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균/선수 경력
1. 개요
2. 아마추어 경력
3. 프로 경력
3.1. 괴물 타자의 등장 (2001)
3.1.1. 2001년
3.2. 소포모어 징크스 (2002)
3.2.1. 2002년
3.3. 진화해가는 김태균 (2003~2005)
3.4. 커리어로우 (2006~2007)
3.5. 장타 커리어하이 (2008~2009)
3.6. 일본 진출 (2010~2011)
3.7. 복귀 이후 (2012~2015)
3.8. 출루 커리어 하이 (2016~2017)
3.9. 에이징 커브 (2018~2020)
3.10. 은퇴
4. 국가대표 경력
4.4.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우승
5. 연도별 성적
1. 개요
前 한화 이글스 소속 내야수 김태균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아마추어 경력
명문 천안 북일고의 3루수 김태균은 1학년부터 팀의 중심타선에 들어간 초고교급 선수였다. 흔히 말하는 천재. 타치바나 히데오 생각하면 될듯(...). 지금 꼴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얼굴까지 잘 생긴 미래의 슈퍼스타였다.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2000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WBSC U-18 야구 월드컵을 재패한 황금 세대의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3학년 시즌 부진한 모습을 보였으나 한화 이글스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김태균을 1차 지명, 2000년 7월에 계약금 1억 6천만원을 받고 입단했다.[1]
3. 프로 경력
3.1. 괴물 타자의 등장 (2001)
3.1.1. 2001년
2001 시즌 초반엔 1군에 자리가 없어 2군에 머물렀으나 5월에 승격 후 주로 대타로 기용되며 날카로운 타격을 보였고, 곧 대선배 강석천의 3루를 빼앗아 버렸다.[2] 김태균의 놀라운 활약에 고무된 이광환 감독은 김태균을 4번으로 기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연소 4번 타자였다. 시즌 내내 기복없는 활약을 보여주며 약체로 평가받던 팀을 4강에도 올려 놓았다. 준플레이오프에서도 4번으로 출장,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홈런포를 뽑아내며 큰 경기에서도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믿었던 송진우 등 베테량들이 부진하며 2패로 스윕당해 광탈했지만, 10대 4번 타자 김태균의 흔들림 없는 활약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시즌 종료 후 성적은 타율 .335와 20홈런, 이것이 대타 출장을 포함하여 1군 88경기 출장으로 이뤄낸 기록이었다. 이 압도적인 활약에 준수한 성적으로 풀 타임을 소화한 삼성의 박한이는 김태균에 밀려 신인왕 투표에서 2위에 그치게 된다. 데뷔 시즌의 20홈런은 풀 타임 기준으로는 절반을 약간 웃도는 245타수에서 기록된 것으로, 풀타임을 뛸 경우 40홈런을 칠 거포로 다들 기대했다. 3루 수비는 좋지 않은 편이었으나 원래 3루수였던 강석천의 수비가 과히 좋지 않았고, 마땅한 대안도 없어서 한동안 주로 3루를 맡았다.
3.2. 소포모어 징크스 (2002)
3.2.1. 2002년
그렇게 엄청난 기대감 속에서 등번호를 10번으로 바꾸고 2002 시즌을 맞이하였으나, 시즌 전 라식 수술을 받았는데 그 부작용과 더불어 소포모어 징크스로 거하게 말아먹어 모든 이들에게 실망을 안겨준다. 작년과 비교해보면 홈런과 득점, 장타율까지 절반으로 뚝 떨어졌고, 삼진도 100개를 돌파하였다. 또한 0점대 war[3] 로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결국 시즌 후 52번으로 돌아왔다.
3.3. 진화해가는 김태균 (2003~2005)
3.3.1. 2003년
3년차이던 2003년에는 데뷔 시즌에 버금가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문제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40홈런을 넘기지 못했다는 것. 더군다나 2001년부터 2003년 사이는 어느 괴수가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홈런을 날리는 시대였다.
그래도 소포모어 징크스를 떨쳐내고 .319에 데뷔 첫 30홈런(31홈런) 150안타를 기록하였다. 장타율은 .572로 개인 최고 장타율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삼진은 106삼진을 기록하며 개인 최다 삼진을 기록하였고 현재까지 개인 최다 삼진으로 남아있다.
3.3.2. 2004년
이승엽이 일본으로 떠난 뒤, 2004년에는 투고타저시대가 찾아옴과 동시에 프로야구의 흥행이 저조했고, 무엇보다도 김태균 본인이 한결같이 '''괜찮긴 하지만 리그를 씹어먹는 수준은 아닌 정도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대중과 언론의 관심 밖에 있어야만 했다.[4] 또한 이 당시 팀의 성적도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도 2년 연속 20홈런과 데뷔 첫 100타점을 기록하며 드디어 대활약했다.
3.3.3. 2005년
한편 한화 구단은 그렇잖아도 장종훈이 2000년대에 들어와 부진하던 차에 김태균이 등장하여 착착 성장해가자 장종훈을 은퇴시키기로 한다. 결국 03년 이후 장종훈은 출장횟수가 크게 줄었으며 매년 구단의 은퇴 권유를 받게 되었다. 결국 05년도에 장종훈이 은퇴하게 되었으며, 구단은 최대한 모양새 좋게 보이도록 언론 홍보작업을 하였다.[5] 뭐 장종훈 본인은, 시간이 지난 뒤 농담 섞어 아내는 몇 년 동안 TV에서 김태균을 볼 때마다 채널을 돌렸다는 얘기를 했다만... 어쨌든 이후로 김태균에게는 '''"포스트 장종훈"'''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게 되었다. 팬들 역시 김태균을 장종훈의 후계자로 여기며 전성기 장종훈 만큼의 임팩트 있는 성적을 기대했었다.
2005년에는 안타, 타점, 장타율 각 2위와 타율 3위, 출루율 5위를 기록하면서 커리어하이를 경신했다. 1루수 골든글러브도 수상하였다.
3.4. 커리어로우 (2006~2007)
3.4.1. 2006년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덕분에 프로야구가 갑자기 다시 흥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 때 한화의 감독은 김인식. 미디어와 팬들은 한화를 주목할 수 밖에 없었고, 기대에 걸맞게 2006년 준우승이라는 좋은 성적을 내게 된다.
그런데 하필 이 시기에 김태균은 커리어로우를 기록한다. 특히 2할9푼대와 13홈런이라는 추락으로 인해 김똑딱이라는 오명을 쓰고 미디어의 차디찬 관심을 받게 된다.[6] 사실 2006년에 김태균은 한화 팬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지는 않았다. 시즌 중엔 부진했지만 포스트시즌에서 맹활약을 했기 때문. 준플레이오프에서도 좋은 타격감을 보여 주었으며 플레이오프에서는 2개의 홈런을 때려내고 MVP까지 차지하는 등 한국시리즈 진출의 1등 공신으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 두 개의 홈런을 쳐 낸 덕에 시즌 종료 후 한화 팬들에게 많은 욕을 먹지는 않았다.
3.4.2. 2007년
2007년 시즌 성적은 사실 따지고 보면 좋은 성적이었긴 했는데, 2007 시즌 자체가 워낙 투고타저의 극을 달렸던 한해였던 탓에 다른 년도, 다른 선수들의 기록과 비교했을 때 그리 대단치 않게 보였다는 점이 문제였다. 한마디로 '''잘하긴 잘하는데 뭔가 불만족스러운 성적'''. 그 오랜 기간동안 '포스트 이승엽'내지 포스트 장종훈을 꿈꿔온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이었다. 신인시절 좋은 기억을 갖고있는 팬들에게 김태균 이란 타자는 3할 30홈런이 기본으로 요구되는 선수였다.
야구 커뮤니티에서 그런 발언을 했다간 바로 키보드 배틀이 벌어질 일이었지만, 한화 이글스 팬들에게 있어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는 김태균이란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게다가 2005년 장종훈 은퇴 당시의 각종 언플들까지 있었으니... 그러한 팬들의 기대를 날려버릴 정도로 김태균은 실망스러운 성적을 냈다. 여담으로 2007 시즌 개막전에서 김태균은 길이길이 회자되는 몸개그를 시전했다(...).[7] 또한 그해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 우승 이후 후반기 성적을 대폭 깎아먹으며 오질나게 욕을 먹었다.
구단 역시 팬들과 마찬가지로 실망했었는지, 결국 2008 시즌을 앞두고 연봉을 삭감하기에 이르렀다. 팬들의 반응은 '''올 것이 왔다.''' 다음해는 더 잘하겠지...라는 기대감도 어느새 곧 10년, 김태균은 결국 저 정도의 타자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김태균 본인도 결국 항복하고 도장을 찍어야 했다. 어쨌든 이 2년간의 성적도 다른 평범한 선수들에 비하면 준수한 것이긴 했다. 문제는 이 당시 크보 역사상 최고의 슈퍼루키가 같은 팀에 등장했던 탓에 언론의 관심은 김태균에게서 빗겨나 있었다는 것.
하지만 '''한화팬들은 그에게 주목했다.''' 어쨌든 팀에서 가장 중요한 타자는 김태균이었고, 한화의 성적 또한 그의 타격에 일희일비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언젠가부터 '김태균은 까야만 잘한다' 라는 공감대가 한화이글스 팬 커뮤니티에서 형성되어, 홈런이나 안타를 쳐도 잘했다는 축하보다 까는 글이 더 많이 달리기 시작한 전통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느샌가 다들 김태균을 까기 시작했다. 겉으론 욕하지만 속으론 한 방 크게 날려주길 기대하며.
결국 팬들은 김태균을 욕하고 구단을 욕하면서도, 제발 내년에는 김태균이 이승엽 내지 장종훈 정도의 대선수가 되길 기원하며 희망고문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는 한편 어쨌든 준수하지만 최고는 아니고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그렇고 그런 한화표 선수의 한 명으로 남는가 했는데...
3.5. 장타 커리어하이 (2008~2009)
3.5.1. 2008년
2008년 시즌에 들어서, 갑자기 SK 와이번스를 넘어 최고의 스포테인먼트를 몸소 실천하는 야갤의 대스타이자 별명 제조기가 되어버렸다. 성 뒤에 뭐든지 갖다붙이면 별명이 되는 사나이.[8] 결국에는 '''별명이라는 단어 자체가 별명이 되어버린''' 무시무시한 사나이. 그 수많은 베리에이션은 '''김별명''' 참조. 본인은 김고자(...)라는 별명을 가장 싫어하며, 가장 마음에 드는 별명은 김질주와 김국민이라고.[9] 하여간 저 덕분에 '''한 시즌 타점보다 한 시즌 생산되는 별명이 더 많았으며''' 성적은 늘어나는 별명과 반비례하면서 하락세를 달렸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는 사실 따지고 보면 단순하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팀의 주축선수였기 때문에 집중적인 팀의 홍보대상이었고, 그만큼 인터넷에 쌓인 자료가 많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성적 자체는 좋긴한데 최고는 분명 아니었기 때문에 좋은 놀림거리가 됐던 것. 그런데, 2008년 갑자기 '''관심 받은 만큼의 성적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며 이것이 단순한 놀림거리가 아닌 하나의 팬덤현상 비슷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동갑내기 친한 친구라는 점과 맞물려 어느새 이대호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 리그를 이끌어가는 두 명의 타자 중 한 사람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2007년 시즌 종료 후 연봉 파동 때문인지, 혹은 '종훈매직'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2008 시즌에는 남다른 타격감을 선보여 부상에도 불구하고 맹타를 휘둘러, 결국 자신의 최다 홈런 타이 기록인 31홈런을 기록함으로서 자신과 치열하게 홈런 경쟁을 하던 롯데 자이언츠의 카림 가르시아를 제치고 2008 시즌 홈런왕을 확정지었다. 데뷔 8년만에 드디어 홈런왕 등극. 데뷔 첫해 포스트 이승엽 소리를 듣고, 그 이후 기나긴 시간을 김태균이 최고의 타자가 되리라 기대하며 기다려웠던 올드팬들에겐 그야말로 감개무량한 일. 데뷔 2번째 골든글러브도 수상하였다.
사실 김태균이 그 동안 성장하지 못했던 큰 이유 중 하나가 끊임없는 잔부상 때문이었는데, 2008년에는 '''잔부상 - 복귀후 맹타 - 잔부상 - 복귀 후 맹타'''의 사이클로 드디어 부상과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 약한 부상 때보다 부상이 조금 회복된 후에 더 나은 타격 감각과 홈런 생산력을 보여주었고, 하필 팀도 치열한 중위권 싸움을 하면서 팬들은 그의 컨디션에 일희일비해야 했다. 하지만 베이징 올림픽 이후에...
3.5.2. 2009년
2009년 두산과의 경기중 포수 최승환과 부딪힌 후 헬멧이 벗겨진 상태로 뒤통수를 땅에 박아서 뇌진탕 후유증으로 부진중. 이 후유증으로 인해 당분간 경기를 출전하지 못하게 되어, 별명도 추가되려면 좀 시간이 걸릴 듯했다. 결국 시즌 말 부활은 했지만... 시즌은 다 끝났고 한화는 8위인데 뭐.
어쨌든 2008년에 드디어 재능을 만개했다는 점, 2009년 WBC에서의 맹활약, 젊은 나이라는 점 때문에 리그 최고의 타자로 대접받았다. 무엇보다도 시즌 종료 후 FA 신분을 획득한다는 점 때문에 시즌 내내 언론과 팬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아야 했다.
작년 성적보다는 못미치더라도 .330 19홈런 62타점을 기록하며 최하위인 팀 클린업에서 활약하였고 FA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갔다.
3.6. 일본 진출 (2010~2011)
2009시즌 종료후, 결국 한화를 떠나 치바 롯데 마린즈와 3년 계약을 맺었다. 본인이 워낙 일본행을 원했던데다가 치바 롯데 마린즈의 신임 감독인 니시무라 노리후미 감독이 우타 거포 보충을 요청하였고, 무엇보다 구단주 신동빈이 '''직접''' 데려오라고 지시를 해서 그 덕분에 프론트가 재빨리 움직여 '''우선 협상이 바로 끝나자마자 계약'''을 해버렸다.
한화에서도 엄청난 양의 금액을 제시했지만 결국 꿈과 돈을 쫓아서 간 셈이니.[10]
3.6.1. 2010년
일본 진출 첫 시즌 시범경기에서는 .342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희망을 알렸지만 정작 시즌 개막 경기 세이부전에서는 52년만에 4타수 4삼진이란 굴욕을 겪었다. 본인은 크개 개의치 않는다고 했지만 다음날 호아시 가즈유키의 팜볼에 농락당하여[11] 6연타석 삼진에 이어 1사 1, 2루 득점찬스에서 폭풍 병살. 마지막 타석에서는 그나마 중견수 플라이. 공이 외야로 나갔다. 9타수 0안타 6삼진.
그런데 이후 연속 홈런을 치는 등, 5월이 오자 살아나기 시작했다. 일본 롯데리아에 '''김치태균버거'''(…)라는 메뉴도 있는걸 보면 현지에서의 인기도 대단한 듯. 덧붙여, 김태균의 홈런 영상을 보면 공이 넘어감과 동시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문 밖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김태균이 홈런을 치면 저 김태균김치버거를 선착순 몇명 한정으로 '''52엔'''에 팔기 때문이다. 배번이 1번이었으면 어땠을까.[12] 하지만 치바롯데에는 자기이름걸고 음식내면 부상 혹은 부진이라는 전통이 있었다.[13]
그리고 일본 올스타에 선발되었다. 같은 시기에 임창용도 올스타에 선발되었지만 임창용과 김태균은 서로 상대 팀. 홈런레이스에서는 '''한국인 최초''' 1위에까지 올랐다.
그러던 2010년 8월 2일, 돌연 '''김석류''' 아나운서와의 결혼을 발표하였다. 2010 시즌 후반기 부진 속에 갑작스런 발표와 슬럼프 시기와 김석류 아나운서의 일본 체류 시기가 겹쳐서 야갤에서는 온갖 개드립 양산했다 결혼 발표후 4경기 연속 무안타였다가 8월 7일에야 19호 홈런을 때려냈다. 이때 한 말이 '''석류 덕분이다'''라고.
하지만 일본에서 맞이한 첫시즌인 10시즌 김태균의 성적은 타율 0.268에 21홈런 92타점으로 일견 괜찮은 성적(특히 타점은 리그 6위다)으로 보이나 '''득점권 타율 0.236로 사실상 꼴지에 랭크되어 있고, 병살이 24개로 단연 선두에 랭크되어 있다.''' 삼진 역시 1위 라쿠텐의 야마사키 타케시에 7개 뒤진 140개로 2위. 장타율은 거포형 1루수로서 부족한 .429였으며, 타격의 대표적 세부스탯인 WRC+은 115, WAR은 2.2를 기록하면서 클래식에 비해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다.출처 200안타를 넘게 때린[14] 니시오카 츠요시와 4할 출루율의 이구치 타다히토가 김태균 앞에서 밥상을 차리는 리그 최고 테이블 세터진의 롯데에서 4번을 치면서 타점이 92개밖에 되지않는 이유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1루수이면서 실책이 '''8개'''나 된 것도 평가를 깎아먹은 요인이 되었다.[15] .[16]
물론 진출 1년차니 이 정도의 성적도 완전히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몇몇 무개념 팬들이 김태균 타점, 홈런 스탯만 들고와서 마치 리그 최상급 클린업인듯 우기는게 문제. 첫 시즌 김태균은 김득병, 김삼진, 김찬물이었지 김홈런, 김영양이 아니였다. 전반기까지만 하더라도 무시무시한 성적을 올렸는데, 6월까지 18홈런 65타점으로 상당한 성적을 보여줬지만 이후 3달동안 3홈런 27타점에 그치면서 후반기에는 6번으로 타순이 밀리게 될 정도였다. 92타점도 오히려 이 시즌의 팀 타선을 생각하면 좀 부족해 보이는것이 1번타자인 니시오카 츠요시가 일본야구 타석수 신기록을 세울 정도로 공격 기회가 많았던 것이 이 시즌의 지바 롯데였다. 4번인 김태균의 앞을 친 3번 타자 이구치의 출루율도 .412였으니... 김태균에게 돌아온 만루찬스가 23회나 됐다고 하니 이런걸 감안하면 오히려 92타점은 적어보일 정도. 후반기 들어서 안그래도 떨어지던 성적이 김석류와의 결혼발표 이후로 더 눈을 썩게 만드는 성적이 나와서 김석류는 더불어 까이게 되었다(…).
그래도 나름 클린업으로 쓸 만한 성적이었기 때문에 같은 해에 일본에 진출한 이범호를 보러 소프트뱅크 홈구장에 직관 간 사람의 경험담에 의하면 옆에 앉은 소프트뱅크 팬들이 이범호를 언급하면서 '''롯데는 한국인 용병을 꽤 잘 뽑았는데 우리는 뭐 저딴 놈을 데려왔냐'''고 했다고 한다[17] .
2010년 일본시리즈에서는 나름대로 괜찮은 활약을 했다. 7경기 모두 선발 출장해 29타수 10안타 타율 .345 2타점. 장타는 단 한개도 없었으나 똑딱질은 열심히 했다. 팀도 주니치를 상대로 접전끝에 4:2로 이겨 대한민국에서는 단 한번도 못한 우승의 한을 일본에서 풀었다.[18][19]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출전, 11타수 1안타 4볼넷(...)을 기록, 지독한 부진으로 팀 타선의 구멍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연히 '김볼넷'이라는 별명이 추가됨은 말할 것도 없다. 이후 결승전까지 4번으로 출장하며 테이블세터진과 추신수가 만든 팀의 찬스를 전부 날려먹었다. 최종 타율은 0.091
2011년 KIA로 국내 복귀한 이범호의 행보 때문에 한화 팬들 사이에서는 김태균이 국내에 복귀할 때 반드시 한화로 돌아와주길 바라는 여론이 강했다.
3.6.2. 2011년
이전 해인 2010년 아주 좋지는 않지만 썩 괜찮은 성적을 올린 관계로 2011년은 보다 적응한 모습으로 더 나은 성적을 올릴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전력난이 심해지면서 대폭 늘어난 낮경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손목 부상까지 겹치면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몇경기 만에 1군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던 중 7월 27일, 김태균이 부상 장기화와 지진의 여파로 인한 심리적 충격 등을 이유로 '''치바 롯데구단과의 계약을 해지하고 다시 FA 자격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뉴스가 떴다.'''# 8월 7일 야구장에 방문하신 회장님이 복귀를 인증하셨다.
하지만 대부분의 반응은 김태균의 복귀를 비난했다. 일본언론은 당연히 김태균을 비꼬면서 맹비판했고, 일본의 인터넷 사이트 등지에서는 한국 선수들의 이미지가 덤으로 안 좋아졌다. 국내에서도 역시 김태균을 비판하는 의견이 많이 나왔는데, 김성근 감독은 김태균의 정신력이 너무 나약하다며 비판했고# 심지어 장훈은 김태균의 복귀를 보며 “한국 남자로서 부끄러웠다”라고 까지 말했다. 400승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 역시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 "조금 아프면 아프다고 빠지고, 뭐가 무섭다고 가 버리고"라고 디스했다.
김태균의 복귀로 인해 안그래도 이승엽이 MVP만 5번 수상했는데 일본 8시즌 통합으로는 처참한 수준이라, 이승엽과 2012년 복귀하는 것은 일본 야구계에서 한국 선수들에 대한 평가가 매우 낮아진 것이 향후 일본 진출을 고려하는 한국 선수들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될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임창용의 경우 싼 값에 활약을 했더니 야쿠르트에서는 단지 좌완이면서 특이한 폼을 가졌을 뿐인 이혜천을 영입한 경우도 있었다.
그의 중도포기로 인해 상당한 비판을 받는다. 김태균 김구라되다.[20][21]
구단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시즌 도중 퇴단했다고 하지만 본인은 구단과 좋게 헤어졌다고 하니 너무 강도높은 비난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것이다. 당해년도 계약금을 포기하려고 했는데 구단에서 그냥 다 줬다고. 이후 김태균은 '''"팀도 동료도 없었다... 난 한낱 용병이었을 뿐"'''이라는 역대급 명언을 남겼다. 이미 2010년에 일본 야구의 분위기에 절반쯤 마음이 떠났던 모양.
2011년 11월 28일 한화가 김태균에 베팅한 금액이 최소 연 10억에 육박할 것으로 보도되었다. 12월 12일 한화에서는 기존 매체들에 알려진 것과 달리 10억+a가 아닌 계약기간 1년에 '''옵션 없이 순수연봉만으로 15억''' 계약을 했다. 연봉 15억은 국내 스포츠 선수 사상 최고액이다. 팬들은 계약금 없이 1년 15억이기 때문에 FA로 따지면 4년 60억이라 크게 비싸지 않다는 의견과, 그래도 일본에서 죽 쑤고 왔는데 15억은 너무 과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다. 보통은 이면계약으로 옵션처리하는 금액을 이렇게 한꺼번에 줘버리는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안되는 일이지만. 아마도 박경완의 금지된 이면 다년계약 파문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22][23][24]
하지만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상황에서 김태균과 비슷하기라도 한 클래스가 한화에 존재하지 않으며, 2013년 이후의 FA 몸값이 폭등한 상황에서 2015년 후 김태균 FA시 타팀에서 김태균을 데려가려면 2년치 연봉(30억)+보상선수 또는 3년치 연봉(45억)을 한화에 지급해야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타당한 계약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12일 입단식에서 자신에게 15억은 과분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했으며, 야왕의 해결사 별명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치바 롯데 퇴단에 대한 의혹을 담은 새로운 기사가 올라왔으나 수많은 입단식의 기사에 묻혔다.#
김승연 회장이 시즌 중 영입을 천명했을 정도로 모그룹 차원에서 프랜차이즈 스타인 김태균의 친정팀 복귀에 많은 공을 들였으며, 그에 따른 기대 또한 대단하다.[25] 노재덕 단장은 김태균을 믿기 때문에 처음부터 옵션계약은 생각지 않았다고 말했으며, 정승진 사장은 언젠가는 김태균의 등번호도 영구결번이 되지 않겠냐고 이야기할 정도.#
국내 입국 시 '팀에서 동료인 니시오카 츠요시 선수가 자신에게 다가와 둘이 있을 때 자신이 한국계임을 고백했다'는 말을 해 까였다.[26] 12월 26일 조선일보에 퇴단에 관한 기사가 실렸는데, 지진과 방사능 문제 때문이며 서로 좋게 헤어졌다는 이전 기사와는 달리 팀에 제대로 적응을 못해 그만뒀다고 제 입으로 밝혔다. 성적만을 요구하는 팀에 정나미가 떨어졌다고. 당연히 폭풍처럼 까이고 있는 중. 김태균의 해명을 반박할수 있는 내용이 들어간 기사도 나왔다. 여기
2020년 현재 롯데 팬들의 김태균에 대한 반응은 2010년에는 괜찮은 용병이었으나 2011년에 망해버렸다는 반응이고, 전설의 팀도 동료도 없었다는 발언은 이미 일본에서 엄청나게 유명하다. 김태균 얘기만 나오면 꼭 코치들이나 선수들이 자신에게 하이파이브를 안 해줬다는 말과 함께 오마츠 쇼이츠[27] 가 해 준 하이파이브는 그럼 뭐냐는 말이 나오는 수준. 그래도 2010년에 해 준게 있어서 흑역사, 먹튀 취급을 하지는 또 않는다. 나름대로는 괜찮은 인식.[28] 그리고 별명이 엄청나게 많은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참고로 이때 김태균의 팀메이트였던 일본인 선수[29] 가 방송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팀과 동료들과 교류를 잘 하지 않으려고 했던 대표적인 외국인 선수 중 하나였다고 한다.
정말 여담의 여담으로 김태균 하면 회자되는 이미지는 2010년의 나쁘지 않았던 활약과 팀동없,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김치태균버거. 흔히 저런 콜라보메뉴가 선수의 개성을 강조한답시고 뭔가 괴식을 만들어내는 경향이 구단 안가리고 강한데 김치태균버거는 두툼하게 고기패티 두 장에 적절하게 볶음김치가 들어간 그 맛이 일품이라 당시에도 일부러 저거 먹으러 일본내에 얼마 없는 롯데리아 매장을 찾아갔다고 하는 증언도 많을 정도로 굉장히 호평이었고 김태균 퇴단으로 단종된 이후에도 저 버거만 어떻게 안되겠냐는(...)여론이 있었고 현재까지도 프로야구 선수 콜라보 메뉴 중 수작으로 꼽히는 메뉴 중 하나.
이 당시만 해도 프로야구 선수 콜라보레이션 메뉴가 그렇게 대중적인 편은 아니었고 어떻게든 돈 벌어야 하는(...) 가난한 카프가 적극적으로 해서 카프의 명물 같은 취급이었는데, 이 김치태균버거의 성공 이후 타 구단에서도 선수를 이미지한 콜라보레이션 메뉴나 나아가서는 선수가 직접 감수해서 만든 선수 프로듀스 메뉴를 도입하기 시작, 이제는 모든 구단에서 매년 출시하고 구장에서 맛볼 수 있는 일본야구의 한 문화가 되었다.
일본 인터넷에서 김태균 이야기가 가끔 나오면 햄버거 맛있었다는 이야기는 꼭 나오고 은퇴 스레드에도 저 김치태균버거가 맛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3.7. 복귀 이후 (2012~2015)
3.7.1. 2012년
2012시즌 개막전이었던 롯데 자이언츠전에서는 5타수 2안타(2루타1) 1타점을 기록. 그 다음날엔 3타수 2안타 2타점을 기록했으나 4회말 1사 1, 3루에서 손아섭의 평범한 1루 땅볼을 1루 베이스도 밟지 않고 2루로, 그것도 악송구를 하는 수비를 작렬시키며 한화팬들을 멘붕시켰다. 이후 선발이었던 안승민은 와르르 무너져내렸고, 4회에만 7실점, 결국 팀의 5:10 패배로 이어졌다. 한화 팬덤에서는 그따위로 할거면 15억 도로 토해내라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 경기 이후 한대화 감독이 인터뷰에서 '''"잠깐 귀신이 씌여 그랬을 것"'''이라며 감싸 안아주는 모습을 보였다.
4월 13일에는 테이블세터의 부진으로 타점을 챙기지 못했으나 14일에는 4타수 4안타로 시즌 초이긴 하지만 '''6할'''을 찍었으며 통산 1,100 안타를 달성했다.
4월 22일 삼성전에서 드디어 '''시즌 첫 홈런을 때려냈다.''' 무려 '''50타석만에''' 터진 귀중한 홈런.
4월 29일 넥센전에서 브랜든 나이트를 상대로 동점 솔로 홈런을 때려냈다. 1:1 동점을 만드는 값진 홈런.
팀이 막장이 되어버린 것과 일본 복귀 때 저지른 만행 탓인지 팬들의 관심은 싸늘했다. 일부 팬들은 김태균의 역대 전적을 고려해볼때 6월 이후 반드시 DTD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해마다 찾아오는 잔부상이 어김없이 또 찾아왔다. 타격 시에 손가락이 울리며 통증이 오는 상황이라고. 이로 인해 6월 후반기부터 결장이 잦아졌다. 대타로 출장해보기도 했지만 되려 타율만 갉아먹고 어느샌가 타율이 4할 밑으로 추락한 상태. 허나 중요한 것은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팀은 막장이고 김태균 본인에게는 아무도 별 관심을 안 가진다는 것(...).
6월 24일 두산과의 경기에서는 선발로 나선 류현진이 3이닝 4실점으로 조기 강판된 상황에서, 상대 선발투수인 니퍼트를 상대로 추격의 불을 당기는 3점 홈런을 날렸다. 이 홈런으로 니퍼트는 그대로 강판되었고, 팀은 기어코 8회말 역전에 성공하며 시리즈를 스윕하는가 싶었는데.. 9회초 박정진이 경기 종료까지 아웃카운트 단 두개를 남겨둔 상황에서 폭투로 주자를 불러들이는 바람에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갔고, 결국 연장 승부 끝에 7:8로 경기를 내 주고 말았다.
7월 7일 SK 와이번스 전에서 시즌 10호 홈런과 더불어 결승타[30] 를 기록하며 팀의 연패를 끊는데 일조했다.
다음날 열린 7월 8일 SK 와이번스 전에서도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개인 통산 200홈런'''(역대 18번째)을 달성했다. 뿐만 아니라 개인 통산 600득점과 2,000루타를 동시에 달성했다. 집중력을 발휘해 연이틀 3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타율도 0.398까지 끌어올렸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는 개인 기록 달성도 기쁘지만 무엇보다도 팀이 연패를 끊은 것과 더불어 류현진에게 승을 챙겨줄 수 있어 기쁘다고 소감을 밝히며, 4할 타율에 대한 것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2012 올스타전 홈런레이스에 참가하여 예선에서 '''홈런 14개'''[31] 를 쏘아올려 1위로 결선에 출전하였고, 결선에서 예선 2위를 차지했던 박용택을 6:3으로 꺾고 최종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개인적으로 3번째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우승 기록으로, 이는 양준혁, 박재홍에 이은 역대 3번째 기록이다.
하지만 이후 체력탓인지 점차 부진하면서 4할에서 한참 떨어진 0.363으로 시즌을 마감했다.[32] 그래도 타율 1위와 출루율 1위를 타이틀을 가져갔다.
2010년 후반 들어 굉장히 세이버매트릭션들에게 재평가받는 시즌인데, WAR과 WRC+ 스탯에서 리그 최정상을 기록했음이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2012년의 KBO리그는 00년대 이후 손에 꼽을 투고타저 시즌이었는데 타율 2위 강정호와 약 5푼이상 차이나고 wRC+에서 중시하는 출루 2위 박석민과도 4푼 이상 차이나는등 세이버 스탯에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다. 그래서 클래식 스탯을 중시하는 골든글러브는 홈런, 타점왕 박병호에 밀려 차지하지 못했으나 세이버매트릭스 기록으로 따지면 2012년 최고의 타자는 김태균이었다.
3.7.2. 2013년
나름대로 고군분투했던 12시즌과는 달리, 2013년에는 장타력 없이 영양가 없는 똑딱질만 일삼는 모습을 보여주는데다가,[33] 야구 '''내외적'''으로 구설수를 만들어 내어 한화 이글스 팬들은 물론이고 타팀팬들에게도 많은 비판을 받고있다.
심한 경우는 암흑기인 팀에 도움이 안된다며 LG 트윈스 시절의 조인성(...)과 비교당하기도 했지만, 9월 중반에 부상에서 돌아오더니 3개의 홈런을 치며 두 자릿수 홈런타자가 없었던 팀에 유일한 두 자릿수 홈런타자가 된다.[34] 그러나 김태균은 2002년, 2006년에 이어 세 번째로 커리어 로우 시즌을 기록한다.
시즌 최종성적은 101경기 .319 110안타 '''52타점 10홈런(...)''' 73볼넷 67삼진 1실책 '''.444(출루율 1위)''' .475 .920인데... 2013시즌 한화 타선이 기대와는 다르게 08 김기아(...) 뺨치는 소총타선이 되어버렸다 하더라도 누적 스탯이 참...
전반적으로 기대보다 못한, 그것도 스탯관리만 주야장천 한 시즌으로 평가된다. 다만 이게 정말 까일 스탯인지는 다소 논란이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를 참조.
3.7.3. 2014년
2008년 커리어 하이에 버금가는 성적(?)을 기록한 해. 개인 통산 최고 타율(0.365)이었지만 201안타를 쳐 .370의 타율을 기록한 서건창덕분에 타격왕 달성에는 실패하고 출루왕 타이틀을 가져가는데 만족해야했다. 그리고 한국 복귀 이후 최다 홈런(18홈런), 최다 타점(84타점)을 기록했지만 극악의 타고투저 시즌임을 감안한다면 4번 타자로서 뭔가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든다.
3.7.4. 2015년
간만에 20홈런/100타점을 기록하면서 한국 복귀 이후 최다를 기록했지만 전반기의 맹활약에 비해 후반기의 부진이 아쉬웠던 시즌. 똑딱이는 탈출했으나 타율을 엄청나게 희생했다. 순수 출루율은 상당히 높았지만 어느 털보 외인괴수에 의해 출루율 2위에 그치며 결국 4년 연속 출루왕 도전은 실패했고 OPS 1.00도 지키지 못했다.
3.8. 출루 커리어 하이 (2016~2017)
3.8.1. 2016년
KBO 리그를 정복하고도 남을 성적을 달성했으나, 최형우에 밀려 콩라인으로 남고 말았다.
그러나 2012년이나 14년 때의 선구안과 정교한 컨택트를 유지하면서 전성기에 버금가는 장타력을 그대로 보여 준 출루면에서의 역대급 시즌이었다. 초반 먹튀행각을 보이며 엄청나게 까였지만 5월 초순 이후 원래대로 돌아오더니 결국은 2008년의 커리어하이를 경신하였다.
3.8.2. 2017년
한미일 프로야구 사상 최다 86경기 연속 출루를 기록하며 출루 커리어 하이의 정점을 찍었다.
3.9. 에이징 커브 (2018~2020)
은퇴해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나이도 많이 먹은 것도 있지만, 2017시즌에는 햄스트링 등 많은 부상을 당하여 최근 3시즌에 비해 실력이 많이 떨어졌다. 2018시즌부터는 본격적으로 노쇠화가 진행되기 시작하여 개인 커리어 처음으로 80경기도 출전하지 못하였다.
3.9.1. 2018년
시즌 내내 부상에 시달렸으며, 타격감도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보이며 팀에 김태균이라는 큰 공백을 남긴 시즌. 간신히 14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은 달성했으나 13년 연속 100안타 기록은 마감했다.
아마도 이 유리몸화가 본격적인 노쇠화의 징후로 보인다.
3.9.2. 2019년
팀내 타율 1위를 기록했지만, 공인구 변경과 노쇠화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홈런과 장타율 모두 감소한 시즌.
3.9.3. 2020년
FA로 단년 계약을 맺은 시즌이었다. 하지만 저조한 실력으로 몸값에 비해 아쉬운 모습만 보이다 8월 중순 팔꿈치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다. 10월 21일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3.10. 은퇴
시즌 내 복귀가 어려워지자 10월 21일 구단에 은퇴 의사를 밝혔다.# 은퇴식은 내년 정규시즌에 진행될 예정이며, 영구결번 여부도 비슷한 시기 결정될 것이라고 한다. 구단 측은 1군 무대에 한 번이라도 오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했으나 '''"누군가는 1군 엔트리에서 빠져야 할텐데, 그 빠진 선수가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경기를 치를 수도 있다.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출전할 수 없다."'''라며 거절했다.[35]
김태균이 은퇴하면서 한화 이글스 소속으로 2006년 한국시리즈를 경험했던 타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36] 덤으로 영구결번이 된다면 LG의 이병규에 이어 2번째[37] 로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가 없는 영구결번 선수가 된다.
팀의 암흑기를 지탱해주면서 저평가와 오버페이 논란을 받으면서 묵묵히 자신의 야구를 하다가 마지막에 조용히 은퇴하면서 많은 한화 팬들의 아쉬움을 불렀다. 선수단과의 마지막 인사에선 서폴드가 눈물을 보이는 등 대부분 아쉬워했지만, 안영명 등 고참들이 분위기를 밝게 가져가서 밝은 분위기에서 끝이 났다.
은퇴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에선 도전 정신을 일깨워준 김승연 회장에게 감사했다고 언급하는 한편 우승을 못해서 너무나도 아쉽다고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지도자로는 동생처럼 자신을 챙겨주던 이정훈 2군 감독, 개인 훈련의 중요성을 알려준 김인식 감독, 자신을 안주하지 않게 이끌어준 김성근 감독 세 명을 뽑았다.[38][39]
한편 재활 후 대타로라도 활용 가치가 있었던 김태균이 후배들을 위해 은퇴를 선택한 뒤 이용규를 시작으로 수많은 베테랑들이 방출되기 시작하면서 이 선택은 일종의 스노우볼 취급을 받게 되었다.
4. 국가대표 경력
4.1. 제 19회 IBAF 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4.2. 2006 WBC: 3위
메이저리그 올스타들이 총출동하는 국제대회인 2006 WBC는 김태균의 커리어 첫 국제대회였다. 당시 국민타자 이승엽이 주전 1루수로 맹활약하여 출전기회를 많이 잡지 못했지만 이승엽의 후계자 1순위가 자신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게다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4강에 오르면서 병역특례까지 받게되어 군문제를 일찌감치 해결할 수 있었다.
4.3. 2009 WBC: 준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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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WBC 이후 김태균은 이승엽의 1루수 후계자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이후 기량이 급등한 이대호, 국민타자 이승엽에 밀려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2008 베이징 올림픽에 모두 승선하지 못했다. 하지만 2008년의 맹활약과 이승엽의 WBC 불참선언으로 인해 2009 WBC에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출전할 수 있었다.
2009 WBC에서 김태균은 이대호를 밀어내고 팀의 주전 1루수이자 4번타자로서 맹활약했다.
1라운드 한일전(승자전)에서 그야말로 눈물나는 14:2 콜드게임 패배때 유일하게 투런 홈런(1회)을 때려 2점을 가져온 것을 시작으로, 3월 9일 있었던 재대결(순위결정전)에선 귀중한 1타점 결승타로 한국에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일본전 맹활약으로 인해 김승엽이라는 새로운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이후 상위라운드에서 역시 매경기 맹타를 휘둘러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어 이대호로 기울던 여론을 순식간에 자신에게 넘어오도록 만들었다. 대회종료시 최종 성적은 타율 0.345, 3홈런(공동 1위), 11타점(1위), 9득점(1위)로 WBC 1루수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또한 이때의 활약으로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 야구의 구단 관계자들의 눈에 띄어 해외 이적설이 돌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심은 결국 1년후 일본진출으로 귀결되었다.
4.4.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우승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역시 이대호와 함께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1루수로서 출전하였다.
하지만 1.5년전과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어 이대호에게 주전 1루수 자리를 내놓게 되었다. 김태균의 개인 성적 역시 매우 처참했다. 김태균은 15타석을 치루는 동안 단 1안타와 볼넷 4개 만을 얻어내는 것에 그첬다.
이 대회에서 김태균이 기록한 0.091의 타율은 21타석동안 0.368의 타율을 기록한 이대호와 비교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적 부진과는 별개로 팀 동료들의 활약에 힙업어 대한민국은 금메달을 획득하며 4년전 도하 참사의 아픔을 완전히 씻어냈다.
4.5. 2013 WBC
2013 WBC 역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하지만 4년전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때와는 달리 이승엽, 이대호에 밀려 주전으로 활약하지는 못했다.
김태균은 이 대회 6타석이라는 제한된 기회속에서 2안타를 기록했지만 팀을 WBC 사상 첫 1라운드 탈락의 수모에서 탈출시키지는 못했다.
4.6. 2017 WBC
지난 3번의 대회에 이어 2017 WBC 역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이로써 오승환과 함께 현재까지 총 네번 개최된 WBC에 모두 개근한 선수로 이름이 남게 되었다. 이러한 경우의 해외선수로는 푸에르토리코의 야디에 몰리나, 멕시코의 애드리안 곤잘레스, 베네수엘라의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 미겔 카브레라 등이 있다.
김태균은 이번 대회 대표팀이 치룬 3경기에 모두 출전했지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김태균은 3경기 0.125/0.222/0.500 1홈런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2연속 1라운드 탈락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1라운드 3차전 몸살감기로 인해 선발제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장 10회 대타로 나와 투런 홈런을 때려내며 대표팀의 유일한 1승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1라운드 2차전 네덜란드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전 애국가에 맞춰 김태균이 장난스럽게 거수경례를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경기 외적으로도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지난 이스라엘과의 경기 충격패 이후 나온 장면이라는 점에서 국민들은 더욱 분노하고 있다.
5. 연도별 성적
- 통산 기록은 3000타석 이상 기준
[1] 실제로는 전통적으로 충남 지역 팜이 흉작이라서 김태균은 2차 1라운드인 김백만(야구선수)보다도 적은 계약금을 받았다.[2] 강석천은 당시 롯데의 공필성과 더불어 영 좋지 못한 3루 수비를 보이던 선수였다.[3] 2018년에 다시 war 0점대를 기록하기 전까지는 0점대 war이 개인 war 중 유일한 기록이였다.[4] 타율 7~8위, 홈런 6~7위를 유지하는 성적, 심지어 개수나 비율조차도 순위권에 맞춰졌다(...).[5] 장종훈이 김태균을 격려하면서 '다음은 너다'라고 말했다는 기사라든가, 김태균이 장종훈의 라커룸을 물려받았다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6] 다만 2006 시즌은 1980년대와 비슷할 정도로 희대의 투고타저 시즌이라는 것을 감안해야한다. 홈런왕 이대호를 포함해 당해 20홈런 이상을 쏘아올린 타자는 고작 4명뿐이었고, 3할 타자도 5명에 불과했다.[7] 이때 상대투수는 정대현이다.[8] 단 무조건 2글자, 성까지 합쳐서 3자 이내라는 조건이 붙는다. 김마리아같은 예외도 있긴 있지만.[9] 2008 시즌 경기 MVP로 선정된 후 인터뷰에서 밝혔다. 당시 인터뷰어는 송지선[10] 속설에 따르면 한화가 제시한 돈은 심정수의 계약금보다 훨씬 웃도는 70억 ~ 80억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김태균이 롯데에서 받게 되는 돈은 총 7억엔. 당시 환율로 환산하면 90억원 정도 된단다. 가히 인생의 승리자.[11] 30% 이상 구사하니 주종이다. 왼손 스리쿼터에 슬라이더처럼 휘면서 떨어지기 때문에 생소하게 느꼈을 것이다.[12] 진지빨자면 그 1번은 당시 대졸사회인 출신의 24세 신인이었던 키요타 이쿠히로가 입단 거부 소동 끝에(당 해 드래프트 최하위픽인 4라운드 지명이라 지명순위에 불만을 품었다.) 받은 것이라서 김태균에게 그 번호가 돌아갈 가망이 없었다. [13] 2020년 기준으로는 죄다 음식을 냈기 때문에(...) 선수단이 전원 망할리는 없을 테니 상관없다. 다만 2017년처엄 죄다 음식을 내고 죄다 망한 시즌도 있기는 했다(...) [14] 니시오카는 이 해의 성적을 내세워 메이저리그의 문을 두드리고 결국 미네소타 트윈스로 향했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15] 참고로 이때 김태균 때문에 지명타자로 밀려난 선수가 바로 후쿠우라 카즈야. 5년 전에는 이승엽을 1루수에서 지명타자/좌익수로 밀어낸 후쿠우라였으나 세월이 야속했다. 하지만 후쿠우라는 지명타자로 뛰면서 13홈런을 치며 부활하게 된다.(그 전의 5시즌 합쳐서 21홈런밖에 못 칠정도로 장타가 죽어있었다.)[16] 2020년 현재는 김태균에 대해서 나름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 1년차 때 그냥저냥 해주고 2년차때 망해서 중도퇴단했지만 롯데 타자용병 중 20홈런 넘긴 사람이 2005년의 이승엽, 맷 프랑코 이후로 김태균이 처음이었고, 그 다음으로 나온 20홈런 용병은 2016년의 알프레도 데스파이네였으니.. 사실 그만큼 해준 용병타자도 최근 15년 간 한 손에 꼽는 수준. 그리고 다 떠나서 WAR이 2를 넘기고 wRC+가 115를 찍었으면 용병 치고 좀 아쉽지만 결코 나쁜 수준은 아니다.[17] 근데 그 날 이범호는 팀의 유일한 안타를 쳐 내면서 와쿠이 히데아키의 노히트노런을 간신히 저지했다고 한다[18] 당시 롯데의 일본시리즈 엔트리에 든 내야수 중 유이한 현역 선수. 나머지 하나는 호소야 케이. 타자 전체 범위까지 합쳐도 키요타 이쿠히로까지 3명이 전부이다.[19] 일본에서는 장타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국내와 달리 똑딱이도 인정해주는 편이다. 게다가 우승도 했겠다 정규시즌도 돈값은 아니더라도 평균치는 해준편이라 롯데팬들 사이에서는 첫시즌 만큼은 분명 좋은 이미지였다.[20] 기사를 보면 동료들과 코치들이 자신에게 친근하게 다가오지도 않고 심지어 홈런치고 하이파이브도 안했다고 하는데... 치바 선수단 투명인간 인증샷.[21] 당장 거의모든 인터넷사이트에서 김태균관련 기사가 뜨면 악플뿐이 안달린다. 이로 인해 쇼크받아 입원하여 덤으로 까이는 김석류 지못미.[22]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저런 모습을 보면서 다른 선수들은 불만이 쌓인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어떤 선수는 김태균도 15억을 받았는데 이번 연봉협상에선 꼼꼼하게 따지겠다면서 벼르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23] 엄밀하게 말해서 15억이란 금액의 산정 기준이 모호한것도 사실이다. 한국프로야구의 FA는 FA 이적시 연봉의 2배나 3배를 보상금으로 주는 제도를 시행하는 관계로, 연봉위주로 계약하고 계약금은 사이닝 보너스라고 해서 상당히 조금 주는 미국과 다르게, 고액계약시 총 연봉의 30~50%라는 큰 계약금을 주는 것이 보통이라 계약금 비중이 상당히 크다. 근데 이때의 김태균 계약은 그렇지가 않으니 모호해진 것. 물론 이게 김태균 탓이라고 할수는 없고 주먹구구식으로 운영 중인 한국 프로야구의 현실이겠지만, 이래저래 까이는 김별명 신세는...[24] 결국 한화 구단내에서 폭발의 기운이 감지되는 상황이다. 이대수는 '''골든 글러브까지 탄''' 유격수임에도 2010년 대비 '''5000만원 인상'''에 그치는 제안을 받았다. 아무리 김태균에게 15억을 줬어도 이건 너무하다는 평이 지배적.[25] 한화 재단의 천안북일고 출신 스타가 아니던가.[26] 일본 사회에서 재일 한국인이 받는 대접을 생각하면...[27] 김태균과 중심타선 자리를 경쟁했던 선수로 대놓고 김태균의 홈런에 좋아하면서 하이터치를 해주는 장면이 찍혔기 때문에 김태균의 저 인터뷰를 반박하는 증거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선수다. 참고로 이 선수는 김성근도 스승으로 모신다. 롯데에 소속되었던 한국 선수, 코치랑 계속 가깝게 지냈던 선수 중 하나.[28] 다만 05년 이승엽을 본 일본의 롯데팬들은 한국인 선수에 대해 얘기하면 이승엽을 더 좋아하고 더 먼저 얘기한다. 물론 어린 팬들은 둘다 모르고 이대은만 겨우 알지만(...).[29] 사토자키 토모야.[30] 놀랍게도 올 시즌 김태균이 기록한 '''첫 결승타'''. 유독 김태균의 타석 앞에서 공격이 끝나는 경우가 많았던 팀 사정때문인 것으로 보인다.[31] 4아웃 이후 무려 12연속 홈런을 기록했다. 참고로 김태균의 2012시즌 홈런 개수는 16개.[32] 사실 시즌 초기가 과도하게 타율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다. BABIP 수치 등을 통해서 김태균의 초반 2, 3개월의 성적을 분석하면 기대성적보다 타율이 거의 1할 가량 높이 나왔다.[33] 6월을 기준으로 홈런이 3개이며, 득점권 상황에서는 1할대를 기록함으로써 같은 시기 제대로 삽을 푸고 있던 '''이승엽 보다도 낮은''' 득점권 타율을 기록하고 있다.[34] 프로야구 13번째로 9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기도 하였다.[35] 같은 팀 선배이자 現 한화 이글스 단장인 정민철 또한 같은 이유로 은퇴경기를 고사했었다. 두 사람의 대인배스러움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36] 투수로는 메이저리그에 있는 류현진 혼자 남았다. 안영명도 포함이었으나 안영명은 2020년 11월 6일에 방출되었다. 이후 KT 위즈로 이적.[37] 만약 박용택이 2020 시즌에도 팀이 우승하지 못하거나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지 못한 뒤 시즌 종료 후 영구결번으로 지정된다면 3번째 선수가 된다. 11월 5일 LG가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면서 박용택 역시 우승반지 없이 은퇴하게 되었다. 다만 이병규와 김태균은 해외리그에서 반지를 하나 따오긴 했다.[38] 이후 이영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송창식이 자주 등판한 것을 혹사라고 하는데 선수가 등판하는 걸 싫어하는데 등판시키는 게 혹사지 본인이 좋아서 던지는 걸 혹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하면서 감독 팬들이 몰려와 김태균도 혹사가 아니라고 인정했다고 한화 팬들을 비방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김태균 입장에서는 2016년 4월 역대급 부진을 겪을 때에도 꾸준히 4번 타자로 출전시켜 준게 김성근이라, 딱히 관계가 나쁠 이유가 없다.[39] 혹사라는 것은 혹독하게 일을 시킨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살려조 송창식은 혹사가 맞다. 그런데 본인이 좋아하니까 혹사가 아니다 라는 김태균의 발언은 혹사라는 단어조차 모르는 무식에 가까운 확률도 크다. 다만 야구선수들이야 대부분 자기를 많이 내보낸 감독들을 좋게 얘기하는 성향이 있고, 야구 분야에서 계속 일할 사람이라면 노장 감독들을 비판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한국처럼 감독과 선수를 스승-제자 관계로 보는 환경에서는 더더욱 선배 야구인에 대해 비판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