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

 


1. 개요
2. 발단
3. 전개
4. 판결 결과
5. 재확산
6. 음모론과 반박
7. 사건이 남긴 것들
7.1. 한국의 반미 감정
7.2. SOFA는 불평등 조약인가?
7.3. 인터넷의 역할
8. 기타


1. 개요


2002년, 경기도 양주군에서 주한미군이 조종하던 미 육군 장갑차[1]에 의해 일어난 사고 및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일컫는다. 피해 학생들의 이름을 따서 '효순이 미선이 사건' 혹은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이라고도 한다. 결론을 우선 말하자면, 주한미군의 과실치사 사고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고'''임에도 유달리 미군이 고의적으로 일으킨 것처럼 인식 시키기 위해 "사건"으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라는 호칭은 윤민석이 작곡한 반미 노래인 'Fucking USA'로 유명한 송앤라이프에서 자주 부르던 호칭. 해당 노래에서도 언급된다. 단, 많이 알려진 'Fucking USA' 1편은 만들어진 시점이 여중생 압사 사건 이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폴로 안톤 오노와 그전까지의 미군 만행들만 언급된다. 이 사건은 일반인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2편에서 언급된다.[2]
이 사건의 명칭은 처음에 설명되었듯, 미 육군의 훈련 도중 군용 차량에 두 여중생이 압사당한 사고(혹은 사건)와 그에 대한 전국민적인 반미 시위를 포함한다.
후술하듯 사건의 고의성 여부를 놓고 매우 시끄러웠다.[3]

2. 발단


2002년 6월 13일, 즉 2002 월드컵에 국민들이 환호하고 있던 시절이었다.[4] 경기도 양주군(現 양주시)[5] 광적면 효촌리 56번 지방도 갓길에서 당시 조양중학교 2학년이던 신효순, 심미선 양이 국도를 따라 언덕을 넘어 덕도리 쪽으로 300m만 가면 있는, 효순양과 미선양의 친구가 사는 초가집이라는 이름의 식당에 모여 의정부에 놀러 가기로 하였다. 학생들은 졸업생이 10명(그중 여학생은 여섯 명)에 불과한 효촌초등학교를 나온 동창으로, 다음 날은 효순 양의 생일이기도 해서 여학생 다섯 명이 모이기로 약속했었다.[A][6]
이날 오전 10시 30분 경 두 여학생은 마을을 나와 친구 집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그 뒤에서는 주한미군 미 보병 2사단 44 공병대대 소속 부교 운반용 장갑차가 법원리 쪽에서 내려와 약간 왼쪽으로 틀어 막 언덕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차량 행렬은 선두 안내 차량 1대, 병력 수송 장갑차, 그 뒤로 사고 차량, 일반 공병 궤도 차량 3대, 후미 안내 차량 1대였다. 이때 맞은편에서 M2/M3 브래들리 기갑 전투 차량 5대가 덕도리에서 무건리 훈련장으로 오고 있었다. 사고가 난 도로의 폭은 3.3m 정도인 데 반해 사고 차량의 폭은 3.65m이다. 사고 차량이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으려면 갓길을 걷고 있던 학생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A] 두 여학생은 주한 미 육군 제2보병사단의 M60 AVLM[7]에 깔려 현장에서 숨졌다.
이 차량은 M60 패튼 전차의 차대에 미클릭을 탑재한 지뢰 제거용 장갑 차량이다. 다시 말해, 전차를 개조해 만든 장갑차라는 것이다. 장갑차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장갑차와 이 차량은 조금 다르다.
가해자인 두 미군을 처벌하라는 서명을 받는 장소에서 지하철 역이나 좀 큰 거리 같은 곳이라면 이 사진들이 흔히 걸려 있었다. 아무 여과 없이 그대로 사용해서 이후 참혹함 등의 이유로 항의가 들어와 모자이크 처리를 했지만, 이미 본 사람들이 많았다.

3. 전개


사고 당일 미 육군 제8군은 수습에 나섰다. 사건 당일인 6월 13일에는 8군사령관이 직접 유감을 표명하였고, 다음날인 6월 14일에는 미 육군 제2보병사단 참모장 등이 분향소를 직접 방문해 문상하였다. 그리고 피해 유가족에게 각각 조의금 명목으로 100만 원씩을 전달하는 등 사고 수습에 나섰다. 보상금은 이후에 전달되었고, 미8군에서는 각각 2억 원 정도의 금액을 보냈다.
그러나 당시 조의금을 보상금으로 해석한 유가족들이 2사단장을 만나고자 항의를 계속하자, 미군 측은 15일 장례식부터 먼저 치르면 사단장과 면담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같은 달 19일에는 미 육군 2사단 측의 한미 합동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미군 측의 조사 결과는 '이번 사고는 고의적이거나 악의적인 것이 아닌 비극적인 사고'였다. 즉 '''과실사고'''라는 것이다. 장갑차 조종수인 마크 워커 하사(Staff Sergeant)가 두 명의 여학생을 확인하지 못하였고, 전차장이었던 페르난도 니노 하사의 통신 장애까지 겹쳐서 피치 못하게 사건이 발생했다고 했다. 페르난도 니노 하사는 여중생들을 보긴 봤지만 당황하여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사고 당일만 해도 속보 형식으로 짤막하게 '여중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으로 보도되기만 했고, 거의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했다.[8][9] '''당시 2002 한일월드컵이 한창 진행 중'''이어서, 한국 국민들의 관심은 모두 사고 다음 날에 치러진 한국포르투갈전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한국이 승리하고 16강에 진출하면서 사고 자체가 완전히 묻혔다.
2002년 6월 하순부터 사고지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였던 의정부시 일대에서는 모자이크를 하지 않은 사고 사진을 의정부역이나 시내 광장에서 볼 수 있었다. 일부 대학교의 벽보에 사진과 함께 내걸리거나, 의정부와 양주시의 중/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사고를 낸 이들이 소속된 부대인 미 육군 제2사단사령부가 위치한 의정부시 가능동 '캠프 레드클라우드'에서 산발적으로 집회를 벌이는 데 그쳤다. 사실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 사고는 전국적인 관심사가 되지는 못했다.

4. 판결 결과


주한미군 측과 유족들 간의 공방은 계속되었고, 검찰 측 수사도 시원치 못한 데다 비판 여론이 점점 확대되자, 법무부는 7월 10일에 미측에 재판권 포기 요청을 한다. SOFA 규정상 주한미군들의 훈련 중 사고, 즉 공무 집행과 관련된 범죄는 미측이 그 재판권을 가지는 일종의 치외법권의 형태를 보이는데, 그 재판권을 한국 측이 가지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8월 7일 미군 당국은 그것은 전례 없는 일이라며 재판권 포기를 거부했다. 이걸 가지고 살인이 맞으니 은폐 혹은 미군들을 보호하려고 그랬다는 주장도 있지만, 애초에 사고가 아닌 사건이라도 SOFA 협정상 미국이 재판권을 우선 가지고 있다. 특히나 이 경우엔 미국 입장에선 훈련 중에 생긴 교통사고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재판권을 포기할 경우 이후 벌어지는 모든 단순 사고에도 재판권 포기가 가능한 전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미군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치다.[10]
이후 11월 20일과 22일 동두천 미군 기지인 캠프 케이시 내 군사법정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배심원단은 피고인 미 육군 부사관 2명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각각 무죄 평결을 내렸다. 다만 무죄 취지는 서로 달랐는데, 우선 페르난도 니노 하사가 당황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여중생들을 본 것이 맞은 만큼 사고를 막지 못한 죄가 성립한다고 봤다. 그러나 무전기 고장으로 그 사실을 조종수에게 알릴 방법이 없었으니 처벌할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고(쉽게 말하자면 불가항력이었기에 처벌할 수 없다는 말), 마크 워커 하사는 여중생들을 볼 수 없었고 관측병의 통보를 받아 움직이기에 사고가 났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으므로 처음부터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미 형법상 검찰이 무죄에 대해서는 항소할 수 없기 때문에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이 판결을 근거로 미 육군 2사단의 해당 장갑차 정비 관련자들에 대해서 중징계가 내려졌다.
그리고 두 피고인은 5일 후 한국으로부터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 캘리포니아로 안전하게 출국하였다. 그러나 유가족과 한국인들의 입장에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다. 마크 워커 하사의 변호사인 가이 워맥조차 "여중생들을 보지 못한 마크 워커 하사야 무죄가 맞지만 막판이라도 여중생들을 보긴 봤었던 페르난도 니노 하사는 처벌을 받아 마땅했다"고 판결을 비난했다.
이들은 출국과 동시에 '본의 아닌 사고'에 유감이며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조종수 워커 하사는 그때의 충격으로 PTSD를 앓다가 2004년 허리 통증을 이유로 육군을 떠나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후술할 MBC <세계와 나 W> 인터뷰에서 밝혔다. 자세한 것은 맨 밑 단락 참조.

5. 재확산




이 사건이 확대된 것은 2002년 11월 20일 무죄 판결 소식이 알려진 이후였다. 6, 7월의 월드컵 4강 열기가 이제 막 식고 있을 즈음 (미군 2명이 운전하는 장갑차에 여중생이 깔려 죽었다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알려졌기 때문이 아니라)[11] 이 사건의 가해자들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월드컵의 열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번져나갔다. 11월 26일 드디어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추모를 시작했다. 특정 단체 주도 없이 인터넷을 통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촛불집회의 양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12]
한창 메신저들이 자리 잡아가던 시절인 만큼 넷상에서도 이 문제가 뜨거웠고, 온 네티즌이 지못미의 전신격인 이모티콘 ▶◀을 자기 아이디 앞에 붙이는 등 사건은 일파만파로 퍼져갔다. 일부에서는 리본이 서양의 문물인데 여중생들을 죽인 미군들은 양놈들이므로 우리 고유의 삼베 상복을 본따 ▶◀ 대신 ▦을 쓰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그리고 당시 넥슨에서는 효순이 미선이를 추모하자는 취지로 무료 이벤트 아이템을 배부하였다. 크레이지 아케이드는 캐릭터 선택 창에서 효순이, 미선이의 빈소가 나오는 스킨과 추모 국화를 매달은 깃발을 무료 이벤트 아이템으로 배포했다. 바람의 나라는 채희네상점에서 추모망또, 추모깃발, 추모국화를 개당 100전에 판매했다. 어둠의 전설은 검은색 추모 풍선을 100 골드에 판매했다.[13] 또한 플래시 애니메이션 제작팀인 오인용에서도 관련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등 다른 부문에서도 추모 열기가 확산되었다. 심지어 스타크래프트 버전으로도 나왔다![14]
11월 27일에는 주한미국대사가 조지 W. 부시 미합중국 대통령의 사과를 간접적으로 전하고, 12월에는 직접 전화로 김대중 대통령에게 유감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미국 측의 사과는 '우리가 잘못했다'라기보다는 ''''우리 잘못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희생돼서 유감이다''''라는 입장이었는데, 이런 표현을 받아들이지 못한 국민들에게 반발을 사 반미 감정을 더 확산시켰다.[15] 주둔 지역의 문화와 국민 감정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일을 키운 셈이다. 한국이라서 쿨하지 못하게 어린애들 죽었다고 지나칠 정도로 격앙되었다고 쓴 것이라면 엄청난 착각이다. 서양의 경우 미성년자 사고에 대해 더욱 격앙된 반응을 보인다. 이와 비슷하게 아프가니스탄에서 주둔하던 미 육군이 실수로 쿠란을 소각해 분노한 군중에게 애꿎은 UN 직원 등이 죽는 사건이 있었다.
여기에 이전에 계속되던 주한 미군의 문제점들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더욱더 확대되고,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있었던 아폴로 안톤 오노 사건이 다시 급부상함으로써 반미 감정은 극에 이르게 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안톤 오노 사건은 연관이 없었지만, 당시 금메달 하나에 나타난 반미 감정은 엄청났다.
안톤 오노 사건은 2002년 2월에 일어났었다. 그 당시 송앤라이프에서는 'Fucking USA'와 '기특한 과자[16]', '또라이 부시' 등의 수많은 반미 노래를 만들어 인터넷에 반미 정서를 불어넣으며 인기몰이를 했다. 송앤라이프의 대표 윤민석 작곡가[17]는 젊은 시절 '김일성 대원수는 인류의 태양', '수령님께 드리는 충성의 노래' 외 여러 NL 민중가요를 작곡한 인물인데, 사건 당시 이 사건을 주제로 노래를 만들며 월드컵에만 정신이 팔려 이 참극을 외면하는 국민 정서를 질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쯤에는 반미 감정도 어느 정도 가라앉은 데다 노골적인 NLPDR 성향을 보이는 게 너무 확연했기에 송앤라이프는 이미 대중의 관심에서 잊혀져 있었다.
이 외에도 엽기하우스 등 많은 엽기 사이트에서 이를 풍자하는 합성물도 크게 유행하였다.

6. 음모론과 반박


이 사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근거없는 루머(누가 그랬다 더라~ 같은 식의)가 확산되기도 하였는데, 이때 확산된 유언비어들을 아직까지 진지하게 믿는 이들이 종종 나타나기도 한다.
  • 미군 차량이 왜 여중생을 발견하지 못했나?
이런 주장을 하는 측에서는 우선 장갑차가 여중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에 의혹을 제기한다. 상식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데 보고서도 피하지 않았으니, 사고가 아니라 의도적인 살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M60 AVLM은 원본인 M60 AVLB[18]보다는 낫다지만 조종수는 전방 확인이 가능할 것이라는 일반인의 생각과는 달리 생각보다 더 시야가 제한되는 차종이다.[19] 당장 안전상의 문제로 부대 이동간 도로상 밀폐 조종을 하지 않는 대한민국 국군 궤도 차량들도 가끔 사람보다 훨씬 더 큰 물체인 전봇대를 들이받거나, 갓길에 주차된 승용차를 깔아뭉개는 사고를 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전차보다도 시야가 제한되는 AVLM이 도로변에서 걸어가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는 개연성이 있다. AVLM의 경우 원 M60 조종석이 아닌 포탑을 제거한 위치의 왼쪽에 조종석이 있다. 조종석의 우측 전방엔 차체 전면부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구조물[20] 때문에 오른편이 아예 보이질 않는다. 때문에 일반 전차 이상으로 전차장이 통제관으로서 시야 확보와 지시를 하는 것이 중요한데, 통신기가 고장이 났다는 게 비극의 원인이었던 셈이다. 따지고 보면 고의성을 주장하기보단 이를 미리 인지하고 교체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더 강하게 책임을 물어야 했을 것이다.
  • 미군이 의도적으로 살인을 한 것인가?
여중생들이 속도가 느리고 소음을 발생시키는 장갑차를 미리 피하지 못하고 압사당한 것에도 의혹이 제기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미군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피하는 여중생들을 일부러 쫓아가서 죽였다'는... 그러니까 '고의적인 살인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 왜 여중생들은 피하지 못했는가?
위에 말했듯이 이 전차를 피하지 못할 구조여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전차가 알아서 멈추는 걸 기대하는 게 차라리 더 가능성 있는 단차선 도로거나 급경사에다 낭떠러지 구간이 아니고서는 피하지 않은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군대 다녀온 사람은 다 알겠지만 전차는 움직일 때 매우 시끄럽다. 이는 여중생들이 몰라서 못 피한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박으로는 제한된 도로에서 쫓아가서 궤도로 찍을 정도로 순간적인 기동성이 좋지 않다는 점이 있으며, 위에서 어떻게 여중생들을 보지 못했는가에서 언급되었듯이 AVLM 조종수는 애초 보이지도 않는데 피하는 여중생을 쫓아서 일부러 죽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통신 장치가 고장 난 전차장이 지시하기도 불가능했으며, 설령 고장 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서있는 거면 몰라도 이를 피해서 도망가는 대상을 조종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통신만으로 방향을 지정해서 일부러 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 때문에 반대 측에서는 여중생들이 미처 피하지 못한 원인 중 하나는 AVLM이 자신들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여학생들이 '알아서 비켜 가겠거니'[21] 하고 생각했을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따라서 피해자들이 평소 군사 장비 이동이 대단히 잦은 지역에 살고 있어 장갑차에 대한 경계심이 낮아 그냥 지나가겠거니[22] 하고 관심을 두지 않다가 사고가 발생했다는 의견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종의 안전불감증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동두천시포천시 등 미군이나 대한민국 육군 장갑차량이 흔히 지나다니는 곳 일대의 주민들을 살펴보면 군 궤도차량이 바로 옆에서 기동해도 그냥 무심한 듯 시크하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간다는 말이 있다. 기동훈련이 아니라 군부대 주위에서 사격 훈련을 할 때 경고 방송을 해도 주민들은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더구나 기동 훈련이 있을 때 도로에서의 일반 차량 및 인원의 통행을 제한해야 함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건 관할 지역 공무원들의 병크였는데, 당시 국민들의 모든 분노는 사고를 저지른 미 육군들에게 향해 있었기에 스리슬쩍 넘어가 버렸다. 그래도 이 사고 이후로는 주민들 자체적으로 꽤 신경을 썼다고 한다.
월드컵이 열리던 당시에는 독일전 패배와 연이은 한국과 터키의 3, 4위전, 그리고 폐막식까지 월드컵만 보면서 조용하게 보내고 싶어하던 분위기가 강해서, 당시 사건 관련 행사들도 월드컵이 열리던 시기에는 묻혔던 상태였다. 그런 변명을 하려면 왜 월드컵이 끝나고 당 사건은 불이 붙었는데 제2연평해전은 완전히 묻혔는지에 대한 변명도 준비해오는 편이 좋겠다.
굳이 반미 감정과 정치적 이용 등의 사정을 빼고 이유를 들자면 제2연평해전의 피해자들은 사건 순간의 직위가 '군인' 이었고, 이 건의 피해자들은 '민간인' 이라는 차이가 있다. 두 경우 다 애석한 경우지만, '군대 교전으로 인한 피해와 평시 우군이 유발한 사고에 의한 민간인의 피해를 같은 범주에서 논하는 경우가 맞느냐'에 대한 의문 또한 존재한다. 물론 이것이 싸우다 죽은 군인들의 비극은 묻혀야 한다는 걸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명심할 것은 제2연평해전을 결부시켜 장갑차 사고(또는 사건)을 폄하하는 것은 피장파장의 오류라는 거다. 애초에 제2연평해전이 주목 받지 못한 건 문제지만, 그렇다고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주목 받은 게 문제는 아니며, 이 둘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로 뭉쳐서 따지기보다는 개별로 각기 따로 문제점을 따져봐야 할 것이다.
한편 유족인 미선양의 부친 심씨는 "미 육군이 매년 남겨두고 간 조화를 누군가 매번 짓밟고 간다."고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사건 이후 미군의 고의적인 살인 행위라는 주장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떠돌았으나, 이는 억지에 불과하다.
  • "장갑차 조종수(운전병)가 여중생들을 못 봤다는 건 거짓말이다."
시야 장애가 없이 고개까지 50m 이상 쭉 뻗은 직선 도로가 사건 지점 이전부터 펼쳐져 있었고, 사건 당일 6월 13일 오전 10시경 맑은 날씨였기에 눈 밝은 조종수가 못 볼 이유가 없다는 의혹이다. 그것도 커브를 돌고 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시속 20km이하로 달리는 상황에서 15m 전방의 사람들을 못 봤다면 전차장이나 전방사수가 본다는 주장이다.
  • M60 AVLM는 전방 시야가 나쁘다는 것은 위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 전차장(정확히는 차장) 역시 사람인지라 항상 100% 주변 상황을 인지하리란 보장도 없다. "전방 사수"라는 보직은 M60 AVLM에 없다.
  • "장갑차 조종수가 중대장과의 교신을 하느라 신경을 쓰다가 여중생들을 못 봤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다."
장갑차 조종수는 오로지 전방 관찰과 운전에만 신경 쓰는 것이 주 임무지, 중대장 등과의 교신은 조종수의 책무가 아니며, 중대장이나 대대장 등과의 교신은 당연히 전차장(지휘관)의 임무고 그의 권한이다. 조종수는 전차장의 명령을 따르면 되는 것이다. 단 하나 예외라면 전차장이 죽었거나 의식불명일 때 조종수가 중대장 등과의 교신을 하며 지시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조종수가 중대장과의 교신에 신경을 쓰다가 두 여중생을 못 봤다는 말은 것은 거짓말이라는 주장이다. 설사 중대장과 교신을 했다고 해도 조종수는 늘상 무전 교신을 하며 조종을 하고 다니기 때문에, 장갑차 조종에 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 조종수가 늘 상 무전교신을 하면서 조종을 하고 다닌다고 해서 장갑차 조종에 별 영향 주지 않는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그러면 운전 중 자주 통화하는 사람은 운전 중에 사고 안 날 수 있는 건가? 물론 조종수는 무전 교신을 하면서도 장갑차 조종에 우선으로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서 교신에 신경 쓰느라 여중생을 못 봤다고 하는 것은 조종수 잘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종수가 일부러 여중생을 치었다는 것도 아니다.
  • "충돌이나 추돌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급히 조종간을 오른쪽으로 틀다가 사고가 났다는 것 역시 거짓말이다."
장갑차가 오르막 10m를 남겨두고 앞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앞에서 어떤 차량이 중앙선 지점을 먹은 채 달려와 충돌 위험이 있었다면, 장갑차 조종수는 5m 정도의 짧은 거리에서 상대 차량과 마주쳤기에 반사적으로 온 힘을 다해 조종간(운전대)을 우로 당겼어야 한다. 그랬다면 사건 현장 도로에 오른쪽 궤도의 찍어 물린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있어야 하고, 또한 두 여중생들의 시신이 일렬종대로 누워있을 수가 없다. 횡으로 흩어져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앞서가는 차량과의 추돌 위험이 있었다면 앞서의 충돌 현상 시 발생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전혀 아니다. 따라서 충돌과 추돌의 위험이 있어 사고가 났다는 말은 거짓이라는 주장이다.
  • 시속 20km인 저속으로 움직인다고 위에서 말했으면서, 궤도 자국이 항상 남아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상황에 따라서 궤도 자국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저속 상태 + 포장도로에서는.
  • "과속으로 인해 사고가 났다는 건 거짓말이다."
장갑차는 차량 자체가 무거운 데다, 일반 차량과는 달리 엔진에서 나오는 동력이 스프라겟트라는 쇠톱 같은 톱니바퀴에 전달되어, 그 톱니바퀴에 1톤이나 되는 쇠바퀴가 씌워져 굴러가는 것이기에 평균 시속 50km 이하 정도밖에 달릴 수 없다. 사건 지점 오르막길에서는 커브를 돌고 난 직후 바로 오르막이라서 시속 20km 정도로 달렸을 것이다. 따라서 과속으로 인해 사고가 날 일은 결코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오르막이라 시속 20km로 달렸을 거라고 추정하는 것은 너무 비약이 심하다. 궤도차량이라면 오르막길이라도 충분히 가속 가능하다. 20km로 달렸다는 건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며, 고의성에 대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 "도로 폭이 좁으니 사고가 났다는 건 거짓말이다."
도로는 대형 버스 두 대가 비켜지나갈 정도의 폭이고, 큰 도로에 비해 폭이 좁은 만큼 조심하게 된다. 오르막길에서 장갑차가 거의 속력이 없는 상태에서 과속이나 도로 폭이 어쩌고 하는 얘기는 헛소리라는 주장. 도로 폭이 좁으니까 조심하게 되므로 사고가 날수 없다는 주장인데... 그런 식으로 하면 골목도로에서도 교통사고가 일어나면 안 된다. 운전자가 도로가 좁으니까 알아서 조심할 것이므로. 미군 조종수가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게 절대로 아니다. 그 대신 일부러 살인했다는 것을 주장하려면 훨씬 더 많고 일리 있는 근거들이 필요하다.
  • "통신장애는 거짓말이다."
장갑차는 기동성과 통신이 생명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고로는 통신장애가 나지 않으며, 사건 이후에도 조종수가 중대장과의 교신(통신)에 신경을 쓰다가 사고가 났다는 게 이 의혹을 주장하는 자들의 논리다. 하지만 역시나 그냥 추측성 이야기다. 통신이 생명이라서 어지간한 사고로 통신장애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걸 전재로 깔고 있다. 애시당초 미군측에서 당시 통신기가 고장난 상태였다고 공식 발표했기 때문에 이걸 뒤집지 못하는 한 의미가 없다. 그리고 무전이라고 해도 전차 내부에서 서로 주고 받는 무전과 외부와의 무선 무전은 다른 계통이다. 중대장과 통신이 가능해도 내부 무전은 고장이 나 있을 수 있다. 게다가 통신 장비의 불량과 고장은 생각보다 흔하다. 실제 우리나라 구형 자주포의 경우에도 같은 방식을 이용하지만, 통신 장비의 불량을 심심치 않게 겪는다. 통신병 해봤으면 알지만 부대 밖으로 세 발짝만 나가도 먹통이 되기 일쑤고, 부대 내에서도 상황전파 등으로 통신을 했을 때 통신을 못 받는 무전기가 생기거나 애초에 보낸 적도 없는 상황 전파가 오는 황당한 일도 종종 일어나는데, 미군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 있는가?
  • "사건 현장에 남겨진 살해 증거들이 고의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현장에서 떨어진 위치에서 발견된 신발과 궤도 자국 등을 근거로 미군이 고의적으로 여학생들을 죽이고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확인사살까지 했다는 주장. 광우병 논란과 마찬가지로 전문가의 견해나 수사관들의 의견 없이 그저 사진만으로 추측하고 부풀려진 내용으로, 당연히 신빙성 따윈 없다.
  • 재판정에 참여한 미군들이 희생자와 한국 법정을 조롱하며 반성의 뜻을 보이지 않았으니 고의적 살인범이 분명하다.
과거 이 문서에서 실제로 행해졌던 반달 사례이기도 하다. 미군들이 한국은 좋은 나라라고 주장하며 깐족거리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아 살인범이라는 게 주장인데 당연히 근거 따윈 없다. 본 문서에 반달이 가해졌을 때 근거로 PD수첩에 분명히 보도되었다고 주장했으나, 정작 해당 회차분을 달라고 하자 버로우했으며 은근슬쩍 주장이 철회되었고, '미군에겐 한국인을 사형시킬 권리가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하다가 달아났다. 밑에도 알겠지만 해당 미군들은 오히려 죄책감과 PTSD에 시달리는 것이 확인되었다.

7. 사건이 남긴 것들


사건 자체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미국과 미군 당국의 한국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의 후폭풍을 제대로 겪고 엄청나게 데인 미국은 이후 미군 관련 사건, 사고에 있어 '대체적으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게 되었고, 미국 정계에서도 한국의 반미 감정을 재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이다.

7.1. 한국의 반미 감정


한국의 반미 감정은 이전에도 계속 존재해왔다. 특히 주한미군에 대한 감정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기본적으로 미군이라는 집단이 우수 인력도 있지만 낮은 계급의 사병들, 특히 육군의 경우 '할 일 없는 잉여'가 적지 않다. 또한 범죄 경력 등이 많은 사람이 사법거래로 어지간한 범죄에 대한 처벌을 줄줄이 피해갔으나, 범죄에 연루된 기록은 남아 갈 데가 없게 되면서 군대라도 가자는 생각으로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고는 항상 끊이지 않았다. 이 문제는 이라크 전쟁 이후 인력 부족으로 인한 육군 모병 기준의 완화로 인해 더욱 심해지고 있다.[23] 그나마 강력 범죄나 반복적으로 사고를 치는 인원들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으로 보내버리는 조치를 취한 이후에 완화된 게 이 정도다. 또한 기소율도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낮아지는 추세인데, 미군이 한국에 넘겨줘야 하는 범죄자라 해도 살인, 강도강간, 연쇄강도 등의 중범죄자가 아니면 검찰 기소를 갖가지 사법제도를 이용해서 최대한 늦추는 한편 미군 당국이 가해자를 뒤로 빼고 직접 피해자에게 배상한 뒤 재빨리 가해자를 미국으로 보내버리는 방식으로 실질적인 처벌은 면하게 해주고 있기 때문.[24]

7.2. SOFA는 불평등 조약인가?


이 사건 이후 SOFA 규정 개정 논의가 빈번히 진행되었지만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앞서 말했듯 이 규정은 파병 국가인 미군 측에 상당히 유리하게 쓰여 있는데, 그중 가장 치명적으로 한국 측에 불리한 조항이 바로 이 치외법권이다.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국내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건 매우 불평등한 일이지만, 문제는 '''동시에 대한민국도 파병 국가에 이 치외법권을 미국처럼 똑같이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25]
이런 조항이 21세기에도 세계 10대 경제 강국을 내세우는 한국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비판적 목소리가 일부에서 적지 않지만, 또 다른 일부에서는 한 나라에 다른 나라의 군대가 파견되어 활동하려면 그 정도는 감수할 필요가 있고, 북한과 대치하는 한국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동맹국인 미국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등가교환의 법칙. '''막대한 운영비가 드는 군대를 배치하는데 당연히 공짜일 리가 없다'''. 전작권 환수와 이러한 문제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도 관심이다.
앞의 SOFA 협정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자면 우리나라도 중동으로 파견을 보내고 있으며, '''SOFA 규약은 반드시 맺고 보낸다.''' 아니면 절대 가지 않으며 당연히 국군이 뭔가 대민 피해를 입힐 시 그 재판은 한국에서 하도록 되어 있다. 특히 중동에서 어떤 잘못을 했을 때 그쪽 재판정에 서도록 하면 태형 혹은 거세, 사형, 돌팔매질 등의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받을 수 있다. 심지어 그중 상당수는 우리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는 죄목으로. 그런 측면에서 미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도 그렇게 적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면 한국의 사법체계는 미군을 판결하기에 부족한가?"란 반론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 국가의 법체계를 신뢰하지 않아서 SOFA를 체결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아무리 잘 짜인 사법체계를 가진 국가 간이라도 법체계는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SOFA에 대해 한국과 관련된 예를 들자면 이라크 아르빌 지역에 파병된 국군 부대인 자이툰 부대에서 한국 육군 상병 1명이 경계 근무 중 장난하다 실수로 쿠르드 민병대원 헤멘 바카르를 코 앞에서 죽여 버리는 사건이 있었다. 기사. '''서로 총 쏘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치던 중 발생한 오발사고였다'''. 사망한 쿠르드 민병대원 헤멘 바카르는 병원으로 실려간 지 4일 만에 죽었다.
피해자인 헤멘 바카르는 죽기 전에도 실수로 자신을 쏜 병사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견을 피력했고, 그의 친형도 처벌하지 말라고 탄원서를 냈다고 한다. 이 쿠르드인의 유족은 고작 $10,000의 보상금만을 받았다. 사고를 낸 상병은 한국으로 재빨리 송환되어 일단 구속되는 것부터 시작했다. 실제로 SOFA라든가 이와 비슷한 규약이 없었다면 해당 사건을 일으킨 상병의 미래는 암울했을지도 모른다. 이 병사는 1년 6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이 민병대원 헤멘 바카르는 이렇게 사고사로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는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단순히 카더라이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고, 아마 같이 생활하던 전우애와 상대가 고의로 자신을 쏜 게 아니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용서를 한 것일 확률이 높다.
이 일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가정을 해보건대, SOFA 따위의 규약이 없었다면 해당 사고를 낸 한국군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최소한 몇 년 뒤로 계산해야 했을 수도 있다. 거기다 해당 지역이 중동이었다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법정에 끌려가서 고의 살인이 아니라는 게 명백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슬람의 율법으로 재판을 받고 형벌을 받았을지 모른다. 행여나 정부에서 떼를 써서 데려오려고 해도 그건 전적으로 해당 국가 마음대로다.
국가에서 파병한 군대 소속 인간이 사고를 낸 경우 데려오려고 규정을 만들어 뻘뻘거리며 노력을 하려는 것도 자국민 보호라는 차원에서 사실 가능한 논리이다. 민간인이 다른 나라에 관광 가서 사고치는 거랑 다른 나라에 파병된 '''군인'''이 사고치는 거랑은 문제가 같지 않다. 민간인이면 몰라도 군인이 낸 사고라면 자칫하다간 '그 나라 군대가 시킨 일'로 와전될 수 있으며, 이는 곧바로 외교 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된 그 피의자'''의 신분은 당연히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이번처럼 국민 감정으로 번질 경우는 더욱 그렇다.[26]
문제는 이게 의도적으로 저지른 살인이라거나, 죄가 심각한 경우에 본국 송환을 안 하겠다는 케이스를 고려할 필요가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죄가 엄청나게 크다고 본국 송환을 포기하는 경우를 용인하겠다고 하면 송환에 대한 변별력이 엷어진다는 문제가 생긴다. 애초에 군대를 파병한 나라가 무엇하러 본국 송환에 있어 자국민을 외국의 법정에서 빼올 기회가 있음에도 그 기회를 쓰지 않는 경우와 같은 예외 케이스를 앞장서서 주장하겠는가?
애꿎은 우리나라 중학생 2명이 깔려 죽은 것에 대해 분통이 터지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당연하다. 이에 대해 개정을 논하자고 할 수 있다. 분통이 터지고 억울하다면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주기가 힘든 형편이다. 폐지를 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당장 우리도 파병 국가인 입장에서 폐지를 논하는 것은 끝나지 않는 토론이 될 것이 뻔한 데다가, 또한 SOFA 규정의 본국 송환에 관한 것은 가루가 되도록 욕을 먹어도 어쨌든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파병하는 국가의 입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보호하는 규정의 존재 여부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무척이나 많이 남아있다.
이 사건과 관련한 SOFA 규정이 불평등조약인가에 대한 단락의 결론은 ''''파병한 국가의 입장에서는 필요한 혹은 유리한 조약''''이라고 하겠다. 미국이나 대한민국이나 다 적용하고 있고 (타 파병 국가들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사항이다. 덧붙여 SOFA 규정이 미국에 유리하고 대한민국에 악랄하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어떻게 해결해달라고 호소하는 국민들의 의견을 들어줄 수가 없다.
대한민국 정부도 미국처럼 파병 국가이고 '''대한민국에 유리하고 파병 지역 국가에 불리하다는 SOFA 규정을 활용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 점에서 일단 도의적으로 주장하기가 좀 힘든 부분은 있다. 당장 해외 파병을 하고 있는 한국 정부가 이 조약이 불평등하고 악랄하다는 점 때문에 국가와 국민의 이익이 된다는 점을 포기할 가능성은 그야말로 '''없다'''.
사실 이런 종류의 불행한 사건사고는 종종 일어난다. 이 사건과 함께 자주 언급되곤 하는 것이 이탈리아에서 미 해군 전투기 조종사A-6을 조종하다가 실수로 스키장케이블카 와이어를 날개로 잘라버린 사건이다. 카발레세 케이블카 추락 사고의 3번 항목 참조. 매우 높은 에 위치한 스키장이었으므로 당연히 승객들은 전원 사망했고, 미국은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물론 이탈리아에서 재판을 받지는 않고 소파 조약에 의거해 미국에서 처벌받았다. 두 사건의 가해자들에 대한 평결은 각기 다르긴 했어도 G7 국가이자 나토 가입국인 이탈리아도 이런 식인데, 한국에'만' 편파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본 사건과는 별개로 한미행정협정은 한국의 SOFA와는 한 차원 다른 문제도 갖고 있다. 그것은 미군뿐만 아니라 '''미군에 관계되는 대부분의 민간인들도 치외법권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군속과 미군 가족은 군인이 아니다.''' 본 사건은 미군에 의해서 저질러졌기 때문에 변명할 여지라도 있지만, 만약 민간인인 군속이나 미군 가족이 그랬다면 어땠을까? 이들이 범죄를 절대로 저지르지 않는 점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문제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물론 이 부분은 이 사고와 큰 연관은 없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일련의 사건들로 SOFA 조항이 재조명되었고, 이로 인해 이 부분도 문제 제기가 된 것.

7.3. 인터넷의 역할


이전만 해도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라고 불리며 단순히 정보를 교류하는 것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 인터넷의 엄청난 정치적 힘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인터넷은 스타크래프트 배틀넷을 할 수 있는 재미있는 도구라고만 생각했던 10대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거기에 2002년 6월 27일부로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불온통신)가 위헌 판정을 받아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것도 한 몫 했다.[27]
이로 인해 인터넷이 더 이상 단순한 오락/정보 도구가 아니라 정치적 이슈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주목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적인 해석도 존재하는데, 인터넷이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집단이 자신들의 이해 관계에 맞게 여론을 특정 방향으로 몰아가거나 조작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인터넷을 통한 정치적 활동이 크게 부각되었다는 것이며, 기존의 매스미디어만큼 광역적이면서도 오프라인 정치 활동만큼이나 상호교류적인 점을 통해 기존의 정치적 활동보다 장단점이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사건 모두 월드컵 기간 중에 일어난 사건이라, 처음 터졌을 때에는 뉴스에 보도가 되어도 여론이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선이 효순이 사건의 경우 월드컵이 끝난 뒤 온갖 커뮤니티, 포털 및 뉴스 게시판에서 (아직 미군의 고의적인 살인인지, 과실치사인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여중생들을 살해한 미군에 대해 많이 퍼뜨려주세요."'''라는 식으로 여론의 관심을 호소하는 글이 많이 올라왔다. 이 사건이 조명 받으면서 시사 고발 프로에서도 방송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사건이 확대된 것은 2002년 11월이었다. 11월 26일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추모를 시작했고 열기는 2003년까지 이어졌으며, 그 뒤로부터 10여 년간 매년 1주기, 2주기 식으로 추모식을 성대하게 열었다. 서울에서는 2002년 정도만 돼도 이미 지금과 다름 없을 정도로 인터넷이 깔린 상태였다. 당장 인터넷 패러디 언론으로 주목 받았던 딴지일보의 전성기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되었던 2002년 말까지였다. 2016년인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는 김구라의 시사 대담이 2002년 즈음에 제작된 건데, 당시 딴지일보의 인터넷 라디오 방송이었으며, 슈퍼주니어의 멤버 희철도 당시 그 방송 팬이어서 팬클럽에도 나갔다고 한 적이 있을 정도다.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는 김구라 일행의 안톤 오노 테러 기행 동영상(안톤 오노 버르장머리 고쳐주겠다며 미국까지 찾아감) 역시 딴지일보에서 당시 제작하여 인터넷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다.
2002년 초 아폴로 안톤 오노 사건 당시 폭발적으로 유행했던 노래가 'Fucking USA'였는데, 당연히 이 노래는 딴지일보에서 밀어주며 인터넷으로 MP3 파일로 퍼져나간 것이다. 헌데 2002년을 일부 지방에 인터넷이 덜 깔린 걸 근거로 국민들이 TV나 보며 일방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던 시대로 호도하면 안 된다. 2001년만 해도 서울에 상당히 인터넷이 보급되었고, 그래서 매향리 사태를 비롯해 미국의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책임론 제기나, 9.11 테러 때만 해도 여러 언론사의 자유 게시판이나 기자들의 칼럼 게시판에선 논쟁이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이 때도 일부 정치 세력들이 9. 11 테러 세력을 독립군에 비유하여 논쟁이 되기도 했었다. 당시 인터넷 일간 스포츠 기자 칼럼에서 어느 기자가 이에 대해 독립군에 비유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비판하는 칼럼을 실었는데, 이 칼럼의 댓글로 많은 논쟁이 오갔었다. 다만 노골적인 반미 여론은 적었는데, 이듬해 안톤 오노 사건으로 반미 여론이 폭발하게 된다.
그리고 2002년 당시 서울의 어느 대학가에든 이 사건의 충격적인 사진이 모자이크 없이 걸려 있었다. 대학가는 물론 역세권 같은 데에서 참혹하게 목숨을 잃은 여중생의 시신이 찍힌 사진을 노 모자이크로 버젓이 걸어놓고 미군을 악으로 묘사하는 글을 붙여놓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미군 주둔지에 찾아가서 성조기 불태우기 등 미군 철수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지금도 인터넷에는 당시 짤방이 떠돌아다니는데, 미군의 성조기를 빼앗으려는 대학생 무리 중 한 여대생이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있어서 '나이키 신고 반미한다' 라는 게 다음 카페에서 조롱 받기도 했었다.
물론 나이키 신는 것과 반미는 상관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다음에서는 심지어 '맥도날드도 미국 것이니 가면 안 된다'라는 얘기마저 돌았었고, 어떤 다음 카페 회원은 '맥도날드에 출입하는 한국인들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서 인민 재판하자'는 글을 올려 논쟁이 되기도 했을 정도로 극단적인 반미 열풍이 인터넷을 뒤덮던 시절이었다. 2003년만 해도 인터넷과 디카의 보급이 어느 정도 대중화된 상태라서 특히 다음 카페에는 각종 사진들도 많이 올라오고 엽기 사진들도 유행하던 시절이었는데,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먹는 한국인들도 매국노라고 욕하며 사진 찍어 올리자는 네티즌들이 있었을 정도로 반미 열풍에 휩싸여있었다.
이 시위에서 인터넷의 역할을 강조하는 건 사건이 처음 보도되고 묻힌 지 약 6개월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시위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건 발생 이후 당시 언론에선 단신 뉴스 정도로만 보도하고 더 이상 후속 기사도 없었다. 월드컵 때문에 묻힌 감도 있으나, 월드컵 열기도 길어야 한두 달인 걸 감안해보자. 보통 뒤늦게 화제가 되는 경우는 가족들이 인터넷을 통해 피해를 호소하거나 그런 경우인데, 이건 가족들이 아닌 사람들이 이 기사를 발굴하여 게시물을 여기저기 퍼날랐고, 인터넷의 특성상 삽시간에 여기저기로 퍼졌다.
게다가 당시는 인터넷 초창기 시장이라 주요 포털도 다음 등 극히 제한적이라 인터넷 유저들은 다음을 많이 했으니(당시 한메일이 국민 이메일이었다), 인터넷이 무한대로 광활해진 지금보다는 훨씬 여론을 퍼트리기가 용이했던 상황도 한 몫 했다. 흔히 드라마에서 상대에게 '이 바닥 작은 거 알지? 금방 다 퍼져 나가' 이러는데, 당시 인터넷 바닥은 작아서 여론 퍼뜨리기가 훨씬 용이했던 상황이었다. 또한 지금은 하도 낚시를 많이 당해봐서 학습 효과가 생겨 누군가 글을 올린다고 해서 바로 믿거나 퍼트리지 않고 의심하는 여론도 있으나, 당시엔 초창기라 그냥 올려진 글을 액면 그대로 다 믿는 게 당시 상황이었으니, 인터넷 바닥이 작은 것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삽시간에 여론을 장악해버렸던 것이다.
시사 방송 때문에 국민들이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은 인과관계가 뒤바뀐 것이다. '''인터넷 여론 때문에 시사 방송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알다시피 원래 언론 자체적으로는 사건 초기 단신 뉴스로 보도되고 그대로 묻혔고, 후속 기사도 없었으며, 매일같이 기사가 쏟아지는 언론의 특성상 잊혀진 사건이었다. 헌데 특정 정치 세력들이 기사를 발굴하여 각색하여 '살인마 미군' 프레임으로 퍼트리기 시작했고, 당시 바닥이 작은 인터넷 특성상 삽시간에 여론을 장악하였다. 당연히 네티즌들은 방송사 게시판 여기저기에 효순, 미선 사건 다뤄달라는 게시물로 도배를 하게 되었고, 언론에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인터넷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방송을 통해 처음 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방이라면 몰라도, 서울에서는 대학가는 물론 번화가 거리에 끔찍한 피해 사진과 글이 붙어있는 게 흔했기에 인터넷을 하지 않는 일반인들도 대충은 알았을 것이다.
당시 과열된 시위를 보면 어느새 효순이와 미선이는 뒷전으로 밀려나있고 반미 시위가 주가 되었는데, 특히 서울의 대학생들은 훨씬 과격하여 아예 미군 부대에 직접 찾아가 깽판 치는 일도 발생했다. 미군 부대 무단 침입을 시도하거나, 경계를 서고 있는 미군의 장비를 빼앗으려다가 몸싸움이 발생되는 등 난장판이었다.[28]
과거 KBS 인간극장에서 백인 혼혈-흑인 혼혈 커플 부부 사연을 다룬 적이 있었다. 둘 다 아버지가 미군이었고 가족 없이 어렵게 자란 '한국인'이었다. 남자가 백인 혼혈이었는데, 영어를 못하고 한국말만 할 줄 아는 완전 한국인이었다. 근데 당시 자신이 크게 상처 받았던 일화를 얘기하는데, 그게 바로 효순, 미선으로 촉발된 과격 반미 시위였다. 그냥 거리를 지나가는데 일부 시위대들이 '어 저기 양키 지나간다!!' 소리쳤고, 갑자기 우루루 달려들어 자신을 마구 구타했다고 한다. 놀라서 '저 한국인이에요' 소리치면서 지갑 꺼내 주민등록증 보여줬더니 '뭐야 이거? 튀기잖아!?' 하면서 침 뱉고 갔다고 하는데, 그 때 심한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현재에 와서는 오히려 고인들이나 유가족을 모욕하면서 지겹다고 하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면서 악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과거 반미 시위자들와 다를 게 없는 행동을 하는 이들도 종종 보이는 편. 해당 문서에도 몇 차례 고인과 유족에 대한 반달이 있었다.
싸이도 이 시기에 추모 집회에 참가하여 신해철이 작사한 'Dear America' 를 불렀는데, 가사 내용이 지극히 패륜적이었고 지금 시각으로 보면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노래이다. 하지만 대마초 혐의로 엉망이 된 이미지를 이 시기에 되살렸을 정도로 반미 주의가 팽배했던 시기였다.

8. 기타


  •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 후 미선 양의 아버지는 "사고를 낸 미군도 이젠 편히 지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당시 사고를 '미군의 살인'이라고 규정하는 반미 단체와 다른 견해도 밝혔다. 미선 양의 아버지 심 씨는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하는데 (미군이) 애들이 미워서 낸 게 아니지 않나."라며 "얼굴도 모르지만 그 미군들도 이젠 마음의 짐을 덜고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효순 양의 부친 신현수(58)도 마찬가지 생각일 것이라고 전했다. # 2005년 4월 29일 MBC 시사프로 <세계와 나 W>에서 퇴역한 마크 워커 하사를 찾아가 인터뷰한 바가 있는데, 여중생들을 치여 죽였단 죄책감에 PTSD에 시달리고 있었다. 매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허리 통증과 설사에 시달리고 있어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 사고 6일 전(6월 7일)에는 경기도 파주시에서 미군 고압선 사고로 팔다리를 잃은 전동록이 투병 11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해당 사건처럼 월드컵 때문에 묻혔다.
  • 매년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으로 인해 유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한다. #
  • 1982년 부미방 사건 관련자였던 문부식이 2003년 2월 4일 조선일보 '폭력의 세기를 넘어: 문부식의 시간여행' 1화에서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사실을 과장하고 자가 발전적인 분노로 단순성에 매몰된 자들'이라 비판해 파문이 일었다.
  • 정치인 김문수는 경기도지사 시절, "미선·효순양 사고는 길이 좁은 게 원인"[29]이라 했다. 2014년 56번 지방도의 해당 구간은 왕복 4차로로 확장 이설했고, 기존 도로는 마을길로 사용 중이다.
  • 사건 발생 이듬해인 2003년 4월 북한 평양의 모란봉 제1중학교에서는 두 학생을 6학년 9반 명예학생으로 제 멋대로 등록시킨 후 2005년 3월에는 졸업장을 줬다. 한 술 더 떠 이걸 주제로 "다시 보는 졸업증"이라는 선전 영상까지 만들었다. 한 마디로 반미 감정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한 조선로동당프로파간다이다. 1, 2
  • 카투사로 복무 중인 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사고를 낸 해당 장갑차는 여전히 부대에서 사용 중이라고 했다.[30]
  • 사고가 난 이듬해에 주한미군에 이상하게 안전 사고가 많이 발생해서 사망자가 여럿 나오자, 억울하게 죽은 두 원혼 때문이라는 카더라가 돌았고, 주한미군 측에서 찜찜했는지 위령제까지 지냈다고 한다.
  • 이 사건 이후, 주한미군은 자신들 예하 군인 및 군무원 등에 의해 벌어지는 범죄 및 사건/사고에 대해 보다 한국인들이 납득할 만한 방식으로 사과 및 재발 방지 제스처를 취하는 등 예전보다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다. 10년 뒤에 평택에서 미 공군 군사경찰들이 엄연히 미군 부지 밖에 있었음에도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었다는 이유로 한국인 3명을 권한도 없는데 체포해 기지 안으로 끌고 들어가려 했고, 한국 경찰과도 시비가 붙은 바 있는데, 이때는 제7공군사령관[31]정복을 입고 직접 한국식으로 기자들 앞에서 고개 숙여 사과하는 등 보다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이며 성의 있게 사건을 수습했다. 그리고 이는 2020년에 와서도 변하지 않아 2020년 8월 30일 SUV 승용차가 음주운전한 상태에서 과속하다 주한미군 장갑차를 들이받아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때도 주한 미 대사인 해리 해리스가 트위터에 추모글을 남기고, 주한미군 역시 훈련을 중단하고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신속히 밝혀오는 등 발 빠르게 조치를 취하는 모습을 보였다. #
  • 이 사건 이후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던 맥도날드가 사라졌는데, 좀 미묘한 시기에 없어져서 항간에는 해당 사건에 항의하는 지역 주민들의 시위로 사라졌다고 주장하지만, 증거는 없다. 그런데 이때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에 있던 맥도날드는 정말로 미국 상품 불매 운동으로 인해 없어졌다.
  • 2000년에 발매된 서태지 6집 2번 트랙의 '탱크'라는 곡이 이 사건으로 인해 뒤늦게 주목받았다.
  • 디자이너 정철연이 웹툰 마린블루스 시즌 1에서 니노 병장 무죄 선고 당일부터 촛불 집회까지 해당 사건을 언급했다.
  • 2008년경 사고 현장 근처 지역인 파주시에 있는 무건리 훈련장이 확장하면서 국방부가 인근 오현리의 토지를 수용하는 중에 주민들의 반발이 일었는데, 이때 운동권에서는 이 사건과 엮으려는 시도가 나왔다. 당시 기사 이들 논리는 당시 사고를 낸 미군 장갑차의 목적지가 무건리 훈련장이었으니 확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런 논리는 상당한 무리수였고, 제도권 언론에서도 이 논리를 수용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이 문제는 2011년에 인근 가야리에 상가용지를 포함한 이주단지를 조성하는 것으로 합의되면서 일단락되고, 2012년 말 이주단지 조성이 완료되었다.
  • 2017년 6월 10일[32] 미 육군 제2보병사단 창설 100주년 기념 행사를 하려 했으나 반미 단체가 시위에 나서고 팬사이트에 악플을 달면서 많은 가수들이 참여를 취소했다. 기사 이건 행사 주최측인 의정부시가 가장 문제인데, 기사에도 나와 있듯이 창설일은 10월 26일로, 기념 행사를 하려 한 6월 10일은 창설일과 전혀 관련 없는 날이다. 의정부시에서 벌이는 다른 행사와 묶어서 진행하기 위해 탁상행정식으로 무리하게 진행한 것이 문제.
  • 2017년 6월 13일 추모 행사에서 14년 만에 유족이 참석했다. # 유족은 "그래도 15년 동안 한결같이 미선이, 효순이를 잊지 않은 게 시민단체더라"며 "이제는 믿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분들 뜻에 따르기로 했다"고. # 다만 유가족이 딸의 죽음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길 바란다고 못을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날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유가족의 발언을 무시하고 '사드 가라', '소파 전면 개정', '자주 평화', '평화협정체결' 등이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등 상관도 없는 의제를 들먹이며 정치적인 퍼포먼스를 벌였다.
  • 2020년 12월 19일, 스티브 유가 자신의 입국을 막으려는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는 가운데 이 사고를 \'효진이, 미진이를 가지고 반미 감정을 부추겨왔다.'라면서 피해자의 이름도 모른 채 자신의 피해를 호소하는 용도로 써먹기도 했다.[33]
[1] M60 AVLM 공병장갑차(공병전차)로, M60 전차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2] "숏트랙 금메달도 훔쳐가고 / '''효순이 미선이를 탱크로 죽이고''' / 통일의 길목마다 훼방을 놓는 / 우리 민족의 적 양키들아".[3] 물론 사건 자체는 고의성이 없는 사고였다. 다만 무죄를 선고하는 바람에 최소한의 과실조차 인정되지 않았다고 알려지면서 논란이 커진 것.[4] 참고로 이날은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는 날이기도 하였다.[5] 양주군이 양주시로 승격된 건 2003년의 일이다.[A] A B [송평인 기자의 현장칼럼] 생일파티길 두 여중생 궤도 차량에 참변 전말(2002년 7월 18일 동아일보, 2009년 9월 17일 수정.)[6] 기사에 나온 내용을 인용하자면 "기다리던 효순이와 미선이는 오지 않았고 그날의 생일 파티는 엉망이 됐다. 초등학교 6년을 같이 다녔고 중학교도 같이 다니고 있어 자매 이상으로 친했던 남은 친구들은 아직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효순양을 위해 준비했던 선물을 태우는 것으로 그들만의 장례식을 치렀다."라는 내용이 나왔다.[7] Armored Vehicle, Launched MICLIC.[8] 다만 경향신문6월 23일자 사설6월 26일자 시론을 통해 사고 얘기를 성실히 전했다.[9] 조선일보 측은 사고 당일 인터넷판으로 보도했으나, 다음 날 발행된 신문에 안 실리다가 6월 20일자에 미군부대 내 비공개 추모식 기사가 실렸다. 프레시안 기사 참조.[10]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은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이것이 딱히 잘못된 조치는 아니었다. 다만 당시의 한국의 분위기와 정서상 이러한 결정이 오독될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하고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했던 것.[11] 시민들이 시위에 나선 것은 이 사건 자체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가 무죄를 받았다는, 즉 정의가 짓밟혔다는 분노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면 안 된다. 만약 가해자들이 처벌을 받았다면 아무리 사건 자체가 끔찍했다 하더라도 그토록 큰 시위로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12] 특정 단체의 주도가 없었다고 하는데, 이 집회를 야기한 건 당시 특정 언론사의 기자가 올린 게시물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 #, #[13] 그리고 이 이후로 포탈은 물론 각종 게임 등에서 전국적인 관심을 가진 사망사고에 추모 관련 행사나 문구 등을 포함하는 게 크게 유행하게 된다.[14] 스타크래프트 팬 애니메이션인 Starcraft Episode의 외전이다. 원래는 미공개 분이었다가 후에 공개된 것이라고 한다.[15] 당시는 이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미국, 특히 조지 W. 부시에 대한 반감이 엄청난 시기였다.[16]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프레첼을 먹다가 질식했던 사건을 희화화해 부시 대통령을 놀려먹었던 노래였다.[17] 종북주의자다.[18] AVLB는 AVLM과 차량 자체의 시야는 큰 차이가 없으나, 커다란 가교가 얹혀있기에 더욱 시야가 제한된다.[19] 애초에 공병전차인데 장갑차라고 불리는 것부터가 그 당시 여론이 앞뒤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흔히 떠오르는 장륜형 장갑차거나 흔히 보는 박스형 장갑차로 추측하고 소설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는 방증이다.[20] AVLB에 탑재하는 교량 관련 부품인데, MICLIC을 무게 중심에 맞춰 장착하기 위해 굳이 제거하지 않았다.[21] 해당 사고 지역은 인도가 없기 때문에 사람을 발견했으면 회피하여 중앙선 너머로 기동했어야 했다.[22] 그리고 실제로도 옆으로 피해가고, 그것이 여의치 않거나 대열이 많아서 기동에 문제가 있으면 차량을 급히 세우는 경우도 있고, 경로 상에 있는 사람에게 비키라고 외친다.[23] 미국은 월남전 종전 2년 전에 모병제로 전환했다.[24]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미군에서 벌어진다고 보면 된다. 한국처럼 사법제도가 제대로 돌아간다면 흉악범죄자는 직접 처벌이 가능하지만, 아프간 같이 사법체계 자체가 엉망인 곳이라면 아예 사법처리 자체를 미 본토에서 대행하게 된다. 물론 기소를 면한다고 쳐도 이후 인생은 답이 없어지지만, 애초에 범죄 저지르는 미군들이 그런 거 생각하고 범죄 저지르지 않는다.[25] 이 부분을 피장파장의 오류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 부분에서 피장파장의 오류가 성립하려면, 대한민국에 모순이 있기 때문에 SOFA 치외법권 자체가 합리적이라는 결론이 나와야 한다. 근데 이 문단의 내용은 치외법권 자체가 합리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상황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피장파장의 오류에 해당하지 않는다. SOFA 치외법권의 합리성에 대해선 아래 부분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피장파장의 오류에 대해선 해당 문서를 참조할 것.[26]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은 판결에 국민의 법 감정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나라다.[27] 이마저도 그 해 12월에 전기통신사업법이 개정되어 '불온통신'이 '불법통신'으로 바뀌면서 오래 가지 못했다.[28] 엄격히 적용하면 이러다가 총 맞아 죽었어도 할 말이 없다. [29]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인도라고 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이 거의 없었으며, 사실 그런 공간만 있었어도 두 여중생이 위험한 위치에서 걸어갈 일도 없었을 것은 사실이다.[30] 한화로 10억이 넘는 물건이다.[31] 공군 중장으로, 한반도 주둔 미 공군 장병들 중 최선임자이다.[32] 본 문서의 사건이 벌어지기 3일 전의 날짜다.[33] 정식 명칭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고'이고 공식적인 자리나 보수언론은 주로 이렇게 부른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은 오히려 국내의 반미단체나 진보단체가 주로 부르는 용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