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고속도로 씨리즈

 


'''88고속도로 씨리즈
88Expressway Series'''
}}}
[image]
[image]
'''KIA 타이거즈'''
'''''KIA TIGERS'''''
'''삼성 라이온즈'''
'''''Samsung Lions'''''
[image]
2020년 양 팀의 첫 이벤트 시리즈 엠블럼
'''정규시즌 전적
총 경기 - 705경기
'''
'''KIA 타이거즈'''
'''무승부'''
'''삼성 라이온즈'''
'''330승'''
'''12무'''
'''363승'''
'''최근 경기'''
삼성 라이온즈 1 : '''10 KIA 타이거즈'''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2020년 10월 25일)
'''다음 경기'''
-
'''첫 경기'''
'''삼성 라이온즈 5''' : 1 해태 타이거즈
무등 야구장
(1982년 4월 5일)
'''역대 최다 점수 도합'''
'''KIA 타이거즈 13''' : 12 삼성 라이온즈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2014년 6월 5일)
'''역대 최다 점수 차'''
삼성 라이온즈 1 : '''22 KIA 타이거즈'''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2017년 6월 29일)
'''포스트시즌 전적
총 경기 - 19경기
'''
'''KIA 타이거즈'''
'''무승부'''
'''삼성 라이온즈'''
'''12승'''
'''1무'''
'''6승'''
'''최근 경기'''
삼성 라이온즈 1 : '''4 해태 타이거즈'''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1993년 10월 26일, 1993년 한국시리즈 7차전)
'''첫 경기'''
삼성 라이온즈 3 : '''4 해태 타이거즈'''
무등 야구장
(1986년 10월 19일,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
'''역대 최다 점수 도합'''
'''삼성 라이온즈''' '''8''' : 7 해태 타이거즈
무등 야구장
(1990년 10월 14일, 1990년 플레이오프 2차전)
'''역대 최다 점수 차'''
삼성 라이온즈 2 : '''9 해태 타이거즈'''
무등 야구장
(1987년 10월 25일, 1987년 한국시리즈 4차전)
'''한국시리즈 우승 횟수'''
'''KIA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V11'''
'''V8'''
1. 개요
2. 역사
2.1. 2020년
3. 역대 상대 전적
3.1. 정규시즌
3.2. 포스트시즌
4. 양 팀 간 트레이드
5. 양 팀을 오갔던 선수ㆍ지도자들
6. 양 팀의 VS놀이
7. 말말말
8. 여담
9. 관련 문서
10. 둘러보기


1. 개요



'''88고속도로 씨리즈'''는 KBO 리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문 구단들[1]이자 운명의 라이벌인 KIA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의 라이벌전을 일컫는 말이다. 양 구단의 연고지인 호남영남[2] 사이는 정치적인 스탠스, 지역감정 등으로 항상 라이벌 관계였고, 두 도시를 오가려면 반드시 광주대구고속도로(舊 88올림픽고속도로)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원래 발음은 '시리즈'가 맞는 표현이지만, KIA 구단 홍보자료나 언론에서도 일부러 씨리즈로 표기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 두 팀이 전통의 라이벌이고, 올드 유니폼을 입고 대결하며 추억을 상기시켜주니 이렇게 표기하는 듯 하다.

2. 역사




프로야구 출범 이전인 1970년대 영호남 지역갈등으로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다.[3] 프로야구 출범 이후에는 상징부터가 호랑이 VS 사자에 유니폼 색깔도 '''빨간색'''의 타이거즈와 '''파란색'''의 라이온즈[4]이고, 각각 영호남을 상징하는 도시가 연고지인데다가 당시 정당지지 스탠스도 극명했었기에 여러 이유로 라이벌 구도가 형성됐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원년에는 경북고대구 상고가 전국대회를 휩쓸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대구의 야구 명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팀에 뛰던 선수들이 출범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삼성에 입단했기 때문에 삼성 라이온즈 선수단은 모두 국가대표 수준이었다. 여기에, 창단 이후로도 선수단에 투자를 많이하고 김일융, 김성길, 김기태재일 한국-조선인 선수들을 적극 스카웃하는 등 재벌그룹 삼성이 밀어주었다.
반면 해태의 선수단 구성은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었다. 선수단 구성원이 약 열일곱명 정도로 선수층도 얇았다. 따라서 프로 원년에는 출전할 선수가 모자라 김성한이 억지로 투 웨이#s-2.1를 뛸 수 밖에 없었다. 훗날 타이거즈를 강자로 이끌게 되는 선동열은 당시 아직 고려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고 지역 연고학교인 광주일고의 황금기는 1983년에서야 시작됐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출범 이전, 광주는 전국대회였던 4도시(서울, 부산, 대구, 인천) 야구대회에 포함되지 못했던 것처럼 야구로 각광받지 못하고 있었다.
수준 높은 선수단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프로야구 출범 원년,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OB 베어스에게 우승을 내어주고 만다. 반면 선수가 부족해 삼성으로 부터 서정환을 1982년 12월에 트레이드 해온 해태는 이듬해 1983년 한국시리즈를 우승해버린다.
중형 과자회사 팀이었던 타이거즈는 부족한 지원을 근성으로 버틴다는 언더독#s-2 이미지까지 겹쳐 더 열띤 자존심 경쟁에 들어갔다. 해태에는 비록 삼성처럼 풍족한 지원은 없었지만 개성 넘치고 독특한 선수들이 많았다. 김응용 감독은 그의 리더십과 카리스마로 이 선수들을 잘 휘어잡았고 1985년 선동열의 입단으로 대등한 수준의 팀이 되고 나서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뜨거운 라이벌전중 하나로 인기몰이를 했다.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대한 염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이루지 못하고 1985년은 통합우승을 했지만, 한국시리즈를 치르지 않아 찜찜하던 찰나에 1986년 결국 두 팀이 1986년 한국시리즈 정상에서 맞닥뜨리게 된다. 한국시리즈 3차전 해태 버스 방화 사건으로 인해 양 팀간의 사이는 더 극단적으로 변했다. 게다가 그 다음해인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삼성이 23승의 김시진KBO 리그 역대 최강타선으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하여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며 무난히 우승할 것으로 평가를 받았으나, 전국체전 일정으로 인해 한국시리즈 일정이 다소 연기되었다. 이로 인해 해태는 정규시즌을 2위로 끝마치고 플레이오프에서 10월 12일까지 경기를 한 후, 8일 간의 휴식 후에 10월 21일부터 한국시리즈를 시작하며 누적 된 경기경험에 투수진도 적당히 쉴 만큼 쉬어서 상대적으로 삼성이 경기 감각적인 면에서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결국 해태가 4-0으로 시리즈 스윕으로 홈에서 손쉽게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는 해태가 도통 힘을 쓰지 못했는데, 1990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삼성이 선동열을 공략하여 시리즈 스윕을 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이후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또 다시 만나 7차전까지 가는 혈투[5] 끝에 신인 이종범의 맹활약으로 해태가 V7을 달성했다.
해태의 전성기 시절엔 삼성이 우승을 한 번 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한국시리즈에서는 항상 해태가 우승을 차지하고 그 후에는 삼성에서 이순철, 조계현, 정회열 등 해태의 선수들을 영입한다거나, 혹은 임창용, 이강철처럼 돈으로 영입을 해가며 해태를 따라해보는 시도를 보여주었으나, 당시엔 우승 횟수가 워낙 차이도 났고 삼성은 항상 준우승 전문이라는 놀림을 받았기 때문에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삼성이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시작으로 2011~2014 시즌엔 통합우승 4연패를 일궈내며 V8까지 달성하면서, 이러다 '우리의 우승 횟수를 뛰어넘을 수도 있겠다'는 타이거즈팬들의 여러 우려[6]에 인터넷 상에서는 양 팀간의 설전이 계속 있었다. 하지만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이 발생하며 예상치 못한 삼성의 긴 암흑기가 시작되고, KIA는 공교롭게 FA로 삼성의 최형우를 영입하고 2017 한국시리즈에서 V11을 이룩하게 되며 다시 양 팀간의 상황이 미묘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8년 이후로는 양 팀이 사이좋게 추락하며 팬들도 예전처럼 싸우기보다는 좋았던 옛날을 추억하며 서로의 슬픈 신세(5,6위-7,8위-6,8위)를 한탄하는 훈훈한(?) 말들이 더 자주 오가는 편.
이렇듯 각종 설전이 오가지만 김응용 감독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 위 아 더 월드가 되기도 한다. 양 팀에서 위대한 업적을 쌓은 감독이라 김응용 이야기만 나오면 갑자기 화기애애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10년대 들어서는 단순히 팀을 떠나 지역간 화해모드로 접어들면서 서로를 돕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세한 건 달빛동맹 문서를 참조.
이런 양 팀의 라이벌 관계에 부응하여 2019년 12월 15일, 희망더하기 자선야구대회가 끝난 후 양준혁 삼성 라이온즈 OB회 사무총장이 이순철 SBS SPORTS 해설위원에게 공식으로 '타이거즈 vs 라이온즈 레전드 매치'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라이온즈 측은 이미 참여하겠다는 의지가 확실하고, 타이거즈는 이순철 해설위원이 타이거즈 OB회 송유석 총무에게 전달하겠다고 밝히면서 2020 시즌이 끝난 후 스토브 리그에 레전드 친선 매치가 열릴 확률이 높아졌다.

2.1. 2020년


6월 20일과 21일에 이뤄진 양 팀간의 경기에서는 KIA가 올드 유니폼을 착용하고 문희수가 시구, 김봉연이 시타를 맡으면서 조만간 이벤트 시리즈로 확대되는 것이 아니냐는 팬들의 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7]
[image]
맷 윌리엄스 감독이 KIA 감독으로 취임을 한 후 상대팀 감독에게 선물로 와인을 한 병씩 주고 있는데,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각 구단 감독들이 답례품을 준비하는 문화가 새롭게 탄생되었다. 7월 15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열린 경기에서, 삼성 허삼영 감독은 평소 와인을 즐긴다고 하여 연고지 인근 청도군의 감으로 만든 청도 감 와인을 답례품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7월 24일부터 26일까지 열리는 3연전에는 25일과 26일[8] 이틀 동안 드디어 양 팀간의 공식적인 첫 이벤트 시리즈 매치가 열렸다.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에서 열린 이 시리즈에는 서로 올드 유니폼을 착용하고 시리즈 첫째 날인 25일에는 선동열 前 감독이 시구했으며, KIA 프런트에서는 이번 이벤트에 맞춰 양현종오승환 사진이 함께 래핑된 기념구와 반팔 티셔츠, 열쇠고리 등 기념 상품을 판매했다. 그 외에도 TBC에서 챔필까지 찾아와 직접 취재를 하고, 전상현최채흥[9]이 함께 하는 랜선 싸인회, 타이거즈-라이온즈 팬인 커플이나 부부 유니폼 인증샷, 80~90년대 양 팀간의 경기 직관 사진을 SNS에 올리면 기념 상품을 증정하는 이벤트도 열렸다. 첫 이벤트 시리즈 경기는 25~26일 모두 KIA가 승리했다.
이후 9월 17일~18일에는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두 번째 이벤트 시리즈가 열렸다. 그리고 이 두 경기도 모두 KIA가 승리했다.

3. 역대 상대 전적



3.1. 정규시즌


'''연도'''
'''KIA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상대우위'''
1982년
3승 13패
13승 3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1983년
11승 8패 1무
8승 11패 1무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84년
11승 9패
9승 11패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85년
7승 15패
15승 7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1986년
11승 6패 1무
6승 11패 1무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87년
9승 9패
9승 9패
'''동률'''
1988년
11승 7패
7승 11패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89년
12승 8패
8승 12패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90년
13승 7패
7승 13패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91년
14승 4패
4승 14패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92년
8승 10패
10승 8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1993년
7승 11패
11승 7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1994년
10승 7패 1무
7승 10패 1무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95년
6승 11패 1무
11승 6패 1무
'''삼성 라이온즈''' 우위
1996년
11승 7패
7승 11패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97년
10승 7패 1무
7승 10패 1무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98년
8승 10패
10승 8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1999년
8승 10패
10승 8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0년
7승 11패 1무
11승 7패 1무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1년
6승 13패
13승 6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2년
7승 12패
12승 7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3년
12승 5패 2무
5승 12패 2무
'''KIA 타이거즈''' 우위
2004년
6승 12패 1무
12승 6패 1무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5년
3승 15패
15승 3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6년
9승 7패 2무
7승 9패 2무
'''KIA 타이거즈''' 우위
2007년
8승 10패
10승 8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8년
9승 9패
9승 9패
'''동률'''
2009년
13승 6패
6승 13패
'''KIA 타이거즈''' 우위
2010년
7승 12패
12승 7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11년
7승 12패
12승 7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12년
6승 12패 1무
12승 6패 1무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13년
4승 12패
12승 4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14년
4승 12패
12승 4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15년
8승 8패
8승 8패
'''동률'''
2016년
8승 8패
8승 8패
'''동률'''
2017년
12승 4패
4승 12패
'''KIA 타이거즈''' 우위
2018년
6승 10패
10승 6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19년
8승 8패
8승 8패
'''동률'''
2020년
10승 6패
6승 10패
'''KIA 타이거즈''' 우위
'''통산 전적'''
330승 363패 12무
363승 330패 12무
'''삼성 라이온즈''' 우위
요약하면 해태 왕조 시절에는 해태 우위, 해태가 몰락하고 KIA에 인수된 이후에는 삼성 왕조의 건설로 인해 삼성 우위, 삼성 왕조가 몰락하고 나서는 두 팀이 백중세를 보이고 있다.

3.2. 포스트시즌


'''연도'''
'''KIA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결과'''
1986년 한국시리즈
4승 1패
1승 4패
'''해태 타이거즈 V2'''
1987년 한국시리즈
4승
4패
'''해태 타이거즈 V3'''
1990년 플레이오프
3패
3승
'''삼성 라이온즈 KS 진출'''
1993년 한국시리즈
4승 2패 1무
2승 4패 1무
'''해태 타이거즈 V7'''
'''통산 전적'''
12승 6패 1무
6승 12패 1무
'''KIA 타이거즈''' 우위

4. 양 팀 간 트레이드



4.1. 서정환


트레이드 일자
1982.12.07



서정환

현금
KBO 최초의 트레이드이자, 최초의 현금 트레이드이다. 주전에 밀려 해태로 트레이드 된 서정환은 해태왕조에 기여하며 해태의 트레이드 승리로 끝났다.

4.2. 김승남 ↔ 정성룡


트레이드 일자
1992.11.17



김승남

정성룡
포철공고 시절, 제2의 장효조라고 불릴 만큼 최고의 유망주였던 정성룡은 정작 프로에 입단하니 꽃을 피우지 못하고 2군을 맴돌았고, 좌타자에 항상 목 말라했던 김응용 감독의 눈에 띄어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1993 시즌에는 해태의 V7에 기여하였다.

4.3. 동봉철, 김태룡이병훈, 김훈


트레이드 일자
1996.05.25



동봉철, 김태룡

이병훈, 김훈
삼성 백인천 감독이 주도한 트레이드. 동봉철김태룡1996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어 우승을 맛봤다. 이병훈은 1997년 초 음주운전에 교통사고를 내고 거기에 후유증까지 얻으며 선수 생활이 어려워져 은퇴했다. 이 트레이드도 해태의 승.

4.4. 양준혁, 곽채진, 황두성 + 20억 ↔ 임창용


트레이드 일자
1998.12.14



양준혁, 곽채진, 황두성 + 20억

임창용
KBO 역대 트레이드 중 최대어급의 트레이드라고 불리는 트레이드다. 1997년 외환 위기로 해태 타이거즈의 모기업인 해태그룹은 힘들어졌고, 그로 인해 선수를 팔아야 해서 현금 트레이드를 실시했다. 임창용은 삼성에 가기 싫어서 울었다고 하고, 양준혁도 군기로 유명한 해태에 입단 거부 선언까지 하는 등 잡음이 많았으나 김응용 감독이 잘 달래서 결국 합류하였다.
양준혁은 아이러니하게 합류 후 1999 시즌을 커리어 하이를 달성하고 1년 뒤 LG 트윈스로 이적을 했고, 임창용은 삼성에서 전성기를 꽃피우며 결국 이 트레이드 이후 18년 후에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이 터진 후 방출되어 고향팀인 KIA 타이거즈로 합류했다.

4.5. 신동주강영식


트레이드 일자
2001.03.21



신동주

강영식
삼성 감독으로 부임한 김응용이 자신이 총애하던 강영식을 데려오기 위해 주전 외야수인 신동주와 맞바꾼 트레이드. 하지만 강영식은 정작 권혁에 밀려 자주 출전하지 못했고, 그 이후 롯데 자이언츠신명철과 1:1 트레이드가 되었고, 롯데에서 활약했다.
신동주는 짧은 기간 동안 타이거즈의 주전 외야수로 활약했으나, 2003 시즌이 끝난 후 FA 마해영의 보상선수로 다시 삼성에 돌아갔다. 하지만 2005년, 최용호와 트레이드로 다시 KIA로 이적했으나 부진하여 방출되며 결국 은퇴한다.

4.6. 이강철


트레이드 일자
2001.07.30



이강철

2,600만원
KBO FA 이적 1호였지만 극심한 부진으로 먹튀가 되어버린 이강철을 고향 팀으로 다시 돌려보낸 트레이드. 해태가 KIA로 인수되기 이틀 전에 성사된 트레이드여서 7월 31일 인천 SK전에서 이강철이 해태 유니폼을 입고 투구하는 마지막 모습을 볼 수도 있었지만, 당시 중부지방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우천취소되었다. 결국 이강철은 복귀하여 부활했고, KIA에서 성대하게 은퇴했다.

4.7. 신동주최용호


트레이드 일자
2005.07.24


[[KIA 타이거즈|[[파일:external/s20.postimg.org/KIAtigersold.png|width=65
]]]]
신동주

최용호
최용호는 트레이드 이후 1군 마운드에 한 번도 올라오지 못한 뒤 2006년 시즌 후 방출되었고, 신동주 역시 2006 시즌 중 방출되며 두 팀 모두 손해를 보게 된 트레이드가 되었다.

4.8. 김희걸조영훈


트레이드 일자
2012.06.21



김희걸

조영훈
2005년 트레이드 이후 7년 간 선수 교류가 없었던 두 팀이 삼성 전임 감독을 지냈던 선동열 감독과의 인연으로 오랜만에 트레이드를 단행하였다. 김희걸은 삼성 라이온즈 불펜에서 추격조 롤을 수행했고, 조영훈은 결국 고질적인 수비불안과 부진으로 시즌이 끝난 후 특별지명을 통해 NC 다이노스로 이적했다.

4.9. 한기주이영욱


트레이드 일자
2017.11.29



한기주

이영욱
끊임없는 부상 및 재활로 인해 자리가 없어진 한기주가 KIA 프런트에 꾸준히 트레이드 요청을 했고, KIA 프런트는 여러 구단과 접촉해 본 결과 삼성이 이영욱을 제시하면서 1:1 트레이드가 되었다.
KIA의 경우 김호령의 군 입대로 생긴 로저 버나디나의 중견수 백업 롤을 수행해줄 것으로 기대했고, 삼성은 신용운이 그랬던 것처럼 삼성 트레이닝 센터의 힘을 빌려 부활하기를 기대했다.
결국 이영욱은 허벅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여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고, 한기주는 2018 시즌 초 잠깐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며 활약을 했지만, 결국 6점대 불펜이 되고 2019 시즌 이후 은퇴했다.

5. 양 팀을 오갔던 선수ㆍ지도자들


  • 지도자로서 오간 경우 ★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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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양 팀의 VS놀이


  • 김봉연 vs 이만수
    • 실업 시절 홈런왕과 최고의 공격형 포수의 대결. 두 선수 모두 전국구 인기스타이기도 하였다. 원년 출범부터 홈런왕 경쟁으로 큰 이슈였다. 결국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은 김봉연이 차지했고 이후 누가 프로야구 최초 통산 100홈런을 먼저 달성할 것인지도 당시 엄청난 흥미거리였는데 이는 이만수가 먼저 달성했다.
  • 김성한 vs 이만수
    • 통산 성적으로 보면 이만수가 우세하지만, 당시에는 원년부터 90년대 초기까지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이자 영호남을 대표하는 타자들이었다. 팬들 관계는 치열했지만, 실제로 양 선수 사이는 매우 좋아서 김성한의 은퇴식 때 이만수가 자신의 경기를 제끼고 무등구장까지 찾아와 축하해주기도 했다. 광주MBC 김성한 은퇴식 영상
  • 이종범 vs 양준혁
    • 프로야구 커뮤니티 최고의 떡밥 중 하나이다. 통산 KBO 성적은 양준혁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1990년대 중반의 1인자였던 이종범에 밀려 좋은 성적에도 2인자에 머무르며 이종범이 떠난 이후에도 이승엽이 1인자로 입지를 공고히 하며 꾸준한 2인자 그룹으로 활약했기에 전성기 기준으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경우엔 이종범이 우세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또한 NPB에서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는 이종범의 성적이 부상 이전까지는 세이버매트릭스상으로 꽤 괜찮게 나오면서 '상위 리그에서 유의미한 성적은 어디까지 어떻게 인정해줘야 하는가?'의 예로 간혹 논쟁이 붙기도 한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상태이다. 통산 커리어는 양신의 우세, 전성기는 종범신의 우세.
  • 임창용은 어디 레전드인가?
    • 돈이 없어 임창용을 삼성에 팔아야 했던 해태와, 임창용의 전성기를 함께하며 좋은 시기를 같이한 삼성. 임창용이 삼성에서 엄청난 커리어를 쌓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거쳐 시카고 컵스에서 퇴단하고 삼성에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다들 삼전드의 컴백이라며 반겼으나[10],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이 터지며 방출되고, 당시 도박 선수 명단이 알려지기 전, 대다수 크보팬들은 "해당 선수들 은퇴해야한다!" 라는 의견이 많았는데, 정작 해당 선수 중 임창용이 있음이 알려지고 그 선수만 방출이 되자 일부 KIA팬들은 다시 불러 오자며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임창용은 2016년에 KIA에 복귀해서 반갑다는 환영을 받았고 3년간 활약하며 우승도 함께하였으나 결국 김기태 감독 및 프런트와 불화로 은퇴식도 없이 방출되며 현역 생활을 쓸쓸히 마무리했다. 이래저래 삼성팬들에게는 그의 전성기를 함께하며 좋은 순간들을 같이 보낸 부정할 수 없는 팀레전드이자 애증의 존재, KIA팬들에게는 아쉽게 떠나보낸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아픈 손가락이다.
  • 김선빈 vs 김상수
    • 데뷔 시즌도 비슷하고, 특히 2012~2014 시즌 선동열 감독 재임 시절에 양 팀간의 설전이 간혹 일어나며 누가 더 잘하는 유격수인지 온라인 상에서 키배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김상수는 2019 시즌부터 2루수로 포지션 변경을 했는데, 김선빈도 2020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2루수로 포지션 변경을 했고 누적 성적도 비슷하다.
  • 김주형정인욱(우동균 or 이영욱)
    • 양 팀간 안터지는 노망주들끼리 바꿔보자고 양 팀팬들이 서로 트레이드 의견을 묻기도 했다. 당연히 프런트에서는 시도조차 해본 적도 없고 팬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만 하는 이야기. 다만 이영욱은 한기주와 트레이드 되기도 했다.
  • 무등 야구장 vs 대구시민구장
    • 챔필과 라팍을 짓기 전, 양 팀팬들이 우리의 구장이 더 안좋다며 온라인 상에서는 서로 설전이 오가기도 했다. 무등야구장 물방개 사건과 시민구장 H빔 사건 등 양 팀은 정말 열악한 홈구장을 사용했었다. 참고로 무등구장은 1966년 완공, 대구구장은 1948년 완공이다.
그 외에도 '양 팀 중 어디가 더 명문 팀인가' 등 파이어가 나는 주제들이 많아서 팬덤이 충돌하기도 한다.

7. 말말말


“직장을 옮기는 스트레스가 이렇게 큰 것인지 몰랐습니다. 허허벌판에 혼자 서있는 것 같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고. 어떤 잡지를 보니까 직장 옮기는 스트레스가 자식 먼저 보내는 스트레스나 부모 잃은 스트레스 못지않다고 했던데, 그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 것 같아. 아무튼 어려워요”

- 2000년 11월 5일, 삼성 이적 후 김응용 인터뷰 #

"영호남 라이벌팀인 해태와 삼성전은 아주 치열했다. 광주로 원정 경기를 가면, 해태 응원석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수 바보’라고 놀리기도 했었다.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담배 필터를 귀에 틀어막고 타석에 들어선 적도 있다. 그때는 해태 팬들이 너무 두려웠다. 나한테 바보라고 놀린 사람은 그들 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슬럼프에 빠질 정도로 ‘만수 바보’란 구호가 듣기 싫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또한 관심의 표현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 2011년 7월 4일, 이만수 인터뷰 #

"KIA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30년 동안 쌓였던 한을 풀 기회다. 설령 우리가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관계 없다. 삼성과 KIA가 붙는 한국시리즈 매치업은 상당한 파괴력이 있는 흥행 카드가 되지 않겠는가"

- 2011년 7월 5일, 삼성 구단 관계자 인터뷰 #

나이쑤 내가 다 기뻤음

- 2013년 7월 2일, 손동욱정병곤에게[11]

#

"아마 내가 은퇴하기까지 (대구에서) 야유는 감당해야 하지 않겠나"

- 2017년 7월 18일, 최형우[12]

#

"해태하고 코리안시리즈나 이런 게임을 하면 해태한테 많이 진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93년도에 저희들은 박충식 선수가 던졌고 2대1 인가 지고 있는 상황에서 선동열, 주자 2루에 놔두고 제가 2루타 쳐서 동점 만드는 상황이 있습니다. 다른 홈런 치고 이런 것보다도 그 게임이 아마도 제일 인상 깊게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 2018년 4월 16일, 이종두 인터뷰,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13]

을 추억하며 #

"당시 해태 타이거즈는 자금력이 없었고, 삼성 라이온즈는 있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본다. 삼성이 반대로 우승을 했다면 야구판이 어떻게 됐을까…. 삼성이 1980년대 우승을 많이 했다면 새 야구장도 빨리 지었을 것이고, 투자도 더 많았을 텐데. 자꾸 늦어졌다"

- 2019년 8월 15일, 류중일 인터뷰 #


8. 여담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대구경북에 확산되자 KIA 선수단 및 코치진, 2020 시즌 주장 양현종과 이화원 대표이사가 각각 1,000만 원씩 총 3,000만 원을 대구적십자사에 기부를 하며 달빛동맹에 힘을 쓰기도 했다.
  • KBO 리그 10개 구단 중 이 두 구단만 3루를 경기장 내 홈 덕아웃으로 사용하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는 북서향으로 지어진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시절부터 3루 덕아웃을 홈으로 썼고[14] KIA 타이거즈무등 야구장 시절에는 1루 덕아웃을 홈으로 썼지만 동북동향으로 지어진 새 야구장으로 이사 온 뒤부터는 3루 덕아웃을 홈으로 쓰고 있다. 과거 정북향으로 지어진 목동 야구장을 홈으로 쓰던 서울 히어로즈도 3루를 홈으로 썼으나 고척 스카이돔으로 옮긴 후로는 1루를 사용하고 있어서 3루를 홈 덕아웃으로 쓰는 팀은 이 두 구단만 남게 되었다.[15][16]

9. 관련 문서



10. 둘러보기





[1] 양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 도합만 해도 무려 '''19회'''다. 나머지 8팀은 우승 횟수(15회)를 다 합쳐도 미치지 못한다.[2] 여기서는 TK 한정이다. 같은 영남이어도 TK와 PK의 정치 성향은 3당 합당 이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달랐고, 현재도 큰 차이가 있다.[3] 다만 박정희 집권기에 이 지역 갈등이 고착화된 것은 아니다.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러한 경향이 보이기는 했으나 10월 유신 이후 체육관 선거가 되면서 이 구도는 잠잠해졌다. 이 지역 갈등이 제대로 고착화된 것은 5.18 민주화운동으로 신군부가 대놓고 호남 차별을 시작하고, 민주화 이후 3당 합당을 거치며 PK 지역이 보수 지역으로, 호남 지역이 반(反)보수 지역으로 고착화된 것이 더 큰 이유이다.[4] 다만, 삼성은 원년에는 파랑색 유니폼이 아닌 빨강색 유니폼을 입기도 했다. 자세한 건 삼성 라이온즈/유니폼 참조.[5]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를 7차전까지 치른 최초의 시리즈였다. 나머지는 SK 와이번스와 겨룬 2009년 한국시리즈이다.[6] 게다가 KIA는 2011 시즌엔 4위에 그쳤고, 2012년부터는 선동열 감독의 암흑기가 시작되어서 더 비참함을 느꼈다.[7] 원래는 이날부터 이벤트를 개시하려다 준비 부족으로 미뤄졌다는 루머가 떠돌았을 정도였다.[8] 원래 24일~25일에 개최하려고 했으나, 24일이 우천취소가 되면서 하루씩 미뤄졌다.[9] 둘은 대구상원고등학교 2년 선후배 사이다. 생년월일은 1년 차이이나, 전상현이 부상으로 인해 1년 유급했기 때문.[10] 사실 임창용은 해외 시절 인터뷰를 여러 번 하면서 말년은 타이거즈에서 뛰고 싶다고 하였으나, FA 신분이 아니라 삼성으로 복귀해야만 했다. 2011 시즌 인터뷰 당시에는 타이거즈 복귀를 강력 어필했으나, 그 다음 해부터 사이가 껄끄럽던 선동열 감독이 부임하자 그 이야기가 흐지부지 되기도 했다. 쉽게 말하면 KIA나 삼성 어디라도 부정적이지 않지만 선동열 있는 곳은 안 간다[11] 자신의 페이스북에 2013년 6월 28일, 양 팀간의 경기에서 끝내기 안타를 친 삼성 정병곤의 페이스북에서 KIA 손동욱이 '나이쑤 내가 다 기뻤음'이란 댓글을 달았다가 KIA팬들로부터 엄청난 비난과 질타를 받았다. 뒤늦게 이에 대해 단국대학교 선후배 사이라서 그랬다고 해명했지만, 잠시 더위를 먹어서 그랬다는 핑계로 더더욱 욕을 먹었다.[12] FA로 KIA 이적 당시, 삼성에 '소외감'을 느꼈다는 실언으로 이적 후 첫 시즌인 2017 시즌 시범경기부터 라팍 원정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야유를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KBO 올스타전/2017년#s-10.1을 참고 바람.[13] 이 경기는 박충식이 전설의 181구를 던지는 투혼과 15회 공방 끝에 무승부로 끝난 한국시리즈 명경기로 불리는 경기 중 하나다.[14] 1984년과 2000년 딱 두 시즌만 1루 덕아웃을 홈으로 썼다. 그러나 다시 3루로 돌아오게 된다.[15] 이들 팀 외에 한때 3루 덕아웃을 홈으로 쓰던 팀도 있다. 과거 인천을 연고로 했던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가 3루 덕아웃을 홈으로 썼다. 희한한 것은 이 당시 홈구장인 숭의야구장은 남향으로 지어져 있어서 3루 덕아웃을 홈으로 쓰면 시종일관 홈팬들과 홈팀 선수들이 땡볕을 바라봐야 하는 불편이 생긴다. 그럼에도 3루 덕아웃을 고집했던 것은 선수단의 비상시 동선 때문이었다. 이유인즉슨... 청보와 태평양의 성적이 처참하게 안 좋다보니 거의 매 경기마다 극렬 관중들이 난동을 피웠는데 선수들이 이를 피해서 빨리 도망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고 결국 3루 덕아웃으로 가면 성난 관중들을 피해 빨리 도망갈 수 있다는(...) 답을 찾았다. 실제로 당시 3루 쪽은 인천공설운동장의 정문과 더 가까웠다. 결국 팀의 성적이 정상을 되찾은 1994년이 돼서야 홈 덕아웃이 1루로 돌아오게 된다.[16] 2020년 잠실시리즈 전 경기에 한해 LG 트윈스가 3루 덕아웃을 사용한다. 원래 LG 트윈스 홈경기라면 1루 덕아웃을 홈으로 써야 하지만 락커룸이 3루 덕아웃 뒤에 있기 때문에 그라운드 위나 구장 내 실내 복도를 통해 1루와 3루를 오가야 한다. 그런 가운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 창궐하면서 선수단 이동으로 인한 불필요한 접촉을 막기 위해 각 팀의 락커룸과 인접한 덕아웃을 홈으로 쓰기로 한 것이다. 잠실 3루 덕아웃 뒤에는 LG 트윈스 락커룸이 있고 1루 덕아웃 뒤에는 두산 베어스 락커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