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템킨 반란
러시아어: '''Восстание на броненосце «Потёмкин»'''
영어: '''The uprising on the battleship "Potemkin"'''
한국어: '''포툠킨(포템킨) 함 반란 사건'''
1905년 6월 27일[1] 에 일어난 반란 사건. 러시아 해군 전함 "포템킨(포툠킨, Потёмкин)"[2] 함에서 일어났다. 우연이지만 사건이 일어난 계기가 수병들의 불합리한 처우라는 점에서 임오군란과 비슷하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오랜 기간 누적된 갖은 국가 내부의 모순으로 사회적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 폭발 직전까지 몰렸다. 더구나 1904년부터 시작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군의 상황이 점점 불리해지며 국민들의 불만을 더욱 쌓아올렸고, 여기에 차르의 궁전 앞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던 노동자 행렬이 무차별 사격당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지면서 민심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된다.
여기에 더해 포템킨이 소속된 러시아 해군은 수병들에게 비인간적인 생활을 강요하며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하지 않는 열악한 함상 환경으로 악명이 높았다. 포템킨의 수병들은 쓰시마 해전에서 발트 함대가 괴멸당하자 다음에는 자신들이 소속된 흑해 함대의 차례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까지 폭증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6월 27일, 훈련을 위해 출항한 포템킨에서, 수병들의 식사로 제공될 예정이었던 쇠고기들을 내리던 식사당번들이 이 고기들이 썩기 시작해 구더기가 득시글대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들의 외침을 듣고 달려온 수병들이 이 고기들을 폐기하고 새 고기를 달라고 원성을 높였다. 이 고기는 포템킨 함의 함장 예브게니 골리코프 대령의 지시로 출항 전날인 26일에 포템킨과 함께 있던 소형 어뢰정 N267호정의 정장인 클로트 폰 유르겐스부르크 대위가 항구의 푸줏간에서 구매한 고기였으며, 고기를 수령하여 건조시키기 위해 외부 갑판에 쇠꼬챙이로 꿰어 두는 작업을 했을 때는 멀쩡했던 것들이었다.
수병들의 소란에 군의장(함내 최선임 군의관)인 스미르노프 군의대위가 부식 검수를 위해 나타났는데, 그는 이 고기는 좋은 고기이며, 식초로 소독하여 먹으면 별 탈 없다며 배식토록 했다. 하지만 수병들은 분노하여 이 고기로 끓인 수프를 먹는 것을 거부[3] 했고, 조리병의 보고를 받고 직접 취사장과 수병들의 점심 식사 장소인 갑판[4] 에 가본 부장 이폴리트 길리아롭스키 중령은 빵과 물만 먹고 있는 수병들에게 수프를 먹지 않으면 항명 행위로 간주한다고 했으나, 되려 수병들에게 "썩은 고기 너나 실컷 쳐먹어라."는 야유만 받고 돌아와, 함장 골리코프 대령에게 수병들이 항명한다고 보고했다.
길리아롭프스키 중령의 보고를 받은 골리코프 대령은 승조원들을 후갑판에 집결시킨 뒤, 정 못믿겠으면 시료를 채취해 육상에 보내 검수시키겠다고 하여 수병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가라앉혔다. 그러나, 평소에도 수병들에게 가혹행위를 일삼으며 인간대우를 해주지 않아 갖은 증오를 끌어모으던 부장 길리아롭스키 중령은 함장의 관대함이 승조원들을 버릇없게 만든다고 생각하여, 함장의 조치로 어느 정도 진정된 수병들이 함장이 떠난 뒤 해산하려 하자 이들을 재집결시키고 위병을 부르고 방수포[5] 를 가져오라며 '''본보기로 수병 몇 명을 총살시키려 들었다.''' 이에 겨우 누그러뜨린 불만이 재차 폭발한 수병들은 크게 분노하였고, 뒤이어 일어난 폭력행위는 곧 함선 전체를 반란으로 몰아넣었다. 단 7명으로 시작된 이 소동은 여러 불만이 누적된 다른 수병들이 계속 합류하며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이들을 통제해야 할 하사관들은 기세에 눌려 이를 방기했다.
주모자인 7명 중 하나인 그리고리 바쿨린추크 수병이 소총으로 부장을 쐈으나 빗나갔으며, 부장이 권총으로 반격하여 바쿨린추크가 총알에 맞아 쓰러지자 다른 주모자인 아파나시 마튜셴코 어뢰수병장이 소총으로 부장의 머리를 맞춰 즉사시켰다. 부장 근처에 있던 리벤초프 사관후보생도 마튜셴코의 총에 맞아 즉사했으며 총 소리를 듣고 나온 포술장 네우파코예프 대위, 통신관 막시밀리아프 대위도 차례로 사살당했다. 장교들이 차례로 사살당하자 쳐다보기만 하던 다른 수병들도 덩달아 병기고로 들어가 총을 꺼내왔다. 머지않아 전함에 있는 '''700명에 가까운 수병 모두가 반란에 가담'''하면서 장교들에게 지옥이 열렸다. 이 난리통 와중에 바흐틴 후보생은 수병 2명을 사살했으나 수병들의 분노가 담긴 약 20여발의 총알을 온 몸에 얻어맞으며 호되게 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피투성이인 채로 물로 뛰어들어 N267호정으로 헤엄쳐가서 반란 사실을 말하고 거기에서 숨을 거뒀다.
곧이어 기관장 나자로프 중령, 보급관 마카로프 대위가 부상을 입은 채로 물로 뛰어들어 헤엄쳐서 N267호정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항해장 그리고리예프 대위는 헤엄쳐서 달아나던 도중 어느 수병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아 즉사한다. 수병들과 장교들의 총격전이 마구 벌어졌을 때, 뒤늦게 어뢰실에서 나온 어뢰관 빌헬름 트라실로프 톤 대위가 큰 소리로 일갈했다. 톤 대위는 평민 출신으로서 수병들을 아껴준 드문 장교였기에 수병들이 멈칫거렸고 톤 대위는 권총을 들면서 당장 반란을 멈추라고 외쳤지만,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 마튜셴코 수병장이 소총을 들자 톤 대위와 마튜셴코 수병장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사격하여 마튜셴코 수병장은 가벼운 부상을 입었고 톤 대위는 사망하였다.
주요 장교들이 죽거나 도망가는 와중에 수병들은 2명의 장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바로 함장인 예브게니 골리코프 대령과 식초 운운으로 수병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군의장 스미르노프 대위였다. 도망가지 못한 몇몇 장교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기에 군의관인 갈렌코 중위와 함장 전속부관인 알렉세예프 대위를 찾아낸 마튜셴코는 함장과 군의장이 어디 있는지를 캐물었고 이들은 그들이 숨을만한 곳을 말해주었다. 수병들은 배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하였고 얼마 안 가 총성과 함께 함장과 군의장이 피투성이로 끌려나왔다. 먼저 군의장 스미르노프 대위는 '''썩은 고기가 억지로 입에 처박힌 채 수병들의 욕설과 구타를 당하다 얼마 안 가 사살당해 바다에 버려졌다.''' 함장은 다른 장교들보다는 관대하게 수병들을 대해 왔기에 함장의 처분을 두고 논란이 일었으나, 얼마 전 드미트리 시로프 수병을 사소한 잘못으로 이등수병으로의 강등이라는 엄벌을 가한 적이 있어 시로프 수병이 직접 골리코프 대령을 사살하였고 시체는 역시 바다에 버려졌으나 어뢰정 N267호정이 인양했다.
이제 포템킨에 남은 장교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딱 2가지, '''죽거나, 협력하거나''' 뿐이었다. 평민 출신으로 수병들과 사이가 좋던 안톤 코발렌코 기관대위[6] 와 칼룬니 후보생은 수병들이 총을 겨누었으나 마튜셴코는 코발렌코 대위가 사회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지며 뜻을 동의하던 걸 기억하고 그들을 죽이지 말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코발렌코 대위와 칼룬늬 후보생은 계급장 역할을 하던 견장을 떼어 버림으로써 반란에 동참하였고 함장 전속부관 알렉세예프 대위도 같이 동참했다. 군의관 갈렌코 군의중위는 반란에 동참하지는 않았으나 도망치지도, 항복하지도 않고 부상당한 장병들을 치료했고 수병들으로써도 의사가 필요했기에 갈렌코 중위를 내버려뒀다. 그러나 제일 처음 총에 맞아 중태에 빠진 바쿨린추크 수병은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 다만 사망 직전 의식을 겨우 되찾고 마튜셴코 수병장에게 "배는 어찌되었나?"라는 질문을 던졌고 성공했다는 대답에 미소지으며 "잘했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 외에 군종관(당시 러시아군의 러시아 정교 사제는 장교가 아닌 군무원이었다.) 파르멘 신부 역시 수병들에게 약간의 구타를 당하긴 했으나, 살해당하지 않고 사자에 대한 종교 의식 등을 접전해 주었다.
한편 포템킨에서 겨우 도망쳐 온 장교들을 통해 반란사실을 감지한 어뢰정 N267호 정장 유르겐스부르크 대위는 당황했다. 어뢰를 발사할까도 생각해봤으나 아무리 그래도 최신예 전함을 함부로 공격하는 건 무리라 여겨 뱃머리를 돌려 현장을 빠져나가려 들었다. 하지만 포템킨에서 배를 장악한 마튜셴코 수병장의 지시로 속사포를 겨눠 발포했다. 당연히 규모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N267호정은 혼비백산했고 여기 수병들도 이대로 죽느니 같이 뜻을 따르자는 것을 본 정장은 백기를 들어 항복한다. 그리고 어뢰정의 장교들도 묶여 감금되면서 포템킨과 어뢰정 N267호는 반란을 일으킨 수병들 손에 들어갔다. 일단 이 시점에서 반란의 첫 페이지는 성공적이었다. 다만 항해나 전투를 위한 전문 기술들은 장교와 하사관 없이 수병들만으로는 구사하기 힘들어 반란에 협조한 장교, 하사관들을 위주로 제한적인 지휘권을 보장했고 당직 등도 평시처럼 돌아갔다.
당시 러시아 전역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대대적인 파업과 시위가 벌어지던 중이었는데, 흑해 연안의 항구 도시인 오데사도 그러한 곳 중 하나였다.
반란 수병들이 완벽하게 장악한 포템킨 함과 N267호정은 노동자의 상징인 붉은 깃발을 걸고 오데사에 도달,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시내의 러시아 육군 주둔지에 함포 2발을 발사한다.[7] 흑해함대에서는 전함 5척을 동원하여 포템킨을 막고자 했으나 '''5개 함 모두가 포격을 거부하고 게오르기 파베다노세츠 함은 아예 포템킨에 합류해 버렸다.''' 애당초 출발할 때 반란이 우려된다 하여 함내 분위기가 안 좋은 전함 1척은 두고 갔음에도 이렇게 되었다.
그러나 수병들끼리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었고 맨 처음 반란을 일으킨 7명 중 하나인 표도르 미키시킨 수병은 보급품을 얻으러 가던 길에 잠복하고 있던 러시아 육군의 공격을 받아 즉사, 또다른 7명 중 하나인 일리야 카디로프 수병은 부상을 당해 붙잡혔다. 심화되던 갈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게오르기 파베다노세츠 함은 후일 정부에 항복, 알렉세예프 대위와 칼룬니 후보생 두 기관장교는 겁을 먹고 고민하던 몇몇 수병들을 설득하여 N267호정을 타고 도망가 정부에 항복했다. 이 어뢰정의 수병들은 일단 겁을 먹고 반란에 가담하긴 했으나, 전함이나 순양함 등 큰 함정들과 달리 구축함이나 어뢰정 등 작은 함정에선 장교나 사병이나 모두 열악한 환경에서 함께 근무하여 신분 간 갈등이 적었고 보다 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편이었기 때문에, 장교들을 포템킨 함으로 넘기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등 가담 정도가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포템킨 함은 끝까지 결사항전하고 루마니아까지 가서 함선을 넘긴다. 루마니아에 도착한 뒤 송환되어 재판을 받은 61명 중 주동자인 마튜셴코 수병 등 7명은 교수형, 19명은 시베리아 유배형, 35명은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수들은 1905년에 형이 집행되었다. 유배형을 받은 이들 중 펠트만 수병과 파블로 수병은 시베리아를 탈출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달아났다. 이 중 펠트만 수병은 러시아 혁명 후 소련으로 돌아와 영화 전함 포템킨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주동자들 중 송환되지 않은 7명의 수병들 가운데 나머지는 루마니아에 억류되었다. 그러다가 1906년 루마니아에서도 사회주의 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루마니아 왕실은 포템킨 함 승조원들이 문제가 있다고 여겨 주동자 7인을 포함한 수병 86명을 재판에 회부해 수감했다. 그 가운데 7명 주모자 중 하나였던 요제프 드미첸코 수병만이 영국으로 달아났다가 나중에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서 거기서 천수를 누리고 죽었으며 그 밖에 남은 다른 수병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나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포템킨 함은 반란을 일으킨 함선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에 반환된 후, 성 판텔레이몬의 이름을 따서 '판첼리몬'으로 1905년 10월 9일에 개명되었다. 분노한 니콜라이 2세가 비하적인 명칭을 붙였다는 설이 미국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떠도는데,[8] 기본적으로는 잘못된 이야기다. 아무리 당시 러시아가 막장이었다지만 몇 안되는 금쪽같은 전함에 굳이 비하적인 명칭을 붙여서 사기를 떨어트릴 이유는 없다.
사실 반란 자체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가깝고, 이후에도 경과를 보면 반란의 진행 방향을 놓고 우왕좌왕하다 용두사미로 끝난 감이 있다. 하지만 국가의 중요한 전략무기인 전함에서 반란이 일어나 체제를 위협했다는 점[9] 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러시아 제국 붕괴의 시초를 알린 사건으로, 12년후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사건으로 공산권 국가에서 해군은 사회주의의 선봉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었고, 이는 후에 공산권 국가의 해군 장병들이 전반적으로 잘 대우받는 계기가 되었다. 상징적인 의미도 있지만, 포템킨 함 반란사건의 원인이 수병들에 대한 부실한 대우였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는 것도 있었다. 실제로 이후 수병들의 처우가 굉장히 개선되어, 소련 해군 및 현 러시아 해군은 총원 모병제로만 수병을 조달하고 복무 기간도 육군보다 긺에도, 지원률이 항상 높아 인적 자원 걱정을 타군에 비해 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포템킨 함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Борец за свободу"(자유를 위해 싸우는 전사) 함으로 또 새롭게 이름을 바꿔서 참전했지만, 러시아의 수상함대 전력이 지리멸렬한데다 적국인 오스만 제국도 사정은 마찬가지라 그다지 활약의 기회는 없었다. 다만 1915년 오스만 제국 해군의 순양전함 야부즈 술탄 셀림 함[10] 과 포격전을 벌여, 엄연히 드레드노트급인 야부즈 함을 상대로 분전하여 명중탄을 내는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
이후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러시아 내전 과정에서 여기로 넘어갔다 저기로 넘어갔다 하면서 이름도 몇번씩 바뀌는 고생을 하다가, 최종적으로는 1919년 영국-프랑스 해군에게 나포되어 폭파 처분되는 불운을 맞는다.
워낙 손상이 심했던지라 다시는 전열에 복귀하지 못하고 세바스토폴 항 외부에 방치되어 있다가 결국 1923년부터 해체작업에 들어갔다. 최종적인 퇴역처리는 1925년. 이 과정에서 일부 구조물만 떼어내 기념관에 보존하였다. 무사히 살아남았다면 방호순양함 아브로라[11] 함 못지 않게 대접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포템킨의 반란은 수병에 대한 가혹한 대우가 원인이었는데, 생활수준이 다소 낙후된 러시아 뿐 아니라 전세계 모든 국가들의 함상 생활이 전체적으로 참담했다. 포템킨의 썩은 고기가 특이한 게 아니고 당시의 저장 기술로는 항해가 오래되면 저장해둔 식재료들이 썩어가 곰팡이가 생기거나 벌레가 생기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해군 특성상 항구에 기항하기 전까진 보급이 불가능하기 때문. 이 탓에 바다에서 일하는 것은 기피되는 일이었으며, 당장 조선 수군만 하더라도 칠반천역으로 여겨져 수군 입대를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이 난중일기등의 기록에 남아있다.[12] 특전 U보트에서는 식탁에 오르는 고기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이 잘 묘사되며,[13] 오래되어 상한 보급품의 썩은 부분만 칼로 도려내고 먹는 장면도 나온다.
보급의 난해함과 후달리는 저장 기술이 문제였으므로 전세계 최강인 영국 해군조차도 염장고기를 오크통 속에 잔뜩 쌓아놓는 게 현실이었으며, 굶을 수는 없으므로 녹색 곰팡이가 피든 말든 배고프면 꺼내먹어야 했다. 염장고기에 곰팡이가 생기는 건 보존기술의 한계상 병조림과 통조림이 나오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신선한 야채는 꿈도 꿀 수 없으며 물 또한 오래되면 곰팡이가 피며 썩어버리기에 더러운 물맛을 가리려고 술을 타먹기 시작했다. 주식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던 건빵의 경우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더럽게 딱딱하기 그지없었는데 어느 정도였냐 하면 영국 해군의 군율에는 '''"식사시간에 전우에게 절대 건빵을 던지지 말 것"'''이라는 조항이 있을 정도로 거진 벽돌 취급을 했다. 뿐만 아니라 물도 오래되면 썩기 때문에 항해가 길어지면 물 대신 장기 보존에 유리한 럼을 마셔댔다. 왜 하필 럼이냐면 가장 저렴한 술이었기 때문. 그래서 선원, 수병, 해적 가릴 것 없이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으며, 채소나 과일을 장기간 먹지 못해 비타민 C 결핍으로 괴혈병에 시달리기까지 했다.[14]
이렇게 환경이 막장이니 항구 같은 곳에서 모병을 하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멍청이들이나 매우 가난한 극빈층, 공짜로 술을 준다는 얘기에 들어온 거지들이나 지원했지 대부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래서 징병된 사람들은 다들 배를 안 타려고 발버둥을 쳤으며, 모병제를 유지하는 영국 해군에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납치(...)해서 수병으로 채워넣기까지 했다.[15] 심지어 죄수들을 대상으로 징발했는데 차라리 감옥에 다시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인원이 있기도 했다.
해군 강국인 영국은 되려 타국 해군보다 수병 처우 개선이 늦어서, 전함들조차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공식 수병 거주구역이 없었다. 수병들은 잠을 잘 때면 복도에 해먹을 걸고 올라가 잤는데 이 해먹조차도 부족하여 해먹 1개를 교대로 써가면서 잠을 자야 할 정도였다. 이와 반대로 당시만 해도 장교는 귀족급이라는 인식이 남아있기 때문에 개인 침대와 공간이 허락되었다. 위생도 개판이라 넘쳐나는 쥐를 때려잡을 고양이는 반드시 군함에 태우고 다녔다.[16]
이런 생활로부터 조금 자유로운 함선이 그나마 인권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인식이 일찍부터 있던 미 해군 함선 정도였다. 그나마 자유롭다는 미 해군에서도 여러 크고 작은 일[17] 을 겪으면서 차근차근 고쳐나갔다. 남북전쟁 당시 남겨진 기록을 봐도 북군이나 남군이나 해군 환경이 막장이라 백인 흑인 가리지 않고 수병이 되었고 이 열악한 극한환경 속에서 '''백인과 흑인이 차별대우 받지 않고 어울려 지내기도 하였다.'''[18] 오죽하면 서로 죽어라 싸우던 적국의 해군들이 전투가 끝나면 아군, 적군 관계없이 입수자의 목숨만은 살려주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뱃사람이라는 고된 일을 한다는 동질감 때문이다.
2차 대전 직전, 영국 해군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 중 하나는 영국 해군성이 수병 월급을 대폭 낮추자[19] 수병들이 거기에 대한 반대표시로 단체 파업을 일으킨 것이 있는데(인버고든 항명), 하필 대규모 기동훈련이 있는 날이었기에 항구에 정박하는 배들마다 소식이 전해져 파업 규모가 점점 커졌다고 한다. 그러나 장교들이 슬기롭게 대처한 덕에 파업은 평화롭게 진행되었고, 해군성은 곧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이후 주동자 처벌 등도 전혀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등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안한건 아니고 파업을 주도한 수병들을 전역시켰다.
이러한 수병들의 파업은 나름 영국 해군의 전통(?)이었다. 프랑스 혁명 기간 중(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도 이런 대규모 파업이 있었다. 당시에도 영국 해군 수병들은 급여 인상이나 식단 개선 등을 내걸고 파업을 했지만 스스로 규율을 지켜 장교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고, 또 전쟁 중이던 프랑스 해군이 나타나면 파업을 일시 중단하고 프랑스 함대와 맞서 싸우겠다고 천명하며 교섭을 벌여 일부 요구조건을 관철시켰고 주동자 처벌도 없었다고 한다. 단 같은 시기에 다른 곳에서 벌어진 파업에서는 주동자들이 되도 않은 정치적 요구[20] 까지 해대다 최후에는 프랑스로의 도주까지 꾀해서 주동자들은 모두 처벌(사형당하거나 호주로 유형당하는 등...)되었다고 한다. 그외에도 해외에서 작전 중이던 군함의 수병들이 봉급 지급이 행정착오로 제때 이루어지지 않자 이에 항의해 파업을 했고 영국 해군은 주동자 처벌없이 봉급을 지급했으며 수병들도 바로 임무에 복귀한 사례도 있다. 즉, 수병들의 파업을 무조건 항명이나 반란으로 처벌한게 아니라 요구조건을 내부적인 처우개선(봉급 인상 등) 정도로 국한하고 장교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하지 않을 경우엔 해군 고위층과 정부도 일종의 정당한 권리주장 정도로 받아들였지만, 이를 벗어난 무리한 요구나 폭력 등이 수반되면 단호하게 처벌했다.
수병들의 반란조차 해군 특유의 상황 탓이 컸다. 육군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주변 부대에서 파악하고 진압하러 오겠지만, 장시간 고립된 상태로 항해하는 경우가 많은 해군의 경우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소수의 장교들은 어떻게 손을 써 보지도 못하고 배를 점거당하기 쉬웠다. 그래서 가혹한 체벌로 수병들을 억눌러야 했던 것인데, 가혹한 체벌을 가할 수록 수병들의 반발은 더 커질테고, 그러다 한계를 넘으면 반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강하게 처벌하면 또 해군 조직이 유지되기 힘들어진다. 따라서, 불만에 못 이긴 수병들이 파업이나 반란 등의 형태로 그것을 표현할 경우 장교들에게 해를 끼치고 배를 점거하는 등 도를 넘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수병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며 가담자를 처벌하지 않고 불문에 붙이는 등 유화적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범선 시대 영국 해군의 경우 반란을 모의중인 수병들은 밤중에 갑판에서 '''포탄을 굴린다'''는 습관이 있었다(...). 당연히, 진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다는 갑판 밑에 위치한 장교 침실에 포탄 굴리는 소리를 들려주며 '''"우리 지금 화 많이 났다. 뒈지기 싫으면 처우 개선해라."'''고 시위하는 것에 가까웠다.
해병대가 창설된 주 원인 중 하나도 이것이었는데,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장교들을 보호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수병들을 수감하는 등 일종의 헌병 역할을 맡기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해병들을 딱히 우대해 주거나 한 것도 아니고, 되려 19세기 중반 세일러복이 생기기 전까진 자유롭게 사복 입었던 수병들과 달리 한여름에도 꽉 끼는 레드코트 입고 각잡고 서있어야 하는 등 개고생을 해야 했던지라, 대우가 거지같으면 해병들이 되려 수병들과 합세해 장교들을 족치는 데 앞장서기도 했으므로 만능 해결책은 아니었다.
포템킨 함의 반란에서 특이했던 점은 '''출항 전날 사와서 출항 당일 배식한''' 고기에 구더기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계절이 여름이고 저장기술이 미비하여 식재료가 방치되다시피 해서 맛이 가기 시작해 구더기가 나온 것이다. 물론 신선한 고기도 더운 여름에 그대로 방치하면 미처 썩기 전에 파리가 꼬여서 구더기가 생길 수 있다. 꼭 썩은 고기에만 파리가 꼬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출항 당일에 구더기가 생긴 것은 분명 상식 밖의 일이었기에 이 점에서 혹시 처음부터 싱싱한 고기를 사오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군수자금 횡령 등을 의심해야 할 여지가 생긴다. 즉 평소에 쌓인 불만이 누적된 것이 '''출항 당일부터''' 구더기가 생긴 고기가 나오자 터졌을 것이다. 수병 노릇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고 항해가 길어지면 썩은 고기가 나올 것 정도는 그 동안의 경험으로 당연히 알고 있을 테지만 무려 출항 당일에 벌써부터 구더기가 들끓는 고기가 나오니 열이 받을 수밖에.
영어: '''The uprising on the battleship "Potemkin"'''
한국어: '''포툠킨(포템킨) 함 반란 사건'''
1. 개요
1905년 6월 27일[1] 에 일어난 반란 사건. 러시아 해군 전함 "포템킨(포툠킨, Потёмкин)"[2] 함에서 일어났다. 우연이지만 사건이 일어난 계기가 수병들의 불합리한 처우라는 점에서 임오군란과 비슷하다.
2. 당시 상황
당시 러시아 제국은 오랜 기간 누적된 갖은 국가 내부의 모순으로 사회적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 폭발 직전까지 몰렸다. 더구나 1904년부터 시작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군의 상황이 점점 불리해지며 국민들의 불만을 더욱 쌓아올렸고, 여기에 차르의 궁전 앞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던 노동자 행렬이 무차별 사격당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지면서 민심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된다.
여기에 더해 포템킨이 소속된 러시아 해군은 수병들에게 비인간적인 생활을 강요하며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하지 않는 열악한 함상 환경으로 악명이 높았다. 포템킨의 수병들은 쓰시마 해전에서 발트 함대가 괴멸당하자 다음에는 자신들이 소속된 흑해 함대의 차례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까지 폭증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6월 27일, 훈련을 위해 출항한 포템킨에서, 수병들의 식사로 제공될 예정이었던 쇠고기들을 내리던 식사당번들이 이 고기들이 썩기 시작해 구더기가 득시글대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들의 외침을 듣고 달려온 수병들이 이 고기들을 폐기하고 새 고기를 달라고 원성을 높였다. 이 고기는 포템킨 함의 함장 예브게니 골리코프 대령의 지시로 출항 전날인 26일에 포템킨과 함께 있던 소형 어뢰정 N267호정의 정장인 클로트 폰 유르겐스부르크 대위가 항구의 푸줏간에서 구매한 고기였으며, 고기를 수령하여 건조시키기 위해 외부 갑판에 쇠꼬챙이로 꿰어 두는 작업을 했을 때는 멀쩡했던 것들이었다.
수병들의 소란에 군의장(함내 최선임 군의관)인 스미르노프 군의대위가 부식 검수를 위해 나타났는데, 그는 이 고기는 좋은 고기이며, 식초로 소독하여 먹으면 별 탈 없다며 배식토록 했다. 하지만 수병들은 분노하여 이 고기로 끓인 수프를 먹는 것을 거부[3] 했고, 조리병의 보고를 받고 직접 취사장과 수병들의 점심 식사 장소인 갑판[4] 에 가본 부장 이폴리트 길리아롭스키 중령은 빵과 물만 먹고 있는 수병들에게 수프를 먹지 않으면 항명 행위로 간주한다고 했으나, 되려 수병들에게 "썩은 고기 너나 실컷 쳐먹어라."는 야유만 받고 돌아와, 함장 골리코프 대령에게 수병들이 항명한다고 보고했다.
길리아롭프스키 중령의 보고를 받은 골리코프 대령은 승조원들을 후갑판에 집결시킨 뒤, 정 못믿겠으면 시료를 채취해 육상에 보내 검수시키겠다고 하여 수병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가라앉혔다. 그러나, 평소에도 수병들에게 가혹행위를 일삼으며 인간대우를 해주지 않아 갖은 증오를 끌어모으던 부장 길리아롭스키 중령은 함장의 관대함이 승조원들을 버릇없게 만든다고 생각하여, 함장의 조치로 어느 정도 진정된 수병들이 함장이 떠난 뒤 해산하려 하자 이들을 재집결시키고 위병을 부르고 방수포[5] 를 가져오라며 '''본보기로 수병 몇 명을 총살시키려 들었다.''' 이에 겨우 누그러뜨린 불만이 재차 폭발한 수병들은 크게 분노하였고, 뒤이어 일어난 폭력행위는 곧 함선 전체를 반란으로 몰아넣었다. 단 7명으로 시작된 이 소동은 여러 불만이 누적된 다른 수병들이 계속 합류하며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이들을 통제해야 할 하사관들은 기세에 눌려 이를 방기했다.
3. 진행
주모자인 7명 중 하나인 그리고리 바쿨린추크 수병이 소총으로 부장을 쐈으나 빗나갔으며, 부장이 권총으로 반격하여 바쿨린추크가 총알에 맞아 쓰러지자 다른 주모자인 아파나시 마튜셴코 어뢰수병장이 소총으로 부장의 머리를 맞춰 즉사시켰다. 부장 근처에 있던 리벤초프 사관후보생도 마튜셴코의 총에 맞아 즉사했으며 총 소리를 듣고 나온 포술장 네우파코예프 대위, 통신관 막시밀리아프 대위도 차례로 사살당했다. 장교들이 차례로 사살당하자 쳐다보기만 하던 다른 수병들도 덩달아 병기고로 들어가 총을 꺼내왔다. 머지않아 전함에 있는 '''700명에 가까운 수병 모두가 반란에 가담'''하면서 장교들에게 지옥이 열렸다. 이 난리통 와중에 바흐틴 후보생은 수병 2명을 사살했으나 수병들의 분노가 담긴 약 20여발의 총알을 온 몸에 얻어맞으며 호되게 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피투성이인 채로 물로 뛰어들어 N267호정으로 헤엄쳐가서 반란 사실을 말하고 거기에서 숨을 거뒀다.
곧이어 기관장 나자로프 중령, 보급관 마카로프 대위가 부상을 입은 채로 물로 뛰어들어 헤엄쳐서 N267호정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항해장 그리고리예프 대위는 헤엄쳐서 달아나던 도중 어느 수병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아 즉사한다. 수병들과 장교들의 총격전이 마구 벌어졌을 때, 뒤늦게 어뢰실에서 나온 어뢰관 빌헬름 트라실로프 톤 대위가 큰 소리로 일갈했다. 톤 대위는 평민 출신으로서 수병들을 아껴준 드문 장교였기에 수병들이 멈칫거렸고 톤 대위는 권총을 들면서 당장 반란을 멈추라고 외쳤지만,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 마튜셴코 수병장이 소총을 들자 톤 대위와 마튜셴코 수병장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사격하여 마튜셴코 수병장은 가벼운 부상을 입었고 톤 대위는 사망하였다.
주요 장교들이 죽거나 도망가는 와중에 수병들은 2명의 장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바로 함장인 예브게니 골리코프 대령과 식초 운운으로 수병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군의장 스미르노프 대위였다. 도망가지 못한 몇몇 장교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기에 군의관인 갈렌코 중위와 함장 전속부관인 알렉세예프 대위를 찾아낸 마튜셴코는 함장과 군의장이 어디 있는지를 캐물었고 이들은 그들이 숨을만한 곳을 말해주었다. 수병들은 배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하였고 얼마 안 가 총성과 함께 함장과 군의장이 피투성이로 끌려나왔다. 먼저 군의장 스미르노프 대위는 '''썩은 고기가 억지로 입에 처박힌 채 수병들의 욕설과 구타를 당하다 얼마 안 가 사살당해 바다에 버려졌다.''' 함장은 다른 장교들보다는 관대하게 수병들을 대해 왔기에 함장의 처분을 두고 논란이 일었으나, 얼마 전 드미트리 시로프 수병을 사소한 잘못으로 이등수병으로의 강등이라는 엄벌을 가한 적이 있어 시로프 수병이 직접 골리코프 대령을 사살하였고 시체는 역시 바다에 버려졌으나 어뢰정 N267호정이 인양했다.
이제 포템킨에 남은 장교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딱 2가지, '''죽거나, 협력하거나''' 뿐이었다. 평민 출신으로 수병들과 사이가 좋던 안톤 코발렌코 기관대위[6] 와 칼룬니 후보생은 수병들이 총을 겨누었으나 마튜셴코는 코발렌코 대위가 사회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지며 뜻을 동의하던 걸 기억하고 그들을 죽이지 말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코발렌코 대위와 칼룬늬 후보생은 계급장 역할을 하던 견장을 떼어 버림으로써 반란에 동참하였고 함장 전속부관 알렉세예프 대위도 같이 동참했다. 군의관 갈렌코 군의중위는 반란에 동참하지는 않았으나 도망치지도, 항복하지도 않고 부상당한 장병들을 치료했고 수병들으로써도 의사가 필요했기에 갈렌코 중위를 내버려뒀다. 그러나 제일 처음 총에 맞아 중태에 빠진 바쿨린추크 수병은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 다만 사망 직전 의식을 겨우 되찾고 마튜셴코 수병장에게 "배는 어찌되었나?"라는 질문을 던졌고 성공했다는 대답에 미소지으며 "잘했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 외에 군종관(당시 러시아군의 러시아 정교 사제는 장교가 아닌 군무원이었다.) 파르멘 신부 역시 수병들에게 약간의 구타를 당하긴 했으나, 살해당하지 않고 사자에 대한 종교 의식 등을 접전해 주었다.
한편 포템킨에서 겨우 도망쳐 온 장교들을 통해 반란사실을 감지한 어뢰정 N267호 정장 유르겐스부르크 대위는 당황했다. 어뢰를 발사할까도 생각해봤으나 아무리 그래도 최신예 전함을 함부로 공격하는 건 무리라 여겨 뱃머리를 돌려 현장을 빠져나가려 들었다. 하지만 포템킨에서 배를 장악한 마튜셴코 수병장의 지시로 속사포를 겨눠 발포했다. 당연히 규모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N267호정은 혼비백산했고 여기 수병들도 이대로 죽느니 같이 뜻을 따르자는 것을 본 정장은 백기를 들어 항복한다. 그리고 어뢰정의 장교들도 묶여 감금되면서 포템킨과 어뢰정 N267호는 반란을 일으킨 수병들 손에 들어갔다. 일단 이 시점에서 반란의 첫 페이지는 성공적이었다. 다만 항해나 전투를 위한 전문 기술들은 장교와 하사관 없이 수병들만으로는 구사하기 힘들어 반란에 협조한 장교, 하사관들을 위주로 제한적인 지휘권을 보장했고 당직 등도 평시처럼 돌아갔다.
당시 러시아 전역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대대적인 파업과 시위가 벌어지던 중이었는데, 흑해 연안의 항구 도시인 오데사도 그러한 곳 중 하나였다.
반란 수병들이 완벽하게 장악한 포템킨 함과 N267호정은 노동자의 상징인 붉은 깃발을 걸고 오데사에 도달,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시내의 러시아 육군 주둔지에 함포 2발을 발사한다.[7] 흑해함대에서는 전함 5척을 동원하여 포템킨을 막고자 했으나 '''5개 함 모두가 포격을 거부하고 게오르기 파베다노세츠 함은 아예 포템킨에 합류해 버렸다.''' 애당초 출발할 때 반란이 우려된다 하여 함내 분위기가 안 좋은 전함 1척은 두고 갔음에도 이렇게 되었다.
4. 최후
그러나 수병들끼리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었고 맨 처음 반란을 일으킨 7명 중 하나인 표도르 미키시킨 수병은 보급품을 얻으러 가던 길에 잠복하고 있던 러시아 육군의 공격을 받아 즉사, 또다른 7명 중 하나인 일리야 카디로프 수병은 부상을 당해 붙잡혔다. 심화되던 갈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게오르기 파베다노세츠 함은 후일 정부에 항복, 알렉세예프 대위와 칼룬니 후보생 두 기관장교는 겁을 먹고 고민하던 몇몇 수병들을 설득하여 N267호정을 타고 도망가 정부에 항복했다. 이 어뢰정의 수병들은 일단 겁을 먹고 반란에 가담하긴 했으나, 전함이나 순양함 등 큰 함정들과 달리 구축함이나 어뢰정 등 작은 함정에선 장교나 사병이나 모두 열악한 환경에서 함께 근무하여 신분 간 갈등이 적었고 보다 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편이었기 때문에, 장교들을 포템킨 함으로 넘기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등 가담 정도가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포템킨 함은 끝까지 결사항전하고 루마니아까지 가서 함선을 넘긴다. 루마니아에 도착한 뒤 송환되어 재판을 받은 61명 중 주동자인 마튜셴코 수병 등 7명은 교수형, 19명은 시베리아 유배형, 35명은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수들은 1905년에 형이 집행되었다. 유배형을 받은 이들 중 펠트만 수병과 파블로 수병은 시베리아를 탈출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달아났다. 이 중 펠트만 수병은 러시아 혁명 후 소련으로 돌아와 영화 전함 포템킨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주동자들 중 송환되지 않은 7명의 수병들 가운데 나머지는 루마니아에 억류되었다. 그러다가 1906년 루마니아에서도 사회주의 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루마니아 왕실은 포템킨 함 승조원들이 문제가 있다고 여겨 주동자 7인을 포함한 수병 86명을 재판에 회부해 수감했다. 그 가운데 7명 주모자 중 하나였던 요제프 드미첸코 수병만이 영국으로 달아났다가 나중에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서 거기서 천수를 누리고 죽었으며 그 밖에 남은 다른 수병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나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5. 의의
포템킨 함은 반란을 일으킨 함선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에 반환된 후, 성 판텔레이몬의 이름을 따서 '판첼리몬'으로 1905년 10월 9일에 개명되었다. 분노한 니콜라이 2세가 비하적인 명칭을 붙였다는 설이 미국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떠도는데,[8] 기본적으로는 잘못된 이야기다. 아무리 당시 러시아가 막장이었다지만 몇 안되는 금쪽같은 전함에 굳이 비하적인 명칭을 붙여서 사기를 떨어트릴 이유는 없다.
사실 반란 자체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가깝고, 이후에도 경과를 보면 반란의 진행 방향을 놓고 우왕좌왕하다 용두사미로 끝난 감이 있다. 하지만 국가의 중요한 전략무기인 전함에서 반란이 일어나 체제를 위협했다는 점[9] 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러시아 제국 붕괴의 시초를 알린 사건으로, 12년후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사건으로 공산권 국가에서 해군은 사회주의의 선봉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었고, 이는 후에 공산권 국가의 해군 장병들이 전반적으로 잘 대우받는 계기가 되었다. 상징적인 의미도 있지만, 포템킨 함 반란사건의 원인이 수병들에 대한 부실한 대우였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는 것도 있었다. 실제로 이후 수병들의 처우가 굉장히 개선되어, 소련 해군 및 현 러시아 해군은 총원 모병제로만 수병을 조달하고 복무 기간도 육군보다 긺에도, 지원률이 항상 높아 인적 자원 걱정을 타군에 비해 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6. 이후의 행적
포템킨 함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Борец за свободу"(자유를 위해 싸우는 전사) 함으로 또 새롭게 이름을 바꿔서 참전했지만, 러시아의 수상함대 전력이 지리멸렬한데다 적국인 오스만 제국도 사정은 마찬가지라 그다지 활약의 기회는 없었다. 다만 1915년 오스만 제국 해군의 순양전함 야부즈 술탄 셀림 함[10] 과 포격전을 벌여, 엄연히 드레드노트급인 야부즈 함을 상대로 분전하여 명중탄을 내는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
이후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러시아 내전 과정에서 여기로 넘어갔다 저기로 넘어갔다 하면서 이름도 몇번씩 바뀌는 고생을 하다가, 최종적으로는 1919년 영국-프랑스 해군에게 나포되어 폭파 처분되는 불운을 맞는다.
워낙 손상이 심했던지라 다시는 전열에 복귀하지 못하고 세바스토폴 항 외부에 방치되어 있다가 결국 1923년부터 해체작업에 들어갔다. 최종적인 퇴역처리는 1925년. 이 과정에서 일부 구조물만 떼어내 기념관에 보존하였다. 무사히 살아남았다면 방호순양함 아브로라[11] 함 못지 않게 대접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7. 번외: 열악한 함상 생활
포템킨의 반란은 수병에 대한 가혹한 대우가 원인이었는데, 생활수준이 다소 낙후된 러시아 뿐 아니라 전세계 모든 국가들의 함상 생활이 전체적으로 참담했다. 포템킨의 썩은 고기가 특이한 게 아니고 당시의 저장 기술로는 항해가 오래되면 저장해둔 식재료들이 썩어가 곰팡이가 생기거나 벌레가 생기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해군 특성상 항구에 기항하기 전까진 보급이 불가능하기 때문. 이 탓에 바다에서 일하는 것은 기피되는 일이었으며, 당장 조선 수군만 하더라도 칠반천역으로 여겨져 수군 입대를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이 난중일기등의 기록에 남아있다.[12] 특전 U보트에서는 식탁에 오르는 고기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이 잘 묘사되며,[13] 오래되어 상한 보급품의 썩은 부분만 칼로 도려내고 먹는 장면도 나온다.
보급의 난해함과 후달리는 저장 기술이 문제였으므로 전세계 최강인 영국 해군조차도 염장고기를 오크통 속에 잔뜩 쌓아놓는 게 현실이었으며, 굶을 수는 없으므로 녹색 곰팡이가 피든 말든 배고프면 꺼내먹어야 했다. 염장고기에 곰팡이가 생기는 건 보존기술의 한계상 병조림과 통조림이 나오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신선한 야채는 꿈도 꿀 수 없으며 물 또한 오래되면 곰팡이가 피며 썩어버리기에 더러운 물맛을 가리려고 술을 타먹기 시작했다. 주식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던 건빵의 경우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더럽게 딱딱하기 그지없었는데 어느 정도였냐 하면 영국 해군의 군율에는 '''"식사시간에 전우에게 절대 건빵을 던지지 말 것"'''이라는 조항이 있을 정도로 거진 벽돌 취급을 했다. 뿐만 아니라 물도 오래되면 썩기 때문에 항해가 길어지면 물 대신 장기 보존에 유리한 럼을 마셔댔다. 왜 하필 럼이냐면 가장 저렴한 술이었기 때문. 그래서 선원, 수병, 해적 가릴 것 없이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으며, 채소나 과일을 장기간 먹지 못해 비타민 C 결핍으로 괴혈병에 시달리기까지 했다.[14]
이렇게 환경이 막장이니 항구 같은 곳에서 모병을 하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멍청이들이나 매우 가난한 극빈층, 공짜로 술을 준다는 얘기에 들어온 거지들이나 지원했지 대부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래서 징병된 사람들은 다들 배를 안 타려고 발버둥을 쳤으며, 모병제를 유지하는 영국 해군에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납치(...)해서 수병으로 채워넣기까지 했다.[15] 심지어 죄수들을 대상으로 징발했는데 차라리 감옥에 다시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인원이 있기도 했다.
해군 강국인 영국은 되려 타국 해군보다 수병 처우 개선이 늦어서, 전함들조차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공식 수병 거주구역이 없었다. 수병들은 잠을 잘 때면 복도에 해먹을 걸고 올라가 잤는데 이 해먹조차도 부족하여 해먹 1개를 교대로 써가면서 잠을 자야 할 정도였다. 이와 반대로 당시만 해도 장교는 귀족급이라는 인식이 남아있기 때문에 개인 침대와 공간이 허락되었다. 위생도 개판이라 넘쳐나는 쥐를 때려잡을 고양이는 반드시 군함에 태우고 다녔다.[16]
이런 생활로부터 조금 자유로운 함선이 그나마 인권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인식이 일찍부터 있던 미 해군 함선 정도였다. 그나마 자유롭다는 미 해군에서도 여러 크고 작은 일[17] 을 겪으면서 차근차근 고쳐나갔다. 남북전쟁 당시 남겨진 기록을 봐도 북군이나 남군이나 해군 환경이 막장이라 백인 흑인 가리지 않고 수병이 되었고 이 열악한 극한환경 속에서 '''백인과 흑인이 차별대우 받지 않고 어울려 지내기도 하였다.'''[18] 오죽하면 서로 죽어라 싸우던 적국의 해군들이 전투가 끝나면 아군, 적군 관계없이 입수자의 목숨만은 살려주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뱃사람이라는 고된 일을 한다는 동질감 때문이다.
2차 대전 직전, 영국 해군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 중 하나는 영국 해군성이 수병 월급을 대폭 낮추자[19] 수병들이 거기에 대한 반대표시로 단체 파업을 일으킨 것이 있는데(인버고든 항명), 하필 대규모 기동훈련이 있는 날이었기에 항구에 정박하는 배들마다 소식이 전해져 파업 규모가 점점 커졌다고 한다. 그러나 장교들이 슬기롭게 대처한 덕에 파업은 평화롭게 진행되었고, 해군성은 곧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이후 주동자 처벌 등도 전혀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등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안한건 아니고 파업을 주도한 수병들을 전역시켰다.
이러한 수병들의 파업은 나름 영국 해군의 전통(?)이었다. 프랑스 혁명 기간 중(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도 이런 대규모 파업이 있었다. 당시에도 영국 해군 수병들은 급여 인상이나 식단 개선 등을 내걸고 파업을 했지만 스스로 규율을 지켜 장교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고, 또 전쟁 중이던 프랑스 해군이 나타나면 파업을 일시 중단하고 프랑스 함대와 맞서 싸우겠다고 천명하며 교섭을 벌여 일부 요구조건을 관철시켰고 주동자 처벌도 없었다고 한다. 단 같은 시기에 다른 곳에서 벌어진 파업에서는 주동자들이 되도 않은 정치적 요구[20] 까지 해대다 최후에는 프랑스로의 도주까지 꾀해서 주동자들은 모두 처벌(사형당하거나 호주로 유형당하는 등...)되었다고 한다. 그외에도 해외에서 작전 중이던 군함의 수병들이 봉급 지급이 행정착오로 제때 이루어지지 않자 이에 항의해 파업을 했고 영국 해군은 주동자 처벌없이 봉급을 지급했으며 수병들도 바로 임무에 복귀한 사례도 있다. 즉, 수병들의 파업을 무조건 항명이나 반란으로 처벌한게 아니라 요구조건을 내부적인 처우개선(봉급 인상 등) 정도로 국한하고 장교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하지 않을 경우엔 해군 고위층과 정부도 일종의 정당한 권리주장 정도로 받아들였지만, 이를 벗어난 무리한 요구나 폭력 등이 수반되면 단호하게 처벌했다.
수병들의 반란조차 해군 특유의 상황 탓이 컸다. 육군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주변 부대에서 파악하고 진압하러 오겠지만, 장시간 고립된 상태로 항해하는 경우가 많은 해군의 경우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소수의 장교들은 어떻게 손을 써 보지도 못하고 배를 점거당하기 쉬웠다. 그래서 가혹한 체벌로 수병들을 억눌러야 했던 것인데, 가혹한 체벌을 가할 수록 수병들의 반발은 더 커질테고, 그러다 한계를 넘으면 반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강하게 처벌하면 또 해군 조직이 유지되기 힘들어진다. 따라서, 불만에 못 이긴 수병들이 파업이나 반란 등의 형태로 그것을 표현할 경우 장교들에게 해를 끼치고 배를 점거하는 등 도를 넘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수병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며 가담자를 처벌하지 않고 불문에 붙이는 등 유화적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범선 시대 영국 해군의 경우 반란을 모의중인 수병들은 밤중에 갑판에서 '''포탄을 굴린다'''는 습관이 있었다(...). 당연히, 진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다는 갑판 밑에 위치한 장교 침실에 포탄 굴리는 소리를 들려주며 '''"우리 지금 화 많이 났다. 뒈지기 싫으면 처우 개선해라."'''고 시위하는 것에 가까웠다.
해병대가 창설된 주 원인 중 하나도 이것이었는데,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장교들을 보호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수병들을 수감하는 등 일종의 헌병 역할을 맡기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해병들을 딱히 우대해 주거나 한 것도 아니고, 되려 19세기 중반 세일러복이 생기기 전까진 자유롭게 사복 입었던 수병들과 달리 한여름에도 꽉 끼는 레드코트 입고 각잡고 서있어야 하는 등 개고생을 해야 했던지라, 대우가 거지같으면 해병들이 되려 수병들과 합세해 장교들을 족치는 데 앞장서기도 했으므로 만능 해결책은 아니었다.
포템킨 함의 반란에서 특이했던 점은 '''출항 전날 사와서 출항 당일 배식한''' 고기에 구더기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계절이 여름이고 저장기술이 미비하여 식재료가 방치되다시피 해서 맛이 가기 시작해 구더기가 나온 것이다. 물론 신선한 고기도 더운 여름에 그대로 방치하면 미처 썩기 전에 파리가 꼬여서 구더기가 생길 수 있다. 꼭 썩은 고기에만 파리가 꼬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출항 당일에 구더기가 생긴 것은 분명 상식 밖의 일이었기에 이 점에서 혹시 처음부터 싱싱한 고기를 사오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군수자금 횡령 등을 의심해야 할 여지가 생긴다. 즉 평소에 쌓인 불만이 누적된 것이 '''출항 당일부터''' 구더기가 생긴 고기가 나오자 터졌을 것이다. 수병 노릇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고 항해가 길어지면 썩은 고기가 나올 것 정도는 그 동안의 경험으로 당연히 알고 있을 테지만 무려 출항 당일에 벌써부터 구더기가 들끓는 고기가 나오니 열이 받을 수밖에.
[1] 그레고리력 기준. 당시 러시아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는 6월 14일.[2] 억양을 살려서 제대로 발음하면 "빠쫌낀". 쓰는건 포툠낀이라 쓰지만 강세로 인한 모음 변화와 구개음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포템킨'은 영어 철자(Potemkin)를 표기한 것이거나 Потeмкин(ё를 e로 표기. Ё 참조.)을 잘못 읽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3] 수병들과 장교들은 부식을 따로 조달하고 조리와 식사도 별도로 했기에, 수병들은 군의장이 지가 먹을 거 아니라고 검수를 대충 했다고 분노했다.[4] 당시 군함에선 장교들 외엔 식사 및 휴식 공간이 별도로 없어, 러시아 해군 함정에선 수병들은 갑판 위에 접이식 탁자를 펼쳐 식사 후 다시 접고, 함내 여기저기서 해먹을 걸고 잤다.[5] 당시 러시아 해군에선 총살형 집행시 사형수를 방수포로 덮는 절차가 있었다.[6] 공과대학 출신 인텔리였기에 사회주의에 일찍부터 눈을 떴다.[7] 영화에서는 시민에게 총을 발사한 군대에 대항하여 시민들과 함께 싸우기 위해 포를 발사하는 것으로 묘사.[8] 미국 역사학자 리처드 휴가 쓴 전함 포템킨(2005년 한국에서도 정식번역)에서도 판첼리몬을 '쌍놈' 함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서술되었을 정도이다.[9] 흑해함대 전함 7척 가운데 2척이 반란에 참여했다. 여기에 남은 전함들은 반란군에 대한 포격을 거부하기까지 했으니 이 정도면 흑해 통행을 완전히 마비시키기에 충분한 전력이다. 포템킨 반란이 유명한 이유도 이로 인해 흑해에 이해관계가 있는 국가들간에 국제적 문제로까지 비화되었기 때문이다.[10] 원래 독일의 몰트케급 순양전함 2번함 괴벤으로, 영국에 발주해 건조 중이던 전함을 1차대전이 터지면서 대영제국 깡패에게 먹튀당해 열받아 있던 오스만 제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독일 황제인 빌헬름 2세가 지중해에 파견되었다가 1차 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영국과 프랑스 함대를 피해 오스만으로 도주한 순양전함 괴벤과 경순양함 1척을 오스만 제국 해군에게 넘겼다. 다만 승무원들은 그대로 독일 해군 장병들이었다. 함명의 유래는 셀림 1세. 자세한 내용은 몰트케급 순양전함 문서 참고.[11] 10월 혁명 당시 겨울궁전에 포탄을 발사한 것으로 유명한 순양함. 흔히 영어식인 오로라 함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기념함으로 보존 중.[12] 정확히는 천민이 아닌 양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일말고 다른 일은 할 수 없는 신량역천에 해당된다.[13] 초반엔 꽤 고급스런 느낌이지만, 나중엔 털도 안 뽑힌 고기가 제대로 조리되지도 않고 나온다.[14] 괴혈병이 도대체 왜 일어나는지 알 턱이 없었기에 대책이 없는 괴혈병은 뱃사람들을 괴롭히는 가장 큰 주적이었다. 1753년 영국 해군 군의관 제임스 린드(1715-1794)는 괴혈병을 앓던 수병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끝에 괴혈병이 채소나 과일을 먹으면 낫는다는 걸 입증하며 레몬을 수병들에게 보급하면 괴혈병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해결책을 내놓았는데, 영국 해군성은 레몬이 비싸니 '''수병이 괴혈병으로 죽으면 신병을 뽑아 채워넣으면 그만'''이라 하여 이 해결 방안을 거부하였다. 실로 어이없는 대책이었지만 지금과 달리 린드가 활동했던 시대에는 레몬이 전량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매우 비싼 고급 음식이었다. 따라서 장기간 항해에 레몬을 지속적으로 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동양권에서는 회를 먹으면 괴혈병에 걸리지 않는다는걸 경험적으로 알았지만 서양에선 회를 먹지 않기 때문에 결국 괴혈병을 퇴치할 방법을 알았음에도 예산 문제로 괴혈병에 계속 시달릴 수 밖에 없었던 것. 그나마 린드가 살아있을때 같은 영국인인 제임스 쿡이 휘하 선원들에게 자우어크라우트와 과일을 지급해 세계 최초로 괴혈병 없이 세계 일주를 이뤄냈지만.[15] 그냥 남자들은 머릿수만 채울 수 있다면 아무나 잡아왔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수병이 제대하자마자 다시 잡혀오는 일도 있었다. 특히 선원들은 우수 인력이었기 때문에 근처 술집은 인기 장소였으며, 항해 중 지나가던 상선이 있으면 다짜고짜 나포한 다음 선원을 빼돌리기도 했다. 이건 해군인지 해적인지...[16] 특이하게 인명경시, 가혹행위로 악명높던 일본 해군이 영국보다 사정이 나았는데, 최신예 전함이었던 야마토급 전함 한정으로 모든 수병들을 위한 침대가 구비되어 있었고 호화 여객선 요리사가 징발되어 수병들의 요리를 책임졌다. 그리고 잠수함은 침상을 1인당 1개씩 100% 구비했다. 물론 다른 함선들은 그냥 영국과 똑같이 적당히 해먹치고 자야 했다.[17] 1844년에 사관후보생이 열악한 대우에 불만을 나타내다, 럼에 취해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농담을 했는데 이 말이 함장에까지 퍼져 관련된 3명이 처형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처형된 사관후보생은 당시 미 해군 장관의 아들이었는데, 함장은 그 뒤로 보복성 인사조치로 한직으로 쫒겨나 제독이 되지 못한 채 군 생활을 마감해야만 했다. 당시만 해도 해군장교 후보생들은 현역 해군함에 타서 훈련 및 여러가지를 실습하면서 보조로 배우면서 등용하였는데 이게 어디까지나 함장의 마음대로 이뤄졌기에 이 사건을 계기로 해군사관학교가 생겼으며 해군에 대한 대우 인식이 거론되었다고 한다.[18] 당시 촬영된 사진을 보면 남군이나 북군 수병들이 흑인 백인 따지지 않고 거리낌없이 어깨동무를 하거나 한곳에 모여 찍혀있다. 반면 당시 육군에서는 흑인과 같이 있는 것마저 재수없다고 여겨 사진 하나에 흑인 백인이 같이 나와있는 것조차 찾아보기 어렵다.[19] 1차 대전 때 쓴 엄청난 전비부담으로 전후 영국의 국가재정이 악화되었기에 삭감 자체는 수병들도 납득하고 있었다. 서류상으로는 10% 삭감이었지만 급여 지급 기준이 같이 바뀌면서 실질적인 삭감폭이 25%로 매우 컸기에 파업이 일어났던것.[20] 의회해산이나 프랑스와의 강화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