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택/선수 경력

 


1. 아마추어 시절
2. 데뷔 후 ~ 2008 시즌
3. 2009 시즌
3.1. 2009년 수위타자 논란
4. 2010 시즌
6. 2012 시즌
7. 2013 시즌
8. 2014 시즌


1. 아마추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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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문고 시절

휘문고등학교 출신으로 1998년 LG 트윈스고졸 우선 지명을 받은 후 고려대학교를 거쳐 졸업 후 LG에 입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 시절, 경기 도중 턱부상으로 군면제처리 되었다.경기에서 사구를 맞아 관절이 아예 나가버려 면제가 되었다는 말도 있고 대학 시절 다친 건 맞는데 단순 턱관절 염증으로 수술 받았다는 말도 있다. 이때 면제가 안됐다고 하더라도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출전했기 때문에 병역 특례를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긴 했다. 실제로 WBC가 끝난 후 관련 기사에서 미필자로 분류되기도 했다.
지명 당시인 1998년 무렵, 휘문고는 LG의 연고학교였다. 고졸우선지명이 존재하던 시절 LG와 OB는 서로 고등학교를 갈라 선수들을 지명하기로 했는데 하필 OB 연고학교에는 유망주가 씨가 마르는 바람에 LG에게 매달려 LG가 지명하지 않은 선수 중에서 지명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렇게 해서 박용택의 고교 동기인 유재웅은 두산에서 뛰게 되었다.
계약 당시 스카우트 팀장과 계약금 2억 3천만 원 + 연봉 2천만 원으로 총 2억 5천만 원으로 계약했는데 그 당시 타자들 사이에서 정평이 나있던 이현곤, 김민우가 더 높은 액수로 계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이현곤이 해태 타이거즈에 3억 5천만 원, 김민우가 현대 유니콘스에 3억 4천만 원 정도를 받았다. 자신도 그 정도를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1억 원이나 적게 받자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때 고졸 선수로 함께 들어온 선수가 김광우가 3억, 서승화는 5억이었다. 서승화의 경우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입단 협상 건이 걸려 있어 어느 정도 납득이 됐지만, 김민우, 이현곤의 경우는 전혀 납득할 수 없어 구단에게 계약금을 올려 받을 방법을 재차 물어봤다.
구단 측의 대답은 계약하지 말고 마무리 캠프에 가서 김성근 감독한테 인정받고 오라는 것이었다. 구단 입장에서도 주전의 실력을 갖춘 것을 증명해야 주전의 대우를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이 어떤 인물인지 잘 몰랐던 박용택은 거리낌 없이 구단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구단은 김성근 감독이 신인들, 고졸 선수들을 선수로도 생각을 안 한다고 만약에 선수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 2천만 원, 3천만 원으로 계약을 할 수도 있다며 겁을 줬지만, 그의 선택은 바뀜이 없었다.
그렇게 계약하지 않은 채로 석 달을 지옥 훈련했다. 그러자 김성근 감독이 박용택에게 "야! 너 왜 계약 안 해?"라며 물어봤고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자 김성근 감독은 박용택을 주전 감으로 인정해 구단과 계약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계약금 3억 원 + 연봉 2천만 원으로 도합 '''3억 7천만 원'''으로 LG 트윈스와 계약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인터뷰 영상

2. 데뷔 후 ~ 200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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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풋하던 2000년대 시절
2002년 데뷔할 때부터 줄곧 주전을 차지했으며, 2000년대 중반 투고타저가 심해지던 시기에 LG의 중심 타자로 자리잡게 되었다. 다만 '''2009년에 타격왕에 오르기 전까지는''' 2할 중후반대의 타율, 두 자릿수 홈런+두 자릿수 도루의 평범하다고 하기엔 잘하고 뛰어나다 하기에는 좀? 그저그러한 성적을 냈기 때문에 발전에 한계가 있었다는 평도 들었다.[1] 그리고 '''4번 타자 도루왕'''이라는 독특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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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플레이오프 MVP 수상 당시
2002년 데뷔 시즌부터 주전을 차지하여 타/출/장 .288/.359/.467 9홈런 타점 55 득점 68 도루 20개로 준수한 성적[2]을 올리고 도 4위로 가을야구에 진출하였다. 게다가 플레이오프 최종 5차전에서 결승 홈런 포함 2홈런 10루타라는 눈부신 활약으로 한국시리즈 진출의 1등공신이 되었다. 팀은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으로 마감하였다. [3]
2003년 김성근 감독 대신 이광환 감독이 다시 부임하였다. 아쉽게도 여러가지 사정으로 팀은 6위에 그쳤으며, 본인도 2년차 징크스로 부진하였다. 그럼에도 이듬해인 2004년에는 타/출/장 .300/.357/.471 17홈런으로 2002년 데뷔 당시의 성적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철이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LG에 '''잃어버린 10년이 도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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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KBO 시상식에서 이병규와 함께
2005년 타/출/장 .280/.344/.432로 작년보다 부진했지만 90득점 43도루로 각 부문 1위를 차지하며 2000년대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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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_2006시즌_요약.jpg'''[4]
2006년 타/출/장 .294/.361/.462 16홈런 25도루로 준수한 활약을 했지만 팀은 뭐(...). 이순철 감독이 사퇴한 이후 양승호 감독 대행이 분투해 보았지만 팀과 본인은 데뷔 첫 최하위인 8위로 크게 부진하였다.
이름
경기
타석
타율
안타
홈런
타점
비고
<color=#373a3c> 박한이
126
567
0.285
134
6
43

박용택
126
534
0.294
140
16
64

제이 데이비스
117
479
0.284
118
21
74

시즌 후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분에 도전했지만 보다시피 자신보다 훨씬 스탯이 밀리는 박한이에게 밀려 수상에 실패하였다. WAR도 박한이는 4.89로 9위인 반면에 5.06으로 리그 5위를 했는데도... 다만 골든글러브상이 말도 안 되는 것이 너무 많아 잘 언급되지 않는다. 자세한 건 문서 참고
이병규가 NPB로 진출 후, 없었을 때인 2007~9년 즈음은 LG의 유일한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나, 이대형[5]오지환[6] 이 등장하면서 인기가 조금 밀리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 LG에서는 가장 인기가 많은 선수 중 하나이다. 적절한 중장거리 타자로 타율도 괜찮고 크기가 큰 잠실야구장을 홈으로 쓰면서 두 자릿수 홈런을 꾸준히 기록해주는데다 두 자릿수 도루도 꾸준히 해주고 있는 선수. 외야 수비 능력도 나쁘지는 않지만, 어깨 신경의 부상으로 송구능력이 떨어진 게 약점. 때문에 2010년부터 2011년까지 지명타자로 출장하는 경기가 많아졌다. 간단히 요약하면 소녀어깨+호타준족. 이광용의 옐로카드 인터뷰로 어깨 문제는 26분쯤부터 나옴 대학시절에만 해도 좋은 어깨를 가졌지만 대학 4학년때 말부터 훈련 중 통증을 느꼈고 당시 고려대 인스트럭터 김광림의 권유로 프로 계약 이전까지는 두어 달 동안 타격훈련도 접을 정도로 쉬니 처음 온 통증이기 때문에 다시 호전되었다고 한다. 박용택의 인터뷰에 의하면 프로 입단 후 스프링캠프에서 김성근 감독의 지시로 무리한 어깨 훈련을 하다 다쳤다고 밝혔다.

'''박용택''' : 계약하고(프로입단 후), (마무리) 캠프[7]

가서 그때 감독님이 김성근 감독님이었죠. 마무리 캠프갔는데... (허탈한 웃음) 외야수가 공을 보통 하루에 많이 던져야 50개씩 던지는데, 많이 던져야. '''하루에 500개 이상 씩을 던졌어요.'''

'''캐스터''' : 하필이면 또 김성근 감독이셨네요.

'''박용택''' : 예. 그러니깐 팔이 떨어지죠. 근데 감독님은 '''"그걸 이제 안 쓰던 근육을 써서 그렇다."'''(중략.)[8]

그래서 많이 던졌어요. 그러다보니 적응도 하고 이겨내려는 방법을 알아지고 점점. 그래서 이제 시즌 들어가고 했는데 한 2년 정도는 잘 던졌어요 그래도. 뭐 꾸역꾸역? (이하 생략)

저 인터뷰가 나온 것은 2009년인데, 김성근이 야신으로 추앙받으며 명성이 절정에 달해 있던 시절이다. 노리타들이 넷상에서 서슬 퍼렇게 홍위병질을 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박용택과 이광용이 저런 말은 한 것은 매우 용기있는 것이었다. 노리타들의 집단 린치를 우려해서 실제보다 매우 완고하게 말한 것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러니 어떤 이유로도 김성근의 무지막지함이 가려질 순 없다. 아무리 외야수가 송구연습을 하루에 5백 개씩(박용택 인터뷰 참조)하면 실력이 강화된다? 5~60년대 일본야구기구만화에서나 통할 웃기는 개소리다. 결과적으로 김성근의 엽기적 훈련방식으로 인해 박용택의 어깨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시점에 봐선, 통증이 이미 발견되었을 때에 완전히 쉬는 건 아니더라도 재활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 당시 2000년대 초반이라 지금과 같은 2010년대 ~ 20년대와 달리 재활 수준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재활에 들어갔어도 어찌되었을지는...정리하자면 김성근의 잘못된 훈련으로 인한 원인제공 + 이광환[9]과 이광환의 후임 이순철의 땡겨쓰기 + 프런트의 무식함과 방관이 합쳐진 결과라고 보면 된다. 이 당시까진 아직 국내의 재활의학 수준이 도입기였고[10] 감독은 자기 임기 안에 선수들을 어떻게든 쓰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고 프런트는 말려야 할 책임도 있기 때문에 꼭 후임 감독 탓만 할 것도 아니다. 원래 엘지팬들은 김성근의 경기운영에 불만이 있었어도 2002년 한국시리즈의 강렬한 추억으로 김성근에 대해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편이었는데, 노리타들의 감성팔이와 선수혹사 + 왜곡조작, 일화가 재평가 받는 동시에 10년의 암흑기의 한 몫을 김성근이 차지한다는 걸 다시 확인하면서 상당수가 반김성근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인터뷰에서 보더라도 2년간 꾸역꾸역 버티다가 2004년시즌 우익수로 이동 후 부상이 심해져 시즌 후에는 공을 못 던질 정도가 되었고, 2005년 이후에는 어깨가 안 좋은 상태에서도 게임에 출전하면서 지금의 소녀어깨가 된 것. 이후 꾸준한 재활로 2008년 시즌 초 두산과의 라이벌 매치에서는 끝내기 좌익수 홈보살을 기록하기도 할 만큼 관리에 성공한다. 다만 이것은 좌익수일 때 이야기고, 여전히 중견수 박용택은 리그 최하급 송구력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수비 범위로 송구의 제약을 만회하는 선수. 비슷한 예로 이용규, 이대형 등이 있다. 그래도 수비실력은 나쁘지 않는데, 문제는 그놈의 어깨가 문제...
데뷔 시즌 부터 플레이오프 MVP를 수상하고 2005년엔 득점왕과 도루왕을 동시에 수상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LG에 새로운 타선의 핵이 생긴것 아니냐며 설레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팀은 한창 비밀번호를 창조하는 데다 상술했듯이 '''평범하다고도 못하고 뛰어나다고도 못하는''' 성적으로 은근히 많이 까였다. 거기에 2008년 투고타저+소녀어깨로 우익수[11]+부상의 트리플 크라운으로 커리어로우 시즌을 보내며 "박용택의 기량은 이제 한계"라는 평가를 받는 처지에 까지 놓였다. '''그런데...'''

3. 200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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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시즌에는 불같은 활약을 보였다. 본인 말로는 그 동안 김용달 타격코치와 6년 동안 타격폼을 계속 바꿔왔었는데 지금에야 몸에 맞는 타격폼을 찾은 것 같다고 한다.[12] 시범경기 때 부상을 당해 걱정을 샀지만, 안치용의 부진이 길어지자 4월 말 1군으로 돌아와 불꽃같은 타격을 선보였다. '''주로 팀의 1번타자로 출장하여 안타 168개(리그 2위) 타율 0.372(리그 1위) 홈런 18개 74타점 91득점(리그 5위) 도루 22개 출루율 0.418(리그8위) 장타율 0.582(리그 5위) OPS 0.999(리그 6위)''' 2009시즌의 엘지의 득점루트를 보면 박용택 안타- 이대형 땅볼, 도루 - 정성훈 진루타 or 뜬공 - 페타지니 안타
상술했듯 전년도인 2008년에 커리어로우 시즌을 보내면서 LG팬들 사이에서도 박용택의 미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시범경기 때의 부상으로 이런 우려가 한층 더 고조되었는데, 정작 1군에 복귀하자마자부터 말 그대로 미친듯한 타격을 보여주기 시작하면서(첫 10경기 타율 0.534기록) 일부 LG팬들조차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2009년 초반 당시 LG 외국인 선수인 페타지니가 압도적인 기량으로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부문에서 상위권을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용택이 페타지니에게 모종의 영향을 받아서 각성한 것이 아닌가하는 팬들의 추측이 있었고, 실제로 박용택 본인도 페타지니를 언급하는 인터뷰를 하였다. 여기서 몇몇은 양준혁이 LG에 온 이후 각성했던 김재현을 추억하기도(...)
타격 부분에서 거의 모든 기록이 시즌 10위안에 들 정도로 좋은 성적을 기록하였다. 시즌 후 2009년 수위타자를 차지하였고, 골든글러브 외야수부문을 수상하였다.

3.1. 2009년 수위타자 논란



이 사건은 그의 누적기록에 큰 오점을 남겼다.
2009년 수위타자가 되었는데, 그 마무리과정에서 일이 좀 많이 안좋은 쪽으로 폭발했다.
박용택은 롯데 홍성흔과 시즌 마지막까지 수위타자 경쟁을 하였는데, 9월 25일 對롯데전에서 '''박용택은 출전하지 않았고''', 출전한 홍성흔은 '''4볼넷(…) 후 1뜬공'''으로 박용택이 2009 수위타자 타이틀을 차지하게 된 것. 경기가 끝나자마자 KBS 스포츠 뉴스에서는 '''씁쓸한 타격왕''', SBS 스포츠 뉴스에서는 '''졸렬한 타율관리''' 등이라며 대차게 깠다. 연합뉴스에서는 아예 '''추태'''라는 단어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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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SBS 스포츠 뉴스에서 나온 졸렬한 타율관리라는 헤드라인은 졸렬하다라는 말을 인터넷 상에 널리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13] 이때 얻은 별명인 '''졸렬택'''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경기출전의 재량권이 최종적으로는 선수에게 있다는 점[14]홍성흔이 볼넷으로 멍하니 서있을 동안 덕아웃에서 '''홍낄낄거리는 장면이 잡혀서''' 박용택에게 가해진 비난은 상당했다. 홍낄낄1, 홍낄낄2
주 비난의 대상은 '''고의성 사구를 4번이나 지시한 김재박 감독'''이었지만, 시즌 마지막 경기에 나왔다가 3타수 무안타로 타율이 3할7푼2리로 떨어지자 바로 교체되며 겨우 3할 7푼 타율을 유지한 박용택은 '졸렬택'이니 뭐니 온갖 비난을 들으며 조롱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박동희와 김재박의 대담에서 김재박이 '''박용택 자신이 못 나가겠다고 했다'''고 밝혀서 박용택은 더 까였다.
'''1980~90년대에나 있었던 타이틀 밀어주기가 21세기에 일어나 버렸으니 이거 원 참...''' 이대로라면 수위타자 경쟁 역사의 흑역사로 남을 가능성도 농후. 기록은 영원하지만, 비난도 영원할 듯한 모양새로 일이 진행되고 있어, 30년이 다 되어가는 KBO 역사상 몇 없는 3할7푼 이상의 고타율의 수위타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은 건 졸렬택이라는 별명뿐이라 선수 본인에게도 어찌보면 불행한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정리하면, 그는 3할 7푼이라는 고타율로 일궈낸 성과[15]인 수위타자 타이틀 역사상 오점을 남기게 된 셈.
이 사건 이후 위키백과의 박용택 항목에서는 1분 단위로 페이지가 바뀌는 꼴리건과 쥐빠들 간의 진흙탕 개싸움이 진행된 끝에 2009년 9월 30일 새벽, 관리자에 의해 편집이 제한되었다.
2009년 9월 29일, LG트윈스 홈페이지의 '쌍둥이마당'에서 박용택 자신이 입장을 밝혔다. 일단 자신이 쓴 글만 보면 타석에 나서지 않은 것 자체는 분명 자신의 의지였던 듯. 그로부터 4년 뒤인 2013년 시즌 후, 페어플레이 상을 수상하면서 '페어플레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생각했다. (2009년에) '''어리석은 일을 했다'''며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홍성흔을 고의사구로 거른 게 문제인 것이지, 박용택이 출장하지 않은 것만으로는 딱히 문제가 될 여지가 없다. 리그에서 가을야구가 이미 물 건너갔거나 정규 시즌 순위를 확정 지은 등의 이유로 인해 페넌트레이스 잔여 경기의 승패가 사실상 무의미해진 팀이 개인 타이틀 획득 등을 이유로 선수의 출장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은 굳이 2009년 LG 트윈스와 박용택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며[16], 대개의 경우 상대 팀들 또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거나 오히려 좋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통 이러한 출장 조절의 대상이 되는 선수들은 비율스탯인 타율이나 평균 자책점 1위를 경쟁하는 선수들이다. 시즌 막판 1승이 아쉬운 상황에서 상대 팀이 수위타자나 평자점왕을 경쟁하는 급의 선수를 빼주면 상대 팀 팬 입장에서 당연히 좋아하면 좋아했지 싫어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엄밀히 따지면 이 사태의 가장 큰 원흉은 사실 출장하지 않았던 박용택이 아니라, 홍성흔을 거르라고 지시했던 김재박이므로 사실 박용택이 페어플레이 상을 받을 자격 운운할 문제까지는 아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박용택이 출전하지 않은 것 자체는 매 시즌 막판이 되면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며 그렇게 심각한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17] 만약 박용택이 김재박에게 홍성흔을 걸러 달라고 요청했고 김재박이 그 요구를 받아들여서 홍성흔을 전부 거른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당시 박용택은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선수였고 지금처럼 LG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상황도 아니라서 감독한테 대놓고 저런 요구를 할 수 있을만한 팀 내 입지가 아니었으며, 설령 그럴만한 입지가 된다 쳐도 저렇게 대놓고 경기운영에 간섭하는 요구를 받아주는 호구같은 감독이 있을 리도 없다. 게다가 김재박이 현대 시절부터 상대 팀 기록 방해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김재박이 비난받으면 비난받아야지 박용택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실제로 이 사건과 가장 비슷한 사례인 1984년 김영덕 감독의 이만수 밀어주기의 경우에도, 경쟁자였던 홍문종을 9연타석 고의사구로 거른 것에 대해서 김영덕 감독이 욕을 먹지 이만수가 욕먹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홍문종의 타격을 고의사구로 방해하는 것은 전적으로 감독의 영역이라서 일개 선수였던 이만수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어차피 떠날 사람이라면 선수를 위해 욕먹는 걸 감수할 수도 있지 않겠냐며 김재박을 옹호하기도 하지만, 현실은 박용택이 이 일로 인해 있는 욕 없는 욕 다 먹은 셈이니 선수를 위해서는 별로 좋은 처사는 아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동안 엘지와 롯데 팬덤은 그야말로 원수지간이 되었지만 이젠 시간도 많이 흐른 데다가 2012년 소위 올스타 동맹과 연달은 엘 꼴라시코로 인해 양팀 팬덤이 급속도로 친해진데다가 팬 서비스 등 각종 미담과 함께 인터뷰마다 그때 일을 사과하는 박용택의 태도 등으로 롯데 팬덤에서도 박용택에 대한 이미지가 급격히 좋아졌다. 실제로 디시 꼴갤에서도 박용택을 이름이 아니라 훈훈하게 용택이형(...)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이게 과연 쥐갤인지 꼴갤인지 헷갈릴 정도.

4. 2010 시즌


박종훈 감독의 취임과 함께 선수단의 새로운 주장이 되어 의욕을 불태우고자 했지만, 2009년 시즌 막판의 타율 관리로 급격히 늘어난 안티팬들의 공격으로 정신적 충격이 워낙 컸는지 정규 시즌 전반기 내내 죽을 쑤어도 개죽을 쒔다(...). 지난해 타격 부진과 심수창과의 불화로 맥을 못추다 화려하게 부활한 조인성과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 지난해의 불방망이가 일장춘몽이었던 양 타율이 1할대에 머물며 2군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이렇게 최악의 1년을 보내는가 싶었는데...
7월 들어 이택근과 함께 갑자기 월간 타율 3~4할을 왔다갔다 하는 크레이지 페이스로 몰아치기 시작하더니 결국 에누리 없이 타율 0.300로 시즌을 끝마쳤다. 그것도 규정타석까지 채웠다. 딱 1타석 초과였지만(...).
2010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했는데 박용택 본인은 LG 잔류를 원한다고 공공연히, 그리고 강력하게 밝혔다. 박용택은 LG 프랜차이즈이면서 팀 충성도가 매우 높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엘지에서 은퇴할 것이 유력하다. 본인도 LG맨으로 남겠다는 얘기를 수차례 했으며 후일 감독 욕심도 있는 듯. 구단과의 교감도 있었는지 소속팀 협상 기간에 아무 마찰없이 계약기간 4년(3+1년)에 계약금 8억(5억+3억), 연봉 3억 5천만원 등 총액 34억원에 계약했다. 각종 옵션이 수두룩한 듯한데, 박용택은 군말 없이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추후에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때 타율, 출루율, 안타, 타점, 득점, 등록일수 6가지 항목에 각각 옵션이 걸려 있었고 마이너스 옵션까지 있었다고 한다. 보장금액이 달랑 7억밖에 안되는 계약이었는데 4년 동안 옵션을 전부 달성해서 34억을 다 받았다고.

5. 2011 시즌


붙박이 지명타자로 뛸 것을 선언하고, 몸을 불리면서 20홈런 이상을 쳐주며 20-20 클럽도 가능할 거라는 기대가 많았다. 하지만 적절한 타이밍만 되면 등장하는 적시찬물(...)과 팀의 어김없는 DTD, 2011년 8월 청문회 사건까지 겹치면서 조인성과 함께 '''부진의 원흉''' 동시에 '''무조건 쫓아내야하는 놈''' 취급을 받았다. 결국 팀은 공동 6위로 666858766을 찍었다. 와중에 규정타석 3할을 기록하며 스탯관리는 LG선수답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는 홍성흔이 가져갔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6. 2012 시즌


2012년의 첫 소식으로 살을 빼서 발야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382&article_id=0000026457
지난 해와는 달리 주로 테이블 세터에 포진하며 이대형과 1, 2번 자리를 번갈아 맡고 있다. 상대팀 선발이 에이스급인 경우, 좌투수에 비교적 강한 편인 박용택이 1번을, 4~5선발 급이면 이대형이 1번을 맡는 등 상황에 따라 다른 타선 구성이다. 체중 감량 덕분인지 박용택은 다시 스피드를 회복하며 LG 발야구의 선봉장으로 나서고 있고, 5월 6일 현재 도루 6개로 공동 6위에 랭크 중. 타격은 4월 내내 2할대 중반으로 다소 이름값을 못하는 듯 했으나 5월 들어 방망이가 상승세를 보이고 있고, 특히 5월 4~6일 두산 베어스 와의 어린이날 시리즈에서는 12타수 8안타(0.667)의 맹타를 뽐내며 팀을 2승 1패 위닝 시리즈로 이끌었다. 4일 경기에서 팀은 졌지만 시즌 2호(솔로) 홈런을 기록했고, 5일)엔 5타수 4안타 2득점 1도루로 두산 수비진의 얼을 빼놓으며 LG 어린이 팬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6일에는 멀티히트(4타수 2안타 1득점)로 타율을 0.301로 끌어올렸고 2, 3회초 연달은 호수비까지 시전하였다. 용암택 폭발을 다룬 최훈카툰
5월 8일 넥센 히어로즈 와의 원정경기에 1번 중견수로 선발출장, 안타는 단 1개였지만 나머지 4타석은 전부 볼넷을 얻으며 100% 출루를 기록, 타율을 0.310으로 끌어올렸다. 게다가 도루도 2개를 추가하고 경기 내내 넥센 수비진을 발로 흔들어 놓으며 이날 LG가 8대 2 대승을 거두는 데 숨은 공신이 되었다. 경기 후 MVP 인터뷰 말미에 "오늘(어버이날) 딸 솔비가 "엄마 아빠 사랑해요" 라고 카드를 써줬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장모님께 감사드린다"라고 소감을 밝히며 '''효자택'''이란 별명이 추가되었다.
7월 1일 SK 와의 경기에서 5회 스리런을 때리면서 팀의 결승타점을 만들었다. 무서운 점은 이 홈런까지 포함해서 12시즌 7월까지 그의 타율은 3할 7리인데 득점권 타율은 무려 '''4할'''이라는 점.
그리고 최종 성적은 '''타율 0.305 (8위), 안타 152개 (2위), 76타점 (9위), 82득점 (4위), 홈런 11개 (15위, 외야수 3위), 30도루 (5위), 득점권 타율 0.416 (1위), OPS 0.813 (외야수 1위) WAR 5.86 (8위) '''로 '''리그 최고의 외야수'''로 활약하며 개인 통산 두번째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참고로 이 5.86의 WAR은 개인의 한 시즌 최대 WAR이다.[18]

7.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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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5일 두산전에서 3회말 1사 후 우월 만루 홈런을 터뜨리는 순간.

7.1. 페넌트레이스


5월 12일, 롯데전에서 팀이 1-0으로 뒤지는 가운데 자신의 시즌 첫 마수걸이 홈런을 투런 홈런으로 때려 내며 경기를 역전시킨다. (하지만 결국 경기는 재 역전패.)
5월 31일, 기아전에서 7회초 무사 주자 만루 상황에서 박경태를 상대로 통산 4호 '''만루홈런'''을 때렸다. 팀은 7회에만 9득점이라는 폭풍타격으로 11-2로 승리.
시즌 초반에는 못친다고 심하게 까였지만 용암같은 타격으로 3할대의 타율을 유지중이고 홈런 3개를 때렸는데 그중 2개가 만루 홈런이다. 시즌 중에는 주로 톱타자나 테이블세터로서의 역할을 많이 맡았다.
6월 7일, 롯데전에서는 5타수 무안타로 부진했지만 8회초 2사 만루에서 강민호의 빗맞은 안타성 타구를 슬라이딩 캐치로 잡아내는 그림같은 수비를 보여 주었다.[19] 이후 문선재의 솔로 홈런으로 쐐기를 박고 정현욱이 깔끔하게 3자범퇴로 마무리.
8월 2~4일 잠실 야구장에서 벌어진 삼성과의 시리즈 2차전에서 삼성 선발 윤성환의 글러브 색깔을 두고 항의했다. 윤성환은 분홍색 글러브를 끼고 나왔는데 글러브 색이 연해서 타석에서 공이 잘 안 보인다는 이유. 심판진은 이를 받아들여 앞으로 경기에서 해당 색상 글러브의 사용을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삼성 라이온즈 관련 커뮤니티는 상당히 분위기가 과열되는 양상. 작년까지 멀쩡하게 쓰던 글러브 색상을 왜 지금에 와서야 거슬린다고 사용을 금지하느냐, 분홍색 보호 장구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 경우도 다 금지해야 하느냐, 유니폼이 흰색인 팀은 그러면 어떻게 공과 구별하느냐 등 각종 비난 여론이 쏟아졌다. 또 이 경기의 구심은 문선재의 삼촌 되는 문승훈 주심이었는데. 어떻게 조카가 뛰는 팀에 삼촌이 구심으로 올라올 수 있느냐는 문제제기도 커뮤니티에 올라오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후에는 딱히 별 다른 구설수 같은거 없이 시즌을 잘 마무리하고 신인 시즌 이후 11년만에 포스트시즌 플레이오프에 출전하게 되었다. 정규시즌에선 125 경기에 출전해 안타 156, 타율 0.328, 홈런7, 득점 79, 타점 67, 도루 13의 준수한 성적을 올려 통산 세번째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7.2. 포스트시즌


박용택은 2013년 플레이오프 전 경기에서 선발 중견수 겸 1번타자로 출장하여 17타수 8안타 2볼넷 1도루 2타점 2득점, '''타율 .471''', '''장타율 .647''', '''출루율 .526'''를 기록하며 2013년 포스트시즌에 출장한 전 선수들 중 가장 높은 타율[20]문우람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출루율, 최준석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장타율을 기록하는 등 실로 괴물같은 활약을 했다. '''그러나'''….
10월 20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4차전, LG 트윈스가 시리즈 전적 1승 2패로 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경기에서 팀이 지면 바로 탈락인 경기였다. 경기는 양 팀 선발 투수유희관우규민의 호투로 8회초까지 2:1의 한점차 승부가 이어졌으나, 8회말에 등판한 봉중근을 상대로 선두 타자이자 3번타자인 최주환의 대타로 나온 최준석의 솔로홈런 이후, 다음 타자인 오재일의 친 펜스 상단을 맞은 타구가 '''박용택의 발에 맞아서''' 워닝트랙을 따라 하염없이 굴러갔다. 이날 박용택은 선발 중견수 겸 1번타자로 출장하여 5타수 1안타 1타점을 기록했다.
2013년 플레이오프 4차전만 보면 박용택이 2013년 플레이오프에서 죽만 쑤다가 물러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는 4차전 경기에서도 LG 트윈스의 유일한 타점을 올린 선수였고 1~3차전 모두 5할을 넘는 활화산 같은 공격력과 주루를 보여주어 LG 타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야구를 하고 있다고 해도 될 정도의 활약상을 보여주었다. 다만 마지막 마무리가 아쉬웠을 뿐. '''하지만 이 마저도 재평가를 받게된다.'''

8. 2014 시즌


4월 11일까지의 9경기에서 타율 .484으로 전체 1위, 출루율 .660으로 2위와는 1할5푼 가까이 차이가 나는 전체 1위에 오르며 굉장한 타격 페이스를 이어갔다. 이전 인터뷰에서 "1번타자인 만큼 체형도 1번에 맞게 만들었고 매일 안타 하나, 볼넷 하나씩 얻어서 나가는 것이 올 시즌의 목표다."라고 밝혔는데, 실제로 개막 이후 전 경기에서 안타, 볼넷을 한 개 이상 얻어내는 괴물같은 활약을 하였다. 여타 시즌에 비해 가장 좋아진 부문이 바로 선구안으로, 선수 생활 12년동안 한 번도 BB/K 비율이 1을 넘지 못했던 박용택이 올 시즌에는 16볼넷을 얻는 동안 삼진을 겨우 4개만 당했을 정도로 확연히 개선된 스트라이크존 판단력을 보였다.
다만 열심히 출루해서 밥상을 차렸지만 후속타자들이 영 비실한지라 득점 순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특히 2번타자들이 번트 실패나 병살타를 연발하며 득점 찬스를 살리지 못한 점이 제일 큰 문제였다. 김기태 감독은 손주인, 김용의, 7번 이병규 등 온갖 선수를 2번으로 돌려써봤지만 전부 신통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김기태 감독의 퇴진을 전후하여 타격감이 급격히 식어버렸다. 4할을 훌쩍 넘던 타율은 어느새 .333까지 하락했고, 독보적이었던 출루율 1위 자리도 정근우에게 내줬다. 손주인이 비로소 2번 자리에서 제몫을 하기 시작한 마당에 박용택의 부진은 매우 아쉬운 부분. 6월 15일 자신의 열성팬이던 달마아저씨가 별세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는데, 그 경기를 뛰고 경기가 끝나자마자 빈소가 있던 구리 윤서병원으로 가서 조문을 하고 입관식에 자신의 배트에 싸인을 해서 넣어줬다.
7월 말까지 LG 타자들 중에서는 기복 없이 가장 꾸준하게 제 몫을 해냈다. 양상문 감독 부임 후에는 주로 3번타자로 출장했으며, 2014 시즌을 1번타자로 준비한 탓인지 (거기에 나이 문제도 더하여) 3번타자로서는 장타력이 조금 아쉽지만, 3할 3푼 이상의 타율과 4할을 한참 넘는 출루율로 팀 공격에 공헌했다. 브래드 스나이더의 가세 이후로는 중견수 출장 비율이 줄어들면서 체력적인 부담을 덜었는지 타격 페이스가 좀 더 좋아졌다.
2014년 10월 7일 경기에서 맹타를 휘둘렀는데, 그 날 경기 전 딸의 운동회에서 열심히 줄다리기를 한 것이 제보되었다.
NC 다이노스와의 2014년 준플레이오프에서 4경기 모두 선발 지명타자 겸 3번타자로 출장하여 17타수 6안타 1홈런 2볼넷 3타점 5득점, 타율 .353, 장타율 .588, 출루율 .421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2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넥센 히어로즈와의 2014년 플레이오프에서 4경기 모두 선발 지명타자 겸 3번타자로 출장하여 17타수 4안타 3타점 1득점, 타율&장타율&출루율 .235로 망했는데, 특히 3차전과 4차전 도합 8타수 무안타를 기록하며 팀이 홈에서 2연패 당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하고 말았다. 팀은 시리즈 전적 1승 3패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박용택은 2014년 포스트시즌에서 34타수 10안타 1홈런 2볼넷 6타점 6득점, 타율 0.294, 장타율 0.412, 출루율 0.333를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하였고, 우선협상 마지막날인 11월 26일에 원소속 구단과 4년 50억 원(계약금 18억 원, 연봉 8억 원, 옵션 0)에 재계약하였다. 이로써 박용택은 2014 시즌 FA 선언 선수 중 원소속 구단과의 계약 기간에 계약한 첫 번째 선수가 되었다. LG팬들은 계약 소식을 듣자마자 쾌재를 불렀으며 박용택은 LG 프랜차이즈 최고 모범 사례로 평가 받았다.[21]

9.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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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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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엔 분명 1할이었는데 어느덧 '''3할5푼 타율'''을 찍고 있는거 보면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다는 표현이 맞는 듯한 페이스다.

11. 20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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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7일 넥센전에서 9회말 2사 후 좌월 역전 끝내기 2점 홈런을 터뜨린 후.

'''이번엔 왼쪽으로 날아갑니다 이 타구! 담장 밖으로!'''

'''LG의 심장 박용택! 박용택의 끝내기 투-런, 팀! 서울 LG!!! 트윈스!!!'''

'''바로 박용택입니다! 엘넥라시코를 정말 화려하게 장식하는 주중 3연전의 끝!'''

'''바로 트윈스의 심장! 그는 박용택입니다!'''[22]

- 윤성호 캐스터의 샤우팅

2017 시즌 포함 박용택의 안타 갯수는 총 '''2225개'''. 한국 프로야구 최다안타 기록 경신까지 남은 갯수는 '''93'''개. 올해 페이스대로라면 다음 시즌에 양준혁의 2318안타를 무난히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 외에도 내년에는 3년 연속 타율 0.330(홍성흔, 최형우 만이 유이하게 달성한 기록이다.), 10년 연속 타율 3할(달성 시 '''KBO 최초'''), 자신이 만들어낸 기록을 넘어 '''7년 연속 150안타 기록''', 1200득점(그 위로는 양준혁과 이승엽이 있다.) 등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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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0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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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201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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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계약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박용택은 나이도 문제거니와 사실상 수비가 더 이상 안 되고 지명타자로서의 폭발력도 없을 뿐더러 지난 시즌 중후반 팀의 극적인 추락으로 인해 주장 자격ㆍ리더십 부재 논란이 어느 때보다 더 크게 부각되었던 터여서 박용택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날이 갈수록 쌓이고 있는 상황에서 구단이 그에게 4년 계약같은 큰 딜을 제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설령 1월안에 빠르게 FA 계약을 마친다 해도 전망은 그리 좋지만은 않은 것이, 올해로 박용택이 불혹의 나이를 맞았고, 지난 시즌 중반부터 주장 자격ㆍ리더십 부재 논란이 어느 때보다 더 크게 불거지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날이 갈수록 쌓이고 있는 상황인 만큼, 이제는 박용택이 더이상 자신의 자리와 개인 성적ㆍ기록 등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가 팀을 생각하는 플레이와 행동, 그리고 마인드를 중시해야 할 필요가 있고, 더불어 그러한 자세와 태도를 갖고 자신의 선수 생활 말기(末期)를 준비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변의 목소리가 높은 상황이다.
1월 18일 LG와의 계약에 합의했으며, 1월 20일 2년 25억[23]에 싸인을 했다.[24]

14. 2020 시즌


FA 마지막 해. 이 시즌이 끝나면 은퇴하겠다고 예고했다. LG 트윈스도 창단 30주년이고 본인도 우승을 노린다고 했지만 4,5선발조차 불확실한 팀 상황에 다른 팀들도 워낙 만만하지는 않아서...
은퇴 시즌이지만 10월 중순 현재 .307을 기록 중이며, 시즌 중반까지는 영양가 떨어지는 스탯관리성 안타들과 정작 중요한 상황에서 베테랑답지 않게 맥없이 범타로 물러나는 등 실망을 주었으나 시즌 후반 2-5위 순위싸움이 본격화되면서 정말 중요한 승부처에서 대타 안타를 계속 기록해주며, 타격에서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다. 마침내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2,500안타라는 대 기록을 세웠으며, 계속 승부처마다 대타로 출장하며 조용히 이 기록을 하나 하나 늘려가고 있다. 막판 순위싸움 결과에 따라 정말 본인의 은퇴 시즌에 우승까지도 노려볼 수도 있는 상황이며, 이렇게 되면 본인이 활동한 19시즌 중 딱 첫 시즌과 마지막 시즌에 코리안시리즈에 진출하면서 드라마같이 커리어를 마감할 수도 있겠다. 준 플레이오프에서 승부처마다 대타로 나와 팀이 그의 안타를 가장 필요로 할때 찬물을 끼얹으며 두산에 0:2로 패배했다.
이승엽의 마지막 경기에는 홈런 두방이 나왔고 양준혁은 1루까지 전력질주를 했으며, 박용택은 유광잠바를 입은 후배들에게 찬물을 끼얹으며 마무리 했다. 가장 자신들 다운 모습으로 야구인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할 수 있을것이다.
은퇴 투어는 논란 끝에 본인이 끝내 고사했지만, KIA를 시작으로 키움을 제외한 모든 팀의 선수단이 꽃다발 전달과 단체사진 촬영 등 소소한 고별 행사를 열어줬다. 사실 LG 팬들도 바란 건 이 정도였지 더 큰걸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으로.

[1] 2006~8년까지 '''심한 투고타저'''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좋은 스탯이긴 했지만 팬들에게는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음에도 그 성적에만 안주하고 발전이 없다며 까이곤 했다. 이때까진 삼진을 많이 먹는 경향을 보였다.[2] 그리고 LG 트윈스에서 박용택 이후에는 데뷔 시즌부터 주전으로 활약한 타자는 '''없다.'''[3] '''이때까진 몰랐다. 이 해가 그의 처음 한국시리즈이자 마지막 한국시리즈일줄은'''[4] 오른쪽 사진 가장 오른쪽이 박용택이다. 옆에 앉은 사람은 박경수.[5] 07년 도루왕과 골든글러브를 받으면서 그야말로 인기를 누렸다.[6] 정확하게 말하자면 1군 데뷔는 2009년 8월 이후 추가 엔트리 등록 때 데뷔 했고, 본격 적인 풀타임 시즌인 2010년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7] 정규시즌 끝나고 11월 쯤. 다음 해부터 뛸 신인선수도 범주에 포함되며, 이때는 아직 대학재학 시절이었다.[8] 내용은 아픈 이유를 말한 것으로 추정.[9] 엘지 트윈스의 김성근 후임은 이광환 감독이다. 이광환이 김성근과 야구관은 완전히 다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친한 편이고 트윈스의 94시즌 우승 당시 감독이기도 했기 때문에 노리타와 엘지팬들의 비판이 덜하지만 그 또한 2년간 박용택을 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10] 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선동열은 어깨 건초염을 치료한다고 열을 빨아내려 어깨에 말고기를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치료시기를 놓치고 염증이 더 심해져서 마무리로 전환.[11] 우익수는 어깨가 상당히 강해야 하는 수비 포지션이다.[12] 김용달이 주장하는 타격폼이 본인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코치의 지시를 무시하고 자기 소신대로 치니까 그게 몸에 맞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13] 그 전까지만 해도 젊은 층에서는 사용빈도가 거의 없다시피하던 단어였다. 격식있는 글 또는 문학작품에서나 간간히 볼 수 있었던 단어였는데 이 사건 하나로 인해 인터넷 유행어 수준으로 널리 보급됐다.[14] 꽤나 유명한 테드 윌리엄스의 20세기 마지막 4할 타율 도전 일화가 대표적이다.[15] 그 이전의 0.370이상의 타자는 감독겸 선수였던 백인천(1982, 단 시즌의 1팀 당 경기수가 80경기였다. 뭐 경기수 늘어도 잘쳤겠지만. 이 외에도 대한민국의 유일한 4할 타자다.), 장효조(1985, 1987) 이종범(1994), 마해영(1999)이 있다. 다만 1999년이 한국프로야구사상 역대 최악의 타고투저시대라는 것과 1982년, 1994년이라는 세월을 생각한다면... 2009년 이후로 .370 이상을 기록한 선수도 서건창(2014), 에릭 테임즈(2015), 최형우(2016), 김선빈(2017)까지 단 4명 밖에 되지 않는다.[16] 역으로 선수가 개인 타이틀을 위해 감독에게 출전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예로 2010년의 김주찬. 당시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김주찬을 포스트시즌을 대비해 부산으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김주찬이 개인 타이틀을 위해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목동으로 갔다. 하지만 해당 경기가 우천취소가 되는 바람에(...) 이대형에게 도루왕을 내준다.[17] 이 사건에서 사실 박용택의 출전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논점이다. 왜냐하면 박용택이 출전을 하든 말든 그것만으로는 홍성흔의 타격 결과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논점은 '홍성흔의 타격을 고의적으로 방해한 주체가 누구인가'이며, 이는 당연히 그냥 출전하지 않고 벤치에 있었던 박용택이 아니라 고의사구를 지시한 김재박이다.[18] 아이러니하게도 이 해 박용택의 타출장은 그의 통산 타출장보다 미묘하게 낮다. 이 스탯으로 이렇게 높은 WAR을 쌓은 이유는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그의 주루/도루스탯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 시즌이 2010년대 최악의 투고타저 시즌이었기 때문이다.[19] 이 타구를 놓쳤다면 동점 또는 역전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20] 그나마 마지막 경기에서 5타수 1안타를 치는 바람에 타율이 5할 밑으로 내려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안타 하나가 '''동점 적시 2루타'''였다.[21] 박용택이 사직구장에서 잘해서 '사직택'이라는 별명도 있고 탈쥐효과 버프로 롯데오면 잘하지 않을까라는 일부 롯데팬들의 기대도 있었다. 실제로 박용택은 후에 인터뷰에서 '바다가 보이는 팀'에서 사전접촉을 했다고 밝혔다.[22] 이날 넥센전은 LG팬이라면 누구라도 기억할 17시즌에서 손에꼽는 경기였다.[23] 계약금 8억, 연봉 8억, 옵션 1억[24] 이미 금액과 조건은 지난해 합의되었으나 은퇴 후 조건을 맞추느라 시간이 걸렸고 거기에 둘 다 느긋한 태도(어차피 남을 테니)로 일관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