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역사

 



1. 개요
2. 영국 지배 이전
3. 영국령 홍콩
3.1. 영국의 홍콩 점령
3.2. 일본의 군정
3.3. 전후와 사회운동
3.4. 반환 협상
4. 반환 이후
4.1. 민주화 요구
4.2. 홍콩 민족주의


1. 개요




2. 영국 지배 이전


홍콩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까지 그 기원이 올라간다. 현재의 홍콩인을 포함한 광둥인은 한화되어 한족으로써의 정체성을 지니지만, 원래 이 지역에 살던 민족은 백월로 칭해지는데 이 당시 중국 남부 지역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오스트로아시아어족. 다이카타이어족 계통의 언어를 쓰는 동남아시아계통의 종족들이 터 잡고 살고있었고, 이를 중국에서는 월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광동어의 이명(異名)은 "월어"라고 불렸다고 한다. 광둥은 고대에 월지방 내진 남월 지방이라고 했는데 월나라보다 남쪽이라는 뜻에서 붙여진것이다. 이들은 진나라한나라한족 왕조의 정복으로 인해 복속되고 전란을 피해 중국대륙 중북부의 한족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여 섞여들어와서 한족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DNA도 홍콩이나 광둥성, 광시 좡족 자치구, 하이난성 쪽의 한족은 중원이나 화북 지방의 한족보단 오히려 베트남인과 유사하다.[1]
역사시대에는 진시황에게 병합되었다가 진시황 사후 이 곳에 파견되었던 임효와 그의 부관이었던 조타(베트남어로는 찌에우 다)가 광저우를 수도로 남월을 건국했다. 남월은 남쪽 월나라라는 뜻. 남월은 광둥성, 광시 좡족 자치구, 하이난성, 구이저우성, 윈난성 일부와 베트남 북부를 아울렀으나 전한 시대 무제에게 정복당해 이후 중국의 영역에 들어가고 한족화된다. 당나라북송, 원나라대에는 무역항과 해군 기지로서 활용되었다. 송나라 최후의 전투인 애산 전투가 이 근처에서였고 여기서 원나라에 패배한 조씨 황족들은 전부 까우룽 반도에서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으며 원나라는 베트남미얀마를 정벌하는 기지로 사용했다. 명나라가 망한 뒤 남명이 잠깐 들어섰다가 강희제의 친정으로 청나라에 복속되었다. 원과 청 둘다 북방 계통의 정복왕조라 자신들의 고향인 내몽골, 만주나 수도인 베이징, 강남의 중심지 항저우와도 멀리 떨어진 이 곳에 무관심했다.

3. 영국령 홍콩




3.1. 영국의 홍콩 점령


1513년포르투갈인 호르헤 알바레스(Jorge Álvares)가 서양인으로써 최초로 홍콩에 상륙한다. 그리고 서양과의 접촉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영국동인도회사광동성 근처 도시에 무역항을 건설하면서 처음으로 홍콩과 영국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1841년, 제1차 아편전쟁홍콩 섬영국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다음해의 난징 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정식으로 양도되었다. 이듬 해에 영국은 빅토리아 시티(Victoria City)의 건립과 함께 총독부를 신설하였다. 영국의 식민지가 된 셈이다.

지금 대황제(大皇帝: 청 황제)가 장차 홍콩을 대영국 군주에게 급여하니, 사후 왕위를 세습하는 자가 항상 '''영원히''' 장악하고 편의에 따라 법도를 세워 다스리도록 맡긴다.

중국 황제 폐하는 대영제국여왕 폐하에게 홍콩 제도를 양도한다. 홍콩 제도는 '''영원토록''' 대영의 여왕, 그 상속자와 후계자의 소유가 될 것이며, 대영제국의 여왕 폐하가 직접적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이와 같은 법률과 규정에 의해서 통치될 것이다.

난징 조약》 제3조, 한문영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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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제2차 아편전쟁 패배 이후 바운더리 스트리트(Boundary Street, 限界街)의 남쪽 까우룽 반도(몽콕 주변)와 스톤커터스 아일랜드(石環島)가 베이징 조약으로 영속적으로 영국에 추가 귀속되었다.
1860년 영국으로 할양되어 영구 귀속된 영역. 현재의 모습을 보면 육지의 확장으로 해안선에 많은 변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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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추가 조차되어 편입된 지역. 현재의 지도와 거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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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홍콩 지도.
1898년영국은 홍콩과 인접한 북부 섬과 산까이(新界, 신계)를 당시 충분히 영구 양도받을 수 있었음에도, 99년간 조차했는데 유효 기간은 1997년까지.
왜 99년 조차인가에 대하여는, 당시 서구 다른 열강들이 영국의 영향력이 중국에서 강해지는 것에 대한 견제 심리를 의식해서 99년 조차로 청나라 관리와 합의했다는 설 등이 있다. 이 99년 조차 조항 때문에 향후 홍콩 전체가 중국에 반환되는 계기가 된다.
19세기의 홍콩은 영국의 주요 무역항이었다. 홍콩은 영국의 물산 집산지로써 활용되는 자유 무역항으로 선언되었고 구룡반도에서 광동 성 곳곳으로 운행하는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영국식 교육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홍콩은 아시아의 영국령 중에서 가장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문화가 꽃핀 지역이다.

3.2. 일본의 군정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은 영국, 미국에 선전포고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영국의 식민통치하에 놓여있던 홍콩을 공격했다. 영국 해군의 상당수는 싱가포르 방어를 위해 홍콩을 떠났다. 12월 18일에는 일본군이 상륙해 12월 25일 침사추이에 입성한 후 페닌술라 호텔에 있던 마크 애치슨 영 총독에 대해 총칼로 위협해 항복을 받아내었다.
홍콩을 점령한 일본은 홍콩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일본군 장성이 총독을 맡았다. 치안은 일본군 헌병이 맡았다. 중국계, 영국계사람들은 모두 탄압을 받았으며, 일본군은 이들을 학살했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연합국에게 항복하여 일본의 홍콩 지배가 끝났다. 중화민국장제스는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8월 30일 영국 해군이 홍콩을 재점령하면서 홍콩은 다시 영국치하로 돌아온다. 영국은 특별군사법정을 열어 일본군에 부역한 중국인들과 홍콩에서 전쟁 범죄를 자행한 일본인들을 처벌했다.

3.3. 전후와 사회운동



1968년 홍콩
일본의 패전 후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 다시 돌아갔다. 영국 역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식민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각지의 식민지들을 평화롭게 독립시켜줬지만, 홍콩은 계속 식민지로 영유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고 판단해 계속 영유하기로 했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되면서 중국 대륙이 사회주의 체제로 돌아서자 공산주의 사막 속 자본주의의 오아시스처럼 여겨져 수많은 중국 부호들과 공산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홍콩으로 몰려오기 시작하여 인구밀도는 이때부터 세계 최고를 찍었다.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하여 제조업 중심의 경제로 성장하였으나 70년대 이후 지리적 장점과 정치적 안정의 덕을 보아 동아시아 금융권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된다.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은 홍콩 할양은 아편전쟁으로 인한 불평등 조약의 결과라며 영국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행정권'''만 인정해 왔다. 실질적으로 자기 영토로 간주하고 상호 왕래 시 내륙여행 허가증을 비자 대신 발급받을 것을 요구했다. 즉 중국 영토 중 간접통치하여 따로 노는 곳 취급을 했다.[2]
1949년 국공내전 말기 당시 승기를 잡은 인민해방군은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고, 일부 공산당 강경파들은 100여년간 식민지였던 홍콩까지 "해방"하자고 했으나, 광동성에서 작전하던 부대들에게 "절대 월경하지 말고, 영국군을 먼저 공격하지 말 것"이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는 불필요하게 서방열강을 적으로 돌리지 않고, 외교적으로 중화민국을 자연스럽게 승계하려는 조치였다. 이 조치 때문인지 영국은 1950년 1월 서방국가중에 최초로 중화민국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했다. 국공내전 이후 중국 공산당 정부는 영국과 벌인 홍콩 반환에 관한 협상에서 공동강령 55조를 통해 영국과의 조약 자체를 인정하지도, 계승하지도 않겠다는 입장이긴 했지만 서방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존에 체결한 조약을 부정하는 건 무리였다.
물론 이곳도 '''격동의 현대사'''를 완전히 비껴간것은 아니어서, 1922년 홍콩 선원 파업, 1925년 5.30 운동, 1956년 쌍십폭동(雙十暴動), 1967년 67폭동이 일어났다. 특히 67폭동은 홍콩 현대사의 분수령이다. #영어판 다큐 발단은 오랫동안 저렴한 노동력이 강점으로 여겨지던 홍콩의 경제구조가 한계를 맞이하면서 사회갈등의 불씨가 된 것. 1966년에 스타 페리 요금 인상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 해결은 커녕 방치되면서 영국령 홍콩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고, 다음해인 1967년,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노사분규에 경찰이 강경진압을 시행하면서 일파만파로 퍼진것. 여기에 민주적 지식인들, 중고등학생들, 대학생들, 공산주의자들, 모택동주의자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합세하면서 대투쟁이 벌어진 것. 당시에는 문화대혁명이 중국본토에서 벌어지던 시기여서 굉장히 강력한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친중파로 규정되지만 현재의 친중파 정당과는 달리 마오쩌둥을 따랐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런 좌익 운동들은 전 시민의 호응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홍콩에서는 공산주의를 피해 본토에서 망명온 사람들이 많았으며, 좌익 인사들이 반공인사들에 대한 적색테러를 감행하고 경찰들을 살해하고 본토에서 흥분한 홍위병들이 영국 대표부를 공격해 점령하는 사건이 있는 등 좌익 운동을 지원하던 중국 대륙부터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3] 그럼에도 폭동 초기에는 홍콩의 썩어빠진 사회상을 개혁할수있다는 기대감때문에 어느정도 지지를 얻기도 했지만 혼란상과 민간인까지 살해하는 각종 트롤짓으로 인해 지지가 격감하면서 영국 식민당국이 승리하는 결과를 낳았고, 본토 문화대혁명의 광기도 어느정도 수그러드는 계기가 되었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은 영국령 홍콩 정부로 하여금 위기 의식을 느끼게 해 사회 개혁을 단행하는 계기가 되어 홍콩을 선진 사회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3.4. 반환 협상


홍콩섬과 까우룽 반도 남부 등은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구히 청나라에게 양도받은 영국 영토이지만, 까우룽 반도의 나머지 지역(신계)은 나중에 청나라로부터 99년의 기간을 정하여 추가 조차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신계의 조차 기간 만료를 앞두고 영국과 중국은 1982년부터 홍콩 문제에 관한 회담을 시작한다. 회담에서 영국은 조차 기간을 15년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중국은 청나라의 영국의 관련 조약을 원천적으로 무효로 선언하면서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을 박아 버렸다. 중국 공산당은 북경 조약, 남경 조약, 구룡신계 조차조약이 모두 무효이며 승계하지 않겠다고 건국 전인 1948년에 이미 천명하고 있었던 터였다. 사실상 이에 할 말이 없던 영국 입장에서는 홍콩을 전부 군말 없이 돌려주거나 아님 중국과 일전을 불사하면서 다 가지던가의 선택지 밖에 없었다. 중국이 국제적 고립을 무릅쓰고 홍콩을 무력 점령해버리면 영국이 홍콩을 지킬 방법은 많지 않았다.
이 때 영국은 1997년에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 넘기되 행정권을 영국이 행사하는 아이디어도 제안해봤지만 중국은 이것도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22회에 걸친 협상 끝에 1984년 영국은 홍콩 전 지역을 반환하되 중국은 홍콩에 일국양제를 적용한다는 내용의 중영공동선언이 발표된다.
영국은 중영공동선언의 규정에 따라 홍콩에 어느정도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물론 반환 이후는 엄연히 '''중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하나의 중국을 중시하는 중국이 영국의 개입을 허락한 적은 일체 없었으나, 이것이 중영공동선언의 폐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국은 홍콩의 '''영유권'''을 지키는 선에서 영국의 경제적인 이권을 보장해준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반환 결정 이후 홍콩 정책에는 여러 변화가 있게 된다. 우선 홍콩 정부는 비어있는 땅이었던 신계를 1990년대부터 열심히 개발한다. 그 전에는 '1997년 되면 중국으로 넘어갈 땅' 취급당해서 영국령 홍콩 정부는 튄문 등 북부 신계 개발을 기피했다. 그래서 윈롱과 튄문 등은 황무지로 남아 있었다. 물론 신계 남부는 개발을 해서, 리카싱은 신계 남부 신구룡 신도시들을 개발하며 부동산 재벌이 되었고, 췬완(筌灣, Tsuen Wan), 샤틴(沙田, Sha Tin), 칭이 섬(靑衣, Tsing Yi) 등 빨간택시가 들어가는 신계남부 신도시들은 방역/위생정책은 물론 인종별 거주지까지 영국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쪽은 중국인 혈통의 홍콩사람들이 살라고 만든 신도시라 영국 색채가 나지 않고 거리 이름이나 지명 등도 전부 청나라 때 쓰던걸 그대로 썼다. 반환 후에는 막상 영국인 혈통의 시민들이나 외국인들이 섬 쪽의 비싼 집값을 못견디고 대거 신계 남부로 이사오게 된걸 생각하면 아이러니.
또한 이 시기부터 영국령 홍콩 정부는 제한적인 민주화를 추진한다. 구의회 선거를 완전 직선으로 바꾸고, 국회 격인 입법국에도 보통선거로 선출된 의석을 일부 마련하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런 조치들은 독재국가 중국을 긴장시켜, 중국과의 마찰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4. 반환 이후


결국 홍콩은 마지막 총독크리스 패튼의 임기를 끝으로 1997년 7월 1일 중국령 홍콩 특별행정구가 되었다. 당시 영상
천안문 6.4 항쟁의 여파 때문인지 홍콩인들이 받은 충격과 불안감은 실로 대단한 것이였으며, 실제로 과거 베트남이 공산화 되었을 때 탈출한 남베트남인(보트피플)처럼 홍콩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버린 이들도 꽤 된다. 특히 많이 간 곳이 캐나다에서도 '''밴쿠버'''다[4]. 이 시기의 홍콩을 무대로 한 홍콩 97 같은 작품도 있을 정도. 반면 중국으로의 복귀를 환영, 지지한 홍콩인들도 꽤 있었다. 그리고 홍콩 반환 이후 일국양제가 정착되고 10년간 홍콩 사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홍콩으로 복귀한 홍콩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반환 이후에는 당시 타이베이중화민국과 수교하고 있으면서 홍콩에 영사관을 설치했던 16개국[5]은 영사관을 폐쇄해야 했다.[6]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당시 중화민국과 수교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이미 1996년 11월에 1998년 1월 부로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하겠다는 선언을 했었기에(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과도기 동안 영사관을 유지하는 것을 허락받았다.[7] 그리고 파나마는 2017년에 중국과 수교한 후 홍콩에 영사관을 다시 설치했다.

4.1. 민주화 요구


2047년까지 홍콩은 기본법 및 중-영 간 합의에 따라 체제를 보장받으며, 그와 별개로 사회주의 체제를 적용하지 않는 별도 행정 구역인 특별행정구이다.
홍콩은 중국에 비하면 정치적으로 훨씬 민주주의적이며, 영국령 홍콩에 비해 현재의 중국 특구 체제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좀 더 나은 면도 있다.(행정장관 선거 등) 그럼에도 홍콩의 현재 정치체제는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여러 문제가 있으며, 또한 실질적인 면에서 들여다보면 일국양제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의 입김이나 반중공 성향 정치인 및 인사에 대한 탄압이 강해지고 있어 홍콩의 자치권 및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있다는 우려가 많다.
그러나 중국 대륙중국인들과 비교해 역사적 경험이나 기본적인 시민교육수준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홍콩 시민들의 정치 의식은 본토 중국인들과는 차이가 크다. 천안문 시위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정치 탄압을 비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에도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쓰투화(司徒華)[8]라는 사람마저 있었을 정도라 중국 공산당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홍콩의 이런 진보적인 성향을 억누르려고 시도하고 있다.
법리적으로 일국양제 원칙이 2047년이라고 폐지될 가능성은 적지만, 만약 중국 공산당이 현 추세를 유지하며 행정장관 선거나 홍콩 사법부의 임명에 대한 간섭을 계속할 경우 사실상 일국양제는 껍데기만 남고 홍콩의 민주주의나 자유주의의 실질적인 요소들은 사라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위험성이 있었다.
홍콩에서는 이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간섭이나 민주주의 쇠퇴에 반대하는 여러 활동과 시위들을 벌여왔다. 2003년 국가보안법 철회 시위, 2014년의 우산 시위, 2019년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 등 민주주의와 일국양제 존중(중국 공산당의 간섭 거부)을 요구하는 대형 시위들이 빈발하고 있다.

4.2. 홍콩 민족주의


중국 중앙정부와의 갈등과 반환 이후 이주해온 대륙인들과의 갈등이 두드러지면서 홍콩에서는 스스로를 중국인도, 영국인도 아닌 홍콩인으로 규정하는 민족주의적 여론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에서 시진핑이 집권하면서 홍콩의 자치권 및 자유에 대한 침해가 심해지자, 이런 민족주의적 여론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각은 극단적으로는 중국이 일국양제를 제대로 보장해주지 않으니 차라리 떨어져 나가겠다는 홍콩 독립운동으로 발전했다. 지지자들은 아직 적은 편이지만 대학이나 중고등학교에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 공산당과 홍콩 정부가 긴장하는 중이다.

[1] 화북, 만주 지방의 한족도 중원과는 DNA 차이가 꽤 다르고 오히려 몽골인만주족과 더 비슷해서 한족 집단 내부의 DNA 차이가 크다. 한족 문서 참고. 민족 결정에 혈통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2] 지금도 대만(중화민국)에서는 홍콩을 자기네 영토로 보고 홍콩인을 자국 시민으로 간주해 병역을 제외한 납세 등 의무를 중화민국의 직접 통치 지역인 타이완 섬에 6개월 이상 거주시 부여한다.(예전엔 병역도 부과했다.)[3]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의 1966년 파트에서는 홍콩에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며 등장인물들이 해외로 떠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사건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묘사한 것.[4] 홍콩인들의 이주로 밴쿠버에 중국계 인구가 많아져 캐나다 내 인종차별주의자들에 의해 홍쿠버(Hong Kong + Vancouver)로 비하당하기도 했다. 홍콩 반환과는 상관 없는 경우지만 왕조현도 밴쿠버에 거주한 일이 있다.[5] 감비아, 과테말라, 나우루, 니카라과, 도미니카 공화국, 도미니카 연방, 라이베리아, 벨리즈, 세인트 루시아,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코스타리카, 파나마, 파라과이, 투발루.[6] 파라과이는 영사관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일단 당시엔 아직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로 이전시켰으나, 2년 후 마카오마저 반환되면서 결국 철수해야 했다. 라이베리아 영사관은 반환 당시에는 '''중국과도 동시 수교 중이어서''' 문제가 없었으나 반환 두 달 후인 1997년 9월에 중국과 라이베리아가 단교하면서 그로부터 한 달 만에 쫓겨났다.[7] 이때 쫓겨났던 나라들 중 감비아(2013-2016), 도미니카 연방(2004), 라이베리아(2003), 중앙아프리카공화국(1998), 코스타리카(2007)는 후에 중국과 수교(괄호 안 연도, 감비아는 '13년에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16년에 중국과 수교)했지만 수교 후 홍콩에 영사관을 복구하지 않았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만이 2006년까지 홍콩에 명예영사를 두었을 뿐이다.[8] 교사 출신으로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식민지적인 교육에 반대하였다. 2011년 1월 2일 향년 79세로 타계하였으며, 워낙 홍콩 시민들에게 명망이 높아 친중파인 행정장관마저도 공개적으로 추도했다. 1월 29일에 장례식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