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사건

 




1. 개요
2. 사망 전: 박연차 게이트 관련 검찰 수사
3. 사망: 2009년 5월 23일
4. 사망 이후
5. 타살설
5.1. 반박


1. 개요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경상남도 김해시 봉하마을 부엉이바위에서 투신자살한 사건.

2. 사망 전: 박연차 게이트 관련 검찰 수사


'''검찰에 출두한 노무현 전 대통령'''[1]
대통령직 퇴임 이후 고향에서 농사 짓고 방문객을 맞이해 좋은 평가를 받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자 수사의 화살이 측근의 중심인 자신에게까지 뻗쳐 검찰 수사를 받을 위기에 놓이게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수사는 무려 몇 개월에 걸쳐서 장기간 진행되었다. 먼저 박연차에게 받은 15억은 이자율 7%, 차용기간 2008년 3월 ~ 2009년 3월로 명시되어 있는 차용증을 써주고 받은 것이라 사안간의 거래로 판단돼 죄를 묻기 어렵다며 무혐의 처리되었고, 강금원이 노무현에게 전달한 70억은 창신섬유 이사회에서 회의 후 후원격으로 건넨 것이고, 건넨 시점도 퇴임 이후이기 때문에 노 전 대통령에게는 불법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참고로, 강금원의 횡령탈세 사건을 수사하던 대전지검은 이 돈을 회사에서 횡령한 것으로 판단해 사법처리 하였다. 당시 강금원은 뇌졸중을 앓고 있었으나 구속되었고, 병보석마저 불허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에 대한 착잡한 심정을 글로 남겼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터넷에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면서 더 이상 여러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아달라며 스스로 칩거에 들어갔다.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더 이상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후 강금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자 그제서야 병보석이 허락된다. 그러나 이미 치료시기를 놓쳐버렸고, 결국 사망에 이르고 만다.
노무현은 자신의 미니홈피에 국민들께 죄송하다는 사과문을 작성하였고, 부인 권양숙 여사가 자신 모르게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권양숙도 박 회장한테서 받은 10억과 현금 3억원을 모두 자신이 전달받았다고 인정했으며 이후에도 박연차가 정상문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 전달한 1억원어치의 백화점 상품권이 권씨에게 돌아간 정황이 드러나 다시 수사를 진행했었다. 문재인은 당시 노무현이 이 사실을 듣고 엄청나게 화를 낸 뒤,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하냐며 심한 허탈감에 빠졌다고 말했다. 이 일은 사과문을 작성하기 이전이라고...
이 상황에서 박연차는 4월 검찰의 수사에서 “500만 달러를 연철호에게 송금하기 이전에 이미 노 전 대통령과 사전에 협의를 했었다.”라고 진술하여 당초 퇴임 이후에 이 사실을 알았다는 노무현 측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노 전 대통령은 곧바로 해명과 방어가 필요하다는 제목의 글에서 검찰 수사를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으며, 박연차는 사실이 아닌 것을 이야기 하고 있고 아내가 돈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참 구차하고 민망스러운 일이지만, 몰랐던 일은 몰랐다고 말하기로 했다”며 “나는 아내가 받은 줄 몰랐다는 사실을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 진술이 터지고 난 후 검찰은 다음주 내로 노무현 내외를 불러 수사하기로 했다.
2009년 4월 30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전두환 다음으로 세번째로 검찰에 소환된 대통령이 됐다. 2008년 12월, 연철호를 통해 박연차에게 받은 것으로 보이는 500만 달러, 2007년 6월 정상문을 통해 권양숙이 받은 100만 달러, 그리고 정상문이 횡령한 12억 5000만원의 업무 추진비에 관련한 수사를 받았다. 검찰은 노무현에게 이런 돈의 흐름을 재임기간에 알고 있었느냐고 집요하게 캐물었으나, 노 전 대통령은 대체로 '모른다'며 혐의를 부인했고, 2007년 6월 말 박연차가 권양숙에 전달한 100만 달러 중 일부로 의심되는 30만 달러가 금융정보분석원의 외화송금 거래내역에 의하면 노 전 대통령의 아들인 노건호와 딸 노정연에게 송금되었는데, 이 사실을 노 전 대통령에게 알고 있었느냐고 추궁했으나 이 사실도 '전혀 몰랐다'며 부인했다. 검찰이 박연차의 대질을 추진했지만, 노 대통령은 시간이 늦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후 검찰은 30만달러의 출처가 박연차의 돈 100만 달러의 일부인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권양숙을 비공개로 다시 소환조사하기로 했다.
각 언론들은 참여 정부가 내건 최대 무기였던 도덕적 우월성이 무너지는 순간이라며, 주변 참모들의 연이은 비리 소식과 구속, 노건평의 이권 개입, 정치자금 주선과 노무현도 시인한 아내의 뇌물수수로 인해 청렴과 깨끗한 정치를 내걸던 참여정권의 이미지가 추락했다고 연일 보도했다.
여담으로, 박연차는 당시 검찰에서 박검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금품을 받은 사실 자체를 부인하던 정치권 인사와 관료에게 '다 끝났으니 사실대로 털어 놓으라'면서 당사자를 강하게 압박했기 때문. 검찰 관계자는 "상대방이 박 회장과의 금품 수수를 시인하든지, 부인하든지 관계없이 박연차가 대질조사에서 기존 진술을 그대로 유지한 점은 법정에서도 그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검찰의 공소 유지에 청신호가 된다"라고 전했으며, "이 진술이 법정에서도 일관되면 노무현에게 유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5월, 2기 검찰 수사진이 꾸려질 당시 '''이인규, 홍만표''', '''우병우''' 등이 합류하였다. 이인규는 이명박과 오래전부터 인맥 관계가 있다는 말이 돌았다. 원래는 중수부에 들어갈 라인이 아니었다는 것. 이인규는 이전 수사진의 수사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이들이 부임하고 난 이후 고가의 피아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선정적 보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논두렁 발언은 사실이 아니다. 언론에서 '아내가 받은 시계 논두렁에 버렸다!'라는 보도가 이어지자 몇몇 사람들은 해당 피아제 시계를 찾기 위해 논두렁을 뒤지는 일도 일어났다[2].
논두렁에 버렸다는 진술은 2009년 5월 13일, SBS가 단독 리포트로 내보낸 기사가 출처다. 이 기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에서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준 명품 시계를 받아 봉하마을 논두렁에 버렸다’고 진술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시민은 이후에 "노무현이 시계의 존재를 알게 되어 권양숙에게 화를 내며 망치로 깼다고 들었고, 그렇게 알고 있다."라고 한 방송에서 발언했다. 결론적으로는 논두렁에 버린 것이 아니라 망치로 깨버렸다는 것. 26일 검찰에 따르면 2009년 이인규 전 대검 중앙수사부장이 이끌던 ‘노무현 수사팀’은 노 전 대통령 소환 전부터 국정원 측과 정면충돌했고 한다. 국정원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불구속 기소 및 명품시계 여론전 등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23일,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회는 이명박 정권 때 국정원 직원 4명이 ‘논두렁 보도’ 직전인 2009년 4월, 하금열 당시 SBS 사장과 접촉해 노 전 대통령 수사 보도를 적극 요청하고 주장했다고 발표했고, 그 결과물이 5월 13일, 단독으로 내보낸 논두렁에 버렸다는 보도. 해당 과정에서 국정원 측이 자신들의 뜻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려 하자 검찰은 "수사권 침해"라고 반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검찰은 국정원 직원의 멱살을 잡으며 몸싸움까지 벌였다고 알려졌다. 검찰은 당시 노 전 대통령의 구속 등 신병 처리에 치중했다. 검찰 관계자는 “당시 수사팀이 노 전 대통령 소환 후 임채진 검찰총장에게 구속 기소를 건의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당시 검찰 내 분위기도 "박연차 게이트로 인해 구속된 형사범들과 다르게 불구속으로 처리할 이유가 없다"였다. 한 관계자는 "600만 달러를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노 전 대통령을 불구속 수사한다면 앞으로 남은 수사에서 1억∼2억 원 씩 받은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어떻게 구속하자고 할 것이냐"고 주장했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밝혀 `말 바꾸기'가 아니냐는 의혹이 주장되었다. 2007년 12월, 연철호가 박연차에게 500만 달러 투자를 부탁했고 조세피난처로 알려진 버진아일랜드에 다음 해 1월, 타나도인베스트먼트라는 창투사를 설립해 다음 달 노 전 대통령 퇴임 직전 홍콩계좌로 돈을 송금받았고, 노 대통령은 퇴임 이후 그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던 문재인은 연합뉴스와 전화 통화에서 "노 전 대통령은 이 사실을 퇴임 후 봉하마을로 내려가면서 알게 됐다"며 "투자이고 하니까 그냥 정상적 거래로 봐서 별 문제가 안되는 것으로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2017년, 정두언새누리당 의원이 한 프로그램에 나와 당시 담당 검사였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노 전 대통령의 구속수사를 강하게 주장했다고 밝혔다. 정 전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은 어차피 재판으로 가면 노 전 대통령은 실형을 받을 텐데 구속되면 본인이 한 걸로 여론몰이가 될까 부담을 느꼈다."라며 "구속시키지 말라고 검찰 수뇌부에 전달했는데 우병우가 버텼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우 전 수석이 버티는 바람에 안타까운 죽음이 일어났다.", "이 죽음이 엄청난 촛불집회로 이어졌으니 MB#s-1 입장에서는 우병우가 얼마나 밉겠냐?"라며 우 전 수석이 검사장으로 승진되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 대다수의 국민들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구속을 반대했다.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70.6%의 국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구속에 반대하였고, 찬성한 국민들은 27%에 그쳤다고 한다. 예전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구속에 찬성하는 여론이 70%,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에 찬성하는 여론이 72%,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에 찬성하는 여론이 75%에 달한 것과 비교해 보면 확연한 여론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수사에 대한 부정적인 국민여론은 그대로 선거에 반영되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검찰수사와 발맞추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으나 노 전 대통령의 검찰소환을 하루 앞 둔 2009년 4월 29일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5곳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단 한 곳도 얻지 못하는 참패를 당한다. 그제서야 부정적인 국민여론을 인식한 한나라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공세를 늦추며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인다. 당시 한나라당 핵심 당직자의 전언에 의하면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를 비롯한 대부분의 한나라당 국회의원들도 재보선 참패 뒤에 악화된 국민여론을 인식하여 노 전 대통령을 불구속 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심지어 청와대조차도 국민여론을 의식하여 불구속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임채진 검찰총장도 불구속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나 수사를 전담하던 이인규, 우병우, 홍만표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수사를 강력히 주장하고 버티면서 사태는 더욱 난항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석한 지 3주쯤 지난 뒤...

3. 사망: 2009년 5월 23일


2009년 5월 23일 자택의 컴퓨터에 아래아 한글 파일로 유서를 미리 작성해 두고 '''사저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했다.''' 이후 경호 차량(은색 그랜저 TG)에 실려 진영읍내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시골 병원 특성상 수술이 불가능하여 다시 경호원들의 그랜저 차량으로 인근의 양산시 양산부산대학교병원으로 후송하지만 도착 후 '''결국 사망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시신은 원래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될 예정이었지만 화장하여 달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수원연화장 8번 화장로에 화장되고 봉하마을 내 묘역에 안장되었다. 향년 62세.
사망 직후 법무부장관 김경한은 검찰은 더 이상 수사를 진행시키지 않을 것으로 안다(공소권 없음으로 검찰의 수사 종결)고 언론을 통해 발표하여, 검찰 수사가 통제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등이 자진 사표를 냈고, 법무부장관 사표는 반려되었지만 검찰총장은 받아들여졌다. 사건은 추가적인 심문 및 증거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피의자 사망으로 인한 공소권 없음' 발표하고 내사 종결로 마무리되었다.
죽음이 알려지자, 이번에는 각계각층에서 검찰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쏟아졌다. 당시는 국정원 개입 부분은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여당한나라당에서조차 검찰 수사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는데, 검사 출신으로 법무부장관까지 지냈던 당시 '''한나라당 대표 박희태조차''' "이런 수사는 처음 본다."라며 검찰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특히 이 부분은 노무현이 사망하기 한 달 전인 4월의 상황이다. 물론 박희태 대표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편들었다기보다는 검찰이 하루가 멀다 하고 노무현 수사 과정을 속속들이 언론에 뿌리고 이에 노무현 측에서 반박하는 것까지 공개되면서 정치권이 혼돈에 빠진데 대한 불만을 제기한 것이었다. 게다가 일부 여권 인사들까지 수사 대상에 오르면서 한나라당 입장에서도 마냥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반길 처지가 아니었던 것.
홍준표는 '''"구속을 하려고 했다면 신속히 결정해야지, 전직 대통령 수사를 하면서 모욕만 주었다."'''고 검찰을 강하게 질타했다. 홍준표가 노무현의 정적으로 분류되는 정당 소속이긴 하지만 검사 시절 정의와 소신의 검사로서 이름 날렸고 검찰의 고질적인 병폐 때문에 잘리다시피 했던 자라 검찰의 저런 행동이 고깝게 보였을 것이다.[3] 10주기 하루 전날인 2019년 5월 22일 올린 노무현 회고 영상에서도 그때 검찰의 행동은 모욕이었다고 말하는 등,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은 확고한 듯 하다.
검찰 원조 특수통이자 레전드 검사로 불리는 심재륜 전 부산고검장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지켜본 뒤 검찰동우회 소식지에 '수사십결'[4]이라는 글을 기고하며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팀의 과도한 수사행태를 비판하였다. '검사님의 속사정'이란 책에 나온 내용에 의하면 어느 검찰간부는 당시 수사팀이 검사로서 지켜야할 선을 넘으며 무리한 수사를 하였다고 비판하면서 다른 전직 대통령은 다 허물이 있는데도 손도 못대면서 봉하마을에 내려간 힘없는 노무현만 잡아 족치는 건 비겁한 짓이라는 말도 덧붙혔다고 한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이 사망하고 6월 12일, 검찰은 6개월에 걸친 '박연차 리스트' 수사 결과를 최종적으로 발표하였다. 당시 중수부장 이인규는 장장 6개월에 걸쳐 진행된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결과를 단 5분 만에 발표하고 종결지었다. 처음에는 중수부장실에서 사실상 비공개로 진행하려고 하다가 언론의 반발을 받고 공개로 진행한 것이었다. 발표 현장에서 수사팀은 최대한 답변을 피하며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고 하였고, 홍만표는 시종일관 눈을 감고만 있었다. 이인규는 발표만 하고 자리를 피했다. 검찰, 결과 발표 '게눈 감추듯'.
5분간의 발표에서 이 수사는 '뇌물수수 의혹' 때문이라 하였으나, '''구체적인 증거는 언급하지 못했다'''. 훗날 문재인 대표 측에서 이인규를 비판하며 몇 가지 사실을 추가하자 검찰 측에서는 그러한 부분은 모르고 있었다고 말할 정도. 다만, 검찰은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했다며, 정당한 수사였다고 주장하면서 추후 역사적 평가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변호인단은 어이없다는 입장과 함께 검찰의 자기변명과 책임회피를 비판하였다. 문재인 변호사는 자신을 방어하고자 고인을 두 번 욕보이는 행태에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곧이어 검찰은 전직 대통령 구속 여부에 대해서, 검찰은 이미 불구속으로 내정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당시 박연차에게서 금품을 받은 사람은 모두 참고인으로서 다 불구속이 확정된 상태였음에도 유독 금품을 받지 않은 노무현에게만 피의자로서 구속 여부를 심의하였으며, 또한 시간을 질질 끌며 모욕을 주었다는 사실을 밝힌 셈이다. 이러한 검찰의 혼란스러운 행태에 대해 검찰은 또 다시 비난을 들었다. 검찰은 이후 침묵으로 일관했다. 2015년 2월 당시 중수부장 이인규는 당시 어째서 일이 이렇게 흘러갔는지 그 진실의 일부분을 밝혔다. 국정원에서 망신주기 여론 플레이를 제안하였으며, 검찰의 권한을 무시하고 국정원이 주도하려고 하여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이인규는 심지어 국정원이 여론플레이의 주역이었으며 검찰은 관여하지 않았다고까지 말했다. 국정원 검찰에도 노무현 시계 언론플레이 요구.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같이 수사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 우병우는 이인규의 발언에 긍정하면서 맞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야당은 특검을 요구하였으나 국회에서 여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참고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수사를 밀어붙이던 검사 3인방의 운명도 주목받고 있다. 홍만표 당시 수사기획관은 법조사상 최대비리에 연루되어 구속수감 중이고, 공명심에 눈이 멀어 불구속 국민여론도 무시하며 구속을 밀어붙이던 우병우 당시 중수1과장 역시 사상최대의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되어 현재 구속수감 중이다. 이인규 당시 수사팀장은 모기업의 인사청탁 의혹 등에 연루된 상태이고, 국정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가 발족하자 재직 중이던 법무법인을 퇴사하고 미국으로 날아가 체류 중이었다가 2019년 8월에 귀국한 이후 현재는 서울특별시에 머물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를 두고 항간에서는 '노무현의 저주'란 말이 떠돌기도 하였다.
'''노무현 본인이 뇌물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결국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진보 진영 측은, 2017년에 비리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가 대북공작금까지 사용하며 뒷조사를 벌였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그러고도 뇌물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세간에 내놓지 않았던 것을 보면 '''노무현 본인은 형사처벌을 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보수 진영에서는 '''"만약 노무현 전 대통령이 형사처벌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면, 왜 법치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법으로 다투지 않고 자살을 선택했는가?"''' 라고 반문한다.[5] 아무튼 이 행동 덕분에 이명박은 노무현의 곁을 따르던 참여정부 청와대 비서진들과 노무현의 옛 동지, 추종자들에게 단단히 원한을 사게 된다.

4. 사망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대한민국 정치사를 뒤바꾸어 놓았고, 그 여파는 현재진행형이다. 현직 권력자도 아닌 퇴임 후 시골로 낙향한 전직 권력자 한 명의 죽음이 일국의 현대사를 뒤흔들어 놓은 사례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기간 동안 500만 명이나 되는 '''역대 최대의 조문객'''이 몰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문객은 내무부 자체 보고에 의하면 1769만 명이라 하지만 , 언론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문객 수를 200만 명으로 잡고 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500만 명 조문객을 역대 최대로 보도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서울역사박물관에 공식분향소를 설치했지만, 추모객들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공식분향소를 외면하고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마련한 덕수궁 앞 시민 분향소를 찾았다. 당시 조문객들의 숫자를 보면 5월 27일까지 덕수궁 시민분향소엔 60만명의 조문객들이 몰렸지만, 공식분향소를 찾은 조문객들은 겨우 5만명 정도였다.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10%대의 낮은 지지율로 허덕이던 민주당은 순식간에 지지율이 28%로 급등하여 정당 지지율 1위를 기록하였고, 한나라당은 24%를 기록하여 1위에서 2위로 내려앉았다. 시사in의 분석에 의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해 일부 한나라당 지지층과 부동층, 진보진영이 민주당 지지로 결집하였다고 한다. 여론조사 결과 60%의 국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이명박 정부의 정치보복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도 56%에 달했다.
이 시기에 실시된 대선후보 여론조사에 의하면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수성구 을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후 대선후보 대열에도 끼지 못하던 유시민정동영을 꺾고 야권 대선 후보 지지율 1위의 대권주자로 올라서기도 하였다. 또한 2010년 지방선거의 민주당 서울특별시장 예비후보 적합도에서 친노인사 3명(유시민, 한명숙, 강금실)이 1위 ~ 3위까지를 독차지했고, 이들 모두 오세훈 前 서울시장을 가상대결에서 꺾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하기 이전까진 언급조차 되지도 않던 인물들이 갑작스럽게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로 등장하게 된 것은 '노무현 사망 후폭풍'의 영향력이 그만큼 엄청났다는 반증이다. 또한 민주당 당내의 역학구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가까웠거나 친노 진영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인사들의 위상이 급상승하고, 비노로 분류되는 인사들은 몸을 사리는 분위기가 형성되는데, 특히 비노 인사들로부터 맹공격을 받던 참여정부장관 출신 정세균 민주당 대표의 위상이 강화되었다. 또한, 추모기간 동안 네이버다음 등에선 노무현 추모웹툰이 올라왔으며, 현재에도 만화 전문을 볼 수가 있다. 또한 사망 직후 각 지역에서 시국선언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얼마 후에 2009년 6.10 범국민대회등의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2010년 치러진 6.2 지방선거는 우연찮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1주기 추모식이 겹치는 바람에 친노 인사들을 전면에 내세운 민주당이 대승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지방선거 직전에는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명칭만 들어가면 여론조사 지지율이 5~15%가 올라가는 현상이 발생해, 노무현 재단에는 하루에도 수십통씩 노무현 재단 관련 타이틀을 달고 싶다는 후보자들의 민원이 쏟아졌다고 한다. 특히,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노무현의 최측근이었던 안희정이광재, 김두관 등이 각각 충청남도지사강원도지사, 경남도지사 등에 각각 당선되어 화제를 모았고 참여정부 행정관, 비서관 출신들이 대거 기초자치단체장에 당선되었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새정치민주연합의 여론조사 경선에선 후보의 경력에 '노무현' 문구만 들어가도 지지율이 20% 상승하여 비노계 후보들이 여론조사 문항에서 '노무현' 이름을 빼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도사를 낭독한 한명숙 전 총리는 큰 인기를 얻어 민주통합당의 당 대표 자리까지 차지한 뒤 2012년 총선을 진두지휘하기도 하였다. 2012년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은 비록 김용민 막말 파문의 직격탄을 맞아 패하긴 하였으나 127석의 의석수를 확보하였는데, 이 중 참여정부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훗날 더불어민주당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정두언 전 국회의원은 2006년 지방선거,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에서 참패를 거듭하던 민주당을 되살아나게 한 원동력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이라 분석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에도 영향을 미쳐 2013년 10월 여론조사에서 처음으로 노무현이 박정희를 호감도에서 앞섰던 적이 있고, 2016년에는 역대 호감도에서 박정희를 완전히 꺾었으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발발 직후에는 박정희의 호감도가 빠지며 노무현의 호감도가 처음으로 50%로 상승했다. 2017년 5월 여론조사에서는 54.2%의 호감도를 기록하여 20.6%의 호감도를 기록한 박정희를 누르고 1위를 기록하기도 하였으며, 10월 여론조사에서도 1위를 기록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호주국립대 김형아 교수가 기고한 논문에 의하면 기존의 '김대중 vs 박정희' 구도로 돌아가던 한국의 현대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노무현 vs 박정희'의 구도로 변환되었다고 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 역시 현대 한국사회를 이끌어온 시대정신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꼽았고, 그 상징이 박정희와 노무현이라고 정의하였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문재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이전까지만 해도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고, '''정치에 나설 생각조차 없는 인물이었지만'''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 이후 대권주자로 발돋움하여 2012년 민주당 대선후보,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를 거쳐 2017년,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유시민 작가는 썰전에서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으로 노무현의 정치적 복권이 이루어졌다고 표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민주개혁세력을 결집시키고, '친노'란 멍에 때문에 일선에 나서지 못하는 인재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반대로 함량미달의 정치인들이 노무현의 이름을 팔아 정계에 데뷔하거나, 대중영합주의에만 혈안이 된 일부 정치인들이 자신의 인기를 높이기 위해 수시로 노무현 및 친노의 이름을 팔아대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일례로 별다른 경력없이 노무현재단 관련 타이틀만 가지고 선거에 나선다든지, 노무현 전 대통령 당선자 시절 잠깐 맡았던 명예직이나 한직 등을 크게 부풀려 말하거나, 고인과 과거 인연이 있음을 강조하며 관직, 국회의원직 등을 얻으려 하거나,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지지자들의 애정을 악용하여 자기들 자리보전 하는데 써먹는 정치인들이 등장하는 등 고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정치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2018년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노무현의 적통이라 불리는 문재인 대통령이 19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친노를 잇는 친문은 현재 대한민국 정치에서 주류 중의 주류 계파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귀향 연설에서 극찬했었던 친노 핵심인사로 분류되는 유시민 또한 정계에서 은퇴했으나 작가, 평론가, 방송인으로 두루 활약하고 있으며, '2017 대한민국에 영향을 끼친 인물'(시사저널 조사) 3위에 선정되었다. 참여정부 때의 국무총리였던 이해찬 의원은 무려 7선에 성공하는 등 많은 나비효과를 내고 있다. 또한 현재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70% 박스권이라 할 정도로 높은 상태를 유지 중이고, 더불어민주당 역시 중도좌파 성향의 정당으로는 이례적으로 과반 지지율을 유지중인 상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이은 정권이라는 명분이 어느 정도는 존재할 것이다. 사실상 현재 차기 대선후보로 분류되는 실질적으로 유력한 후보들은 대체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 많다. 게다가 아직까지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변호인, 노무현입니다, 무현, 두 도시 이야기 등의 작품이 화제가 되었다. 노무현에 대한 오마주가 영화 곳곳에 담긴[6] 광해도 문재인의 관람 후 모습[7]으로 인해 노무현과 함께 오르내렸고, 더 킹 역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 및 죽음이 영화의 터닝포인트로 작용하였다. 더 킹의 감독은 이 영화를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하였다.
심지어 '노무현의 남자들이 여의도를 접수했다.' 는 말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제1야당 '''자유한국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참여정부에서 정책실장 등을 역임했던 김병준이 임명되고, 여당 대표로는 노무현정부 국무총리를 지냈던 이해찬이 당선되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문희상은 국회의장으로, 정무수석을 지냈던 유인태는 국회 사무총장으로 취임하였다. 동아일보'여의도를 넘어 한국정치 전반을 친노가 점령하는 모양새다'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또한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와 그로 인한 여러 법조비리들 역시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련성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으며, 적어도 여론조사를 통해 나타나는 과반의 여론이 적폐청산의 동력원이 되는 이유가 이명박 정부 시절 노무현의 죽음과 관련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또한 이명박에게 거의 불리하게 해석되는데, 국민들의 여론이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 이명박이 지른 범죄를 수사하는 것이다' 와 동시에 '당신도 노무현을 무리하게 수사해서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인과응보다'라는 주장이 병존하기 때문이다. 논리적 타당성을 떠나서 적어도 같은 대통령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노무현의 죽음이 적어도 대통령 후임인 이명박을 수사하는데 이 정도까지의 원동력이 되고, 그 여론이 과반을 훨씬 넘는 지지를 받는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방문객 수의 감소로 어려움을 겪던 딴지일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 정국 기간 관련 취재 및 특집보도를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큰 주목을 받았고, 이후 수많은 독자들이 몰려들며[8]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김어준은 이 당시 딴지일보에 쇄도하는 네티즌들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산으로 돌려말하며 자신에게 축복이 될지 부채가 될지 모르겠다며 걱정하였으나 결국엔 딴지일보가 부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를 런칭하여 진보진영의 선봉장으로 활약하게 된다.[9] '나는 꼼수다'의 대성공으로 정치 관련 팟캐스트의 전성시대가 열리면서 보수우위의 종편방송과 맞서는 민주진보측 여론시장이 팟캐스트계에 형성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이자 생을 마감한 장소인 봉하마을김해시 최고의 인기 관광지가 되었다. 잔디공원과 생태문화공원이 들어서면서 정치색이 없는 일반관광객들도 종종 찾는 명소가 되었고, 진보 성향의 정치인 등이 필수적으로 들리는 코스가 되었다.
2020년에도 노무현 효과는 여전해서 21대 총선에서는 그의 시대 정신과 신념을 따르던 사람들이 제 21대 총선에서 180석 민주당 계를 떠나 87년 민주화 이후 6공화국 역대 정당 중에서 선거를 통해 최대 의석을 얻었다.[10] 비록 노무현은 비극적으로 죽었지만, 그의 추종자들이 2021년 현재 대한민국의 주류 정치 세력이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5. 타살설



[노무현 타살설을 주장하는 글(접기/펼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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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 사망 이후 현재 공식 사인은 자살로 판정된 지는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수십 미터에서 투신했는데도 즉사하지 않았다는 점, 두개골이 파열되었음에도 목뼈는 부러지지 않았다는 점, 다른 신체부위의 타박상이 적고 출혈이 적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아직도 노무현 타살설이 주장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노무현 타살설이 언급되고 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인(死因)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던 지지자들이 노무현의 사인을 제대로 밝혀 내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신은 부검도 없이 화장했기 때문에 정확히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미스테리로 남게 되었다. 본래 자살 및 타살이라면 부검을 하는 것이 원칙이고, 사인을 알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에 부검을 실시하려 했으나, 유가족 측에서 고인의 유서에 쓰여 있는 '화장해라.'라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서 화장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기 때문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타살설이 사실이었을 경우 미제 사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타살설을 부정하는 이들은 당시 이명박 정부나 노무현의 정적들에게 노무현의 죽음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었기 때문에 노무현이 타살당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노무현은 실족사한 것인데 외부에서 그의 죽음을 자살로 둔갑시켰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노무현이 딱히 자살할 이유도 없었고, 타살당할 만한 이유도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반대로 범인은 그 사건으로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이라는 의견을 들어 당시 폐족위기에 몰려있던 친노 진영에서 노무현을 의도적으로 살해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다만 문재인을 까기 위한 용도로서 사용될 뿐 진지한 주장은 아니다.

5.1. 반박


  • 톨게이트 CCTV를 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실려 있던 그랜저 경호차가 통과하는 순간 경광봉이 튀어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타살설에서는 이것이 피흘리는 손을 조작한 것이라 주장하지만, 화질이며 재생퀄리티를 봤을 때 조작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 이는 타살설을 주장하는 측에서 저화질 캡처가 아닌 '원조' 동영상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근거라고 볼 수 없다. 경광봉은 화면에 매우 갑작스럽게 등장하는데, 만약 원본이 피흘리는 손이었고 그 부분을 경광봉으로 덮어씌운 거라면 손의 움직임과 같아야 할텐데, 죽어가는 사람이 저렇게 날렵하게 손을 내밀 수 없다. 또한 계속해서 손을 내밀고 있는 상태였다면 그 전까지 차체 밖으로 아무것도 나와있지 않은 것으로 조작을 해야 하는데 이건 더 어렵다. 결정적으로, 손이라고 주장하는 사진을 보면 차창 테두리에 기댄 게 아니라 들고 있는 것으로 명확히 확인이 되는데, 의식이 없는 사람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조금만 생각해보면 기절 혹은 사망한 사람의 팔이 저 각도로 튀어나오게 차 안에 눕히거나 앉히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공사장의 바람구멍. 이 의혹은 사진의 각도에 문제가 있다. 사진 3의 노란 점선은 위 사진 1, 2의 시선을 표현하고자 한듯 하지만, 바람구멍이 있는 사진은 노란점선의 위치가 아니라 대로변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8을 보면 알 수 있듯 철재판넬이 같이 찍히기 위해서는 노란점선의 위치보다 상당히 내려와야 한다. 사진 1, 2를 봐도 바람구멍이 모든 칸마다 뚫려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고, 길목 막판에 해당하는 사진7에 나오는 구멍들이 사진 1, 2에 나오는 바람구멍일 가능성이 높다.
  • 파일명을 가지고 악랄한 트집을 잡고 있다. 날짜를 착각했거나 전날 파일을 덮어서 계속 사용한 등의 일상적인 변수를 모두 제하더라도, 이 의혹은 '내일 노무현 암살'이라는 초S급 기밀이 일개 신문사 디자이너 귀에까지 들어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미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지만, 하루 전날 로고를 미리 제작해둬야만 할 이유가 아예 없다. 또한 라디오 코리아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위한 뉴스다. 시차발생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한국의 23일은 LA에서는 아직 22일인 것이다. 의혹 제기자는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관계조차 확인하지 않고, 군소언론의 특수성 혹은 실수를 마치 거대한 음모의 완벽한 증것인 양 억지를 부리고 있다.
  • 병원 의혹에서 말하는 '1차진술'의 출처가 불분명하다. 5월 23일 당일 오전에 작성된 기사를 봐도 공식 브리핑에서 처음부터 의식불명이었다고 밝힌다.
  • 타살설 주장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경호원을 의심하는데, 경호원을 의심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넌센스지만 애초에 경호원을 1명만 데리고 산에 오른 것은 노무현 본인이다.



[1] 사진 맨 왼쪽부터 '''문재인''' 당시 변호사, 주영훈 봉하마을 경호팀장, 문용욱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대통령 수행비서), 전해철 변호사, 노무현 전 대통령, 김경수 비서관. 이중 문용욱 실장과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훗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정치권 최일선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수석 변호인 역할을 한 문재인은 제19대 대통령이 됐고 경호 책임자였던 주영훈은 문재인 정부의 초대 청와대 경호처장이 됐으며 측근 변호인 전해철친문계의 핵심 3선 국회의원과 행정안전부 장관까지 내정되었고 마지막 비서관인 김경수경상남도지사가 됐다.[2]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홍만표와 우병우는 비리 및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감옥에 갔고, 이인규는 모 기업의 채용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국정원 관련 수사가 시작되자 돌연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이를 노무현의 저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 이인규는 이에 대해 할 말이 많다며 모든게 끝나면 제대로 된 당시의 사실을 밝히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인규는 세월이 흘러 2019년 8월, 미국에서 돌아온 것이 뒤늦게 확인되었다.[3] 개인의 일설로는 홍준표가 당 원내대표 시절에 노무현이 소속되어 있던 정당으로 옮기려고 했다는 얘기도 있고, 같이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사이였다고 한다. 한 마디로 겉으로 보기에는 정적이지만 사실 꽤 친근했다고.[4] ‘칼은, 찌르되 비틀지 마라’, ‘수사의 목적은 달성하되, 공연히 불필요한 고통을 줘서는안 된다’, ‘언론과는 불가근 불가원하라' 는 등 수사를 할때 기본적으로 지켜야할 10개의 원칙을 설명.[5] 이명박은 검찰 조사를 받고 결국 구속까지 됐을지언정 끝까지 법으로 싸웠다는 점 또한 이 의견을 뒷받침한다.[6] 사실 더 많은 오마쥬가 있었으나 정치적 후폭풍을 고려하여 편집되었다고 한다.[7] 당시 영화를 관람한 후 눈물을 흘리며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고 한다.[8] 딴지일보의 말에 의하면 독자들이 '텍사스 소떼'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9] 다만, 노무현이 죽기 전까지 딴지일보나 나꼼수 멤버들이 보였던 행적은 참여정부 내지는 노무현을 물어뜯던 당시의 진보층과 다를 게 없는 입장이기도 했다. 주진우는 당시 시민사회수석인 문재인을 민경찬 사설펀드 건으로 집요하게 물고늘어져 전과를 만들어내고 사퇴시키지만 결국 문재인은 무관한 일이 되어 직접 사과를 해야 했고, 김어준, 김용민은 각자 사설로 노무현을 비난했던 전력이 있다. 딴지일보도 창간 때부터 B급의 명랑한 정치 풍자를 명목으로 조롱을 일삼기도 했다. 의문의 서버 해킹 및 폭파로 인해 딴지의 과거로 접근할 길이 사라진 점은 이들의 이미지 세탁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10] 합당까지 포함할 시 3당 합당 때의 민주자유당이 217석으로 최대 의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