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병

 


1. 개요
2. 궁병의 역사
2.1. 동양
2.2. 서양
2.3. 궁병의 특징
2.4. 실전 궁술 복원
4. 그 외의 참조하면 좋은 문서들
5. 창작물에 나오는 궁병
5.1. 목록


1. 개요


弓兵. 을 무기로 다루는 병사. 궁수(弓手)라고도 쓰며 궁사(弓師)라고도 쓴다. 영어아처(Archer)나 보우맨(Bowman) 등으로 쓴다.

2. 궁병의 역사


고대~근세까지의 전장에서 보병의 엄호를 받으며 멀리서 적군을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비슷한 역할로 쇠뇌를 쓰는 노병, 투창병, 돌팔매 부대 등도 존재했지만 세계사적으로 궁병이 원거리 공격 병과로서 가장 보편적이었다.
고대의 다른 무기와 비교하면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명중률의 제약, 방패갑옷에 쉽게 막히는 공격, 그리고 화살이 공짜는 아니었기에 주력 병과로 활약한 시기는 거의 없었다. 많이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고대 그리스시대에도 이미 용병업은 있었기 때문에, 돈이 많으면 궁병을 많이 양성하는 것보다 용병을 고용하는 편이 훨씬 싸고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궁병을 채용한 가장 큰 이유는 기병을 양성하지 못하는 국가에서 기병을 상대하기엔 궁병이 최고였기 때문이었다. 보병이 기병을 쫓아가다간 지쳐서 역으로 박살날 위험이 있었고, 기병을 맞붙이기엔 비용 차이가 어마어마 했기 때문에 궁병이 그나마 싸고 만만했던 것이다. 즉, 상성 관계가 기병>보병>궁병>기병이 되었던 것.
하지만 이론과 달리 창과 활을 동시에 장비하지 못했던 궁수들은 쐐기진을 짜고 맨 앞사람이 화살막이가 되어 닥돌해오는 기병들에게 쉽게 털렸다. 사거리 100m 남짓한 궁으로 그정도 거리는 수 초 내로 답파할 수 있는 기병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궁수는 포병이 아니라서 아군을 앞에 방패로 세우고 적들에게만 쏘는 짓이 불가능하다. 미리 장전해놓을 수 있는 총과 달리 활시위를 당기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 것도 문제인데, 밖에서 장창병이 시간을 끄는 사이 안에서 장전하다가 기병이 재돌격을 위해 후퇴할때 신속하게 안과 밖을 뒤집어 총알을 먹여줄 숮있는 테르시오와 달리 그 다음 사격을 위해 나와 장전하다 그대로 쓸려 죽는다. 괜히 활이 석궁이나 총 같은 차세대 무기에게 빠르게 자리를 넘겨준게 아니다.
궁병은 오히려 공성전에서 두각을 내밀었다. 공성전에선 기병은 아예 쓸모가 없어졌고, 그래서 기병이 아닌 보병을 상대해야 하는데 야전과 달리 성벽의 존재가 적의 접근을 차단해주고, 때에 따라서 역공세를 취하게 될 때에도 높은 곳이 확보된 상태이기 때문에 아군의 뒤통수에 화살을 박을 위험성이 적어서 공성전 에서만큼은 궁병의 활용도가 매우 올라갔다. 그리고 적이 방진을 짜고 있다면 평소엔 그냥 빗나가거나 방어구에 막히고 말았을 화살이 아무렇게나 쏴도 미처 방어구가 가려주지 못하는 곳에 적중하기 좋게 모여있는 형세가 되어, 기병이 돌격하기 전에 미리 궁병으로 공격해 적의 사기를 꺾거나 적을 유인해 지치게 만드는 데도 유용했다. 유목민족은 스웜전술로 대표되는 궁기병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야전에선 무적을 자랑하던 시절도 있었다. 무장 수준이 낮을수록 궁병은 핵심적으로 자리하여 중세 일본에서는 부상 및 사망자의 8할이 활에 의해 발생했다고 한다. 이는 유미토리 같이 마궁수가 대다수였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야 겠지만.
서양에선 갑옷이 기형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끝내 일반적인 활로는 중무장한 기사를 뚫을 수 없는 사태까지 이르자 연사력을 대폭 희생하는 대신 위력을 높인 석궁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유명한 제노바 석궁병도 파비스가 없으면 장궁한테 연사력에서 밀려 개박살 나 크레시 전투같은 참사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석궁조차도 장다르메 등 흔히 연상되는 중세 말 서양의 정예 깡통 기병들의 판금 갑옷을 뚫기 버거워지고, 화승총이 개발되자 갑옷을 뚫지 못하고 숙련되기도 힘든 궁병의 자리는 위태위태 해졌지만, 근대화가 한순간에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화약무기 덕에 갑옷이 점차 경무장화 되자 틈새시장을 노려 아직 현역으로 굴러가긴 했다. 비가 올때는 화승총보다는 그나마 쓸모가 있었지만 어차피 아교가 풀려 도찐 개찐.
이후 총검이 개발되고 총의 성능이 오르자 파이크맨과 궁수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전열보병에게 자리를 완전히 내주고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2.1. 동양


동양은 상대가 가난한 유목민족 이기 때문에 위력 보다는 연사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했고, 서양과 달리 많은 기병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궁병의 취급이 좋았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기병으로 구성된 북방 유목민족과 맞설 일이 많았고, 그만큼 유목민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표적인 예로 호주머니와 환도. 아울러 한반도 전체에 걸친 백두대간의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인해 산성이나 읍성을 중심으로 한 수성/공성이 주요 전쟁 양상이었기 때문에 활도 많이 썼다.[1] 산해경이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로부터 시작하여 중국의 많은 기록에서는 삼국시대에서부터 조선까지, 한민족 국가들의 뛰어난 궁병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특히 조선 시대에 이르면 활쏘기는 선비의 기본 소양일 뿐 아니라 기생과 같은 아녀자들까지도 취미로 활쏘기 내기를 할 정도로 대중적으로 보급되었다. 오죽하면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후, 조선총독부에서 내린 치안 관련 칙령 중 하나가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활을 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뛰어난 궁수들이 많다. 명궁 항목 참조.
일본에서는 궁수를 유미토리(弓取り)라고 한다. 직역하면 '활잡이'라는 의미지만 이 단어는 꼭 활잡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는 않았고 '무명이 뛰어난 무사'를 가리키는 일종의 관용구였다. 유미토리라는 말이 '무사'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진 이유는 헤이안 시대 말엽 겐페이합전 시기의 무사들의 주된 무기가 크기가 긴 일본식 활이었기 때문. 이 시대에는 주로 서로를 향해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대는 것이 주된 무사들의 대결 양상이었다. 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활을 더 이상 무사의 상징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이 말만은 남는다. 마치 '중장기병'을 뜻하다가 '귀족 무사 계급'을 뜻하게 된 영단어 Knight, 라틴어 Equites와 같은 경우.

2.2. 서양


서양, 특히 고대엔 크레타 궁병과 스키타이인 궁수가 유명하였고, 중세에는 영국군장궁병이 유명하였다. 다만 고대 그리스에선 궁병을 매우 천시하였다. 남자라면 중갑 입고 전선에서 부딪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지라 멀리서 "안전하게" 화살을 쏘아대는 궁병은 찌질한 병종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문학에서 많이 보인다. 극단적인 예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헤라클레스"에선 다름아닌 '''헤라클레스'''가 활을 쏜다는 이유로 비겁한 겁쟁이라는 모욕을 하는 인물이 나올 정도다. 이때가 이미 헤라클레스가 히드라등 온갖 괴물들을 때려잡은 이후인데도 '''단순히 활을 잘 쏘니까 겁쟁이다'''라는 논리로 비난한 것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 곧바로 활은 전략적인 무기라는 반론이 나오긴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궁병을 얼마나 천시했는지 볼수 있는 예. 어찌보면 1차 대전까지 저격수 천시하는 풍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와 그리스, 그리고 마케도니아 왕국까지 스키타이인 궁수는 매우 중요한 전력이었다. 특히나 스키타이인들은 유목민족 답게 말 위에서 활을 쏠 수 있기에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 뿐만 아니라, 그와 싸웠던 알렉산드로스 대왕 조차도 동방원정 후기에 스키타이인 궁기병을 용병으로 택하여 데리고 다녔다.
궁사는 대체로 평민 계층(자영농민인 젠트리, 요먼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활이 나름대로 비싸고 이정도쯤 되는 계층이면 그럭저럭 군사 훈련을 할 여력이 되는 중류층이기 때문인 듯하다. 영국에서는 이것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활쏘기만 하라는 것을 국가 정책으로 삼기도 했으며, 이렇게 훈련한 덕인지 일반적으로 이 사람들은 팔과 상체 근육이 약간 비정상에 가까울 정도로 발달되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시대 궁병들의 유골을 발굴해서 보면 어깨뼈의 형태 자체가 일반인과 다르게 변형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그러나 중세에 이르자 중무장 기병대가 주력이 된 서유럽의 경우에는 영국을 제외하면 개인 및 국가의 경제 능력이 점차 향상되면서 비싸지만 사용이 쉽고 위력이 강력한 쇠뇌로 갈아타고, 총기가 보편화된 이후로는 비유럽권 지역에서도 극소수의 전문 병력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전열보병 시대가 되면 일정 비율의 궁병, 궁기병 편제를 유지하였던 동아시아 지역이나 총기 전래가 아예 되지 않은 오지를 제외하고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전통을 중시하는 풍조가 강했던 영국에선 근대 이후로도 수차례 장궁병 병과를 부활시키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2차대전 당시 유일무이한 궁병(?)으로 활약했던 잭 처칠도 이런 풍조하에 나타난 인물.

2.3. 궁병의 특징


궁병 최대의 장점은 양성 비용이 대체로 싸다는 것이다.[2] 활의 가격은 재질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중갑과 금속무기보다는 훨씬 저렴했다. 궁술 역시 백병전을 익히는 훈련보다는 훨씬 단시간 내에 습득이 가능했기 때문에 전사계층이 아닌 징집병들도 빠른 기간 내에 기본적인 사격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참고 영상 일반적으로 투사무기들이 근접무기에 비해 교육기간이 짧은 편이다. 단, 활은 모든 투사무기 중 배우기 어려운 편에 속한다. 개개인의 명중률도 전쟁에서처럼 집단으로 운용할 경우 탄막을 펼치는 식으로 어느정도 보완이 된다.[3] 일개 징집병들이 전장에서 레골라스마냥 뛰어다니고 할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다만 입문 자체가 싸게 먹힌다는 거지, 제대로 된 탄막이 형성될 수 있을 정도로 훈련시키려면 이쪽도 비싼 건 매한가지였고, 화살도 소비량이 심각한 주제에 제대로 된 재료로 제대로 만들어야 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유지비는 많이 들었다. 따라서 궁수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부농이나 상인 사냥을 생업으로 사는 사냥꾼, 혹은 전문용병이 담당하였다. 가난한 농민들은 전쟁시에는 활이 아닌 집에서 쓰던 농기구나 혹은 나무를 깍아서 만든 몽둥이(클럽,스태프)로 무장하였다. 이건 동서양의 차이가 있다. 서양은 기본적으로 병사가 모든 무장을 구비해야 했으나 동양권의 경우 전부 또는 일부를 국가가 지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단순히 농민 궁병이라도 단도 정도는 쥐어줬다.
궁병이 보편화 되기 전인 고대에는 이 자리를 투창병이나 투석병이 차지했는데, 이 경우에는 활에 비해 무기인 투석구의 제조와 투척할 돌멩이 수집은 활과 화살에 비해 그야말로 공짜나 다름없을 정도로 쉽고 싸게 준비 가능하며, 위력에 대해서도 활을 능가했지만 제대로 써먹으려면 활을 능가하는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역사적으로 일부를 제외하곤 소수의 전문가[4]를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부 지방에서 영국이 궁수 양성을 위해 수시로 활쏘기를 장려했던 것처럼 평시에 투석을 즐겼던 지방[5]에서 전시에 동원하는 일종의 예비군 방식으로 비교적 대규모로 충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대까지는 이러한 군제가 다수 있었으나 시대가 지나며 궁병에 비하면 편제상으로 휠씬 줄어들게 되었다.
기계식 활인 쇠뇌의 경우 활과 투석구를 모두 아득히 상회하는 무지막지한 위력[6] 그리고 현대의 총처럼 걸어놓고 나서(장전) 편하게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기면 그만이기에 활에 비해 익숙해지기 굉장히 쉽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기계장치가 추가된 활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일반 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작 방법이 복잡하고, 덕분에 만드는 기간이 오래 걸리는데다 억소리나게 비싼 가격도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대규모 병력에 지급하기에는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관계로(훈련 시간은 훨씬 짧지만) 중세 유럽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 이전이나 이후로나 일정 수준 이상으로 비중 있게 쓰인 적은 많지 않았다. 한국사에서는 신라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특히 쇠뇌를 많이 사용했고 그 품질은 당나라에서도 높게 쳐줄 정도였다. 당나라에서는 전군의 3분의 1을 궁수 겸 쇠뇌수들로 채울 정도로 비중을 높게 두었다. 이들은 단순한 궁수들이 아니라 적이 접근하면 창을 들고 대응하는 다목적 보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활이든 쇠뇌든, 궁수 양성에는 많은 시간이 들기 마련인데, 여기에 비용(화살[7])도 많이 드는 탓에 질 좋은 궁수부대를 양성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잉글랜드나 조선, 터키 등에서 궁수부대를 편제하기 쉬웠던 것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활쏘기를 즐기는 문화 덕이 매우 컸다. 특히 말을 탄 상태에서 활을 쏘는 기마사격(기사, 騎射)은 굉장히 고급 기술이며, 몽골 등 북방기마민족처럼 기사 자체가 어려서부터 생활화된 민족이 아니면 대규모 기마궁수 양성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들었다.
많은 매체들이 궁병들은 오직 활만 갖고 다니며 그 탓에 원거리에서는 유리하나 근접전에서는 적들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궁병이라고 해서 활만 달랑 들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영국 궁사들은 상당수가 꽤 잘 사는 편이었으므로 갑옷도 잘 장만해서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영국 궁사들은 아쟁쿠르 전투에서 진흙탕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프랑스 기사들에게 근접전을 걸어 뼈와 살을 분리해놓은 경우도 있고, 그 외에도 적국 보병이 영국 보병대를 부수고 영국 궁병대에 달려들었다가 오히려 궁병 부대에게 근접전에서 발려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에는 전문적으로 양성된 인력이 있을지언정 병과에 따른 구분이 세분화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이 정말로 중무장할 여건이 되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프랑스 기사들이 대놓고 거렁뱅이 집단이라고 비웃을 정도로 갑옷이 부실했다는 말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이들이 이질 등으로 고생하는 중이라 갑옷이 있었더라도 입을 여건이 안됐다는 것과, 이렇게 비웃었던 기사는 평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갑옷이 좋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웬만큼은 챙겨입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실제로 기사가 궁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중세시대에 그린 전투화를 보면 궁병들이 부무장으로 칼이나 메이스 같은 철퇴를 상비하고 있고 정 안되면 나무를 대충 깎아 만든 몽둥이라도 장비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있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로 궁수들에게 칼이나 철퇴 그것도 아니면 육모방망이로 부무장 시켰다. 예초에 조선이나 중국을 제외하면 활을 능숙하게 사용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재력이 소비되었고 주로 앞에서 말한대로 재력있는 부농이나 상인 혹은 전문용병이나 사냥꾼들이 궁병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냥꾼이 활만 들고 다니는 것도 매체의 왜곡이다. 위험한 사냥을 생업으로 사는 사람들이 활만 들고 사냥하는 경우는 없다. 사냥하다가 늑대나 곰을 만나게되면 활로 상대하는데 한계가 있어 활뿐만 아니라 창이나 단검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여러 사람들이 같이 사냥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북병들이 총이나 활만큼 창도 잘 다룬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이들이 사냥꾼이었기 때문이다. 총탄이나 화살이 빗나가면 바로 창으로 바꿔 들고서 목표물의 심장을 귀신같이 찔렀다고 한다.
무엇보다 제대로된 활과 화살도 제작-유지 비용이 많이 깨진다. 거기다 궁병 1명이 들고 다닐수 있는 화살 수도 많아야 100개 미만이었고 화살이 떨어지거나 적이 근접했을 경우를 대비해 부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현대전에서도 탄약이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 소총 말고도 권총이나 군용나이프를 지급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최악의 경우 보조 무기로 적과 싸우라는 뜻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궁수는 일반적으로 근접전에서 적과 맞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적을 공격하는 역할을 맡는데다, 좋은 갑옷은 보병에게 지급하는 것도 모자랄 판이었기 때문에 궁수가 좋은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 또한 너무 무거운 갑옷은 활을 쏘는데 방해가 되므로 경장을 선호하기도 했다. 실제로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면 궁병대는 민소매 갑옷을 입고 투구가 아닌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있다. 소매 있는 갑옷은 활쏘기에 방해가 되며 투구는 시야 확보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물론 위에서 애기한대로 양판소처럼 일반적으로 당한 것은 아니었다. 활도 근접전이 가능한 무기로 조선무과 시험중 하나가 근접사격 시험이었다. 애초에 멀리서 쏘든 가까운 데서 쏘든 활에서 나간 화살은 사람을 죽인다. 거기다 자신이 활밖에 없다고 순순히 죽어주는 사람은 더욱 없다. 거기다 가까운 데서 활을 쏘면 활의 저지력과 관통력이 강한 상태에서 맞추는 것이라, 관통되지 않더라도 저지력 때문에 상당히 귀찮다고 한다. 유튜브에서 knight vs warbow 참조. 하지만 대부분의 예시가 일부에 불과한 만큼 지식 자랑밖에 안될 것이다.

2.4. 실전 궁술 복원


현대에는 실전된 궁병들의 기술을 복원하려는 시도들도 있는데, 어떤 국가든 활쏘기가 전통으로 남아있는 한 되도록 거기에 충실하고자 한다.
대한민국국궁의 경우에는 온깍지 궁사회에서 발굴하여 연구했던 온깍지 사법이 실전 궁술의 형태에 가깝다는 주장이 있었다. 여기서 추구했던 것은 높은 장력의 활을 아무리 많이 쏴도 몸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으로, 이는 표적 맞추기를 중시하는 현대적 이념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온깍지궁사회는 2000년 겨울에 출범하여, 2007년까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형태로 운영을했고, 2007년 이후에는 친목회인 사계로 운영을 하다가, 2018년에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은 온깍지활쏘기학교로 이첩시켰다.
온깍지궁사회에서 해방 전후에 집궁한 구사들을 만나서 사풍과 사법을 확인한 결과, 대부분 1929년에 발행된 <조선의궁술(조선궁술연구회)>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사법 또한 이와 같아서, <조선의 궁술>에 정리된 사법이 한국의 전통사법이며, 1970년대 접어들어 개량궁의 등장과 함께 변형된 반깍지 사법은, <조선의 궁술>의 전통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결국 이런 과정은 활을 스포츠로 볼 때 그 활동이 사람의 몸에 유익한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으로 판정난다. 건강에 유익하지 않는 증거는 그 후로 폭증하여 팔꿈치나 어깨를 다치고 심지어 목디스크까지 앓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전통이 갖는 유의미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온깍지 사법은 한국의 전통사법을 말한다는 점에서, 체육을 위한 사법으로는 가장 완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는 과거 국가에서 전폭적으로 장려해줬기 때문인지, 현대에도 여전히 장궁 커뮤니티가 존속되고 있다.
인터넷 상에서 실전 궁술을 복원한다고 알려진 인물로는 라스 앤더슨이 있다. 그러나 이 인물에 관해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라스 앤더슨의 영상(한국어 자막 있음)
라스 앤더슨의 경우 각종 고대 사료를 바탕으로 자신이 그것들을 복원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엄연히 말하자면 복원이 아니라 창작에 가깝다. 우선 그가 참고한 고대 사료의 경우 어느 문화권의 사법을 말하는지 전부 다 다르다. 어떤 것은 아랍의 방식을 따르는 한편, 어떤 것은 몽골의 방식을 따르는 등등, 결국엔 고대 궁술의 재현이 아니라 라스 앤더슨 자신의 입맛대로 궁술을 시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영상에서 나오는 것도 20m 안의 근거리 곡예 사격들로만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 때문에 기술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개인의 자질 여부도 의심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사용하는 활이 고대처럼 높은 장력의 활이 아닌, 낮은 장력의 활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궁술 커뮤니티 쪽에서의 반응도 '테크닉이나 영상 자체는 훌륭하지만, 고대 사법 복원 운운은 좀 아닌 것 같다' 쪽이 정설에 가깝다. 더군다나 이후 사람을 상대로 윌리엄 텔을 흉내낸 영상도 올린 바람에 궁술계에 엄청난 비판과 분노를 사고 말았다. 해당 영상은 얼마 안 가 삭제되었다. 그러나 라스의 노이즈 마케팅이 나름 선전하였는지, 그의 모국에서는 이미 유명인이나 다름없으며, 영국에서는 그에게 자문한 영화를 개봉하기까지 하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라스 앤더슨도 100파운드 활로 묘기궁술을 시도 해보았지만 속사는 어려웠다고 한다. 다른 시점에서 보면 라스 앤더슨은 묘기궁술이 아니면 100파운드 활도 쏠수 있을 정도는 된다. 쓰는 활의 장력은 50파운드 정도이며, 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만큼 낮은 장력의 활은 아니다. 근대에 활을 연구했던 Saxton T pope에 따르면 고대 활의 장력은 대부분 이정도였다고 한다. 다른 영상을 보면 장거리 사격도 다수 있다. 라스앤더슨이 경기장 반대편에서 장난치듯 날린 화살이 나무 과녁을 부수는 장면도 볼 수 있다. 사격을 연사로 아주 쉽게 하기에 그의 활의 장력이 낮다고 보지만, 장거리 사격 연사도 쉽게하는 영상을 보면 실제로 팔 힘이 대단히 좋은 것 역시 사실로 볼 수 있다. 또한 고대 사료를 바탕으로 자신이 고대 궁술을 복원했다고 주장하지 않고, 고대 궁수들처럼 자연스럽고 빠르게 쏘기 위해, 여러 고대 사법을 참고 하여 자신의 사법을 만든것이다. 하지만 활의 장력은 어디까지나 측정시에 당긴 거리까지 제대로 당겨야 의미가 있고 덜 당길 경우의 활의 장력은 감소하기에 라스앤더슨이 정말 매번 50파운드의 장력으로 쏜 것인지는 여전히 의심이 남는다. 동영상에서 봐도 빠르게 쏠 경우 활시위가 얼굴에도 제대로 안닿을 정도로 덜 당기는 모습이 포착된다.

3. 손가락 욕


[image]
궁병의 훈련과 양성에는 막대한 시간이 소모 됐기 때문에 서유럽 지역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포로를 풀어줄때, 특히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 군대는 영국군 궁병 포로들의 중지와 검지를 잘라버리는 관행이 있었다. 다시는 활을 못쏘게 하기 위함인데 이를 안 영국군은 V사인을 내보이며 "와서 내 손가락을 잘라봐라" 라는 의미의 욕설이자 도발 행동이 된다고 한다. 그 외에도 '너 따위는 이 두 손가락만으로도 처리가 가능하다.' 라는 도발적 의미가 있다는 설도 있다. 시간이 흘러 영국 내에선 심한 욕으로 자리잡게 된다.
위의 두 사진 모두 윈스턴 처칠인데 좌측이 처음 승리의 V사인을 표현한 것. 이것이 욕이라는 사실이 귀에 들어가자 그 이후로는 우측처럼 손등이 자신을 향하도록 바꾸었다.

4. 그 외의 참조하면 좋은 문서들



5. 창작물에 나오는 궁병


2차 창작물들에서는 궁병 종족으로 엘프의 이미지가 매우 강한지라 대부분의 궁병 캐릭들이 호리호리하거나 혹은 연약한 이미지로 그려지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사실 활을 당기고 그것을 유지하는데는 등근육을 비롯한 전신의 근력이 상당히 요구된다. 실제 중세에 쓰던 전쟁용 활은 그 장력이 40kg에 달했으며 영국 장궁병의 경우에는 장력 70kg이 넘는 활을 쓰기도 했다. 당연히 상당한 근력이 요구되었으며, 보디빌더처럼 근육이 펌핑되지는 않지만, 활을 수련하는 사람들 또한 근육이 다부지게 발달하여 있다. 당장 여말선초 최강의 궁수이자 조선의 건국자로 알려진 이성계의 초상화를 보면 장년의 나이임에도 어깨가 떡 벌어진 모습이 다부진 몸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하다.[8] 더군다나 굳이 중세까지 갈 필요도 없이 현대 올림픽 양궁선수들의 몸만 보더라도 겉보기엔 말라보이지만 알맹이는 근육으로 꽉 찬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보통 도적과 함께 민첩성과 관련된 스탯을 보유하며 신속하고 재빠른 몸놀림을 보이는 식으로 특징을 잡는데, 바로 위 문단에서 말했듯이 활은 보기보다 완력과 등근육을 비롯하여 굉장한 피지컬과 힘을 요구하는 도구이다.
신호에 맞춰서 한 번에 일제사격을 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일이 잦은데, 현실에서는 머스킷을 쓴 전열보병과는 달리 궁병은 일제사격을 하지 않았다. 일제 사격을 하면 딱 사격할 때에 맞춰서 방패 등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고 막은 뒤에 다시 화살을 재고 쏠 때까지 달려들 수 있으니까. 물론 유효 사정거리 개념은 있으므로 적이 충분히 다가오고 나서 지휘관이 사격 시작 명령을 내리긴 하지만, 신호에 맞춰서 일괄적으로 사격을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그냥 사격 명령을 내리면 각각의 궁병이 개별적으로 목표 지점으로 사격을 할 뿐이다.
대다수의 무협소설에서는 찬밥 취급이다. 대부분이 도검제일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드물게 맨몸이나 이 주력이 되기도 하지만 활은 어떻게 해서든지 별볼일 없는 무기로 만든다. 가끔 위력적으로 묘사될 때는 암습에나 쓰는 비겁한 무기 취급이다. 현실적으로 근접무장으로는 이길 수 없으니 깎아내리는 셈이다.
드래그 온 드라군 시리즈에서도 악명을 떨치는 졸개들. 오죽하면 그냥 잡졸인데도 최악의 캐릭터 인기투표에 이놈들이 순위권에 올라왔다.
전직이라는 개념이 있는 게임의 경우 일반적으로는 연노/쇠뇌/석궁병, 레인저나 저격수 등의 병과와 호환되지만 드물게 궁수가 전직해서 도적이 되거나 반대로 도적이 전직해서 궁수가 되는 경우도 있다. 아무래도 로빈 후드같은 활잡이/도적 속성의 유명인이 있는 것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민첩성을 살리는 클래스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인 듯 싶다. 삼국지 영걸전의 경우 궁병의 최종테크가 특이하게도 발석차다.
대부분 궁병들은 활만 들고 다니고 그 탓에 화살이 떨어지거나 적이 가까이오면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는데 이것은 게임이나 영화 등의 대중매체의 왜곡으로 현실적으로는 반지의 제왕, 호빗으로 유명한 톨킨의 소설 세계에서는 엘프나 궁병들도 검같은 보조 무기로 근접전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보병처럼 창벽이나 방패벽을 구축해서 강력한 방어 전술을 펼치는 데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톨킨이 소설을 쓰면서 중세시대의 궁병을 잘 표현했는데 이는 톨킨이 서구 유럽에서 유일하게 궁병을 체계적으로 사용한 영국 출신인 탓이 크다. 한국 사극에서도 활만 들고 다니다가 적에게 죽는 궁수들을 보면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방송국이 엉터리로 고증한다고 성토하는 기사도 있다. 그런데 궁수들이 근접전까지 치르게 되면 게임에서는 '''닥치고 궁수'''식으로 밸런스가 붕괴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 정도는 고려해주자. 안그래도 사거리 무기라는 우위를 잡은 궁수들이 현실처럼 근접전에서도 막강한 위력을 보여주게 된다면 다른 병과들은 버림받게 된다. 현실과 달리 훈련기간이 짧거나 거의 없는 게임 여건상 밸런스를 맞추자면 궁수를 어떻게든 너프시켜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궁수들은 솔플에 적합하다. 다른 근접 딜러들처럼 공격받을 위험이 적은데다 마법사들처럼 mp의 부담을 많이 받지 않고, 컨셉이 컨셉인만큼 기동성이 좋거나, 사냥꾼 컨셉인 경우 대신 몸빵을 해주거나 딜링을 같이 해주는 동물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손이 덜가기 때문. 거의 모든 온라인 게임에서 궁수 컨셉의 직업은 솔플 앵벌용 부캐로 하나씩은 키워놓는 경우가 많다.
RTS 계열은 게임의 성격 따라 다르다. 워크래프트 시리즈 부류의 캐주얼한 RTS 게임의 경우는 오로지 활만 들고 나오지만 토탈 워 시리즈와 같은 경우는 부무장까지 갖추고 나온다. 특히나 토탈 워 시리즈는 고급 전문궁병들과 하급 농민 궁병들의 격차가 확 벌어지는데 당연히도 전자는 일정 수준의 갑옷과 근접전 무장을 장비하고 나온다. 미디블2: 토탈 워의 잉글랜드 고급 장궁병들이 대표적.

5.1. 목록


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단일 캐릭터는 활잡이 문서 참조.

[1] 조선 중기까지도 우리나라 군대의 주력은 기병이었다. 그러나 그 기병조차 활에 집착하는 바람에 임진왜란까지 가면 진짜배기 기병돌격이 가능한 중기병들은 거의 다 사라지게 된다. 일본군이 벽제관 전투 전까지는 명나라 기병대를 상대로 고전하기도 했던 것을 보면 아쉬울 따름.[2] 단 아래에서 후술하겠지만, 유지비용 면에선 창검으로 무장한 보병보다 많았다. 화살은 현대의 총알과 똑같은 위치로 소모품에 해당한다. 좋은 목재를 써도 훈련이든 실전이든 계속 쓰다보면 부러지며, 다시 보충하는데도 시간과 돈이 많이 필요했다.[3] 각종 매체에서의 궁수들이 유격전을 펼치는 경우는 대게 노련한 사수들이고, 야전에서의 궁병은 근현대의 포병처럼 방열하고 사격하듯, 대오를 갖춰 포진한 후 지휘관의 명령하에 단체로 사격하는 식이었다. 궁병이라고 만능은 아니어서, 짧은 수련 기간을 거친 하급 병졸들의 경우에는 효율적인 사격법을 행하지 못해 전술했듯이 탄막을 형성하는 방식을 제외하고는 써먹을 법이 없었고, 이는 활을 숨쉬듯 다루던 문화가 있던 한국이나 영국, 유목민족들을 제외하면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문제였다.[4] 고대에는 로도스섬 투석병과 발레아레스섬 투석병이 유명했다고 한다.[5] 우리나라의 경우 안동과 김해의 투석병들이 유명했는데, 이들은 한국의 전통 연례행사인 석전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고 한다.[6] 활에서 발사된 화살의 운동에너지는 평균 200J에 해당한다. 그러나 쇠뇌는 최대 1000J에 해당하는데, 이는 머스킷 탄환의 기본 운동에너지와 흡사하다.[7] 화살은 훈련에서든 실전에서든 소모/분실되기 매우 쉽다. 그리고 예나 지금(1발당 2~3만원)이나 재료/인건비가 무척 비싸다. 그렇다고 비용 아끼겠답시고 화살을 싸구려로 막 만들면 안 쓰느니만 못 할 정도로 조악한 물건이 되어 버린다. 화살은 공기역학적으로 굉장히 섬세한 물건이다.[8] 단순히 타고난 근력만 뛰어나더라도 높은 장력의 활은 쉽게 당기고 쏠 수 있으며, 실제로도 활 입문자의 경우 그런 유형이 종종 나타나는 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활을 오래 쏘기 위해선 단순 근력이 아닌 오랜 훈련에 따른 상당량의 근지구력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