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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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SK 와이번스의 외야수. 現 SK 와이번스 1군 1루 베이스 코치.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초등학교 시절엔 육상 선수였다. 이후 야구로 방향을 틀었으나 "발이 빠르고 센스가 있지만 키가 작고 힘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주고등학교 시절에는 투수였으나 역시 하드웨어의 문제로 프로의 지명을 받지 못한다. 이후 대학에서도 스카웃 제의가 있었으나 집안 사정이 어려워 연봉 1000만원에 쌍방울 레이더스의 신고선수로 계약했고, 실질적으로는 2000년 SK 와이번스로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단이 인계되면서 SK로 입단하게 되었다.
2.2. 프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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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뷔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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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제대 후 주전으로 도약했던 2005년
입단 후 2년 동안 10경기에 대주자로만 간간이 나오며 1군에선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12] 2002년 말 바로 상무로 입대했다.
군에서 제대한 2005년에는 조범현감독의 관심을 받아 조원우와 조경환을 벤치멤버로 밀어내고 주전 좌익수 자리를 차지하며 출장 경기수가 늘어나 주로 2번 타자로 출전했다. 2006년에는 플래툰 때문에 자주 출전하지 못하다가 김성근 감독 부임 후 본격적으로 가을동화 스토리를 쓰기 시작한다. 2007년엔 0.272 25도루, 2008년엔 0.279 19도루를 했으니 나름대로 자기 밥값을 한 셈이다.
2.2.1. 2009 ~ 2010 시즌
하지만 2009년 시즌은 1할대의 심각한 타격부진으로 2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거의 박재홍의 대수비요원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마저도 9월 3일 경기에서 평범한 우익수 앞 안타를 잡지 못해 단타로 막을 타구를 적시 3루타로 둔갑시켜 버리고 말았으니 김성근 감독에게 어느 정도로 까였을지는 미지수. SK 와이번스 갤러리에선 이를 두고 ''''지구온난화가 선수생명 하나 끝장냈네''''라고 평가했다. 2009년 조동화는 '''sWAR 통산 단일시즌 꼴찌'''를 기록 중이다...
여담으로 2009년 SK의 외야진을 박재상-김강민-조동화로 짤 경우 연봉 합계는 딱 3억(9,500-1억-1억500)이 되고, 위 3명을 포함, 박재홍을 제외한 다른 외야수 전원의 연봉을 합치면 박재홍의 연봉(4억)이 나왔다.
조동화는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2타수 1안타 1사구(死球) 타율&장타율 .500, 출루율 .667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연승으로 우승했다.
2.2.2. 2011 시즌
2011 시즌에는 솩갤의 까임 지분 1위를 차지하였다. 초반엔 김강민이, 후반에는 박재상이 부상으로 출전을 못하면서 주전외야수로 자주 나오는데 답답한 타격은 물론 수비에서 실책성 플레이도 늘어나고 있기 때문.
2011년에는 9월 20일 사직 롯데전에서 수비하다가 잘못 넘어지는 바람에 '''왼쪽 전방십자인대'''와 '''측부 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2011 시즌 아웃은 확정이고 2012시즌에 복귀할 지도 미지수. 그나마 돌아와도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문제다.
2.2.3. 2012 시즌
8월 23일 드디어 2군에서 조동화가 대타로 출전했다. 5회말 1사 2루에서 2루수 앞 땅볼을 기록. 김용희 2군 감독은 움직임이 괜찮았다고 평가. 그리고서 드디어 9월 추가 엔트리에 조동화가 올라왔고, 9번 대타로 올라와서 3타석에서 안타, 삼진, 볼넷을 기록.
9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서 뛰기 시작. 간간이 쳐주는 안타와 쏠쏠한 작전 수행 능력으로 SK 타선의 소금으로 활약하였다.
9월 8일 문학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와의 17차전에서 7회말 6:6 무사 1, 3루 상황에 타석에 들어와 1루쪽 기습 번트를 감행, 넥센 히어로즈의 1루수 박병호의 태그를 피하며 타자와 주자 모두 세이프가 되었다. 이 때 3루 주자 박정권이 홈으로 들어오며 타점을 기록, 이 경기의 결승타를 기록했다.
이후 8회말 9:6으로 SK가 리드하는 상황에서 1사 2, 3루에 타자로 나와 우익수 희생 플라이를 쳐 2타점째를 올려 가을버프 제대로 받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결승타와 이어진 희생 플라이 타점에 힘입어 MVP에 등극.
조동화는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2년 플레이오프에서 2, 3, 4차전에 선발 우익수 겸 9번타자로 출장하여 8타수 1안타 1볼넷, 타율 .125, 출루율 .222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조동화는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1차전은 선발 우익수 겸 9번타자, 4차전은 대주자, 6차전은 대타로 출장하여 4타수 무안타, 타율&장타율&출루율 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조동화는 2012년 포스트시즌에서 12타수 1안타 1볼넷, 타율&장타율 .083, 출루율 .154를 기록했다.
2.2.4. 2013 시즌
시즌 초반만 해도 이명기, 한동민, 김강민, 박재상 등 외야 경쟁자들과 비교하여 앞서는 것이 없던 처지라 외야 백업에 머물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고 실제로 4월 중순 넘어서 콜업이 됐다. 그러나 이명기, 한동민의 부상으로 인한 2군행, 박재상과 김상현의 타격 부진등으로 인해 6월 이후 사실상 외야 한 자리를 잡으며 괜찮은 모습으로 외야진에서 쏠쏠한 활약을 하였다. 여전한 번트실력은 덤.
규정타석에 들어서지는 못했지만 7월 5일까지 48경기 152타수에서 타율 0.276, 출루율 0.351, 장타율 0.329의 성적과 13도루로 07~08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7월 3일 문학 KIA전에는 끝내기 안타도 기록.
8월까지 2할7푼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하며 팀내 상위,하위타선의 첨병역할을 잘 수행했지만 9월이 되더니 체력이 떨어진 탓인지2할이 겨우 넘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팀내에서도 뜬금없이 살아난 박재상에게 밀려 출장 기회가 줄어드는 중. 또한 본인의 커리어에서 가장 많은 타수[13] 를 기록하며 볼넷과 삼진 모두 기록을 경신했다.(74삼진/46볼넷) 타수에 비해 볼넷수가 많아서 타율보다 출루율이 1할 높다.(타율 0.258, 출루율 0.360)
2.2.5.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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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타율 면에서는 타고투저 광풍 속에서도 2할 6푼 수준으로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SK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톱타자 이명기의 뛰어난 출루 능력을 뒷받침해주는 2번타자로써 제 몫을 다했다. 리그 최고의 번티스트라는 별명답게 번트로 희생번트는 물론 내야 안타도 곧잘 만들어내며 투수를 흔들었다. 도루 역시 커리어 최다인 37개로 팀의 기동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14] . 이외에도 득점, 타점, 안타에서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안타는 개인 최초로 100안타를 넘겼고, 득점과 타점도 70-50점을 넘겼다. 단 타격 능력은 여전히 아쉬웠다. 전 시즌과 다를 바 없었던 타율이고 출루율은 오히려 더 낮아진 수준.(타율: 0.256-0.260, 출루율 0.357-0.327)
2.2.6. FA
시즌 후 FA 자격을 취득해 11월 26일 SK에 4년 22억(계약금 8억, 연봉 3억, 옵션 2억)에 잔류했다. 오버페이라는 평가도 있었으나 뛰어난 작전 수행 능력 및 좌, 중, 우익수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안정된 수비력, 그리고 고참으로서 보여준 팀에 대한 헌신까지 높게 평가되어 고액 계약을 이끌어 낸 것. 신고선수(현 육성선수)로 입단해 꾸준히 활약해 FA계약까지 해낸 인간승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팬들도 대부분은 그간 고생했던 보상이라며 대체로 축하해 주고 있는 중.
2.2.7.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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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주장이었던 내야수 박진만에 이어 2015년 SK의 주장을 맡게 되었다.
3월 31일 홈 개막전에 앞선 팀 창단 15주년 기념행사에서 김원형 코치와 함께 팀 15년 근속에 대한 감사패를 받았다.
5월5일 어린이날 롯데전에서 시즌 첫 홈런를 비롯해 5타수 4안타 2득점 1홈런을 기록했으며 강민호의 팬스를 맞출뻔한 안타성 타구를 잡아내는 호수비도 주면서 이 날 경기의 수훈선수가 되었다. 도루도 3개를 기록한 것은 덤.
5월 7일 롯데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3회초에 올라와 시즌 두번째 홈런이자 시즌 첫 백투백홈런을 기록했다.
5월 15일 LG 트윈스와의 원정 3연전 경기에서 팀이 5:2로 리드하고 있는 9회 초에 1번 타자 이명기의 대타로 투입, 타석에서는 무난하게 삼진을 당했다. 하지만 9회 말, 마무리로 올라온 윤길현이 선두타자 한나한의 대주자로 올라온 김용의를 2루까지 살려 보내고, 후속타자 채은성과 유강남을 각각 삼진과 뜬공으로 돌려세운 2사 주자 2루의 상황. LG의 9번타자 오지환이 초구를 때려 우중간을 가르는 깊숙한 안타성 타구를 날린다. 이에 조동화는 외야의 정 중앙[15] 에서부터 약 30미터 정도를 질주하여 넘어지면서 타구를 캐치. 펜스 바로 앞에 떨어지는 2루타성 타구를 순식간에 외야수 뜬공으로 둔갑시켰다. 잔디가 아닌 모래 부분에서 넘어지면서 뒤통수를 부딪혔지만, 큰 부상은 아닌듯 이튿날인 5월 16일 경기에도 출전했다.
6월 12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3연전 첫경기에서 경기 시작 직전에 앤드류 브라운이 아내의 간병을 위해 빠지면 대신 자리에 들어가 졸지에 '''4번 타자(!)'''로 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4타수1안타 2타점을 기록하며 4번의 역할을 해냈다! 팀도 승리하며 기분좋게 해프닝을 넘길수 있었다.
8월 10일, 급성복통으로 1군 엔트리에서 빠졌다가 20일에 복귀했다.
8월 27일 지명타자 최정의 대주자로 출장한 조동화는 8회초에 박정권의 적시타로 득점했으며, 9회초에는 우익수로 포지션이 바뀌면서 지명타자가 소멸되었는데 그 다음타자가 투수 윤길현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타석에서는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 9회초를 끝내고, 이후 정우람이 세이브와 함께 팀은 6:3으로 승리했다.
2.2.8. 2016 시즌
방망이도, 수비도, 주루도, 송구도,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김강민이 부상으로 빠짐에 따라 임시 주장직을 맡았으나, 5월 27일 허리 통증으로 2군에 내려가버림으로써 주장 두 명이 동시에 2군에 있는 진풍경을 연출하였다. 오죽하면 2년 5.5억원에 FA 계약한 팀동료 박재상[16] 과 계약서를 바꾸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후 2군에서 4할대 타율을 기록하다가 7월 8일 이명기와 교대되어 1군에 복귀했다.
2.2.9. 2017 시즌
한동민, 김동엽, 조용호, 정진기 등 신흥 외야자원과 트레이드로 노수광까지 합류하면서 안 그래도 좁았던 그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다.
2군 경기에도 출전하지 않고 있는데 직관을 다녀온 팬에 의해 1군과 동행하며 배팅볼을 던져주거나 훈련 보조를 해주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공식적인 발표는 나지 않았지만 사실상 은퇴수순인듯. 그런데 2군 경기 기록이 사라졌다.
이대수의 퇴장 때에도 등장(!)하여 기사에 논란으로 나오기도 하였다.
최근 사진을 보면 살이 찐 듯 하다(...).
시즌 막바지에 이른 9월초 기사에 따르면 연봉 보전을 조건으로 1군과 동행하고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최근 구단의 은퇴 권유를 거절한 것으로 드러났다.
2.2.10. 20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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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 마지막 해. 그러나 시범경기든 뭐든 보이지 않고 있다. 아마 이대로 되면 FA 계약금 다 받는 올해를 끝으로 은퇴하거나 방출당할 듯.
최근에는 강화 SK 퓨처스 파크에서 퓨처스 선수들과 동행하며 수비 연습을 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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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 미라클과의 교류전에 출전한 모습
한편 선수 본인은 현역 연장 의지를 드러내며 5월 31일 저니맨 외인구단과의 교류전인 3군 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7월 16일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구단에서는 2018년 인천 홈경기 중 하루를 골라 조동화에 대한 은퇴식을 치러줄 계획이라고 한다.[17] SK 왕조 시절 외야 라인의 한 축이었던 박재상의 은퇴식 수준에 준하는 행사가 될 전망이다. 참고로 조동화는 2000년 SK 와이번스 창단 원년 멤버 중 처음으로 2000년에 입단해 한 팀에서만 뛴 후 은퇴식을 치르는 영광스러운 주인공이 됐다.[18]
이후로는 SK 퓨처스 파크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다. 그리고 9월 8일 두산 베어스와의 홈 경기에서 은퇴식을 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다.[19] 또한 코칭스태프, 선수들이 그를 기억하기 위해 유니폼에 가을동화 10을 입고 경기에 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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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팀은 에이스 김광현의 호투에도 불구하고 3:0으로 패했지만 조동화는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18년동안 오직 SK 와이번스에서만 보냈던 현역 시절'''을 훈훈하게 마감한다. 은퇴식에서 마지막 타격 세레모니를 했는데 마지막 타격 역시 '''번트를 댔다.'''
3.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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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부터 SK 와이번스 2군의 작전·주루코치로 본격적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19년 4월 19일 김무관 1군 타격코치가 육성군으로 이동하며 2군으로 같이 내려간 백재호 1군 타격 보조코치를 대신해 박재상 1군 1루 베이스 코치가 1군 타격 보조코치로 임명되자 1군 1루 베이스코치로 임명됐다. 2020년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무관중 경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팬들에게 재미를 주고자 코치나 감독, 심판 등에게 마이크를 씌워주는데 중간중간 조동화 코치의 마이크가 잡힐 때 선수들과 하는 대회가 굉장히 친근감이 느껴지고 또한 재미있는말도 많이해서 팬들에게 큰 웃음을 주고있다.
세대교체 자원으로 임재현, 최상민, 채현우를 뽑았다.
4. 플레이 스타일
타격능력은 답답한 수준. 기본적으로는 2할대 초중반 타율이 팬들이 보는 기대성적으로, 가끔 무섭게 쳐주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타격을 기대할 만한 선수는 아니다. 번트기술과 수비가 뛰어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번티스트(번트+아티스트). 단순히 수비기술만 따지면 리그 톱으로 꼽힌다. 때문에 수비수로는 외야 어디다 박아둬도 참 잘한다. 두산 팬이라면 치를 떨정도. 하지만 신체조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발, 어깨등은 톱클래스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김강민에게 밀려서 우익수로 출장할 때가 많다. 수비와 번트능력으로 1억 가까운 연봉을 받을만큼 가치가 있는지는 팬들 사이에서도 논란거리. [20] 역시 2년 연속 우승의 효과가 그만큼 강하다는 반증이다.
1.5군 수준의 선수라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조동화의 도루 성공율은 0.785(12시즌까지의 기록 기준,106도루/29실패)로 KBO 6위다. 재밌는 사실은 이 부문 1위가 바로 동생 조동찬. 무려 8할 중반이다.
5. 여담
- 별명은 가을동화, 번트를 잘댄다고 번트+아티스트여서 번티스트[21][22] , 4번 타자 조거포[23] , 그리고 결정적으로 X동화(…)가 있는데 역으로 이걸 줄여서 '졷'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 별명은 동생인 조동찬도 마찬가지로 불린다. 그리고 2015시즌, 주장이 되면서 졷장님타이틀 획득.
- 등번호 변천사가 조금 거시기하다. 신인 시절에 48번을 달다가, 이진영이 10번에서 35번으로 옮기자[24] , 10번으로 바꿔 달았으나, 트레이드로 고액연봉을 받는 고참선수인 김기태가 오면서 결국 10번을 차지하지 못했다. 2002 시즌을 마치고, 상무에 입대했고, 2005년에 전역하고 복귀했더니, 10번은 아직도 김기태가 달고 있어서, 그 뒷번호인 11번을 강혁이 공익근무로 빠진 틈을 타서 달았다. 김기태가 은퇴하자 용병 시오타니 가즈히코가 10번을 차지했으나 시오타니가 장문석의 공에 손목을 맞고 부상으로 방출되자, 주인이 없어진 10번을 차지해서 그 이후로 쭉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박재상이 심기일전한다는 이유로 1번에서 11번으로 번호를 옮기게 되면서 그 새를 틈타(?) 조동화가 1번을 차지하였다.
- 2010년 5월 1일 정규시즌에서 홈런을 쳤다.
- 2010년 10월 15일, 한국시리즈 1차전 시합일 새벽 1시에 자신의 아이디로 00박재홍 엘리트[25] 카드 조합에 성공했다고 한다(…). 물론 프로야구 선수들의 사이클은 일반인과 조금 달라서 대개 새벽 2~3시에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지만... 일본 전지훈련 중에도 현지의 열악한 인터넷 사정을 뚫고서 마구마구를 하는 게 종종 목격되었다.
- SBS 안경현 해설위원의 증언에 따르면 식사량이 정말 적다고 한다. 소식하는 수준이 아니라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정도라고. 심지어는 하루에 컵라면 한 그릇 먹고 버티는 날도 있단다(...).
- 2011년 5월 8일 SK 대 KIA전 문학구장에서 삼중살을 만든 장본인. 연장 승부 2:1로 1점차 승부인 상황, 그것도 무사 1, 3루에서 이루어진 삼중살이란 것이 주목할 만 하다. 보통의 확률로는 게임이 SK 쪽으로 역전되거나 못해도 동점은 나왔을 상황. 과정은 조동화 타격 → 그대로 투수 유동훈에게 라인드라이브(1아웃) → 3루 이범호에게 송구(2아웃) - 1루로 송구(3아웃)의 상황. 여기서의 재밌는 것은 3루수 이범호가 삼중살 상황이란 걸 몰라서 느긋하게 3루 베이스만 태그해 놓고 벙쪄 놓고선 뭔가 혼자 맘을 놓는데 주위에서 전부 1루로 던지라고 난리가 난 것. 1루 주자였던 박진만은 이미 2루까지 발을 옮겨논 후였던 지라 아웃은 불가피했긴 했는데 이범호가 워낙 벙찌고 있던지라 삼중살이 성립 안 될 수도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쨌건 몸개그.
- 2011년에 회자된 조동화 법칙. 한 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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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은 동갑내기에 2000년에 신고 선수로 입단한 동기 사이다.
5.1. 동생 조동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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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소속인 조동찬과 형제 사이다. 다만 인지도는 조동찬에 비해 조금 밀리고, 덩치도 조동찬보다 작다.[26] 그래서 다들 조동화가 동생인 줄 알지만, 분명 '''조동화가 형이고, 조동찬은 동생'''이다. -나성범, 정영일- , 모상기-모상영, 최정-최항과 함께 형제가 모두 프로야구에서 뛰고 있는 흔치 않은 케이스.[27] 다만 도중에 상무에 뛰었다가 제대를 했기 때문에 현역활동 시즌은 동생에 비해 적다. 그리고 조동찬이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따면서 입대 공백이 없어졌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동생의 커리어를 따라잡는 건 아무래도 어려워졌다.
동생 조동찬과는 매우 사이가 좋다고 알려져 있다. 처음 SK에 입단했을 당시 고3이던 동생을 위해 동료들의 장비를 얻어다 줬는데, 이 때문에 팀 내에서의 별명이 '동생주게요'였다고 한다. 첫 우승 소감으로 '동생에게 용돈도 줄 수 있고 할 말도 생겨서 황홀하다'고 했으며 2010년에는 '''동생 대신 군대를 가 줄 수도 있다'''는 말까지 했다. 하…한군두!! 그 외에도 인터뷰에서 동생 생각하는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한다. 물론 형제선수라는 화제성 때문에 기자들이 많이 묻기도 하지만.
더불어 재미있는 사실은 조동화는 좌투좌타인 반면 조동찬은 우투우타다. 또 조동화는 외야를 주로 보지만 조동찬은 내야를 주로 보는 점도 대비된다. 반면 비슷한 점도 있는데. 통산 도루 성공률이 굉장히 높다. 역대 100도루 이상 선수 중 조동화가 6위, 조동찬은 '''1위'''.
2013년 8월 조동찬의 부상 소식을 접하고는 분을 못 이겨 핸드폰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본인도 마찬가지로 무릎 부상을 당한 적이 있어 그 아픔을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화가 났을 것이다. '''이게 다 문선재라는 놈 때문이다.'''
여담으로 조동화,조동찬 형제의 우승반지 갯수는 무려 9개나 된다.(02,05,06,07,08,10,11,12,14) 게다가 만약 09기아우승과 13년 조동찬의 부상이 없었더라면 이 형제는 2005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번갈아가며 우승반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소속팀 SK 와이번스와 삼성 라이온즈가 2000년 후반~2010년 초반 왕조를 구축했던 팀들이었다보니 이런 기록도 가능할 뻔 했다.
05조동찬-06조동찬-07조동화-08조동화-09x-10조동화-11조동찬-12조동찬- -14조동찬.
5.2. 가을동화
2009년엔 1할대 후반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2007~08년 두 시즌 동안에는 2할 7푼대의 타격과 두 자릿수 도루로 하위타선이나 2번 타순에서 활약했고, 번트나 스피드를 이용한 기습적인 작전수행 능력은 꽤 인정받는 편이어서 자주 출장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외야수 셋 중 두 자리를 박재홍과 이진영이 먹고 들어갔기 때문에 남는 한 자리를 두고 김강민, 박재상과 돌아가면서 메우고 있었다.
그러던 2007년 한국시리즈, 통산 홈런이 단 1개에 불과하던 조동화는 2차전 5회말에 두산 베어스의 제 2선발 맷 랜들에게서 우측 담장을 넘기는 솔로홈런을 쳐냈다. 이에 그치지 않고 4차전 5회초에 리그 다승왕이자 1차전 승리투수였던 다니엘 리오스의 공을 당겨쳐 솔로홈런을 만들어 1-0으로 박빙의 리드를 이어가던 SK와 깜짝선발 김광현에게 승리를 안겨줬다.
또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홍성흔의 2루타성 타구를 슬라이딩으로 잡아내는 백미를 연출하며 팬들로부터 가을만 되면 미치는 '''가을동화'''란 별명을 수여받았다.
여기에 2009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또 한번 솔로홈런을 쏘아올렸고, 4차전 8회말 만루 상황에서 유동훈을 상대로 내야안타를 치면서 1타점을 추가했다.[28] 올 시즌 1할대 타율에 단 하나의 홈런도 없던 그가 이렇게 변신하는 걸 보니 가을동화라는 별명은 빈말은 아닌 듯. 참고로 2009년까지는 정규시즌 통산 홈런 개수보다 3년 동안 한국시리즈에서 친 홈런이 더 많았다[29] .
게다가 재밌는 사실은 2009년 한국시리즈 7경기 중 어떤 방식이던지 조동화가 타점을 올린 3경기는 '''모두''' 이겼다는 것. 반대로 출장을 못했거나 타점을 올리지 못한 경기는 '''모두''' 졌다. 이 사실을 알던 몇몇 SK 팬들은 7차전 선발로 나온 조동화가 타점을 올리지 못하고 교체되자 결과를 예상하고 탄식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2010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조동찬이 박진만과 교체되자마자 박재홍의 대주자로 출루하여 득점 올리는데 성공, 타석에서는 '''응원가를 채 틀기도 전에 1구를 맞고''' 1루로 출루, 2차전에서는 우익수 대수비로 교체투입된 후 2타석에 나와 1안타를 기록하면서 1.000의 타율(?..;;;)을 보여주고 있다.[30]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도 2차전과 마찬가지로 이호준과 교체되며 우익수 대수비 요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올해도 변함없이 2, 3차전 모두 4번타자로 들어갔는데, 이번 3차전의 경우 응원가 틀기도 전에 희생번트를 성공시킬 정도로 뛰어나고 깔끔한 작전능력을 보여줬다. 덕분에 1.000타율(?..;;;)도 지속됐다.
역시 가을동화답게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주고 있지만… 아쉽게도 SK가 2010 한국시리즈를 4연승으로 스윕. 처음부터 작전상 백업 역할이었던 조동화는 2010시즌 가을동화 촬영에는 실패했다. 2011시즌에는 아예 가을야구 직전에 시즌아웃.
2012년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에서 오랜만에 가을 야구에 복귀했지만, 예전만큼의 명성은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동생이 속한 그 팀은 2년 연속 우승을 달성하여 이제 우승 반지 커리어도 동생에게 확실히 밀린다.
5.3. 끝내기
방송에서 끝내기로 언급될 정도로 조동화의 2010년부터는 끝내기로 재미 좀 봤다.
평소에는 뒷목잡는 타격만 하다가도 끝내기 상황만 되면 이건 뭐 클러치히터. 어쩌면 번트, 수비와 함께 그의 존재감과 가치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2008년 9월 14일 한화와의 경기에서 첫 끝내기 안타를 쳤다.
2010년 5월 2일 LG와의 경기에서 끝내기 홈런을 쳤다. 이젠 조거포. 이 날 경기는 '''조포대첩'''으로 기록되었다.
6월 18일에는 '''기아'''와의 경기에서 역전 끝내기 2루타를 쳤다. 그리고 화가 난 윤석민은 락커룸에 가서…이하생략.
6월 30일에 '''기아'''(…)와의 원정 경기에서 11회초 쐐기를 박는 3타점 2루타를 쳤다(…).
2011년 5월 8일 '''기아'''와의 문학 홈경기에서도 끝내기를 기록했는데 이건 끝내기 '''삼중살'''(…).
2011년 8월 24일 두산전에는 9회말 끝내기 '''기습번트'''를 만들어냈다. 3루주자의 베이스러닝이나 중계를 볼 때 누가봐도 본인이 스스로 만들어낸 번트. 이러고도 감독대행에게 공적을 뺐겼다.
2013년 6월 8일 한화와의 경기에서 또 끝내기 안타를 쳤다.
2013년 7월 3일, 또다시 '''기아'''(…)와의 문학 홈경기에서 9회말에 끝내기 중전안타를 쳤다. 주전급이 아님에도 이날까지 조동화가 기록한 개인통산 끝내기 안타는 무려 '''6회'''.
5.4. '대체 선수' 개념에 부합하는 선수
발도 빠르고 배트 컨트롤 능력도 있으며, 수비를 잘 하고 번트도 잘 댄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스탯을 뜯어 보면 한 번도 3할을 기록하지 못한 선수가 파워도 없으며, 선구안 역시 전혀 장점이 아니다. 내야안타 비율도 높기 때문에 BABIP이 타율에 비해 많이 높다. 가장 직관적으로 공격력을 짐작할 수 있는 지표인 OPS를 보더라도 조동화는 OPS 7할을 넘겨 본 적이 없다. 이대형이 OPS 6~7할 언저리에서 왔다갔다 하며 똑딱이, 주루 1툴(...)이라고 까였는데, 조동화는 한술 더 뜬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형만큼 도루를 많이 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냉정히 말하면 그 터지기 전의 LG 이대형과 비교해도 오히려 떨어지면 떨어졌지 크게 나은점이 없다. 게다가 중견수인 이대형과 달리 코너에 주로 서던 선수다.
무엇보다도 통산 WAR가 '''0'''에 가깝다는 점이[31] 그를 '''대체 선수의 훌륭한 표본'''으로 비교할 수 있게 한다. 그러니까 조동화로만 타선을 꾸리면 타선의 통산 WAR는 0이고, 조동화 9명으로 이루어진 야구단은 3할보다 약간 아래의 승률을 기록한다는 망상이 야구팬 사이에서 잠시 유행한 적이 있었다.
발도 빠르고 수비력도 좋기 때문에 훌륭한 백업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주전감으로서는 영 아니다. 박재상보다 떨어지는 타율과 안습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장타력을 보면서 이 선수가 어떻게 22억은 받아갈 수 있었는지 의문을 품는 팬이 적지 않았다.
다만 그의 가치는 공격보다는 주자, 번트 배터, 수비수로서의 가치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도루 자체는 많지 않지만, 성공률은 높기 때문에 주자로서는 굉장히 위협적이다. 번트가 필요할 때 무조건 대줄 수 있는 능력도 그가 종종 2번 타자로 기용되는 이유이기도 하며, 수비 범위도 굉장히 넓어 넘쳐나는 SK 외야진에서도 중용되었다.
약간의 추억보정도 있는 편. SK 왕조 시절에는 기동력, 번트 능력, 수비력 등이 선수평가에서 꽤나 주요한 지표로 활용되었는데, 이는 김성근 감독의 지론인 스몰볼 야구에 맞는 지표들이다. 출루를 많이 하지는 못해도, 일단 출루했을 때는 상대 투수를 흔들며 언제나 다음 베이스를 노릴 수 있는 센스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중용받았으나 이런 추억 속 평가도 김성근의 퇴진과 함께 거품이 빠지면서 팬들의 냉철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7. 관련 문서
[1] 공교롭게도 3월 22일은 조동화가 프로 시절 내내 속해 있었던 SK 와이번스의 법인 설립일이다.(2000년 3월 22일)[2] SK 와이번스에서 준비한 은퇴 기념 영상에 따르면 거주지는 경기도 김포시로 추정된다. 영상 속 조동화 집 네이버지도 그전 카카오 로드뷰에서는 공사중으로 나오나, 네이버 지도로는 완료가 된 것으로 보인다.[3] 되고송 사용 전까지 등장곡과 응원가가 동일했다. 근데 지금은 또 되고송, 날쌘돌이와 번갈아가면서 틀고 있다.[4] (어젯밤엔 난 네가 싫어졌어) 안타! 조동화!x2 (빙글빙글 돌아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나 혼자 가슴 아팠지) 안타! 조동화![5] 동화가 치면 안타가 되고~ 동화가 뛰면 도루가 되고~ 동화 나가면~ 꼭 점수가 되고~ 언제나 상대팀은 울상이 되고~ 안 되는 게 어딨어 조동화가 있는데 오늘도 동화 고고고고~ 조동화 있으면 언제나 승리~ 조동화 화이팅![6] 이재원이 직접 불러주었다.[7] 와이번스 날쌘돌이~ 조동화~ 와이번스 날쌘돌이~ 조동화~ 달려라(달려라!) 조동화(조동화!) 와이번스의 동화~[8] 되고송과 The Great Escape 모두 정근우가 썼던 노래다.[9] 조동화 오오~ 조동화 오오~ 오예~ 오예~ 와이번스 조동화~ (×2)[10] 문서를 잘 보면 알겠지만 이름이 밝혀져 있다. 아들은 2019년 부활한 프로젝트인 "슛돌이가 돌아왔다"에서 "라이온킹 FC"에 합류한다고 한다.[11] 손혁, 박용택, 양현종이 소속되어 있다.[12] 2000년에 2군에서 33도루, 2군 통산(2008년 기준) 80도루로 3위다. 그리고 2군 통산 341안타(2008년 기준)로 12위에 올라있었다. 그 윗순위 선수들 대부분이 은퇴하였고, 유일한 현역인 최형우가 2008년부터 주전으로 성장했으니 현역에선 순위권이라 봐도 될 듯.[13] 경기수는 07년의 121경기인데, 9월 29일 기준 101경기에 출장했다. SK가 5경기가 남은 상황이라 경신이 불가능할 듯.[14] 실제로 조동화가 출전한 경기에서, 일단 조동화가 어떤 방법으로든 타석을 벗어나는 순간 포수의 시선이 조동화에게 반쯤 못박히는 것을 볼 수 있다. 타석에 서면 번트, 출루하면 도루. 그야말로 배터리의 악몽같은 선수.[15] 중앙 전광판의 정 중앙부분이었다![16] 이쪽은 최소 2할 7,8푼은 친다(...)[17] 일각에서는 동생 조동찬이 있는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 은퇴식이 거행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은퇴식을 하게 되었다.[18] 박재상은 구단 창단 2년차였던 2001년에 입단했다. 현재 SK에 남아 있는 창단 원년 멤버는 조동화와 이대수가 유일하며, 그 이대수도 여러 이적을 통해 다른 구단들에 몸을 담다 돌아왔고, 쌍방울 레이더스 최후의 신인이자 또다른 SK 창단 멤버인 이진영 역시 다른 팀들에서 몸 담았기 때문에 창단 원년 멤버가 원 클럽 플레이어로 남은 경우는 조동화가 유일하다.[19] 여담으로 절친인 박성광이 은퇴식 사회를 맡았았는데 전지적 참견 시점 박성광 파트에서 소개되었다.(10월 7일, 14일 방송)[20] 하지만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인 마이클 본이 12시즌 WAR를 6 이상 기록한걸 보면 확실히 수비능력이 팀 승리 기여에 크게 작용하긴 한다.[21] 항상 대주자, 대수비 등으로 출전하여 기회가 많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KBO 리그 통산 희생번트 4위다.[22] 실제로 안치용 해설위원의 언급으로는 코치가 아닌 조동화 선수가 직접 선수들에게 번트 지도를 한다고 한다. 또한 엠스플 유튜브 프로그램 스톡킹에서 허도환의 증언에 따르면 번트를 댈 시 배트를 정확히 포수의 눈을 가리게 대서 공이 안 보이게 한다고 언급했다. 이러나저러나 번트는 정말 잘 대는게 맞는듯. 동생 조동찬도 번트를 꽤 잘댄다.[23] 가을에만 쓸 수 있는 한정적 별명. 하지만 이마저도 소속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해야 한다. 이보다 경기 후반에 수비 강화 목적으로 이호준을 조동화와 교체하면서 이호준이 보던 1루에 박정권이 들어오고, 박정권이 보던 우익수는 조동화에게 넘긴다. 따라서 이호준이 들어가던 4번 타자 포지션에 조동화가 들어간다. 그리고 후반에 경기의 흐름을 바꿀 만한 결정적인 기회가 4번 타자 조동화가 타석에 들어올 무렵 많이 걸리곤 한다.[24] 그 후 이진영을 상징하는 번호가 되었다.[25] 당시 마구마구의 엘리트 카드 중에서는 최상급이었다! [26] 부모님이 계란 장사를 하셨는데 조동화는 계란을 싫어했고 덕분에 조동찬이 계란을 많이 먹어 덩치도 형보다 더 커졌다는 후문.[27] 그러나 2014 시즌 도중 정형식은 음주운전으로 인해 임의탈퇴되었으며, 모상기, 모상영 형제는 시즌 종료 후 둘 다 방출당했다(...).[28] 팬들은 내야홈런이라고 한다.[29] 2010년 시즌 무려 3홈런이나 기록하면서 이 수치는 일단 역전되었다. 여담이지만 정규시즌 통산 홈런 중 하나는 '''만루홈런이다.'''[30] 나머지 1타석이 8회말 2아웃 상황이었는데, 2루 주자 김강민이 견제사를 당하여 3아웃이 되면서 공수교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경기를 SK가 승리하면서 9회말 공격은 넘어가지 않게 되어 '''그대로 조동화의 해당 타석은 사라졌다.'''[31] 스탯티즈에서 추산한 결과로는 2016년 시즌 종료 기준 WAR가 1.03이다. 물론 최근 시즌 전까지는 스탯티즈 수비 WAR이 매우 부실하기에 수비가 장기인 조동화로서는 다소간 손해를 보기는 했을 것이다. 물론 그 영향력은 미미한 수준이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