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고속도로 씨리즈
1. 개요
'''88고속도로 씨리즈'''는 KBO 리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문 구단들[1] 이자 운명의 라이벌인 KIA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의 라이벌전을 일컫는 말이다. 양 구단의 연고지인 호남과 영남[2] 사이는 정치적인 스탠스, 지역감정 등으로 항상 라이벌 관계였고, 두 도시를 오가려면 반드시 광주대구고속도로(舊 88올림픽고속도로)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원래 발음은 '시리즈'가 맞는 표현이지만, KIA 구단 홍보자료나 언론에서도 일부러 씨리즈로 표기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 두 팀이 전통의 라이벌이고, 올드 유니폼을 입고 대결하며 추억을 상기시켜주니 이렇게 표기하는 듯 하다.
2. 역사
프로야구 출범 이전인 1970년대 영호남 지역갈등으로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다.[3] 프로야구 출범 이후에는 상징부터가 호랑이 VS 사자에 유니폼 색깔도 '''빨간색'''의 타이거즈와 '''파란색'''의 라이온즈[4] 이고, 각각 영호남을 상징하는 도시가 연고지인데다가 당시 정당지지 스탠스도 극명했었기에 여러 이유로 라이벌 구도가 형성됐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원년에는 경북고와 대구 상고가 전국대회를 휩쓸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대구의 야구 명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팀에 뛰던 선수들이 출범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삼성에 입단했기 때문에 삼성 라이온즈 선수단은 모두 국가대표 수준이었다. 여기에, 창단 이후로도 선수단에 투자를 많이하고 김일융, 김성길, 김기태 등 재일 한국-조선인 선수들을 적극 스카웃하는 등 재벌그룹 삼성이 밀어주었다.
반면 해태의 선수단 구성은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었다. 선수단 구성원이 약 열일곱명 정도로 선수층도 얇았다. 따라서 프로 원년에는 출전할 선수가 모자라 김성한이 억지로 투 웨이#s-2.1를 뛸 수 밖에 없었다. 훗날 타이거즈를 강자로 이끌게 되는 선동열은 당시 아직 고려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고 지역 연고학교인 광주일고의 황금기는 1983년에서야 시작됐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출범 이전, 광주는 전국대회였던 4도시(서울, 부산, 대구, 인천) 야구대회에 포함되지 못했던 것처럼 야구로 각광받지 못하고 있었다.
수준 높은 선수단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프로야구 출범 원년,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OB 베어스에게 우승을 내어주고 만다. 반면 선수가 부족해 삼성으로 부터 서정환을 1982년 12월에 트레이드 해온 해태는 이듬해 1983년 한국시리즈를 우승해버린다.
중형 과자회사 팀이었던 타이거즈는 부족한 지원을 근성으로 버틴다는 언더독#s-2 이미지까지 겹쳐 더 열띤 자존심 경쟁에 들어갔다. 해태에는 비록 삼성처럼 풍족한 지원은 없었지만 개성 넘치고 독특한 선수들이 많았다. 김응용 감독은 그의 리더십과 카리스마로 이 선수들을 잘 휘어잡았고 1985년 선동열의 입단으로 대등한 수준의 팀이 되고 나서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뜨거운 라이벌전중 하나로 인기몰이를 했다.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대한 염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이루지 못하고 1985년은 통합우승을 했지만, 한국시리즈를 치르지 않아 찜찜하던 찰나에 1986년 결국 두 팀이 1986년 한국시리즈 정상에서 맞닥뜨리게 된다. 한국시리즈 3차전 해태 버스 방화 사건으로 인해 양 팀간의 사이는 더 극단적으로 변했다. 게다가 그 다음해인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삼성이 23승의 김시진과 KBO 리그 역대 최강타선으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하여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며 무난히 우승할 것으로 평가를 받았으나, 전국체전 일정으로 인해 한국시리즈 일정이 다소 연기되었다. 이로 인해 해태는 정규시즌을 2위로 끝마치고 플레이오프에서 10월 12일까지 경기를 한 후, 8일 간의 휴식 후에 10월 21일부터 한국시리즈를 시작하며 누적 된 경기경험에 투수진도 적당히 쉴 만큼 쉬어서 상대적으로 삼성이 경기 감각적인 면에서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결국 해태가 4-0으로 시리즈 스윕으로 홈에서 손쉽게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는 해태가 도통 힘을 쓰지 못했는데, 1990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삼성이 선동열을 공략하여 시리즈 스윕을 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이후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또 다시 만나 7차전까지 가는 혈투[5] 끝에 신인 이종범의 맹활약으로 해태가 V7을 달성했다.
해태의 전성기 시절엔 삼성이 우승을 한 번 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한국시리즈에서는 항상 해태가 우승을 차지하고 그 후에는 삼성에서 이순철, 조계현, 정회열 등 해태의 선수들을 영입한다거나, 혹은 임창용, 이강철처럼 돈으로 영입을 해가며 해태를 따라해보는 시도를 보여주었으나, 당시엔 우승 횟수가 워낙 차이도 났고 삼성은 항상 준우승 전문이라는 놀림을 받았기 때문에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삼성이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시작으로 2011~2014 시즌엔 통합우승 4연패를 일궈내며 V8까지 달성하면서, 이러다 '우리의 우승 횟수를 뛰어넘을 수도 있겠다'는 타이거즈팬들의 여러 우려[6] 에 인터넷 상에서는 양 팀간의 설전이 계속 있었다. 하지만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이 발생하며 예상치 못한 삼성의 긴 암흑기가 시작되고, KIA는 공교롭게 FA로 삼성의 최형우를 영입하고 2017 한국시리즈에서 V11을 이룩하게 되며 다시 양 팀간의 상황이 미묘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8년 이후로는 양 팀이 사이좋게 추락하며 팬들도 예전처럼 싸우기보다는 좋았던 옛날을 추억하며 서로의 슬픈 신세(5,6위-7,8위-6,8위)를 한탄하는 훈훈한(?) 말들이 더 자주 오가는 편.
이렇듯 각종 설전이 오가지만 김응용 감독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 위 아 더 월드가 되기도 한다. 양 팀에서 위대한 업적을 쌓은 감독이라 김응용 이야기만 나오면 갑자기 화기애애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10년대 들어서는 단순히 팀을 떠나 지역간 화해모드로 접어들면서 서로를 돕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세한 건 달빛동맹 문서를 참조.
이런 양 팀의 라이벌 관계에 부응하여 2019년 12월 15일, 희망더하기 자선야구대회가 끝난 후 양준혁 삼성 라이온즈 OB회 사무총장이 이순철 SBS SPORTS 해설위원에게 공식으로 '타이거즈 vs 라이온즈 레전드 매치'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라이온즈 측은 이미 참여하겠다는 의지가 확실하고, 타이거즈는 이순철 해설위원이 타이거즈 OB회 송유석 총무에게 전달하겠다고 밝히면서 2020 시즌이 끝난 후 스토브 리그에 레전드 친선 매치가 열릴 확률이 높아졌다.
2.1. 2020년
6월 20일과 21일에 이뤄진 양 팀간의 경기에서는 KIA가 올드 유니폼을 착용하고 문희수가 시구, 김봉연이 시타를 맡으면서 조만간 이벤트 시리즈로 확대되는 것이 아니냐는 팬들의 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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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윌리엄스 감독이 KIA 감독으로 취임을 한 후 상대팀 감독에게 선물로 와인을 한 병씩 주고 있는데,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각 구단 감독들이 답례품을 준비하는 문화가 새롭게 탄생되었다. 7월 15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열린 경기에서, 삼성 허삼영 감독은 평소 와인을 즐긴다고 하여 연고지 인근 청도군의 감으로 만든 청도 감 와인을 답례품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7월 24일부터 26일까지 열리는 3연전에는 25일과 26일[8] 이틀 동안 드디어 양 팀간의 공식적인 첫 이벤트 시리즈 매치가 열렸다.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에서 열린 이 시리즈에는 서로 올드 유니폼을 착용하고 시리즈 첫째 날인 25일에는 선동열 前 감독이 시구했으며, KIA 프런트에서는 이번 이벤트에 맞춰 양현종과 오승환 사진이 함께 래핑된 기념구와 반팔 티셔츠, 열쇠고리 등 기념 상품을 판매했다. 그 외에도 TBC에서 챔필까지 찾아와 직접 취재를 하고, 전상현과 최채흥[9] 이 함께 하는 랜선 싸인회, 타이거즈-라이온즈 팬인 커플이나 부부 유니폼 인증샷, 80~90년대 양 팀간의 경기 직관 사진을 SNS에 올리면 기념 상품을 증정하는 이벤트도 열렸다. 첫 이벤트 시리즈 경기는 25~26일 모두 KIA가 승리했다.
이후 9월 17일~18일에는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두 번째 이벤트 시리즈가 열렸다. 그리고 이 두 경기도 모두 KIA가 승리했다.
3. 역대 상대 전적
3.1. 정규시즌
요약하면 해태 왕조 시절에는 해태 우위, 해태가 몰락하고 KIA에 인수된 이후에는 삼성 왕조의 건설로 인해 삼성 우위, 삼성 왕조가 몰락하고 나서는 두 팀이 백중세를 보이고 있다.
3.2. 포스트시즌
4. 양 팀 간 트레이드
4.1. 서정환
KBO 최초의 트레이드이자, 최초의 현금 트레이드이다. 주전에 밀려 해태로 트레이드 된 서정환은 해태왕조에 기여하며 해태의 트레이드 승리로 끝났다.
4.2. 김승남 ↔ 정성룡
포철공고 시절, 제2의 장효조라고 불릴 만큼 최고의 유망주였던 정성룡은 정작 프로에 입단하니 꽃을 피우지 못하고 2군을 맴돌았고, 좌타자에 항상 목 말라했던 김응용 감독의 눈에 띄어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1993 시즌에는 해태의 V7에 기여하였다.
4.3. 동봉철, 김태룡 ↔ 이병훈, 김훈
삼성 백인천 감독이 주도한 트레이드. 동봉철과 김태룡은 1996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어 우승을 맛봤다. 이병훈은 1997년 초 음주운전에 교통사고를 내고 거기에 후유증까지 얻으며 선수 생활이 어려워져 은퇴했다. 이 트레이드도 해태의 승.
4.4. 양준혁, 곽채진, 황두성 + 20억 ↔ 임창용
KBO 역대 트레이드 중 최대어급의 트레이드라고 불리는 트레이드다. 1997년 외환 위기로 해태 타이거즈의 모기업인 해태그룹은 힘들어졌고, 그로 인해 선수를 팔아야 해서 현금 트레이드를 실시했다. 임창용은 삼성에 가기 싫어서 울었다고 하고, 양준혁도 군기로 유명한 해태에 입단 거부 선언까지 하는 등 잡음이 많았으나 김응용 감독이 잘 달래서 결국 합류하였다.
양준혁은 아이러니하게 합류 후 1999 시즌을 커리어 하이를 달성하고 1년 뒤 LG 트윈스로 이적을 했고, 임창용은 삼성에서 전성기를 꽃피우며 결국 이 트레이드 이후 18년 후에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이 터진 후 방출되어 고향팀인 KIA 타이거즈로 합류했다.
4.5. 신동주 ↔ 강영식
삼성 감독으로 부임한 김응용이 자신이 총애하던 강영식을 데려오기 위해 주전 외야수인 신동주와 맞바꾼 트레이드. 하지만 강영식은 정작 권혁에 밀려 자주 출전하지 못했고, 그 이후 롯데 자이언츠로 신명철과 1:1 트레이드가 되었고, 롯데에서 활약했다.
신동주는 짧은 기간 동안 타이거즈의 주전 외야수로 활약했으나, 2003 시즌이 끝난 후 FA 마해영의 보상선수로 다시 삼성에 돌아갔다. 하지만 2005년, 최용호와 트레이드로 다시 KIA로 이적했으나 부진하여 방출되며 결국 은퇴한다.
4.6. 이강철
KBO FA 이적 1호였지만 극심한 부진으로 먹튀가 되어버린 이강철을 고향 팀으로 다시 돌려보낸 트레이드. 해태가 KIA로 인수되기 이틀 전에 성사된 트레이드여서 7월 31일 인천 SK전에서 이강철이 해태 유니폼을 입고 투구하는 마지막 모습을 볼 수도 있었지만, 당시 중부지방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우천취소되었다. 결국 이강철은 복귀하여 부활했고, KIA에서 성대하게 은퇴했다.
4.7. 신동주 ↔ 최용호
최용호는 트레이드 이후 1군 마운드에 한 번도 올라오지 못한 뒤 2006년 시즌 후 방출되었고, 신동주 역시 2006 시즌 중 방출되며 두 팀 모두 손해를 보게 된 트레이드가 되었다.
4.8. 김희걸 ↔ 조영훈
2005년 트레이드 이후 7년 간 선수 교류가 없었던 두 팀이 삼성 전임 감독을 지냈던 선동열 감독과의 인연으로 오랜만에 트레이드를 단행하였다. 김희걸은 삼성 라이온즈 불펜에서 추격조 롤을 수행했고, 조영훈은 결국 고질적인 수비불안과 부진으로 시즌이 끝난 후 특별지명을 통해 NC 다이노스로 이적했다.
4.9. 한기주 ↔ 이영욱
끊임없는 부상 및 재활로 인해 자리가 없어진 한기주가 KIA 프런트에 꾸준히 트레이드 요청을 했고, KIA 프런트는 여러 구단과 접촉해 본 결과 삼성이 이영욱을 제시하면서 1:1 트레이드가 되었다.
KIA의 경우 김호령의 군 입대로 생긴 로저 버나디나의 중견수 백업 롤을 수행해줄 것으로 기대했고, 삼성은 신용운이 그랬던 것처럼 삼성 트레이닝 센터의 힘을 빌려 부활하기를 기대했다.
결국 이영욱은 허벅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여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고, 한기주는 2018 시즌 초 잠깐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며 활약을 했지만, 결국 6점대 불펜이 되고 2019 시즌 이후 은퇴했다.
5. 양 팀을 오갔던 선수ㆍ지도자들
- 지도자로서 오간 경우 ★ 표시
- 강동우
- 강만식
- 강영식
- 강한울
- 곽채진
- 김건한
- 김기태 ★
- 김무종 ★
- 김영환
- 김응용 ★
- 김종모 ★
- 김주찬
- 김태룡
- 김평호 ★
- 김호 ★
- 나성용 ★
- 동봉철
- 마해영
- 문수호
- 박근홍
- 박승호 ★
- 박충식
- 박흥식 ★
- 서정환
- 선동열 ★
- 손지환
- 신동주
- 신용운
- 양일환 ★
- 양준혁
- 우병걸
- 유남호 ★
- 이강철
- 이경록
- 이동수
- 이병훈
- 이상윤 ★
- 이순철
- 이영수
- 이영욱
- 임창용
- 장재중★
- 장태수 ★
- 정성룡
- 정현발 ★
- 정회열
- 조계현
- 조영훈
- 조창수 ★
- 조충열 ★
- 진갑용 ★
- 최용호
- 최익성
- 최정용
- 최형우
- 한기주
- 한대화 ★
- 황두성
6. 양 팀의 VS놀이
- 김봉연 vs 이만수
- 실업 시절 홈런왕과 최고의 공격형 포수의 대결. 두 선수 모두 전국구 인기스타이기도 하였다. 원년 출범부터 홈런왕 경쟁으로 큰 이슈였다. 결국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은 김봉연이 차지했고 이후 누가 프로야구 최초 통산 100홈런을 먼저 달성할 것인지도 당시 엄청난 흥미거리였는데 이는 이만수가 먼저 달성했다.
- 김성한 vs 이만수
- 통산 성적으로 보면 이만수가 우세하지만, 당시에는 원년부터 90년대 초기까지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이자 영호남을 대표하는 타자들이었다. 팬들 관계는 치열했지만, 실제로 양 선수 사이는 매우 좋아서 김성한의 은퇴식 때 이만수가 자신의 경기를 제끼고 무등구장까지 찾아와 축하해주기도 했다. 광주MBC 김성한 은퇴식 영상
- 이종범 vs 양준혁
- 프로야구 커뮤니티 최고의 떡밥 중 하나이다. 통산 KBO 성적은 양준혁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1990년대 중반의 1인자였던 이종범에 밀려 좋은 성적에도 2인자에 머무르며 이종범이 떠난 이후에도 이승엽이 1인자로 입지를 공고히 하며 꾸준한 2인자 그룹으로 활약했기에 전성기 기준으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경우엔 이종범이 우세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또한 NPB에서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는 이종범의 성적이 부상 이전까지는 세이버매트릭스상으로 꽤 괜찮게 나오면서 '상위 리그에서 유의미한 성적은 어디까지 어떻게 인정해줘야 하는가?'의 예로 간혹 논쟁이 붙기도 한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상태이다. 통산 커리어는 양신의 우세, 전성기는 종범신의 우세.
- 임창용은 어디 레전드인가?
- 돈이 없어 임창용을 삼성에 팔아야 했던 해태와, 임창용의 전성기를 함께하며 좋은 시기를 같이한 삼성. 임창용이 삼성에서 엄청난 커리어를 쌓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거쳐 시카고 컵스에서 퇴단하고 삼성에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다들 삼전드의 컴백이라며 반겼으나[10] ,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이 터지며 방출되고, 당시 도박 선수 명단이 알려지기 전, 대다수 크보팬들은 "해당 선수들 은퇴해야한다!" 라는 의견이 많았는데, 정작 해당 선수 중 임창용이 있음이 알려지고 그 선수만 방출이 되자 일부 KIA팬들은 다시 불러 오자며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임창용은 2016년에 KIA에 복귀해서 반갑다는 환영을 받았고 3년간 활약하며 우승도 함께하였으나 결국 김기태 감독 및 프런트와 불화로 은퇴식도 없이 방출되며 현역 생활을 쓸쓸히 마무리했다. 이래저래 삼성팬들에게는 그의 전성기를 함께하며 좋은 순간들을 같이 보낸 부정할 수 없는 팀레전드이자 애증의 존재, KIA팬들에게는 아쉽게 떠나보낸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아픈 손가락이다.
- 김선빈 vs 김상수
- 데뷔 시즌도 비슷하고, 특히 2012~2014 시즌 선동열 감독 재임 시절에 양 팀간의 설전이 간혹 일어나며 누가 더 잘하는 유격수인지 온라인 상에서 키배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김상수는 2019 시즌부터 2루수로 포지션 변경을 했는데, 김선빈도 2020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2루수로 포지션 변경을 했고 누적 성적도 비슷하다.
- 무등 야구장 vs 대구시민구장
- 챔필과 라팍을 짓기 전, 양 팀팬들이 우리의 구장이 더 안좋다며 온라인 상에서는 서로 설전이 오가기도 했다. 무등야구장 물방개 사건과 시민구장 H빔 사건 등 양 팀은 정말 열악한 홈구장을 사용했었다. 참고로 무등구장은 1966년 완공, 대구구장은 1948년 완공이다.
-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vs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 챔필은 2014년 완공, 라팍은 2016년 완공이다. 참고로 챔필을 짓고 난 후 문제점들을 어느 정도 개선하여 라팍을 지었기 때문에 양 팀 팬들이 서로 자기 구장이 낫다며 초창기에 싸우기도 했으나 창원 NC 파크가 생기며 자연스럽게 논쟁은 사그러들었다.
7. 말말말
“직장을 옮기는 스트레스가 이렇게 큰 것인지 몰랐습니다. 허허벌판에 혼자 서있는 것 같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고. 어떤 잡지를 보니까 직장 옮기는 스트레스가 자식 먼저 보내는 스트레스나 부모 잃은 스트레스 못지않다고 했던데, 그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 것 같아. 아무튼 어려워요”
"영호남 라이벌팀인 해태와 삼성전은 아주 치열했다. 광주로 원정 경기를 가면, 해태 응원석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수 바보’라고 놀리기도 했었다.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담배 필터를 귀에 틀어막고 타석에 들어선 적도 있다. 그때는 해태 팬들이 너무 두려웠다. 나한테 바보라고 놀린 사람은 그들 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슬럼프에 빠질 정도로 ‘만수 바보’란 구호가 듣기 싫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또한 관심의 표현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KIA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30년 동안 쌓였던 한을 풀 기회다. 설령 우리가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관계 없다. 삼성과 KIA가 붙는 한국시리즈 매치업은 상당한 파괴력이 있는 흥행 카드가 되지 않겠는가"
나이쑤 내가 다 기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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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내가 은퇴하기까지 (대구에서) 야유는 감당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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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하고 코리안시리즈나 이런 게임을 하면 해태한테 많이 진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93년도에 저희들은 박충식 선수가 던졌고 2대1 인가 지고 있는 상황에서 선동열, 주자 2루에 놔두고 제가 2루타 쳐서 동점 만드는 상황이 있습니다. 다른 홈런 치고 이런 것보다도 그 게임이 아마도 제일 인상 깊게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 2018년 4월 16일, 이종두 인터뷰,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13]
을 추억하며 #
"당시 해태 타이거즈는 자금력이 없었고, 삼성 라이온즈는 있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본다. 삼성이 반대로 우승을 했다면 야구판이 어떻게 됐을까…. 삼성이 1980년대 우승을 많이 했다면 새 야구장도 빨리 지었을 것이고, 투자도 더 많았을 텐데. 자꾸 늦어졌다"
8. 여담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대구경북에 확산되자 KIA 선수단 및 코치진, 2020 시즌 주장 양현종과 이화원 대표이사가 각각 1,000만 원씩 총 3,000만 원을 대구적십자사에 기부를 하며 달빛동맹에 힘을 쓰기도 했다.
- KBO 리그 10개 구단 중 이 두 구단만 3루를 경기장 내 홈 덕아웃으로 사용하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는 북서향으로 지어진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시절부터 3루 덕아웃을 홈으로 썼고[14] KIA 타이거즈는 무등 야구장 시절에는 1루 덕아웃을 홈으로 썼지만 동북동향으로 지어진 새 야구장으로 이사 온 뒤부터는 3루 덕아웃을 홈으로 쓰고 있다. 과거 정북향으로 지어진 목동 야구장을 홈으로 쓰던 서울 히어로즈도 3루를 홈으로 썼으나 고척 스카이돔으로 옮긴 후로는 1루를 사용하고 있어서 3루를 홈 덕아웃으로 쓰는 팀은 이 두 구단만 남게 되었다.[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