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역사

 




1. 개요
2. 본문
2.1. 잉글랜드 클럽 최초의 유럽 대항전 참가
2.2. 감독 혁명
2.3. 위닝 멘탈리티
3. 맨유의 기원
4. 세 남자의 이야기
4.1. 어니스트 망날
4.4. 퍼거슨 시대 그 이후
5. 역대 시즌
5.1. 1992-93 시즌
5.2. 1993-94 시즌
5.3. 1994-95 시즌
5.4. 1995-96 시즌
5.5. 1996-97 시즌
5.6. 1997-98 시즌
5.7. 1998-99 시즌
5.7.1. 세부 내용
5.7.2. 트레블의 주역들
5.8. 1999-00 시즌
5.9. 2000-01 시즌
5.10. 2001-02 시즌
5.11. 2002-03 시즌
5.12. 2003-04 시즌
5.13. 2004-05 시즌
5.14. 2005-06 시즌
5.15. 개별 문서가 존재하는 시즌
6. 관련 문서


1. 개요


잉글랜드 축구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

2. 본문


잉글랜드 축구 1부 리그가 1992년 '프리미어 리그(Premier League)'란 이름으로 새롭게 탄생한 이후 새 시대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클럽은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프리미어 리그 개막과 더불어 맨유는 곧바로 1992-93 시즌 우승을 차지했고 2012-13 시즌까지 단 한 번도 3위 아래로 내려간 적 없이, '''21년간 총 13번'''의 우승컵을 들어올려 EPL에서 가장 성공적인 구단이 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878년 중산층 노동자들 중 Lancashire Yorkshire의 뉴턴 히스 지사 노동자들이 쉬는 시간에 모여 만든 것이 그 유래며, 뉴턴 히스 LYR F.C.(Newton Heath LYR F.C.)란 이름으로 창설되었다. 1902년 4월 26일부터 새롭게 지금의 이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가지게 되었다.
1906년에 1부 리그로 승격하고, 1908년 첫 리그 우승, 다음 해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 이후 1911년에 두 번째 리그 우승을 했다. 이후 1950년대 리그 우승을 3차례 차지하면서 풋볼리그 강자로 떠올랐다. 이 시절 맷 버스비 감독 체제로 UEFA 챔피언스 리그 전신인 유로피언 컵에서도 맹활약하여 리그를 넘어 유럽 최정상이 될 뻔했으나, 비슷한 시기에 클럽은 잊을 수 없는 시련을 겪었다. 1958년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유로피언 컵 경기를 마치고 귀국하던 도중 맨체스터 선수단을 태운 비행기가 중간 경유지인 뮌헨에서 추락하는 대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축구사의 가장 치명적인 사고 중 하나로 기록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유나이티드는 그들의 세계 정상 등극을 위해 약 10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 최악의 사고에서 한 명의 젊은 선수가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그는 66년 월드컵의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보비 찰튼이었다. 찰튼은 그의 별명이 "그라운드의 노동자"였을 만큼 지칠줄 모르는 스피드와 가공할 킥력으로써 세계의 미드필드를 호령했다. 그리고 드디어 맨체스터에는 축구사를 통틀어 단 몇 명의 진짜 천재들 중 한 명이 합류한다. 그는 북아일랜드의 전설 조지 베스트 였다.
마침내 67/68 시즌 당대 최고의 보비 찰튼조지 베스트를 앞세운 유나이티드는 레알 마드리드와 벤피카 리스본을 연파하고 그들의 오랜 염원인 유로피언 컵을 차지한다. 그것은 잉글랜드 클럽으로서는 최초의 기록이었다.
하지만 그가 은퇴한 후에 잠시 주춤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86년 감독에 부임한 알렉스 퍼거슨경에 의해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 나가게 되었다. 퍼거슨 경이 감독을 맡으면서 맨유는 1992년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개편 이후 리그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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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L 출범 후, 퍼거슨의 맨유는 3위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프리미어 리그 개막과 더불어 맨유는 2012-2013 시즌까지 한번도 3위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었고, 19번 시즌 중 12번을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가장 성공적인 행보를 보인 EPL 구단이 되었다. 2012-2013 시즌에는 잉글랜드 구단 최초로 20회 우승에 도달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8-1999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을 결승전에서 누르고 챔피언스 리그 2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그 해 맨유는 UEFA 챔피언스 리그, 프리미어 리그, FA컵 3개의 주요 타이틀을 석권하여 잉글랜드 구단 중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또한 2007-2008 시즌 프리미어 리그 우승과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첼시 FC를 승부차기 끝에 누르고 통산 3번째 우승으로 더블을 기록하면서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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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유 그 자체였던 퍼거슨 감독의 은퇴
'''그러나 퍼거슨 감독이 2012-2013 시즌 리그 통산 20번째 우승을 달성한 후 은퇴'''하고 데이비드 모예스루이 판 할을 거쳐 2016년 5월 27일 주제 무리뉴가 후임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2019년 3월 28일 올레 군나르 솔샤르주제 무리뉴의 후임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2.1. 잉글랜드 클럽 최초의 유럽 대항전 참가


1955년 유로피언컵(UEFA 챔피언스 리그 전신)이 만들어졌고, 당시 규칙은 각 리그 우승팀들만 출전할 수 있었다. 이듬해 1955-56년에 버스비 경의 맨유가 우승을 차지했고, 맨유는 유로피언컵 출전 자격을 얻었으나, FA측에서는 이걸 거절했다. 이유는 '그런 대회(유럽 대회)에 나가지 말고 차라리 자국 리그에 집중해라'.
FA측에서는 다른 대회(유럽 대회)보다 리그에 집중하길 원했고[1] , 버스비경은 이에 항의했지만, FA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화가 난 버스비 경은 당시 유러피언컵 창설자들을 찾아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고, FA에는 맨유의 유로피언컵 참가를 거절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 냈다. 결국 1956-57 시즌 맨유는 유러피언컵에 참가하게 되었고, 맨유 이후의 리그 우승팀들 역시 유러피언컵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맨유의 유럽대항전 성적은 챔피언스리그 3회와 컵위너스컵 1회, 유로파리그 1회로 총 5회 우승했고, 이는 챔피언스리그 6회와 유로파리그 3회로 총 9회 우승한 리버풀에 이어 잉글랜드 클럽 내 2위에 해당한다.
게다가 UEFA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챔피언스리그 올타임 랭킹(통산 승점을 기준으로 삼는다.)에서는 그 리버풀에도 앞서며 레알, 뮌헨, 바르샤에 이어 4위를 차지하고 있고 잉글랜드 클럽 중에서는 독보적인 1위이다. 참고로 리버풀은 이 순위에서 8위로 EPL 클럽들 중 2위이며 챔스 우승이 없는 아스날이 의외로 10위에 랭크되어 있다.

2.2. 감독 혁명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감독이다. 선수가 감독보다 중요한 존재가 된 순간 클럽은 죽어버린다. 1968년 유로피언컵에서 첫 우승을 했을 때는 맷 버스비 경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 알렉스 퍼거슨

저는 모든 경기장 스텝, 연습생, 어린이들, 그리고 저를 포함한 모든 코칭 스텝, '''심지어 구단주까지도 아침 6시에 불러내 경기장 눈을 치웠습니다.''' - 알렉스 퍼거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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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유의 최고경영자 데이비드 길 머리를 쓰담쓰담했던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문화는 감독에게 모든 전권을 넘겨주는 것이다. 유나이티드의 찬란한 영광을 가져온 세 명의 감독. 그 아래에서 감독 전권 위임은 구단주, 사장, 스탭, 및 팬들까지도 이를 거의 전통처럼 받아들이게 되어버렸다. 세계 최초 유스 시스템의 태동도 감독 전권 위임과 장기 감독이라는 유나이티드의 문화에서 나올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감독의 역할은 지금보다 훨씬 제한적이었다. 맷 버스비 경이 막 감독 생활을 시작하려던 1940년대,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새로운 감독 세대를 열었다. 사실상 1870년대 본격적인 축구가 시작되고 나서 1940년대까지는 감독은 허수아비같은 존재였다. 선수 선발에 관한 권리는 일명 '비서관' (현재의 수석코치 정도)에게, 훈련 권한은 코치들, 선수 영입 권한은 보드진의 역할이었기 때문. 1940년대 맨유가 막 감독을 시작하려던 맷 버스비 경에게 감독 역할을 제의했을 때, 버스비는 맨유 보드진에게 선수 선발, 훈련, 영입 등 보드진과 코치진의 권한을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 당시에는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맨유는 이 제안을 승낙했고, 버스비는 선수 선발부터 훈련, 전술, 영입 등 모든 부분을 자신이 관리할 수 있게 되면서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다. 말 그대로 ‘제국’의 구축이었다. 이후 맨유의 유소년 시스템을 정비해 맨유 아카데미가 탄생했고, 스카우트 시스템을 정비해 전 세계로 스카우트를 보내게 되었다. 버스비의 비전과 영향력은 이후 맨유의 ''''철학''''으로 남아있게 된다. 보통 축구계에는 여러가지 혁명이 있는데, 버스비의 역할 역시 혁명 중 하나로 통한다. 버스비 이후 팀들은 버스비의 맨유처럼 감독에게 권한을 점점 주기 시작했고, 그 결과 현대 축구와 같은 감독 권리가 탄생하게 되었다.

2.3. 위닝 멘탈리티


'''버스비와 퍼거슨의 유산, 그러나 점차 희미해져가는 전통'''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은퇴하면서, 후임 감독을 모색하는 와중에 맨유의 상징에 대한 재논의가 이뤄졌다. 이전까지 '''맨유가 곧 퍼거슨'''이었기 때문에, 후임자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그 기준으로 퍼거슨이 가진 장점들 1) 장기적으로 팀을 이끌 수 있는 검증된 감독 2) 감독전권위임의 클럽 3) 유스 정책 4) 리빌딩 5) 전술의 유연성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EPL 장기감독 3위였던 데이비드 모예스[2], 아약스 유스로 유명했던 루이 판 할[3]. 두 명의 감독을 겪고 난 후, 지금 맨유에게 그 어떤 것 보다 필요한 전통은 퍼거슨의 27년의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그가 들어올린 수많은 우승 트로피들이라는 것이다. 뮌헨 비행기 참사, 캄프 누의 기적, 수많은 우승들이 이어온 맨유의 전통, 바로 '''위닝 멘탈리티(Winning Mentality)'''이다.

경기가 끝난 후, 우리 아스날 애들이랑 맨유애들이랑 다같이 저녁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맷 버스비가 이번에는 맨체스터로 빨리 가야될 것 같다고 해서 아쉽게도 이번에는 같이 뒷풀이를 못했어. 그 이유가 바로, 맨유가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치루어야했기 때문이지. 맨유애들이랑 노는 건 매번 즐거운 일이었어. 상상이가? 걔네들이랑 우리랑 같이 모여서 술먹고 담배도 같이 피고 놀고 그랬을 정도니깐... 그리고 모든 이들이 알듯이, 이 경기는 잉글랜드 축구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경기가 되어버렸지. 또한 이날 일어났던, 아니 일어나지 못했던 일까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게 되었어...

던컨 에드워즈가 살아있었다면 더 위대한 업적을 계속해서 쌓아나갈 친구였어. 던컨은 그날 경기에서 클랩튼에게 매우 터프하고 거칠게 대항했지. 던컨이 드리블할 때 클랩튼은 태클을 할수도 있었어. 클래튼이 그러더라 '내가 차라리 그때 던킨의 발을 걸었다면, 던컨은 부상으로 비행기에 타지도 않았을테고 아직 살아있지 않았을까? 허나 나는 그때 던컨에서 태클을 하지 않았어. 왜냐고? 그는 잉글랜드 축구계를 위해 매우 특별한 선수였거든. 감히 할 수가 없었던 거야. 던컨에게 태클 하는 것은 거의 죄를 짓는 기분이였다고. 그가 잉글랜드에서 어떤 존재인지, 또 나이가 얼마인지 생각해본다면 말이야. 그러나 던컨은 딱히 그런 보호도 필요없던 선수였어. 17살 나이에 떡갈나무 줄기같은 무대포 다리로 뛰는 남자였다고. 난 잘알아.' 우린 늘 그 경기를 추억하고 있다고. 우리에게 늘 웃어주고 손까지 흔들어 주었던 던킨 에드워즈를 위해 언제나 묵념해줄거야. 참 가슴이 찡한 이야기지. 솔까 이 경기는 우리가 졌는데도 말이야! - 브루스 스미더스 (아스날 히스토리 中) -

(버스비 아이들이 영국에서 가진 마지막 경기를 추억하며) 내가 열살 때, 나와 아버지와 매주 같은 곳에서 맨유와 아스날의 경기를 관람했다. 버스비의 아이들이 뛰었던 맨유는 완벽한 팀이었고, 그들은 멋진 게임을 했다.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슬퍼했다. 그들 만큼 잘하는 팀이 없을 때였다. 우리는 학교에서 매일 비행기 참사와 관련된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영국 전체가 슬픔에 빠진 시기였다. 그때는 텔레비전이 보편적이지 않을 시기였기 때문에 모두 라디오를 들으며 슬퍼했다. 나는 선수들과 관계자들이 회복하는 것을 기다렸다.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였던 프랭크 스위프트도 그때 사망했다. 그 사건은 크나큰 비극이었다. 너무 많은 젊고 위대한 축구 선수들을 잃었다. 아주 슬픈 일이다. - 해리 레드냅 감독-

1958년 2월 6일 세르비아 수도인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챔피언스 리그 8강 경기에서 맨유가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를 물리치고 4강 진출을 확정지은 뒤 영국으로 귀국하던 중 선수단을 태운 비행기가 뮌헨에서 추락했다. 이 사고로 맨유의 주장이던 로저 바인을 비롯해 7명의 선수가 그 자리에서 숨졌고 당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던 던컨 에드워즈도 치료 도중 사망하면서 선수 8명과 코칭 스태프, 구단 직원, 경기를 취재하러 간 언론인 등을 포함해 총 23명이 세상을 떠났다. 당시 팀의 평균 연령은 23세에 불과했다. 게다가 목숨을 건진 선수들 역시 다시는 축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해 쓸쓸히 은퇴했다.
사고 당시 버스비는 비행기 밖으로 튕겨 나가 땅바닥으로 내동이쳐졌다. 처음 그의 상태를 진찰한 뮌헨 병원의 담당의사는 '소생 가능성 희박'판정을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버스비는 초인적인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실낱 같은 생명줄을 간신히 잡고 있던 중 소식을 듣고 달려온 지미 머피 코치에게 '우리들의 깃발을 계속 휘날려주게'라고 당부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이 충격적인 사고 이후 클럽이 해산될 것이라는 의견이 축구계에서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도 유나이티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보비 찰튼을 중심으로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해 재기를 노렸다.

우리는 앞으로 맷 버스비 감독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가 돌아온 것은 클럽의 모든 이들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죠. 맷 버스비 감독이 복귀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이 메시지는 버스비의 입원 중, 올드 트라포드에서 열린 경기에서 알려졌다) 온 경기장이 정말 눈물바다가 됐어요. 대단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아팠죠. 알겠지만 정말 마음을 흔드는 일이잖아요. - 윌프 맥기네스(전 맨유감독)-

이 때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선수 두 명이 맨유에 합류하게 된다. '스트렛포드 엔드의 왕'이라 불리는 데니스 로와 '유럽의 펠레'라는 극찬을 받은 조지 베스트가 바로 그들이었다. 1967년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부활을 알린 맨유는 이듬해인 1968년 4강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꺾은 뒤 결승에서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벤피카를 물리치고 드디어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뮌헨 참사, 그리고 10년 후에 기적적인 우승은 맨유 신화를 생산했고, 당시 국민들은 이 신화에 매료되어버렸다.
맷 버스비, 맨유의 홈구장 올드 트래포드 정면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고(맞은편에는 그의 제자인 발롱도르 삼각편대 찰튼, 베스트, 로의 동상이 있다.) 경기장 앞 도로도 그의 이름을 땄을 정도로 그의 '''위닝 멘탈리티'''는 맨유의 상징이다.

승리는 언제나 얻는 것이다. 때때로 승리해서도 안되고 때때로 제대로 해서도 안된다. 항상 제대로 해야한다. 승리는 습관이다. 안타깝게도 패배도 역시 습관이다. - NFL의 명감독 빈스 롬바르디 -

2002년 1월 1일. 퍼거슨은 드디어 그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직에서 물러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퍼거슨 경은 그의 인생을 축구에 바쳤고, 그는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룬 느낌이었다. 바로 전 날이 그의 환갑잔치였다. 그리고 그 날, 그는 점심 식사 후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그의 아내 캐시 여사가 그의 발을 걷어차며 그를 깨웠다. 퍼거슨이 눈을 뜨자, 캐시와 세 명의 아들들이 그의 앞에 서있었다. 캐시는 "당신이 은퇴하지 않는 걸로 우리가 결정했어요"라고 말했고, 그것이 논란의 끝이었다.
이 사건은 여러 가지 중대한 점을 시사한다. 첫째, 이 사건은 스포츠계의 어겨질 수 없다고 여겨졌던, 한 인물의 스포츠 인생에 2막이나 앙코르 공연은 없다는 규칙을 박살내버렸다. 스포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언제 그만둬야 할 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그가 은퇴하지 않기로 결심한지 후 2013년까지, 퍼거슨은 이미 높은 곳에 올라가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이미지와 이윤을 오히려 더 향상시켰으며, 더 젊은 감독들에게도 절대 지지 않았다. 27년 동안 수많은 상대들과 싸우고 대부분 그 상대들을 꺾은 퍼거슨의 무기는 위닝 멘탈리티였다.
이게 가장 크게 나타난 경기가 1998-99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으로 퍼거슨이 이끄는 맨유는 바이에른 뮌헨에게 1골차로 뒤지고 있었고, 경기는 거의 끝나가던 시점이었다. 퍼거슨은 마지막 승부수로 두 명의 교체선수를 투입했다. 정말 기적같은 1분이 지나자 두 교체선수는 각자 1골씩 기록했다. 데이비드 베컴이 찬 2번의 코너킥이 테디 셰링엄의 동점골과 솔샤르의 역전골로 이어지며 승부를 뒤집어 버렸다. 그 때까지 굳건했던 뮌헨은 무너졌으며 맨유는 챔스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급기야는 유러피언 트레블을 달성하는 사상 최대의 대업적을 이룩했다. 당시 UEFA 회장이었던 레나르트 요한손이 경기종료 2분 전에 VIP 박스에서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뮌헨에게 상을 수여하러 갈 준비를 했다. 이때 유나이티드의 대부인 보비 찰튼경 면전을 지나갔는데, 그에게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한편, UEFA 스테프들은 이미 바이에른 뮌헨을 상징하는 붉은색 리본을 단 빅 이어를 들고 있었다. 레나르도 오한손 UEFA회장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을 때엔 맨유가 역전승을 거둔 후였다고. 그가 기억하는 당시 첫 장면은 이랬다. "엘리베이터가 30초 만에 도착했는데, 몇 개의 방과 드레스룸 지역을 지나서 긴 홀로 지나가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아직 듣지 못한 것이 있을 테니까요. 저는 그래서 경기장 쪽에 와서 그 광경을 보자 혼란스러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승자는 울고 패배자는 춤을 추고 있었거든요."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이 경기가 끝나고 경기장을 나서면서, 그를 따라다니던 카메라에 대고 그의 제일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축구? 말도 안 돼 (Football. Bloody hell)" 이른바 '''캄프 누의 기적'''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트레블을 달성했던) 99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이 의심할 여지 없이 저에게 최고의 순간이었어요. 단순히 극장골을 넣어서 이겨서가 아니라, 팀 전체가 하고자 했던 의지가 대단했는데 그게 기억에 남네요. -알렉스 퍼거슨-

트레블은 누구에게나 대단한 업적이죠. 하지만 평생 같이 자라온 친구들과 같이 우승하면 더 좋죠. 우리 여섯명의 사진이 있어요. 챔스 컵과 함께 찍은 사진이요. 우리 중 일부는 12살 때부터 친구에요. -니키버트(현 맨유 유스 코치)-

모든 일이 한꺼번에 맞아 떨어지는 그런 각별한 순간이었죠. 평범한 배경의 그 젊은 선수들이 갑자기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게 되었고 위업을 달성할 능력을 갖고 있었죠. 이전엔 볼 수 없던 멋진 형태로요.

12살때부터 함께 자란 선수들이 트레블을 차지하는 일이 과연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요? 전 확신 못하겠어요.다시 일어날지 모르겠어요. 축구의 미래가 어떨지 모르겠어요. EPL에서 6~7인의 동료들이 이런 업적을 재현하긴 어려울거에요. - 게리 네빌-

맨유에서 뛰는 걸 꿈꾸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일어날 수 없는 게 현실이죠. 저흰 행운아였어요. 어렸을 때부터 함께 뛰었고 함께 1진에 올랐죠. 이것도 상당히 힘든 일이에요. 다시 이런 일이 있을까요? 자신 없어요. -폴 스콜스-

(캄프 누의 기적에 대해)[4]

대단한 경기였어요. 우린 경기 마지막 몇 분 동안 엄청난 압박감을 받았습니다. 사실 전 전광판에 적힌 90분이라는 시간을 보고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여겼어요. 하지만 팀에 투입된 두 명의 교체 선수가 정말로 기적을 만들었어요. 무승부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상황에서 테디 셰링엄이 동점골을 넣었을 때 이 세상 것이 아닌 해방감을 맛보았어요. 연장전을 대비해야 하는데 훙분이 가라앉질 않더군요. 그리고 그때 솔샤르가 결승골을 넣었죠. -야프 스탐(현 레딩 FC 감독) -


3. 맨유의 기원


역사적으로 축구의 대중화와 연관이 깊은 도시인 맨체스터시는 축구가 전세계적인 대중 스포츠로 발돋움하게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산업혁명의 태동지이다. 산업혁명에 맞춰 유럽 전역에 이른바 ‘산업도시’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산업도시를 일상적으로 조직한 것은 노동조합이었고 비일상의 문화 영역에서 응집시킨 것은 축구였다. 당시엔 지금처럼 레저와 스포츠의 선택지가 다양하지 못했는데, 이 때 축구가 대중 스포츠로 발돋움하게 된다. ‘축구 종주국’ 영국의 축구문화는 거대한 산업도시들과 수많은 사람들의 연대와 열광으로 발전했다. 그 흔적은 지금까지 남아있는데, 명문 축구 클럽의 연고지는 공업도시(철강도시, 석탄도시[5], 섬유도시[6], 무역항[7])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양상은 19세기 말, 산업혁명은 유럽 전역으로 전개되었는데 축구도 인기도 함께 퍼지게 된다. 스페인의 빌바오[8] 와 독일의 도르트문트[9] 탄광 지대가 그러했으며 스웨덴의 말뫼[10],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11] 로테르담[12], 이탈리아의 토리노[13], 밀라노[14] 등이 그러했다. 그렇게 영국인들에게 축구를 전수받아 제3세계 여러 나라들도 개항과 산업 발달이 전개되면서 축구가 독자적인 문화로 꽃피었다.
1870년대는 잉글랜드 프로 축구에 새로운 역사가 기록되던 시기였는데, 그 기반 위에서 마침내 1878년 맨유가 시작되었다. '유나이티드'라는 말 그대로 장차 맨체스터 지역의 몇 개 팀이 결합하게 되지만, 그 시작은 1878년에 창단된 뉴튼 히스 LYR(Newton Heath LYR, 이하 뉴튼 히스) 클럽이다. ‘랭커셔&요크셔 철도 회사’의 근무자들이 주축이었다. 질주하는 근대의 상징인 철도는 유럽 전역에 걸쳐 탄광 혹은 철광 지대의 생산물을 항구 도시로 운반하는 것을 목적으로 부설되었는데, 그 시원 또한 바로 맨체스터다. 철도용 캐리지와 웨건을 만들던 근무자들은 휴식 시간이나 주말에 공을 찼고, 그 중 뛰어난 몇 명은 지금의 맨체스터 피카디리 철도역 부근의 기지창과 그 인근의 운동장에서 일과 중에도 계속 공을 찰 수 있었다. 이른바 ‘프로’의 시작이었다.

4. 세 남자의 이야기


100년이 넘는 맨유의 역사는 세 남자의 이야기로 정리 될 수 있다. '''어니스트 망날''', 맷 버스비, 그리고 알렉스 퍼거슨이다. 이 세명이 들어올린 맨유의 트로피는 맨유 전체 트로피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맨유의 20회의 리그 우승은 모두 이 세명이 들어올린것이었다. 한 클럽의 역사가 단 3명의 감독에게서 나온 것은 일반적인 축구계 문화에서 익숙치 않은 그림이다.
어니스트 망날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시작을 알렸으며, 맷 버스비는 잉글랜드 축구에 최초로 유스시스템을 선보이며 축구 클럽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고, 알렉스 퍼거슨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EPL을 세계 최고의 위치에 자리잡도록 만들어냈다.

4.1. 어니스트 망날


감독 경력 : 1903-1912 '''(9년)'''

맨유 전적 : 471전 242승 139무 90패 (승률 51.38%)

우승 경력 : 1부 리그 2회 (1908,1911), FA컵 1회 (1909), 커뮤니티 쉴드 2회 (1908,1911)

어니스트 망날 부임 이후, 빌리 메레디스, 샌디 턴불 등의 선수들과 함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08년 첫 리그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FA컵, 커뮤니티 쉴드를 우승하며 맨유의 첫 전성시대를 이어갔다.

4.2. 맷 버스비


  • 감독 경력 : 1945-1969 (24년)
  • 맨유 전적 : 1141전 576승 266무 299패 (승률 50.48%)
  • 우승 경력 : 1부리그 5회 (52,56,57,65,67), FA컵 2회 (48,63), 커뮤니티 쉴드 5회 [52,56,57,65,67], 유로피언컵 1회 (68)
  • 축구계 최초 체계화된 유스 시스템 창조
  • 잉글랜드 클럽 최초로 유럽 대항전에 참가
  • 잉글랜드 클럽 최초의 챔피언스리그[15] 우승
  • 잉그랜드 역대 최연소 1부 리그 우승 (평균연령 22세)
  • 레드 데블스 별명 부여
버스비 시대의 가장큰 업적이라고 하면 역시나 유스 시스템의 창조라고 할수 있다. 왈더 클릭머, 지미 머피가 이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스팀은 FIFA 세계 유스 클럽 대회와 잉글랜드 FA 유스컵 부터 싹슬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이 자연스럽게 대부분 1군에 자리잡아 잉글랜드 리그 역사상 최연소 우승팀 (평균연령 22세)의 일원으로 우뚝서게 된다. 던컨 에드워즈, 보비 찰튼, 데니스 바이올렛이 바로 이 시스템 속에서 탄생한 천재들이였고 이들은 영국을 넘어 유럽을 호령할 기세였다. 이 위대한 '''버스비의 아이들'''은 비극적인 뮌헨 참사로 다수가 사망, 은퇴하는 큰 타격을 입지만 참사 10년뒤인 1968년 마침내 유럽을 정복하고야 만다.
다른 잉글랜드 클럽 또한 맷 버스비가 만들어낸 유스 시스템의 중요성을 깨우치기 시작해 곧 따라서 유스팀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스날의 경우 1954년도에 유스팀을 창설했다.) 라리가의 경우는 유스 시스템의 역사가 비교적 짧은 편이다. (최근 주목받는 바르셀로나 유스팀이 창설된 건 약 1970년 경이며, 레알 마드리드 유스팀 창설은 1960년대이다.)
이렇듯 오늘날 '명문 클럽' 맨유의 이미지는 전세계 유일의 교황 작위 축구 감독이자 영국 최초 기사 작위 클럽 감독인 맷 버스비에게서 태동하였다.

4.3. 알렉스 퍼거슨


  • 감독 경력 : 1986-2013 (27년)
  • 맨유 전적 : 1500전 895승 338무 267패 (승률 59.66%)
  • 우승 경력 : 프리미어리그 13회 (93,94,96,97,99,00,01,03,07,08,09,11,13), FA컵 5회 (90,94,96,99,04), UEFA 챔피언스리그 2회 (99,08), 리그컵 4회 [92,06,09,10], 커뮤니티 쉴드 10회 (90,93,94,96,97,03,07,08,10,11), UEFA 컵위너스컵 1회 (91), UEFA 슈퍼컵 1회 (91), 인터컨티넨탈컵 1회 (99), FIFA 클럽 월드컵 1회 (08)
  • 잉글랜드 최초의 트레블 달성 (1999년)
버스비 시대 이후 조용하던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애버딘 FC를 이끌며 수십년간 이어져온 셀틱 FC레인저스 FC의 양강 체제를 무너뜨리고, FC 바이에른 뮌헨레알 마드리드 CF를 격파하며 UEFA 컵 위너스 컵을 우승시킨 명장 '''알렉스 퍼거슨''' [16]이 감독으로 취임하며, 90~00년대 세계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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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리그 경쟁력을 박살 냈던 헤이젤 참사의 여파를 보여주는 리그 그래프)
헤이젤 참사로 잉글랜드의 모든 클럽이 5년간 유럽 대항전에 나갈 수 없게 되고, 그로 인해 프리미어리그 경쟁력(UEFA 리그 순위 3위에서 29위로 수직 하강)이 박살났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일개 클럽이 아니라 '''리그를 세계 정상에 다시 올려 놓겠다''' -알렉스 퍼거슨-

퍼거슨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축구 위상 자체를 세계 최고로 끌어올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더 나아가 EPL을 상징하는 인물.[17] 1999년 맨유의 트레블은 맨유 우승만이 아니라 잉글랜드 리그를 침몰에서 다시 구해놓은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영연방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퍼거슨이 들어올린 것은 트로피가 아니라 영국의 자존심이라고 말했으며,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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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한 장으로 보는 알렉스 퍼거슨의 25년간 미친 존재감)[18]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EPL에서 축구 감독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짧다는 얘기가 있다. 2006년 영국 워릭 경영대학원(Warwick Business School)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992년부터 2005년까지 잉글랜드 감독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약 2년이었다. 허나 퍼거슨 감독은 무려 27년간 재임하고, 성공신화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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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뮌헨만이 같은 기간 유나이티드와 같은 수의 트로피를 들었지만 15명의 감독이 거쳐간 결과이다. #)

4.4. 퍼거슨 시대 그 이후


2013년 여름, 퍼거슨 감독과 데이비드 길 단장[19]이 함께 은퇴하며, 유나이티드는 새로운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맷 버스비가 토대를 이룩한 유나이티드의 문화를 바탕으로 알렉스 퍼거슨 은 찬란한 꽃을 피웠고, 유나이티드 뿐만아니라 리그의 인기까지 세계 최고로 끌어올렸다. 새로 취임한 에드 우드워드 단장의 발언들은 현재 최고 인기 리그인 EPL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지닌 가치와 인기를 대변한다.

에드우드워드의 비전은 '엘리트'선수들을 모든 포지션에 갖는 것이다.

맨유는 세계 최고의 축구 팀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스포츠 팀이다.

역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올드 트래포드란 이름도 절대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수익의 확실한 성장으로 우리는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언제든지 최고의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 투자할 능력이 있다는 얘기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수들은 즉시 전력감의 탑클래스여야 한다.

거절할 수 없는 오퍼(가격)를 제시할 것 이다.

흔쾌히 투자할 용의가 있다. 고정 예산은 없다. 재정적으로 우리는 강력하고, 운영 가능한 자금이 있다.

우리는 감독을 지원해주는 역할이기 때문에 풋볼 디렉터가 없다. 결정권은 감독에게 있다.

퍼거슨 감독은 재임 시절 직접 영입 명단을 낙점하면, 조엘 글레이저와 데이비드 길 단장에게 통보, 협의하는 식이었다. 매번 이적 시장에서는 그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이 정책을 유지할 것이다. 원한다면 우리는 일찌감치 최고 이적료를 경신할 수도 있었다. 금액 한도는 절대 없었다.

유나이티드의 야망은 승리이다. 그게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는 승리를 원한다. - 에드 우드워드 단장-


퍼거슨 시대 이후 유나이티드는 기나긴 긴축 재정 상태를 끝내고 이적시장의 큰 손으로 다시 등장했다. 사실 유나이티드는 리오 퍼디난드, 세바스티안 베론등 막대한 이적료를 지출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구단이였다.글레이저 가문이 인수한 이후 부채를 갚기위한 긴축재정 상태가 사실은 비정상적인 상태였던 것. 반할이 부임한 2014-15 시즌 이후 이적시장에서 유나이티드의 모습은 수익 대비 자연스러운 지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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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1 ~ 2012/13(알렉스 퍼거슨경 은퇴) 시즌,이적료 지출 순위)
선수단에서도 2011년 게리 네빌, 2013년 폴 스콜스, 2014년 라이언 긱스 등 맨유 황금기를 이끌었던 '퍼거슨의 아이들'이 차례로 은퇴하고 맨유는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이 하게되었다. '퍼거슨의 아이들' 중 필 네빌은 맨유로 돌아와 1군 코치로 일한 적이 있고, 니키 버트는 현재 맨유 유스 코치로 미래의 새싹들을 육성하고 있다.
퍼거슨 감독의 유산 덕분에 재정적으로 황금빛 엘도라도 맨유 시대가 도래한 반면, 축구 내적으로는 팀 정체성이 사라지고 심각한 암흑기를 겪고 있다. 에버튼을 11년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모예스, 자타가 공인하는 전술가 반할, 스페셜 원 무리뉴가 팀을 이끌었지만 전술적으로나 성적으로나 신통치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위닝 멘탈리티가 사라지고 선수들의 정신력은 피폐해졌으며 계속된 영입실패로 팀이 망가지고 있다. 아직 완전히 몰락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이대로라면 AC 밀란처럼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최근 3년간 맨유의 수준은 매우 실망스럽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은퇴 후 맨유는 열정적이고, 재밌고, 공격적인 축구를 이어가지 못했다. '''맨유는 경기에서 이기고 팬들이 즐거워하는 축구를 하는 데 익숙해진 팀이다. 준우승을 해도 실망하는 팀이 바로 맨유였다.''' - '''올레 군나르 솔샤르'''

2019년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가 우리 돈으로 4조원이 넘는 거액으로 맨유를 사겠다고 나섰으나, 글레이저 구단주에게 거부당했다. 글레이저 구단주에게 불만이 폭발한 서포터들은 차라리 팔라고 반발하면서 맨체스터 시티를 사서 그야말로 우승후보로 탈바꿈시킨 만수르 빈 자예드 알나얀 왕자처럼 구단을 매각하는 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할 정도. 결국, 빈 살만 왕세자는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사고자 협의중이다.

5. 역대 시즌



5.1. 1992-9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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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버스비 감독 시절인 1966/67 시즌 이후 1부리그 우승과는 인연이 없던 맨유는 알렉스 퍼거슨 경이 1986년부터 맨유 감독을 맡은 후 일곱 시즌 만에 숙원이었던 26년 만에 1부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2위 빌라와 승점 10점 차이로 우승하여 독주했을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리그 중후반까지 퍼거슨 감독의 전임 론 앳킨슨 감독이 이끌던 아스톤 빌라와 돌풍의 팀 노리치와 엎치락뒤치락하는 치열한 경쟁 끝에 승자가 되었다.
맨유의 시즌 시작은 정말 좋지 않았다. 지난 시즌 2위였지만 개막전 셰필드 유나이티드 원정에서 1-2로 진 맨유는 홈개막전이던 에버튼과의 홈경기에서도 0-3 완패를 당하며 최악의 출발을 했다. 입스위치와의 홈경기에서 비긴 뒤 4라운드 사우스햄튼 원정부터 5연승으로 반등하는 듯 했지만 곧바로 5연무에 2연패 7경기 연속 무승으로 15경기을 치른 시점인 11월 초에는 5승6무4패로 리그 순위 10위까지 내려갔다. 물론 혼전 양상의 리그라 1위 노리치와는 승점 차가 9점이라 추격할 여지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맨유의 문제는 15경기에서 14득점에 그친 공격이었다. 사실 여름이적시장에서 공격수를 보강하려고 했으나[20] 디온 더블린 1명을 데려오는데 그쳤는데 그 더블린마저 개막 1달도 안돼서 다리가 부러지며 시즌아웃당했다.
이렇게 또다시 리그 우승이 좌절되는듯 했지만 중요한 이적 하나가 맨유 역사를 바꿨다. 그 주인공은 에릭 칸토나. 탁월한 재능으로 리즈를 마지막 디비전 1 우승으로 이끌었고, 리버풀과의 커뮤니티 실드에서 해트트릭을 하며 그 재능을 널리 알린 상황이었으나 그의 성질머리가 문제가 되어 리즈 감독인 하워드 윌킨슨과 불화가 있었는데 퍼거슨 감독은 전화 통화로 '''120만 파운드'''라는 헐값으로 칸토나를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칸토나는 맨유로 합류하자마자 적응기가 따로 필요없이 마크 휴즈와 훌륭한 콤비를 이루었고 리즈 시절과 합하여 15골16어시라는 스탯을 찍으며 중위권에 있던 맨유를 연승행진으로 이끌며 순식간에 우승권으로 도약시켰다. 1월에 시즌 처음으로 선두에 도약한 맨유는 3월 들어 4경기 연속 무승으로 주춤했고 이를 틈타 아스톤 빌라와 노리치가 맨유를 추월하며 3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맨유는 4월 들어 노리치 원정에서 3-1로 승리하며 무승행진을 끊음과 동시에 타이틀 경쟁자인 노리치의 우승 희망을 꺾었다. 그리고 4월 10일 선두 아스톤 빌라와의 승점 1점 차이로 2위에 있던 상황에서 맨유는 셰필드 웬즈데이를 상대로 후반 41분까지 홈에서 0-1로 지고 있다가 후반 41분과 추가시간 6분에 나온 주장 스티브 브루스의 결정적인 득점으로 극적인 2-1 승리를 거두는데 마침 아스톤빌라가 홈에서 0-0으로 코번트리에 덜미를 잡히며 선두로 등극하게 되었다. 경기 영상[21] 맨유는 잔여 경기 5경기를 모두 승리한 반면 빌라는 마지막 3경기를 모두 패하며 자멸했고, 결국 최종전을 한 경기 남기고 빌라가 강등권 경쟁 중인 올덤 애슬레틱에 홈에서 0:1로 잡히며 맨유는 26년 만의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 우승은 앞으로 20년 동안 12번을 더 우승하게 될 위대한 맨유 왕조의 대단원의 서막이었다.

5.2. 1993-9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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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93 시즌 아스톤 빌라와 막판까지 우승경쟁 끝에 프리미어리그 초대 우승팀이 된 맨유는 1993-94 시즌에는 블랙번 로버스와 막바지까지 경쟁 끝에 타이틀을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거기에 FA컵 결승전에서 첼시 FC를 상대로 4-0 대승을 거두며 클럽 역사상 처음이자 역대 잉글랜드 팀 중 6번째인[22] 리그-FA컵 더블에도 성공했다. 리그컵 결승전에서 아스톤 빌라에 패하지 않았다면 잉글랜드 역사상 첫 국내대회 트레블을 이룬 첫 팀이 될 수 있었다. 다만 25년 만에 출전한 UEFA 챔피언스리그(전신 유로피언컵)에서는 2라운드에서 갈라타사라이 SK에 원정다득점 원칙으로 떨어지며 일찍 고배를 마셨다.
26년 만의 우승 후 블랙번 로버스와의 경쟁 끝에 강등된 노팅엄 포레스트로부터 지난 시즌 PFA 올해의 팀에 오른 유망주 미드필더 로이 킨을 당시 영국 레코드인 375만 파운드에 데려온 맨유는 초반부터 줄곧 1위를 질주했고 7라운드 첼시 원정 패배 이후에는 8연승을 질주, 1월 중순에는 2위 블랙번에 승점 16점 차이로 선두에 오르기도 했다. 1994년 1월 맷 버스비 전 감독이 타계하여 에버튼과의 홈경기에서 그를 추모하는 묵념이 있었다. 이 경기에서는 라이언 긱스가 결승골을 득점하며 1-0 승리를 거뒀다. 맨유는 2월까지 리그 29경기에서 단 1패만 당하며 순항했다. 그러다가 3월 리그 첫 경기였던 첼시와의 홈경기에서 리그 2번째 패배를 당하며[23]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곧바로 이어진 찰튼 애슬레틱과의 FA컵 8강전에선 3-1 승리를 거뒀지만 피터 슈마이켈 골키퍼가 퇴장당해 아스톤 빌라와의 리그컵 결승에 결장해야 했다. 리그로 돌아와 리그컵 준결승에서 만났던 강호 셰필드 웬즈데이에 홈에서 5-0 대승을 거두며 블랙번의 추격을 뿌리치는듯 했지만, 곧바로 꼴찌 스윈든 원정과 아스날 원정에서 2-2 무승부에 그치며 주춤거렸는데 문제는 에릭 칸토나가 두 경기에서 모두 퇴장당해 리그컵 결승에 출장정지 징계를 받아야했다. 결국 리그컵 결승에서 아스톤빌라에 1-2 패배로 준우승에 머문다. 안좋은 흐름은 계속 이어지며 4월 첫 경기 2위 블랙번과 승점 6점이 앞서있는 상황에서 블랙번 원정을 가게 되었는데 0-2 완패를 당하며 승점 3점 차이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올덤 애슬레틱과 웸블리에서 FA컵 준결승을 치르게 되는데 0-0으로 연장으로 이어지다가 연장전 먼저 실점하며 준결승에서 탈락 위기에 몰렸다. 다행히 마크 휴즈가 연장전 종료 1분 전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리며 재경기로 끌고갔다. 3일 뒤 펼쳐진 재경기에서 4-1 대승을 거두며 FA컵 결승에 진출한 맨유는 에릭 칸토나가 5경기 출장정지 징계에서 복귀했고 복귀전인 맨체스터 더비에서 홀로 2골을 넣으며 완벽한 복귀를 알렸다. 칸토나의 복귀로 탄력을 받은 맨유는 막판 뒷심부족으로 승점을 잃기 시작한 블랙번을 결국 승점 8점 차이로 제치고 리그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그리고 FA컵 결승에서 첼시에 4-0 대승을 거두며 더블에도 성공했다. 에릭 칸토나는 시즌 25골을 득점하며(리그 18골12어시) 공격을 이끌었고 PF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 라이언 긱스리 샤프, 안드레이 칸첼스키스 역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며 칸토나를 보좌했다.
시즌 후, 13년간 맨유에서 활약했던 주장 브라이언 롭슨미들즈브러로 플레잉코치가 되어 떠났다. 그리고 클레이튼 블랙모어, 마이크 펠란, 디온 더블린 역시 팀을 떠났다. 그리고 블랙번으로부터 데이비드 메이를 영입했다.

5.3. 1994-95 시즌


시즌 전 유럽대항전 영국인 쿼터를 채우고 30대 중반인 브루스와 30대로 들어서는 팰리스터 센터백 듀오를 고려하여 블랙번의 센터백 데이비드 메이를 영입했고, 겨울 이적시장에서는 지난 시즌 득점왕 앤드루 콜을 영국 이적료 신기록인 700만 파운드와 유망주 키스 길레스피를 얹어 데려왔다.
그러나 콜을 데려와서 칸토나와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려던 찰나 같은 겨울에 크리스탈 팰리스 원정에서 퇴장당한 에릭 칸토나가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는 관중에게 이단옆차기를 날리는 불미스러운 일로 8개월 자격정지로 시즌아웃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칸토나의 징계 이후 3월 강등권 입스위치와의 홈경기에서 앤드루 콜의 5골로 9:0 대승을 거두기도 했으나[24] 토트넘, 리즈, 첼시와의 홈경기에서 아쉽게 한방 부족으로 칸토나의 공백을 체감하며 0:0으로 비겼고, 리버풀 원정에서는 0-2 완패를 당하며 좀처럼 선두 블랙번과의 격차를 줄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블랙번에 골득실은 앞서고 승점 2점 차로 뒤쳐진 상황에서 최종전 웨스트햄 원정을 가게 되었는데 전반전 먼저 실점한 뒤 후반 이른 시간에 맥클레어가 동점을 만들었고, 같은 시각 안필드에서 블랙번이 동점을 허용하며 맨유가 역전골을 만들 경우 극적인 뒤집기 우승이 가능했다. 경기 종료 전까지 총공세에 나섰으나 웨스트햄 골키퍼와 수비진의 우주방어를 뚫지 못했다. 그러면서 승점 1점 차이로 EPL 3연패에 아쉽게 실패했다. FA컵에서마저 결승에서 에버튼에 0-1로 패배하며 6년 만에 시즌을 빈손으로 마감하게 되었다.
무관으로 마쳤지만 풀백 자원인 게리 네빌과 공격형 미드필더 폴 스콜스가 프리미어리그에 데뷔했던 시즌이었으며 시즌 종료 뒤, 주장인 폴 인스인터 밀란으로, 마크 휴즈는 첼시로, 안드레이 칸첼스키스는 에버튼으로 이적하였다.

5.4. 1995-9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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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전 안드레이 칸첼스키스(에버튼), 마크 휴즈(첼시), 폴 인스(인테르)가 이적했고, 이를 대체하기 위한 별다른 이적시장에서의 영입도 없었다. 에이스 에릭 칸토나는 전시즌 쿵푸킥 사건으로 인해 8개월 자격정지를 먹어 10월이 되어야 복귀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퍼거슨 감독은 유스 팀에서 어린 선수들인 니키 버트,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게리 네빌, 필립 네빌 등의 선수들로 시즌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한 언론의 우려가 있었고 개막전 빌라 원정에서 3-1로 패하자 그날 저녁 BBC MOTD 하이라이트에서 고정 패널인 앨런 한센은 "꼬맹이들 갖고 우승할 수 없다"라며 엄청난 혹평을 내렸다. 영상
개막전에서 패배한 이후 곧바로 5연승으로 반등에 성공했고 칸토나도 징계에서 돌아왔다. 리그컵과 UEFA컵에서 한 수 아래인 2부리그인 요크 시티 FC와 러시아의 FC 로토르 볼고그라드[25]에 광탈했지만 오히려 광탈로 리그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개막전 이후 11월까지 리그에서 아스날 원정에서의 0-1 패배를 제외하곤 무패를 기록하며 뉴캐슬과 치열한 양강 구도를 형성했다.
그러다가 12월 들어 노팅엄-첼시-셰필드웬즈데이에 3연속으로 비기고 리버풀과 리즈와의 더비 매치에서 2연패를 당하여 5경기 연속 무승으로 삐걱거리며 선두 뉴캐슬과 승점 10점 차이로 벌어졌다. 박싱데이 뉴캐슬과의 일전에서 앤드루 콜이 친정팀에 비수를 꽂으며 2-0 승리를 거두고 QPR에 2-1 신승을 거두며 뉴캐슬과의 승점을 잠시 좁혔지만 1996년 새해 첫 경기인 토트넘 원정에서 4-1 참패를 당했고 개막전 패배를 안겼던 빌라와의 홈경기에서 0-0으로 비기며 1월 중순에는 시즌 종료까지 15경기 남은 시점에 선두 뉴캐슬과의 승점차가 무려 12점인 3위까지 내려앉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퍼거슨 감독은 뉴캐슬의 케빈 키건에게 고도의 심리전을 걸었다. 언론에다 "다른 EPL 팀들은 뉴캐슬을 상대로 대충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이에 키건은 "맨유를 반드시 이기고 말겠다. 반드시!"라는 말과 함께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드는 등 과민반응을 보였다.
1월 마지막 경기인 웨스트햄 원정에서의 1-0 승리를 시작으로 2월에 있던 4경기[26]를 모두 쓸어담으며 뉴캐슬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볼튼 원정에서 6골을 퍼부으며 크게 뒤쳐졌던 골득실도 뉴캐슬과 비슷한 수준으로 만회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2월 말에는 키건의 과민 반응 이후 흔들리기 시작한 뉴캐슬에 4점 차이로 따라붙었다. 3월 첫 경기는 홈 전승을 기록하고 있던 선두 뉴캐슬과의 중요한 맞대결이었는데 우승 결승전으로 불렸던 이 경기에서 칸토나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두며 승점 1점 차이로 턱밑까지 쫓아왔다. QPR 원정에서 종료 직전 칸토나의 극적인 동점골로 1-1로 비긴 뒤, 3월 20일 아스날과의 홈경기에서 또 칸토나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하며 드디어 뉴캐슬을 2위로 내리고 선두로 올라섰다. 여담으로 3월에 있었던 4경기 4골이 모두 칸토나의 골이었고 경기 결과는 3승1무였다. 당연히 칸토나는 3월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그 이후 강등권 경쟁중인 사우스햄튼 원정 1-3 패배[27]를 제외하고 모든 경기를 이기며 시즌 종료까지 선두를 지켰고 최종전 미들즈브러 원정에서 3-0 대승을 거두며 토트넘에 비긴 뉴캐슬을 승점 4점 차로 꺾고 2년 만의 우승 탈환에 성공했다. 선덜랜드와 레딩, 맨시티와 사우스햄튼, 첼시를 꺾고 3연속 결승에 오른 FA컵에서는 결승전에서 후반 41분에 나온 칸토나의 발리슛 결승골로 리버풀을 1-0으로 꺾고 구단 역사상 두 번째로 리그-FA컵 더블에 성공했고, 리그-FA컵 더블을 두 차례 달성한 첫 번째 팀이 되었다. 시즌 후 베테랑 수비수인 스티브 브루스와 폴 파커가 팀을 떠났다.

5.5. 1996-9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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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아스날, 뉴캐슬과 시즌 내내 우승경쟁을 했으며 역대 프리미어리그 팀 중 최소승점인 75점으로 68점이라는 승점으로 2,3,4위가 나뉜 뉴캐슬, 아스날, 리버풀에 승점 7점이 앞서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개막 9경기 무패행진 이후 뉴캐슬 원정 0-5 패, 사우스햄튼 원정 3-6 패, 첼시에 홈에서 1-2 패배로 3연패를 당하며 12월 중순엔 6~7위까지 떨어졌었지만 선덜랜드전 홈경기 5-0 대승을 기점으로 11경기 9승 2무를 기록하며 빠르게 승점을 쓸어담으며 1월에 주춤하던 리버풀을 제치고 선두에 올랐다. 이후 선덜랜드 원정에서 1-2로 패배하고 더비카운티에 홈에서 2-3으로 패배하는 위기도 있었지만 선두를 빼았길 위기 때마다 리버풀이 알아서 자멸했으며 4월 19일 안필드에서 열린 사실상의 우승 결정경기에서 팰리스터의 2골로 3-1 완승을 거두며 우승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결국 2경기 남은 상황에서 리버풀이 윔블던 원정에서 2-1로 패배하며 프리미어리그 2연패에 성공했다.
FA컵과 리그컵은 윔블던과 레스터에 덜미를 잡히며 조기탈락했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조별예선에서 페네르바체 SK에 홈에서 패하며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대항전 홈경기 패배를 당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조별예선을 통과한 뒤 8강에서 포르투를 꺾고 준결승까지 올라가며 좋은 성적을 냈다. 준결승에서 대회 우승팀이 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홈과 원정 모두 1-0으로 패배하며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시즌 전 주전 측면 미드필더였던 리 샤프가 450만 파운드에 리즈 유나이티드로 떠났고, 주장 스티브 브루스버밍엄 시티로 FA로 떠났다. 앨런 시어러를 1200만 파운드와 앤디 콜을 주고 영입하려했지만 뉴캐슬에 하이재킹했고 울며 겨자먹기로 대신 영입한 올레 군나르 솔샤르가 성공적인 이적 첫해를 보냈는데 전 대회에서 19골을 득점하며 팀내 득점 1위에 올랐다. 22세의 젊은 미드필더 데이비드 베컴은 개막전 윔블던 원정에서 하프라인 뒤 60야드 거리에서 윔블던의 골키퍼 닐 설리번이 앞으로 나와있는 것을 보고 슛을 날린 것이 그대로 골인되며 유명세를 타더니 리버풀전, 토트넘전에서 중요한 골을 득점하며 맹활약했고 PFA 올해의 영플레이어 상을 수상했다. 솔샤르와 동향인 로니 욘센도 훌륭한 이적 첫 시즌을 보냈는데 게리 팰리스터와 찰떡궁합의 호흡을 보여주며 브루스의 공백을 훌륭하게 메웠다. 다만 또다른 이적생 카렐 포보르스키요르디 크루이프은 측면과 미들, 공격을 볼 수 있는 자원임에도 불구하고 실망스러운 활약상을 펼쳤다. 에릭 칸토나가 이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고 마지막 시즌에서 리그 11골을 포함하여 전 대회 합쳐 15골을 득점하며 박수칠 때 떠났고 영원한 맨유의 전설로 남게 되었다.

5.6. 1997-9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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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즌을 마치고 은퇴한 에릭 칸토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토트넘으로부터 350만 파운드에 테디 셰링엄을 영입했고, 그의 등번호 7번은 데이비드 베컴에게, 베컴의 등번호 10번은 셰링엄이 가져가게 되었다. 그 외엔 헤닝 베르그가 블랙번으로부터 영입되었다. 칸토나가 찼던 주장 완장은 로이 킨이 차게 되었다.
전반기 내내 리그를 독주했고, 2위에 승점 12점 차까지 벌이며 순항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유벤투스, 코시체, 페예노르트와 한 조가 되어 가볍게 1위로 8강에 진출하여 트레블도 가능해보였다. 그러나 FA컵 32강에서 강등권의 반즐리 FC에 재경기 끝에 탈락했고,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도 한 수 아래로 보였던 AS 모나코에 홈어웨이 무승부 끝에 원정골에서 밀려 탈락했다. 리그에서도 크리스마스 이후 하위권의 코번트리와 사우스햄튼에게 패배, 볼튼에 무승부에 그쳤고 중위권의 레스터에 홈에서 0-1로 졌다. 3연승으로 정신을 차리는 듯 했으나 셰필드 웬즈데이 원정에서 0-2로 패배하고, 웨스트햄 원정에서 1-1로 비겼으며 전반기 패배를 안겼던 아스날에게 홈에서 0-1로 패배하며 리그 10경기에서 5패에 아스날에 더블을 허용, 6점 차로 1위는 지켰지만 아스날이 3경기를 덜 치러 주도권은 아스날에 넘어갔다. 그리고 맨유는 이후에도 홈에서 리버풀과 뉴캐슬에 무승부로 덜미를 잡혔고, 그 사이 아스날은 10연승의 고공행진으로 맨유로부터 1위를 빼앗았다. 결국 리그 최다득점과 최소실점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점 1점 차이로 빈손으로 시즌을 마치게 되었다.

5.7. 1998-9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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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크 스타인 감독은 제자 알렉스 퍼거슨 경에게 맨유의 감독을 해보지 못한게 후회된다고 이야기 했고, 이는 다른 클럽으로 부터 러브콜을 많이 받았던 애버딘 FC감독시절의 퍼거슨이 맨유의 감독으로 오기로 결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애버딘과 셀틱은 스코티시 프리미어십에 속해 있다.

5.7.1. 세부 내용


주요 영입으로는 드와이트 요크를 이적료 1260만 파운드, 야프 스탐은 1060만 파운드로 영입했다.
시즌 개막 전, FA 채러티 실드에서는 지난 시즌에 리그에서 역전 우승을 허용했던 아스날 FC를 상대로 3:0 완패를 당했다.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직전 시즌에 우승을 달성한 아스날 FC를 비롯해 아스톤 빌라첼시 FC[28]가 돌풍을 일으키며 힘겨운 순위 경쟁을 벌인다. 전반기에는 리그에서 2~3위에 머무르며 다소 힘겹게 시즌을 이어갔다. 레스터 시티와의 개막전에서 2:0으로 지고 있다가 베컴의 극적인 프리킥 동점골로 2:2 무승부를 거뒀고, 두 번째 경기였던 웨스트햄 원정에서도 0:0 무승부에 그쳤다. 승격팀 찰튼을 상대로 4:1로 역전승하며 3경기 만에 개막 첫 승을 거뒀고, 코번트리를 상대로 2:0으로 연승했지만 5번째 경기에서 디펜딩 챔피언 아스날 FC에 원정에서 3:0 참패를 당했다. 10월에는 사우스햄튼과 윔블던, 에버튼에 대승을 거뒀지만 11월에는 뉴캐슬에 홈에서 비기고 셰필드 웬즈데이 원정에서 3:1 패배로 발목을 잡혔다. 12월에는 리그컵 8강에서 토트넘에 3:1로 패해 탈락했고 리그에서는 빌라-토트넘-첼시와 비기고 홈에서 미들즈브러 FC에 2:3 패배를 당하며 크리스마스엔 8승7무3패 승점 31점으로 아스톤 빌라와 첼시에 뒤쳐진 3위에 그쳤다. 하지만 미들즈브러전 패배가 맨유의 시즌 마지막 패배였고, 이 패배 이후 모든 대회 포함해 시즌 끝까지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1월에 웨스트햄과 레스터를 상대로 2경기에서 요크와 앤디 콜이 각각 4골씩 넣으며 4:1, 6:2 대승을 거뒀고, 찰튼 원정에서 1:0 승리하며 리그 선두 자리를 차지했다. 2월에는 더비 카운티에 1:0 승리를 거둔 후 최하위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원정경기는 올레 군나르 솔샤르가 교체투입되자마자 후반 35분부터 4골이나 퍼부으며 8:1 대승을 거뒀다. 아스날과의 홈경기는 1:1로 비기지만 코번트리-사우스햄튼-뉴캐슬-에버튼과의 경기에서 4연승을 거두며 선두를 굳게 지켰다. 그러다 4월 윔블던 FC리즈 유나이티드 전에서 1-1 무승부를 거두면서 리그 선두 자리를 아스날에게 내주게 된다. 5월에는 리버풀과 2:2로 비기면서 자칫하면 승점 동률에 골득실로 우승이 가려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아스날이 막판에 리즈 유나이티드에 1-0으로 패배를 당했고 다음날 맨유는 블랙번 원정에서 0:0 무승부[29]로 귀중한 승점 1점을 따내며 최종전을 앞두고 맨유가 아스날보다 승점 1점 앞선채 최종전을 맞게 되었다. 홈에서 열린 리그 최종전에서 토트넘에 2:1 역전승을 거두며 지난 시즌과는 반대로 승점 1점차로 아스날을 제치고 리그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FA컵에서는 3라운드에서 2주 전 리그에서 패배를 안긴 미들즈브러에 홈에서 3:1 승리를 거뒀고, 4라운드는 숙적인 리버풀 FC와의 홈경기에서 종료 직전까지 마이클 오언의 골로 끌려가다가 요크와 솔샤르의 극적인 두 방으로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16강은 3부리그의 풀럼 FC를 상대로 홈에서 앤디 콜의 결승골로 1:0으로 이겼다. 8강은 첼시 FC와의 홈경기에서 스콜스와 디 마테오의 충돌 후 퇴장 끝에 0:0으로 비겼고, 원정에서 열린 재경기에서 요크의 2골로 2:0 승리를 거뒀다.
FA컵 준결승 아스날 FC 전에서 연장전 끝에 0:0으로 승부를 가려내지 못하면서 빌라 파크에서 3일 만에 재경기를 펼치게 된다. 전반 17분에 데이비드 베컴이 특유의 중거리 슈팅으로 선제골을 넣으면서 리드를 잡게 된다. 그렇게 리드를 유지하던 후반 24분 경에 데니스 베르캄프가 중거리 슈팅으로 동점골을 넣었고, 로이 킨이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하는 악재까지 겹치고 만다. 그러던 후반전 추가시간에 필 네빌의 깊은 태클이 반칙으로 선언되면서 PK를 내주게 되었는데, 베르캄프의 슈팅을 페테르 슈마이켈이 방향을 완벽하게 읽고 막아내며 승부는 연장전으로 진행된다. 연장 전반에는 아스날의 한 차례 찬스가 있었는데, 베르캄프의 날카로운 슈팅을 슈마이켈이 선방하면서 계속 승부는 원점이 이어졌다. 그러던 연장전 후반 5분 라이언 긱스가 하프 라인 부근부터 홀로 볼을 차고 들어갔고, 엄청난 드리블로 상대 수비 4명을 제쳐낸 뒤 강력한 슈팅으로 골문을 가르면서 극적인 골든골을 기록해 결승 진출에 성공한다. 이후 이 경기는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2차전과 결승에 못지 않은 명경기로 평가받게 된다.
FA컵 결승 뉴캐슬 유나이티드 전에서 전반 11분만에 테디 셰링엄의 선제골을 넣으며 앞서갔고, 52분에 폴 스콜스의 추가골이 나오며 2-0으로 앞서간다. 그렇게 리드를 잘 지켜내며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예선에서 합산점수 2-0으로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이어서 본선 조별리그에서는 FC 바르셀로나, FC 바이에른 뮌헨, 브뢴뷔 IF와 함께 D조에 편성되었고, 이 조는 당연히 죽음의 조였다. 1차전 바르셀로나 전에서는 치열한 승부 끝에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데이비드 베컴의 득점으로 3:3 무승부를 거뒀다. 2차전 뮌헨 원정에서는 드와이트 요크폴 스콜스의 골로 2:2 무승부를 거두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맨유는 조 2위였다. 3차전 브뢴뷔 원정에서는 긱스의 멀티골과 함께 앤디 콜, 로이 킨, 드와이트 요크, 올레 군나르 솔샤르의 골로 6-2 완승을 따내며 조 1위로 올라선다. 4차전 브뢴뷔 전에서는 베컴, 앤디 콜, 필 네빌, 요크, 스콜스의 골로 5-0 완승을 거뒀다. 5차전 바르셀로나 원정에서는 지난 경기처럼 치열한 승부가 이어졌고, 요크의 멀티골과 콜의 1골로 3-3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였던 뮌헨 전에서는 킨의 골로 1-1 무승부를 거두며 조 2위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를 상대했다.[30] 1차전 홈 경기에서는 드와이트 요크가 전반전에만 데이비드 베컴의 크로스를 받아 2골을 기록하며 앞서갔고, 점수를 유지하면서 2-0 승리를 거뒀다. 2차전 원정에서는 선제골을 내준 이후 후반전 막바지까지 스코어가 유지되던 상황에서 88분에 폴 스콜스가 동점골을 넣으며 인테르의 희망을 없앴다. 그렇게 합산점수 3-1로 준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에서는 유벤투스 FC를 만났다. 1차전 홈 경기에서는 1-1 무승부를 거두면서, 다소 아쉬운 결과를 거뒀다. 2차전 원정에서는 전반 초반에 필리포 인자기의 멀티골에 의해 탈락 위기를 맞게 되는듯 했다. 그런데 주장 로이 킨이 전반 24분 세트피스 찬스에서 헤더로 만회골을 기록하며 분위기 전환에 성공했으며, 10분 뒤에는 드와이트 요크가 동점골을 넣으며 다시 맨유가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 후반전 84분에 드와이트 요크가 키퍼를 제치다 키퍼에 걸려 넘어진 상황에서 흐른 볼을 앤디 콜이 침착하게 골로 성공시키면서 역전승을 따냈다. 그러면서 합산점수 4-3으로 결승 진출에 성공하게 된다. 다만 로이 킨과 폴 스콜스가 경고 누적으로 인해 결승에 나올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는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놀라운 기적으로 2-1 승리를 따내면서 트레블을 달성했다.

5.7.1.1. 캄 노우의 기적

'''축구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 중 하나'''

'''1998-99 UEFA Champions League Final'''
'''1999. 05. 26 / 캄 노우 (스페인,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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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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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바이에른 뮌헨'''
''' 2-1 '''
'''90 +1' 테디 셰링엄
90 +3' 올레 군나르 솔샤르
'''
'''6' 마리오 바슬러'''
'''경기 하이라이트'''
'''1998-99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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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chester United FC'''
'''2번째 우승'''
자세한 사항은 캄 노우의 기적 항목 참고.

5.7.2. 트레블의 주역들


당시 베스트 11이 그대로 모두 맨유의 레전드에 올릴수 있을정도로 면면이 화려하다.

▲ 맨유 트레블 팀에 관한 다큐멘터리

5.8. 1999-0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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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슈마이켈 골키퍼가 스포르팅 리스본으로 떠났고 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아스톤 빌라로부터 맨유에서 이미 선수로 뛴 적 있는 마크 보스니치를 대체 골키퍼로 재영입했다. 다른 주요 영입은 미카엘 실베스트르와 퀸튼 포춘. 그러나 시즌 초반 보스니치와 레이몬드 판 데르 고우 골키퍼가 모두 부상으로 이탈하자 베네치아 FC로부터 급하게 마시모 타이비를 데려왔다. UEFA 슈퍼컵에서 UEFA컵 우승팀 SS 라치오에 1:0으로 패했지만 리그에서 초반 7경기에서 6승1무를 거두며 잘 나갔다. 그러나 윔블던에 홈에서 1:1로 비긴데 이어 사우스햄튼과의 홈경기에서 매트 르 티 시에의 평범한 땅볼을 타이비가 알까기하며(...) 어이없게 실점했고 결국 3:3 무승부에 그쳤다. 그리고 첼시 FC 원정에서 또 타이비의 호러쇼로 5:0 대패를 당하며 프리미어리그 29경기 무패를 마감했다. 토트넘 원정에서도 3:1 패배를 당했다. 중반기까진 리즈 유나이티드에 잠시 밀리기도 했으나 토트넘전 패배 이후 이후 리그 26경기에서 뉴캐슬에 당한 3:0 패배를 제외하고 21승4무로 여유롭게 선두를 독주하며 28승7무3패 승점 91점으로 2위 아스날에 승점 18점차 압도적인 리그우승을 거뒀다.[31] 마지막 11경기는 전승이었다. 슈마이켈의 이적과 주전 센터백 로니 욘센과 백업 수비수 웨스 브라운, 데이비드 메이의 시즌 아웃으로 수비수들의 뎁스가 얇아져 45실점으로 다소 많은 실점을 기록했으나 이를 완전히 상쇄하는 무려 97득점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수비진의 빈틈을 잠재웠다. 요크가 24골, 콜이 22골, 솔샤르가 15골을 기록하며 막강한 팀 공격을 이끌었다. 이 시즌 PFA 올해의 선수상과 FWA 올해의 선수상을 주장 로이 킨이 모두 석권했다.
디펜딩챔피언으로 출전한 챔피언스리그에서 1차 조별예선[32]과 2차 조별예선[33]을 모두 조 1위로 통과했으나 8강에서 당시 우승팀 레알 마드리드와 만나 1차전 원정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한 뒤, 2차전 안방에서 2:3으로 패배하며 탈락했다.
도쿄에서 열린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브라질의 SE 팔메이라스를 1:0으로 꺾고 잉글랜드 클럽 중 이 대회를 우승한 첫 번째 팀이 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FA의 요청으로 브라질에서 열리는 FIFA 클럽 월드 챔피언십(현재 FIFA 클럽 월드컵)에 참가하게 되면서 FA컵에 기권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그 대회에서도 조 3위에 그쳐 토너먼트조차 가지 못했다. 리그컵에서도 첫 경기에서 아스톤 빌라에 0:3 패배로 광탈하며 국내대회는 리그 1개만 들어올리게 되었다.
시즌 종료 후 요르디 크루이프데포르티보 알라베스로 떠났고 눈뜬 장님 타이비도 고국인 이탈리아의 레지나로 떠났다. 슈마이켈의 대체자로 월드컵 야신상 경력의 파비앵 바르테즈를 영입했다.

5.9. 2000-0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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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적시장과 겨울이적시장을 모두 포함하여 영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겨울에는 헤닝 베르그가 블랙번으로, 바르테즈에 밀린 마크 보스니치가 첼시로 떠났다.
24승8무6패 승점 80점으로 2위 아스날에 승점 10점 앞서며 프리미어리그 출범 후 첫 번째 리그 3연패에 성공했다. 8라운드 아스날 원정에서 0:1로 패해 레스터 시티에 밀려 2위로 잠시 내려간 적은 있었으나 곧바로 다음 경기인 레스터 원정에서 3:0 승리를 거두며 선두를 탈환했고 8연승으로 독주했다. 승격팀 찰튼에 원정에서 3:3으로 비기고 리버풀과의 홈경기에서 0:1로 패해 상승세에 제동이 걸렸으나 12경기 9승3무로 또다시 상승세를 달리며 선두를 계속 독주했다. 홈에서 아스날을 6:1로 초토화시키기도 했다. 트레블 시즌 넘버4 공격수였던 테디 셰링엄은 21골(리그 15골)로 팀내 최다득점을 기록하며 PFA 올해의 선수상과 FWA 올해의 선수상을 휩쓸었고 시즌 후 친정팀인 토트넘 핫스퍼로 이적했다. 다만 기존 주전 투톱이었던 드와이트 요크앤디 콜이 각각 시즌 12골과 13골, 리그에서는 9골에 그치며 득점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시즌이 끝난 뒤 PSV 에인트호벤의 공격수 뤼트 판니스텔루이를 클럽레코드인 1,90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스티브 맥클라렌 수석코치는 브라이언 롭슨의 경질로 공석이 된 미들즈브러 FC 감독으로 떠났다.[34]
그러나 리그 외 다른 대회에서는 모두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며 다소 심심한 시즌을 보냈다.[35] 리그컵에선 4라운드에서 선덜랜드에 탈락했고 FA컵에서는 홈에서 열린 4라운드 웨스트햄전에서 그 유명한 바르테즈의 택시사건으로 실점하며 0:1로 패해 조기 탈락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조별리그 1차와 2차를 모두 조2위로 통과하며 8강에 올랐지만 바이에른 뮌헨과 2년 만에 재회하여 홈에서 0:1 패, 원정에서 1:2 패로 도합 1:3으로 설욕을 당했고 뮌헨은 해당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이 되었다.

5.10. 2001-02 시즌


PSV 에인트호벤의 공격수 뤼트 판니스텔루이와 세계 4대 미드필더로 꼽히던 SS 라치오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을 영입했다. 자서전 사건이 있었던 주전 센터백 야프 스탐SS 라치오로 이적했다. 스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월드컵 우승 센터백 로랑 블랑을 인테르에서 데려왔다. 그 외에는 백업 골키퍼로 로이 캐롤을 위건 애슬레틱으로부터 영입했다.
그러나 1997-98시즌 이후 4년 만에 무관으로 마감했다. 프리미어리그 출범 후 처음으로 3위에 그쳤고, 챔피언스리그는 준결승에서 원정다득점 원칙에 의해 바이어 04 레버쿠젠에 탈락했다. 리그컵은 첫 경기에서 아스날에 원정에서 4:0 참패를 당해 광탈, FA컵도 4라운드에서 퍼거슨의 오른팔이었던 스티브 맥클라렌이 이끈 미들즈브러에 원정에서 2:0으로 패해 광탈했다. 퍼거슨 감독이 시즌 전 은퇴를 예고했는데 비록 아내의 말을 듣고 번복했지만 이게 시즌 초반 팀이 심하게 흔들리는 원인이 되었다.
개막전에서 승격팀 풀럼 FC에 홈에서 루이 사아에게 2골을 허용하며 고전했으나 이날 프리미어리그 데뷔전을 치른 이적생 반 니스텔루이의 동점골과 역전골로 3:2 역전승을 거뒀다. 또다른 승격팀 블랙번 원정에서 2:2 무승부, 빌라 원정에서 1:1 무승부로 마친 후 4라운드 에버튼과의 홈경기에서 베론의 데뷔골이 나오며 4:1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5라운드 뉴캐슬 유나이티드 원정에서 난타전 끝에 바르테즈의 실수 등으로 3:1로 지는 경기를 긱스와 베론의 골로 3:3을 만들었지만 경기 막판 웨스 브라운의 자책골이 나오며 아쉽게 첫 패를 당했다.
6라운드 지난시즌 돌풍의 팀 입스위치 타운에 4:0 대승을 거두고 7라운드 토트넘 원정에서 전반전 3:0으로 지던 경기를 후반전 콜과 블랑, 반 니스텔루이, 베론, 베컴의 득점으로 대거 5골을 퍼부으며 5:3 대역전승을 거뒀다. 8라운드 선덜랜드 원정도 3:1로 무난하게 승리했다.
챔피언스리그 1차 조별라운드에서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릴 OSC, 올림피아코스와 한 조가 되었다. 9월 18일 1차전 릴과의 홈경기는 종료 직전까지 0:0으로 끌려가다 종료 직전 베컴의 극적인 결승골로 1:0 신승을 거뒀다. 9월 25일 2차전 잉글랜드 팀들의 무덤이었던 리아소르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원정은 스콜스의 득점을 잘 지켜내며 그 징크스를 깨는 듯 했으나 종료 5분을 남기고 연거푸 2골을 허용하며 2:1 역전패를 당했다. 10월 10일 3차전 올림피아코스 원정에서 후반 베컴과 콜의 득점으로 2:0 승리를 거두며 조1위가 되었다. 그러나 10월 17일 홈에서 열린 데포르티보와의 4차전에서 바르테즈의 2개의 실책으로 반 니스텔루이가 2골을 넣었음에도 홈에서 어이없게 2:3 역전패를 당했다. 10월 23일 홈에서 열린 올림피아코스와의 5차전에서 후반 막판에 나온 솔샤르와 긱스, 반 니스텔루이의 득점으로 3:0 대승을 거두며 2차 조별라운드에 진출했다.
10월 중순부터 12월까지 7경기 1승1무5패를 기록하며 9위까지 미끄러졌다. 9라운드 승격팀 볼튼과의 홈경기에서 베론의 프리킥 선제골에도 불구하고 놀란과 리케츠에게 실점하며 1:2로 졌다. 개막 후 무패였던 리즈 유나이티드와 10라운드 로즈더비 홈경기는 비두카에게 실점하며 패배 위기에 있다가 교체투입된 솔샤르의 동점골로 1:1로 간신히 비겼다. 11라운드 리버풀 원정에서는 오웬에게 2골, 리세에게 1골을 실점하고 베컴이 1골 만회하는데 그치며 3:1 완패로 맞대결 3연패를 기록해 6위로 추락했다. 하위권의 레스터에 2:0 승리를 거둔 뒤 아스날-첼시-웨스트햄을 상대로 1:3, 0:3, 0:1로 3연패를 당해 15경기 6승3무6패에 27실점이라는 맨유로서는 믿기지 않는 성적을 기록하며 1경기 덜 치른 리버풀에 승점 11점차 뒤져진 9위가 되었다. 혼돈의 리그였던 탓에 16위와 승점차는 불과 2점이었다. https://www.11v11.com/league-tables/premier-league/09-december-2001/ 스탐의 공백은 컸고, 블랑은 급하게 수혈되었으며 야신상 바르테즈 골키퍼는 아스날전에서 앙리에게 패스하며 어이없게 실점하는 등 연일 실책을 연발하며 수비 불안을 가중시켰다.
9위까지 떨어졌으나 이후 8연승하며 1위를 탈환했다.[36] 이 기간 반니스텔루이는 사우스햄튼에 해트트릭을 기록한 것을 포함해 8경기 모두 득점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리버풀에 홈에서 지난해에 이어 대니 머피에게 결승골을 허용하고 0:1로 패해 두 시즌 연속 리그 맞대결을 리버풀에 모두 내줬다. 리버풀전 패배 이후 볼튼 원정에서 4:0 대승으로 전반기 패배를 설욕하고 선덜랜드에 홈에서 4:1 승, 찰튼 원정 2:0 승, 빌라와의 홈경기 1:0 승리로 4연승하며 1위는 지켰다. 그러나 29라운드 강등권 더비 카운티 원정에서 2:2 무승부에 그치며 1위는 지켰지만 우승의 주도권을 2월부터 미친듯이 연승행진을 시작한 아스날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토트넘에 홈에서 4:0 승, 웨스트햄에 원정에서 5:3 승리를 거뒀지만 3월 23일 32라운드 맨유의 수석코치였던 맥클라렌이 이끈 미들즈브러와의 홈경기에서 0:1로 패하며 1위 자리를 리버풀에게 빼앗기고 말았다.[37] 결국 시즌 막판 아스날과의 홈경기에서 실뱅 윌토르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0:1로 패해 아스날의 우승이 확정되어 4년 만에 우승에 실패하게 된다. 24승5무9패 승점 77점으로 최종 순위는 2위 리버풀보다 승점 3점이 뒤쳐진 3위에 그쳤다.[38] 리그 홈경기에서 6패나 기록하며 1977/78 시즌 이후 최악의 홈경기 성적을 기록했다. 87득점으로 리그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올렸지만 45실점이나 내준 수비는 시즌 내내 불안요소였다. 이 때문에 다음 시즌 잉글랜드 국가대표 센터백 리오 퍼디난드를 영국 내 최다 이적료로 비싸게 영입하게 된다.
챔피언스리그 2차 조별라운드에서 바이에른 뮌헨, 보아비스타, FC 낭트와 한 조가 되어 3승3무 무패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 1차 조별라운드에서 만났던 데포르티보를 다시 만나 1차전 원정에서 3:2 승, 2차전 홈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완벽한 설욕에 성공해 준결승에 진출했으나[* [39] 준결승에서 바이어 04 레버쿠젠에 홈에서 2:2 무, 원정에서 1:1 무로 원정다득점에서 밀려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리그컵과 FA컵 모두 이른 라운드에서 각각 아스날과 미들즈브러에 광탈하며 4년 만에 무관으로 마쳤다.
새로운 공격수 뤼트 판니스텔루이는 적응기 없이 전체 대회에서 36골(리그 23골)을 기록하며 훌륭한 활약을 보였지만 또다른 이적생인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은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기대 이하의 활약을 보였다.
데니스 어윈과 로니 욘센은 각각 12년, 6년의 맨유 커리어를 마감했다. 트레블 시즌 백업골키퍼였던 레이몬드 판 데르 고우도 팀을 떠났다.
판니스텔루이의 영입으로 입지가 좁아진 앤디 콜은 겨울에 블랙번 로버스로 이적했으며 후보로 전락한 드와이트 요크는 시즌 후 콜을 따라 블랙번 로버스로 떠났다. 대신 앤디 콜이 떠난 뒤 겨울이적시장에서 인데펜디엔테의 우루과이 공격수 디에고 포를란을 영입했다. 이로써 트레블 이후 3년도 안되어 공격수 4명 중 솔샤르만 빼고 모두 팀을 떠나게 되었고 판니스텔루이를 중심으로 공격이 재편되었다.

5.11. 2002-0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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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수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창 주가가 높았던 잉글랜드와 리즈 유나이티드의 센터백 리오 퍼디난드를 영국 내 최고 이적료인 2,90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그 외에는 레알 바야돌리드로부터 골키퍼 리카르도를 데려와 백업 골키퍼를 보강했다.
퍼디난드의 영입으로 수비가 안정되며 맨유는 2년 만에 아스날로부터 리그 우승을 탈환했다. 3월 초까지 승점 8점이 뒤졌지만 마지막 18경기에서 15승3무를 기록하는 강한 뒷심을 발휘하며 아스날을 제치고 역전 우승에 성공했다. 11년 동안 8번의 리그 우승으로 잉글랜드의 최강자는 맨유임을 증명했다. 반 니스텔루이는 리그에서 25골, 전체 44골을 기록하며 1년 전 아스날의 티에리 앙리에 1골차로 빼앗긴 첫 번째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을 이번엔 1골차로 따돌리고 차지했다.
시즌 출발은 정말 좋지 않았다.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 1차전에서 약체인 헝가리의 졸로에게르세르에 1차전 원정에서 경기 막판 실점으로 0:1 패배를 당하는 이변을 허용했다. 개막전 승격팀 WBA와의 홈경기에서 교체투입된 솔샤르[40]의 늦은 결승골로 간신히 1:0으로 이겼다. 졸로에게르세르를 2차전 홈경기에서 5:0으로 뭉개고 1차 조별예선에 진출했으나 9월 11일과 14일 리그에서 볼튼에 홈경기 0:1 패배, 리즈 유나이티드에 원정 0:1 패배로 연패를 허용하며 2승2무2패로 10위까지 추락했다. 또한 주장 로이 킨알프잉게 홀란과의 사건에 대해 자서전에서 고의로 다치게 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며 벌금과 함께 출전 정지 징계를 받는 악재까지 발생했다.
9월 21일 토트넘과의 7라운드 홈경기에서 반니의 PK로 1:0으로 이기며 연패를 끊었고, 9월 28일 8라운드 찰튼 원정에서 3:1 역전승하며 원정 첫 승리에 성공했다. 10월 7일 9라운드 에버튼과의 홈경기에서 몹시 고전했으나 경기 종료 5분을 남기고 스콜스의 2골과 반니의 PK로 3:0 완승하여 3연승에 성공, 4위에 올랐다. 하지만 10월 19일과 26일 풀럼 원정과 빌라와의 홈경기에서 1:1 무승부에 그쳐 리버풀[41]-아스날과의 순위 싸움에서 다소 뒤쳐지게 되었다. 11월 2일 12라운드 사우스햄튼과의 홈경기에서 디에고 포를란의 결승골[42]로 2:1로 이겼으나 11월 9일 13라운드 맨체스터 시티와의 라이벌전 원정 경기[43]에서 게리 네빌의 뼈아픈 실책 등이 겹치며 3:1 완패했고 11월 17일 14라운드 강등권에 허덕이며 글렌 로더 감독의 경질설이 돌던 웨스트햄 원정에서 1:1 무승부에 그치고 말았다. 14라운드까지 맨유의 성적은 6승5무3패 승점 23점으로 아스날-리버풀-첼시-에버튼에 뒤진 5위였다. 선두 아스날과의 승점차는 9점이나 됐다. 여기에 뉴캐슬-리버풀-아스날과의 어려운 경기들을 앞두게 되었다. 연초 고심 끝에 은퇴를 번복했던 퍼거슨 감독에 대한 비판 여론도 불거졌고 이제는 한물간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강팀들과의 3연전에서 3전 전승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11월 23일 뉴캐슬과의 15라운드 홈경기에서 난타전 끝에 반니의 해트트릭과 스콜스, 솔샤르의 득점으로 후반 10분까지 5골을 만들어내며 5:3 승리를 거뒀다. 아스날이 소튼 원정에서 3:2 패배하며 선두와의 승점차는 6점이 되었다. 12월 1일 지난 두 시즌간 홈어웨이 4전 4패를 기록했던 리버풀과의 대결에서 안필드 원정임에도 두덱 골키퍼의 어이없는 실책을 놓치지 않은 디에고 포를란의 후반 18분과 21분 2골로 2:1 승리를 거뒀다. 이 승리로 맨유는 에버튼을 제치고 4위가 되었고 2위 리버풀과의 승점차도 2점차로 줄였다. 12월 7일 17라운드 선두 아스날과의 홈경기는 베론과 스콜스의 득점으로 2:0 완승을 거두고 선두와의 승점차를 3점으로 좁혔고 리버풀을 제치고 3위가 되었다. 12월 14일 18라운드 최하위 웨스트햄과의 홈경기에서도 베론의 프리킥골 등으로 3:0 완승을 거두며 4연승에 성공했고 첼시와 아스날이 모두 무승부를 기록하며 첼시를 제치고 선두 아스날에 승점 1점차 2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12월 22일과 26일 19, 20라운드 블랙번과 보로 원정에서 로이 킨이 출장정지 징계에서 복귀했음에도 1:0, 3:1 패배로 연패를 당하며 20라운드까지 10승5무5패로 선두 아스날에 승점 7점차 뒤쳐지고 2위 첼시에 승점 3점 뒤쳐진 3위에 그쳤다. 하지만 맨유는 보로전 패배가 리그에서의 마지막 패배였다.
2002년의 마지막 경기였던 12월 28일 21라운드 버밍엄 시티와의 홈경기에서[44] 포를란과 베컴의 골로 2:0 승리를 거두며 분위기를 추스렸다. 베론의 스루패스에 이은 베컴의 로빙 칩슛이 압권. 아스날이 리버풀과의 홈경기에서 1:1로 비기고 첼시가 리즈 원정에서 2:0 패배를 당하며 첼시와 승점 동률로 3위지만 아스날에 승점 6점차로 추격하게 되었다. 2003년 첫 경기였던 1월 1일 22라운드 선덜랜드와의 홈경기는 경기 종료 10분 전까지 1:0으로 지고 있었지만 베컴의 동점골과 스콜스의 버저비터 역전골로 2:1 역전승을 기록했다. 이 승리로 아스날에 3:2로 패배한 첼시를 승점 3점차로 제치고 2위가 되었다. 1월 11일 23라운드 WBA 원정에서 이른 시간 선제골을 허용했으나 반니와 스콜스, 솔샤르의 득점으로 3:1 역전승을 거두며 3연승했다. 1월 18일 24라운드 3위 첼시와의 홈경기는 구드욘센에게 선제골을 실점했으나 쿠디치니의 클리어링 미스를 틈타 베컴의 크로스에 이은 스콜스의 동점골, 종료 직전 베론의 환상적인 킬패스를 받은 포를란의 극적인 역전골로 2:1 승리를 거두며 4연승했다. 2월 1일 26라운드 소튼 원정은 반니와 긱스의 득점으로 2:0 완승을 거두며 5연승했고 2월 4일 25라운드 버밍엄 원정도 반니의 결승골로 1:0 승리, 6연승을 거두며 선두 아스날을 승점 3점차로 추격했다.
연승행진은 맨체스터 시티와의 홈경기에서 끝났다. 2월 9일 27라운드 맨체스터 시티와의 더비매치 홈경기에서 반니의 선제골로 앞서갔지만 션 고터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며 1:1 무승부를 허용해 연승을 6연승에서 마감했고, 시즌 맨체스터 시티와의 맞대결에서 1무1패에 그치게 되었다. 2월 22일 28라운드 강등 위기의 볼튼 원정에서 종료 직전까지 1:0으로 끌려가다가 솔샤르의 극적인 동점골로 1:1 무승부를 기록했고 아스날의 승리로 승점차는 5점으로 벌어졌다. 워싱턴컵(리그컵) 결승전 시점까지 맨유는 16승7무5패 승점 55점으로 한 경기 덜 치른 채 선두 아스날에 승점 8점차로 뒤쳐졌다.
워싱턴컵 결승전 패배 이후 첫 경기였던 3월 5일 29라운드 재정난으로 인해 하위권으로 처진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로즈 더비 홈경기에서 라데베의 자책골과 실베스트르의 결승골을 묶어 2:1 승리를 거뒀고 선두 아스날과의 승점차를 5로 줄였다. 3월 15일 30라운드 아스톤 빌라 원정은 데이비드 베컴의 결승골로 1:0으로 이겨 다시 연승에 성공했고, 아스날이 블랙번 원정에서 2:0으로 완패해 승점차를 2점으로 좁히는데 성공했다. 3월 22일 31라운드 풀럼과의 홈경기는 반니의 해트트릭으로 3:0 완승을 거두며 아스날을 제치고 시즌 처음으로 선두에 올랐다. 반니의 일명 말달리자로 불리는 단독 드리블골이 나온 것은 덤. 다음날 아스날이 에버튼에 2:1 승리를 거두며 하루 만에 2위가 되었다.
A매치 브레이크 이후 4월 5일 32라운드 리버풀과의 홈경기에서 상대 수비수 히피아의 퇴장과 2개의 PK를 반니가 성공시키고 긱스, 솔샤르의 골을 묶어 4:0 대승을 거두며 리그에서 리버풀에 더블에 성공했다. 아스날이 빌라 원정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아스날과 승점 동률에 골득실에서 뒤쳐진 2위가 되었다. 4월 12일 33라운드 3위 뉴캐슬 원정에서는 폴 스콜스가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세인트 제임스파크 홈관중들을 얼어붙게 했고 6:2 대승으로 5연승을 거뒀다. 맨유는 시즌 뉴캐슬 상대로만 2경기 11골을 넣었다.[45] 이 승리로 3위였던 뉴캐슬은 우승 경쟁에서 사실상 탈락했으며 FA컵 준결승으로 경기가 없어 1경기 덜 치른 아스날을 승점 3점차로 제치고 단독 선두에 오르게 되었다. 골득실에서도 +32를 기록하며 아스날의 +33을 거의 따라잡았다.
4월 16일에 열린 아스날과의 원정경기는 사실상의 리그 결승전이었다. 전반 24분 반니가 긱스의 패스를 받아 캠벨과 키언을 제치고 선제골을 넣었다. 후반 5분 아스날은 애슐리 콜의 슈팅이 앙리의 발에 맞고 들어가 동점골을 기록했고, 후반 17분 앙리가 오프사이드 트랩을 뚫고 멀티골을 득점하며 역전했다. 하지만 맨유는 킥오프한지 1분도 채 안 되어 긱스가 솔샤르의 크로스를 동점골로 연결시켰다.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고 맨유와 아스날의 우승 경쟁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스날은 비에이라가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 주장직을 키언에게 넘기고[46] 교체되었고 솔 캠벨이 솔샤르에 대한 팔꿈치 가격으로 레드카드를 받아 3경기 출장 정지를 받는 대형 악재를 맞이했다.
4월 19일 유럽대항전 진출을 노리는 블랙번과의 35라운드 홈경기에서 3:1 완승을 거두며 아스날과의 승점차를 유지했다. 전반 20분 베컴의 크로스에 이어 반니가 선제골을 넣었고 곧바로 블랙번의 헤닝 베르그에게 동점을 허용했으나 스콜스의 기막힌 위치선정에 의한 2골로 3:1로 이길 수 있었다. 전반 종료 무렵 바르테즈가 부상으로 빠져 리카르도로 교체되었고 리카르도가 페널티 박스 안에서 파울을 저질러 페널티킥을 허용해 동점 위기가 있었지만 리카르도가 PK 선방으로 자신의 실수를 직접 만회했다.
4월 27일 36라운드 먼저 치러진 경기에서 아스날이 강등 위기의 볼튼 원정에서 2:2 무승부에 그쳐 발목을 잡힌 가운데 맨유는 토트넘 원정을 떠났다. 토트넘의 케이시 켈러 골키퍼의 여러차례 선방에 막혀 고전했으나 후반 22분 스콜스가 긱스와 패스와 크로스를 주고받으며 헤딩으로 매우 중요한 선제골에 성공했고, 경기 종료 직전 반니가 포춘의 패스를 받아 시즌 40번째 득점에 성공하며 경기에 쐐기를 박았다. 이 승리로 승점 77점의 맨유는 1경기 덜 치른 승점 72점의 아스날에 승점 5점차로 앞선 선두에 등극했다.
5월 3일 37라운드 찰튼과의 시즌 마지막 홈경기에서 반니의 해트트릭으로 4:1 대승을 거두며 잔여 3경기 남은 아스날과의 승점차를 8점으로 벌려 매직넘버를 2로 줄였다. 반니는 해트트릭으로 챔피언스리그를 포함해 9경기 연속 득점의 물오른 감각을 뽐내며 시즌 43번째 득점으로 맨유 공격을 주도했다. 레알 마드리드 이적설이 불거지던 데이비드 베컴은 선제골을 득점하고 반니의 팀 4번째 골을 도우며 마지막 맨유에서의 홈경기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이로써 다음날에 열리는 아스날과 리즈의 대결에서 아스날이 승리하지 못할 경우 맨유의 15번째 우승이 확정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스날이 강등 위기에 있던 리즈에 홈에서 2:3 패배를 당하며 맨유의 우승이 확정되었다.
5월 11일 최종전 에버튼과의 구디슨 파크 원정경기에서 프리미어리그 시상식을 맞이하게 되었다. 에버튼은 UEFA컵 막차 탑승을 위해 반드시 승리가 필요한 입장이었고 전반 8분 케빈 캠벨이 선제골을 득점했다. 하지만 맨유는 전반 42분 베컴이 자신의 전매특허인 프리킥으로 동점골에 성공하며 맨유에서의 마지막 득점을 했고, 후반 33분 반니가 PK로 앙리와의 득점왕 경쟁에서 앞서는 역전골을 성공시켜 에버튼의 유럽대항전 희망에 찬물을 끼얹었다.[47] 맨유는 25승 8무 5패 승점 83점으로 승점 78점의 2위 아스날에 승점 5점차로 앞서며 시즌을 마쳤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1차 조별리그에서 조1위[48], 2차 조별리그에서 조1위[49]로 통과한 뒤 8강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빅매치를 만나 명승부를 펼쳤다. 1차전 원정에서 3:1로 패한 뒤, 2차전에서 챔피언스리그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 끝에 호나우두에게 해트트릭을 내줬음에도 4:3으로 역전했으나 결국 합계 5:6으로 뒤져 탈락했다.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이 경기를 보고 첼시 FC를 인수하는데 영감을 주었다.[50]
워싱턴컵(리그컵)에서는 2부리그의 레스터와 번리, 프리미어리그의 첼시와 블랙번을 꺾고 결승에 진출했으나 숙적 리버풀 FC에 2:0으로 져 준우승했다. 전반 41분 제라드의 슈팅이 베컴의 발을 맞고 골문으로 들어가는 불운이 있었고, 후반 오웬에게 쐐기골을 허용했다.
FA컵에서는 3라운드 2부리그 포츠머스에 4:1 대승, 4라운드 웨스트햄에 6:0 대승을 거뒀지만 16강에서 아스날에 홈에서 긱스가 완벽한 노마크 골찬스를 어이없게 놓치고 무력하게 0:2로 져 탈락했다. 이 경기 후 라커룸에서 빡친 퍼거슨이 찬 축구화의 스터드에 베컴의 이마에 맞아 부상당하며 베컴과 퍼거슨의 불화설이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시즌이 끝난 뒤 베컴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로랑 블랑은 이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5.12. 2003-0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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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이적시장에서 지난 몇 년과는 다르게 많은 영입이 있었다. 다비드 벨리옹, 에릭 젬바젬바, 팀 하워드, 클레베르송,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영입되었다. 퍼거슨과 불화가 있던 데이비드 베컴이 레알 마드리드로 떠났으며 EPL 적응에 실패한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은 로만이 인수한 첼시로 이적했다. 겨울이적시장에서는 풀럼 FC의 에이스 루이 사아가 영입되었고 하워드에 밀린 파비앵 바르테즈올림피크 마르세유에 임대되었다가 완전이적했다. 중국의 둥팡줘는 겨울이적시장에서 데려오기는 했는데 워크 퍼밋 문제로 곧바로 로열 앤트워프 임대행.
아스날과의 커뮤니티실드는 팀 하워드의 승부차기 맹활약으로 승리했다. 초반에는 리그에서 아스날, 첼시와 선두경쟁을 하며 잘 나갔지만 리오 퍼디난드의 도핑테스트 불참으로 인한 8개월 자격정지가 내려진 2004년 1월 이후 팀이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23승6무9패 승점 75점에 그쳐 무패우승의 아스날에 승점 15점이 뒤쳐지고 2위 첼시에 승점 3점이 뒤쳐진 3위로 마감하게 되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조별라운드에서 VfB 슈투트가르트, 파나티나이코스, 레인저스 FC와 한 조를 이루어 5승1패 조1위로 통과했으나 16강 토너먼트에서 주제 무리뉴의 포르투를 만나 1차전 원정에서 2:1 패배를 당한 뒤, 2차전에서 폴 스콜스의 선제골로 원정다득점으로 8강을 눈앞에 두었지만 종료 직전 팀 하워드의 실책에 이은 코스티냐에게 동점골을 내줘 합계 3:2로 탈락했다.
리그컵에서도 4라운드에서 2부리그의 웨스트 브롬위치에 광탈하는 굴욕을 겪었지만 다행히 FA컵에서는 우승하며 무관으로는 시즌을 마치지 않게 되었다. 아스톤 빌라와 노샘프턴 타운, 맨체스터 시티, 풀럼을 제압한 뒤 준결승에서 아스날을 폴 스콜스의 결승골로 1:0으로 이겼고, 결승에서 2부리그 팀 밀월 FC를 상대해 3:0 완승을 거두며 통산 11번째로 FA컵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5.13. 2004-05 시즌


여름이적시장에서 유로 2004에서 혜성처럼 떠오른 만 18세의 잉글랜드의 슈퍼루키 웨인 루니를 에버튼으로부터 2,700만 파운드를 지불하고 영입했다. 강등된 리즈 유나이티드로부터 앨런 스미스를 영입했고, 파리 생제르맹으로부터 측면 수비수 가브리엘 에인세도 영입했다. 유망주인 주세페 로시헤라르드 피케도 합류했다. 니키 버트디에고 포를란은 각각 뉴캐슬 유나이티드비야레알 CF로 이적했다. 퍼거슨의 실패작 중 하나인 에릭 젬바젬바도 겨울에 떠났다.
그러나 개막전부터 최고의 갑부팀 첼시 FC에 원정에서 1:0으로 패하며 최악의 스타트를 했다. 홈에서 아스날 FC의 49경기 연속 무패 기록을 깼으나 11월까지 7위에 처지며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이후 올라온 팀은 올라온다고 20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하고 아스날을 상대로 원정에서도 유명한 터널 사건 끝에 4:2 완승을 거두며 더블을 기록, 2위까지 치고 올라왔으나 막판 페이스가 떨어져 강등권의 노리치에 패하는 등 결국 22승11무5패로 두 시즌 연속 3위라는 아쉬운 성적으로 리그를 마감했다. 마지막 홈경기에서는 우승팀 첼시 FC 선수들을 상대로 가드 오브 아너를 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뤼트 판니스텔루이가 잔부상으로 인해 리그에서 16경기 선발출전에 그치며 팀득점수가 58득점으로 뚝 떨어졌다.
챔피언스리그 조별라운드에서[51] 올림피크 리옹에 이어 2위를 기록했고, 16강에서 AC 밀란에 홈어웨이 모두 0:1로 져 탈락했다.
리그컵은 준결승에서 첼시에 1차전 원정 무승부 이후 2차전 홈경기에서 1:2로 져 탈락했다. 디펜딩 챔피언 자격의 FA컵은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무관 피하기 단두대매치가 된 아스날과의 결승전에서 0:0 무승부 이후 승부차기 끝에 폴 스콜스의 실축으로 4:5로 져 3년 만에 무관의 멍에를 떠안았다.
2005년 5월 미국의 글레이저 가문이 8억파운드의 금액으로 클럽을 인수했다. 이에 일부 팬들은 항의하여 FC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를 만들었다.

5.14. 2005-06 시즌


[image]
맨유 유스 출신의 수비수 필 네빌에버튼으로 떠났다. EPL 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주제 클레베르송도 베식타스로 이적했다. 로이 캐롤과 리카르도도 자유계약으로 방출되었다.
슈마이켈 이후 6년 동안 골칫거리였던 골키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풀럼과 네덜란드의 골키퍼 에드윈 반 데 사르를 영입했다. 그리고 PSV 아인트호벤으로부터 박지성을 영입했다.
프리미어리그 개막 후 무실점 3연승을 거두며 기분좋게 시작했으나 맨시티와 리버풀에 무승부, 그리고 블랙번을 상대로 홈에서 페데르센에게 2골을 실점해 1:2로 패하며 부진했다. 2005년 10월 29일에는 미들즈브러 원정에서 4:1 대패를 기록하며 7위까지 처지기도 했다.[52] 주장 로이 킨은 맨유의 여러 선수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가 결국 방출되었다.
어수선한 팀분위기 속에서 홈에서 선두 첼시를 상대로 대런 플레처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해 첼시의 40경기 연속 프리미어리그 무패 기록을 마감시켰고 리그에서 연승을 기록하며 2위까지 올랐다. 하지만 비야레알 CF, SL 벤피카, 릴 OSC와 한조로 꿀조라고 예상되었던 챔피언스리그에서 부진한 경기 끝에 최종전에서 벤피카에 2:1로 역전패에 조4위로 UEFA컵조차 나가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리그에서는 맨체스터 시티와 블랙번에 패배하며 1위 첼시에 승점 15점차까지 벌어졌다. FA컵에서도 16강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FA컵 리버풀전 85년 무패를 마감하며 0:1로 져 탈락했다.
겨울이적시장에서 몇 년간 맨유의 주축을 이루는 네마냐 비디치파트리스 에브라를 영입했다.
블랙번 원정에서 벤틀리에 해트트릭을 허용해 4:3으로 패배한 이후 맨유는 리그에서 9연승을 기록해 15점차까지 벌어졌던 첼시를 승점 7점차까지 추격했고 리그컵에서는 위건 애슬레틱을 결승에서 4:0으로 꺾고 2년 연속 무관은 면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루드 반니스텔루이는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고 퍼거슨 감독은 루이 사아와 웨인 루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주축으로 공격진을 개편하며 리빌딩에 나서기 시작했다.
9연승의 상승세는 어이없게도 최하위 선덜랜드와의 홈경기에서 0:0으로 비기며 마감하게 되었다. 결국 첼시 원정에서 3:0으로 패해 첼시가 우승을 홈에서 확정지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리버풀과 최종전까지 챔피언스리그 직행이 주어지는 2위 경쟁을 했고, 최종전에서 찰튼에 4:0으로 대승을 거두며 막판 9연승으로 쫓아온 리버풀의 추격을 뿌리치고 2위만은 지켰다.

5.15. 개별 문서가 존재하는 시즌



5.15.1. 2006-07 시즌


'''우승한 대회: 프리미어리그'''

5.15.2. 2007-08 시즌


'''우승한 대회 :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스 리그, 커뮤니티 실드'''

5.15.3. 2008-09 시즌


'''우승한 대회 : 프리미어리그, 리그컵, 커뮤니티 실드, 클럽 월드컵'''

5.15.4. 2009-10 시즌


'''우승한 대회 : 리그 컵'''

5.15.5. 2010-11 시즌


'''우승한 대회 : 프리미어 리그, 커뮤니티 실드'''

5.15.6. 2011-12 시즌


'''우승한 대회 : 커뮤니티 실드'''

5.15.7. 2012-13 시즌


'''우승한 대회 : 프리미어리그'''
알렉스 퍼거슨과의 마지막 시즌

5.15.8. 2013-14 시즌


'''우승한 대회 : 커뮤니티 실드'''
몰락의 시작

5.15.9. 2014-15 시즌


'''우승한 대회 : 무관'''

5.15.10. 2015-16 시즌


'''우승한 대회''' : '''FA컵'''

5.15.11. 2016-17 시즌


'''우승한 대회''' : '''커뮤니티 실드, EFL컵''', '''UEFA 유로파 리그'''
새로운 감독과 함께한 첫 시즌. 리그에선 죽을 쒔지만 2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챔피언스리그로 복귀했다.[53]

5.15.12. 2017-18 시즌


'''우승한 대회''' : '''무관'''
부임 2년차에 일내는 감독과 함께한 두번째 시즌. 하지만 트로피를 하나도 들어올리지 못했다.(UEFA 슈퍼컵,FA컵 준우승/챔스 16강/리그컵 8강) 리그에서 2위를 기록했지만 경기력은 2016-17 시즌보다 더 좋지 못했다.

5.15.13. 2018-19 시즌


'''우승한 대회 : 무관'''

5.15.14. 2019-20 시즌


'''우승한 대회 : 무관'''

5.15.15. 2020-21 시즌



6. 관련 문서



[1] 180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잉글랜드 리그는 축구 종가로써 위엄이 있었고, 독보적인 세계 최고의 리그였다. 잉글랜드인들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 독일, 스페인, 이태리 등을 돌아다니며 그들에게 축구를 본격적으로 전파시키고 영향력을 끼쳤던 시절이다. 당시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이명(異名)을 갖고 있던 영국의 강대한 국력을 자양분 삼아 축구가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유럽과 남미 전역에 원시적 형태로 자리하던 클럽들은 '축구 종가(宗家)'에서 풋볼리그가 탄생했다는 소식에 자극받아 친선전 혹은 소규모 토너먼트 식으로 치르던 수준에서 벗어나 속한 국가를 기준으로 리그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현재 100년을 훌쩍 넘은 유럽과 남미 프로축구 리그가 뿌리내리게 된 배경이다. 1930년대 이후 월드컵이 생기면서 클럽은 세계적으로 발전해갔고, 그 중에서도 특히 개방적이었던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큰 자금력을 바탕으로 더 성장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당시 전혀 개방적이지 못했고 FIFA월드컵의 참여를 거부했었다. 즉,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남미 스타들을 대거 유입하면서 잉글랜드보다 축구 기간이 짧았지만 그것을 커버했고 빠르게 발전해 나간 형태라면, 잉글랜드 클럽은 초창기에는 축구종가로써의 위치를 확고히했지만, 30년대 이후로 접어들면서 FA는 (유럽무대)보다 자국 리그에 더 집중할 것을 클럽들에게 원했다.[2] 퍼거슨이 은퇴했던 2013년 당시 기준으로, EPL 장기집권 감독은 1위 맨유의 퍼거슨 감독(27년), 2위 아스날의 벵거 감독(17년), 3위 에버튼의 모예스 감독(11년) 순이었다.[3] 루이 판 할은 아약스 유스 출신 선수들로 1994-95 시즌 리그와 챔스에서 '무패 더블'을 했던 명장이다. 맨유의 골키퍼였던 에드윈 반 데 사르도 그 당시 아약스 멤버였다.[4] 캄프 누의 기적 당시 팀의 주축이던 로이 킨폴 스콜스가 결장해서 베컴이 중미로 뛰었다. [5] 아스톤 빌라 FC[6]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및 신흥 강호 맨체스터 시티 FC[7] 에버튼 FC리버풀 FC[8] 아틀레틱 빌바오[9] 보루시아 도르트문트[10] 말뫼 FF[11] AFC 아약스[12] 페예노르트 로테르담[13] 유벤투스 FC[14] AC 밀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15] 이 때는 유로피언컵이었다.[16] 퍼거슨경은 애버딘 FC시절, 셀틱의 10분의 1도 안되는 금액으로 수십년간 이어진 셀틱, 레인저스의 양강 체제를 무너뜨렸다. 거기에 바이에른 뮌헨과 레알 마드리드를 격파하며 위너스컵을 우승. UEFA 클럽랭킹 70위 대의 클럽이었던 애버딘을 UEFA 클럽랭킹 9위까지 올렸다. 1978년부터 1986년까지 애버딘을 이끌며 클럽의 전성기를 만들었던 퍼거슨은 애버딘 에서도 레전드 감독이다.[17] 알렉스 퍼거슨이 끌어올린 EPL의 전세계적 인기와 그로 인해 얻게된 엄청난 TV 중계권료는 결론적으로 리그의 중위권팀에게도 기회를 주게 되었다. 중계권료 (재정적 윤택)를 바탕으로 리그 중위권 클럽들이 더욱 두터워진 것이다. EPL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리그다. 막강하던 그 세리에 A가 몰락한 것도 결국은 돈 때문이었다. 선수영입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아부었지만 세리에A의 재정상태는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파르마, 피오렌티나는 파산했다. 스페인도 마찬가지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거듭되며 전체적인 수준이 하락했다. EPL은 다르다. 일각에서는 이런 추세라면 EPL 리그 20위가 라리가 양대산맥 레알 마드리드 CF, FC 바르셀로나의 중계권으로 받는 돈을 넘는 건 시간 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18] 해석하자면, 퍼거슨 재임 기간 중 25년 동안(2012년 기준) 레알 마드리드는 24명, 인테르는 19명, 첼시는 15명, 유벤투스·뮌헨·맨시티는 14명, AC 밀란은 13명, 바르사는 11명의 감독이 거쳐갔다. 그런데 27년 동안 앞에서 언급한 클럽 중에 퍼거슨 '''개인'''이 들어올린 통산 우승컵 개수(38개)와 동률인 '''클럽'''은 뮌헨 단 한 곳이며, 리그만 봤을 땐 분데스리가에서 독주 체제를 구축한 뮌헨(14회)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클럽'''도 퍼거슨(13회)보다 리그 우승을 더 많이 하지 못했다.[19] 데이비드 길은 맨유 은퇴 후, 영국 FA 부회장과 FIFA 집행위원회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20] 사우스햄튼으로부터 앨런 시어러를 영입하려 했으나 블랙번 로버스에게 빼았겼고, 셰필드 웬즈데이로부터 트레버 프랜시스 영입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21] 퍼기 타임의 시작이라고 한다.[22] 1888-89 프레스턴 노스 엔드, 1896-97 아스톤 빌라, 1960-61 토트넘 핫스퍼, 1970-71 아스날 FC, 1985-86 리버풀 [23] 첼시와의 두 경기 모두 게빈 피콕에게 결승골을 허용했다.[24]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다골차 승리이다. 이 기록은 2019-20 시즌 사우스햄튼과 레스터 시티의 경기에서 레스터가 9:0으로 승리하며 타이가 되었다. 여전히 프리미어리그 홈경기 최다골차 승리기록이다.[25] 현재는 2부리그인 러시아 풋볼 내셔널 리그에 있지만 볼고그라드를 대표하는 클럽으로 소련 해체 후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러시아 리그에서 나름 중상위권에 있던 팀이었다. [26] 윔블던(A) 4-2승, 블랙번(H) 1-0승, 에버튼(H) 2-0승, 볼튼(A) 6-0승[27] 유니폼 흑역사가 있었던 경기다. 등번호가 식별이 안된다는 이유로 퍼거슨 감독이 전반 45분만 입고 하프타임 때 당장 벗으라고 소리질러 폐기되었다.[28] 결과적으로 빌라는 시즌 6위, 첼시는 시즌 3위를 기록했다.[29] 블랙번은 이 결과로 인해 2부리그로 떨어졌다.[30] 1998 월드컵의 악연이 있던 베컴과 시메오네가 재회했다.[31] 2004/05 시즌 첼시가 승점 95점을 기록하고 2009/10 시즌 103골을 득점하기 전까지 각각 승점과 득점 부문에서 프리미어리그 최다기록이었다. 2위와 최다승점차 역시 2017/18 시즌 맨시티가 19점차로 경신했다.[32] 올림피크 마르세유, 슈투름 그라츠, 디나모 자그레브(당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와 한 조[33] 발렌시아 CF, ACF 피오렌티나, 지롱댕 드 보르도와 한 조.[34] 유스팀 코치인 마이크 펠란이 1군으로 올라왔지만 2001/02 시즌은 수석코치 없이 진행되었다.[35] 이 시즌이 리버풀의 유명한 리그컵-FA컵-UEFA컵 미니 트레블이 나왔던 시즌이다. 여담으로 그 시즌 리그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홈어웨이 모두 졌다.[36] 더비(H) 5-0 승, 미들즈브러(A) 1-0승, 사우스햄튼(H) 5-0승, 에버튼(A) 2-0 승, 풀럼(A) 3-2승, 뉴캐슬(H) 3-1승, 사우스햄튼(A) 3-1승, 블랙번(H) 2-1승[37] 아스날은 두 경기 덜 치른 상태였다.[38] 1989/90 시즌 이후 12년 만에 리버풀보다 아래의 순위로 마감했다. 퍼거슨이 은퇴한 2013/14 시즌 전까지 24년간 유일하게 리버풀보다 아래의 순위로 마감한 시즌이 되었다.[39] 베컴이 2차전에서 부상당하는 악재가 발생했다. 알도 두셰르에게 중족골 부상을 입은 베컴은 역시 시즌아웃에 2002 월드컵 출전조차 불투명했다. 두셰르의 국적이 하필이면 2002 월드컵에서 만날 잉글랜드의 라이벌 아르헨티나라 음모론이 있기도 했다.[40] 그의 맨유에서의 100호 득점이었다.[41] 시즌 초반 9승3무로 선두를 달리며 우승할 기세였다. 하지만 곧바로 11경기 무승으로 DTD했고 결국 최종전 첼시와의 단두대매치에서 져 챔피언스리그도 못나가고 말았다.[42] 유니폼을 벗는 세레머니를 하다가 경기 재개 이후 유니폼을 다시 제대로 입지 못해 손에 유니폼을 쥔채 벗은 채로 뛰는 일이 있었다.[43] 메인 로드에서의 마지막 맨체스터 더비였다. 그리고 페테르 슈마이켈이 맨체스터 시티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맨체스터 더비였다.[44] 전 주장 스티브 브루스가 맨유를 떠난 후 처음으로 OT를 방문했다.[45] 이는 2007/08 시즌 홈에서 6-0 승리, 원정 5-1 승리로 재현된다.[46] 이 경기 전 셰필드 유나이티드와의 FA컵 준결승에서도 무릎이 좋지 않아 조기 교체되었다.[47] 같은시각 블랙번이 토트넘과의 원정경기에서 4:0 대승을 거두며 에버튼은 최종전에서 6위에서 7위로 밀려나고 말았다.[48] 바이어 04 레버쿠젠, 마카비 하이파, 올림피아코스와 한 조[49] 유벤투스, FC 바젤,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와 한 조. 유벤투스엔 2번 모두 승리를 거두며 4번째 경기까지 전승으로 조1위로 가볍게 통과했다.[50] 처음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인수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51] 올림피크 리옹, 페네르바체, 스파르타 프라하와 한 조.[52]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종료 직전 맨유의 프리미어리그 1,000호골을 넣었으나 기뻐할 수 없었다.[53] 리그 성적만 놓고보면 유로파로 가야하지만 유로파리그를 우승했기 때문에 차기시즌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따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