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역대 후궁
1. 개요
조선의 후궁을 설명하는 문서.
이 중 이름이 알려진 경우는 태조의 후궁 화의옹주 김씨(김칠점선), 정종의 후궁 숙의 기씨(기자재), 태종의 후궁 서경옹주(금영)[1] , 혜선옹주 홍씨(가희아), 신순궁주 이씨(이정민), 단종의 후궁 숙의 권씨(권중비), 세조의 후궁 폐소용 박씨(박덕중), 성종의 후궁 귀인 엄씨(엄은소사)와 귀인 정씨(정금이), 연산군의 후궁 폐숙용 장씨(장녹수)와 폐숙용 전씨(전전비)와 폐숙원 김씨(김귀비), 폐숙원 최씨(최보비) 광해군의 후궁 폐소용 임씨(임애영)[2] , 인조의 후궁 상궁 이씨(이정민)[3] ,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장옥정),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성덕임), 고종의 후궁 귀인 이씨(이완덕)[4] 와 귀인 양씨(양춘기)와 삼축당 김씨(김옥기) 정도이다.
2. 태조
3. 정종
4. 태종
5. 세종
6. 문종
7. 단종
8. 세조
9. 성종
10. 연산군
11. 중종
12. 인종
13. 명종
14. 선조
15. 광해군
16. 인조
17. 효종
18. 숙종
19. 영조
20. 정조
21. 순조
22. 헌종
23. 철종
24. 고종
25. 관련 문서
[1] 이름이 금영인지 성이 김씨인지는 모름[2] 김개시가 광해군의 후궁인 걸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니다. 후궁이나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광해군은 그녀를 후궁으로 삼지 않았다.[3] 얼자출신 후궁으로 인조의 사랑을 받다가 정비 인열왕후의 미움을 받아 출궁한 이후 재혼까지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4] 고종의 세 귀인 이씨 중 광화당이라는 당호를 받은 이육의 생모이다.[5] 김해의 관기출신으로 이름은 칠점선이다. 태조의 막내딸 숙신옹주의 어미이다[6] 조선초기 내명부 품계로 3품이었다.[7] 의령옹주의 친모. [8] 이름은 기자재. 4남5녀를 낳음[9] 아들 하나를 낳음[10] 아들 하나를 낳음[11] 4남1녀를 낳음[12] 기생 출신이다. 양녕대군이 큰아버지의 애첩인 것을 모르고 가까이했으며 알고도 가까이했던 여인이다.[13] 정종을 모시던 시녀로 환관 정사징과 내통하였다고 한다.[14] 궁에들어오기 전부터 첩이였다[15] 화산군 장사길(張思吉)과 관기 출신인 복덕(福德)의 딸. 아버지가 공이 많아 기녀 복덕이 낳은 자녀를 모두 면천시켜주었다[16] 그녀가 심온의 외손녀라는 설이있다.즉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의 조카라는 소리다. 심온의 둘째사위인 강석덕의 딸이라는것인데 강석덕의 아들인 강희안이 1419년 생이고 딸은 그보다 어리다는 기록도 있어, 생년의 기록이 잘 맞지 않아 그녀가 심온의 외손녀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17] 간택후궁으로 입궁하며 장의궁주에 봉해진다.[18] 간택후궁으로 입궁하며 명의궁주에 봉해진다.[19] 천민에다 궁녀출신이다. 어린나이에 세종의 아낌을 받아 오빠인 홍유근도 세도를 부리려했다. [20] 조선초기 내명부 정5품이었으나 후에 정6품으로 바뀌었다.[21] 세종의 서장녀 정현옹주의 생모이다. [22] 조선초기 내명부 정6품이었으나 후에 종6품 상기로 개칭되었다.[23] 1430년 옹주를 하나 낳았으나 봉작도 받기 이전에 사망한다. 그녀도 1446년 소헌왕후가 사망하기 이전에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44년 음력 7월 10일에 벼락에 맞아 사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24] 원래 귀인이었으나, 단종이 즉위하면서 빈으로 승격되었다.[25] 세자의 후궁에게 내리는 품계로 종3품.[26] 원래는 사칙의 품계를 받았었다. 사칙은 세자궁 내명부 종6품으로 후에 수칙(守則)으로 개칭되었다.[27] 세자의 후궁에게 내리는 품계로 종4품.[28] 이름은 권중비(權仲非).왕비간택시 참여하여 최종 간택에서 후궁에 낙점되었다. 다른 후궁인 숙의 김씨도 마찬가지이다. 단종의 폐위 이후 아버지 권완이 정순왕후 송씨의 아버지인 송현수와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한 후 공신의 노비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 이후 세조 10년에 방면되었다.[29] 이쪽은 정순왕후 송씨나 숙의 권씨와는 다르게 아버지가 단종 복위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평온히 살았다고 한다. 게다가 병이 났을 때 무려 수양대군의 집에 피접을 나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수양대군과도 원만한 사이였던듯 하다.[30] 이름은 덕중으로, 임영대군의 아들인 구성군 이준에게 계속해 연서를 보냈고 구성군 이준은 그것을 세조에게 알렸다. 이로 인해 폐서인 되어 교형에 처해졌다.[31] 신숙주의 서녀이다.[32]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의 서조카[33] 해안군의 어머니[34] 덕양군의 어머니. 덕양군이 어릴때 사망[35] 경빈 박씨가 막내딸 혜정옹주 출산시기와 비슷하게 출산을 했다. 중종의 총애를 받는 경빈의 눈치를 보던 궁안 사람들은 몸 상태가 좋지않은 나씨를 궁밖으로 빼냈고 이에 나씨와 그녀가 임신중이던 왕자가 모두 사망한다[36] 정순옹주, 효정옹주의 어머니[37] 문정왕후의 둘째 오빠인 윤원량의 딸, 즉 문정왕후의 조카이다.[38]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사촌언니이다.[39] 동명이인이다.[40] 마찬가지로 동명이인이다.[41] 임해군과 광해군의 어머니[42] 인조의 할머니로, 인조 이후의 모든 왕들은 인빈 김씨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43] 1619년에 옹주를 하나 낳았다. 하지만 이 옹주는 5살때 아버지 광해군이 폐위되는 바람에 정식으로 옹주에 봉작되지 못했다. 폐출된 뒤 외삼촌의 집에서 살다가 광해군이 죽고 3년상을 치른 후인 25살 때 혼인을 하였다. 박징원에게 시집을 가서 2남3녀를 낳았고 1664년 4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44] 귀양간 광해군을 끝까지 귀양지에서 모셨다[45] 교태를 잘부리고 문서관리를 잘해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얼자출신으로 추정됨[46] 인빈 김씨의 조카이다.[47] 이름이 한보향[48] 인조 사후, 김자점의 옥사에 휘말려 폐서인 되어 죽었다.[49] 이름은 이정민. 인열왕후의 미움을 받아 출궁해서 재혼까지 했다. [50] 조선 역사상 마지막 후궁 출신 왕비였으며, 희빈 장씨 사후 숙종은 후궁이 왕비가 될 수 없도록 법제화시켰다. 아들인 경종이 즉위한 후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었다.[51] 영조의 생모로 드라마 동이가 그녀의 일생을 다룬 드라마이다.[52] 숙종의 후궁들 중 유일한 간택 후궁.[53] 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정조의 할머니.[54] 2명의 딸을 낳았다[55] 사도세자와 관련하여 정조 즉위 이후 유배되어 사사되었다.[56] 본명은 성덕임, 정조의 첫사랑으로 알려져있으며 후궁들 중 유일한 승은 후궁으로 정조를 15년이나 기다리게 만들었다.[57] 순조의 유일한 서녀인 영온옹주의 생모이다. 옹주는 건강치 못했고 그때문에 말을 잘 하지 못해 이복오빠인 효명세자가 안타깝게 여겼다 한다.[58] 헌종이 사망했을 당시 그녀는 17살의 어린나이[59] 궁녀출신. 1848년 딸을 하나 낳았지만 출산 당일 사망함. 1814년생으로 헌종보다 13살이나 연상.[60] 1854년 철종의 서장자를 낳음. [61] 1859년 서2남 출산 1861년 서3남 출산 [62] 1850년 서장녀 출산, 1853년 서2녀 출산[63] 1856년 서3녀 출산[64] 3명의 옹주를 낳은것으로 추정됨[65] 서5녀 출산[66] 보통 '엄귀비'라 불리는데, 그녀는 '귀비'가 아니라 '황귀비'였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잘못된 호칭이다.[67] 완화군 이선의 생모이나, 아들인 완화군은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68] 의친왕 이강의 생모이다. 생몰년도가 정확하지 않으나 궁인으로 있다가 아들 의친왕이 10살 때 사망했다고 전해지며, 1906년(광무 10년)에 귀인으로 봉작되었다. 아들도 낳았으나 당호를 받지 못했다. [69] 고종의 서4남인 이육을 낳았다. 왕자는 3살의 어린나이로 사망한다 [70] 고종의 막내아들 이우를 낳았다. 이우 왕자는 어린시절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다[71] 명성황후가 살아있던 시절 고종의 딸을 하나 낳는데 역시 어려서 사망한다. 딸은 낳은 그녀도 당호를 받았는데 의친왕의 생모인 귀인 장씨가 당호를 못받은 것은 견제라고 볼수 있다[72] 덕혜옹주의 생모이다.[73] 1890년 ~ 1970년. 마지막 승은 상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자식을 낳지는 못했지만 고종 사후 순종(당시 창덕궁 이왕)에 의해 삼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 받았다.[74] 인터넷을 찾아보면 고종의 후궁 중에 상궁 염씨가 기재되어 있는 정보가 많은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참고로 고종의 딸을 자처한 '문용옹주' 이문용이 생모라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염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