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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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민주당
한문명
民主黨
영문명
Democratic Party
창당일
2008년 2월 17일[3] (통합민주당)
당명 변경
2008년 7월 6일 (민주당)
해산일
2011년 12월 23일 (민주통합당으로 신설합당)
주소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버드나루로14길 25 (당산동)
대표
손학규 / 4선 (14~16·18대)
원내대표
김진표 / 재선 (17~18대)
의석 수
89석 / 299석
당 색
녹색 (#019E33)
이념
자유주의

내부계파:
사회자유주의
참여민주주의
보수자유주의
사회보수주의
중도개혁주의
진보주의
사회민주주의
정책 연구소
민주정책연구원
홈페이지

2011년 12월 23일 기준
1. 개요
2. 성향
2.1. 계파 분석
3. 당가
4. 역사
5. 역대 지도부
5.1. 대표
5.2. 원내대표
6. 역대 선거결과
6.1. 전국동시지방선거
6.2. 재보궐선거
7. 비판 및 논란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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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8년 2월 17일 창당한 통합민주당이 같은 해 7월 6일 이름을 바꾼 대한민국정당. 2011년 12월 23일 해산하였다. 민주통합당과 그 후신인 민주당의 전신이 된다.
초대 대표이자 발기인[4]손학규경기도 지사. 제2대 대표는 정세균 대표(2008년 7월 ~ 2010년 8월). 제3대 대표는 손학규 대표(2010년 10월 ~ 2011년 12월).

2. 성향


민주당계 정당의 이념 스탠스야 영원한 떡밥거리다. 위클리경향의 기사에 따르면,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민주당을 중도 개혁 노선이라고 하면서 우파라고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했고, 전북대학교 강준만 교수 역시 자신의 저서에서 민주당을 중도라고 주장했다. 반면 손호철 교수 등 사민주의,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계열에서는 민주당을 전형적인 중도우파정당으로 본다.

"통합민주당은 강령과 정책비전을 통해 서민, 중산층,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정당 실현과 민주 번영 통합 평화 환경을 5대 기본가치로 하는 정당을 자임". ‘더 많은 기회, 더 높은 책임, 더 넓은 배려’와 ‘소외계층의 보호' 주장.

- 2008년 통합민주당 창당 당시는 "중도좌파".

“개인과 공동체, 시장과 정부, 자율과 책임, 사익과 공익의 조화와 균형을 통해 고른 경제성장과 서민, 중산층의 복지향상을 함께 추구하고,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는 중도개혁주의 정당임을 선언”

'성장과 분배의 조화'

- 2008년 전당대회 이후 "중도개혁(중도)" 노선의 승리. #

"새로운 정책과 비전을 갖춘 뉴민주당,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책임정당, 국민과 당원이 함께 하는 신뢰받는 수권정당 건설"

- 2008년 당선된 정세균 대표의 "뉴민주당 플랜"(중도) #

무상급식 전면화, 대학등록금 인하, 남북평화협정 전환, 생활형 밀착정책.

- 2010년 1월 좌우논쟁 끝에 재정립된 "뉴민주당 플랜"(중도좌파) #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 '사람중심 시장경제', '보편적 복지', 당내 민주주의 "민주진보세력의 연대와 통합"과 "획기적인 당의 체질 개선과 자기 혁신"

- 2010년 10월 새 강령과 "민주당 선언" (중도좌파) #

'특권 없는 법치', '공정한 시장경제',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촛불민심 계승', "무상급식·보육·의료와 반값등록금, 주거복지, 일자리 복지", '중도적 진보'

- 2011년 12월 민주통합당 강령(중도적 진보. 2010년 강령보다 약간 좌향좌.)
민주당의 강령 역시 중도개혁주의와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 등으로 좌충우돌했으며, 같은 지도부와 같은 구호 아래 내용이 변한 것들도 있다. 대표적으로는 "뉴 민주당 플랜". 그러다보니 "민주당에 이념이 어디있는가. 계파만 있다!"라는 주장도 있었다만은(...)
큰 틀에서 중산층과 서민, 중소기업을 대변하고 햇볕정책에 우호적이며, 호남에 기반을 둔 개혁적 자유주의 정당이라는데는 큰 이론의 여지는 없다. 위의 논쟁도 보통 자유주의를 좌우 구도에서 어떻게 정의해야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가깝다.
여담으로 국민의 정부 시절 새천년민주당을 주도했던 한화갑 등은 새로 창당한 평화민주당의 이념을 공식적으로 중도우파라 내걸었다. # 그러나 금새 묻혀서...
정치 성향과는 상관 없이 십수 년 만에 투쟁정신이 가장 강한 야당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2008년 촛불시위 정국과 MB 악법(4대강 사업 등) 저지, 2009년 미디어법(종편법) 저지 투쟁, 한미 FTA 반대 투쟁 등 18대 국회에서 한나라당의 독주에 계속해서 제동을 걸기 위해 국회 공성전도 많이 벌였으니. 그러나 법안 통과까지는 제동을 걸지 못해서 국민들에게 비판을 많이 받기도 했다.
이런 비판 때문인지, 민주통합당민주당(2013년)18대 대선 전후로 대여 협상 쪽으로 선회했으나 도리어 여당 2중대라는 욕만 먹고 다시 투쟁 쪽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2.1. 계파 분석


민주당 내부에서는 과거 열린우리당을 주도했던 개혁적 중도 세력들과 새천년민주당을 주도했던 중도 보수 세력, 한나라당에서 탈당해 온 인물들 등이 공존하고 있어 진보보수가 뒤엉켜 있는 편이었다. 특히 당의 주요 인물인 손학규 전 대표 또한 보수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던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온 인물이라 당의 성향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사실 이런 다양한 출신 성분이 새천년민주당 이래 민주당계 정당의 오랜 갈등 원인이었다.
당의 계파를 분석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범 친노계열이 당의 주류세력으로 자리매김 했는데, 정세균이 이 주류세력의 수장이었다. 세부적으로 보면 안희정, 이광재 같은 친노직계 일부와 김진표, 조정식 등 사수파, 18대 총선에서 살아남은 소수 486세대 의원과 정세균계[5], 원내에서 생존하거나 당직을 맡았던 민평련 일부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반면 비주류계는 정동영을 중심으로 뭉쳤는데, 전북출신의 일부 의원[6], 정동영계[7], 천정배계[8][9], 김한길계, 舊 민주계, 손학규계가 비주류를 이루었다. 물론 보수성향인 김한길계, 손학규계, 舊 민주계, 박지원계는 성향만 놓고보면 진보적인 천정배계, 정동영계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비주류계열이다보니 연합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김근태를 중심으로 뭉친 민평련계열이나, 임종석, 우상호 같은 486세대 의원 상당수는 18대 총선에서 낙선하여 힘을 잃은 상황이었다. 또한 이해찬, 유시민 같은 친노세력 일부도 당을 이탈한 상황이었다. 물론 이해찬, 민평련 세력, 우상호 등은 모두 19대 총선에서 원내로 돌아오지만.,.
이들 중 가장 알력이 심한 것은 정세균 계파와 정동영 계파인데, 재보궐선거 당시 정동영의 비공천과 그에 따른 무소속 출마 강행 이후 더욱 골이 깊어졌다. 정동영계는 열린우리당 당시 김근태 계파에 비해 보수적인 계파였으나 맹주인 정동영의 용산참사 이후 성향 변화에 따라 가장 진보적인 계파가 되었고, 김한길 계파 잔류세력(이종걸)이나 천정배 계파와도 손을 잡게 되었다. 반면 정세균 계파는 386세대 의원, 소수 김근태 계파와 친노직계(정확히 말해 이광재, 안희정 계열)와 연합적으로 행동했다.[10]

3. 당가




나가자 필승 민주당!
나가자 필승 민주당!
언제나 국민들과 함께
어디서나 국민들과 함께
희망의 깃발을 들어라
우리는 민주당이다
국민의 소중한 뜻으로
국민의 뜨거운 힘으로
승리의 깃발을 들어라
우리는 민주당이다
국민의 사랑 민주당
국민들의 믿음직한 사랑이 되어라
국민의 자랑 민주당
자랑스런 민주주의 당당하게 지켜라
국민의 희망 민주당
살맛나는 대한민국 우리가 만들자
서민과 중산층의 벗 전진하는 민주당
  • 통합민주당(2008년) 당가에서 약간의 수정[11]만 거쳐 그대로 사용되었다. 후신인 민주통합당도 이 멜로디에 가사만 새로 만들어 붙인 것을 당가로 사용했다.

4. 역사




4.1. 개명


2008년 7월 6일 전당대회에서는 정세균 의원을 대표로 하는 지도부를 선출하고 당명을 통합민주당에서 민주당으로 변경했다. 2010년 현재 지도부와 의원층 지분은 구 열린우리당 측과 구 새천년민주당 측간에 6:4 ~ 7:3 정도로 나뉘어진다. 대선 당시 5:5 지분과 7:3 지분 사이에서 무산 된 걸 생각하면 결국(...)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갈등의 흔적은 치유되지 않았으며, 민주당계 정당의 정통성을 두고 다투었던 상대와 같은 당에서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세력들이 빠져나갔다. 대표적으로 2010년유시민을 위시한 친노계 신당파(국민참여당)와 한화갑의 구 동교동계 일파(평화민주당)가 전직 대통령들의 이념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이탈했다. 민주당에 잔류한 인사들은 이 같은 분당적 행보를 적대적으로 보는 입장이었으며, 친노계 사수파와 잔류 동교동계는 이들에 대해서 더 부정적이었다.

4.2. 2010년 지방선거 승리


2010년 6월 2일 치러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무상급식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지지를 호소했으며,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등과 추진한 야권연대(진보신당은 제외)가 효과를 거둬 큰 승리를 거뒀다. 다만 서울시장과 경기지사에서 패배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절반의 승리, 미완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도지사선거에서 친노파(송영길, 이광재, 안희정, 김두관)[12]들이 승승장구한 데다 전라도 지역당에서 충청남/북도, 경상남도, 인천광역시까지 세력을 확장한 것에서 정세균계와 친노 사수파들과의 연합은 옳았다[13]는 것을 증명했으며, 예상 외의 대승이라 지지세력들은 이 결과로 민주당이 자만에 빠져서 또 망하는 것 아니냐 는 불안감 생겨났다. 결국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후 비주류들은 당의 혁신을 부르짖으며 정세균 대표와 각을 세웠다.
이런 가운데 민주당은 지방선거의 승인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미래를 대비하기보다는 그냥 '이대로 정부만 때리면 되겠지'라고 안이하게 있다가... 방어전격인 7.28 재보궐에서 대참패하는 수모를 겪는다. 원래 민주당이나 야당의 지역구였던 지역(서울 은평구을, 충주시, 인천광역시)[14]들을 대부분 잃어버리고 간신히 텃밭인 강원도 원주시와 태백. 영월, 광주 남구만 건진 것. 그나마 광주 남구도 비 민주당 단일후보로 나선 민주노동당 후보에게 맹추격을 당해 겨우 몇천 표 차이로 신승했을 정도니...[15]
결국 정세균 대표는 책임을 지고 8월 2일 대표직을 사퇴했으며 민주당은 10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치열한 당권 경쟁이 불붙었다. 그동안 은둔 중이던 손학규 전 대표와 정동영 의원이 전면에 나섰으며 그 외에 천정배, 박주선(비노계열), 정세균 등의 여러 인사들이 출마를 선언했다.
10월 3일 인천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손학규 후보가 1위로 당선되어 새 대표가 되었고 정동영, 정세균이 그 뒤를 이었다. 정동영은 이로서 일시적으로 부활했으나 결국 강령에서의 "경제민주화" 논쟁 주도를 제외하고는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정세균은 큰 세력의 후퇴를 절감했으나 또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정세균은 민주통합당 창당 과정에서 뜬금없이[16] 나가리가 되었다.

4.3. 민주통합당 창당


2011년 4월 27일 있었던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최대 승부처로 꼽힌 성남시 분당구 을에서 손학규 대표가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권 교체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은 것도 잠시... 10월 26일 하반기 재보선에서는 무소속 박원순 후보에게 밀려서 제1야당이 서울시장 후보도 못내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졌다.
각종 재보궐 선거들에서 민주당 독자로는 정권탈환 불가능라는 것이 판명되면서 2010년 지방선거 이후로 분출된 야권 대통합 논의가 2011년 10월 26일 재보궐 선거 이후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18대 국회 특성상 한나라당의 독주를 막을 수 없는 환경이었음에도 각종 투쟁 등으로 MB 정권의 폭주에 제동을 거려 했었지만 끝내 2011년 11월 22일 한미 FTA한나라당의 단독 강행처리로 통과되면서 민주당은 독자적으로는 사실상 산소호흡기를 뗐다라는 평이 지배적으로 되었다. 그간 공언하던것과는 달리 FTA 통과를 막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유효한 협상 결과를 얻어낸것도 아니기 때문. 정세균과 손학규는 야권 대통합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친노 출신 시민단체인 "혁신과 통합" 등과 야권 중통합에 합의했다.
민주당 내에서는 박지원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민주당 단독 전당대회를 개최해 새 지도부를 구성한뒤에 야권 통합논의를 전개해야 한다는 주장과 민주당 중심의 야권통합 추진론이 일었지만 손학규 대표의 강공 드라이브에 점점 묻히게 되었다. 당내에서 이런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겉으로는 60년 민주당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결국 계파 갈등이다.
문제의 12월 11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말 그대로 헬게이트' 그 자체였다. 통합 반대파들은 투표 자체를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과거 새천년민주당 시절 유시민을 폭행한걸로 유명한 "난닝구 사건"의 주범이 재등장하여 쇠의자를 집어던지기도 했다. 또한 어떤 반대파 당원은 인분을 퍼붓는 추태를 보였다.
박지원 전 원내대표는 투표방해는 안하겠다고 공언했었지만 이 추태의 배후가 그가 아니겠느냐는 의혹도 있었다. 그나마 3개월 뒤 이런 동교동-호남 계 반대파들의 탈당(정통민주당)을 말리며 설득하고 다닌 것도 박지원이었다..
결국 투표 결과가 나오긴 했지만 의결 정족수 논란으로 개표결과 발표가 몇시간동안 중단되고 전당대회장에서 당무위원회가 열리는 초유의 사태끝에 통합이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되었다. 반대파들은 무효소송을 내었으나 무산되었다. 역설적으로 12월 11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민주당이 왜 사라져야 하는지 가장 잘 보여준 한바탕 쇼라는 평가가 나왔다.
2011년 12월 16일, 민주당과 시민통합당은 공식적으로 합당을 결의했으며, 민주당, 혁신과 통합(시민통합당), 시민단체, 한국노총, 창조한국당국민참여당의 진보소통합(통합진보당 결성) 반대파들이 모여서 원샷으로 통합 전당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임시로 붙여진 이름은 "민주진보시민통합정당".
당초 일각의 민주당부터 진보신당까지 야5당의 전면통합은 민노-국참-진보신당 탈당파가 선을 그어버리면서 통합진보당의 창당으로 물건너 간 셈이고,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창조한국당은 일부 탈당파가 합류하는 것으로 그쳤다.
결국 민주당은 마지막 최고위원 및 확대간부회의를 통해 합당을 결의하면서 2008년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구 새천년민주당)의 통합으로 생성된 (통합)민주당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2012년 1월 15일 신당의 전당대회를 개최해 새 통합신당의 지도부를 선출되었다.
물론 새 통합신당의 당명이 민주통합당 으로 결정되어 약칭 민주당이라 했다. 이로서 60년 전통의 민주당은 계속 살아남게 되었다. [17]

5. 역대 지도부



5.1. 대표




5.2. 원내대표




6. 역대 선거결과



6.1. 전국동시지방선거


연도
선거명
광역단체장 (비율)
기초단체장 (비율)
광역의원 (비율)
기초의원 (비율)
2010년
5회
7 / 16 (43.8%)
92 / 228 (40.4%)
360 / 762 (47.3%)
1,025 / 2,888 (35.5%)

6.2. 재보궐선거


연도
국회의원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2008년 10월

0 / 2
0 / 3
1 / 9
2009년 4월
1 / 5

1 / 1
0 / 3
2 / 5
2009년 10월
3 / 5

2010년 7월
3 / 8

2010년 10월

0 / 2
0 / 1
1 / 3
2011년 4월
1 / 3
1 / 1
2 / 6
2 / 5
6 / 23
2011년 10월

0 / 1
2 / 11
4 / 11
7 / 19

7. 비판 및 논란


노무현 전 대통령 생전과 사후 태도가 급변한 점 역시 당의 도덕성 측면에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참여정부에 대한 책임론으로도 갈등을 빚었다.[18]
재무부에 소속되어 분식회계를 자행해 물의를 빚은 문제 등, 호남 지역주의 토호와 관료 출신 의원들이 문제라는 주장도 많았다.
야권 연대를 강력히 외치기는 했는데 결국 광주광역시 선거구를 기존 4인 선거구제에서 2인 선거구제로 갈아치우는 깽판을 저질렀다. 쉽게 말하자면 호남 지자체를 완전히 독식하겠다는 선언. 중앙당사에서는 관여하기 어렵다는 궁색한 발표를 했으나 다른 정당의 반발이 심해 전반적인 야권 연대는 물건너가고 지역별 소규모 연대로 마무리되었다.
게다가 성희롱 경력이 있는 인물을 도지사 후보로 스카우트 해오는 등 공천에서 상식 밖의 짓을 벌였는데, 이것은 결국 반발에 부딪혀 원점으로 돌아갔다.[19][20]
지방선거 당시 야권연대와 관련, 민주당을 제외한 야권연대가 협상과정에서 당선확률 95%인 호남 일부를 달라고 우기고 당선확률 10%인 곳들 일부를 민주당에 양보하겠다는 주장을 했으니 가당치 않다는 민주당 옹호론이 있는가 하면, 이걸 역으로 뒤집어서 민주당이 당선 불투명한 지역만 소수정당에게 떠넘기려 한다는 반론도 팽팽하게 맞섰다.

8. 둘러보기


통합민주당

민주당

민주통합당

국민참여당

평화민주당

[1]소나무 수묵화 로고는 경상북도 울진군 출신으로 불교계에서 이름 높은 수묵화가 이호신 화백의 작품이다. 출신지를 보면 알겠지만 금강송을 모티브로 하였다.[2] 영국 보수당이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 변경한 로고도 역시 초록 나무(단, 여기는 활엽수이다.)이다.[3]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는 2월 18일에 등록하였다.[4] 당시 통합민주당.[5] 정세균 개인의 계파. 전병헌, 강기정, 김영주 등이 속했다. 특히 전병헌은 서울을 한나라당이 휩쓰는 와중에도 한나라당이 공천문제로 다투면서 재선에 성공했다.[6] 이강래 등이 대표적.[7] 이종걸, 박영선 등이 여기에 속했다.[8] 주로 비주류 개혁파.[9] 이때 정세균계와 결별함으로써 정동영-천정배는 이후 비노계로 분류되었다.[10] 이런 정세균의 행보는 물론, 거기에 정세균 본인의 참여정부 시절 열린우리당 정책위원회 의장, 원내대표, 당 의장, 산업자원부 장관 , 열린우리당 사수파 경력이 더해져서 친노로 보는 편도 많다. 다만 최재성, 전병헌 등의 정세균 계파의 친노색이 옅기 때문에 범 친노 혹은 중도계열로 보는 쪽이 더욱 적합하다. 극성 친문계열은 비주류에도 적대감을 보이지 않는 정세균을 박원순과 더불어 견제하는 분위기도 강한 편.[11] 당명에서 빠진 '통합'을 삭제하였고, '서민과 중산층의 벗'이라는 슬로건이 추가되었다.[12] 김정길 전 행자부 장관도 부산시장 선거에서 현직 허남식 시장에게 패배했지만 고무적인 득표율을 올렸고, 야권단일후보인 유시민 전 복지부 장관도 아깝게 김문수 지사에게 패했다.[13] 애초부터 열린우리당 때부터 정세균친노계는 함께 행동했다.[14] 창조한국당 문국현의 의원직 상실로 지역구가 비어버린 서울 은평을은 친이계의 좌장인 이재오가 구 민주계의 원로인 장상 전 총리 서리를 꺾고 원내복귀에 성공했으며, 인천 계양 을(송영길 지역구), 충북 충주(이시종 지역구)도 각각 한나라당 이상권윤진식이 승리했다.[15] 결국 광주광역시오병윤 후보는 통합진보당 명의로 다음 해인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주 서구의 단일 후보가 되어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를 꺾고 당선된다.[16] 친노계가 18대 총선에서의 대거 컷오프와 낙선, 이해찬과 유시민의 탈당으로 약화된 상황에서, 범 친노 계파 중 가장 큰 계파 수장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친문정세균을 모시려고 했지 무시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통합 과정에서 원인 불명으로 밀려난것. 이는 한명숙이 식물 대표가 되는 원인이 되었고, 19대 총선 패배의 요인이 되었다.[17] 여담이지만 실제로 08년 통합민주당 당가#와 12년 민주통합당의 당가# 율동 버전는 거의 같은 멜로디를 변주한 것으로, 가사만 다르다. 이 당가는 윤민석(...)이 작곡하여 논란거리가 되었다. 김도향 버전의 어깨동무#도 있다.[18] 물론 舊 민주계와의 통합을 거치며 김한길계와 정동영계만 있었던 비노계의 세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당에서 많았던 것이 한 몫 했다. 다만 민주당이 노무현 사후에 물타기를 했던 점은 빼도박도 못 할 점.[19] 민주당 후보인 우근민 전 지사는 이미 선거 법을 위반해서 지사직을 잃은 이력이 있었다.[20] 때 마침 한나라당도 친박계 후보인 현명관의 비리의혹이 있어서 둘 다 공천을 철회하는 병림픽을 벌였다. 결국 우근민 전 지사가 6년만에 지사직에 복귀했지만 한나라당과 싸우기에 바빴던 민주당은 우 지사의 복당을 거부했다. 결국 십수년만에 우근민 지사는 새누리당으로 복당했고 2014년 6.4 지방선거를 끝으로 정계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