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조선)/특이한 기록들

 



1. 세자빈 문제
2. 며느리 문제
3. 건강관리 소홀
4. 평생직장
5. 자손
6. 쿠데타와의 악연


1. 세자빈 문제


세자는 첫 번째 세자빈 휘빈 김씨를 멀리하고 효동과 덕금이라는 궁녀들을 더 총애하였다. 야사에 휘빈 김씨가 박색이었다고 한다. 문종은 정사에 명나라 사신이 12살 문종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휘빈 김씨는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이상한 주술을 쓰다가 발각되어 폐위되었다.
세종대왕은 두 번째 세자빈을 뽑을 때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순빈 봉씨를 간택했다. 하지만 순빈 봉씨도 세자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세자는 순빈 봉씨의 투기가 한나라 여후 못지 않다고 하였다. 처음엔 세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던 순빈 봉씨는 그렇게 되지 않자 궁녀와 동성애를 하는 사건을 일으켜 폐위되었다.
세 번째 세자빈 권씨는 행동에 흠이 없었으나, 단명하였다. 세손을 낳고 다음날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종은 이후 정실 부인을 들이지 않았다.

2. 며느리 문제


세종이 문종의 세자빈 두 명 이외에 손수 이혼시킨 며느리가 두 명 더 있다. 4남 임영대군과 8남 영응대군의 처로, 이들은 몸이 병약하여 쫒겨났다.
임영대군의 첫 부인인 남씨는 단종 초에 좌의정을 지낸 남지의 딸로, 정신이 약간 온전치 못했던 듯 하다. 1433년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황을 파악한 세종이 신하들과 논의하여 이혼시키고 얼마 후 임영대군을 최승녕의 딸과 재혼시켰다.
막내아들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영응대군 역시 처음 들인 대방부부인 송씨[1]를 병이 있다 하여 쫓아내고 정충경의 딸과 결혼시켰다.[2] 그러나 영응대군이 첫 부인 송씨를 잊지 못하고 계속 찾아가 딸 두 명을 낳았고, 계유정난 이후 정씨를 쫒아내고 송씨와 재결합하였다. 대방부부인 송씨는 질투심이 많고 사나워 나중에는 영응대군이 두려워 했다. 첩들이 영응대군의 얼굴을 거의 못 보고, 영응대군이 세상을 떠날 즈음 첩이 낳은 아들에게 송씨 몰래 숨겨놨던 보물을 물려주었는데 송씨가 알고 이것을 빼앗아 절을 지었다.[3]
실제 이들의 의중은 몰라도 세종의 적자들 중 계유정난을 기준으로 하면 장남 문종과 5남 광평대군, 7남 평원대군은 죽은 상황이고, 차남 수양대군과 4남 임영대군, 8남 영응대군 VS 3남 안평대군, 6남 금성대군의 구도가 이뤄진 상황이었다. 세종대왕의 은혜를 입었기에 단종을 위해 옹호하였다는 단종 계열 신하들을 보면 임영대군은 몰라도 영응대군 역시 쉽게 수양대군 편을 들 상황은 아닌데 이런 걸 보면 이혼 문제 때문에 아버지를 남모르게 원망했을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3. 건강관리 소홀


왕과 같은 한 나라의 수장은 '''살아있다는 그 자체'''로도 상징이 되기 때문에 건강관리의 중요성이 더욱 부가된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건강관리가 여러모로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그야말로 편식+운동부족+과로='''성인병 종합선물세트'''의 훌륭한 예시가 된다.
현재 남아있는 세종대왕의 어진은 그냥저냥이지만 실제로는 편식이 심하고 운동량은 부족했기 때문에 '''비만이었다.'''[4] 20대 당시 세자 시절부터 이미 당뇨병을 앓았던 기록이 있는 만큼 건강 상태는 젊었을 때부터 영 좋지 않았다. 육류 위주의 식단과 부족한 운동량에서 비롯된 당뇨고혈압, 고지혈증 등 각종 성인병의 전조 증상을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말년에 시력을 잃은 이유도 당뇨병 합병증으로 추정될 정도니 가히 종합병원.
세종이 이렇게 고기 마니아였던 까닭은 집안 내력으로 보인다. 여진, 몽골 같이 육식을 자주하는 이민족들과 부대끼며 살던 동북면 무장 집안으로 할아버지는 한반도 전역에 요동까지 누빈 당대 제일의 무장, 문관 출신 아버지도 조선 27왕 중에 손꼽히는 사냥 마니아 였다. 왕 되고도 어떻게든 핑계 만들어 나갈 정도로 사냥을 좋아했었으니 운신이 한결 자유로운 왕자 시절까진 더했을 터. 사가에서 지낼 때부터 육식과 가까웠고, 싫어할래야 싫어하기 힘든 환경이었다.
격구, 활쏘기, 말타기, 사냥 같은 강도 높은 운동을 즐겨 육류 위주의 식습관을 가져도 크게 문제가 없었던 이성계, 이방원과 달리 세종대왕은 책 읽기를 매우 좋아했는데, 몸을 움직이기는 싫어해서 많이 먹기는 하는데 방에서 들어 앉아 나다니질 않는 지금의 비만인들과 다를 게 없었다.
"수라상에 고기반찬이 없으면 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으니 어지간히 편식이 심했는 듯. 태종은 자신의 형 정종이 죽었을 때 세종이 잠시 고기를 끊자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도[5] 한편으로는 아들 걱정이 또 발현되어서 유언에도 3년 상을 치를 때의 예법에 따라 상주에게 육식은 금지되어 있는데도 '주상이 고기를 좋아하니, 내 상을 치를 때는 고기를 먹게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임금이 허손병(虛損病)을 앓은 지 여러 달이 되매, 정부(政府)와 육조(六曹)에서 육찬(肉饌) 자시기를 청하여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듣지 아니하고, 병세는 점점 깊어 약이 효험이 없으니, 유정현 · 이원 · 정탁 등이 육조 당상(六曹堂上)과 대간(臺諫)과 더불어 청하기를, “평인(平人)들이 만사를 제폐(除廢)하고 상제(喪制)를 지켜 행하여도 3년 안에 병에 걸림을 오히려 면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전하께서 지존(至尊)하신 몸으로 소찬(素饌)만 진어(進御)하시고 만기(萬機)를 보살피시면서 3년의 상제(喪制)를 마치고자 하신다면, 병이 깊어 치료하기 어렵게 되시리니, 옛 사람이 말하기를, ‘죽은 이를 위하여 산 사람을 상해(傷害)하지 말라. ’고 하였으며, 또 ‘육즙(肉汁)으로서 구미(口味)를 돕는다. ’는 말도 있습니다. 이제 세자(世子)가 어린데, 전하께서 상경(常經)만 굳이 지키어, 병환이 깊어져서 정사(政事)를 보지 못하시게 된다면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의 복이 되지 않습니다. 태종의 유교(遺敎)에도 또한 말씀하시기를, '''"주상은 고기가 아니면 진지를 들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 권도를 좇아 상제(喪制)를 마치라."'''[6]

고 하셨으니, 이는 곧 전하께서 예법을 지키시고 지나치게 슬퍼하시므로, 앞으로 건강을 해하실까 미리 아시고 염려하셨사오니, 어찌 위로 조종(祖宗)의 영(靈)을 위로하시고, 아래로 신민(臣民)의 바람에 좇지 아니하십니까.”

세종 4년(1422년) 11월 1일(갑인)

하지만 애초에 이 유언이 알려진 계기가 세종이 3년상을 치르던 도중 고기를 안 먹어서 신하들이 건강을 해친다며 올린 상소에서 인용한 것이어서 안 먹을 땐 안 먹었다. 물론 아예 밥 자체를 먹지 않아 영양실조로 죽은 인종을 제외하면 3년상 중에 임금이 고기 안 먹는다고 신하들이 기겁하며 말리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아 까짓거 고기 한번 안 먹는다고 안 죽어요~” 라고 하면 안되니까 빈말로라도 챙겨드셔야 한다고는 했겠지만.
이 편식만큼은 고치질 못해서, 임금이 초가집에서 살고 고기 반찬을 금함으로써 하늘에 속죄해야 하는 가뭄 때에도 고기 반찬을 거르지 않았다. 설렁탕도 세종대왕이 선농단 제사를 올릴 때,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식사 시간이 지나도록 선농단에 발이 묶이게 되자 배가 고파서 친경[7]에 쓰인 밭 가는 를 보고 그 자리에서 잡아 만든 데서 유래한 음식이라는 야사가 있을 정도.[8]

“졸곡(卒哭) 뒤에도 오히려 소선(素膳)을 하시어, 성체(聖體)가 파리하고 검게 되어, 여러 신하들이 바라보고 놀랍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또 전하께서 평일에 육식이 아니시면 수라를 드시지 못하시는 터인데, 이제 소선(素膳)한 지도 이미 오래되어, 병환이 나실까 염려되나이다.''' '''옛날 원경왕후(元敬王后) 초상에 태종께서 육선(고기반찬)을 권하시면서 이르기를, ‘주상의 한 몸이 종사(宗社)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것이니,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 하셨나이다.''' 신 등의 오늘날 청하는 것도 또한 종사와 생민(生民)을 위하는 것입니다.”

세종 4년(1422년) 9월 21일(을해)

'''"졸곡(발상 후 3달) 후에도 오히려 드시지 않아 몸이 여위시고 검게 된 모습을 보면서 신하들 가운데 뵙고 놀라지 않은 사람들이 없으며 '''또 평소에도 고기 없이는 식사를 하지 못하시는 분인데 드시지 않은 지가 오래되어 건강이 심히 염려됩니다. 옛적 원경왕후께서 돌아가신 날 태종께서 고기반찬을 권하시며 말씀하시길 '왕의 몸은 왕조의 평안과 관계되는 일이니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오늘 저희들의 청하는 이유 역시 왕조와 백성을 위하는 것입니다.'''

현대어 번역본

그리고 태종이 직접 세종의 비만 체형을 지적한 적도 있었다.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지만, 몸이 비중하니'''(=비만이니)'''가끔 밖에서 놀기도 해야 하므로 사냥을 함께 하면서 무사(武事)를 강습하려 한다."'''

세종 원년 10월 9일 기사.

다만 여기에는 왕위에서 물러난 후의 생활이 심심하니 아들 핑계로 사냥을 즐기며 놀러 다니고 싶은(...) 태종의 꼼수도 있기는 하다. 세종대왕의 이와 같은 고기 사랑은 본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었으나, 역사적인 성군이 고기만 먹는 편식의 대표주자였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들려서인지 오늘날에는 세종 하면 연상되는 단어가 훈민정음 다음에 고기가 될 정도로 유명해졌다.[9]
세종대왕은 고도비만 까지는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대왕이 김종서에게 이런 말을 한다.

"'''30살 전에 매던 띠(帶, 허리띠)가 모두 헐거워졌으니 이것으로 허리 둘레가 줄어진 것을 알겠다.''' 과인의 나이가 33세인데 살쩍의 터럭 두 오리가 갑자기 세었으므로, 곁에 모시는 아이들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뽑고자 하기에, 내가 말리며 말하기를, '병이 많은 탓이니 뽑지 말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13년(1431년) 8월 18일.

젊었을 때 매던 허리띠가 헐거워져서 허리둘레가 줄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데다가 살쩍에 흰 터럭이 나 있다고 말하는 장면. 이걸 보면 재위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젊었을 때보다 살이 빠져 버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부분은 당뇨병에 의한 체중감소로 보인다. 현대에도 당뇨병의 대표 증상으로 급격한 체중 감소를 든다.
게다가 식욕 뿐만 아니라 성욕도 왕성해서, 후궁 포함 7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보았다. 부부간의 금슬도 좋아 그중 8남 2녀가 정실부인 소헌왕후와 사이에서 나온 자식으로, 조선조에서 2번째로 많은 정실 자손을 보았다. 문제는 태어난 왕자들도 죄다 아버지를 닮아 능력이 매우 뛰어나 그들에게 국사를 맡기는 바람에 문종이 승하한 이후, 조선의 정치에 큰 파란을 부르게 됐다는 것.[10]
그래서인지, 세종은 임질에도 걸렸다. 이 임질이 성병이냐 아니냐에는 많은 말이 오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실록을 검토한 한의사들은 성병이 아니라고 한다. 다만 한의학에서 말하는 임(淋)은 현대 의학 기준으로는 요로결석, 혈뇨 등을 포함한 배뇨장애의 총칭이며, 크게 5가지의 오림(五淋)으로 나뉜다. 육식을 즐기고 비만했던 세종의 기록을 보면 고림(膏淋)[11]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임질에 기록을 찾아봐도 증상이 요도에 발생할 질환에 가깝게 설명되고, 심지어 아버지의 그곳(!)을 빨아 임질을 낫게 했다는 효자 이야기도 있다. 현대의학용어로 굳이 적자면, 신경성 방광염일 가능성이 높다.
건강의학 교수와 박사들도 평가를 하면, 세종대왕은 육식 위주로 과식을 많이 하는 탓에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해 고생을 하였고, 옛날에는 적당한 진단처방도 없이 54세까지 살았던 것이 더 대단하다고 평가했을 정도로 건강관리에 신경을 안 썼다고 평가한다.
또한 왕들이 하던 운동이나 몸 단련을 싫어했고 앉아서 오랫동안 생활을 하니 무릎이나 다리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했으며, 젊을 적에 허리디스크도 있었을 거라고 추측하였고,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한 비뇨장애 또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스트레스 또한 한 몫도 했다. 세종대왕 또한 조선의 역대 국왕들처럼 스트레스에 자유로울 수는 없었고 꽤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이 된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맛있는 고기 음식만을 찾아도 전혀 이상한 점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무튼 세종대왕이 고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유명해서인지 이런 패러디 영상도 있었다. 이 영상은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등장하는 세종대왕 배역을 맡은 한석규가 나왔다.# 스펀지에서도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고기가 없다고 반찬투정을 하는 세종의 화면을 내보냈는데 이혁재가 세종으로 분해 상당히 그럴싸하게 역정을 냈다. 반면 식생활이 검소하기로 유명한 영조는 패널 중 한 명인 홍지호 박사가 연기했다. 간장 한 종지를 아껴서 내년에 또 먹는다는 대사로 패널들의 배꼽을 뺐다.
단순한 식습관과 운동 외에 과로 역시 몸을 망치는 주범이다. 세종대왕은 수면시간이 상당히 적었다고 할 만큼 그만큼 일을 많이 했고, 수면부족과 과로가 이중으로 겹쳐 건강을 더욱 악화시킨 것. 신숙주가 밤늦게 책을 보다 잠들어 세종이 덮을 것을 주었다는 일화가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 시간까지 왕이 잠 안 자고 일을 하고 있었단 소리다(...). 아래의 평생직장과 함께 생각하면 신하 입장에선 만나고 싶지 않을 군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세종은 비만 때문에 심각한 시각장애와 수전증을 앓고 있었다.# 세종은 지화에게 종3품을 작록할 때 이미 눈병이 나 있었다. 질병의 원인이 당뇨[12]라는 등 다양한 의견이 있었지만 신빙성 있는 주장은 아직까지 없는 상태이다. 눈병을 오래 앓아 눈이 침침하였고 지팡이 없이는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실록을 보면 세종 23년 2월에는 “내가 안질을 얻은 지 이제 10년이나 되었으므로 마음을 편히 하여 조섭(調攝)하고자 하니 매월의 대조회와 아일(衙日)의 조참(朝參)과 야인들의 숙배(肅拜)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없애게 할 것이며, 향과 축문도 친히 전하지 말게 하라”, 4월에는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 아파서 봄부터는 음침하고 어두운 곳은 지팡이가 아니고서는 걷기에 어려웠다. 온천에서 목욕한 뒤에도 효험을 보지 못하였더니, 어젯밤에 이르러서는 한방 약물학 책의 주석(註釋), 작은 글자를 보았는데도 볼 만하였다”고 하였다.
현대의 시각장애 등급으로는 약 4~5등급으로 예상된다. 이 정도의 시각장애는 시력검사표에서 제일 윗 글자를 읽을까 말까 하는 시력이다. 건강을 염려한 태종이 독서를 좋아하는 세종의 책을 없애버렸다는 얘기는 아주 유명한 일화.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에도 당뇨와 심각한 눈병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격무에 시달렸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세종은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하면서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했다. 그렇다고 몸을 움직이는 활동이나 운동도 딱히 하지 않고 방에 가만히 앉아서 할 수 있는 활동을 선호하는 스타일이었다. 당연히 건강이 좋을 수가 없었다. 편식, 수면부족, 운동부족으로 기본적인 건강관리가 박살난 상태에서 몸에 질병을 달고 살았던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다.

4. 평생직장



'''세종 13년 9월 10일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세종 25년 12월 4일 영의정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나 듣지 않다.'''

이하 내용을 참조할 때 세종대왕이 신하들의 은퇴도 윤허하지 아니하며 끝까지 부려먹었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생긴 오해임을 감안해야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은 그 행적의 원인과 정치적 의도를 모두 고려하여 해석하여야 하나, 실록의 기록을 액면그대로 멋대로 해석하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이 경우이다. 현대의 조선역사전공 교수들은, 이러한 세종의 은퇴거부가 신하들에 대하여 보호를 해주기 위해서라고 판단하고 있다. 즉, 황희와 같은 재상들의 경우는 재상은 왜 물러나지 않느냐(언제까지 그자리 차지하고 있을거냐)는 신하들의 시기질투에 대하여 은퇴를 하고자 하나 왕이 윤허하지 않는다는 식의 보호장치를 제공하고, 3년상과 같은 경우에는 당대 정치환경에서 재상급이 아니고서야 한번 물러나면 정치판에 돌아올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즉 커리어가 막혀버리는 신하들에게 서울에 그대로 있으라 하는 정치적 배려였다는 것이다. 또한, 시국에 따라 3년상을 줄이거나 없애는 제도 역시 세종이 억지로 만든게 아니라 이미 당시 조선에 있는 제도라고 한다. 은퇴도 막으면서 부려먹었다는 것은 아래 서술 말마따나 우스갯소리로 이해하도록 하자.
왕조차 하루종일 일하는데 신하들이 격무에 시달렸음은 안 봐도 뻔하다. 황희, 조말생, 김종서 등 세종대왕 집권시기의 신하들은 은퇴도 마음대로 못 하고 노인네가 돼서서도 현직에 있었으며, 건강상의 이유로 사직을 청해도 계속 빠꾸먹었다. 황희만 봐도 노환 등을 이유로 사직을 여러번 요청했으나 세종대왕은 언제나 거부했다. 이징옥 등 다른 신하들도 여러 번 이런 저런 이유로 사직을 하겠다고 요청을 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황희는 세종 치세 내내 80이 넘은 나이에도 정승직을 계속 맡아야만 했다. 결국 황희는 그토록 원하던 사직을 할 수 있었지만 그때는 세종이 훙서(薨逝)[13]하기 4달 전이었다...[14]
물론 세종 치세 때는 신하들이 세종을 따라 강도높은 업무를 계속해야 했으므로 후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은퇴하려는 걸 세종이 알고 막은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게다가 후대를 위해 막상 과거로 뽑은 젊은 신하들은 집현전에서 뺑뺑이를 돌리는 바람에 나이 많은 중신들이 생고생을 해야 했다. 일이 힘들기는 힘들었는지 3년상 치른다고 사직서 내는 게 3년상 핑계로 도망치려고 그러는 걸로 밖에 안 보이고, 장영실도 공밀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작극을 벌였다는 드립까지 나온다.[15] 근데 또 그러면서도 신하들이 퍼지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황희가 노환으로 힘들다고 하니까 가마를 지원해주는 식.
신하들도 세종이 세자에게 업무를 이관하는 것을 막으면서 받은만큼 보답했다.# 물론 태종의 예처럼 조선왕조에서 임금이 대리청정이나 양위를 하는 척 쇼하며 왕권의 재확인을 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순조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기 전에는 대리나 양위를 하겠다고 하면 신하들이 "아니되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하면서 거둬달라고 고하는 일이 많았기에 특이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픈 시기에 세종대왕이 직접 만든 것이 바로 훈민정음이다.'''
그리고 역대 조선시대 조정을 통틀어 세종 때만큼 개성이 강하고 튀는 신하들이 많았던 시절도 드물다. 고위관료들부터 보면, 온화한 듯 공사 구분 못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대국을 보는 능력도 뛰어났으며 자기주장 강한 무서운 정승이었던 황희, 유들유들한 성격으로 황희같은 무서운 영감님들 진정시키고 조율하던 맹사성, 꼬장꼬장하고 뭐 하나 꼬투리 잡아서 아랫사람들 신랄하게 갈궈대는 허조, 부패한 신하였지만 정무처리만큼은 뛰어났던 조말생, 평생 군인으로 살았지만 아랫사람들을 잘 보듬었던 덕장 최윤덕 등이 있다.
또 과학기술관련 업무처리는 독보적이었으나 정작 일반행정능력은 미숙했던 정인지, 허조의 뒤를 이을 만한 인물이었던 최만리, 키가 작고 무예는 서툴렀지만 담력과 강단이 뛰어나 북방 개척에서 맹활약한 김종서, 최윤덕과 맹사성의 후계라 할 수 있는 황보인, 치세 내내 토목과 건축을 도맡은 정분,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열혈한 이징옥, 음악 분야에서는 독보적이었으나 자기관리능력은 부족했던 박연이나 관노에서 출세한 장영실, 이공계 군인이었던 이천이 있었으며 세종 후반기의 집현전 학사들도 의외로 장난꾸러기였던 성삼문, 지독한 기회주의자였으나 학자로서의 능력만큼은 탁월했던 신숙주, 시험관에게 막말을 할 정도로 패기가 흘러넘쳤던 최항 등. 세종 때의 인사들을 보면 다 굉장히 개성이 강한 인물들이 많다. 이렇게 캐릭터가 분명하고 자기주장이 강한(개중에는 자기와 코드가 맞지 않는) 신하들을 데리고 국정을 운영하여 조선을 발전시킨 세종대왕의 인재발탁 감각과 용인술은 오늘날에 봐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5. 자손


세종이 수립한 기록에서 또 다른 특이한 부분은 조선 왕조 역사상 정실 왕비후궁 소생을 막론하고 '''아들을 많이 낳은 기록(18남)'''[16]과 정실과의 사이에서 2번째로 자식을 많이 낳았던 기록(10명, 8남 2녀)이다. 중전 소생이 많은 기록으로는 태조와 태종이 공동 1위(11명)지만, 사실 태조는 신의왕후 한씨 소생 8명(6남 2녀)과,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3명(2남 1녀)을 합친 것이므로, 정실부인 한 사람만 놓고 보면 세종과 소헌왕후가 2위다. 1위는 아버지인 태종. 사이 안 좋은 원경왕후와 7남 4녀를 낳았다. 다만 양녕대군 위의 세 아들이 요절해서...
특히 소헌왕후와의 금실이 좋았는데, 소헌왕후의 사후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을 시켜서 편찬한 것이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불경 언해서 석보상절(釋譜詳節)이다. [17] 그리고 세종대왕이 그 석보상절을 읽고나서 감명받아 직접 쓴 것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다.[18]
또한 금슬이 좋았기 때문에, 후궁들을 들이기 시작한 시기가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고 한다. 아마 앞에서 말한 태종이 상왕일 때 장인 심온을 사사했던 과거가 미안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세종에 관한 후궁 기록은 세종 4년에 태종이 간택령을 내리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 후 태종의 죽음으로 인한 장례 등으로 실제 후궁이 들어온 것은 세종 6년이니 상당히 늦은 편이긴 하다. 게다가 후궁 소생의 첫 아들은 세종 7년에 태어났다. 2008년에 방영된 사극 대왕 세종의 인기와 관련해서 나오기 시작한 세종 관련 역사소설들은 대부분 이 기록에 따르고 있다.
그 외 자세한 사항은 세종대왕/가족관계 문서를 참조.

6. 쿠데타와의 악연


재미있는 것은 세종대왕의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모두 '''쿠데타의 주동자'''였다는 사실이다.
세종대왕은 자신의 선조들이 일으킨 쿠데타의 수혜자인 동시에, 자신의 아들이 일으킨 쿠데타의 피해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쿠데타를 기반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장손을 잃었으니...[19] 특히나 장손을 엄청나게 아껴서 5살 때 스승을 두고 공부를 시켰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할 정도.

[1] 정순왕후 송씨의 아버지인 송현수의 누이이다.[2] 영양위 정종(부마)의 누이이다.[3] 예종실록 8권, 예종 1년 10월 6일 병진 3번째기사[4] 그렇다고 아주 운동을 안 한 건 아닌데, 문제는 그가 즐겼던 스포츠가 그닥 운동량이 많지 않은 '''골프'''였다. 정확히 말하면 조선식 골프인 격방. (격방의 규칙은 현대의 골프와 굉장히 유사하다.) 말 타고 활 쏘고 사냥 즐겼던 아버지나 반평생 장수였고, 나이가 들어서도 사냥을 즐길만큼 타고난 무골이던 할아버지에 비하면 정말 몸을 안 움직였다.[5] 주상이 젊었을 때부터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하였는데 이제 초상을 당하여 소찬(素饌)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내가 어찌 어엿비(가엾게) 보지 않겠는가. 《세종실록》 세종 2년(1420) 8월 29일[6] '권도(權道)'란 '수단은 옳지 않으나 결과로 보아 정도(正道)에 맞는 처리 방도. 목적을 이루기 위한 편의상의 수단'을 뜻한다. 대충 "그 애는 고기 아니면 밥 못 먹으니, 나 죽고 나서도 (장례 기간에 육식은 안 된다고) 너무 따지고 들지 말고 융통성을 발휘해서 장례 기간을 마쳐라"라는 뜻. 숨을 거둘 때조차 아들이 자기 상 치르다가 몸 상할까 염려하는(물론 걱정하는 이 아들은 왕인지라 몸 상하면 나라가 큰일 난다는 점도 있지만) 태종의 자식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7] 親耕. 선농단 제사 행사 중 하나로, 왕이 직접 땅을 갈며 농사를 권장하는 행사였다.[8] 사실 설렁탕몽골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음식이지만, 여기에는 설렁탕과 같은 형태의 요리 자체가 몽골의 영향으로 생겨나기는 했으나 설렁탕이라는 이름과 구체적 형태는 선농단에 어원이 있다는 의견이 있으니 설렁탕을 무조건 몽골 요리라고만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9] 이런 세종대왕도 먹지 않은 고기가 있는데, 양고기다. 당시 조선에서 양고기가 나오지 않아 수입을 해야 했는데, 세종은 수입할 돈으로 더 많은 백성을 먹여살릴 수 있다며 거부한 것. [10] 사실 이건 어린 단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해줄 왕실의 여인들이 없었다는 점이 한몫했다. 물론 숙종 처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수렴청정을 받지 않은 사례도 있긴 하지만 이쪽도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가 살아있었던 상황이였기에 4세,5세 정도에 즉위 했더라도 수렴청정을 받을수 있는 상황이였다.[11] 소변이 쌀뜨물 같고 기름기가 많아 점성이 높은 상태. 당뇨병의 초기 증상이기도 하다.[12] 악명높은 합병증으로 망막병증이 있다.[13] 왕이나 왕족, 귀족 등이 죽는 것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14] 사실 황희에 경우 세종대왕이 쇼를 하며 감싸준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황희는 유능하지만 비리와는 영혼의 단짝처럼 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다보니 그만큼 참소도 많이 당했다. 세종대왕도 황희가 워낙 비리를 저질렀다는 걸 모를 리 없지만 그의 능력이 아깝기도 하고, 왕권에 위협을 직접적으로 가한다고도 할 수 없어서 황희가 은퇴하겠다고 해도 왕이 반대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줘 황희는 최소한 권력욕이 없어서 알아서 물러나려고 하는데 내가 계속 관직을 유지시키는 거니까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말라는 무언의 언급이나 마찬가지라는 의미다.[15] 3년상 치르다 줄초상 치르는 사례도 꽤 많았을만큼 3년상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16] 덧붙이자면 자녀복 많은 조선 왕조 군주 랭킹 5위다.[17] 석보상절석가모니를 다룬 책이다. [18] 후일 수양대군은 즉위 이후 두 책을 하나로 합쳐 월인석보(月印釋譜)로 펴냈다. 초창기 훈민정음으로 쓰인 것 뿐만 아니라 권1에 훈민정음 언해본까지 실려있는 국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책이다.[19] 게다가 이 패륜을 부추긴 것이 자기 형인 양녕대군이다. 세종대왕과 부왕인 태종이 은혜를 베풀며 잘 먹고 잘 살게 해줬더니만 원수로 갚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