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스포츠)

 



1. 개요


스포츠에서 특정팀이 연속 우승을 하는 등 엄청난 성적을 거두면 '''왕조'''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전통의 강호가 상위권에 꾸준히 드는 강팀을 지칭한다면, 왕조는 그 강팀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성적을 거두며 우승을 독점한 팀을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3년 연속 우승'''을 왕조의 기준으로 하고 있다.

2. 농구



2.1. 한국


한국프로농구 원년 우승 이후 2001년 인수 및 재창단 과정에서 암흑기에 빠져들었으나, 2000년대 후반 강팀으로 도약했다.[1] 그리고 2012-13~2013-14시즌에 챔피언 결정전 2연속 우승, 2014-15시즌에 통합 우승을 하며 KBL 최초로 '''3연패'''를 이룬 뒤 고양 오리온에게 챔피언 자리를 넘겼다.
임달식 감독의 지도 아래 하은주의 강력한 높이를 앞세워 6연속 우승을 기록했다. 국내선수들로는 막을 수 없었던 하은주의 존재때문에 저평가를 받고 있는 왕조이기도 하다. 2012-13시즌, 춘천 우리은행 한새에게 무너졌다.
위성우감독 부임 후, 신한은행의 독주를 끝내며 6연속 챔피언에 등극했다. 2012-15시즌에는 삼성생명, 신한은행, KB 스타즈가 차례로 도전했으나, 2015-16시즌에는 우리은행을 제외한 다른 5팀이 하향평준화 되면서 리그를 독주 한다.[2] 그 뒤 2018-19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용인 삼성생명 블루밍스에게 패배했다.

2.2. 미국


조지 마이칸이 6년 동안 5회 우승을 이끌었던 무적함대. 하지만 1960년 LA로 연고지를 이전한 후 이 시기의 스타들은 기념되지 못하고 있고, 영구결번도 해제된 상태다. 이를 비판하는 팬들은 미니애폴리스 시기의 선수들을 존중하지 않을 거면 5회 우승을 반납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3]
13년동안 11회 우승했다. 전설적인 센터 빌 러셀(11회 우승), 밥 쿠지(6회 우승), 샘 존스(10회 우승), 존 하블리첵(6회 우승)[4]이 군림했던 팀.
2차례 스리핏으로 총 6회 우승.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이 군림했던 NBA의 세계화를 연 왕조. NBA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조던의 자발적인 퇴장으로 우승이 끊어져 불패라는 상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팀이기도 하다.[5] 그러나 이후 불스 구단은 우승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이 시기의 우승과 조던의 명성에 기대어 팬들에게 장사만 하는 등 짠돌이 행보를 보였고 때문에 '''불스 왕조'''를 '''조던 왕조'''로 불러야 한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6]
스리핏으로 3회 우승.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가 군림하던 시대.
  • 휴스턴 코메츠(WNBA): 1997~2000
WNBA가 출범된 첫 해부터 4연패를 거두며 WNBA 최초의 왕조를 이룬 팀. 경영난으로 2008년에 사라졌다.

3. 배구



3.1. 한국


V-리그 원년인 2005년 우승 이후 2007-08 시즌부터 7연속 우승을 했다.[7] 이후 2014-15시즌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에 패하면서 막을 내렸다. 몰빵배구로 저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4. 야구



4.1. 한국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2020'''

39번의 시즌동안 KIA[8] 11회, 삼성 8회, 두산[9] 6회, SK 현대[10] 4회, 롯데 LG 2회, 한화 NC 1회 순으로 우승하였다.
KBO 리그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 리그로 팬층 역시 매우 두꺼우며 논쟁도 자주 발생한다. 왕조는 그중에서도 관심도가 높은 대표적인 쟁점 중 하나인데 팀들간의 성적을 비교하는 민감한 주제다 보니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응원팀에겐 관대한 기준을 다른팀에겐 엄격한 기준을 대는 등 팬들부터 일관성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있었고 여기에 단발성 우승만 해도 과거의 성적과 연결을 시키며 왕조를 언급하는 등 용어를 남발하는 언론 역시 논란이 커지는 데에 일조했다. 논란은 후술.
하지만 해태와 삼성만큼은 야구팬들 모두가 왕조로 인정하는 팀들로 각각 한국시리즈 4연패[11]를 달성한것이 논란이 발생하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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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김응용 감독이 이끌며 한국시리즈 4연패를 달성한 팀이다. 1983년 첫 우승 이후 선동열, 이순철, 한대화가 등장하고, 김성한이 전성기를 맞으면서 해태는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에 우승을 하며 '''한국시리즈 4연패'''를 달성한다. 당시 해태는 시즌 성적만 놓고 보면 2위만 3번을 기록하는 등 정규 시즌에선 압도적인 강팀이 아니었으나 포스트 시즌에선 뛰어난 집중력과 실력으로 4연패를 달성한다. 하지만 1990년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여 5연패 달성은 실패로 끝나버린다.
연패가 끊어졌지만 해태는 이듬해부터 다시 우승을 하기 시작했고, 1997년까지 평균 2년마다 한번 꼴로 우승을 거두며 비록 온전한 왕조는 이루지 못했으나 여전히 당대 최강팀이란 것을 계속해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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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삼성은 원년부터 상위권의 성적을 거두며 전통의 강호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한국시리즈 우승은 좀처럼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응용, 선동열 감독을 거치며 준우승 징크스를 어느정도 해소했으며 2011년 류중일 감독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도약하게 된다.
류중일 감독은 선발 야구, 믿음의 야구, 형님 리더십 야구를 표방했고, JOKKA 라인에 신인왕 배영섭, 타격 3관왕 최형우, 김상수의 각성, 윤성환의 부활 등으로 감독 부임 첫 해인 2011년 통합우승을 달성한다. 거기에 아시아 시리즈에서 한국 구단 최초로 우승을 차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삼성 왕조의 서막을 알렸다. 이후 2012년에는 이승엽의 복귀와 이지영, 심창민, 정형식 등 유망주들의 맹활약으로 2연속 통합우승을 차지했고 2013년조동찬, 권오준의 부상과 이승엽의 부진 등 여러 악재가 겹쳤음에도 리그 최초로 통합 3연패를 차지하며 언론과 팬들에게 왕조로 인정받았다. 2014년도에도 삼성의 질주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기자들의 업셋 예상을 보란듯이 뒤집으며 리그 최초로 통합 4연패까지 이룬다.
여기까지가 삼성의 최전성기로 4년 동안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우승하는 전무후무한 '''통합 4연패'''를 달성한다. 이 시기 투수진은 금지어가 있긴 하지만 외인투수들도 평타에서 대박까지 준수한 편이었고 윤성환, 장원삼, 배영수 등의 최상위권 선발진들과 안지만, 정현욱, 권혁, 권오준, 오승환으로 이루어진 역대 최강의 불펜진이 철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타선에서는 대도 유망주인 김상수, 박해민을 앞세웠고 채태인, 최형우, 박석민의 345번 라인은 이승엽조차 6번타자로 뛰게 만들 정도인 당시 최정상급 클린업중 하나였다. 여기에 2014년 영입한 야마이코 나바로는 공-수-주에서 나무랄 것 없는 먼치킨급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당시 삼성은 리그를 지배한 최강팀이었다.
하지만 2015년 정규시즌 5연패 이후 2015년 한국시리즈 시작 전에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이 터지고 만다. 여기에 연루된 주축 투수인 윤성환, 안지만, 임창용이 엔트리에서 제외되었고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 삼성은 준우승에 그쳤다. 사실 그 동안 확실한 주전들로 왕조를 유지해 왔지만, 팀 뎁스가 얇아져 가고 있는 시점[12]이었으므로 리빌딩하기 적절한 시점에 내려왔다는 평도 많다. 여기에 모그룹이 스포츠단의 자립을 요구하며 갑작스럽게 자금 지원을 크게 줄였고 그 여파로 중심 타선인 야마이코 나바로박석민이 타팀으로 이적한다. 마지막으로 프런트 측은 자신들의 삽질을 포함한 모든 문제를 류중일 감독에게 뒤집어 씌우는 행동을 하였고 2016시즌을 9위로 마무리한 류중일 감독은 감독에서 물러나고 만다. 7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도 실패했으며 영원할 것 같았던 삼성의 시대는 저물고 말았다.

4.1.1. 논란이 있는 팀들


그동안 KBO의 왕조는 해태-현대-SK-삼성 순이 주류였다. 하지만 현대, SK의 성적 문제와[13] 2002~2006 삼성을 왕조로 인정하지 않는 등 논란이 있었다.[14] 여기에 2019년 두산의 우승은 해결되지 않은 기존의 논란을 증폭 시켰고 좀처럼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3연패가 대두된다.
3연패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시각이 있는데 '''3연패는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야구는 특급 선발이 전경기의 1/5 안팎만 출전하고 홈런왕 타자가 다른 8명의 타자와 같은 기회를 받는 등 에이스 위주의 경기가 불가능한 스포츠다. 그래서 우승팀의 승률이 6할보다 낮을수도 있고 하위팀의 승률이 4할을 넘을수도 있으며 약팀이 강팀에게 우세를 보이기도 한다. 즉 팀간의 격차가 크지 않아[15] 연속 우승이 쉽지가 않다. '''실제로 2연패를 달성한 7팀 중 3연패를 이룬 팀은 1980년대 해태, 2010년대 삼성 단 2팀뿐'''이다.
다른 의견으로 현대, SK의 성적을 근거로 5년간 3우승을 왕조의 조건으로 하자는 팬들도 있다. 하지만 연패가 없을수도 있고[16] 두팀의 전성기가 겹치기도 하며[17] 2019년까지 7번이나 나온 기록을 높게 평가 할 수는 없다.[18] 사실 5년간 3우승은 계단식 포스트시즌 때문에 나올 가능성이 컸고[19][20] 실제로도 그랬다.[21] 그리고 이 사실이 주목 받자 현대, SK를 왕조에서 제외하는 의견이 생겼고 이는 점점 많아질 가능성이 크다. 같은 성적이 많아지면 평가가 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22] 따라서 3연패 조차 못한 5년간 3우승팀을 4연패팀과 동등하게 둘 수는 없을것이다.[23]

부자, 아니 왕조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걸 몸소 실천한 시기로 해태는 1990년 플레이오프에서 패하며 5연패에 실패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1990년대 초 이강철, 조계현, 1990년대 야수 sWAR 1위를 기록한 홍현우가, 1993년에는 투타의 핵심을 이룬 이종범이대진이, 1990년대 후반에는 임창용이 등장하는 등 걸출한 신인들이 주전 선수들의 뒤를 받쳐주거나 주전을 꿰차면서 리빌딩을 자연스럽게 이루었다. 4년 연속 우승하던 1980년대 중후반만큼은 아니어도 초호화 선수진을 이끌며 1991년부터 1993년, 1996년, 1997년까지 1990년대에 우승을 4번 했다. 무엇보다 4연패 시절에는 통합 우승이 1번뿐이어서 포스트시즌에만 강했다는 인상을 주었지만, 1990년대의 우승은 모두 통합 우승이었다.
하지만 1997 시즌 종료 후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쳐오면서 해태의 경영난이 심각해지자,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이종범을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로 진출시키고, 임창용, 이순철, 조계현을 삼성에 팔아넘기며, FA였던 이강철, 홍현우를 놓쳐 버린다. 결국 1998년 포스트시즌에 오르지 못한 것을 시작으로 기아자동차가 구단을 인수하기 전까지 하위권을 전전하기 시작한다.
김재박 감독이 이끌었던 팀. 정주영 회장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자 분위기 쇄신을 위해 스포츠에 눈을 돌렸는데 이때 탄생한 팀이 현대였다.[24] 분위기 쇄신이 목적이었으므로 현대는 가능한 한 짧은 시간 안에 강팀이 되어야 했다. 프런트 측은 삼성과 머니 게임을 벌여가며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던 해태, 쌍방울의 선수와 유망주 그리고 2000년부터 도입된 FA 제도를 통해 각 팀의 에이스급 선수들을 싹쓸이 했고 박재홍, 박경완, 임선동, 정명원, 정민태, 박진만과 같은 걸출한 실력을 갖춘 선수를 확보했다. 이 외에도 다른 팀 내에서 입지가 흔들리거나 갈등을 겪었던 전준호, 심정수, 심재학, 박종호, 송지만 등을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하며 KBO 팀들을 통틀어 역대 최고급 선발 라인업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양대 리그였던 2000년에는 정민태, 김수경, 임선동이 나란히 18승을 올리는 등 역대 최고급 선발진을 갖게 된다. 선발뿐만 아니라 계투진들도 뛰어났는데, 조웅천, 조용준, 정명원, 신철인, 이상열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투수력을 바탕으로 당시 기준으로 시즌 최다승인 91승을 거두기도 했다.[25] 이 시즌에 기록한 0.695의 승률은 역대 시즌 승률 3위이며, 전/후기리그 체제가 아닌 단일 시즌 기준으로는 역대 시즌 승률 1위의 기록이다.
하지만 2001년 정주영 회장의 사망과 하이닉스의 자금난 등이 겹치면서 주축 선수들이 모두 다른 팀으로 팔려나갔고 2007시즌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 뒤 신생 구단인 서울 히어로즈가 현대 선수단을 인수했다.
현대는 1998년, 2000년, 2003년, 2004년까지 3회의 통합 우승과 양대 리그 당시 1회 우승[26]으로 통산 네번 우승했다. 하지만 해단으로 인해 우승 횟수가 더 이상 늘어날 수 없어 최종 4회 우승으로 팀 역사를 마감한다.
한국시리즈에서 우승 없이[27] 준우승만 6차례 기록했던 삼성은 최후의 수단으로 해태의 김응용 감독을 영입하지만 2001년 또 다시 준우승에 그치고, 그해 겨울 트레이드로 팀을 떠났던 양준혁을 FA로 재영입하고 SK에 김기태, 김동수, 김상진, 김태한, 정경배, 이용훈을 주고 좌완투수 오상민과 유격수 틸슨 브리또를 받아오는 6대2 트레이드를 단행한다. 그리고 대망의 2002년 이승엽, 마해영의 백투백 끝내기 홈런으로 마침내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이후 2003년 준PO에서 패하고 2004년 우승에 실패한 삼성은 김응용 감독을 사장으로 승진시키고 선동열 수석코치를 감독으로 선임한다. 그리고 FA로 심정수, 박진만을 영입하며 막강한 전력을 구축한 뒤 2005년, 2006년에 통합 2연패를 달성한다. 하지만 2007년부터 3년동안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며 중위권에 머물렀고 2010 시즌을 끝으로 김응용, 선동열 모두 삼성을 떠나게 된다.
이 시기 삼성은 현대, SK와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성적을 기록했지만 언론과 팬들로부터 왕조로 인정받지 못했는데 그 원인으로는 현대와 전성기가 겹쳤던 점 , FA를 싹쓸이하면서 돈성이라는 안좋은 이미지를 구축한 점,[28] 선동열의 지키는 야구가 삼성 팬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던 점[29] 등이 있다.
SK는 하위권을 전전하기는 했지만 나름 리빌딩도 어느 정도 완료했고 준우승의 공로가 있는 조범현 감독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김성근 감독을 선임한다. 김성근 감독은 1점을 짜내기 위한 작전과 필요하다면 도발을 걸어 상대 팀의 멘탈을 흔드는 등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구를 했다. 이는 약점이 없는 팀, 포기하지 않는 팀이라는 찬사와 비매너 야구, 번트 야구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논란의 중심이 되는 원인이 되었지만 4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해[30] 2007년, 2008년, 2010년에 통합 우승을 차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때 주요 선수들로 김광현, 채병용, 송은범이 선발을 이끌었고 정대현, 정우람, 윤길현, 작은 이승호, 전병두, 고효준, 김원형, 조웅천, 큰 이승호, 가득염이 불펜을 책임졌다. 타선에선 박경완, 김재현, 박재홍, 이호준, 안치용, 박정권, 김강민, 최정, 정근우, 나주환, 박재상이 있었다.
하지만 2011년 시즌 중 프런트는 지나치게 전권을 요구하는 김성근을 중도 경질시키고[31] 이만수에게 감독 대행을 맡긴다. 사실 성적 때문에 부각이 덜 되었지 당시 SK는 내부적으로 잡음이 많았었다. 김성근과 이만수의 갈등 프런트와 현장의 갈등 등 코칭스태프들이 따로 움직였고 팀 분위기는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두산은 도박 사건으로 분위기가 침체된 삼성을 2015년에 무너뜨리고 2016년에는 통합 우승을 하며 2연패에 성공한다. 이후로도 승승장구 할 것 같았던 두산은 2017년 정규시즌 우승에 실패 후 한국시리즈에서 무력하게 패했고, 2018년에는 2위와 14.5게임차가 나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뒀지만 SK에게 충격적인 업셋을 당해 버린다.[32] 하지만 2019년 후반기 80승에 선착하며 순조롭게 정규시즌 우승을 할 것 같았던 SK를 따라잡기 시작했고 시즌 최종전에 승리하면서 정규시즌 우승에 성공, 작년 한국시리즈에서 당했던 패배를 간접적으로 되갚아준다. 이후 두산은 2016년에 이어 2019년에도 통합 우승을 달성한다.
2020년에는 3위로 정규시즌을 마치고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였으나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이후 두산의 행보는 부정적으로 흐르고 있는데 당장 모기업의 상황이 좋지가 않고 그 여파로 라울 알칸타라, 오재일, 최주환, 크리스 플렉센이 타팀으로 이적을 해버린다. 이들의 공백을 어떻게 해결 하느냐에 따라 두산의 미래가 갈릴것이다.

4.2. 미국


  • 뉴욕 양키스: 1920~1965[33], 1995~2001[34]
1920~1965시즌은 통칭 '''올드 그레이트 양키스'''로 불린다. 야구의 신 베이브 루스 영입을 시작으로 루 게릭, 조 디마지오, 요기 베라, 미키 맨틀 등의 올타임 레전드들이 팀을 이끌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무이한 초거대 야구단으로 거듭난다. 이 기간 동안 '''월드 시리즈 우승 20회'''[35], 아메리칸리그 우승 29회를 차지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1927년의 양키스는 야구 역사상 최강의 팀으로 평가되며,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밥 뮤젤로 구성된 클린업 트리오 역시 역대 최강으로 꼽힌다. 야구에서 흔히 쓰이는 '''살인 타선(Murderers row)'''이라는 말이 이 시기 양키스의 타선 때문에 만들어졌다. 세대 교체를 서너 번씩 하면서도 성적이 떨어지질 않는 양키스 때문에 뉴욕을 박차고 나간 팀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LA 다저스니 말 다 한 셈이다.
1995~2001시즌은 '''뉴 그레이트 양키스'''로 불렸는데, 조 토레 감독의 지휘로 데릭 지터, 마리아노 리베라, 호르헤 포사다, 앤디 페티트, 버니 윌리엄스 등 팜 출신 선수들이 주축이 되어 팀을 이끌며 월드시리즈 우승 4회, 아메리칸리그 우승 5회, 동부 지구 우승 5회를 차지했으며, 플레이오프를 개근했다. 특히 1998년에는 '''올드 그레이트 양키스'''도 기록한 적 없는 정규 시즌 114승을 찍었고, 포스트시즌 11승(DS 3승, CS 4승, WS 4승)을 더해 역대 1시즌 최다 승(125승) 기록을 세웠다. 이후로도 양키스는 '''악의 제국'''으로 불리는 등 세계구급 강팀으로 군림하나, 플레이오프 불운이 이어지며 1990년대 말만큼의 우승을 하진 못하게 된다.[36]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1972~1976[37]
지금은 빌리 빈머니볼로 유명한 팀이지만 20세기에는 월드시리즈를 9차례나 제패했던 명문 구단이다. 특히 1970년대에 구단주 찰리 핀리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1972년~76년까지 월드시리즈 3회 연속 우승과 3년 연속 아메리칸리그 우승, 5년 연속 지구 우승을 기록하며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 특히 이 때 달성한 월드시리즈 3연패는 메이저리그에서 오직 오클랜드와 뉴욕 양키스만 가지고 있는 기록. 이 시기 팀의 전성기를 이끈 선수들로는 롤리 핑거스캣피시 헌터레지 잭슨바이다 블루, 진 테나스 등이 있다.

4.3. 일본


1951~1953시즌은 양극화가 심각한 때였다. 센트럴에서는 요미우리만 올라오질 않나, 반대는 난카이가 올라오면서 자이언츠-난카이 3연전을 했다. 이 도전을 모두 이겨내면서 3연패 달성. 1호 야구단의 저력을 보여주며 1차 왕조를 세웠다.
1965~1973시즌은 1951~1953시즌을 왕조 '''따위'''로 만들어버린 무시무시한 시기. 과장 아니고 해마다 10월만 되면 '''자이언츠 야구단 일본 제패'''라는 소식이 들려왔던 시절이다. 당시 퍼시픽 리그 강호 니시테츠 라이온즈가 약해지며 자이언츠의 라이벌은 퍼시픽 리그에선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시절이다. 도에이 플라이어스나 한큐 브레이브스가 신흥 강호로 올라갔지만 자이언츠를 막긴 힘들었다. 가히 일본의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콤비라 할 만한 홈런왕 오 사다하루, 미스터 베이스볼 나가시마 시게오 콤비가 타선을 책임졌던 팀. 9연패를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7차전까지 승부를 가져간 적이 없다. 많아야 2패만 내주는 압도적 성적. 일본시리즈 9연패를 달성했기 때문에 흔히 V9 시기라고 부른다. 이 정도면 왕조 선언을 넘어 칭제건원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이때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일본의 국민 구단으로 자리잡았고, 일본 야구 팬들은 친요미우리 VS 반요미우리로 거의 완벽하게 쪼개졌다. 하지만 1974년 1리 차이로 주니치에게 센트럴 리그 우승을 빼앗기며 일본시리즈 진출 좌절로 나인핏 왕조는 종결된다.
  • 니시테츠/세이부 라이온즈: 1956~1958, 1986~1992[38]
1956~1958시즌은 후쿠오카 시절 왕조. 난카이가 콩조를 달성하고 주르륵 미끄러진 사이 그 틈을 노려 리그 우승을 했고, 바로 3연패를 달성했다. 그러나 지방 사철이라 돈도 없어서 전력 유지가 힘든 나머지 내려왔고, 이후 검은 안개 사건으로 팀은 완전히 멸망 직전까지 갔다.
1986~1992시즌은 사이타마로 옮기고 세웠으며, 리그 우승 9회에 일본 제일 클럽 자리를 8번이나 차지한 상승(매번 이긴다는 뜻) 군단의 돌풍이었다. 세이부는 강해야 관중이 많이 온다 하며[39] 어떻게든 팀 전력을 강화시켰다. 타선은 막강한 AKD[40] 클린업 트리오가 타점을 팍팍 내주었고, 중심 타선 이외에도 이시게 히로미치, 츠지 하츠히코, 히라노 켄, 타나베 노리오, 이토 츠토무 등의 선수들이 알토란 같은 활약을 보여줬다. 투수진에선 히가시오 오사무, 쿠도 키미야스, 마츠누마 형제가 왕조 초반의 투수진을 주도했고, 중후반으로 가면서 와타나베 히사노부, 시오자키 테츠야, 궈타이위엔 등 신진 선수들이 중심에 떠오르며 리그를 썰어먹었다. 전력만 따지면 V9로 대표되는 요미우리의 최전성기보다도 강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89년에 리그 우승을 못하면서 끝나나 했으나 3연패-1년 쉬고-3연패를 찍으며 갈라놓기 애매하게 왕조를 이어나갔다.
발야구로 상대를 유린하고, 정상급 투수로 퍼시픽 리그 최강으로 군림. 왕조 되찾으러 왔다는 자이언츠를 2연속 격파하며 자이언츠 천하 종결을 재확인했다.
2014년, 2015년 우승 후 2016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에서 떨어지며 왕조는 물거품이 되는 듯 했다. 하지만 기본 전력이 단단했기에 곧바로 재도전이 가능했고 2017년, 2018년, 2019년에 3-peat을 달성하며 왕조의 시작을 선언한다. 그 뒤 2020년에도 우승을 하여 V9시절의 요미우리 외에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던 4연패를 달성한다.심지어 2020년에는 변칙 룰도 무시하는 건 기본이고 상대 팀에게 엄청난 굴욕을 선사했다.
세이부 왕조 감독들이 요미우리 왕조 출신이라면, 이 시기 소뱅 감독들인 아키야마 코지쿠도 키미야스는 세이부 왕조 멤버이자 일본시리즈 MVP 출신이며, 1999년 일본 시리즈에서 호크스의 35년만의 우승에 공헌을 했다. 또 감독으로서 호크스를 강팀 반열에 올려놓은 오 사다하루는 구단 회장으로서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5. 축구


아래 수많은 유럽 리그의 왕조들이 서술되어 있지만 대부분 자국 리그 한정이고, '''유러피언 컵과 그 후신인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기준으로 한 축구 왕조[41]는 시대 순서대로 레알 마드리드 CF(1955~1960), AFC 아약스(1970~1973), 바이에른 뮌헨(1973~1976), 리버풀 FC(1976~1984), AC 밀란(1987~1994), FC 바르셀로나(2008~2012), 레알 마드리드 CF(2015~2018)[42]까지 7팀이 주로 언급된다.[43]

5.1. 한국


K리그에서 최초로 왕조를 구축했던 팀으로 동대문 연고 시절인 1993~1995 시즌과 연고지를 성남으로 이전한 시절인 2001~2003 시즌에 각각 3연패를 기록하는 등 통산 7회 우승을 기록했다. 특히 1995 시즌에는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까지 제패하며 K리그 팀 중 최초로 시즌 더블을 달성하였고 2003 시즌에는 승점 91점을 기록하며 당시 최다 승점 기록을 갈아치웠다. 모기업이던 일화가 슬슬 발을 빼던 2010 시즌에도 AFC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하는 등 건재함을 과시했으나 결국 문선명 교주가 사망하면서 일화에서 성남시에 팀을 매각, 중위권 팀으로 전락했다. 2016년에 챌린지로 강등되었으나 2019년 다시 K리그로 복귀하였다.
2009년과 2011년 K리그 정상에 오르면서 왕조의 서막을 알렸고, 이후 2014~2015년[44] 2연패, 2017~2020년 4연패를 달성하면서 통산 8회 우승으로 '''K리그 역대 최다 우승팀'''에 등극했다. 또한 2016년에는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아시아 최강팀으로 군림했고, 2018년에는 스플릿 라운드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우승, 2020년에는 K리그와 FA컵에서 동시에 우승하면서 더블을 달성했다. 다만 심판 매수 논란이 있어서 매수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기도 한다.

5.2.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의 첫 번째 왕조를 구축했다고 평가받는 팀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과 미겔 무뇨스를 중심으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페렌츠 푸스카스, 프란시스코 헨토, 레몽 코파, 호세 산타마리아로 이루어진 '''저승사자 군단'''이었다. 특히 1955-56 시즌부터 1959-1960 시즌까지 '''유러피언 컵 5연패'''를 달성했으며, 프리메라 리가에서도 8번의 우승을 기록했다. 챔피언스 리그 연속 우승이 20년 넘게 나오지 않았던 상황에서 챔피언스 리그 5연패가 나올 가능성은 매우 적기 때문에, 거의 불멸의 연속 우승 기록을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이때 '''8년 18일 동안 121경기 연속 홈 무패'''라는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여전히 세계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45]
2010년대에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중심으로 세르히오 라모스, 루카 모드리치, 마르셀루, 토니 크로스 등과 함께 또 한번의 왕조를 구축하였다. 2013-14 시즌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의 지휘 하에 구단 역사상 10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한 것을 시작으로, 지네딘 지단이 지휘하기 시작한 2016년 1월부터 레알 마드리드는 UEFA 챔피언스 리그 3회 우승, 라 리가 1회 우승, UEFA 슈퍼컵 2회 우승, FIFA 클럽 월드컵 2회 우승,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회 우승을 달성하였다. 특히 2015-16 시즌부터 2017-18 시즌까지의 3연패를 포함해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챔피언스 리그에서 '''5년간 4차례 우승'''하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챔피언스 리그가 현행 체제로 개편된 이후 그동안 2연패를 달성한 팀이 전무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레알 마드리드의 이러한 업적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다. 팀의 주축 멤버인 루카 모드리치는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 리그 3연패를 NBA 시카고 불스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쓰리핏과 비교하며 레알 마드리드가 축구의 왕조'''라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지단이 자진 사임하고 호날두가 이탈리아의 유벤투스 FC로 떠나며 레알 마드리드의 두 번째 왕조는 막을 내린다.
2008-09 시즌 펩 과르디올라 감독 취임 이후 리오넬 메시의 전설적인 활약 아래 2014-15 시즌까지 7시즌 동안 라리가 3연패를 포함한 리그 5회 우승과 2회 준우승, 코파 델 레이 3회 우승, UEFA 챔피언스 리그 3회 우승을 이룩했으며, 무관에 그친 시즌은 2013-14 시즌 단 한번뿐인 명문 구단. 2009년 한 해 동안 6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헥사블'''[46]을 달성한 바 있다. 현재까지 유이하게 두 번의 트레블을 달성했으며, 유럽 클럽 역사상 가장 높은 Elo 레이팅을 찍어 보기도 했다.[47] 그러나 2015-16 시즌과 2016-17 시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유벤투스 FC에게 탈락했고, 2017-18 시즌에는 로마의 기적의 희생양이 되더니 결국.. 그렇게 바르셀로나는 역사상 최강의 팀에서 기적의 희생양으로 전락한다.

5.3. 잉글랜드


1972년부터 1985년까지 리그 우승 8회, 준우승 3회를 기록하며 전성기를 맞았으며, 유러피언 컵에서도 우승 4회, 준우승 1회를 거뒀다. 특히 당시는 리그 우승팀과 전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팀에게만 유러피언 컵에 출전할 자격이 주어졌는데, 1976-77 시즌부터 1984-85 시즌까지 아홉 시즌간 유러피언 컵에 개근하는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즉, 저 기간 동안 반드시 리그 우승이든 유러피언 컵 우승이든 거뒀다는 것이다.
퍼거슨 왕조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1986년 알렉스 퍼거슨이 감독으로 취임한 이후 1990-91 시즌 컵 위너스 컵 우승을 필두로 프리미어 리그가 출범한 1992년부터 2003년까지 프리미어 리그 우승 8회, 준우승 3회, 챔피언스 리그 우승 1회 및 98-99 시즌 트레블을 기록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더욱이 이 트레블을 달성한 경기는 캄프 누의 기적(1999)으로 영원히 역사에 남게 된다. 이후 아스널, 첼시 등의 역습으로 잠시 침체기를 맞았으나[48] 2006년부터 다시 전력을 재정비, 2013년까지 우승 5회, 준우승 3회, 챔피언스 리그 우승 1회, 준우승 2회를 이룩했다.

5.4. 이탈리아


1930년대 세리에 A 프로 개편 후 첫 5연패를 차지했고, 1970년대~1980년대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명장 조반니 트라파토니 시절 세리에 A 6회 우승, 코파 이탈리아 2회, 유러피언 컵 1회, 컵 위너스 컵 1회, UEFA 컵 1회, 도요타 컵 1회 등 14개 트로피를 쓸어담았다. 이 당시 UEFA 주관 대회를 최초로 전부 제패한 기념으로[49] UEFA에서 UEFA Plaque라는 명예 트로피를 최초이자 최후로 지급받았다. 2011-12시즌부터 리그는 한 시즌도 빼놓지 않고 우승하면서 다시 왕조의 반열에 올라섰다.
일명 '''위대한 토리노(Grande Torino)'''. 제2차 세계 대전 전후로 리그 5연패를 달성했으나,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인해 왕조의 막을 내렸다. 인테르와 함께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탈리아 클럽이다.
전자는 카테나치오의 창시자인 엘레니오 에레라의 조련하에 유러피언 컵 2연속 우승 및 준우승 1회, 세리에 A 우승 3회를 기록하며 40년대의 '''위대한 토리노'''와 더불어 '''위대한 인테르(Grande Inter)'''로 불렸다. 후자는 로베르토 만치니, 주제 무리뉴 휘하에서 세리에 A 5연패,[50] 챔피언스 리그 우승 1회, 코파 이탈리아 2회를 기록하였다. 특히 09-10 시즌은 숨막히는 수비 라인과 미들진의 조직력이 극대화된 시절로 결국 트레블까지 달성했다.[51]
압박 축구를 완성한 아리고 사키와 후임 파비오 카펠로 휘하의 87~94년 동안 리그 우승 3연속 우승을 포함한 4회를 기록했으며, 91-92 시즌에는 무패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다음 시즌까지 무패를 이어가며 58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 유러피언 컵(현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최후의 2연패를 포함한 3회 우승. 이때 당시의 밀란은 클럽 축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팀 중 하나로 꼽힌다. 괜히 밀란 제너레이션으로 불리는게 아니다.

5.5. 독일


비록 분데스리가에서는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 발목을 잡히고 74-75 시즌 리그 10위로 추락하기도 했으나, 리그 우승 3회와 유러피언컵 우승 3회를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 등 팀의 주축 선수들이 독일의 첫 전성기를 이끌며, 1966년 월드컵 준우승, 1970년 월드컵 4강, 1972년 유로컵 우승, 1974년 월드컵 우승을 거두는 데에 큰 일조를 했다.[52] 2013년부터 현재까지 리그 연패 진행중이며 특히 2013년에는 독일 클럽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했다.

5.6. 네덜란드


축구 역사상 가장 혁신적이었던 팀. 리누스 미헬스가 그의 분신 요한 크라이프를 앞세워 이룬 토털 혁명을 토대로 리그 우승 6회, 챔피언스 리그 우승 3회를 거뒀다. 71-72 시즌에는[53] '''48전 42승 5무 1패, 135득점 27실점, 승률 87.5%'''라는 엽기적인 팀 기록을 찍으며 트레블을 달성했다. 87.5%라는 승률은 유럽 대회 참가 클럽 중 단일 시즌 최고 승률이다.

6. 관련 문서


[1] 2005-06시즌부터 5시즌 동안 정규 리그에서 4번, 챔피언 결정전에서 2번 우승을 한다.[2] 2015-16시즌 정규리그는 압도적 1위 우리은행과 연패로 6위가 된 KDB생명을 제외한 나머지 4팀이 2,3위를 놓고 플레이오프 경쟁을 벌이는 구도가 되었다.[3] 사실 이로 인한 문제들 중 가장 큰 문제는 NBA 최초의 슈퍼스타였던 마이칸이 어느 팀에서도 영구결번이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마이칸은 위태로웠던 신생 NBA를 자리잡게 한 주요 인물 중 한명이었고 농구의 여러 규칙 (3초룰, 24초 샷클락, 골텐딩 등)을 바꾼 장본인이었다.[4] 빌 러셀이 은퇴하고 1974년과 1976년에 2번의 우승을 더했다. 총 8회 우승[5] 하지만 마이클 조던은 승리하든 패배하든 아직도 7번째 우승에 도전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밝혔다. 불스 왕조는 단장과 구단의 의사로 7번째 도전을 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스스로 막을 내렸다.[6] 불스 구단주는 화이트삭스도 같이 소유하고 있는데 야구빠이기 때문에 불스가 1990년대 우승을 연이어 할 때도 시큰둥해했다.[7] 7연속 우승은 '''한국 프로 스포츠 사상 최장 연속 우승 기록'''이다.[8] 해태는 2001년 도중 KIA에 인수되어 KIA 타이거즈로 팀명이 바뀐다. 해태 9회, KIA 2회 우승.[9] OB 베어스는 1999년 두산 베어스로 팀명이 바뀌며, OB의 우승은 두산의 우승에 해당된다.[10] 현대는 2007년 이후 해체되어 최종우승 기록이 4회로 남게 되었다.[11] 삼성은 '''통합''' 4연패[12] 예전에는 2군 팜이 두터웠다고 평가 받았으나 4연패로 인해 신인 지명 순위가 계속 밀렸고 우수한 유망주를 픽할 수 없었다. 2015년 2차 드래프트가 그 증거로 삼성 2군은 타팀에 비해 유출이 적었다. 타팀도 삼성 2군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13] 해태와 삼성은 4연패에 성공했지만 현대와 SK는 3연패조차 성공 하지 못했다.[14] 2000년대 현대와 삼성은 2연패와 3시즌 이내의 우승을 달성했고 SK는 2연패와 2시즌 이내의 우승을 달성했다. 삼성은 현대보다도 더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왕조로 인정받지 못했고 여기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15] 축구, 농구, 배구는 승률 차이가 훨씬 크다. 치르는 경기수가 야구만큼 많지는 않지만 극단적인경우 무패 우승팀이 나오기도 한다.[16] 우승/우승 실패/우승/우승 실패/우승의 경우[17] 2000년대 현대와 삼성의 경우[18] 2019년까지 해태, 삼성이 2번 현대, SK, 두산이 1번씩으로 해체된 팀을 포함 12팀 중 약 4할인 5팀이 달성했다. 우승횟수로는 해태, 삼성이 7회 현대, SK, 두산이 3회로 38시즌 중 약 6할인 23회에 이른다. 5년간 3우승을 대단하게 볼 수 없는 이유다.[19] 야구는 정규시즌의 성적 변동이 크지 않은 종목으로 KBO, MLB, NPB의 성적 변동은 실제로 크지 않다. 정규시즌 상위팀에게 유리한 계단식 포스트시즌은 이런 야구의 특성과 결합하여 KBO에서 5년간 3우승이 자주 나온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20] 자세한 내용은 포스트시즌을 참고. 우승을 하기위해 KBO의 정규시즌 1위는 4~7경기, 2위는 7~12경기, 3위는 10~17경기, 4위는 11~19경기, 5위는 12~19경기를 치른다. 반면 2리그 6지구인 MLB는 지구 1위팀들이 11~19경기, 와일드카드팀이 12~20경기를 2리그인 NPB는 리그 1위팀들이 7~13경기, 리그2, 3위팀이 10~16경기를 치른다. 이처럼 KBO의 포스트시즌에선 상위팀의 이점이 매우 커 5년간 3우승이 자주 나왔다.[21] 1982년~1999년에는 2번만 나왔지만 2000년~2019년에는 5번이나 나왔다. 더군다나 경쟁팀이 늘어나 우승 난이도가 높아지고 있는 와중에 말이다.[22] 현대, SK가 그 증거로 왕조로 이견이 없었던 두팀은 최근 동일한 성적이 많아지자 왕조에서 제외되는 평가를 받는 상황까지 몰렸다. 사실 이는 어느정도 예견된 일로 두팀은 왕조로 보기에는 성적이 애매했다. 그래서 비슷한 성적이 적었을때는 왕조로 불렸지만 이런 상황이 영원할순 없었고 언젠가는 왕조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었다.[23] 첫 우승부터 마지막 우승까지의 기간을 보면 4연패팀들과 다른팀들의 차이는 더 명확해진다. 4연패팀은 4번째 우승까지 4년이 걸렸지만 1991~1997 해태, 1998~2004 현대는 7년이 걸렸고 2002~2006 삼성, 2007~2010 SK, 2015~2019 두산은 3번째 우승에서 그쳤다.[24] 사실 실업 팀 현대 피닉스를 통해 미국의 양대 리그처럼 한국 프로야구에 새로운 리그를 만들려고 시도하였으나 그렇게 되진 못했고, 대신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 한국 프로야구에 입성했다. 자세한 건 현대 피닉스 참고.[25] 이후 경기수가 144경기로 늘어나면서 두산이 2016년 93승으로 경신했다. 2000년 현대는 133경기에서 91승.[26] 2000년도에는 양대 리그여서 통합 우승 개념이 모호하나 자리그와 인터리그 경기수가 동일했으며 현대는 그런 상황에서 최고 승률을 기록했으므로 통합 우승으로 칭해도 무리가 없다.[27] V1 자체는 1985년 전후기 통합 우승으로 달성했지만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았다.[28] 당시 최강팀이던 현대에서 박종호, 심정수, 박진만을 차례로 빼온게 컸다. 하지만 삼성은 정당한 권리로 FA선수를 영입 했으며 현재 시점에서 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다. 애초에 돈질의 시작은 1990년대 현대가 원조다.[29] 기존 삼성의 공격적인 팀컬러에 익숙해져 있던 삼성 팬들에게 선동열식 불펜 야구는 생소했을 뿐더러 그 과정에서 배영수, 권오준, 권혁 등 많은 투수들이 혹사당했고 초반 2연패 이후 4위-4위-5위라는 저조한 성적, 그리고 결정적으로 양준혁에게 은퇴를 강요하는 등 삼성 팬덤에게 선동열은 좋은 감독이 아니었다.[30] SK는 이후 2011년, 2012년에도 한국시리즈에 오르며 최초로 6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기록을 달성한다.[31] 이 자체만 놓고 보면 김성근 감독의 잘못이 큰데, 프런트의 많은 배려와 투자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은 프런트를 비난하는 뉘앙스의 인터뷰를 했고 그 결과 프런트와의 갈등이 자주 일어났다.[32] 14.5게임차 업셋은 역대 최대 게임차 업셋이다.[33] 1936~1939시즌에 4연패, 1949~1953시즌에 5연패[34] 1998~2000시즌에 3연패[35] 20회 우승은 양키스를 제외하면 메이저 리그에서 아무도 달성하지 못한 기록인데 양키스는 이 기간 동안에만 20회 우승을 달성했다.[36] 한가지 실예로 2001년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만 7차전 혈투 끝에 마무리투수인 마리아노 리베라가 애리조나의 루이스 곤잘레스한테 끝내기안타를 내주며 패했다.[37] 1972~1974시즌에 3연패[38] 1986~1988시즌에 3연패, 1990~1992시즌에 3연패[39] 세이부 홈 구장은 도쿄에서도 열차로 1시간 정도 가야 하고, 사이타마 인구 밀집 지역에서도 거리가 있었다. 한 마디로 성적이 안 나오면 관중 수익이 폭망한다는 것.[40] '''아'''키야마 코지, '''기'''요하라 카즈히로,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41] 예를 들면 레알 마드리드의 경우 자국 리그에서의 왕조는 53년부터 65년까지지만 61년~65년까지는 유럽대항전에서 아쉬운 성적을 거뒀기에 유럽 전체의 왕조 기간에는 포함이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약스의 경우에는 65년부터 자국 리그에서 강세를 보여줬으나 70년 이전까지는 유러피언 컵에서 우승이 없으므로 유럽 왕조 기간은 71년부터로 보는 것이 옳다.[42] 2013-14 시즌부터 레알 마드리드의 왕조가 시작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2014-15 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무관에 그친 반면 2년간 부진하던 바르셀로나가 트레블을 달성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2015-16 시즌부터 왕조로 분류한다. 참고[43] 참고1참고2참고3참고4 해외 언론에서 언급한 왕조 내용과 한준희 위원이 레알 마드리드의 챔스 2연패를 언급하면서 나온 역대 최강팀들에 관한 의견이다. 레알 마드리드(1955~1960), 아약스, 바르셀로나는 항상 고정이고 챔피언스 리그 3연패 이후 레알 마드리드(2015~2018)까지도 포함된다. 다만 해외 언론에서는 리버풀과 뮌헨을, 한준희 위원은 밀란을 선정했는데, 세 팀의 전성 시대가 다 다르므로 굳이 우열을 가릴 필요 없이 모두 왕조로 인정해도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44] 이 때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준결승전까지 동아시아와 서아시아가 따로 치른다는 규칙이 신설되었다. 원정 부담 완화가 되며 전력 손실이 덜해졌고, 이게 전북 왕조 건국에 큰 일조를 했다.[45] 세르비아의 FK 츠르베나 즈베즈다가 96경기 연속 무패로 2위.[46] 라리가, 코파 델 레이, UEFA 챔피언스 리그, UEFA 슈퍼컵, FIFA 클럽 월드컵,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47] 2012년 4월 15일 2103점으로, 원래 1960년대 미겔 무뇨스가 이끌던 레알 마드리드가 가장 높은 레이팅을 기록했으나 최근 재조정되어 바르셀로나가 더 높은 레이팅을 기록하게 되었다. 다만 시즌 종료 시점의 레이팅에서는 무리뉴의 2011-12 레알이 가장 높다.[48] 이건 당시 아스널 감독과 첼시 감독이 아르센 벵거 그리고 주제 무리뉴라서 그런거다.[49] 주요 대회가 아닌, 인터토토 컵 같은 정말 마이너한 대회까지 우승해본 팀은 유벤투스가 유일하다. 애초에 챔피언스 리그나 UEFA 컵 같은 대회에서 우승할 만한 강팀이라면 '''리그 성적이 너무 좋아서''' 다른 대회에는 참가도 못할 가능성이 높다.[50] 05-06 시즌 칼초폴리로 인해 얻은 스쿠데토 포함.[51] 사실 위대한 인테르 시절 64-65 시즌에 3개 대회 결승에 오르며 이탈리아 클럽 역사상 최초로 트레블 기회를 잡았으나, 코파 이탈리아에서 준우승하며 실패.[52] 사실 1970년대부터는 바이에른이 독일 원탑 클럽이라 바이에른 왕조가 지속되는 가운데, 간헐적으로 다른 클럽들의 도전이 번갈아가며 이어지는 형국이라, 바이에른의 시대를 저 시기로만 국한하는 것이 적절한가 싶기도 하나, 유럽을 제패한 시기가 이 시기라는 점이 중요하다.[53] 미헬스가 팀을 떠나고 코바치가 맡은 시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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