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독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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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독일'''
영어: '''France–Germany relations'''
독일어: '''Deutsch-französische Beziehungen'''
프랑스어: '''Relations entre l'Allemagne et la France'''
1. 개요
2. 단순비교
3. 역사
3.1. 중세
3.2. 19세기
3.3. 두 차례의 세계대전
3.4. 2차 대전 후 : 갈등을 넘어서 협력으로
4. 관련 문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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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독일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항목. 전통적으로 두 국가는 앙숙에 가까웠으며 특히나 1871년 보불전쟁을 통하여 독일이 통일을 이룬 뒤로는 거의 반 세기 넘게 실질적인 주적으로 서로를 인식했으며 1차대전, 2차대전을 거치면서 서로에 대한 적대감은 극도로 증폭됐다.
하지만 1949년 서독이 수립된 이후 독일의 적극적인 과거사 청산 및 유럽연합의 창설 등을 통하여 두 국가 사이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됐으며 오늘날에는 진정한 우방으로 서로를 인지하고 있다.[1]


2. 단순비교


국가
프랑스
독일
면적
674,843km²
357,021km²
인구
66,616,416
82,838,212
정치제제
대통령 중심 이원집정부제
의원내각제
1인당 GDP
$44,933
$50,841
명목 GDP
$2조 9,251억
$4조 2,116억
국방비
612억 달러
360억 달러

3. 역사


독일이 19세기 후반에 독일 제국이라는 근대적 국가로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무수한 군소공국들로 분열됐다는 점을 고려하여 본 단락에서 언급하는 독일은 오늘날의 독일 연방공화국을 넘어서서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독일 문화권'을 지칭하고 있는 점을 염두에 둘 것. 1871년에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전쟁을 통해 강제로 배제한 후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 소위 말하는 '독일'이란 사실상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가리켰다. 중부 유럽 국가들의 공통 조상인 신성로마제국 또한 르네상스 이후 근세에는 '도이치(독일) 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이라 일컫어졌다. 따라서 '독일'이라는 말의 의미와 범위는 시대가 지나며 변화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과거의 '독일'이란 보통 신성로마제국의 강역, 특히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강역을 나타낸다고 보면 된다. 정리하자면 '독일'이란 단순히 현대(21세기)의 '독일연방공화국'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존재했던 무수한 독일계 국가들을 모두 뭉뚱거려 일컫는다고 보면 된다.

3.1. 중세


고대 로마의 국경선이 라인강이었던 탓에 이 때부터 두 국가로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카롤루스 대제 사후 베르됭 조약에 의거하여 프랑크 왕국이 삼분되면서부터 두 국가가 각자의 길을 갔다고 보는 시각이 다수이다. 물론 고대 로마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갈리아의 로마 지배 500년도 매우 긴 시간일 뿐더러, 이를 제외하면 프랑스는 왜 로망스어군프랑스어를 쓰고, 독일어는 왜 게르만어군독일어를 쓰는지가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 학습만화의 영향으로 프랑스=라틴, 독일=게르만의 단순한 도식이 지배적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어쨌든 베르됭 조약 이후로 양국 사이에 대규모 전쟁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전혀 마찰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대표적으로 1214년 영불전쟁에서 신성로마제국오토 4세는 잉글랜드의 존 왕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했다가 부빈 전투에서 패했다. 자세한 내용은 존 왕, 필리프 2세등의 문서를 참고 바람. 또한 1496년 이탈리아 전쟁에서 막시밀리안 1세밀라노를 차지하려는 프랑스를 상대로 교황령, 베네치아, 밀라노, 아라곤 등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군과 싸운 일도 있다.
그러다 머나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카를 5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게 된다.[2] 카를 5세는 오늘날의 베네룩스 일대를 비롯한 라인강 지역을 재패한데 이어 스페인의 왕위까지 차지해버렸고, 프랑스는 말 그대로 완벽히 고립되어버린다.[3] 이러한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프랑스는 허구한 날 합스부르크와 치고박았고 그 중에서도 갈등이 가장 크게 폭발한 것은 바로 17세기의 30년 전쟁.
이후 루이 14세 시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하여 스페인의 부르봉 왕조를 세우는데 성공하면서 비로소 프랑스는 외교적 고립을 뚫어버릴 수 있었고, 심지어 '''18세기 중반에는 동맹의 역전이라는 대격변을 겪으면서 오스트리아와 우방이 된다!'''

3.2. 19세기


'''하지만 오스트리아와의 오랜 악연이 끝나자 새로운 악연이 등장하니 그것은 바로 프로이센이었다.'''
본래 프로이센과 동맹이었던 프랑스였지만 동맹의 역전을 통하여서 그 관계는 적대 관계로 변하였고 7년 전쟁을 통하여 프로이센과의 오랜 갈등이 시작된다. 하지만 7년 전쟁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최소한) 양국 국민들의 입장에서 전쟁은 '민족 간의 다툼'이라기 보다는 '높으신 분들간의 다툼'이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적대감 같은 것은 크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프랑스 혁명전쟁을 거치면서 이 또한 송두리째 뒤집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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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아작내버리면서 1806년 신성로마제국을 무너뜨렸고, 라인강 서안을 프랑스에 합병시키는 한편 라인 동맹을 결성하여 독일문화권을 사실상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린다.[4] 이러한 상황에 반발하면서 독일에서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한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빈 체제가 수립되면서 이런 민족주의는 다시 잠잠해보이는 것같이 보였었으나 오히려 수면 밑에서 민족주의는 세력을 차츰차츰 확장해나가고 있었고, 독일 내에서는 '프랑스를 대신하여 우리 독일이 유럽의 지배자 자리에 올라야 한다!'라는 주장이 공공연히 표출됐다. 게다가 프랑스가 꾸준히 독일 연방 내부의 정세에 개입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프랑스에 대한 반감 역시 커져간다.
이렇게 케케이 쌓인 반감이 한순간에 폭발한 것이 바로 1870년보불전쟁. 전쟁은 프랑스의 참패로 끝났으며 독일은 프랑스의 심장부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면서 통일을 이루게 된다. 수세기 동안 유럽의 최고 강대국 자리에서 밀려난 것만으로도 프랑스가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는데, 프로이센 왕국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게서 받아낸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다들 알다시피...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독일에 대한 적대감을 불태웠고 독일은 독일대로 프랑스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5]
다만 비스마르크가 실각하고 빌헬름 2세가 정국을 장악하면서 독일이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프랑스를 밀어주면서 1890년대에 살짝 양국 관계가 호전될 기미를 보일'듯'한 시기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애초에 서로에게 쌓인 것이 너무 많았던 데다가 1905년 모로코 위기가 터지면서 말짱 도루묵.

3.3. 두 차례의 세계대전


그리고 이러한 해묵은 원한은 1차대전2차대전으로 대폭발을 일으킨다. 1차대전 당시 양 측은 모두 연합국동맹국의 핵심이었던만큼[6] 전황 역시 양국에 의해 주도됐다. 양국이 합쳐서 400만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사자를 낸 끝에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고 프랑스는 50년전의 패배를 잊지 않고 고스란히 갚아준다. 베르사유 조약을 통하여 독일은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지불하는 한편으로 다시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게 돌려주어야 했고 라인란트는 비무장화됐다.[7]
또한 베르사유 조약이 수립된 이후에도 프랑스는 가능한 한 독일을 재기불능 상태로 유지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전쟁배상금 이행이 늦어지자 당시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의 주도 하에 벨기에군과 연합하여 독일의 루르 공업 지대를 점령해버린 일. 심지어는 자국이 IOC를 주도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독일의 올림픽 참여를 막기까지도 하였다(...) 이러한 프랑스의 강경적인 대독정책은 당연히 독일인들의 극렬한 반발심리를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같은 전승국이었던 영국과 미국 역시도 이러한 대독일 강경책에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시했기 때문에 결국 프랑스는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고 도스 안, 영 안, 로카르노 조약 등으로 대표되는 불안정한 양국 간의 긴장 완화가 1920년대 중후반부터 찾아온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으로 전세계 경제가 아작나면서 양국 모두 정치적으로 극도의 불안정성이 야기되고, 특히나 대공황으로 인한 피해가 컸던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정권을 잡는다.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펼치는 아돌프 히틀러 앞에서, 프랑스는 1920년대 초반의 패기는 어디로 갔는지 한 마리 순한 양으로 변해버린다.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라인란트 재무장을 무력하게 지켜봐준 일. 사실 이 시기 프랑스의 유화적인 대독정책이 변명거리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는데, 일단 당시의 프랑스 제3공화국은 정치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해서 1년에만도 여러 차례 내각이 엎어지는 판국이었기 때문에 대외정책에 신경을 쓰기조차 버거운 판국이었다. 거기다 같이 독일을 견제해야할 영국과 엇박자는 덤(...).
게다가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는 이미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수 정체가 심각해서 1930년대에도 여전히 인구수가 4,000만이었다. 20년전의 1차대전 당시 청년층의 3분의 1 이상이 날아가 버리면서 망했어요. 반면 이 시점에서 독일의 인구는 이미 6,000만 중반을 찍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현실적인 제약은 안 그래도 만연해있던 염전사상을 더욱 부추겼고 프랑스로 하여금 독일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결정타로 작용한다.
라인란트 재무장 허용과 뮌헨 협정 등을 통하여 프랑스는 최대한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알다시피 히틀러는 상상을 뛰어넘는 돌+I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쟤네가 최대한 행동을 억제하네. 슬슬 이쯤에서 마무리지어야지'가 아니라 '저것들 호구네. 슬슬 판을 더 벌리자.'라는 태도를 보였고(...) 마침내 1939년 폴란드 침공이라는 초대형 병크를 저지른다. 폴란드 침공은 프랑스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했고 프랑스와 영국이 다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2차대전이 시작된다. 하지만 1차대전의 악몽으로 인하여 프랑스는 전쟁 초기 내내 머뭇머뭇거렸고, 실로 한심한 모습만[8] 보이다가 독일한테 카운터 어택을 한 방 대차게 얻어맞고는 폭싹 무너져버린다. 독일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프랑스에는 자국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인 비시 프랑스가 수립됐고 전쟁 기간 내내 프랑스는 독일의 빵셔틀 노릇을 해야만 했다. 물론 자유 프랑스레지스탕스가 비교적 활발히 반독투쟁을 벌이기는 했지만, 프랑스의 체면은 말 그대로 박살이 났으며 단 6주만에 독일에게 패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프랑스로 하여금 단순히 독일에 대한 반감을 넘어서서 공포감을 선사했다.
물론 프랑스는 나치의 수탈과 억압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그나마 같은 유럽계로 대우받아 당장 서부전선동부전선의 독일국방군의 태도 차이만 봐도 (유대인 제외) 영국, 프랑스, 미국인들은 같은 유럽계 인종으로 인식하고 (그들 기준에서) 꽤 대우해준 편이다.

3.4. 2차 대전 후 : 갈등을 넘어서 협력으로


2차 대전 후 프랑스와 독일을 포함한 서유럽은 기존까지 세계 무대의 주역이던 열강의 대열에서 처진다.(참고로 전쟁 피해를 일체 입지 않은 스웨덴북유럽의 발언권이 좀더 커진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국가는 바로 미국과 소련. 이들이 주도한 국제질서는 위대한 국가(Grande Nation)의 부활을 꿈꾸던 프랑스에게는 퍽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국력이 한 풀 꺾인 프랑스가 혼자서 무엇을 주도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뭐 사실 영국도 있기는 했지만, 영국은 유럽의 일원이라는 아이덴티티가 결여되다시피 한 편이라서... 애초에 윈스턴 처칠은 2차대전 종전 직전에 샤를 드 골에게 대놓고 '전쟁 끝나고 영국이 미국과 프랑스 중 하나를 선택해야 되면 우린 당연히 미국에 붙을 거임.'이라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미국과 영국을 대신해서 함께 유럽 세계를 주도할 협력 국가가 필요했고, 그 대상이 바로 독일이었다.
한편 패배 후 독일에서는 콘라트 아데나워를 총리로 하여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됐고, 이들은 기존까지 독일의 주류 정계 가 자부하던 특수여정(Sonderweg)[9]에 거부감을 드러내면서 적극적으로 서구권의 일원으로 편입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즉 독일과 프랑스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졌던 것. 국가 관계에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맹도 없다는 오래된 표현은 여기에도 적용되었다.
협력의 첫 단추는 경제적 교류였다. EU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장 모네는 1950년 이른바 슈망 계획을 발표하면서 루르/알자스-로렌/베네룩스 일대의 철강과 석탄을 프랑스, 독일, 베네룩스 국가들이 자유롭게 서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독일은 로렌을 프랑스에게 할양한 이후 철강이 없다시피 했고 반대로 프랑스는 석탄이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즉 서로 윈윈. 물론 단순히 이 목적만으로 프랑스가 슈망 플랜을 제안한 것은 아니다. 이 계획을 독일이 받아들이면 독일의 철강 사용량과 사용처의 추적이 상당부분 가능했기 때문에 한국전쟁 이후 현실에 옮겨진 독일의 재무장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이 당시 독일에서는 막 라인강의 기적이 시작됐던 찰나였기 때문에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당시 독일 경제부 장관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1952년에는 불/독/베네룩스 3국에 이탈리아까지 합류하며 석탄-철강 공동체(ECSC)가 탄생한다. 이 ECSC가 로마 조약을 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이 유럽 경제 공동체(EEC). 그리고 여기에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가입하면서 세를 불린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EU. 당연히 EU의 설립자인 독일과 프랑스의 입김이 강한 것은 덤.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1950년대 후반이 되면 양국 간의 정치적 협력 역시 활발히 이루어진다. 서독의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가 강력한 친프랑스 인사였다는 것[10], 그리고 드골이 극렬 프랑스 민족주의자라는 점도 한몫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브 라 프랑스!'('프랑스 만세')를 외치며 위에 언급한 '위대한 국가'의 부활을 가장 열렬히 주장하던 드골 입장에서 미국과 영국은 2차 세계대전 내내, 그리고 그 이후에도 프랑스에게 상전 노릇을 하려는 부류로 보였고, 이는 미영 양국에 대한 반감과 독일에 대한 우호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협력에 방점을 찍은 것이 바로 1963년 아데나워와 샤를 드 골이 맺은 엘리제 조약. 양국은 엘리제 조약을 통하여 외교/경제/군사 등의 업무에서 노선을 같이 할 것을 약속했고 이는 실제로 이행된다. 양국의 국가원수들은 정치적 스탠스에 상관 없이 서로 간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그 중에서도 아데나워 - 드 골과 헬무트 슈미트 - 지스카르 데스탱 사이의 관계가 무척이나 절친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협력 덕분에 양국간의 관계는 20세기 초중반과 비교하면 상전벽해에 가까울 정도로 우호적이 됐으며, 혹자는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유럽이 1100년 만에 재통합됐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할 정도.
1990년에 프랑스와 독일의 학자들이 각기 자국 역사교육과정의 기술내용을 시정 보완키로 합의, 이를 관계교육당국에 건의하고 나서 주목을 모으고 있다.#
1977년에 독일은 프랑스를 우호적으로 보는 비율이 10%에 그쳤으나 최근에는 27%로 늘어났다.#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은 EU 개혁 논의를 계속 추진하면서 차세대 공동 전투기의 개발도 합의하고 프랑스 측도 프랑스 내의 독일어 교육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2018년 11월 4일에 프랑스 파리의 노르트담 성당에서 제1차 세계대전 100주년 행사가 열렸고,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과 독일의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에서 평화의 합주가 열렸다.# 하지만 상임이사국자리를 놓고 갈등이 있는 편이고 거기에다 독일의 숄츠 부총리가 프랑스가 가지고 있는 상임이사국자리를 EU에게 넘겨야 한다고 발언하자 프랑스측은 반발했다.#
2019년 1월 22일, 독일과 프랑스의 정상이 아헨에서 새로운 우호 협정에 서명했다. 서명한 날은 엘리제 협정 56주년이며 협정의 내용은 외교, 국방 정책, 범죄, 테러, 경제통합에 대한 협력강화이다.(협정 내용) 하지만 노르드스트림2를 두고 마크롱 대통령이 제동을 걸자 독일측은 반발했다.#
2019년 2월 22일에 독일과 프랑스가 유로존 공동예산제의 세부안에 합의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는 전기차 배터리 공동 개발에 7조원 투자를 합의했다.# 하지만 EU의 리더십을 두고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2020년 6월 29일에 메르켈 총리와 마크롱 대통령은 베를린 인근의 메제부르크 성에서 회담을 가진 자리에서 코로나19극복을 위해 협력하자고 강조했다.#

4. 관련 문서



[1] 특히나 2011년에는 프랑스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호감가는 국가 1위로 독일이 꼽혀서 상당한 놀라움을 안겨줬다.[2] 정확히 말하자면 카를 5세 등장 1세기 가량 전부터 발루아합스부르크 사이가 갈수록 험악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나중에처럼 철전지 원쑤 사이까지는 아니었다.[3] 사실 완벽한 고립은 아니어서,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정신에 입각하여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이 을 침공하는 것을 도와주기는 했다. 뭐 어쨌든 유럽 대륙에서만 놓고 보면 완벽히 고립된 상황. [4] 오스트리아는 그래도 마리 루이즈를 시집보내서 명목상으로나마 프랑스와 동등한 취급을 받기라도 했지만, 프로이센의 경우 틸지트 조약을 통하여 완전히 재기불능에 빠져버리게 된다.[5] 소위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불리는 이 시기 유럽 외교계에서 독일이 철저히 프랑스를 고립시키는데 성공했던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6] 2차대전에서의 프랑스군 이미지 때문에 오해받는 경우가 많은데, 1차대전에서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제1 전력이자 탱킹 담당이었다. 2차대전으로 치자면 소련군에 해당한다 볼 수 있다.[7] 사실 프랑스 내부에서의 여론은 이것조차 너무 관대한 거 아니냐(...)면서 불만이 컸었다. 아예 프랑스 내부에서는 라인란트를 프랑스에게로 합병하려는 방안이 진지하게 논의될 정도. 아마 영국과 미국이 뜯어말리지 않았더라면 실제로 일어졌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8] 다만 프랑스군 자체는 1차대전과 마찬가지로 나름 열심히, 그리고 잘 싸웠다. 수뇌부들이 신나게 삽질을 해서 사병들만 죽어나갔던게 문제(...)[9]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리 독일은 우리 독일만의 고유한 발전의 길이 있다능! 그러니까 서구 민주주의 따위 개나 주셈!'이라는 마인드(...)이다.[10] 아데나워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이 양반은 1920년대 후반 당시에 라인란트프랑스군이 다시 진주할 것을 주장해서 '반역자'라고까지 정적들에게 씹혔던 인물이다.[11]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프랑스는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