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실업축구연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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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국실업축구연맹전은 1964년 전국실업축구연맹[1] 에 의해 창설된 대한민국 최초의 전국 규모 정규 축구 리그다. 1983년 슈퍼리그가 창설되기 전까지 대한민국 축구 최상위 리그 역할을 담당했다. 2003년 실업 리그가 K2리그로 재편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역사
2.1. 출범 이전
해방 이전인 1920년대부터 경성을 중심으로 여러 실업축구팀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고, 이북의 평양 또한 상당히 조직화된 리그를 운영하면서 경성과 평양은 한반도 축구의 양대산맥으로 군림하게 된다. 이 두 지역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경평대항실업축구전'''이라는 교류전 형식의 대회를 운영하기도 했으며 두 지역의 축구적 위상을 고려했을때 사실상의 슈퍼컵 개념이었다. 식민지 치하였기 때문에 한반도의 축구팀들 중 최상위권 팀들은 천황배 대회에 나갈 수 있었는데, 1935년에는 경성축구단이 우승을, 1936년에는 보성전문학교 축구단이 준우승을 할 정도로 이 땅에서 실업축구는 이미 성행하고 있었다. 1939년 경성실업축구연맹이 조직되면서 실업축구리그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봄이 올것만 같던 대한민국 실업축구계는 1950년 터진 한국전쟁으로 모든 기반이 파괴되면서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산발적인 컵대회인 전국축구선수권, 전국체전, 대통령배 축구대회 등만 열리는 형식으로 겨우겨우 명맥이 이어졌고, 전쟁이 끝나고 전후복구에 여력을 다하던 50년대까지 리그 조직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다 1960년 아시안컵 우승으로 높아진 국내 축구 열기와 비로소 안정이 된 국내 상황이 맞물려 여러 실업팀이 창단되었고, 무수한 대회가 쏟아지며 창설되었다. 너무 많은 대회가 열리자 대회의 질과 권위도 살지 않고, 각종 저질 경기가 난무하게 되어 전국실업축구연맹은 1964년 최초의 정규리그격 대회인 전국실업축구연맹전을 출범한다.
2.2. 출범 이후
1964년 제일모직, 병참단, 해병대, 대한석탄공사, 한국전력, 금성방직, 대한중석, 서울시경, 방첩대, 철도청의 10개 구단으로 원년 리그가 구성되어 첫 대회를 치뤘다.
기본적인 전국실업축구연맹전의 포맷은 오늘날 남미의 여러 리그와 비슷한 '''춘계''', '''추계'''의 전후기 리그 형식이었다. 춘계 대회는 대체로 4월~5월에, 추계대회는 9월~10월에 열렸다. 처음에는 춘계와 추계 우승팀은 각각 모두 그 해의 리그 우승팀으로 인정되고 따로 챔피언결정전 같은 개념은 없었으나, 70년대에 12월에 치르는 왕중왕전 개념의 대회를 몇 년간 유지한 적은 있었다. 다만 춘계 우승팀과 추계 우승팀만의 대회는 아니었고, 겨울~초봄에 치르는 대통령배 축구대회 우승팀, 여름에 치르는 전국축구선수권 우승팀까지 총 4개 팀이 토너먼트 형식으로 대회를 치뤘다. 이후 80년대에 이 대회는 폐지되었다. 한 해 춘계리그와 추계리그 중 한 리그만 나가는 팀도 있었고, 선수부족을 이유로 협회 등록팀이 리그가 아닌 컵대회만 나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대회 방식도 자주 바뀌어서 월드컵 형식의 조별리그-토너먼트 형태로 대회가 주로 치뤄지다가 잠시 단일리그를 실시하기도 했고, 1983년 수퍼리그 출범 때에는 수퍼리그와의 연계를 꾀하며 1~2부 자체 디비전 시스템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 뼈대는 '''조별리그-토너먼트''' 형식이었다.
1960년대 10개 팀 미만의 소규모로 운영되오던 리그는 1969년 '''금융단축구협의회'''가 창설되고 이들이 금융단 축구리그를 만들면서 전환점을 맞게 된다. 두 리그는 상호 경쟁체제를 형성하며 서로 운영되다가 1969년 대통령배와 전국축구선수권에서 금융단 리그 팀들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여주면서, 기존 실업팀들에게 큰 위협감을 심어주었다. 결국 실업축구연맹이 협상을 통해 금융단 축구팀들을 실업축구연맹에 가입시키는데 성공하고 1970년 추계대회부터 리그는 18팀 규모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은행팀의 막강한 자금력과, 선수 은퇴 후 은행직 보장의 안정성까지 겸비한 금융단 축구팀들은 리그에서 강호로 금방 자리잡았고, 우수선수들을 많이 확보한다.
리그의 최대 약점이자 숙원사업은 바로 연고지제도 도입이었다. 기업위주, 특히 금융권 팀들이 많았던 당시 리그 상황에 서울지역에 팀이 당연히 편중될 수 밖에 없었고, 춘계, 추계 대회를 비롯한 실업축구대회는 대부분 효창운동장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릴수밖에 없었다. 연간 리그의 기초 조건인 '''홈 앤드 어웨이'''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문제점을 실업축구연맹이 모르고 있진 않았으므로 1972년 추계대회때 참가팀들에게 연고지를 배분해 연고제도를 시험적으로 실시하기도 했고, 1975년부터 지속적으로 풀리그 대회방식 도입을 시도했다. 1980 시즌에는 서울리그, 강릉리그, 부산리그, 춘천리그로 조마다 지역을 배분해 결선리그를 서울에서 모여 치르는 방식도 시도하는 등 나름 노력했으나, 연고지제도의 정착이 안된 상황에서 이 방식들은 오래갈 리가 없었고, 1982년 겨우겨우 '''코리안리그 1부''', '''코리안리그 2부'''로 자체 승강제를 슈퍼리그와 연계할 목적으로 실시했으나 이마저도 1년만에 접게된다. 연고지제도는 2003년 K2리그로 재출범하고 나서야 비로소 완성하게 된다.[2]
그래도 1983년 수퍼리그 출범 이후에는 충실히 하부리그의 역할을 했다. 1983시즌 코리언리그에서 한일은행 축구단이 우승해 어찌보면 대한민국 축구 최초의 '''승격팀'''으로써 다음 시즌 수퍼리그에 참여할 권리를 얻었고, 1984시즌에도 상무 축구단이 코리언리그 우승을 달성하고 1985년부터 수퍼리그에 합류해 활동했다.[3] 1987년 수퍼리그가 온전한 프로팀만의 리그로 전환된 뒤 1988년부터 드래프트를 실시하면서 선수들의 직업선택적 불만이 많이 쌓였고, 그때마다 프로 대신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실업팀에 입단하는 선수들이 종종 있어왔다. 김대의, 김태영, 박건하 등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이렇게 실업축구연맹전에 데뷔했고, 이들은 이곳에서 실전경험치를 먹고 K리그로 향했다.
하지만 1997년 대한민국을 휩쓴 IMF발 외환위기 때문에 당시 실업축구의 중요 뼈대였던 금융단 팀들의 연쇄 해체로 인해 리그는 10팀 이하로 쪼그라들어버려 실업축구 무용론까지 나오고 만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997년부터 프로팀 2군의 참가를 허용하기도 했으나 2000년 프로 자체 2군리그인 R리그가 창설되며 미봉책에 그쳤다. 2000년대 초 경기회복이 되며 험멜코리아, 현대미포조선 등의 기업구단이 창단되고 활력을 찾는 듯 했지만, 이후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진출을 계기로 프로축구 확장이 대세 여론이 되었고, 기존의 춘계, 추계 단기대회 방식으론 한계를 느낀 실업축구연맹이 향후 프로 2부화를 목표로 K2리그를 출범하며 전국실업축구연맹전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3. 역대 참가 구단
4. 연혁
4.1. 역대 우승팀
4.2. 우승 횟수
5. 의의
앞서 서술했듯 국가대표 위주로만 돌아가던 1960년대부터 프로축구가 출범하기 전 까지 대한민국의 최상위 클럽축구리그의 역할을 충실히 했던 대회다. 60년대 레전드들인 김호, 김정남, 이회택부터 70~80년대 레전드인 박창선, 차범근, 김재한, 박이천 등 한국 축구의 간판들이 모두 모이는 무대였다. 또한 1980년대 중반부터 프로축구에 드래프트제도가 도입되며 선수들이 강하게 반발했고, 이 중 몇몇은 직업 선택의 권리를 외치며 실업리그인 전국실업축구연맹전을 택하는 선수들도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이런 기조는 절정에 달해 몇몇 팀들은 프로팀 못지않은 자본력을 무기로 이들을 스카웃해갔고, 이때 실업팀의 수준은 거의 프로팀에 버금갈 정도로 수준높았다. 이 당시 이랜드 푸마의 박건하, 한국주택은행의 노상래, 한일은행의 김대의, 국민은행의 김태영, 기업은행의 정재권 등이 실업팀 소속으로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어본 선수들이다. 또한 한국철도의 이을용같이 실업리그에서 실력이 늘어 프로로 간 뒤 대성한 케이스도 있고 할렐루야의 황득하 처럼 30대가 넘어 뒤늦게 프로에 입문해 나름 활약한 선수도 있었다. 이때의 실업리그는 프로축구에게는 소중한 선수수급의 장이었다.
또한 상무 축구단과 경찰 축구단의 존재로 축구선수들의 병역문제 해결을 위해 꼭 필요한 무대가 되기도 했다. 서정원, 최용수, 서기복 등 국가대표급 초호화 선수단으로 90년대 최다 우승팀이 된 상무는 물론이고, 리그 마지막 우승팀으로 남은 경찰청의 전력도 만만치 않았다. 또한 자금력으로 무장한 금융권 팀들도 선수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는데, 이는 단순히 금전적인 여유 뿐만 아니라 선수 은퇴 이후 은행원으로써의 삶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재한은 은퇴 이후 소속팀이었던 주택은행의 영업사원으로 변신해 지점장의 위치까지 올라가기도 했고, 현 U-23 대표팀 감독인 김학범 감독도 국민은행에서 일 잘하는 은행원으로 소문날 정도의 업무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원년 구성 구단 10개 팀 중 현재까지 명맥이 이어지는 팀은 경주 한국수력원자력과 대전 한국철도 2팀이 있으며[27][28]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팀 모두 프로팀이 아닌 세미프로팀으로 현재 K3리그에 참가하고 있다. 실업축구연맹전의 중요한 축이었던 금융단 축구단 중 가장 최근까지 운영되었던 고양 KB국민은행은 금융기관이 프로스포츠 구단을 직접적으로 소유하면 안된다는 금융법에 막혀 독립법인을 설립하는 수고를 감수할 정도로 프로행에는 욕심이 없었던 상태라 결국 프로팀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해체되었고, 나머지 다른 금융권 팀들은 모두 80년대 혹은 90년대 IMF 전후로 해체되어 지금은 축구계에 금융권 팀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수퍼리그 출범에 맞춰 포항제철 축구단과 대우 축구단이 프로로 올라가 현재의 포항 스틸러스, 부산 아이파크가 되었고, 이후 90년대 이랜드 푸마나 현대미포조선 축구단같은 기업형 구단들도 추후 K리그 진출을 노렸지만 이들의 K리그 입성은 무산되었다. 이후 이랜드그룹은 2014년 서울 이랜드 FC를 창단해 K리그에 입성했고, 현대미포조선은 한국 내셔널리그에서 우승하며 K리그 승격권을 거머쥐기도 했으나 승격을 거부하면서 실업구단으로 남아있다 안산 그리너스 FC에 선수단 일부와 기업 차원의 메인스폰서 역할을 맡기로 하고 팀을 해체했다. 또한 실업축구연맹전부터 참여해 한국 내셔널리그를 거쳐 K리그 챌린지에 진출했던 고양 Hi FC와 충주 험멜의 전신인 임마누엘 축구단과 험멜코리아 축구단같은 사례도 있다.
6. 프로 진출 선수 명단
전국실업축구연맹전에서 데뷔한 이후 프로에 진출한 선수 명단이다.
- 김병지 - 상무 축구단 (1989~1991)[29]
- 서효원 - 기업은행 축구단 (1991~1993)
- 정정수 - 할렐루야 축구단 (1992~1993)
- 노상래 - 한국주택은행 축구단 (1993~1994)
- 김태영 - 국민은행 축구단 (1993~1995)
- 김현민 - 할렐루야 축구단 (1993~1996)
- 박건하 - 이랜드 푸마 (1994~1995)
- 최은성 - 국민은행 축구단 (1994), 상무 축구단 (1995~1997)
- 김태완 - 한일은행 축구단 (1994), 상무 축구단 (1995~1996)
- 제용삼 - 이랜드 푸마 (1994~1997)
- 정성천 - 할렐루야 축구단 (1995~1996)
- 김종현 - 국민은행 축구단 (1995~1997)
- 박효진 - 국민은행 축구단 (1995~1997)
- 최익형 - 국민은행 축구단 (1995~1997)
- 이을용 - 한국철도 축구단 (1995~1998)
- 최영근 - 할렐루야 축구단 (1995~1998)
- 안승인 - 한일생명 축구단 (1996~1998)
- 김대의 - 한일은행 축구단 (1997)
- 진순진 - 할렐루야 축구단 (1997~1998)
- 권찬수 - 한일생명 축구단 (1997~1998)
- 이창원 - 이랜드 푸마 (1998), 상무 축구단 (1999~2000)
7. 관련 문서
[1] 한국실업축구연맹의 옛 이름.[2] 물론 진정한 연고지 정착까지는 또 몇년이 걸렸다.[3] 이 때 수퍼리그 원년팀으로 참가했던 국민은행 축구단이 최하위에 머물러 일종의 '''강등'''을 당해 1985시즌부터 다시 실업축구연맹전을 소화했다.[4] 해체된 쌍용양회 선수들을 주축으로 창단[5] 해병대 축구단 선수단 흡수[6] 포항제철 돌핀스의 2군팀으로 참가[7] 대우 로얄즈의 아마추어 축구단[8] 대우 로얄즈의 2군팀으로 참가[9] 1984년부터 현대 호랑이의 2군팀화.[10] 1984년 한시적으로 할렐루야 독수리의 2군팀이었다.[11] 1998년엔 해체된 이랜드 푸마를, 1999년엔 해체 위기의 할렐루야 축구단을 각각 인수하여 자신들이 명칭을 '''할렐루야 축구단'''으로 계승했다. 즉 수퍼리그 원년 우승팀 할렐루야 축구단과는 이름만 같이 완전 다른 축구팀인 것.[12] 럭키금성 황소의 2군팀으로 참가.[13] 1983년 사내 동호회로 창단[14] 이전까진 사내 동호회[15] 이전까진 사내 동호회[16] 이전까진 사내 동호회[17] 이전까진 사내 동호회[18] 한국축구사에 보기 힘든 노동조합 중심 축구팀이었다.[19] 순수 아마추어[20] 역대 참가팀 중 가장 미스테리할만큼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팀[21] 임마누엘 선수단 일부를 주축으로 창단.[22] 이랜드 박성수 회장의 고향인 목포시 연고로 K리그 8번째 구단 창단 시도를 한 적은 있다.[23] 본사 럭키금성 황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생적 출발이다.[24] 하지만 이후 감독과 선수단 절반 이상이 신생팀 엄브로 축구단에 대거 이적하며 존폐위기를 맞았다.[A] A B C D E F G H I J 공동 우승[25] 미상의 이유로 대회가 중단된 것으로 추정된다.[B] A B 공동 준우승[26] 10.26.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 당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대회가 중단되었다.[27] '''상무'''라는 통합 부대로 합쳐지기 이전까지 포함한다면 김천 상무 FC까지 총 3팀이다.[28] 2019년까지는 '''서울시경'''이란 이름으로 원년 대회에 참가했던 경찰 축구단이 아산 무궁화라는 구단으로 K리그에 참여하고 있었으나, 경찰 측에서 축구계에 완전히 손을 떼면서 2020년 충남 아산 FC라는 100% 민간구단으로 재창단되었다.[29] 심지어 일반병으로 입대해 상무로 전입에 성공한 입지전지적 케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