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생애

 


1. 어린 시절
2. 은행강도 혁명가
3. 권력을 획득하다
6. 제2차 세계 대전과 독소전쟁
7. 냉전
8. 우상화의 절정
9. 말년
10. 사망
11. 장례식


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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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5살 청소년 스탈린
1878년 12월 18일, 러시아 제국 조지아 동부의 고리(გორი, Gori)시의 오세트계 제화공 베사리온 주가슈빌리와 재봉사 케케 겔라제 슬하 삼남으로 태어났다.[1] 어린 시절이 불행했는데 위로 미헤일과 기오르기 두 형이 있었는데 모두 태어난 지 몇 달 안돼서 죽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전통적인 구두공이었던 스탈린의 아버지는 자신이 하던 구두공 일이 잘 되지 않자, 큰 상심에 빠졌고, 슬픔을 잊기 위해 술을 과음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스탈린은 아주 어릴 적에는 어느 정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지만 성장하면서 술에 취한 아버지의 폭력 속에서 자랐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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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슈빌리[3]
어머니 케케 겔라제[4]
베사리온 주가슈빌리는 술주정뱅이에 성질이 매우 거칠어 아내와 아들에게 폭력을 일삼았다.[5][6] 그러나 머리는 꽤 좋아 조지아어, 러시아어, 아르메니아어, 터키어에 유창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술주정뱅이가 되기 전에는 인간적 매력도 상당했고, 가정적이였으며 사업도 잘 되어 부유한 삶을 살았지만 이 결혼을 시기한 마을 여성들의 악질적인 소문과[7][8] 돈 대신 술을 내는 조지아 특유의 관습 탓에 나날이 과음하여 결국 알코올 중독에 빠져버렸다.
결국 1883년에는 미친 사람으로 불리며 싸움을 일삼는 망나니가 되었다. 이런 아버지를 스탈린은 두려워하며 피했고, 이에 분노한 아버지는 스탈린을 이 잡듯이 패고, 트집 잡으며 사생아라 욕했다. 이는 아내도 마찬가지였는데 언젠가는 맞아 피투성이가 된 스탈린이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경찰을 데리고 오거나, 칼을 던져 막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겨우 스탈린이 '''만 4살''' 때 벌어진 일이었다. 이후 베사리온의 알코올 중독은 더 악화되어[9] 나중에는 벨트를 팔아 술을 사먹는 지경으로 전락해[10] 이곳 저곳 떠돌며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즘에 스탈린은 마차에 치여 왼팔을 다쳤고, 평생 왼팔이 불편한 장애로 남는다.
1884년 베사리온은 스탈린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아내 케케의 주장을 무시하고, 제화 기술을 가르쳤으나 이로 인해 스탈린은 천연두에 걸려 얼굴에 곰보가 생긴다. 베사리온은 스탈린이 낫자마자 바로 집을 나가버리고는 생활비도 보내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케케는 재봉사 일을 하며 여러 지인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스탈린은 키웠다. 이후 케케는 스탈린을 주교로 만들기 위해 신학교에 보내려 했지만 갑자기 찾아온 베사리온에 의해 스탈린이 구두 공장으로 끌려가는 일이 벌어졌다.[11] 다행히 신학교와 여러 고위 관료들이 도와줘 스탈린은 신학교에 갈 수 있었다. 이렇게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나머지 스탈린은 평생 아버지를 증오했고 훗날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의 무덤을 갈아엎어 버렸다.
스탈린의 어머니, 케케 겔라제는 폭력적인 남편과는 반대로 매우 신실하고 자식에게 헌신적이며 따뜻한 어머니였다.[12] 케케는 어린 스탈린에게 초등교육을 받게하고, 신학교로 진학시켰다. 시작은 매우 좋았다. 그 시기 스탈린의 성적은 매우 우수했다. 당시 스탈린은 자신의 리더로서 애들을 이끌고 싶어했고, 카리스마를 보여 12살에 18살 상급생을 부하로 거느렸었다.
성경
5
러시아 문학
5
역사
5
수학
5
조지아어
5
라틴어
-
그리스어
4
교회 슬라브어
5
조지아-이메레티 노래
5
[성적표]

이후 스탈린은 다윈의 책 등을 접하며 점차 무신론, 반정부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고리 신학교가 파업으로 폐쇄되자 힘들게 트빌리시 신학교[13]로 전학갔으나 억압적이며 조지아 문화 대신 러시아 문화를 강요하고, 차르에게 복종하라는 학교에 반항해 혁명과 조지아 독립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면서 걸핏하면 학교에 안나오는 등 학업에 소홀해지자 장학금이 끊어졌고, 결국 스탈린은 마지막 학년에 학교를 자퇴한다. 기록상으로는 수업료 미지불로 인한 제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이먼 시잭 몬티피오리, 로버트 서비스 등의 학자들은 이를 부정한다. 실제 스탈린은 장학금 480루블 안 돌려줘도 되니 제발 돌아와만 달라는 학교의 수차례에 걸친 요청을 거부하고, 덤으로 학교 도서관에서 책까지 털어간 것으로 밝혀졌다.
이때 시인으로도 활동했는데 교외 활동을 금지한 교장에게 들키지 않도록 소셀로(Сосело; 작은 소소)란 필명을 사용해서 1895~6년 사이 6편의 시를 발표했다. 시의 주 내용은 조지아에 대한 애국심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이중 데뷔작인 <달에게 보내는 편지>는 이베리아라는 잡지의 지면으로 실린다.

<달에게 보내는 편지>

지상의 비밀스런 먹구름 위를

예전처럼 거침없이 부유하라.

그대의 은빛 광채로

짙은 안개의 어두움을 흩날리라.

잠에 취해 몽롱한 대지에

보드라운 미소로 고개를 기울여

캅카스 최고봉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라.

그대를 향해 높이 솟은 얼음 봉우리에게.

그러나 언젠가 박해당해 유골이 된 이도

시인들이 잠든 그 신성한 언덕에 올라

희망의 날갯짓으로 날아오를 수 있음을

분명히 알라.

어두운 하늘에서 빛나라.

창백한 빛으로 뛰놀라.

예전처럼 한결같은 빛으로

나의 조국을 비추라.

나는 그대에게 가슴을 열고

마주 향해 손을 내밀고

또 다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밝은 그대를 보겠노라.

 
또 다른 시 <아침>은 당시 조지아 문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문어체로 쓰여졌다.

<아침>

연분홍빛 꽃봉오리가 피더니

온통 푸른 빛 도는 보랏빛이네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계곡의 백합 풀 위에 누웠네

종달새 짙푸른 하늘에서 노래하며

구름보다 더 높이 날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이팅게일

숲 속에서 아이들에게 노래 불러주었네

꽃이여, 아 나의 조지아여!

평화가 내 조국에 넘치게 하라!

친구들이여 노력해

빛내라, 조국을!

이아코브 고게바슈빌리(იაკობ გოგებაშვილი, 1840년 10월 15일 ~ 1912년 6월 1일)라는 조지아의 유명 교육자[14]는 그가 집필한 교과서에 이 시를 넣을 정도였다. 그외에도 조지아 귀족들의 선집에까지 시가 실리는 등 당대 스탈린은 조지아의 명망있는 문학가였다.

2. 은행강도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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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스탈린
자퇴 후 방황하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글을 접하고, 감명받아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였다. 당시 혁명세력 중 가장 과격한 부류였던 볼셰비키에서 스탈린이 맡은 일은 자금 조달이는데 좋게 말하면 자금 조달이고, 실상은 강도질이였으며 위험하고, 범죄였기에 누구하나 맡으려 하지 않았다.[15] 그러나 스탈린은 자금 조달에 자원했다.[16] 이후 스탈린은 은행, 현금 수송차를 털거나 인질을 납치해 몸값을 요구하고, 파업을 선동하는 등 여러 범죄를 저질렀고, 스탈린도 이를 자랑스럽지 않게 생각했는지 잘 언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후일 트로츠키에게 '우리가 혁명하는 동안 놀고 먹던 잉여'라는 투의 비난을 받았고, 최근까지 정설로 알려졌으나 일부 학자들에 의해 조지아 문서 보관소에 잠들어 있던 문서들이 발견되면서 스탈린의 젊은 시절 활약들이 밝혀졌다. 다만 뒤집혔다고 해서 스탈린은 혁명에 공헌했는데 트로츠키는 알고 보니 잉여였다는 식으로 뒤집혔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사실 10월 혁명의 전후과정을 보면 트로츠키의 활약이 스탈린보다 화려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스탈린은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잉여라는 트로츠키의 주장과는 달리 스탈린 역시 볼셰비키 지도자로써 상당한 활약상이 있었음이 밝혀진 것. 그런데, 트로츠키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을 생각한다면 설령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활동 내역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무 공적도 없는 잉여라고 까는 것을 그만두었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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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에 찍은 머그샷.
아무튼 이런 범죄 행각 때문에 일급 수배자가 된 스탈린은 7번이나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의 방만한 관리와 스탈린의 정치력 덕에[17] 유형지에서는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고, 스탈린은 전부 다 빠져나갔다.[18] 또한 이 7번의 도주 탓에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에게 '너 사실 러시아 제국 프락치 아니냐'는 투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1905년 12월 25일 핀란드 대공국 탐페레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표자회[19]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을 처음 만났다.[20] 이후 스톡홀름의 당대회에 참여해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만나 친구가 되고, 런던에 갔다가 항구 노동자들과 시비 붙어 두들겨 맞던 걸 구해진 계기로 막심 리트비노프와 인연이 생긴다.[21] 이 때까지만 해도 스탈린은 스탈린이 아니고 그냥 주가슈빌리였다.
또 당시 스탈린의 혁명동료인 알레크산드레 "알리오샤" 스바니제(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ალიოშა“ სვანიძე, 1886년 ~ 1941년 8월 20일)의 남매인 에카테리나 "카토" 스바니제(ეკატერინა „კატო“ სვანიძე, 1885년 4월 2일 ~ 1907년 11월 22일)와 만나 결혼도 하여 아들 야코프 주가시빌리를 두었으나, 잦은 도피 생활 때문에 제대로 가정을 돌보지 못했다. 결국 카토는 남편을 대신해 홀로 아들을 키우다 22세의 나이에 티푸스로 요절했다. 장례식에서 참가한 스탈린은 매우 우울해 했으며, "아내는 단단한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줬는데… 아내는 내 마지막 인간적인 감정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라고 말했다. 장례식 막바지에 아내의 무덤으로 뛰어들어 자기도 함께 묻어버리라고 오열했다. 그 순간 오흐라나(러시아 제국의 비밀경찰)의 첩자들이 장례식장을 습격하는 난장판이 벌어졌고, 스탈린은 금새 감정을 추스른 뒤 달아났다.

2.1. 프락치


오래 전부터 스탈린이 사실은 비밀경찰 오흐라나의 프락치라는 음모론이 있었다. 주요 의문점은 살해까지 저지른 은행 강도가 유배형을 받고, 유배지에서도 나름 편하게 지냈으며 심지어는 애인까지 사귀어 사생아를 두는게 말이냐 되냐는 것, 게다가 여러차례 유배지에서 탈출했다는 점이 의심 받았다. 또한 대숙청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다른 프락치 출신 동료들을 묻어버리기 위해 계획했다는게 음모론의 골자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 이 음모론은 그저 음모론으로 취급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유배는 사실상 보내버리고, 방치하는 것에 가까웠다. 제대로 맘 먹고 돈만 어떻게 구해서 위조 서류를 만들면 역으로 가서 기차 타고 떠나면 됐다. 스탈린도 자유인 시절 벌어둔 돈을 동지들에게 융통해 놓은 뒤 밀반입 시켜 탈출했다.[22][23]
게다가 제정 러시아 말기 혁명가나 기타 반정부 사상가치고 유배 한 번 안 가본 사람 없고, 탈출 못 해본 사람 없었다. 당장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같은 볼셰비키부터 시작해 멘셰비키, 미하일 바쿠닌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같은 아나키스트들도 다 한두번 씩은 유배 갔다가 탈출한 전적이 있다. 애시당초 비밀경찰들은 프락치를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닌 이상 유배 '''보낼 일이 없다.''' 그냥 멀쩡하게 당 내부에 심어둬서 프락치질 하게 놔두지 뭣하러 시베리아까지 보내서 당장 눈 앞에 있는 혁명 조직에 대한 정보 수집을 약화시킬까?
물론 스탈린이 아니었다는 거지 실제로 볼셰비키 내부에는 프락치가 꽤 있었다. 그 중 대표라 할만한 인물은 고위 간부 로만 말리놉스키라는 인물인데, 레닌의 측근으로 볼셰비키 당원으로서 두마[러시아•의회]의 의원직을 역임했었다. 말리놉스키는 볼셰비키와 관련된 체포나 수사에 항상 연관되었었고, 의심받자 독일로 도망쳤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자 한자리 받을 속셈으로 돌아왔다가, 비밀경찰 오흐라나의 기록을 모두 접수한 볼셰비키에게 전직 프락치임을 들켜 체포 후 처형당한다. 다만 이 인물의 경우 레닌과 스탈린을 포함한 핵심 간부들의 옹호로 목숨을 건진 전적도 있고 해서 볼셰비키가 오흐라나에 역으로 침투시킨 이중 스파이라는 견해도 있다.
어쨋든 이 일과 유사한 여러 사건들로 인해 학자들은 '오흐라나는 프락치를 통해 볼셰비키를 붕괴시킨다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이들이 서로를 의심해 죽고 죽이게 만들어 자멸의 길로 이끌었다'고 평한다. 실제로 레닌은 이후 동지들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어 무분별한 숙청을 시작했다. 이 뒤를 이은 스탈린도 마찬가지여서 스케일을 더 키워 대숙청을 벌였다.

3. 권력을 획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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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의 캅카스 3인방이라 불리었던 3명의 사진, 아나스타스 미코얀[24], 이오시프 스탈린, 세르고 오르조니키제[25]
캅카스 지역의 멘셰비키에 대한 열렬한 투쟁으로 캅카스의 레닌이란 별명도 얻고 1910년대 어간에 프라우다 창간에 참여하여 첫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중앙위원에 선출될 정도로 세간의 인식과 달리 혁명가로써 두각을 보이던 스탈린이었지만 오흐라나에 체포됨으로 그의 혁명가 이력은 한방에 훅갈 위기에 처한다. 시베리아 한복판에 끌려가 무려 4년이나 썩어야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신검까지 끌려가 차르의 군대에 징집될 위기에 처했다가 왼팔 부상 때문에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와중에 러시아 혁명이 터지고 차르 정부가 무너진 후에야 시베리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그 중요한 차르의 붕괴 시기에 한 일이 없었던 것은 당연했고 그 영향으로 10월 혁명에 대한 유명한 미국인 사회주의자 존 리드의 르포 <세계를 뒤흔든 10일>에서도 겨우 두번 이름만 언급될 정도이다.[26]
거기에 4년이 넘는 시베리아 유형 사이에 스탈린은 완전히 잊혀져 버려서 명색이 전직 중앙위원인데도 인정받지 못하고 '중앙위원회에서 일했던 사람' 정도로 소개받아 말단 취급을 받는 굴욕을 당했다. 보다 못한 레닌이 그의 신원을 보증해 줄 정도였다.[27] 거기에 스탈린 본인이 스스로도 내성적이라 나서기를 꺼려(이는 트로츠키와 매우 대조적이다.) 이러한 정황이나 훗날 권력에서 밀려난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눈에 안띄는 듣보잡 정도로 묘사한 것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면서 한때 스탈린이 혁명 중에 한 일이라곤 없는 그저 '''레닌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주된 묘사였으며 위에서 봤듯이 심지어 프락치라는 의혹도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저술한 스탈린 전기에 나온 것처럼 잉여 인사가 아니라 오히려 은행강도 등으로 단련된 도시 뒷골목 어둠의 세력과의 커넥션으로 레닌의 망명이나 자금 동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주요 당대회에 참석하며 존재감을 드러냈으며 위에서 언급했듯이 중앙위원에도 선출되는 등 볼셰비키 혁명가 중에 최소 주류의 말석에는 들어가는 비중을 차지했다. 괜히 레닌이 말년에 서기장을 준게 아니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고 러시아 내전이 벌어지자, 그는 붉은 군대의 정치장교로 입대하여 직업군인의 충성을 감독하고 동향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군사적 재능은 있었다고는 한다. 그는 내전 초기에 남부전선으로 파견되었고, 백군의 반격으로 볼가 강 인근의 차리친, 후에 스탈린그라드가 될 도시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업무를 보게 된다.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심어둔 구 제국군 장교들과 불화를 빚었고, 자신의 명령을 잘 듣지 않는 몇몇을 경질시키고 체포한 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남부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군 전체를 통솔하는 모스크바의 트로츠키는 당연히 이런 스탈린의 행동에 격노하였고, 스탈린-보로실로프 라인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며 이 문제를 둘을 중재할 능력이 있는 레닌에게 직접 가져가기에 이른다. 레닌은 스탈린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이고 보로실로프를 우크라이나로 보내 트로츠키의 불만을 일단락시켰다.
거기에 갓 건국된 폴란드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있던 소련을 침공해온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때, 그가 지휘-감독 하던 소련군은 폴란드군에게 역관광당해 대패했고[28], 소련 측에 우세했던 전쟁 양상은 폴란드 측으로 흐른다. 이러한 이유로 국방장관 트로츠키와, 전선사령관인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엄청나게 사이가 나빠지고, 이 때문에 스탈린은 군직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는데[29], 훗날 스탈린은 투하쳅스키는 처형, 트로츠키는 암살하여 그 때의 복수를 했다.
이후 정부로 돌아가서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메리트를 강조하여 민족문제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원래 정권을 잡기 전까지도 스탈린이 남들에 비해서 비교우위를 갖는 분야는 소수민족 문제 분야였고, 실제로 민족 문제 관련 일을 많이 했으니 당연한 일. 이 자리는 스탈린에게 상당한 이득을 가져다 줬는데, 소수민족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포섭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교묘한 정치적 책략과 소련 내 민족 업무에서 보여준 과단성[30] 등으로 세력을 키워나갔고, 여러 업무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 능력과 식견을 뽐내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1922년 스탈린은 마침내 소련 권력의 핵심 서기장에 선출된다. 그리고 취임 한 달만에 레닌은 지병으로 쓰러진다. 레닌이 뇌일혈로 반신불수가 되면서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때 스탈린의 억압적인 정치성향이 드러나게 되어 레닌에게 상당한 반감을 산다.
아마도 당시 볼셰비키당 내에서는 레닌이 유일하게 스탈린의 성격을 정확히 보고 스탈린 지휘하의 당의 미래를 예측한 사람인 것 같다. 레닌은 죽기 전 써둔 유언장에서, "스탈린 동지는 너무나 잔인하고 성격이 급하다. 그의 성격은 서기장 자리에 맞지 않다. 그러므로 서기장에서 해임하라"고 써놨다. 그러나 레닌은 후계자에 대해 암시적이고 모호한 표현만 했지 아주 명백하게 후계자 지명을 언급하지는 않아서 문제가 되었다. 혁명의 1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국방장관 트로츠키는 영웅주의적으로 보이는 성격과 때문에 당내 유력주자들의 시기와 견제를 끊임없이 받았고,[31] 스탈린이 사임하면 그에게 총서기 자리가 돌아갈 판이었다. 그래서 정치국 위원들은 다소 만만하게 보이는 스탈린의 사임을 반대했다. 그래서 이 유언장은 스탈린이 주재하는 정치국회의에서 공개하지 않기로 했고, 이는 '''30년이나 지나서''' 흐루쇼프 시대에 와서야 공개될 수 있었다. 이때 스탈린의 유임을 강력히 주장한 혁명가들 대부분이 후에 스탈린의 대숙청 때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처형되었는데, 이땐 많은 이들이 스탈린의 본질을 깨달았으나 그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레닌의 유언장은 스탈린에 대한 가혹한 평가와 트로츠키에 대한 전체적 호평, 그리고 약간의 단점과 '''그 부분을 다른 동지들이 보좌해서 채워달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

스탈린 동지가 서기장으로써 무제한의 집중된 권력을 쥐게 된다면, 그 권한을 주의깊게 사용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반면, 트로츠키 동지는(중략) 개인적으로 '''가장 현재 중앙위원회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과도한 자만심을 보였고 문제의 순 관리적인 작업[32]

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 레닌의 인민위원회에 보내는 유언장 중 1922년 12월 24일 작성된 부분

조지아 쪽의 일들은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입장에서 접근한다면 극도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며, 사려깊음과 준비성을 가지고 필요사항에 대해 절충안을 이끌어내야 한다. 하지만 조지아인(스탈린)은 이런 문제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여줬고, 마구잡이로 남들을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33]

라며 비난하고('''사실은 그 자야말로 진정한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이며, 대러시아주의에 물든 천박한 깡패 놈이다.'''), 사실상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저해하고 있다.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가장 크게 해치고 그를 무너뜨리는 요소는 국가의 '부당함'이며, "피해를 본" 민족들은 평등하다는 느낌과 그 평등에 대한 침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 특히 그게 과실이나 기만, 그것도 바로 그들의 노동자 동지들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게 바로 내가 이 건에서 소수민족들에 대해서는 많이 양보하고 관대하게 대할수록 좋다 말하는 이유다. 이게 바로 이 건에서 노동자 계층의 근본 권리를 위한 투쟁에는, 단순히 형식적인 태도가 아니라 억압받는 소국의 노동자의 편에 서서 억압자 대국을 대하는 태도에 입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34]

- 레닌의 국가와 '자치화'에 대한 서한. 1922년 12월 31일.[35]

스탈린에게 혁명의 영웅 트로츠키는 눈엣가시였고, 전 세계의 공산화를 이룩해야 공산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는 영구혁명론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에 맞서 러시아 단독으로도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일국 사회주의론을 펼쳤다. 다만 트로츠키는 거만한 태도 때문에 스탈린 말고도 적이 많았다. 후일 외무장관에 취임하여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게 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같은 경우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하고 근면한 것 외에 장점이 없는 관료에 불과했는데, 트로츠키가 대놓고 몰로토프를 조롱하자 몰로토프가 부들부들 떨면서 '''"동무, 모두가 (동무처럼) 천재가 될 순 없소."''' 라고 대답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반면 그 당시 좀 만만한 감이 있었고[36] 겸손하고 상식적이라는 인상을 주변에 주고 있던 스탈린은 혁명동지들에게 마치 모두의 합의를 도출할 만한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란 인상을 주었다.

레닌은 애초에 스탈린에게 경계심을 품다가 볼셰비키가 초심을 잃고 소련의 군소 가맹국들에게 깡패 독재국가스러운 면모를 드러내는 것을 경계하고 반성하던 터라 약소국에 가혹한 면모를 내비치는 스탈린을 지도자 자리에 앉힐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레닌은 절대 스탈린을 후계로 삼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여러 서찰을 남겼지만 트로츠키는 아직도 자신이 목숨을 건 권력투쟁의 장에 있다는 감을 잡지 못했는지 자신이 난타당하는 중앙위원회에 불출석하고 문필활동에 전념하면서 스탈린과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연합을 더러 '정치국 안의 정치국', '중앙위원회 안의 중앙위원회' 운운하며 비난하는 데 열중했으나 당의 절대적 단합을 호소하던 스탈린 때문에 분파주의자로 몰릴 뿐이었다. 자세한 것은 레프 트로츠키 문서 참조.[37]
권력투쟁 과정에서 패한 트로츠키는 처음에는 그냥 시베리아에 유배되었고 최종적으로 소련에서 추방되었다. 트로츠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독일 공산당 등에서는 트로츠키를 모셔가려고도 했지만 교활한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외국에 가서 혁명을 성공시키고 자신의 세계 혁명론을 입증하고 영웅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고 이런저런 핑계로 트로츠키를 묶어 놓았다. 당시 스탈린과 협력한 '''지노비예프는 트로츠키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오히려 추방으로 처리했는데, 트로츠키가 아무리 실각했다고 해도 트로츠키의 영향력은 그만큼 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추방당한 후에도 반스탈린 활동을 계속 펼치자, 훗날 멕시코로 요원을 보내 암살하기도 했다. 대체로 스탈린에게 숙청된 인물들은 흐루쇼프에 의해 대부분 복권되었지만, 자신이 세운 소련 체제를 "퇴보한 노동자 국가"라고 주장한 트로츠키는 흐루쇼프도 외면했고, 암살자 라몬 메르카데르에게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하기도 했다. 트로츠키는 결국 소련이 망할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다.
이후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몰아내는데 협력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레프 카메네프와 손을 잡고 트로이카 체제를 수립하나, 이번에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와 스탈린의 사이가 삐걱거렸다. 이들은 트로츠키가 주장한 '당내 민주주의' 문제를 들고 와 스탈린을 비난했고 '부자 되시오' 발언으로 충격을 안긴 니콜라이 부하린 역시 자본주의를 우습게 안 인간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미 나가리된 트로츠키까지 끌어들인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연합은 스탈린과 부하린의 연합에게 다시 분파주의자로 몰려서 신명나게 두들겨 맞고 나란히 당에서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최종적으로는 부하린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당내의 유일지도자로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이후 대숙청을 실시하여 이렇게 권력투쟁과정에서 자신에게 한번이라도 밉보인 인간들은 모조리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아서 처형했다. 지도적 혁명가들은 '''스탈린을 잘못 평가한 대가를 죽음으로써 치르게 되었다.'''

4. 피와 공포의 숙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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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믿음이 가는 사람이 가장 먼저 의심받아야 될 사람이다.'''

- 이오시프 스탈린

'''레닌이 오래 살았다면 그도 감옥으로 갔을 것이다.'''

- 나제즈다 크룹스카야[38]

'''붉은 군대의 베테랑들을 다 없애버린게 네놈 아니냐? 네가 유능한 장군들을 다 죽여버렸잖아!'''

- 클리멘트 보로실로프[39]

그렇게 자신을 디스하던 이들을 숙청하고 자신의 절대권력 확립을 위하여 스탈린은 전대미문의 대숙청을 실시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5. 제2차 세계 대전까지


당시 소련의 실태는 동물농장에서 비판되기도 했다. 스탈린의 의심과 불안이 소련 사회의 구석구석을 지배하였고 대숙청이라는 사상 최대의 마녀사냥을 발생시킨다.[40] 실제로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스탈린 집권기를 공식적으로 '''대공포(大恐怖)'''기로 정의하고 있을 정도. 동물농장1984의 저자인 조지 오웰사회주의 사상을 가졌음에도 스탈린과 소련식 정책을 증오하며 그들을 신랄하게 까는 저 두 책을 썼다. 이에 관해선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 내의 트로츠키주의자(POUM)들을 박멸시키기 위하여 NKVD로 하여금 스탈린주의자(PCE)를 부추겨 공화파를 후원하긴커녕 분열을 조장했다는 이유도 있는데, 당시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 중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스탈린은 나치 독일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개전 이후 독일과 함께 폴란드사이좋게 갈라먹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서로가 서로를 믿지 않았던 조약은 언제 무너질지 모를 일이었다. 소련도 언젠가 독일이 뒤통수를 후려칠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때문에 1939년의 폴란드 분할 이후 새로운 독일-소련 국경선에 '''"스탈린 라인"'''이라는 방어선을 건설하라고 명령한다. 다만 그 방어선이 이전의 소련-폴란드 국경선에 있었던 방어선을 뜯어다가(…) 만들려고 한 병크가 문제였다.
나중에 스탈린이 죽고 난 후에 니키타 흐루쇼프의 발언 중에는, "우리는 스탈린 덕분에 이긴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긴 것이다." 라는 것이 있다. 다만, 흐루쇼프의 평가는 전쟁 지휘에 대한 부분에 한정해서 본다면 맞을지 몰라도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이 아니었다면 소련이 독소전에서 이기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이야기라고 봐야 한다.
이 무렵 코민테른을 통해 중국 혁명에 깊숙히 개입했으며 중국 공산당에게 오랫동안 중국 국민당과의 국공합작을 유지하라고 교시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장제스를 비롯한 국민당 우파들을 숙청하고 국민당을 공산화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4.12 상하이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틀어졌다. 이후 갑작스럽게 중국 공산당의 무력봉기를 지시하면서 노선을 거꾸로 뒤집었으나 그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취추바이 노선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이후 리리싼 노선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스탈린은 중국인 공산주의자들이 좌경모험주의를 범한 것이라고 뒤집어 씌워 그들을 숙청했다.
1929년에는 중동로 사건, 봉소전쟁을 통해 장쉐량과도 부딪혔으나 정작 승리를 거둔 바실리 블류헤르를 대숙청 중에 가차없이 숙청해버렸다.

6. 제2차 세계 대전과 독소전쟁


1934년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노골적으로 소련을 디스하며 주변의 소국을 병합, 소련의 안보를 위협하게 된다. 소련은 안보적 위기를 느끼게 되었으며, 대숙청 와중에도 꾸준히 국방력을 증진하기 위해 병력을 늘리고 무기를 뽑아내었다. 스탈린은 영국, 프랑스와 손을 잡고 히틀러를 막아보려 했으나, 영불은 소련을 노골적으로 무시했고,[41] 독일에 침략당해도 소련의 개입을 허용할 수 없다는 폴란드의 고집 때문에 협상은 결렬되고 만다.
결국 스탈린은 서방 각국을 불신하게 되었고, 이 때 히틀러는 서방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소련과 폴란드 침공 직전인 1939년 8월 유럽을 독소가 반분하자는 비밀조항을 넣은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이후 히틀러가 서방각국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소련은 비슷하게 폴란드 동부, 발트 3국, 그리고 루마니아 왕국의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 핀란드 일부(카렐리야 지방)[42]를 차지해 대가는 톡톡히 챙긴다. 게다가 스탈린은 자신이 배신했을 경우의 상황을 히틀러가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에게 협상하는 자세가 아니라 고압적인 자세로 여러가지 사항을 요구하여 여러가지 수많은 이익들을 챙겼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히틀러를 화나게 만들기도 해서 히틀러는 스탈린을 "피도 눈물도 없는 강도"라고 비유할 정도였다. 그러나 히틀러가 엄청나게 빠른 시간만에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를 함락시키고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영국군마저 거의 전멸 위기에 놓여, 영국의 함락도 거의 코 앞에 이르게 되자[43] 스탈린은 깜짝 놀랐다. 그러자 그때부터 스탈린의 태도는 점점 부드러워지기 시작했고, 히틀러가 요구하는 일들은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최대한 협조해 주었다. 그러나 게오르기 주코프를 위시한 소련의 여러 장군들은 이런 스탈린의 태도가 전쟁이라는 재앙을 불러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독일이 소련과의 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여러차례에 걸쳐서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며 경계령을 내려주라고 화를 냈다. 그러나 스탈린 또한 화를 내면서 히틀러를 건드리면 안 되며 그렇게 한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2015년 KBS에서 광복 70주년에 맞춰 방영했던 '세계대전'이라는 다큐멘터리에 나온 교수에 따르면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은 "영국도 굴복시키지 못하는 히틀러가 설마 우리 소련을 치겠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스탈린이 히틀러를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 모르지만, 히틀러를 과소평가하지는 않았다. 그는 히틀러가 단시간에 독일 민족들을 통합하고 독일 내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독일 공산당을 완전히 전멸시켰던 모습과 특히 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순식간에 정복하는 히틀러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의 뒷통수를 쳐도 전혀 죄책감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희대의 또라이가 아니라면 적어도 1차대전에서 양면전쟁을 하다가 패망한 독일을 이끌고 영국과 전쟁이 끝나기 전에 소련을 침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몰로토프가 전쟁준비에 몰두하던 스탈린에게서 "1943년에는 전쟁을 할 준비가 마련된다"라는 스탈린의 말을 들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히틀러가 바로 그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희대의 또라이였다는 것이었다.'''
"설마 1941년에 들어오겠느냐?"라고 생각했던 게 문제였다. 러시아를 침공하려는 사람들이나 이를 막아내려는 러시아 사람들이나 동장군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로 계산해야 하는 것이고, 그러면 겨울이 올 때까지 침략할 시간이 충분한 봄에 침공을 하는 게 유리하다는 것 역시 양쪽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1941년의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 침공 때문에 한여름이 될 때까지 침략을 하지 못했기에 언젠가 전쟁은 하겠지만 올해는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강해진다. 그러나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 새벽 3시 30분부터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공한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전쟁에 휘말린 소련군은 개전 몇 시간 만에 소련군 전투기 1200대가 이륙도 해보지 못하고 파괴되었고, 소련의 전방 보급기지들은 인근 부대에 탄약을 공급하기도 전에 점령되었다. 독일군은 그 날 단 하루만에 발트 3국으로부터 60~80킬로미터, 벨라루스로 40~60킬로미터, 우크라이나로 10~20킬로미터까지 진격했고, 상상을 초월하는 진격속도에 혼란에 빠진 소련군은 지금 독일군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44] 부랴부랴 동원된 부대들은 새로운 숙영지로 이동 중에 공격을 받아 괴멸되거나, 전선에 도달한 직후 제대로 된 정보 없이 무턱대고 싸우다가 몇시간 만에 사라졌다.대숙청으로 지휘에서 보급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가 망가졌던 소련군은 겨울전쟁에서 보여준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군은 포로만 수백만이라는 굴욕을 당하고 와해 직전까지 몰렸다.
개전 당일 주코프와 여러 장군들은 새벽 3시 30분부터 국경에서 폭격이 시작되었다 보고를 받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그들은 스탈린의 측근들에게 스탈린을 깨워서 모스크바에 데려오도록 했다. 한편 잠자고 있던 스탈린은 독일군이 소련 도시들을 공습하고 있다는 주코프의 전화를 받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주코프에게 그 어떠한 전투도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 뒤에 리무진을 타고 모스크바로 간 스탈린은 이미 회의를 하고 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게오르기 주코프와 같은 최측근과 장군들과 대응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독일이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망연자실하였고 매우 창백하고 당황한 얼굴로 '''빈 파이프를 뻐끔거리면서''' 이 상황을 믿지 않으려고 하였다. 스탈린은 이 회의에서조차 이 공격이 단지 제한된 도발이라고 믿고 있었다. 심지어 세묜 티모셴코가 '우리의 도시를 공습하는 걸 그냥 도발이라고 할 순 없다'라고 말하자 스탈린은 "그렇다면 독일의 장군들이 자신의 도시를 폭격해서 도발을 했을 것이다"이라면서 독일 지도자 히틀러가 그럴 위인이 아니라고 대꾸했다.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고 '''"히틀러는 분명히 이 상황을 모를 거야."''' 라고 푸념하듯이 말하면서 히틀러전쟁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독일의 일개 장군들이 음모를 일으킨 것이거나 독단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끝까지 믿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지휘부의 누군가가 "히틀러는 이 '''도발'''에 대해 모르고 있을 수도 있으니 독일측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야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스탈린은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몰로토프를 독일 대사관에 파견했다. 독일 대사관에 도착한 몰로토프는 그곳에서 만난 독일 대사 슐렌부르크[45]에게 '''히틀러가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몰로토프는 그 말은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나머지 말을 더듬거리며 '''"우리가 귀국에 그럴만한 짓을 한 적이 있습니까?"''' 라고 말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스탈린 또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몸에 힘이 빠졌는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뒤 오랫동안 견딜 수 없는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소련 지도부 사이에서 거의 유일하게 주코프가 독일군을 저지해보겠다고 여러가지 전략들을 이야기했지만, 이반 코네프는 '''"저지가 아니라 전멸이겠지."''' 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 상황에서도 전쟁을 지휘할 생각은 없었다. 세묜 티모셴코가 스탈린에게 어떻게 전쟁을 이끌어야 되겠냐를 물어보기 위해 스탈린을 만났지만 스탈린은 그를 못본 척했다고 한다. 그는 그 와중에도 오로지 정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정치부회의에 참석했다.[46] 한쳔 방송 연설은 몰로토프에게 맡겨놓았는데 그는 몰로토프가 자신을 위협하거나 깎아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 업무를 맡겼다. 그나마 스탈린은 다음날부터는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며칠 후에는 하루에 14시간 정도를 일하면서 전쟁을 지휘할 정도로 괜찮아 졌다고 한다. 소련 지도부는 일단 적이 코 앞에 와 있었기 때문에 일단 어찌저찌 전열을 정비하고 독일군과 싸우는데 정신이 없었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던 스탈린에 의해 소련군이 입은 피해가 심각하다는 것을 안 많은 사람들은 점점 '''"왜 스탈린이 서기장으로써 전쟁 역할을 수행하는가?"''' 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수수께끼 같은 행동을 벌이게 된다. 1941년 6월 29일부터 측근과 장군들은 스탈린이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 스탈린이 실종된 것이다. 당황한 사람들이 스탈린의 행방을 알아보니 그가 며칠간 출근하지도 않고, 관저에 숨죽이며 틀어박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전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갔기에 소련 지휘부는 일단 스탈린이 없는 가운데에서 할 일을 계속 했지만, 스탈린이 없는 상태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그들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생겼다. 그들은 항상 스탈린에게 명령을 받아 움직였으며, 지금하고 있는 일들이 그의 노여움을 사서 그가 갑자기 돌아온 뒤 자신들을 무슨 트집을 잡아 숙청 시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보다 못한 몰로토프 등의 심복들이 스탈린의 관저로 가서 스탈린에게 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니냐고 요구하기 위해서 찾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들은 먼저 스탈린을 설득하기로 하고[47] 스탈린의 관저로 찾아갔다. 그들이 본 관저에 있던 스탈린은 축 늘어져서 안락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자신들이 오자 "무슨 일이오?"라고 물었다. 나중에 출판된 미코얀의 회고록에 따르면, 스탈린은 갑자기 찾아온 측근들을 경계하는 눈치였으며 굉장히 나약하고 의기소침해 보이는 모습이여서 그런 스탈린의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미코얀의 회고록에는 스탈린이 측근들이 스탈린을 불신임하고 체포하러 온 줄 알았다는 눈치라고 생각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 때문에 로버트 서비스, 앤터니 비버 등 여러 저명한 연구에도 스탈린이 체포를 두려워했다는 내용이 기술되었으나 이는 사실 미코얀의 아들인 세르고 미코얀이 아버지의 회고록을 멋대로 조작해서 넣은 문구고, 미코얀이 직접 기술한 회고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이는 나중에 미코얀의 회고록 초판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당시 스탈린의 속내는 이반 4세가 자신이 왜 통치해야 하는지를 각인시키기 위해서 수도원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던 이유와 비슷하다는 추측이 있다.[48] 한마디로 "이놈들이 왜 이제서야 나의 중요성을 깨닫고 찾아오는 거야." 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스탈린에게 전쟁을 이끌 사람의 필요성을 이야기했고, 그러자 스탈린은 "그래서 누가 전쟁을 지휘할 것인가?" 라고 이야기했다. 이에 심복들은 "당신이 전쟁을 지휘해 주시오." 라고 이야기했고, 스탈린은 꽤나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그 제안을 승낙하여 전쟁을 지휘했다. 특히 스탈린은 자신의 부하들이 자신들끼리 권력 투쟁이나 자리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 더욱 안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에 몰로토프가 전쟁을 지휘한다고 이야기했을 경우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모조리 숙청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라브렌티 베리야는 '''"스탈린의 나약한 모습을 본 미코얀과 몰로토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대가를 치루게 될 것이다."''' 라는 섬뜩한 예언을 했다.[49] 어쨌든 현실을 깨달은 후에는 적극적으로 전쟁수행에 개입했다. 이것이 지나쳐서 몇몇 군사작전에 개입했다가 수백만의 병력을 날려먹긴 하지만, 자신이 개입해 봐야 별로 좋을게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이후에는 직업군인이 짠 작전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와 반대로 더욱 개입해서 안 그래도 시궁창이었던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50] [51]
1941년 11월 7일 모스크바 10월 혁명 퍼레이드 스탈린은 행진하는 부대를 향해 레닌 묘소에서 짧은 연설을 했다.

"앞으로 몇 개월 안에, 반년이나 어쩌면 1년 이내에, 히틀러의 독일은 그들이 저지른 죄악의 무게로 인해 붕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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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p.375

가장 큰 위기는 1941년 12월의 모스크바 전투였는데, 스탈린은 정부 부서를 모두 동쪽으로 피난시켰으면서도 시와 운명을 함께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실제로 공방전 내내 모스크바를 지키면서 방위전을 독려했다. 게오르기 주코프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활약으로 모스크바는 성공적으로 사수되었다. 이후에는 총사령관 대리인 주코프에 작전지도를 맡기고, 자신은 자는 시간을 빼놓고 하루 12시간 이상씩 일하면서 전쟁 수행에 필요한 행정을 총괄했다. 그는 전쟁 전부터 총괄하던 일반 행정뿐만 아니라 군업무로부터 군수생산, 그리고 서방 원조까지 거의 모든 방면의 세부사항을 직접 챙기면서 실무진에 엄청난 압박감을 주었고, 이들은 저승사자였던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죽어라 일을 했다. 실제로 이 당시 대숙청 기간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임무를 달성하지 못한 자는 굴라그로 가거나 혹은 처형되었다. 이런 면에서 스탈린은 2차대전 당시 소련의 승리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무리한 작업은 스탈린의 육체를 크게 손상시켰다. 주코프가 회상하기를 스탈린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노화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얼굴은 쭈글쭈글해졌으며, 눈은 심하게 쳐지고 몸동작도 느려졌으며 머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얘졌다고 한다. 실제로 1939년과 독소 불가침조약때와 1945년 얄타 회담에 찍은 사진을 보면 6년밖에 안 지났는데 머리나 수염이 모두 새하여졌다는걸 알 수 있다. (항목에 들어가서 사진 참조바람)
게오르기 주코프가 작전 계획을 짜는 동안 스탈린은 정치가들을 이용하여 군수물자의 생산을 늘리도록했고, 1942년 소련은 놀라운 성과를 달생했다. 소련 경제는 1942년 후반 여섯 달 동안 독일이 그해를 통틀어 얻을 수 있었던 생산 수준에 도달했을 정도로 전쟁 수행에 성공적으로 헌신했고, 그 수치는 주목할만 했는데, 그 반년 동안 소련은 15,000대의 항공기와 13,000대의 탱크를 생산해냈다. 즉 탱크와 항공기 생산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려 독일군의 침략을 상대했던 것이다.[52]
어쨌든 붉은 군대는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레닌그라드 포위전, 바그라티온 작전을 비롯한 전투에서 전세를 역전시키고, 베를린을 함락시킴으로써 1945년 5월 9일 마침내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은 국방군 총참모장 빌헬름 카이텔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냈다. 마침내 독소전쟁이 마무리된 것이었다. 당시 소련인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다, 당시 모스크바에서는 축포가 1000여발이나 발사되었고, 화려한 불꽃놀이가 벌어졌으며, 무엇보다도 모두들 엄청나게 마셔댔다. 비록 본진이 탈탈 털려서 식량은 없었지만 보드카는 넘쳐나서 술은 잔뜩 마실 수 있었으며 경찰들은 사람들이 고성방가를 하거나, 오줌을 벽에다가 싸는 것도 눈감아주었다고 한다.
이 가슴 벅찬 승리에 스탈린 그 자신도 대단한 감명을 받았음은 분명해보인다.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는 아버지와 관계가 소원해진지 꽤 오래 되었음에도 전승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드디어 우리가 이겼어요!"라며 축하의 인사를 건냈다. 스탈린 또한 이 날 만큼은 딸에 대한 나쁜 감정을 잊어버리고 감동과 기쁨에 가득찬 목소리로 "그래, 우리가 이겼구나."라는 말로 화답하였다. 그런데 정작 스베틀라나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 부하들로부터 승전을 축하하는 전화가 걸려오자 되려 벌컥 화를 내며 "지금 한가하게 전화나 하고 있을 때란 말이오?"라며 퉁명스런 태도로 일관했다.
그해 6월 24일, 모스크바에서 역사적인 전승 기념 개선식이 벌어졌다.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의 오래된 전통에 의하면 개선식의 첫 장면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최고사령관이 백마를 타고 그림처럼 달려나가기는 것으로 시작된다. 물론 여기서 최고 사령관은 주코프가 아니라 스탈린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완성될 수 없었는데, 기병대 정치위원을 하던 것도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고 몸도 예전같지 않아 말을 다루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이 연습을 위해 멋들어진 아랍산 백마에 올라타자 놀란 말은 앞다리를 치켜 들어 스탈린은 땅바닥에 굴려버렸고, 머리와 어깨를 다친데다 기분까지 상한 스탈린은 "주코프더러 행렬의 선두에 서라고 하시오. 그는 노련한 기병이니까."라고 하면서 주코프를 다시 호출했다. 주코프는 스탈린으로부터 말을 잘 다루냐는 질문을 받았고,[53]독재자가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주코프는 본능에 가까운 아부로 당연히 스탈린 동무가 최고사령관으로써 행렬에 선두에 서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이 너무 늙어서 힘들다며 주코프에게 선두에 설 것을 명령하고, 가장 높은 곳에서 말을 타고 가는 주코프를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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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를 타고 개선식을 하는 주코프. 원래는 스탈린이 타고 있었어야 할 장면이었다.[54]
어쨋든 그렇게 전쟁에서 승리하자 전쟁 이전부터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던 스탈린은 이제 '승리의 지도자'라는 업적까지 더해지면서, 소련에서는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런 것들이 종교화의 레벨까지 이르러 반종교를 표방하는 프라우다지에서조차 공개적으로 "자신의 일이 잘 안될때, 그분(즉 스탈린)에게 기원하면 모든게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사설을 쓸 정도였다. 아래는 당시 프라우다지의 사설.

당신의 작업이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혹은 자신의 능력이 의심스러울 때, 그 분을 생각하시오. 스탈린을...

그러면 확신을 얻게될 것이오.

당신이 기운을 차려야 할 때 피곤함을 느끼거든, 그 분을 생각하시오. 스탈린을...

그러면 일이 수월해 질 것이오.

당신이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자 할 때, 그 분을 생각하시오. 스탈린을...

그러면 올바른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오.

스탈린이 말한 것은 인민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민들이 말한 것은 스탈린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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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0일자 프라우다 기사에서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스탈린 자신은 독소전쟁 축하연 연설에서 "우리의 승리에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모든 것은 소련 인민들의 피와 땀이 이룩한 것입니다." 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어떤 역사가는 이 연설이 스탈린이 한 연설중에서 가장 정직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나치를 정리하고 3개월 뒤에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유럽에 있던 붉은 군대를 시베리아 열차에 태워 극동 주변에 배치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9일, 150만 명이 넘는 소련군이 26,000문의 야포와 5,300대의 전차 그리고 4,500대에 달하는 항공기와 함께 8월의 폭풍 작전을 개시하였다. 소련군은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 이후에도 진격을 계속하여 21일부터 23일 사이 원산과 함흥 그리고 개성까지 접수했다. 또한 극동의 소련군은 1945년 8월 18일 사할린 섬을 차지하기 위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1905년 러일전쟁에서 잃었던 남사할린을 다시 되찾았다.

7. 냉전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났지만, 추축국 동맹을 패퇴시키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미국과 소련은 전후 질서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을 했다. 스탈린은 영미와 흥정으로 동유럽을 차지할 수 있었고, 소련의 건국 당시부터 숙원이던 완충지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제 1세계 vs 제 2세계 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냉전이라고 한다.
일단 전쟁이 끝난 후 스탈린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1945년 6월 28일에는 자신이 영웅시한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처럼 대원수의 지위에 오른 스탈린은 전쟁당시 주춤했던 세뇌 및 숙청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일단 전쟁 중 독일 점령지에 있던 '''배신자'''들이 우선적인 숙청대상이 되었다. 캅카스발트 3국에 있던 여러 반소 분자들이 총살되거나 굴라그로 보내졌다. 전쟁 중 포로가 된 소련군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었다. 277만 5700명의 소련군이 포로가 되었다는 이유로 여과 수용소라는 곳으로 보내졌다. 이 중 절반은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려갔다. 전쟁이 끝났다는 이유로 국민들을 느슨하게 다루는 것은 '''강철의 대원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다시 강조되었고, 국민들은 당과 정부에 충성을 바쳐야만 했다. 비밀경찰은 다시 바빠졌고, 소련의 어용 언론들의 세뇌와 선전은 다시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소련은 나치 독일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나, 종전 3년 만에 전쟁 전 수준으로 생산량을 회복한다.다만 전쟁의 상흔에서 온전한 복구를 하기까지는 50년대 중반을 넘어서야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후복구 과정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이루어 졌고 성공적이었다. 제4차 5개년계획 마지막 연도인 1950년에는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스탈린의 소련은 만성적인 소비재 부족 현상을 완벽히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전후 복구 과정에서 소비재 생산도 발전하면서 1947년에 이르러서는 소련에서 배급제가 폐지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배급제를 실행했던 영국보다 7년이나 빠른 속도였다.
1949년 소련은 핵 실험을 하여 기존에 미국이 가지고 있던 원자폭탄 보다 더 위력이 강한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한다. 이로써 소련은 미국의 핵무기 독점을 끝내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냉전시대에 스탈린이 세계 적화의 야욕이 있었다는 식의 선전이 있었지만, 실제로 스탈린은 다른 나라의 혁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55] 그래서 다른 나라의 혁명이 실패하더라도 소련의 이익이 침해되거나 미국과 대결하는 것은 피했다. 예를 들어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군에서 무정부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득세하자, 소련은 NKVD를 보내 공화파에서 이들을 때려잡는데 힘을 쓰다가 적전분열을 일으켜 결국 파시스트군이 승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베를린 위기때도 도로는 봉쇄했을지언정, 미국의 공중 수송은 막지 않았고, 국공내전 때도 인민해방군이 승리하기 직전까지 개입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는 중화민국과의 외교를 끊지 않으면서 구 러시아 제국이 만주에서 가졌던 이권을 되찾는데 집중하였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호치민을 지원한 것도 1950년이 돼서였다. 당시 스탈린은 호치민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OSS와 협력했던 것과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점을 의심해서 호치민을 당혹스럽게 만든 적이 있었다. 그래도 호치민이 요구한 한가지는 확실하게 들어주었는데,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을 베트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에서도 소련군은 비밀리에 참전한 공군을 제외하면 끝까지 참전하지 않은 것도 이때문이다. 오히려 모택동에게 김일성을 원조하라는 말을 한 이후에 '쟤가 개입 안 하겠다고 하면 우리 이웃으로 미군을 놔도 상관없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정치학자들은 스탈린을 "20세기 최고의 정치현실주의자"로 평가한다.
스탈린이 이런 모습을 보인것은 그가 보기에 따라선 매우 소심하면서도 신중한 성격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나, 그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을 지휘하면서 본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뼈저리게 체감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스탈린은 소련의 서기장이자 소련군 통수권자 그리고 연합국의 지도자 중 한명으로서 미국이 행한 가진 것이라고는 명분밖에 없는 키다리 지도자에게도 전차 수십, 수백량 이상을 제공하는 미칠 지경의 USA Loan, 미국이 수행한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을 대상으로 한 양면전쟁, 그리고 미국의 섬 반도 반동분자들을 단번에 박살낸 악마의 폭탄 투하를 생생히 전달 받을 수 있었던 인물이다. 소련 서기장 스탈린이 아니라 삼척동자가 봐도 신생국가 소련이 '''핵무기 기술까지 독점했던''' 미국과 충돌할 경우 남는 것은 자멸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미소 전쟁이 소련이 미국이 가진 것 이상의 핵전력을 보유하지 못한 스탈린 생전에 벌어졌다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던 소련이 본토와 생산력, 경제력이 멀쩡히 살아있었던 미국을 이겼을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무기대여법 등을 통한 다양한 자원과 경공업, 군사적 지원, 배후에 있던 일본 제국을 미국이 박살내고 있었던 상황 등으로 인해 소련이 마음놓고 중화학 군사 산업을 육성하고 독소전쟁에 모든 것을 올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미국과 소련이 전쟁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런 지원은 당연히 없는 것이고, 소련은 독소전쟁 이상의 패널티를 가지고 전쟁을 했어야 함이 당연.
물론 미국 핵개발 비화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일본에 떨어뜨린 핵폭탄 두개 소진한 후 다음 핵무기의 준비까지 미국에게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핵이 없었다고 해서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는다. 국제역학적으로 보아도 소련에게 득될 것은 하나도 없던 것이, 일단 영국만 해도 윈스턴 처칠철의 장막이라고 언급할 정도로[56] 공산주의 소련에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고, 독일 쪽에서 보아도 독소전쟁나치의 대 소련 프로파간다, 소련군의 약탈, 미소분할점령 등으로 인해 소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 프랑스는 좀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자유 프랑스는 미국에게 진 이 엄청났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을 묵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즉 영프독으로 대표되는 기존 열강들이 소련에 친화적이지 않고, 미국의 편을 들 것이 분명한 상황이다. 일본의 경우 반미감정이야 당연히 가지고 있었다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소련 편을 들어줄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일단 일본은 확실히 GHQ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고 이것은 서유럽을 확실히 지배하지 못한 소련과 서유럽을 확실히 지배한 미국의 극단적인 차이이다.[57] 또한 일본과 소련은 러시아 제국, 러시아 내전 시절부터 서로 치고받고 싸운 앙숙관계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넘어 양면전쟁을 했던 만큼, 소련을 동, 서로 나누어 공격할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 다만 양면 공격의 대상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에서 소련 서부, 동부로 바뀌는 것일 뿐이다. 당시 미 해군태평양 전쟁을 통해 세계 3위 일본 해군을 상대로 하면서 급격히 팽창해 명불허전 세계 1위의 해양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수송능력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연히 공군전력 또한 마찬가지. 베를린 봉쇄에서 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오로지 공군의 공중 수송을 통해 서베를린이라는 대도시를 지탱한 것이 미군의 수준. 이런 상황에서 대서양에서 주구장창 미군을 괴롭히던 나치 독일의 유보트와 일본 제국의 잠수함들마저 없어졌으니 상황은 더 낫다. 미국이 이런 해군력의 압도적 우세를 이용해 베링 해협과 대서양을 막아버리고 소련의 동쪽과 서쪽에서 양면 공세를 벌인다면 소련 입장에선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소련의 의미있는 군항은 죄다 동유럽, 러시아 서쪽에 집중되어 있어 애초에 소련 해군이 약하지만 모항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58] 때문에 일본 제국이 당했던 것처럼 소련 역시 미국의 본토를 공격할 엄두도 못 낸채 일방적으로 얻어 맞는 샌드백이 되었을 것이 자명하다. 소련군이 서진해 서유럽을 위협할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 독일을 완전히 합병하려 한다면 그것대로 프랑스와 영국이 가만히 있을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적어도 스탈린 생전의 소련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보기도 어렵고. 이런 점을 모두 종합하면 스탈린이 세계 적화를 추구하며 공격적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지상전에서 미국에게 상당한 출혈을 강요할 수는 있을지언정, 소련과 미국은 기본적으로 바다로 인해 이격되어 있어 근본적으로 상대가 안 되기 때문이다.
다만 소련군이 진주한 나라에서는 소련식으로 사회를 개조하려 했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워 위성국으로 삼으려고 했다. 이런 제국주의적인 태도는 나중에 동유럽에서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거의 독자적인 혁명으로 집권한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이에 반발해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스탈린 사후,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소련의 간섭을 벗어나려는 소요사태가 일어났고, 동유럽과는 약간 다르지만 마오쩌둥이나 김일성, 엔베르 호자는 이전의 소련 꼬붕을 했던 노선을 폐기하고 독자노선을 천명하게 된다.

8. 우상화의 절정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변에 아첨하는 무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독재자답게 단순히 아첨에만 그치지 않았다. 스탈린에게 바쳐진 것은 그냥 아첨이 아니라 거의 '''숭배''' 수준이었다. 사실 스탈린 자신은 지나친 숭배 의식과 열풍에 당혹스럽다며 선전에 도가 지나치다고 불평했다. '''그렇다고 선전과 숭배 의식을 제한하지는 않았다.''' 당시 이러한 숭배 의식을 만들어낸 건 결국 스탈린 본인의 절대자적인 통치 스타일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가 숭배 의식을 비판한 것은 당연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튼 전후 소련에서는 웃지 못할 스탈린 숭배 열풍이 불었다. 한 번은 1945년에 스탈린 전집이 출간될 때의 일이다. 스탈린은 종이가 부족하니 3만 부만 찍자고 했다. 그러나 주변인들은 '''대중의 요구가 엄청날 것'''이라면서 적어도 30만 부는 찍어야 한다고 말했다. 겸손한 스탈린 동지는 마지못해(?) 이에 동의했다.[59] 그는 자신의 전기를 읽고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스탈린은 자신에 대한 도가 지나친 아첨이 가득한 스탈린 전기를 읽고 '''"우리에게 우상 숭배자는 필요 없소... 우리에겐 마르크스와 레닌의 가르침이 있으니 다른 것은 필요 없소."''' 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탈린 전기가 발간이 취소되지는 않았다.''' 스탈린을 신성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후계자로 보는 ''''단기 과정'은 전후 천만부가 발간되었다.''' 동시에 전기는 100만부 이상, 전집은 50만부 이상 발간되었다. 스탈린의 숭배는 이제 소련 출판계의 사명이었고, 소비에트 언론이 가야할 길이었다. 전쟁전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에 대한 수많은 포스터가 제작되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스탈린에 대한 철저한 세뇌는 미덕이 되었다.
스탈린 우상화는 1920년대부터 레닌과 엮어서 레닌의 계승자로 슬슬 나왔고 1930년대부턴 레닌을 제치고 자체 우상화로 더 심해지더니 대숙청이 시작되자 열광적으로 변하고 독소전쟁에서 승리하자 신격화되기 이른다. 1940년대 소련 지도를 보면 독소전쟁때 유명한 격전지 스탈린그라드 뿐만 아니라 '스탈린스크', '스탈리노고르스키', '스탈린스키', '스탈리노그라트', '스탈리나오울' 같은 도시가 등장한다. 심지어는 모스크바를 '스탈리노다르 혹은 스탈린다르(스탈린의 선물)로 바꾸자는 아부성 청원이 나왔고 역법을 '''예수 태어난 연도 따위하면서''' 서기 연도를 대체하여 스탈린 생일을 기준으로 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두가지는 겸손한 스탈린 동지도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는지 사양한다.[60][61][62]
영화 <베를린 함락>에서는 감독이 스탈린 홀로 히틀러의 패배를 궁리하며 참모부 지도를 주시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전쟁 시 신화 속엔 스탈린이 홀로 전쟁영웅-정치인의 실체가 되었다고 믿을 판이었다. 1948년 소련 예술상 출품작 중에 단 두 편만이 위대한 스탈린을 묘사하지 않은 작품이었다. 새로운 노래나 출판물은 말할것도 없었다. 노래야 손발이 오그라드는 스탈린 찬양 내용이 주를 이었고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은 겨우 1000만부 정도나 팔렸지만[63] 스탈린의 저작들은 총 7억 600만부가 팔렸다. 레닌의 저작은 2억 7900만부, 마르크스-엥겔스의 저작은 꼴랑 650만부가 판매 되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 셀러작가가 되었던 스탈린 동지의 기록은 마오쩌둥에게 곧 깨진다. 마오주석 어록은 44억부가 출판되었다. 역시나 대륙의 기상이다.[64]
이런 지도자 신격화를 어디의 선전물에서 많이 본 것 같다면 '''절대 기분 탓이 아니다.''' 북한의 모든 선전, 선동 기법은 스탈린 식 선전선동 기법의 철저한 모방화 - 이후 민족주의 주입에 있었다. 당연히 스탈린을 찬양하는 포스터에서 북한 냄새가 나더라도 그게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시대에 들어서면서 소련은 스탈린의 방식대로 체제만 유지하고 그를 숭배했던 것에 대해 흑역사 취급하는 분위기로 흐른 반면 북한의 김일성 숭배는 더욱 막장화되면서 '''소련에서 자기네들이 세워 준 정권인 북한의 김일성 숭배 선전물을 보며 낄낄거리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졌다.
이 시절 소비에트 연방의 모든 사람이 위대한 '''스탈린 동지의 영도력 안에서 행복을 느꼈다. 아니라면 느껴야만 했다.''' 소비에트 안에서 좋은 일은 모두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의 은혜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어떠한 작품도 그의 천재성을 언급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었다. 역사와 정치학, 경제학, 지리학, 화학, 물리, 유전학 까지도 '스탈린 동지'의 지도적 사상을 통합하지 않으면 완전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심지어 요리책에까지 '스탈린 동지'의 말이 인용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의 사진을 게재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적 마차 사고로 온전하지 못한 왼쪽 팔과 얼굴의 천연두 자국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사진보다 초상화를 많이 선호했다.''' 2차대전 후에는 너무 나이든 초상화를 거부해서 보통 그 이전의 초상화가 사용되었으며 모든 초상화는 '스탈린 동지'가 '''인정한 작품만이 공개될 수 있었다.''' 계속되는 선전세뇌는 억압적 독재 정권하에서도 효과를 발휘했다. 특히 독소전 이후의 상황과 연계되어 스탈린은 구국의 영웅으로 승격되었다. 이제 많은 소비에트 인민들이 실제로 '스탈린 동지'를 사랑했다. 아마 초기에는 그냥 살아남기 위해서 또는 굴라그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그를 숭배하는 사람이 많았고 스탈린이 독소전쟁에서 승리한 후부터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실제로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허나, 스탈린 숭배는 흐루쇼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 이후에 스탈린은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졌고, 이 기조가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붕괴 이후로 소련에 대한 향수가 늘어나면서 실제로 스탈린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대거 나타났다'''. 심지어는 이 항목 상단의 짤에 나온 것처럼 정교회에서 스탈린 이콘이 나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초기에는 정교회를 비롯하여 종교 자체를 말살하려 했던 스탈린이지만 독소전쟁이 시작되면서 소련 인민들을 단결시키기 위하여 정교회를 거꾸로 밀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걸 이유로 정교회에서 스탈린을 갖다가 떠받드는 거다.(...)

9. 말년


그렇게 시간을 흐르고 흘러 1949년에 스탈린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70살 노인이 되었다. 그의 70세 생일은 마오쩌둥, 호찌민 등등의 전세계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모두 참여한 화려한 기념식이었다. 보통 사실보다 미화된 그의 초상화와 사진을 통해서 그를 알고 있던 많은 지도자와 사람들은 이날 참여한 스탈린의 노쇠한 모습에 굉장히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스탈린은 초상화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나이를 먹는 인간이었다. 다만 인민들은 늙은 모습도 마치 오랜 세월을 지낸 현자 같다고 자기 합리화(...).
원래 의심이 많았던 독재자이지만,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의심도 배로 더 늘었다. 그는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베리야, 흐루쇼프, 미코얀 등 자신의 충실한 충복들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까 의심했고 그들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스탈린의 모든 주변인들이 스탈린이 너무 늙었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의심 많은 스탈린 앞에서 정신이 머리에서 가출하지 않는 이상 감히 후계자 이야기를 꺼내는 무모하고 정신나간 인간들은 없었다.
특히 그 누구든지 자신을 위협할 권력을 가질 경우 이 늙은 콧수염 대마왕이 가만히 있지 않으리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심지어 그 정도의 권력을 갖지 못한 측근들도 항상 자신을 숙청할 지 몰라 살얼음판을 걷는 생활을 했다. 사실 말년의 스탈린은 격무에 지쳤기에 은퇴해서 쉬고 싶었지만 은퇴할 경우 보복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워낙에 대숙청으로 수많은 이들을 잔인하게 쓸어버린 그였기에 이러한 불안은 사실 정확한 것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권력을 잡고 있지 않는다면 무슨 보복을 당하게 될 지 몰랐다. 물론 이렇게 일을 하기에는 몸과 마음이 매우 지치고 늙은 상태였기 때문에 옛날처럼 정상적으로 업무를 보기는 힘들어서 말년에는 일도 대충대충하고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다니거나 만찬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스탈린은 말년에 주변 인물들을 떠보기 위해 자주 은퇴를 거론하긴 했다. 하지만 그가 은퇴의 뜻을 비치면 아첨이 예술에 경지에 이른 측근들은 펄쩍 뛰면서 '''스탈린이 없는 소련은 존재할 수가 없다'''면서 그가 없으면 절대로 안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그러나 가끔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인간도 있었다'''. 주치의였던 비노그라도프가 건강을 위해 은퇴를 제안하자 스탈린은 크게 화를 내며 그를 처벌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러면서도 스탈린은 자신의 은퇴를 계속 의제로 삼고 회의를 했다. 스탈린 강철 권력에 의하면 마치 고양이가 쥐를 손안에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과 같았다는 서술을 했다.
한편 스탈린은 미코얀, 몰로토프, 흐루쇼프, 베리야 등의 여러 고위 정치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언제든지 숙청될 수 있음을 계속 경고했다. 특히 베리야는 자신이 전임자들처럼 숙청될 것이란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몰로토프의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는 유태인으로써 반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으며 여러가지 경고를 통해 스탈린은 자신의 주변에서도 공포 정치를 유지했다. 특히 독소전쟁 이후 회복되지 않는 민생경제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자 스탈린은 이를 구실로 군부 내부의 숙청을 감행했고 레닌그라드 사건을 일으켜 전 국가계획위원장 보즈네셴스키 등을 총살했으며 이스라엘이 친미로 돌아서자 시오니즘 음모론 운운하면서 소련 내부 유대인 거물들을 차례로 숙청, 소련반파시즘유대인위원회의 위원장 솔로몬 미호옐스를 자동차로 들이받아 요단강 건너보내고 나머지 유대인 지도자들도 줄줄이 총살시켜버리는 등 스탈린의 공포 정치는 끝을 몰랐다. 나중에는 최측근인 경호 책임자 블라시크와 비서실장 포스크레비셰프마저 숙청당했다.

"지금 처칠네, 트루먼네, 번스네의 칭찬을 들으면 아이처럼 기뻐 어쩔 줄 몰라하고, 거꾸로 이들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은 뒤에는 용기를 잃어버리는 많은 이들이 권위 있는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우리 대열 속에 있는 외국인들에게 무조건 비굴하게 구는 노예근성을 낳기 때문에 위험한 태도입니다. 외국인들에게 굽실거리는 이 노예근성에 맞서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스탈린

말년에는 서방에 너무 나약하게 군다는 이유로 미코얀과 몰로토프를 싫어해서 그들이 서방 스파이라는 망상에 시달렸고 그들을 점점 멀리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코얀과 몰로토프와 친했던 흐루쇼프와 동료들이 미코얀과 몰로토프가 숙청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스탈린이 자신의 최측근들만을 불러 영화를 관람하는 데에 그들을 동참시켜 다시 스탈린의 신임을 얻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오히려 스탈린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특별히 누군가를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주로 말렌코프를 노려보며 "우리가 영화를 관람할 때마다 몰로토프와 미코얀이 오는 이유를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당장 그만둬! 또다시 그런 짓을 했다간, 누구든 용서하지 않겠어!" 라면서 그들에게 화를 냈고, 결국 몰로토프와 미코얀은 모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선 독소전쟁 발발 때 저택에서 자신의 허약한 모습을 본 그들이 자신을 해치려고 했다는 망상을 가지게 되었거나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본 것이 싫어서 그랬던 것이 이유라는 주장도 있다. 하여튼 미코얀과 몰로토프가 싫어졌던 이유는 위에서 베리야가 말했던 대로 스탈린의 나약한 모습을 본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흐루쇼프가 자서전에서 밝혔던 대로 그 이후에 스탈린이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지 않았다면 그들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 외에 스탈린의 말년에 대한 내용은 흐루쇼프가 회상한 스탈린의 말년 글에 잘 나와있다.
말년에 이르러 의심이 극에 달한 스탈린은 자신의 주치의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왜 갑자기 스탈린이 주치의들을 의심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아마도 몽골 인민 공화국의 독재자 허를러깅 처이발상의 죽음이 꽤나 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1952년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는데 그를 무척이나 아꼈던 스탈린은 처이발상의 죽음은 주치의들이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스탈린이 의사들을 의심하기 시작하다가 위에서 말했듯이 주치의였던 비노그라도프가 자신의 하야를 요구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스탈린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고 스탈린은 그들을 숙청하기로 마음먹었다. 흐루쇼프는 그때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어느날, 스탈린은 우리들에게 티마슈크라는 여의사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어주었다. 내용은 즈다노프가 고의적으로 부당한 진료를 받아 사망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 편지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편지 내용이 단 10%라도 진실이라면, 그 전체를 사실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른바 '흰 가운을 입은 암살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다. 크렘린 소속 의사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 스탈린은 당시 국가보안상인 세묜 이그나티예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들겨 패! 두들겨 패! 두들겨 패라고! 그놈들을 가루가 되도록 짓이겨버려! 만약 자백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머리 하나만큼 네놈의 키를 줄여주겠어!"[65]

저딴 식으로 스탈린이 갈궈대니 의사들이 무슨 일을 당했을지는 뻔히 알 만하다. 결국 소련의 의료 엘리트들이 차례로 체포되었고, 이들은 고문을 못 견디고 있지도 않은 음모를 자백했다. 스탈린은 흐루쇼프를 비롯한 정치국 위원들을 불러모아 의사들의 거짓 자백서를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새끼들아. 너희는 눈이 멀었다. 내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너희가 적을 구분할 줄도 몰라서 이 나라는 망하게 될 것이다!"

이 사건은 제2의 대숙청으로 발전할 소지가 있었지만 스탈린의 사망으로 인해 크게 번지지는 못했다. 흔히 "아이러니하게도 이 숙청이 스탈린의 생명을 보다 더 빨리 꺼지게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스탈린의 뇌출혈은 당시 의료 수준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0. 사망



스탈린은 말년에 관저보다 흑해 연안 별장에서 주로 생활했고, 이곳에서 그는 편지를 통해 지시를 내렸다. 이 별장에는 당구장, 영화관이 설치되어 있었고, 인민들은 상상할 수 없는 풍부한 요리와 술, 그리고 담배가 준비되었다. 스탈린은 마음 내키는 사람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지냈다. 물론 그들은 대개 스탈린의 충실한 종이었다. 1953년 2월 28일 저녁, 스탈린은 게오르기 말렌코프, 라브렌티 베리야, 니콜라이 불가닌, 니키타 흐루쇼프를 호출하여 여느때처럼 같이 영화를 보자고 했다. 영화를 본 스탈린은 측근 4인방을 데리고 그의 별장인 블리즈나야로 데려가 연회에 초대했다. 베리야를 포함한 고위 당원들은 콧수염 대마왕의 피바람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연회가 가시방석 같았겠지만 그렇다고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연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몇몇 사람들에게 '너 숙청'을 했기 때문이다. 만찬은 다음날인 3월 1일 새벽 4시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스탈린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모두 심각하게 취한 상태였다. 스탈린은 이날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고 열정적으로 손을 흔들면서 참석자들을 배웅하고 농담을 늘어놓으며 참석자들을 애칭으로 불렀다. 스탈린이 이렇게 기분좋게 그들을 배웅하는 일은 언제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흐루쇼프 등도 기분 좋게 귀가했다.
측근들이 돌아가자 스탈린은 경호원들에게 자신이 부를 때까지 방해하지 말라고 말한 뒤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3월 1일 아침에 경호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매일 아침 10시마다 경호원들을 불러 보고를 받던 스탈린이 아무리 기다려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경호원들은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스탈린의 명령을 거역할 경우 자칫 큰 재앙을 부를 수도 있었기 때문에 경호원들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좌불안석이 되어 초초하게 기다렸다. 그러다가 오후 6시 반에 별장 안에 불이 켜지자 경호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방에서 아무런 명령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경호원들은 누군가는 들어가 봐야 한다고 싸웠지만 아무도 감히 스탈린을 방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밤 10시쯤 모스크바 중앙위원회 사무실에서 스탈린에게 소포가 도착하자, 11시에 이 소포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때 파벨 로즈가쇼프, 혹은 미하일 스타로스틴이 들어가 식당에 불을 켰다가 스탈린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기절할 뻔 했다. 스탈린은 의식은 있었지만 말은 못하는 상태였고 손을 심하게 떨고 소변을 잔뜩 흘린 상태였다. 스탈린은 손을 흔들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서 나머지 경호원들이 몰려와 스탈린을 소파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들은 누구도 스탈린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고, 또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로봇 같은 존재들이였기 때문에 스탈린이 위급한 상황일 때 오히려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거기에 의료진을 모조리 감옥에 가둔 상태라 의사도 곁에 없었다. 결국 스탈린은 자신이 뿌린 행동때문에 자멸해버린 자승자박의 상태가 되어 버렸다.
경호원들은 먼저 국가보안부 장관 세묜 이그나티예프에게 연락했고 이그나티예프는 베리야와 말렌코프를 부르라고 했다. 베리야는 연락이 닿지 않았고 말렌코프와 겨우 연락이 닿을 수 있는데 말렌코프는 베리야, 흐루쇼프, 불가닌을 모두 불러서 다 같이 별장으로 갔다. 말렌코프가 혼자서 스탈린의 별장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경호원들로부터 스탈린이 오줌을 흘리며 쓰러져 있다는 말을 듣고 경악한 측근들은 베리야와 말렌코프를 보내 조심스럽게 스탈린의 상태를 살폈다. 스탈린이 깰까봐 말렌코프는 구두를 벗고 양말바람으로 스탈린에게 다가가 그가 코를 골고 있는 걸 확인했다. 스탈린의 관저에서 나온 베리야는 스탈린은 그저 잘 뿐인데 법석을 떨었다고 경호원들에게 각오하라고 질책을 했다. 경호원들은 몇시간 전에는 사태가 더 위중했다고 변명했지만 측근들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스탈린과 별장에 남은 경호원들은 스탈린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호소했다. 이에 측근들은 마침내 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 사무국을 소집해서 의사들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의사들은 진료했을때 곧 스탈린의 상태가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다. 오른쪽 팔다리는 마비되었고, 피를 토했으며, 체인-스톡스 호흡(Cheyne–Stokes respiration)이라는 불규칙한 호흡[66]을 했다. 스탈린의 사망 원인은 뇌출혈이나 뇌경색일 가능성이 높아보이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스탈린의 부검 결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스탈린의 죽음과 관련된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스탈린이 살아나면 곤란한 베리야를 비롯한 고위 당간부들이 그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기밀문서가 해금되면서 이런 음모론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예를 들어 2011년 소련의 비밀 문서가 공개되었는데 스탈린의 사인은 확실하게 뇌출혈이라고 판명이 났다. 스탈린의 측근들이 스탈린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음모론도 그들의 당시 행동의 맥락을 고려해본다면 설득력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
아무튼 당 지도부는 스탈린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만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은 사악한 배신자로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던 전문의들을 찾아갔다. 의사들은 자신들을 고문하고 심문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공손하게 돌변한 데에 굉장히 놀랐다. 당지도부는 그들에게 체인-스톡스 호흡을 한다는 환자가 어떻게 될 지 질문했고, 의사들은 사망이 가장 가능성 높은 결과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당 지도부원들은 용기를 얻을 수 있었고 당 지도부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포스트 스탈린 시대를 논의하기 시작되었다. 몰로토프는 한때 스탈린의 후계자로 생각되었으나 그는 스탈린의 공격을 받은 상태로 실권을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에 최고 권력을 얻겠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왜냐면 스탈린은 2인자 따위는 키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새로운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결국 적기를 놓친 상태에서 무의미한 치료가 계속되다가 스탈린은 1953년 3월 5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공식 발표된 사인은 '고혈압의 발작에 의한 뇌의 대출혈'. 말년의 스탈린은 이중삼중으로 경비를 세웠고, 항상 자신이 자는 방을 수시로 바꿀 정도로 암살이나 테러에 민감했다. 특히 의심병에 빠져 위급 시에 자신을 돌봐줄 의사들을 숙청하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순간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수많은 인민들과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강철 사나이 스탈린도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11.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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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보니 5개년 계획과 공포정치, 대조국전쟁 등 그들의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스탈린은 그들이 집단적으로 걸어온 길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소비에트 국가를 강화하고, 군사력과 산업 생산력을 높이고, 영토를 확장하고, 정치적 안정을 꾀하며 함께 노력한 동지들이었다. 그들은 스탈린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의 지성과 경험을 존경하기도 했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때조차 그들을 매혹했다. 그가 소파에 축 늘어져 있는 동안, 어떤 초인의 능력으로도 그가 다시 일어나 소련의 공적 생활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스탈린의 지도하에 수백만을 굴라그에 처넣었던 사람들이 의식을 반쯤 잃고 마비된 늙은이를 보면서 벌벌 떨었다. 그가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설사 한순간일지라도, 그가 벌떡 일어나 모두를 파멸시키라고 명령할 가능성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그들은 죽어가는 스탈린에게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지도자가 숨을 거두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몇몇 사람이 서로의 품에 쓰러졌다.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는 슬픔에 정신을 잃고 흐루쇼프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았다. 그들은 시종들도 들어와 주검을 보게 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스탈린 사후의 정치를 논의했던 간부회 지도자들도 가슴이 쿵 하고 내려 앉았다. 그들의 인생 뿐만 아니라, 이 나라 역사에서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 스탈린 강철 권력

그의 죽음이 발표되자 소련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오랜 숭배 의식으로 이미 신격화가 철저히 진행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죽자 수많은 인민이 대성통곡을 했고 소련 인민들은 공황상태에 빠질 정도였다. 몇년간 그가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혀 들은 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소련 각지에서 그를 숭배하던 국민들이 몰려들었다.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들은 모두 만원이었고, 경찰의 통제가 필요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스탈린은 그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레닌과 비슷한 방식으로 장례를 치를 계획이었다. 이집트파라오처럼 방부 처리가 된 시신은 유리관 속에 넣어져 레닌 영묘에 함께 안장될 예정이었다. 독재자가 현직에서 죽으면 대체로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실제로 김일성, 마오쩌둥의 장례식을 보면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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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시신은 방부처리되어 붉은 광장에 있는 레닌 영묘에 합장되었다. 레닌과 같이 스탈린도 잠자는 듯한 모습으로 방문객이 관람할 수 있었고 당시 영묘 입구에도 레닌과 스탈린의 이름이 동시에 쓰여있었다. 그러다가 후에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1961년에 다시 화장되어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67] 히더 프링글의 저서 <미라>에 따르면 엠바밍을 주도한 이는 세르게이 데보프(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Дебов, 1919~1995)[68]였는데, 그는 곰보 자국까지 없애가며 방부처리를 했다고 한다.
스탈린의 관 옆에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고 외치는 휘장이 쳐졌다. 스탈린 동무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특기를 끝까지 발휘했다. 3월 8일 그의 시신을 보려는 인파가 너무 많이 몰려서 수백명이 깔려 죽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 참사는 스탈린의 장례식에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소련 체제에 타격을 줄 것을 우려한 소련 지도부가 은폐하기로 결정하면서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 로버트 서비스는 스탈린이 죽어서까지 죽음을 부르는 능력을 잃지 않았다고 촌평했고 올레크 흘레브뉴크는 이 참사가 외국의 사주로 일어난 것이라는 음모론이 나타난 것을 지적하며 스탈린이 인민들을 잘 교육시켜놨다고 촌평했다.
스탈린의 죽음에 대해서 많은 인민들이 그의 죽음을 정말로 슬퍼했지만 노골적인 증오와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문에 국가보안부는 스탈린에 대해 불경한 발언을 한 인민들을 체포하여 처벌했다.
여담으로 바로 같은 날에 대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사망. 그러나 그의 죽음은 스탈린의 죽음에 묻혔는데 더욱 더 안습한 사실은 스탈린의 죽음에 조화를 사가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조화를 사가서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장례식에는 쓸 수 있는 조화가 단 한개도 없어서 조화 없이 장례식을 치뤄야 했다는 심히 안습한 이야기가 있다.
1953년 3월 9일, 스탈린의 장례식이 끝났다. 이제 레닌-스탈린 영묘로 이름을 바꾼 레닌 영묘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영원히 잠들었다.
자유 진영의 거두 미국, 영국을 포함해 전세계에서 고위급의 인사로 구성된 조문단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세계의 언론들은 스탈린의 죽음을 알리며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도,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사악한 독재자로도 평가했지만, 그가 농업국가 러시아를 원자력 소련으로 현대화했으며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의 지도자이자, 무엇보다도 아돌프 히틀러에 맞서 싸운 최고사령관 중 하나였다는 것에 경의를 표했다.


[1] 1938년 소련에서 출판 된 스탈린 전기는 그의 생애를 1879년 12월 21일로 표기해놓고 있다.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에 따르면 조지아에 가서 문서를 확인해본 결과 그가 태어난 해는 1878년 12월 18일이 맞다고 한다.[2] 일설에 따르면 어머니 또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설이고 실제론 스탈린과 어머니 겔라제는 모자관계가 각별할 정도로 좋았다.[3] 베사리온 이바네스 제 주가슈빌리(ბესარიონ ივანე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Besarion Ivanes dze Jughashvili). 생년월일(부) 1850 (월일 불명)~1909.08.25, 아버지는 생년밖에 기록이 없다.[4] 에카테리네 "케케" 기오르기스 아술리 겔라제(ეკატერინე „კეკე“ გიორგის ასული გელაძე, Ekaterine "Keke" Giorgis asuli Geladze). 생년월일(모) 1858.02.05~1937.06.04[5] 하도 학대당했던 나머지 스탈린은 언젠가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벼른 적이 있었고, 자신을 때린 아버지에게 단검을 던졌다. 결국 스탈린은 가출해야 했고 아버지의 화가 풀릴 때까지 이웃집에서 머물렀다.[6] '스탈린 강철권력'의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그 당시 스탈린이 겪은 무차별 폭력이 스탈린의 성격과 인간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는 옆동네 총통어릴 적과 유사하다. [7] 스탈린의 친부는 다른 사람이다 카더라~ 류의 소문.[8] 실제 스탈린도 사석에서 사실 자신의 친 아버지는 어린 자신과 어머니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마을 성직자가 아닐까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물론 이는 붕어빵같은 부자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시피 농담일 가능성이 높다.[9] 이 때문에 사망했을 때의 사인이 간경화였다. 일설에서는 엄청나게 취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다가 화난 사람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해 죽었다고도 한다.[10] 조지아가 속한 캅카스 지역에서 벨트를 판다는 것은 인생 막장을 의미한다.[11] 베사리온은 집을 나가 떠돌다가 구두 공장에 취직했는데 아들도 같이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할 생각이었다.[12] 그래서 스탈린은 어머니와의 관계가 매우 좋았다. 특히 나중에 서기장이 된 스탈린은 어머니를 고급 아파트에 거주하게 하고 경호원들까지 붙여줄정도로 특별대우를 해주었다.[성적표]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에서 발췌함.[13] 참고로 이 학교는 억압적인 학교로 유명했다. 학생들의 학교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심했는지 '''1884년엔 학생 한 명이 교장을 폭행해 퇴학당했고, 1886년엔 학생이 교장을 찔러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14] 조지아에서 문맹퇴치운동을 이끈 민족주의 성향의 운동가로 아동문학가로도 유명하다. 소련 시절에도 일부 저작물이 재간행 되기도 하였으며 1940년 조지아 최고 예술인과 유명인들이 묻히는 마마다비드 교회의 묘지로 이장되었다.[15] 멘셰비키는 이를 이유로 볼셰비키를 범죄 집단이라 비난했고, 후일 레닌은 이 일을 중단시켰다.[16] 당시 조지아에서는 부르주아 털어먹는 건 도둑질이 아닌 의적이라 칭송했기에 스탈린도 자신의 행위은 도둑이 이니라 의적이라 생각하고 임했다는 설이 있다.[17] 죄수들을 선동해 싸움을 붇인다거나 주변 여인과 눈이 맞아 연애를 했다는 등 링크[18] 집권 후 이때 편의를 봐준 간수와 마차에 태워준 마부에게 은혜를 갚았다고 한다.[19] conference. 대회(congress)와는 다르다.[20] 대표자회 장소가 페트로그라드에서 탐페레로 변경된 것을 전달받지 못해서 페트로그라드로 갔다가, 탐페레까지 갈 기차삯이 없어서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에게 여비와 식대를 빈대붙었다.[21] 후일 리트비노프는 스탈린이 자길 숙청하지 않은건 그때 자기가 구해줘서 그런거라는 내용의 농담을 종종 했다.[22] 이때 어떤 동지가 이 돈을 삥땅쳤는데, 후일 스탈린에 의해 숙청된다.[23] 한 번은 여장을 해서 탈출한 적도 있었다.[러시아•의회] [24] 그의 동생인 아르툠 미코얀은 미하일 구레비치와 함께 미그 사를 창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본인도 1930년대 무역장관으로 활약하며 이때 도넛이나 팝콘 등의 서방 음식을 소련에 소개, 도입하기도 했다.[25] 1886. 10. 24. ~ 1937. 2. 18, 조지아 출신의 혁명가로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 몸담았으며 스탈린의 최측근이었다. 그리고 대숙청 당시 숙청 위기에 몰리자 자살했다. 덕분에 가족은 숙청되지 않았고 크렘린 벽 묘지에 묻혔다. 다만 자살한 게 맞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26] 이에 반해 레닌은 물론 트로츠키나 지노비예프는 거의 매장마다 언급되는데, 스탈린은 이 책에 자신의 이름이 많이 나오지 않고 트로츠키의 이름이 더 많이 나왔다는 이유로 '''레닌이 만국의 노동자들로 하여금 읽으라고 서문을 써 준''' 이 책을 '''금서'''로 만들어서 소련 인민의 접근을 차단한다![27] 사실 레닌조차 스탈린의 이름을 잊어먹고 그의 별명인 '코바'만 기억하고 있어서 "코바의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 나는 사람?" 하고 주변에 물어볼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28] 트로츠키 회고록에서는 이 패배를 권한을 넘어선 스탈린의 지휘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으나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트로츠키도 패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현재의 유력한 설. 이 패배는 스탈린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이 오늘날의 연구 결과이다. 폴란드 주변의 혁명운동을 퍼뜨리고 폴란드 내의 소수민족에 대한 혁명고취를 위해 잘 나가던 진격을 무리하게 옆으로 돌리게 한 것이 결정적 패인이라는 분석이 있는데, 이 명령은 스탈린이 아닌 레닌이 거의 억지로 밀어붙여서 만든 당 차원의 권고였고 민족문제에 정통한 스탈린은 여기에 반대했다가 레닌이 폴란드 침공을 강하게 주장하자 찬성으로 돌아섰다. 트로츠키는 강하게 반대한 축이었다.[29] 폴란드와의 전쟁을 스탈린의 책임으로 100% 물어버리고 당 차원의 추방을 논한 사람이 바로 트로츠키였다. 그는 이전에도 스탈린을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30] 스탈린은 볼셰비키 정권 내에서 민족문제 위원이었으나 사실 서기장직(엄밀히 말하면 간사장)도 업무량만 많고 권한은 별로 없는 직위였다. 다만 스탈린에 대한 신임으로 레닌이 임명해 준 것이다.[31] 실제로 러시아 혁명 당시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혁명을 본보기로 행동했는데, 군인 출신 나폴레옹이 제정을 세워서 혁명 정신에 역행한 것을 보면서 ''''아 슈바 우리도 군인들 가만 내비두면 좆되겠구나.'''' 라고 생각하여 태생부터 군인에게 별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소련에서 까인 군사관련 인물이 한 둘이 아닌데, 투하쳅스키도 그 중 한명이었고, 스탈린에게 처형당했다.[32] 이 표현은 당시 러시아 혁명가들이 사용하던 일종의 관용구라서 관료적인 작업이라고 오독하기 쉬운데, 사실은 오히려 절차적 정당성을 중시하는 관료주의와는 반대 개념에 가깝고(관료주의는 오히려 '''서기장''' 스탈린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문제나 갈등을 그 배경과 상황에 맞춰 순리에 따라 차근차근 해결하지 않고 문제 자체만 관리해서 해결하려 드는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트로츠키의 특징에 비춰서 설명한다면, 트로츠키가 볼셰비키 당 내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라는 건 레닌도 알고 트로츠키도 아는 사실이었으므로 당연히 트로츠키의 주장이 대체적으로 옳고 다른 주장은 틀린 것일 수 밖에 없으니까 굳이 토론이니 공감이니 합의니 하는 데 시간 낭비할 것 없이 그냥 아가리 파이트로 상대를 밟아버리고 자기 주장대로 하게끔 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33] 소수민족의 입장을 소련의 이익보다 앞에 놓는 것. 쉽게 말해 '''소비에트 밑으로 안 들어오는 놈들은 맞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깡패스럽고 폭압적인 논리로, 당시 소수민족위원회 의장이었던 스탈린이 남을 비난할 때 남용하던 단어다. 심지어 조지아는 스탈린의 모국이었는데도.[34] 레닌은 좀 더 그들을 달래 가며 타협을 해가야 한다고 느낀 것이고, 그런 문제에서도 폭압적이며 잔인한 모습을 보이는 스탈린은 지도자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35] 조금 더 나중 시점에 쓴 서한에서는 스탈린은 소련의 소수민족 문제에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함께 계속 종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이 평가를 보면 대강 레닌이 스탈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답이 나온다.[36] 후일의 이미지에선 전혀 틀린 말이지만, 이 당시의 스탈린은 그냥 평판은 좋은데 말 없고 존재감도 그닥인 사람이었다.[37] 정확히 말하면,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어떤 사상을 갖고 있다기 보다는 그냥 존나 나쁜 놈으로 낙인찍었다.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딱지는 소련이나 동구권 내에서는 그냥 '무지무지 나빠서 타도해야 하는데 파시스트나 자본주의자라고는 부르지 못 하는 놈'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트로츠키주의가 극좌 모험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서구권의 트로츠키주의 정당이 극좌노선을 취했기 때문에 생긴 인식일 뿐이다. 이 점은 흐루쇼프와 마오쩌둥이 서로를 '극우 수정주의자'와 '극좌 모험주의자'라고 공격하면서 '트로츠키스트'라고 매도한 점이나, 노동조합이 국가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 좌익 반대파를 탄압한 트로츠키의 노선을 스탈린이 '우익적이고 독재적이다'라고 비판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38] 블라디미르 레닌의 아내. 1936년 8월의 모스크바 재판을 방청한 후 남긴 말. 참고로 크룹스카야는 스탈린과는 죽을 때까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크룹스카야가 1939년 사망했을 당시 스탈린이 그녀를 독살한 게 아니냐는 음모론도 나돌았다.[39] '''자신을 비난하는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내뱉은 말.''' 식사 도중 스탈린이 보로실로프에게 겨울전쟁의 졸전에 대해 비판하자 이렇게 항의하며 그릇들을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그 강철의 스탈린도 여기에 여간 찔렸던 게 아니었는지 이런 불경한 발언을 한 보로실로프를 그냥 해임하는 선에서 끝냈다. 그리고 천생 정치인인 스탈린은 군인 출신 보로실로프의 도움이 없으면 붉은 군대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스탈린이 러시아 내전 당시 정치적 위기에 있을 때 보로실로프가 열심히 스탈린을 보살펴주기도 해서 그야말로 베스트 프렌드였다. 이런 보로실로프인 만큼 저렇게 대놓고 스탈린 면전에서 스탈린을 비난할 수도 있었다.[40] 이에 대해 그의 딸은 "아버지는 어디에서든 적을 찾아내려 했으며 고독감과 절망감으로 가득한 탄압 매니아였다." 라고 술회하고 있다.[41] 얼마나 무시했냐면, 영불 지도자급에서도 뮌헨 협정 이후 독일에 대한 불신과 1938-9년 들어 폴란드 위기가 번질 때 영불대사가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과 대면해서 협상을 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스탈린은 "만일 독일의 침공에 대비해 독일을 공격한다면 소련은 200개 사단을 동원할 용의가 있다. 영불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라고 물었다. 이에 영국 대사는 영국 본토에 육군사단 3-5개를 원정군으로 동원할 수 있다는 드립을 치고 프랑스 대사는 전쟁 의지에 대해 머뭇거림을 보였다. 이에 스탈린은 "이런 도둑놈들! 우리는 200개 사단이나 동원하는데 즈그놈들은 손도 안대고 코풀려고 하네?" 라는 반응을 보이며, 서방이 이이제이를 노리는 것 아니냐라는 의심을 한층 더 강화했다. 다만, 프랑스는 몰라도 영국에 대해 실드를 칠 여지는 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대륙에서 전쟁이 터질거라 예상되면 육군 사단보다는 해공군 투자 혹은 전쟁에 쓸 재원 마련에 집중했기 때문이다.[42] 사실 핀란드도 통째로 꿀꺽하려고 했지만 겨울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는 바람에 카렐리야 지방만 점령하는 선에서 강화를 맺었다. 손바닥만한 나라에게 얻어터진 놀라운 업적으로 스탈린은 1939년 올해의 인물에 선정.[43] 당시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영국조차도 한번에 독일에 점령 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44]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p.350을 참조[45] 베르너 폰 슐렌부르크 백작(1875년 11월 20일~1944년 11월 10일) 나치 독일의 마지막 소련 대사. 독일 제국 시절부터 활약한 외교관.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한다. 참고로 암살자 그룹의 내각 계획에 외무장관으로 포함되어 있었다.[46] 스탈린의 이 멘탈붕괴는 인간 스탈린의 나약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스탈린이 어떤 생각으로 현 정세에 임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게 비춰질 수 있다.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임을 일단 언급하지만, 일단 스탈린은 그 전부터 히틀러에 대해서는 대단한 능력을 지닌 효웅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자신처럼 정세에 대한 계산이 가능하며 상황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정치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스탈린은 1선 장군들이 뻔히 보이는 전쟁의 전조를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계산이 서는 날카로운 정치가인 히틀러에 대한 판단을 중시했기에 무시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이 엄청난 위력으로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을 패배하며 히틀러는 완벽한 계산하에 전쟁을 일으킨 대단한 효웅이고, 독일의 전력은 대단하다는 인식을 강화했다. 이러한 까닭에 스탈린은 양면전쟁의 한계와 러시아 기후의 무서움을 히틀러가 계산하고 있을 것이라 여겨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역으로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켜 버리자, 히틀러에 대한 고평가는 역으로 '러시아를 이길 만해서 전쟁을 일으킨 게 아닐까? 우리의 정보가 잘못됐었나? 독일이 신기술을 개발했나? 하여간 우린 끝이야!' 와 같은 사고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런 경우 충격에 빠져 아무 것도 못하는 지도자도 역사 속에 종종 있으나, 강철의 대원수는 어쨌건 일단은 싸울 수밖에 없음을 인지하고 금세 충격에서 일어선 편이다.[47] 이때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는 '''만약에 그래도 스탈린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스탈린이 아니라 몰로토프에게 전쟁 지휘권을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8] 물론 정말로 충격을 먹은 것도 영향이 상당히 있겠지만.[49] 그러나 미코얀과 몰로토프 모두 정치적 굴곡은 있었을지언정 그냥 제 수명에 죽었다. 미코얀은 1978년에 사망, 몰로토프는 1986년에 사망. 오히려 스탈린 시절의 악행으로 모두한테 원한을 산 베리야가 1953년 총살형당하면서 제 명을 못 살았다.[50] 스탈린과 히틀러의 군에 대한 자세와 태도를 비교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치타델 작전 당시 히틀러는 군사작전과 행정에 온갖 간섭을 하여 혼란과 비효율성을 이끌어 내고 막판에는 서부 연합의 이탈리아 침공이 이뤄지자, 이탈리아의 중요성을 장성들에게 역설하며 그나마 조금씩 성과를 내던 작전을 취소 시켜 버렸다.[51] 반면 소련은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군사회의에서 한개의 돌파구에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스탈린과, 적어도 두개 이상의 돌파구를 열어 독일군에게 혼란과 피해를 강요해야 한다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그에게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게'라며 두번이나 돌려 세웠으나 계속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자, 스탈린은 그에게 다가가 어께위에 손을 얹었고 그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스탈린이 그의 계급장을 떼어 낼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네의 타당한 판단이 자네의 자신감을 받쳐주는 것이겠지.'''라며 로코소프스키의 제안을 따랐다. 그리고 작전은 대성공.[52] 스탈린 강철권력 p.714~15를 참조[53] 물론 주코프는 러시아 내전 당시 기병 장교였으니 이런 질문은 물을 가치조차 없었다.[54] 이전 문서에는 옆에 있는 동료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라고 되어 있었지만 아니다. 로코솝스키는 저때 흑마를 타고 반대편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뒤에 두 사람이 나란히 달리기도 했지만 로코솝스키는 흑마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위 사진에서 뒤를 따르는 인물은 로코솝스키일 수 없다.[55] 설사 관심을 두려 해도 독소전에서 3천만 가까이 사망해서 직접 개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반면 미국은 본토에 피해가 없고 베를린에 대규모 수송을 시전할 정도로 물자가 넘쳤다.[56] 발언 당시에는 야당 대표로 말한 것이지만, 발언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윈스턴 처칠인 만큼 흘려 듣기 어렵다. 물론 영국 정부는 전 동맹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그(윈스턴 처칠)은 일개 민간인이며, 그의 발언은 영국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란 개드립을 쳤지만, 그 말을 진지하게 믿는 멍청이는 아무도 없었다.[57] 즉 미국은 일본이 미국을 지지하도록 강제할 수 있지만, 소련은 서유럽 국가들이 자신을 지지하도록 강제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58] 이는 이후 냉전에서도 드러난다. 소련 해군이 미 해군의 수준을 넘은 적은 소련의 성립부터 멸망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59] 이런 식의 이른바 충성 경쟁은 스탈린 정권에서 흔한 일이었다. 스탈린 스스로가 사치나 허영과는 거리가 먼 것도 한 몫했겠지만, 이렇게 자신을 의도적으로 낮추어서, 상대방에게 충성심을 드러내 보일 것을 강요하는 것은 정권 당시에는 일종의 의례였다. 의도 자체는 러시아나, 2015년 시진핑 주도의 열병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스탈린은 이를 일상화(...)했다. 스탈린이 가진 인간에 대한 편집증적 불신이 드러나는 부분이다.[60] 사람 생각은 다 거기서 거기인지, 대한민국에서도 이승만의 호인 '우남'을 따서 서울특별시를 우남특별시로 개명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는지 이 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다만 이승만 추종자들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광화문 광장을 멋대로 이승만 광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북한의 경우는 한 술 더 떠서 김일성 사후 김일성의 생일연도(1912년)를 따라 주체연도로 쓴다. 왕조국가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우상화는 여기가 한 수 위.[61] 스탈리노다르로 개명하자고 한 것은 다름아닌 니콜라이 예조프로 자신의 숙청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것을 감지하고 살아보려고 발악한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은 모스크바의 개명에 대해 좋아하긴커녕 오히려 너무 노골적이라고 느꼈는지 불쾌하단 반응을 보였고 예조프는 1940년에 처형된다.[62] 비슷하게 히틀러도 만슈타인에게 불쾌감을 보인 적 있다. 만슈타인이 히틀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아는데 히틀러 만세를 외치자 너무 속보이는 아부라고 느꼈는지 오히려 핀잔을 준 적 있다. 히틀러는 자기 앞에서 자신감 있게 자기의견을 내는 부류의 인물들을 좋아했다.[63] 대부분은 국비로 결혼하는 부부에 증정한 것이다.[64] 스탈린과 마오의 저서들이 독재자가 쓴 불쏘시개쯤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들의 저서들은 히틀러의 대표작과 달리 '스탈린과 마오쩌둥이라는 중요 역사인물들의 1차 사료라는 점을 배제하고' 저작 자체로만 평가해도 학술적인 가치를 인정받는 저서들이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자국민들에게 오직 자신들의 사상만이 옳은 것이고 나머지는 다 틀린 것이라고 자신의 이념을 절대화하면서 강요했고 그걸 거부하면 코렁탕을 먹인 것은 스탈린과 마오쩌둥, 히틀러가 모두 마찬가지였으나 사상의 완성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꽤나 있었던 것.[65]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이 발언을 20차 당대회에서 공개하자 대회장 전체가 분노로 술렁였다.[66] 호흡이 점차 깊어지다가(동시에 더 빨라지는 경우도 있다) 다시 천천히 호흡이 얕아지고(호흡이 점차 빨라지던 경우엔 이때 속도 역시 감소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무호흡 상태가 잠시간 지속되고, 그 이후 다시 한 사이클이 반복된다. 간격은 약 30초에서 2분.[67] [image] 이마저도 초기에는 지금보다 훨씬 초라한 모습이었으나, 1970년대 브레즈네프 시대에 들어서면서 스탈린에 대한 재평가가 어느 정도 이루어 지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68] 그는 1969년에 사망한 호치민 베트남 대통령의 시신도 방부처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