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혜영

 

'''원혜영의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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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경기 부천시 중구 을)'''
''선거구 분리''
임무웅[22]

'''제14대
원혜영'''

''선거구 개편''
이사철[23]
최선영[24]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기 부천시 오정구)'''[25]
제15·16대
최선영

'''제17~20대
원혜영'''

제21대
서영석

<colbgcolor=#004ea2> '''제16-17대 경기도 부천시장'''
'''대한민국 제14 · 17~20대 국회의원
원혜영
元惠榮 | Won Hyeyoung
'''
<colcolor=#ffffff> '''출생'''
1951년 9월 27일 (72세)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도당리[1]
'''본관'''
원주 원씨
'''학력'''
부천북초등학교 (졸업)
중동중학교 (졸업)
경복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역사교육학 / 학사)
'''병역'''
육군 병장 만기전역
'''가족'''
배우자 안정숙, 슬하 2남
'''종교'''
개신교[2]
'''소속 정당'''

'''의원 선수'''
'''5'''
'''의원 대수'''
14, 17, 18, 19, 20
'''현직'''
더불어민주당 외교안보통일자문회의 의장
'''경력'''
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 학생회장
풀무원식품 창업
민선 2·3대 부천시장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
열린우리당 사무총장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
통합민주당 원내대표
민주당 원내대표
민주통합당 공동대표
국회 남북관계발전특별위원회 위원장
새정치민주연합 공천혁신추진단장
더불어민주당 인재영입위원장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
더불어민주당 공천관리위원장
'''SNS'''

1. 개요
2. 생애
2.1. 정치 활동
3. 부천의 맹주
4. 논란
5. 여담
6. 경력
7. 수상
8. 선거 이력
9. 소속 정당
10. 저서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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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기준으로 바르게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기준으로 잘 할지는 장담 못하겠지만, 사람의 기준으로는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바르게 정치를 할 수 있겠느냐는 아버지[3]

의 질문에 대한 대답


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이다. 원만하고 무난한 성품으로 갈등 조정을 잘 하는 관리형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아버지가 원경선 풀무원농장 창업주로, 평안남도 중화 출신이다. 즉, 실향민 2세이다.
수도권 5선 중진의원에 당대표, 원내대표도 지냈던 거물 정치인치고는 큰 이벤트 또는 임팩트가 없다는 평을 받는다.
검소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국회의원과 부천시장을 오랫동안 지내고도 태어났을 때부터 살던 고택에서 평생을(66년째) 거주하고, 수십만 km 이상 주행한 자동차를 계속 사용했을 정도였다.[4] 또한 선친 이래로 부천시에서 쭉 해왔던 자선사업의 뜻을 이어가는 것인지, 기부 활동을 많이 하는 정치인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2. 생애


1951년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도당리(현 부천시 도당동)[5]에서 풀무원 공동체를 일군 원경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참고로 원경선은 "풀무원농장"의 창업주이고 이후의 식품 기업 풀무원은 출소 후 생계유지를 위해 강남 지역에서 유기농 식품 가게를 운영하던 원혜영이 창업하였다. 현재 5선 국회의원으로 부천시오정구 지역(현재의 부천시 정)이 지역구이다.
부천북초등학교(당시 부천소사북국민학교)와 중동중학교(60회), 경복고등학교(45회),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제적 및 복교)를 졸업하였다. 1971년에 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 학생회장을 하던 시절 유신 헌법 반대 시위를 하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강제 징집되었으며, 학교 선배였던 김상곤과 비슷한 시기에 잡혀갔다고 회고했다. 전역 후 서울대학교 재학 중이던 1975년 민청학련 사건 미석방자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를 하다가 기소되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2016년에 유신 헌법이 이미 위헌으로 내려졌기 때문에 다시 무죄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6년 동안 친구 남승우(現 풀무원 대표)와 함께 풀무원에서 일하였다. 오랫동안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상태였다가 14대 국회의원 당선 뒤 1996년 서울대학교를 25년 만에 졸업한다.

2.1. 정치 활동


1988년 한겨레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겨레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남구(현 옛 소사구원미구 일부 지역)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통일민주당 최기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중구 을(현 옛 오정구 지역)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1995년 정계복귀한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따라가지 않았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정치국민회의 최선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노무현, 김원기, 유인태 등과 국민통합추진회의(약칭 통추)를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하로동선'이라는 고깃집을 차려 장사를 한 적이 있었으나 잘 되지는 못했다고 한다.[6][7]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 김원기 등과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으며 이듬해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을 받아 부천시장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상당히 무난하게 시정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아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수도권에서 새천년민주당이 고전하는 와중에도 무려 '''55%'''의 득표율로 재선되는 기염을 토했는데, 실제로 재임기간에 세계 최초로 버스정보시스템을 도입한 것과 북부도서관 건립 등 교육/문화 사업을 과감하게 육성하여 부천국제영화제, 부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만화영상진흥원 등을 설립. 수도권 변방의 도시였던 부천을 만화예술의 메카, 문화도시로 탈바꿈 시킨 게 지금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부정적 평가로 서울 지하철 7호선 연장운영이 늦어져 13년이 걸려 2012년에야 개통했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이는 미국발 금융불황으로 인한 국비지원금 축소로 인한 것으로 당초 2004년 착공시 목표년도가 2010년이었다. 대체적으로 부천시의 버스교통이 원혜영 의원의 시장 재임 이후 좋아졌다는 건 객관적으로 사실이다.[8]
재선되고 1년 6개월 정도의 임기를 수행한 뒤 2003년 말에 사임하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8년 만의 국회 복귀에 성공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이 수도권에서 그야말로 참혹하게 나가떨어지던 와중에도 당선되어 3선 고지에 올랐다. 17대 국회에서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 사무총장, 최고위원을 지냈다.
18대에는 원내대표 및 당대표에 버금가는 당직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8대 국회 때는 당시 당대표였던 정세균 의원과 함께 내부적으로는 몰락 직전까지 몰렸던 민주당을 재정비했고, 외부적으로는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와의 원내 힘겨루기에서 밀리지 않으려 노력해 19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에 반격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공을 세웠다고 평가된다.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오세훈 시장의 사퇴로 공석이 된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권유받아 서울로 주소를 이전한 일이 있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를 비롯한 야권 성향의 무소속 후보까지도 이에 대해 맹비판해 당시 부천 오정구 선거구의 공보물에 원혜영 의원을 비판하는 내용이 없는 후보가 없었을 정도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4선 고지에 올랐다. 당선된 해에 선거법 위반 문제로 1심에서 벌금 500만 원 의원직 상실형을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는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는 경기도지사 경선에 나가기도 했다. 원혜영 의원도 경기도 내에선 인지도가 적지 않은 편이지만 수원 영통구 출신의 김진표 의원에게 밀려 도지사 선거 본선에 나서지는 못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5선을 달성했다.
2016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당대표 출마 권유를 폭넓게 받았으나,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당권보다는 개헌,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등 관심갖고 있는 정치개혁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 집중하겠다고.[참고기사]
2016년 말부터 더불어민주당 인재영입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는 유시춘[9], 유홍준, 이철 등과 함께 일명 '꽃할배 유세단'을 결성해 중-장년층 표심 공략에 나서기도 했다.
5선 중진 의원으로 한때 이석현 의원(6선 의원)과 같은 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유력했으나 2018년 5월 10일, 불출마 선언을 했다.
21대 총선 불출마를 고심 중에 이낙연 총리 후임으로 문재인 정부 2대 총리 설이 돌고 있다. 이낙연 총리가 21대 총선 지휘를 위해 당 복귀를 한다면 후임 총리는 비교적 잡음이 적은 인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10] 그러나 청와대에서는 비슷한 성정의 인물 중에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김진표를 우선적으로 검토했고, 고사하자 정세균으로 후보를 변경한 상태라, 정 전 국회의장이 다시 고사하지 않는 이상 총리직은 힘들어졌다. 추후 총리에는 정세균이 임명되었고, 이낙연은 21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종로에서 황교안 후보와 맞붙어 승리을 거뒀다.
2019년 11월 19일 '국제협력요원 순직 심사 등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하였으며, 이 법안은 '국제협력요원 제도 폐지에 따른 순직 심사 등에 관한 법률'로 수정가결되었다.
2019년 12월 11일, 백재현 의원과 함께 공식적으로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단순한 총선 불출마뿐 아니라 정계 은퇴까지 함께 고민중인 것으로 보인다.
정치 인생 마지막을 앞둔 2020년 1월 6일, 더불어민주당 공천관리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7일부터 이틀간 진행되는 정세균 국무총리 임명 동의에 관한 인사청문특위에도 민주당 몫 위원으로 참석해 국민과의 소통 등에 대하여 질의를 주고 받았다.
언론에서는 미래통합당 김형오 공천관리위원장에 밀려 크게 주목받진 못했지만, 민주당 공천관리위원장으로서 공천을 잘 관리해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역사적인 대승을 거두는데 기여했다. 민주당은 소위 '시스템 공천' 방침을 1년 전에 확정 짓고 이를 반영한 특별당규를 전당원투표를 통해서 확정지었는데, 이 원칙에 충실하게 조용히 공천을 잘 관리해서[11][12] 민주당은 역대급으로 잡음 없는 공천을 통해서 후보자들을 확정짓고 선거에 나설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역사적인 대승은 물론이고 253개 선거구 중 단 한 명만 빼고[13] 모든 후보자들이 다 선거비를 보전 받는 기염을 토했다. 이로서 정치인생의 마지막을 명예롭게 마무리짓게 되었고, 앞으로도 민주당에서 원로로 예우받을 듯하다.

3. 부천의 맹주


명실상부한 부천시의 맹주. 그 위세는 전성기의 정동영이 전주에서 누렸던 위세조차도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 정도다.[14] 부천에서 5선 국회의원으로 인지도와 인기가 높을 뿐만 아니라, 부천시장을 두 번 역임하면서 한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한편 17대 총선에서 부천시장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총선 출마한 것과 서울시장 보궐선거 나가려고 잠시 주소를 이전한 것은 두고두고 비판받는 중...이라고는 하나 부천시장 사임 직후 총선에서의 득표율이 과반으로 62.8%에 이르렀고, 야당이 81석에 그치며 대참패한 18대 총선에서도 56.3%를 득표하며 생환할 정도로 폭넓은 지지를 꾸준히 받은 것도 사실이다.
원혜영이 부천시의 거물 정치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로는, 부천에서 나고 자랐거나, 학창시절을 보낸 현실 정치인이 드물기 때문. 부천에는 부천군, 초기 부천시 시절(70~80년대)부터 살아온 노년층들을 제외하면 외부에서 이주하여 온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15] 90년대 이후 부천 출신 전현직 국회의원 중 잘 알려진 인물은 원혜영을 제외하고는 김근태, 이사철, 안동선 뿐이다.
결정적으로 원혜영 의원의 집안이 부천에서 쌓은 공덕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선친인 원경선 창업주 이래로 풀무원 농장을 통해 부천에서 빈민구제 등의 자선사업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 풀무원농장은 개신교의 노작 활동에 기반을 두고 빈민 구제를 목표로 세워진 집단 농장으로, 창업 목적이 사회에 대한 봉사를 담고 있는 곳이다. 덕분에 원씨 집안은 과장을 보태면 부천에서 거의 신으로 통할 정도여서 3,40년 이상 부천에서 살아온 시민들은 원혜영 의원 집안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고 한다.

4. 논란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16] 남북경협 증진 목적으로 개성공단을 방문해 북측 여성접대원들의 권유에 3,4분간 부채춤을 춰 김근태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 등 집권여당 지도부와 함께 구설수에 올랐다. 한나라당과의 정쟁으로 확대됐다.

5. 여담


  • 선친 원경선은 우리나라 최초로 유기농법을 도입한 생명평화환경운동의 대부로 6.25 전쟁 이후 전쟁고아들과 함께 공동체 농장을 운영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대로 부천지역사회를 위해 복무해 온 셈이다. 부친은 아들이 풀무원 공동체를 맡아 주기를 원했지만 절대 강요하지 않고 아들의 의견을 존중해주었으며 각자 생각이 다르면 매일 자정을 넘기며 의견을 교환했다고 한다. 훗날 원혜영 의원은 이런 민주적인 집안 분위기 덕분에 자연스럽게 민주화운동의 길에 들어섰다고 회고한다.
  • 당시 초등학생들은 퇴비로 쓰기 위해 매일 풀을 한 다발씩 뜯어와야 했는데, 이를 없애겠다는 공약을 걸고 회장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정부 시책이라 결국 지킬 수 없었지만, 본인은 학생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실현시킬 생각이었다고
  • 아내인 안정숙[17]에게 "우리 집에 우물이 있는데 물이 아주 좋다, 평생 그 물로 머리를 감게 해주겠다"라고 프로포즈를 했다고 한다.
  • 전두환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기 위해 풀무원 대표직을 그만두었는데, 어떻게 지분을 처리할지가 문제였다. 당시 풀무원이 크게 성장할 거라고 확신했지만, 독재정권이 회사에 피해라도 입힐까 걱정했던 원혜영은 상표권만을 공동명의로 남겨두었다. 1990년대 말 상표권 가치가 수백억대에 이르자 지분을 도로 매입하려고 했는데 그때만 해도 지적재산권에 대한 개념이 희박할 때라 국세청은 인지 대금 11만 6천 원으로 상표권의 가격을 책정했다. 그래서 차라리 지분을 모두 기부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해서 20억을 기부하여 장학 재단을 만든 것이 풀무원 부천육영재단의 탄생 비화이다. 이 때문에 재정적으로 풍족한 편은 아니라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해 전세자금을 대출받아 언론에서 청빈정치인으로 미담성 기사가 나오기도 했지만 본인은 자산이 7억이나 있다며 해명자료를 올린 적도 있다. 현재도 원혜영은 특허 허브국가 추진위원회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45만 km를 탄 자신의 그랜저 XG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2013년 1월 말, 더이상은 고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아 폐차시키고 체어맨 H로 바꿨다고 한다. # 5년 전에 체어맨 H로 바꿨다는데, 지금 체어맨의 거리도 꽤 나올 듯.[18]
  • 원혜영이 부천시장으로서 보여준 능력은 긍정적인 편이지만, 동춘서커스 공연장 건립문제는 매듭짓지 못했고, 결국 후임 시장인 한나라당 홍건표가 뒤집어쓰며 흑역사로 남았다.
  • 2018년 11월 14대 국회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장석화 전 국회의원이 별세하자 경향신문 부고 기사에 자신의 초선의원 시절 사진이 잘못 올라가는 일이 있었다. 이후에는 장 전의원의 사진으로 정정되었지만.

6. 경력



7. 수상


  • 1995년 환경운동연합 녹색정치인상
  • 1999년 21세기 여성포럼 선정 '여성운동과 함께하는 만나고 싶은 남자 99인'
  • 2008년 제10회 국회 백봉신사상
  • 2011년 《민주신문》 창립 17주년 기념 한국을 빛낸 21세기 한국인상 시상식 '대한민국을 빛낸 정치인'상
  • 2011년 한국반부패정책학회 대한민국 반부패 청렴 대상
  • 2012년 한국정부회계학회 감사장(복식부기회계제도 도입으로 정부재정 선진화 기여)
  • 2013년 2월 제14회 국회 백봉신사상
  • 2013년 12월 제15회 국회 백봉신사상
  • 2014년 범시민사회단체연합 선정 '좋은 국회의원'
  • 2014년 국정감사 NGO모니터단 국정감사 우수의원
  • 2015년 대한변리사회 주관 제5회 지식재산대상 개인 부문
  • 2016년 제12회 대한민국 의정대상

8.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부천 남

6,839 (5.54%)
낙선 (6위)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부천 중 을

'''36,608 (52.48%)'''
'''당선 (1위)'''
'''초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부천 오정

20,502 (30.11%)
낙선 (2위)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 부천시장

'''123,448 (54.31%)'''
'''당선 (1위)'''
'''초선'''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17,502 (55.01%)'''
'''재선'''[19]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부천 오정

'''43,284 (62.08%)'''
'''재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32,861 (56.01%)'''
'''3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68,850 (62.45%)'''
'''4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35,559 (44.79%)'''
'''5선'''

9.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88 - 1991
정계 입문

1991 - 1995
합당

1995 - 1996
합당

1996 - 1996
탈당 [20]

1996 - 2000
입당

2000 - 2003
합당

2003 - 2003
탈당 [21]

2003 - 2007
입당

2007 - 2008
합당

2008 - 2008
당명 변경

2008 - 2011
당명 변경

2011 - 2014
합당

2014 - 2015
합당

2015 - 현재
당명 변경

10. 저서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발상을 바꾸면
시민이 즐겁다(2000)
아름다운 도시를 만드는
55가지 지혜(2002)
아버지, 참 좋았다(2010)
원혜영의 진격하라(2013)
원혜영의 혁신하라(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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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둘러보기










[1] 現 경기도 부천시 도당동.[2] 출처[3] 생명평화환경운동의 대부 원경선[4] 결국 이 자동차는 2013년 '''더이상 고칠 수 없다는 이유로''' 폐차됐다.[5] 2015년 현재도 도당동에 거주 중이다. 도당동이 본래 오정면 지역이었고 사실상 옛 오정구 생활권이지만, 원미구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선거 때마다 애를 먹고 있다고. 옛 오정구 지역인 여월동 휴먼시아에 따로 마련한 전세집과 왔다갔다 한다고 한다.[6]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사실상 원혜영 특집이었던) 풀무원 특집에 의하면, 원 의원은 당시 하로동선 개업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장사가 잘 될 각이 안 났다고.[7] 사족으로 '하로동선'은 여름의 화로와 겨울의 부채라는 뜻으로, 아무 소용 없는 말이나 재주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 또는 ''''나중에 요긴하게 쓰일 물건''''이라는 해석을 가능케 하는 단어다. 이전 서술에서는 하로동선을 이상하다고만 깠으나, 무지에 불과하다.[8] 실제 부천시민들이 버스교통만큼은 상당히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참고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21&aid=0002161199[9] 유시민 작가의 누나.[10] 총선 직전 정국에서 총리 관련하여 문제가 불거질 경우 총선에도 영향이 크게 갈 수 있기 때문에 당내에서는 안전한 원 의원을 미는 기류가 생겼다.[11] 자신의 지역구에서도 얄짤 없었다. 현역 불출마 지역구라 전략공천 대상 지역구로 지정됐지만 경선으로 전환되었고, 자신의 전 보좌관이자 전 부천시장 김만수, 자신의 최측근 서영석, 비례대표 의원 정은혜가 경선을 했고 서영석이 후보가 되었고 본선에서도 승리했다. 결과적으로 많은 중진 의원들이 그렇듯이 자기 측근에게 지역구를 물려준 모양새가 되었지만, 절차상으로 흠잡을 데가 없었으니 불만이 나올 수가 없었다.[12] 이는 이해찬 대표도 마찬가지. 자신의 측근들을 다 경선에 붙였고, 줄줄이 졌는데도 "자기들이 못한 것을 어떻게 하겠어"라는 반응을 보였고, 이렇게 지도부급 인사들이 욕심을 버린 것이 민주당의 총선 승리 요인 중 하나였다.[13] 경주시에 출마한 정다은 후보자. 14.72%로 반액을 보전 받았다(...)[14] 이제 정동영은 전주에서 전혀 위세가 없다. 2016년 총선에서는 접전 끝에 겨우 당선됐다. 제1야당 대통령후보 출신이 전성기 때 누렸던 위세가 있는 지역에서 보수여당호남에서 참패한 정당을 상대로 신승을 했단 건 창피한 수준이다..[15] 주로 호남, 충청지역에서 이주한 사람이 많다.[16] 북한의 1차 핵실험은 10월 9일, 개성공단 방문일은 10월 20일[17] 씨네21 편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18] 그만큼 주행거리가 긴 셈.[19] 2003.12.17 사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20] 재야운동가-민주당계 정당 대통합을 위한 탈당[21] 열린우리당 합류를 위한 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