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배경

 


1. 개요
2. 태평양 전쟁 이전의 일본 상황
2.1.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3. 일본의 중국 침략에 따른 국제사회의 압력
4. 일본의 남방 진출에 대한 경제제재 확대
4.1. ABCD 포위망과 미국의 대일 석유수출 금지
5. 일본이 미국에 대한 선공을 결정한 요인들
5.1. 미국의 고립주의
5.2. 파죽지세의 동맹 나치 독일
5.3. 미국 여론에 대한 오판과 미국에 대한 과소평가
6. 일본의 대미 개전 준비
7. 만약 일본이 미국이 아니라 소련을 쳤다면
8. 그럼에도 미국을 공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1. 개요


일본의 군부는 연합국에게서 조건부 항복을 끌어내려 했습니다. 조건부 항복을 끌어내려면 연합국에게 한번은 심한 타격을 줘야 한다는 게 일본의 생각이었어요. 그 후에 평화협상을 하려 한 거죠.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 기획 다큐 5부 태평양 전쟁' 中 켄 고타니(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강사)


1931년 이후 일본의 팽창은 경제적 자급, 군사적 안보, 동아시아에 대한 리더십의 욕구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1940년이 되어도 중국과의 전쟁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자 일본은 야심을 식민 강대국들로 넓혔다(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얼마전 동맹국인 독일에게 패했고, 영국은 독일과 전쟁 중이었다.). 또 다른 원료 자원과 시장을 확보함으로써 점차 관계가 악화되고 있던 미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1940년 9월,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했고 미국은 즉각 일본으로 향하는 모든 철강 원료를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한편 1939년 노몬한에서 소련에 참패한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주요 적국으로 간주해 온 소련과 중립 협약을 맺고 동남아시아의 나머지 유럽 식민지 점령을 준비했다. 그러나 일본은 우선 미국의 반격에 대비해 손을 써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41년 12월 7일 새벽,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해 미 태평양 함대 일부를 파괴했다.
일본은 세계최대의 산업 강국과 맞섬으로써 평화협상에서 동아시아에 대한 자신의 패권을 인정받으려고 했다.

- '아틀라스 일본사', p. 150


2. 태평양 전쟁 이전의 일본 상황


러일전쟁 직후의 일본은 워낙 승리가 화려했던 탓에 외부적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애초에 중공업 생산 기반이 변변찮고, 농업 기반의 국가였던 당시의 일본은 스스로 해결 불가능한 수준의 막대한 전비와 후유증을 떠 안게 되었다. 몇 년치 예산에 해당하는 전비를 쏟아부었는데, 그 돈의 대부분은 영국과 미국에서 차관(빚) 형식으로 들어왔다. 무엇보다 러일전쟁의 결과가 일본의 승리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일본이 완전히 이긴 것도 아니어서 장기적으로 가면 불리하다는 애매한 상태로 종결되었다. 러일전쟁의 종전을 논의하던 포츠머스 회담에서 러시아측 대표인 비테 남작은 일본 대표단에게 "'''우리는 어려운 국내 사정[1] 때문에 전쟁을 끝내는 것이지, 결코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라고 윽박지르며 배상금을 못주겠다고 버텼으며, 일본 대표단도 러시아가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는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서구열강들에게 "돈이나 밝히는 신생 국가"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위신상의 문제가 겹쳐 배상금을 요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으로 '전쟁을 이기면 배상금으로 소비된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서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국민들은 배신감을 느꼈으며, 이는 삼국간섭때와 같은 서구 열강에 대한 반발과 히비야 방화 사건과 같은 과격한 행동들을 불러왔다. 아무튼 러시아는 배짱을 튕기며 단 한푼의 배상금도 지불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에 대한 지배권, 남만주의 이권을 확보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러일전쟁 항목을 참고하도록 하자.
하지만 러일전쟁을 끝낸 포츠머스 회담도 미국의 영향력이 뒷받침된 것이었고, 일본 내에서도 "우리가 러시아를 상대로 더 많은 전리품을 얻어낼 수 있었는데, 미국이 압력을 넣어서 차지하지 못했다."라는 반미감정이 싹 텄으며, 그로 인해 일본도 1907년부터 제국국방방침을 정해서 미국을 2순위 적국으로 삼고서 육해군이 매년 연도작전계획을 작성하는 등 미국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링크 그러니까 일본이 1941년에 일으킨 진주만 공습으로 대표되는 미국과 일본의 전쟁은 이미 34년 전부터 그 싹이 트고 있었던 셈.
그 와중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연합군에 참전은 했지만 유럽 반대편에 있던 국가라서 독일령 뉴기니의 일부[2], 독일령 칭다오를 점령한 것 말고는 군수공장 역할만 충실히 수행했다[3] 덕분에 1차대전 종전이후 승전국으로서 세력 확장은 물론이고 전후에는 호황세에 접어들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시작되는 등 안정세를 되찾는 듯 보였고, 1921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참여하는 등 열강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잠깐 반짝이던 일본 경제는 그 전후호황이 투기광풍으로 변질되어 급기야 버블붕괴로 막을 내렸으며, 관동 대지진의 뒤치닥꺼리를 하다가 쇼와 금융공황로 은행업계가 초토화되는 등 잠시도 쉴 새 없이 악재만 이어졌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금본위 복귀를 내세운 입헌민정당이 집권하여 체질개혁을 단행코자 막대한 출혈을 감수하며 금본위제 복귀를 밀어붙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미국과 영국이 제각기 금태환 중단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위정자들은 계속 고집을 부려 금본위제 존속을 천명했고 엔화는 환율 투기꾼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정부와 군부, 국민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일본은 1928년부터 보통선거를 시행하는 등 제한선거를 폐지하고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흐름으로 가고 있었다. 국제경제적 위기나 관동 대지진과 같은 사건으로 민생이 크게 개선되지 못했으며, 삼국간섭때부터 지속된 해외 열강에 대한 반감 등으로 정부의 권위가 하락하고 반대급부로 군부에 대한 지지가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4] 급기야 관동군이 내각의 통제를 정면으로 무시하고 침략전쟁을 벌인 만주사변이 일어나게 되었으나, 사건을 되돌리력고 노력했던 정부의 의지와는 달리 당시 도쿄대학 대학생의 88%가 이를 정당하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정부와 국민의 의견대립이 큰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만주사변이 대단히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만주 정복이 순식간에 완수된 까닭에 군대의 정치적 입김과 파워는 더더욱 막강해져 결국 5.15 사건(이누카이 쓰요시 암살)으로 헌정이 붕괴되고 2.26 사건에서 황도파 쿠데타를 진압했던 통제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완벽한 군국주의 파시즘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2.1.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레이트 게임을 알 필요가 있다. 남진하는 러시아와 이를 막으려는 영국. 극동으로 내려오는 러시아을 막기가 곤란한 영국은 미국에 의해 개화된 일본을 도와 러시아와 맞서게 한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영국 군함으로 싸워 승리하고, 러시아 함대가 수에즈 운하 통과하는 것을 일본에 정보를 준 것도 영국이다. 영국은 일본이 러시아와 맞서고, 북쪽으로 진출하기를 바라고 있었으나[5], 러일전쟁의 패배와 혁명으로 러시아는 만주의 이권싸움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리고 일본은 만주를 차지하며, 중국 또한 대청제국이 무너지고 국민정부가 탄생함으로서 판도가 바뀌게 됐다.
다나카 내각 이래로 일본은 계속 중국에 개입하며 일본의 권익 옹호를 위해 여기저기 찔러보다가 제남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고 1928년 황고둔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에게 밀려 만주로 쫓겨오는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을 암살하기까지 했다. 장쭤린은 평소에 일본에 굉장히 협조적인 인물이었음에도 만몽에 대한 권익으로 눈이 뒤집힌 일본은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었다.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은 동북역치로 국민정부에 합류했음에도 여전히 친일정책을 유지하였는데 결국 이시와라 간지 등 일부 맛탱이가 간 관동군 장교들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했고 1932년 괴뢰국 만주국을 세워서 만주를 사실상의 식민지로 만들었고, 1933년 열하사변을 일으켜 열하성을 침탈했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만다. 물론 이 과정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만주사변-열하사변을 통해 너무도 손쉽게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만몽에 이어 화북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서 계속 중국을 찌르며 도발하고 있었다. 이중에는 하매 협정진토 협정의 체결, 친일파 인루겅을 내세운 기동사변과 쑤이위안 성을 노렸던 수동사변, 푸젠 성 침탈을 노렸던 폭동 사주 등이 있었다. 그러다가 총알 몇발 날아온 걸 핑계로 찔러본 것이 루거우차오 사건이었는데... 그동안 일본에는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하면서 공산당 토벌에만 혈안이 되있다는 비난[6]을 듣다가, 서안 사건으로 감금당하는 굴욕까지 겪었던 장제스 국민당 주석은 태도를 바꿔서 전면적인 대일항전을 선언하였다. 장제스는 루산성명을 통해 전 중국이 힘을 합쳐 일본에 항전할 것을 선포했고 일본군은 중국군의 차원이 다른 저항에 직면했다. 3개월이면 지나의 항복을 받아내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일본은 3개월이 지나서 상하이를 겨우 점령했을 뿐이었고 3차례나 증원군을 파견해야 했을 정도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뜻밖의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눈이 뒤집혀져서 확전하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무서운 줄 모르고 감히 저항하는 건방진 지나를 응징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으로 몰려가 대량 살육을 저질렀고 중국과 일본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중화민국과 일본제국 사이에서 최후에 시도된 화평 교섭인 트라우트만 공작 역시 승리에 도취된 일본 제국이 모든 점령지를 일본의 사실상 식민지로 할양하고 중화민국에게 괴뢰국가로 전락할 것을 강요하는 통에 뒤집혀서 외교적인 조기 종전은 물건너갔고 군사적인 종결 역시 국민혁명군의 결사적인 저항과 보급, 병참에 취약한 일본군 스스로의 한계로 인한 공세종말점 도달 및 이후 구체적인 전략의 부재로 전쟁을 끝낼 수가 없었다. 상하이를 포함한 서부연안지대를 점령하고 우한광저우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으나, 병력과 물자의 한계에 부딪혀서 더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일본군은 수차례나 국민정부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중국 서부 오지에 대한 무리한 공세를 감행했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1939년에는 격파하기는 했으나, 중국군의 거센 공세를 받기도 했다.. 이에 일본에서는 정치적 공작으로 중국을 분열시키기 위해 고노에 담화라는 것을 발표, 수도가 함락된 중화민국 정부는 일개 지방군벌에 불과하며 일본과 화평을 할 성의가 보이지 않느니 앞으로 인정하지 않고 말살에 나설 것이라는 '''일방적 설정'''을 발표하며 대화 창구를 닫은 다음에 왕징웨이 공작을 통해 국민당의 명목상 2인자 왕징웨이를 내세워 괴뢰정부를 세웠다. 이렇게 하면 자기네가 지방 군벌에 불과하다고 '''설정'''한 국민정부는 붕괴되고 군벌들이 일본군의 편에 줄줄이 붙을 줄... 알았는데 중국인들이 일본인들의 뇌내망상대로 움직여줄 리가 없었고 오히려 장제스의 국민정부의 권위만 더 증대되었다. 대화 창구도 닫아버리고 항전파의 입장만 더 공고히 해준 덕분에 중국에서의 전쟁은 더욱 장기화되었다. 1944년 일본군은 병력과 물자를 긁어모아서 대륙타통작전을 시행하여, 화중, 화남의 곡창지대를 점령하고 국민당 정부가 위치했던 충칭 인근까지 도달하면서 중국군에 심대한 피해를 주었지만, 전쟁 자체를 끝내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거대한 점령지 통제와 어마어마하게 넓은 전선을 관리하기 위해 그간 소수정예를 추구하던 일본군은 걷잡을 수없이 거대해졌고 때문에 천문학적인 군사비가 필요하게 됐다. 이런 식으로 엄청난 돈과 목숨을 투입하다보니 이젠 발을 뺄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너무도 광활한 점령지에 비해 파견 병력이 적었기에 일본군이 미처 섬멸하지 못한 국민당 유격대와 잔여 병력 및 지방 정부가 지방을 통치했고 화북에서는 공산당이 치안 공백을 틈타서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일본군은 사실상 점(도시)과 선(철도)을 연결한 지역만을 겨우 통치하고 있었다.
일본의 남진에 자극받은 미국이 대일석유수출을 금지하자 일본은 미국에 대한 전의를 불태운다.

3. 일본의 중국 침략에 따른 국제사회의 압력


중국에 대한 계속 침략으로 가뜩이나 안 좋은 시선을 받던 일본은 난징 대학살 등 온갖 전쟁범죄에 앞장선 결과, 국제적인 압력을 받는다.
무엇보다도 거대한 영토와 인구와 각종 자원이 풍부한 중국은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최대의 소비시장으로 모든 서구 열강이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지역이다.[7] 중일전쟁 이전까지는 만주 지역에서 러시아 제국을 저지하며 일본이 만주의 이권을 얻고 중국 시장에서 영국이나 미국 독일 등이 이득을 보는 식으로 상생관계가 이어졌으나, 일본이 만주를 획득한 후 중국으로 손을 뻗으며 이런 관계에 금이 생겼고 중일전쟁으로 깨지고 만 것이다. 상징적으로 당시 중국에서 가장 번성했던 상하이는 영국, 미국, 프랑스 자본이 수십년 동안 막대한 돈을 투자해서 개발한 지역이었는데 일본군이 여길 박살을 내버렸다. 또한 일본군은 국민당의 주요 무기 수입처인 버마 로드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봉쇄하기 위해 무리하게 하이난 섬을 공격했고 중불국경을 폭격함으로 프랑스의 재산과 인명 손실까지 야기하여 영불의 어그로를 끌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 3공화국은 크게 화를 내며 일본의 압력 때문에 설정했던 대중국 무기 수출 제한을 풀어버렸고 중불국경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일본과 영국, 미국의 사이가 틀어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영국이 중국의 항전을 지원한다는 말이 일본 내에서 나돌며 반영감정이 솟아났다. 이를 시작으로 텐진에서 영국 조계를 포위한 채 통행하는 영국인을 일본 군인이 옷을 벗기며 수색함이 드러나자 영국 내에서도 반일감정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영국은 독일이 체코를 합병하는 상태에서 시시한 문제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고, 일본이 제안하는 모든 항목을 수락하며 중국에 대한 어떠한 원조도 하지 않겠다는 조약을 맺고서 이는 일단락 되는듯 했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진행되며 해안지역을 일본이 점령하는 등 일본의 승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영,프,미는 자국의 시장 점유를 사수하기 위해 경제차관이나 무기 판매 등 여러 방법으로 중국 지원을 늘리고 있었다. 반면 일본 입장에서는 중국이 당장 항복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니 전쟁을 끝낼 수도 없고, 그런데도 중국이 항복하지 않고 전쟁이 장기전으로 흘러가며 경제재제, 전략자원의 수출 금지 등 답답한 상황이 지속되자 이를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허나 이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아 영국 내에서의 반일감정은 그래도 수그러들지 않았고, 무역전초기지로서 필리핀과 기한적 식민지 계약을 맺으며 중국시장에 자본을 투입했던 미국에서도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의 시장이 파괴되자 반일감정이 악화되기 시작한다. (일본도 똑같이 반영감정이 수그러 들지 않았다.) 그로 인해 미국과 일본이 1911년 이래 유지해왔던 미일통상항해조약에 대해 1939년 조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미국에서 밝혀 왔다. 그리고 국교조정회담에서 일본이 중국을 침공함으로써 미국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다는 입장을 밝힌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강경한 반발 입장을 유지했고 1940년을 기해 미일통상항해조약은 해지된다.

4. 일본의 남방 진출에 대한 경제제재 확대


동시에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눈독을 들이는데, 이는 나치독일에 의해 혼란에 빠진 유럽의 프랑스나 네덜란드 등의 식민지 관리가 부실해진 틈을 타서 동남아시아를 점령, 풍부한 동남아의 자원으로 부족한 중일전쟁을 지속할 자원을 확보하고 해외경제에 휩쓸리지 않는 자급경제권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1940년 당시 유럽은 한창 2차대전 도중이었고, 폴란드와 베네룩스, 프랑스가 모두 무너져 영국만이 홀로 독일에 맞서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남방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식민지는 사실상 모두 주인 없는 땅이나 다름없었으로 쉽게 획득할 수 있으리라 보였던 것이다. 그 중 가장 먼저 표적이 된 것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일본은 독일의 괴뢰국인 비시프랑스와 협정을 맺어 지배권을 인정받음으로서 타국과의 마찰 없이 점령이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1940년 일본은 일본 제5사단을 인도차이나에 진군시켰고 그 유명한 추축국 동맹인 삼국 추축 동맹을 체결한다. 이 삼국동맹은 소련을 겨냥한 1937년의 삼국방공협정과 달리 당시 일본과 독일은 소련과 각각 중립조약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기에 이 동맹의 겨냥점은 미국과 영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즈음 독일이 네덜란드를 공격 함락시키자 일본은 남방에 있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압박하면서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는 90%의 물자 독점권을 요구했고, 프랑스가 함락되고 괴뢰국 (비시)프랑스가 들어서자 일본은 인도차이나로 들어가던 중국의 보급물자 공급을 막는 동시에 프랑스의 식민지를 압박했고, 나중에는 동남아시아에 병력을 주둔시켜서 완전히 삼킬 야욕까지 내비치기 시작했다. 결국 미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에 1억달러의 차관을 제공하였고 영국 역시 1만 파운드의 차관을 중국에 지원한다. 하지만 일본의 확장정책은 청일전쟁부터 일관되게 지속된 안보정책[8]의 일환이었고, 전쟁에 대한 국민의 지지 또한 확고했으며 연합국이 실제로 태평양에서 행사할 수 있는 군사력이 없다시피했으므로 외교적 압력으로 일본의 정책이 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4.1. ABCD 포위망과 미국의 대일 석유수출 금지


1941년엔 결국 미국('''A'''merica), 영국('''B'''ritain), 중국('''C'''hina), 네덜란드('''D'''utch)[9] 이 4개국은 일본에 전략물자수출을 금지하는 소위 말하는 'ABCD 포위망'을 형성시켰다. 이것이 일본 입장에서는 치명타였는데, 전력물자에는 당연히 석유도 포함되었고, 당시 일본 전체 석유 수입의 80% 이상을 미국에서 수입하는 상황이었다는 것.[10] 당시 일본은 석유재고량은 평시 3년분, 전시 1년 반이었고, 중일전쟁중이라 석유가 더 필요한 상황인데 미국의 석유수출 금지는 일본에게 치명타였다. 또한 1941년 3월에는 무기대여법이 통과되어 영국과 중국에 무상으로 무기가 공급되기 시작했고, 6월에는 독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일본이 자국의 아킬레스 건이 될 석유 문제를 방기한채로 중국 침략을 하고 미국과 관계가 악화되는걸 방치했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11] 일단, 일본은 메이지 시대 이래로 적게나마 산유국이긴 했는데[12], 아키타 현과 니이가타 현에서 석유가 나왔다. 하지만 여기서 나오는 연간 산출량은 1942년 기준으로 160만 배럴이어서#, 해당 년도의 석유 소비량인 3천 6백만 배럴에 크게 미달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석유는 일본의 아킬레스 건이 맞았고, 미국은 당연히 이를 지렛대로 삼았으며, 일본 역시 이런 현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석유의 주 용도인 연료와 석유화학 제품을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다면, 석유가 반드시 필요한 분야에만 배급하는 식으로 경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 다른게 아니라, 2차 대전 말 벌어진 전시 송출로 악명높은 송근유가 바로 이런 용도이기도 하고, 전국 교통망을 차량대신 철도로 대체하면 석탄을 활용해서 육상 교통에서의 석유 수요를 상쇄할 수 있기도 하다. 이런 식의 삽질 와중에 일본이 주목한 것은 다름아닌 정어리였는데, 현대적인 어업기술을 식민지 조선에 도입하면서 1920년대부터 이미 어마어마한 어획고를 기록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정어리 기름은 윤활유 및 난방과 조명을 위한 등유로 사용할 수 있었고,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를 비료로 썼다. 하지만 1935년, 조선에서의 정어리 어획고가 75만톤을 넘어선 해에 일본 6만톤, 조선 10만톤의 정어리 어유(魚油)가 생산되게 되는데, 상황이 이쯤 되자 비료로 사용될 질소 화합물의 상당량을 화약 생산으로 넘길 수 있었고, 기술발전 덕분에 어유를 경화유 산업[13]의 자원으로 활용하면서 경공업 수요를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생산량이 충분해지자 어유 그 자체를 연료로 이용하여 저품질의 연료로도 굴러갈 수 있는 민간/군사 영역, 특히 선박용 기름으로 충당하려고 했다. 물론 이 물량만으로도 석유를 완전히 대체하는건 불가능하긴 했지만, 낙관적인 예상대로라면 선박용 연료의 50%를 정어리 어유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었다.[14] 그리고 1937년에는 정어리 어획고가 '''조선에서만 138만톤'''을 찍으면서 정어리 기름을 통한 일본의 에너지 반자립의 꿈(?)이 눈앞에 있었으며[15][16], 일본의 내각 역시 미국의 지렛대에서 해방되었다고 여겼다. 그 시점부터는 미국의 항의는 예전같은 무게는 없었으며, 산발적인 테러로 일관하던 중국 침공도 중일전쟁으로 본격화하게 된다. 하지만, 해당 해를 기점으로 상승세는 꺾였다. 1939년까지 백만톤을 가뿐히 넘기던 어획고는 추락하기 시작했고, 태평양 전쟁이 개전하던 1941년에는 60만톤, 전쟁이 시작된 1942년에는 '''7천톤'''으로 어획고가 추락하게 된다. 하지만 정어리의 꿈이 부서지던 1941년에는 이미 석유 금수 조치가 시작되고, 일본은 다시 미국의 석유가 필요한 나라였다.
결국 일본은 미국과 교섭을 시도하고, 1941년 11월 26일 미국국무장관 코델 헐과 주미일본대사 노무라 기치사부로사이에서 협상을 벌인다. 일본의 목표는 미국이 중국 지원을 중단할 것(전쟁이 끝나면 석유문제에서 해결될 수 있으므로)과 국제연맹에서 부정당했던 만주국 승인이었고, 미국은 이미 무기대여법이 통과되고 대규모 함대 건조와 경제동원이 시작된 상황이었으므로 시간만 버는것이 최소 목표였다. 따라서 협상에서 공식적으로 미국은 추축동맹 파기, 점령지의 군경 철수 및 이권포기, 만주국의 해체 등 사실상 이행하기 힘든 강경한 조건을 내걸었고, 일본 역시 미국은 유럽의 전쟁에 중립을 지키고 태평양에서 일본의 팽창을 묵인할 것, 만주국의 승인, 경제 협력 강화, 필리핀의 독립을 보장할 것, 중국이 중일전쟁에서 항전을 포기하도록 공동으로 압력을 가할 것 등 이행하기 힘든 제안을 했다. 이에 미국은 만주국은 승인하되 중국에서의 철수와 동남아에 대한 침략을 중지하라는 타협안을 내놓지만 이미 다 이긴 전쟁으로 보이는 중일전쟁을 포기하라는 이야기며 일본에게 1894년부터 이어진 안보정책을 무(無)로 돌리라는 제안이므로 역시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지만 ABCD포위망은 여전히 일본을 옥죄고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의 석유 비축량을 줄어들기만 할 것이며 미국의 군사적 우위는 늘어나기만 할 뿐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일본은 결국 중일전쟁 포기와 네덜란드령 동남아시아의 석유 확보중 후자를 선택함으로서 전쟁을 결정하게 된다.
당시 협상에 대해 일본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인 추축동맹 파기, 점령지의 군경 철수 및 이권포기, 만주국 해체 등을 내걸며 석유금수조치를 취한 미국의 강경노선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시기의 미국은 이미 벌어진 독소전쟁에서 소련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독소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한다면 2차대전은 추축국이 승리할 것이고, 이를 막기 위해서 미합중국 전쟁부는 1941년 겨울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련이 버텨야 하고 1942년 봄부터는 소련이 승기를 잡기에 충분한 무기를 공급할 수 있을만큼 미국의 무기생산량이 증가할 것이라 예상했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의 남진에 몇 배나 강력한 보복 정책을 시행함으로서 소련을 간접적으로 도우는 것에 집중했고, 협상 역시 미국 입장에서는 시간을 버는 것만으로도 목표를 달성한 셈이었던 것이다.

5. 일본이 미국에 대한 선공을 결정한 요인들



5.1. 미국의 고립주의


사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때만 해도 미국은 '강대국 중의 하나' 정도의 이미지로, 미국이 스스로 의도 혹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물론 공업 생산량이나 경제 규모로 보나 여러가지 측면에서 미국대영제국을 뛰어넘은 것은 훨씬 전이었으나, 대외적으로 미국이 초강대국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미국은 이미 20세기 초반에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열강을 모두 합한 정도의 경제규모에 도달했지만, 스스로 세계 최강국이라는 인식이 부족했다. 애시당초 지금 군사력으로 일부분에서 미국 다음가는 러시아도 미국 때문에 큰 규모의 전쟁을 시도조차 하지 않을 정도지만 당시 독일군은 영프에게 본토가 털린건 내부의 적이 원인이라고 믿고 저 둘이 저자세로 나오자 1차대전때 그렇게 깨졌는데 2차대전을 일으켜버린다. 그만큼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의 인식은 과소평가되고 있었다. 17세기부터 내려온 서유럽 중심의 세계 패권 경쟁에는 도전하지 않으면서 미서전쟁으로 쿠바푸에르토 리코, 그리고 태평양 지역의 몇 개 섬을 획득하는 선에서 만족하고 있었고 앞마당인 카리브해와 중남미 지역에서만 골목대장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로 독트린 조항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은 중남미와 태평양 지역의 패권만 유지해서 본토의 안전에만 관심이 있었다. 나치 독일의 팽창에 대해서도 대체로 불간섭주의 위주였다.[17][18][19] 경제적으로도 미국은 경제대공황의 복구가 끝나지 않았으며, 먼로독트린을 비롯한 고립주의적 국방정책과 공황으로 인한 군축으로 1930년대 미국의 군사력은 세계 17위 수준에 불과했다.
따라서 미국이 전쟁에 돌입하더라도 그 경제력을 군사적으로 동원하려면 수 년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 전에 태평양에서 인도네시아 등을 확보하여 석유 등 자급적 경제를 확립하면 중일전쟁이 아무리 지구전이 되더라도 결국 승리할 수 있으며, 자원이나 미국 경제에 휘둘리지 않으므로 당시 동아시아쪽에서는 필리핀을 유지하는 것에만 관심을 보이던 미국에게도 버틸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받았던 것이다.

5.2. 파죽지세의 동맹 나치 독일


일본이 전쟁을 결정한 요인 중 하나는 당시 독일의 기세가 워낙 강세였기 때문도 있다. 독일은 유럽 열강국 가운데 하나이자 육군 강국이었던 프랑스를 완전히 먹어버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을 모조리 짓밟아 유럽의 패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나마 맞수로 적당한 나라는 오직 영국소련 정도였는데, 영국은 섬에 틀어박혀서 독일의 공습을 겨우겨우 막아내며 간신히 숨만 돌리던 처지였고, 소련은 한창 독일에게 탈탈 털리는 시점이었다. 즉 독일의 승리가 머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일본 역시 1차대전에서 배운 전훈인 경제자립권 확보에 이번 기회를 활용하는게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40년까지 일본의 아베 노부유키, 요나이 미츠마사 내각은 유럽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 정책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신체제운동과 함께 독일의 나치와 같은 일국일당 정책을 추진했으며,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무역이 제한됨에 따라 장기전을 위한 자원 확보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일본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원하는 식민지, 즉 동남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항복한 그들의 모국을 지배하는 독일의 양해가 필요할 것이라 판단하고 이를 위해 추축국에 들어갔다. 독일과 일본의 관계는 서로의 이득을 위해 추축국이란 이름을 썼을 뿐이지 거리상 서로 협조하기도 어려웠으며 운명공동체 같은 관계도 애초에 아니었다. 둘은 명목상 추축국으로서 동맹이었지만, 서로 적극적인 협력을 하기엔 거리나 기타 여건상 애초에 불가능했으며 서로 막연한 기대를 품는게 전부인 느슨한 동맹으로 보이는건 이런 이유이다.

5.3. 미국 여론에 대한 오판과 미국에 대한 과소평가


미국의 여론에 대한 오판 역시 전쟁을 결정하는 이유였다. 일본의 시각에선 미국은 당시 경제 대공황으로 경제의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었기때문에 전통적으로 미국 스스로를 옭아매고있던 먼로 독트린과 맞물려 미국을 더욱 고립주의 성향으로 빠뜨렸고 또한 유럽을 바라보는 미국민들의 원망어린 시선 역시 컸다. 미국 국민들의 인식은 당장 자신들이 겪고있는 경제 대공황도 1차 세계대전이라는 유럽동네 쌈박질에 참견했다가 얻은 병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아직 그때의 무기랑 빚도 갚지 못했으면서 그새를 못 참고 또 다시 전쟁을 벌이는 유럽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때문에 유럽 전체가 불바다가 되는 상황에서도 미국 내 여론은 극소수 루즈벨트파를 제외하면 국민,의회 모두 절대적으로 참전반대, 고립주의노선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가뜩이나 여러 전쟁을 겪고 호전적으로 변한 일본은 자기들이 선제공격을 해서 미 태평양함대 주력을 섬멸해 기선을 제압한다면 저자세로 협상해올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사항이 앞섰던 것이다. 미국의 경제동원에는 몇 년 단위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마저도 미국 내 고립주의 여론이 너무 절대적이었던지라 장기전으로 갈 수록 여론에 발목이 잡혀 전력으로 전쟁에 임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예상했고, 한편으론 미국 입장에서도 미국내 반전여론에 의해 대선을 의식한 루즈벨트가 전쟁을 중도에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또한 미국과의 전쟁 무대는 태평양이라는 점도 중요한 요소였다. 미-일간의 전쟁은 지상전으로 결정되는 유럽의 전쟁과는 다를 것이 분명했다. 경제적 자급권이 형성되어 지속적 총력전이 가능한 초강대국의 싸움이 벌어질텐데, 태평양이라는 바다가 무대인 만큼 한 국가가 멸망할때까지 싸우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도중에 외교적으로 적당히 타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본군에 미국을 공격해 워싱턴까지 진군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미국이 태평양을 건너 도쿄까지 진군해올 수 있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또한 태평양에서 싸울려면 해군이 반드시 필요한데, 미 태평양 함대에 어떻게든 기습을 가해 치명상을 안겨 잠시만이라도 해군력에 공백을 만들어버릴 수 있다면, 국력과는 무관하게 미국이 자신들에게 건너올 수단이 당분간은 없어지는 셈이니 그 사이 남방작전으로 동남아 일대와 미국령 필리핀을 점령해버리고 태평양의 주도권을 선점한 뒤 점령지의 방어선을 굳혀 방어전 위주로 버틴다면, 미국이 뒤늦게 함대를 재보강해 반격을 펼치려고 한들 이미 필리핀을 포함해 대부분이 넘어가버린 전선에 경제 상황도 최악인 미국이 비용적, 정치적 부담 아래 협상을 통하여 동아시아에서 손을 떼버리게 할 수도 있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아는대로, 미국의 반응은 일본이 예상했던 것과는 정반대, 아니 그 이상이었다. 오랜 경제 공황과 굶주림에 찌들어 냉소적이고 소극적인줄로만 알았던 미국의 국민들은 막상 일이 터지자 일본의 파멸을 외치며 성인 남성들의 자진입대율은 90%로 치솟았고[20] 국회는 사실상 만장일치[21]로 그 이전의 고립주의는 꿈이라는 듯이 국민, 정부 모두가 분노를 표출하며 순식간에 일본과 추축국에 대한 태도를 바꿔 전쟁에 참전했다. 일본이 미국의 발목을 잡으리라 예상했던 경제문제도 전쟁이 치료해줬다는 점 역시 오판이었다.

6. 일본의 대미 개전 준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1년 일본에선 미국과의 총력전을 구상하고 준비 과정과 예상 결과를 파악하기 위해 젊은 엘리트 인재들을 모아 총력전 연구소를 설립해 연구하게 한 바 있다. 연구진들이 내린 결론은 당연하게도 '일본의 필패'였다. 연구진들은 일본의 공업 생산력과 자원, 특히 석유의 생산 및 수송 능력[22]을 볼 때 도저히 미국을 총력전으로 이길 수 없다고 정확히 판단하였다. 이 결과를 보고받은 도조 히데키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책상에서 이루어진 연습으로서, 실제 전쟁이라는 것은 제군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러일전쟁에서 우리 대일본제국은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겼습니다. 그 당시에도 열강에 의한 삼국간섭으로 어쩔 수 없이 제국은 일어선 것이지,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고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은 계획대로 되지 않지요. 생각 밖의 일이 승리로 연결되어 갑니다. 따라서 제군이 생각하는 것은 책상 위 공론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그 의외성이란 요소를 고려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 책상연습의 경과를 제군은 경솔하게 입 밖에 내서는 안 됩니다."

쉽게 표현하면 "그전에 한 전쟁도 어찌어찌 이겼잖아? 이번에도 될 거야." 인 것. 국가의 최고통치자가 이런 발언을 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일본군이 얼마나 전쟁에 대해 안일한 생각을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러일전쟁은 사실 러시아의 세력확대를 견제하기 위해서 미국과 영국 두나라가 일본을 내세워서 치른 대리전쟁에 가깝다. 또 하나 당시 러시아의 차르 정권은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도저히 전쟁을 지속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차르 입장에선 후방의 러시아 민중들 그리고 전선의 병사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종전을 결정한 것이다. 만약 러시아가 이 모든 것, 심지어 발트함대의 전멸까지 무릅쓰고 최소 만주에서의 육상전이라도 속행했더라면[23] 만주의 일본군은 고사했을 것이고 일본은 훨씬 불리한 결과를 받아들어야 했을 것이다. 포츠머스 강화회담에서 러시아가 강조했던 것도 자신들은 패전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자뻑은 이런 전후 상황을 모두 무시하고 그저 우리 황군이 잘해서 이긴 것이라는 정신승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치 만주작전에서 다 쓰러져 가는 관동군 이기고 일본을 이겼다는 논리와 비슷하다.[24][25]
더구나 일본은 '''미국이 제대로 빡쳐서 나올 경우,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당장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장관이 진주만 공습의 성공을 보고받은 후 "어쩌면 우린 잠자고 있던 거인을 깨운 것인지도 모르겠군."이라고 독백을 한 것과 상당한 대조가 된다[26]
일본은 이미 1937년 중일전쟁의 늪에 빠져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적을 공격하는 것은 양면전쟁을 스스로 일으키는 무모한 행동으로, 군사학이나 병법까지 찾아볼 것도 없이 2:1로 싸울 때 어떤 편이 유리한지만 생각해 봐도 미친 짓이라 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미국유럽태평양에서 양면전선을 형성했고, 이기기까지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국이니까''' 가능한 것이고 태평양과 유럽에서 필요로하는 군종이 다른점도 있었다.[27][28] 게다가 독일이 이미 소련을 침략하면서 동부전선으로 엄청난 전력이 투입되어 있기도 했고.

7. 만약 일본이 미국이 아니라 소련을 쳤다면


사실 당시 일본이 '''추축국의 일원으로서'''의 입장에서 전략적으로 선택해야 할 최적의 선택지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였다. 당시 소련은 히틀러기습공격을 당하여 모스크바 함락을 걱정해야 하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소련은 인구 대다수가 있는 우랄산맥 서쪽 대부분을 잃은 상황이였고, 때문에 몇년 전과 달리 동부에 주둔하던 부대들의 역량이 약화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물론 일본은 시베리아를 거쳐 모스크바로 진격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모스크바까지 진격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일본 본토 코앞의 블라디보스토크만 점령하거나 하다 못해 원래 우세했던 해군력으로 항구만 봉쇄하기만 하였어도 독일의 전쟁 수행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이는 당연하지만 연합국에게 큰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2차대전 때 소련으로 가는 렌드리스의 미국 물자는 상당 부분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내려주는 상황이었는데[29][30] 만약 블라디보스토크가 봉쇄당했다면 소련 입장에선 미국발 랜드리스 물자의 절반은 막히게 되는 상황이었고, 이렇게 된다면 독소전에 있어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겠지만[31] 적어도 독소전쟁이 훨씬 길어지고 더 많은 물자를 소비하게 되어 연합국의 시선을 일본으로부터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미국의 루즈벨트 입장에서도 반공주의가 심한 미국에서 공산주의 소련을 돕기 위한 참전에는 명분도 지지도 부족한 상황이라, 직접 전면적인 참전은 미국내 여론의 반대 때문에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히틀러도 이러한 효과를 노리고 일본군의 참여를 바랬었다.
또한, 일본군이 극동에서 소련의 어그로를 잔뜩 끌고 있으면 소련군이 극동의 병력들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지 못 하였을 것이고, 자칫하다간 모스크바가 점령당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32] 상징적으로도 그렇고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최고 요충지였던 모스크바를 독일군이 점령했다면 소련은 큰 타격을 입고 독일에 대한 체계적인 반격이 이루어지기까지 훨씬 더 오래, 그리고 훨씬 더 처절한 결과를 감내했어야 할 것이다.[33]
그리고 이렇게 전쟁이 길어져 연합국들의 태평양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고 태평양에 동원할 수 있는 물자가 줄어드는 사이 전쟁에 대한 부담을 느끼는 연합국에 대하여 재협상을 시도할 여지가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일본군은 중국 전선으로 끊임없이 투입되는 병력과 물자의 문제로 소련에 의한 공세를 취하기엔 무리가 많았다. 독소전쟁후 10개사단 이상의 병력이 독일과의 전투를 위해 이동하였지만 여전히 30개 사단이 넘는 소련군이 여전히 극동에 남아있었다. 대소전이 개시된다면 일본군은 개전과 동시에 요새포와 관동군 직할의 대구경포로 시베리아 철도를 차단하고 3일에서 15일 이내에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치타에 대한 공세를 취하여 소련 극동군을 격멸후 바이칼 호 방면으로 주력이 이동하여 서시베리아나 유럽에서 올 소련군과의 결전을 벌여 종전으로 간다는 계획을 잡았지만 관동군 또한 중국의 강력한 저항으로 꾸준히 중국전선으로 인력이 짜내지는 상황에선 도저히 저런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없었다.
또한 일본 육군은 이렇다 할 적이 거의 없는 만주-동남아시아 전선에서 2선급 장비와 인력을 갖춘 식민지 치안유지용 점령군을 상대로 선전했지 실제 1급 정규육군과 상대한 적은 거의 없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 벌어진 장고봉, 노몬한 전투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펼친 졸전을 보면 과연 일본군이 소련군을 상대로 제대로 된 전쟁을 치를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소련을 압도하는 전력을 갖추고 있었던 해군의 지원을 전혀 바랄 수 없던 환경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더욱 그렇다. 거기다가 만주작전 당시의 관동군과 1940년의 관동군은 다른 군대라고 봐도 무방할만큼 전력면에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34]
또한 랜드리스 물량의 절반가량이 블라디보스토크에 하역된건 사실이지만,[35] 이건 블라디보스토크 루트가 편하고 안전했기 때문이지, 블라디보스토크가 유일한 통로라서가 아니다. 독일 잠수함의 위협이 있지만 그냥 군수물자처럼 북대서양 루트를 이용해도 되고, 베링 해를 지나는 루트도 있었다. (베링해 루트는 알류샨 열도를 점령하고 항공기를 배치하면 이용할 수 없겠지만, 알류샨 열도를 점령하려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해야 하니 애초에 전제를 벗어난다.) 만약 일본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했다면, 좀 더 돌아가야 하지만 물자를 못보내는 건 아니며 수송 거리가 조금 늘어난다고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칠리는 없다. 블라디보스토크 하나 점령했다고 소련으로 가는 랜드리스를 봉쇄할 수 있다는건 순진한 생각이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고 랜드리스 물자도 탈취하는 것으로도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는 셈이고, 이것 또한 결국에는 미국과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혹시나 랜드리스를 봉쇄하고 온전히 탈취 할 수 있다고 치고 소련이 무너지는 게 뻔하다면, 랜드리스에 대한 채무는 무너질 소련이 그대로 안고가고 그것을 고스란히 탈취하는 일본은 아무런 책임없이 꽁으로 물자를 공급받게 되는데, 상식적으로 이 지경이 되면 미국은 누구 좋으라고 일본의 돈줄이 되어버리는 소련쪽 루트로 랜드리스를 보내겠는가?
일본군 스스로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침조약을 파기하지 않고 소련을 공격하지 아니하였다. 나치 독일이라는 명백한 적국의 타도의 확고한 목적으로 뭉친 연합국과 달리, 추축국은 어디까지나 상황적 이해관계의 일치로 인해 느슨하게 뭉친 집단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독일의 전쟁수행능력에 능동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 보다는 그로 인한 리스크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더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물자도 부족하고 당시 일본군의 실질적 한계로 인해서 일본이 소련을 공격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가상 시나리오지만, 실현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경우였다 할 것이다.

8. 그럼에도 미국을 공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석유의 고갈'''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석유 금수조치로 인해 일본의 전쟁수행능력은 극도로 떨어졌으며, 석유 비축량이 당장 '''수 개월분'''으로 떨어지자 일본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미 수 많은 물자와 인력을 투하하고 있었으나 '''독일을 포함한''' 각종 국가들의 군사자문단들에 의해 나날히 발전하는 국민당군의 전투력이나 연합국으로 부터 물자의 지원을 받은 중국 군벌들의 거센 저항으로 장기화 되어버린 중일전쟁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부터 철수하면서 조선만주국 일부만을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하느냐, 아니면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의 유전을 확보하느냐의 선택지에서 일본은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미국 제재 때문에 나라에 석유가 없다→ 동남아 유전을 뺏어서 쓰자→ 동남아를 치려면 미국 함대(진주만)를 날려야 한다'''
위에 나와있듯이 일본이 미국을 친 이유는 미국과 영국, 중국, 네덜란드 4개국이 일본에 전략물자 수출을 금지했기 때문에 석유 수입의 80% 이상을 차지하던 미국에서 석유를 수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국과 계속 전쟁을 하기 위한 자원확보를 위해서 동남아시아를 점령할 필요가 있었고, 동남아를 차지하려면 ABCD연합을 몰아내야 하니, 그 수단을 위해 태평양에서 제일 위협이 되던 미 태평양 함대를 소멸시켜 협상 테이블로 억지로 끌고 나올 수 있도록 선빵을 날린 것이다.[36]
한 마디로 미국을 선제 공격하지 않으면 남방자원을 차지할 수도 없었고, 남방자원이 없으면 중국과의 전쟁조차 계속 수행하지 못하는게 당시 일본의 자원 상황이었다. '''미국을 안치면 자원이 없어서 먹었던 중국영토도 다 토해내야할 판에 소련을 상대로 전선을 하나 더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보급은 뭘로 하고 전차와 항공기 연료는 어디서 구하려고?[37] 애초에 일본이 소련 상대로 전쟁할 자원이 있었으면 중일전쟁에 집중하지 미국과 전쟁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당시 일본은 미국을 공격하거나, '''군국주의를 포기하거나'''의 선택지만이 존재하던 상황이었다. 미국은 일본을 경제적으로 압박하면 일본은 조선과 만주국을 식민지로 점령한 것에 만족할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당시 군국주의 일본의 경제는 팽창하지 않으면 고사할 수 밖에 없고, 더불어 수 많은 자원과 인력이 투하된 중국을 포기한다는 것은 군부의 실패를 인정하고 군부가 실각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이러한 선택지 사이에서 군부는 자신들의 알량한 권력을 지키기 위해 미국을 선제타격한다는 선택지를 골랐다. 결국 그로 인해 이미 획득하였던 식민지도 모조리 토해내야 했고 메이지 유신으로 이룬 근대화의 성과도 전부 후퇴하는 파멸적인 결과를 맞게 되었다.[38]


[1] 새해 벽두에 발발한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 전역에서 차르 퇴위를 외치는 노동자 파업과 농민반란이 속출하면서 무정부 상태에 접어들고 있었고, 포템킨 반란으로 군까지 흔들리는 상황이 되자 차르정권은 일본과의 전쟁을 하루 빨리 마무리 짓고, 국내 수습에 집중할려고 했다.[2] 남양군도[3] 이 외에 칭다오를 탈출한 독일 동양함대를 추적하기도 하고 지중해에 소함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영국이 막 취역한 순양전함 공고를 영국해군에 파견해 달라는 요청도 했지만 이것은 거부. [4] 일본군은 1차대전의 전훈을 분석하여 식량비축을 위해 농민을 보조하고 의무교육비를 지원하는 등 민생친화적인 정책을 주장했고 이것이 국민의 지지를 얻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5]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을 열강들이 묵인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6] 이것은 국민당군의 공격과 대장정 와중에 위기에 몰렸던 중국공산당의 선전이었지만, 당대 중국내 민족주의 지식인들과 민중들 그리고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있던 각지의 군벌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서안 사건을 촉발시켰다. 일본의 계속되는 영토 침탈, 이권 침탈에 장제스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 토벌'이 우선이라면서 무저항 방침을 고수하는 모습이 중국의 민중과 민족주의 지식인들에게 큰 반발을 사고 있는 상황이었다.[7] 18세기 이래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모든 서구 강대국들의 아시아 정책에서 제 1순위는 중국 시장에서의 자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한반도와 일본은 중국으로의 접근로 혹은 중국에서 밀려났을 경우에 견제를 위한 근거지로 2순위이다. 이는 과거부터 지금 까지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8] 경제자급권 형성, 중국시장의 이익 확보 등[9] 당시 네덜란드는 유럽 본토가 독일군에게 털렸지만 본토보다 훨씬 넓은 인도네시아 식민지는 영국으로 망명한 네덜란드 망명정부의 통제 하에 있었다.[10] 이때는 아직 중동의 유전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이었다.[11] 온라인 상에서 일제를 깔때, 보통 일본군과 내각 수뇌부가 멍청해서 그렇다고 넘기곤 하는데, 당대의 열강이었던 만큼 당연히 그 정도로까지 멍청하진 않았다. 다만 후술하듯이, 다른 의미로 지나치게 낙관주의자였던게 문제였다.[12] 지금도 원유는 꾸준히 산출된다.[13] '''비누, 양초, 글리세린, 마가린''' 등을 생산한다.[14] 제국주의 열강국에 있어서 해군과 상선단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것도 제 3위의 해군국이었던 일본에서 소비하는 선박용 연료의 50%를 충당한다니, 일제 입장에서는 이 목표에 도달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성공이다.[15] 언뜻 보면 웃겨보이지만, 1차 대전 당시 독일에서는 초석질산암모늄 합성으로 대체하면서 화약과 비료 독립을 달성하고, 온 유럽과 치고 박은 성공 사례가 있었으니...[16] 다시 말하지만, 일제도 정어리 기름으로 석유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리라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미국의 석유에 완전히 묶여있던 시기보다 운신의 폭이 크게 넓어졌을 뿐이다.[17] 대표적인 인물이 존 F. 케네디의 아버지로 당시 주영국대사였던 조지프 케네디와 당시 부통령 존 낸스 가너.[18] 정반대의 경우가 중국으로 서구 열강은 청나라를 '잠자는 사자'라고 생각하여 건드리지 않았으나 아편전쟁으로 청의 유약함이 드러나자 앞다투어 뜯어 먹겠다고 찾아왔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홍콩, 마카오.[19] 사실 '잠자는 사자'라는 말의 의미는 청나라가 강대국이어서 잘못 선공했다가는 역관광당한다는 의미라기보단, 중국의 광활한 영토와 수많은 인구때문에 금방 서양의 우수성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경제항목의 역사적맥락 참조[20] 신체조건미달로 입대불가 판정을 받은 청년이 낙담해 자살했던 일이 있을만큼 미국내 남성들 사이에선 전쟁에 안 나가면 남자도 아니다라는 비슷한 인식이 있었던 모양.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가 바로 캡틴 아메리카다.[21] 평소 반전주의 입장을 고수하고 제 1차 세계대전 때도 반전 운동을 벌인 제닛 렌킨 하원의원 한 명만이 반대표를 던졌다.[22] 미국으로부터 석유를 공급받을 수 없으니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지역의 유전지대를 개발해서 일본 본토로 수송하는 형태를 가정하였다. 이 총력전 연구소를 분석한 논픽션인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의 저자 '이노세 나오키'는 책에서 이를 두고 '구멍뚫린 양동이로 물을 퍼가는 식'이라고 표현했다.[23] 러일전쟁의 주요 야전인 랴오양, 타이쯔허, 펑텐 회전에서 일본군은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러시아군의 주력을 섬멸하는 데는 실패했고 만주 주둔 러시아군의 전력은 종전 시까지 일본군 전력을 훨씬 능가하는 상황이었다.[24] 하지만 일본의 패망이 소련군의 참전 때문이라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우선 일본 정부는 미군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떨어뜨렸을 때는 태연했으나, 소련군 160만 명이 만주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겁에 질려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소련을 상대로 허겁지겁 평화 조약 체결을 논의하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리고 만주 작전 당시, 만주에 주둔 중인 일본 관동군은 70만 명이었고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대인 만주군 또한 30만 명이나 되었다. 합계 100만 명의 병력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고, 이 병력이 소련군의 침공 이후 불과 2주일 만에 모두 소련군에 항복했다는 사실은 일본 정부에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큰 타격을 입히기에 충분했다.[25] 다만 총리라는 도조의 직위를 생각하면 우린 이제 망했다고 대놓고 얘기할 수도 없으니 적당히 둘러대기 위해 이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는 이후 도조는 육군 내부 강경파를 상대로 미국과의 협상가능기간을 늘리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26] 그러나 진주만 공습에 대해 해군 군령부(우리의 해군본부)에서는 반대했었다. 야마모토는 진주만을 공격하든 공격하지 않든 미국은 참전할 것이고 그럴 바에야 초장에 미 태평양함대를 격멸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결국 사임하겠다고 위협까지 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켰다. 이는 항명에 가까운 일이다. 당시 일본의 군사전력에서 육군은 형편 없었고, 해군은 세계 최강 수준이였다. 그러나 웃기게도 일본내에서 육군이 해군보다 우위권에 있었다. 당장에 2.26 사건 주도세력의 다수가 육군이고, 황도파니 통제파니 하는 계파들은 물론 관동군도 모두 일본 육군계파들이었다.(메이지시기 조슈파가 육군 건설을 주도하면서, 세이난전쟁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가 자결하며 세력이 약화된 사쓰마번이 주도한 해군보다 사실상 상위에 위치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총독직도 육군이 독점하는 직위였다.[27] 미 육군의 주력은 유럽에서 작전했지만 해군의 주력함들은 태평양에서 작전했다. 대서양에서는 크릭스마리네나 이탈리아 해군같은 별 볼일 없는 해군만이 존재했고 동맹국인 영국이 혼자서 저 둘을 바르고 다녔으니... 물론 유보트가 설쳐서 미국한테 대량의 호위항공모함을 얻어가기는 했다.[28] 게다가 독일과 일본처럼 제대로 된 동맹군 없이 독불장군으로 두개의 전선을 수행한 것도 아닌 데다가 위치상 본토가 공격받는 상황에 대해서 매우 자유로운 전쟁 수행이 가능했다.[29] 영국에서 만든 건 주로 이란으로 내려줬다[30]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은 렌드리스 물자를 미국 서해안으로 옮긴 뒤 소련 배에 옮겨서 날라주는 방법을 써야했다.[31] 소련의 당시 상황을 보면 나치 독일이 모스크바가 함락되면 러시아도 프랑스처럼 항복할 것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소련이 멸망할때까지 싸웠을 것이고 연합국은 이를 방관할 생각이 없었다.[32] 실제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극동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은 수십만이 넘었고, 혹독한 시베리아의 날씨로 인해 동계전투 능력이 패시브가 되어있던 상태였다. 독일군이 질적으로, '''심지어 양적으로도 소련군에 우위를 가졌던 상황에서(독일군 192만, 소련군 125만)''' 소련에 남은 정예병력 및 가용가능 전력은 극동 주둔 소련군이 유일했다. 다만 독일군도 질적 우위는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빠르게 소모되어 버렸고, 더불어 보급선의 난항으로 인해 지속적인 지연이 발생하는 등 모스크바 점령 후 소련 전체에 대한 공격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33] 제 2차 세계대전 종결 후 많은 사람들이 나치 독일의 국방군 장성들의 회고록을 근거로 모스크바를 점령하였으면 독일군이 독소전쟁을 승리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재 역사가들은 이것이 비밀해제된 소련의 문건들과 비교하여 볼때 대표적인 오판이며 소련은 모스크바가 함락되어도 계속적으로 지연전을 펼치며 저항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특히 위에 언급되었던 독일군의 지리멸렬한 보급문제는 동쪽으로의 독일군의 진격에 큰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볼때 모스크바가 점령당했다고 하여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라 보는 역사학자들은 과거 다수설에서 현재 소수설로 바뀌었다.[34] 할힌골 전투 초반 일본군이 소련군보다 피해가 적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초반만 그랬고 게오르그 주코프가 등장한 이후로는 역으로 대판 깨졌다. 그것도 이때는 해군의 지원이라도 있었는데도 말이다.[35] 무기 등 군수물자는 북대서양을 지나서 무르만스크아르한겔스크 등을 통해서 보냈고, 블라디보스토크 루트로는 식량이나 피복, 철강 등 비군사적 물자를 주로 보냈다.[36] 이 때문에 일본 극우들은 미국의 금수조치가 태평양 전쟁의 원인이라고 헛소리를 하지만, 애초에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벌이지 않았다면 미국이 금수조치를 할 이유도 없었다. 일본이 조선과 만주국 일부 정도로 만족했다면 한국 입장에서는 끔찍했지만 일본이 한국을 완전히 병합하는 것을 열강들이 방관하는 상황도 벌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중국에서 물러나면 금수조치를 해제한다고 했지만 이걸 거부한게 일본이다.[37] 시베리아에 석유는 없었다. 2차대전 당시 소련의 석유는 대부분 코카서스 지방에서 나왔으며, 볼가/우랄 지역에서도 조금 생산된다. 1950년대에 서시베리아 수르구트 일대에서 상당한 규모의 유전이 발견되지만 2차대전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그나마 일본이 여기까지 가려면 만주에서 4,000km는 가야한다.[38] 다만 이후 운 좋게도 냉전의 시작으로 미국의 반공정서로 인한 지원과 옆 나라의 전쟁이 발생하여 막대한 자본을 투자받아 공업화할 기회를 얻어 빠르게 일본을 재건하고 세계의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과는 별개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