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업적과 능력
1. 개요
삼국지 게임을 30년 넘게 만들어온 일본의 게임회사 코에이는 조조가 '''정치, 행정, 전쟁 모두에 탁월했으며 시가문학에도 통달한 만능의 영웅호걸'''이라 소개했다. 실제 조조는 다재다능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인물 중 하나다.
2. 정치 관련 - 환령[2] 의 문제점을 청산하다
조조가 암군들과 환관들의 집정, 황건적의 난과 동탁의 집권과 이각의 집권 이후로 쇠약했던 정권을 20여 년 동안 안정시켰던 건 큰 공헌이다. 동탁은 환관과 기득권층을 거의 박살내놓았고,[3] 그렇게 박살나 텅 비어버린 관료층을 조조가 채워준 것이다. 조조는 어쨌든 동한 말기 막장이었던 사태를 수습하고, 환령 이래 동한의 암덩어리였던 환관과 외척 집단 일소를 완성하여 광무제가 육성해놓았던 사인층의 염원을 실현한 바 있었다. 재야 여론을 주도하던 사인 식자층은 정치 감각과 뛰어난 통치 능력을 보여준 조조에게 크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조조 역시도 한말의 문제점에 대해 진저리를 치고 있었으니 유학자들과 뜻이 맞았고, 그들을 받아들여 탄탄한 위나라 정부를 꾸리게 된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잘못 생각했던 것은, 조조에게 지식인들이란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했다는 점이었다.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든 것만 봐도 그렇고, 공융이나 예형 같은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들을 탄압해 죽이기도 했다. 특히 공융은 불효자라고 낙인찍어 죽여버린 건 말의 앞뒤가 안 맞는 사례였다. 불효자이거나 인성이 안 좋은 자라도 능력만 있으면 대접하겠다고 해놓고는 저랬으니..... 그냥 자기 자제력이 상당 부분 떨어졌을 뿐이었다. 그런 조조가 세운 나라가 바로 위나라였고, 서진은 위나라를 상당 부분 이어받은 나라였다.[4][5] 서진이 통일할 때까지 한 자리 해먹은 유학자라면 이미 나라가 지식인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고 적응한 경우였고, 적응하지 못하고 떨어져나간 사람들은 그대로 중앙정부와는 인연을 끊어버린다. 이들은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며 현실을 개혁한다는 은자 정신을 가진 것도 아니라서, 그저 현실에서 도피한다는 식으로 아예 깊은 산 속에 틀어박히게 된다.
3. 군사 관련
조조의 능력을 비하할 때 항상 거론되는 것은 다름아닌 통일 왕조 건설에 실패했다는 점이다.[6][7] 후한 말 이후의 시대를 묶어 흔히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하는데, 당연한 것이겠지만 위나라는 중국사에서 통일 왕조로 취급되지 않으며, 다만 진의 전신인만큼 삼국을 대표해 쓰는 것일 뿐. 중국 역사 전체로 눈을 돌려보면 남북조시대 북조 국가들이나 오대십국시대의 5대 왕조들이 차지한 영역이 위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굳이 말하면 남북조 시대에서 조위를 넘어서는 성세를 확실하게 자랑한 국가는 전진과 북주 외엔 없고, 오대십국 시대의 5대 국가들이야 다들 조위를 넘어서는 국세를 자랑하지만 5대 국가들은 말 그대로 중앙 왕조들이기에 사실 조위의 성취가 그렇게까지 깎아내릴만한 것은 못된다. 그러나 조위가 어쨌든 통일에는 실패한 데다가 워낙에 촉한이 국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조위의 통일을 저지한 데는 성공했기에, 조위가 실질적인 통일을 했다거나 후대의 분열기 중앙 왕조들보다 우수했다는 개드립은 결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사 전체를 볼 때 최고의 군사 군주로 꼽히는 것은 서초패왕, 한고제, 광무제, 당태종, 송태조, 홍무제 / 영락제, 강희제 등 당대에 통일 왕조를 건설한 군주다. 이들은 당대에 거의 자력으로 전 국토를 통일하거나 실질적으로 완벽한 통일 왕조를 건설했기 때문에 최고의 평가를 받지만, 조조는 이들과 비슷한 유의 통일 군주가 아니라는 결점 때문에 이들보다 평가가 다소 깎이는 편이다.
단, 조조가 통일 군주가 아니기에 다른 시대의 통일 군주에 비하면 분명코 아래급이긴 하지만 그 군사적 능력만 보면 후한 말기와 위진남북조시대의 군주들을 통틀어 단연 탑클래스의 지휘관 중 하나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일단 이 시대 전체를 통틀어 조조만큼 많은 전투를 경험했고 또 가장 다양한 적과 대적했던 인물은 기껏해야 유비 정도다. 많은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하북을 완전히 제패한 50대 후반까지는 세력에 있어서도 열세이거나 아니면 동시에 많은 적을 대적해야 했기 때문에 물량의 우위를 확보했던 경우도 거의 없다. 비록 패배한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결국 반전의 계기를 잡아내어 전투는 졌지만 전쟁은 끝내 이겨낸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악의 실패였던 적벽대전 조차도 패전 후 대처는 나름 성공적이어서 손권의 북진을 적절히 차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3.1. 상대한 세력
거병 초기부터 왕위에 오른 말년까지 중원을 누비며 싸운 인물인지라 상대한 적들 역시 많다.
- 동탁 : 거병 초창기에 대적한 적이고, 동탁이 장안으로 도주하자 혼자 추격했다가 서영 상대로 복병에 무너지면서 더는 충돌이 없었지만 동탁 사후 정권을 잡은 이각과 곽사로부터 달아난 헌제를 협천자하는 과정에서 이각과 곽사를 몰아냈다.
- 도겸 : 원술과 연계하여 조조를 공격했으나 조조는 원소와 함께 이를 연주에서 격퇴했다. 참고로 이 때만 하더라도 조조는 신생군벌에 불과했고 도겸은 서주에 터를 잡은지 오래된 까닭에 세력에서 도겸이 우위였다!!! 또한 알려진 것과 달리 도겸은 절대 백면서생이 아니었으며 후한 말 많은 반란 진압에서 활약했던 인물이다, 절대 만만한 호구가 아니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연전연승하며 도겸을 밀어부친 조조의 용병술이 뛰어났던 것. 이후 도겸의 부하가 조숭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며 조조는 서주를 유린...하기 시작하나 여포에게 근거지인 연주를 공격당하자 퇴각. 도겸이 사망하며 공손찬 측의 지원군으로 와 있던 유비가 서주목을 승계한다. 이후 서주는 유비, 여포, 조조 등 여러 군벌들의 지배를 거쳐가다 최종적으로는 조조의 손에 떨어진다. 서주대학살 때문에 약체로 보이지만, 저 도겸의 세력이 나중에 유비와 여포로 이어지며 조조에게 어느정도 위협이 되었고 결국 8년이 지난 후에야 서주는 간신히 조조의 세력권에 귀순된다. 말 그대로 도겸의 세력+유비/여포의 세력이 얼마나 조조 입장에서는 골치아팠는지 보여주고 있다.
- 원술 : 원소와 연합하던 시절 조조의 숙적이었다. 초기엔 원소와 자웅을 겨룰 만큼 큰 세력을 가졌다. 원술은 남양에서 북쪽의 공손찬과 연합하며 원소를 견제했고, 원소의 지원을 받던 조조를 공격했으나 역으로 털려 양주까지 밀려난다. 양주에서 재기에 성공하지만 재차 여포와 연합한 조조의 공격을 받아 세력이 크게 약해지며 공중 분해된다. 난세 초반만 하더라도 조조를 따위로 만들어 버릴 만큼 압도적인 세력을 자랑했지만 조조에게 연달아 발리면서 중원의 패권을 내어 주었고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여포와의 동맹 관계라도 잘 관리했으면 그래도 최소한 조조를 견제하는 것은 가능했겠지만...
- 여포 : 멘탈리티의 문제가 있지만 여포 본인의 군재/무예는 원소의 용병으로 싸우면서도 정평이 크게 나 있었다. 조조가 연주에서 자리잡을 때 처음에는 장막의 사주를 받아 치열하게 싸웠다. 사실 이때가 조조에게 있어서 최대의 위기나 다름없다. 동탁 토벌에 집안 재산을 거의 다 써버리고 몇년 동안 황건적들과 싸우다가 겨우 연주에 자리를 잡은건데 그걸 홀라당 여포에게 털린 것이다.[8] 심지어 여포는 조조를 잡아 죽일 수도 있었다. 이후 여포를 쫓아내고 연주의 기반을 완전히 굳혔는데, 여포가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차지하자 공격을 시도해 죽였다. 이 때 여포는 조조의 교묘한 이간계 때문에 이미 싸우기도 전에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을 만큼 고립된 상태였고 결국 전쟁이 시작하자 마자 가지고 있던 힘도 제대로 못 써보고 망했다
- 장수 : 관동에서 지지고 볶던 조조가 사예 방면으로의 진출을 꾀하며 마주쳤다. 상대적으로 약소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유표의 지원과 가후의 활약이 더해져 수 차례 조조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겨주며 선전했다. 그러나 체급차는 극복할 수 없었는지 결국 조조에게 항복한다.
- 원소 : 서로의 숙적이었던 원술과 공손찬이 패망하자 자연스럽게 대립하는 입장이 된다. 원소의 세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어서 한때 조조 본인조차 원소에게 투항할 마음이 생겼을 정도라고 한다. 원소가 먼저 공세를 취했으나 조조가 이를 관도에서 가까스로 막아냈다. 그런데 이 전투 직후 원소의 건강이 악화일로를 걸은 끝에 그대로 사망해버리는 대사건이 터졌고, 원가는 후계자 다툼으로 세력이 분열되어 그 틈을 노린 조조에게 멸망당했다. 이후 조조의 세력은 분열된 원가를 7년에 걸쳐 멸망시키고 북중국 전역을 장악해 명실상부한 최강자가 된다. 원소를 이기는 것이 게임으로 치면 1주차 정엔딩이라면 이후 본격적인 천하 통일을 노리는 건 2주차 진엔딩을 도전하는 플레이라 볼 수 있다
- 유표 : 원래 원소, 조조와 함께 원술에 대항하고 있었으나 원술이 패망하자 적이 되었다. 장수와 유비를 방패삼아 장수, 유비를 내세워 끊임없이 조조를 위협해왔고 조조와 대리전을 벌였으나 장수가 조조에게 투항한 후에는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결국 유표 사후 그의 세력은 조조에게 흡수됐다가 유비, 손권의 반격으로 북형주만 차지하게 된다. 보유하고 있는 병력만 10만에 가까워 실력을 놓고 보면 원소, 조조 다음가는 제 3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방 호족들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고 본인 스스로도 문약했던 까닭에 (단 정략과 통치술에서는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평가해 줄만 하다. 연의에서는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지만 유표는 절대 형주를 쉽게 손에 넣은 인물이 아니었다) 결국 그의 기업을 조조에게 내어주고 만다
- 마초 : 관서의 군웅들 중 한명으로 장안 이서 지역을 완전히 자기 아래로 복속시키려는 조조와 충돌하여 결국 장기전의 유리함을 살린 조조가 승리하여 마초를 비롯한 관중 군웅들의 세력을 뿌리뽑았다. 마초는 조조가 맞 상대 할 당시 강대한 관서 군벌 연합의 수장이었고 맹장 곽원을 격파하고 후일의 일이지만 하후연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으며 조조의 전략을 간파하고 그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다. 결국 제압하긴 했지만 조조도 만단위의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긴것은 조조였다. 폭발적인 저돌력을 자랑한 마초를 상대로 조조의 꼼꼼한 판짜기가 거둔 승리였다
- 장로 : 익주 진출의 교두보로 한중의 토착 세력인 장로를 공격해 복속시켰다.
- 손권 : 자신의 천하 통일 야망을 저지시킨 장본인 중 한명인 애송이. 형주를 너무나도 쉽게 점령하자 그 기세를 몰아 손권을 위협한 건 좋았으나 너무 싸움을 서두른 나머지 애송이 군주가 앞세운 주유와 유비의 활약에 대패하며 물러났다. 적벽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결국 손오의 명장 주유에게 수전에서 대파, 육전에서 유비에게 대파되는 등 조조 본인의 대패다. 하지만 애당초 북쪽 출신 중에서 수전에 능했던 이들은 하북출신이면서 수전에 능했던 관우 이후 서진 시대 두예/왕준이 나올때까지 아무도 안 나왔다. 이후 서로 몇 차례 대치하며 적당히 강화를 맺기도 한다.
- 유비 : 기반과 세력 격차, 상대 전적에 있어 늘 조조에게 밀렸지만 끝까지 조조에 맞서는 걸 포기하지 않으며 대항해 결국 조조의 천하 통일을 저지시키며, 둘의 마지막 격돌인 한중 공방전에서도 조조를 패퇴시켰다. 한중 공방전 승리 후 유비가 한중왕을 칭하자 정말 한 고조가 항우를 무찌른게 재현되는거 아니냐며 천하가 들썩였을 정도다. 실제로 얼마 뒤 관우가 번성을 침공하자 이전과는 다르게 위나라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각지에서 발생했으며, 이후에도 제갈량이나 강유 등이 북벌을 할 때 호응하는 세력이 꽤 있었다. 하지만 유비도 조조가 이간책을 써서 손권을 이용해 관우를 치게 만드니 결국 두 나라는 서로 싸우느라 엄청난 손해를 보았고 결국 유비는 천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서로의 천하 통일을 마지막까지 막은 격이 되었다.
3.2. 위무주손자
손자병법에 주석을 단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손자병법은 기본적으로 모두 조조가 주석을 단 '위무주손자'이다.[9] 그가 손자병법에 한 일은 내용을 고치는 것보다는 당시까지 있었던 일화들과 보충 설명들을 달아놓은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문장만으로도 격조를 높였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달아놓은 주석은 손무라는 걸출한 병법가의 기본 틀과 함께 손자병법을 병법서 이상의 책으로 끌어 올려 주었다.
물론 클라우제비츠나 앙투안 앙리 조미니 마냥 전술 이론에 밝은 사람이 명장취급을 다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조의 경우 행보로 그의 병법 응용을 확실히 보여줬으며[10] 그 경험을 토대로 조조가 주석을 달 수 있었던것이다. 단순 지식만 있었던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걸 오늘날 우리가 봐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저술한 자신의 경험들과 지식을 베이스로 한 조조의 병법에 대한 조예는 무시할 게 못 된다.
반면 조조의 행적이 손자병법의 주요 사상인 총력전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전략가로서의 조조를 그리 높게 보지 않는 경향도 있으나, 국가의 정상적인 군사동원 능력을 전부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을 상정하고 전략을 제시한 손자병법과, 거병 초반엔 친인척과 지인들만으로 이뤄진 작은 기반을 가지고 시작한 군벌이었고 말년까지도 체제 내에 상당한 반대파가 있어서 총동원에는 한계가 있던 조조의 군사적 경험이 합치하긴 힘들 수밖에 없다는 점도 감안은 해야 한다. 조조가 당대 최고의 장군들 중 하나였고 그런 자신의 깨달음을 조리있게 서술할 문필적 재능도 대단했던 걸물이었음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순 없다.
여담으로 손자에 주석을 달면서 보통 병력은 공격측이 수비측의 10배여야 한다지만 그건 군대의 질이 서로 비등한 상태일때이지 수비가 약하고 공격이 강하면 2:1로도 함락시킬 수 있다. 내가 그런식으로 여포를 사로잡았다 자뻑하기도 했다.
3.3. 용인술
조조의 용병술 중 단연 최고의 능력은 군사적 용인술이었다. 군재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걸 지원해 줄 부장이 없으면 그 군재는 사실 있으나 마나다. 심지어는 혼자 다 해치운 것 같은 명장 한신의 경우에도 조참/관영과 같이 뛰어난 장수들이 같이 있었다.
조조의 곁에는 능력 자체는 떨어져도 인격적인 면모와 다양한 개성의 장수들을 통합할 수 있는 지도력을 지니고 있었던 하후돈이 있었고, 두 말하면 입 아픈 용장/맹장인 조인이 있었으며, 신속한 기동전이 주특기였던 하후연, 그리고 그 외에 조조가 그 실력을 알아보고 스카웃 해 적재적소에 배치한 오자양장들을 포함해 수많은 기라성같은 명장들을 모두 아우르며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세력을 잘 유지하면서 확장했다. 특히나 북방민족의 위협[11] 을 전예와 조창을 파견해 박살내버리고 안정시키는 점에 있어서는 용인술이 돋보였다 볼 수도 있는 면모가 있다. 항장 서황/장합/장료 등을 과거의 악연을 깨끗하게 잊고 중용했으며 하급군관~병졸 출신이었던 우금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먹고 잘 써먹은 것을 보면 인재의 장단점을 알아보고 활용하는 재능에서는 유비와 더불어 단연 최고였다고 할 수 있다.
3.4. 힘의 집중과 분산
그리고 조조의 경우 군의 힘의 집중과 분산을 매우 잘 해낸다. 심지어는 패퇴하는 과정에서도, 연주가 털린 상황에서 성 3개를 가지고서 그 성 3곳의 여력을 집중해 초현/산동반도를 토벌하여 세력을 꾸리고 결국 이 세력을 통해서 여포를 연주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하고 심지어는 적벽에서 패퇴했음에도 군의 분산을 통해 완전히 흔들릴 뻔한 세력을 조인을 남군에 남겨 형북을 유지하고, 각지에 장수들을 배치하여 대비케 한다. 형주 공방전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관우를 상대하기 위해 서주의 장패, 회남의 하후돈, 장료, 각주의 자사들 병력까지 모두 끌어들여 관우를 상대했다.
3.5. 북방 민족 정벌
조조는 북방 원정으로 원가에 붙은 오환족을 캐박살내어 그 세를 크게 꺾어버리고 흉노족을 복속시켜 후환을 제거하였다. 조조의 북방정벌이 삼국지연의에서의 비중으로 인하여 원소의 잔당 토벌에 부수된 잡어 사냥쯤으로 치부되지만, 사가들은 조조의 오환토벌이 후한 말 북방민족의 세를 크게 꺾어논 업적이라고 평하면서 '''조조의 오환토벌이 없었더라면 오호십육국 시대가 1세기 더 빨리 도래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하기까지 한다.
그는 건안 20년(216년)에는 남흉노를 5부로 나누어 선우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5부 흉노로 분할 통치하면서 흉노를 사실상 중국에 복속시키고 노예화하였고 흉노는 한인들에게 사회적, 경제적으로 멸시받는 존재가 되었다. 이런 북방 이민족의 대규모 중국 이주는 후일 오호십육국 시대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이런 이민족들 통제 문제는 이완기에 들어선 대제국은 어느 제국이든 겪는 문제였기에 관리에 실패한 서진 정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조조와 조위에게 책임을 돌릴 순 없다.
다만 북방 민족을 막을 요충지였던 하북 지역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실책은 부정할 수 없기는 하다. 조조는 이민족을 철저하게 때려잡았지만, 동시에 원소를 따른 하북 세력과 백성 대다수를 몰락시키거나 억누르는데 힘을 쏟았다. 게다가 이어진 반란과 내전으로 하북 지역의 역량은 계속 약화되었다. 조조가 이후 하북의 업성을 자신의 세력의 수도로 두었지만 조비 시대에 다시 낙양으로 돌아감으로서 이런 행보는 무색해졌다. 물론 조조 본인의 시대에는 조조가 일군 막강한 군사력이 건재했으며 바로 그 이민족들을 아주 철저하게 깨부수었기에 조조 생전, 삼국 시대 그리고 이후 서진 초기까지는 문제가 되진 않았다. 따라서 오호십육국의 원죄를 조조에게 떠 넘기는 것은 좀 과한 부분이 있다.
3.6. 수로의 군사적 운용
후한 말에 들어 전장의 장소가 황하, 회수, 장강 등 큰 하천과 호수까지 전장이 되면서 물을 이용하는 사례도 증가하였다. 아마 그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여포를 토벌했던 하비 전투일 것인데, 이때 조조는 기수, 사수의 물을 끌어와 하비를 수몰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물을 전쟁에서 이용하던 사례는 이런 식의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조조는 수계(水系)를 이용한 병력과 물자의 이동에 대한 중요성을 잘 알았고 이를 가장 잘 사용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가령 204년에 있던 원상과의 전투에서 조조는 기수의 수리시설인 백구白溝를 이용해 군량을 운반했고, 206년에 있던 오환 정벌에서는 주변의 강과 수계를 개척하여 각각 평로거平虜渠와 천주거泉州渠라는 수로를 만들기도 했다. 조조가 북방에서 전쟁을 진행하면서 시행한 수로 개척은 해하海河 수계 형성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조조의 수로 개척은 해하 수계 중에서도 여러 물줄기가 합쳐지는 지점인 천진 일대에 영향을 줬다.
3.7. 친정 중시
조조의 군사 전략에서 특이점은 두가지를 들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개인 친정(親征) 중시이며 다른 하나는 친족 중시다.
조조는 다른 지역을 침공할 때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陣頭指揮)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하북 정벌, 오환 정벌, 형주 정벌, 강동 정벌, 한중 정벌이 모두 조조의 친정 아래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유비가 관우나 장비 등의 자신의 부하로 하여금 다른 지역을 점령하게 하고 관우가 독자적으로 형주 북쪽 지역을 침공한 것과 비교된다. 하지만 조조 자신이 노년에 접어들면서 신체 정신적 역량이 떨어지게 되었는지 친정의 결과도 악화되는데, 형주 정벌을 마지막으로 적벽대전과 한중 공방전이라는 두 결점을 남기면서 영토 확장이 좌절되게 된다.
이는 조조가 한 황실을 등에 업는 '협천자'라는 정치적 입장을 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한 지역을 정복하는 거대한 정벌 계획을 조조 이외의 인물이 나서서 수행하고, 그 인물이 성공을 이룩하게 된다면 조조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약화된다. 조조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군권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으며, 언제나 전쟁에 나서야 하고, 이기지 못하면 정치적 입지가 손상되었다. 이는 조조 스스로도 군권만은 절대 놓을 수 없다고 천명한 것에서 드러난다. 후한과 공존하는 막부의 우두머리라는 입장상, '조조의 대안'이 될 만한 장수가 나타나면 그는 후한 조정을 등에 업고 또 다른 '협천자'를 수행할 수 있었으므로 이러한 상황이 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아야 했다. 따라서 노년의 나이에도 친정을 하고, 항상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자 하였다.
사실 이는 통일 왕조 군주에게서도 자주 나타나는 모습이다. 당 태종, 송 태조, 홍무제, 영락제, 숭덕제 등등 병법에 자신있는 군주들 (개국한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더더욱)은 본인이 직접 사령관이 되어 출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조조뿐만 아니라 유비, 손씨 가문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모습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조조는 중국사 통일 군주들과 달리 자신에 반대하는 군웅인 유비와 손권을 끝내 제압하지 못하여 천하를 석권하지 못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3.8. 친족 중시
조조는 군사 분야에서는 조씨, 하후씨 친족을 매우 중시했다. 항장이나 이성의 숙장들을 대우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친족 장수들을 우위에 놓고 그들로 하여금 항장들을 감독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역시 친족을 전혀 데리고 있지 않았으면서 관우, 장비 같은 장수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그들을 높이 대우한 유비와의 차이점. 그러나 이 역시 많은 왕조에서 드러나는 특징이라 조조만의 특징으로 보긴 어렵다.
문제는 조씨, 하후씨 일족에는 그 지위에 걸맞은 군사적 능력을 가진 인물들[12] 도 많았지만, 다소 부족한 인물도 있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봐도 정사에서 그 지위에 걸맞은 수준의 '군공'은 찾기 어려운 조홍과 하후돈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비교적 명장으로 꼽히는 하후연 역시 한중 공방전에서 패배하여 사망한 직후 조조 자신이 하후연의 사령관으로서의 역량 부족을 한탄한 기록이 남아 있다.[13]
이런 문제점이 조조의 군사 행동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가깝기는 하다. 조조는 상당히 자주 내부 반란에 시달렸는데 서주 공방전 와중에는 여포를 앞세운 진궁, 장막이 일으킨 본거지 연주에서의 반란으로 거의 죽을 뻔 했고, 협천자 이후에는 후한 황제와의 마찰로 인해 여러 차례의 반란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다. 동승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후한 내에서의 반 조조 반란은 조조가 죽을 때까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가 정권을 유지하려면, 군권을 꽉 잡기 위하여 친족을 중용하는 정실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9. 초기의 과감성과 말년의 안이함
조조는 일견 무리하게 보일 정도로 굉장히 과감하고 공세지향적인 경우가 많았으며, 후일 조조의 주력부대 중 하나가 되는 청주병들을 거둘때나 관도대전, 오환 정벌 등에서는 이러한 과감한 공격이 성공을 거두었다. 관도대전에서 보여준 조조군 전체의 행보를 보면 틈이 보이면 그 쪽으로 과감히 기동해 군세를 패퇴시켜 물러나게 하는 기동을 보여주고 있다. 관도대전의 승패를 가른 오소 전투 역시 기동전이다. 이후 조조와 유사한 기동전술을 보인 사례는 사마의나 강유 정도다. 하지만 이 때문에 위기를 자주 겪기도 했는데 동탁을 추적하다가 서영에게 대패를 당해서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이 그 사례다. 역시 과감하게 나섰던 적벽대전에서는 보급 문제, 질병 문제가 겹치면서 무너지게 된다. 기동전 자체는 양날의 검이라서 먹히면 좋은데 안먹히면 망한다. 그 사례가 조조 특유의 기동이 전혀 안 먹히다 시피한 한중공방전과 적벽에서 막히고 오림에서 패퇴하는 적벽대전이다.
그러나 원소를 쓰러뜨린 이후부터는 과감함보다 오만함과 안이함이 눈에 띄게 되며, 스스로가 오만해지면서 대실패를 거두게 된 경우도 많았다. 원가의 잔당을 토벌할 때만 해도 원담과 원상의 사이를 가르는 이간계를 쓰면서 틈을 기다렸던 싸웠던 조조였지만 이후에는 조금 달라진다. 적벽대전에서는 손권에게 허세를 부리기도 했으며, 패배 이후 형주를 떠날때에도 병사를 충분히 남겨놓지 않고 떠나면서도 유비가 오면 어쩌냐는 유파의 말에 '''그럼 내가 친히 육군'''[14] 을 몰고 와서 막겠다는 말을 했지만 실상은 조인에게 형주를 맡긴채 방치했고, 연합군에게 형주의 대부분을 내어주고 말았다. 오와의 지속적인 싸움에서도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다. 관동 군벌과의 싸움에서는 마초와 한수 사이의 이간계를 다시 펼쳤고 한중까지 정벌했지만, 그 과정에서 만 단위 손실을 입어야 했으며, 한중 정벌 이후에는 다시 다소 안이한 판단과 움직임을 보여주다가 유비에게 한중을 내어주고 관우의 번성 공방전 때는 관우 하나 막는다고 회남 전선을 통째로 비워 대놓고 손권에게 틈을 노출시키는 등, 말년의 행보는 잦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오만하고 안이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조조에게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이었던 원가의 세력을 완전히 말살하고, 상당히 강력했던 유표의 잔당마저 흡수한 뒤라서, 남아있는 손권과 유비의 세력은 별거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해이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사실 조조는 일생동안 분발하기도 했지만 행운도 많이 따라왔기에 인생 말년쯤 되면 이상한 착각에 빠져서 해이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5] 특히 전성기의 조조와 말년의 조조를 비교하면 도저히 같은 사람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는 게 특징.[16][17]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평가도 있는게, 조조의 최중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곽가가 원가 소탕 중에 사망하는 것 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조조의 성공을 이끌어 왔던 책사진이 하나 둘 퇴장하면서 조조 본인의 한계가 노출되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다. 확실히 초중반의 조조와 적벽 이후의 조조는 크게 달라졌는데 적벽 전에는 순욱부터 시작해 희지재를 비롯하여 순유, 정욱, 곽가 등의 인력 다단계를 활용해 인력 풀을 충분하게 모아왔다면 적벽 이후에는 본인의 늙음과 동시에 참모진영이 소모되어 고착화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후 활용되는 S급 참모라면 사마의 정도가 고작인데 적벽 이후에는 역량의 발전보다는 안정화가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4. 제도 관련
장쭤야오의 조조평전을 보면 군벌들 간의 어지러운 싸움을 종식시키고 오환과 선비를 정복하여 통치체제를 안정시켰으며 호족들에 의한 토지 독점을 견제하고 부역을 덜어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농지세와 호구세를 병합한 호조제를 도입하여 현대 중국정부 수립 전까지 각 왕조가 실시한 조세제도의 근간이 되었고 수리사업을 활성화하고 소금과 철의 전매를 관영화하여 생산력 증대 및 국고의 충실을 기하였으며 사회질서를 바로 세우고 올바른 행정 기풍을 진작시켰다고 한다. 중국 문학사상 큰 획을 그은 건안문학을 발전시킨 공로는 덤이 되겠고.
그러나 조조의 호조제는 조위가 한나라 말기에 붕괴된 화페경제의 재건에 실패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기존 화폐체제를 살리지 못하니 이를 화폐가 아닌 현물을 바치는 것으로 대신한 것이고 그마저 각 인구수를 정확하게 계측하기 어려워 단순하게 한 집 단위로 묶어서 세금을 매겼다. 이는 당시 조조의 정책이 장기적이지 않고 그의 행정력이 그리 뛰어나지 못했음을 알수 있는 대목으로 당장에는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나 조조사후에는 큰 효과를 보지 못한 전란의 시기이기에 효과를 본것이지 장기적인 정책은 아니였다.
게다가 조조가 행한 둔전제 역시 우선 민둔제는 당시 각종 유민과 사로잡은 민간인들을 강제로 이주 시켜 가둬 놓고 강압적으로 시행 하였고 그들의 처우는 호적에도 포함시키지 않고 일반 양민보다 못한 처우를 받았다. 더욱이 수취율마저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둔전제 또한 조조가 살아 있을 당시엔 자신의 권위로 이를 억눌렀지만 이를 제도화 하여 폐단을 막을 수단 역시 마련해두지 않은 당장의 눈앞의 고난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행하여 조조사후엔 귀족들이 둔전을 사유화하는 문제가 불거지기도 하였다.
그러니 호족들에 의한 토지독점을 견제하고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는것은 너무 조조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해석하는게 아닌가보여진다. 다만 원호법의 시행으로 군인의 복지를 챙긴점은 그 당시에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소금과 철의 전매 역시 촉한의 유비와 제갈량 역시 시행하였으며 제갈량은 철과 소금의 생산량과 질을 향상시켜 항구적 이득이 되어 후대에까지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또 오나라에서는 해염의 생산이 성행하고 철, 구리가 난다는 기록이 있다. 한 마디로 조조만의 업적은 아니라는것.
따라서 조조의 내정 정치의 방향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법가 사상가인 신불해와 상앙에 비견된 평가처럼 사회 전체를 '극도로 긴장되고 일사불란한 계엄령 상태' 로 두었고, 위촉오 삼국의 군주들 중 가장 효율적으로 내정 제도를 굴렸지만[18] , 제도를 시행하며 나올 수 있는 폐단은 본인의 '''임기응변'''으로 대응했고, '''제도의 폐단을 막는 제도화'''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이 점에서 보면 상앙 같은 이들보다도 못하다. 적어도 상앙의 개혁의 결과물은 진효공부터 진이 멸망할 때까지 시행되었으며 심지어 상앙의 개혁으로 진나라는 전국칠웅 최강국이 되어 끝내 천하통일을 이루게 되었으며 이미 상앙이 활동하던 진효공 시절에만 해도 진나라는 좀 꺾이긴 했지만 나름 전성기를 구가하던 위나라를 캐관광을 보낼 정도로 강성했다. 이에 비해 조조는 어쩄든 자신의 정책으로 하북을 먹고 다지는데는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유비나 손권의 세력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으며 본인 생전에는 적벽대전에서 지고 본인 사후에는 제갈량의 북벌로 인한 끊임없는 공격을 받고 심지어 본인 사후 20여년 후인 낙곡대전에서도 촉나라에게 캐관광을 당하는 등 신통치 못했다. 결국 적어도 본인이 하북을 먹고 다지는 데만큼은 본인의 정책이 실효가 있었겠지만 천하를 도모하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그런 조조의 정치는 효율적이었지만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몹시도 위태로운''' 것이었고, 조조는 그 위태로움의 경계선을 상시 걸어가며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이를 때웠다. 그러나 조조 본인이 사망하고, 군대건 세금 문제건 인재 선발이건 모든 부분에서 규모가 커지게 되면서 군주 개개인만의 능력이나 임기응변만으로는 한계가 있던 위나라 말기 ~ 서진 정권 하에서는 조조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는 정책들의 폐단이 쌓이고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19] 어쨌거나 조조 본인의 생전엔 효율적인 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기에 후대에서 제대로 시정하지 못한 책임까지 조조에게 묻는 것은 무리다.
또한 조조는 전략적 이유로 백성을 강제 이주시키는 행위를 자주 했고, 이로 인해 민초 사이에서는 불평불만이 있었다.[20] 먹고 살게는 해주지만 그렇다고 마음과 몸이 편하게는 못 해주기 때문에 민담 등에서 이미 악역이 된 듯하다. 국경 지대에 있는 농민들 강제 이주는 예사였으며, 민둔제의 경우는 징발된 농민으로 하여금 황무지를 개간시키는 것이다. 백성의 딸이나 심지어 유부녀(!)까지 빼앗아서 병사들의 아내로 던져주는 것은 덤.[21] 물론 조조가 납득이 가는 이유나 효율성 없이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강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동탁이나 이각, 곽사 처럼 권력을 즐길 줄만 알지 제대로 쓸 줄 모르는 폭군과는 다른 평가를 받지만, 결국 후대에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악명을 떨치게 된다.
4.1. 둔전제
조조의 정치 능력의 진수는 임기응변과 현실성, 유연성, 그리고 빠르고 과감한 결단력에 있다. 동시에 일반 민중들의 피해에는 무심한 경향이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둔전법(屯田法)으로서 전한 시절부터 이미 존재해왔던 법을 모개 등이 새로 정비한 것이다. 종전의 둔전은 변방 등에 신 경작지를 개척하는 것이었으며 주로 병사들의 군량 자급자족을 위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곤 했다. 반면에 조조는 민둔(民屯)이란 것을 두어 수도인 허도 근처에 배치해 전란으로 황폐해진 땅의 생산량을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둔전의 확대 과정에서 강제이주와 엄벌같은 강압적인 방식도 동원하였기 때문에 민란이 발생하거나 도주하는 경우도 일어났다. 또한 둔전민은 일반 농민에 비해 천대받았다.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지만, 세율은 수확의 50%, 관의 소를 빌릴 경우에는 60%라는 가혹한 것이었다. 기반은 마련해주는 대신 먹고 사는 정도만 보장해주는 제도였기에 유랑민이라면 모를까, 전란에서 비껴나있는 민중들에게는 오히려 더 손해인 제도였다. '''일부 학자들은 부패만 없으면 이게 더 낫다는 주장을 하지만, 한나라의 기존 세제 쪽이 오히려 부패가 없으면 당연히 백성들의 부담이 훨씬 덜하다. 오히려 둔전제가 부패할시 백성들에게 피해가 덜가는거지 단순하게 따져서 부패로 수확의 30% 정도를 추가로 빼앗기더라도 둔전제보다는 기존 세제가 백성들 손에 남는 것이 더 많다. 게다가 둔전제가 특별히 부패를 저지르기 어려운 장치가 되어있는 것도 아니다.''' 조조 대에는 이런 것을 임기응변으로 회피했으나 위나라 말기 조방 대에 접어들어서는 조상 일파가 사유화하면서 각종 부정부패로 이외의 수탈이 늘어나기에 이른다. 결국 둔전제는 위나라 마지막 황제 조환대에 폐지된다. 이 여파는 진대에도 남아서 이때에 이르면 부세가 이미 농민 소득의 절반 가량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토지에서 거둔 농산물의 25%만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한나라 시절에 부세가 1/15였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둔전제는 단기적으로 조조의 세력을 급성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확실하다. 조조는 임기응변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고히 하고 그에따른 이득을 최대한 뽑아네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위나라의 전체적으로 봤을때 우위를 지탱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 조조의 전략적 우위가 확고해진 것은 하북을 평정한 이후이며, 그 이전에는 원소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는 물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도대전 당시에는 심각한 물자 부족을 겪었다는 기록도 확고히 존재한다. 또한 단지 기록에 자세히 남지 않았을 뿐, 원소를 비롯한 많은 군웅들도둔전제 못지 않은 나름의 내정 정책을 펼쳐서 경제력 향상을 꾀했다는 것은 기록이 많이 남은 유비와 손권의 예로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과거에는 둔전제가 경제적 체질을 강화했다는 식의 과대평가가 있었으나 이는 논란이 있다. 둔전제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둔전은 '''고작 40년만'''에 폐지된다. 심지어 조조 생전에도 이미 백성들이 둔전에서 일하는 것을 거부하는 등 반발이 극심했다. 천년동안 중국의 토지 제도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 역시 잘못된 주장이다. 북위/수/당의 균전제, 조용조는 둔전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없으며, 균전제는 기본적으로 나라의 모든 땅을 공유지(公有地)로 삼고 백성에게 고르게 경작지를 나누어주고 세금을 받아들이는 법이다. 사실상 자신의 땅이 없는 강제노동에 가까운 둔전제와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당장 서진만 봐도 등장으로 조위의 둔전제가 264년 폐지되면서 경작은 토지없는 강제 노동이 아니라 일반민중이 담당하게 되었으며, 그 수입으로 군비의 대부분을 감당했다. 즉, 서진은 조위의 방식을 버리고 국가에서 양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해주고 토지세를 징수하는 국가 수전제도를 운영하였는데 이는 5세기 북위에서 나타나는 균전제와 같은 방식인 것이다. 이런 제대는 송나라 때부터 더 이상 시행되지 않고, 이른바 전제불립(田制不立)이라고 하여 국가에서 토지의 소유권에 대해서는 방임하면서 기존에 토지세에 더해서 매매의 과정에서도 세금을 징수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였다.
또, 당 말기에는 양세법이라는 초대형 세제 개혁이 있었다. 고려의 토지 제도 확립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도 지나친 과대 평가다. 고려에서 운영한 둔전은 전형적인 군사 둔전으로, 이는 조조 이전 시대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둔전제의 영향력은 오호십육국 시대 일부에만 영향을 끼치는 정도로 끝난다. 즉, 조조의 둔전제는 전란기에나 먹힐만한 임시방편적인 제도였을 뿐이다. '''문제는 후대에 황제들이 임시방편으로 쓰던 방식을 그대로 써먹으려 했던게 가장 큰 문제였다'''
4.1.1. 관련 문서
4.2. 호조법
조조는 200년 전후로 호조법을 시행한다. 그 전까지 중국은 개별 단위로 인두세를 부과해 한 명마다 세금을 적용했으나, 조조는 개별 수취에서 호(戶)단위의 가족 집단 하나로 치환해 세금을 부과해서 과세 부담을 줄였다. 전쟁을 치르며 내지(內地)의 양곡으로 외지(外地)의 군사와 국민을 부양하는 데는 조조가 전쟁으로 피폐해진 중원에 수리 사업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한 공헌도 컸다.
호 단위로 부과하는 전통도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다만 이건 족징이나 인징 등이 가미되어서 좋다고 볼 수만은 없지만(...). 어쨌든 이러한 제도의 시행은 분명히 유의미한 것이었으나, 제도의 관리 측면까지 세세하게 법령화되어 있지는 못 했다. 제도 자체를 관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조 개인의 역량에 의존했다고 볼 수 있으며, 호족 문제와 더불어서 보았을때 엄청난 세제 개혁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4.3. 구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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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유재시거, 구현령을 내려서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시행한 것은 널리 알려 있다. '불인불효' 해도 능력만 있으면 뽑겠다는, 도덕성과 상관없이 능력만 있다면, '덕행과는 상관없이 능력으로 인재를 뽑겠다.'라는 선언은 당시로써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한 시절에는 관직을 뽑는 절차를 "효렴"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물의 덕행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선발했었기 때문이다. 뭐, 사실 그 덕행이란 게 결국, 사대 호족 내에서 친목/인맥빨로 나눠 먹기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지만. 조조를 높이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구현령을 '유교 도덕을 뛰어넘은 능력 위주의 선발'이라고까지 하는 등의 칭찬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실 공직자를 등용하는데 있어 장래를 생각한다면 능력과 도덕성은 떨어뜨릴수 있는게 아니다. 공직자가 도덕적이지 않은데 능력만 있다면 오히려 더 해로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유재시거가 애초에 거기서 말하고 싶은 것이 진짜 도덕성과 능력인지도 의문이다. 인재의 명성과 도덕성이라는 건 기존의 관리들이나 지방 호족들에게 얼마나 알려졌고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라고도 할 수 있다. 조조가 유재시거를 주장한것은 이제부터 관료 등용을 추천에 의존하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조조 자기 의중대로 하려는 시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결국 구현령은 실제로는 이루어진 정책이라고는 볼 수 없으므로 이 의도가 성공했다고 볼 순 없다. 또한 구현령은 실질보다는 그 의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는 어떤 시대에나 그렇듯이 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삼국시대에도 재능보다 덕이 부족한 인재가 더 널렸고, 바보가 아닌 이상은 '유력가의 추천'을 받는 인재가 발탁되는 것이 당연했으며, 조조마저도 그러한 시스템의 한계에서 벗어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이렇게 불인불효도 상관없다면서 구현령 내려놓고 공융을 불효죄(...)로 죽인게 조조다.
그리고 조조의 용인술에서 항상 나오는 말이 구현령을 내세워 '실력에 따라 인재를 중용하다'인데. 말 자체도 모호하거니와 삼국시대에서 실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안 한 군주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유비가 그러했고 원소가 그러했으며 손책이 그러했고 손권도 초반 한정 그러했다. 동시대 군주인 유비와 손권이 인재 등용에 있어서 조조 이상의 파격적인 인선을 보인 사례는 분명히 있었다. 과연 조조의 인재등용 방식이 타 세력과 뚜렷한 차별점을 줄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가?[22]
먼저 유비의 경우, 한중왕 즉위 당시 최요충지 한중 태수를 자신의 최측근이자 이미 전중국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던 만인지적 장비를 제끼고 일반 부곡 출신의, 당시엔 상대적으로 무명에 가까웠던 위연을 중용해 맡겼다. 또 자신에게 전혀 충성하지 않았던 유파를 끝까지 붙잡아 그 능력만은 요긴하게 활용했다. 당장 친인척 없이 밑바닥 인생을 살았었던 서서가 유비에게 중용된 것만 봐도 그렇고, 그 덕분에 제갈량을 얻을 수 있었는데다가 유비 자체도 밑바닥에서부터 관우, 장비, 간옹 정도만 데리고 기업을 시작했다.
또 손권 같은 경우는 어려서부터 전장을 전전하느라 학식을 쌓지 못 해 상소를 올릴 때 글조차 쓰지 못 하고 말로 대신해야 했던 무지렁이 무부에 불과했던 여몽이 배움이 부족할 뿐 머리 자체는 엄청나게 좋다는 것을 간파하여 직접 호학을 권하며 지용겸장으로 성장시켜 활약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능력을 제외하고는 생양아치에 불과한 반장을 도덕성을 묻지 않고 중용해 그 능력만큼은 잘 활용했다.
또한 조조의 호적수였던 원소도 흑산적과 이민족인 오환족까지 포섭해 자기 세력으로 만들었다.
결국 위의 현실 정치에서 구현령은 실질이 수반되지 않은 선언에 불과하였다. 어차피 관리 선발 기준은 한 시대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으며, 후대의 과거 제도나 시험 선발 같은 체제 정비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선포되었음에도 구현령이 현실 정치에 미친 적은 편이다. 사실 조조 휘하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보면 어디 유명한 가문의 누구라는 경우가 꽤 많으며 인물을 추천하여 등용한 인물이 지인을 추천하여 등용시키는 비제도적 등용 체계였다.
그나마 조조 생전에는 창업 군주만 가질 수 있는 강력한 전권과 실질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난세의 현실 때문에 비교적 낮은 신분 출신의 인재나, 예법에 크게 얽매이지 않은 인재들이 적지 않아 광폭한 인재풀을 구성했다. 그러나 이들이 '공신'의 지위를 얻으면서 점차 인재풀이 고착화 되는 과정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듯 조조가 만든 시스템에도 허점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조위 말에 호족세력이 발호한 것은 종친을 배제하는 대신 호족들로 땜빵한 조비와 조예의 책임이 가장 크겠지만 조비가 황제를 칭할 때 호족들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던 게 과연 우연일까. 그것보단 조비가 호족에게 기댈수 밖에 없도록 조장한 조조의 책임도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조식과의 후계자 경쟁에서든 호족세력의 확장에서든 간에.
결국 조조 사후의 조비 시대에 이미 기존의 호족 집단에서 공신 계층을 이루면서 성장한 문벌 귀족들이 고위 벼슬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위나라의 성립 이후에는 더욱 더 명문가 출신이 고위직을 독점하게 되고, 예외적인 사례는 등애 정도만 남게 된다. 이런 풍조는 위진남북조시대 중국 정치계를 대표하는 귀족 계급이 형성되는 흐름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지나치게 강력해진 귀족 계급 때문에 오히려 상대적으로 '문벌'이라는 측면에서는 그 계통부터 청류와는 거리가 멀어 미묘한 측면이 있었던 조씨의 세력은 흔들리게 된다. 조예 이후의 조상 정권에서는 조씨, 하후씨와 인척들이 모여서 정권을 형성하고 귀족들과 대항하게 되지만, 결국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사마씨에게 무너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마소를 따라 위를 뒤집어엎은 자들은 순욱, 종요, 신비, 화흠, 왕랑, 가규 등의 후손이었다.[23]
허나, 아무리 능력있는 자만 살아남는 난세의 시기이고, 실효가 있었다는데 의문을 제기하곤 하지만, '''공표'''했다는 사실 만으로 큰 상징성이 있다. 자기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그랬다지만, 어쨌건 조조는 많은 항장들과 가후 사례와 같이 과거를 신경쓰지 않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한 황실이 기울때까지 자기 세력만 불렸던 청류파를 크게 견제하였다.
4.4. 원호법
조조는 관도대전 그리고 적벽대전과 큰 싸움이 끝났을 때마다 영을 내려 싸움에서 죽은 장병들에게 자손이 없으면 친척으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였다. 또한 조조는 그 가족에게 농사지을 땅을 나누어 주고 밭갈이 소를 주었다. 나아가 각 고을에는 학교와 선생을 두어서 죽은 장병들의 자식들을 교육시켰고 장병들을 위해 묘당을 지어 제사가 이어지게 도왔다. 이렇듯 조조는 살림이 궁핍한 이들을 위로하고 구제할 것을 명하는 체계적인 원호법을 사실상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5. 인재 관련
능력이 있는 인재에 대한 욕심이 대단해서 자신과 악연이 있었던 인물이라도 과감하게 기용하는 면이 있었다. 예시는 다음과 같다.
- 진림 : 진림은 조조의 3대 조상까지 싸잡아 욕하는 글을 썼는데도 살아남아 순조롭게 출세한다. 일단 시위를 떠나면 화살은 날아갈 수밖에 없다며 대답하자, 조조는 자신을 위한 화살이 되라며 설득하고 진림은 그 뒤부터 조조의 문관이 된다. [24]
- 위충#s-3 : 장막이 연주를 침공하자 위충은 도망가버려서 그를 신뢰하고 있던 조조는 분노한다. 그러나 위충을 다시 사로잡았을 때 너의 재능을 아낄 뿐이라며 다시 기용했다.
- 장수, 가후 : 이들에 의해 친족들이 죽었음에도 등용했다.[25] 특히 가후는 이후 조조가 후사 문제를 문의할 만큼 총애받는 책사가 된다.
- 유웅명 : 마초에게서 조조에게 도망왔다. 그러나 다시 조조를 버리고 장로에게 도망갔다. 장로가 격파되자 유웅명은 조조에게 항복하는데 조조는 그를 용서하고 관직에 복직시켰다.
- 필심 : 필심은 연주 시절 조조에게 등용되었다. 장막, 여포가 연주에서 모반을 일으켰을 때 필심의 가족을 인질로 잡자 조조는 필심을 장막에게 보내준다. 필심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조가 장막, 여포를 격파하고 다시 필심을 사로잡았는데, 조조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어찌 자기 임금에게 충성하지 않겠는가? 그는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 라며 필심을 다시 등용했다.
- - : 여포에게 서주에서 쫒겨난 후 조조에게 갔을 때 조조가 자신과 동등한 군벌로 대응하며 좌장군 벼슬까지 줬지만 유비는 조조 밑에 있을 생각이 없었고 조조의 유비 끌어들이기는 결국 실패했다.
반면에 자기 휘하에서 오래 일하더라도 비위에 거슬리는 인물들에게는 냉혹한 일면이 있었다. 예시는 다음과 같다.
- 양수 : 연의에서는 그 유명한 계륵 에피소드 이후 처형시킨다. 정사에서는 몇 달 뒤에 죽이지만. 어쨌든 양수가 나름 재능은 있었지만 조조에게 밉보여서 죽은 건 동일하다.[27]
- 공융 : 유재시거 내세우면서 불효자라고 죽였다.
- 최염 : 최염이 감옥에서도 의연한 태도를 보이자 '이런 건방진 놈을 봤나?'하고 자결시켰다. 심지어 최염은 조조와는 사사롭게는 사돈관계였다.
- 최씨 : 최염의 조카딸. 문제는 조조의 아들인 조식의 아내, 즉 며느리인데도 죽였다(!).
- 예형 : 예형은 명성 때문에 죽이기 껄끄럽자 유표#s-1에게 보냈다. 물론 유표도 죽이기 껄끄러워 황조에게 보냈고 단순한 황조에게 막말을 해 황조가 단칼에 죽였다.
- 허유 : 자신과 친분이 있었고, 관도대전에서 큰 공을 세웠던 허유#s-1도 죽였다. 단 허유같은 경우엔 본인의 잘못도 크다.
- 누규
- 주불의
- 순욱 : 조조가 구석을 받는 것을 순욱이 반대하자, 그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한 번은 순욱을 전장으로 끌고 가서 여러 구실을 붙여 죽이려 했는데 순욱이 이를 알고 병을 핑계로 집에 있자 이제 그대에게 내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빈 도시락통을 보냈다. 이에 순욱은 그 뜻을 깨닫고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 모개 : 최염의 동료였던 모개 또한 밀고로 인해 체포되었으나 다른 동료들의 변호로 관직을 빼앗기고 쫓겨났다. 이후 모개는 병을 얻어 죽게 된다.
- □희 :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는 총애하는 희(姬, 첩)가 있어 조조가 낮잠 자는 것을 늘 수종했는데, 조조가 베개를 베고 누우며 조금 이따가 자신을 깨우라고 말했다. 희(姬)는 조조가 편안히 잠든 것을 보고 깨우지 않았는데, 조조가 스스로 잠이 깬 뒤 그녀를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 변양
- 환엽
- 원충
위서 하기전을 보면 위나라의 군신관계의 분위기가 대단히 억압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기사가 있다. 여기서 연속이란 말단 관료, 소속된 관료를 뜻한다. 말단 관료를 처벌한 일은 대수롭지 않을수도 있지만 위나라에서는 조조가 구현령을 발표한 이후로 속관도 조조에게 직접 상소를 올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하기, 최림, 최염 등 명문 호족들도 처음에는 속관으로 시작했다. 연속이 비록 직급은 낮지만 명문 일족의 귀족들도 임명되는데, 조조는 그들을 모두 몽둥이로 다스렸던 것이다.태조는 성격이 엄했으므로, 연속(掾屬)들은 공무에 관한 일로 왕왕 곤장을 맞기도 했다. 하기는 항상 독약을 가지고 다니며 죽어도 치욕은 받지않을 것을 맹서하였기 때문에 시종 벌을 받지 않았다.
위서 하기전
순욱의 간언을 듣고 헌제를 맞이한 조조였고, 원소는 헌제의 정통성을 거부하는 입장이었지만, 관도대전 직전까지 조조는 관료들의 충성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원소와 뒷거래에 나서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또 위풍은 조조가 죽기 1년 전에 반역을 도모했는데 이 반역 사건은 기존의 그것과는 다르게 굉장한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위나라 고관의 자제들이 위풍과 함께 반역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왕찬, 장수, 송충, 유이의 자식들이 위풍과 뜻을 같이 했으며 결국 적발되어 어떤 집안은 대가 끊기고 어떤 집안은 친척이 대를 잇는다. 조조가 왕이 되고도, 죽기 1년 전까지도 위나라를 엎으려는 시도가 귀족 자제들 사이에 있었을 정도로 조조와 신하들의 연결 고리는 우리가 아는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29]
몇몇 동양의 위정자들은 조조의 통치력을 고평가했지만, 그 실체는 다분히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옛 사대부들이나 민중들이 조조를 인간적으로 싫어했던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위진정통론 시각으로 편찬된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조차 최염이 조조에게 살해당한 것은 매우 억울한 일이라고 했을 정도다.
6. 신체 관련
6.1. 무예
개인적 무예와 용력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맨손으로 큰 개를 때려잡았다는 기록도 있고, 조조가 직접 칼을 썼다는 기록도 몇 개 존재한다. 보통 삼국지에서 무력으로 유명한 군주라고 하면, 압도적으로 여포와 손책, 손견 정도가 나오고, 손권이나 조조한테서 의외의 무예 기록들이 나오곤 한다. 그 다음으로 유비 패왕설로 유명해진 유비가 나오는데 사실 이건 반쯤 개그설이고....
조조 역시 만만치 않은 무예를 자랑했다. 물론 완력이나 싸움 실력이 없어도 큰 문제가 없는 현대와 다르게 당시에는 시대상이 시대상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무예와 완력은 기본 소양인 검 감안해야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기록이 꽤나 비범하다.
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 조조가 십상시 중 하나로 유명한 장양의 집에 들어갔다가 걸리는 상황이 터진다. 정사에서는 그 이유가 나오지 않지만 조조의 빽이 환관계의 전설이라고 칭해지는 조등이라[30] 얌전히 잡혔어도 별 일은 없었겠고 아마 그래서 더 함부로 못 건드렸을 가능성도 크지만, 직접적으로 무재가 남달라서 그랬다는 언급도 있다.태조가 일찍이 중상시 장양의 집에 몰래 들어갔다가 장양에게 발각되었다. 그러자 뜰에서 수극을 휘두르다 담을 넘어 달아났다. 무재가 남들보다 뛰어나니 능히 (그를) 해칠 수 없었다.
이동잡어
반동탁연합 때, 조조는 답답하게 진격을 멈춘 다른 제후들을 놔두고 진격했다가 하필이면 동탁군 최고의 명장 중 하나인 서영에게 걸려 패배를 당한다. 병력이 상당히 증발한터라 조조는 양주자사 진온의 도움으로 서주의 단양병[31] 병력 4천을 모으는데, 돌아오는 길에 반란이 터졌다. 이 기록은 그때의 일로, 밤중에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조조가 몸소 수십 명을 베어가며 위기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물론 진영에 조홍 같은 쟁쟁한 이들도 함께 있었기에 조조의 '용맹'으로 이긴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대단한 건 변함없다.군사들이 모반하여 밤중에 태조의 장막을 불태우자 태조가 손수 검으로 수십 명을 죽였고 나머지가 모두 패하여 흩어지자 진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모반하지 않은 자는 5백 여 명이었다.
위서
조조는 궁술 실력도 뛰어났다. 삼국 제일의 명궁 이런 수준은 아니지만, 하루에 꿩 63마리 사냥이면 대단한것이다. 물론 사냥 관련 기록에서는 맨 손으로 맹수를 쳐내는 손권이 있어서 빛이 바래는 감이 있다.재력(才力)이 남보다 뛰어나 손수 활을 쏘아 나는 새를 맞추고 맹수를 사냥했으니 일찍이 남피에서 꿩을 사냥해 하루에 63마리를 잡은 적도 있다.
위서
위에서 나오듯 전장에서 살다시피 하면서도 크게 아팠던 적이 없고,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나 죽음의 위기에서도 기어이 살아 돌아왔으니 무예가 수준급이었던 건 분명하다.
6.2. 건강
평생 전장을 돌아다니며 격무 중에 크게 아프거나 잔병치레한 기록이 없다. 후술할 조조닭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몸에 좋은 음식을 골라 챙겨먹으며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한 모양이다.
평생동안 지병인 편두통에 고생하기도 하는 등 마냥 건강하기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32][33] 조조의 꼼꼼하고 사려깊은 성격과 그가 관리해야 했던 넓은 영지와 복잡한 시대상 등을 보면, 골치가 안아플 수 없었다. 그 시대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고 의학 수준도 매우 떨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60대 중후반까지 살았던 조조는 고대인으로서 상당히 장수했다고 볼 수 있다.
혹은 실제로 의학적 지병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양성 뇌종양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뇌종양의 증상은 심한 두풍[34] , 성격장애 등이 있는데 조조의 인성을 생각해 보면(...)
밑에 가족 관계에 나와있지만 요절한 자식들부터 60대에 얻은 늦둥이까지 포함해 수많은 자식들이 있었던 걸 보면 건강 관리에 굉장히 신경을 썼던 모양이다.
그런데 당시 위나라의 고위급 장수들이나 재상들은 60대~70대는 물론이고 80대, 심지어 90세 이상(...)까지 산 것으로 추측되는 인물들도 꽤 발견되는 터라 당대 기준으로 충분히 살만큼 산 조조조차 단명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6.3. 외양
정사에서는 이상하게도 조조의 외모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고, 야사에서는 조조가 작고 왜소했다는 식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조조의 풍채가 훌륭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보통 창업 군주를 묘사할 때 외양을 실제보다 높게 기술해주는 편인데, 조조의 경우 그런 묘사가 없다.
조조의 외모에 대한 기록이 있는 야사가 두개 있는데 세설신어에서는 '형루(形陋)', 위씨춘추에서는 '자모단소(姿貌短小)'[35] 라는 한자를 사용해서 조조의 외모를 묘사한다.
태평어람에 인용된 『위씨춘추』에는 무왕(조조)은 체구는 왜소하지만 의기양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설신어에는 조조가 자신의 용모가 흉노의 사신을 제압할 위엄이 없다고 생각해 신하로 위장하고 최염을 왕좌에 세워서 왕 노릇을 하게 한 후 흉노의 사신을 접대하게 했는데, 그 사신에게 나중에 위왕의 풍채가 어떠냐고 묻자, 그 사신이 "위왕은 대단히 위엄이 있었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그러나 그 옆에 칼을 들고 시립하고 있던 사람이야말로 진짜 영웅이었다."라고 했다. 그래서 조조가 그 사신을 위험하다고 여겨 사람을 시켜 살해했다고 한다. 물론 그냥 뜬 소문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으나, 흉노 같은 경우 다른 대등한 외국이 아닌 일개 야만 부족이었고, 그 당대에 오늘날 유엔 같은 국제질서가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꾸며낸 얘기라고 치부하는 것 또한 지나친 태도다. 이런 얘기가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쯤으로 흥미롭게 볼 순 있을 듯.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첫 등장 할 때 '신장 7척[36] , 가느다란 눈, 긴 구레나룻(身長七尺,細眼長髯)'라는 외모 묘사가 나오는데 이는 연의의 창작이라서 역사상의 조조의 외모와는 관련 없다.
7. 예술 관련 - 예술가적 면모
조조의 예술가적 면모는 역대 군주들 중에선 실로 돌연변이에 가까운 케이스다. 조조는 당대 문학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5언의 악부시(樂府詩)에 새로운 풍조를 불러일으키고 문학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인 일류 시인이었다. 그의 시대에 처음으로 개인의 문학, 개성의 문학이 탄생했다. 물론 유구한 중국사, 나아가 동북아 유교 문화권에서 뛰어난 예술가적 자질을 갖춘 군주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혼군, 암군, 폭군이 되어 '''나라를 말아먹었다.'''(…) 당장 조조의 자식인 조비부터가 조식 다음가는 당대 최고의 문인 중 하나였지만 군주로선 함량미달이었다. 이렇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분방하고 변화무쌍한 예술가적 기질과 기본적으로 안정성을 최우선 과제로 여겨야 할 국정 운영의 속성에 맞춰 원리 원칙에 입각한 예측 가능한 정책을 우직히 밀고 가야 하는 군주적 자질은 현실적으로 상극에 가깝다는 것이 수많은 사례를 통해 입증됐음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그 양극을 모두 가지고 조화시킨 희귀한 사례이다. 박물지에 따르면 환담, 채옹은 음악에 능하고 풍익(馮翊)의 산자도(山子道), 왕구진(王九眞), 곽개(郭凱) 등이 바둑을 잘 뒀는데 조조가 이들과 동등하게 능했다고 한다.
물론 사회적 풍조에 따라 그 유용성은 크게 다르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후기로 갈수록 이 양극단을 조화시키지 못했었던 군주들이 워낙 많았기에, 동양권에서 '군주의 예술 행위'에 대해서 얼마나 경계심을 가졌는지는 한국사에서도 증명되는 사실이다. 고려 시대에만 해도 노국 공주의 사망으로 인한 상심이 너무 커져 암군이 되어버린 공민왕 같은 인물도 있거니와 조선 중기에 시, 문장을 중시한 훈구파와 연산군이라는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폭군에게 호되게 두들겨 맞으며 태동한 사림은 조선 전기 지배 계급보다 군주의 예술을 비하, 제한하려 들었다.(교조적인 성리학 + 연산군의 폭정이 함께 작용했다.) 심지어는 시를 쓰는 것까지도 멸시하고 없애려 들었고 이에 따라 군주가 조금이라도 예술을 즐기려 들면 크게 반발하며 억제하려고 했다. 조선 성종은 시 좀 썼다가 수십건의 상소가 쏟아져서 진절머리를 내고 결국 포기했다. 조선 전기에만 해도 왕이 연회때 같이 노래하고 춤췄다는 기록도 있는 것에 비하면 사회적 기준이 크게 바뀐 것. 모든 유자들이 받드는 성인 공자도 악기 연주와 노래를 즐겼고, 제자들에게 권장까지 했던 걸 생각하면 이런 군주들의 예술 행위에 대해서 어느 정도 관대함을 취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러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사례가 어디 한둘이어야지.(...)[37]
물론 조조도 폭군으로 평가받을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나라를 망치긴커녕 창업 군주에 준하는 치적[38] 을 쌓았는데, 실제 '''조조만큼 예술가로서 높은 경지에 도달한 동시에 정치와 행정, 전쟁 같은 군주로서의 능력까지 뛰어난 인물은 거의 없다.''' 천재적인 예술가였으나 결국 나라를 망친 송휘종, 정무를 완전히 팽개친 천계제, 명군의 범주에는 들어가지만 예술가로서는 시시했던 건륭제와 같은 경우가 조금 있을 뿐이다.[39] 중국사의 역대 군주들 가운데 조조만큼 군주로서의 능력과 예술가의 자질을 높은 수준으로 겸비한 인물을 굳이 찾아 본다면 선덕제 정도밖에 없는데, 이상하게 선덕제는 명군으로나 예술가로나 모두 존재감이 높지 못하다.
그리고 이런 탁월한 예술가적 기질을 가끔은 안 좋은 쪽으로, 광기에 가까운 형태로 폭발시켜서인지, 두 번의 서주 대학살이라든가 관도 대전 전 후 7~8만에 달하는 원소군 포로를 모조리 사살하거나 생매장하는 등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 못 할 잔혹한 기행을 선보이기도 했다. 중국계 일본인인 역사 문학가 진순신은 저작 <소설 제갈공명>에서 이러한 조조의 부정적인 의미의 예술가적 감수성을 예리하게 드러내는 장면을 묘사한다. 작중에서 조조의 서주 대학살로 인해 부모를 잃고 남은 가솔들과 함께 피난길을 떠나는 제갈량은 숙부 제갈현에게 "왜 조조는 죄없는 백성을 죽이는 겁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제갈현은 "조조가 시인이라서 그렇다"라고 답한다. 이는 작중 인물들의 대화를 빌려 상식적으론 도무지 이해 못할 조조의 잔혹한 폭거의 이면에 깔린 심리적 메커니즘을 설명하려는 시도임과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제갈량의 행보를 추동하는 심리적 동인을 밝히려는 노력이다. 물론 제갈량이 진짜 서주 대학살로 인해 고향을 등지고 떠났는지는 확실치 않고 혈육을 잃은 건 더더욱 아니지만, 왜 뛰어난 재능을 갖춘 제갈량이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출세길이 훤히 열린 조조에게로 출사하지 않고 그 당시에는 별 볼일 없는 존재였던 유비에게 임관해서 평생을 유비의 총신으로 초지일관했는지 납득이 가게끔 개연성을 부여한 훌륭한 문학적 묘사라 할 수 있다. 또한 적벽대전 이후 말년으로 접어들수록 이전의 과감하고 냉철한 모습과는 달리 왠지 뭔가 나사 풀린 모습을 자주 노출하게 되는데, 이 문제 역시 조조의 예술가적 감수성이 노쇠화와 맞물려 안 좋은 방향으로 발휘된 경우로 보는 시각도 많다.
실제로 말년의 조조는 우리가 아는 그 조건달, 조먼닭이 아니었다. 적벽대전 이후 유비의 침공에 대비해 군대를 남겨놓으라는 유파의 요청을 가볍게 즈려밟고 남형주를 버리다시피 뒤로 한채 즉각 철수해 결과적으로 유비의 웅비를 뒷받침할 기반을 마련해 준다. 또한 한중을 점령하고 나서는[40] 한중은 익주의 목구멍이나 다름 없으니 지금 이 기세를 몰아 그대로 쇄도하면 능히 유비를 깨부술 수 있다는 유엽과 사마의의 합리적인 의견을 무시하고, 곧바로 철군(득롱망촉)해서 결과적으로 익주를 점령한지 얼마 안 된 불안정한 시기에 익양 대치 등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던 유비의 숨통을 터줬다. 그리고 한중 공방전 때는 한중을 구원하기 위해 목적지를 목전에 둔 장안까지 멀쩡히 잘 친정나왔다가 어째서인지 그대로 장안에 눌러앉아(...) 하후연과 장합 등이 유비군에게 당하고 있는 것을 반 년 이상 수수방관하다 총사령관 하후연이 전사하는 최악의 상황에 몰리고 나서야 뒤늦게 부랴부랴 구원에 돌입했고, 결국 한중을 빼앗김으로써 결과적으로 한중왕 즉위라는 유비의 최전성기를 열어준다. 마지막으로 번성 공방전 에서는 관우의 북진에 필요 이상으로 과민 반응하며 멘붕에 빠져 갈피를 못잡고 하북으로 천도를 하네마네 우왕좌왕하다가 사마의와 장제의 진언을 듣고 비로소 정신을 바로잡고(...) 올바른 대응을 펼칠 수 있었다. 사실 이 부분도 좀 어폐가 있는 게, 아무리 사마의와 장제의 말을 듣고 손권과 이면적 합의가 있었다지만 관우 하나 잡겠다고 손권과 합의가 이루어지자 마자 멀리 합비의 장료와 양주 26군의 사령관 하후돈까지 형주로 오라고 동원하고 온회전에도 나오듯이 조서를 내려 회남 방면을 지키기 위해 회남에 주둔하고 있던 여러 주의 군사들까지 각기 소집하며 회남전선을 텅 비우면서 그야말로 박박 긁어모아 형주로 보내고 이 지역을 무방비로 노출시키는 건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손권이 그렇게까지 믿을만한 사람인가 하면 당연히 아니고 말이다. 아무리 우금이 이끄는 정예 7군이 수몰돼 전멸[41] 했고 또 관우의 기세가 대단히 강성해 내부에서 반란까지 들끓었다곤 하나 관우의 군세는 조위의 전력에 도저히 비할 바가 아니다.[42] 이미 유비의 익주 정벌 과정에서 2차례나 많은 병력과 핵심 제장들을 다 차출당했고, 또 손권과의 익양 대치의 결과로 남형주의 반을 할양해 고작 형주의 1/4을 바탕으로 둔 게 관우의 전력이다. 5만이 넘어가면 흔히 10만으로 칭하는 당시 상례상 관우가 이끄는 병력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조위의 전력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3~4만에 불과했다.[43][44] 실제로 번성포위망은 서황이 가진 신병과 조조가 지원한 주개, 은서 등 12영을 합친 상태에서 서황이 관우의 5천 보기를 격파하면서 풀린다. 관우가 급박한 상황에서 동원할수 있던게 겨우 5천 정도라는 말이다. 그리고 관우의 번성 포위망이 격파되어 관우가 면수를 장악하고 양양 포위를 굳건히 하자 조조는 마피에 주둔하면서 계속 병력을 끌어 모으는걸 멈추지 않는다.
물론 이것을 예술가적 기질로 인한 과잉 반응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 관우는 당대 최고급 장수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고, 조조군은 한중 공방전과 양번 공방전의 연이은 대패로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또한 관우가 번성에서 포위가 풀리긴 했지만 이 시점에서 관우는 아직도 면수를 장악하고 양양을 완전히 포위한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조는 군대를 퇴각시키지 않고 군대를 양번에 규합할 필요가 있긴했다. 거기에 번성 공방전의 결과로 처절히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위의 인사 유엽으로부터 "촉한은 약소국으로 뛰어난 상장은 관우 뿐"이란 평가를 받은 걸 보면 관우가 피아를 가리지 않고 당대의 명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관우는 사서에 남겨진 기록상으론 패배가 많아 그 막대한 명성에 비해 커리어가 초라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듣곤 한다. 그러나 사서상 커리어로는 촉한의 상장 중 최고 수준에, 똑같이 만인지적의 반열에 오른 장비를 제치고 피아를 가리지 않고 유비군 최고의 상장으로 평가받는 걸 보면 관우를 바라보는 당대의 시각을 능히 짐작케 한다.[45]
사실 말년에 뭔가 이전과 많이 다른 어설픈 인물로 급변모했다는 인상을 주는 건 난세의 간웅으로서 조조와 인물상이 상당 부분 겹치는, 한때의 절친이자 필생의 라이벌인 원소에게도 보여지는 일면이다. 원소 역시 평생을 과감하고 냉철한 간웅으로 철두철미 일관하다 말년 관도대전 무렵부터 뭔가 급격히 성급하고 허술한 모습을 노출하더니 관도 대전에서 참패하고 얼마 안 가 급사하면서 원가의 패망을 불러왔다.[46]
원소와 조조의 차이점이 있다면 전자는 명문가의 천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조금의 여유도 누릴 여지가 없는 치열한 삶을 사는 통에 이를 인지하고 어떻게 개선해보려는 노력조차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하락세와 함께 죽음이 찾아왔다면, 후자는 고생도 많이 했지만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삶 속에서 건강관리도 열심히 했고, 무엇보다도 예술 활동을 통해 내면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재주가 있었기에 최대한 하락세를 늦추며 그럭저럭 연착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조조의 예술가적 면모는 신의 한 수 인 셈이다.''' 실제로 똑같은 간웅으로서 잘 나가다가 급격히 하락세가 찾아 온 원소는 왠지 성급하고 초조해져 무리수를 두다 폭망했다면, 조조는 왠지 소심하고 소극적으로 변했지만 안해도 될 짓을 해 화를 자초하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똑같이 급하락세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양태와 결과가 정반대인 것은 감정적 여유를 누릴 줄 아는 예술가적 면모가 만들어낸 차이일지도.
물론 이렇게 나이가 들고 판단력이 흐려지거나 겁을 먹는 케이스도 생물학적 한계상 분명히 존재하지만 사람마다 차이는 있는 법이라서, 적어도 조조보다 예술적인 면에선 잘 부각되지 않고 문학에 있어서도 실용적인 독서를 하는 정도였던 또 다른 라이벌 유비[47] 와 비교하면 이런 기질적인 면이 더욱 부각되기도 한다. 유비와 조조는 거의 동년배였고 유비의 이릉대전이라는 결과물 자체가 조조보다 더 나쁜 쪽으로 부각돼서 그렇지, 유비 말년의 행동 패턴은 조조보다는 보통 사람들이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영역에 있었다. 환갑이 다 되어 진행한 한중 공방전에서 유비의 전술, 전략적 행보는 여전히 예리했으며 후한이 멸망하자 이를 이용, 한실 부흥을 명분으로 재빨리 제위에 오르는 행위 자체도 명분을 중시했던 유비 자신의 일관되게 보여온 행동 패턴의 또 다른 증명이었다. 또 이릉 대전의 목표는 평생을 함께한 관우의 복수와 형주의 회복이라는 이해 가능한 일관된 전략적, 명분적 목표가 있었으며 육손이라는 기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전쟁 수행에 있어서 흠을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후계자의 입지도 믿을만한 신하에게 맡겨 분명히 세웠던 점에서 사실상의 장자 조비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조식 사이에서 오랫동안 고민했던 조조와는 확연한 차이점을 보인다. 비슷하게 말년에 엄청난 문제를 겪은 손권의 경우야 그 본인의 문제도 있긴 했지만 무분별한 숙청을 통한 나라의 황권을 재정립한다는 시도를 완전히 실패해서 말아먹은 케이스에 가까우니 논외로 치고....(...)
상술했듯 예술가 기질과 군주 노릇은 상극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논하자면 예술은 군주에게 있어서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가령 정치에 그다지 관심이 없거나 혹은 정치에 혐오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예술을 통해 접근하게 된다면 경계심을 상당히 누그러뜨릴 수 있고, 또 쉽게 호감을 사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치와 예술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가령 바그너 음악을 대중 동원 같은 자신의 통치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한 나치 히틀러나 문학을 현실의 갈등과 모순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도구의 일종으로서 사회 변혁의 첨병으로 여긴 사회주의 리얼리즘 같은 문예 사조를 생각해보자. 문예 사상가 발테 벤야민은 이런한 관련성을 두고 "파시즘은 정치를 예술화하고 사회주의는 예술을 정치화한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이런 극단적인 예까지 갈 것 없이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가령 일제 강점기[48] 나 군사 독재 정권 시절 같은 중요 역사적 정치적 분기점에 있어서 시대를 달리해 참여 문학이냐 순수 문학이냐 하는 명확한 답을 낼 수 없는 논쟁이 반복되는 것을 생각해보자. 정치와 예술의 밀접한 관련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물론 현대 미학적 관점을 통해 고대 사람인 조조의 리더십과 통치술을 조명하는 건 어폐가 있겠지만 적벽 대전을 앞둔 조조가 단가행을 읊자 모두 감동하여 "승상 킹왕짱!"을 연호했다는 일화에서 보여지듯 교양을 중히 여기는 전근대 시대의 지배계층에게 있어서 조조의 예술가적 기질은 분명 상당한 호감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고 이는 조조의 패권 가도를 뒷받침할 인재풀 확보라는 측면에 있어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49][50][51]
7.1. 요리
중국 요리 중에는 조조닭이라는 음식이 있다. 일화는 하비에서 주둔하던 조조가 너무 바쁘다 보니 몸져누웠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 요리사들은 의원의 말대로 조조가 먹는 닭에 한방 재료들을 넣었고 이를 먹은 조조는 서서히 기운을 차렸고 후에도 이런 음식을 자주 먹게 돼서 조조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즉, 삼계탕 같은 음식과 비슷한 것. 이런 일화가 있었을 만큼 조조도 꽤 바쁘게 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귀한 식재료였던 전복 요리를 즐기는 것을 넘어 환장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52] , 정확히는 전복을 말린 '건화'를 즐겨먹었다고 한다. 물론, 건화는 조조가 개발한 것은 아니다. 사실, 먹은 것만으로 나열하기 시작하면 대륙의 기상 중국인답게 한국인 관점으로는 온갖 해괴한 것들이 다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문화인답게 술도 좋아했는지 술의 레시피를 천자에게 상주했는데, 이것이 구온춘주. '''후일까지 황실에 진상하는 명품이 됐다.'''
7.2. 패션
박물지에 따르면 한나라 때 쓰던 갈관(葛冠)이라는 모자 대신에 백갑이라는 모자를 만들어 위진 시대에 백갑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미화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찾아내 마구 부풀리는 창업 군주임에도 인물이 준수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붉은 옷으로 유명하다. 즉 '''당대의 패셔니스타.'''
7.3. 음악
박물지에 따르면 한말에 금석(金石) 음악이 실전되었으나, 한중에서 두기#s-2(杜夔)라는 인물을 얻어, 헌현종경(軒懸鐘磬)을 설치하고 음악 연주법을 다시 보급했다. 즉, 본인이 음악적인 재능을 보여준 기록은 '''없다.'''
이 점이 예술가로서의 조조의 평가를 절하하는 요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동북아 한자 문화권에서 예술가의 재능을 평가하는 기준은 시서화악(詩書畵樂)이기 때문이다. 즉 시문, 서예, 회화, 음악 이렇게 4가지 항목에서 평가받으며[53] 거기에 감식안과 비평 능력, 그리고 수집벽이 뒤따른다. 이런 예술가의 이미지는 고대로부터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것으로서 예술 전반에 걸쳐 방대한 조예를 지니고 있어야 완전한 예술가로 대접받을 수 있는데, 조조는 당대의 문장가 중 한 명이고 서예에 있어서도 명필로 평가받지만 나머지 그림과 음악에 있어서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진 못했다는 것.
군주로서의 역량은 조조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예술가로서의 자질은 천재로 평가받는 남당의 후주 이욱 같은 경우는 시서화악 모두에 능한 만능 예술인이었다. 또 군주로선 암군이었지만 예술가로선 역시 천재라는 소리 듣는 송 휘종도 음악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당대 최고 수준이였다. 조조의 예술적 자질은 분명 뛰어나지만 4종의 예술에 모두 능했던 이욱과 3종의 예술에 능했던 휘종의 반열에 들지는 못하며, 앞서도 언급했지만 대략적으로 글씨와 그림에 능했으며, 특히 그림은 송 휘종에 비견될 만큼 뛰어났던 선덕제와 비교하면 적당할 것이다.
7.4. 문학
조조는 문학에 매우 뛰어났고, 그의 문학적 재능은 자식들에게도 이어졌다. 흔히 조조, 조비#s-1, 조식 세 사람을 통틀어 삼조(三曹)라 부른다. 이 중 조식은 이백이 출현하기 전까지 중국 문학의 일인자로 손에 꼽혔다.
조조 이전의 시들은 유가적 취향이 강하여 현실을 도외시하였으며 부(賦)라는 형태의 매우 긴 문학이라 접근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이에 반하여 조조는 수도에 문인을 모으고 '건안 문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사조를 주도한다. 건안 문학의 특징은 이전의 문학과 달리 현실을 강하게 반영하였으며 화자의 개인적 감상을 적극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점 등이 있다. 조조 자신도 오언시[54] 등의 간결한 시를 많이 지었다. 대표적으로 보출하문행, 단가행, 호리행 등이 있다. 조조 시 중에선 군중, 민중, 일반병사의 고달픔을 노래한 시가 꽤 많은데, 순수문학파이기는 했지만 조조의 인물상을 생각해봤을 때 정치적인 의도, 즉 프로파간다의 성격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조조는 동시기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시인이었고 이러한 문학적 자산을 자신의 정권을 뒷받침하는 후한 말의 명사집단과의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유교 경전에 주석을 다는 것이 주가 되었던 동아시아 관료의 소양에 문학적 자질이 포함되기 시작한 것이다. 문학=문예창작을 기준으로 삼아 사대부를 평가하는 것은 과거제 시기까지 이어져서 진사과가 생겨 버린다. 즉 무릇 선비라면 시도 좀 짓고 글줄 좀 쓰는 이미지는 사실상 조조가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조조가 남긴 유산이 후일 동아시아 전체의 관료제도에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의 과거시험에는 제술과로 남았다고 할 수 있겠다.
매너리즘을 타파하고 개성을 부여한 건안 문학의 풍토는 이후의 중국 문학사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그 필두에 서 있던 사람이 조조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중국 문학에 완전히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은 공이 자자하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시인으로만 조조를 평가해도 위인'''이라 평가한다.
마오쩌둥이 조조의 시가를 좋아했다고 알려져있다. 마오쩌둥이 조씨 삼부자의 시 중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이 조조의 작품으로 조조의 시에서 영웅호걸의 풍모가 느껴진다고 한다. 패기가 넘치면서도 깊은 사색과 문학적 감수성이 들어있는 해로행 같은 작품을 보면 그 평가가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2019년에 개봉한 중국 영화 유랑지구의 주제가에도 조조의 시가 차용되었다.
7.5. 서예
서예에도 재능이 있는 편으로 글씨가 예술적으로도 평가받았던 모양이다.
장화의 박물지에 따르면 한나라 때 안평(安平)의 최원(崔瑗), 최원의 아들 최식(崔寔), 홍농의 장지(張芝), 장지의 동생 장창(張昶)이 모두 초서를 잘 썼는데 조조가 이들에 버금갔다고 한다.
실제로 아직 존재하는 유일한 글씨가 있는데 석문잔도의 곤설(袞雪)이 그것이다. 소용돌이치며 튀는 물방울이 마치 눈과 같다 하여 쓴 것으로 서체가 호방할 뿐 아니라 재치가 들어간 글씨로 평가받는다. 곤(袞)자는 본래 흐를 곤(滾)으로 써야 하지만 이에 대해 누가 물으니 '''바로 옆에 물이 흐르니 삼수변을 붙일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55] 더불어 곤(滾)과 곤(袞)은 통가자[56] 로, 살짝 다른 글씨를 사용해 재치를 더하고 설(雪)자와의 균형을 맞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는 댐 건설로 본래 글씨가 있던 곳은 물에 잠겼고 글은 그 이전에 떼어내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석문잔도에는 복사본이 존재한다. 어떤 의미로 보면 삼수변이 사라진 셈이다.
7.6. 종교 관련
7.6.1. 유교
주로 일본의 삼국지 창작물을 통해 만들어진[57] '조조=법가 정치가'라는 이미지와 한국 사회에 퍼진 유교에 대한 반감이 맞몰려서 한국에서는 유교(유가)를 배척한 '실리주의적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다소 퍼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유교는 중국 문명의 근간이기 때문에 간단히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교(유가)와 법가를 병용하는 것은 한나라 이후 중국 정치의 기본이었고, 조조 자신도 지식인인 이상 유교의 주요 경전은 모두 암기하고 있었을 수밖에 없다. 조조는 공식 석상에서 유교 경전을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있으며,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공자의 어록을 빌려 칭찬하는 경우도 자주 보여줬다. 멀리 갈 것 없이 당장에 조조가 중용한 순욱을 필두로 하는 순씨 일족 뿐만 아니라 조조 밑에서 일한 내로라하는 호족, 관료들이 다름 아닌 유교 지식과 소양을 갖추었던 사람들이다.
조조는 유교를 배척하기는커녕 오히려 유교 사상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한 정치가이다. 공융을 죽일 때는 불효했다는 죄목도 포함해서 죽이기도 했다. 물론 이건 유교를 따른 게 아니라 이용한 것이니, 조조의 평가가 더 더러워진 일화 중의 하나다(...).[58]
7.6.2. 도교
조조는 도가에 상당히 심취해 방술(方術), 즉, 도교의 영향을 받은 연단법이나 방중술을 좋아하여 그런 사람들을 모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59] 박물지에 따르면 조조는 양성법(養性法)을 좋아하고 방약(方藥)을 알아 방술지사(方術之士)들을 초빙하게 했다. 또한 1척에 이르는 들의 칡을 먹었고, 또 적게 먹고 짐주(鴆酒)를 많이 마셨다. 또 조조가 끌어모은 방사의 이름이 16명이나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좌자, 화타의 이름도 끼어 있다. 조식의 글에도 천하의 방사들을 위왕이 모두 불러 모았다는 언급이 있었다.
이 영향 때문인지 조식은 도교를 옹호하는 "변도론"을 저술하였으며, 조조의 양자인 하안은 연단술을 활용하여 오석산을 만들었다. 조조의 취향은 후로 육조 시대로 이어지는 노장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8. 유사한 인물들
종종 조조를 '동양의 카이사르'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고, 실제로도 둘은 비슷한 면모들이 있다. 두 명 모두 군사, 정치, 행정, 예술, 학문 등 다방면의 분야에서 뛰어난 천재였고, 놀기 좋아하는 플레이보이라는 점도 닮았다. 둘 다 '황제'의 자리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원하면 황제에 자리에 오를 수 있을 만큼의 토대를 다져놓았고 실제로 그들의 후계자들은 모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군사적, 정치적 업적을 세운 영웅이 문학적 재능도 보인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인데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와 같은 걸출한 저서를 남겼고, 조조도 당대의 유수 시인으로 손꼽히며 손자병법의 주석 작업, 악부의 진흥 등에 큰 업적을 보였다. 게다가 한때는 동지였으나 결국 적이 된 라이벌(폼페이우스/원소[60] )이 있다는 것까지 닮았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인상 비평이고, 카이사르와 조조는 차이점도 많다. 북중국만 평정한 조조와는 달리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로마 전역을 통합했었다. 그리고 조조는 당대에서부터 민중과 지식인들 대부분에게 비판 받았지만, 카이사르는 민중에서의 인기가 많았고 따르는 중간계급도 많았다. 또한 조조는 이전의 이미지와 달리 제도 개혁에는 생각보다 무심해서 남북조시대의 귀족화에 한몫해 비판을 받지만, 카이사르는 로마 개혁에 적극적이었고 평가는 갈릴지언정 로마의 도약에 큰 기틀을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엇보다 세계사에 남긴 영향은 카이사르가 압도적이다.[61][62]
최근 들어서는 연의에는 나오지 않는 악행들이 속속 발굴되며 인격적으로 큰 결함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결국 이 도덕성은 끝까지 조조의 평가에서 발목을 잡고 있는데, 당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최악의 역적이고, 현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최악의 학살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조조曹操:시대를 초월한 난세의 간웅 그리고 이는 단순한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 전략적으로도 실책이 되어서 결국 그가 중국의 통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카이사르의 경우에는 자국민을 대량학살하진 않았고[63] , 적어도 그 같은 범죄가 대업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으니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오히려 조조의 이런 무자비한 행동은 카이사르보다는 술라와 더 비슷한 면도 있다.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와 비견되는 일이 많고, 이미지상도 비슷하게 나온다. 소위 '쿨하고 강력한 카리스마 리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로 그렇게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조조와 노부나가의 과감한 일처리 성향이나 능력은 비슷했을지 몰라도 성격은 크게 다르다. 조조는 정사나 연의 모두에서 생각보다 정이 많고[64] , 소심하며 예민한 성격이다.[65] 특히 일본 삼국지 창작물에서 '쿨한' 성격으로 많이 묘사되는 것과 달리 정사를 보면 쿨과는 거리가 매우 멀고 격정적이고, 자기과시욕도 매우 강해서 '잘난 척'도 곧잘 하는 성격이다. 즉, 정사에서 볼 수 있는 조조의 성격은 '''의외로 연의에서 묘사되는 조조의 캐릭터와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66] 시원스럽고 남성적인 노부나가와 다르게 예술 등에도 관심이 많으며 성격이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성향이다. 결국 그로 인해 평생 두통에 시달렸으며, 추정컨대 뇌혈관질환이 도져 죽게 된다.
[1] 후한의 황제인 환제와 영제를 묶어서 부르는 말[2] 후한의 황제인 환제와 영제를 묶어서 부르는 말[3] 물론 이것은 중앙정부를 무력화시키려고 하다보니 중앙권력에 깊숙하게 관여한 환관들도 함께 쓸어버린 것뿐이다. 국가개혁의 큰 뜻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무고한 인민을 수없이 살상하고 수도 일대를 초토화시키면서 대혼란을 초래한 것에 불과하다. 단, 동한의 큰 암덩어리였던 환관 및 환령 시대에 커진 족벌 계층을 완전히 싹 쓸어버려 조조 같은 훗날의 개혁자에게 큰 도움을 준 건 여하튼 사실이었다.[4] 삼국지연의의 독자들은 위-진 교체 장면에서 위나라가 드디어 업보 쌓아온 대가를 받는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진나라는 위나라와 다를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 자체는 일단 사실이었다. 서진이 보수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어도 서진은 제2의 사마의가 나타나지 않게 면밀한 제도 개혁과 위나라의 각박한 전시 체제 완화에 노력을 기울였던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5] 훗날 등장하는 유유나 소도성은 그 때문에 사마의와는 꽤 다른 방식을 연구해서 실천해야 했고 실은 바로 그것이 전 황실을 몰살하는, 좋지 못한 풍습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유유가 각별히 잔인한 것만은 아니었다.[6] 허나 이는 시대의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는 점도 한 몫 한다. 원래였다면 조조는 모든 제후를 갈아버리고 통일 왕조를 세워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담당하는 위인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조조에게는 '''유비'''라는 세기의 라이벌이자 시대를 초월한 숙적이 존재했고, 이 둘은 각자의 천하통일을 저지하고 서로를 실패하게 만들어 기타 라이벌들과는 달리 승패를 내지 못한 채 시대를 종결했다. 또한 조조에게는 유비 세력은 물론 자신의 세력도 훨씬 능가하던 세력인 절친 '''원소'''도 있었다.[7] 다만 이렇기 때문에 이들의 대결과 일대기가 오늘날에서도 기타 라이벌보다 훨씬 더 많은 각광과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만약 조조가 유비를 제압하고 통일 왕조를 건설했다면 그 평가는 올라갔을지언정, 오늘날 만큼의 인기는 얻지 못했을 수도 있다.[8] 순욱과 정욱의 공이 정말 큰데 이들이 성 몇개라도 지켜내지 못했다면 조조는 그냥 유랑하며 떠도는 세력이 될 뻔했다.[9] '''위'''나라의 '''무'''제가 '''주'''석을 단 '''손자'''병법. 흔히 조조의 저서로 알려진 맹덕신서가 사실 이 위무주손자를 일컫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10] 물론 서주대학살은 희대의 바보짓. 하지만 이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거지 군략과는 다소 거리가 있음을 주지하자.[11] 물론 북방민족들 입장에서는 살아갈 터전을 구하기 위해서 온 거지만.[12] 대표적인 예가 조인과 조진. 그러고보니 둘 다 연의의 피해자..[13] 하후연의 전사는 조조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 정설인데, 조조는 한중에서 유비를 막는 하후연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하후연이 전사하기 최소 반년 전 장안에 도착한 뒤 하후연을 구할 움직임을 안 보이고 미적지근하게 있었다.[14] 육(六) 군, 즉 '''천자가 이끄는 군대'''를 가리킨다.[15] 여포와의 싸움에서는 황충의 발생으로 흉작이 들면서 여포 군의 군량이 떨어지며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고, 원소와의 싸움에서도 장수가 항복해오며 형주 방면이 안정이 되는 행운이 따라주었다. 게다가 관도, 창정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원소의 세력은 건제했는데, 원소 자신이 급사해버렸던 것 역시 운의 영역. 유표의 경우 자연사한 것을 틈타 유종을 쉽게 낚는 등 여러모로 행운이 많았다. 단 이러한 기회를 놓친 세력이 많이있었던걸 보아서 단순히 운이라고만 할수는 없다.[16] 사실 위대한 명장들도 사람이고 당연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투 스타일이 바뀌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나폴레옹도 청년기 이탈리아 전역에서 놀라운 기동전을 펼치나 후반기에는 대규모 물량을 이용하는 전투로 스타일이 바뀐다.[17] 다만 나폴레옹의 경우엔 나폴레옹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나폴레옹 본인 특유의 기동전을 수행할 정예병력들이 많이 소모되어 신병들이 소화하기 쉬운 전술로 변화를 준 것이 가깝다. 특히 이베리아 반도 전쟁과 러시아 원정이 치명타였다.[18] 사실 촉과 비교했을때 효율적이었는지는 상당히 의문이 남는다.[19] 이는 역대 위나라 황제들의 역량이 조조보다 딸리거나 일을 할 수 없어서 그렇다. 당장 조비만 해도 문제가 많았던데다가 단 몇년만에 요절, 그 뒤를 이은 조예는 재위기간의 상당기간을 제갈량의 북벌을 저지하는데 쏟아야 했고 그 이후에는 타락하고 몇년 뒤 사망, 또 그 이후의 조방, 조모, 조환은 꼭두각시였으니 논할 여지가 없다.[20] 예를 들어, 손권의 지배 지역인 강남은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손권은 주변에서 인구를 납치해오는데 열성이었다. 손권에게 인구를 늘려주기 싫었던 조조는 강남 인근의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하려고 했는데, 이 조치에 반발한 백성들이 무려 10만호나 강남으로 도망가버렸다(...). 손권에게는 엄청난 이득이었는데 조조와는 달리 10만호나 온 것은 넝쿨째 들어온 호박이나 다름없었다. 손권이 장악한 오나라는 인구가 적어서 원주민을 사냥하는등 별짓을 다 했는데 그렇게나 간절히 원하는 인구가 조조의 뻘짓때문에 넝쿨째 들어온 것[21] 다만 이는 세병제 초기라 그랬다. 실제로 이후의 세병제는 이정도까지는 안 해도 되었다.[22] 그리고 애초에 이런 난세에 '인성' 보다는 '능력'이 더 중시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야 내가 살아남으니까[23] 이들은 각각 순욱의 아들 순의, 종요의 아들 종회, 신비의 아들 신창, 왕랑의 아들 왕숙과 손녀 왕원희, 가규의 아들 가충 등이다.[24] 근데 이건 애초에 조조 성격 상 패드립을 당해도 멘탈에 지장이 없었던 영향도 큰듯.. 사실 이 시대에는 상대를 깎아내리기 위한 패드립이 흔했다.[25] 단 장수의 경우엔 그를 비롯해 친족들의 말로가 좋진 못했다. 그래도 일단 이 부분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어 추측만 가능할 뿐이고, 적어도 합류 당시엔 깔끔하게 맞아줬다. 심지어 장수의 영 좋지 않은 말로도 조비 때 일이라 조조와는 무관하다.[26] 그밖에도 관우가 자신의 주공이자 대형 유비의 행방을 알자마자 바로 유비를 찾아 조조 휘하를 떠났는데 이에 부하들이 관우를 추격할 것을 조조에게 진언하나 이에 조조가 자신의 주공을 위한 것임을 언급하며 관우를 쫓지 말라고 직접 명을 내린다. 관우의 충의와 함께 조조의 영웅호걸적인 도량을 동시에 보여준 사건.[27] 양수가 조식파의 주요 인물이라 후계자 문제로 거슬렸다고 한다.[28] 장야신의 저서중 하나가 "조조는 어떻게 영웅이 되었나"이니 조조를 호의적으로 보는 사람이라 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판을 한 것..[29] 이와 정 반대되는게 유비 세력, 조조와는 차원이 다른 위기를 겪으며 세력이 공중분해되었다 모였다를 반복했지만 중요한건 그 때마다 유비 세력의 핵심 구성원들은 큰 변동이 없었다.[30] 이때는 이미 사망했지만 그럼에도 생전에 십상시의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라 영향력이 어마어마했다.[31] 서주 단양군의 병사들로 용맹하고 잘 먹었으며 무장이 잘 되어 있었다. 유비가 도겸을 지원했을 때, 단양병 일부를 도겸이 유비의 군대로 편입시켰다는 기록이 있다.[32] 때문에 연의에서는 길평에게 독살당할 뻔했다.[33]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조조의 두뇌가 쉴새없이 가동되기 때문에 이따금씩 자신의 비상한 두뇌를 감당하지 못하고 두통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34] 보통 편두통이 아니다. 실제로 조조의 두풍은 편두통 수준으로 그치지 않았다.[35] 용모가 짧고 작다는 의민데 한마디로 단신 숏다리라는 것이다. 여담으로 원소는 '자모위용' 즉, 용모가 카리스마있고 잘생겼다는 의미를 지녔다.[36] 전한 시대로 치면 161cm, 후한 시대로 치면 165.9cm에 해당된다.[37] 어쨌거나 조선 사림의 편집증적인 금욕주의는 크게 이상했고 지나쳤지만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명분은 있었다. 연산군이나 송 휘종처럼 뛰어난 예술인들이 국정을 워낙 크게 말아먹은 것이 '임금이 예술에 심취하면 나라를 말아먹는다'는 말의 증거가 된 것이다. 그래서 임금이 시를 쓰거나 그림을 좀 그리려고 하면 "연산이다! 휘종이 하던 짓이다!"라며 난리를 쳤다. 다행히 그 이후로는 다소 완화되어 조선 후기 지배 계급도 예술을 즐기긴 했지만 분야를 엄격히 등급화했고, 지배 계급이 즐겨도 되는 예술은 한정되어 있었다.[38] 여러 개인적 실책과 정책적 실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조조와 조위의 치세에 후한 말 환령 대부터 발발한 대혼란상과 무질서를 어느 정도 바로잡고 중앙권력의 통치력을 회복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39] 건륭제는 자신이 수집한 예술 작품의 운치를 망쳐버린 인물로도 악명이 자자한데, 남의 그림에다가 각종 도장을 찍고 주제에 시를 적어놓는 등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을 지경. 조조의 시는 몇십 편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하나하나가 오늘날까지 입에 오르내리는 명문인데, 건륭제의 시는 많이 남아 있지만 그저 도서관 구석에나 꽂혀있을 뿐이다라는 디스도 있다. 사실 군주로서의 능력도 과거에는 명군 소리를 들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겉만 번지르르했다고 부정적인 재평가를 받는 추세다. 결국 나라 다스리기와 예술 모두 보기에는 그럴듯한데 뚜껑을 열어보면 그저 그렇다는 얘기.[40] 하후돈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사실 한중도 수비측 장로군이 실수로 야밤에 길을 잃은 하후돈과 허저의 군대를 받아들이는 바람에 방어선이 뚫린, 얼마간의 요행수를 타고 점령한 것으로 조조는 초반에 한중의 험로에 막혀 공격이 지지부진하고 또 보급 문제도 겹치자 철군까지 생각했다. 이후 하후연을 제거하고 한중을 확보한 유비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고 철저하게 방어선을 굳혀 조조군을 몰아냈다.[41] 대부분 포로로 잡혔다.[42] 당시 조조군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조조군은 번성의 조인과 만총, 7군을 이끄는 우금. 나중에 원군으로 합류한 서황 같은 네임드 외에도 방덕의 부장 동형과 동초, 양양을 지키는 여상, 서황군의 증원군으로서 합류한 은서와 주개 같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들도 상세히 기록돼 있는 걸 보면 정말로 관우군에 어지간히 인물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흔히 인재난에 시달렸다고 하는 후기 촉한의 강유의 북벌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장익이나 요화 등 같은 기존의 알려진 인물들 외에도 유은이나 왕사 등 같은 나름대로 준수한 인물들이 강유를 보좌했던 걸로 확인되는 걸 보면 당시 관우가 얼마나 열악한 여건에서 형주를 건사하고 또 북진을 추진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물론,촉한의 기록자체가 부실하기도하다.[43] 무엇보다 '''관우를 보좌하는 네임드 부장이나 참모는 정말 사서상에 찾기가 어렵다.''' 연의에서야 나름 준장으로 묘사되는 아들 관평은 실제론 참전에 의의를 두는 수준이고 조루 역시 비슷한 처지이며 주창은 가공 인물에 마량과 이적은 익주에서 유비를 보좌하고 있었고 요화와 왕보는 관우 휘하에서 일한 건 맞는데 번성 공방전에는 참전하지 않고 형주에 남았다. 사서 곳곳에 꽤 자세히 언급돼 있어 삼국 시대에 상당히 비중있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는 걸 짐작케 하는 게 번성 공방전인데, 당시 관우군에 속하는 장수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인물은 관우 본인과 함께 처형당했다고 스쳐지나가듯 언급되는 아들 관평, 도독 조루 뿐이다. 얼마나 인물이 없었으면 관우는 번성을 직접 공격하고 양양은 휘하의 상장을 시켜 공격하게 했는데 이 상장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기록이 누락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44] 다만, 유비의 한중왕 선언으로 인한 민심의 흔들림, 지원도 없이 홀로 자그마치 7년간 형주를 지켜 통치한 관우와 그 관우라는 이름으로 인해 움직이는 민심과 관우의 북진소식만으로도 여기저기 일어난 반란들은 틀림없이 조조에게 크나큰 위협이였다. 손권 또한 관우를 치기 위해 합비전선까지 느슨하게 하면서 관우를 쳤다. 이것만으로도 관우라는 네임드값과 한중왕이라는 칭호가 얼마나 위협이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45] 이는 역으로 생각해 보면 비록 불리한 여건이지만 관우 수준의 명장이라면 이 정도 미약한 전력을 갖고도 얼마든지 조위와 동오를 상대로 형주를 사수할 수 있다고 그 위상과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관우라는 존재가 유비군에서 얼마나 비중있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인선인 셈. 조조와 손권의 뒷거래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지만 말이다.[46] 이런 것을 보면 후대 사람들이야 영웅이니 간웅이니 하는 말을 쉽게 하지만 원소나 조조의 말년을 보면 영웅이나 간웅이라 불리는 이도 결국은 희로애락을 느끼며 완벽하지 못한 한 사람인데, 막중한 책임을 떠안으면서 능력을 일관되게 유지하려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심한 정신적, 신체적 압박감을 견뎌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영웅을 논하기는 쉽지만 정말로 영웅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것이다.[47] 유비도 물론 예술 관련으로 좋아하는게 있었다. 선주전에 따르면 개, 말, 아름다운 의복,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좋아했다는 말의 경우 태평어람에 적로같은 좋은 말을 고르는 재주가 있었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 것과 달리 음악의 경우 조조 수준으로 열중했다는 기록은 없으니 만큼 그냥 듣거나 가끔 연주하는 수준으로 즐겼던 수준으로 보인다. 재밌게도 후세의 기록을 보면 제갈량의 경우 금(琴)을 상당히 잘 탔다고 하고(그래서 삼국지 드라마에서 제갈량이 나오면 그가 금(琴)을 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융중에서 양보음을 부르며 농사일에 열중하는 등 음악과 관련이 있어서, 후학자들이 공명은 충분히 유교적 이상의 예술 형태인 예악(禮樂)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런 '음악'을 즐겼다는 면에서는 주군이나 신하나 통하는 면이 있었던 것 같다.[48]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문인 중 한명인 회월 박영희는 원래 카프 소속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심취했다가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 자신이다"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고 순수 문학으로 전향한다.[49] 일례로 '''예인(藝人)'''이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예술적 소양이 풍부했던 김종필의 운치있는 휘호 정치와 예술에 일가견있는 면모는 비록 김종필이라는 인물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호오가 갈렸다고는 하나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일단 그를 끌어들일 만한 인물이라는 인식을 주어 DJP 연합의 성립 같은 것으로도 작용했고 정치권의 이미지를 낭만적으로 가꾸었으며, 외신에서도 호의적인 시선으로 다루어져 국가 간의 외교에도 기여했다. 또 빌 클린턴의 색소폰 연주가 그의 주가와 명성을 크게 신장시킨 것도 유명한 일화다.[50] 김대중이 이들로부터 느낀 바가 있었으니 '''부드러운 이미지'''였다. 투사(鬪士)의 이미지가 강했던 DJ는 대선을 앞두고 '''알고보면 부드러운 남자''', 속칭 '''알부남'''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우선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면 DJ는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웃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여성지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는 것을 결코 마다하지 않았으며 보좌진들은 그가 꽃을 가꾸거나 아이들과 놀아주는 사진들을 최대한 많이 내보냈다. 무엇보다도 문화 예술에 관심을 가져 연극이나 영화를 관람하고 예술인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개그맨들에게서 화술을 배우고 성우들을 초빙해서 사투리를 교정하는 등. 당시 예술인들 중 상당수가 DJ 지지를 선언한 것에는 그러한 배경이 있었고, 그것이 훗날 DJ가 문화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51] 이는 비단 인간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나 국가에도 통용되는데, 소프트 파워는 국가의 국제적 위상과 간접적인 영향력을 제고해준다. 예를 들면, 한류의 영향력으로 인한 한국 제품의 판매 증가, 외국인 관광객의 증가가 그것이다. 이렇게 벌어들인 자금을 군사력의 증강에 투입하거나 다시 경제력을 확장시키는데 투자할 수 있다. 또 국제 사회에서 해당 국가의 이미지를 낭만적으로 가꾸어주고 어느 특정 사안에서 '타국 입장'에 민감한 사안만 아니라면 '타국의 동의'를 얻는 것이 보다 쉬워진다. 이렇게 개선된 국가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국제 사회의 다수로부터 지지받으며 주도적인 위치에 설 수도 있을 것이다.[52] 조식이 지은 구제선주표에 따르면 조식이 서주에서 있을 적에 조조에게 전복을 200개나 갖다바쳤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이 이야기가 조조가 검소했다는 건 전형적인 서민 코스프레고 실제로는 이익은 다 챙기는 높으신 분이었을 거라는 의견과 당시에도 귀한 전복을 진상하려고 어민들이 수탈과 고생당했다는 증거로 여기기도 한다. 물론 검소한거랑 식도락은 좀 별개라 검소하지만 음식 자체는 미식으로 즐기는 사람이 있으니 꼭 그렇게만은 볼 수 없지만. 예를들어 한국 근현대사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은 검소했지만 미식가였고 반대로 김영삼 대통령은 부자였지만 음식은 국수 정도만 즐겼다고 한다.[53] 그리스 로마 문화권의 경우 서예 대신에 조소(彫塑)가 들어간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만 보더라도 조각가이자 건축 설계자이자 화가였을 뿐 아니라 문장에도 능했다.[54] 五言詩, 한 행에 다섯 글자가 있는 한시. 대부분의 한시는 오언시 또는 칠언시다. 兮 등의 불필요한 추임새 등이 사라져 있다.[55] 관련 민담에 의하면 '''실수로 삼수변을 쓰지 않은 것을 임기응변으로 대답한 것'''이라고 한다. [56] 동일한 글자로 간주하는 글자. 파자에 많이 사용된다.[57] 특히 창천항로가 이런 묘사의 대표격이다.[58] 물론 유교를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한 것은 딱히 조조만 그랬던 게 아니다. 조조의 숙적이었던 원소부터가 그런 식으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고, 그 '''조비'''조차도 오히려 유교를 진흥시키고 장려했다. 물론 이는 아버지 조조와 마찬가지로 위나라의 황권 강화를 위한 정치적 목적이 더 강했다. 정작 조비는 유교 질서를 장려한 것과는 정반대의 행적을 더 보여줬다.[59] 여강의 좌자, 초군의 화타, 감릉의 감시, 양성의 극검을 끝내 이르게 했다.[60] 심지어 이 둘조차 닮았다. 둘 모두 원래는 카이사르/조조보다 배경도 좋고 세력도 컸으며 실력도 있었으나, 개인적인 결점들과 몇 번의 치명적 실수가 맞물려 결국 몰락했다. 젊을 때는 빼어난 미남으로 알려졌다는 것까지 공통점(…). 물론 이런 공통점들은 어디까지나 가십의 영역일 뿐 실제로는 차이도 많으니 진지하게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61] 이것은 카이사르와 조조의 사후 로마가 통합되어 주변국에게 국력을 과시한 것과 반대로 분열되여 주변국에게 쩔쩔매게된 중국의 국내 사정 때문이기도 했다.[62] 다만 이는 조조의 잘못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로마의 내전과 중국의 내전은 그 기간과 규모가 크게 달랐다고 이전문단에서는 주장했고, 중국이 군사적으로는 크게 발달했으나 인구가 급감하고 전체적인 국력이 한나라 전성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쇠략된 상태였다고 이야기하지만,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로마도 카르타고를 완전히 말살한 이후부터, 카이사르의 내전기까지 100년가까이 내전을 벌여왔다. 그중에서 로마연합이 해제되어 싸울정도로 이탈리아 내에서도 큰 문제로 자리잡고, 노예들이 크게 반란을 일으킨 스파르타쿠스까지 엄청나게 혼란스러웠다. 이는 중국과 거의 100년 가까이 내전이 지속되었던 점이 동일하다. 따라서, 이런 동시적인 혼란 속에서도 결국 당대에도 후세에 외침을 당하도록 완료를 못한 조조와 이런 상황에서도 로마제국의 크기를 키우고, 안정적으로 국가를 수립하며, 속주민과의 차이도 줄여나가도록 대계를 세운 카이사르는 압도적인 차이가 있다. [63] 물론 이민족인 갈리아족이나 게르만족에 대해서는 자비가 없었지만, 같은 로마인들의 경우 설령 한때 싸웠다 해도 적대행위만 중단하면 거의 무조건 용서하고 아무런 처벌도, 불이익도 주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관용'은 아예 관용구로 남았을 정도. 물론 이처럼 정적을 죄다 살려주는 관용 때문에 암살당했다는 것도 부정하기는 힘들지만...[64] 특히 진궁을 끝까지 붙잡으려고 하는 건 정사에도 있는 내용이고, 원소가 죽은 후에 원소 묘를 지나다가 제사를 지내며 곡을 하며 펑펑 울기도 했다. 하북 현지에서의 여론을 의식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조조의 공식적인 입장은 어디까지나 '조정의 수장으로서 황실을 능멸하는 역적 원소를 토벌한다'는 것이었다. 즉, 이것은 자신의 세력이 내세운 정치적 명분을 조조의 개인적인 이유로 완전히 뒤엎은 행동이라 삼국시대가 종결된 이후 후대에조차 자기 말을 뒤집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요컨대 원소 묘에서 펑펑 울었던 게 정치적 쇼라고 하기에는 오히려 손해볼 여지가 많은 행동이었다는 이야기.[65] 다만 전투에선 공격적이고 과감한 전술을 많이 사용하기도 했다.[66] 어찌 보면 일본 매체에서 곧잘 묘사되는 '쿨한 조조'는 정사나 연의의 조조를 묘사한 것도 아니고, 이를 바탕으로 적절히 각색한 수준에 그친 게 아니라 거의 새로운 인물을 창작한 거라 봐도 지나치지 않은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