를 하게 되어, 요격을 겸해 내친 김에 시리아 원정까지 감행했으나 결실없이 물러났고, 프랑스 본국이 다시 오스트리아의 위협을 받게 되자 이집트를 탈출해 귀국하였다.

3.3. 1799, 쿠데타


귀국 직후 시에예스와 손잡고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뒤엎고 3명의 통령에 의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였다. 물론 나폴레옹이 제1통령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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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당시 500인회 의원들에게 둘러싸인 시기의 그림[11]
제1통령 시절의 나폴레옹

3.4. 종신통령 취임


당시 프랑스에는(산악파와 대비되는) 평원파(지롱드)라고 불리는 온건 부르주아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1년마다 정권이 바뀔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혼란을 종식시켜줄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나폴레옹 중심의 새 정부는 곧 인기를 얻었고, 곧이어 종신 통령에 취임했다.

3.4.1. 나폴레옹 법전 편찬


국민 교육 제도의 확립, 훈장 제도의 도입, 프랑스 은행 설립 등이 이 시절의 업적으로 꼽히지만, 본인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은 '''나폴레옹 법전'''의 편찬이었다.

3.4.2. 자유주의


또한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과 함께 자유주의가 널리 확산되면서 현재의 독일이나 스페인 등 프랑스에 점령당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급진세력이 급격히 성장하였다.
하지만, 이들 급진세력은 프랑스 혁명의 공화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과는 별개로 자국을 짓밟은 침략·학살·약탈자였던 프랑스(와 나폴레옹)을 지극히 증오하였으며, 이는 민족주의 이념이 나타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의 급진세력으로부터 나타난 공화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이념은 19세기 유럽의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민족 국가'''의 탄생을 불러온 원인이 되었다.

4. 황제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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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좌에 앉은 나폴레옹 1세[12]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부분)[13]

4.1. 오스트리아 격파


그 후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차례의 승리를 거두고, 이러한 승리를 바탕으로 루네빌 조약과 아미앵 조약을 통해 일시적인 평화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의 인기는 크게 높아졌지만, 한편으로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세속군주의 일원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4.2. 1804, 황제 선포


그리하여 1804년,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교황에게 대관 받아 나폴레옹 1세에 등극한다. 자유, 평등, 권리[14]를 기치로 내건, 소위 근대 공화정의 출발을 알렸다는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로는 좀 허무하지만, 안정적인 정권의 성립을 바라던 프랑스 국민들은 나폴레옹의 즉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 당시까지는 프랑스에서도 왕정에 대한 거부감이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다. 1804년에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에 관한 국민투표가 있었는데 찬성이 3,521,675표, 반대가 2,579표였다. 지식인들은 로마 공화정이 로마 제정으로 바뀐 것을 근거로 삼아서 제정의 성립을 합리화했다.
참고로, 프랑스 혁명 자체가 왕정에 대한 불만보다는 민생 파탄으로 인한 '못살겠다 갈아 엎어버리자'식이었던 것이었다.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왕정을 완전히 배격하기 시작한 것은 나폴레옹 3세가 절대왕정의 한계를 보여준 시점부터다.

4.2.1. 대관식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며 거친 대관식에서 보인 행보도 많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교황이 주재하는 대관식을 통해 황제가 되려는 군주들은 로마로 건너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이 관을 머리에 씌워줬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자기가 로마에 가서 대관식을 거행한 게 아닌, 교황(즉, 오른쪽 끝의 하얀 옷을 입은 채 앉아 있는 사람)을 직접 파리까지 데려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진행했을 뿐 아니라, 교황이 황제에게 부여해주는 관을 받지 않고, 자신이 직접 관을 집어 자신의 머리에 썼다. 위의 오른쪽에 있는 쟈크 루이 다비드의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 왕관을 쓰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그림'이 그 장면이다.
이 사건은 왕권신수설의 완전한 몰락 즉, 더 이상 신의 권위로 정치를 행사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신성 로마 제국마저 붕괴시켜 신권 정치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그림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문서를 분리했으니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문서 참조.)

4.2.2. 결과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는 프랑스 혁명이념을 지지하던 이들에게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만민의 평등을 꿈꾸며 일어난 혁명이 곧 한 독재자의 황제 즉위를 위한 쿠데타가 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때 느낀 충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여러 가지가 있는데,
  • 첫 번째는 베토벤이 그에게 헌정하려 했던 교향곡에 관한 일화이고,
  • 두 번째는 식민지의 독립이었다.
나폴레옹은 황제로 즉위하여 혁명을 끝내고 기존의 지배질서에 스스로를 편입하려고 했지만 유럽의 정통 왕실들에게는 그저 찬탈로 보였다. 결국 나폴레옹은 계속 유럽 구체제 국가와 전쟁을 하게 된다.

4.2.2.1. 베토벤, 헌정 교향곡 표지를 찢다

베토벤은 3번 교향곡을 나폴레옹을 위해 작곡했다. 그는 나폴레옹을 "가난한 사람들의 영웅"이라 칭했고, "나는 나폴레옹과 같이 독재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출판업자에게 보낸 초본에서, 그 첫 페이지에는 이런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이 교향곡을 정말로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음악가들은 궁정에 소속된 하인이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스스로를 하인으로 인정하기 싫어했다. 그는 자기가 작곡한 곡을 팔며 자유롭게 살고 싶어했다. 그는 이러한 모든 불합리를 나폴레옹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황제로 즉위했다. 그리고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라고 써 있는 표지를 찢어버렸다. 표지에 덧붙여진 말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영웅 교향곡은 위대한 사람의 추억을 축복하고자 쓰여졌습니다."

후일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 공작에게 패배하자, 황제 나폴레옹을 증오하던[15] 베토벤은 웰링턴을 찬양하는 "웰링턴의 승리"라는 곡을 만들었다.[16]

4.2.2.2. 식민지

[image]
이탈리아의 왕 나폴레옹, 안드레아 아피아니[17], 1805
프랑스 황제로 즉위하면서 동시에 이탈리아 왕국의 왕이 되는데, 이탈리아는 외젠 드 보아르네부왕으로 임명하여 맡긴다.
당시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은 오늘날의 프랑스, 스페인, 동북부를 제외한 이탈리아 전역, 크로아티아(일리리아), 아이티 등을 다스렸다.

4.3. 대륙 봉쇄령, 이베리아 반도 전쟁



4.3.1. 영국과의 해군경쟁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에 맞서 프랑스도 급히 해군력을 강화했다. 그 일환으로 스페인 해군을 끌어들이기는 했지만 당시 스페인군은 육군이고 해군이고 인원수만 채우고 있을 뿐 참담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영국 해군에 비해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무엇보다도 경험 면에서 비교할 수 없었다.
물론 프랑스 해군은 유럽 2위로 유일하게 영국에 맞설 만한 해군이 있었고, 특히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는 각고의 노력과 개혁 끝에 여러 차례 영국이 큰 낭패를 보도록 했다. 문제는 혁명이 터지면서 왕정 시절의 장교단이 사라졌다는 데 있었다.
혁명 초기에는 육군도 개판이었지만 육군은 어떻게든 인원수 채우고 주변 국가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유능한 인물들이 경험을 쌓고 하여 절대왕정시대의 유산과의 조합으로 나폴레옹의 대군단이 될 수 있었지만, 해군은 경험 있는 뱃사람이 많아야 하고, 제대로 된 함선도 다수 건조하고 유지해야 하며, 정교한 보급체계까지 있어야 하니 육군처럼 임기응변으로 능력이 상승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도 1805년까지는 강력한 해군의 모습이나마 남아있어서 영국에서 '프랑스가 상륙하면 어떻게 하나'라고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4.4. 영국과의 전쟁



4.4.1. 1805년, 영국에게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배


결국 1805년 10월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넬슨 제독에게 패하면서, 영국 점령은 언감생심이 되고 만다.

4.4.2. 1806, 대륙봉쇄령


대신 영국을 고립시키고자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렸으나, 영국은 압도적인 해군력과 식민지와의 무역으로 대유럽 무역중지로 인한 피해를 상쇄할 수 있었다. 오히려 러시아 제국스위스(헬베티아 공화국)가 가장 많은 타격을 받았다.
물론 영국도 경제 피해를 좀 입기는 했으나, 정작 프랑스의 해군력 자체가 영국 해군에 비해 매우 전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되려 프랑스가 경제 봉쇄를 당한 꼴이 되다시피 하고 말았다. 그리고 영국에는 아메리카라는 새로운 거대한 시장이 있어서, 영국이 캐나다와 미국 등과 교역을 하면 그 나름대로 큰 이익을 챙길 수 있는 판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영국이 실리를 챙겨가는 그림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4.4.3. 스페인 점령


대륙봉쇄령을 강화하기 위해 포르투갈을 점령하고 스페인 왕위를 빼앗아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넘겼고, 당시 나폴레옹의 군대는 스페인을 휘젓고 다니면서 스페인 민중의 반감을 샀다.
프랑스 혁명 당시 반서약파 가톨릭 신부들을 탄압하면서 반교회적 정서가 팽배했던 전직 혁명가, 자코뱅들이 많았고, 이들에게 있어서 뿌리 깊은 신비주의적 문화와 신앙관이 진하게 녹아있던 스페인의 종교 관련 사적, 문화재는 비이성적이고도 야만적인 것으로 비추어져 심각한 훼손, 약탈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이베리아 문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뚜렷한 스페인 가톨릭 문화 만의 독특함은 '피칠갑한 예수상'과 '통한의 표정으로 눈물 흘리는 성모상'일 만큼 스페인 카톨릭 문화는 '인간적 감정을 격렬하게 강조하는 성향'이 있고, 당시 전직 자코뱅 출신 프랑스군에게 이런 모습은 '미신과 후진성의 표상'으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이러한 행동은 스페인 민중의 반발을 일으켰다.

4.5. 1807 ~ 1814, 영국의 이베리아 반도 파병: 나폴레옹 측 30만의 병력 상실


여기에 주목한 영국이 혁명전쟁 이후 처음으로 지상군을 유럽 대륙의 이베리아 반도로 파병하면서 반도 전쟁이 시작된다. 프랑스군은 게릴라군과의 싸움에 끝없이 시달리게 된다. 나폴레옹은 최대한 빨리 스페인에서의 전쟁을 마무리지으려 했지만 독일과 이탈리아의 평원에서 나폴레옹의 군대가 지금까지 이겨왔던 방식은 험난한 산지로 가득한 스페인에서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스페인·포르투갈과의 반도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약 30만 명의 병력을 잃는다.

4.6. 1812, 러시아 원정


이런 상황에서 영국과의 무역에 경제가 좌지우지되던 러시아대륙봉쇄령을 무시하고 계속 통상에 나서자, 이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1812년 당시로선 유례(類例)없는 61만 대군을 일으켜 러시아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스페인 전역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를 침공함으로써, 동시에 두 개의 전선을 만들어 메우기 힘든 틈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4.6.1. 청야전술


나폴레옹의 대군이 러시아를 공격할 당시 24만명이었던 러시아 국경수비군은 프랑스군에 맞서 방어했지만,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후퇴해야 했다. 프랑스군은 그 여세를 몰아 1812년 8월에는 스몰렌스크까지 점령했다. 문제는 그 스몰렌스크라는 지역이 수도 모스크바로 가는 길목이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쿠투조프를 새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반격을 준비했다. 8월 말 쿠투조프 사령관은 모스크바의 근교인 보로디노에서 전투를 벌여 비록 어느 한쪽이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프랑스군 5만 명을 섬멸하기도 했었다. 쿠투조프 사령관과 알렉산드르 1세는 마침내 모스크바를 비우고 후퇴하는 작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전까지 프랑스에 맞서 수없이 전투를 치렀던 러시아군 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 장군은 청야(淸野)전술을 펼쳐서, 러시아 국토 내부로 프랑스군을 깊숙이 끌어들이며 꾸준히 반격을 가해 차츰 프랑스군의 희생자를 늘렸다.
다만, 이 후퇴작전을 총지휘한 것은 쿠투조프가 아니라 스코틀랜드계 조상을 둔 발트태생 바클라이 드 톨리였고, 쿠투조프는 보로디노 전투 전부터 러시아군을 지휘했다. 청야전술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게 현재 중론이고 초기 경질된 '바클라이 드 톨리'의 공이 컸지만, 외국계라 쿠투조프만 민족영웅이 된 것. 알렉산드르 1세, 미하일 쿠투조프, 러시아 원정 참조.

4.6.2. 10월 18일, 퇴각


1812년 9월 초 남은 11만의 군대를 이끌고 텅 빈 모스크바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이후 한 달 동안이나 모스크바에서 차르가 항복해오길 멍하니 기다리고 있다가 결국 10월 18일에서야 퇴각을 시작, 이후 식량도 없고 보급품도 떨어진 상태로[18] 11월의 추위 속에서 게릴라와 싸우며 수많은 병력을 잃고 말았다. 거디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에 들어간 저녁 화재가 일어나 도시 전체가 6일 동안이나 큰불에 휩싸였고, 그 바람에 모스크바 대부분의 폐허로 변해버렸다.
동시에 러시아군의 반격작전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고, 이후 베레지나 강을 건너면서 수천 명이 익사하는 등 캐안습의 절정을 보여주며 퇴각한 뒤에 12월에는 파리에서 쿠데타 소식이 전해지자 병사들마저 버리고 근위대 200명만 데리고 도망...
결국 40만이 전투&비전투 손실로 희생되고 10만여가 포로로 잡히면서 대육군은 이름만 남게 된다.

5. 나폴레옹의 몰락



5.1. 대불동맹 재결성: 트라헨베르크 작전


이렇게 나폴레옹의 부대가 격파당한 틈을 타 프랑스를 공격하려는 대불동맹이 다시 결성되었다.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스웨덴 등이 동맹을 맺었고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까지 동맹에 가입한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 동맹에 맞서 나폴레옹은 고작 몇 달 만에 새로운 군대 양성을 시도했고, 일부 병력은 나폴레옹의 의도대로 성장했다.
이를 통해 초반까지는 버틸 수 있었지만 점차 전쟁은 피차의 소모전으로 흘러가며 나폴레옹의 입지를 좁혔다. 더군다나 대불동맹군은 워낙 강한 나폴레옹 본인과의 교전을 피하고 다른 장군들을 각개격파하며 프랑스군의 총 전력을 약화시켜 나갔다.(트라헨베르크 작전)

5.2. 1813, 라이프치히 전투: 패배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의 패배를 기점으로 프랑스 제국은 1814년 1월쯤에는 이미 파리까지 밀리고 있었다. 물론 나폴레옹 본인은 여전해서 갓 징집한 15만 명 남짓의 병력으로 동맹군의 38만 병력과 맞서며[19] 3만명의 기동대로 러시아 제국군 5000명 병력을 덮쳐서 전멸시키고 이후 2만명 남짓 병력으로 블뤼허가 이끄는 12만명의 프로이센군을 3차례에 걸쳐 일시적으로 격파해 퇴각시키지만, 사방팔방에서 밀려드는 동맹군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5.3. 1814 4월, 퇴위후 투항


2달이 지나고,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부대의 승리 기념 퍼레이드가 파리에서 열릴 정도로 굴욕을 당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아직 싸울 생각이었으나 거기에 동의할 사람이 없었고 결국 1814년 4월 퇴위를 선언한 나폴레옹은 연합군에게 투항한다.
연합군은 나폴레옹의 유배지로 코르시카를 프랑스에서 분리 독립시켜 나폴레옹을 코르시카의 영주로 보내버리려 하였으나 나폴레옹이 코르시카를 불침무적의 요새로 만들어 재차 프랑스를 정복하거나 통일 이탈리아의 왕이 되어 연합국에 도전할 것이라는 우려로 포기한다.

5.3.1. 엘바섬 유배


당시 동맹국은 나폴레옹에 대한 극심한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맹국은 나폴레옹의 추방지로 샤르데냐, 미국, 세인트 헬레나, 심지어 호주 쪽까지 고려하였으며 결국 지중해 이탈리아 반도 근처의 엘바 섬(고향 코르시카와 가깝다.)를 유배지로 선택한다.
이후 프랑스 혁명 때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1살 아래 동생인 루이 18세가 왕좌에 앉게 되는데[20] 프랑스를 이전으로 되돌려 놓으려 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평판이 매우 안 좋은 왕이었다.
거기다 혁명으로 쫓겨났던 왕당파들이 귀국해서는 보상을 챙기려드는 통에 프랑스는 어수선했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왕당파는 나폴레옹에게 약속했던 연금을 지불하지 않고 오히려 암살자를 고용해 끊임없이 그를 암살하려 했고 영국은 이를 조장하거나 방관했다. 게다가 그가 다스리던 엘바 섬은 고향 코르시카와는 다르게 황제 나폴레옹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어 모욕적인 언사는 물론 나폴레옹이 내리는 명령도 다 거부하거나 반항하기 일쑤였다.

5.4. 엘바섬 탈출과 백일천하


그 와중에 차츰 유럽 제국들의 밥그릇 싸움이 심각해지자, 영국은 유리한 패를 가지기 위해 '''나폴레옹이 탈출하는 것을 방조'''한다. 그 틈을 타 나폴레옹은 탈출에 성공한다. 이때 당시의 일화들은 백일천하 항목 참조.

5.4.1. 1815, 워털루 전투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등이 돌아온 나폴레옹을 물리치기 위해 다시 연합군을 보냈다. 나폴레옹군은 상당히 선전했지만, 러시아 원정 이후로 잃어버린 것이 너무 컸기에 결국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간발의 차이로 패배했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 연합군이 '''간신히 이겼다.''' 나폴레옹이 그렇게 삽질을 많이 했음에도 말이다.
간단히 적어보면, 전투개시 직전 쏟아져 시간지연을 야기한 폭우, 영국 동맹군으로 참전해 전장 각종 요지를 끈질기게 방어해 시간을 끌어준 네덜란드군, 참모장 술트의 무능함, 영국군이 총퇴각하는 것으로 오인해 기병 단독돌격(결과적으론 영국군 방진에 돌격)을 감행해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 네 원수. 하지만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그루쉬의 3만 기병대가 프로이센보다 먼저 도착했다면 승리는 프랑스에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5.4.2. 재퇴위


그렇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며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끝이 났고, 프랑스 의회가 온통 적들로 가득찬 상태에서 그는 퇴위할 수 밖에 없었다. 많은 하층민들은 여전히 '황제폐하 만세'를 외쳤지만 워털루의 그 끔찍했던 킬링필드의 모습은 그를 모든 재기의욕을 상실한 정신적 방전상태로 만들어 버린 것으로 보인다.
조제핀이 말년에 기거했던 말메종에 잠시 머물며 옛 추억을 회상하던 나폴레옹은,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파리 외곽으로 접근해오자 서둘러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으로 가려 했으나 해상을 봉쇄한 영국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영국에 명예롭게 항복하기 위해 영국전함 벨레로폰 호를 타고 영국 플리머스 항에 정박하지만 영국은 그의 영국 상륙을 불허한 후, 계속 그를 항구에 묶어 놓았고, 결국 세인트헬레나 유배라는 조치를 취한다.

5.4.3. 세인트 헬레나 유배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지가 결정되었다는 통보에 나폴레옹 본인도 탄식을 금치 못했고, "그런 격오지에 가서 뭘 하겠냐'라며 낙담했다. 그런데 이 말이 "그런 곳 갈 바에 차라리 죽을란다"로 와전되어 영국측에서 난리가 났다. 영국군은 나폴레옹의 측근들에게 황제가 자살하면 '당신들에게 책임을 물어 교수형에 처 할 것' 이라고 경고를 했으며, 그들은 나폴레옹을 설득하여야만 했다. 측근들은 시간이 흘러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프랑스로 돌아올수도 있을거라고 황제에게 간청하였고, 결국 나폴레옹은 "'''나의 운명을 완성하겠다.'''"라고 말하며 1815년 8월 7일, 순순히 아메리카급 전열함 노섬벌랜드에 올라 아프리카 적도 근처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기약없는 두 번째 유배길을 떠난다.[21] 100일이 넘던 항해기간 동안 나폴레옹은 별다른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그는 거의 독서를 하거나, 항해에 관련된 기술적, 과학적 지식들을 물어보거나, 자신들이 거쳐가는 지리에 대한 정보를 탐독했다. 저녁에는 측근들과 카드놀이를 하거나 체스를 두었다. 함장도 최대한 나폴레옹을 배려해주었고 영국 해군 장병들도 황제와 그 일행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자 황제는 답례로 모든 승조원들에게 금화를 나눠주려고도 했다.

6. 1815, 세인트 헬레나에서의 말년



6.1. 주거지: 브리아스 → 롱우드


1815년 10월 15일, 나폴레옹의 일행은 세인트헬레나 섬에 도착한다. 이 섬은 남대서양 한 가운데 위치한 절해고도라 세인트헬레나집게벌레 같은 특이한 생물이 살 정도로 험악한 곳이었고, 평소에도 사람이 편안하게 살기엔 문제가 많은 곳이었다. 섬의 가장 고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섬의 예전 총독이 기거했던 총독 관저였던 롱우드 하우스는 당시 매우 낡았고 형편없었으므로 이를 수리하고 새단장하는 동안 시가지와 가까운 저지대의 브리아스에 머물다가 이후 롱우드로 옮긴다. 이시기 나폴레옹은 회고록 구술과 산책등으로 시간을 떼웠다. 그가 지내게 된 롱우드 지역에는 '발콤'이라는 성을 가진 가족이 살았는데, 나폴레옹은 그 집의 딸 2명과 친해져 심심할때마다 찾아가서 이야기를 하거나, 카드놀이를 하는등 자주 만났다. 그 밖에도 발콤의 집에서 일하는 노예에게도 관심을 가졌으며, 그의 일생에 대해 듣고선 매우 분노하며 제독과 상의하여 그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22] 이들은 나폴레옹을 '친철한 신사분(gentleman)'으로만 알고 있었지, 그가 황제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6.2. 영국 총독, 허드슨 로


설상가상으로 영국에서 세인트헬레나의 총독으로 파견된 동갑인 '허드슨 로'(1769~1844/Sir Hudson Lowe)가 인간 말종이었다. 본국 영국에서도 욕만 죽어라 쳐먹던 그는 영국군 내에서도 휘하 부하들한테 가혹행위를 벌여 평이 나빴고, 개차반같은 성격 때문에 부임지마다 주변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게다가 무능하기 짝이 없어서 한직만을 전전한 인간이었고, 총독이 되기 전에도 장교에서 조기 퇴직 대상이였다. 영국 내에서도 이 인간에 대한 평은 전혀 좋지 못해서 신사가 아니라고 부정당하기도 했다. 이 세인트 헬레나는 지금도 워낙에 외딴 시골 섬이나 다를 거 없는데 하물며 200여년 전 당시에는 여길 가는 곳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더더욱 외딴 곳이었으므로 이런 곳의 총독이라는 직위도 말이 좋아 총독이지, 자세히 보면 이것도 한직에 지나지 않는다. 허드슨 로 본인도 이런 머나먼 섬 구석 총독이란 허울좋은 이름으로 보낸 것도 한직 축출이란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이 좌천이나 다를 바 없는 조치에 대해 그야말로 열폭하였다. 그래서 세인트 헬레나에서도 그 버릇 못 고치고, 밑사람들을 박대했다.
이렇게 찌질한데다 오만한 소인배 허드슨은 초반부터 자신에게 굽히지 않는 나폴레옹을 굉장히 증오하여[23] 나폴레옹이 거주하던 롱우드 하우스 주변에 감시병을 배치해 가택 연금 했으며 병사들로 하여금 황제라는 칭호 대신 장군이라고 부르게 시키는 등 모욕적인 조치를 취했고 그도 나폴레옹을 이런 식으로 욕했다.
또한 처우면에서 주치의를 강제로 영국으로 보내버리고 장작 공급을 제한하기도 하였다.[24] 이 같은 조치에 대해 영국 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있었을 정도였다. 특히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상대한 웰링턴 공작도 허드슨 로를 두고서 "질투심과 시기심에 가득 찬 한심한 인간"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통 적장을 포로로 잡게 된다면 그 적장을 유배를 보내든 사형(또는 참수)을 시키든 그에 걸맞는 예우를 갖추는 것이 보통이나, 허드슨 로의 행위는 이와 반대되는 행위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영국 언론들조차도 "적이라고 해도 그만큼 능력있고 유럽을 공포로 떨게한 사람을 이렇게 푸대접하는 것은 오히려 영국 망신시키는 것이다. 로 총독도 유배지가 아닌 전쟁터에서 나폴레옹을 만났더라면 져서 죽었을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오히려 로를 욕하였다.
결국 허드슨 로는 나폴레옹이 죽고 나서 나폴레옹 주치의이자 (실상은 첩자이기도 하던) 오미어러의 고발로 파면당한다. 신하들이 반발하며 "저런 곳에서도 일을 저 모양으로 하니 더 이상 쓸모 없다. 따라서 아예 벼슬자리를 박탈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그나마 조지 4세의 배려로 한직인 Ceylan 지역의 부대장 자리를 전전했다. 결국 허드슨 로는 작위는 받고 74세[25]까지 장수하며 평온하게 적당히 살다가 갔다. 하지만 허드슨 로가 역임했던 직책중에 세인트 헬레나 총독이 그나마 가장 높은 벼슬이었고 실질적으로는 강등이나 좌천과 다를바 없었기에 마냥 좋다고 할 수 없다. 이후 허드슨 로가 전진하던 벼슬들은 모두 기지 부대장이라든지 중간관리자로서 한직이었고 상관 눈치를 봐야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영국 왕 조지 4세나 뒤를 이은 윌리엄 4세도 로에 대하여 '''"아부는 잘하는데 됨됨이가 영 아니다"'''라고 깠을 정도였다. 이렇게 인망이 없으니 죽었을 때 장례식에서도 조문객은 식솔들과 극소수 친척들만이 참석했을 정도다. 이는 로가 죽기 4년 전에 나폴레옹의 유해가 성대한 인파의 환영을 받으면서, 파리 앵발리드에 복귀한 것과 대비된다.

6.3. 최후까지의 측근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의 시종들이 나폴레옹의 총애를 두고 다퉈 나폴레옹이 '내가 늬들 마누라냐?' 하고 투덜거렸다는 이야기도 있는 걸 보면, 총독의 부당한 조치도 나폴레옹의 매력을 완전히 꺾지는 못한 모양이다.
나폴레옹은 유배지까지 따라온 몇 안 되는 충복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엘바섬에서처럼 나름 '미니 궁정'을 만들어 격식을 차리며 마지막 남은 영광의 조각만은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했다.
당시 영국이 나폴레옹 측근 수행원의 숫자에 제한을 두는 바람에 결국 측근 중에서 라스 카즈, 구르고, 몽톨롱, 베르트랑 이 4명만 수행하게 된다. 물론 라스 카즈의 아들, 몽톨롱 부인, 베르트랑 부인, 그 외 '세인트헬레나 궁정'을 담당할 마르샹 등의 하인들은 예외. 구르고는 독신이라 혼자였다.
유배생활을 함께한 사람들은 각자 사정에 따라 중간에 섬을 떠나기도 하고 새로 들어오기도 했으며 처음부터 나폴레옹의 임종까지 줄곧 함께 한 경우도 있었다. 주요 인물에 대해 간단히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6.3.1. '''라스 카즈'''(1766~1842), 1816년 12월까지


가장 유명했던 인물로 훗날 '세인트헬레나의 회상'을 집필해 일약 대성공을 거두었다. 나폴레옹 서사시의 대미를 전설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장본인이다. 이 책의 성공 이전에도 그는 '역사지리부도'라는 학술서로 큰 성공을 거둔 잘나가는 인물이었다.
귀족 출신이며 왕당파였던 그는 후에 나폴레옹에 합류해 백작 작위를 받고 국가 참사원 멤버가 되는 등 경력을 이어가다가 백일천하 이후 어린 아들과 함께 세인트헬레나 동행을 자원했다. 학식과 교양이 매우 풍부하고 영어에 뛰어났으며 언변이 뛰어났던 그는 유배생활 초기의 나폴레옹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동시에 말동무이자 통역관이었으며 충실한 회고록 기술자이기도 했다.[26]
해군 출신이라서 항해 관련해서도 빠삭했기 때문에 세인트 헬레나로 가는 영국 배에서 나폴레옹의 통역을 담당하게 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롱우드 기거 이전 브리아스에 머물 시기부터 이미 그는 나폴레옹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가장 친밀한 측근이었고 이는 '구르고', '몽톨롱', '베르트랑' 등과는 차원이 다른 대우였다. 이로 인해 섬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해서 그들의 심한 질시와 견제를 받는다. 이러한 친밀함을 바탕으로 그는 황제의 당시 내면까지 잘 파악할 수 있는 상세하고도 훌륭한 기술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1816년 12월, 허드슨 로 총독에 의해 그의 세인트헬레나 생활은 끝이 난다. 비밀리에 유럽과 연락하려 했다는 죄목이었는데, 사실 쫓겨나기 직전에 총독이 그의 롱우드 복귀를 허락했음에도 자의로 섬을 떠나는 쪽을 선택했기에 훗날 그의 의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상기했듯이 '역사지리부도'로 이미 대성공을 거둔 그가 나폴레옹의 유배생활이라는 '크게 한 몫 잡을 수 있는 주제'에 대해 저술가의 본능적 후각을 발휘하여 일부러 동행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순수한 충성심에서 나온 동행이 아닌 이기적 목적의 동행이라는 것. 이 점은 그를 질시했던 '구르고'나 '몽톨롱' 역시 지적했던 점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쯤에서 유럽으로 빨리 돌아가 나폴레옹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유럽에 알림으로써 동정여론을 일으키고 나폴레옹을 도울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가 섬을 떠남으로써 나폴레옹은 그의 수준에 맞을 뿐더러 그를 잘 이해하던 최고의 말동무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의 섬 생활이 더욱 고달파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영어를 못하는 나폴레옹에게 개인 영어 강습을 해주기도 했다. 노섬벌랜드호에 있을 때부터 했었는데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롱우드 시절 다시 재개했다. 뛰어난 두뇌를 가졌던 나폴레옹의 영어실력이 매우 빠른 속도로 늘어나자 나름 놀라워한다. 하지만 결국 섬을 떠나게 되면서 강제중단.
그는 평소에도 시력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세인트헬레나 생활 동안 변덕스럽고 습하기 짝이 없는 기후와 열악한 생활환경 속에서 계속해서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훗날 시력을 상실하고 말았는데, 1840년 나폴레옹의 유해가 돌아와 장엄한 장례식과 함께 앵발리드로 향했을 때 안타깝게도 이 역사적인 순간을 눈으로는 확인하지 못했다. 대신 현장에 참석해 귀로 들었다고...

6.3.2. '''구르고'''(1783~1852), 1818년 까지


나폴레옹처럼 포병 출신으로 백일천하 당시 나폴레옹의 부관이다.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으로는 자신이 최고라고 나름 자부하던 그는 본디 유배 동행자로서 나폴레옹이 염두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구르고가 생떼를 쓰는 바람에 결국 그를 합류시키게 되었는데, 만약 구르고가 합류하지 않았다면 충복 사바리 장군[27]이 대신 합류했을 것이고 나폴레옹의 유배생활은 덜 고달파졌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던 라스 카즈를 몽톨롱과 함께 극도로 시기하는데, 충성스럽긴 하지만 자신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며 총애경쟁을 벌이는 괴팍한 성격의 구르고 때문에 나폴레옹은 피곤해한다. 한 여자를 두고 여러 남자가 싸우는 듯한 꼬락서니를 보다 못한 나폴레옹은 툭하면 구르고와 티격태격 충돌하며 점점 그에게 싸늘해지는데, 몽톨롱과의 친분마저 파탄난 구르고가 몽톨롱에게 결투를 신청한 사건이 벌어지자 나폴레옹의 관심에서 더욱 더 멀어진다.

당시 기록(구르고의 일기)에 나오는 티격태격하는 대화들을 종합해 보자면 대략 이렇다.

'''나폴레옹''': 구르고, 오늘은 인상이 또 왜 그래?

'''구르고''': 폐하. 전 제가 더 이상 폐하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나폴레옹''': 그렇지 않아. 몽톨롱 부부와 잘 지내는 게 좋을 거야. 넌 항상 내 성질을 건드리고 있어. 여기 따라온 이상 날 기쁘게 하라고.

'''구르고''': 그럴 순 없습니다. 그는 절 모욕했습니다. 폐하께서 저보다 몽톨롱을 더 가까이 하시는 걸 참을 수 없습니다.

'''나폴레옹''': 내가 누굴 가까이 하든 뭔 상관이야? 나라는 바위와 충돌해 봐야 넌 깨질 뿐이야. 넌 날 모욕하고 내 인생을 더 괴롭게 하고 있어. 몽톨롱이 너보다 더 나아!!!

'''구르고''': 폐하께서 절 이토록 천대하시다니 너무나 슬픕니다.

'''나폴레옹''':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구르고''': 이런 모욕을 당하느니 제가 여길 떠날 수 있게 해 주십쇼.

뒤끝이 심하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구르고와 다툴 때 마다 이후 나름 좋은 말을 해 주는 등 그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나 결국 구르고는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1818년 2월, 나폴레옹과 작별한 그는 한동안 섬 저지대에 머물게 되는데 그 이유는 베르트랑에게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서였다. 3월이 되자 베르트랑은 돈을 지불했고 구르고는 섬을 떠난다.

섬을 떠난 이후의 라스 카즈가 회상록 출판 등으로 나폴레옹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 반면, 구르고는 그러지 못했다. 세인트헬레나 체류 당시 그는 가족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곳의 생활을 굉장히 미화해 놓았다. 가족이 자신을 걱정할까 우려해 한 일이었지만 이것이 나폴레옹에게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한다. 나폴레옹에 대한 처분이 가혹하다는 일부 비판에 직면했던 영국은 구르고의 이 편지를 이용해 정당화에 성공하고 나폴레옹의 유배조건을 더욱 옥죄게 되는데, 총독 허드슨 로가 본국의 의향을 충실히 이행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결국 나폴레옹의 뒤통수를 친 셈.

라스 카즈가 떠난 후 나폴레옹이 구술하는 회고록 기술을 도맡아 했었다. 비록 나폴레옹과 티격태격 했고 라스 카즈의 언변과 학식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나름 나폴레옹의 말상대가 되어 주기도 하는 등 그래도 그의 역할이 적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구르고마저 섬을 떠나자 나폴레옹의 말동무가 될만한 사람은 사실상 없게 되었고 나폴레옹은 더욱 더 고독해진다. 이후 1819년 7월에 몽톨롱의 부인[28]마저 섬을 떠나자 이제 희망은커녕 온통 절망과 고독, 먹구름 그리고 앙톰마르쉬 밖에 없는 유배생활 후반기가 펼쳐지며 그때부터 건강이 빠르게 악화된다.
아래 '독살설' 항목에 나오는 시기가 이때부터다.

6.3.3. '''몽톨롱'''(1783~1853), 1821년까지


나폴레옹 비소 독살설의 주인공이다. 이를 두고는 그의 부인 알빈을 나폴레옹이 정부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알빈은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과 매우 가까운 존재였으며 그녀가 1819년에 섬을 떠났을 때 나폴레옹은 매우 슬퍼했다.
알빈이 1816년에 낳은 딸을 나폴레옹의 사생아로 보는 견해도 있을 정도. 몽톨롱은 이러한 관계를 알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즉 독살설의 주인공으로 지목된 것에는 그럴 듯한 배경이 있는 셈이다. 또한 과거에 군대공금을 횡령한 전력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몽톨롱이 나폴레옹이 죽은 후 받게 될 유산을 노리고 동행을 자처했다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나폴레옹 사후 가장 많은 유산을 챙긴 건 몽톨롱이었다. 여러모로 의구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다.

괴팍한 성격의 '구르고'와는 달리 나폴레옹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그의 임종 때까지 그를 충실히 보필한다.(덕분에 유산으로 한 몫 챙긴다.)

6.3.4. '''베르트랑'''(1773~1844), 1821년까지


1797년 나폴레옹의 1차 이탈리아 원정 당시 그의 편에 서게 되었고 이후 많은 활약을 한다.
황실 궁정대원수였던 뒤로크 장군이 1813년에 사망하자 그의 후임자가 된다.
이후 부인과 아이들을 다 동반하고 가족 전체가 유배길에 동행하게 된다. 나폴레옹의 지근거리에 머물렀던 '라스 카즈'나 '구르고' 등과는 달리 롱우드에 살지 않고 떨어진 시가지 쪽에서 지내면서 주로 특정요일이나 정해진 떄에만 나폴레옹을 만나게 되는데 부인과 아이들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병세가 악화된 나폴레옹의 마지막 시기와 임종까지의 순간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한 인물. '군대, 선두'라고 알려져 있는 나폴레옹의 마지막 말도 베르트랑이 기록한 것이다.
훗날 1840년 나폴레옹의 장례식 당시 참석하여 매우 감격해한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대하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 도입부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잠깐 언급된다. 소설에서 베르트랑은 엘바 섬에서 선장의 명령으로 전령임무를 맡은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에게 정황상 '''황제 복귀의 음모'''가 담긴 편지를 맡긴다. 그런데 수령인이 에드몽을 취조한 검사 빌포르의 아버지이자 골수 공화파 '누아르티에 백작'이였고, 검사 빌포르는 자신의 출세길이 막힐까 두려워 증거를 인멸하고 입막음을 위해 주인공을 절해고도의 감옥에 집어넣는다.

6.3.5. '''오미어러'''(1786~1836), 1818년까지


세인트헬레나 시절 나폴레옹의 첫번째 주치의.
1815년 당시 영국 해군 군의관이었고, HMS 벨레로폰 함에서 근무하던 중 (영국으로 가기 위해) 배에 승선한 나폴레옹을 만나게 된다. 이후 영국 정부의 허가를 얻어 세인트헬레나로 동행한다.
나폴레옹 일행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한편으로 그들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영국정부에 올리는 첩자역할도 담당한다.
이후 영국 정부와 허드슨 로 총독이 나폴레옹을 점점 가혹하게 다루는 것에 대해 반대하며 총독과 큰 불화를 겪는다. 결국 옹졸한 총독의 고자질에 의해 본국 정부로부터 해임당하고 1818년 8월에 섬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이후 오미어러는 영국 정부와 허드슨 로를 비판하다가 해군에서도 잘리고 소인배 허드슨 로에 의해 소송까지 당했으나 재판부가 로의 고소를 무시하는 바람에 위기에서 벗어난다. 오히려 나중에 오미어러는 허드슨 로를 두고 나폴레옹을 학대한 파렴치한이라며 그의 악행을 폭로하며 비난했다. 결국 로는 이 여파로 세인트헬레나 총독에서조차 잘리고 한직기지 부대장이나 전진하면서 오히려 세인트 헬레나의 총독자리가 가장 황금기라고 할 정도(적어도 이 섬에서 총독이 가장 높은 위치이니)로 늘그막까지 여기저기 한직을 오고가면서 살다 갔다. 오미어러가 나폴레옹을 박대한 복수를 허드슨 로에게 제대로 해준 셈이다.

6.3.6. '''프란체스코 안토마르치'''[29](1789~1838)


황제 나폴레옹 덕분에 온갖 수단을 동원해 큰 재산들을 모았건만, 가족인 그에게조차 은혜도 모르고 인색하기 그지없었던 '나폴레옹의 가족들'이 고용해서 보낸 (싸구려) 의사.
나폴레옹과 동향인 코르시카 사람으로, 1819년 9월 20일에 새로 추가되는 다른 일행들과 함께 섬에 도착한다. 이후 나폴레옹의 임종까지 사실상 주치의 역할을 맡게 되는데, 이 사람은 원래 산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죽은 사람을 연구하는 병리학자였다.
그래서 치료는 어설펐으며 심지어 의사로서 자리를 지키지 않을 때도 많았던 그를 나폴레옹은 매우 경멸했다. 실제로 그는 나폴레옹을 간단히 진찰한 후 세인트헬레나 섬의 수도인 제임스타운으로 가서 대부분 그곳에서만 지냈다.
이후 병세 악화로 죽음을 직감한 나폴레옹이 유언에 대한 구상에 들어가게 되는데 분노한 나폴레옹은 안토마르치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내가 죽으면) 안토마르치에게 20프랑을 남기겠다. 그가 목을 맬 줄을 살 수 있도록.'''

나폴레옹이 죽자 영국 해군 군의관 아르노트와 함께 그의 시신을 해부했으며 데스마스크도 제작한다. 아이러니 한 것은 나폴레옹 생전엔 도움이 안 되었던 그가 사후에야 도움이 되었던 거였다.
그는 자신의 전공이었던 부검에서 '''간이 심각하게 부어 정상적인 사람의 간보다 눈에 띄게 컸다'''란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이 보고서가 발표되지 못할 걸 안 안토마르치는 사망자의 장기에서 조직 표본을 두 점 채취하여 보관해 두었다.
이 표본은 여러 경로를 거쳐 런던의 한 의학박물관으로 입수되었고 1913년 그곳에서 현미경으로 분석한 결과 나폴레옹의 사인은 아메바 감염에 의한 간염. 즉 극도로 열약했던 수감환경 탓이란 것을 밝혀냈다. 안타깝게도 이 조직 표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독일 공군폭격받았을 때 영원히 소실되었다.

7. 1821년, 죽음


나폴레옹은 그렇게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6년간의 유배 생활를 보내다가 위암으로 인해서 1821년 5월 5일 오후 5시 49분에 향년 51세를 일기로 눈을 감게 된다.[30] 나폴레옹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France, armée, tête d'armée, Joséphine.

(프랑스, 군대(육군), 선봉, 조제핀)

이라고 알려져 있다.[31] 그의 임종을 지켰던 베르트랑 장군[32]의 기록에 따르면 '군대의 선두(선봉)'이라고 들리는 말이었다고 한다. 5월 5일 새벽에 남긴 말이었는데 '프랑스'나 '조제핀'이라는 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부분(프랑스, 조제핀)은 정확한 출처가 필요하다.
[image]
(나폴레옹의 데스마스크)[33]

8. 1840년, 나폴레옹 1세 유골의 귀환(Retour des cendres)



나폴레옹의 유해는 사후 19년만인 1840년, 자신의 생전에 건설되기 시작한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을 통과하여 앵발리드(Les Invalides)로 옮겨져 이곳 지하에 안장되었다. (이장 당시의 상황은 위키피디아 영어판을 참조.)
프랑스인들이 복고 부르봉 왕가를 몰아내고 루이필리프 1세를 옹립한 부르봉-오를레옹 왕가 (7월 왕정)에서, 나폴레옹의 이장이 결정된다. 이유는 7월 왕정이 부르봉 왕가와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시민들을 달래고 통합하기 위해서,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 재현이라는 정책목표를 위해서 등등 매우 다양했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목표 달성에 실패한다.''' 이 대형 이벤트는 나폴레옹의 마지막 몇 년을 다룬 영-프 합작영화 <Monsieur N>(2003)에서 묘사하기도 했다.
내심 나폴레옹을 불편히 여겼던 왕정은 나폴레옹의 관과 이를 보기 원하는 민중을 기피했다. (영화 <Monsieur N>과 달리) 실제 관은 커다란 영구차에 숨겼고, 파리를 제외한 도시는 모두 피했다. 앵발리드의 예식에는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제한되었다. 그나마도 왕정쪽 정치인들은 굉장히 산만하고 무성의한 분위기였다고.
이에 반해 민중은 프랑스 제국 근위대 생존자들이 옛 군복을 꺼내입어 황제를 맞았고 구경꾼도 40만이나 밀집하였다. 그들은 제1제정에 대한 향수를 자극받았으며, 자신들의 감정을 무시하고 '순교자 황제'에게 무례히 구는 왕정에 분노했다. 왕실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꾸민 이벤트는 역으로 왕정과 민중의 단절을 드러내는 신호탄이 된다. 이는 7월 왕정의 권위를 상처 입히고 나폴레옹 신화를 강화한다.

9. 독살설


영국이 세인트헬레나 섬이 again 엘바 섬이 될까 싶어 비소독살했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는데, 남아있는 나폴레옹의 머리카락을 분석해 보면 비소 함유량이 상당히 많다는 이유로 독살설을 지지하는 설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로 반박하는 설도 만만치 않다. 단적으로 관이나 내장재 등 죽은 다음에도 비소가 축적될 이유는 많다는 이야기다. Cupric Green으로 인해 비소 중독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2014년 10월 26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나폴레옹의 심복이었던 몽쏠롱 장군이 자신의 부인 알비느와 나폴레옹이 외도하는 것을 알고는 충격을 받아 몽쏠롱이 나폴레옹을 비소를 탄 와인으로 죽였다는 주장을 다루었다. 당시의 부검과 기록을 검토한 결과 나폴레옹의 사인은 위암으로, 할아버지, 아버지, 세 명의 동생도 위암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몽쏠롱 장군이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난 2000년 몽쏠롱이 그의 아내 알비느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편지의 내용에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나폴레옹을 병자로 만들려고 계획했다는 사실이 적혀있어, 그가 나폴레옹을 죽음으로 몰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극적인 삶을 살다 생전의 권세에 비해 초라하게 삶을 마감한 인물이기에 암살설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1] 국내에도 출간되었던 막스 갈로의 유명한 소설 '나폴레옹'에서는 '앙톰마르쉬'라고 번역되어 있다.[2] 보나파르트의 이탈리아어 식 표현.[3] 원래는 귀족이 아니었으나, 아버지인 샤를이 프랑스로 붙은 대가로 작위를 받았다.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니 나폴레옹은 태어날때부터 귀족이었다.[4] 아버지인 샤를은 피렌체로 유학가 피사 대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해 변호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고, 깡촌이었던 코르시카에서 유지가 되었다. 그 후 코르시카 독립운동이 실패하자 프랑스로 붙는데, 코르시카 내에서는 엘리트였으므로 작위도 받고 프랑스에서 파견된 코르시카 총독과도 친해진다.[5] 이 사관학교의 정원이 프랑스 전체에서 600명이었다. 다만 사관학교 서열로는 하급 학교였다. 원래는 깡촌 출신인 나폴레옹은 입학이 어려웠지만 아버지와 친했던 코르시카 총독이 추천서를 써 주었고, 결정적으로 코르시카 군사 총독이었던 마브뢰프가 나폴레옹의 어머니에게 푹 빠져 적극 지원을 해 주었다. 이 당시 나폴레옹의 집안은 사실상 편모가정이었는데, 아버지가 코르시카 대표로 프랑스에 갔다가 다른 여자와 새살림을 차렸기 때문이다.[6] 코르시카어는 프랑스어보다는 이탈리아어에 더 가깝다고 할 정도로 프랑스 표준어와는 달랐기 때문에 말도 잘 안 통했을 것이다. 당연히 우아하다고 여겨졌던 프랑스어를 쓰는 다른 귀족 자제들이 무시했을 것이다.[7] 이원복의 만화 사랑의 학교에 등장해서 유명해진 내용인데, 이 없어서 학교 앞에서 파는 사과 한 조각 사 먹기 힘들었는데, 사과 파는 아줌마가 오죽 불쌍했으면 나폴레옹이 지나갈 때마다 공짜로 사과를 하나씩 줬다고 한다. 훗날 나폴레옹이 황제가 됐을 때 조용히 돌아와 아줌마에게 그동안의 감사의 표시로 금화를 가득 전달해주고 사과 파는 아줌마는 금화에 새겨져 있는 황제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러나 해외자료나 웹사이트에서는 도통 이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볼 수가 없다.''' 나폴레옹이 국내에서만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이 정도 인물의 에피소드라면 해외에서도 알려져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예를 들어 사랑의 학교에서 나온 크리스마스 휴전 같은 경우는 외국에도 알려져 있다). 그러니 나폴레옹과 사과 이야기는 국내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많다. [8] 사실 이 당시 해군 이야기를 들여다 보면 크게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이야 모국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도 없는 이적행위지만, 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계급의 TO는 정해져 있었지만 그 TO는 배출되는 사관 수에 비해, 지금과 비교하여, 턱없이 작았기에 많은 해군 장교들이 임관이나 진급을 못하여 ‘실직’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출세에 대한 욕심이 있는 장교들은 자국을 떠나 타국 해군에 복무하려고 했었다. 특히 당시 세계적인 해운국이던 영국에 그러한 일이 있었는데, 진급이 되지 않던 장교들이 신생 러시아 해군이나 스웨덴 해군으로 취직하러 가는 일이 왕왕 있었다.[9] 바로 아래 문단에서 후술하지만, 나폴레옹은 로베스피에르의 동생인 오귀스탱과 친했다.[10] 이 팜플렛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다음에 전력을 다해서 없애려고 노력한 당대 최고의 금지 문건이 된다.[11] 이때 나폴레옹을 호위한 저 두 척탄병은 조제핀에게 저녁 식사 초대를 받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그림에서 보듯 당시 의회 분위기가 나폴레옹을 때려죽이려고 할 정도로 험악해 두 척탄병이 목숨을 걸고 나폴레옹을 호위했다. 다만 그림에 나온 두 명은 실제 그 척탄병이 아니라 모델이라고 한다. 좌우의 얼굴을 비교해보면 매우 똑같이 생겼는데 한 모델을 기준으로 두 명을 그렸다고 한다.[12] 앵그르, 1806년작[13] 자크 루이 다비드, 1807년 작[14] 박애를 기치로 내걸었다고 하지만 나중에 갖다 붙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권리는 소유권, 즉 사유재산권을 이야기한다.[15] 나폴레옹에 대한 증오감이 얼마나 컸는지 그가 황제가 된 프랑스까지 싫어했다. 뭐 자신의 팬이 프랑스인이라고 하면 그것까지 싫어하고 화내진 않았지만. 베토벤이 살던 오스트리아에 프랑스가 쳐들어오고 이후 프랑스군에 대한 연주회 강요가 들어오자 날 죽여봐라는 투로 혐오하며 거절한 일화도 있다.[16] 다만 베토벤 학자에 따라 나폴레옹을 싫어한게 황제로 즉위한 직후부터가 아니라 한 달 전 즈음부터 싫어졌다는 설도 있다. 베토벤의 편지를 분석해서 나온 결과였다. 즉 가뜩이나 맘에 안 들기 시작했는데 거기다가 마침 황제 즉위까지 했으니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17] 나폴레옹을 신격화한 것으로 유명하다.[18] 금방 끝날 줄 알고 방한복도 없이 왔고, 드넓지만 텅텅 빈 겨울의 땅에서 물자를 조달할 방법은 없었다.[19] 별도로 프랑스 남부에선 이베리아에서 웰링턴이 12만 명 병력으로 쳐들어와서 술트가 8만 명으로 방어하고 있었다.[20] 루이 16세의 아들인 루이 17세는 10살 때 감옥 안에서 요절했다.[21] 이때 통역 담당이었던 라스 카즈(Las Cases)는 그에게 회고록을 작성 해볼 것을 권유 했다.[22] 웃긴 사실은 프랑스는 혁명정부때 이미 노예제를 폐지했는데, 1802년에 나폴레옹이 다시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아이티 혁명의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튀르(1743~1803)를 박해한 전력도 있다.[23] 나폴레옹 역시 자존심이 강해서 죽을 때까지 허드슨에게 굽히지 않았다.[24] 그 밖에 나폴레옹을 구타했다거나 침을 뱉은 썩은 포도주를 부었다거나, 읽던 책을 보는 앞에서 빼앗아 찢어버렸다거나, 화가 나면 찾아가 뒤통수를 때리며 화풀이를 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그 근거와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 삭제 조치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참고 바람.[25] 1769년 7월 28일 ~ 1844년 1월 10일[26] 단순히 교양 지식만 많았던 것이 아니라 간간히 그의 말에 반박도 하고, 그러면서도 기분이 상하지 않게 적당히 아부도 하는 밀당의 달인이었다. 나폴레옹은 그에게 자신이 사적으로 친한 사람에게만 하는 '귀 꼬집기'를 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이 빠른 속도로 구술하는 회고록을 정신없이 받아적었다. 시력 저하로 아들이 잠깐 대신할 때도 있었다. 이 회고록 기술 역할은 그가 섬을 떠난 후 구르고가 이어받았다.[27] 푸셰의 후임으로 치안장관을 역임했었던 인물로, 최고의 나폴레옹 숭배자였다.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와 더불어 충성심은 최고 수준. 나폴레옹이 프랑스와 마지막 작별하는 그 순간까지 함께하며 그와의 이별을 눈물로서 슬퍼한다. '당신을 죽이게 되어 유감이오. 하지만 황제께서 그걸 원하시오'라는 나름 유명한 말의 주인공.[28] 알빈 몽톨롱(1779~1848). 세인트헬레나 시절 나폴레옹의 정부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가 세인트헬레나에서 낳은 딸인 엘렌(1816~1910)을 나폴레옹의 딸이라 보는 사람들도 있다.[29] 국내에도 출간되었던 막스 갈로의 유명한 소설 '나폴레옹'에서는 '앙톰마르쉬'라고 번역되어 있다.[30] 영국인 의사들이 작성한 공식적인 부검결과에서는 위암으로 발표되었다. 이것은 그의 죽음이 열약한 수감 환경의 결과로 판명되지 않기를 바란 결과였다.[31] 랑펠로에서도 나폴레옹이 죽을 때의 유언으로 나온다. 다만 대사는 "프랑스.. 선봉(원본은 先頭, 즉 선두)... 군대.."로 약간 다르다. 그리고 대사 뜬 뒤 게임 오버가 뜬다.[32] 라스 카즈, 구르고, 몽톨롱과 함께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의 측근이 되었던 4명의 주요 인물 중 한 명. 이 중 라스 카즈와 구르고는 각각 1816년 12월, 1818년 3월에 섬을 떠나고 몽톨롱과 베르트랑만 임종을 지킨다. 세인트헬레나 생활 이전의 직위는 프랑스 황실 궁정대원수였으며 전임자는 뒤로크 장군.[33] 사후 40시간 뒤에 의사 프란체스코 안토마르치가 본을 떠서 만들었다. 나중에 세 개의 복제품이 추가로 제작되어 나폴레옹의 데스마스크는 현재 4개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