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E/역사

 


1. 개요
2. CWC
3. WWWF
4. 골든 제너레이션
5. 뉴 제너레이션
7. Ruthless Aggression의 시대와 PG Era
8. 리얼리티 에라
9. New Era
10. 코로나 19로 인한 무관중 시대


1. 개요



역대 WWE 프로그램 인트로[1]
현 세계 최대의 레슬링 단체인 WWE의 대략적인 역사를 설명하는 항목이다. 본 항목은 어디까지나 각 시대별로 있었던 특징과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대해 설명했을 뿐임을 알린다.

2. C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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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맨 가문의 제 1세대 인물은 권투 프로모터였던 로데릭 제스 맥맨[2]이었다. 그는 원래 프로레슬링에 대해 무관심했는데 그 당시 조셉 몬트라고 하는 사람이 조금더 대중에게 호응하는 스타일의 프로레슬링 단체를 만들게 된다. 몬트는 동업자가 죽은 뒤 뉴욕으로 활동 지역을 옮기게 되는데 거기서 제스 맥맨과 만나서 협업을 결심하게 된다. 이들은 1953년 Capitol Wrestling Corporation을 세우게 되고 NWA 체제에 가입하게 된다. 이후 제스가 1년 뒤인 1954년 사망하자 제스 맥맨의 자리는 그의 아들인 빈스 맥맨 시니어가 물려 받게 되었고, 두 사람은 좋은 파트너로서 단체를 성장 시켜 나간다.[3]

3. WWW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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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에 접어들면서 CWC는 NWA와 마찰을 겪게 되는데 당시 NWA 월드 챔피언은 CWC 소속의 버디 로저스였다.[4] 하지만 버디 로저스는 연맹 규약을 어기고, 자신이 속한 지역을 넘어서도 경기를 하곤 했는데 이런 문제로 NWA와 마찰을 겪게 된다. 몬트와 맥맨은 로저스가 계속 챔피언을 유지하길 바랬지만 로저스는 당시 규칙이었던 NWA 월드 챔피언이 연맹에 내야하는 25000 달러의 벨트의 명예에 대한 의미의 보험금을 내지 않았고, 결국 빼앗기게 된다.
당시 NWA의 여러 프로모터들이 체제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고, CWC 역시 이런 불만 대열에 참가하면서 연맹을 탈퇴한 다음 단체명을 World Wide Wrestling Federtation으로 개명하고, 버디 로저스에게 첫 챔피언의 자리를 수여했다.[5] 이후 몬트가 고령의 나이로 물러나면서 빈스 시니어는 WWWF의 유일한 소유주가 되었고, 초대 회장(President)에는 윌리 길젠버그가 선임되었다.

4. 골든 제너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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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인트로
1978년에는 2대 회장직에 전 신일본 영업부장 신마 히사시가 선임되었고, 1979년 이름을 다시 WWF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1982년 우리가 흔히 아는 그 빈스 맥맨 주니어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사업을 물려 받게 되면서 실소유주가 된다. 1984년에는 잭 터니(1935~2004)가 3대 회장이 되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WWF는 기존의 평화로운 지역구 체제를 탈피하고 확장을 시도하게 되는데 자신들의 전용 흥행 체육관인 매디슨 스퀘어 가든이 아닌 다른 지역의 체육관에서 흥행을 열고, 자신들의 비디오를 역시 외부 지역에 판매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자금이 모이기 시작한 WWF는 본격적인 확장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 시대에 활약했던 선수들이 전설적인 선수들인 헐크 호건, 랜디 새비지, 로디 파이퍼, 앙드레 더 자이언트, 얼티밋 워리어 같은 사람들이었다.[6]
실제로 공격적인 확장을 시도했지만 아직까지 자금력에서 부족했던 WWF는 위기에 처하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나온게 바로 프로레슬링의 슈퍼볼인 레슬매니아였다. 빈스 맥맨은 NWA의 스타케이드에서 그 아이디어를 따왔는데 그 정도가 아닌 더 크게 판을 키워서 사람들의 관심을 한데 모으기로 결심했고 당시 문화 트렌드를 주도했던 가수 신디 로퍼와 복서 무하마드 알리, 배우 미스터 T를 섭외한 뒤 일명 락 앤 레슬링 커넥션을 통해 전 미국인의 관심을 WWF로 집중 시키기로 한다.
그렇게 1985년에 열린 WWF 레슬매니아 I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면서 WWF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레슬링 단체로 키우는데 성공했고, 전성기를 맞게 된다. 헐크 호건의 애국자 기믹을 통해서 수 많은 미국인들은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그 체제가 굳건할 것이라고 여겼다.
매니아에게만 인기가 있던 언더그라운드 프로레슬링을 메인스트림으로 끌어올리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아니 실질적으로 메인스트림 프로레슬링을 이룬 전무후무 유일한 단체. 그 시작은 역시 1980년대 '''헐크 호건'''이라는 전설적인 레슬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헐크 호건앙드레 더 자이언트, 얼티밋 워리어 간의 대립은 전 세계적인 이슈와 관심을 일으켰고 특히 헐크 호건 vs 안드레 더 자이언트를 메인 이벤트로 내세운 레슬매니아 3는 '''9만명'''이 넘는 관중이 몰리는 등의 흥행 대박을 이루기도 했다. 이 레슬매니아 3는 '''공식 기록상 프로레슬링 흥행 중 두번째로 많은 관중이 입장한 경기이기도 하다.'''[7] 참고로 비공식으로는 북한 평양 릉라도 5.1경기장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평양 국제체육 및 문화축전'릭 플레어 vs 안토니오 이노키전이 약 15만 명의 관중을 모았지만 북한 내의 실태로 미루어 보면 관중을 강제로 동원했을 가능성이 높고 반대로 관람이 자유롭지도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흥행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5. 뉴 제너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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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기세는 1994년 터진 스테로이드 파동으로 큰 위기를 겪게 되는데[8] 헐크 호건WWF에 불리한 증언을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헐크 호건이 경쟁 단체이던 WCW로 이적하게 되면서부터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지로서는 최강이었지만 실제 경기로써는 원패턴만을 고수하던 '''재미없는''' 챔피언 헐크 호건 이후[9], 걸출한 테크니션으로서 각광받던 브렛 하트가 챔피언을 이어받게 되면서 경기 내적 발전을 이루기도 했다. 브렛 하트, 숀 마이클스, 언더테이커 등이 이 시기 메인이벤터로서 새롭게 떠오른 스타들이었다. 사이코 시드, 오웬 하트, 밀리언 달러맨, 디젤, 레이저 라몬, 제이크 로버츠, 베이더 ,빅 보스 맨등의 신진 세대, 또는 과거 세대의 선수들이 이때까지 WWF에 남아있던 선수들. 1995년에는 잭 터니가 사임하고 후임 회장직에 WWWF 시절 스타였던 고릴라 몬순(1937~1999)이 선임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인재의 발굴을 일컬어 뉴 제너레이션 시대라고 부르게 되지만 당시 WWF의 상황은 너무 좋지 못했다. 주력 선수들 대다수는 WCW로 간 상황이라 그들을 보기 위해 많은 팬층을 빼앗겼고, 약물 파동 이후 사람들이 프로레슬링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부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게다가 빈스 맥맨은 여전히 1980년대에나 하던 유치하기 그지 없던 기믹을[10] 고수해 많은 팬들의 야유를 듣게 되었다. 브렛 하트는 자신의 자켓을 도둑맞았다는 이유로 해적 레슬러와 대립하는 등 이미지가 아주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재정적으로도 엄청난 위기에 빠져서 40%의 사원들을 해고했고 그로 인해 로얄럼블에 나갈 선수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 사이 1994년에 린다 맥마흔이 CEO직에 앉았고, 1997년 8월에는 회장제 대신 커미셔너제를 도입해 골든 제너레이션 시절 스타인 서전 슬로터를 커미셔너직에 앉혔다.
그래도 여러가지 의의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현재까지 계승되는 월간 PPV인 '''인 유어 하우스''' 체계를 도입했다는 건데, 골든 에라 시기에는 4대 PPV만 개최했으나 뉴 제너레이션에 와서 인 유어 하우스 체계로 한달에 한번 PPV가 개최되어 스토리 전개가 빨라졌다. 이 인 유어 하우스는 매번 컨셉이 바뀌는데, 이 중 애티튜드에 개최된 인 유어 하우스 몇개는 이후 애티튜드 후기와 파워이즈백 시기에서 월간 정규 PPV로 승격되기도 했다.[11]

6. 애티튜드 시대


WCW헐크 호건, 스팅, 릭 플레어, 자이언트, DDP, 스캇 스타이너, 부커 T 등 기존의 선수에 더해 케빈 내시, 스캇 홀을 영입하고, 새로 영입한 2명에 더해 기존에 영입했던 헐크 호건을 끼얹어 nWo라는 프로레슬링 역사상 최고의 악역 집단을 만들어내며 시청률에서 WWF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유치한 캐릭터 놀음 대신 현실인지 각본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의 생동감 넘치고 자극적인 성인 드라마를 지향하는 한편 WWF의 아이콘이었던 브렛 하트마저 영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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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기의 대반전을 이끌어 낸 인물은, '''스톤 콜드 스티브 오스틴'''. 물론 그 전의 '''1997년 몬트리올 스크류잡'''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항목 참조.
몬트리올 스크류잡을 통해 CEO 빈스 맥마흔은 악덕 기업주로서의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다. 이런 이미지를 오히려 기믹으로 활용하는 영민함을 보여준 빈스 맥마흔과, 악덕 기업주를 겁없이 마구 응징하는 '''사원 vs 사장''' 각본을 매우 훌륭하게 수행해 낸 스톤 콜드 스티브 오스틴. WWF는 NWO로 대표되는 WCW의 자극적인 각본을 자기들도 활용하기로 결심하는 한편, 보다 더 쉽게 관객으로 하여금 감정이입할 수 있도록 발전시키고, 여기에 새로운 선수들의 발굴, 그리고 WCW에서 영입했음에도 잘 써먹지 못하던 선수들을 영입하고 푸시를 주며 빠진 로스터를 훌륭하게 메꾼다. 믹 폴리가 챔피언이 되는 장면을 기점으로 WCW로부터 상위 시청률을 탈환했으며, 이후로 WCW는 한번도 WWF의 시청률을 따라잡지 못하고 몰락한다.
물론 WCW가 제대로 대처했다면 후발 주자라는 특성상 WWF의 시청률 역전이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WCW는 제대로 대응하기는 커녕 스스로 몰락했는데, nWo라는 프로레슬링 역사상 최고의 악역 집단도 그 카리스마를 잃어가고 정치판보다 더 심각한 백스테이지 세력간 다툼[12]으로 인한 막장 경기의 양산, 젊고 능력있는 레슬러들을 키우지 못하고 올드 레슬러들의 잔치로만 부각되는 각본, 영입해놓고 제대로 써먹지 못한 경기력 좋은 레슬러들의 WWF이적으로 단체간의 수준차가 커지기 시작했다.[13] 물론 빌 골드버그의 173연승 신화가 큰 임팩트를 주긴 했지만 재밌는 경기를 만든 것은 아니며, 초반의 승리에 취한 WCW의 삽질로 인해 결국 WCW는 WWF에 인수되었고, WCW의 선수들이 WWF에 등장하며 인베이젼 각본이 전개된다. 아울러 ECW도 인수되어 ECW의 선수들이 WWF에 영입되었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를 시청률상 최전성기로 보는데, 역사상 가장 높은 RAW의 시청률은 1999년 5월 10일 기록한 8.1 레이팅이고 역대 2위는 오웬 하트 추모 특집으로 열린 5월 24일에 기록한 7.2이다. 물론 이는 TV 쇼의 전체 시청률이고 세그먼트 중 가장 높았던 것은 1999년 9월 27일 믹 폴리와 더 락의 The Rock This Is Your Life 세그먼트가 기록한 8.4로, 오늘날 3.0을 기준으로 왔다갔다 하고 4.0 근처만 가도 대박이라 치는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물론 지금은 예전에 비해 방송국이나 경쟁 프로그램의 수가 훨씬 많아진 점도 고려해야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엄청난 기록인 건 맞다. 게다가 2010년에 RAW는 2.8이라는 낮은 수치를 기록해 빈스의 주름살을 늘어나게 만들었다.[14]
과거 뉴 제네레이션즈에 없었거나 비중이 미미했었으나 애티튜드 시대에 떠오른 인물로는 스티브 오스틴, 더 락, 트리플 H, 믹 폴리, 커트 앵글, 케인, 빅 쇼, 크리스 제리코, 크리스 벤와, 랍 밴 댐, 에지, 크리스찬, 하디 보이즈, 더들리 보이즈, 에디 게레로 등이 있다.

7. Ruthless Aggression의 시대와 PG Era


애티튜드 시대의 종언은 스티브 오스틴더 락이 은퇴한 2002년 또는 2003년으로 보며, 그 이후를 루슬리스 어그레션이라 한다.[15]
더 락과 오스틴이 은퇴한 이후에도 애티튜드 시절부터 뛰던 선수들과 성장한 유망주들, WCW와 ECW를 통해 유입된 선수들[16]은 WWE를 지탱했다. 브록 레스너빌 골드버그가 데뷔했고 돌아온 릭플레어는 에볼루션을 만들어 RAW를 지배했지만 RAW의 모든 타이틀을 독점한 탓인지 시청률은 하락했다. 체어샷으로 인한 선수들의 뇌 손상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던 와중에 크리스 벤와의 일가족 살해 사건이 터지면서 WWE는 여론의 엄청난 공격을 받고 자칫 잘못하면 회사가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기존의 노선으로는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고 판단한 WWE는 시청 등급을 Rated PG-13에서 Rated PG로 낮추면서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면들을 순화, '온 가족의 WWE'라는 목표를 가지고 PG 시대를 시작하게 되었다.
기존 애티튜드 시대를 실시간으로 시청한 마니아 중 상당수는 애티튜드 시대를 그리워한다. 반대로 2008년 이후 PG 시대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애티튜드 때의 유혈이 낭자한 WWE가 너무 자극적이라 부담스러워서 보기 힘들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애티튜드 시대의 지나친 폭력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도 말이 많기도 했고 상업성으로 따지면 오히려 PG 시대의 수익이 더 많기 때문에 PG 시대가 장기화되리라는 전망이 압도적이다. 거기다 PG 시대에는 다수의 인디 레슬러들이 영입되고 멕시코나 일본 쪽의 레슬링도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 특유의 화려한 경기운영 능력으로 인해 애티튜드보다 경기력 면에서 확장되었다.[17]
루슬리스 어그리션ㅡPG 시대엔 존 시나, 바티스타, 랜디 오턴, CM 펑크, 레이 미스테리오 같이 애티튜드 시대엔 데뷔하지 않았거나 애송이에 불과했던 선수들이 메인으로 도약하게 되었으며, 애티튜드 시대에 활약하던 선수들도 일부 건재해 같이 경기를 이끌어갔다. 하지만 브록 레스너,릭 플레어, 숀 마이클스, 랍 밴 댐, 커트 앵글, 에지, 제프 하디, 빌 골드버그등의 스타들이 은퇴하거나 WWE를 나오면서 이름값에서는 애티튜드 시대에 비해 확실히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 때문에 WWE는 존 시나의 사례처럼 엄청난 역반응을 각오하면서도 새로운 스타를 띄우는 한편 더 락과 같은 과거의 스타의 복귀를 이끌어 부족한 이름값을 메꾸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지만 스맥다운은 1999년 첫 방송부터 PG등급이었다.

8. 리얼리티 에라


일반적으로 2011년의 CM 펑크파이프밤을 시작으로 본다. 그리고 리얼리티 시대의 도래를 팬들에게 각인시킨 것은 언더테이커의 충격적인 패배가 있었던 2014년의 레슬매니아 30이다.

리얼리티 시대에 이르러 WWE는 기존의 만화적이고 비현실적인 기믹을 줄이고, 실제 상황을 접목시킨 현실성 위주의 스토리텔링을 짰으며, 단순한 엔터테인먼트에 그치지 않고 보다 현실적인 스포츠로 보이도록 했다. WWE 네트워크를 출범시키는 한편 유튜브 등 적극적인 인터넷 매체의 활용도 리얼리티 시대의 특징인데, 레슬매니아 등 주요 PPV가 있을 때, PPV 전의 선수들이 준비하는 모습, PPV가 끝나고 백스테이지에서 선수들이 나누는 대화 등을 영상으로 만들어 리얼리티성을 높였다. 그리고 기존의 육성 프로그램을 발전시킨 NXT 브랜드 설립을 통해 새로운 선수들의 유입을 꾀했다. 이를 통해 ROH나 타 인디 단체에서 활약하던 선수들이 유입되었다. 이로서 WWE는 PG 등급을 지키면서 선수들의 전반적인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데에도 성공했으며 2015년 기준 WWE의 인재 풀이 매우 좋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레슬매니아 31에서 트리플 H스팅의 경기를 제외한 모든 경기에 NXT 출신들이 참여했고[18] 게다가 메인 이벤트를 2년 연속으로 NXT 출신 선수가 장식하는 등 적극적으로 NXT를 밀어주는 모습.
하지만 경기력의 향상과는 별개로 여전히 스타성의 부족은 WWE의 발목을 잡고 있는 요소이다. 루슬리스ㅡPG시대에 활약했던 선수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가운데 새롭게 등장해 CM펑크의 탈단을 메꾼 대니얼 브라이언은 부상으로 은퇴하며 이탈했었고, 로만 레인즈는 과거 존시나보다 더 큰 역반응으로 곤욕을 치르다 백혈병으로 은퇴했다. 세스 롤린스는 성공했지만 세스 롤린스가 챔피언일 때의 시청률은 낮았고, 에이드리언 네빌 존 목슬리는 결국 WWE를 나갔으며 케빈 오웬스, 나카무라 신스케, 핀 밸러, 세자로, 루세프, 칼 앤더슨, 루크 갤로우스 등은 각자 이런 저런 이유로 큰 푸시나 인기를 유지하지 못했다. 각본이 막장이니 푸시를 받아도 크게 인기를 끌기 쉽지 않으며, 푸시를 주는 동안 큰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푸시를 끊고 다른 선수에게 넘긴다. 결국 여기 저기서 인디 괴물들 끌어모아봤자 아이콘을 만들어내지 못했으며 리얼리티 시대를 지탱한 것은 PG시절의 아이콘인 존 시나와, 오랜만에 돌아온 브록 레스너였다.
또한 인재풀이 들어차면서 기존의 라이트한 여성과 아이들 팬들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에 대해 WWE의 열성적인 레슬링 팬들은 어느 때보다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새롭게 무적 선역 기믹으로 키우려던 로만 레인즈의 역반응이라든가, 루세프를 상대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프로모를 밀었음에도 불구하고 WWE 레슬매니아 31에서 존 시나에게 돌아온 것은 7만명의 야유 합창이었다.
새로운 스타 유망주를 그들의 개성으로 선수를 키울려는게 아닌 '차세대 존 시나'로만 만들려는 점이 지적되는데, 무적 선역 기믹의 필요성은 단체를 먹여살릴 정도로 중요하고 존 시나가 영화 촬영 등 다른 일에 매진하는 WWE 입장에서 차세대 무적 선역 기믹을 만드는 것은 필수적이긴 하지만 결국 존시나의 대체재를 만들지 못했다.
시청률에 대해선 시청률이 전부는 아니라는 입장과, 그래도 역대 최악의 시청률을 찍을 정도니 심각하다는 입장으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 WWE네트워크 가입자는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고 유투브 구독자와 조회수가 엄청나다는 점으로 화제성이 죽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후자의 경우 WWE네트워크 가입자 수도 늘고 있긴 하지만 점차 증가폭이 감소하고 있고 스페셜 이벤트 판매 단가는 PPV 시절보다 더 떨어져서 수익 개선이 되고 있지 않으며, RAW에서 메인이벤트가 시작되기도 전에 관객들이 대거 이탈했다는 것은 분명하게 위험한 현상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9. New Era


WWE가 2016년 7월 19일 WWE 드래프트 2016 이후부터 New Era라는 말을 강조하고 브랜드 확장 2기가 시작되면서 New Era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12년 이후 다시 RAW와 스맥다운이 분리되었고 새로운 로스터들과 브랜드들의 새로운 로고, 각 브랜드의 새로운 아나운서, 새로운 인트로 등이 보여졌으므로 New Era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시점이다.
빌 골드버그, 제프 하디에지, 존 모리슨,바비 래쉴리, 쉘턴 벤자민 같이 과거 WWE를 거쳐 갔던 베테랑 선수들을 복귀시키는 한편 과거 스팅을 영입했던 것처럼 TNA의 몰락을 통해 AJ 스타일스, 사모아 조같이 비 WWE 단체에서만 활약했던 선수들도 영입했으며, 코피 킹스턴이나 드류 매킨타이어, 돌프 지글러 같이 PG시대의 선수들이나 메인 이벤터로 도약하지 못했던 선수들에게 다시 푸시를 주며 새로운 스타를 키우는 중.
어소리티 각본이 끝나고 셰인 맥마흔이 복귀하면서 예전보다 각본이 좋아졌다는 평이 있다. 또한 로스터 분리를 통해서 그동안 푸시를 받지 못했던 선수들이 기회를 받으면서 팬들의 호응도가 높아졌다.
하지만 로스터 분할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어서, 2017 WWE 슈퍼스타 셰이크업 이후부터 각종 부작용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로만에 대한 역반응은 이제 당연한 수준이고 개연성 없는 각본 문제라던가, 인도시장 공략으로 인한 시청자 감소, 크루저웨이트 디비전의 흥행 부진 등등. 특히 스맥다운은 관중들이 워낙 안 들어와서 카메라에 잘 안 잡히는 입장로 기준 우측 관중석은 아예 통째로 가려놓고 진행하고 있다. 이렇게 밀어주던 로만도 백혈병으로 인해 은퇴하였고, 남아있던 선수들도 에이드리언 네빌 존 목슬리의 사례와 같이 각본의 문제나 힘든 일정, 적은 푸쉬해 실망해 AEW 등의 단체로 이적하고 있는 등 상황이 그렇게 순탄치는 않아 보인다. 과거 WWE가 짱짱할 때는 TNA에서 선수 데려가도 큰 타격이 없었지만 지금 WWE가 그렇게 여유로운 입장은 아니었다. 정작 NXT 시절부터 트리플H가 공들인 선수들 역시 메인으로 이적했지만 메인로스터가 브랜드 분리 이후로 많아진 로스터를 감당하지 못해서 거의 선수들이 절반정도 출연을 못하고 있고, 타단체가 잘되는걸 볼수 없어 계약으로 묶어두는 무리한걸 했다.
2018년 미국의 지상파 채널 FOX가 WWE 스맥다운과 5년간의 방송 계약을 공식 발표했고 2019년 10월 4일, 스맥다운이 20주년을 맞이하는 날 FOX에서 시즌 프리미어를 가졌다. 이날 스맥다운에서는 많은 레전드들의 일회성 출현했다.

10. 코로나 19로 인한 무관중 시대


2020년 2월, 중국 우한발 코로나가 미국에까지 퍼져 수많은 감염자들이 발생하자, WWE는 캐피톨 레슬링 센터에서 무관중으로 쇼를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레슬매니아가 끝난 2020년 4월에는 빈스 맥마흔이 쇼에서 활용하지 않는 다수의 선수를 방출시키는 해고러쉬가 발생했다. 코로나가 끝나도 이들이 다시 WWE에 영입될지는 미지수일 뿐만 아니라 빈스 맥마흔이 자버 취급하거나 출연시키지도 않고 활용하기 싫은 선수들 대다수가 불만을 들어내며 임팩트 레슬링 & 올 엘리트 레슬링로 가버리면서 올 가능성은 거의 낮을 뿐만 아니라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한다. [19] 코로나로 인해 메인뿐만 아니라 NXT에도 비상이 생겼고, 미국 봉쇄 조치로 인해 영국을 오 갈수 없게 되어 NXT UK 녹화 및 NXT UK 소속 선수들이 미국으로 올 수 없는 사태가 되었다. [20]
레슬매니아 36에서 언더테이커 vs AJ 스타일스의 경기와 브레이 와이어트 vs 존 시나의 경기를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제작해 많은 팬들의 호평을 얻었고, 매 PPV마다 특별한 스타일의 경기를 진행하고 있다. 이 경기를 보고 팬들은 '''덥플릭스''', '''시네마틱 에라'''등 다양한 별칭을 지어주었으며, 머니 인 더 뱅크 2020의 머니 인 더 뱅크 매치는 퍼포먼스 센터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경기를 진행해 '''덥닝맨'''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그렇게 꾸역꾸역 무관중임에도 위클리쇼와 PPV를 진행해 왔지만 결국 올 것이 왔다. 6월 9일에 WWE RAW 녹화를 위해 퍼포먼스 센터 현장에 있었던 수련생 1명이 확진판정을 받았다. #. 이날은 완전 무관중이 아닌 관중석에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의 녹화였기 때문에 누구를 통해 감염되었는지 확인조차 되고 있지 않았다. 더 충격적인 건, 브라이언 알바레즈의 트윗에 따르면 이날 관중석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는데, 이것이 WWE의 요구사항이었다고 한다. WWE의 실세로 불리는 고위임원 케빈 던은 마스크 쓰고 관중석에 있을거면 아예 오지 말라고 관중에게 말했다고 한다. #.[21][22] 결국 6월 말부터는 관중석 인원들 전원 다 마스크를 착용시켰다.[23]
계속 퍼포먼스 센터에서 진행하는 것에 만족을 못하는 빈스 맥마흔으로 인해 다른 장소를 물색하다가 8월 21일부터 플로리다 주 올랜도 암웨이 센터 썬더돔에서 진행해 관중석마다 LED 모니터를 통한 가상 팬들로 체워 진행하게 된다.[24] 코로나로 인해 봉쇄조치로 미국에 올 수 없는 선수들이 다시 미국에 들어 올 수 있게 되었고 12월 11일부터는 썬더돔이 트로피카나 필드로 옮겨서 진행된다.

[1]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WWE를 상징하는 인물들과 장면들을 넣은 인트로가 있다.[2] 셰인, 스테파니 남매의 증조 할아버지.[3] WWE에서는 이 시대를 제대로 처주지 않는 편이다. 주로 WWWF 시절 이후만을 미디어 등에서 거론하는 편.[4] 원조 네이쳐 보이로 릭 플레어가 그를 동경해 별명을 따랐다고 한다.[5] 이런 탈퇴가 있었지만 NWA와는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6] 하지만 이런 무리한 확장을 우려한 빈스 맥맨 시니어는 "그러다가 강물만 흐려놓는다."면서 주의를 줬다고 한다.[7] 지금은 레슬매니아 32에서 기록이 경신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호왈 9만이지만 실제로는 약 7~8만 정도였다고.[8] 이때 빈스 맥맨은 가족들을 모아두고 자신이 감옥에 갈지도 모르며, '''"감옥에서 청부 살해 당할지도 모른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WWF의 확장 과정에서 전국의 프로모터들에게 원한을 많이 샀기 때문이라고(WWE 50에서)[9] 사실 헐크 호건도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을 하다 왔기 때문에 테크닉에 부족함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WWF의 당시 시대상 원 패턴 프로레슬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게 그 시절 유행이었기 때문. 오히려 헐크 호건의 전성기 시절에는 WWF내에서 테크니션은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10] 귀족, 치과 의사(이 기믹으로 유명했던 것이 글렌 제이콥스, 바로 '''케인'''이었다), 쓰레기 청소부 같은 기믹도 있었다. 심지어는 소도 있었다.[11] 풀리 로우디드, 저지먼트 데이, 언포기븐, 백래쉬, 노 웨이 아웃 등이 인 유어 하우스 출신이었다.[12] WCW는 오너인 테드 터너프로레슬링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보니 유명 레슬러(헐크 호건, 케빈 내시 등)나 프로모터(에릭 비숍)들이 백스테이지를 좌지우지하는 일이 많았다. 반면에 WWE는 예나 지금이나 프로레슬링에 잔뼈가 굵은 빈스 맥맨이 권력을 꽉 잡고 있어서 정치적인 문제는 거의 없고 심지어 사위인 HHH조차도 빈스 맥맨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13] 이때 크리스 제리코, 크리스 벤와, 에디 게레로 같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들이 WCW를 떠나 WWF로 이적했고 WWF에서는 이들을 메인으로 내세워서 다수의 명경기들을 뽑아냈다.[14] 현재는 WWE 자체 방송국인 WWE 네트워크가 생겼고 회원수가 150만을 넘을 정도라서 이젠 시청률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전에도 워낙 이래저래 방송국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던 시기라 시청률에 대해서는 원래 그렇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었다. 당시 이게 이슈가 되었던 것은 그 시절에는 인터넷보다 아직은 TV 시청률이 더 중요하던 시기라서 그런 것일 뿐.[15] 국내 한정으로 파워 이즈 백이라는 명칭이 쓰였으나 정식명칭은 당연히 아니다.[16] 사실 이들은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안 그래도 로스터가 넘쳐나는데 이들에게 줄 푸시도 없었고, WWF의 팬들도 WCW의 선수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개그 캐릭터화되었고, 이적 후 NWO 창설로 WWF의 숨통을 끊을 뻔했던 케빈 내쉬와 스캇홀은 각각 부상과 사고로 WWE를 나가게 되었다 . 또한 ECW도 사부샌드맨, 타미 드리머 등 대부분의 선수가 큰 푸시를 받지 못하고 사라졌다.[17]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애티튜드 시절의 경기력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애티튜드 시절은 그동안 단순한 기술 조합에 의존한 덩치 큰 레슬러에 가려졌던 크리스 벤와, 커트 앵글 에디 게레로, 랍 밴 댐,크리스 제리코 등의 테크니션들이 전면에 설 수 있던 시대였다. DX더 락, 스티브 오스틴, 믹 폴리가 미칠듯한 엔터테이먼트의 재미를 선사하면서도, 그동안 숀 마이클스등의 예외가 아니고서야 전면에 서지 못했던 작은 체구의 선수들에게 푸시를 주면서 레슬링을 보는 재미도 만족시킨 것이 WCW와의 차이점이었다. WCW는 nWo빌 골드버그의 연승행진으로 엔터테이먼트로서의 재미를 충족하긴 했지만, 정작 경기 자체는 재미없고 경기를 재밌게 이끌어나갈 능력이 있는 선수들을 푸대접해서 WWE로 보낸 것이 WCW의 패배 요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PG 시대는 애티튜드 시대가 이끌어낸 경기력 발전이 지속된 시대라고 보면 될 것 같다.[18] 경기에 참여한건 아니지만 NXT소속 멤버중 일부가 트리플 H의 등장신에서 터미네이터로 분한 트리플 H와 함께 등장한 저항군들로 등장했다. WWE 레슬매니아 22의 존 시나 등장신때 수행원으로 당시 산하단체 소속이던 CM 펑크가 등장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 이것까지 치면 진짜로 모든 경기에 NXT 출신들이 등장한게 된다.[19] 예외적으로 드레이크 매버릭의 경우는 SNS을 통해 방출된 심경을 들어내며 잠정 크루저웨이트 토너먼트에 참가해 방출된 상태에서 재계약해 트리플 H 덕분에 NXT에서 활동하고 있다.[20] WWE와 계약을 맺고 수련생 신분으로 미국에 거주중인 선수들 & 메인로스터 일부를 제외한 거주지가 미국이 아닌 선수들 & 수련생들 역시 미국으로 올 수 없는 상황이다.[21] 이런 일이 일어났음에도 현재 빈스 맥맨은 7월말부터 본격적으로 관중들을 수용하려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많은 팬들이 우려하고 있는 것은 덤.[22]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런 상황속에서도 무리하게 관중들을 받아야할정도로 WWE의 자금 사정이 안좋은 걸 수도 있다. 빈스 맥맨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현재의 비판여론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을테니.[23] 현재는 퍼포먼스 센터에서 다른 경기장으로 바꾸었지만 결국 현 사태를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관중을 받는대신 경기장주변에 1000개의 썬더돔을 설치해 시청자들이 집에서도 경기를 볼 수 있게 하였다.[24] 일부 LED 모니터에 나오는 팬중에 장난삼아 본인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팬들도 있어 방송사고도 터졌고 WWE에선 곧바로 해당 팬들을 차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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