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로마 제국/오해
1. 오토 1세가 초대 황제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수립'이라는 사건은 어느 날,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나라가 지도 위에 불쑥 생긴 것이 아니다. 오토 1세의 대관은 독일 국왕이었던 오토 1세에게 '로마인들의 황제'라는 타이틀을 추가적으로 부여한 것일 뿐이며, 이 대관식이 없던 나라를 탄생시킨 것이 아니다. 이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개념 자체가 고대의 서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를 교황의 권위를 통해 복구하는 의미이므로, 이 정치체제의 군주는 정식으로 말하자면 초기에는 프랑크 국왕, 후에는 독일왕이며, 이 직함을 얻은 사람이 로마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황제로 취임했던 것이다.
따라서 오토 1세를 제국의 초대 황제로 간주하는 시각은 800년 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롤루스가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받고 축성된 뒤 서유럽 지역의 '황제'로 선포된 사건을 흑역사 취급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카롤루스 이후에도 '황제'의 지위는 계승되었으며, 924년 베렝가리오 1세의 암살 이후 제관 수여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가 962년 독일 왕국의 국왕 오토 1세가 교황 요한 12세로부터 제관을 수여받으며 황제의 지위가 복원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오토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이란 제국을 최초로 건립한 초대 황제가 아니라 단지 서유럽에 재건된 제국의 황제 지위를 작센 왕조로 복원시킨 군주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이 이후 실질적으로 독일 왕국의 또다른 이름처럼 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며, 프랑크 왕국의 분열 이후 이탈리아 왕국을 지배했어도 프랑스 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이 점에서 신성 로마 제국을 '독일과의 연관성이 강화된 서유럽의 제국'이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토 1세는 프랑크 왕국 분열 이후 사실상 실질적 역량을 상실한 제국을 독일 왕국 중심으로 재편시킨 군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며, 이 기준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독일적 성격과 연관지어 정의한다면 오토 1세를 창업 군주로 평가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사실 신성 로마 제국의 기점을 962년이 아닌 800년으로 잡는 의견은 현재까지도 사학계 내외에서 존재하는 논쟁이다.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성격을 독일적인 것으로 파악할 것인지, 아니면 로마적인 것으로 파악할 것인지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논쟁으로, 단순히 연도의 문제를 벗어난 민감한 사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의 교육 과정에서는 962년을 공식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 중등 교육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전술했듯이 924년 이후 중단되있던 서로마 제위가 오토 대제 이후 단절 없이 지속되었고, 이 오토 왕조를 계승한 프리드리히 1세 대에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표현이 확립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프리드리히 1세 이전에는 독일 왕이 서로마 제위를 겸하는 형태였다.
또한 다른 관점에서는, 프랑크 왕국이 843년 이후 서프랑크와 동프랑크로 갈라졌고 처음에는 양쪽 왕이 형제였지만 세대를 거듭해 감에 따라 친연관계가 옅어지고[1] 그러다가 또 동프랑크에서는 911년에 부계후손이 절손되어 콘라드를[2] 새 왕으로 뽑음에 따라 카롤루스 왕조는 끝났다.[3] 이에 따라 프랑크-로마의 정통성을 둘러싼 대결구도가 생겼고, 여기서 로마 교황의 눈에 서프랑크보다 먼저 든 독일의 오토 왕이 정통성을 선점했다고도 볼 수 있다.
2. 불안정한 나라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세'라고 불리는 10세기~15세기 동안의 신성 로마 제국은 '''주변 나라들에 비해서 안정된 나라였다.''' 하지만 중세 후기에 겹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은 근대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하나의 국민국가로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의 길을 걷게 되는 씨앗을 남기기도 했다.
이건 굳이 저연령층 대상인 먼나라 이웃나라를 들먹이지 않아도 세계사를 잘 모르는 일반 대중들이 잘 오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중세사의 여러 관념은 사람들이 잘 이해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단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은 그렇게 낮지 않았다. 신성 로마 제국은 그 자체로 중세 성기~후기 동안 서유럽에서 제일 크고 부유한 나라였으며, 신성 로마 황제가 본격적으로 군대를 동원하면 동로마와도 비견될 수 있었고, 황제는 명실상부하게 전 유럽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1세 때에는 10만 대군을 모아 십자군 원정을 시도했을 정도. [4] 이 병력이 참전한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많은 병력이었다.''' 제국 내에서는 대영주-황제-교황은 서로를 견제하며 세력의 균형을 이루었고 그 세력 균형이 깨질 때는 프리드리히 1세 때처럼 황제가 황권을 확대하기 위해 선수를 칠 때나 제위 계승이 불안정할 때뿐이었다.
그마저도 유럽의 다른 나라와 비교해본다면 중세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이 오히려 높은 축에 속함을 알 수 있다. 당장 프랑스 왕국의 경우 위그 카페 시절에는 대주교가 대놓고 왕을 무시하고 국왕을 선거제로 뽑아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게다가 '''카페 왕조 초기에는 프랑스 왕 역시 신성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선거왕제였다.''' 다만, 왕조가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이 많았던 초기 신성 로마 제국과는 달리 프랑스 왕국은 운좋게 부자계승이 여러 세대 동안 지속되면서 카페 왕조의 지위가 공고해진 것이다. 그나마도 백년전쟁 때까지 프랑스 국왕 자체의 세력은 오히려 다른 대영주들에 비해 크게 못미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카롤링거랑 관련 없는 왠 듣보잡 백작[5] 이 왕위를 계승한 바람에, 다른 대영주들의 눈치를 보느라 왕국 전체에 적용되는 칙령이나 법을 선포할 수도 없었으며 의회(삼부회)를 소집하기도 어려웠다. 그에 비해 샤를마뉴식 봉건관료제의 고향인 독일-이탈리아 지역은 군주 개인의 카리스마와 선거로 뽑는다는 정통성, 교황에게 대관 받았다는 정통성을 통해서 지방 영주들을 반쯤은 관료제처럼 통제할 수 있었다.
프랑스 왕국 외의 10~13세기 당시의 주요 국가를 보자면 동으로는 폴란드와 헝가리 왕국, 북으로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들, 잉글랜드 정도가 있겠다. 동로마야 이미 2천년을 앞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강력한 관료제와 중앙집권을 이룩했으니 제외하고, 다른 나라들을 보자면 대부분 갓 부족제에서 벗어나 봉건주의를 도입해서 왕권이 신성 로마 제국보다 훨씬 약하거나(헝가리, 폴란드, 스칸디나비아), 분할 상속과 남쪽 이슬람 세력과의 상시적인 전쟁 상태 때문에 국가 자체가 안정적이지 못한(이베리아)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나마 특이한 케이스는 잉글랜드로, 노르망디 공 정복자 윌리엄의 정복으로 일종의 '정복 왕조'를 세운 입장에서 군주가 귀족에 비해 훨씬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강한 수준은 아니었고 봉건제 내의 한계를 넘지는 못했다. 잉글랜드도 분할 상속으로 몸살 앓기도 했고 왕과 교회와 귀족 간의 갈등 다 있었다. 로마와 거리가 워낙 머니까 교회와의 갈등에서는 왕이 유리하긴 했지만.
또한 먼나라 이웃나라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허울에 즐거워하고 (북)이탈리아 반도에만 신경을 쓰느라 독일 지역의 영주들이 힘을 키우는 것을 방관했다'고 써놓은 부분은 맥락을 잘라먹은 굉장히 악의적인 서술이다. 신성 로마 황제의 입장에서 북이탈리아는 허울에 즐거워하기 위해 신경쓰는 곳이 아니라, 중세 신성 로마 제국의 경제의 대부분을 담당했던 핵심적인 지역이자, 자신의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곳이었기 때문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경제 측면에서만 접근해도, 13세기까지도 신성 로마 제국 영토 내에서 알자스 이북 지역에는 주민 1만 명 이상의 도시가 리에주, 쾰른, 겐트 단 세 군데뿐이었는데 북이탈리아에는 15개에 달했다. 게다가 11세기까지 서유럽은 주변 어느 문명과 비교해도 경제적으로 열세에 놓인 지역이었고, 화폐를 유통하려고 해도 금은이 전부 동유럽이나 북아프리카, 서남아시아로 유출되는 안습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 상황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사치품을 생산하고 대외 교역으로 금은을 유입시킬 능력이 있는 지역[6] 이 북이탈리아였던 것이다. 즉, 신롬의 입장에서 북이탈리아는 단순한 면적을 떠나 단위 면적당 영토적 가치가 충분히 막대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독일(게르마니아) 지역은 고대 로마 시대에는 아예 제국의 국경선 바깥으로, 그나마 로마의 주요 속주였던 갈리아 지역보다도 개발 진행이 훨씬 더딘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이 있던 중세가 현대마냥 조세 수취 체제가 완성되어 주민세와 재산세를 거둘 수 있던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봉건 영주에게는 세금을 거둘 수 없다'''. 봉건 영주가 군주(황제)에게 지는 의무는 군역(병력 제공)이지 금전적인 세금 지불이 아닌 것이다. 결국 중세 초기~중기동안 독일 지역은 신성 로마 제국에 있어 군사력의 중심이지 세금원이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 자리가 군대만으로 유지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고, 황제로써 권위와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는 현금이나 현물이 반드시 필요했다. 하다못해 봉건 영주들의 군사력을 동원할 때에도 방어전이 아닌 이상 일정 기간(1년에 40일)이 넘어가면 병력 동원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고,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서는 가끔씩 포상이나 하사품도 뿌려줘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자금을 어디서 마련해야 할까? 황제의 직할령은 다른 봉신 영주들의 영지에 비해 그렇게까지 크고 넓은 것도 아니었고, 독일 지역의 직할령에서 걷히는 세금은 황제 자신의 군대 유지 및 황실 일가를 부양하기에도 빠듯했다. 결국 샤를마뉴마냥 전쟁 자체를 산업화하여 매년 한 번씩 원정을 나가 주변 세력을 뚜까패고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한, (다른 봉건 영주들에 대한) 황제의 우위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부유하고 인구 밀도가 높으며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산업이 발달한 북이탈리아 도시들로부터 거둬들이는 세금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
정통성면에서도 로마가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신성 로마 제국은 그 정체성을 교황이 관을 씌워준 황제가, 가톨릭의 보호자로서 군림하는 것에 두고 있었다. 이 '기독교 신앙의 보호자인 황제'라는 관념은 중세를 넘어 근세까지도 유럽에서 공고히 유지되어서 다른 나라의 군주들은 감히 황제를 자칭하지 못했다. '황제' 칭호에 대한 동로마와의 분쟁에서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로마인(=로마라는 나라)의 황제는 아니지만 '로마 땅의 황제'(=로마라는 지역을 다스리는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탈리아 반도 북부~중부의 로마 근처라는 영토를 다스린다는 점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정통성에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는 것. 그런데 북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잃으면? 신성 '''비'''로마 제국 황제, 즉 '로마랑은 상관없는 황제'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에 더해, 보통 로마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사이의 관계를 '교황권과 세속 군주권의 우위를 두고 갈등을 벌이는' 적대적인 라이벌 관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있어 '교황의 보호자'라는 입장은 '기독교 세계의 세속 1인자'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교황의 보호자'로써 다른 세속 군주들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인정받았고, 대내적으로도 반항적이고 독립적인 영주들을 통제하고 영토 내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보호자=종교(가톨릭)의 보호자라는 지위와 신성 로마 제국 영토 전체 및 서유럽 전체에 걸친 교회 조직이 필요했던 것. 애초에 신롬 황제들이 주교공을 임명하여 영주들의 세력을 견제한 것이나, 전성기에는 황제와도 우열을 다툴 정도로 강성했던 교황권의 신장 자체가 황제의 황권 강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황제와 교황은 서로 세력을 다투는 라이벌인 동시에 '기독교(가톨릭)의 로마 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정치체를 유지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해야 하는 관계이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교황과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황령이자 1위 총대주교의 착임지인 로마와 신성 로마 제국 영토의 연결 역시 필수불가결했다. 만약 북이탈리아 영토를 상실한다면 일차적으로 교황 및 로마 시와의 물리적인 연계 자체가 약해지고, 심하면 중세 초기의 동로마 라벤나 총독부나 중세 중후기의 노르만계 오트빌 왕조 같은 다른 세력의 손아귀에 교황이 들어가 버릴 가능성도 있었던 것.
이런 맥락을 자르고 황제가 북이탈리아에만 몰두하느라 본국 격인 독일의 기둥 뿌리가 썩어가는지도 몰랐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굉장히 부당한 처사.
결국 요약하자면, 중세 신롬의 황제들이 종종 독일 지역에 대한 통제를 방기하기까지 하면서 북이탈리아에 대한 지배력 확보에 골몰했던 것은, 신성 로마 제국에 있어 북이탈리아는 독일 못지 않게 핵심적인 영토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독일 및 알프스 이북의 영토를 조금 잃더라도 북이탈리아만은 꽉 쥐고 있어야 제국의 존속이 가능했기에 다른 무엇보다도 북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 보존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애초에 이런 오해를 널리 퍼트린 먼나라 이웃나라 같은 경우, 한국 내에서 유럽에 대한 관심사를 불러일으킨 좋은 책이지만 기본적으로 당대 한국인의 눈높이에서, 당대의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쓴 책임을 감안해야 한다.(그렇지 않았으면 그렇게 큰 인기를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 결국 먼나라 이웃나라의 초기 버전에서 다룬 유럽사(신성 로마 제국사)는 민족국가 개념에 익숙한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편하게 어느 정도 '번안된' 내용임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
제국 황제들의 중앙집권화 노력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하인리히 4세, 프리드리히 1세 항목 등을 참조하자. 여기서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그 황제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후일담으로 자신을 파문하고 수모를 준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종국에는 시칠리아로 쫓아내버려 죽게 한다. 어쨌건 저 두 사람의 사례를 보다시피 이탈리아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황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첫 관문이었다. 이처럼 중세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황제와 교황이 끊임없이 영향력을 다투는 시기였고 그나마 카노사의 굴욕 전까지(=중세 중기 이전)만 해도 교황은 황제의 봉신(封臣. 봉토를 받은 제후) 취급을 당해야 했었다.
오히려 제국의 분권화는 중세 이후부터 급속히 진행된다. 중세 말기부터 이웃한 유럽 국가들은 점차 근대의 국민 국가로서 군주가 봉건제후들의 영지를 서서히 흡수해갔다. 반면 제국은 황제를 선거로 뽑는 제도와 그에 의한 봉건제후들간의 갈등, 여러 왕조들의 단명, 독일 지역의 높은 인구 밀도[7] , 그리고 제국 내의 여러 민족 등으로 인해 봉신들의 영지 하나하나가 근대 국민국가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 '결과' 역시 원인을 소급하자면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성 로마 제국의 결정적인 실패는 여러 왕조들이 단명하였고, 왕조가 단절될 때마다 선거군주제로 복귀하거나, 심하면 황제가 부재한 대공위 시대까지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웃의 프랑스 왕국의 경우 987년에서 1789년까지 +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약간을 포함해서 '''800여 년간''' 방계의 발루아, 부르봉을 포함한[8] 카페 왕조가 유일한 (부계)왕가로서 존재하였는데, 이러한 안정적인 부계 왕위 계승 덕분에 프랑스는 신성 로마 제국과는 달리 중앙집권으로 가는 길이 정체되지 않고 꾸준히 이어졌던 것이다.
또한 제국 내부에서 성직자 서임권을 가지지 못하고 주교령의 독립적인 정치적 지위까지 인정해야 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는 달리, 프랑스 왕은 아비뇽 유수 이래 서구 대이교 때까지 왕국 내의 교회를 높은 수준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또 중앙 집권 능력에 차이가 나게 된다. 특히 프랑스 왕들 중에 필리프 4세는 교황을 교체해버리기까지 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이 정말로 끈질기게 황제를 방해한다. 카를 5세만 해도 든든한 지지자였던 교황이 황권을 강화하려는 카를에게 반감을 가져 반황제 세력으로 돌아서버렸다. 다만, 프랑스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특수성'으로 봐야 할 것이다. 유럽에서 프랑스 카페 왕조처럼 오랫동안 꾸준히 버티면서, 서서히 중앙집권을 강화해 온 왕조는 훗날 이탈리아 왕국을 건국하게 되는 사보이 왕조 뿐이다.
또한 저 지긋지긋하게 신성 로마 황제를 괴롭힌 북이탈리아 문제도 신성 로마 제국의 중앙집권화를 방해한 주요 원인 중 하나인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미 이때쯤 되면 혼혈도 많이 되어 구분이 어려웠고 게르만과 라틴이 혼연일체를 이뤄서 서유럽 기독교권을 만들었던 때건만,[9] 로마 시절 속주들의 위에 군림했던 본국이었다는 자부심은 어디 안 가는지, 북이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로마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게르만족인 황제가 자신들을 지배한다는 사실에 반감이 커서 정말로 끈질기게 저항했다[10] . 이 때문에 황제의 즉위 때마다 황제는 북이탈리아인들과 긴 갈등을 겪어야 했고, 결국 금인칙서를 반포한 카를 4세 대 무렵에는 사실상 이탈리아 내 제국의 권한 대부분을 잃게 된다.
중세 후기부터 누적된 이런 문제는 결국 해결되지 못했고 그 결과 중세 이후로 제국은 이웃나라인 프랑스, 영국 등에 비해 절대왕정의 구축에 있어 뒤처지게 된다. 물론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15세기 이후 제위를 합스부르크 가문이 거의 독점하면서 사실상의 세습제를 구축하고 황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30년 전쟁으로 모두 허사가 돼버린다. 전쟁 중반까지 황제 측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면서 반대 세력을 억누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제때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주변국의 개입을 여러 번 허용하고 말았다.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등. 특히 스웨덴의 칼 구스타프와는 정말 끈질기게도 싸웠고 또, 앞의 두 나라는 신교 국가였지만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임에도 신성 로마 제국을 엿먹이기 위해 신교파 국가들을 후원했다. 황제는 반황제 세력들을 제압하는 데 실패하였다. 결국 30년 전쟁을 종결하면서 맺어진 베스트팔렌 조약은 제국 내의 각 봉건제후국들의 주권을 인정해주고 사실상의 독립국가로 만들어주면서 전쟁으로 흔들린 제국에 결정타를 날린다.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이후 독일 영방국가들에게 있어 신성 로마 황제는 춘추전국시대의 주나라 왕이나 일본의 덴노와 같은 허울뿐인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세계사 지도와 시대별 역사 지도 유튜브를 봐도 베스트팔렌 조약 이전의 유럽 지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를 대체로[11] 하나의 나라로 표시해놓지만 조약 이후의 유럽 지도는 독일 지역을 수많은 작은 영방국가들로 분열된 상태로 그려놓는다. 볼테르의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라는 유명한 디스도 사실 베스트팔렌 이후의 껍데기만 남은 제국을 조롱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 이후로 합스부르크는 제국은 내팽겨치고 대신 동유럽과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훗날 독일 통일 운동에서 소독일주의와 대독일주의로 나뉘어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서로 분리되는 불씨가 된다.
3. 독일인만의 나라이다?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인들이 통치의 중심이기는 했지만 독일인 외에도 보헤미아인, 이탈리아인, 남프랑스인, 네덜란드인, 벤트인, 유대인 등 여러 민족들이 존재한 다민족 국가였다. 1512년에 지정된 신성 로마 제국의 정식 국호는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지만 이 국호가 지정된 때는 부르고뉴와 이탈리아 등 비독일 지역에서 제국의 영향력이 줄어든 시기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선성 로마 제국이 독일인들만의 나라가 됐다고 할 수 있는 시기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어 네덜란드, 스위스를 완전히 상실하고 느슨한 형태의 연방체제가 되고 나서이다. 다만 이때마저도 보헤미아 왕국 같은 비독일 지역이 남아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자칭했던 오리지널 로마 제국만 하더라도 라틴족뿐만 아니라, 그리스인을 비롯한 온갖 민족들이 모여 살던 다민족국가였다. 로마시에서는 라틴어가 통하지만, 제국의 동부는 그리스어 문화권이었고 그 외에도 지방마다 고유한 언어가 통용되었다. 당장 팔레스타인 지역만 하더라도 아람어가 쓰였다. 그 동부 반쪽의 동로마 제국도 그리스인을 비롯하여 불가리아인, 이탈리아인, 아르메니아인, 아랍인, 튀르크인, 페르시아인, 유대인 등 온갖 민족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옛 제국들을 현대의 민족국가에 대입하여 보는 것은 분명히 오류이다. 비슷한 예로, 동로마 제국을 보고 '라틴어를 안 쓰다니!', '그리스인이 주축이라니!' 하면서 로마의 정통성을 이어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당연히 오류다. 이미 고대 로마에서도 그리스어가 잘만 쓰였다. 이런 식의 극단적 민족주의, 내지는 혈통주의(종족주의)적 사관은 오히려 고대 로마의 정체성과도 차이가 난다. 역사적 신빙성에는 의문이 있다고 한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연원을 트로이, 곧 소아시아 출신의 아이네이아스와, 이탈리아 라티움 지방의 토착민 로물루스라는 이중적 구조에서 파악하였으며, 자신들의 조국을 재건된 트로이라고 자처하였다.[12]
3.1. 초기 구성 국가들
신성 로마 제국의 당시 체계를 보면 민족 세계를 알 수 있다. 초기에 신성 로마 제국을 구성하던 하위 국가는 독일 왕국, 이탈리아 왕국, 보헤미아 왕국, 부르군트 왕국이 있었다.
독일 왕국은 이탈리아 왕국이나 보헤미아 왕국과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독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모체가 되었기 때문에 선제후 회의에서 독일 왕국의 국왕(독일왕)으로 선출된 자가 교황의 대관을 받아 황제가 되었다. 교황은 대관을 거부할 수는 있어도 선거를 물리고 다른 사람을 황제로 앉힐 수는 없었다. 교황이 정치적인 이유로 대관을 거부한 경우에는 명목상 황제가 아니라 독일왕이었지만 실질적인 황제로 인정받았다.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 중 거의 절반이 교황 대관을 받지 못한 독일왕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문제 없이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와 있다. 15세기 막시밀리안 1세는 이런 명목과 실질의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왕 선출과 동시에 스스로 황제를 칭했고, 이후 황제들은 교황의 대관을 받지 않고 황제가 되었다. 독일 왕국은 인구 등 규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위에 있어서도 제국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독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과 사실상 동일시되었다. 후대 독일 제국과 프로이센의 관계와 비견할 수 있다.
이탈리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이 건국되던 962년부터 독일 왕국과 더불어 함께 제국을 구성하던 하위 왕국이었다. 중세 이탈리아 왕국의 전신은 랑고바르드 왕국이었다. 랑고바르드 왕국은 6세기경 게르만족의 일파인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하여 세운 나라였다. 이탈리아에서 수백 년간 세력을 유지했던 랑고바르드 왕국은 다른 게르만 국가인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1세에게 정복되었고, 북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족은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남이탈리아에선 베네벤토 공국 등 랑고바르드 잔존세력이 한동안 존재했다.[15]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후 북이탈리아는 장남 로타르가 관할하는 중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고, 또 메르센 조약을 통해 중프랑크는 북쪽의 영토를 동프랑크와 서프랑크에게 사이좋게 떼어주고 북이탈리아만 남게 되었다. 그래도 북이탈리아를 가지는 자가 황제를 겸하게 되어서 북이탈리아의 대접은 나름 좋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북이탈리아 지역은 서로 황제가 되려 하는 카롤루스 왕가 방계의 프랑크 귀족들 간의 혼란에 빠졌고, 결국 960년 교황의 요청으로 이탈리아에 원정온 독일 왕국의 국왕 오토 1세에 의해 합병된다. 북이탈리아의 위협으로부터 교황령을 보호해준 대가로 오토 대제는 이탈리아 국왕과 더불어 황제가 된다. 이로서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왕국과 더불어 신성 로마 제국의 창단 멤버가 된다. 이탈리아 국왕직은 독일왕과 더불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자동으로 부여받는 타이틀이 되었다.
보헤미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이탈리아와 더불어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는 지역이었다. 보헤미아는 처음에 공국으로 출발했지만 12세기 말 스스로 왕국이라 칭했다. 지리한 논쟁 끝에 정치적인 타협으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은 보헤미아가 왕국을 칭하는 것을 승인했다. 그러나 애초에 공국이었던 보헤미아는 왕국으로 승격된 후에도 독일 왕국 내에 있는 하위 선제후국(공국)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보헤미아 왕국 국왕이 독일 왕국 국왕을 뽑는 7명의 선제후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 독일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의 관계가 동등한 왕국이 아닌 주종의 관계임을 보여준다.
3.2. 이탈리아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왕국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할 때부터 있었던 왕국이다. 신성 로마 제국 초기의 중세 황제들(작센 왕조, 잘리어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은 로마와 로마가 상징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가톨릭 신앙에서 정체성을 찾으려 하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1세를 비롯한 초기의 많은 황제들이 이탈리아에 그렇게도 집착했던 이유는 교황과의 정치적, 종교적 갈등 때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부 중세 황제들은 로마에 집착하여 지나칠 정도로 이탈리아 경영에 골몰했지만 정작 이탈리아에서는 곤경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독일을 비롯한 중부 유럽을 평정하며 그 이름을 전유럽에 떨쳤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도 이탈리아 원정에서는 무능할 정도로 연패를 거듭하며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이탈리아 경영의 실패는 독일 국내 정치에서 제후들의 여러 도전과 위협으로 이어졌다. 강력한 황권과 진정한 신성 로마 제국을 추구했던 호엔슈타우펜 왕조 황제들의 황권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고 결국 대공위 시대로 귀결되고 말았다.
대공위 시대 이후 황권이 약해졌기 때문에 어느 한 가문에서 황제를 독점적으로 세습하지 못하고 합스부르크 가문, 비텔스바흐 가문, 룩셈부르크 가문 등이 한동안 번갈아가면서 황제를 배출했다. 이들 신세대 황제들은 초기 황제들과 달리 매우 실리적이고 합리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리스크만 많고 실익이 별로 없는 이탈리아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대신 독일에서 가문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직할령을 확대하는데 주력했다. 이들은 심지어 교황의 대관조차 받으러 가지 않았다. 이들 세 개 가문들은 공통적으로 제국의 동쪽 변방을 주시했고 각각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보헤미아로 가문의 영토를 확장했다. 이처럼 대공위 시대 후 신세대 황제들이 독일 지역에 집중하고 이탈리아에 무관심하게 되면서 14~15세기 신성 로마 제국은 북이탈리아 지역의 영토와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어 이탈리아는 명목상으로나마 제국의 봉토로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5세기 중반부터 신성 로마 제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게 된 합스부르크 왕조는 아예 국호를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고 바꾸었다.
3.3. '민족' 개념에 대해서
중세 제국들의 특성상 국가는 민족들 위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영주 계급 및 왕족들의 지배로 생겨난다. 이 당시 우리가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이것들은 단순히 영지를 소유한 봉건적 지배 계급들의 이해관계에 의한 복합적인 분할관계에 해당하는 일련의 '영지'들이며, 절대로 지리학적 문화적 연결성을 토대로 한 민족분류 개념에 기초한 국가 개념이 아니다. 이 시대는 영주 계급들의 봉건적인 질서에 의해서 영지들이 임의적으로 분할된 시대로서 지배권력 하에 있는 피지배 계급들 역시도 자신들을 하나의 영지에 속한 개체로 인식할 따름이었고, 그들을 대표하는 것도 사실상 민족개념이라기보단 단순히 상상된 권력에 지나지 않는 지배계급들의 표상일 뿐이었다. 민족의 개념은 중세의 폐쇄적인 생활방식이 허물어지는 과정에서 또 봉건적 질서가 옅어지기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는 크리스트교를 믿지 않는 사라센인이나, 본격적으로 개종하고 카르파티안 분지에 정착하기 전인 9세기 즈음의 마자르인이 아니라면 서방인들끼리는 딱히 이질감은 없었다. 그리고 이들의 경우 결코 현대 민족적인 관점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종교라는 중세 유럽의 유일무이의 진리나 아니면 정주민이 아닌 기마 유목민이라는 딱 봐도 눈에 보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화적 관점에서 배제된 것이다. 실제로도 마자르, 폴란드 등 저러한 생활 문화적 관점에서 이질감을 유발했던 이민족 또한 10세기를 넘어 점차 정주민화 되어 가고, 기독교와 봉건제를 받아들이며 중세 보편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융화되어 갔다. 심지어 국가간의 국경조차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민족적 관점에서 '독일인'이란 개념이 정립된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이 망한 19세기의 일이니. 조금 느슨하게 봐도 루터가 독일어로 된 성경을 쓰고 이어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16세기 정도다. 참고로 독일인들이 자신의 조상을 토이토부르크 전투의 게르만족들에게 찾으려고 한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이 망하면서 로마와의 연계가 끊어지자 새로운 표상을 찾고자 한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 빌헬름 1세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 등 근현대에 들어서 시작된 것이다. 다만 이걸 단정적으로 보면 또 안되는게 게르만족들 조차도 로마의 통치 아래서 로마인으로써 살아갔었던 이들이 있었던가 하면 토이토부르크 전투로 자신들의 터전을 지켜낸 이들이 존재했다는걸 감안하면, 민족주의 대두 이전에도 복합적인 시선으로 바라봤을게 틀림없다. 로마와도 싸웠었던 민족이 한편으로는 로마의 후계를 자처했었다는 이 상황 자체가 이걸 설명해준다. 로마 하에 있었던 게르만족과 게르마니아에서 살던 게르만족은 서로 다른 민족이 된게 아니며, 분명 로마라는 국가는 로마 이후의 서유럽의 석권자가 보았을때 궁극적 목표로 비춰질 수 밖에 없다. 허나 그렇다고 자기 민족이 자기 정체성을 지키게 된 전투는 분명 존재했기에, 그 정체성이 남아있는한 그 전투는 잊혀질리는 없다. 이 전투가 독일 민족의 새로운 표상을 차지하게 된건 이 민족이 더이상 로마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독일 제국으로써 재편되었고, 주도적인 지배층에만 안주하는걸 벗어나 독일인만의 국가를 지향하게 된것이다.
본격적으로 유럽에 '민족'이라는 개념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나폴레옹의 등장 이후부터라고 하지만, 나중에 온 민족 국가 독일의 관점에서 역사적 전례이기는 하지만 근대 민족 국가 독일과 직접적으로 법통이 이어진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을 분석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 관점에서 오류이다. 다만 중세 시대에도 민족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백년 전쟁으로 민족 의식이 싹텄다. 독일에서도 수많은 제후들이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독일 민족이라는 개념은 분명히 존재했다. 이미 신성 로마 제국이 탄생하기 수십 년 전 동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된 후 세로 왕위에 오른 하인리히 1세는 스스로 '독일인들의 왕'이라 칭했고, 이는 독일 왕국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근세로 넘어가서는 15세기에 생긴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국호가 아니더라도, 외국인 출신의 출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루터로부터 촉발된 종교개혁 문제를 다루며 '숭고한 독일 국가'의 국민들이 종교적으로 단합하기를 촉구했다.
4. 로마 제국과 그 어떤 연관도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시기 다른 지역에서 어떻게 생각하든간에, 서방 가톨릭 사회에서 서로마의 계승국으로 대접받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저는 부인들과 기사들, 전쟁과 사랑,
궁정 예절, 대담한 위업을 노래하리니,
무어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바다를 건너와
프랑스를 황폐하게 만들었을 때였는데,
그들은 '''로마의 황제인 카롤루스'''에게
트로야노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겠다고
장담하는 자신들의 왕 아그리만테의
분노와 젊은 혈기를 뒤따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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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로마의 법통이 그대로 이어진 동로마 제국이 건재한 상태에서 300여년간 단절되었다가 벼락출세한 게르만 야만족들에게서 재건된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 정통성이 딸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을 그렇게 쉽게 '짝퉁'이라고 폄하하기에는 여러 모로 난점이 많다.
4.1. 서론
프랑크 왕국은 물론이고 많은 서방의 게르만계 세력들은 황제를 칭하길 간절히 바랐다. 언제나 서신이 오가는 일이 있거나 하면 아직도 건재한 동로마보다 급수가 낮은 신분임을 별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9세기 카롤루스 1세가 교황 레오 3세를 반대파들로부터 구출하고 황제를 칭하기 시작했다. 서유럽 지역에서는 로마 교황청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해당 지역의 게르만 왕국에게 대관식을 통해 명목상 서로마 제국의 제위를 부여하는 일이 있었으며, 이러한 관습이 결국 중세 서로마 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의 탄생을 낳았다. 옛 서양은 물론 옛날 서양 학계에서는 이 신성 로마 제국을 진정한 로마 제국이라고 중시했으며 비잔티움 제국을 소위 그리스 제국이라 부르며 멸시했다.
물론 이러한 시각은 당시 로마 제국, 중동, 동유럽권의 시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한계점을 지니나, 이런 이데올로기적 주제들을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신롬을 파악할 수는 없다. 이는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중화권 제국의 역사를 파악할때, 당시 중국인들의 이데올로기와 그와 연관된 나라들의 이데올로기를 균형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기에 대해서 외부인이 코멘트를 하는 것이야 자유지만,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실제 역사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무시하고는, "내가 보기에는 신롬이 로마와 상관이 없다", "내가 보기에는 러시아는 로마와 상관이 없다"고만 이야기하는 건 곤란할 것이다.
4.2. 로마인의 지배자가 로마 황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간과해서는 안되는 건, 서유럽에 잔존해있던 서로마인들의 보호자들의 구심점은 로마市였으며, 서방인들의 주류 이데올로기에선 로마市와 로마 시민들을 보호하는 독일의 군주들이 '로마 황제'였다는 점이다. 이는 성경 다니엘서에 기반한 당대의 제국 이데올로기에 따라 서방인들이 보편 제국이 역사에 끊임없이 존속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서유럽인들은 서로마의 세력이 쇠한 공백 지역에 카롤루스, 오토 및 후계자들이 보편 제국을 복원했다고 받아들이기도 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도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와 같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내려오는 근거를 찾기보다는,[18] 자신들의 전통성의 주축인 가톨릭과 그 총본산이자 성지인 로마시(市)의 수호와 함께 로마 시민들로부터 보호자이자 황제로 인정받는 것에 더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교황령은 그 성립에 대한 이데올로기에서 신성 로마 제국과 공생관계였다. 교황령은 독립국이기는 하지만, 관념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과 거의 '부부'에 해당하는 위치였다. 때문에 교황을 비롯한 로마 시민, 그리고 서유럽인들은 독일의 군주들을 '로마 황제'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는 12세기의 로마 코무네 폭동 당시, (당연히 이탈리아인이었던) 폭도들이 1155년에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보낸 문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물론 이 글은 폭도들이 황제를 구슬리기 위해 쓴 글이니만큼 여러 가지 감언이설이 들어갔다는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독일의 군주가 이탈리아 및 로마 시민들에게 '이방인 출신이지만 '''어쨌든 우리의 통치자''''로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 고대 로마 제국에서도 출신지가 황제 자격을 제한하진 않았다. 트라야누스는 이베리아 반도 출신이었고, 나중에 가면 북아프리카 출신 로마 황제도 출현한다.오 인내심이 많으시며 은혜가 풍성하신 군주여, 폐하와 우리들의 권리에 대한 몇 마디 말을 들어주소서. 폐하께서는 한 사람의 방문객이었습니다만, 우리가 폐하를 시민이 되게 했습니다. 폐하는 알프스 너머에서 온 이방인이었습니다만, 우리가 폐하를 통치자로 받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속했던 권리를 폐하에게 바쳤습니다.
Knut Schulz, <중세 유럽의 코뮌 운동과 시민의 형성>에서 인용
4.3. 거룩한 성지이자 가톨릭 이념의 중심지
물론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와 서로마 멸망으로 인해 로마 제국의 수도는 '새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이며, 로마市는 로마 제국의 입장에선 로마 제국의 역사상 단 둘만 존재했던 도시 중 하나이자, 안타깝게도 로마 제국의 지배권에서 떨어져나간 도시였다. 로마市는 아직도 나름의 규모를 자랑했지만, 6세기경에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에게 최대 도시의 자리를 빼앗긴 상황이었다.[19] 또한 행정적으로도 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이후 점차 의미를 잃어갔으며 종국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며 제국과 관련된 모든 행정적 위상을 상실했다. 심지어 서로마가 있었을 당시에도 서로마의 행정은 밀라노와 라벤나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로마 시는 제국의 도시, 황제의 도시에서 교황의 도시로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옮겨가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市에서 으뜸 사도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순교하였고, 초기 기독교 역사의 중심지인 로마의 사도적 전통은 후발 주자로 제국의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폴리스보다 강력할 수 밖에 없으며, 로마의 주교인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도 으뜸 주교로 인정받았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어디까지나 동로마 제국의 수도라는 위상에 의해 성장할 수 있었던 후발 주자였다. 실제로 초기 기독교 박해기에 동방 주교들 중 가장 으뜸으로 취급받던 자리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였다. 후일 비잔티움 천도 이후에야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의 위상이 급상승하였고,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3조에서야 "왜냐하면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는 명예상의 특권으로 로마 교황 다음을 누리기 때문이다."라고 언급되었다. 또한 이후 칼케돈 공의회 제28조(콘스탄티노폴리스 시의 특권이 로마시와 동일하므로 교회적 직무에서 서열 2위로 격상)도 결국 교황에게 승인되지 않아 (제28조에 한하여) 합의가 안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 서유럽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로마市는 단순한 로마 제국의 옛 수도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영적인 수도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으며, 동시에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유럽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로마 제국의 문화적 유산들을 보존하는 곳이었다. 이에 따라서 서유럽에선 로마市의 보호자·지배자가 곧 로마 제국의 황제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이는 정교회와 합을 맞춰온 동로마 제국에서 여러 성지-주축 도시 중 하나일 뿐인, 심하게 말하면 발상지고 옛 수도지만 어쨌든 이제는 우리가 수도고 그 지배 아래의 점령지로 전락한, 로마市를 보는 시각과는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
종교적 시각과, 국가를 운영하는 행정적 시각은 차이가 날수 밖에 없으며, 로마라는 국가적 행정 체계가 무너지게 된 뒤의 서유럽에서는 당연히 종교적인 상징이 무게가 실리게 될수 밖에 없다.
4.4. 정리
''로마시에서 시작된 그 로마가 아니다''
이 말로 모든 것이 정리가 된다.
로마시에서 시작된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1세 시기에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겼고 애초부터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으로 구분되는 명칭도 없었다.
그러니 교황의 일관성있는 주장과 정치적 입김이 프랑크 왕국, 동프랑크(독일) 왕국과 맞아떨어져서 결국 로마 총대주교(교황)이 다른국가의 왕을 황제로 임명하는 당대에 말도 안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원래는 로마 총대주교(교황)가 로마 제국의 황제로부터 임명을 받는데
이 관계를 없애고 로마 총대주교(교황)이 다른 국가에게 황제를 임명해버렸다.
이것이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이자 로마 제국의 신민이였던 로마 총대주교(교황)가 실질적으로 로마 제국으로 부터 독립하며 서방세계의 아버지가 되었고 그것이 오늘 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시에서 시작된 그 로마가 아니다'' 가 정리된 결론이다.
정리를 하자면 이렇게 된다.
- 1. 신성 로마 제국은 으뜸 사도인 베드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사도 전승을 손실 없이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상실 이후 모스크바 총대주교구 설립까지 사도적 전통이 없다시피 한 러시아 제국이나 아예 이슬람 칼리프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 비해 독보적이다.
- 2. 신성 로마 제국은 로마 시민 및 지배자들의 인정이 있었다. 영토의 통치에 있어서는 비록 교황령이 베네치아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서 독립하여 로마를 잃고,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도 교황령과 신성 로마 제국이 공유하다 루돌프 1세가 교황에게 통치권을 전부 돌려줬지만, 밀라노는 프랑스 혁명 전쟁 중인 1801년까지 제국의 영토로 남았다. 반면 오스만 제국은 제국의 영토와 백성만을 흡수했을 뿐이고, 러시아 제국은 로마 제국의 신앙과 유민만을 흡수했을 뿐이었다.
- 3. 신성 로마 제국은 그 시작이 위조 문서에 기인하였기에 근본이 되는 제위가 없으며, 로마 황실과 혈연적 관계도 없기에 계승을 주장하는데 무리가 있다. 유럽에선 제국을 주장할 때 로마의 계승을 나름의 근거에 따라 주장하거나 최소한 다른 지역의 제국을 정복하여 가져오는 것이 정통인데, 공식적 기록이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멸망 후 제위를 반납하여 서로마 제위는 동로마 제국에 합쳐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로마 공화정 전통에 의한 시민 지지에 의거한 황제 정통성과는 다르다. 따라서 신성 로마 제국은 동로마의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와 결혼한 러시아 제국이나 무라트 1세 이후 혈연적 계승은 없어졌으나 정복으로 동로마를 정복한 오스만 제국에 비하면 정통성 문제에서 상당히 취약하다.
5. 볼테르의 발언
볼테르의 이 말이 간단하면서도 워낙 강렬하기 때문인지 마치 신성 로마 제국의 표어인 것처럼 유명해졌다. 이 발언만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허울뿐인 국가로 치부하기도 하는데, 볼테르는 신성 로마 제국의 체제에 대해서 비난한 것이 아니다. 볼테르의 말은 1346년 카를 4세가 금인칙서를 반포한 이후 제국 내 황제의 권위가 줄어들고, 카를 4세 본인이 이탈리아 영토에 대해 무관심함을 보이면서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국가가 되었다는 것뿐이다. 볼테르는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을 18세기까지 달고 다니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라 생각한 것이지[28] ,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 체제 자체는 공화적 요소가 섞여 있다면서 긍정적으로 보았다."Ce corps qui s’appelait et qui s’appelle encore le saint empire romain n’était en aucune manière ni saint, ni romain, ni empire."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딱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
— 볼테르, 나라들의 풍습과 정신에 관한 글(Essai sur l'histoire générale et sur les mœurs et l'esprit des nations) (1756) 중 챕터 70
- Joachim Whaley, The Holy Roman Empire: A Very Short Introduction, 10-11페이지
[1] 고대 중국 주나라에서도 춘추전국시대의 도래는 희성(姬姓) 동성제후국들 간의 친척관계가 세대를 거듭해가면서 멀어졌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더이상 주나라를 같이 떠받칠 친척이라기보다는 잠재적인 적으로 본 것에서부터 시작한 것인데 그것과 마찬가지의 원리다.[2] 카롤루스 가문의 외손이긴 했다. 독일계 국가에서 이후로도 나타나는 선거군주제의 선거 후보들은 다 이렇게 전 왕(가)의 외손, 사위, 먼 부계 친척 등으로 직간접적 혈연이 있었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이 살리카법의 본가인 만큼 부계가 바뀌면 왕조가 바뀌는 거다.[3] 서프랑크에서는 987년까지 좀 더 오래 갔고, 동프랑크와 마찬가지로 새 왕으로 뽑은 위그 카페 또한 구 카롤루스 왕가의 외손이었다.[4] 현대 역사가들은 10만은 뻥이고 1.5만 정도로 보고 있다. 물론 잉글랜드에 프랑스 절반을 가진 리처드 1세가 총동원을 내린 병력이 1만 남짓이란 걸 생각하면 원정에 1.5만을 데려온 것은 대단하긴 하지만. [5] 사실 정말로 듣보잡은 아니고, 카페 가문은 모계로나마 카롤링거와 연관이 있던 나름 명문가이다. 다만 세력이 거대한 공작 제후들이 자기들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카페를 왕으로 뽑은건 맞다(...)[6] 흥미로운 예 중 하나로, 서유럽에서 치즈 문화가 널리 퍼진 곳은 주로 북이탈리아 지역의 문화적 영향을 받은 지역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치즈의 가공 역시 나름의 기술적 기반이 필요한 (당시 기준으로는) 고급 기술이었고, 따라서 인구 밀집도가 높고 자본과 인프라가 축적되었던 북이탈리아 지역이 고대 로마 이래의 치즈 제작 기술을 간직하고 발전시켜 주변으로 퍼트린 것이다. 하물며 치즈 제작보다 더 전문성이 높고 비용이 많이 소모되는 고급 기술은 말할 것도 없다.[7] 제국 성립 초기의 독일 지역은 그냥 촌구석이자 훨씬 좁은 프랑스의 3분의 1 수준밖에 안 되는 인구를 자랑하는 동네였지만, 중세 말부터는 한자동맹의 개발이나 남독일 지역의 공업 발달 등으로 인해 유럽 내에서 손꼽히는 인구밀집 지역이 되었다. [8] 부르봉 대의 왕들도 카페로부터 이어지는 혈통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시민들도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은, 루이 16세의 기요틴 사형 직전에 사형집행하는 혁명군 측에서 왕을 거추장스러운 존칭 다 빼고 '루이 '''카페'''(Louis '''Capet''')'이라고 부르는 데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9] 실제로 하플로 그룹으로 봐도 이탈리아는 롬바르디아, 로마냐, 우르비아, 나폴리, 시칠리아로 남북을 따라 4개로 상당히 티나게 구분된다. 면적은 프랑스나 독일보다 작은데 유전적으로는 더 다양하다. 로마인을 기반으로 켈트, 게르만, 북아프리카, 흑인, 그리스인, 바이킹까지 매우 다양한 인종이 거쳐간 땅이기 때문이다.[10] 사실 인종과는 별개로 지리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지금 지도로 보기에는 바로 이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독일과 북이탈리아를 가르는 알프스 산맥은 전근대의 기술로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서 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지형이었다. 게다가 독일 왕국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지 않아 게르만 부족제의 풍습이 강하게 유지되었으나, 북이탈리아는 로마 제국의 핵심 지역으로써 로마 보편법을 중심으로 한 성문법에 의한 지배가 한번도 끊긴 적이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항상 이 독일 지역와 이탈리아 지역의 풍습 차이를 매우 염두한 통치를 해야했다.[11] 보헤미아, 신성 로마 제국 테두리 밖의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의 역외영토(헝가리, 크로아티아 등), 북이탈리아, 동방식민운동의 점령지 등도 간혹 같이 병치된다. 그러나 독일 내지(內地) 자체가 산산조각 나있게 그려져 있지는 않다.[12] 해외의 논문들 중에서는 로마가 나중에 트로이에서 상당히 가까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것에서 착안하여 이 쪽을 깊게 연구한 논문이 있다.[13] 로마 시와 그 주변 + 볼로냐, 라벤나(표시 안 되어 있지만) 등 북동부 해안 + 둘을 연결하는, 페루자(Perugia) 중심의 길고 좁은 회랑 모양의 영역.[14] 중프랑크의 분할 과정에서 부르군트는 독립된 국가였다가 1032년 콘라트 2세 때 신성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15] 그래서 밀라노를 포함한 북이탈리아 지역의 한 주이자, 넓게는 역사적 지리적 맥락에서 북이탈리아 전체를 의미하는 롬바르디아와 혼동의 여지가 있으나, 동로마의 남이탈리아 지역 중 한 테마의 이름이 Longobardo였다.[16] 유튜브의 유럽 역사 지도 영상을 보면 교황령 이남의 남이탈리아는 신성로마제국 색깔의 연한 색으로 표시되는 경우가 많다.[17] 루도비코(루트비히, 루이스)는 종래의 로마식 이름이 아니라 게르만 어원의 이름이다.[18] 즉 기진장은 진짜면 더 좋지만 가짜라도 뭐 아무래도 큰 상관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1204년까지는 진짜 로마 제국이 강대국으로 건재해 있었고, 수도 이름이 다름아닌 그 콘스탄티누스가 직접 세웠고 그의 이름이 후대에 붙은 콘스탄티노플이기 때문에, (종교와 대응되는)정치적인 의미에서 로마 제국 및 콘스탄티누스와의 연결성을 강하게 주장할수록 오히려 신성로마제국의 존립 정당성은 약해진다.[19] 6세기 중반의 동로마와 동고트 간의 고트 전쟁을 보면, 로마 시의 주인이 여러 번 왔다갔다했는데, 그러던 중 로마 시의 상주인구가 다 피난가거나 굶어죽어서 하나도 없었던(영어 위키백과 'Gothic war (535-554)에서 'Uninhabited'라고 나온다.) 시절도 있었으니 뭐 최대 도시의 위상은 진작에 사라졌다.[20] 5대 총대주교좌 중 로마를 제외한 4개 총대주교좌 지배[21] 로마와 라벤나는 중간에 나왔지만, 밀라노는 제국의 막바지까지 봉토로 남았다. 그러나 천년의 로마 역사에서 밀라노가 수도였던 것은 불과 백여년에 불과한 데다가 이미 전성기를 한참 넘긴 시절이어서 아무래도 무게감이 덜하다.[22] 러시아의 전신격 국가들과 로마 제국의 겹치는 영토는 크림 반도 뿐이고 그 너머의 우크라이나 본토(와 키예프)가 로마령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물며 모스크바야...[23] 서로마 멸망 후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로 빠르게 분열되었으며, 그 와중에 다시 교황파 대 황제파의 분쟁이 지속되어 통일된 의견이 모인 적이 사실상 없기 때문에, 신성 로마 황제가 로마시민의 지지를 받았다고는 보기 힘들다.[24] 오스만의 제국의 통치에 순응한 옛 동로마인들도 많았다.[25] 모계로 혈연이 이어진 것을 자칭 계승한 것이어서 정통성은 부족하다. 부계 쪽 상속권은 상속자들이 서유럽 국가들에 팔아버렸다. 그리고 이후에 표도르 1세이후로 동로마 혈통도 단절된다.[26] 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의 후손으로 혈연적 연관성이 있었으나 로마노프 왕조 때 단절됨. 다만 이전부터 류리크 왕조와 동로마 황실간 통혼은 오래전부터 이어졌고 그전부터 있었던 혈통은 로마노프의 모계 혈통으로 이어지니 어떻게 보면 혈연적 계승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27] 무라트 대에서 끊김[28] 게다가 이 때는 전술한 이유로 인해 이리저리 제후들이 제멋대로 놀기 시작하면서 제국은 문자 그대로 간판만 남은 상황이라 나폴레옹이 아니더라도 간판마저 떨어질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