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홍/선수 경력
1. 클럽 경력
1.1. 바이어 04 레버쿠젠
건국대학교를 졸업 후 1991년 K리그의 드래프트 제도를 거부하고 차범근이 활약했던 독일 분데스리가 소속 레버쿠젠에 진출하나 아마추어팀이었다. [1]
1.2. 부퍼탈 SV 보루시아
1992년 2부리그 부퍼탈로 이적했지만 9경기 3골의 기록을 남기고 무릎 부상(십자인대 파열)로 한국으로 리턴.[2]
이때 K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 하나를 남기게 되는데 바로 '''"1 VS 8 지명권 트레이드"'''. 이전 해의 드래프트 결과로 황선홍을 지명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완산 푸마[3] 에 포항제철 아톰즈는 '''소속 팀 선수 8명과 황선홍 한 명을 바꾸는 사상 초유의 트레이드를 제안하게 된다.''' 당시 신생 팀이던 완산 푸마는 한 명이라도 선수가 아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황선홍은 1993년부터 포항 소속으로 뛰게 된다.[4]
1.3. 포항제철 아톰즈/포항 아톰즈/포항 스틸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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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부터 1998년 7월까지 포항에서 활약하며, 홍명보, 라데 보그다노비치, 최문식, 박창현, 박태하 등의 전설적인 동료들과 함께 포항의 1990년대 황금 시대의 한 축을 이뤘고, 특히 라데와의 공격 투톱은 지금도 회자가 될 정도. 본인도 신문 인터뷰에서 '''"나와 라데의 투톱을 능가하는 투톱은 이후로 K리그에 없는 듯 하다."'''라고 인정했다. 국가대표 차출이 없었던 1995시즌에 '''8경기 연속골''' 기록을 포함, 11골 6도움을 기록하며 득점 3위에 오른 것이 커리어 하이.
1997~1998년 포항 스틸러스의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現 AFC 챔피언스 리그) 2연패에 일조했지만, 아쉽게도 정규리그와 FA컵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5] 95 코리안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의 준우승이 전부.
1.4. 세레소 오사카
이후 1998년 7월, J리그의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 그 이듬해 26골로 '''J리그 득점왕'''을 차지한다. [6] 이는 '''2020년 현재까지도 최초이자 유일하게 한국인 선수가 외국 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사례다.'''
1.5.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0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국내 무대에 복귀하나 부상으로 정규 리그에서 뛰지 못하고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에서 같은 팀이었던 데니스와 경기 중 드잡이질[7] 을 한 끝에 맞트레이드 형식[8] 으로 J리그의 가시와 레이솔로 임대를 가게 된다.
1.6. 가시와 레이솔 (임대 후 완전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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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 샤샤와 임대 형식의 맞트레이드가 성사되어 J리그의 가시와 레이솔에 2001년 말까지 임대되었다. 韓日 빅트레이드 황선홍-샤샤 그러나 2000년 7월 샤샤가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방출되면서 수원 유고용병 샤샤 방출키로 황선홍 역시 2000년 7월 가시와 레이솔에 완전이적 하는 것으로 신분이 정리되었다. 황선홍, 지난해 가시와 레이솔로 완적이적.
당시 같은 팀에 있던 홍명보, 유상철과 함께 코리안 트리오로서 맹활약했다.
그러나 월드컵이 끝나고 1달 후인 2002년 8월, 월드컵 때 입은 부상으로 결장이 계속되고 나이가 나이인지라 회복자체가 불투명하자 방출되었고 8월 17일 고별전을 끝으로 일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1.7. 전남 드래곤즈
가시와 레이솔에서 방출된 이후 황선홍은 흔히 말해 국제미아 신세가 되었다. 초반에는 미국 진출을 타진했으나 찾아주는 구단이 없어 포기했고, 터키진출은 계약기간에서(자서전에 따르면 선수본인은 단기계약을 원했으나 팀은 더 긴 계약기간을 원했다고 한다) 조건이 맞지 않아 무산되었다. 이후 월드컵에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나이와 부상으로 인해 다른 나라 구단에서도 찾아주지 않아 은퇴 위기까지 몰렸다. 그러나 2002년 9월 귀국 후 K리그에 발길을 돌렸고, 대전 시티즌과 전남 드래곤즈 중 전남 드래곤즈를 선택해 이회택 감독과 면담을 하고 2002년 10월 월봉 2000만원에 계약을 했다.
그러나 정강이 뼈 부상이 심각해 재활훈련에도 불구, 단 1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1.8. 현역 은퇴
황선홍은 시즌 종료 후인 2002년 12월 정확한 진단을 받기 위해 독일로 건너갔는데, 의사에게서 "'''6개월 이상의 안정이 필요하다"''' 라는 진단을 받고 은퇴를 결심, 2003년 2월 9일 기자회견을 통해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지도자의 길을 갈 것을 발표하였다.[9]
K리그 통산 성적은 64경기 31골 16어시스트. 해외에 나가있었던 시즌도 꽤 되고 부상으로 허비한 시즌도 상당하며, 90년대에는 리그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해서 항상 국대 차출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8게임 연속골 기록이나 라데와의 투톱이 준 임팩트를 제외하면 명성에 비해 K리그 커리어는 빈약한 편이다. 그래서 선수 황선홍이 한국축구의 레전드라는 점은 모두가 인정하지만 K리그 레전드라고 하기는 힘들다. 대신 감독으로서 화려하게 비상하고 있으니 지도자로서 K리그의 레전드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10]
2. 대표팀 경력
2.1.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2.1.1. 1996 애틀랜타 올림픽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축구 대표팀에 와일드카드로 선발되어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친다. 그러나 당시 최용수가 있는데 뭐하러 주전원톱을 둘이나 쓰냐? 라는 황선홍의 와일드카드 선발에 대한 반론이 있었으나 당시 올림픽대표팀 감독이던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은 자신의 생각을 밀어부쳤고 실제로 최용수는 본선 첫경기 가나전에서 황선홍에 밀려 결장했다. 당시 황선홍-윤정환 콤비는 최용수-윤정환 콤비와는 다른 의미로 일품이었는데 최용수-윤정환 콤비가 윤정환 패스-최용수의 파괴력있는 마무리의 구도였다면 황선홍-윤정환 콤비는 둘다 시야와 패스에 강점을 가진 선수다보니 2:1 패스 등 둘의 패스플레이를 통해 여러차례 가나수비를 위협했었다. [11] 다만 두번째 경기인 멕시코전에서 전반 35분만에 부상으로 이원식과 교체되었고 그 여파로 마지막 경기인 이탈리아전도 결장하고 말았다. 가나와의 첫 경기에서 결승골이 된 페널티킥을 유도하는 등 플레이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부상으로 실제로 기여한바는 생각보다 크지 않은 셈.
어쨌든 그 무렵까지 황선홍은 비록 미국 월드컵의 이미지 때문에 욕을 많이 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국에 아직 그를 능가할 만한 공격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실제 A매치 때마다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기에 축구팬들은 그에게 어느정도는 다음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기대하는 분위기였던 건 사실이었다. 황선홍 자신에게도 그건 가장 절실했던 과제이기도 했다.
2.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2.1. 1988 AFC 아시안컵 카타르
1988년 11월 7일 이회택 감독이 건국대학교의 무명 선수 황선홍을 1988년 AFC 아시안컵 대표팀에 발탁했을 때 엄청난 구설에 시달렸으나[12][13] 데뷔전인 한일전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14]
2.2.2.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이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골 잔치를 벌이며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각광받는다. 이때 또 다른 고려대학교의 국가대표 선수였던 홍명보와 만났고 이후 두 사람은 일생의 벗이자 1990년대 한국축구를 이끈 쌍두마차가 된다.
하지만 1990년 월드컵에서 대표팀이 3패로 탈락하면서 김주성과 황선홍 두 공격수가 비난을 받으면서 첫번째 시련을 겪게 된다.[15]
2.2.3. 1994 FIFA 월드컵 미국
그러나 국제무대에서의 불운은 계속됐다.
1994년 미국 월드컵, 황선홍은 첫 경기 스페인전에서 골키퍼와 일대일 기회를 놓쳐 아쉬움을 남겼다.[16] 하지만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볼리비아전에서 그는 여러 차례 기회를 잡아 슈팅을 날리지만 모두 골문을 외면하고 만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까지만 해도 월드컵 출전국의 수는 24개국이었다. 각 조 2위까지 12개 국가와 3위 중 성적이 좋은 4개 국가가 16강에 오르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1승 1무 1패로 승점 4점만[17] 올리면 16강이 유력했다. 첫 경기에서 강적 스페인과 비겨 첫 단추를 잘 끼웠지만, 확실한 1승 상대로 여겼던 볼리비아전을 비기고 말았다. 당시 조 편성은 우승후보 독일, 스페인 그리고 볼리비아였다. 따라서 독일, 스페인과 최대한 비기고 볼리비아를 이기는 게 우리의 전략이었다. 물론 볼리비아도 마찬가지여서 한국-볼리비아전은 사생결단의 혈투가 됐다.[18]
볼리비아전 하이라이트를 보면 알겠지만, 몇 번의 찬스에서 어떻게 저렇게까지 뜰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슛이 높이 뜨기는 했다. [19] 이 뜬 슛들이 어찌나 강하게 인상에 남았던지[20] 경기 이후 황선홍에게는 오랫동안 이름 앞에 '똥볼', '홈런볼'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1994년의 황선홍은 단군 이래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운동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21] 온라인도 아니고 오프라인에서 2002년 아폴로 안톤 오노보다 더한 욕을 먹었으니, 이때 황선홍 선수가 받은 모욕과 협박은 지금 생각하면 어떤 면에서 거의 범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가장 유행하던 말은 "이완용 이래 최고 역적"이다.[22] [23]
하지만 다음 경기인 독일전에서 0:3으로 끌려가던 후반에 추격에 불을 지핀 것은 바로 그였다. 경기 영상을 보면 그의 월드컵 사상 첫 골을 기록했음에도, 그의 표정이 대단히 어둡다. 골을 넣은 후 세레모니는 커녕 굳은 표정으로 땅을 보며 고함을 지르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영상 3분 31초에 골을 넣고도 괴로워하는 모습이 나온다.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당시의 심경을 밝히길 "왜 이제서야 들어가는 거야..."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후 홍명보가 회심의 중거리 슛을 성공하며 3:2로 따라잡은 것에서 경기가 끝나긴 했지만, 독일전 후반은 사실 한국이 독일을 압도하고 있었다. 엄청난 무더위로 댈러스 경기장은 40도를 넘나들고 있었고, 독일은 체력이 방전상태였다. 경기가 5분만 계속됐어도 한국이 독일을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는 게 많은 전문가의 평가였다.
당시 룸메이트였던 홍명보가 훗날 술회한 바로는 쏟아지던 월드컵 전부터 골에 대한 부담으로 심적부담이 상당했던데다가[24] 볼리비아전 이후로는 무자비한 비난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 '''자다가도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후일 밝혀진 바로는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에게 "감독님, 저 이번엔 정말 잘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계속 쏟아지는 비난에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본인은 "당시에 지금처럼 인터넷이 대중화되어 있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라고 회상한다. 굳이 인터넷이 없어도 직접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두려워서 집 밖을 나가지 못할 정도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98 월드컵 이후 J리그에 진출하면서 젊은 선수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몸 관리를 더욱 철저히 했다. 모 스포츠 사이트와 이루어진 비공개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내비친 바 있는데, "난 은퇴하지 않고 반드시 한국에 다시 돌아갈 것이며, 월드컵에도 가능하다면 꼭 다시 나가고 싶다. 그래서 나를 비난했던 많은 사람에게, '당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 보이고 은퇴할 것이다."라고 했다.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
이렇게 선수 생활에 있어서 가장 맘고생이 심했던 94 월드컵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월드컵 도전 역사상 90분 내내 풀타임으로 뛰었던 유일한 월드컵이기도 했다. 90년은 교체 출전, 2002년은 선발 출전 후 교체되거나 반대로 교체 출전 및 부상 등으로 풀타임으로 소화하지 못했고, 98 월드컵은 후술하겠지만 월드컵 직전에 큰 부상으로 출전 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기량이 절정이었던 미국 월드컵에서 정말 열심히 뛰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으니 더욱 한이 맺혔을 법 했다.
2.2.4.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이후에도 황선홍은 국가대표팀의 붙박이 공격수로 활약한다. 예선 네팔과 경기에서 혼자 8골이나 뽑아낸 것도 이 대회. 미국 월드컵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여 8강 토너먼트에서 일본과 한일전을 벌였는데, 여기에서 역전골과 결승골을 넣는 맹활약을 펼친다. 특히 이 경기는 역대 축구 한일전 중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명승부 중 하나인데, 도하에서 대한민국을 무너뜨린 미우라의 선제골로 끌려가다가 후반전 황선홍의 절묘한 힐 패스를 받은 (당시 방송을 보면 신문선이 한정국의 힐 패스라고 하지만 이는 그가 착각한 것이다) 유상철이 동점 골을 뽑아낸 후 황선홍의 헤딩 역전골, 그리고 다시 일본의 이하라 마사미가 중거리 슛으로 다시 동점, 하지만 후반 종료 직전 황선홍이 스스로 페널티킥을 얻어 내고 그가 직접 성공시키면서 경기를 3:2 승리로 이끈다. 월드컵에서의 비난을 어느 정도 씻어 내는 맹활약이었다. 다만 우즈베키스탄과의 4강전에서 결정적 오픈 찬스를 여러 차례 놓치며 0-1 패배의 빌미를 제공한 건 옥의 티.
2.2.5. 1996 AFC 아시안컵 아랍 에미리트
당연한 소리이지만, K리그에서 반 시즌만 뛰고도 2년 연속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하고, 거기다가 48년 만의 올림픽 승리의 주역이 된 황선홍이 아시안컵 대표에 빠질 리가 없었다. 그리고 황선홍은 UAE전에서 1골, 인도네시아전에서 2골, 그것도 모두 선취골을 작렬하면서 자신의 물 오른 득점감각을 전 아시아에 과시했다. 그러나 쿠웨이트와의 3차전에서 후반 막판, 쿠웨이트 수비수의 살인태클에 오른쪽 발목 인대가 파열되었고, 결국 시즌아웃 된다.[25] 그리고 황선홍이 빠진 한국은 일본이 중국을 잡아준 덕에 와일드 카드로 간신히 8강에 진출한 뒤, 이란전에서 알리 다에이에게 후반에만 5골을 허용하며 거짓말처럼 참패당했다(...).
2.2.6.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1998년의 프랑스 월드컵만을 바라보며 절치부심하던 황선홍은 1997년에 '''또다시''' 무릎이 아작난다.[26] 그러나 황선홍은 오직 월드컵만을 바라보며 재활에 매달린다.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황선홍 없이 치러야 하는 상황. 하지만 국민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없는 사이 대표팀 간판 공격수 자리는 무섭게 등장한 신예 최용수가 차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97년 아시아 최종예선은 그야말로 최용수의 독무대라 할 수 있었다. 그 유명한 도쿄대첩을 비롯하여 대표팀은 황선홍 없이도 승승장구하였다. 그 기간동안 황선홍은 묵묵히 재활에 전념했다. 그리고 마침내 월드컵을 두 달여 앞둔 1998년 3월 말 대표팀에 복귀한다.[27]
공교롭게도 그의 복귀전은 숙명의 라이벌 일본. 도쿄대첩의 성과가 무색하게 그 당시 대표팀은 일본에 A매치 2연패 중이었다.[28] 일본에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의 없는 벼랑끝 승부. 최악의 분위기 속 황선홍의 컴백. 모든 것이 그에게 맞춰진 시나리오였다. 4월 1일, 비 내리는 잠실 주경기장에서 벌어진 한일전에 선발 출전한 황선홍은 양팀이 한 골씩을 주고 받은 1:1의 스코어에서 후반 27분, 서정원의 절묘한 패스를 받아 골키퍼 가와구치와 일대일 상황을 맞이한다. 황선홍은 침착하게 공을 컨트롤 하면서 골키퍼 앞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와중에 떡진 잔디밭은 축구공이 순조롭게 흘러가도록 놔두질 않았다.[29][30] 당황한 황선홍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골키퍼와 일본 수비수들과 뒤엉키는 상황을 연출한다. 이대로 슈팅 찬스가 날아가고 마는구나... 하는 순간, 혼전의 양상 속에서 누가 차 올렸는지 축구공이 위로 튀어오른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황선홍이 있는 힘껏 뛰어올라 바이시클 킥으로 축구공을 골문 쪽으로 날려버린다. 그대로 골이 된 것이다. 골을 확인한 황선홍은 본부석 쪽으로 달려오면서 몸을 날려 슬라이딩 세레모니를 하며 포효한다. 그렇게 황선홍은 그가 출전한 4번째 한일전에서 4번째 결승골을 넣으며 한일전의 사나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
황선홍의 화려한 컴백으로 황선홍-최용수 투톱은 월드컵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당시 피파 랭킹 3위였던 체코와의 친선 경기에서 두 선수가 나란히 한 골씩을 기록하여 2:2 무승부를 거두기도 했으며, 차범근 감독은 '''"황선홍은 현재 대표팀 전력의 50%를 차지하는 선수다."'''라 평하기도 했다.
허나 프랑스로 떠나기 직전에 펼쳐진 중국과의 친선경기[31] 에서 '''황선홍은 골키퍼에게 태클을 당해 부상당하고 만다'''.[32]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지금도 소림축구로 악명이 높지만 1998년에는 훨씬 심했다. 그래서 당시에도 중요한 평가전을 실력이 높은 팀이 아닌데다가 한국에 강한 승부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플레이가 거친 중국팀과 하다가 괜히 중요한 선수들 부상이라도 입으면 어쩌냐는 비난이 있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 그 경기에서 중국 골키퍼와의 충돌로 무릎이 박살났다. 당시 인대 끊기는 소리가 경기장에서 들렸을 정도라고 하는데 뭐 어느정도 과장이야 있었을지언정 TV화면 너머로 보는 국민들 눈에도 황선홍의 선수생명이 끝났다는 예감이 스칠정도의 살인태클이었다. 그는 22인의 엔트리에 들어 프랑스로 향했으나, 부상은 심각했다. 단 한 경기라도 뛰어보고자 무릎에 '''진통제를 여섯 번''' 맞았다. 그러나 결국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이 때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황선홍을 싫어했으면, '''"저번 월드컵처럼 실수할까봐 무서워서 경기에 안 나오는 것 아니냐?"'''는 식의 비난이 있었다고 한다...[33]
프랑스 월드컵이 끝나고, 사람들은 이제 '황선홍의 월드컵 인연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 시점에서 한국나이 31세였으니 다음 월드컵을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34] 그래서 그를 동정하는 사람도 많이 없었고 그는 결국 도망치듯 일본 J리그로 건너간다.[35] 하지만 그렇게 건너간 J리그에서 1999년 득점왕을 차지하며 희망을 되살리게 되었으니.. 절망을 안고 건너간 일본이 그에게 희망을 되살려 준 셈이 되었다.
2.2.7.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이렇게 불운하기만 하던 황선홍의 국가대표 커리어였고, 2002년 월드컵은 황선홍으로서는 인생 마지막 최후의 도전인 셈이었다. 더군다나 월드컵 개막 직전에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겠다"는 선언을 하였고[36] 그는 결국 2002 월드컵에서 마지막 선수 생명을 불사르게 된다.
2.2.7.1. 조별리그 D조 1차전 : vs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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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으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경기가 되었다. 전반 25분 경에 이을용의 낮은 크로스를 논스톱으로 골문 구석으로 차 넣어 선취골을 뽑아낸다. 당시 리버풀의 주전 골키퍼인 두덱도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기술적인 골이었다. 그의 경험과 센스를 확실히 보여주었던 장면. 이을용이 빈 공간으로 크로스를 했고 황선홍이 달려가며 왼발로 툭 갖다대서 방향만 바꿔놓는 것으로 골을 넣었는데, 웬만큼 슛 기술이 뛰어나지 않고서야 못 할 슛이다. 더군다나 본인의 주발인 오른발이 아닌 왼발이었고, 쇄도하던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골대를 향해 몸통을 비틀어 차야 했었는데도 깔끔한 피니쉬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무릎팍도사에서 황선홍은 이을용이 애매하게 줬었다고 그 상황에 대해 농반진반으로 살짝 불만을 드러냈었다. 황선홍은 곧바로 벤치에 있는 박항서 코치에게 달려가 선수들과 함께 포옹한다. [37] 결국 이 한 골은 폴란드전의 결승골이 되었고, 황선홍의 인생골이자 명예회복의 한 판이 되었다. 이 경기는 한국의 월드컵 역사상 첫번째 승리이다. 첫 승의 포문을 연 첫 골, 결승골을 작렬시키며 제대로 인생골을 집어 넣었다.
덤으로 이 날 경기 후반전에서는 그동안 1:1 찬스를 자주 놓쳐 홈런왕이라고 조롱받던 유상철 역시 오른발 강슛으로 쐐기골을 뽑아냄으로서 마찬가지로 그동안의 안타까움을 씻어버리는 명예회복의 한 판이 되었다.
2.2.7.2. 조별리그 D조 2차전 : vs 미국
미국전은 여러 모로 아쉬운 경기였다. 이상하게 게임이 잘 풀리지 않았는데, 전방 공격수인 설기현은 뭘 잘못 먹었는지 계속 똥볼만 죽어라 날려댔고, 경기를 중계하던 송재익 캐스터는 이를 비난하느라 바빴다(...) 황선홍은 미국월드컵때 자신의 모습과 닮아 보였는지(...) 계속 설기현을 독려했다. 하지만 전반 중반에 미국 선수와의 충돌로 머리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투혼을 살려 붕대를 두르고[38][39] 그대로 경기에 임했으며 심지어는 머리를 다친 그 상태로 헤딩까지 했다. 그리고 전반 막판에는 페널티킥을 그가 직접 얻어내기까지 했다. 물론 결과는 이을용의 실축으로 끝났지만(...). 후반전 들어 안정환으로 교체되어 그라운드에서 물러났는데, 관중들은 30대 중반 노장의 투혼에 기립박수로 화답하였다.
참고로 이 경기가 A매치 99경기째였는데 다음 포르투갈전에 출전하면 100경기 출전으로 센츄리클럽에 가입할 수 있었다.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한다고 밝혔기 때문에 만약 포르투갈전에 출전하지 못하고 한국도 16강에 못 올라간다면 그걸로 A매치 100경기 출전은 무산될수도 있는 상황. 히딩크 감독의 자서전에 의하면 당시 히딩크 감독도 박항서 코치를 통해 황선홍이 포르투갈전에 출전하면 센츄리클럽에 가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 선수의 출장 기록이 경기보다 중요할 순 없다며 황선홍이 스타팅에서 제외된 원래 계획을 고수했고 그가 뛰어야 되는 상황이 생겨야만 투입하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사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월드컵이라는 중요한 대회에서 그것도 토너먼트 진출이 결정되느냐 마느냐 하는 경기에 한 선수의 출장기록을 배려해 원래 계획을 수정할 정신나간 감독이 있을까?
아무튼 황선홍은 포르투갈과의 경기에 출전하진 않았지만, 대한민국팀은 박지성의 결승골에 힘입어 포르투갈을 1:0으로 격파하는 이변을 만들었고 조 1위로 16강에 안착할 수 있었다. 황선홍은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 교체로 출전하여 A매치 100경기에 출장하면서 센츄리클럽에 가입하게 되었다.
2.2.7.3. 16강전 : vs 이탈리아
이탈리아전은 후반 한 골차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교체투입되었고, 후반 막판 절묘한 2대1 패스로 설기현의 동점골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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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전에서는 수비벽을 쌓고 점프하는 선수들 밑으로 허를 찔러 깔아 찬 절묘한 프리킥을 보여 주기도 했다. 부폰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골도 가능했다. 이 프리킥이 의도하고 찬 게 아니라는 말도 있었으나 당시 코치였던 최진한의 인터뷰에서 J리그에서도 그렇게 몇 번 그런식으로 찬적이 있어서 일부러 노리고 찬 것이라고 좀 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걸로 봐선 원래 의도한 바가 맞다. 외부링크 의도하고 찬 게 아니라는 말은 남자의 자격에서 유상철이 황선홍한테 한 농담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이런 변칙적인 프리킥으로 2018년 월드컵에서 콜롬비아가 일본에 동점골을 넣은 적이 있다.
어쨌든 이탈리아전의 황선홍은 골을 넣지 못했을 뿐 폼은 이때까지 출전한 월드컵 경기 중 가장 좋았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활발하면서 노련한 움직임으로 팀의 활력을 불어넣어줬고 연장 후반 막판에 이영표의 크로스때 절묘한 위치 선정으로 문전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뭐, 결과는 알다시피 크로스가 안정환의 머리에 정확하게 배달되어 극적인 골든 골로 끝났지만.[40]
2.2.7.4. 8강전 : vs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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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전에서는 승부차기 1번 키커로 나섰다. 경험 많은 베테랑이어서 히딩크가 1번으로 세웠는데, 결국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켰다. 골키퍼 카시야스가 방향을 잘 잡았지만 겨드랑이 사이로 공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다행히도 골이 되었다. 황선홍이 훗날 밝히기를, 그 킥은 제대로 차지 못한 실패한 킥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5번 홍명보까지 골을 성공시키면서 한국은 사상 초유의 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한다. 4강이 확정되는 순간 황선홍과 홍명보가 힘껏 포옹하는 장면은 한국축구사에 영원히 기록될 명장면이다.
2.2.7.5. 4강전 : vs 독일
독일 전에도 출전했으나 후반 54분에 교체되어 나왔다. 우리나라는 선전했으나 아쉽게도 1:0으로 석패해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2.2.7.6. 2002년 11월 20일 친선경기 브라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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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과의 친선전에서 홍명보와 함께 은퇴 경기에 출전했다. 우리나라는 결국 2:3으로 석패했고 황선홍은 홍명보와 함께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그동안 불운과 좌절도 많았지만 대한민국 축구선수로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서 화려하게 선수생활을 마무리 할 수 있었으니, 그 누구보다도 행복했던 선수였다고 할 수 있겠다.
2.2.7.7. 지식채널e '어떤 스트라이커의 1승' 편
"나는 '한 골'이 절실한 순간이 너무 많았다.
정말,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안 될 때가 더 많았다"
"전 다시 한국에 가야합니다.
난...한국 가야 돼요
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인식을 다 바꾸고 은퇴하려고요
그게 내가 해야 될 일이에요"
1999년 스포츠 전문 웹진 "후추닷컴" 일본 오사카 인터뷰 -
나는 모든 선수들에게 애착이 있지만
황선홍에게 조금 더 애착이 가는 게 사실이다.
그는 팀의 베스트로서 항상 혼자 아픔을
뒤집어썼다.
프랑스에 5대 0으로 대패하던 날 그는
내 숙소에 찾아와 밤을 새워 울었다.
조금 더 일찍 좋은 팀에서 체력과
개인 스피드를 연습했다면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골 하나가 너무나 간절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축구선수여서
무척 행복했습니다.'''
전 국가대표 황선홍
3. 기록
3.1. 포항 스틸러스
3.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아시안 게임 축구 동메달 : 1990
- CONCACAF 골드컵 4위 : 2002
- AFC 아시안컵 준우승 : 1988
- FIFA 월드컵 4위 : 2002
3.3. 통산 성적
3.3.1. 국가대표
2017년 9월 5일 기준이다.
3.3.2. 클럽
3.4. 주요 개인 수상
-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득점왕 : 1994
- 아시아축구연맹(AFC) 득점왕 : 1994, 1995
- 아시아축구연맹(AFC) 특별상 : 1995
- 한국프로축구 브론즈슈 : 1995
- 한국프로축구 골든볼 : 1995
- K리그 베스트 11 : 1995
- J리그 득점왕 : 1999
- J리그 베스트 11 : 1999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브론즈슈 : 2001
- 체육훈장 맹호장 : 2002
- 자황컵 체육대상 남자 최우수상 수상 : 2002
- 자랑스런 충남인상 체육발전분야 : 2002
3.4.1. 표로 보기
3.5. 개인 기록
3.5.1. 클럽
- 95년 K리그 8게임 연속 득점[43]
- 99년 J리그 득점왕 24골 8어시스트
3.5.2. 국가대표
- A매치 103경기 50골.(역대 득점 순위 2위, 1위는 차범근)
- 90년 월드컵 지역예선 득점왕 6경기 7골
- 94년 아시안게임 득점왕 11골
- 94년 아시아축구연맹선정 득점왕 A매치 16골
- 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브론즈슈 2골[44]
- 02년 6월 4일. 월드컵 폴란드전 골. 이탈리아전에서 센츄리 클럽 가입
- 대한민국 최초 전대륙 상대 A매치 득점 성공[45]
4. 플레이 스타일
그의 플레이 스타일을 요약하자면 후술할 몇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전술의, 그 어떤 공격권의 포지션에 넣어놓아도 최소 미친 활약을 펼치는 매우 유니크한 스트라이커였다. '''그야말로 황선홍은 어떤 전술에도 써먹을 수 있는 공격수였다.''' 그의 이런 장점은 팀의 전술이 자신 위주로 돌아가야 빛을 발하는 후배 국가대표 공격수인 이동국과 박주영의 약점에 비춰봤을 때 국가대표팀이 그를 뽑을 수밖에 없는 매우 중요한 이유였다. 따라서 그가 선수 시절을 하는 동안 어떤 국가대표 감독이든 반드시 황선홍을 최전방 공격수로 썼으며, 황선홍이 국가대표에 뽑히지 않았을 때는 그가 부상 중이었을 때 밖에 없다.
선수 시절 황선홍은 최전방 공격수로서 갖춰야할 모든 덕목을 두루 갖춘 만능형 스트라이커였다. 우선 그는 최소한 우리나라 선수 중 그 당시 훌륭한 183의 키와 준수한 주력, 피지컬을 바탕으로 온갖 종류의 슈팅 테크닉을 실전에서 시도할 수 있는 수준[46] 의 공격수였다. 발기술도 꽤 괜찮아서 순간적인 발밑 기술로 공을 지켜내거나, 상대 진영으로 공을 전진 시도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고, 시야와 패싱 능력도 나름 준수하게 갖추어 연계 플레이 역시 뛰어났다. 요약하자면 개인 전술의 폭이 매우 넓었다는 것. 거기에 그는 넓은 활동 반경에 지능적인 오프 더 볼 움직임 역시 갖추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선수로 활약하던 당시 한국 국가대표팀의 모든 감독들이 결국은 황선홍을 기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국가의 자존심이 걸려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자국에서 벌어지는 월드컵의 역사상 첫 승을 노리던 첫 번째 경기에서 35세의 노장 선수가 선발 원톱으로 나왔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원래 2002 월드컵 때도 황선홍이 주전이었고 안정환이 교체였다. 공격수로서 환갑인 35의 나이로 국대에서 주전이였다는 것만으로 그의 재능과 센스는 히딩크 감독도 인정했다.[47] 그만큼 황선홍의 클래스가 뛰어났다는 것이다. 본래는 가급적 젊은 선수를 기용하고 싶었지만 그가 제일 뛰어났기에 기용된 것이다. 그의 친구이자 동 시대의 또다른 레전드인 홍명보의 경우 그가 차출되는 순간 팀 전술이 쓰리백 오버래핑 위주 전술로 획일화된다는 황당한 단점을 지녔다는 점과 대조된다.
윗 내용만 보면 월드클래스 쌈싸먹는 공격수처럼 보일 수 있는데, 전부 당대 아시아 레벨에서다. 세계 레벨에선 한계가 명확했다. 국내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고 하지만 세계의 정상급 수비수들을 상대하기엔 피지컬이건 주력이건 특별할게 없었고, 볼 터치와 드리블도 평범했다.
주로 최전방의 타켓형 스트라이커로 뛰는 경우가 많았는데 항상 수비수 2~3명을 끌고 다니며 공간을 만들었고 수비를 등지고 하는 플레이도 뛰어났다. 그에 따라 슈팅 기회를 직접 갖기도 했지만 다른 2선 선수들에게 공간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많이 했다.[48] 또한 순간 침투력과 뛰어난 위치 선정으로 슈팅 기회를 많이 가졌는데 오히려 이것이 골 결정력 부족이라는 폄하로 이어지기도 했다. [49] 다만 선수 시절 지독한 불운으로 늘 부상에 시달렸고[50] , 그로 인해 젊은 시절 그의 플레이는 기복이 있었다. 황선홍의 부상과 비난에 대해서는 이후에 상세히 후술한다.
이렇게 한국축구에서 유니크한 스타일을 보여주었다보니, 그의 후계자를 찾는데에도 꽤나 애를 먹었다.
황선홍 은퇴 이후 황선홍의 역할을 맡았던 선수는 이동국, 조재진, 박주영, 이근호, 김신욱 등이 있지만 모두 황선홍과 비교할 때 조금씩 모자란 플레이를 보여줬다.[51] 2010년 이후 손흥민이란 걸출한 공격수가 나왔지만 황선홍과 달리 주력을 바탕으로 한 2선 침투에 능한 선수라 결국 대표팀은 박주영과 같은 타켓형 스트라이커를 필요로 했다.
그렇게 '''16년'''여가 지난 2018년이 되어서야 '''황의조'''가 다시금 후계자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5. 총평
황선홍이 선수 생활을 하던 14년 간 국가대표팀 부동의 스트라이커로 활약했고, 동시대의 모든 공격수는 황선홍과의 경쟁에서 밀렸다. 히딩크도 체력을 중시하며 젊은 선수들 위주로 대표팀을 구성했는데 그에 따라 초반에는 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표팀은 골 결정력 부족으로 히딩크로부터도 킬러가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했고 결국 황선홍이 합류하고나서 킬러가 왔다는 극찬과 함께 무한 신뢰 받았다. 황선홍은 공격수로는 환갑일 나이인 35세로 다시 27세의 안정환[52] , 30세의 최용수[53] , 33세의 김도훈[54] 등을 모두 제치고 최전방 원톱 스트라이커 주전 자리를 꿰찼다. 결국 그 어떤 선수도 부상이 아닌 황선홍과의 주전 경쟁에서 이기지 못했다.
황선홍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부상이다. 황선홍은 축구 인생에 전환기를 맞이할 즈음이면 공교롭게도 크고 작은 부상이 닥쳐와서 선수생활 내내 부침이 심했다. 특히 전방 십자인대가 두 번[55] 이나 파열됐는데 군대에서 전방 십자인대가 파열되면 곧바로 의병 제대를 할 수 있는 매우 심각한 부상이다. 특히 축구 선수에게 십자인대 파열이란 선수 피지컬에 큰 영향을 주고 선수 생활 내내 고통스러운 재활과 보강 훈련을 해야 한다. 십자인대 파열로 내리막길을 걷게 된 축구 선수들도 많다.[56][57]
이런 부상을 무려 두 번이나 겪고도 재활에 성공해 극복하고 계속해서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발탁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대체 불가능한 선수였다는 뜻이다. 간혹 어떤 이들은 동시대 공격수인 '독수리' 최용수가 A매치 67경기 27골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선홍보다 더 활약했다고 착각하는데 최용수가 활약했던 98 월드컵 예선 때는 황선홍이 부상으로 아예 대표팀으로 뛰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따라다니던 부상만 아니었다면 훨씬 더 좋은 커리어를 기록할 수 있었던 선수였다.
선수 시절 끝없는 불운으로 부상에 시달렸고 욕도 많이 먹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기대와 주목을 많이 받는 선수였다. 90년대에는 심지어 황선홍 급류차기 훈련이라는 황당한 기사 등 대한민국 축구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선수였다. 그래도 마지막인 2002년 월드컵에서 명예 회복을 하며 선수 생활을 잘 마무리했기 때문에 불운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이후 황선홍의 플레이를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폄하 당하는 경우가 있다.
5.1. 비난과 폄하 그리고 오해
'''왜 그토록 욕을 먹었는가?'''
일단 90년대에는 사람들이 축구에 대한 지식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그 때문에 경기에서 지거나 못했을 경우, 대표팀에 대한 비난이 미드필더나 수비수 또는 전술에 대한 비판이 아닌, 오로지 최전방 공격수에게만 집중되었다. 90년대 한국 축구는 공격보다는 수비 불안이 더 큰 문제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한국 축구는 늘 수비가 문제다. 그러나 동시대 국가대표의 붙박이 중앙 수비수였던 홍명보에게 비난이 쏟아지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는 점은 의아한 일이다. 특히 98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전 5:0 참사 때도 홍명보를 비롯한 수비수에 대한 비난은 없었고, 오히려 십자인대 파열 부상으로 벤치에 앉아있던 황선홍을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까지 수비진이나 미드필더진은 비난에 있어서 성역이였고, 모든 욕은 골을 못넣은 공격수, 그리고 그런 공격수를 기용한 감독이 욕을 먹었다.[58] 즉, 경기에서 지면 무조건 공격수가 욕을 먹던 시절이였다.
그 때문에 황선홍은 국가대표로서 무수히 많은 활약을 했음에도 94 미국 월드컵 볼리비아전 딱 한 경기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심지어 그의 커리어도 폄하되고 있다. 사실 94 미국 월드컵 볼리비아전 외에 딱히 황선홍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은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4강전을 제외하면 딱히 없다. 그저 단 한경기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으로, 황선홍은 과도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대가를 너무나도 혹독하게 치러야만 했다.[59]
사실 황선홍이 진짜로 실력 없고 욕만 먹는 선수였다면 94 월드컵 이후 묻혔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94 월드컵 이후로도 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96 AFC 아시안컵, 96 애틀란타 올림픽(와일드 카드 출전) 등에서 골을 넣으며 맹활약했다. 물론 94 월드컵 이후 생겨난 안티팬들은 맹활약하는 황선홍을 보며 아시아용이라고 비아냥댔지만, 결국 황선홍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하는 공격수라는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하는 공격수가 월드컵에서 못했던 것에 대한 좌절감이 더 큰 비난과 분노로 이어진 것이다.[60]
98 월드컵을 앞두고 한일전에서 역전골을 넣으며 화려하게 복귀했고, 그에 따른 기대도 대단했다. 그동안 한국 대표팀이 실행해보지 않았던 황선홍과 최용수의 역대 최강의 투톱을 가동할 수 있다는 큰 기대가 있었지만 결국 부상으로 좌절됐고, 98 월드컵은 완전히 망쳐버린 흑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이런 기대와 그에 따른 실망감은 일부 안티팬들에 의해 황선홍의 비난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왜 중국전에 무리해서 부상을 당했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거가 있어서인지 국대 스트라이커들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많이 표시한다. 예를 들어 박주영이 한창 까일 때에도 이 정도는 너무 부당하다는 의견을 내비친 적도 있고, 이동국의 경우에는 포항 출신이라는 것 이외에도 많은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과거의 자신과 겹쳐보는 듯한 발언을 많이 한다. 2013년 올스타전에서 제 2의 황선홍으로 노장 축에 속하는 이동국을 뽑기도 했다. 이 올스타전에서 이동국은 '축제'라는 경기 특성 상 잘 쓰지도 못하고 잘 쓰지도 않는 개인기를 선보였었는데 경기장에서 노골적인 야유를 들었고, 저 발언 이후에 웅성웅성거리는 소리도 많이 들렸다. 그런 까닭인지 데얀을 내치고 박주영과 재계약을 감행하며 K리그 흥행에 이바지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만 활약했다?'''
역대 2위에 해당하는 황선홍의 '''A매치 103경기 50골(경기당 0.49골)'''에 대해 아시아에서만 넣은 골이라는 폄하가 있다.[61] 그러나 AFC에 속한 이상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당연히 아시아팀들과 경기를 많이 한다. 황선홍 뿐이 아니라 다른 모든 선수들도 아시아팀과 비아시아팀과의 경기 비율은 비슷한 수준이다.
어차피 역대 한국 공격수 중에 세계무대에서도 통할만한 역량을 발휘한 선수는 차범근, 박주영, 손흥민 뿐이고 이 선수들도 A매치 득점 대부분을 아시아팀 상대로 기록했다.
유럽이나 남미의 유명 공격수들도 약팀과의 경기에서 몰아치기를 하는 것은 다 마찬가지이다. 그 잘난 리오넬 메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그렇다. 포르투갈의 전설적인 골잡이 에우제비우는 호날두가 자신의 A매치 골기록을 넘어서자 나는 리히텐슈타인이나 아제르바이잔과는 경기한적 없다며 꼬집었었고 실제로 호날두의 대표팀 득점을 뒤져보면 7골을 넣은 리투아니아를 비롯해 라트비아, 아르메니아, 안도라, 에스토니아, 페로제도 같은 약체팀들에 대놓고 몰아넣었다. 2020년 11월까지 호날두가 A매치에서 기록한 102골중에 피파랭킹 50위권 안에 있는 팀 상대로 기록한 득점은 28골에 불과하다.
호날두보다야 덜하지만 메시도 크게 다르진 않다. 같은 남미에서 매번 마주치는 브라질과 우루과이에게 5골씩 기록한걸 제외하면 강팀 상대로 다득점한 적이 없다. 베네수엘라, 과테말라, 파나마, 볼리비아, 에콰도르 같은 중남미 약체팀들 상대로 열심히 몰아넣었고 스페인(2골), 독일(1골), 프랑스(1골) 같은 유럽 강호들 상대론 조용했다.
황선홍의 클래스가 아시아를 넘어서지 못한것에 대해서야 할 말이 없지만 황선홍을 콕집어 아시아 몰아넣기라고 그가 넣은 골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은 부당한 폄하다. 또한 아시아팀과 비아시아팀에 대한 골을 따로 분리하여 비교하면 황선홍이 역대 1위이다. 심지어 그는 선수생활 늘 부상에 시달려 대표팀 경력에서 최소 2년 이상의 공백이 있는 선수다.
[1] 전반기 10경기 10골을 득점하며 좋은 활약을 보여서 후반기 1군 선수들과 함께 훈련했지만 경기에는 내보내주지 않았다고.[2] 첫번째 십자인대 파열로 인해 6개월을 재활로 보낸 뒤 복귀하였는데 다시 두 경기만에 무릎 연골 파열로 2차 수술행. 황선홍은 이때 지금의 부인인, 당시 독일로 어학연수를 와있던 정지원 씨를 만나게 된다. 아는 후배들을 따라 대학 축제에 놀러갔던 그는 지금의 와이프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고, 후배를 보채서 소개팅까지 성공. 첫 만남 후 무릎 부상을 당해버려 거동이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정지원씨는 어학연수 일정이 끝났음에도 6개월간 귀국을 늦춰가며 병수발을 했다. 귀국 후 그 해 크리스마스에 결혼식을 올린다.[3] 이 때는 사실상의 전신인 완산 푸마. 이듬해 전북 버팔로로 구단명이 변경되었고 자금난으로 해체된 후 현대자동차의 스폰서로 현재의 전북 현대 모터스로 재창단된다. 그러나 전북 버팔로와는 엄연히 별개의 팀으로 되어 있다.[4] 이 때 포항에서 트레이드된 선수 중 한 명이 이흥실이었다. 그러나 이흥실은 전북에서 한 경기도 뛰지 않고 바로 은퇴했다.[5] 포항이 1996년 제1회 FA CUP 축구대회에서 우승했지만, 정작 본인은 아시안컵과 일정이 겹쳐 불참했고, 유일하게 출전한 1997년 제2회 FA CUP 축구대회 준결승에서 천안 일화 천마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6] 이로부터 16년이 지난 2014년의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포항 스틸러스의 감독으로 세레소와 경기를 치르자 적장임에도 엄청난 콜을 받을정도로 사랑받았다.[7] 그 경기때 황선홍은 어깨 탈골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 부상 정도를 자세히 모르는 데니스가 황선홍을 건드리고 말았고, 황선홍은 데니스의 멱살을 잡았다. 데니스로서는 걱정해서 그랬다가 드잡이를 잡힌 나머지 빡쳐서 성질을 냈고 그 결과 황선홍의 임대가 결정되었다. 수원 입장에선 팀에 온지 얼마 안 되는 황선홍 보다 데니스가 전력적으로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남겼다.[8] 이 트레이드가 이후 개그적인 상황을 야기했다. 이 트레이드 전에 수원은 당시 유고 특급 용병 샤샤를 가시와로 먼저 보냈다. 샤샤와 절친이었던 박건하는 매우 아쉬워 했는데, 얼마 후 박건하도 가시와로 임대갔다.(...) 그러다 일본에서 적응하지 못하던 샤샤가 황선홍과 맞트레이드 되면서 두 사람은 다시 작별을 나누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박건하도 다시 수원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둘 다 상당히 멋쩍은 반응이었다고. 박건하는 샤샤보고 '이제 너 얼굴 보는 것도 질림ㅋ'라는 반응을 보였다.[9] 원래는 2003년 시즌 일부를 뛸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상으로 무산되었다.[10] 비슷한 케이스가 홍명보. 황선홍처럼 부상이나 여론의 비난으로 부침이 있진 않았지만 명성에 비해 K리그 커리어가 빈약한 편이고 J리그 활약상이 더 돋보인다는 점은 황선홍과 같다. 게다가 K리그 입단과정에서 파문을 일으키고(이거야 포항구단도 한 통속이었다지만) 선수생활 말년에 LA갤럭시 이적을 통해 포항을 엿먹이며 K리그를 완전히 물로 보는 행동을 했기에 지도자로서의 행보를 빼더라도 황선홍보다 평가가 훨씬 안 좋다. 그래서 이쪽도 국대팬, 라이트팬이 아니면 한국축구 레전드 대우는 해줘도 K리그 레전드로 꼽지는 않는다.[11] 당시의 경험 때문인지 황선홍은 현역시절 호흡이 잘 맞는 선수로 윤정환을 여러차례 꼽기도 했었다.[12] 당시 황선홍은 청소년 대표팀 경력도 한 번 없던 그야말로 무명 대학선수일 뿐이었다.[13] 이회택은 이미 용문고 1학년 시절부터 황선홍을 점찍어두고 있었다고 한다. 이회택이 한양대 감독을 하던 시절 용문고 3학년 선수를 뽑기로 하고 관전하던 도중 눈에 띄었다고. 이후에 한양대로 입학하기로 했던 그 3학년 선수가 사정상 한양대가 아닌 다른 학교로 진학하지 않으면 다른 여러 선수가 피해를 보게 되어서 이회택은 알았으니까 대신 황선홍을 달라고 했는데 잘해서 3학년인 줄 알았던 황선홍이 1학년이었다고 한다.[14] 참고로 황선홍은 현역시절 일본과의 A매치에 총 4경기 출전해서 5골을 넣었다. (도움도 몇 개 있다.) 더 놀라운 것은 4경기 모두 결승골을 넣었다는 점.[15] 90년대에는 대표팀에 대한 비난이 공격수에게만 집중되는 경향이었다. 수비수나 미드필더, 또는 전술에 대한 감독 책임보다는 오로지 공격수만을 비난했고 황선홍은 항상 그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다.[16] 하지만 이때 비판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공격수가 한번 찬스를 놓치는건 옛날에도 비일비재 했고 극적으로 비겨서 묻혀버렸지만 볼리비아전 이후로 스페인전 일대일이 다시 재조명 되었다.[17] 승=3점. 무=1점. 1986년부터 1994년까지 우리의 월드컵 본선 전략이었다. 최대한 비기기. 단, 승리시 승점 3점이 주어진 것은 1994년 월드컵부터다. 그전까지는 승리시 승점 2점.[18] 여담으로 볼리비아전 당시 주심이 무슨 생각인지 전반전에 5분, 후반전에 8분, 합쳐서 무려 13분의 추가시간을 주었다. 이 경기의 여파로 FIFA에서 추가시간에 관한 규정을 만들면서 현재와 같이 주심의 재량권을 제한하고 대회 주최 측에서 추가시간을 공지하는 방식이 도입된다.[19] 이 경기에서 황선홍은 총 5번의 슛을 시도했고 이 중 페널티 에어리어 밖에서 때린 3개의 슛이 모두 높이 떴으며 이 중 2개는 잘 차기만 하면 들어갈 수도 있었던 찬스였다. 나머지 2개의 슈팅은 머리에 잘 맞췄지만 골키퍼 정면으로 가고 만 헤딩슛과 상대 수비의 실수로 얻어낸 딱 한 번만 더 치고 들어가면 넣을 수 있었던 GK와의 1:1 찬스였다.[20] 심지어 이 경기는 스페인전의 선전으로 기대가 커진 국민들이 최초의 월드컵 1승을 달성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경기였다.[21] 인터넷이 활성화된 지금, 선수들의 외적인 논란으로 욕을 먹은 선수들이 많지만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운동선수는 국가대표 경기에서 큰 실책을 한 선수다. 특히 월드컵 나간선수들은 역적이 된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농구스타 허재는 음주운전 3번, 그중 한번은 무면허 음주운전이다. 선수 외적으로도 구설수에 많이 오른 편이었다. 그러나 안티가 많았을 뿐이지. 90년대에는 인기가 매우 좋은 편에 속하는 스타였다. 시대가 인터넷 시기가 아니라는 점도 있겠지만 허재가 먹은 욕은 황선홍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다. 황선홍은 대인기피증까지 생겨날 정도니깐. 황선홍은 축구 외적으로는 매우 깨끗한 편이다. 2018년 현재도 그런게 싸인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는 류현진이나, 음주 3번의 강정호, 병역논란의 나지완과 오지환, 약쟁이 김재환, 학교폭력 안우진, 구설수의 아이콘 이천수, SNS로 논란일으킨 기성용 등등 이선수들 합쳐서도 장현수가 먹은 욕이 배가 된다. 이천수나 기성용은 국대에서 잘하니 팬들이 좋아해준다. 장현수는 팬서비스도 매우 좋고 소위 입터는 행위도 하지않았다. 비록 나중에 병역 서류조작으로 날라갔다.[22] 사실 볼리비아전의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다른 플레이는 상당히 괜찮았다. 실제로 당시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기록한 4골 중 2골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는데, 스페인전에서 문전으로 파고드는 홍명보의 패스를 수비수를 등진채 적절한 위치로 리턴해줘서 그가 서정원의 골을 도움하는데 기여했고, 후술하겠지만 독일전에서는 자신을 마크하는 수비수의 중심을 빼앗아 떨궈내는 순간적인 페인팅과 적절한 공간침투 그리고 이어진 기술적인 칩슛으로 직접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결국 어떤 공격수든 지나칠 정도로 안 풀리는 경기가 있을 수 있음에 비추어볼 때 그에 대한 비난이 너무나 가혹했음은 분명하다. 볼리비아전이 그만큼 엄청나게 중요한 경기이긴 했지만...[23] 2018년도에 김보름과 함께 가장 많은 비난을 먹었다. 김보름은 그래도 나중에 동정 여론이라도 생겼지... 그 수비수는 결국 병역혜택 봉사활동 서류조작으로 국대 영구 퇴출이 되었다. 2002년도에 명예회복을 한 황선홍에 비한다면 비참한 결과다. 명예회복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 아마 21세기에 가장 욕을 먹는 운동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동국, 박주영도 역적수준으로 까이긴 했지만 저 두명은 리그 내에서 활약도 우수했고 A매치에서 골도 많이 넣었다. 기대치가 있으니 욕을 하는것이고, 인기도 좋은 편이니깐. 그 수비수는 말그대로 못해서 국민들에게 유명한것이니.[24] 국민 상당수가 그를 첫골을 넣을 선수로 지명했었다. 월드컵이 끝나고 엄청나게 비난을 받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국민들도 황선홍을 상당히 믿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25] 골때리는 건 심판이 그 장면에서 퇴장이나 경고는 커녕 파울조차 주지않았다는 것. 당시 경기를 보면 분노한 고정운이 바로 보복태클을 들어가고 또 당시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박종환이 흥분해서 "저거! 저거!"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26] 1997년 5월, 발목부상 후유증으로 오른쪽 십자인대가 파열되었다. 당시 황선홍은 리그, 국가대표, 상기한 올림픽대표 와일드카드까지 96년 한해에만 60여 경기를 뛰며 혹사당한데다가 상술했다시피 아시안컵 쿠웨이트전에서 후반 막판 상대 수비수의 살인태클에 오른 발목 인대까지 부분파열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도 못한 채 곧장 차범근호에 소집되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3월 7일~9일에 열린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준결승전과 결승전까지 출전했다. 이러니 무릎이 폭8할 수 밖에(...) 아무튼 1997년에 파열된 그 무릎은 1992년 십자인대와 연골이 파열되었던 바로 그 오른쪽 무릎이었다. 그리고 이후 굉장히 아끼는 후배는 몇년 뒤 그보다 더 심한 혹사를 당하게 된다(...)[27] 프로경기에는 97년 10월에 복귀했다. 하지만 부상후유증을 완전히 떨치지 못해 출장과 결장을 반복하며 몸상태와 경기감각을 끌어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28] 잠실 주경기장에서 벌어진 최종예선 2차전에서의 0:2패배, 그리고 98년 초에 벌어진 다이너스티컵에서의 패배.[29] 당시 잠실 주경기장은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녹색물감을 뿌리는 편법을 쓸 정도로 잔디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다른 경기장에서 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당시에는 월드컵 경기장들이 건설되기 전이었고 축구를 할 수 있는 대부분 경기장의 상태 특히 잔디의 상태가 매우 별로였다. 실제 K리그의 경우 아예 흙바닥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경기하기 일쑤였고 그나마 포항축구전용구장이나 광양축구전용구장은 예외라고 할 수 있었으나 여기는 수용인원이 적어서 국가대표 경기에는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한국이 그나마 제대로 된 잔디에서 축구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월드컵 경기장들의 건설 이후라고 봐도 무방하다.[30] 이후 J리그에 진출했던 모선수는 잔디상태가 양호한 J리그의 경우 패스가 들어올 때 다음 동작을 미리 생각하는데, K리그의 경우 대부분 잔디상태가 좋지 않아 다음 동작이고 뭐고 일단 볼을 제대로 트래핑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31] 1998년 축구협회가 얼마나 정신 나간 집단이었는지 알 수 있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날'''에 '''야간 경기'''를 잡았다. 실전 대비라고 설명하기 힘든, 약체 중국과 경기를 잡은 것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당시 축구협회의 병크는 월드컵 대회 도중 차범근 감독을 경질하면서 정점을 찍었다.[32] 이 경기를 계기로 한국 축구팬은 한중전만 열리면 부상 트라우마에 시달린다.[33] 프랑스 월드컵 당시 2인 1실로 숙소를 사용 했는데 당시 황선홍의 룸메이트가 이동국이었다. 같은 공격수라고 선배에게 노하우 좀 전수 받으라고 같이 한방에 몰아 넣은 것이데 경기도 뛰지 못하고 한국팀의 대패를 지켜봐야 했던 황선홍은 하루종일 한숨만 쉬고 괴로워 했다. 당시 18세던 이동국은 대선배가 침울해 있으니 방에 있기도 부담스러워 숙소 뒷편에 나가 계속 공을 찻다고 한다. 그게 차범근 눈에 띄어서 네덜란드와의 2차전 교체 엔트리에 포함 되었고 후반전에 교체 투입되어 18세의 나이로 월드컵에 데뷔하게 된다.[34] 부상이 많았던데다가 당시는 지금보다 평균선수생명이 짧았다.[35] 당시 재기여부가 불투명하다고 판단한 세레소 오사카 측에서 입단테스트를 겸한 6개월의 굴욕적인 계약을 제의했음에도 일본으로 떠났다. 득점왕이 된 것은 괜찮은 활약으로 계약을 연장한 이듬해다.[36] 축구선수로, 그것도 공격수로는 환갑에 가까운 35살의 나이였고 선수생활 내내 달고 다녔던 여러 부상때문에 경기를 풀타임으로 뛸 체력은 부족했고, 대회 내내 안정환과 번갈아가며 원톱 역할을 맡았다. 대회 종료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무릎 컨디션 악화로 대회 중에 두 차례나 진통제를 맞아야 했다. 폴란드전도 진통제의 힘으로 겨우 출장했고, 미국전 이후 또다시 진통제를 맞고 휴식을 취하느라 그리고 전술상의 문제로 조별리그 포르투갈전을 출장하지 못했다. 터키전도 출전하려 했으나 주치의가 ‘한번 더 진통제를 맞으면 부작용이 심각할 수 있다’고 출장을 만류하였으며, 히딩크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일 수도 있는 국가대표 경기이기에 원하면 출전시켜 주겠다고 했으나 황선홍 본인이 후배들의 출장기회를 생각해 출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고 한다. 히딩크 감독은 대회 내내 황선홍을 전적으로 신뢰했다.[37] 히딩크는 황선홍이 자기에게 달려오는 줄 알고 기다렸는데 박항서에게 안기는 걸 보고(...) 약간 서운했다고 훗날 술회했다. 안습. [38] 머리에 씌우는 걸로 빠르게 응급처치가 가능한 그물붕대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당시 치료를 맡았던 최주영 의무팀장이 붕대를 두르고 뛰는 모습을 보여줘 다른 선수들의 투지를 불태우기 위해 일부러 붕대를 사용했다고 한다. 근데 붕대를 감는 사이, 10명으로 뛰던 우리 대표팀은 골을 먹어버렸다(…). 그 와중에 방송중에 관중석에 있던 황선홍의 딸 황현진 양(당시 9살)이 우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는데, 자기 아버지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39] 다만 2012년 최주영 의무팀장의 인터뷰에선 그물붕대가 있었음에도, 당황해서 기존에 사용하던 탄력붕대를 꺼내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40] 안정환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안정환은 사실 헤딩을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세리에 A에 진출하면서 헤딩 기술도 많이 늘어서 헤딩골도 잘 넣는 선수가 되었지만. 황선홍도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며 회상했는데, 강호동이 안정환이 골든 골 넣을 때 황 선수는 바로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안 선수(안정환)에게 골든골 기회를 뺏긴게 아니냐며 장난삼아 놀리자 황선홍은 "정환이 걔, 사실 헤딩골 잘 넣는 선수는 아니었어요;;;"라며 진땀을 뺐다(...) [41] 상술했다시피 아시안컵 일정과 겹쳐서 아예 엔트리에서 빠졌다. 당시 우승의 주역은 조진호였다.[42] 94 월드컵 지역예선과 일정이 겹쳐 엔트리에서 빠졌다(...)[43] 김도훈이 타이 기록을 세우긴 했으나,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 여담으로 이 때 황선홍은 연속골에 실패한 9번째 경기까지 계속해서 같은 축구화를 신었다고 한다. 이는 일종의 징크스를 의식했기 때문이었으며, 그 결과 축구화는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너덜너덜해졌다.[44] 이때 호주전에서 넣은 골이 컨페더레이션스컵 역대 최고의 골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http://www.fifa.com/confederationscup/video/best-goal/index.html 참고로 어시스트한 선수는 박지성이다.[45] 1988.12.6 일본(아시아), 1989.8.13 미국(북아메리카), 1990.2.4 노르웨이(유럽), 1994.2.26 콜롬비아(남아메리카), 1994.5.3 카메룬(아프리카)를 상대로 득점. 2001.6.3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오스트레일리아(오세아니아)에게 득점하여 대한민국 선수로는 최초로 전대륙 득점에 성공했다. 참고로 박주영(2011), 이동국(2014), 손흥민(2017)도 전 대륙 상대 득점자다.[46] 프로선수쯤 되면 상상할 수 있는 웬만한 기술은 다 구사할 수 있다. 이걸 실전에 써먹을 수 있느냐가 문제인데, 그게 가능한 선수였다는 것.[47] 한국의 베르캄프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48] 황선홍 이후에 그의 포지션에서 뛰었던 이동국과 박주영이 움직임이 적어 공간을 만들지 못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49] 즉, 경기 중에 다른 공격수들에 비해 워낙 슈팅 기회를 많이 갖다보니 그 슈팅들이 모두 골로 이어지지 않으면서 황선홍은 개발이라는 오명을 받았다. 그런데 기록을 비교해 보면 다른 공격수들은 아예 슈팅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50] 마지막 대회였던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조차 폴란드와의 첫 경기에서 허벅지 부상을 입고 이후부터 진통제를 맞고 뛰었다.[51] 이동국은 국제대회에 약했으며, 그나마 박주영이 타겟형 스트라이커 롤을 잘 수행했지만 결정력이 들쭉날쭉했고, 이근호는 오프 더 볼과 활동량이 좋지만 기술이 투박했으며, 김신욱은 제공권이 좋지만 등지는 힘이 약해 지워지기 일쑤였다. 오로지 조재진만이 짧은 전성기동안 황선홍에 가장 근접했다라는 평가를 얻는데 그쳤다.[52] 황선홍의 교체 멤버로 선발되었지만 폴란드 전 이후 황선홍이 허벅지 부상을 입으면서 포르투갈전, 이탈라이전, 스페인전에서는 안정환이 선발로, 황선홍이 교체로 나왔다.[53] 미국전에서 교체 출전했으나 결정적인 기회를 날린 것 때문에 이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렸다.[54] 황선홍의 어깨 부상 시절 히딩크호의 공격수로 활약했지만 결국 황선홍에 밀려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55] 92년 독일에서 부퍼탈에서 막 주목 받기 시작할 때 한 번 파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같은 부위 다시 파열.[56] 대표적으로 어려서부터 축구 천재라 불리며 한국 축구의 기대주였던 고종수는 2002년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입고 그 후로 사실상 몰락하여 선수 생활도 일찍 마치게 된다.[57] 황선홍의 장남인 황재훈은 중학교에서 축구 선수로 활약하다 십자인대 파열로 축구 선수를 그만두었다.[58] 98 월드컵 멕시코 전에서 3:1로 패배 후 차범근 감독이 욕을 먹었는데, 그 이유는 공격수인 최용수를 기용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59] 사실 90년대 한국축구계의 선수육성, 관리수준은 심리, 신체 기타 모든 측면에서 팬들의 기대에 비해 그야말로 참혹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히딩크도 자서전을 통해 그가 베르캄프나 반 바스텐을 연상시키는 좋은 움직임과 슈팅 감각을 가졌다며, 조금 더 일찍 유럽에서 체계적인 과정을 거쳤으면 훨씬 대단한 선수가 되었을 거라고 언급한바 있다. 물론 이것은 동시대 다른 선수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겠지만, 그는 혹사와 팀의 선수관리 실패로 인한 큰 부상을 여러번 겪었으며 또 대표팀 부동의 공격수였기에 훨씬 큰 기대에 부응해야만 했고 또 비난받아야만 했다.[60] 우리나라 최고인데 왜 세계 무대 가면 그모양인가 하는 식의 비난이지 다시는 국가대표에 못나오게 해야한다는 식의 비난이 아니었다. 왜냐면 다른 선수는 그보다 더 못했기에...[61] 역대 1위는 차범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