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동구·강화군·옹진군
1. 개요
인천광역시 중구, 동구, 강화군, 옹진군을 포함하는 선거구. 20대 총선 선거구 획정으로 처음 개설된 지역구였으나 4년 뒤인 2020년 동구가 빠지고 새 선거구인 중구·강화군·옹진군이 만들어지게 된다.
기존 중구·동구·옹진군 선거구도 옹진군 전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비범했는데[2] 서구의 인구 초과로 기존 선거구에서 쫓겨난 강화군이 이리로 들어오면서 영해와 EEZ를 합치면 너무 넓은 선거구 넓이로 말이 많았던 홍천군·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 선거구를 빠트리고도 남을 거대한 선거구가 되어 버렸다. 여기에 더해 서해 북방한계선 전 구간, 즉 '''휴전선'''의 절반을 껴안고 있기까지도 하다.
선거구에 속한 지자체들이 근세 한국사 전 기간에 걸쳐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보니, 정치 1번지만큼은 아니어도 여러 모로 한반도의 근현대사를 담은 선거구가 되었다. 정치 성향상으로는 전통적인 보수정당(2016년 기준으로는 새누리당)의 비영남권 지역기반의 일부로 여겨져 왔으나 이번 선거에 새로 합류한 강화군과 나머지 지자체 사이 미묘한 표심의 차이가 드러났고 실제로 선거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강화군의 선거구 배정 문제는 인천의 선거구 획정 문제에서 가장 게리멘더링 논란이 컸던 사안이기도 하다. 어차피 인천 본토와는 김포로 서로 떨어져 있는 가운데, 그나마 가장 가까운 서구 대신 중구/동구와 붙인다는 점 때문이다.
2. 투표 성향
'''자타가 공인하는 한때 인천지역 보수정당의 텃밭'''[3]
인천시내 13개 지역구 중에서 그나마 미래통합당 및 그 전신의 지지세가 가장 뚜렷한 지역이다. 지리적 위치나 인구의 형성 과정을 보면 그럴 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보수성향이 강한 편이다.
이 지역은 인천에서도 60대 이상 고령 인구가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대표적인 구도심 지역인데다 북한과 바로 맞닿아 있는 접경지역이다. 특히나 NLL과 마주하고 있는 강화군과 옹진군은 지유한국당 후보의 평균 지지율이 60%를 상회할 정도로 보수의 세가 강하다.[4] 도시 지역이자 원도심권인 중구와 동구에는 오래 전부터 인천에서 살아온 토박이들과 6.25 전쟁 직후 내려온 황해도 출신의 피난민들, 그리고 그 피난민들의 후손이 꽤 있다. 이들의 정치 성향도 꽤나 보수적이다. 이러한 인구 분포 때문에 보수 성향의 후보들이 출마하면 큰 이변 없이 당선된 역사가 있다.
그러나 미래통합당 후보라고 해서 무혈입성하는 것만은 또 아니다. 농촌 지역에서는 미래통합당 지지율이 70%에 육박하지만 도시 지역인 중구와 동구는 미래통합당과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 구도가 5.5:4.4로 근소하게 미래통합당이 앞서있다. 여촌야도의 경향이 조금 있는 편. 인천국제공항 인근 공항신도시 일대나 영종도 하늘도시에 입주한 젊은 연령대의 주민들이 중구에 유입되고 동구를 먹여살리고 있는 현대제철, 두산인프라코어, 동국제강 등 대규모 제조업 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민주당계 정당이나 진보정당의 지지율이 아주 낮지는 않다. 특히 동구의 경우 정의당의 지지세가 인천에서도 꽤 높은 편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5]
중구와 동구, 옹진군이 통합된 이후 대부분의 선거에서 보수정당[6] 후보들이 승리를 거뒀지만 아닌 경우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사태 직후 열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가 대표적 사례. 이 당시 이 지역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던 열린우리당 한광원 후보가 현역 의원이던 한나라당 서상섭 후보를 꺾고 승리를 거두며 이 지역구에서 처음으로 민주당계 정당 후보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3. 선거구 변천사
3.1. 중구·동구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부터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까지는 구제(區制)가 실시되기 이전의 시기이기 때문에 인천시 전역을 동별로 묶은 뒤 갑, 을, 병 선거구로 나눠서 선거를 치렀다. 중구와 동구의 경우 보통 중구는 갑, 동구는 을이나 병 선거구에 편성됐다.
현행 선거구의 최초 뿌리로 볼 수 있는 선거구 획정 사례는 1968년 인천시에 4개의 구[12] 를 설치된 이후의 첫 선거인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부터이며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중구와 동구가 한 선거구로 묶이고 훗날 옹진군이 인천직할시로 편입된 이후 중구·동구와 한 선거구로 묶이게 된다.
3.2. 강화군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부터 제5대 국회의원 선거까지는 강화군 단독으로 의원을 선출했다. 그 때는 이 지역의 인구가 많았기 때문. 이후 강화의 인구가 감소하면서 이웃 지역인 김포군과 선거구가 합쳐져서 오랫동안 김포군·강화군 선거구로 묶여 선거를 치렀다. 제9대 국회의원 선거와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고양군과 묶이기도 했고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와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부천시와 합구된 역사도 있다.
1995년 강화군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된 직후에는 계양구와 한 선거구로 묶였다가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15년간 서구의 검단 일대 지역과 한 선거구로 묶였다. 그리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선거구를 다시 정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결국 현행대로 선거구가 다시 획정됐다.
3.3. 옹진군
옹진군 출신 의원이 선출된 것은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다. 이전에는 옹진군 지역 중 다수가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인데다 전쟁 직후라 경황이 없어서 옹진군 출신 의원을 뽑지 못했다.
지역의 위치나 인구수에 사연이 많은 탓에 여러 지역과 선거구가 붙었다 떨어지는 역사가 벌어졌다. 제6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제9대 국회의원 선거까지는 시흥군, 부천군과 묶였고 이후에는 시흥군과 부천군에서 떨어져 나온 부천시, 안양시, 광명시와 묶이기도 했다. 그러다 소선거구제가 정착된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8년간 인접 행정구역인 안산시와 합구됐다.
그러다 1995년 옹진군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된 이후에는 중구, 동구와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거운동하기 힘든 지역구 중 하나로 꼽힌다. [13]
4. 역대 선거 결과
4.1. 18대 대선[14]
- 출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
4.2. 20대 총선
기존 선거구의 현역 새누리당 국회의원 가운데 중구·동구·옹진군 측 의원이었던 재선의 박상은 의원은 불법정치자금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했는데 잔여임기가 미달하여 궐석이었고, 서구·강화군 을선거구 측 의원이었던 안상수 의원이 서구 선거구 대신 이 선거구로 와서 3선에 도전하고자 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피선거권을 잃은 박상은 의원도, 3선에 도전하는 안상수 의원도 아닌 신인인 배준영 후보를 공천하였다. 배준영 후보는 우련통운의 부사장으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세월호의 화물 고박을 맡았던 회사의 부사장이라는 경력으로 인해 416연대로부터 낙선운동 대상에 오른 인물이었다. 배준영 후보는 동인천역에서 서울역까지 운행하는 KTX를 도입하겠다는 공약과 섬 지역 교통의 개선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선거운동에 나섰다. 기사
현역 안상수 의원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고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전직 인천광역시장이기도 했던 안상수 후보는 시장 재직 시절 월미은하레일 건설과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유치 등의 무리한 사업 추진으로 인한 부채 조장으로 기존 선거구는 물론 인천시 전역에서 지역 재정 악화의 원흉으로 악명이 높은 상황. 같은 시기 수도권의 광역자치단체장을 했고 또 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해 차기 대선 잠룡으로도 손꼽혔던 오세훈이나 김문수와도 극명하게 대조되었다.
이렇게 여권 분열이 이루어진 가운데 야권에서는 치과의사 출신의 더불어민주당 김찬진 예비후보와 전직 인천 동구청장 출신 정의당 조택상 예비후보가 양당의 인천광역시당 차원에서 이룬 야권연대에 합의하였고 조택상 후보가 더불어민주당을 대신하여 야권 단일화 후보로 나섰다.[20] 조택상 후보는 안상수 후보가 인천광역시장 선거에서 패배하여 잠시 물러났던 시절 민주노동당 인천 동구청장으로 재직한 바 있는 인물. 조택상 후보는 마우스랜드라는 우화를 이용해 여권의 텃밭인 NLL 연변 강화군과 옹진군 지역에서의 지지를 호소했다. 기사 그러나 국민의당은 야권연대에 응하지 않고 김회창 후보를 단수공천했다.
2개의 도시 지역 자치구와 2개의 농촌 지역 자치군이 더해진 선거구답게 선거 결과는 꽤나 흥미로운데 자치구와 군별로 1위가 다 달랐다. 중구와 옹진군에서는 배준영 후보가 1위를 했고 동구에서는 조택상 후보가 1위를 했으며 나머지 지역에서 2위를 한 안상수 후보가 강화군에서 1위를 했다. 특히 배준영 후보는 기존 선거구 중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는 중구, 동구 옹진군의 합계 득표율 1위에 올랐으나[21] 정작 전체 합계에서는 1%가 조금 넘는 전체 득표율 차로 낙선하고 말았다. 전체 합계에서는 강화군을 등에 업은 안상수 의원이 31.87%의 득표율로 1위를 했는데 이는 수도권은 물론 전국에서도 최저 득표율 당선 기록이다.
안상수 당선인의 입장에서는 잠깐이나마 같은 임기 동안 수도권의 인접 지자체장을 했던 두 여권 잠룡이 사실상 이번 선거로 재기 불능의 위기에 빠졌는데, 반대로 정작 지난 선거에서 자신에게 직접 꺾였거나 자신을 꺾은 후보와는 기어이 의회에서 전부 재회했다는 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상당히 많이 남긴 선거였다.
선거가 끝난 직후 안상수 당선인은 곧바로 새누리당에 복당을 신청하였고, 비박과 친박 당원 간 대립으로 인한 새누리당의 패배와 끝나지 않은 당 내 갈등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야권연대 조택상 후보는 선거 이후 정의당을 탈당하고 선거 당시 야권연대에 부응했던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였다.
4.3. 19대 대선
도시 지역인 중구와 동구에서는 문재인이 이겼고 농촌 지역인 강화군과 옹진군에서는 홍준표가 승리했다. 하지만 인구가 많은 중구-동구에서 10% 이상 차이로 낙승해서 전체적으로는 문재인이 승리했다.
4.4.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인천시장은 더불어민주당 박남춘 후보가 중구와 동구에서 압승했고 강화군과 옹진군에서 유정복 후보에 석패하였다. 기초단체장은 강화군수 빼고는 전부 민주당이 승리했다.
4.5.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2019년 1월 말 기준 중구-동구-강화군-옹진군 선거구의 인구는 27만9494명인데 선거구 분구의 기준이 되는 인구 상한선을 근소하게 넘어섰다. 그래서 선거구 재조정 가능성이 있다.
각 당이 선거구 획정의 인구 상한/하한선으로 삼자고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등은 김제시·부안군(13만9470명)을 하한선으로 하고 김해시 갑(27만9251명)을 상한선으로 삼자고 주장한다. 반면 미래통합당은 동두천시·연천군(14만541명)을 인구 하한선으로, 고양시 병(28만1824명)을 인구 상한선으로 주장하고 있다. 만약 민주당이 언급한 상한선이 채택될 경우 이 선거구 인구는 상한선을 초과하기 때문에 네 구군 중 하나를 떼어내야 한다. 물론 넷 다 단독 선거구를 구성하기는 턱도 없는 인구이므로(...)[24] 특례 선거구가 하나 더 생겨야 할 것이다. 동구를 미추홀구 갑에 붙이는 방법과[25] 강화군을 서구에 붙여 3분할하는 방법이 있는데[26] 지역구 의석수가 포화상태인 만큼 전자가 유력하다.
2020년 3월 3일 선거구획정위원회가 선거구 조정 결과를 발표했는데 예상대로 기존 선거구에서 동구를 떼어서 미추홀구 갑 지역에 붙이기로 했다. 이후의 상황은 새 선거구 문서 참조.
[1] 당시 이 선거구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18대 대선이 그 지역의 성향을 아는데 좋은 지표이므로 현 선거구에 맞춰 다시 계산한 수치.[2] 옹진군은 도서지역이다. 어느 한 섬에 군청을 둘 수 없어서 인천 본토인 용현동에 군청을 두고 있다. 유세를 하려면 최북단 백령도에서 최남단 덕적도까지 일일이 배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3] 다만 이것은 퇴색된 감이 없지않아 있는데 19대 대선에서 문재인이 승리했기 때문. 다만 강화, 옹진에선 홍준표가 승리했다.[4] 그 중에서도 옹진군은 자유한국당 후보가 70% 이상의 득표율을 올리는 경우가 꽤 있다. 옹진군 내 도서지역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생각을 해본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5]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조택상 당시 민주노동당 후보가 동구청장에 당선되기도 했다.[6]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7] 1명의 의원을 뽑는 소선거구제로 실시된 선거였고 이 선거에서 인천시에 배정된 의석은 3석이었다. 나머지 2석은 남구와 북구 선거구.[8] 2명의 의원을 뽑는 중선거구제로 실시된 선거였고 이 선거에서 인천시에 배정된 의석은 1석이었다.[9] 선거 3개월 뒤인 1981년 7월 1일 경기도에서 분리돼 인천직할시로 승격된다.[10] 서구·강화군 을 선거구에서 강화군을 분리해 중구·동구·옹진군과 합구.[11] 동구가 기존 선거구에서 빠져서 미추홀구 갑으로 이동한다.[12] 중구, 동구, 남구, 북구. 중구와 동구는 그대로 남아 있다. 남구는 훗날 연수구, 남동구, 남구로 분리됐고 쪼그라든 남구는 2018년 미추홀구로 이름을 바꿨다. 북구는 서구, 부평구, 계양구로 나뉘어졌다.[13] 각 섬을 다 돌아야 하고, 여객선 운항 특성상 하루에 여러군데를 돌기 쉽지 않는 등의 이유. 일부 후보는 후보자 본인은 시내(중구, 동구) 위주로 돌고, 선거운동원에 등록된 배우자나 자녀 등의 직계가족이 대신 섬에 방문하여 선거운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14] 당시 이 선거구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18대 대선이 그 지역의 성향을 아는데 좋은 지표이므로 현 선거구에 맞춰 다시 계산한 수치.[15] 지역구 득표수 합계/지역구 투표수 합계[16] 중구 30,613표+동구 25,911표+옹진군 9,197표+강화군 29,666표[17] 중구 55.3%, 동구 55.5%, 옹진군 71.9%, 강화군 69.9%[18] 중구 24,538표+동구 20,584표+옹진군 3,470표+강화군 12,534표[19] 중구 44.3%, 동구 44.1%, 옹진군 27.1%, 강화군 29.5%[20] 김찬진 후보와 조택상 후보의 후보 단일화는 이전에도 한 번 있었는데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그랬다. 이 때도 김찬진 후보는 새정치민주연합의 동구청장 후보로 나섰고 조택상 후보는 정의당 동구청장 후보로 나섰는데 당시 활발했던 야권연대 바람에 동참해 조택상 후보로 단일화를 이뤘다. 그러나 본선에서는 이흥수 새누리당 후보에게 패배.[21] 강화군을 뺀 중구, 동구, 옹진군의 득표수만 놓고 보면 배준영 후보가 3만723표, 안상수 후보가 2만2730표다. 기존 선거구 구조에서는 배준영 후보가 8000표 가까운 표차로 낙승할 수 있었지만 강화군의 투표함에서 '안상수 몰표'가 쏟아지면서 다른 지역의 열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22] 더불어민주당 김찬진 예비후보와 선거연대[23] 전국 최저 득표율 당선[24] 그나마 12만여명이 사는 중구가 선거구 획정 인구 하한선에 근접한다. 동구와 강화군은 6만명대의 인구가 살고 있고 도서지역인 옹진군은 다 긁어모아도(...) 2만명대에 불과하다.[25] 동구와 미추홀구 갑 지역의 북쪽인 도화동은 송림로로 연결되지만 생활권이 다소 다르다. 동구는 동인천역 생활권 성격이 강한 반면 미추홀구 갑 지역은 제물포역이나 주안역 생활권 성격이 강하다.[26] 서구 갑이 현재도 상한선을 넘은 상태지만 일단 2019년 1월 인구로는 행정동 하나를 을에 떼줘서 2선거구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데, 강화군이 붙게 되면 서구+강화군의 총인구는 상한선의 2배를 넘어서 3분할이 강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