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영화)
1. 개요
2014년 영화화가 결정됐다. 감독은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를 연출한 허진호 감독의 시대극 영화다.
2. 예고편
3. 시놉시스
4. 등장 인물
4.1. 주역
4.2. 황실
4.3. 독립 운동가
4.4. 그 외
5. 줄거리
1961년, 서울신문의 기자인 김장한은 일본에서 덕혜옹주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이 소식을 들은 뒤 잠시 덕혜옹주에 대해 회상한다.
1919년. 고종황제의 외동딸인 덕혜옹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낸다.[1] 아들 영친왕을 일본에 볼모로 보낸 고종황제는 덕혜옹주만은 지켜주기 위해 시종 김황진의 조카인 김장한과의 혼례를 추진한다. 고종은 남몰래 어린 김장한을 불러들이고, 어린 옹주는 이때 고종에게 인사하러 왔던 장한을 처음 만난다. 혼례가 무사히 성사되면 덕혜옹주가 일제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어느 밤 고종이 독이 든 수정과를 마시고 독살된다.[2] 어린 옹주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러 갔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다.
시간이 흘러 1925년. 14살이 된 덕혜옹주는 소년이 된 장한과 다시 만나고, 피아노 연주를 함께 하는 등 잠시 풋풋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덕혜는 친일파 한택수가 행사에 입을 기모노를 보내자 자신은 양장을 입고 받은 기모노는 복순이에게 입히면서 저항하는 등 꽤나 당찬 면모를 보이는 아가씨다. 동요를 지어 고아들에게 가르치고, 아이들을 돌보고, 한글을 가르치고 싶다고 하는 등 애국심 굳은 황녀로 성장한 듯하다. 다만, 한택수가 이런 옹주를 위험인물이라 하여 일본으로 보내려 한다는 것이 문제.
덕혜는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받음과 동시에 일본으로 강제로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3] 귀인 양씨는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에게 보온병을 주며, "물 한 모금도 함부로 마시지 말라"고 당부한다.[4] 덕혜가 침울한 표정으로 궁을 나서면서 화면이 전환된다.
다시 시간은 1961년, 취재를 위해 일본에 들른 김장한은 과거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동료인 복동을[5] 만난 뒤,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이 된 영친왕의 개인 저택에 들러 다시 한 번 덕혜옹주에 대해 떠올린다.
시간이 흘러 성숙한 여인이 된 덕혜는 도쿄에 있는 오라버니 영친왕의 저택에서 지내고 있다. 공부를 마치고 조선에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지만, 한택수는 귀국을 차일피일 미룰 뿐이다. 낙담에 빠져 있는 덕혜에게 성인이 된 장한이 찾아온다. 사관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한 장한은 한택수에게 아부를 떠는 듯한 모습을 보여 잠시 덕혜의 반감을 사지만, 그도 사실은 이우 왕자와 함께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 황실 가족 모임에서 덕혜를 찾아온 이우는 고모인 덕혜를 조선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덕혜를 조선으로 보내려는 비밀 공작이 시작되지만, 한택수가 독립운동기지를 덮쳐 무산되고, 결국 덕혜는 장한과 함께 어렵사리 탈출하여 영친왕의 궁전으로 돌아온다.
장한은 덕혜를 위로하기 위해 레코드판을 선물하고, 생모인 양 귀인의 편지도 전해 준다. 덕혜는 외로운 타향살이 중 장한을 조금씩 의지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귀인 양씨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한택수는 "친일 연설을 하면 조선을 방문하게 해주겠다"며 회유한다. 덕혜는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에 조선인 노동자 앞에서 친일 연설을 읽기 시작하지만 결국 끝까지 읽지 못하고, 조선인 노동자들을 격려하는 말을 한다. 황족으로서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면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진정 위로하는 말에 노동자들은 진심으로 감격하면서, 자신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항의한다. 거세진 항의에 연설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한택수는 이 일로 덕혜의 뺨을 후려친다. 한택수를 가까스로 말리는 김장한의 모습이 압권. 영친왕의 궁으로 돌아온 덕혜는 머지않아 귀인 양씨의 부고를 듣고, 마침내 상하이 망명을 결정한다.
덕혜와 이우, 장한은 영친왕을 설득하여 상하이 망명을 계획한다. 일본인 고위 장관들이 모이는 기원절[6] 행사에서 김봉국이 폭탄을 터뜨리면 영친왕과 장한이 탈출하고, 덕혜와 마사코(이방자)가 합류하여 상하이로 떠나는 것. 영친왕이 복통을 호소하며 자리를 비운 사이, 봉국이 무사히 폭탄을 터뜨리고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한편, 덕혜는 마사코, 소 다케유키와 드레스를 고르러 간 자리에서 마사코에게 드레스 갈아 입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옷을 갈아 입으러 간 방에서 덕혜는 마사코에게 영친왕의 망명 계획을 알린다. 마사코는 영친왕이 자신에게 망명 계획을 알리지 않았을 리 없다며 떠나지 않으려 하지만, 망설일수록 영친왕이 위험해진다는 덕혜의 말에 결국 따라 나선다. 이렇게 영친왕과 덕혜의 상하이 망명은 성공한 듯 싶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영친왕이 망명을 거부하면서 작전은 물거품이 된다. 그리고 또 다시 한택수가 은신처를 덮치면서 영친왕과 마사코가 먼저 붙잡히고, 덕혜는 장한과 함께 어렵사리 탈출한다.
장한과 덕혜는 시즈오카 현 모처에 있는 산 속의 독립운동 기지로 피신하고, 그곳에서 함께 며칠을 지낸다.[7] 덕혜는 장한의 총상을 치료해주고, 장한이 위험해지자 꼭 끌어안고 함께 밤을 지새는 등 약간의 로맨스 분위기를 자아낸다.[8] 그렇게 복동과 약속한 날이 되어 덕혜의 상하이 망명이 성공할 것처럼 보였으나 일본군의 기습으로 두 사람은 위험에 처한다. 장한은 덕혜를 비밀 통로로 먼저 내보내고, "저에게 10분만 주십시오.10분 후에 반드시 옹주님을 찾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덕혜가 비밀 통로를 통해 해안가로 달리는 사이 장한은 숨겨둔 총과 폭탄으로 수많은 일본군을 상대한다. 한편, 해안가로 달려간 덕혜는 배를 끌고 오는 복동과 만나고 멀리서 장한이 덕혜를 향해 달려오며 감격스러운 포옹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배를 끌고 온 사람은 한택수였다.[9] 결국 장한은 한택수의 총에 맞아 쓰러지고 덕혜는 힘없이 주저앉는다.
덕혜는 소 다케유키와 결혼한다. 결혼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만 잠깐 비친다. 젊은 다케유키는 덕혜를 위해 조선식으로 식단을 준비하라고 하고, 옆에 앉아 다정히 말을 건네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희망을 버린 덕혜는 마음을 열지 않고, 덕혜옹주는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다.
시간은 다시 1961년으로 돌아와 김장한이 그 장소 그대로 있는 소 다케유키의 집을 찾아온다. 거기에는 이미 늙은 소 다케유키가 살고 있었고 그는 그녀의 일에 대해 묻는 김장한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지만, 김장한은 집요하게 집안으로 무작정 들어가서 그녀의 물품을 다케유키의 방에서 찾는다. 그러다가 다케유키의 재혼한 부인과 자녀들[10] 도 보게 되지만 다케유키는 무작정 집을 뒤지는 김장한을 밀치면서 싸우다가 넘어트리게 되고 그가 의족[11] 을 차고 있는 걸 보면서 "당신 뭐야" 라고 묻는다. 둘은 서로 마주 앉아서 이야기하면서 상황을 설명한다. 다케유키는 "나는 덕혜를 버리지 않았고, 딸 정혜(正惠, 마사에)는 나와 덕혜가 이혼한 후 자살했다"면서 눈물을 흘린다.
영화는 다시 1945년 8월 15일, 소 다케유키 집에서 덕혜는 빨래를 개며 딸 정혜가 덕수궁을 그리는 걸 보면서 "더 빨갛게 단풍이 물들어서 예뻤다, 그래서 엄마는 가을만 오기를 기다렸다" 정혜와 그림을 이야기하면서 있다가 딸 정혜가 "엄마 나 배고파" 그래서 덕혜는 허겁지겁 밥을 지으러 가다가 라디오에서 쇼와 덴노의 '''옥음방송''', 즉 항복 선언 방송을 듣고는 딸 정혜를 끌어 안으면서 "일본이 패망했어!! 전쟁에서 졌어!! 이제 조선에 갈 수 있어!!" 하면서 감격의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이후 덕혜는 딸 정혜와 함께 GHQ 지배 하에 있는[12] 시모노세키 항에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린다. 딸 정혜가 "엄마, 무서워. 집에 가면 안 돼? 아빠는?" 그러자 엄마 덕혜는 "아빠는 잊어. 넌 이제 소 마사에가 아니라 정혜야. 넌 조선인이야"라고 말하면서 "엄마는 얼마나 기다렸는데, 20년을 기다렸어. 우리가 가면 얼마나 반가워 할까!!"라며 들뜨고 등 감격한다. 그러다 자신의 차례가 된다. "소 덕혜냐"고 심사관이 묻자 덕혜옹주는 "네 제가 맞아요" 하지만 입국 심사관은 "조선 측으로부터 거부를 받았다, 입국거부자 명단에 있다"면서 차갑게 말해 버린다. 놀란 덕혜옹주는 "아니 제가 왜 입국이 거부가 돼요? 이봐요! 전 조선인이에요! 나 조선 사람이라고! 조선인이에요!" 라면서 절규하지만 끝내 미군에게 끌려 내팽겨져친다.
그런 뒤 그녀에게 부축의 손을 건네는 이가 있었는데 그를 본 덕혜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어이구 옹주 마마! 오랜만입니다," 라고 말하는 그가 중절모를 벗자 한택수임이 드러난다. 한택수는 "세상이 또 바뀌었습니다,", "조선이 독립을 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이 얼마나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하면서 웃는다. 앞으로 나가면서 정혜를 보더니 지갑을 열면서 "네가 마사에구나, 많이 컸구나" 하면서 돈을 주려는 찰나 덕혜가 바로 멱살을 잡지만 한택수의 보디가드들에게 다시 한번 바닥을 내팽겨쳐진다. "옹주님 제가 예전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옹주님은 다시는 조선 땅을 밟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 한택수는 절차에 의해 보호받으며 입국한다. "Are You MR.HAN?(당신이 mr.han입니까?)" 한택수는 "Yes, My name is Tak Soo Han.(예, 제 이름은 한택수입니다.)" 동시에 미군이 "Please, Come this way.(이쪽으로 오십시요.)" 안내를 받으면서 귀국선에 승선한다. 이에 덕혜는 우는 것도 잠시, 격하게 몸을 웅크림과 동시에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드러눕는다. 정혜는 그런 엄마를 무서워 하면서 뒷걸음질치고, 주변 대기하는 사람들도 미쳤다는 듯이 안타깝게 쳐다본다.
시간은 다시 1961년으로 돌아와, 장한은 복동과 같이 옹주가 입원해 있는 정신병원을 찾는 데 성공한다. 간호사에게 간곡한 부탁 끝에 옹주의 병실 앞에 다다른다. 하지만 이미 폐인이 되어 하염없이 창문만 바라보고 있는 옹주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이후 61년 한일기본조약회담의 기자회견 자리에 참석하게 된 장한은, 박 의장(박정희)에게 질의응답 시간에 자신의 차례가 아님에도 마이크를 빼앗아 "대한제국 황족들의 복권과 옹주의 귀국을 허락해 달라"고 외치다가 경호원들에게 끌려나가고 빈 방에 갇힌다. 그러나 박 의장은 장한을 따로 부르고, 장한의 간곡한 설득에 옹주의 귀국을 허락한다.[13]
그리하여 장한은 옹주가 있는 정신병원에 가서 퇴원 수속을 밟고[14] 폐인이 된 옹주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장한을 못 알아 보던 옹주는 장한이 구출 작전 때 옹주에게 외쳤던 약속을 부르짖고, 옹주는 기억을 되살리며 장한을 안아준다.
이윽고 어렵게 귀국길에 오른 옹주는 귀국장에서 자신을 마중나온 이제는 다 늙어버린 황실의 궁녀들에게 절을 받고 유모 복순과 눈물겨운 재회를 한다. 시간이 흐르고 장한은 이제는 자신의 집이 아니라 관광지가 된 덕수궁에 옹주와 동행하고, 옹주는 출입금지 팻말이 붙은 궁 내부를 바라보다가 고종황제와 귀인 양씨가 자신을 환영하는 환상에 빠진다. 환상 속에서 고종과 양 귀인과 부둥켜 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옹주에게, 양 귀인은 처음으로 덕혜라고 불러주며 귀환을 환영한다. 이윽고 옹주가 좋아하는 사이다를 사온 장한이 옹주와 담소를 나누며 영화는 끝난다.[15]
6. 고증 오류
- 한일 강제 병합 후 궁궐 내 남자 직원(내시, 대령숙수 등)은 모두 쫓겨나고 궁녀들만 남았다. 따라서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는 날 그 앞에서 울고 있는 내시들은 고증 오류다.
- 영화 내에서 일본어로 옹주를 부를 때도 옹주의 일본식 발음으로 부르지만, 실제론 덕혜의 일본어 발음을 더해 '도쿠에 히메(德惠姬)'라 불렸다. 올케 이방자의 회고록을 봐도 알 수 있다. (히메는 신분 높은 사람의 딸을 호칭)
- 극 중 직접 출연하지는 않았지만, 남자 주인공 김장한의 아버지의 이름이 김황악이라고 언급되었는데 실제 김장한의 아버지 이름은 김정진(金珽鎭)으로 김황진의 동생이다. 김황진 - 김정진 형제는 신 안동 김씨로써 26세 '진(鎭)'자 돌림을 쓴다. 제작진이 이런 점까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김장한 아버지의 이름을 김황진의 황을 따서 가상으로 지은 듯하다.
- 고종황제가 어린 장한을 밤늦게 따로 불러 얘기할 때 자신의 딸을 덕혜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고종은 덕혜옹주가 덕혜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지도 몰랐다. '덕혜(德惠)'는 고종 사후 2년 뒤인 1921년 5월 4일에 이복오빠 순종황제가 내려준 봉호이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고종은 덕혜를 '아기'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만, 극 중 진행 상 아무래도 그냥 "아기야"라고 부르긴 무리였던듯 하다. 실제로 여러 회고록 등을 보면 어린 시절의 덕혜옹주는 그저 '복녕당[16] 애기씨'로 통칭된다.
- 덕혜옹주가 조선인 노무자들 앞에서 자신을 조선의 옹주 이덕혜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역시 고증 오류이다.
우선 '덕혜(德惠)'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본명이 아니라 순종이 내린 작호인데, 1931년 소 다케유키(宗 武志)와 결혼하면서 남편의 성에 작호를 붙여 '소 도쿠에(종 덕혜, 宗 德惠)' 로 불리운 것을 시작으로,[17] 1956년 이혼하고 나서 어머니 귀인 양씨의 성을 따라 양덕혜(梁德惠)로 [18] 그리고 1962년 국적 회복되어 귀국하게 되면서야 이덕혜(李德惠)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즉, 1962년보다 한참 과거인 일제강점기 시기에 덕혜옹주가 노무자들에게 스스로를 이덕혜로 칭하면서 소개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 일제강점기라서 예법을 엄격히 따지지 않아 덕혜옹주가 용보 당의를 입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면서 궁중 예법은 황실의 격에 맞게 한층 상승되었다. 왕은 황제가 되었고, 황제의 자식들은 왕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옹주라 해도 왕의 반열에 있기에 덕혜옹주가 용보 당의를 입는 건 황실 예법에 따른 것이다.
- 영화 초반부, 덕혜옹주가 기모노를 바꿔치기 했을 때, 한택수가 높으신 분들에게 까이는 장면이 있다. 그 때 '내선일체를 홍보할 수 있다면서 큰소리 쳐놓고 뒤통수를 맞다니'라는 대사를 하는데, 내선일체라는 용어가 제대로 반열에 오른 시기는 1937년부터였다. 덕혜옹주가 유학을 가던 시기는 1925년인데, 이 장면에 나오던 시기도 대략 1925년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내선일체'라는 용어가 무려 12년 전에 나온 셈이 된다.
- 마지막에 덕혜옹주가 귀국하는 길 탑승한 비행기가 무려 제트기에 이코노미 3-3-3배열 광동체기다! 애초에 광동체기 자체가 1969년 데뷔한 물건이며, 3-3-3배열이 최초로 적용된 물건도 1995년 나온 보잉 777이다.
6.1. 실제와 다르거나 가상으로 만들어 끼워맞췄던 부분
영화 <덕혜옹주>는 사실(fact)과 허구(fiction)를 적절히 섞은 '팩션(faction)'으로 관람객들은 허구와 사실을 구분하고 내용을 공감할 필요가 있다.
- 가장 두드러진 허구는 영화에서 가장 극적이고 중요한 장면인 덕혜옹주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와 영친왕과 함께 중국 상하이 망명을 추진했다는 대목이다. 실제로 망명 시도를 했던 건 의친왕 이강이다.[19]
- 영화에서는 영친왕 부처가 덕혜옹주를 계속 데리고 산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이는 실제와 다르다.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일본에 온 직후에는 가쿠슈인에 편입하기까지의 극히 짧은 시간 동안만 함께 살았으며, 가쿠슈인에 다니는 동안 아직 어리고 그동안 여러 일로 충격이 컸을 옹주를 위해 자신들이 데리고 보살피겠다는 영친왕 부처의 요청을 일본이 거절하고 바로 기숙사로 보냈다고 한다.[20] 따라서 그들 부처가 덕혜옹주와 함께 지낸 시간은 귀인 양씨가 사망한 해의 여름방학까지 포함해도 지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 덕혜옹주가 가쿠슈인을 졸업했는데도 귀국시키지 않는다고 항의하는 장면이 나오나, 사실 옹주는 이미 이 시점에서 신경쇠약으로 인해 등교 거부 상태였다. 설상가상 졸업 이전의 시점이던 이때는 이미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데다 혼담까지 오가고 있어 당시에는 가쿠슈인을 끝까지 다니지 못했다. 덕혜옹주가 학업을 마친 건 소 다케유키와 결혼한 이듬해인 1931년의 일이다.
- 영화에서는 덕혜옹주가 일본에 처음 간 뒤 1960년대까지 처음엔 친일파 때문에, 나중엔 한반도 정부의 반대로 조선 땅을 한 번도 밟지 못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덕혜옹주가 어머니 귀인 양씨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1929년 6월 2일[21] 조선에 잠시 귀국한 적이 있다.
- 실제 덕혜옹주는 이미 10대 때부터 정신병 증상이 시작되어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닐 정도였지만, 영화에서는 못 볼 꼴을 계속 보고 충격이 누적되면서 세월이 꽤 지나서야 발병하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작중에서 그런 묘사가 처음 나오는 건, 딸 정혜도 꽤 큰 1945년 이후로 나온다.
- 김장한이 행방이 묘연한 영친왕 부처를 추적하여 실종된 덕혜옹주를 수소문하려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 속 김장한의 해방 이후 후기 행적의 모티브가 되는 김을한[22] 의 회고록에 의하면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 있는 것을 알려준 건 소 다케유키가 아니라 영친왕으로, 당시 돈으로 월 1만 엔[23] 에 달하는 거액의 병원비를 다달이 지불한 것도 영친왕이라고 한다.[24] 전 남편 소 다케유키는 당시 김을한의 전화에 병원에 있다는 사실만 알려주고 끊었다고 하며, 덕혜옹주를 찾기 위해 김을한이 소 다케유키를 직접 찾은 일은 없다고 한다. 참고로 김을한이 덕혜옹주의 행방을 확인한 건 그가 도쿄 특파원으로 건너갔던 1950년대 초반 무렵이라고 한다.
- 소 다케유키와의 맞선과 웨딩드레스를 보러 가는 신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자 여사가 즐거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영친왕 부처 모두 자신들에 이어 어린 옹주를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든다며 해당 혼사를 굉장히 불쾌히 여기고 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특히나 이 시기 이미 몽유병이나 신경쇠약을 비롯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던 옹주를 치료할 생각도 하지 않고 한창수[25] 가 자신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결혼을 서둘러 진행한 탓에 옹주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더욱 반대를 해서 어떻게든 혼담을 깨려 노력했다고 한다. 물론 그 결혼 반대는 물거품으로 돌아갔지만.
- 덕혜옹주는 영화에서처럼 밥을 지으러 가는 일이 없었다. 일본이 패망하기 전에 소 다케유키는 화족(귀족)이었고, 일제의 귀족은 영화 아가씨에서처럼 기본적으로 저택에서 살며 몇 명의 하인들을 고용한다. 정신병을 앓아온 덕혜옹주는 항시 요양상태였고, 패망 후에는 보살펴 줄 하인을 고용할 처지가 못 되어 정신병원으로 보내지기 때문에 제 몸을 건사하지도 못하는 덕혜옹주가 가사를 했을 거라 볼 수 없다. 더욱이 가사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딸 정혜의 양육이 가능했을 리가 없는데, 딸 정혜와 평범한 모녀로서의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나오는 것 역시 모순이다.
- 덕혜옹주가 조선 옷이 아니란 이유로 기모노를 거부하고 평생 한복과 양장만 입었다는 묘사는 오류다. 옹주가 조선에서 다녔던 히노데(日出) 소학교는 일본인 학교였고 기모노 착용이 의무였기에, 옹주도 기모노를 입고 다녔다.
- 윤제문이 배역을 맡은 한택수는 한창수라는 실제로 과거 존재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 인물을 모티브로 만든 가공의 인물이다. 영화에서 그는 나라를 팔아먹기 위해 온갖 짓거리를 다하고 옹주에게도 온갖 쓰레기짓을 다하는데 그것도 모자라 광복 후에도 뻔뻔스럽게 태연히 조선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최대 발암씬이지만 사실 그가 연기한 과거 진짜 한창수는 광복 12년 전인 1933년에 이미 사망했다.
7. 평가
일단 언론 시사회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손예진, 박해일, 고수, 김대명 등의 연기가 훌륭하고 소 다케유키 백작 또한 원작의 악당 남편 이미지 대신 혼마 야스코(本馬恭子)의 학술적 성과도 포함된 듯하다는 의견이 있다. 사실 신파조로 가려면 갈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어느 정도 과잉되지 않고 감상주의적인 분위기가 배우의 연기로 중화되어 절제된 신파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는 듯.
거시적인 역사적 비극보단 그안의 개인이 겪은 비극에 더 중점을 둔 분위기이며 감정이 과잉될 수 있는 순간도 서사에 적절하게 녹아 들었다는 평가가 있다. 전반적으로 언론 시사회 평은 호평이 많다. 특히 손예진의 연기는 후반부 장면에서 소름이 끼친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박해일의 노년 연기도 평가가 상당히 좋다. 이동진은 무비썸에서 별 셋을 줬다.
개봉 전에 대한제국의 황족들이 현대에 와서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가 한국독립운동에 적극적 참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영화를 찍기 위해서 없는 사실을 덧붙여 미화한다는 비평이 있었다. 물론 의친왕처럼 황족들 중에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하려 노력한 사례가 없는 건 아니지만,[26][27] 예고편만 보면 무슨 덕혜옹주가 황손으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투사처럼 묘사해 놓은 것처럼 보였던 것.
이래서 차라리 덕혜옹주 개인의 삶을 사실적으로 다루면서 시대의 흐름에 스러져간 개인의 비극을 다루어도 충분할 소재인데 왜 이런 방향에서 접근했는지는 의문이며, 결국엔 애국 마케팅 아니냐는 의문들이 제기되었다. 거기에 영화의 원작 소설이 솔직히 좋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수준이라 대중들의 역사관에 문제가 될 작품이 아니냐는 의문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영화 개봉 후, 우려했던 덕혜옹주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식의 내용이나 미화는 거의 없었다.[29] 영화를 보고 나서 예고편을 보면 '아, 이 장면이 저렇게 나왔구나'하면서 오해를 일으킬 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자체는 감동적이었다는 평, 지루했었다는 평, 역사왜곡 아니냐는 평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덕혜옹주라는 인물의 개인사에 대해 다루었고 몇몇 부분은 역사에 묘사된 덕혜옹주와는 큰 차이가 없다.
한 마디로 말해,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덕혜옹주나 대한제국 황족들이 독립운동가로는 묘사되지 않았다.[30] 즉, 우려했던 국뽕은 없었고 담담하게 망국의 황녀의 인생 궤적을 보여준다는 식의 평가도 있어서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평가가 갈리는 듯하다. 하지만 덕혜옹주가 '''독립운동가로 묘사되지 않았을 뿐'''이지 여러 장면에서 역사적인 사실과는 크나 큰 차이가 있으며 영화상의 창작이나 픽션이라는 점을 감안해 영화의 '''역사왜곡은 정도가 심한 부분'''이 있다. 그렇기에 영화 시작 전에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한 픽션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또 덕혜옹주 개인의 독립운동 참여 같은 것을 넣지 않았을 뿐이지 영화가 전반적으로 '''조선 구왕실 인물들에 대해 미화'''하고 있다는 감상평도 있다. 결과적으로 큰 도움은 되지 못했지만 구 왕족들도 조선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노력은 했다는 식으로 묘사되었기도 하고, 대한제국 황족들이 아무리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해도, 그보다 훨씬 많은 한반도의 일반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에 비할 바는 못되므로 공감을 받을 여지가 많지 못하다는 것. 그런 거라면 영화 <귀향>에 묘사되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사례가 더 공감을 얻기 쉬울 것이다.
황진미는 이 영화에 대해 누가 이렇게 황당한 왕실 미화에 공감하는가라며 역사와는 다른 일방적인 왕실 미화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간 황진미가 역사 소재 영화에 대해 자신의 이념이나 잘못된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엉뚱한 평을 한 것에 비하면 역시 역사 소재인 이 영화에 대해 제대로 된 비평을 했다.[31]
한편 허진호 팬덤이나 허진호 특색을 알고 있는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매끈하게 잘 빠지긴 했으나 허진호의 장기가 잘 살아난 영화는 아니라는 평이 우세하다.[32]
그래도 로맨스 감독 아니랄까봐 김장한과 덕혜옹주간의 애틋하고 비극적인 상황과 심리묘사는 상당히 볼만하다.
7.1. 애국심 마케팅
하여간 영화 내용은 그렇다치고 이 영화를 배급하는 배급사인 롯데 측에서 이 영화를 홍보할 때 애국 마케팅을 사용해서 더 이런 쪽으로 해석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공식 포스터들만 해도 '우리나라'를 좀 지나치게 강조하는 면이 있는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이런 인식을 피하긴 어려울 것 같다. 밑에서 설명할 개봉일 변경 소동도 그렇거니와 당장 이런기사만 봐도 무슨 광복절을 맞이해 대한민국 국민은 다 봐야 한다는 식으로 오글거리는 기사를 쓰고 앉아 있는데 포털에서 '광복절, 덕혜옹주' 키워드로 검색하면 이런 기사들이 꽤 많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7.2. 정치적 진영논리
거기에다가 2016년 7~8월의 정치계에서 여당을 상징하는 영화가 <인천상륙작전>이라면 야당 측을 상징하는 영화는 <덕혜옹주>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인데 '평가는 완성도의 문제다 vs 정치적인 편파로 평가를 내리는것이 아니냐?' 논란이 있는 <인천상륙작전>에 비하면 조용한 편이지만 야당 측에서 꽤 언급하는 영화가 되어 있다.심지어 국민의당 국회의원들이 광복절을 맞아서 이 영화를 단체 관람 한다는 기사도 있을 정도고 더민주측에서도 이 영화를 언급하고 있다.[34] 이 기사 댓글에 나오는 '여당은 <인천상륙작전>이고, 야당은 <덕혜옹주>인가'라는 말이 촌철살인.
8. 흥행
2016년 8월 3일, 개봉 첫날 26만 6천명 관객으로 <수어사이드 스쿼드>와 <인천상륙작전>에 밀려 박스오피스 3위로 시작했다. 롯데시네마의 화력으로 상영횟수에서는 2등이였다. 앞의 두 영화가 혹평을 거세게 받았던터라, 주말을 지켜보아야할 듯.
3일차인 8월 5일 1위를 달성하며 차트 역주행에 성공했다. 경쟁작들과 다르게 혹평이 낮아 그런 듯. 손예진은 롯데의 최고 성적인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 이어 또 다시 롯데 작품에 흥행 성공할지 기대되고 있다. 개봉 4일차인 8월 6일 100만 돌파에 성공했다. 특히 같은 날 개봉한 <수어사이드 스쿼드>와는 큰 차이가 벌어졌다.
이 정도 추세라면 간만에 롯데 배급 성공작으로 자리 잡을 듯. 작년 롯데에서 100만을 넘은 한국 영화가 딱 하나, <간신> 111만명 뿐이였다. 롯데는 작년에 <덕혜옹주>와 비슷한 규모의 <협녀, 칼의 기억>으로 무려 43만명을 모았다.
8월 9일 오전 7시기준으로 개봉 7일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덕혜옹주의 손익분기점은 350만이다. 2주 전에 개봉한 <부산행>, 전주에 개봉한 <인천상륙작전>, 같은 날 개봉한 <수어사이드 스쿼드> 등 경쟁하는 영화가 많은데다 차주에는 <터널>, <국가대표 2> 등 대작들이 개봉하기 때문에 쉽지만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막상 열어보니 <수어사이드 스쿼드>, <국가대표 2>가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하다보니 돌파가 거뜬할 것으로 보인다. <인천상륙작전>의 2주차에 개봉하여 <터널>과 맞붙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 성공한 셈이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예상보다는 흥행하기는 했으나 졸작 논란에 시달리며 관객의 정치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바람에 별다른 폭발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인천상륙작전>의 2주차는 무주공산이었는데, <터널>과 맞붙었으면 이런 공백지대를 놓칠뻔 했다.
8월 13일 개봉 11일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8월 14일, 손익분기점인 350만을 돌파했다. 롯데에서 배급한 한국영화들 중에서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가 지난 2014년에 개봉한 <기술자들> 이후로 약 1년 8개월만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개봉 14일차인 8월 16일 오전 10시 20분 기준으로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9월 4일 550만 관객을 돌파했다.
9월 12일 총 관객은 557만이지만 일일 관객수가 2000 이하로 떨어졌다. 최종집계는 559만 5,907명.
8.1. 개봉일 변경 소동
잇따라 한국 영화들을 말아먹은 롯데엔터테인먼트가 사활을 걸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롯데가 수입배급권을 가지고 있는 <스타트렉 비욘드>와의 팀킬을 막기 위해 미국에선 7월 말에 개봉한 스타트렉을 8월 18일로 미뤘다. <덕혜옹주>는 '''8월 3일로 개봉일'''을 확정했다. 그러다, 비슷하게 광복절을 타겟팅한 CJ엔터테인먼트의 <인천상륙작전>이 7월 27일에 개봉하게 되어 영향을 받을까봐 걱정이 되었는지 <덕혜옹주>를 '''8월 10일로 변경'''했다. 롯데측은 “조국을 그리워한 덕혜옹주의 마음이 광복절의 의미와 맞닿아 있는데다가 후반작업 일정에도 여유를 갖기 위해 10일로 개봉일을 정했다”는 명분을 댔다.
그런데 마침 그 날은 쇼박스의 <터널>, 메가박스의 <국가대표 2>가 개봉하는 날이였다. 거기다 언론시사회에서 <인천상륙작전>에 대해서 혹평이 나오자 자신감을 얻었는지, 다시 개봉일을 '''8월 3일로 되돌렸다.''' 롯데측은 “한국 영화 3편이 동시에 붙는 부담감이 있는데다가, 후반작업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됐다”고 밝혔다. 때문에 후진적인 마케팅이라고 비난이 일었다.#
9. 소설/연극 덕혜옹주와 차이점
소설에서는 일본에서[35] 덕혜옹주를 몰아붙인다면, 영화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직접적으로 덕혜옹주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10. 여담
- 조연으로 나온 윤제문이 음주 운전에 걸리면서 제작보고회에 오지 않았으며# 극의 흐름상 중요해서 편집 없이 개봉했다.# 이후 출연했던 아수라에서도 편집 없이 개봉했지만 덕혜옹주와 달리 아수라는 실패했다.
- 연달아 영화를 말아먹은 롯데엔터테인먼트의 배급작이라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었다. 하지만 8월 14일에 손익분기점을 넘으면서 사실상 흥행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롯데의 한국영화 저주가 1년 8개월만에 풀렸다는 말도 있다.
- 원작 소설이 표절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었는데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본격적인 법적 분쟁 준비 과정에서 그냥 흐지부지됐다고.
- 실존인물 덕혜옹주는 일본에 유학하던 시절부터 신경쇠약 등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영화에선 국외로 망명을 하려다 실패하고 일본에 붙잡힌 상태에서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 것으로 표현되었으며, 중간과정은 생략되었다.[36]
- 덕혜옹주의 남편인 소 다케유키 백작은 과거에는 성격도 좋지 않고 외모도 추하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허우대 멀쩡한 미남자였다. 영화에서도 실제 소 다케유키 백작처럼 훤칠한 키의 미남으로 덕혜옹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녀와 이혼하고 딸마저 자살하자 충격으로 그녀를 잊고 산다.
- 이방자 역의 토다 나호, 정신병원 간호사 역의 아키바 리에[37] 를 비롯해 일본인 배우들이 여럿 등장한다.
- 깜짝 출연으로 고수가 이우왕자로 나온다. 이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우 왕자 역시 고수 못지 않은 미남이라 싱크로율이 괜찮은 캐스팅이라는 평가.
- <나쁜놈은 죽는다>, <비밀은 없다>의 연속 흥행 대참패로 티켓 파워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평을 받은 손예진은 이 영화에서 열연을 보여줘 흥행과 연기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시 잡았다. 더불어 10억 원을 투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 2016년 7월 27일 손예진이 SBS 나이트라인에 직접 출연하여 영화를 홍보했다. 영상
- 2017년 6월 24일 라스트프린세스 대한제국 최후의 황녀(ラスト・プリンセス 大韓帝国最後の皇女)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개봉했으며, 후에 DVD로도 발매되었다.
- 2018년 광복절 특선 영화로 채널 CGV에서 방영 되었다.
- 미묘하게 아나스타샤와 공통점이 많다. 차이점은 아나스타샤가 확실한 우익 애니메이션이라면 이쪽은 민족좌파 진영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허구로 점철되어 있는지라...
10.1. 크라우드 펀딩
영화 분야에 소액투자(크라우드펀딩)가 허용된 이후 세번째[38] 로 투자자를 모집했다. 333만명을 손익분기점으로 제시하고 5억 한도로 6월 28일부터 7월 22일까지 투자자를 모집했지만 5,530만원(총 65명 투자) 밖에 모이지 않아 투자모집 자체가 무산되어 버렸다. 그 이유는 앞서 투자자를 모집했던 사냥의 흥행이 처참했던 것.[39] 이에 대한 여파로 <덕혜옹주>까지 모집에 실패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투자가 성사됐다면 시뮬레이션 상 약 +30% 수익이 났을 것으로 예상된다.
10.2. 영화제 상영
- 2016년 9월 29일부터 열리는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영화제 특성상 감독이나 배우 GV가 있을 듯.
11. 관련 문서
[1] 예고편에서처럼 덕수궁을 쪼르르 달려가기도 하고, 아버지 고종황제의 품에 안겨 볼을 부비대는 등 고종을 딸바보로 만들기에 충분한 어린 옹주로 나온다.[2] 이때 문쪽에 실루엣이 나오는데, 자세히 보면 그 실루엣의 정체는 바로 한택수이다.[3] 덕혜옹주는 거세게 거부했지만 한택수가 어머니 귀인 양씨를 두고 협박하자 마지못해 일본으로 향한다. 그리고 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4] 이때 아버지 고종황제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걸로 보아선, 고종의 죽음이 독살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모양.[5] 복동은 일본에 정착해 곱창전골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실제 당시 재일교포들이 곱창집을 차리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일본인들은 곱창을 안 먹고 버리는 것 취급했는데, 재일교포들이 이것들을 요리해 먹으면서 곱창 요리가 일본에도 퍼졌다.[6] 이전 버전에서는 태양절 행사라고 작성되어 있었는데 태양절은 김일성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다. 영화의 행사 장면에서도 기원절은 진무 덴노가 즉위한 날이라는 언급이 나오기에 기원절 행사가 맞다.[7] 며칠 기다리면 복동이 배를 구해온다고 해서 몸을 숨기기로 한 설정이다.[8] 이 때 둘의 케미가 제법 괜찮다.[9] 중간에 복동의 배를 가로채고 복동을 협박하여 은신처를 찾아낸 듯.[10]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 이혼한 후 가츠무라 요시에(勝村良江)라는 일본 여성과 재혼, 장남 다츠히토(立人), 차녀 와키(和木), 차남 나카마사(中正)의 2남 1녀를 더 낳았다.[11] "죽은 줄만 알았는데 어떻게 살아 돌아왔냐"는 복동의 질문에, 장한은 "덕혜옹주를 탈출시키는 데 실패한 이후 남양 군도에 총알받이로 강제 징용되어 그 곳에서 해방을 맞았다"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정황상 징용 중에 한쪽 다리를 잃은 듯.[12] 그래서인지 미군들이 조선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다.[13] 이 때 박정희는 장한이 일본육군사관학교 선배여서인지, 장한에게 "나와 함께 새 정부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가 장한이 "나는 현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거부당했음에도 장한을 나쁘지 않게 보는 모습을 보여 준다. 다만 세월이 흐르면서 덕혜옹주가 사람들에게 잊혀진 탓인지 덕혜옹주의 귀국을 허락해 달라는 말을 듣자 "그런데, 덕혜옹주가 누구요?"라는 말을 한다.[14] 이떄 환자와의 관계에서 보호자 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 장한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15] 이 장면을 보고 마지막 황제가 생각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16] 어머니 귀인 양씨의 당호[17] 그 전까지는 별다른 본명 없이 살았다고 보면 된다. 본래부터 왕족들의 이름은 필요할 때가 아니면 부르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것이 법도였고, 원래 작호가 본명 내지는 이름 역할을 하기 위해 있던 것이다. 덕혜옹주 이전의 조선 왕조 왕자녀들도 본명은 있지만 생전엔 작호로 불렸다. 어차피 본명이 있어보았자 살아생전 불릴일도 거의 없기 때문에 이름이 없어도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18] 이때 '이덕혜'가 아니라 '양덕혜'로 불리운 이유로 여러가지 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친가인 전주 이씨 가문에서 덕혜옹주를 이혼녀라고 거부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래서 외가의 성씨인 '양'을 사용한 것이라 함.[19] 다만 영친왕&이방자 부부가 유럽에 비공식 방문을 한 당시에 빠리에 온 소식을 접하고 상해임시정부 측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하여 영친왕을 납치 후 망명시키려던 시도를 하려다 사전 발각되어 무산된 이력이 있다. 영화는 의친왕의 망명 시도와 상해 임시정부의 영친왕 납치 기도를 의도적으로 섞은 걸로 보인다.[20] 참고로 영친왕은 자신에 이어 어린 여동생이 볼모로 끌려온 데 대해 매우 불쾌해 하고 있었는데, 오라비 내외가 데리고 있는 것조차 거부당한 것에 심하게 화가 나서 오랫동안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21] 동아일보 당시 기사 링크[22] 1905 ~ 1992. 역시 김황진의 조카이자 덕혜옹주의 원 약혼자 김장한의 친형으로, 이 사람이 기자 생활을 한 게 영화에 반영되었다. 그의 말로는 백부와 동생의 일도 있었지만 그의 아내 민덕임이 덕혜옹주의 유치원 동무였던 것도 덕혜옹주에게 관심을 둔 이유로 작용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친왕 부처와 덕혜옹주의 귀국에 힘쓴 건 이 김을한으로, 실제 김장한의 행적은 파혼 후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후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고 1969년 5월에 형보다 먼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23] 현재 시가로 약 30만 엔 가량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보면 된다. 참고로 대졸 초임 평균연봉이 6,500엔 하던 시절이니 당시로서도 상당히 큰 금액임을 알 수 있다.[24] 이게 대단한 것이, 현재의 시가로 계산해도 엄청난 금액을 내 준 거지만 이 당시는 영친왕은 더 이상 왕공족이 아니어서 예전처럼 풍족하지 않았다. 신적강하나 이승만 정권의 황실재산 강제 국유화 등으로 인해 이때부터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당한 시점이었기에, 원래 살았던 이왕가 저택마저 헐값으로 내놓는 지경에 이르는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집세를 핑계로 참의원에서 공건물을 빌렸다고 서류에 쓰고 돈을 줄 정도로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 이복 여동생을 위해 거액의 병원비를 내 주고 있었던 거다. 더군다나 이 시대가 가족이라 해도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알면, 영친왕이 나름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25] 영화 속 등장인물인 한택수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 당시 이왕직 장관으로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이런 한창수에게 당당하게 박찬주 여사와의 결혼을 성사시키며 빅 엿을 날린 게 이우 공이다.[26] 사실 이것도 좀 모호한 게 독립운동에 참여하려고 했다지만 애첩과 함께 중국에 건너 가려다 지체돼서 일제한테 걸렸던 데다가, 의친왕은 공식적인 자식을 둔 측실만 14명이었다. 이런 면에서 일제 하에서 호의호식 하지 않았다고 보기엔 사실 모호하다. 아무래도 남아 있는 대한제국 황실 후손들이 다 의친왕계라서 이런 시도가 부각되는 면이 없잖아 있는것도 사실이고.[27] 물론 잘 살았던 걸 떠나서,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꼭두각시 황족으로 사느니 차라리 '''일개'''시민으로 독립된 국가에서 살겠다고 망명을 시도한 것이다. 무산되었지만 독립운동을 시도 했었고 충분히 부를 버리고 고단한 길을 택하려고 한것도 역시 사실이다. 그리고 측실을 많이 둔것과 독립운동을 시도했던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독립운동가들중에 사생활이 자유분방했던 사람이 전혀 없었던것도 아니고, 그런 사실이 독립운동을 했던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28] '일본 헌정의 신'이라 불리는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의 딸. 혼마 야스코(本馬恭子)의 저서 <德惠姬>에 소개된 유키카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유키오는 "한국에 대해서는 일본이 아주 몹쓸 짓을 했으니까 언젠가는 보상을 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29] 실제 역사상의 덕혜옹주도 가쿠슈인 동급생 소마 유키카(相馬雪香)[28] 로부터 "내가 너의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에 나섰을 텐데, 왜 너는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긴 했다. 물론 덕혜옹주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럴 만한 상태도 아니었다. 참고로 유키카 여사는 저 말을 한 후, 교무실로 불려가 교사들로부터 "쓸데 없는 말을 하지 마라"는 꾸중을 들었다고.[30] 덕혜옹주의 경우 ''내가 국민들에게 힘이 되지 못했다."라고 자책하는 대사가 있으며 영친왕의 경우 막판에 망명을 망설이다 결국 포기하는 등 우유부단한 인물로 나온다. 이우 왕자 또한 "해방 뒤에 우리가 서 있을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독립운동을 주장하는데 그만큼 실제 역사에서 황족들이 독립운동에 기여한게 거의 없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31] 비평 말미에 예로 든 뮤지컬 <엘리자벳>의 경우, 초반부만 보면 엘리자벳을 권위에 저항하는 자유분방한 황후로 그리는 것 같지만 막상 본격적으로 전개되면 남편에겐 자유 운운하며 뒤에선 축재를 일삼고 백성들이 아이들에게 먹일 우유가 없어 신음할 때 우유로 목욕을 하고 아내, 어머니로서 역할을 전부 방기하는 무책임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특유의 정신병적인 면도 두드러진다.[32] 허진호는 대형 사극에 적합한 감독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적은 인물과 공간에서 디테일함에 승부를 걸었던 감독. 심지어 직전에 만들었던 역사극 <위험한 관계>조차도 역사와 무관하게 세 남녀의 욕망에 집중했다.[33]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대통령에 출마한 건 1963년이고, 1962년 3월부터는 (사실상의) 대통령 대행이었다.[34] 아이러니한 사실인데 1962년 덕혜옹주의 영구 귀국을 성사시킨 것은 박정희[33] 였다. 즉, 이 영화 개봉 당시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이다.[35] 정확히 명시된 인물이 아닌 일본 정부에서[36] 사실 일본의 인질이긴 했지만 자칫 일본에서 유학 중인 조선 왕족이 죽는다면 가장 골치 아픈 건 일본 정부기에 별다른 핍박은 없었다. 게다가 13살부터 유학하고 있는 소녀를 암살할 이유도 딱히 없을테고. 다만 주변의 증언에는 덕혜옹주 개인이 그런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는 있다.[37] 미수다 출신.[38] 첫번째는 <인천상륙작전>, 두번째는 <사냥>[39] <사냥>은 손익분기점을 164만 명으로 제시했는데 최종 64만 명밖에 모이지 않아 -70% 대의 손실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