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생애
1. 가정사
본적은 경상북도 영주군 이산면이다. 집안이 경상북도 북부 지방에서 생활했으며, 부친인 유수호 전 의원을 비롯한 선대 묘소가 영주에 있다.
유승민의 조부 유재영(劉載英)[1] 은 경북 영주 지역에서 평생 빈농으로 살았는데, 글씨를 잘 써서 양반집에서 상을 당하면 비석의 글씨를 써주는 부업을 했다고 한다. 양반집에서 자식들에게 교육을 강조하고 투자하는 것을 보고,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을 교육시켰다고 한다.
유승민의 부친은 유수호 전 의원으로 경북고등학교, 고려대학교를 졸업했고 1955년에[2]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으며 1960년 육군 군법무관 대위로 군 복무를 마친 뒤,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법조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판결을 여럿 내려 1973년 판사 재임용에 탈락한 뒤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85년에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가 통일국민당 - 신민당 - 자유민주연합을 거쳐서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3선이상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켜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유승민의 모친 강옥성 여사는 상당히 독실한 불자로 알려져 있다. 대구 청수사 신도회장만 30년 이상 맡아 봉사에 헌신하셨고, 아들의 공천관련 문제가 언론을 타자 대구 모 사찰에서 조용히 1000배를 올리셨다고. 또한 각종 나눔공양으로 유명한데, 법당관련 행사나 아들 유승민 의원 관련 행사시 각종 음식들을 손수 요리해 베푼다고 한다.[3] 아흔이 가까운 고령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매일 신문 6종류를 구독해 챙겨보실 정도로 혜안이 깊으시다고 한다.
형 유승정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사법시험에 합격하여(연수원 11기) 군법무관으로 복무를 마치고 판사로 임용되었다. 창원지방법원장, 경상남도 선관위원장, 서울남부지방법원장을 지낸 후 현재는 변호사[4] 라고 한다. 누나 유진희는 약사로 알려져 있다.
아내 오선혜는 경북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였다. 아들 유훈동은 아버지에 이어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으며, 현재 대기업에 재직하고 있다. 딸 유담은 은광여자고등학교, 동국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유승민 의원이 국방위원장으로 재임할때, 아들 유훈동군의 결혼식을 매우 조용하게 지내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화환은 일절 거절하였고, 지역 관계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려 아무도 모르게 극소수의 하객들만 데리고 결혼식을 끝냈다. 유승민, ‘아무도 몰래’ 장남 결혼식'
2.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그의 개인적 일화들에 대한 친구들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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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경상북도 대구시 대봉동(現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에서 태어났다. 삼덕국민학교, 대륜중학교,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위스콘신 대학교 대학원으로 유학까지 갔다온 바 있다.
판사로 일하던 아버지의 월급으로 대구시로 유학온 사촌형들까지 건사하느라,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중이염에 걸려 병원을 가야 되는데, 돈이 없어 어머니가 극장 티켓을 암표로 팔려다가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했다. 이때 치료를 제대로 못받은 탓에 지금도 청력이 약간 좋지 않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집안인 것은 아니었음을 귀에 고스란히 그 증거를 남긴 셈이다. 본래 부유한 집안이 아니었고, 그나마 집에 있는 재산은 고향에 남은 장남(유승민의 큰아버지)에게 몰아주었기 때문이다. 이 시절 시골에서는 농토를 장남에게 모조리 물려주고 대신 도시로 나간 동생들의 학비를 내게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시골에서 꾀죄죄하게 농사짓고 사는 큰형 일가와 도시로 가서 세련되게 잘 사는 둘째 이하 집안들간의 갈등이 90년대까지도 드라마 소재가 되곤 했다.
이후 고등학교 무렵, 아버지가 사법 파동으로 인해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한 뒤로는 금전적 상황이 훨씬 나아졌다고 한다. 유승민 본인 또한 방송에서, 어쨌든 성년이 되기 전에 집안 형편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므로 그런 측면에서의 금수저라는 지적은 딱히 부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대륜중 3학년시절 같은반이었던 이기만 대경영상의학원장은 유승민 의원이 중학생때는 굉장한 축구광이었다고 한다. 쉬는시간마다 나가서 축구를 했는데 실컷 공을 차고 매점에 갈때 형편이 어려웠던 이기만 원장의 손을 잡고 '''기만아 너도 같이가자'''면서 크림빵을 사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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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비평준화 시절 대경권의 명문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학창 시절 유승민은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고 하며, 성격은 '샌님'보단 ‘쾌남’에 가까웠다. 교우 관계가 좋아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두루 친하게 지낸, 요즘 말로 인싸였다. 그의 고교 동기로 잘 알려진 사람으로는 정종섭 의원, 류성걸 전 의원, 권오을 전 의원, 주성영 전 의원 등이 있다.
학창시절인 70년대 청룡기에서 유승민의 모교인 경북고는 정상급의 실력을 자랑했는데, 이 영향인지 지금까지 야구를 상당히 좋아한다고 한다. 심지어 고3이던 수험생 시절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리는 경기를 보러 가기 위해 1박 2일간 가출하여 고속버스로 상경했다고 밝혔다.
당시 경북고는 고교야구 최강자로 2연속 우승을 노리던 때였다. 근데 정작 유승민이 직관하러 간 그 경기에서는 광주제일고등학교에 패했다. 그리고 씁쓸한 마음으로 학교에 돌아왔더니, 학교에선 몽둥이 찜질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응원하는 팀은 당연히 연고구단인 삼성 라이온즈, 딸인 유담 씨도 삼성 팬이다. 부녀(父女)가 같이 직관하고, 유담 씨는 직관할 때 대부분 유니폼까지 입을 정도로 열렬한 팬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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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대입 압박에 시달리던 한 친구가 학교 선생님에게 부당한 이유로 맞았고 경남 양산에 있는 통도사[5] 로 가출해버렸는데, 이 친구를 찾아오기 위해 유승민도 집을 떠난 적이 있었다. 친구의 가출 소식을 들은 유승민은 아버지의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을 찾아가 돈 3만 원을 꾼 뒤 그 친구를 찾아나섰다. 며칠 뒤 친구를 찾아 돌아온 유승민은 머리를 빡빡 깎은 채였다. “어쨌든 나도 집을 나간 것이니, 걱정하신 부모님에게 사죄하는 뜻으로 머리를 깎은 것”이라 했다.
그의 고교 동문의 증언에 따르면, 유승민은 모든 친구들과 두루 잘 지내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엔 아무래도 성적순으로 끼리끼리 교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유승민도 경북고의 우등생 모임인 '청록' 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지만, 유승민은 친구의 배경성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사람됨을 가지고 친구들을 만났으며, 당시 경북고의 음성서클 '광풍' 멤버들 및 문학서클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특히 퇴학당한 친구들과 아주 가깝게 지내는 독특함이 있었다고 하며, 심지어는 30대 초반에 재경 경북고 동문회장을 맡았을 당시 동창회 회칙을 바꾸어 중도퇴학당한 친구들도 동문회 가입을 할수 있도록 하였다. 기사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회고에 따르면, 유승민은 고3 때 반 실장을 맡았는데 기사 반 친구 60명의 생일을 빠짐없이 모두 챙겨줬을 만큼 사교성이 좋았다고 한다. 집에서 몰래 양주 1병을 가져와 한 잔씩 돌아가면서 마셨다는 일화가 있다. 가난하거나 학업이 좋지 못한 친구들도 배려해 주는 등, 리더십이 탁월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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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상당히 감수성이 여린 모습들도 보였다. 한 겨울,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서 술에 취해 있던 낯선 이를 업고 집에 들어오기도 했다. 키우던 개가 죽자 1달 동안 슬퍼하기도 했다고. 가족 중 한 사람은 “승민이가 고3 때 집에서 키우던 조그만 개가 죽었는데, 1달 동안 울기만 했다. 어머니가 '수험생이 공부는 안 하고 저러고 있다'며 걱정했을 정도”라고 했다.
유승민은 1976년 '''대학입학 예비고사에서 전국 3등을 거머쥐었고,'''[6]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그런데 유승민은 "형(유승정)이 너무 공부를 잘하는 바람에, 나는 집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며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최근에도 임윤선 변호사와의 방송에서 "형이 공부를 나보다 훨씬 잘했다"고 말하며 "형은 초등학교 때부터 1등을 놓친 적이 없지만, '''나는 공부도 잘 안 하고 만날 놀러다니는 문제아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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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는 초인적인 수재 타입의 형과 비교했을 때, 그것도 농담 삼아 그렇다는 것이며, 유승민도 우등생이었다[7] . 사실 유승민은 학교 수업이 끝난 뒤부터 저녁까지 신나게 놀다가 귀가해 저녁을 먹고 잠을 잔 후, 새벽 2시부터 학교 가기 전까지 밀린 공부를 했다고 한다. 당시 유승민의 친구들에 따르면 '''"쟤는 하루 종일 노는데, 어떻게 저리 공부를 잘하나??"''' 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 누구도 유승민이 비상한 두뇌를 가졌다는 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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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결정하는 전공 진입으로, 법학과가 아닌 경제학과를 선택하였다. 법조인 가족[9] 이어서 시도때도 없이 벌어지는 가족 간의 법 이야기에 질린 나머지 법학과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에 다른 과를 찾던 중 경제학 정도면 좀 덜 혼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꾸중을 각오하고 경제학으로 전공을 결정했다고 한다.[10] 사실 처음에는 수학, 통계학 때문에 골치가 아파 철학과 수업이나, 불문과 수업을 듣는 등 잠시 방황했다고 한다. '''F'''학점도 받아보고(...) C, D도 여러 개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은 수학은 떼려야 뗄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공부에 매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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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 중 육군에 입대하여 대한민국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33경비단[11] 에서 복무하면서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하였다.
유승민의 경북고 동기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판사 출신이자 대구시 유명 법조인의 아들인 유승민이 평범하게 군대를 간 것도 놀랍고, 훈련을 정말 열심히 받아 신병교육대에서 1등으로 수료했다는 사실 또한 놀라운 것이라며 증언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신병교육대장과의 면담에서 '특별히 복무하고 싶은 군 부대가 있나' 라는 질문에 훗날 아내가 되는 오선혜 씨가 다니던 이화여자대학교 근처에서 복무하고 싶다며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실제로 이화여대에서 가까운[12] 33경비단에 배치받게 된 것이다. 웬만한 특전사 출신에게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군기가 쎄서 모두가 기피하던 곳을, 훗날의 아내를 위해 자원했던 것. 다행히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지 몇 개월 뒤에 결혼했다. 훗날 19대 대선 당시 그의 동기들은 당시 그를 좋게 평가하면서 문재인 특전사 못지 않은 병역살이를 했었다고 평했다. 거기다 33경비단은 당시 그 유명한 장태완 장군이 특히 더 엄하게(...) 훈련을 시켰으니 말이 필요없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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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유승민이 복무하던 시기(1979년 1월 ~ 1981년 4월)에 12.12 사태가 있었고, 반란의 주축 부대 중 하나가 유승민이 복무하던 33경비단(단장 김진영)이었다. 물론 일개 병사가 무엇을 했겠냐마는, 어찌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 본인 회고에 따르면 평소처럼 부대에서 지내다 부대 동료들에게 특전사 사령관은 잡혀가고 김오랑 소령은 사망했으며 장태완 사령관이 맞서다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다음 날 노태우가 신임 수경사령관으로 취임했었다고 한다. 훗날 국회 국방위원장이 된 유승민은 12.12 당시 홀로 반란군에 맞서다 전사한 김오랑 소령(추서계급 중령)의 훈장 추서를 추진해 결국 보국훈장을 추서하는데 성공하여 김오랑 기념사업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는데, 일설에 따르면 당시 유승민이 밝히기를 12.12 당시 반란군이었던 33경비단의 일병으로서 김 중령의 훈장 추서를 자신의 책임처럼 여겼다고 한다.
여담으로 모 방송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신임 수경사령관 노태우의 자녀[15] 과외병을 뽑기 위해 공부 잘하는 사병 리스트를 인사처에서 추려내어 최종 3명을 추천하였는데, 그중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 중에 입대한 유승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유승민은 "절대 하기 싫다"며 거부하였고, 결국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본인 말로는, 신병 때 개고생하며 겨우 짬을 먹었는데 이제 와서 장군 따까리하기 싫어서 그랬다고.[16] 당시의 군사독재정권시절, 게다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수경사령관이였던 노태우 사령관의 제안을 일개 사병이 극구 거부했다는것 자체가 엄청난 배짱인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행여 저게 성사되었다면 지금의 유승민은 없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3. 결혼과 미국 유학 시절
서울대학교 1학년이였던 유승민과 경북여고 3학년이였던 오선혜는 당시 고교 은사님이였던 강형(전 대구한의대학교 교수) 선생님[17] 의 댁에서 마주친 것이 첫 만남이었다. 어느 날 오선혜는, 당시 TBC의 '푸른광장'이란 여고 탐방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재학 중인 경북여고를 소개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주제를 가지고 소개해야 해서 원고가 필요했고, 결국 고교 은사님께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강형 전 교수는 유승민에게 오선혜를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원고를 다 작성한 후 직접 전달하기 위해,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을 잡고 만나게 된다. '''"대학생 오빠한테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달라고 하자!"'''며 오선혜는 친구 2명을 데리고 나갔고, 유승민도 친구 2명을 데리고 나와 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이후에 유승민은 강형 전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 여학생의 순수함과 발랄함이 맘에 듭니다"'''라고 언급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오선혜는 이화여자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하였고, 서울대 공대 학생들과 4:4 미팅을 하게 되어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저 멀리서 슬리퍼를 찍찍 끌며 걸어가는 유승민을 만나게 되었다. 훗날 '''"이렇게 우연하게 마주치는 것도 필연이자 운명 같았다"'''라고 오선혜 여사는 회상했다.
오선혜 여사는 "그 이후 유승민을 만나면서 그의 순수한 매력에 빠졌다"고 소개했다. 이화여대 캠퍼스 축제에 초대하자, 양복이 없던 유승민은 선배에게서 빌린 양복을 입고 왔는데, 하필 동복이라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캠퍼스를 누볐다고 한다. 오선혜 여사가 빈 강의실에서 좋아하는 팝송을 불렀는데, 유승민이 곧바로 2절을 이어 불러서 이때 조금 반했다고 털어놨다. 또 함께 등산을 마치고 나서 오선혜가 산에서 아끼던 스카프를 잃어버렸다며 속상해 하자, 다음날 혼자 산을 샅샅이 뒤져 기어이 그 스카프를 찾아왔다고 한다. 이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순수함에 빠졌고, 오선혜가 이화여대를 졸업하자마자 둘은 결혼하게 된다.
'''유승민과 오선혜의 결혼식 사진과 신혼여행(경북 경주시 불국사) 기념 사진'''
1982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유승민은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서 대학원에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재학하여 수리경제학, 미시경제학 조교를 하였으며 4년 만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전공은 산업조직론, 부전공은 계량경제학, 수리경제학으로 알려져 있다. 계량경제학 강의로 1986년 최우수 조교상을 받았으며 이는 역대 위스콘신 대학교 경제학과 한국인 유학생 중 유일한 수상이다. 박사 학위 논문은 1987 Dissertation Travel Fellowship[18] 을 수상하였다. 이 미국 경력은, 이후 정부로부터 외압을 받아 KDI연구위원에서 쫒겨났을때 UC샌디에이고에 초빙교수로 일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같은 시기에 유학생활을 했던 이들에 따르면, 유승민 의원은 당시 위스콘신 대학교에 함께 유학 왔던 동기들, 특히 후배들을 잘 챙겨주는 선배였다고 한다. 또한 행정고시 출신 공무원 유학파들에 대립(?)하는 민간 유학생의 대표주자로서 정부의 역할론에 대해 틈이 날 때마다 논쟁을 했다고 한다. 당시 공무원 유학생의 대표주자는 훗날의 정적이 될 최경환 사무관[19] 이었다.
난 유승민과 미국에서 위스콘신대 경제학과 박사과정에서 함께 공부해서 유승민을 아주 잘안다 유승민은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우며 모자라는후배인 나를 잘 챙겨준 따뜻한 사람이다 의리의 남자이다 경제학과 맥주모임에서 내가 선구자 가곡을 성악으로 노래했더니 운동권 출신 어떤 선배가 선구자는 그렇게 부르면 안된다고 비평하자 왜 안되느냐고 내 대신 싸워준 분이다 내가 공부가 부족해 수준이 낮은 학교인 플로리다 박사과정으로 전학 갔을때 많은 사람들이 위스콘신대에서 쫒겨났다고 비아냥했지만 유승민은 대구에 있는 다른사람들에게 내가 쫒겨났다는 말 대신에 살기좋은 플로리다로 갔다고 좋게 표현해준 따뜻한 분이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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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네티즌의 유승민 유학시절 일화[21]
4. 경제학자 시절
1987년 한국으로 돌아와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으로 복귀했다.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시절부터 같은 연구원으로 있던 이혜훈과 사수-부사수의 관계였다고 한다. 이혜훈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KDI는 남성 연구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남초 직장이었고, '성평등' 이라는 개념도 생소할 당시여서, 여성 연구원이 엄청난 스트레스로 사망(!)하는 사고까지 있을 정도로 여성 연구원들은 힘든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잦았다. 또한 육아문제까지 겹쳐 KDI에서 남성 연구원들의 볼멘소리가 나오기까지 했는데 유승민 박사는 '''"너희 남자들 참 못 됐다. 니들이 애들 키워보기는 했나"''' 라며 여성 연구원들을 챙겼다고 한다. 이에 비슷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던 이혜훈 박사[22] 역시 도움을 받고, 그 계기로 지금까지 유승민과 가깝게 되었다고 인터뷰한 바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야구 매니아였던 유승민 박사는 KDI내의 야구동아리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부총리배 중앙행정기관 야구대회에서는 정식구장 규격의 타석에서 100m 비거리 홈런을 쳐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해당 홈런볼은 유승민 의원실에 전시 중이며, 당시 사실을 증명하는 KDI 소식지를 스크랩해 의원실에 소장하고 있다. 그 외에도 테니스 축구 등 운동들을 좋아하는 활동적인 성격의 연구원이였으며, 비(非) 박사 연구원들에게도 깍듯하게 대했다고 한다. 주량은 한창 젊을 때 소주 10병을 마셨고,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호주가(好酒家)형 스타일"이라고 주변인들은 평가한다.
KDI 연구원 시절 옆방에서 근무했던 김인규 한림대 경제학과 교수는, '''"KDI 시절 유승민 박사는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였지만, 누구에게나 겸손했던 인물"'''이라며 회자했고,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21년전, KDI 선배 박사들의 활약에 주눅들어 외로움을 느꼈던 나를 직접 챙겨준, 고맙고 든든한 선배"'''라고 증언하였다. 또한 19대 국회의원이자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이던 김현숙 전 의원은 '''"박사 중심 엘리트주의가 팽배했던 KDI에서, 석사 출신과도 잘 어울려 젊은 연구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증언하였다.
서울대 홍종호 교수의 '내가 본 유승민'
KDI 출신의 한 연구원은,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출장에서 회식 다음날 아침 숙취로 고생하자, 유승민이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연구원은 백도를 먹으면 숙취가 없어진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백도가 먹고 싶습니다'라고 말했고, "잠깐만 기다리라"며 나갔던 유승민은 점심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창 후에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아무리 뒤져봐도 황도는 있는데 백도는 없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인간미 덕택에, 90년대 KDI의 연구원들 사이에서 유승민 박사는 독보적인 리더쉽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 영향으로 KDI 연구위원 출신인 이종훈 의원, 신광식 전 김앤장 상임고문, 나동민 NH농협 대표, 진수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 그리고 이혜훈 의원의 남편인 김영세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등 수많은 KDI 멤버들이 유승민 의원의 대선캠프에서 직간접적으로 그를 돕게 된다.
자기계발서로 유명한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인 공병호 박사 또한 유승민의 KDI 시절의 미담을 밝혔다. 당시 공병호 박사가 소속되어 일하는 곳은 한국경제연구원이었는데 유승민 박사와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산업정책을 연구하는 곳이였다. 둘은 각종 세미나와 토론 등에서 만나서 친분을 쌓았는데, 그러던 중 1992년 공병호 박사에게 어려움이 생겨 직장도 못 나갈 지경이 되고 말았다.
고민 끝에 KDI의 유승민 박사 연구실을 찾아가 하소연 하는데 유승민 박사가 한마디 했다고 한다. '''"도와줄게."''' 다른 연구소의 연구원을 자신의 일처럼 챙겨주는 유승민 박사를 잊지 못하며, 그는 유승민에 대해 '''"유승민은 의리의 남자다. 옛말에 '좋은 친구 하나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내가 유승민을 떠올리며 하는 말이다"''' 라며 칭찬한다. 공병호 박사와 유승민의 젊은시절 일화
당시 유승민 박사의 전공이였던 산업조직론 전공자가 한국에선 드물었던 까닭에, 유승민 박사는 재벌이슈가 한창이던 당시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경제전문가로 활약했다. KDI 후배였던 이종훈 전 의원에 따르면, 당시 KDI에는 연구실적, 토론 및 강연 등을 고려하여 받는 성과금이 있었는데 유승민 박사는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는 스타 박사였다고 한다.
또한 KDI의 중요 프로젝트는 유승민을 거쳐 진행되었다고 하며, 후배 연구원이였던 홍종호 교수 역시 "KDI시절 유승민은 제일 바쁘고 잘나갔던 선배였다"며 KDI 시절을 회상했다. 90년대 초반 KDI에서 유승민과 함께 일했던 오영숙 연구원은 인터뷰에서, "당시 '''유승민은 차기 원장감''' 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1994년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공기업민영화 토론회에 참석한 유승민 박사. 좌측 2번째.'''
유승민은 KDI의 산업조직팀(법경제팀) 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유승민 박사는 1988년 12월 KDI 정책토론회에서 정보통신분야 규제완화분야를 맡게 되었는데, "국영기업이 사실상 모든 통신산업을 독점하고 있고, 이로 인한 정부의 직접규제로 인해 이들이 시장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통신산업의 민간경쟁을 유도하여, 시장경쟁력 강화와 소비자의 이익을 도모하자"고 주장하였다.
VAN등 고도서비스 분야 완전경쟁 허용해야 - 유승민 KDI 연구위원
훗날, 한국정보통신공사는 KT로 민영화되었고, 정부는 1997년 시내전화 경쟁을 위한 제2시내전화사업자로 하나로통신(현 SK 브로드밴드)를 선정하는 등 본격적인 통신시장 경쟁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90년대 후반부터 한솔, 두루넷, 한국통신 등의 인터넷 서비스 업체 간에 경쟁이 치열하게 불붙기 시작해 한국의 인터넷 환경은 세계에서 최고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하나로통신(현 SK 브로드밴드)은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유승준(스티브 유)을 기용해 ADSL인터넷을 광고하기도 했는데 '''따라올테면 따라와봐'''라는 최고의 유행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에 질세라 KT는 '메가패스(Megapass)'라는 브랜드를 출범시키고, 신화 에릭을 모델로 기용하여 CF를 방영하였다. 에릭의 랩에 묻혀서 그런지 메가패스가 '''내가팼어'''로 들리고 말았는데, 당시 초중고생에게 컬트적인 인기를(...)끌어 뜬금없는 마케팅 대박을 터트리기도 했다. 현재는 KT의 올레(Olleh), SK의 브로드밴드(Broadband), LG의 유플러스(U+) 브랜드로 3사의 초고속인터넷 경쟁체제가 유지되고 있고, 심지어는 현대 HCN같은 지역인터넷 사업자까지 등장하는 등 소비자의 선택권 역시 다양해졌다.
OECD산하 디지털경제정책위원회(CDEP)는 '디지털경제전망(Digital Economy Outlook) 2017이란 보고서에서, 한국의 인터넷 서비스 평균속도는 약 29Mbps로 세계 1위이며, 100Mbps 이상 속도 인터넷가입자 비율은 세계 2위라고 발표하는 등 한국의 인터넷 환경을 세계 최고수준으로 평가하였는데 '''이는 엄연히 인터넷통신 시장의 경쟁의 산물'''이다.
1988 서울올림픽 이후, 한창 세계화 바람이 불던 한국사회에서, 유승민 박사는 특정 시장의 공기업 독점을 매우 경계하는 한편,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재벌이라는 기업의 지배구조를 뜯어고쳐, 곧 다가올 글로벌 시장에서의 기업경쟁력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게 된다.
90년대 초중반, 대한민국은 한창 재벌 대기업 위주의 고도성장 덕택에 현대, 삼성, 대우, 현대그룹 등을 중심으로 한 재벌이 한창 그 위세를 떨치고 있을 시기였다. 정경유착은 물론이고, 아무리 재벌 개혁을 부르짖어도 경제성장이라는 구호 아래 묵살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유승민은 경제개발계획 정책발표나 토론회에서, 당시에는 감히 말도 못 꺼낼 법한 혁신적인 재벌개혁을 발표하곤 했다. 전경련이나 경영자총연합회 등 재벌 대기업 집단에서는 당연히 반길 리가 없었고, '''"저 사람 좀 이상한 사람 아니냐"''' 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 매일경제신문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동시 주최한 국가경쟁력강화 토론회. 맨 우측이 유승민 박사 '''
1993년 공정거래정책회의에서 유승민 박사는 출자총액제한제도, 채무보증 한도축소, 심지어는 정부의 기업분할명령제도 도입 등 당시 재벌경제 대한민국에서 '''감히 말도 안 되는 정책'''을 들고 나와 주목을 받았다. (KBS, MBC)
또한 당시 김영삼 정부출범 이후 대통령 직속 행정쇄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함과 동시에, 김영삼정부의 경제정책에 관해 '친대기업' 정책이라며 비판하였다. (당시 정부의 재벌정책에 관하여 유승민 박사가 한국경제신문에 투고한 칼럼) 또한 재벌집단의 신문, 방송, 금융기관 소유에 대해 "현실왜곡 현상이 발생한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때부터 유승민이란 젊은 경제학자는 그 이름이 조금씩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1994년 한국산업조직학회 사무국장을 역임하였다. 당시 삼성그룹의 자동차시장 진출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이미 국내 기업들이 양분하고 있는 자동차시장의 시장진입 허용에 관하여 찬성/반대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이미 과점 상태의 시장이며, 삼성은 자동차시장 경험 부족으로 위험성이 크다"며 사실상 허가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비쳤는데, 이는 결국 기존 자동차업계의 기득권 유지 논리에 불과했다. '''이에 유승민 박사는 KDI 연구보고서를 통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출을 통해 자동차산업의 경쟁을 도모하여, 자동차산업의 발전과 그에 부수되는 관련 부품시장의 활성화, 그리고 기업경쟁력 강화를 함께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진입 초반 어느 정도의 시장 혼란은 있겠지만, 거시적으로 자동차산업 전체의 이익이 된다며 삼성의 자동차시장 진입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미있는 점은, 당시 한국자동차협회에서 한국산업연구원(KIET)에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연구용역을 발주했고, KIET는 재용역을 KDI에 발주했는데 그 용역보고서에서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출을 찬성하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이에 재용역을 발주한 KIET는 물론이고, 현대 기아 대우 등 타 자동차회사들은 당황하게 된다. 결국은 본인들이 의뢰한 연구용역이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출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결국 삼성은 자동차시장에 뛰어들게 되고, 3년 후 신차를 발표하여 본격적인 대한민국의 자동차 시장 경쟁이 시작되게 된다. 당시 경제기획원 공무원들 사이에서 '''"KDI에 발주한 연구용역 담당자가 유승민이면 반드시 중간점검을 해야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연구용역 보고서는 주문자의 입맛에 맞게 주문생산을 하여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보충적 성격이 매우 강했지만, KIET 용역 일화는 누구의 입맛도 맞추지 않는 유승민의 소신을 나타낸 것이다.
그 후 삼성자동차는 SM5 모델 출시와 함께, 당시로는 매우 혁신적이던 3만6천km 무상수리보증정책 등을 들고 나와 한국 자동차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2년 후인 2000년대부터 이 정책을 적용했을 정도. 또한 대한민국의 자동차 주력시장인 중형차 시장에서 현대 소나타와 삼성 SM5간 양강구도가 10년 이상 형성되었고, 이건희 회장이 직접 생산 전반에 걸친 품질관리를 선도하며 대한민국 자동차시장에서 이른바 '품질경영' 시대를 열었다. 결국 삼성의 자동차시장 진출은 사실상 현대, 기아가 양분하던 한국 자동차시장에 경쟁원리가 도입되어 산업 전체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후 2010년 대한민국 자동차산업은 생산량기준 세계 5위를 고수하고 있다.
1995년 한국산업조직학회 학술회의에서, "대통령직속의 규제개혁청을 신설하여 강력한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규제개혁은 독과점을 방지하는 것이지, 친재벌적 성격의 정책이 아니라며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1998년 규제개혁위원회가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되어 지금까지 존속 중이다.
1996년 거대 공기업이였던 한국중공업의 민영화 문제가 대두되자, 1996년 유승민 박사는 "한국중공업이 공기업으로만 머물러 있으면 국제경쟁력이 약화될 수 밖에 없다"며 민영화를 통한 경쟁력 확보와, 지배구조의 일원화를 주장하였다.
2000년 12월 한국중공업의 두산그룹 인수가 결정되었고, 그 후 두산중공업으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두산중공업은 공격적인 M&A와 사업다각화를 통해 국내 유일의 원자력발전 설비전문기업으로 거듭남과 동시에 2015년 기준 해수담수화플랜트 세계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는 등 굴지의 중공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는 한국 공기업 민영화의 대표적인 성공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관련 자료)
''' 1995년 KDI 국제세미나에 참석해 토론하는 유승민 박사. 좌측 2번째. '''
90년대 초반 한강의 기적의 대표주자였던 포항제철(포스코)의 박태준 체제가 무너지면서 대한민국 철강의 자존심인 포항제철이 흔들리게 된다. 이에 포철에서는 산학협력으로 포철에 대한 경영진단에 나서게 된다. 경영진단반 10인중 한사람으로 유승민 KDI박사가 선정되었고, KDI가 최종적으로 포항제철 경영진단보고서 작성용역을 수주하게 되자 유승민 박사가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현대제철과의 힘겨루기를 하던 포항제철의 경영진단보고서 내용 중, 시장진입을 자유롭게 하여 경쟁원리의 도입을 주장한 유승민의 주장이 당시 통상산업부와 의견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집필 후 보완작업을 하던 중 유승민 박사가 1996년 미국 UC San Diego대학의 IR/PS대학원에 초빙교수로 임용되어 미국으로 떠나는 과정에서 정부에 의한 외압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 후에 귀국하여 다시 KDI에서 선임(수석)연구위원으로 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포항제철은 IMF이후 지분을 전부 매각하여 민영화가 되는 동시에 포스코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후 한국 굴지의 철강그룹으로 도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M&A(기업간 인수합병)문제가 한국 재계에 화두로 떠오르자, 유승민 KDI 연구위원은 M&A규제를 풀어 기업의 시장 진입과 퇴출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뿐더러 그것이 21세기 우리의 선택이라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원칙은 존재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대신 그 반대급부로 '''"재벌총수나 임원진들을 사실상의 기업 이사로 간주하여 경영부실에 책임을 묻고, 기업간에 오가는 불법자금을 처벌하는 법 조항을 형법에 신설해야 한다"''' 는 신선한 주장을 하였다. 그 후 재정경제원은, 2000년부터 외국인의 한국에 대한 적대적 M&A 허용을 시작으로 점차 M&A의 규제를 풀어나갔다.
당시 유승민 박사가 작성한 칼럼 'M&A게임의 원칙'
1997년 당시 IMF위기의 도화선이였던 기아자동차 부도사태 당시, 당시 김선홍 회장을 포함한 기아의 최고경영진의 잇다른 경영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른바 기업의 사물(私物)화 현상, 즉 내 회사가 아니니 최고경영진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현상이 대두되었다. 이에 유승민 KDI 박사는 '''"소유, 지배권이 없는 전문경영인 이 경영부진 속에서도 살아 남으려면 필연적으로 사내에 ‘정치’ 요소가 자라게 된다"'''며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또한 정부가 서둘러 과감한 구조조정에 나서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훗날 기아자동차는 워크아웃에 들어가 현대그룹에 매각되어 지금의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이 탄생하게 된다.
1997년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열린 제 3차 경제규제개혁위원회에서, 정부가 일반의약품(OTC)을 슈퍼나 편의점에서 팔 수 있도록 추진하려고 하자, 약사협회에서는 절대 반대 입장을 내비쳤고, 보건복지부에서는 약사 편을 들면서 "의약분업과 연계해서 고려해야 한다"고 하였다. 유승민 연구위원은 '''"그것을 왜 의약분업과 연계해야하는지 납득할 수 없다"'''며 일반의약품의 슈퍼, 편의점 판매에 찬성하였다. 2011년 한국소비자원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70%이상의 국민들이 이 제도에 찬성하였고, 결국 2012년 말부터 일반의약품의 편의점 판매가 시작되었다. 유승민은 훗날 자서전에서 '''"약사인 친누나가 동생 때문에 고생했다"'''고 말했다.
유승민 박사가 KDI에서 주로 연구했던 영역들은 다음과 같다.
- 경제력 집중과 재벌정책
- 기업지배구조
- 산업조직, 산업구조, 산업경쟁력
- 경쟁법 정책(공정경쟁제도)
- 정부규제개혁
- 공기업 민영화
- 산업별 사례연구 : 자동차, 철강, 정보통신, 광고, 전력, 가스, 석유, 담배 등
[1] 묘비에 "松塢處士江陵劉公載英之墓(송오처사강릉유공재영지묘)"라고 써져 있다. 출처.[2] 영주 지역 사상 최초 합격자로, 기차역에 시장과 경찰서장이 마중을 나올 정도였고 고향 마을까지 가는 길가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환영 인파가 몰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3] 총선 때도 안동식혜를 직접 해와 손님들께 대접하고, 대구에서 서울로 바른정당 대선 경선을 위해 떠나는 이들에게 떡과 부침개를 보따리로 싸주셨다고...[4] 소속이 법무법인 바른이다. [5] 한 언론사에서는 경남 합천에 있는 해인사라고 보도했는데, 유승민 의원이 직접 통도사라고 밝혔다.[6] 많은 사람이 차석이라 알고 있지만, 유승민 본인은 이 얘기가 나올 때마다 "차석은 아니고 '3등'이었다"고 강조한다.[7] 객관적으로 봐도 우등생에 속하는 전교 3등도 아니고 '''전국 3등'''이다.[8] 실제로 환갑이 다 된 나이에도 양세형의 숏터뷰에서 잠깐잠깐씩 지나가는 글자들을 순식간에 다 외워서 단어를 조합해 내는 위엄을 보였다.[9] 아버지와 형 모두 판사 출신 법조인이고, 훗날의 일이지만 매형 김진기 또한 법조인이다.[10] 유앤미 소통콘서트에서 인증했다.[11] 현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 백호대대의 전신[12]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정말정말 가깝다. 작정하면 걸어서도 갈 수 있을 정도.[13] 전투복이 아닌 근무복인데, 수방사 병사들은 예나 지금이나 출타 때 대군 이미지 제고를 위해 근무복을 입는다. 앞가리개의 수방사(당시 수경사) 마크가 또렷이 보인다. 이 근무복은 1990년대 초반에 육군 통합 근무복으로 대체되기 이전의 수방사 자체 근무복이다.[14] 참고로 이 당시 같이 사진을 찍은 형인 유승정은, 군법무관으로 군대에 가기 이전이었다.[15] 노소영(1961년생)은 당시 이미 성인이었으니 아마도 노재헌(1965년생)으로 추정된다.[16] 그렇잖아도 똥군기와 병영부조리가 횡행하던 80년대에, 그것도 수경사 경비단이면 전군 최악급의 가혹한 군기를 자랑하던 곳이다.[17] 강형 교수는 교수가 되기 이전에 유승민이 졸업한 경북고와 유승민의 아내 오선혜가 졸업한 경북여고에서 교사 생활을 했었다. 그래서 유승민, 오선혜 부부에게 은사가 된다. 여담으로 추미애, 권오을, 정종섭, 김성걸, 주성영 등의 은사이기도 하다. 당시 경북고와 경북여고가 지역 명문 고등학교였기에 제자들 중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많다.[18] 우수논문 제출자에게 싱크탱크 출장비를 지원하는 장학 프로그램[19] 박근혜 정부에서 경제부총리를 역임한 친박계 핵심 국회의원인 그 사람 맞다.[20] 구두점과 띄어쓰기는 원문 그대로임[21] 위스콘신 경제학 박사과정은 재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탈락시키는 과정으로 유명하다. 명지대 경제학과 주임교수인 우석진 교수에 따르면, 유학 당시 박사과정에 있던 한국인 4명 중 2명만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며, 어떤 해에는 6명 중 1명만 받는 해도 있었다고 할 정도로 엄격하다고 한다. 경제학 박사 1년차 과정이 혹독하기로 유명하지만 위스콘신은 그 중에서도 두드러질 정도로 난이도가 높다. 과정이 어렵더라도 탈락률이 낮은 학교들도 있는데 위스콘신은 많이 떨어트리는 학교로 유명하다. 요즘에는 중도탈락률이 많이 내려갔지만 여전히 많이 많이 떨어트리는 축에 속한다. 1년차를 통과하더라도 2년차 셉 전공 시험이나 논문의 writing sample이 기준에 못미쳐서 중도 탈락하는 사람들이 많다. 본인이 성적을 잘 냈어도 애초에 많이 뽑고 많이 떨어트리는 구조이기 때문에 운이 나쁘면 잘릴 수도 있는 것이다.[22] 이혜훈 의원은 아들이 3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