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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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G그룹 계열 종합 전자제품 제조 기업이며 한국에선 삼성전자와 라이벌 관계에 있다. 가전으로 유명하며 전세계 가전업체중 2019년 기준 매출 및 영업이익 세계 1위를 달성하였다. #'''L'''ife's '''G'''ood[4]
기업의 체급상으로는 삼성전자의 매출이 LG전자의 대략 3.5배 정도, 시가총액으로는 20배 정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상대가 안되는 규모로 2위이긴 하지만 LG가 하지 않는 반도체 제조사업과 과거 여러가지 기술적인 에러로 브랜드 이미지가 추락하여 2020년 2분기 기준 21분기째 적자를 이어가는 스마트폰을 제외한 사업에서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 편이다. 또한 LG전자가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계열사인 LG디스플레이와 LG이노텍의 광학솔루션 사업에서도 경쟁사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즉, 하고있는 사업에선 폰 빼고 경쟁사 대비 뒤지지 않는 편인데, 돈되는 사업은 어른의 사정으로 못 했다. 자세한 내용은 LG 문서의 반도체 잔혹사 참조.
본사는 마포대교 인근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대로 128 (여의도동) LG트윈타워 서관에 위치해 있다.
공장 및 연구소는 경북 구미시, 경남 창원시, 충북 청주시, 서울특별시 가산디지털단지, 서초 R&D 캠퍼스 등에 두고 있으며, 노조는 한국노총 금속노련 소속이다.
2. 역사
2.1. 금성사(金星社)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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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1960년까지 쓰인 변형 필기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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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쓰인 로고.[5][6][7] 근데 금성은 영어로 venus지 goldstar가 아닌데 물론 골드스타가 비너스보다 간지(?)나기도 하지 비너스는 원래의 여신의 이름이고 사실 속옷 브랜드로 더 유명해서
1958년 10월, 락희화학 사장 연암 구인회가 경상남도 부산시(현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연지동에 '''금성사'''라는 이름으로 전자 회사를 세우고 초대 사장을 겸했다. 1년 뒤 금성사는 최초의 국산 진공관식 5구 라디오 'A-501'을 개발, 생산했으며, 1960년에 최초로 6석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만들고[9] 선풍기[10] 를 생산했다. 뒤이어 1961년에 최초로 국산 자동전화기도 생산했다.'''"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금성사 시절 캐치프레이즈[8]
1962년 동생 구정회가 사장직에 취임한 후 그해 라디오를 처음으로 미국 아이젠버그 사에 수출했고, 1963년 최초로 국산 적산전력량계도 개발해냈다. 1964년 부산 온천동에 종합전기기기공장을 개설하고[11] 연지동 시대를 마감했다. 1965년 4월 최초로 국산 냉장고를 만들고 실업기술원양성소를 세운 뒤, 그리고 1966년 8월 최초의 국산 19인치 흑백텔레비전 VD-191를 생산하며 일약 한국 우량 전자회사로 입지를 굳혔고, 이후 대한전선, 삼성 등 후발 업체들의 진출에 영향을 주었다. 그해 9월에 한국케이블공업(주)를 합병하고 1967년 본사를 서울 을지로 한일을지빌딩으로 이전한 후 가전-통신-전선 3개 사업부로 개편했다.
1968년에 금성판매(주)를 설립하고 최초로 국산 룸에어컨을 개발했고, 같은 해에 히타치와 제휴를 해서 국산 엘리베이터까지 제작했다.[12] 1969년에 최초로 국산 펌프와 세탁기를 생산한 후 10월부터 통신기기 부문을 금성통신(주)으로, 전선 부문을 금성전선(주)로 각각 분리 시켰고, 1970년에 일본 알프스전기와 합작해 금성알프스전자(주)를 설립하였다.
1971년부터 락희화학에서 옮겨 온 4대 사장 박승찬(1926~1979)은 '금성 약진 3개년 계획'을 내세워 기업 발전과 기술 개발에 열을 올렸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1973년 기업공개 단행 후 1975년에 경북 구미공장, 1976년에 경남 창원공장을 각각 세웠고, 1977년 2월에 사업부제 및 본부장제로 개편 후 8월에 자사 첫 컬러TV 'CT-808'을 개발해냈다. 다른 한편으로 1974년부터 '전국 정밀도 경진대회'에서 3연패, 1977년부터 1978년까지 한국 최초로 국제기능올림픽 2연패 달성에 기여해 해외에서도 기술력을 인정 하게끔 했다. 1978년 8월에 컴퓨터사업부를 신설하고 12월에 매출 1천억 원 및 수출 1천억 불을 달성하였다.
1979년 6월 6일에 박승찬 사장이 교통사고로 급서하자 허신구가 사장직을 이어받아 그해 8월에 금성통신, 금성전기 등과 합작해 대한전선으로 부터 대한반도체(주) 지분 49%를 인수했고, 1980년대부터 해외진출에 적극 나섰다. 1980년에 서독에 첫 현지법인을 설립했고, 1982년, 한국 최초 VCR 및 컬러 비디오카메라를 개발하고 미국 앨라배마 주 헌츠빌에 한국 기업으로서 처음으로 현지공장을 개설하였다. 1983년에 디자인 종합연구소 및 제품시험연구소를 개설했고, 1984년에 한국 최초로 음성다중 TV를 개발한 후 평택공장과 김해공장[13] 을 개설하였다. 그해 12월에는 매출 1조 원을 돌파했다. 1986년에 허신구 대신 구자학이 사장직에 앉았고, 1987년 구자학이 부회장으로 승진 하면서 부문별 사장제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금성은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노동운동이 확대됨에 따라 노사분규가 격렬해져 위기에 봉착했다. 특히 1987년과 1989년에 터진 파업으로 매출손실 6천억 원, 근로손실일수 50여 일로 회사를 창사이래 최대의 경영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89년부터 이헌조가 가전부문 사장직에 취임하여 '노사관계' 대신 '노경관계'를 강조한 신경영 및 '종합생산성관리(TPC) 운동' 등을 전개해 개혁을 시작했다.
1991년 '사업문화단위(CU)'제 실시로 금성통신, 금성알프스전자, 금성포스타 등 자회사들과 '가전정보통신CU'를 구축하며 고객감동 서비스와 해외시장 진출에 주력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 현지법인 및 공장을 잇따라 세웠고, 1992년 금성부품, 1995년 금성통신을 각각 합병하였다. 그 외에 1980년 초반에 닌텐도와 계약해 게임 & 워치를 현지생산하고 1994년 게임기 '3DO 얼라이브'를 내놓아 게임사업에 손을 댔다.
창립 25주년(1983년) 기념 광고.
심지어 1987년 금성마그네테크를 합병한 후 '금성 프로테이프' 레이블로 비디오테이프 사업을 했는데, 영화나 애니도 비디오로 발매했다가 1990년대 초부터 관련 사업을 미디아트로 넘겼다.
카세트 테이프의 경우, 1990년대 후반에는 한국 중소기업 OEM이었고, 2000년대 초중반에는 중국 OEM이었다. 2000년대 중반에 사업 철수. [14][15] 여담이지만 이 시기에 뻐꾸기시계를 비롯한 여러 벽시계도 만들었다.
1989년에는 전자오르간도 생산했었다. 2가지 모델이 있었는데, 하나는 카시오, 삼익악기 등의 버전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한국형'''모델이라 해서 국악 악기 음색을 적용한 것이 있었다. 1990년대엔 음원 모듈까지도 내놨는데, '''GSD10101'''이라고, ASSA신바람7000에 사용됐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노래 반주기도 생산 했었다.
1986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 서울올림픽,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때 전광판 스폰서로, 1994년 10월에는 유엔 50주년 공식 후원사로도 각각 선정되어 세계에 이름을 떨쳤다.
이 항목은 공식 명칭인 금성사 외에 금성'''전자'''로도 접속할 수 있는데 사실은 금성사 발족 이후 단 한번도 금성전자라고 칭한 적이 없다. 아마 전자 회사 중 유일하게 ~사[16] 인 것이 금성전자라고 오인하게 되는 원인인 듯.
1992년 폴란드 방영 광고.
2.2. LG로의 사명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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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사는 럭키그룹과 함께 럭키금성그룹으로 불렸는데, 이것은 설립자가 같은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다.
럭키그룹에 대해 간단히 서술하면, 럭키그룹은 1947년 구인회에 의해 설립한 락희화학공업사로 출발한 기업으로, 럭키크림과 한국 최초의 치약인 럭키치약으로 유명하다.[17] 락희화학공업사는 1974년 '''주식회사 럭키'''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이후 금성사가 커지면서 1983년 럭키금성그룹으로 그룹명을 바꾸었다.
1995년 럭키금성그룹은 럭키(Lucky)의 '''L'''과 금성(Goldstar)의 '''G'''를 따온 LG그룹으로 이름을 변경한다.[18] 그룹명에 맞추어 금성사도 사명을 지금의 LG전자로 바꾼다.
다만 이런 변경에는 숨겨진 사연이 있었으니, 1990년대에 들어와서 금성사가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제품을 제조해서 수출하는 단계를 벗어나 해외에 법인을 세우고 현지생산, 현지판매 체제를 세우려고 하니 이미 Goldstar의 상표가 유명해져서 세계 각국(당연히 해외공장설립이 그렇지만 인건비가 싼 개발도상국)의 잔머리 돌아가는 놈들이 각자 자국에 Goldstar 혹은 비슷한 이름으로 유령회사를 등록 시켜놓고 상표권의 사용 대가를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다가 아예 회사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이름을 전세계에 등록하는 방법으로 진드기들을 퇴치한 것. 또한 미국에서는 ‘골드스타’가 해외의 전장에 나간 전사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어서 Lucky Gold Star는 전사자에게 ‘잘 죽었다’는 조롱처럼 들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19]
2005년 LG그룹의 일부 회사가 GS그룹, LS그룹, LIG로 분리 되었는데, 전자 쪽은 LG그룹에 남아 현재에 이른다.[20]
2.3. LG전자로 변경
1995년 사명 변경 후 금성통신을 합병하는 한편, 유아용 CD-I 플레이어 '멀티스쿨', 일체형 멀티미디어 PC '심포니 홈'을 각각 만들고 미국 유명 가전업체 제니스를 인수하였다. 1996년에 카오스세탁기의 후속으로 '통돌이'를 출시[21] 하였으며, 같은 해 IBM과 전략적 기술제휴를 맺어 LG-IBM PC(주)를 설립했다. 1998년에 완전평면 TV '플라톤'을 출시하고 1999년에 필립스와 합작해 훗날 LG 디스플레이가 되는 LG-Philips LCD를 설립하는 등 거침없이 사세를 확장해나갔다.
이러던 와중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치고 나서 이듬해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재벌들의 과잉 중복투자와 소모성 경쟁이 경제위기를 불어왔다면서 각 분야별로 그룹 간 빅딜을 제안했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현대전자와 LG전자가 대상으로 떠올랐는데, 기업 평가를 맡았던 외국계 전략컨설팅 업체 ADL이 현대전자에 후한 평가를 하는 바람에[22] LG그룹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LG반도체(투자한 규모와 인력, 시간, 수익성 면에서 그룹 차원의 애착이 크고 깊었던 기업이었다.)를 넘겨야 했다. 이것이 바로 하이닉스다.
이렇게 피눈물을 흘리면서 반도체를 강제로 빼앗겼지만, 그 이후에도 2000년 휘센 에어컨을 출시해 세계시장 1위를 석권했고, 10월에 LG정보통신(주)를 합병시켰다. 뒤이어 2002년 4월 1일부터 기존 법인을 지주회사 'LGEI'로 개편하면서 물적분할했으며, 11월에는 세계 최초 홈네트워크 시스템 'LG홈넷'을 출범시켰다. 2005년에 싸이언 초콜릿폰을 출시하여 1,000만 대를 판매해냈다. 그 외에도 백색가전과 피처폰 그리고 디스플레이 시장을 중심으로 상당한 실적을 기록해 왔다.
2005년 1월에는 통신장비 부문을 분할하여 캐나다 통신장비업체인 노텔과 합작해 LG노텔(주)라는 합작사를 설립했다. 이후 2010년에 노텔이 파산함에 따라 에릭슨이 노텔의 지분을 인수해 LG에릭슨이 되었다가, 2012년에 에릭슨이 LG 측 지분 25%를 더 인수하여 사명도 거꾸로 에릭슨-LG로 변경됐다. 현재 LG의 가정용 유무선 전화기는 에릭슨-LG를 통해 나오고 있다.
그러던 중 2007년 LG텔레콤 사장 출신 남용 부회장[23] 이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글로벌 회사로 도약 한답시고 부사장급 임원들을 전부 외국인으로 바꾼다든가, 20년 이상 근무한 내부 직원보다 외국인 직원의 의견을 더 듣는다든가, 업무 비용을 줄인답시고 5분단위의 업무계획 장표를 지시한다든가, 기술 개발 비용을 줄이고 마케팅 비용을 늘리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다. 때문에 외국인 임원과 한국 직원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고, 신기술 개발 속도가 느려졌으며 변화하는 시장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전략컨설팅 업체인 맥킨지 앤 컴퍼니의 말을 듣고 '''스마트폰 시장을 내버리고 피처폰 시장에만 투자'''한 결과는... 이것은 초콜릿폰과 LCD TV로 존재감을 드러내던 2009년까지 그 충격이 크지 않았지만, 스마트폰 시대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기존 피처폰의 마케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결과 2010년대 이후 '''헬지'''로 불리며 실적이 크게 악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LG전자에서는 이때를 흑역사로 여기는 듯.
결국 이를 보다 못한 구본무 회장이 친정을 선포하고 남용 부회장 및 그가 영입한 C 레벨 이하 모든 외국인 임직원들이 퇴출당했고, 구본무 회장의 둘째 동생인 구본준 부회장이 대표이사로 취임 하면서 오너 일가 중심 체제가 선포됐다. 그리고 2011년 11월,약 1조 원 가량의 유상증자를 실시했다.[24] 현행법상 지주회사는 자회사 주식 최소 30% 이상을 보유해야 하는데 유상증자 액수가 당시 시총의 10%에 육박했고, 이로 인해 보유 지분율이 30%대 초반으로 떨어짐에도 유상증자라는 초강수를 둔 것. 이후 스마트폰 시장 등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헬지 시절을 떨쳐내는 듯했으나...
2014년 2월 무디스 사는 모바일 부문의 경쟁 심화, 전분야의 평균판매단가(ASP) 압박, 시장점유율 유지를 위해 늘어나는 마케팅 비용 등을 고려하면 영업이익률이 3~4% 수준을 밑돌 것이라며 LG전자의 신용등급을 Lower Medium Grade(낮은 중간 등급)에서 최하위인 Baa3로 하향 조정하였다. 이는 Non-Investment Grade Speculative(투자 부적격) 등급인 소니와도 불과 한등급 차이다. 무디스 사는 또한 LG전자가 가격 압박과 모바일 관련 높은 수준의 마케팅 비용 등으로 수익성이 수년 동안 둔화될 것이며 중국 제조업체가 성장하면서 향후 경쟁자로 등장하여 LG전자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LG전자의 다른 사업은 비교적 양호한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신용등급 하락'''은 스마트폰의 실패가 주된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같은 해부터 미국 환경보호청으로부터 '에너지스타 어워드'를 2016년까지 3년 연속 수상하였다.
2015년 들어 LG전자의 주가가 신저가를 기록하면서 암울한 전망이 드리우고 있다. 2015년 2분기 '''스마트폰 관련 영업이익이 겨우 2억 원''' 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 그나마의 이익도 블루투스 헤드셋이 80억 원 매출을 달성하는 대기업답지 않은 일이 벌어져서 그렇지... LG 스마트폰은 다단계 영업까지 했는데도 78억 적자를 기록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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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2015년 8월 21일, 주가가 39,800원으로 떨어졌다. 리즈 시절이었던 15만 8000원 시기와 비교하면 30%수준도 채 안되는 수치.
전반적으로 봤을 때 21세기 들어서는 한때는 라이벌 이었던 삼성전자에 밀려 만년 콩라인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10년 10월 구본준 부회장이 취임한 이후 사내 구호가 '''1등 합시다'''이니 말 다했다. 참고로 2016년 1월 언론에 보도된 것에 따르면 2015년 삼성전자의 실적은 매출 200조 6500억, 영업이익 26조 4100억 인데 반해서, LG전자는 매출액은 56조 5,090억 원 영업이익은 1조1923억 원에 불과하다. 매출액은 4배 이상, 영업이익은 25배 이상이니 라이벌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
그중에서도 MC사업본부의 적자는 정말로 심각한데 적자 5분기간 연속 되면서 누적적자가 무려 1조에 가까워 졌고, 2016년 3분기에만 자그마치 4,300억의 적자를 기록하였다.[25] 2017년 4분기에는 누적 적자액이 2조 1,500억에 달한다고 한다.
1990년대까지는 치열하게 경쟁하던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지금처럼 격차가 어마어마하게 벌어진 것에는 1998년 소위 '''빅딜'''로 메모리반도체를 빼앗긴 것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그룹 차원에서 엄청난 자금과 연구인력을 투자했던 메모리반도체를 허무하게 뺏기고 나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권이 강제한 빅딜이 소문만 무성했지 결국 LG반도체 달랑 한 건으로 종료 되면서, LG만 더욱 억울하게 된 셈이다.
그렇게 LG반도체를 강제로 집어삼킨 현대전자도 얼마 못 가서 자멸했고, 반도체 분야는 하이닉스로 독립 했다가 2012년 3월 23일 부로 SK그룹의 자회사가 됐다. 이때도 LG가 다시 인수할 것이란 소문이 파다 했지만, 남용 부회장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하이닉스의 인수는 없다고 못박았다.
반도체를 빼앗긴 뒤에도 백색가전과 피처폰, 디스플레이 위주로 한동안 잘 나가긴 했지만, 시장진입 장벽이 낮은 이런 제품군에 중국 업체들이 끼어들면서 말리기 시작했고, 스마트폰 등 새롭게 떠오르는 분야에서는 남용 부회장의 잘못된 예측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잘 나간다고 했을 때도 반도체를 가진 삼성과의 격차는 압도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LG전자의 여러 문제점은 MC사업본부에서 불거져 나왔는데, 위의 남용 사장의 전횡에 대한 반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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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는 전년 대비 주가가 2배 가량 올랐다. 저점 대비로는 2.5배 이상. 연간 영업이익이 2조 5천억에 육박하여 작년 대비 2배 가량 낸 성과에 의한 것. MC사업본부가 손해만 안 냈어도 영업이익이 3조를 훨씬 넘었을 것이다.
2018년 4월에는 LG그룹 역사상 역대 최고 인수합병 금액인 '''1조4440억원'''에 오스트리아의 자동차 조명 제조사인 '''ZKW'''를 인수했다. 이로써 LG전자는 자동차 관련 '전장사업' 역량을 더욱 강화 할 수 있게 되었다. LG전자, ZKW 인수... 전장사업 강화 이로써 자율주행 연구로 돈을 왕창 까먹고 있는 VS본부의 자금줄이 어느정도 확보된 상황.
2.3.1. 삼성 바라기 - 뿌리깊은 2등주의 문화
LG전자가 끝도 없이 추락하던 2011년 8월 한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LG전자를 떠나며 CEO에게 남긴 글이 몇달 동안 인터넷을 강타 하였고 , 주요 언론에도 기사로 올라왔다.삼성이 어떻게 한다더라 하면 이 역시 비판적인 토론 없이 의사 결정이 많이 나버립니다.
글이 파문을 일으킨 뒤에 수많은 전현직 LG직원들의 유사한 이야기가 봇물터지듯 흘러나왔다.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는 상명하달식의 군대식 조직문화와 지나친 짠돌이 경영 그리고 무조건 삼성따라하기. 대체로 사람들의 반응은 '''망할 만하네.''' 특히 LG를 가리켜서 어느 순간 2등도 썩 나쁘지 않구나라고 만족하는 2등주의 기업이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참고로 저글을 쓴 사람은 끝내 CEO 구본준 부회장의 답장을 받지 못했고, 역시나 LG전자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몇몇 LG인들은 회사 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한다느니, 당신같이 발목잡는 사람이 없는 게 오히려 회사가 잘 된다느니, 회사 욕하고 나가는 인성으로 재취업이 되는가 보자며 비아냥거렸으나, 해당 개발자는 카카오에 이른 시기 들어간 결과 직장생활 대박을 쳤고 2019년 즈음에는 스타트업 CTO로 이직할 때마다 신문 나올 정도의 벤처기업계 거물이 되었다.
3. 지배구조
2019년 5월 30일 보통주 기준.
4. 역대 임원
4.1. 구(舊) LG전자
- 부회장
- 노용악[26] (2001~2002)
- 대표이사 부회장
- 구자학 (1987~1989)
- 구본무 (1989~1995)
- 이헌조 (1993~1994)
- 구자홍 (1998~2002)
- 대표이사 사장
- 구인회 (1959~1962)
- 구정회 (1962~1970)
- 허준구 (1970~1971)
- 박승찬 (1971~1979)
- 허신구 (1979~1986)
- 구자학 (1986~1987)
- 구자두 (1987~1988)
- 이재연, 최근선 (1987~1989)
- 박상호 (1987)
- 김지주 (1988~1989)
- 이헌조 (1989~1993)
- 한태희 (1989~1991)
- 구자홍 (1994~1998)
- 정병철 (1998~2002)
- 대표이사 부사장
- 구자홍 (1993~1994)
- 정병철 (1996~1998)
4.2. 신(新) LG전자
- 대표이사 회장
- 구자홍 (2003)
- 부회장
- 노용악 (2002~2003)
- 대표이사 사장
- 정병철 (2002~2003)
- 정도현 (2014~2019)
- 조준호 (2016)
- 권봉석 (2019~)
5. 슬로건
'''금성표는 기술을 상징한다''' (1963~1964)
'''기술의 상징 금성'''[27]
(1963~1967/1973~1987)
'''조국 근대화와 번영의 상징''' (1969~1972)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1980~1987)
'''최첨단 기술의 상징''' (1988~1989)
'''테크노피아를 향한 최첨단 기술''' (1988)
'''신뢰의 상표 금성''' (1989~1993)
'''최고를 선택할 권리 고객에게 있습니다'''[28]
(1994)
'''멀티미디어 - LG전자가 하이미디어로 앞서갑니다'''[29]
(1994~1995)
'''다음 세대를 위한 멀티미디어 기술 - 하이미디어''' (1995~1996)
'''감동의 시작''' (1995~1996)
'''Champion 정신''' (1997~1998)
'''세상을 바꾸는 힘 - 디지털 LG''' (1999~2003)
'''DIGITAL ez LG''' (1999~2002)
'''기술이 깊을수록 사랑입니다''' (2006)
'''고객과 함께하는 미래 더 나은 삶은 향한 도전''' (2019~)
'''가전은 역시 LG''' (2019~)
6. 기관
LG전자 공식 사이트에서 본사/국내 사업장을 참고해도 된다. https://www.lge.co.kr/lgekor/company/about/location.do
6.1. LG트윈타워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대로 128에 있다.
6.2. LG서울역빌딩
서울특별시 중구 후암로 98에 있다.
6.3. LG사이언스파크
서울특별시 강서구 마곡중앙10로에 있다.
6.4. 사업장
가산디지털단지, 인천, 평택, 청주, 구미, 창원에 사업장이 있다.
6.5. R&D 캠퍼스
가산디지털단지, 서초, 양재에 하나씩 있다.
7. 제품
7.1. 제품 특징
금성사 시절부터 LG 제품은 국민 생활에 혁명을 가져왔으며 기실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전자제품 시장은 금성사가 거의 다 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도 모자라 금성제와 LG 가전제품은 보통 '''더럽게 오래 간다.''' 내구성이 꽤 있는 편이라 10년째 쓴다는 사연은 기본이고, 1988 서울올림픽 때 산 선풍기가 아직도 현역이라는 케이스도 있으며, 심하면 냉장고나 전자레인지, TV, 세탁기가 20년을 넘어간다는 말도 있다. 성인 자녀가 있는 집에 자녀보다 더 나이 많은 제품이 있는 경우도 꽤 있다. 심지어 1976년에 나와서 1980년대 초반에 단종된 금성사 시절의 히트상품인 청풍, 역풍, 설풍 선풍기는 2020년 현재도 중고로 거래될 정도.
이제 골동품 수준이라 드물지만 냉장고나 선풍기 등은 45년 이상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거기다가 2017년 기준 결혼 15년째 맞은 부부가 혼수로 구매한 LG 냉장고가 아직도 쌩쌩히 돌아가고 있으며 에어컨도 자주 썼는데 9년째 쌩쌩하다는 경우까지 있다.35년 된 금성 에어컨, LG전자로 돌아온 사연[30] 25년 된 '금성사' 세탁기, "여전히 쌩쌩!" 또 23년된 의류 건조기가 여전히 잘 작동하는 사례도 발견되었다."또 LG…" 23년 된 건조기 아직도 '쌩쌩' 이런 제품들은 LG전자 측에서 기부를 받고 신형 제품으로 무료 교환해주기도 한다. LG전자 입장에서도 그만큼 좋은 홍보 효과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복잡하고 고장이 날 구석이 많아서이기도 하고 옛날에는 그냥 무식하게 튼튼하게 만들다가 이제는 더 작은 크기에 고밀도화된 칩셋, 기판 등이 들어가기 때문에 내구성이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세탁기, 냉장고 등 온갖 전자제품에다가 와이파이를 때려넣는 중이다(!).참고로 Windows 10(...)을 때려박은 냉장고도 CES에 출품한 전적이 있다. IoT 버전이 아니다! 물론 현재의 LG전자 제품은 그 정도로 심각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남아공에 토네이도가 몰아 쳤는데 이에 LG 냉장고가 내동댕이 쳐 졌지만 외관이 훼손된 것 외에는 작동에 문제가 없어 내구성이 탱크임을 입증한 기사가 있었다. LG전자의 가전 제품은 예전 금성사 시절 때보다는 아니지만 여전히 내구성은 괜찮은 듯하다. 관련 기사
8. 사업
15년부터 사업부문에 큰 변화가 있었다. 먼저 기타부문에서 자동차 부품은 LG가 그룹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육성하는 분야로, 15년 감사보고서부터 VC(Vehicle Components)사업본부로 분리되었다. 반대로 HA와 AE사업본부는 'H&A(Home Appliance & Air Solution)사업본부'로 통합되었다.#
LG이노텍은 엄밀히 말하면 상장까지 되어있는 별개의 회사이지만, LG전자의 종속기업이기 때문에 연결기준 재무제표에서는 하나의 기업으로 취급하여 작성된다. 숫자 단위는 억, %는 매출과 영업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의미한다.
참고로 15년 누적 3분기에는 실적이 매우 안습해 졌는데, 합계 영업이익이 8,400억 수준으로 반토막이 났다. 전년 같은 기간 5,000억의 이익을 내며 효자노릇을 하던 HE 사업부가 500억 적자 전환했고, 2,480억의 이익을 내던 MC 사업부는 45억 적자, 새로 분리된 VC 사업부도 47억 적자이며, 이노텍의 영업이익도 30% 가까이 급감. 그 결과 통합 H&A 사업부가 영업이익의 90%(7,699억)을 책임지고 있다. LG전자의 분발이 시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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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4분기에 선방하며 2015년 연간 실적으로 보면 그럭저럭 장사를 괜찮게 했다.# H&A 사업부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여전히 문제지만...
2016년 4/4분기 353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 하면서 적자 전환했다. LG G5의 부진이 결정적이었다는 평가.
2020년 1분기에는 LG전자가 1분기 사상 최대 영업 이익을 냈다.
8.1. 스마트폰 사업
9. 공식 블로그
2009년 3월 10일 'THE Blog'로 시작했으며 현재는 '''Social LG전자'''라는 이름으로 운영 중이다.
9.1. THE Blog 시기
주소는 http://blog.lge.com THE Blog 라는 이름은 네티즌 공모로 지어졌다고 한다. 다른 기업 블로그와는 다르게 비회원도 댓글을 남기는 것이 가능했다.
기업 내, 외부에서 일어난 여러 일들을 포스팅하고, 또 피드백을 착실히 받는 등 기업 블로그 중에서는 성공 사례로 자리잡는 듯 했으나, '''옵티머스 Q의 프로요의 난'''으로 대혼란을 겪은 뒤 새로이 개편을 하게 된다.
9.2. Social LG전자
주소는 http://social.lge.co.kr 메뉴 위치도 바뀌었다.
THE Blog 때와는 달리 Social LG전자에 로그인 하거나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야만 댓글을 쓸 수 있다.
10. 전국 매장
https://www.lgservice.co.kr/center/selectAgentSearchList.do?serviceFlag=agent
11. 멤버십
신규 고객의 경우 판매 사원에게 멤버십 가입을 권유받는다. 가입은 무료이고, 할인 혜택이 따라온다.
12. 전설적 마케팅 실력
13. 노동조합
- LG전자 노동조합: 한국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소속.
14. 기타
- 80년대 중반에 TV나 VCR 등에 HI-FI Stereo 시대가 막을 열리면서 이에 관련된 제품들을 출시했는데, 당시 CF 모델로 조용필을 내세웠던 적이 있었다. 물론 당시 가왕은 한창 전성시절이기도 했고. 그 시절에도 삼성전자, 대우전자 등과 마케팅 혈전을 벌였으니...
- 금성사 시절에 지면광고, AS안내서비스, 간단한 제품안내 스티커, 매뉴얼 등에서 김도원 화백의 삽화를 어렵지 않게 볼수 있었다. 그렇다. 리빙포인트의 그분이다.
- IMF시절 반도체 산업(하이닉스)을 뺏기다 시피 내준 아픈 기억이 있는 회사다. 그래서 2008~2010년 사이에 하이닉스 인수전에 LG전자가 가장 적극적이길 기대했던 사람들이 꽤 있었으나, 당시 LG전자 수장이 LG전자 역사상 최악의 빌런으로 평가받는 남용 부회장이었고 "우리는 그동안 반도체 없이 사는 법을 배웠다"는 희대의 미친 개소리를 남기며 인수전에서 빠져 나왔다. [31][32][33] . 그리고 치킨게임에서 살아남은 SK하이닉스의 2017년 예상 영업이익이 LG전자의 시총[34] 과 비교될 정도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 2011년 2월 4일에 소니에게 PS3와 브라비아 TV가 자사의 블루레이 관련 기술이 무단 사용되었다며 소송드립을 날렸다. 10년 12월에 소니 에릭슨에게 소송당한 것에 대한 맞소송이라는데, LG가 승소한다면 PS3의 북미 수입이 금지되는 엄청난 여파를 불러올 수 있지만, 어차피 소송이 끝날 때 즈음에는 PS3의 수명이 끝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소니 측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유럽 쪽에서는 이 때문에 PS3의 유럽 수입이 10일간 금지되었는데, 그 뒤 3월 11일, 소니가 승소하여 유럽 지역에서의 PS3 압류가 해제되었다. 또한 소니 측에게 13만 유로(약 2억 원)의 소송 비용을 지불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미국 ITC에 소송건 것은 이제야 시작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럽 건도 압류 건만 해결된 것이지, 특허 소송은 아직 진행 중이다.
- Linux가 설치된 PC에서 FLATRON 모니터를 연결하면 LG Electronics 가 아닌 Goldstar 로 인식한다.
- 2015년 7월 6일 현재 주가는 신저가를 기록했다. 그리스 경제위기를 감안하더라도 2달 동안 반등다운 반등 한 번 없이 줄창 내려가는 주가에 일각에서는 팬택과 같은 길을 걷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현재 시총은 7조 5,360억. 스마트폰 사업의 침몰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주가는 2010년 기록한 16만원(유상증자 반영 시 12만 5천 원) 대비 1/4 수준인 4만 원 근방까지 떨어졌고 업황과 실적은 급격히 악화하고 있다. 강세라는 백색가전마저 중국 하이얼 등에 시장을 잠식당하면서 미래가 안 보이는 수준. LG 총수 일가의 극약처방이 필요하다.
- 2015년 3월에 에리크 쉬데르주가 LG전자에서 십 년 동안 근무하면서 있었던 일을 정리한 <한국인은 미쳤다!>를 출판했다. LG전자에서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임원이 됐던 인물이 쓴 책이라 베스트셀러에 올랐는데 내용이 좀 충격적이다. 극도의 경쟁 체제 속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효율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LG를 비롯한 한국 기업들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단언하면서도 기업 내에 만연한 위계질서에 대한 경외로 인해 일어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서술했다. 특히 저자가 퇴사할 즈음에 벌어졌던 일을 설명할 때는 꽤 오싹할 정도다.
15. 관련 문헌
16. 관련 문서
[1] 현 법인 설립 기준. 1958년에 세워진 구 법인은 'LGEI'로 변경했다가 2003년 LGCI에 합쳐져 (주)LG가 됐다.[2] 2021년 1월 17일[3] 우선주 시가총액은 1조 896억이다.[4] 과거에는 LG전자의 구 명칭이었던 럭키금성('''L'''ucky '''G'''oldstar)의 앞 글자를 따온 것이었다. 또한, LG전자의 스마트폰에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동명의 브랜드 송이 존재한다.[5] 참고로 이 형태는 1983년 말부터 1994년까지 썼으며, 1995년 LG로 바뀐 후에도 1996년 7월 31일까지 약 1년간 혼용하였다. (즉, TV의 경우 겉은 금성이라고 쓰여 있지만 뒤에 연식 표찰은 LG로 표기. 세탁기, 탁상용 카세트와 에어컨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LG전자로 바뀐 이후의 금성사 혼용 표기는 1996년 8월에 사라졌다. 심지어 초기 홈페이지 도메인도 www.goldstar.co.kr이었다.[6] 1960년대~1983년까지 썼던 로고는 아래 CF에서 볼 수 있듯이 미묘하게 딱딱한 느낌이었다. 1982년 중반에 심볼마크 하단의 금성 부분이 GS로 바뀌었다.[7] 해당 로고는 금성통신, 금성계전, 금성전선, 금성기전, 금성정보통신 등 '금성' 사명을 쓰는 전자, 통신, 기계계열사가 공통으로 썼기에 오래된 자판기나 주유기, 보통전력량계, 엘리베이터 등지에 아직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특히 대구백화점 에스컬레이터에는 옛 금성사 로고가 아직도 남아있다. 선풍기에 있는 경우도 있지만 LG전자는 현재 선풍기를 생산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아일랜드의 에릭슨-LG관련 장비 공급업체인 GoldStar Telecom은 해당 로고의 GOLDSTAR 부분을 그대로 붙여서 쓰고 있다.[8] 회사 표어 같이 꾸준하게 밀던 문구였다. 광고부터 제품까지 금성사 관련된 것이라면 쉽게 접할 수 있었다. 80년대까지 냉장고, 텔레비전 같은 전자제품들이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을 정도로 고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돈을 모아 큰맘 먹고 사야했고 한번 산 전자제품은 쉽게 바꾸지 못했다. 그래서 애먼 덜 떨어지는 제품 사고 10년 동안 고생하지 말고 우수한 품질의 금성사 제품을 선택하라는 의미를 담은 문구였다. 아주 틀린 말이 아닌 것이 금성사 제품은 내구성이 우수해서 지금까지도 현역으로 돌아가는 물건이 있다.[9] 다만 처음에는 이 라디오가 애물단지였다고 한다. 이유인 즉슨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빈곤층들의 소득수준이 라디오를 살만큼 풍족하지도 않았고, 부유층을 노리기에는 금성라디오의 품질이 미제라디오나 시장에서 암암리에 팔리던 일제라디오만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부차원에서 국산화의 일환으로 밀어주었던 제품이었지만 악성재고로 남았다고, 그러다가 박정희가 홍보목적으로 농촌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하는 김에 금성사 라디오가 그 대상에 포함되었고 광고도 대대적으로 되면서 기사회생했다.[10] 현재 LG전자는 선풍기를 생산하지 않는다.[11] 현재의 동래 럭키아파트 자리이다.[12] 영진전기도 미쓰비시와 제휴를 해서 이때쯤에 엘리베이터를 제작했다. 금성사가 시작한 엘리베이터는 1987년 금성산전, 1995년 LG산전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99년 오티스엘리베이터에 합병 되었고, 영진전기쪽은 1968년에 영진전기, 1971년에 유니버스, 1976년에 서통전기, 1979년 신영전기, 1987년에 금성기전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95년 LG산전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99년에 LG가 엘리베이터 사업을 오티스엘리베이터에 매각 하면서, 2001년 한국미쓰비시엘리베이터가 만들어지고, 쭉 이어진다고 봐야된다. 자세한건은 LG산전엘리베이터 참고.[13] LG전자 김해공장은 2006년 9월부로 씨앤엠이라는 모터전문 제조업체로 독립을 하게 되고, 기존의 LG전자 김해공장 설비 일부는 창원공장으로 옮기게 된다.[14] 벤허는 1980년대에 무비크로스 비디오에서 처음 냈고 1990년대에 대우전자에서 재출시, 스타워즈 1도 대우비디오에서 출시, 록키 3는 SK그룹계열인 SKC에서 출시, 톰과 제리는 서진통상에서 출시했었다...[15] '금성 프로테이프' 레이블 발매작 중에서 그나마 인지도가 있는 영화라면 마지막 황제, 최가박당 시리즈나 프랑스 영화 라붐 정도. 그리고 무삭제로 뱀파이어 헌터 D(1985년)를 성인등급으로 외계인 벰파이어라는 제목으로 출시했다. 또한 지아이 유격대와 닌자 거북이시리즈 도 유명하다.[16] 시계를 좀더 과거로 돌린다면 유일하진 않았다. 태광그룹 계열사 태광산업의 전자사업부가 '''천일사'''였기에.[17] 구인회는 1931년부터 차례대로 '구인회상점', '주식회사 구인상회', '조선흥업사'를 세웠지만 이들 회사는 LG그룹과는 관계가 없다. 럭키크림을 판매하고자 설립한 락희화학공업사가 LG그룹의 직접적인 모태다. 여담으로 럭키가 락희(樂喜)가 된 데에는 당시 이승만 정권에서 외세를 배척한다며 기업이름에 외래어를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혹은, 기업명칭으로는 아직 한자가 친숙하고 외래어가 익숙치 않은 시절이라 럭키에 최대한 가까운 한자이면서 좋은 뜻을 내포한 락희라는 가차를 쓰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다만 락희라는 한자를 일본어로 읽으면 럭키가 되긴 한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참고로 락희를 사명으로 쓰자고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창업주 구인회의 동생 구정회다.[18] 이를 보여주듯 LG그룹의 본사인 LG 트윈타워의 엘리베이터 문에는 럭키그룹과 금성사의 마크가 같이 새겨져 있고, 개별 계열사 중에는 LG 트윈스처럼 그룹명 변경 이전부터 LG라는 사명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 Life's Good 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하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19] 비슷한 예로 기아자동차도 미국에서 KIA가 전사자를 뜻하다 보니 KIA 대신 소문자로 Kia라고 쓴다. 예시[20] 단, LG전자의 자회사로 민수용 전자부품 및 레이더, 미사일 등 정밀군수물품 등을 생산하던 LG이노텍은 민수용 전자부품 생산업체인 LG이노텍과 군수물품 생산업체인 넥스원퓨처로 분리되었다. 이후 넥스원퓨처는 다시 LIG그룹에 편입되어 현재는 LIG넥스원이 되었다.[21] 현임 CEO인 조성진 부회장이 개발하였다.[22] 재미있는 게, 이 전략컨설팅 업체의 평가원 중 한 명이 이장석이었다. 물론 이장석이 모든 것을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내용의 출처는 박동희의 기사에 나타난 김영수 전 LG스포츠 대표의 회고.[23] 동기식 IMT2000 사업 포기 때문에 당시 LG텔레콤 사장에서 퇴직. 이후 회전문 인사로 LG전자로 이동. 남용 부회장이 구본무 회장의 아버지인 구자경 회장의 오른팔격 인물이라서 구본무 회장이 함부로 내칠 수 없었다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24] 이는 LG그룹이 하이닉스 인수전에 뛰어들 수 없었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남용 시절에 기회가 있었는데, 남용 부사장이 포기했다...[25] HTC가 help this company 드립이 나오는 등 최악의 위기 상황 이었던 2015년 말에도 적자는 3000억 수준이었다.[26] 배우 노주현의 형이다.[27] 금성에서 저 문구를 단 얼마 뒤 삼성전자 에서는 ''''첨단'''기술의 상징'을 슬로건으로 걸었다. 그러자 금성 에서는 한술 더 떠 밑에 나오는 ''''최첨단'''기술의 상징'으로 응수[28] 마지막 슬로건. 이를 끝으로 1년 뒤 LG전자로 사명을 변경하게 된다.[29] 사명 변경 전까진 '금성이 하이미디어로 앞서갑니다'였다.[30] 1977년 생산품. 가동해 보니 아직 냉방력도 여전했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기증자가 사용하던 35년간 한 번도 고장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31] 다만 당시 LG그룹 자체가 하이닉스를 인수하기에 부담스러운 여건이 몇몇 있었던 건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LG그룹의 현금 유동성이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고. 개소리의 수준과 그 결과물이 워낙 엄청나서 그렇지...[32] 하지만, 오너 일가가 하이닉스 인수에 강한 의지가 있었다면 LG 지주회사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부채비율이 높아지는 걸 감수하더라도 유상증자나 차입을 통해서라도 인수에 나섰다면 충분히 인수했을 수 있었다. 지주회사 LG는 대한민국의 모든 순수 지주회사 중에서 부채비율이 50 퍼센트에 훨씬 못 미칠 정도로 재무 건전성이 가장 우수한 데다 구씨 일가가 보유한 지분도 45 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오너 지배력도 강력한 기업이기 때문. 게다가, 능성 구씨 문중 일족들의 끈끈한 결속력과 그들이 거머쥔 천문학적인 부의 규모를 생각하면 인수 가능성은 더더욱 높았다.[33] 카더라에 따르면 재계 내에서 하이닉스 인수 주체를 두고 SK그룹으로 교통정리가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34] 2017년 9월 20일 기준 약 14조 2000여억 원[35] 해외 수출판은 LG-G360이라고 한다.[36] 취소선이 그어진 이유는 문서 참조.[37] 1999년 미국의 오티스 엘리베이터와 합병을 해 LG 계열에서 분리되었다.[38] L리암 G갤러거의 약자도 엘지로 본인이 직접 친 드립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