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역사

 




1. 개요
2. 고대
3. 고대 말
4. 중세
4.2. 카라 키타이, 호라즘 제국 그리고 몽골 제국의 침략
5. 우즈베크인의 발흥
6. 근세
7. 근대사
8. 현대사
9. 참고 문헌


1. 개요


실크로드의 중심부 트란스옥시아나의 역사가 사실상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로, 고대부터 동서남북을 잇는 요충지로 번영했다. 일찍부터 낙타를 길들여 사육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우즈벡의 사마르칸트, 부하라, 히바 등의 도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재된 고도로 유명하다.

2. 고대


기원전 3300년부터 우크라이나의 얌나야 문화와 흡사한 아파나시에보 문화권이 나타나서 서쪽으로는 오늘날의 벨라루스 일대부터 동쪽으로는 알타이 산맥 일대까지 유사한 양식의 청동기 문화가 전파된다. 아파나시에보 문화는 보르세미스 문화와 접촉하면서 몽골 서부지역에 기원전 20세기의 청동기 문화가 나타나는데, 이는 고고학적 연구 결과와 더불어 인도유럽계 문화가 알타이 지역으로 진출한 것으로 확인되었다.[1][2]
이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역사 기록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권 하에 들게 되는 기원전 5세기 무렵부터 시작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지역을 "옥수스[3] 강 너머의 땅"이라는 뜻의 트란스옥시아나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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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박트리아 왕국
페르시아가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멸망하면서 이 지역은 공식적으로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역이 되었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서 행정력이 잘 닫지 못했다고 한다. 향수병 때문에 그리스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한 그리스계 이주민들은 셀레우코스 왕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대신 기원전 256년경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세우며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독립했다. 이들 박트리아 그리스인들은 인도와 활발한 교역을 벌이며 그리스어로 고대 인도의 문화와 역사, 종교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중국 서북부 영토에 살던 토하라[4], 스키타이계 부족들이 흉노에게 밀리면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와중에 비옥한 박트리아를 침공하여 기원전 125년경 멸망시키면서 트란속시아나의 그리스인들은 보다 남쪽으로 이동하여 인도-그리스 왕국을 세우고, 불교를 받아들인다.[5] 박트리아에 정착한 토하라인들은 쿠샨 왕조를 세우고 북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나라의 장건페르가나(대완), 소그디아나(강거), 박트리아(대하)를 탐사한 후 흉노가 중앙아시아의 여러 도시와 통상을 하며 부를 축적한다는 정보를 전하자, 한나라는 6만 군대로 무력 시위를 벌이며 여러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에게 흉노 대신 한나라와 직접 통상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한나라의 영향력은 트란속시아나의 동부의 타림 분지 일대에만 매우 약하게 국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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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이 세운 박트리아 왕조 때부터 인도와의 교역으로 번영을 누렸던 트란속시아나 지역 경제는 토하라인들의 지배 하에서 계속 발전하였다. 중앙아시아에서 흉노족이 팽창하고 오리엔트에서는 파르티아가 지중해에서는 로마가 번영하는 사이에 트란속시아나의 도시들은 중국과 인도의 물산을 로마로 수출하는 중개무역 거점이 되어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쿠샨 왕조의 영향으로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남부 일대와 타지키스탄에 대규모 관개 시설이 건설되면서 경제 성장이 가속화되었다. 쿠샨 왕조의 유산이 하나 더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 들어온 인도-그리스인, 인도-스키타이인, 토하라계 쿠샨인들은 당시 인도에 주류 종교였던 브라만교로 입교할 경우, 낮은 카스트를 부여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브라만교 대신에 인도의 상인들이 많이 믿던 종교 중 하나였던 불교로 개종하면서 중앙아시아 전역에 불교가 유행하게 되었다.'''

3. 고대 말


동서교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이 지역에는 설일체유부 대승불교가 널리 전파되고 유행했으며, 많은 불교 대학이 건립되었다. 신라의 고승 혜초왕오천축국전이나 당나라의 고승 현장대당서역기에도 등장한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가 5~7세기부터 점점 교세가 확장되고 있었으며, 사마르칸드와 부하라의 상권을 장악한 소그드인들을 중심으로 마니교가 널리 유행했다. 마니교 교리를 배운 소그드인들은 유럽에 가서는 기독교인 행세를 하고 중국이나 인도에 가서는 불교 신자 행세를 하면서 어려움 없이 통상을 할 수 있었다. 고대 말 이 지역의 역사는 사마르칸드부하라를 중심으로 한 소그드인들이 여러 유목제국들의 흥망성쇠 속에서 동서 교역을 주도하는 역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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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왕국이 붕괴된 후 서기 5세기 무렵 백흉노 이른바 에프탈이라고 하는 유목민족이 득세하였다. 소그디아나와 박트리아를 근거지로 둔 이들은 튀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토하라계 혈통의 유목민으로 추정된다. 트란속시아나부터 인더스 강 일대까지 장악했던 에프탈인들은 이전의 유목 왕조들과 다르게 여러 도시들을 건설하고 소그드인들로부터 체계적으로 세금을 거두는 등 중앙집권을 추구하면서 강력한 세력으로 거듭났다. 이들은 458년 페로즈 1세사산 왕조의 왕위에 오르도록 도운 후에 484년 헤라트 전투에서 페로즈 1세를 전사시키고 사산조 페르시아의 동부 호라산 지역 일대를 장악하는 듯 했다. 그러나 서기 557년 돌궐과 페르시아 연합군이 부하라 근교에서 에프탈족 대군을 포위 공격해 섬멸하면서 세력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전해진다.[6] 에프탈족은 서기 600년경 사산조 페르시아 영토 중심부의 이스파한을 습격하면서 페르시아와 전면전을 선포했고, 사산 왕조의 호스로 2세아르메니아 출신 장군 슴바트 4세 바그라투니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에프탈 카간을 죽이고 호라산 일대를 전부 탈환하였다 한다. 에프탈족이 사산 왕조와의 전면전에 국력을 소모하는 사이에 서돌궐 제국이 에프탈족의 중앙아시아 영토를 순식간에 정복하면서 중앙아시아의 에프탈 왕국은 여러 소국으로 쪼개지며 멸망하였다.
오늘날의 카슈미르와 아프가니스탄 일대 지역으로 이동한 에프탈인들은 인도에서 "후나스Hunas"나 "투르슈카스Turushkas"라고 칭해졌으며, 인도를 여행한 중국인 승려들은 이들의 왕 미히라쿨라[7]가 불교 승려들을 학살하고 여러 사찰을 파괴하여 불교의 교세가 많이 꺾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미트라 신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미히라쿨라 왕은 오늘날의 파키스탄의 시알코트에 해당하는 사갈라를 근거지로 하여, 520년 신드 지방을 정복하고 그곳의 불교 사원들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고 승려들을 학살했다 한다. 중국인 승려 현장카슈미르간다라 지방을 정복하고 승승장구하던 미히라쿨라 왕은 굽타 왕조의 저항에 막히면서 인도 아대륙 정복에는 실패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미히라쿨라 사후 신드,간다라,카슈미르에 있던 에프탈족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불교로 개종하고 인도인들과 동화되었다.
에프탈족을 이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발흥한 서돌궐 제국은 소그드 무역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동아시아 물산을 동로마 제국이나 사산조 페르시아에 수출하는 무역을 장악했다. 소그드인들은 자신들의 무역 네트워크를 지켜주고 도시의 성벽을 보호해주는 튀르크인 전사들과 대개 평화적으로 교류하며 서로간의 통혼도 잦았다. '''유목 제국은 전사 집단에게 사치품을 주어 위신을 세워주어야 전사들의 충성을 받을 수 있는데, 서돌궐 제국은 소그드인들의 동서 무역을 통한 무역 수입만으로 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트란스옥시아나의 소그드인들은 에프탈족과 서돌궐 제국에게 안정적인 수입만 제공해 준 것 뿐만이 아니라 도시에서 생산되는 여러 공산품을 직접 공급하고 외교관으로 봉사하는 등 이들 유목민들이 단순한 전사집단에서 국가로 성장하는데 막대한 기여를 했다. 서돌궐 제국에 관해서 자세한 것은 서돌궐 항목 참조 바람.
고고학을 통해 트란스옥시아나의 문서 상당수를 발굴하고 해독한 결과 고대 말 소그드인과 돌궐 제국의 튀르크인 사이의 통혼은 광범위하게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당시 소그드인과 튀르크인 간의 혼혈은 유목민에 대한 고정관념대로 전시 강간이나 노예화에 의한 것이 아닌, 상호 공존 관계에서 사실상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진 통혼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트란스옥시아나의 결혼 관련 문서에는 이혼 시 위자료 관련한 조항이 세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었는데, 이는 상호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경우였다.''' 당시 발견된 유골 중 상당수는 이미 동아시아계와 서아시아계 유전자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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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중엽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마르칸드 구도심 아프라시압의 궁중벽화에는 머리에 깃털을 꽂은 조우관을 쓰고 둥근 고리가 달린 큰 칼을 차고 있는 고구려 사신들로 추정되는 사신들의 모습도 그려져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동맹을 추구하던 고구려의 외교적 노력과 영향력을 증명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4. 중세


7세기 이슬람 세력이 급속히 팽창하면서 이 지역은 8세기부터 우마이야 왕조압바스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아랍인들은 이 지역을 "그 강 너머의 땅"이라는 뜻의 "마와라아 안 나흐르(ما وراء النهر)"라고 칭했다. 이슬람의 도래 이전 불교, 마니교, 네스토리우스파와 유목민 특유의 천신 신앙 텡그리 신앙의 각축장이던 이곳에는 이슬람 수피들이 선교를 하거나 불교 대학이 이슬람 학교로 개조되면서 점차 이슬람화하기 시작했다.[8] 이 지역의 수피들은 고행을 강조하는 중앙아시아 설일체유부 불교 교리의 영향을 꽤 많이 받았는데, 불교 지역에 이슬람을 선교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 토착 이슬람이 불교적 성격을 띄게 된 것. 부하라사마르칸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발흐, 타지키스탄의 후잔트는 고대의 불교 대학 시설과 시스템을 물려받은 덕분에 페르시아의 니샤푸르, 메르브와 함께 중세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
하디스를 신뢰도에 따라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부하라의 무함마드 알 부하리(810년 ~ 870년), 페르가나의 전설적인 천문학자 알 파르가니(861년 사망),부하라 근교에서 태어난 이븐 시나,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베루니 시 출신인 역사학자 알 비루니[9] 테르메즈 출신의 하디스 편집가 앗 티르미디 등등의 유명한 학자들이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 도시 출신이다.
이슬람 세력 외에도 당나라가 이 "마와라아 안 나흐르"(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티베트와 위구르 제국에게 번번히 막히고 결정적으로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 군에게 패배하면서 저지당했다. 730년대 아랍인들은 이 지역에서 많은 수의 에프탈족과 튀르크족 포로들을 사로잡았다. 튀르크족 노예들이 군인 노예나 집사[10]로 각광받으면서 이 지역에서 포로로 잡힌 튀르크인 노예들이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압바스 왕조에 꾸준히 공급되었다. 전성기를 누리던 압바스 왕조가 제 5대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 사후 분열되고 힘이 약해지자 정교한 관료제가 흔들리게 되고, 이를 틈타 페르시아인들이 호라산과 마와라아 안 나흐르 일대에 반독립적인 나라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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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 왕조
타지크타히르 왕조와 그 뒤를 이은 '''사만 왕조'''[11]가 압바스 칼리프로부터 사실상 독립하여 '''페르시아 문화를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 뿌리내리는데 성공했으며, 행정 용어에서 소그드어와 아랍어가 밀려나고 페르시아어가 대신 사용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인들의 세력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압바스 왕조의 제 8대 칼리파 알 무타심은 중앙아시아에서 잡혀온 튀르크인 노예 병사들에게 기대기 시작했고, 아랍인 군인들은 여기에 반발하여 튀르크인 노예 병사들과 유혈 충돌을 벌였다. 알 무타심이 아랍인 군영과 튀르크인 군영을 분리시키고 튀르크계 군인들을 편애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아랍인들은 점점 병권에서 밀려나고, 이는 튀르크계 노예 군인들이 과거 자신들의 구매자였던 아랍인들을 점점 찍어누르는 계기가 되었다.
중앙아시아 튀르크족의 한 갈래인 카라한 칸국의 사투크 부그라 칸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텡그리 신앙, 불교, 마니교를 믿던 튀르크인들은 점차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하면서 튀르크인의 중동 진출이 가속화되었다. 카라한 칸국은 사만 왕조의 영토를 정복한 것을 계기로 많은 타지크계 신민들을 받아들이고 이들에게 오히려 문화적으로 동화되는데,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인들은 문화적으로 급속히 페르시아-순니 이슬람 문화와 동화되었다.[12]

4.1. 셀주크 제국의 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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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말부터 셀주크가 이끄는 오우즈 튀르크족이 시르다리야 강 삼각주 근처로 이주해들어왔다. 셀주크의 아버지는 과거 하자르 왕의 신하였는데, 아버지가 죽은 후 셀주크는 하자르 왕궁에서 자랐다고 한다. 셀주크의 아들들은 이름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유대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인물로 추정된다. 트란스옥시아나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았어 셀주크와 그가 이끄는 오우즈 튀르크족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인근 지역의 다른 비무슬림 오우즈 튀르크족들을 공격했다. 소그디아나를 근거지로 삼은 셀주크 제국가즈나 왕조의 지배를 받던 호라산 지역의 도시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받아냈다. 위협을 느낀 가즈나 왕조의 술탄 마스우드는 셀주크를 공격하지만 1040년 메르브 근처에서 참패하였다.
셀주크의 후계자 알프 아르슬란과 그의 아들 말릭 샤의 재위 기간에 셀주크 튀르크는 카라한 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동부 영토를 안정시켰으며 이를 바탕으로 서쪽으로 팽창을 지속할 수 있었다. 알프 아르슬란을 보좌하는 재상 니잠 알 물크는 사마르칸드 - 부하라 - 메르브 - 니샤푸르를 잇는 도로망을 개선하고 숙박 시설을 설치하며 경찰을 주둔시켜 세금 수입을 증대시켰다.
페르시아계 명재상 니잠 알 물크가 내치를 책임지고 셀주크 왕들은 전쟁을 전담하다시피하는 이러한 구조는, 소그드인들은 도시에서 장사하고 튀르크인들은 도시 성벽과 무역상들을 보호하며 약탈한 물건을 소그드인에게 처분하던 과거 서돌궐 제국의 시스템을 물려받은 것이기도 했다. 니잠 알 물크가 추구하던 이상적인 국가는 “안전한 상태에서 농민과 상인이 부를 창출하고” - “부유해진 농민과 상인들이 세금을 납부하면” - “세금은 군대와 경찰에 투자되어 안정을 보장하고” - “농민과 상인이 지속적인 안정을 누리며 지속적으로 부를 창출하는” 선순환을 가진 사회였다.
셀주크 투르크는 페르시아를 너머 1055년 바그다드에서 칼리프들을 농락하던 쉬아파 부와이 왕조 군벌 세력을 축출하고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마저 격파하면서 튀르크인들은 카프카스와 아나톨리아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진출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트란속시아나 지역에서는 튀르크어가 주요 언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카라한 칸국의 카슈가르 출신 학자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는 '''튀르크어의 위상 상승'''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카슈가르에서 공부한 그는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 궁정으로 들어간 후에 아랍어, 산스크리트어 사전에 대해 공부하게 된 그는 1070년대 그곳에서 여러가지 튀르크 방언들을 정밀하면서도 상세하게 비교분석한 정보를 담은 아랍어-튀르크어 사전을 집필했다.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튀르크어가 초원에 거주하는 야만인들의 완성도 낮은 언어라고 무시당하는 형편이었으나, 동시에 칼리프조는 이미 셀주크 제국의 보호를 받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는 오늘날 역사학자들이나 언어학자들 입장에서 너무나 고맙게도 당시 튀르크어의 여러 격언이나 운문 문장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하였으며,[13] 여러 튀르크 방언에서 페르시아어 차용어들을 일일이 분리해내는 작업도 해냈다.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중세 튀르크어'''를 공부할 때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자료를 남겨준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4.2. 카라 키타이, 호라즘 제국 그리고 몽골 제국의 침략


거란족들이 중국을 정복하여 세운 요나라가 여진족에게 멸망하자 남은 거란족 난민들은 야율대석의 지휘 아래 타림 분지 일대로 도망쳐 카라 키타이[14]를 세웠다. 1120년대 타림 분지를 장악한 야율대석과 거란족 난민들은 카라한 칸국에 용병으로 복무하던 도중 배신하고 타림 분지를 장악했다. 이들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 군사 귀족들에게 봉토를 주는 대신에 돈으로 봉급을 주었고, 중동의 이웃 국가들에게 자신들이 중국을 정복한 지배자라고 자랑하길 좋아했는데, 카라 키타이 지도자는 스스로를 타그바치 칸[15]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중국의 지배자라는 칭호 외에도 이들이 즐겨쓰던 칭호로는 우주의 지배자(...)라는 뜻의 구르 칸(Gūr Khān)이 있었다. 러시아의 경우 중국인들을 카타이,키타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좀 있다.[16] 요즘도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종종 중국인들을 몰래 뒤에서 험담할 때 "까따이","끼따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끼따이가 중국인이라서가 아니라 중국의 지배자라고 자랑하던 끼따이가 현대에 중국인 명칭으로 불려지게 된 것.
야율대석이 1134년 금나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한 이후 카라 키타이는 고토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대신 서쪽으로 팽창을 거듭하였다. 이들은 1137년 5월 서부 카라한 칸국이 멸망하고 여새를 몰아 1141년 사마르칸드 근처에서 펼쳐진 카트완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산자르를 무찌른다. 1142년에는 호라즘까지 세력을 끼친다.
이들 카라 키타이는 불교를 숭상하고 이슬람을 배척했는데, 이들에 대한 이야기[17]가 유럽에서 와전되어 프레스터 존 왕의 전설이 생겨나기도 했다. 결국 '''카라 키타이는 서쪽 영토 대부분을 무슬림 주민들의 반란에 힘입어 호라즘 제국에 빼앗겼다.''' 13세기 초 알라웃딘 무함마드[18]가 트란속시아나의 무슬림 주민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이 지역의 카라 키타이 세력을 몰아내고 수도를 사마르칸드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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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카라 키타이 동부 영토에 살던 무슬림들은 칭기스칸의 몽골군이 1216년 카라 키타이를 무찌르자 해방자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카라 키타이에서 호라즘 제국 영토가 된 지역들은 이와 정 반대되는 아니 엄청난 대재앙을 겪게 되었다. 13세기 초 몽골 제국이 호라즘 제국을 침략하는 와중에 애꿏게도 우즈베키스탄의 유서깊은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는데, 특히 토하라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당시 중앙아시아 사회는 튀르크계 황인들은 주로 군인으로 활동하고 소그드계,토하라계 백인들은 주로 도회지를 중심으로 상인으로 활동하는 분업 체제였는데 몽골인들이 도시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면서 소그드계 백인 주민들이 더 많은 피해를 입었던 것.
몽골 제국이 나타나면서 호라즘 제국이 멸망하였고 튀르크인들이 군인과 귀족으로 편입되면서 몽골-튀르크 제국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 중에서도 트란스옥시아나지역엔 차가타이 칸국이 위치하게 된다.

5. 우즈베크인의 발흥


1369년 티무르는 칭기스칸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사마르칸드의 파괴된 성벽을 복구하고 수도로 삼은 후에 이후 다른 이슬람-튀르크계 국가들과 전쟁을 벌이며 약탈한 부로 사마르칸드를 아름답게 꾸몄다 한다.(...) 사마르칸드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그가 벌이는 전쟁 와중에 티무르 제국의 영토 또한 크게 확장되었다. 티무르 제국의 라이벌 킵차크 칸국이 티무르가 노리던 중동으로 확장을 시도하자, 티무르는 아예 킵차크 칸국의 본거지들을 꾸준히 공격해서 교역로들을 교란시키고 킵차크 칸국을 의 주요 도시들을 정기적으로 약탈하고 파괴해서 킵차크 칸국을 복구 불가능 수준으로 파탄내버렸다.[19]
티무르는 같은 무슬림인 바예지드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에 심대한 타격을 가해 비잔틴 제국의 생명선을 연장해준 것도 모자라, 인도의 이슬람 왕조들을 공격해서 약탈을 감행하며 힌두교 왕족들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 등 이슬람 정체성은 약했다. 그는 약탈한 사치품들을 전공에 맞게 부하들에게 분배해서 전사들의 충성을 얻는 튀르크 유목민 전통에 충실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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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제국
'''티무르 제국은 새로이 급부상한 튀르크 연맹체인 우즈베크인들에 의해 멸망했지만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서는 티무르가 우즈베키스탄의 사실상의 시조나 다름없다고 가르친다.''' 티무르 제국을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로 때려맞출 경우 티무르 제국 역사가 우즈베키스탄 역사의 최고 전성기가 되기 때문. 티무르 왕가의 자손으로 무굴 제국을 세운 바부르 역시 원래는 페르가나 일대를 다스리던 소군주였으나 우즈베크인들에 의해 그의 모든 영지를 잃고 쫓겨나고 북인도에 정착했으니 무굴 제국의 역사도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 기원을 두는 셈.
1405년 티무르 사후 티무르 제국은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과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둘로 쪼개졌다.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당시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티무르의 후계자 중 천재 천문학자이기도 했던 울루그 벡( Ulugh Beg 1394~1449)의 영향으로 중앙아시아의 철학과 과학의 중심지로 부흥하였다. 울루그 베그는 음악가, 시인들을 후원하였으며 거대한 천문대를 건설하고 직접 천문학을 연구하였다. 사마르칸드에는 반지름 40미터의 3층짜리 육분의가 설치되었다. 당시 또한 부하라에서 수피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달래기 위해 부하라와 사마르칸드에 마드라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오늘날에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티무르 제국의 남부 영토는 헤라트가 중심 도시였다. 울루그 벡과는 다르게 매우 엄격한 무슬림이었던 통치자 샤 루흐(Shah Rukh 제위 1405~1447)의 영향으로 아프가니스탄에는 수피즘에 입각한 상당히 엄격한 이슬람 근본주의 문화가 확립되어갔다고 한다. 인도의 수피들이 힌두교와의 화해와 평화를 추구했던 것과는 반대로 파슈툰족 수피들은 근본주의를 추구하게 되면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주류화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샤 루흐의 뒤를 이은 술탄 후세인은 헤라트를 튀르크어 문학의 중심지로 변모시켰다. 술탄 후세인의 지원을 받는 문학가들은 '''페르시아어 문학작품을 오늘날의 우즈베크어의 직계 기원이 되는 중세 차가타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티무르 제국은 오늘날 우즈베크인의 형성에 영향을 준 샤이바니 왕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차가타이 칸국에서 갈라져 나온 우즈베크인들은 우즈베크 칸국을 세운 후, 자신들이 칭기스 칸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천명하였다. 창건자 샤이바니 칸은 티무르 제국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16세기 초 발흐와 헤라트를 비롯한 아프가니스탄 상당 지역을 점령하였고, 티무르 치세에 아프가니스탄에 정착한 차가타이어파 튀르크족은 우즈베크 부족 연맹에 합류하였다. 우즈베크인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9% 정도를 구성하며 해외에서 우즈베크인들이 제일 많이 거주하는 나라도 바로 우즈베크인 380만여 명이 거주하는 아프가니스탄이다.

6. 근세


우즈베크인들이 티무르 제국을 멸망시킨 시점을 기준으로 '''수천년간 동질성 있는 문화를 공유하던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는 순니 이슬람을 믿는 투르키스탄과 쉬아 이슬람을 주로 믿는 이란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순니 이슬람을 신봉하던 튀르크계 우즈베크인들이 쉬아 12이맘파를 국교화하며 순니파 무슬림들을 쉬아파로 개종시키던 사파비 왕조호라산 일대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게 된 것.''' 처음에는 우즈베크인들이 밀리는 듯 하였으나 사파비 왕조에서 호라산 지역의 튀르크멘 부족들을 통제하는데 실패하면서 이 지역에 쉬아 이슬람의 영역으로 만드는데는 실패했고, 그 결과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과 이란 사이에는 튀르크멘족이 주로 거주하게 되어 투르크메니스탄이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우즈베크인들은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 코칸드 칸국 등 여러 개의 나라로 분열되었으나 무굴 제국에 말을 수출하며 번영을 누렸다. 스텝 지대에서 기른 말들은 인도 아대륙에서 키운 말보다 더 크고 영양 상태가 좋았다. 유럽에서 무굴 제국으로 은화가 쏟아져 들어오자 상당 부분은 좋은 말을 사는데 지출되었다. 말 교역은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로, 말 수요에 비해 항상 공급이 모자라서 일년에 수천마리를 공급하는 것 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18세기 무굴 제국에서는 1년에 약 5만여 마리의 말을 중앙아시아로부터 구입했다. 말 교역에 의한 이문이 증가하면서 우즈베키스탄에서 인도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에 도로와 다리가 정비되고 여행자 숙소가 개선되는 등의 투자가 이루어졌다.[20] 이러한 투자는 물론 우즈베크 도시들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우즈베크 칸국들은 관개 수로를 추가로 건설하고 유지하는 일도 잊지 않았으며, 농민과 유목민이 유혈 충돌을 일으키지 않도록 경찰과 관료들을 배치하여 사회를 안정시켰다. 자체적인 비단 산업을 육성하여 비단을 이웃 국가들로 수출하면서 세입을 보충하기도 했다.
그러나 18세기 말 청나라에 의해 준가르칸국이 멸망하면서 중요한 교역 파트너를 잃어버리고, 19세기부터 군마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무굴 제국의 부가 크게 축소되면서 인도로의 말 수출 시장이 붕괴되자 카자흐계 유목민들이 소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이 점차 확장되고 우즈베크인들의 몫이 축소되면서 이 지역은 무역업 대신 농업의 비중이 증가했다. 우즈베크 유력자들은 러시아를 모방하여 면방직 공장과 소규모 은행을 세웠지만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무역 소득이 감소하면서 부하라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증가하였다.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진출한 러시아 제국은 중앙아시아 지역을 병합하고 부하라 칸국, 코칸드 칸국, 히바 칸국을 보호국으로 삼는다.

7. 근대사


1867년부터 1917년까지 우즈베키스탄 지역은 러시아 제국의 튀르키스탄 영토로 편입되었다. 기존에 거주하던 우즈벡인, 타지크인,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외에도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 러시아 제국 유럽 영토 출신 볼가 타타르인들이 해당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에서 1906년 오렌부르크에서 타슈켄트를 잇는 철도를 설치하면서 타슈켄트는 투르키스탄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기존 무슬림들이 사는 도회지 근처에 러시아인 이주민들을 위한 신도시 구역이 세워졌다. 철도 건설 이후에는 이 지역의 목화 재배와 수출이 증가했다. 1917년 이전까지 투르키스탄의 산업화는 거의 목화 가공업에 한정되었다.
러시아 제국과 중앙아시아의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우즈베키스탄 일대의 지식인들은 볼가 타타르인, 크림 타타르인들과 우즈베키스탄과의 격차를 느끼고 이슬람 근대화 운동 중 하나인 자디드 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자디드 운동은 범튀르크주의적 요소 포함 당시 범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민족주의 성향도 포함하고 있었다. 자디드 운동의 민족주의적 성격은 우즈벡인들의 독자적인 민족 의식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당시 우즈베키스탄의 지식인들은 근세 우즈벡어 문학 작품을 재구성, 재해석하고 여성의 평등을 주장했다. 당시에는 아직 자디드 운동가들의 주장은 보수적인 율법학자들의 방해로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지만, 러시아 제국 붕괴 이후부터는 소련 시대 국가무신론과 이슬람의 충돌 과정에서 대안으로 자디드 운동가들의 온건화, 세속화된 형태의 이슬람 해석이 주류가 되었다.

8. 현대사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면서 많은 러시아 인민들과 중앙아시아 인민들은 자유를 찾게 된다. 이 지역에는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이후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선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억제하였기 때문에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역은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 가장 문맹률이 낮고 이슬람 극단주의 문제가 덜한 지역이 되었다.[21]
1924년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USSR(소련)에 가입해 소비에트 연방 내의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역사를 이어가게 되었다(카자흐스탄은 1930년 가입). 소련이 안정화되면서 1950년대에는 식량 상황이 크게 개선되었고, 60년대에는 주택이 빠른 속도로 보급되면서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들어서는 우즈베키스탄 전통 문화 부흥이 용인,장려되었다.
이후 소련1991년 12월 붕괴로 독립국가가 되었다. 이 당시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이슬롬 카리모프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2001년부터 상하이 협력기구 정회원국으로 가입한 상태.
2016년에 카리모프가 사망하고 2016년 12월 4일에 조기대선에서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가 압승을 거두면서 대통령이 되었고.# 미르지요예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로는 사회통제분위기가 많이 완화되었고 언론의 자유도 어느정도 생겨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상술된 바대로 페르가나, 사마르칸드, 부하라, 히바 같은 실크로드의 가장 핵심적인 연결 거점으로 역사적 왕조들의 수도 역할을 했던 유수의 도시 태반이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등 관광자원이 넘쳐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여름에 날씨가 환장하게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운 관계로 관광객을 많이 끌어모으지 못하고 있다. 소련 시절에는 타슈켄트가 중앙아시아 최대 도시로 집중 개발되기도 하였다.
대항해시대 시작 이후 실크로드 내륙 무역이 점점 쇠퇴하면서 우즈베크의 부유한 무역 도시들을 점점 교역량이 줄어들었다. 한 술 더떠서 소련 붕괴 이후 투르크메니스탄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은 석유와 천연 가스 개발로 생활 수준과 경제력이 급속히 높아진 반면,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같은 경우는 그만한 경제력이 나타나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다.
암울하기만 한 건 아니고 우즈베키스탄은 개발도상국 중에서 높은 독서량을 자랑하며 상대적으로 우수하고 교육수준이 높은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다양한 역사적 유산들은 우즈베키스탄 미래 발전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2020년 5월 1일에 우즈베키스탄 비상사태부는 시르다리야 주의 사르도바 댐이 붕괴해 주민 11,000명 이상이 대피했다고 밝혔다.#

9. 참고 문헌


  • 실크로드 세계사 / 피터 프랭코판
  • 중앙유라시아 세계사 / 크리스토퍼 벡위드
  •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 르네 그루세
  • 신장의 역사 / 제임스 A 밀워드
  • 왕오천축국전 / 혜초, 정수일[22]
  • 이슬람의 세계사 / 아이라 라피두스
  • 인도 불교사 / 에티엔 라모트

[1] 고대 튀르크인들을 중앙아시아와 몽골 서부에 존재한 백인종으로 보는 것이 지지받게 되었다. Suleyman seydi[2] 오늘날 하카시야 공화국에 해당하는 지역에 청동기 시대 여성 유골 4구를 네이처 지에서 2015년 조사한 결과, 이 중 두 명은 하플로그룹 J2a2a, 한 명은 T2c1a2, 한 명은 U5a1a1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J2a2a, U5a1a1은 유라시아 서부에 주로 분포된 유전자, T2c1a2는 주로 중동 지역에 분포하는 유전자이다.[3] 오늘날의 아무다리야 강[4]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월지가 바로 이들이다.[5] 메난드로스 왕이 불교로 귀의한 이야기를 담은 밀린다왕 문경 참조[6]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상세한 사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7] 재위기간 502~530[8] 이 지역의 불교와 마니교는 14세기까지는 존속했다.[9] 973~1050[10] 아랍인들은 투르크인 노예들을 병사로 사용하였다.[11] 최초의 페르시아계 이슬람 왕조이다.[12] 심지어 한참 후대의 오스만 제국에서도 행정 언어로 페르시아어를 애용하는 경향이 있었다.[13] 물론 자신의 고향인 카슈가르의 격언과 시가 중심이 되었다. 그는 카슈가르 방언이 페르시아어 차용어가 적은 순수한 튀르크어로 여러 튀르크 방언 중에서도 여러모로 가장 훌륭한 튀르크어라고 결론지었다.[14] 검은 거란족이라는 뜻[15] 탁발부 칸. 중앙아시아에서는 탁발 선비가 북위를 세우며 북주 북제로 이어져 중국 한족들을 정복하여 통일하고 선비족 계통인 수나라, 당나라 또한 해외에선 타브가치라고 불렸기에 타그바치 칸이라고 불렸다. 즉 중국 문헌에서는 수, 당이 중국의 역사로 쓰여 있으나 해외에서는 선비족 국가로 불려 수,당이 선비족 계열국가라는 설이 지지받게 된다. [16] 영어 고어의 Cathay라던지...[17]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쟁 + 쿠츨루크의 강경한 이슬람 박해[18] 1200년~1220년[19] 리투아니아인들이 이 틈을 노리고 킵차크 칸국의 동유럽 영토 상당수를 정복했다.[20] 무굴 제국에서는 16세기 중반의 15년 사이에 1500여곳의 새로운 숙박업소가 지어진 적도 있었다 한다.[21] 발칸 반도의 알바니아, 보스니아도 비슷한 경우[22] 본문 외에도 주석의 내용이 상당히 풍부하고 충실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