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악영향
1. 개관
중국 역사상 어떤 침략이나 전란도 문화대혁명만큼 중국의 문화를 파괴하지 못했다. 장제스가 대만으로 도주할 때 대륙의 수많은 문화재들을 옮겨놓지 않았다면, 또는 저우언라이가 사병을 동원하여 몇몇 문화재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 중국 문화의 많은 부분을 정말 이야기로만 전해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으로 일어난 문화 파괴 때문에 제 발 저려서, 지금도 장제스가 문화재를 먹튀한 것에 대해 뭐라 못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
문화대혁명이란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면 아마도 르네상스처럼 '문화가 혁명적으로 발전한 시기를 말하나 보다'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전세계를 봐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찬란했던 4000년 중화 문명을 중국인들 스스로 부숴버린 대규모 반달리즘'''이 일어난 시기였다. '''중국 문화 전반이 파괴되어 분야에 따라 수백~수천 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글자 그대로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의 끝판왕.
본래 문화대혁명이라는 용어도 마오쩌둥 생전에 마오쩌둥과 홍위병들이 만든 용어였으며, 마오쩌둥 사후에도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의 권위를 무너뜨릴 수 없었기에 혁명이라 부르는 것일 뿐이다. 실상은 권력욕에 찌든 뒷방 늙은이가 자기 권력욕을 위해 수많은 국민을 부추겨 나라를 갈아버린 사건일 뿐이다.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홍위병들이 저지른 폭력은 단순히 사람에게만 가해진 게 아니라, 기존의 중국 문화 전체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수많은 문화 유산과 서적 등이 이때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고 소실되었다.
마찬가지로 음악, 미술, 영화, 체육, 소설, 만화, 심지어 애니메이션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어이없는 정책과 숙청이 벌어졌고, 중국 문화계도 당연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굳이 중국인이 아니더라도 문화예술 분야에 조금이라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밑의 홍위병들의 수많은 반달리즘 행위에 대해서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특히 해당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화가 치밀어오를 수도 있을 정도의 만행이었다.
오늘날 중국이 하드웨어는 충분하지만 소프트웨어는 미국에게 비교조차 민망할 수준의 넘사벽으로 밀리는 이유 중에 하나다. 오늘날 중국이 표절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스스로 흔한 방송 프로그램도 제대로 기획하지 못해서 타국 미디어를 기웃거리게 만든 만악의 근원 또한 이 문화대혁명 때문이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중국 문화계는 주변 국가인 대한민국과 일본에 비해 심각한 수준으로 열세인 게 현실이다.[1]
중국의 문화 컨텐츠 중에 꽤 수준을 인정받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대만이나 홍콩/마카오의 것들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중국 본토에서 만들어지는 문화 컨텐츠들이 변변치 않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대중음악 분야에서 확연한데, 인구가 13억이 넘는 본토에서, (1/40도 안 되는) 다 합해야 3,000만 가량의 대만/홍콩/마카오와 경쟁이 될 만한 음원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중국 본토의 경제 규모는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우리가 무시할만한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지 오래로, 이는 중국 본토의 하드웨어가 딸려서가 절대 아니다. 소프트파워의 무서움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2]
참고로 중국 내에서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경제적인 피해는 대략 5,000억 위안으로 추산하고 있다. 2019년 기준으로 볼 때 한화로 82조 600억 원 가량에 해당되는 금액으로 중국으로써는 감당이 불가능한 피해액이 아니라지만 이건 중국의 경제가 발전해서 그런 것이고, 1970년대 중국의 경제규모와 위안화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큰 피해액으로 1980년 당시 중국의 총 GDP가 4588억 위안으로 추산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금액임을 알수있다.
대약진 운동의 피해규모와 합치면 6,200억 위안에 달하는데, '''이는 중국 정부가 건국 이후 30년 동안 기반시설에 투자한 총액보다 큰 금액이다.''' 거기에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후발국가들에게 하나하나 경제적으로 따라잡혔고, 또한 문혁의 후유증으로 1980년대 인구 2,000만 명도 안 되는 대만에 '''경제력의 40%를 따라잡혔고''', 중국 기준에서 일개 대도시 정도인 홍콩의 경제력이 중국 전체 경제력의 최대 1/4까지 도달했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문화대혁명은 중국 내 모든 자산을 소모하고, 적지 않은 인민들에게 정신적인 후유증을 남긴 것은 물론이고 경제적인 위상까지 크게 추락시켜버린 '''전세계 최악의 역사적인 반달리즘'''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2. 상세
2.1. 문화유산 파괴
- 염제릉(炎帝陵)의 주전(主殿)은 불에 타고, 능묘는 파헤쳐졌으며, 뼈는 태워져서 뿌려짐.
- 창힐의 능원은 훼손되고, "열사능원"으로 개조됨.
- 절강소흥 회계산의 대우묘(大禹廟)가 훼손됨. 우임금의 조각상은 머리와 목이 잘림.
- 공자의 묘가 파헤쳐져 평평해짐. '대성지성선사문선왕(大成至聖先師文宣王)'이라는 비석도 부서져 가루가 됨. 묘비도 부서짐. 공묘(孔廟)[3] 의 이태소상(泥胎塑像)도 훼손됨, 공자의 76대손 쿵링이(孔令貽)[4] 의 분묘도 파헤쳐짐. 당시 기록이나 회상을 보면 후손들 무덤을 파내서 아직 죽은 지 오래되지 않아 시신의 형체가 있는 멀쩡한 시신들은 나무에 매달았다.
- 화현(和縣) 오강(烏江)변의 항우의 패왕묘(霸王廟), 우희묘(虞姬廟: 사당)와 우희묘(虞姬墓: 무덤)도 천여 년을 내려왔는데, 묘들이 모두 파헤쳐져 폐허가 됨. 이후 패왕묘에 남은 것은 반쯤 땅에 묻힌 석사자(石師子)뿐임.
- 곽거병의 곽릉(霍陵)도 재난을 벗어나지 못함. 향촉(香燭)과 첨통(簽筒)이 부서진 외에 곽거병의 소상(塑像)도 하루아침에 훼손됨.
- 이화원(頤和園)의 불향각(佛香閣)이 부서지고, 대불(大佛)이 훼손됨.
- 왕양명의 문묘(文廟)와 왕문성공사(王文成公祠)의 2개의 건축과 왕양명의 소상(塑像)이 전부 훼손되고 남지 않음.
- 고성태원(古城太原)의 신임 시위원회는 첫째 묘우(廟宇: 사당)를 부수어 전시의 190여 곳의 묘우 고적(古蹟)을 10여개를 남기고 모두 부수고 훼손함. 그의 명에 따라 100여 곳의 고적이 하루아침에 훼멸됨. 산서성박물관 관장이 급히 방림사(芳林寺)로 가서 겨우 이소인두(泥塑人頭: 흙으로 빚어 구운 사람의 머리 형상)를 한 무더기 구해냄.
- 의성(醫聖) 장중경(張仲景)의 소상이 훼손됨. 묘정(墓亭), 석비(石碑)도 부서짐. 장중경기념관의 전람품은 하나도 남지 않음. 의성사(醫聖祠: 의성을 모신 사당)는 이미 존재하지 않음.
- 하남성 남양의 제갈량의 제갈초려(諸葛草廬)(혹은 무후사武侯祠)의 천고인룡(千古人龍), 한소열황제삼고처(漢昭烈皇帝三顧處), 문도무략(文韜武略)의 3개의 석방(石坊)과 인물소상, 명나라 성화연간(成化年間)에 만든 18개의 유리나한(琉璃羅漢)이 모두 훼손됨. 전각의 장식물도 모두 부서짐. 청나라 강희(康熙)가 지은 《용강지(龍崗志)》, 《충무지(忠武志)》 등의 목각본도 불에 탐.
- 한중 면현(勉縣)의 고정군산(古定軍山) 석비는 제갈량이 지주(地主)분자라는 것 때문에 훼손됨.
- 합비에서 대대로 보호해오고 매년 제사지내오던 포청천묘가 하루아침에 훼손됨.
- 항주혁명청년이 악묘(岳廟, 악비의 사당)을 부수고, 악비의 묘도 파헤쳐, 악비의 유골을 태워 재로 만듦.
- 주원장의 거대한 황릉석비(皇陵石碑)가 쓰러짐. 석인(石人), 석마(石馬)가 폭약으로 파괴됨. 황성(皇城)도 깨끗하게 철거됨.
- 여평고리(黎平故里)에 안장되었던 명나라 말의 명신 하등교(何騰蛟)의 사당에 있는 불상이 부서짐. 여평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하등교의 묘도 파헤쳐짐.
- 《서유기》의 작가 오승은의 옛집은 강소성 회안현 하하진 타동항에 있었는데, 폐허로 변함. 이 집은 3개의 담으로 구분되어, 남쪽은 객청(客廳), 가운데는 서재(書齋), 북쪽은 침실[卧室]로 구성된 단출한 집이었고, 수백 년간 "회안현에는 많은 절경이 있으나, 사람들이 가서 문안하는 곳은 이 오래된 집과 그의 묘밖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 홍위병이 《요재지이(聊齋志异)》 작가인 포송령(蒲松齡)의 묘를 파헤침. 묘에는 담뱃대와 머리맡의 책 1권뿐이었는데 4개 구절의 문장이 써져 있었다. 이것이 포송령의 글인지 알아보거나 하지도 않고, 들판에 마구 흩어버린 후, 시체는 불태움.
- 1959년에 세워진 청나라의 문인 오경재(吳敬梓)기념관이 문혁 때 부서짐.
- 장지동(張之洞, 청나라 말기의 개혁가)의 묘가 파헤쳐졌는데, 청백리여서 보물이 없자, 홍위병의 수장(首長)인 장 씨 부부는 시체를 나무에 매달고 수 개월간 방치하여, 개가 뜯어먹기도 함.
- 하남성 안양현의 조간왕(趙簡王) 주고수(朱高燧)의 묘가 파헤쳐짐.
- 흑룡강성 흑하현에 있던 장군분(將軍墳)은 '제왕장상(帝王將相)'의 묘라는 이유로 파괴됨.
- 송나라 때 시인인 임화정(林和靖, 967~1028)의 묘도 파헤쳐짐.
- 청나라 말의 장태염(章太炎), 서석린(徐錫麟), 추근(秋瑾) 및 양내무(楊乃武)와 소백채(小白菜)의 사건에 관련된 양내무(楊乃武)의 묘도 모두 파헤쳐짐. "소의 귀신과 뱀의 요괴를 모조리 없애버린다"는 구호를 외쳤다고 함.
- 남장현의 항일명장 장자충(張自忠)이 건축한 장공사(張公祠), 장씨의관총(張氏衣冠冢)과 3개의 기념정(紀念亭)이 파괴됨.
- 양후청 장군도 국민당반동파로 몰려 묘와 묘비가 훼손됨.
- 안휘 곽저현 문묘(文廟), 산동 래양 문묘, 길림시 문묘도 모두 파괴됨.
- 당대(唐代)의 고승(高僧) 포선(褒禪)이 말년에 머문 곳이 현화산(縣花山)으로, 그의 사후(死後), 제자가 개명하여 포선산이 되었는데, 송(宋) 왕안석(王安石)이 유람하고 《유포선산기(游褒禪山記)》를 지은 후, 포선산은 유명해졌는데, 문혁 때 이를 사구(四舊)라 하여, 포선산에 있던 대소(大小) 2개의 탑이 모두 훼손됨.
- 천년 넘게 자금성의 외성 역할을 해준 베이징 성곽[8] 을 3년만에 완전히 없애버렸다. 현재 그 성곽 터에는 3환로가 깔리고 30년 이상이 지난 뒤에 그 밑에는 베이징 지하철 10호선이 지어졌다.
- 자금성의 황성과 내성, 그리고 외성을 5년 만에 전부 헐어버렸다. 현재 2환로가 내성과 외성 자리에 있고[9] , 내성이 있던 자리에는 베이징 지하철 2호선이 정확히 똑같은 선형으로 지어졌다.
- 송나라 대문호(大文豪) 구양수(歐陽修)의 《취옹정기(醉翁亭記)》는 송대 서예의 대가, 소동파(蘇東坡)가 글을 썼고, 비석에 새겨져 안휘 제현에 있었는데, 근 일천 년을 이어온 이 석비(石碑)를 넘어뜨리고 소동파의 글을 파내고 훼손했으며, 취옹정(醉翁亭) 안에 보관되어 있던 역대 명가(名家)들의 서책과 그림들을 모조리 훼손, 지금까지도 뭐가 훼손되었는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음.
- 만력제의 묘인 정릉을 점령하고 부장품을 닥치는 대로 파괴한 후 만력제와 황후들의 시신을 끌어내어 "봉건지주계급의 우두머리를 심판한다"는 구실로 인민재판에 회부해 투석형에 처해 개박살내고, 남은 잔해는 모조리 불태워서 빗물에 흘려보냄.
-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 백마사가 있었는데 천여년전 요나라 때에도 있었던 18나한상과 2천여년전 인도 고승이 갖고 온 패엽경과 세상에서 희귀한 옥마가 네 가지 구습으로 몰아 산산조각 파괴하고 부수고 불태움.
다만 저렇게 때려부쉈음에도 2019년 7월 6일 기준으로 중국은 세계 최대의 세계유산 보유국이 되었다. 문혁으로 죄다 싹쓸이된 마당에도 중국의 세계유산 등록 건수는 무려 55건으로, 54건이 등재된 이탈리아를 제치고 현재 세계에서 제일 많다. 다만 이들 세계유산 중 일부는 문혁 때 파손되었다가 나중에 복원이 된 것도 있으며, 현재 중국에 남아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각종 박물관에 있는 수많은 문화재는 문화대혁명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문화재이거나, 문화대혁명 이후에 발견된 문화재들, 혹은 문혁 이후로 복원작업을 거친 문화재들이다. 아마 문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세계유산 등록 건수는 3자리수가 넘어갔을 것이다.
항저우의 유명한 사찰 영은사(靈隱寺)도 홍위병들에게 습격당해서 파괴당할 뻔했다. 하지만 온건파였던 저우언라이 총리가 '절 입구와 대웅전 앞에 마오쩌둥 사진을 붙여놓으라'고 지시해서, 사진을 본 홍위병들이 절을 부수는 걸 주저하다가 그냥 돌아갔다는 일화도 있다. 심지어 저우언라이가 배치한 경비병이 아니었다면 '''자금성'''조차 무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저우언라이는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막기 위해 자신의 위치에서 은밀한 활약을 펼쳤다. 일례로 문화대혁명 시절, 과학자들에게 경호병력을 붙여 보호했다. 포탈라궁이나 막고굴에도 역시 위기가 찾아왔지만, 문화재 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저우언라이의 은밀한 보호지시로, 추가로 파괴되는 봉변은 피하게 되었다.
특히 중세 봉건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자금성은 문화대혁명 때 크게 파괴될 뻔한 위기를 넘겼다. 1957년 반우파 투쟁에서 '우파 우두머리'로 비난을 받았던 전 중국민주동맹 간부인 장보쥔의 딸 장이허가 마오쩌둥의 전 비서 리예에게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자금성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집무실을 설치하려 했다고 한다. 1963년에 만들어진 베이징시 도시계획도에 의하면 마오쩌둥이 천안문, 오문,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등을 모두 해체하고 공산당 중앙 당사를 그 자리에 지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장이허 작가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자금성의 모든 건물들에다가 붉은색 천을 줄줄이 걸어놓거나 노동자의 동상을 거대하게 세워놓겠다는 흉측한 발상들도 연이어 나왔으나, 문화재 보호주의자였던 저우언라이의 절박한 반대로 인해 실현되지는 않았다고 폭로했다.마오쩌둥, 자금성 해체하려 했다. 저우언라이가 보호를 위해 애썼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 때 자금성이 밀려나가고 공산당 당사가 들어섰다면 중국은 문화적으로도, 관광산업적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명나라 황릉도 피해를 당해 만력제와 황후, 후비들의 유골과 부장품 일부가 파괴되어, 결국 만력제의 더 자세한 행적과 건강상의 특징 등은 영원히 묻히고 말았다. 만력제의 황릉인 정릉(定陵)은 1956년 발굴을 시행했는데, 한창 연구를 진행하던 와중에 홍위병들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발굴 및 연구에 참여한 연구원들도 상당수가 살해, 감금 등의 학대를 당해서 추가적인 연구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발굴의 총책임자는 우한(吳晗)인데, 문화대혁명의 시발점이 된 '해서파관'을 제작한 그 사람이다.
중국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과 관련된 유적들도 이 당시에 파괴될 뻔했다. 한번은 쑨원이 광둥 정부 시절 머물렀던 광저우 사저를 박살내러 홍위병들이 몰려오자, 관리인이 기지를 발휘해, 마오쩌둥이 쓴 쑨원을 찬양하는 글을 들고 나와 홍위병들에게 읊은 다음, "자, 이래도 여길 부술 테냐!"고 소리치자 홍위병들은 그냥 물러가 버렸다고 한다. 반면 절강성에 있던 장제스 생가는 그냥 홍위병들에게 박살났고 장제스의 생모 왕차이위의 묘소도 파헤쳐지고 태워졌다. 당연히 현재의 생가는, 나중에 문혁의 광기가 사라지고 장제스도 어느 정도 재평가된 이후로 복원된 것이다. 그리고 충칭에 있던 국민정부 주석 린썬의 묘소도 가차없이 폭파당하고 시신은 불태워졌다. 타이위안에 있던 한국의 독립운동가 안창남의 묘와 비석도 문혁 중에 파괴되었으며, 이덕삼 지사 등이 묻힌 상하이 외국인 묘역 '만국공묘'도 홍위병들에게 훼손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산화 이전부터 매국노 수준으로 평판이 나빴던 위안스카이의 묘지는 무사히 보전되었다. 마오쩌둥이 '이런 자도 역사에 있었다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라며 묘지를 보전할 것을 명했기 때문이다.
유교와 공자 역시 봉건적인 사상으로 취급당해 공자의 고향인 취푸(曲阜)의 대성전에 모셔져 있던 공자상이 도끼로 박살났고, 진시황도 경악할 현대판 분서갱유라 할 수 있는 유교 경전 소멸이 일어났다. 또한 무형문화재도 상당수 실전되었다. 대표적으로 문묘에 제사를 올리는 것, 즉 제향(祭享)하는 법이기도 한 《제공대전(祭孔大典)》도 실전(失傳)되어, 한중수교 이후 한국의 석전대제를 참고해서 재현해야 했다. 1990년 석전대제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행사로 초빙 및 2004년 취푸 공묘 석전대제 재현 기사. 그리고 석전대제(문묘제례)를 참고했기 때문인지 석전대제와 같은 고증오류를 제공대전에서도 볼 수 있다.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을 연주하는 악사나 팔일무(八佾舞)를 추는 일무원(佾舞員)은 악공이 맡았으며 모두 남성이었다. 입고 있는 복식 자체가 모두 남성 관복인데 남장여자#s-2.3 항목에서 보듯이 국악, 전통무용 전공자 등의 제례를 수행 가능한 인원 중에서 남성만으로는 숫자가 부족하여 여성이 남자 악인복을 입고 악사와 일무원을 맡고 있다. 현실적인 문제로 발생한 고증오류인데 중국의 제공대전에서도 남성 관복을 입은 여성들이 제관이나 일무원을 맡은 모습이 보인다. 다만 이러한 고증오류는 구성원의 성별보다는 형식을 얼마나 잘 재현했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어차피 복장을 보면 실제로는 다 남자가 하던 일이었다는 걸 알 수 있으니 이는 역사왜곡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
21세기가 된 현대에도 아직도 중국보다 한국에 명 · 청대의 사료가 세세하게 많이 남아 있어서, 한국의 도움 없이는 유교 연구가 어려울 지경이다. 결과적으로 현재는 한국이 중국보다 오히려 유교 관련 문화를 잘 보전한 국가가 된 것이다.(...)
게다가 위의 제공대전도 어디까지나 후대에 형식만 임시로 부활한 것이지, 실제 제사와 그 제사를 수행하는 직책인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10] 은 중국에선 다시 부활하지 못해서, 타이완에 거주하는 공자의 종손인 공수장(孔垂長)이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직책을 수행하고 있다. 공수장의 할아버지이자 국부천대 당시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데려간 봉사관 본인인 쿵더청은 당연히 이 참사에 경악하여서 중화인민공화국에 큰 반감을 가졌다. 국부천대 이후 생전에 한 번도 곡부의 공묘(孔墓)를 찾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자신의 묘지를 곡부에 두지 말도록 했다. 그래서 쿵더청의 묘지는 곡부가 아닌 타이완에 있다. 쿵더청은 본토에 남은 친누이 공덕무(孔德懋)를 만날 때도 곡부가 아니라 해외인 일본에서 만났다. 곡부의 친척들이 타이완을 직접 방문했을 때, 공자 가문에서 대대로 제작하는 술로 알려진 공부가주를 소개해서 대접하며 곡부를 방문해달라고 부탁하자 쿵더청은 '우리 가문에는 이런 술이 없다.'라며 내치기도 했다. 쿵더청이 공부가주를 몰라봤을 리는 없으므로, 이 술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반감이 심했다고 보면 된다.
사실 장제스가 봉사관 쿵더청을 타이완으로 데려간 이유는, 중국을 지배한 역대 왕조들이 전부 연성공을 두어 공자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기 때문이다. 즉 봉사관을 데려간 것 자체가 '우리가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진정한 중국의 지배자'임을 보여주는 정통성을 확보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를 통해 소프트파워를 키우려는 중국의 시도가 평가절하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중국은 하드파워는 강하지만, 소프트파워가 취약해 가까운 장래에 미국을 넘어서기 힘들 거라는 평가를 받곤 한다. 그래서 중국은 공자학원 등을 통해 소프트파워를 증진시키려 하나, 위에 열거된 엄청난 피해들 때문에 그 노력이 가까운 미래에 보상받기는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그러면 그럴수록 대만의 정통성을 더 부각시켜주는 면이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결국 자신이 판 함정에 빠진 꼴이 된 것.
국부천대 이전에도 중국사를 보면, 이렇게 공자의 종손을 보호해서 정통성을 주장한 사례가 많았다. 심지어 송나라가 남송으로 쫒겨날 때도 종손들을 데리고 가서 남종 가문을 세우고, 금나라도 이를 따라해서 곡부에 남아있던 다른 종손들을 보호해서 북종 가문을 세워서 공자 가문이 둘로 갈라지는 사례도 있었다. 이후 원나라가 통일한 이후에 남종과 북종이 협의해서, 곡부에 남아서 선영을 지킨 공로가 있는 북종으로 정통성을 정리하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위에 언급한 쿵더청이 바로 이 북종 가문의 종손이다. 남종 가문의 후예들은 아직 대륙에 남아 있다. 남종에서 별도로 세운 공자 사당도 저장성 취저우에 남아 있다.
공자 밖의 위에서 나온 예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곽거병, 제갈량, 악비, 해서, 왕희지 등 '''중국사에 길이 남을 명사들의 무덤과 기념물이 대규모로 파괴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인쇄 및 무수한 기록과 자료가 박살나 버렸다.''' 예를 들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국제인증을 받은 직지심경을 만든 한국보다 자기들 인쇄술[11] 이 더 오래되었다고 주장해도, '''그 증거가 없다.(...)''' 외세 때문에 파괴된 것이면 할 말이나마 있지만, 자기들이 부순 것이니(...) 변명할 길도 없다.
그 와중에 자금성 내 소장 중이던 청나라 황실이 수집한 최고급 문화재 중 69만여 점은,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튀면서 가지고 가버렸기에, 운 좋게도 홍위병의 광란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문화재를 심히 아끼던 장제스가 중국의 문화적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먹튀한 게 살아남았으니, 예상은 못했겠지만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국립고궁박물원 항목 참조.
중국 내에 있던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도 문화대혁명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이 역시 저우언라이 총리가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역사가 아닌 한민족의 역사라고 했기에 무사했던 것이다.
문화대혁명 후에 발견되어 살아남은 문화재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진시황릉. 1974년에 발견되었는데, 이때는 이미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여서[12] 그 압도적인 크기와 수량의 병마용(兵馬俑)이 살아남았다.
미국으로 넘어간 유물들도 살아남은 것 같다.[13] 참고1 참고2
예전부터 이어진 관우 숭배 사상 때문인지 관림 등 관우와 관련된 일부 유물들도 살아남았다. 사실 관우 같은 경우에는 중국에선 살아있는 역사인 게, 당장 한국전쟁에도 관우의 후손이 참전한 전적이 있다.
이런 일을 저지른 홍위병이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원수냐면, 명나라 말기의 명장으로 중국의 민족영웅 중 한 명인 원숭환의 묘는 마오쩌둥이 심혈을 기울혀 보존하던 민족영웅의 묘인데 마오를 따른다는 자들이 정작 마오조차 보존을 지시한 민족영웅의 묘를 부순 것이다. 또한 이 자들이 중국인들에게 무한까임권을 받은 계기 중 하나가, 바로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신성불가침 수준의 절대적 영역을 자랑하는 남송의 명장 악비의 묘와 상을 건드린 것이다. 악비는 그야말로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한족의 영웅인데, 한족이라는 놈들이 건드린 것. 그 때문인지 홍위병 출신들은 자신들이 홍위병 출신인 것을 숨긴다. 들키는 날에는 보복을 당하거나 먹고사는 데 지장이 생긴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이순신 장군 묘'''를 때려부순 셈.
2.2. 종교 및 문화 박해
문화대혁명으로 괴멸적 타격을 입은 것은 중국 전역의 종교들도 마찬가지였다. 홍위병들 입장에서는 문화재와 함께 모조리 박해하고 때려 부수고 타도해야 할 1순위가 종교였으며, 특히 소수민족들의 종교가 공격 목표였다.
이 시기에는 "종교는 착취계급이 이용하는 도구로 반드시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하여 종교 문제를 처리한다"는 종교 말살정책으로 당의 모든 종교사무부분을 완전히 폐쇄시켜, 중공 치하에서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하던 각 지방 종교단체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천주교의 경우, 각 지역의 홍위병들은 각 성당에 들어가, 건물과 성상을 부수고 성경을 태우는 등 기도와 전례, 성경 읽기 등을 모두 금지시켰다. 또한 교회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다른 종교들 역시 비슷한 상황을 맞았으며, 이에 중국에서 공식적인 종교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시짱 티베트 자치구에서는 무려 6,000개의 티베트 불교 사찰이 파괴되었다. 승려들은 쫓겨났고, 홍위병들은 사찰이란 사찰은 모조리 불태우기에 급급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승려들이 고문을 당하다 학살당했다. 홍위병들은 비참한 모습의 시체들이 완전히 썩을 때까지 대로변에 전시했다고 한다. 나머지 승려들은 강제 환속되었으며 아예 대중들 앞에서 알몸으로 남녀 승려 및 민간인 남녀 간의 성관계를 강제하고 아기의 출산을 확인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14]
이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예시 몇 개만 들자면, 가장 큰 사원이었던 간덴 사원은 다이너마이트로 날아갔으며, 수많은 경전 및 관련 문서들은 화장실 휴지로 사용되었다. 이 경전들 중에는 8세기경에 인도에서 직접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사본들도 있었다. 만약 사본들이 그대로 살아 남았다면 '''세계 불교사가 다시 쓰였을 것'''이라고 한다. 간덴 사원에서 가장 신성하게 모셔지던 쫑카빠(tsongkhapa 1357–1419)의 등신불을 모시고 있던 탑은 "구습과 결별했음을 보이라"며 승려들로 하여금 스스로 탑을 부수고 등신불을 꺼내어 불에 소각하게 하였는데 홍위병들이 물러나자 불을 놓은 승려가 직접 불 속에 뛰어들어 타다 남은 유골들을 구출했다. 후에 유골들은 인도에 있는 달라이 라마에게 보내지고 유품과 사리를 수습하여 다시 탑을 세웠다.
포탈라궁도 박살날 뻔 했으나 역시 문화재를 지키려 했던 저우언라이가 편지를 보내 "이런 건물이 하나쯤은 남아 있어야 후에 봉건계급이 어떻게 농노들을 착취했는지 교육할 수 있다!" 라고 회유함으로써 겨우 살아남았다. 그러나 포탈라궁 언저리에 있던 달라이 라마의 직속사원인 남걜사원과 옛 티베트 의회 건물은 박살난 후였다.[15]
또 무슬림들이 많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에서는 홍위병들이 쿠란을 불태우고, 대부분의 모스크를 일부러 돼지[16] 사육 시설로 만들고, 무슬림에게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했으며, 이맘들이 끌려나와 물감을 뒤집어쓰고 조리돌림 당하고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동화와 혼혈을 강제하는 등[17] 린치의 대상이 되었다. 1975년에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회족 무슬림 1,600명을 학살하는 샤덴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연변 지역의 조선족들도 그들의 출신을 한반도 지역으로 기록한 족보가 훼손되거나 소각되었다. 단순히 족보가 소실되었다는 정도로 끝나지 않고, 그때까지만 "중국에 살고 있지만 내 고향은 한반도",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조선인들이 중국의 항일전쟁에 피흘려 싸운 급부"라는 민족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던 연변 지역의 조선인들의 머릿속 조국관, 민족관 자체가 문화대혁명으로 뿌리채 갈려나가다시피 해서 지금과 같은 "우리는 중국내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중국조선족" "우리의 조국은 중국" 하는 식으로 사상개조되었다. 4인방의 한 명인 장칭의 사주를 받아 연변에 온 마오위안신(毛遠新)[18] 과 그 일당은 “'''조선족은 믿을 수 없다'''”, "조선어의 수명은 기껏해야 10년 내지 15년이다", "연변 문화대혁명이 외국(북한)이 손을 뻗쳤다", "연변에서는 다시 한번 대동란과 대분화가 일어나야한다", "조국의 동북변방 연길에 몸서리치는 반혁명 반란사건이 일어났다"며 민족의식이 뚜렷한 이들을 반혁명분자, 조선(북한) 또는 일본의 특무(간첩), 지식분자로 몰아 집중적으로 박해했는데, 당장 북한의 특무로 몰려 실각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 주장 주덕해(주더하이)를 시작으로, 분리주의자로 몰려 조선족자치주의 주장과 서기들은 물론 학교에서 조선의 역사와 말글을 가르치던 교사들이 홍위병들에게 끌려나와 조리돌림당하고 자아비판을 강요당하고 구타당해 죽는 것은 물론[19][20] 조선인 공동체였던 용정의 명동촌에 위치한 명동학교[21] 와 명동교회의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김약연의 칭송비도 문화대혁명 때에 박살나서 파묻혔다가 나중에 가서야 다시 파내서 세웠다. # 길거리에 '평양냉면', '함흥냉면', '인천백반점' 등 한국 관련 지명이 붙은 음식점 간판까지도 홍위병들에게 박살이 났다. 집에서 한글로 된 편지나 한복 입은 사진만 발견되어도 홍위병들에게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연변 지역 조선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족보는 물론 한글로 쓴 책, 편지나 한복 입고 찍은 사진 등 '한국적(조선적)' 색채가 짙게 드러난 물건들은 모두 불태워 없앴다. 이때 '''항일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상당수 멸실'''되어[22] 독립운동가의 후손임에도 증명할 자료가 없어서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전혀 엉뚱한 인물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가 하면, 현재까지도 한국 학계에서 만주 지역의 항일무장투쟁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심각한 자료 부족을 겪고 있다.[23] 또 박해를 피해 수없이 이사를 다녔으며 심지어 성씨까지 한국과 관련이 없는 중국식 성씨로 바꾸기도 했다. 문화대혁명을 피해 북한으로 달아난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북한 정권으로부터 '중국의 간첩' 내지 '수정주의자'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과장 조금 보태면 중국조선족들이 극성스럽게 그들의 한민족 문화를 중국과 연계시키며 중국의 입장에서 중국의 문화로 소개하려고 드는[24] 편집증적인 태도 역시 문화대혁명을 겪은 PTSD라고 할 수 있다. 그걸로 인해서 한국인들이 중국조선족들에게 곱지 않은 감정을 품게 되었으니, 문화대혁명의 여파는 당대 중국 안에서만 그치지 않고 후대 한중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중국조선족들이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겪었던 고초나 당시의 상황을 사진으로 찍은 사진집이 2010년에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제목은 <연변 문화대혁명 - 10년의 약속>[25] . 관심있는 사람은 일독을 권한다. ## 단 2020년 현재는 절판되어 구할수 없으므로 도서관을 이용할 것.
중국의 기독교 신자들도 배교(背敎)를 강요당했고, 거절하면 당국에 끌려가 구타와 가혹행위 및 고문을 당했다. 개요의 소개영상에서도 나오듯이, 성당들도 홍위병들에게 습격당해, 성모상 등 각종 성상들은 그 자리에서 꺼내져 부서지고, 그 자리엔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리는 일도 있었다. 몇 남지 않은 수도원들도 파괴되었으며, 가정 예배나 기도도 금지되고, 홍위병들은 기독교 신자들의 집에도 들어가, 성경과 찬송가 서적 등을 빼앗아 불태우고 다녔다. 종교인들은 끌려나와 공개적으로 홍위병들 앞에서 갖은 치욕을 겪었다. 상하이 쉬자후이의 서광계 유적지도 기어코 훼손되었다.
등록되지 않은 종교활동은 물론이고, 중국 정부에 종속되어있는 어용 종교단체의 활동마저 완전히 금지되었다. 중국의 관제 종교단체를 관리하는 국가종교사무국이 이 때 모든 활동을 멈추고 사실상 해체 상태에 있었을 정도였다. 등록되지 않은 종교활동을 하는 종교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어용 종교단체 소속 종교인들도 당국과 홍위병들에 의해 끌려나와 수모를 당했다.
2.3. 무술
사제관계가 봉건주의적이라고 중국 무술도 박살 났다. 이는 유명한 소림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무승이 소림사에서 무술을 전하고 익히는 전통이 끊어졌고 실전(失傳)된 무술도 많다. 그나마 민간으로 퍼진 소림 무술은 실전 되지 않았고 억지로 현대에 소림사를 복원했지만, 과연 제대로 복원된 것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나마 홍콩, 마카오, 대만 등의 타 중화권 및 말레이시아나 태국, 싱가포르, 오스트레일리아, 페루,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캐나다 같은 화교 거주지 등지에서 보급된 것들로 인해 무술의 맥을 겨우 유지되는 상황.
본래의 진면목과 각 문파나 고명한 무술가들 고유의 기술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기초 수련법조차 알 수 없게 된 경우가 하나둘이 아니다. '''즉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 중국 무술은 고서적의 기록이나 일부 그림을 참고하거나 이미 무술 수련이나 대련을 끊은 지 수십 년 뒤 아직 까지 생존해있던 무술인들이 최대한 기억을 짜내어 복구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서당 훈장처럼,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중국에서 무도가들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고, 노쇠해서 은퇴한 후에는 제자들의 봉양을 받기도 했다. 이런 모습과, 유파, 문파를 세워 제자를 받아 돈을 벌었다 하여, 중국 공산당 정권에서 좋지 않게 봤던 터라, 문혁 이후로 무도가들은 홍위병들의 탄압으로 제거당하는 것은 물론, 무술서적들도 상당수 자취를 감추웠다, 그래도 몸을 건사한 사람들은 음지에서 수련하거나 기억을 되살려 무술을 복원하기는 했지만 개혁개방 이후로 무술이 건강, 호신용도나 관광상품 등으로 인기몰이를 하자 이번에는 돈을 벌려고 온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현재는 중국 무술이라는 이름 아래 장사꾼들 위주로 남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탄압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무술은 바로 태극권이었다. 사실 태극권도 1966년 다른 무술들과 함께 수련을 금지당하며 탄압을 겪기는 하였다. 그러나 태극권은 소림사나 무당파처럼 종교적 색채를 띠지 않았고, 마오쩌둥이 등산·조깅·수영과 함께 태극권을 심신 단련의 수단으로 권장한 까닭에 4년 만에 금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기존의 투로를 간소화한 간화 태극권을 개발하고 전국의 학교와 지역 사회에 보급하였고 태극권은 21세기 현재까지도 국기(國技)로 대우받고 있다.
하지만 중소 국경 분쟁에서 중국군이 소련군과 몸싸움을 벌일 때 나무봉 등을 이용한 것을 보면 전투력이 필요한 군 중심으로 아주 명맥이 없어진 건 아니다. 다만 심신수양 목적이 있는 전통 무술보단 순수 격투용인 군 제식 무술은 필요한 것만 취하고 새로 만들었기 때문에 전통무술과는 거리가 멀다. 산타(격투기) 참조.
2.4. 스포츠
스포츠도 예외는 아니라, 중국 축구나 농구 분야에서 많은 인재와 옛 기록, 흔적 등이 말살되었다. 이 당시 중국은 선수들이 외국 풍에 물든답시고 올림픽은 물론 모든 체육종목의 해외대회에 참가를 거부할 정도였다. 한국 축구인으로서 한국과 전 세계 축구 역사, 용품 등을 수집하는 이태형이 1950년대 중국 연변팀 축구 유니폼을 겨우 구했는데, 조선족인 정지승이 어렵게 보관하여 겨우 남은 것이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 국가 유니폼에서 클럽 유니폼까지 불타서, 지금도 중국에서는 이 시절의 축구 유니폼을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정지승도 문화대혁명 당시 인민재판에 끌려나와서 축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모욕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1990년대 후반 한국으로 귀화하여 한국 축구계에서 일했으나, 심부전증으로 66살로 급사하고 만다. 이는 지금까지도 중국 축구의 부진에 영향을 끼쳤다. 오죽하면 현재에도 '''"중국에는 호나우두가 밭을 갈고 펠레가 공장을 돌리고 있다"'''고 개드립을 치고 있겠는가?
중국 슈퍼 리그 팀들중 역사가 오래된 팀들의 1970년대 후반 이전 역사자료를 찾기 힘든 이유가 이거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국기(國技)라 일컫는 바둑도 4구악[26] 이라 하여 금지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탄압해놓고 정작 진짜 도박으로 유명한 '''마작'''은 어찌하지도 못했다(...). 괜히 리콴유가 '''"중국인들에게 어지간한 것은 다 금지시킬 수는 있어도 마작은 금지시킬 수 없었다."''' 라면서 손 놓은 게 아니다.
당시 손꼽히던 청년 기재로 이름을 떨치던 녜웨이핑은 흑룡강성의 돼지 도살장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27] 다행히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바둑에 대한 중국 정부의 인식 전환으로 인해 다시 바둑을 두게 되었다. 훗날 녜웨이핑은 중국의 1인자가 된 뒤, "흑룡강성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스포츠 분야는 중국의 수많은 인재와 소련에서 들여온 트레이닝 시스템을 통해 재빠르게 피해가 복구되기는 했다.
2.5. 식문화
이 운동은 중국 요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궁중예식을 기록한 문헌 다수가 문화대혁명 때 소실되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만한전석'''으로 요리들의 순서, 즉 조합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 코스요리처럼 순번을 지키는지, 그냥 한꺼번에 늘어놓는지 등의 예식 자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 수가 없게 된 데다가, 문헌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청나라 시절 만한전석에 대해 알고 있던 환관을 찾아내었는데, 워낙 나이를 먹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탓에 최면요법으로 기억을 불러내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28] 애석하게 중국 대륙 본토에서 복원은 실패로 끝나서, 지금 만한전석은 그저 값비싼 샥스핀 같은 요리를 코스 요리로 만든 것일 뿐이다. 그나마 보통의 대륙인들이 먹기에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먹기에도 터무니없이 비싸다.
이렇듯 중국 요리의 전통이 문혁으로 인해 거의 끊어질 뻔한 위기를 겪었다. 베이징에는 명청(明淸)시대부터 이어진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음식점들이 많았으며, 황실요리에 버금가는 고급음식을 취급하는 고급음식점이 많았다. 당시 이런 류의 음식점들은 홍위병의 공격을 받고 가게 명을 죄다 향양(向陽), 동풍(東風) 따위의 근본 없는 이름으로 개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양고기 샤브샤브를 팔던 '동래순(東來順)'에는 원래 유명 소설가 라오서[29] 의 휘호 '노점신풍(老店新風)'이란 간판이 걸려있었으나, 이 또한 홍위병에게 찢겨나갔다. 그리고 가게는 '민족찬청(民族餐廳)'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당했다. 건륭제가 혼자 몰래 와서 먹고 갔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 오는 샤오마이(烧卖. 딤섬의 일종) 가게인 '도일처(都一處)'는 '북경소매관(燕京烧賣館)'으로 개명당했다.
홍위병들은 음식점을 멋대로 점령하고, 요리사들에게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요리를 하라"고 강요했다. 이로 인해 황실요리를 팔던 고급음식점들이 삽시간에 만두나 빵, 죽 따위를 파는 급식소로 전락해버렸다. 이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중국 요리의 심각한 단절을 가져왔다.[30] 고급음식점에서도 만두나 빵, 죽을 팔긴 했으나, 이런 곳에서 팔던 음식은 '''요리사들이 최고급 재료들을 이용하여 작성한 레시피가 수백 년간 고급음식점의 요리사들에게 전수되던 것들이니, 죽 한 숟가락과 만두 1개에도 역사가 담겨있는 것인데,''' 홍위병들은 이런 걸 깡그리 무시하고 일반 음식을 팔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 '''은나라 시대부터 중화민국 국민정부 시절까지 4000여년간 발전해 왔던 중국의 식문화가 단 3년 만에 백지가 되어버렸다.'''
물론 중국요리라 해도 서민요리들의 레시피까지 실전되지는 않았고[31] 고급식당이라고 해도 무조건 문을 닫은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문혁이 잠잠해지면서 그간의 노하우를 살려 고급음식들을 다시 만들기는 시작했으며, 또한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이후로 수 많은 식당들이 문을 열거나 닫고 경제성장에 따라 외식산업이 급속도록 발달되어가면서 부유층들도 급속히 늘어나며 고급식당들도 프랜차이즈화되었다. 또한 전통 레시피를 재개발하는 과정을 거쳐서 수많은 전통요리들이 살아났으나 상당수의 전통적인 레시피와 노하우가 사라져서 홍콩, 대만 등의 것을 역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중국요리 전체가 홍콩, 대만의 영향을 받게 되고 각 지역의 특색이 많이 사라졌다. 물론 일반 서민층까지 식도락을 즐길 수 있게 될 때까지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기는 했지만(...) 위의 만한전석도 홍콩에선 아직도 잘만 만들어지지만 정통과는 상관이 없고, 청나라와 아무 상관없는 그냥 비싼 광둥요리들을 진열해 놓고 자기들 맘대로 만한전석이라 부를 뿐이다. 참고로 만한전석 자체에 대해선 잘못 알려진 면이 많은데, 이건 해당 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2.6. 미술
21세기가 되면서 중국 출신 현대미술가들이 뜨고 있는데,[32] 이들 상당수가 문화대혁명 당시의 트라우마를 작업 주제로 삼고 있다. 중국 출신 현대미술가들 중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아이웨이웨이[33] 같은 경우, 시인인 아버지가 시골로 하방당하면서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야 했다. 장샤오강 같은 작가도 문화대혁명 시절 홍위병들을 주제로 작업하기도 하였다.
다만 문화대혁명의 포스터들은 홍보효과는 뛰어났다는 점에서 프로파간다적으로는 높이 평가되기는 하는데, 그림 자체가 독특하다고 평가되고 있기 때문에 서구에서는 이 문혁 포스터만 모아서 전시회를 할 때도 있다. 지금은 북한에서 이런 류의 포스터를 아직도 프로파간다에 쓰고 있다.[34]
2.7. 애니메이션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 애니메이션 특성상, 중국은 애니메이션 산업이 발전하기에 상당히 유리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혁 이전에는 상당히 다양한 소재의 중국산 애니메이션이 나왔고, 국제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애니메이션이 나올 정도였다.
애니메이션 산업의 역사를 따져보면 중국이 '''일본보다 훨씬 일찍'''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정도로, 애니메이션 사업에 있어서 선발주자였다. 일본에서는 1943년에 나온 모모타로의 바다독수리가 첫 장편 애니이고 공식적으로는 1958년에 만들어진 백사전이 첫 장편 애니인데,중국은 그보다 빠른 1941년에 이미 데즈카 오사무가 큰 인상을 받았던 장편 셀 애니 극장판인 서유기를 아시아에서 최초로 만들었다.
하지만, 문혁 시기 들어 그 이전에 제작된 작품들과 그 작품을 제작한 감독들은 어처구니없는 비난을 받기 일쑤였고, 작품 소재와 촬영기법도 제한을 받게 되어 내용도 단순화 되었다. 거기에다가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강력한 심의의 영향으로 애니메이션 제작도 급감하여, 문혁 10년 동안 중국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제작된 작품수는 단 17편에 그치는 암흑기를 겪게 된다. 당시 중국에서는 연환화 역시 굉장히 발달하여 중국 특유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이 연환화 기법을 통해 만든 애니메이션이 50년대에만 해도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었지만, 문화대혁명으로 명맥이 아예 끊겨버렸고 중국의 애니메이션과 만화 산업도 완전히 박살났다.
'''결국 동아시아 애니메이션의 주력은 대부분 일본 쪽으로 쏠렸다.''' 더 크게 보면 유능한 중국인 애니메이터 인력을 스카웃해와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의 부족한 인력 보완에 상당한 도움이 돼야 할걸 차질을 빚게 만든 비자유적인 중국 공산당 체제의 한계가 결정적으로 파탄난 것이다.
이로 인해 현재 중국의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산업에서는 창의력 부족과 모방이 심하게 나타나는데, 당시 홍위병이었던 중국의 꼰대들은 이 분야에 대해 "왜 니들은 일본처럼 좋은 작품을 못 만드냐?"라고 중국의 젊은 세대를 많이 디스한다. 하지만 중국식 만화인 연환화나 수묵화 애니메이션 등이 제일 타격을 입게 만든 계기가 문화대혁명이다. 자신들 세대들이 박살내놓고선 현대의 중국 청년들만 탓하고 있는 것.
2.8. 연극
문화대혁명으로 '''가장 피를 많이 본 영역'''이다. 이는 유명 연극, 영화배우 출신이었던 4인방의 수장이자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이 특히 '''몸소 앞장서서 제대로 조져버린 분야'''였기 때문이다.
이미 그 전에 장칭은 1964년에 경극 공연대회에서 한 연설을 통해, "기존 경극이 구시대적이고 봉건적인 내용만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건전한 사회주의 노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디스했고, "모든 경극은 인민들의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삶의 표본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경극 전반에 대한 개작을 지시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장칭의 방침에 반발하거나 미온적이었던 경극 배우들은 모두 숙청되었는데, 당시 경극 배우들에 대한 처우는 문혁 시절 홍위병이었던 천카이거가 감독한 영화 《패왕별희》에서 리얼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렇게 해서 1967년에 우선 기존 경극을 개작하거나 아예 새로 만든 소위 혁명경극 5편, 혁명무용극 2편, 혁명교향곡 1편까지 8편의 공연물이 '문화대혁명의 이상적 음악 작품'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들 작품은 곧 양판희(樣板戱)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엄청나게 자주 상연되고 방송되었다.
- 제1차 양판희 목록
- 혁명경극
- 《홍등기(紅燈記, The Red Lantern)》
- 《사가빈(沙家浜, Shajiabang)》
- 《지취위호산(智取威虎山, Taking Tiger Mountain by Strategy)》
- 《기습백호단(奇襲白虎團, Raid on the White Tiger Regiment)》
- 《해항(海港, On the docks)》[35]
- 혁명무용극
- 《백모녀(白毛女, The White-haired Girl)》
- 《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 The Red Detachment of Women)》
- 혁명교향곡
- 《사가빈》(같은 이름의 혁명경극을 연주회용 작품으로 개작한 것)
- 혁명경극
《홍등기》는 중일전쟁 당시 만주국 점령 하의 후린 철도역 탈환을 위해 잠입한 중국 공산당의 공작원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원작으로, 신해혁명 이후 대를 이어 중국 공산당의 혁명에 동참한 리씨 집안의 내력을 서술하면서, 적에 대한 섬멸 의지와 순국하면서도 대를 잇는 혁명의 기상을 선전하는 작품이다.
《백모녀》는 가난한 소작농의 딸인 여주인공이 악덕 지주의 첩으로 팔려 온갖 학대를 당하다가 탈출한 뒤, 팔로군 병사로 지원해 싸우던 남주인공과 만나 공산 혁명의 대열에 동참한다는 내용이고, 《홍색낭자군》은 빈농 출신인 여주인공이 공산당 여군 부대에 입대해, 혁명 전투에서 맹활약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경극과 가무극 모두 기존의 화려한 의상과 무대 미술을 지양하고, 가수와 배우, 무용수들이 평범한 인민복이나 군복, 기타 수수한 평복을 입고 연기하도록 했고, 주인공은 무조건 사회주의 정신에 충실한 영웅상으로 설정되어, 그에 반하는 인물이나 사건을 철저히 타도한다는 내용이 골자가 되도록 했다. 극의 음악 반주는 기존의 소규모 기악 합주단이 아닌, 합창단과 관현악단이 동원되어 맡도록 했고, 각본과 작곡, 안무를 개인 창작가가 아닌 여러 창작가들의 공동 창작 형태로 맡도록 했다.
그리고 이들 양판희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렸다고 판단한 장칭은, 2번째 양판희 창작을 지시했고, 여기서 뽑힌 9편의 작품이 제2차 양판희로 이름 붙어 보급되었다.
- 제2차 양판희 목록
- 혁명경극
- 《용강송(龍江頌, In Praise of the Longjiang)》
- 《홍색낭자군》 (같은 이름의 혁명무용극을 경극으로 개작한 것)
- 《평원작전(平原作戰, The Warfare on the Plain)》
- 《두견산(杜鵑山, Cuckoo Mountains)》
- 혁명무용극
- 《기몽송(沂夢頌, In Praise of the Yimeng)》
- 《초원아녀(草原兒女, Little Sisters of the Grassland)》
- 혁명교향곡
- 《지취위호산》 (같은 이름의 혁명경극을 연주회용 작품으로 개작한 것)
- 피아노 반주곡
- 《홍등기》 (같은 이름의 혁명경극을 관현악 반주 대신 피아노 반주로 공연이 가능하도록 발췌 편곡한 것)
- 피아노 협주곡
- 《황하 협주곡(黃河協奏曲, Piano Concerto 'The Yellow River')》 (시안 싱하이의 칸타타를 피아노 협주곡으로 편곡한 것)
- 혁명경극
2.9. 음악
그나마 경극이나 무용극은 상대적으로 공연할 레퍼토리가 많은 편이었지만, 피아니스트나 관현악단의 경우, 이 1~2차 양판희나 대중 집회 때의 혁명가요 반주를 빼면 연주할 곡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인터내셔널가를 제외한 모든 국외 작품은 연주가 금지되어 있었고, 피아니스트는 오로지 《홍등기》 피아노 반주곡판과 《황하 협주곡》만을 연주해야 했다. 관현악단도 《사가빈》과 《지취위호산》의 교향곡판과 《황하 협주곡》, 그리고 혁명 경극과 무용극 반주만 하면서 이 시기를 버텨내야 했다.
당연히 이 시기에 활동했던 지휘자와 관현악단 단원들, 피아니스트들은 문혁 후, 전부 당시 상황에 학을 떼며 부정적인 증언을 남기고 있다. 중국중앙교향악단(현 중국국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였던 리더룬(李德倫)은 "하도 같은 곡을 수백 번 반복해 공연하다 보니,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악단원들이 악보 없이, 심지어 눈 감고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마찬가지로 상하이가무단 관현악단 지휘자였던 천셰양(陈燮阳)도 "우리는 문혁 시기 《백모녀》만, 그것도 수백 번을 공연했다. 이러다 보니 모두가 이 일을 지겨워했지만 그런 내색도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물론 시기와 장소에 따라 이 양판희 외의 작품을 연주할 기회도 있었지만, 그것도 양판희 작품을 편곡해 정부의 검열을 거쳐 허가받은 것만 가능했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중국의 양악 분야는 나락으로 추락했고, 1977년에 가서야 수많은 금지곡 조치들이 해제되면서 재기할 수 있었다.
연주자 뿐 아니라 작곡가, 대본 작가, 연출가, 안무가들도 심한 탄압을 받았고, 양판희의 공동 창작 때를 빼면 개인 이름을 붙여 작품을 내놓을 수도 없었다. 아예 거기서 배제된 인물들은 홍위병들에 의해 반혁명적이라며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투옥 혹은 하방(下放)되어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더 심한 경우는, 여자는 아예 홍위병들의 성노리개가 되고, 남자는 숙청을 당하거나 실종되어버리기도 했다.
몇 가지 예로 조선 출신 작곡가 정률성도 이 시기에 마찬가지로 고문과 투옥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문혁 말기에 세상을 떠났고, 비슷하게 고문과 하방(下放) 노동을 당해야 했던 작곡가 왕시린(王西麟)도 홍위병들로부터 치아를 몇 개 잃고 얼굴 모양이 변할 정도로 심하게 구타당하는 등의 고초를 겪다가 살아남았다.
중국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들 중 한 사람이자 촉망받는 작곡가였고 베이징 중앙음악원장과 중국 정치국원이라는 요직까지 올라갔던 마시총(馬思聰)도 문혁이 일어나자 졸지에 사대주의자로 몰려 홍위병들에게 위협받기 시작했고, 결국 1967년에 가족들과 홍콩으로 밀항한 뒤 미국으로 망명해 그 곳에 눌러앉아 활동했다. 소련에서 개최된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피아노 부문에서 공동 2위를 차지했던 피아니스트 류시쿤(劉詩昆)도 "문혁 시기 고문과 투옥 생활을 겪었고, 6년 동안 징역을 살면서 감방 벽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놓고 그걸로 연습을 대신했다"고 증언했다.
이 때문에 문혁 이후의 연주가나 작곡가들은 그 당시의 음악이나 어법을 일부러 피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후 중국이 사상적으로 보수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들어 양판희의 연주가 다시 재개되기 시작했다. 다만 중국 정부도 문혁 시기처럼 이들 양판희의 공연과 관람을 강제하지는 못하고 있고, 공연 횟수도 그 당시에 비하면 현저히 적어져서, 일종의 추억팔이 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외에 중국 공산당에서는 문혁 시기에 마오쩌둥 어록을 인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어록 구절에 가락을 붙인 어록가라는 혁명가요풍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고, 그 외 정부나 당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서, 이렇게 혁명가요의 아이디어를 빌려 노래로 만들었다. 물론 이 운동 자체가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마오 찬양가도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들 노래들도 문혁이 끝난 뒤에는 평가절하되어, 부르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현재 중국의 국가인 《의용군 진행곡》도 이 당시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곡의 작사자인 톈한(田漢, 1898~1968)이 문혁 당시 반당분자로 몰려 숙청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노래는 한동안 가사 없이 연주만 되는 곡으로 전락했다. 1978년에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을 찬양하는 가사가 나오긴 했는데, 이때 중국인들의 반응은 영 좋지 않았다.[37] 이후 1982년 톈한이 복권되자, 원래의 가사로 돌아오게 된다.
결국 중국의 음악계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후유증은, 오늘날 중국의 대중음악계에도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2012년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가 중국으로 수출되었는데 과거 문화대혁명 시절 대중음악계를 미친듯이 검열하는 바람에, 실력 있는 중국 대륙 출신의 가수들이 크게 활약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싸그리 사라져버리는 공백이 있었고, 중국 대륙 출신의 가수들보다 실력이 있는 대만의 가수들에게 높은 순위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재에도 중국대륙 출신의 가수들보다는 대만이나 홍콩 출신의 가수들 중에 실력자들이 더 많고 인기도 더 많다. 결국 10억 인구의 중국 대륙 출신 가수들이 처참하게도 상대적으로 비주류가 되어버렸다.
원래 중국에선 193-40년대 재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상하이 시대곡(時代曲)들이 크게 유행을 했었지만[38] , 국부천대 이후 대부분의 뮤지션들이 홍콩이나 대만 등지로 이주한 후, 중국은 일반적인 대중음악이라고 부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표현의 자유 제한과 검열이 극도로 심한 공산주의 국가의 환경에서, 대중음악이 제대로 발전을 할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그 악명 높은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중국의 대중음악계가 완전히 전멸해 버렸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대중가요들은 마오쩌둥 찬양가 같은, 공산혁명가, 공산당 찬양가, 인민해방군가 같은 것들 뿐이다. 결국 공산당의 무자비한 검열로 인해 중국의 대중가요계가 위축되고 완전히 퇴보하면서 날이 갈수록 대만의 대중가요계보다 인재풀이 크게 좁아졌다.
그러다가 1970~1980년대에는 개혁개방으로, 광동어 노래와 대만 가수들, 등려군이 음악계를 평정했는데, 문제는 이들은 중국 대륙 출신이 아니라 대만 출신이라는 것이다. 또한 1990년대에는 배우로 더 유명한 장국영 등이 가수 활동을 하면서 중화권의 가요계를 빛낸 적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중국 본토 출신이 아니라 대부분 홍콩 출신이었다. 그 때문에, 중국은 지금까지도 대만이나 홍콩 출신의 가수들을 불러오지 않으면 사실상 유능한 인재를 배출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결국 현재 중국 경제가 크게 발전함과 동시에 시민들의 문화 수준도 향상되면서, 중국의 대중가요가 질적으로 제대로 된 발전을 할 기미가 보이나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서방권 가수들과 K-POP, 라틴 팝''' 등이 오히려 중국의 대중음악계까지 완전히 점령해버리는 상황. 덕분에 가뜩이나 좁아터진 상황에서 중국을 대표할 만한 유명 가수가 나올 인재풀이 더 좁아졌다고 할 수 있어서 아직 갈길이 멀다.
2.10. 영화
영화도 다를 게 없다. 중국의 연극계와 영화계는 경극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다가, 문화대혁명 이후부터는 발전이 아예 정지되어버렸다. 물론 비단 문화대혁명탓의 영향도 있지만,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후에 TV가 널리 보급되면서[39] 영화계가 한 번 더 큰 타격을 입은 것도 있기는 하다. 물론 중화권 영화가 성룡, 주윤발, 장국영 등을 중심으로 70년대부터 발전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절정을 이루며 중화권 문화를 빛내긴 했다.
그러나… 문제는 저런 영화계 인재들은 전부 중국 본토 출신이 아니라 당시 영국령이던 홍콩 출신이라는 것이다. 중화권 음악계를 빛냈던 등려군이 대만 출신이었다는 점과 같은 이치다. 실제로 홍콩 영화는 1997년에 사실상 중국 영토가 되고나서는 과거의 명성을 잃어버리고 침체[40] 했으며, 이전의 전성기 시절에 남긴 수많은 영화들은 전부 홍콩 영화로 취급하지, 중국 영화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중국 영화계가 쑥대밭이 되었던 1970년대 당시, 중국인들은 북한 영화를 많이 봤다. 북한의 만수대예술단과 예술단체들이 간혹 중국에서 공연하면 입장권 쟁탈이 너무 심하여, 행정급별 혹은 중공당원 위주에 따라 입장권을 배분할 정도였다. 중국 장년층은 그 당시 유행하던 북한 영화들을 '추억의 영화'로 떠올린다.
물론 홍콩 영화가 붐을 일으키던 시절에도, 중국 본토에서 장예모, 천카이거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영화감독들은 계속 나오고, 공리 같은 재능 있는 배우들도 꽤 나와서 중국 영화의 명맥을 가까스로 이어가긴 했다. 이들을 5세대 감독이라 하는데 대부분 하방이나 홍위병 경험이 있으며, 당시에 대해 트라우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게 대다수다.
그런데 사실 홍콩 영화는 멜로, 액션 등 상업성 영화가 인기였던 것이지, 홍콩 영화가 세계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거나 수상한 경력은 드물다. 1997년 홍콩 감독 왕가위가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처음으로 세계 3대 영화제에 등판한 반면, 중국 본토는 1988년 장예모의 <붉은 수수밭>이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칸느, 베니스 등에서도 상을 석권한 바 있다. 갈수록 심해지는 중국의 검열 체제가 없었다면 문화대혁명과 상관없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한 영화 강국이 되었을 수도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자장커 같은 중국 감독이 칸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 등 세계무대에서 상을 받으며 끊겼던 중국 영화 맥이 살아나고는 있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 갈려 나갔을 영화 인재들을 생각하면 그 손실이 엄청나다. 무엇보다 현재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영향보다 현재진행중인 검열의 폐단이 상당히 크다.
2.11. 인문학, 국민성
어쩌면 문화대혁명으로 잃어버린 가장 큰 것, 전통적인 미풍양속들은 봉건 잔재 취급을 받았고, 오히려 자식이 부모를, 학생이 선생님을 공격하는 행위가 장려되었다. 문혁 이미 중년이었던, 현재 아주 나이 든 중국의 노인들은 "문혁 이전에는 윗세대를 존중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이후엔 없어졌다"고 말한다. 교육은 제 기능을 못하고, 이성적인 논리보다는 프로파간다와 우격다짐, 그리고 진영논리가 먹히는 세상이었다.
오늘날 중국인들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과 편견도 이들 세대와, 이들을 바라보며 자란 세대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인을 천대하던 시대를 겪었으니 지성에 대해 코웃음치고, 질서가 붕괴된 시대를 겪었으니 예절과 절차를 모르고, 목소리가 높아야 이기는 시대를 겪었으니 언성이 시끄럽게 되며, 소련을 수정주의, 미국을 자본주의로 적대시하던 시대를 겪었으니 쇼비니즘에 빠져드는 것은 당연지사. 특히 쇼비니즘은, 자국문화를 탄압하던 문화대혁명을 철저하게 흑역사로 여겨 세뇌에 가까운 교육으로 더욱 대책없이 빠지게 만든 결과를 만들었다.
세대가 물갈이 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점점 줄어들겠지만,[41] 아직도 갈 길이 요원해보인다. 당장 문화대혁명은 2018년 기준으로도 겨우 42~52년 전의 일로서, 개인적으로 보면 짧은 시간이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다.
다시 말해 문화대혁명은 그저 역사책 안에서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당시 실제로 홍위병으로 한창 활동하던 10대~20대들이 2018년 현재 중국의 60~70대로 노인층에 고스란히 포진되어 있다는 것이다.[42] 굳이 홍위병이 아니더라도 그 시대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교양 부족 문제를 겪기가 십상이기 때문에 실제 나이대를 좀 더 넓게 잡을 필요도 있다.
좀 더 어린 나이에 문화대혁명 시대를 겪고 그 영향을 받은 사람도 많을 것이며, 문화대혁명이 지나갔다고 예절교육 등이 당장에서 회복되진 않으니까. 거기다 중국의 평균수명이 약 75세라는 걸 감안하면, 진짜로 홍위병 출신들이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만도 앞으로도 최소 10년에서 20년은 더 필요하다는 소리다.
뉴스에서 말하는 '따마'(大媽)는 중노년 여성들을 칭하는 말이다. 즉, 전직 홍위병 + 진상 아주머니라는 끔찍한 혼종이라 자국에서도 유난히 구설수에 오르고 비난을 듣는다.#
인문학도 크게 망가졌는데, 중국의 박사급 인문학자가 한국의 석사 수준도 안 된다는 충격적인 실태가 현실이다.
2.12. 집회·결사의 자유의 말살
중국 인민들이 가장 피해를 많이 본 것 중 하나. 비록 홍위병들의 해악 때문이긴 하지만, 홍위병이 비판하는 대상이 중앙 권력을 향한 직후 중앙정부에서 이들을 진압하게 되었고, 문혁 이후로 중국의 집회·결사의 자유는 완전히 탄압받게 되었으며 중국공산당 입맛에 맞는 어용집회만이 허용되게 된다. 예를 들면 제2 천안문 사건은 문화대혁명이 없었더라면 중앙정부가 그렇게 신속하게 진압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중국의 민주화운동가, 인권운동가조차 제2의 문화대혁명 방지라는 중앙정부의 변명에 제대로 반박하지 못할 지경이니...
2.13. 경제
대약진 운동을 단기간에 수습했던 것을 그야말로 깡그리 말아먹었다. 그로 인해 중국의 경제력은 후발국가에 하나둘씩 밀려나갔다. 인구면에서 중국보다 훨씬 아래에 있던 국가들에 하나 하나 따라잡혔다. 1976년 당시 중국의 경제순위는 10위로 1966년도의 6위에서 4계단이 더 내려갔고, 1981년에 세계 13위를 기록하여 인구 2,000만명도 안 되었던 호주에 경제력을 따라잡히기까지 했다. 물론 경제는 개혁개방 정책 시행 이후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빠르게 회복되었고, 다시 이 나라들을 하나하나 따라잡으며 30년 후 세계 2위의 자리까지 오르는데는 성공했다.
또한 이 당시 대만은 중국을 경제력면에서 괄목할 정도로 따라잡아서,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만의 경제력이 중국 전체 경제력의 40%이고, 일개 대도시인 홍콩의 경제력이 중국 전체 경제력의 1/4 정도에 달했을 정도였다. 인구차이를 감안하면, 문혁으로 인한 성장침체로 인한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수있다.
어찌보면 한국의 1970년대 경제 개발, 그러니까 한강의 기적을 이끌어준 보이지 않는 조력이기도 하다. 만약 문화대혁명이 없어서 중국이 공업 위주의 개발을 했다면, 십중팔구 한국의 값싼 노동력에서 나오는 경쟁력은 더 싸고 더 많은 물량의 '메이드 인 차이나'에 밀려 제대로 팔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
2.14. 군사
문화대혁명 당시 아주 처참하게 박살난 분야 중 하나다.
당장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에게 충언했다고 숙청당했다. 그리고 문혁이 터지자마자 마오쩌둥이 "홍위병의 행동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여, 홍위병들이 어떤 짓을 해도 먼 산 보듯이 바라만 봐야 했다고 한다. 펑더화이는 예전에 마오 개인숭배와 대약진운동을 비판해 마오와 다투었는데, 그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에 더욱 지독하게 고문 받았다. 비투(批鬪, 비판과 투쟁)라고, 홍위병들이 사람을 묶어서 끌고다니며 군중 앞에서 모욕과 비판, 폭행을 퍼붓는 인격살인 행위가 있는데, 그는 이걸 수없이 당했다. 그것도 모자라 수사기관도 그를 끌고가 모욕과 구타를 했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온몸이 붓고, 얼굴이 짓이겨지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폐를 못 쓰게 되었다. 결국 그는 감옥 의무실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그 덕에 문화대혁명 당시 펑더화이, 뤄루이칭, 양상쿤으로 대표되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현대화론자들이 주자파 반동으로 몰려 참혹하게 숙청당한 후 인민해방군의 현대화는 50년대 이후로 전혀 진전이 없었으며 1971년, 9.13 사건 때는 공군의 야간전투 자체가 불가능하여 소련으로 도주하는 린뱌오 일가를 먼산 보듯이 바라봐야만 했다. 거기에 문혁으로 고급장령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당하고, 1967년 7.20 사건 이후로 군부 자체가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장칭을 필두로 "농민과 노동자를 무장시켜 반동 인민해방군을 대체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이 나오는 판이었다.[43]
"장교 몇 명이 당했을 뿐 군에는 피해가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총참모부 정치부주임, 총후근부 부장, 군구의 사령과 부사령과 정치위원 등의 '''고급장교들을 동네 학생 양아치들이 임의로 잡아가서 죽도록 패거나 아예 때려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 군의 지휘계통이라는 것이 남아날 리가 없다.[44] 이러다 보니 그냥 군대는 홍위병에게 무력도 쓰지 못하고, 군부대는 허구헌날 홍위병에게 털리는 일들이 많았다. 국가의 무력의 중심이고 상징이자 나라의 국방을 책임지는 집단이 고작 동네 양아치 건달들에게 털린 것이나 마찬가지고 나라의 기본틀이 얼마나 무시 당했는가를 알 수 있다.
거기다 군부대와 더불어 군수공장도 털리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이 때 당시 모든 공장들이 털리는게 예삿일이었는데 당연히 군수공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군수공장 노동자들도 반동으로 몰려서 구타나 살해당하는 일들이 많았고, 그 과정에서 숙련된 노동자들도 죽어나갔다. 때문에 군수품 생산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고, 총이나 탱크 등 군수품들은 완전 상태가 불량하고 저급한 품질이 많았다. 이 당시 홍위병들은 군수공장의 기계와 부품들을 털어서 '''총과 장갑차를 제작해 상대 캠퍼스에 쳐들어가는 일'''들이 있었다. 결국 나라야 어떻게 되건 국방이 어떻게 되건 국방물자 털어다 자기들 정치, 파벌싸움이나 벌였다. 오죽하면 공장 노동자들이 혁명을 그만하라는 데모와 파업을 하기도 했다니 말다한셈. 뿐만 아니라 핵미사일 만드는 핵물리학자들이나 로켓 과학자들까지 두들겨패고 수용소로 보내기 까지 했다. 덕분에 중국의 국방력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만 갔다.
또한 이 시절 때 군 내의 베테랑 병사나 장교들이 많이 없어졌는데 당장 위에 문구에서 펑더화이가 충언하나 했다고 숙청당했다. 그리고 이걸 시작으로 중일전쟁 때부터 참가하여 6.25 전쟁, 중국 - 인도 국경분쟁 때 참전했던 베테랑들이 하루 아침에 반동으로 몰려서 참혹하게 죽거나 숙청되어나갔다. 이 때문에 중국군에는 실전적 지휘나 전투를 제대로 할 줄 아는 병사들은 없고, 결국 그냥 실전경험도 없는 장교나 병사들로만 채워지게 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대숙청 직후 숙청으로 고급장교 대다수가 날아간 소련과 비슷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는데, 1차적으로 1969년 중국-소련 국경분쟁에서 치렀고 중국 군부는 공포에 질려, "임박한 소련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는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린뱌오를 빼고 예젠잉, 녜룽전, 쉬샹첸 등 살아남은 원수들 모두가 이러한 주장을 지지했고, 마오쩌둥은 그의 수제자로 국가 2인자였던 린뱌오가 반대하자, 그를 "대국주의에 매몰된 쇼비니스트"로 마구 모욕을 주고 데탕트를 강행했다.
2차적으로는 마오쩌둥이 죽은 후에 중국-베트남 전쟁에서 치르게 되었다. 물론 당시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물리친 엄청난 성과를 거운 동남아의 맹주이긴 했지만 중국은 국력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였던 베트남을 상대로 압도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고작해야 몇 개 도시를 점령하는데 그치며 체면을 구겼다.[45] 그리고 문화대혁명은 대만을 살려낸 또다른 사건이기도 하다.
2.15. 공산권에서 중국의 국가적 위신 추락
애초 공산주의자를 악의 축으로 보는 서방은 접어두고 공산 진영 내부에서 중국의 위신이 많이 추락한 계기도 문화대혁명이다. 당장 베트남 등은 사실상 중국에서 등을 돌렸다. 알바니아 등은 쇄국정책을 하면서도 중국 편이긴 했지만.
3. 유명인 피해자
3.1. 당
- 저우언라이: 끝까지 공직을 유지했고 그나마 피해도 덜한 경우였지만 자신의 수양딸[46] 이 배우였단 이유로 문화대혁명 중 홍위병에 조리돌림당한 뒤 죽었으며, 지속적으로 조반파의 공격으로 정치적으로 위험에 처하여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 류사오치: 정계 최고의 피해자. 한때의 국가주석이 홍위병에게 린치당하여 의무실에서 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 왕광메이
- 덩샤오핑
- 탄전린
- 덩퉈
- 우한
- 펑전
- 후야오방
- 후치리
- 리리싼: 계속되는 조리돌림을 견디지 못하고 수면제를 먹고 목숨을 끊었다.
- 차오관화: 1967년 정권탈취운동 중 홍위병들에게 감금되어 조리돌림을 당했다.
- 지펑페이: 차오관화와 함께 납치되어 조리돌림을 당했다.
- 시진핑을 포함한 시중쉰 일가: 시중쉰의 실각은 문혁보다 4년 앞서 일어난 일이지만, 문혁으로 인해 시중쉰 일가는 더욱 가혹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시진핑의 누나는 홍위병들의 박해 때문에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시진핑 집권 후, 문혁에 대한 더 강력한 비판을 가하게 된 이유라고 점쳐진다.
- 주덕해
3.2. 군
- 주더: 주모군이라 불리며 군의 최고 원로로 존경받던 주더조차도 참소와 공격을 받았다. 그나마 마오가 주더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각이나 숙청 같은 건 당하지 않았다.
- 펑더화이: 군부의 피해자 중 끝판왕. 1959년 루산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실각한 상황이었는데, 1966년 장칭의 명령에 따라 홍위병들이 몰려와 쓰촨성의 자택에 있는 그를 납치해서 베이징으로 끌고 왔고 100번이 넘는 고문을 가한 후 비투회에 끌고 다녔다. 결국 직장암이 악화되어 감옥 의무실에서 사망했다. 또한 이걸 신호탄으로 위의 군의 피해에 서술했듯 중국 인민해방군 베테랑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 허룽
- 녜룽전: 1967년 2월 역류에서 패한 이후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 쉬샹첸
- 예젠잉
- 천이: 원수들 중에서 가장 문혁파에 강경했던 인물로, 2월 역류 이후 가장 크게 비판받아야 했으며, 그의 식솔들도 끌려나와 조리돌림을 당했다.
- 샤오징광: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이후 홍위병들에게 납치되어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전군문혁소조장 쉬샹첸의 개입으로 풀려났다.
- 쉬스유: 난징 군구 총사령관 재직 시절 홍위병들에게 납치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조리돌림당하다 마오쩌둥의 개입으로 풀려났다.
- 샤오화: 중국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주임 재직 시절 장칭의 명령으로 한밤중에 가택 수색을 당하고 예젠잉의 집으로 피해야 했다.
- 추후이쭤: 총후근부 부장이며 린뱌오의 최측근인 그조차도 1967년 1월 홍위병들에게 납치되어 머리가 박박 깎이고 늑골이 부러질 때까지 고문당했다.
3.3. 문화/예술
- 라오서: 소설 <낙타상자>를 쓴 작가. 1967년 베이징 8월 폭풍 사건 중 홍위병들에게 버클이 달린 허리띠로 무수히 두들겨맞는 고문과 조리돌림을 당한 후, 수치를 이기지 못해 다음날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 메이바오주를 포함한 남단(男旦) 배우들
- 쑨웨이스: 저우언라이의 양녀이자 여배우로, 장칭의 개인적인 원한으로 모함당해 스파이로 몰려 투옥, 그 부하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한 후 죽었다. 뒤늦게 장칭으로부터 그녀의 사망 소식을 들은 저우언라이가 그답지 않게 분노를 표출하며 시신의 부검을 하기 위해 중국 공안들을 동원해 수색했지만 장칭의 지령으로 시신은 화장된 상태였다.
4. 결론
문화대혁명의 악영향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구되지 못하고 있으며 '''중국이 세계 2위 수준의 강력한 하드파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무색하게 빈약한 소프트파워를 가지게 된 만악의 근원이다.'''[47] 문화대혁명은 단순히 중국의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자국의 문화 엘리트들을 숙청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문화가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기반까지 박살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 문화사의 최대 컴플렉스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문화대혁명 이후 개혁 개방 이래 시간이 꽤 지나면서 중국의 소프트파워는 매우 빠르게 발전하는 현대 중국 사회 로 서서히 회복되는 단계지만, 소프트파워가 강해진다 해도 다른 열강들의 소프트파워를 모방해 뒤따라가고 있는 것이지, 잃어버린 중국만의 문화력을 되찾는 개념은 아니다. 현재 중국 당국의 '''문화검열과 통제''' 또한 문화력 회복을 늦추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게다가 시진핑이 집권한 이후로는 문화산업의 검열과 통제를 더욱 더 강화하여 간신히 복구시킨 문화마저 도로 고사시키고 있는 심각한 실정이라 역시 완전한 회복은 어려울 듯하다.[48]
최근 중국이 유난히 한국의 고유 문화인 김치, 한복, 태권도 등 한국 고유 문화를 상징하는 것을 자국의 것으로 왜곡시키는 이유가 중국 내부의 불만을 억누르고 회복이 어려운 자국의 문화 컴플렉스를 타국의 것을 강탈해서라도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가 크다는 의견이 있을 정도이다.
[1] 단순히 근현대 문화가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 문화가 주도하고 있어서라고만 보기는 어려운 것이, 한때 중국의 경제중심도시 상하이는 20세기 초까지 아시아에서는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도쿄보다도 재즈, 소울 등의 음악과 영화 등 각종 문화가 번성하고 앞서가는 도시로 주목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세계 열강의 조차지라서가 아니라 당시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중국 배우나 뮤지션들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2] 한국의 경우 6.25 전쟁 이후 본격적인 경제성장으로 먹고살만해진 1980년대부터 문화를 키우는데도 힘을 쏟았다. 물론 독재 시절의 문화 육성은 3S 정책같이 정치적 목적이 다분하긴 했지만, 한류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3] 공묘(孔墓)와 공묘(孔廟)는 별개임에 주의하자.[4] 마지막 연성공인 쿵더청의 아버지[5] 전답의 단위, 6척 사방을 보(步), 100보(步)를 무(畝).[6] 티베트를 중국에서 부르는 이름. 1950년에 중국에 병합된 후 시짱 자치구가 설치됨.[7]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계기와 관련있는 인물이다.[8] 길이만 50km가 넘어가는 초대형 성곽이었다.[9] 내성과 외성이 겹치는 부분은 2환로가 아니다. 그래서 2환로 선형은 남쪽 부분이 더 넓다.[10] 본래는 '공자의 뒤를 잇는 제후'란 뜻의 연성공(衍聖公)으로 불렸으나, 신해혁명으로 공화제가 되자 더 이상 귀족 작위란 형태를 가지기 곤란해졌다. 결국 1935년에 민국 정부에서 명칭을 대성지성선사봉사관으로 바꾸었다. 본문에 언급하는 쿵더청이 바로 마지막 연성공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다.[11] 북경에 있는 중국 제1 역사 당안관에 가면, 명청시대의 공문서라고 할 수 있는 당안이 1천만 건 넘게 보관되어 있다.[12] 문혁 초기에 있었던 반달리즘만 사그라져서 그렇지, 정확하게는 끝나지는 않았다. 공식적으로 끝난 연도는 1976년으로 친다.[13] 저런 곳에 박힌 중국 태극 문양은 기괴한 것들이 은근 많다. 걍 아예 사각형 모양도 있다.[14] 중국사에서 이런 식으로 불교에 대한 박해 즉 폐불(廢佛)은 이른바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이라고 해서 네 차례에 걸쳐 벌어졌지만, 그 법난조차 이런 식으로 불교를 가혹하게 박해하지는 않았다.[15] 사실 티베트 억압은 진주 직후인 1951년부터 행해졌는데, 당시 증언에 의하면 사람들에게서 명망이 높던 티베트 불교 승려들을 강제로 데리고 나와 채소밭에서 거름을 주는 천한 일을 공개적으로 시키거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고양이나 개를 죽이게 하는 등, 티베트 시민들은 그걸 보고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16] 다 알다시피 이슬람교 교리에서 돼지는 매우 불결한 존재로 취급된다.[17] 굳이 말하면 명나라 때부터 위구르인들은 일단 한족과 결혼하도록 주원장에 의해 법제화되어 있었다.[18] 마오쩌둥의 조카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신강 위구르인한테 살해당했고, 마오쩌둥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 ‘동북의 태상황’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자랑했다고 한다. 마오위안신이 연변에 왔던 사실은 중국 정부의 기록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고, 후술할 연변의 조선족 사진사가 찍은 사진을 통해 공개되었다.[19] 남한이나 북한에 친척이 있으면 조선특무(간첩), 공산당을 위해 소련에 갔다 온 사람은 소련특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일본 공장에서 일했다고 해서 일본특무, 교사들은 노동자와 대립된다 해서 지식부자라는 누명을 썼고, 자본주의의 길로 나가는 자들이라 하여 일삼은 감금과 폭행을 당했다.[20] 이때 고초를 겪은 이들 가운데는 조선인 출신으로 중국에서 '영화 황제'라 불리던 배우 김염, 조선인 출신의 음악가로 중국인민해방군가의 작곡가로 유명한 정율성,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조선의용대로도 활약했던 여류 독립운동가 이화림도 있었다. 특히 정율성의 경우는 1956년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가 숙청되는 것을 보고 북한을 떠나 중국 국적을 얻어 정착했던 인물이었다. 북한을 피해서 중국으로 왔는데 중국에서조차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당한 셈.[21] 윤동주 시인의 모교다.[22] 당연히 '조선 독립'이니 '대한 독립'이니 하는 구절이 들어있는 문서를 홍위병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다.[23] 한국 항일무장투쟁사에서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대첩과 함께 '3대 대첩'으로 꼽히는 대전자령 전투의 경우, 박창욱 등 연변 지역의 조선족 학자들 가운데는 중국측 항일투쟁 집단이 주도한 전투를 한국 독립군이 자신들의 행적인 것으로 부풀려 과장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기도 한다.[24] 대표적으로 윤동주 시인을 중국조선족의 대표시인으로 소개하고 있는 현지 안내문 등이 있다. #[25] 제목에 '10년의 약속'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저자인 한국인 류은규가 중국 조선족 사료를 수집하면서 문화대혁명 때의 공백을 백방으로 찾던 중 1999년 용정(룽징)의 조선족 사진가로 문화대혁명 당시 연길현문화관에서 근무하면서 연변에서 벌어졌던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사진으로 찍었던 황영림이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고, 류은규는 그를 찾아가 몇 차례나 설득한 끝에 그가 당시 촬영한 사진을 얻어 <잊혀진 흔적-사진으로 보는 조선족 100년사>(2000년)를 엮을 수 있었다. 얼마 뒤 황영림은 “'''사진을 당신에게 주겠으나, 바로 공개하면 절대로 안 된다. 꼭 내가 사망 후 공개하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찍은 사진 6천 장을 모두 류은규한테 넘겼고, 황영림이 2006년에 타계한 뒤에 류은규는 그와의 약속대로 그 사진을 공개했다. 부제 ‘10년의 약속’이 붙은 연유다.[26] 낡은 문화, 사상, 풍속, 습관을 가리키는 말.[27] 이때 같이 반동의 자식이라고 손가랏질 받으며 시골에서 고생하고 있던 시진핑과 만나면서 절친해졌다고 한다.[28] 디스커버리 채널 : Cultural Revolution under China에서.[29] 라오서 또한 문혁 당시 홍위병들에게 끌려다니며 구타와 모욕을 당하고 결국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호수에 투신자살하였다.[30] 가쓰미 요이치, 《중국 혁명의 맛》, 2015, 교양인[31] 말 그대로 서민들의 대다수가 농민과 노동자였고, 서민을 타겟으로 한 레시피니까 그다지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마파두부 같은 요리가 대표적[32] 물론 중국의 경제성장과 맞물려, 투기자본이 미술품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긴 하다.[33]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베이징 주경기장의 설계 과정에 미술 컨설턴트(Artistic Consultant)로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정부 성향이 강해서, 정작 올림픽이 끝난 후 가택 연금을 당했다.[34] 사실 북한에서 이 용도로 쓰는 것들은, 이를테면 반이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제국, 4할이 중국, 1할이 1-2차대전기 유럽 것과 비슷하다.[35] 원제 그대로 영역하자면 The Harbour가 맞겠지만, 중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저렇게 되어 있다.[36] 미국에 저항하고 북한을 원조한 것을 기념하는 곳.[37] 이 노래가 쓰일 당시 중국은 일제의 위협에 시달리던 시기였고, 《의용군 진행곡》은 항일투쟁을 위해 만들어졌다. 가사가 바뀔 당시 '일제가 침략한 때를 벌써 잊은 것이냐'라는 비판이 주를 이뤘다고 한다. 출처.[38] 사실 중국 국민당은 이러한 시대곡들을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음악이라며 비판했고 싫어했었다.[39] 중국에서 TV가 대중화된 시기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전반기에 이르는 시기이다.[40] 중국 탓만은 아니다. 이미 80년대부터 홍콩 영화계는 투자가 줄었고 무수한 아류작이 판치며 서서히 붕괴조짐이 보여왔다. 80년대 말, 홍콩영화를 앞장서 소개하던 국내영화 월간지 <로드쇼>조차도 "홍콩영화 전성기는 60년대였다"고 많이 평한다. 80년대에 "지금은 붕괴가 보이는 시초라고 판단될 지경"이라고 평가했을 정도이다.[41] 당장 위의 유행어가 생기는 것도, 기성세대의 행패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42] 특히 감수성이 민감한 사춘기 때 문화대혁명을 겪었던 세대는, 이제 겨우 60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43] 이 시기 제작된 선전물과 포스터를 보면 노동자와 농민이 총을 메는 포스터들이 많은데 그게 이거 때문이다. 포스터를 보면 강력한 위엄을 내뿜지만 실상은 오합지졸.[44] 1967년, 장칭의 특명을 받은 베이징의 홍위병들이 사천성까지 쳐들어가서 펑더화이를 납치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저우언라이 총리는 성도군구를 이용하여 펑더화이를 구출하려 했으나, 성도군구의 군구사령과 정치부 주임이 모조리 홍위병에게 조리돌림당하고 있어서(...) 끝내 펑더화이 구출에 실패할 정도였다.[45] 사실 베트남은 천년 전 대월 시절부터 대 중국 투쟁을 치뤘던 역사적 경험이 있었으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최근에는 미국과의 관계까지 개선하는 추세다.[46] 저우 총리의 아내 덩잉차오가 대장정에서 몸이 상해 불임이 되는 바람에 평생 친자녀를 얻지 못하고 아이들을 입양해야 했다.[47]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이전에는 동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인 수준의 소프트 파워를 자랑하던 문화 강국이었다.[48] 뿐만 아니라 아직도 간간히 문화재 파괴를 진행하고 있는 곳이 많다고 한다. 현재도 그 당시 사건에 세뇌된 사람들이 문화재를 파괴하는 행동도 하고 현 정부도 그렇다고 간간히 뉴스의 소식을 보면, 중국은 스스로 자국의 고가치의 문화재를 파괴시키고 있는 셈(...). 물론 이러한 문화재 파괴의 경우에는 부동산 관련한 문제가 많기는 하다. 문혁 때는 아예 작정하고 때려부수었다면, 지금은 돈이 되는 문화재는 지키되 돈이 안 되는 문화재는 개발에 도움이 안 되니 때려잡자라는 식. 사실 이런 것은 배금주의의 문제점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