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역사
1. 건국
1.1.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의 동향
동북아시아의 한 축으로 형성하고있던 고구려가 당과 신라의 연합공격으로 668년 멸망한 뒤 고구려 유민들은 당과 신라, 일본, 돌궐 등으로 흩어지게 된다. 먼저 당은 평양성을 깨뜨리고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의 항복을 받은 후 고구려 영토에 대한 지배를 위해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전국을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편제하여 중국인 관리를 파견하고 고구려인 중에서도 고구려 정보에 도움을 준 유공자들에게 도독, 자사, 현령 등으로 지역을 통치하게 하였다. 하지만 당의 의도와 달리 초창기부터 안동도호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669년 보장왕의 외손인 안승(安勝)이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로 넘어갔고 요동(遼東) 지역에 있던 주요성들 가운데 신성(新城), 요동성, 안시성(安市城) 등 상당수도 항복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당은 고구려민들의 저항 의지를 꺾고 부흥 운동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지배층 및 부유하고 건강한 자들을 중심으로 2만 8천여 호를 뽑아 중국 내지로 옮겼다. 그러나 이런 강압책은 오히려 반발을 불러왔고 검모잠(劍牟岑)이 안승을 왕으로 옹립한 뒤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부흥 운동은 요동으로 번져 안시성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강제 사민의 여파로 불만에 가득 차 있던 고구려유민들은 당에 강력하게 저항한 것이다. 하지만 부흥 운동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고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나는 등 671년 안시성이 함락되며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이 무렵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운동은 신라의 대당 투쟁과 결합되었는데 연달아 당군에 패하며 고구려의 부흥 운동은 잦아들게 되었다.
당은 유민들을 안무하기 위해 장안으로 끌고 갔던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왕에 봉하고 요동으로 돌려보냈고 당인의 직접 통치 대신 고구려인을 전면에 내세워 고구려 유민을 간접통치하는 방식을 취해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가 겨우 안정되는 듯하였지만 연남생이 679년 정월 29일 안동부관사에서 병사했고, 보장왕이 680년 당의 의도와 달리 말갈족과 공모해 복국(濮國)을 도모하는 등 고구려 유민 통치에 많은 애를 먹고 있었다.
한편 안동지역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당의 지배를 거부하고 신라, 돌궐, 일본, 동만주 일대로 이탈해 갔다. 이 때문에 안동 근처에는 가난한 자만이 남고 고구려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평양과 요동 지역 일대는 허갈한 지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677년 요동성에서 신성으로 옮겨진 안동도호부 역시 696년 거란인 이진충의 난을 겪으면서 돌밭(石田)으로 변해 버렸다. 안동도호부는 698년 안동도독부로 격을 낮추었고 704년 다시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으나 고구려 옛 땅에 대한 당의 지배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변화를 거듭했으며 시종 온전하고 확고한 통치를 실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발해가 고구려 멸망 후 3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변방 지역인 동만주 지역에 비로소 건국된 것을 보면 고구려 핵심 지배 세력과 중심 지역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억압책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고구려의 부흥을 막기 위해 당이 강제 이주 정책을 실시한 덕분이었다. 2만 8천여 호가 중국 내지로 강제이동 당했을 때 이들은 황무지로 옮겼는데 고구려인들 특유의 강인한 생활력을 바탕으로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일궈 냈다. 훗날 당 조정에서는 가장 훌륭한 복속민 정책으로 이를 거론하기도 하였는데 복국 도모를 불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빈 터를 채우고 지역 개발도 하게 되었음은 당으로서 이중의 효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민의 강인한 정신력과 우수한 체력 등을 바탕으로 이룩된 일이지만, 결국 고구려 유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다. 고구려에서 멀리 떨어진 당의 변경 각지로 흩어진 유민들은 고구려 부흥은 꿈도 꾸지 못한채 살아남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었고 이들은 3세대 4세대로 내려가면서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멸망 후 신라로 귀부한 고구려 유민도 많았다.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저(익산)에 안치하고 670년 8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했다. 금마저의 고구려국은 671년부터 682년까지 8차례에 거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독자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려는 강한 자주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 영토 안에 건국된 고구려이기 때문에 자주권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신라는 고구려국의 사신이 일본으로 갈 때 따라가 고구려국의 외교를 감시&감독했다. 이조차 682년 6월을 끝으로 금마저 고구려국의 대일본 외교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못했다.
674년 9월 신라는 안승을 보덕국왕에 봉했다. 이는 고려국왕이란 칭호 자체를 부정하여 고구려에 대한 계승 의식을 제거하고 신라에 복속된 소국으로 격하시키려는 조치였다. 뿐만아니라 680년 3월 안승과 신라 왕실의 여인을 혼인시켰으며 안승에게 소판이라는 관등과 왕성(王城)인 김씨 성을 하사하고 수도인 경주로 옮겼다. 안승을 독립국의 왕이 아닌 신라 왕의 신하로 만드는 조치들이었다. 684년 대문의 반란을 계기로 보덕국은 완전히 해체했다.
발해건국의 결정적인 원인은 고구려 부흥의지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 유민들은 강제로 당으로 옮겨지기도 하고 신라로 가기도 하였으며 돌궐, 몽골고원으로 또는 요동으로, 동만주나 일본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1] 결과적으로 패전국이자 멸망하게 된 고구려의 유민들은 여러 지역으로 뿔뿔히 흩어지긴 하였으나 당시 고구려인들은 농경생활을 위주로 하였기에 자신이 살던 지역을 벗어나기에는 힘들었으며 때문에 그 지역에 남아있는 고구려민들이 많았다. 또한 요동 지역의 유민들 특히 영주성방고구려로 기록된 고구려의 군사조직과 고구려 계승의지는 발해의 건국에 큰 버팀목이 되었다.
1.2. 7세기 후반 동북아시아 정세
발해 건국 이전 동북아시아 지역의 불안정한 국제정세도 발해 건국의 요인 중 하나이다. 라싸 지역 중심으로 성장한 토번은 당과의 대비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당에게 가장 위협이 되던 국가 중 하나였고, 쿠틀룩과 백초르의 봉기가 성공하여 당으로 부터 독립한 돌궐도 여러 번 당을 공격하면서 많은 위협을 주었다, 이러한 요인으로 당은 발해의 건국을 견제하기보다는 토번과 돌궐에 대한 방어에 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란인 이진충과 손만영이 일으킨 이진충의 난으로 인해 영주에 잡혀있었던 걸걸중상, 대조영, 걸사비우 등이 영주를 탈출할 수 있게 되어 발해 건국의 환경을 긍정적으로 만들었다. 그 당시 당은 측천무후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내치에 전념하여 당 내부적인 안정을 도모하였으나, 외부팽창이나 이민족 견제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여러 국제정세적인 요인들과 고구려 유민들의 고구려 부흥 의지가 있었기에 발해 건국이 가능하였다. [2]
1.3. 대조영 집단의 영주 탈출
그 후 676년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여 옛 고구려 남부는 신라에 편입됐고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는 요동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요동 지방의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천여 가호를 중원 대륙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과 걸걸중상(대중상) 부자도 고구려 유력층으로 분류되어 영주(榮州)로 끌려가게 되었다[3] .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운영한 전략 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이진충의 난이라고 한다.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장군 출신인 걸걸중상(대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영주에서 고구려 부흥 운동을 위해 만든 영주성방 고구려라는 군사 조직의 지원과 함께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오며 요동의 고구려 유민까지 규합해서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도중 걸걸중상이 죽으면서 그가 이끌던 무리를 대조영이 인수받았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이해고의 당나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 기슭에 진국(震國 또는 振國)을 세웠다. 이진충의 난이 발해의 건국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건 사실적이지만 국제 정세와 역사적인 흐름 그리고 고구려의 부흥 운동을 봤을 때 언제든지 발해 건국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요인은 있었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며, 요서 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고, 영주의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돌궐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는 형식상 관직을 수여했고 돌궐과 일본, 신라 등도 이후 발해를 자주국으로 인정하게 된다.
1.4. 국호
나라 이름은 처음에는 진국(震國)이라고 했지만 713년 당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한 이래 발해라는 이름이 동아시아 세계에 통용되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발해라는 명칭에 대해 발해만에 대한 진출 의지가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스스로는 고려(高麗)라고 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수록된 문왕의 국서에서 자신을 '''고려 왕'''으로 칭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자칭이니 타칭이니 말이 많은데, 일본의 발해관이 어쩌고 하는 문제를 제껴 두고 그냥 문면만 보면 명백한 자칭이다.
원문이 이러한데, 차라리 원문이 조작되었다고 우긴다면 모를까, 이걸 문왕 대흠무 스스로 고려국왕이라 칭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상주하기를, "고려국왕 대흠무가 말합니다..."
奏曰: "高麗國王大欽茂言..."
그럼에도 "일본 측에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불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식으로 의심하는 목소리가 종종 들리는 것은, 발해가 당·신라 등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고려라는 국명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그것을 뭔가 '돌출적인' 것으로 보는 정서에 기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장 발해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만 해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復高麗之舊居]"고 하여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천명한 바 있고, 태자가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책봉받는 등 그러한 계승성을 초기부터 당에게 사실상 공인받았기도 했던만큼, 이를 굳이 조작이라고 볼 만한 타당성은 크지 않다.
국호는 진(震). 발해라는 의견이 있는데 발해란 명칭은 당이 진에게 내린 이름으로, 원래 이름은 진이 맞다. 진이라는 국호는 《신당서》의 내용에 의거해 측천무후가 속말말갈인 사리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회유하기 위해 각각 내린 진국공(震國公)과 허국공(許國公)이라는 작위에서 유래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대조영 세력이 먼저 자칭한 이후 당이 나중에 이걸 인정한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그 후 당에서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게 되어 이 발해를 이후에도 국명으로 사용하게 된다. 여기서 발해라는 명칭의 유래는 지금도 발해(渤海)라고 부르는 바다 보하이 해를 말한다. 조공 - 책봉 체제에서 국제사회에서 발해 '''국왕'''으로 승격한 것은 762년의 일이다. 그 전에는 대조영이 진국 대공, 발해 군왕, 신라 대아찬 등 당대 주변 국가들로부터 여러 가지의 관작을 받게 되는데, 모두 한 나라의 국왕보다는 격이 낮은 관작들이다.
확실히 발해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 유민이라는 자각이 있었으며 발해라는 이름만큼 고려라는 이름도 많이 썼다. 지배층이 옛 고구려의 잔존 세력이고, 처음에 진국을 국명으로 표방한 것이며, 일본국에 발해 국왕이 스스로를 고려 국왕으로 칭한 것을 근거로 발해국이 고구려인의 귀족들과 다종의 말갈을 평민 계층으로 둔 후고구려의 성격을 갖는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위치 논쟁 중인 남경을 제외한 수도들은 전부 고구려의 영역인 동시에 말갈계의 영역이다. 상경 유물들이 공개되어야 하는데, 중국이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폐쇄적인 발굴 작업을 하는 이상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의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주몽이 세운 나라가 끝까지 고구려라고 칭했고, 고려는 왕건이 나라를 세우면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고구려 스스로가 장수왕 즈음부터 정식으로 고려를 칭했다는 설이 상당히 인정 받고 있다. 그 때부터 중국 측 기록에 '고구려'가 사라지고 '고려'로만 기재되기 시작했고, 장수왕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중원고구려비에도 국호가 분명히 '고려'로 기재돼 있다. 당장 궁예가 나라를 처음 세웠을 때 이름을 흔히 '후고구려'라 하지만 실제로는 '고려'라고 했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한 것은 사실 원상 복구인 셈. 아무튼 '고려'는 왕건이 왕이 될 때 느닷없이 처음 등장한 이름이 아니다. 왕건의 나라를 고려, 궁예의 나라를 후고구려, 고주몽이 세운 나라를 고구려라고 구분해서 부르는 관습은 고려 시대 중에 확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내용은 태봉 참고.
사실 발해는 고구려 기피증에 걸린 당나라와 불편해지지 않기 위해 대 중국 외교용 국호이고 실제 내부 국호는 고려라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당나라만 발해라 부른 것도 아니고 고려의 용례에 비해 발해의 용례가 너무 많다는 의견도 있다.[4]
2. 영토 확장
1대 '''고왕(대조영)'''은 최초 근거지의 주변 지역을 장악해 나갔는데,구체적인 세력 범위는 알 수는 없으나 일단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및 북만주에 대한 영토는 확실히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건국 초기 신라는 대조영에게 대아찬 관등을 수여하며 우호 관계를 다지기도 했다. 이 내용은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5] 에만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꽤 있다. 이 대아찬이라는 직위도 재미있는 것이, 6두품의 승진 상한인 6관등 아찬을 넘어서는 '''진골'''의 품계라는 점이다. 고구려 부흥 운동 시의 고구려 왕족에게 진골의 골품을 준 것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하지만 발해가 문왕 때부터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대내외에 표방하면서 신라와 관계가 악화된 것으로 파악되며, 특히 721년에 신라가 강릉 방면에 장성을 쌓은 일은 북쪽의 발해를 경계한 행동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2대 '''무왕(대무예)''' 때는 흑수말갈의 귀속 문제를 두고 당과 갈등이 심화되고 이로 인해 발해 국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온건론자인 발해왕의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긴장이 고조되다가 결국 당나라를 침공하는 데 이른다. 무왕은 산동의 제1 교역항 등주(登州)에 장문휴(張文休) 제독을 보내 선제 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또 무왕은 해(奚)족과 연합해 요서 일대를 공격하여 마도산 전투에서 이겼지만 당군의 방비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회군했다.
이에 당나라는 신라와 함께 연합으로 발해를 공격했으나 격퇴당했다. 이 때 신라군은 겨울에 북정(北征)을 감행한 탓에 교전은 하지 못하고 퇴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애초에 발해는 신라 방면으로 본격적으로 확장 의지를 보인적이 없기 때문에, 이전까지 당나라와 대립하다 발해의 등장으로 겨우 화해한 신라 입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공격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한편 신라도 발해에 그다지 공격할 마음이 없었다고 보인다. 발해와 급격히 화해하고 교류하게 된것이 그 이유다. 이렇게 당나라와 접전을 벌이는 한편으로 이 시기부터 발해의 당나라식 주부현제 등 명칭에 대한 수입이 본격화되었고 발해 내에 지방 지역의 통치도 일원적인 주부현제로 편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3. 혼란과 극복
3대 '''문왕(대흠무)''' 사후 약 30년 간 4대 국왕인 폐왕부터 9대 국왕인 간왕까지 왕이 6번 바뀌는 혼란기가 지속되다가 10대 국왕인 '''선왕(대인수)'''이 즉위함에 따라 혼란기가 진정되었다. 선왕은 고왕 대조영이 아닌 그의 동생 대야발의 후손이다.
4. 전성기 (해동성국)
선왕은 정복 사업과 내정에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당과 화친을 체결해 그의 치세동안 발해는 중원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렸다. 흑수말갈이 발해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으며, 학자에 따라서는 요동 지방을 실효 지배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 요사 》에 "당 원화(806-820) 중에 발해 왕 대인수가 남쪽으로 신라를 정벌했다[唐元和中, 渤海王大仁秀南定新羅.]"는 기록을 보건대, 발해가 신라의 북쪽 경계 바로 위까지의 영역을 확보하여 대동강을 경계로 양국이 대치한 것으로 보인다.[6]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이 시기에 발해의 침략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는데다가, 《요사》가 워낙 두찬(杜撰)으로 악명이 높은 사서라 남정신라 운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어떤 식으로든 발해의 군사적 행동이 있었고, 그 결과가 발해의 영향력이 신라 북변에까지 미치게 된 것일 가능성은 크다. 정확히 발해 선왕의 시기인 신라 헌덕왕 18년(826)에, 대동강변에 장성을 쌓은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5경 15부 62주의 행정 체제도 선왕 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질적인 행정 구역을 의미하는 주현의 정확한 규모는 전해지지 않으나 속현 이름이 명시된 일부 사례로 미루어 보건대 62주 아래에 약 200개 ~ 250여개의 현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5. 쇠퇴
840년대부터 국력이 다시금 쇠락하기 시작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선왕 이후는 발해 전기보다 더더욱 기록이 부족해지기 때문에 발해 내부가 어땠는지를 거의 알기 힘든 실정이다.
삼국사기에서는 886년 신라 헌강왕 재위기간에, 신라 북부 북진(北鎭)에서 보고하기를 “적국 사람이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다.”고 말하면서 그 나무 조각을 가져다 바쳤다. 거기에는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 사람들이 모두 신라국과 화친하고자 한다.”는 열다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 보로국과 흑수국은 지금의 북한 안변군 지역에 살던 여진 계통 부락으로 추정된다. 이는 발해가 멸망하기 40여년 전인 9세기 후반에 발해가 신라와 인접한 한반도 북부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말갈-여진 세력이 거의 독립국처럼 신라와 외교를 시도하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910년대에는 한때 궁예의 부하였다가 이탈해 동북방 골암성에 독자적 세력을 구축한 호족 윤선이 과거 통일신라의 동북 변방인 골암성에 자리잡고 흑수말갈을 휘하로 끌어들여 태봉의 변방을 초략했다고 한다. 사실상 발해의 남부 통제력이 이 때쯤이면 거의 무너진 듯. 함경도 지역의 이 말갈족들은 이후 여진족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고려시대에도 고려에 저항하고 살다가 조선시대에 완전히 한반도로 편입된다.
9세기 말에는 신라와 국격을 둔 논쟁이 벌어졌는데 빈공과 합격자 순위(등제서열 사건), 사신의 대우(쟁장사건)에 있어 발해와 신라간 경쟁이 일어났다.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는 이 때 당나라가 신라 사신이 발해 사신보다 상석에 서도록 조치한 것을 신라 측에서 사례하기 위해 보낸 표이다. 한편 선왕 때 발해의 국력이 워낙 융성했기 때문이 상기한 사건이 선왕 때 일어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 사건들은 선왕 재위기보다 훨씬 뒤인 9세기 말엽에 있었던 일이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은 신라에서도 막 후삼국시대가 개막되던 시점.
6. 멸망
발해는 9세기 들어 당(황소의 대반란, 874년 ~ 884년)과 신라(후삼국 분열)의 몰락 분위기에서도 큰 쇠퇴 징후를 보이지 않지만[7] 15대 왕(인선)을 끝으로 갑작스럽게 파탄난다. 단 15일만에 요(遼)나라 요 태조 2번째 황자 야율요골(耶律堯骨)이 이끄는 기병대에 상경(上京)이 함락된 것. 다음은 《요사》의 발해 멸망 관련 부분이다.
"병인일… 포위했다" "기사일… 항복"에 주목. 0병인, 1정묘, 2무진, 3기사, '''딱 나흘 걸렸다.'''-12월 을해일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이른바 두 일 중에 하나는 마쳤지만, 발해와 대대로 원수 진 것만은 설욕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안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병력을 일으켜서 발해를 대대적으로 친정했다. 황후, 황태자, 대원수 야율요골이 모두 따랐다.
- 윤월 임진일에 목엽산(木葉山)에서 제사를 올렸다.
- 임인일에 오산(烏山)에서 푸른 소와 흰 말을 잡아서 천지에 제사를 올렸다.
- 기유일에 살갈산(撒葛山)에 머물렀는데 귀전(鬼箭)을 쏘았다
- 정사일에 상령(商嶺)에 머물렀는데 부여부를 포위했다.
- 천현(天顯) 원년(926년) 봄 정월 기미일에 흰 기운이 해를 꿰뚫었다.
- 경신일에 부여성을 손에 넣고 그곳의 수비하던 장수를 죽였다.
- '''병인일'''에 석은(惕隱) 안단(安端), 전북부(前北府) 재상 소아고지(蕭阿古只) 등에게 명령을 내려서 1만 기를 선봉으로 삼았는데, 대인선 측 늙은 재상
老相[
의 병력을 만나서 깨뜨렸다. 황태자, 대원수 야율요골(耶律堯骨), 남부(南府) 재상 야율소(耶律蕭), 북원(北院) 이리근(夷離蓳) 야율사녈적(耶律斜涅赤), 남원(南院) 이리근(夷離蓳) 야율질리(耶律迭裏)가 '''그날 밤에 홀한성을 포위했다.''']
- '''기사일'''에 '''인선이 항복을 청했다.'''
- 경오일에 홀한성(忽汗城) 남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 신미일에 대인선(大諲譔)이 흰 옷을 입은 채 새끼줄로 몸을 묶고 흰 양을 끌며 관리 300여 명을 데리고 나와서 항복했다. 황제는 두터운 예로 대하고 그들을 풀어줬다.
- 갑술일에 발해의 군현에 조유를 내렸다.
- 병자일에 근시(近侍) 강말달(康末怛) 등 13명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서 무기들을 수색하도록 했는데, 수비병에게 해를 입었다.
- 정축일에 대인선이 다시 모반해서 그 성을 공격해서 깨뜨렸다. 성 안에 행차했다. 대인선이 말 앞에서 죄를 청했다. 명령을 내려서 경비병들로 하여금 대인선 및 그 족속이 나가도록 했다. 제사를 올려서 천지에 알렸다. 다시 군중으로 돌아왔다.
- 2월 경인일에 안변(安邊), 막힐(鄚頡), 남해(南海), 정리(定理) 등의 부 및 여러 도의 절도사, 자사들이 내조하자, 노고를 위로하고 돌려 보냈다. 얻은 재물을 장병들에게 내렸다.
- 임진일에 푸른 소와 흰 말을 잡아서 천지에 제사를 올렸다. 대사령을 내리고, 천현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사신을 보내 발해 평정한 일을 당에 알렸다.
- 갑오일에 홀한성에 행차해서 창고의 물건을 검열하고 따른 신하들에게 차등을 두어 내렸다. 해(奚)의 부장 발로은(勃魯恩), 왕욱(王郁) 및 회홀(回鶻), 신라, 토번(吐蕃), 항(項), 실위(室韋), 사타(沙陀), 오고(烏古) 등이 정벌에 따라서 공이 있었기에, 후한 상을 내렸다.[8]
- 병오일에 발해국을 동단(東丹)으로, 홀한성을 천복(天福)으로 개칭했다.
'''『遼史』卷2「本紀」第二 ‘太祖’下'''
발해의 허망한 멸망은 한국 고대 사학계 최대의 미스터리로 꼽힌다. 발해에 대한 기록 자체가 별로 남아있지 않기에 강성했던 발해가 왜 그리도 허망하게 망했는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그 큰 나라가 단지 보름만에 멸망한 것을 두고 불가사의라 여겼는데, 일단 중앙 귀족층의 분열과 요의 기동성을 이용한 수도 공격을 이유로 삼았으나 사료 부족 등의 문제와 겹쳐 명확한 규명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멸망하기 수 년 전에도 빼앗겼던 요동 지방을 되찾는 등의 모습으로 보아 귀족층의 분열보다는 '''갑작스러운 수도 공격에 멸망했다는 이론'''에 더 무게가 실리는 편이다.[9]
국가 존속 기간이 228년으로, 한국사의 주요 국가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존속 기간이 짧은 편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왕조 평균 존속 기간이 대체로 긴 편이었던 한국사의 왕조치고는 짧은 것.[10]
6.1. 멸망 원인
6.1.1. 수도 급습설
가장 유력한 설 중 하나로 제1 방어선으로서 발해의 전력이 집중된 요동 전선을 선회하여 발해 중심부로 가는 길목에 있는 '''부여부'''를 급습, 그곳을 함락시킨 다음 발해의 정규군이 전력을 정비하기 전에 상경용천부로 진격하는 속전속결 방식으로 그 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이론이다. 개전부터 대인선의 항복까지 소요된 기간을 발해 멸망 기간과 비교해 보면 제일 그럴듯한 이론이다. 가설이나마 사료에 직접적으로 나타난 건 이것밖에 없다.
특히 고대 동아시아의 유목민족들의 전쟁방식은 국경에서 곧바로 수도까지 진격하는 형태로 벌어졌기 때문에 방어 측의 병력 집결이 늦으면 그대로 끝나는 일이 왕왕 있었다. 애초에 현대전에서도 전격전 등 기동력을 바탕으로 한 우회, 타격 전략 등이 유효한데 통신과 교통이 열악한 전근대시기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비단 발해 뿐만 아니라 한국사에는 이러한 전략 전술이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백제 멸망 때의 나당연합군은 수도인 사비로 곧바로 진격하여 포위, 항복을 받아내었고 여요전쟁 때에는 아예 발해 멸망의 주체였던 거란이 다시 한 번 고려에게 써먹는다. 하지만 한 번에 당한 발해와는 달리 고려는 이미 2차 침입에서 이러한 전술을 겪었기에 청야 전술을 비롯한 여러 대책을 사용해 거란군을 완벽히 막아냈고 오히려 퇴각하려는 거란군을 추격해 귀주대첩으로 궤멸시킨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그대로 밀고 들어와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인조에게 항복을 받아낸다.
발해가 12일만에 수도를 포위 당하고 3일만에 항복한 것이 불가사의 해보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을 면밀히 따져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 시간이다.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 군대는 660년 7월 9일 기벌포에 상륙하여 신라군과 합류, '''3일만인''' 7월 12일에 백제 수도 사비성을 포위하여 백제군 주력을 섬멸시켰으며, 여요전쟁 당시에는 고려측이 방어전선을 구축하여 1018년 12월 10일, 흥화진에서 고려군과 대규모 회전을 벌였음에도 보름 남짓한 이듬해 1월 3일에 '''개경까지 도달한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아예 전쟁 발발 '''8일 만에''' 수도 한성을 내준다.
즉, 시대를 막론하고 압도적인 기동성을 활용한 속도전 및 수도 공략 전술은 애용되었고 특히 군사력 자체가 기병 편제 위주였던 유목민족들은 이를 더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발해가 여요전쟁 당시의 고려나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과 차이가 있었다면 이 공격을 막지 못한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고려는 청야전술에 성공하여 이 전술의 최대 약점인 '''주력을 섬멸하지 않고 왔기에 적국 한가운데 깊숙히 갇힌 상황'''을 역으로 이용하여 귀주대첩으로 궤멸시킨 것이고 조선은 발해와 달리 남한산성까지는 도망가는데 성공했으므로 조금 더 버틴 것 뿐이었다. 다만, 청나라는 조선을 명나라 공략을 앞두고 후방을 안전하게 하고 여러 부수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항복을 받아낸 것에 그친 것이고 요나라와 발해는 위에서 요사를 통해 언급했다시피 요나라는 발해라면 이를 갈 정도로 철천지 원수 취급했기 때문에 항복과 함께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다.
이 가설을 뒷받침 하는 요소는 또 있다. 이러한 속도전 전략은 중앙 정부에게 이른 시간에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대신 대다수 야전군이나 지방 세력이 그대로 남아 점령국에 저항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부흥 운동''' 또한 자주 벌어지게 되는 문제점이 있는데, 실제로 발해의 유민들은 멸망 후 200년에 가까운 장구한 세월 동안 이른바 발해부흥운동을 펼쳐 나갔다. 패망 후 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고구려와 백제도 이와 비슷하다.
6.1.2. 지배층의 내분설
발해 왕들의 기록이 적기 때문에 추정에 그칠 따름이지만 왕실을 포함한 발해 조정의 내분도 멸망 원인으로 충분히 생각해봄 직하다. 발해 이전에 거의 나라가 망한다기보다는 뒤숭숭한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요나라 공격 한참 전부터 고위층을 비롯한 망명 행렬이 이어지고 있음이 나타나는데, 이를 요동 전역이 장기간 유지된 후유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1]
앞서 언급한 수도 급습설과 연계시키면 더 완벽한 설이 완성된다. 지배층 사이의 내분으로 인해 국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지거나 방비가 가장 튼튼할 수도의 방비마저 상당 부분 저하된 와중에 급습을 당해 지나치게 빨리 무너졌다는 식.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라의 지배층이 내분하여 사회 혼란기에 빠지면 국가 방비가 부실해지고 적의 침략에 당하기 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사례를 보자면, 중국사의 서진은 팔왕의 난으로 만신창이가 된 탓에 흉노가 쳐들어와도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하다가 지도층이 싸그리 몰살당한 역사가 있다. 또한 조선의 병자호란도 그 성공 배경 중 하나에는 이전에 있었던 이괄의 난 때문에 발생한 조선군의 약화가 있었으며 여기서 살아남은 이괄의 휘하 장수들이 청나라에게 주요 군사기밀들을 죄다 발설해버려서 쉽게 침공해올 수 있었다.
6.1.3. 말갈과의 대립설
발해가 고구려 유민 + 말갈 + 기타 민족들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로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나온 설.
발해 말기 이들이 들고 일어나 안그래도 혼란한 발해 내부의 혼란을 가중시켜 최종적으로 발해 멸망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는 설이다. 말갈이 끝내 발해에 융합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설. 다만 이 말갈을 국가 내의 하부층으로 인식해서 내부 분열로 보느냐, 아니면 사실상 소화 불량에 걸려서 자력으로 이탈한 흑수 말갈로 이해해서 배후의 위협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국가 구성 자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다른 말갈부락들과 달리 흑수말갈은 발해 선왕 시기에 복속된 것으로 보이는데, 발해 말기에 흑수말갈을 비롯한 말갈족의 이탈기록이 신라와 고려 측을 통해 존재한다.
886년(발해 대현석 15년, 신라 헌강왕 12년) 적국인(狄國人: 말갈 부락)이 신라 북진(=강원도 삼척) 지역으로 건너가" 보로국과 흑수국 사람이 함께 신라국과 화친해 소통하고자 한다"(“寳露國與黒水國人, 共向新羅國和通.”)는 목판을 남기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최소 발해-신라와 인접한 말갈부락들이 신라와 발해 사이에서 간보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대인선 말기에는 이탈한 말갈족에 대한 기록이 고려를 통해 보이는데, 921년 달고(達姑) 171명이 고려 국경을 넘어와 신라도를 통해 약탈을 일삼자 견권이 토벌했다. 흑수말갈은 921년 봄에 고자라, 921년 여름에는 아어한이라는 흑수말갈 추장들이 자신들의 측근을 데리고 고려로 귀순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있다. 923년에는 골암진(강원도 안변군)에 북번(북방 야만인, 아마도 말갈족?)이 자꾸 침입해오자 유금필을 보내 이들을 복속시킨 기록도 있다.
이로 볼 때 12대왕 시기부터 15대 대인선 시기의 동안 흑수말갈의 상당수가 발해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으며, 고려와 인접한 말갈 부락들은 발해의 통제에서 벗어나 고려를 약탈하다가 토벌당하거나 고려에 귀순하게 된다.
6.1.4. 백두산 분화설(폐기)
이 학설은 과거에는 종종 언급되었으나 추가 연구를 통해 10세기 백두산의 분화 시기를 정확히 알아내면서 현재는 '''완전히 폐기'''된 학설이다.
이 설은 일본에서 화산학자들이 일본의 지층을 조사하다가 백두산의 화산재를 발견하면서 이에 대해 연구하면서 제기된 학설이었으며, 1990년대 말~2000년대 쯤 KBS에서 이에 대해 관련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면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되기도 하였기에 인지도가 있던 학설이었다. 특히 학계보다 고대사에 관심 있는 일반인 수준에서는 꽤 유력하게 거론되었던 가설이었다. 발해의 멸망 시기와 백두산의 대폭발 시기가 맞물린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힘을 얻기 시작했었다. 실제로 발해의 5경이 모두 백두산에 인접해 있어 백두산 폭발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과 당시의 백두산 대폭발은 비공식적으로 역사 시대 이래 최대의 화산 폭발로 추정된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했다. 당시 분출된 화산재는 한반도 전역을 1m의 두께로 덮을 만큼의 양이었다. (출처 :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소원주)) 백두산 서부에서 대규모의 화산 쇄설류가 이동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의 땅을 통치하지 않고 폐현시킨 것도 파괴의 정도가 심각하여 땅을 버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가장 큰 반론은 동아시아 3국 어디의 사서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거란의 역사서인 《요사》는 정복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사이기 때문에 은폐했을 확률이 높다는 주장도 있지만, 애초에 이런 범국가적 재난을 은폐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사상적으로도 "발해가 통치를 엉망으로 하여 하늘이 천벌을 내렸고, 따라서 우리의 전쟁은 정당하다." 등과 같이 프로파간다로 써먹을 여지가 충분하다. 결정적으로 나라 하나를 통째로 멸망시켰을 정도의 위력적인 화산 폭발이라면 발해 이민을 받아 준 고려의 역사서인 《고려사》에 분화 당시의 기록이든 유민들을 받아줄 때의 상황이든 기록되었어야 정상인데 전혀 기록이 없다.
백두산 폭발이 발해 멸망 전에 일어났더라도 실제로는 발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연구에 의하면 백두산 대폭발은 겨울에 발생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겨울에는 북서풍이 불기 때문에 화산재 대부분이 동해와 일본으로 날아갔고 상경용천부 또한 백두산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를 입기에는 거리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이후 연구를 통해 백두산의 화산재와 기록이 존재하는 일본 고대 화산의 화산재와 시간대 비교를 통한 연구에 의하면 발해 멸망이 926년 1월에 발생했는데 백두산 분화는 969년(± 20년)에 일어났다고 추정되어 이 학설은 더욱 힘을 잃었다.
그러나 매우 젊은 암석의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은, 그 정확도에 대해 아직 논쟁 중인 부분이 많아서, 아직 정확한 연대 측정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보는 관점도 있었으며, 그 근거로는 고정밀 연대 측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Ar-Ar 연대 측정법도 최근에 일어난 지질학적 시간을 기록하는 데 신뢰도가 비교적 낮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U-Th-Ra 비평형, Cl, He, Be 등의 노출 연대도 젊은 암석에 사용되지만, 각자 암석의 환경에 따라 문제점이 존재한다. 젊은 암석의 연대 측정은 오늘날 지질학의 연대 측정법의 화두 중 하나이다.
다만, 많은 정밀 연대가 926년 이후의 연대를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발해의 멸망과 관련이 없을 것 같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2017년 이러한 일말의 의심조차 잠재우는 연구가 공개되었다. 해당 연구에서 공개한 추정 연대는 946년 후반기로 오차를 3개월로 줄이는데 성공했다. 고로 발해 멸망 이후 20년 뒤에 화산 분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거의 확실해졌다.
관련 연구 기사
해당 문건 번역
더군다나 이 연구 결과는 기존 사서들과 비교해서도 얼추 맞아들어가는데, 고려사를 보면 946년에 개성에서 천고명이 들렸다 라는 기록이 존재한다. 즉, 개성 하늘에서 어마어마한 천둥 소리가 들렸다는 기록이다. 일본의 나라현에 있는 고후쿠지 사찰에서도 946년 11월에 하늘에서 하얀재가 내렸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를 통해 사실상 백두산 폭발로 인해 발해가 멸망, 혹은 거의 멸망에 가까울 정도로 대타격을 입거나 멸망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거론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후 백두산 폭발이 발해 멸망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은 폐기된 대신, 발해 멸망 이후 혼란기가 길었던 이유를 백두산 폭발과 연관짓는 가설로 바뀌었다. 폭발 이후 작은 지진이나 자연 재해, 이변들로 인해 부흥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 실제로도 강제 이주에 의한 것이든 자연 재해를 피한 것이든 발해 멸망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유민의 이동이 있었다. 따라서 발해부흥운동과 거란의 만주 통치 장악력 미흡, 여진족의 침체기 등에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추론하는 것은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 나라의 멸망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더라도 향후 발해가 존재했던 지역이 오랜 기간 버려지고, 동만주에서 새 나라가 일어나기까지 200여년이나 걸린 것에는 화산 폭발과 관련 있지 않나 하는 추측.
7. 멸망 이후
7.1. 고려의 반응
고려는 발해 멸망 이후 자신들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수 많은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였으며, 이는 고려가 공산 전투에서 입은 엄청난 손해를 충분히 메울 수 있을 정도의 큰 규모였다. 그리고 934년에는 발해의 마지막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수 만 호에 달하는 발해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대광현은 왕씨 성을 하사받아 고려 최상위 귀족 계층으로 편입되었으며, 발해 왕가 후손인 대도수 역시 여요전쟁에서 활약하게 된다.
《고려사》 세가의 대광현 내투 기사에는 규모가 무리 수 만[衆數萬]이라고만 적혀 있는데, 이때의 단위는 호(戶)다. 최승로 열전에 수록된 이른바 '시무 28조'에 "渤海旣爲丹兵所破, 其世子大光顯等, 以我國家擧義而興, 領其餘衆'''數萬戶''', 日夜倍道來犇."라고 되어 있다. '수 만'을 2-4만 정도로 비교적 낮게 잡아도, 934년 한 해에만 —범위를 넓혀도 발해가 멸망하는 926년부터 왕건이 사망하는 943년까지라는 길지 않은 기간에— 대략 10-20만 명의 발해 유민이 고려 내부로 유입된 것이다. 《고려도경》에 기록된 12세기 고려의 인구가 210만에 불과했던 걸 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다. 물론 《고려도경》의 인구 수는 과소 평가일 가능성이 높지만 이는 발해 유민 투화 기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유이민에 대한 모든 기록이 남았을 리는 없고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들에 대해서만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
한편 고려에서는 스스로를 고구려를 이었다고 하여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를 원수처럼 여겼다. 실제 고려 태조 왕건은 그 나라를 '본래 우리와 친척인 나라[本吾親戚之國]'라고 표현할 정도로 발해를 친근하게 여겼다.[12] 발해에 대한 동족 관념에서 비롯된 왕건의 반 거란주의는 거란의 사신이 가져온 낙타들을 다리 밑에 묶어 전부 아사시키고, 사신들은 전부 유배보낸 것(만부교 사건)으로 극명히 표출되었다.[13]
이러한 고려의 대 거란 적대 정책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한 발해에 대한 친근감도 있었겠지만 자국에 투화한 발해 유민들을 국가 체제에 통합하기 위한 실리적인 목적도 작용했을 것이다. 왕건은 거란과 같은 북방 민족인 여진족을 인면수심이라며 경멸한 바 있고, 훈요 10조의 거란에 대한 경계를 당부한 부분에도 발해 유민들이 자리잡은 한반도 북부는 국방상 요지이기 때문에 이들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다면, 거란의 외침 시에 제대로 항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거나, 최악의 경우 적에게 호응하는 상황까지도 닥칠 수 있었다. 반면 200여 년 간 독립 국가를 영위해 온 이들을 제대로 흡수할 경우 변방 안정은 물론이고 국력 신장에도 도움이 될 만했다. 그런 이유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발해 유민들에게서 찾는 견해까지 있을 정도다.
발해 멸망 이후, 계속된 발해부흥운동에 대해서도 고려 내부에서는 도와주자는 의견과 무시하자는 의견이 서로 대립하는 등 통일되지 않은 성향을 보였고 결국 서너 차례의 유의미한 발해부흥시도가 있었음에도 고려는 단 한 번도 난민을 받는 것 이상의 지원을 하지는 않았다.[14] 고구려의 정통성 승계 문제에 현실적 국제 역학 질서, 막 통일된지 얼마 안되는 고려의 내부 통제 문제 등의 여러 문제가 얽히기 때문이다.[15]
발해는 북방의 이민족인 거란에게 멸망하였고, 발해 스스로가 편찬한 역사서가 현재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帝王韻記)》 등에 언급된 것을 제하면 한반도 국가의 관찬, 사찬 사서의 서술 범위 밖에 있었다.
이후 조선의 학자 유득공은 고려가 망명해온 발해 유민들의 증언을 통해 발해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발해의 역사를 남기지 않는 것에 안타까워 했다.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ᆢ(생략)ᆢ 김씨가 남쪽을 영유하고 대씨가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ᆢ(생략)ᆢ그러나 끝내 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ᆢ(생략)ᆢ 발해는 중국제도를 본받았으니 반드시 '''사관'''을 두었을 것이다. 또 발해 수도인 홀한성이 격파되어 고려로 도망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10여 만명이나 되니, 사관이 없으면 반드시 '''역사서'''라도 있었을 것이고 사관과 역사서가 없더라도 세자에게 물어 보았다면 역대 발해왕의 사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은계종에게 물어 보았다면 발해의 예법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10여 만 명에게 물어 보았다면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ᆢ(생략)ᆢ 아, 문헌이 흩어진 지 수백년이 지난 뒤에 역사서를 지으려 해도 자료를 찾을 수 없구나. ᆢ(생략)ᆢ
-'''발해고, 유득공의 서문 중에서'''-
7.2. 요나라와 금나라에 남은 발해 유민
고려로 피난하지 않은 대부분의 발해인들은 만주 지역에 남았다. 고청명 등 발해 유민들은 여요전쟁에서 요나라에 징집되어 발해인 부대를 조직해 고려군과 싸우는 동족상잔을 벌이게 되었다.
완안아골타가 금나라를 건국하고 요나라를 공격할 때 천조제는 발해인 부대를 보내 아골타를 막으려 했으며 금나라 역시 송나라를 공격할 때 수만명에 달하는 발해인 부대를 운용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금나라 시기 이후 발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끊기면서, 금나라 중후기에 동화되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7.3. 발해부흥운동
발해 멸망 후 발해 부흥 운동을 일으킨 지역이 몇군데 있었지만 얼마 안 가 대부분 진압당했다. 한편으로 이 점은 요가 중앙부터 공격해 발해를 무너뜨렸다는 근거로도 여겨진다. 하지만 이후 무려 200년간 부흥 운동이 벌어진다는데 의의가 있다.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