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 비/결혼 전
1. 친정 집안과 조상
1966년 9월 11일, 부친 가와시마 타츠히코(川嶋辰彦)와 모친 가와시마 카즈요(川嶋和代)[1] 의 1남 1녀 중 첫째로 시즈오카에서 태어났다.
가와시마 가문은 대대로 '''학자, 교수, 의사 등이 많이 나온 학구적인 집안'''이라고 한다. 타츠히코는 가쿠슈인 대학 경제학부 교수를 지낸 이름 높은 경제학자이며, 7살 아래의 남동생 가와시마 슈(川嶋舟)는 수의사이자 도쿄농업대학 강사이다.
할아버지 가와시마 타카히코(川嶋孝彦)는 관료이자 내각통계국장을 지냈다. 증조부 가와시마 쇼이치로(川嶋庄一郎)는 가쿠슈인의 교수였다. 할머니는 가와시마 이토코(川嶋紀子)로, 손녀와 같은 한자를 쓴다. 할머니를 닮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지었다고. 이토코는 시집 가는 손녀에게 '남편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고 섬기도록 해라'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토코의 아버지는 이케가미 시로(池上四郞)인데, 후쿠시마현 출신으로서 보신전쟁을 겪었으며 제6대 오사카시 시장을 지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제6대 정무총감을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2.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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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3월, 생후 6개월의 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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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5월, 생후 8개월의 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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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7월, 생후 10개월의 키코. 외할머니 스기모토 사카에코(杉本榮子)[2] 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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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8월, 생후 11개월의 키코. 친척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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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6살 때의 키코. 미국에서 살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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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7살 때의 키코. 시치고산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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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외국 생활을 오래 하여[3] 외국어에 능통'''하다는 점에서 손윗동서인 마사코 황태자비와 비슷하다.[4][5] 타츠히코가 펜실베니아 대학교 대학원에 유학하게 되어, 가와시마 일가는 1967년 9월부터 1973년 여름까지 '''미국'''에서 살았다.
귀국한 후 가와시마 키코는 초등학교를 몇 군데 옮겨 다니다가, 아버지가 가쿠슈인 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어 1976년 4월부터 가쿠슈인 초등과 4학년으로 편입학했다. 한 학기를 다닌 후 가와시마 일가는 다시 외국으로 떠났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였고, 키코는 '''영어'''에 이어 '''독일어'''에도 능숙해졌다.
가와시마 일가는 1979년에 귀국했고, 키코는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에 편입학했다.[6] 이후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를 거쳐 1985년 4월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심리학과'''에 입학했다.
학창 시절의 가와시마 키코는 밝고 명랑한 성격에 우수한 학생이었으며, 공부도 운동도 모두 잘 했으며 노력파였다고 한다. 명문학교인 가쿠슈인에 우수한 성적으로 편입학했고, 외국에서 오래 살다 왔기에 다소 서툴렀던 국어(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승마, 테니스, 스키, 등산 등을 능숙하게 즐겼고, 봉사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또한 키코는 예쁘고 청순한 외모로 남학생들에게 인기도 많았다.[7] 고등학교 시절 축제 날에는, 전화번호를 끈질기게 묻는 와세다대학 남학생에게 엉뚱한 번호를 적어 준 적도 있다고. 친구들은 키코에 대해 "차분하고 기품 있었지만, 은근히 장난기도 많았다"고 증언한다. 가끔 종례 전에 학교를 몰래 빠져나가 음료수를 사와서, 친구들과 나누어 먹기도 했다고 한다.
3. 후미히토 친왕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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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코는 '''가쿠슈인 대학에서 1년 선배인 후미히토 친왕을 만났다.''' 후미히토 친왕은 당시 법학부 정치학과 2학년이었는데, 그가 자주 이용하던 교내 서점인 세이분도(成文堂)에 신입생인 키코가 드나들자, 서점 주인이 후미히토 친왕에게 "가와시마 타츠히코 교수님의 따님입니다."라고 키코를 소개했다고. 그 뒤로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는 캠퍼스 커플이 되어 테니스, 자연문화연구회 등의 동아리 활동들을 함께 하며 교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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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나루히토 황태자가 먼저 결혼하기를 기다렸지만, 나루히토 황태자의 결혼 문제는 거의 진척되지 않았다.[8] 기다리다 못한 후미히토 친왕은 가쿠슈인 대학 근처 횡단보도의 신호등 아래에서 키코에게 청혼했다. 이 사건은 일명 '''신호등 아래의 청혼'''으로 당시에 큰 붐을 일으켰다.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가 1959년 황실로 시집올 때 '미치 붐(ミッチーㆍブーム)'이 일었던 것처럼 '''키코 붐'''도 크게 일었다. 또한 당시 후지 테레비에서는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의 만남, 교제, 결혼 과정을 <헤이세이의 신데렐라 키코 님 이야기(平成のシンデレラ紀子さま物語)>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으로까지 제작하여 방영하기까지 했다. 저 부부의 현재 모습을 아는 상태에서 보면 미화로 떡칠(...)이 되어 있지만, 보고 싶은 위키러들을 위한 링크. 1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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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결혼식 전의 모습. 당시 후미히토 친왕은 24세, 키코는 2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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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두고서 아버지 타츠히코 교수, 어머니 카즈요와 함께. 소매가 바닥까지 닿을 듯 치렁치렁한 후리소데(미혼 여성의 예복)를 입은 키코와, 짧은 토메소데(기혼 여성의 예복)를 입은 카즈요의 모습이 대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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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문
윗문단 이야기(즉, 공식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만 읽으면 아름답고 예쁘기만 한 사랑 이야기이지만, 두 사람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뒷이야기들도''' 많다. 사실 가와시마 키코는 후미히토 친왕의 친구의 여자친구였는데 후미히토 친왕이 빼앗았다는 설,[9] 후미히토 친왕은 난봉꾼이며 함께 활동했다는 동아리는 사실 그의 하렘이었다는 설[10] , 심지어 결혼 전에 두 사람이 낙태를 몇 번 했고[11] , 후미히토 친왕은 키코를 그저 잠시만 데리고 놀다가 버릴 생각이었는데, 키코의 아버지 타츠히코 교수가 강력하게 항의하여 겨우 결혼이 성사되었다는 설 등등.
또한 두 사람이 대학에서 처음 만나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고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사실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알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쿠슈인 고등과(남고)[12] 시절 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후미히토 친왕은, 인근 몇 군데의 명문 여고에 "예쁜 여학생들의 사진을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다른 학교들은 모두 거절했지만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에서만 그 요구에 응하여 몇몇 여학생들의 사진을 제출했는데, 그 가운데 가와시마 키코의 사진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도 키코는 '''스스로 원하여 황실로 시집을 왔다'''고 한다. (시어머니 및 형님과 크게 다른 점. 아니, 완전히 정반대이다.) 키코는 후미히토 친왕을 만나 그가 왕자임을 알고 난 후, 말씨를 그때까지 쓰던 보통의 말씨에서 일본 황실 특유의 말투로 싹 바꾸었다고 한다. 즉, 그때부터 황실로 시집갈 것을 작정했다는 의미.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와 달리 황실 생활에 잘 적응하며 시부모와 원만하게 지냈다지만, 결혼 전에는 미치코 황후로부터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카즈요와 키코 모녀는 결혼을 앞두고 예비 사돈/예비 시어머니인 미치코 황후를 찾아뵈었다. 이 때 차가 나오자 카즈요는 키코의 앞에 찻잔을 놓아주었는데, 미치코 황후가 큰 목소리로 꾸짖었다. "딸이 어머니에게 시중을 받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감히 어머니에게 시중을 받다니, 이러면 안 됩니다!!"라며 모녀를 한참 나무랐다고.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가 1959년 황실로 시집올 때 '''장갑''' 문제로 호되게 당한 이야기는 유명하다.[13] 재벌[14] 이지만 평민[15] 신분이었던 쇼다(正田) 가문은, 황족 & 화족들이나 쓰는 긴 장갑(오페라 글러브)을 구하지 못해 무척 애를 먹었다. 그리고 키코가 황실로 시집오던 해는 1990년. 이때는 백화점 등에서 얼마든지 황실용 오페라 글러브를 구입할 수 있었다. 당시 키코가 구입한 오페라 글러브는 2,000엔이었다. 그런데 타츠히코 교수는 이 장갑 가격 2,000엔의 대금을 황실에 청구했다. "딸이 황실에 시집가서 사용해야 할 물건이니, 황실에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당시 타츠히코 교수의 연봉이 800만 엔이었다고. 이에 사돈인 미치코 황후는 몹시 황당해했다고 한다.[16]
'''결혼 후에도 잡음은 존재'''한다. 즐거운 가족 모임 도중에 후미히토 친왕이 만취하여 시녀를 희롱하는 등 술주정을 부려 분위기를 깼고, 나루히토 황태자가 이를 꾸짖었으나 후미히토 친왕은 오히려 형님에게 대들었다. 사야코 공주가 달려와 험악한 분위기의 큰오빠와 작은오빠를 간신히 뜯어말리는 험악한 와중에, 당시 새댁이었던 키코 비는 남편의 그런 포악한 행동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고 한다.[17] 게다가 '''후미히토 친왕은 태국인 여성과 바람을 피웠으며'''[18] , 2003년 차남 일가가 태국 순방[19] 을 갔을 때도 그 태국인 여성을 만났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키코 비는 이를 참으면서, 순방 일정 내내 억지로 미소를 지어야 했다고 한다. 태국 여성과의 바람 외에도 후미히토 친왕은 수없이 많은 염문을 뿌렸으며,[20] 사생아가 있다는 소문도 있다.
또한 언젠가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의 결혼기념일에 한 방송사에서 그들 부부의 얼굴 모양으로 케이크를 만들어 선물했는데, 키코 비가 케이크 상자를 열어보지 않더란다. 왜 그런가 물으니 "전하께서 열어보시지 않았는데 어떻게 제가 먼저 열어 보겠어요…"라고. 심지어 남편의 코트를 일일이 다 입혀주는 모습, 키[21] 도 훨씬 큰 남편을 위해 하녀처럼 우산을 들어주는 모습의 사진들을 보면… '''일본 황실의 보수성과 남존여비'''도 대단하지만, 그런 고통을 다 견디고 살며 늦은 나이에 기어이 아들을 낳고야 만 키코 비도 대단하다.
5. 결혼과 화젯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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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에 약혼 발표 기자회견을 했다. 당시 시할아버지인 쇼와 덴노의 상중(喪中)이라서,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과 가와시마 키코는 검은 옷을 입어야 했다. 청록색으로 보이는 것은 옛날 사진이라서 화질이 구리기 때문.
상중에 약혼 발표를 하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좋지 않은 여론도 있었으나, 시집와서 황실에 잘 적응하여 열심히 사는 키코 비의 모습 덕에 그러한 여론이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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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날 아침, 아버지 타츠히코, 어머니 카즈요, 남동생 슈의 배웅을 받으며 정든 친정을 떠나는 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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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날. 사진 속에서 키코 비는 남편 후미히토 친왕의 머리를 다듬어주고 있는 모습. 그런데, '''감히''' 남편의 머리에 손을 댔다고 비난을 당한 사진이라 한다. 마냥 행복해 보이는 키코 비와, 당황한 듯한 후미히토 친왕의 표정 대비가 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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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6월 29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키코는 가쿠슈인 대학 대학원생이었고, 결혼 후 황족으로서의 공무(公務)[22] 와 육아를 병행하면서도 전공인 심리학 공부를 계속했다. 1995년에 심리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2013년에는 국립 오차노미즈여자대학에서 인문학 박사학위[23] 를 받았다. 수어에도 능통하여, 수어 관련 공무도 하는 등 자주 활용하고 있다.[24]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에 이은 평민 출신의 비(妃)'''로서 화제가 되었다. 결혼 전까지 키코는 가쿠슈인 대학 교직원용 아파트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는데, 일명 '''3LDK의 공주님(3LDKのプリンセス)'''[25] 이라고 떠들썩하게 알려졌다. 그리고 당시 키코의 친정에는 TV가 없어, 가와시마 가문의 독특한 교육 방침도 화제가 되었다.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의 결혼 당시 신문기사
결혼하여 가장(家長)이 된 후미히토 친왕은, 태어나서 결혼 전까지 써 오던 칭호#s-3(稱號) '아야노미야(禮宮)' 대신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라는 궁호(宮號)를 새로 받아, 아키시노노미야 미야케#s-3(황족 가문)를 창설했다. 이에 후미히토 친왕과 그의 처자식은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로 불리게 되었다.[26]
[1] 결혼 전의 성씨는 스기모토(杉本). 스기모토 가문에는 하급 사무라이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2]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카에코의 종교는 창가학회이지만, 창가학회 신자라는 것은 위장이며 실상은 크리스천이라는 소문도 있다. 외손녀 키코에게 성경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3] 그 때문에 귀국 후 일본어가 서툴러 고생했다고도 한다. 이렇게 외국에서 태어나거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귀국한 사람을, 일본에서는 귀국자녀라고 부른다.[4] 다만 하버드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 유학까지 한 마사코 황태자비와 비교할 수는 없다. 2015년 필리핀의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대통령이 방일하여 일본 황족들과의 만찬회에서 영어로 연설했는데, 황족들은 모두 일본어 번역문이 적힌 종이를 읽고 있었다. 반면 마사코 황태자비는 필리핀 대통령의 연설을 똑바로 고개를 들고 쳐다보며 들어, 다른 황족들과 비교가 되었다(…).[5] 여담으로 이때 키코 비의 작은딸 카코 공주가 첫 만찬회 데뷔로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 갓 성년(만 20세)이 된 그녀는 영국 유학 중인 언니 마코 공주 대신 많은 공식 석상에 참석해 아름다운 외모로 주목받으며 인기가 높았다. 또한 그해 4월, 영어 교육을 많이 시키며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 많은 국제기독교대학에 입학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카코 공주가 필리핀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대통령의 영어 연설 내내 일본어 번역문만 보고 있어, "카코 공주가 영어를 못 하는 것 아닌가"라는 말이 나왔다. 이에 대해 궁내청에서는 "연설 후 티타임에서는, 카코 공주가 능숙한 영어로 대화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후에 나오는 뉴스들을 보면, 카코 공주의 영어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은 듯하다.[6] 1982년 3월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담임 선생님은 반 학생들에게 각자 메세지를 적게 했는데, 키코는 "무지개 저 편으로 가자!!"고 썼다. [7]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의 키코 비는 정말 예뻤고, 자연스럽고 해맑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일본 황실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점점 억지스러운 미소와 좋지 않은 인상으로 변했다.[8] '일본 황태자의 아내'라는 '''부담이 무지막지할 것이 분명한''' 결혼이니, 결혼 적령기의 상류층 처녀들이 죄다 외국으로 도망가는 등 기피했기 때문이다. 키코 비의 아들 히사히토도 비슷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9] 기자회견 자리에서 "지금의 남편이 첫사랑이신가요??"라는 질문을 받자, 키코 비는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다가 "네."라고 대답했다고. 한편 그녀가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 시절, 손수 만든 쿠키를 도쿄대학 대학원 남학생에게 선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0] 후미히토 친왕은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발견하면, 꼬붕을 시켜(…) 그 여학생을 동아리에 가입시키도록 했다고 한다. 가와시마 키코도 그러한 여학생들 중의 하나였으며, 그녀들 중에서 끝까지 남은 사람이 키코였다는 것이다. 물론 세간에는 '테니스 클럽'이니 '자연문화연구회'니 하는 이름의 동아리로 알려졌다. 원래 일본 명문대에서는 테니스 클럽을 빙자한 불량 동호회에서 지저분한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11] 이미 가쿠슈인에서부터 2번 낙태했다고 소문이 파다했다. 덧붙여 어떤 점술가에 의하면, 키코 비는 원래 3남 2녀를 낳을 팔자였다고 한다. 흠좀무. 왕자의 결혼이 속도위반이었다가는 왕실 체면이 말이 아니니, 이 때 아이를 가졌더라도 제때 결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12] 가쿠슈인의 중고등학교 과정은 남중/남고, 여중/여고로 나뉘어 있다. 대학은 가쿠슈인 대학(남녀공학)과 가쿠슈인 여대가 있다.[13] 시할머니 고준 황후(나가코)도 황태자비 시절, 장갑 때문에 자신의 시어머니 데이메이 황후(사다코)로부터 꾸중을 들은 적이 있다.[14] 아시아 최대의 제분회사인 닛신(日淸) 제분을 운영하고 있다. 창업주는 미치코 황후의 할아버지인 쇼다 데이이치로(正田貞一郞)이며, 이후 경영은 아버지 쇼다 히데사부로(正田英三郞)를 거쳐 지금은 남동생 쇼다 오사무(正田修)가 맡고 있다.[15] 다만 미치코 황후의 친가인 쇼다 가문은 평민이지만, 외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옛 화족(백작) 가문이었다.[16] 다만 이 부분은 황당한 일이라기보다는, 아버지 카와시마 교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제 딸을 가지고 놀다 버리는 파렴치한 짓을 하고도 모른 척 하려 했던 황실에 대한 분풀이의 하나로 보는 게 옳다는 시각도 있다. 위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결혼 비화가 비화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카와시마 교수가 두 사람이 사귀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도, 가쿠슈인 내에 낙태설이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고, 심지어 후미히토 친왕이 자신의 딸을 데리고 놀다 버리려고 했다는 이야기까지 돈다는 것마저 모두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가만히 있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당장 딸을 이런 식으로 망쳐놓고 나 몰라라 하는 놈팽이를 가만 둘 부모는 세상천지에 없다. 황실이니까 이쯤에서 끝난 거지.[17] 대략 1990년대 초반, 그러니까 마사코 황태자비가 시집오기 전,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의 첫째 마코 공주가 아기였을 때의 이야기라고 전해진다.[18] 이때도 키코 비의 친정아버지 타츠히코 교수는, 궁으로 쫓아와 사돈 아키히토 덴노 등에게 사위의 만행(!)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고 한다.[19] 당시 가쿠슈인 초등과 6학년이던 마코 공주와 3학년이던 카코 공주에게는 첫 해외 순방이었다.[20] 후미히토 친왕과 다카라즈카 가극단 여배우의 염문설이 돌았던 적도 있다. 그 와중에도 후미히토 친왕은 아내 키코 비와 함께 다카라즈카 가극단 공연을 관람하는 공무를 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다. 더욱 우스운 일은, 후미히토 친왕의 생모로 거론되는 여성도 다카라즈카 단원이었다는 것.[21] 후미히토 친왕이 178cm, 키코 비는 162cm라고. 실제 후미히토 친왕은 現 일본 황실에서 가장 키가 크다.[22] 황실과 갈등하며 심신의 병을 앓아 오랫동안 공무를 하지 못하고 칩거한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와 대조적으로, 키코 비는 공무를 열심히 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2006년 히사히토 친왕을 낳은 후 차남 부부는 더욱 이런저런 공무 자리에 얼굴을 내밀며 존재감을 높이고 있으며,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도 자라면서 점점 부모의 공무에 동반하는 일이 늘고 있다.[23] 키코 비가 석사학위와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이유에는, 학구열뿐 아니라 열등감 때문도 있다고 한다. 황족들 중에는 해외 명문대학에서 공부한 이들이 많은 반면, (가쿠슈인 대학도 좋은 대학이지만) 키코 비는 해외 대학에 유학한 경험이 없기 때문. 한편 키코 비의 박사학위 논문은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지 않고, 오차노미즈 여대에서도 비공개(열람 금지)라서, 그에 대한 의혹의 말들이 있다고 한다.[24]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도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수어 관련 공무를 많이 하고 있다.[25] 방 3개에 거실(living room), 식당(dining room), 주방(kitchen)을 갖춘 집. 당시 가와시마 일가가 살던 집이 작아서, 혼수품을 놓아둘 공간이 없어 애먹었다고 한다.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처럼, 키코 비도 혼수깨나 들고서 시집왔다고.[26] 일본 황족들은 성씨가 없지만, 칭호#s-3나 궁호를 성씨처럼 쓰기도 한다. (학교에 다닐 때나 직장생활을 할 때)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노리노미야 사야코, 도시노미야 아이코 등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