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평가

 



1. 개요
2. 최초의 자력 통일
3. 단일 국가관 정착
4. 고구려 계승
5. 무장의 나라
6. 한국사 발전
7. 다른 한민족 왕조들과의 비교


1. 개요


고려의 여러 가지 평가에 대하여 다룬다.

2. 최초의 자력 통일


고려는 신라와 달리 외세의 개입 없이 통일을 이루어냈다. 순수하게 한반도의 토착 세력들이 이룬 통일이기 때문에 고려왕조는 큰 의미를 갖는다. 통일신라와 비교해서 고려의 통일에 보다 정통성을 부여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물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외세를 끌어들인 것이 무조건 폄하할 일은 아니다. 부족한 국력을 극복하기 위해 동맹을 끌어들이는 것도 전략이자 외교력이다. 그러나 그 부작용으로 신라는 당나라의 내정간섭을 받아야 했고, 삼국을 멸한 뒤에도 한 차례 대규모 전쟁을 치른 후에야 겨우 당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게다가 신라의 통일 당위성에 대한 의문은 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반면, 왕건의 고려는 한반도 최초로 '완전한 자력 통일을 성취한 나라'가 되었다. 고려는 신라와 달리 외세와 손을 잡을 의지가 없었다. 게다가 당시 국제정세도 한반도 주변 세력들이 모두 한반도 정세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기에, 고려에게 비교적 수월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반도와 지정학적으로 밀접한 당나라만주후삼국에 버금가는 난세에 처해 있었고, 해양 세력인 일본도 천황 권력의 약화와 고립주의로 나아가고 있었기에 한반도 정세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이런 고려와 달리 후백제는 외교에 꽤나 공을 들였다. 후백제는 거란, 일본과 힘을 합쳐 삼면에서 고려를 집어삼키려고 했다. 그러나 위와 같이 후백제에 도움을 줄만한 세력들이 제앞가림하기도 바빴기 때문에 의미있는 외교적 협력을 받지 못했다. 일본에 보낸 사신은 문전박대당했고 거란에 보낸 사신단은 항해 중 풍랑에 몰살당했다.

3. 단일 국가관 정착


고려는 한민족으로서의 의식적인 통합을 이루고 단일한 국가관을 정착시켰다. 현재 대한민국북한까지 이어지는 한민족이라는 의식은 이때부터 시작했다. 그러므로 한국사에서 고려의 통일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높다. 고려 이전 신라삼국통일도 삼국 유민을 단일한 왕조가 통치하는 상태로 만들기는 했다. 이는 한반도의 민족들을 하나의 정치체로서 물리적으로 합쳐놓는 데 성공한 것이었으나, 신라는 고려와는 달리 그들의 의식까지 통합해내진 못했다.
신라 조정은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흡수하기는 했으나 그들을 '신라인'으로 만드는 데는 소홀했다. 물론 신라가 유독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특별히 박해했던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삼한일통 사상을 주입하기도 했고, 지방민 차별이라는 것도 통일 이전 기존 신라인들에게도 적용되었던 골품제를 비롯한 여러 신분제와 차등 대우들을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에게 기존 신라인들보다 더 큰 박탈감을 주었다. 이런 박탈감 때문에 신라가 쇠약해질 때까지 200여년의 시간이 지날 동안 통일신라 백성들의 통합된 국가관이 생성되지 못했고, 결국 시간이 지나 신라 정부의 통치력이 약해지자 신라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1][2]
반면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국임을 자처하면서도 신라의 삼한일통 의식도 이어받았고, 그에 따라 고려시대에는 신화와 역사의식의 개변이 이루어졌다. 패서지역 기반 성인인 단군, 기자, 동명성왕[3]은 삼국 이전부터 한반도 모든 민족의 시조였던 것으로 격상되었다.[4] 단군과 기자[5]가 통치한 고조선은 삼한에 건립된 최초의 국가이자 시조국으로 공인되었고,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은 부벽루, 동명왕편 등 고려시대의 각종 문학 작품에 등장하였다. 이런 의식적인 개변 덕분에 마침내 한반도에 사는 민족들이 '''단일 공동체'''의 개념을 형성할 수 있었다.

4. 고구려 계승


신라구층탑을 만들어 일통지업을 달성했으니, '''지금 개경에 칠층탑을, 서경구층탑을 만들 것이다.'''

그 현공을 빌려 군추를 없애 삼한(三韓)을 일가(一家)로 모으려 하니 경은 날 위해 소를 지어달라.

- 고려사 최응 열전 중 발췌.

..."최근 서경(西京)을 세우는 것을 끝내고 민(民)을 옮겨 그 곳을 채우니, 이는 지력(地力)을 빌려 삼한(三韓)을 평정하고 '''그 곳에 도읍하려 함이었다"'''...

- 고려사 태조 세가 재위 15년(925년) 5월 중 발췌.

이제현이 찬하여 말하길: "충선왕께서 늘 이르셨다: '...(생략)... 우리 태조께서 즉위하신 후, 김부가 아직 방문하지 않고 견훤이 아직 잡히지 않았는데, 자주 서도(西都)에 행차하시어 북방을 친히 순시하시니, '''그 뜻은 동명구양(東明舊壤)[6]

을 오가청모(吾家靑氈)[7]로 여기시어 반드시 석권하시려 함이었다.''' 을 다루고 오리를 잡는데에 멈추려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8]...(생략)...

- 고려사 태조 세가 논평 중 발췌.

'여진은 본래 구고려(勾高麗)의 부락으로, 개마산 동쪽에 모여 살았다. 세세토록 공물을 바치고 직위를 받으니, '''우리 조종의 은택을 깊이 입었다.''''

...(중략)...

'이 땅은 본디 구고려(勾高麗)가 소유하고 있었다. 옛 비석의 글귀 또한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하여 구고려가 전에 잃은 것을 금상이 후에 얻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 고려사 윤관 열전 中.

(생략) 태종(太宗)이 만국(萬國)을 신하로 만들어 천하를 지배하려하니 장군(將軍)에게 장수들을 통제하게 해 '''우리 고려(我高麗)를 침범했소. 장군은 불행히도 이겨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히 우리나라(我國)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생략)

-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38권 제소정방장군문 중 발췌.[9]

고려의 국가 정체성에서 고구려 계승 의식은 매우 중요했다. 국호부터 장수왕 이래 고구려의 국명이었던 고려를 그대로 이어서 썼고,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의 본기에 고구려를 포함시켰으며, 잊혀질 뻔했던 동명성왕을 시조로 공인해[10] 국가적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고려의 지배층은 민족적으로도 스스로가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신라와 달리, 고려는 왕건을 포함한 개국 세력부터가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패서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11]
하지만 고려가 고구려에 대해서만 계승 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다. 고려의 계승 의식은 꽤나 복합적이어서 삼국 중 하나만을 선택했다고 특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고려 중기에 편찬된 국가 공식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는, '''옛 삼국은 동등했고''', 그 중 신라가 삼국을 처음으로 통일하였으나 나중에 그 신라를 무너뜨린 고려가 진정한 정통 왕조라는 관념이 드러난다. 삼국 역대 임금 모두를 '본기'에 넣었다는 점에서 그 부분은 분명해진다.[12] 고려 중기부터는 백제와 신라도 고구려와 동등한 위치에 둔 것이다. 이는 고려 초기에 비해 중후기에 이르러서는 삼한일통 의식이 고구려 계승 의식만큼이나 강성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구려 계승 의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고려에서 삼한일통 의식이 강해진 이래 사서에는 명목 상 삼국 간에 차등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삼국 중에서도 고구려는 분명 좀 더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고려가 삼한일통 의식을 형성하는 와중에도 고구려에 대한 배타적인 계승 의식 또한 유지되었던 것이다.[13] 특정 한 나라에 치우치지 않고 삼국을 대등하게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이는 조선이 통일신라나 고려와 달리 삼국을 초월한 정체성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북원(北元) 요양성(遼陽省) 평장사(平章事) 유익(劉益)과 우승(右丞) 왕카라부카(王哈刺不花) 등이 명나라에 귀순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명나라가 주민을 이주시킬까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양이 본시 우리 땅이었으므로 만약 우리 나라가 청하면 이주를 모면할 수가 있지나 않을까 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통보하여 왔다.

- 고려사의 공민왕 대 기록. 요동을 고토로 보던 당시 고려 조정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고려는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와 영토를 계승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했다. 고려는 고구려의 고토였던 한반도 북부와 요동 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꾸준히 주장했다. 이를 수복하기 위한 실제적인 노력도 끊임없이 병행되었다. 역사적으로, 예종의 여진 정벌이나 공민왕의 요동 정벌을 비롯해 내외적으로 어려운 여건에서도 수 차례나 북방원정이 추진되었다. 고려는 영토 수복에 대한 근거로 자국이 고구려의 후계국임을 대외적으로 강력히 주장했다. 요나라의 1차 침공에서는 이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이런 고려의 노력 덕분에 고려는 당대에 국제적으로도 고구려의 적자로서 인정받았다. 고려의 주적이었던 요나라는 물론이고 고려와 긴장 관계에 있었던 금나라도 고려를 고구려의 후손으로 보았다. 이는 고려사 문종 세가 11년 3월조에 있는 요흥종의 고려 문종에 대한 책봉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책봉문에서는 문종이 주몽의 나라를 이었다고 써놓았다. 몽골 제국의 경우 그냥 고려를 고구려와 동일한 나라로 보았다.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이 고려가 항복 사절단을 보내왔을 때 당태종도 무너뜨리지 못한 나라를 자신이 굴복시켰다고 말하며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북송의 사신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에서도 고려가 아예 고구려에서 그대로 이어진 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려도경에 따르면 수도 개경의 동신사(東神祠)라는 사당에선 유화부인에 대한 숭배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보는 시각은 발해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적다. 이는 역사적으로 고구려고려 사이에 통일신라라는 또 다른 왕조가 존재했었고, 무엇보다 고려의 영토가 고구려에 비해 협소했기 때문이다. '만주를 정벌했던 강대국 고구려의 계승국이 소국인 고려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것이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인 것이다. 단순히 만주를 영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발해를 고구려의 정통 후신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으나, 이는 고구려 계승에 있어서 고려의 정통성과 역사적 성과를 엄청나게 폄하한 것이다. 영토의 넓이와 별개로 영토의 질과 생산력은 고려가 고구려를 압도했다는 중요한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생기는 오해. 또한 영토적 유산으로 봐도, 그것을 고려는 발해 이상으로 잘 계승하고 있었다. 고려가 차지한 고구려의 고토는 고구려의 사회문화적 중심지였던 평양 일대와 패서 지역이었고, 그곳들을 차지한 고려는 발해에 비해 고구려의 알짜배기땅들을 더 많이 차지한 셈이었다. 이는 고려가 고구려의 사회문화적 유산을 계승하고 국가적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도 발해보다 훨씬 유리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영유했던 것은 고려 스스로도 고구려의 적통임을 주장하는 강력한 근거였다. 그래서 고려는 평양을 영유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제2 수도인 서경으로 삼아 화려하게 재건했다.[14] 이런 정통성과 강력한 계승 의식은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데 상당한 당위성을 더했다. 그래서 당대에 국제적으로 고구려의 적통으로서 훨씬 널리 인정받은 것도 발해가 아닌 고려였다.[15]
발해를 고구려의 후신으로 보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영토의 크기와 만주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고구려 멸망 이후 만주에 대한 상실감 때문에 지나치게 만주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시각이 이유지만 그것은 적절하지 못한 견해다. 고구려의 중심지는 대중이 그렇게 좋아하는 만주가 아니라 한반도 북부 지역인 패서지역과 평양성 일대였다.[16] 요동 일대는 분명 군사적 방어선이자 농업 요충지였지만 고구려의 중심지는 아니었다.[17] 현대 한국에서 군사 지역인 강원도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요충지라고는 해도 중심지라고는 부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흥미롭게도 고려의 지정학적 조건도 신라보다는 고구려와 유사했었다. 신라는 통일 전쟁 이후에는 대륙세력으로부터 유리되어 해양국가적 속성[18]을 발전시켜나갔다. 이는 당나라와 발해 같은 제국들이 이민족들로부터 통일신라의 완충지대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신라와 달리 해양국가적 속성은 줄고[19] 고구려처럼 대륙세력과의 역학관계가 부각되었다. 이는 고려가 거란, 여진, 몽골과 같은 북방의 강력한 기마민족들과 완충지대 없이 인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반도의 중요한 해상 교류 국가였던 일본은 동시기에 고립을 선택하면서 덩달아 고려의 해양 교류 빈도도 크게 줄었다. 그로 인해 고려사는 해양세력과의 교류보다는 대륙세력과의 투쟁이 중심이 되었다.
고려는 신라와 백제 모두를 통합하여 삼한일통의 대업을 완수했는데, 이 영역들은 고구려가 가장 강성하던 시절에도 나제 동맹에 막혀 끝내 정복에 실패했던 영역들이었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관계에 비유해볼 수 있다. 사산 왕조를 건국한 페르시아인들은 아케메네스 왕조 멸망 후 친척 민족이지만 국가정체성은 공유하지 않았던 파르니족의 파르티아에게 지배받았고, 아케메네스 왕조의 부흥을 기치로 건국 후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레반트 지역 및 발칸 반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또한 마찬가지로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흥지인 파르스 지역에서 건국했다. 다만 이 대목에서도 고려가 보다 우세하다. 사산 왕조는 그 최전성기에도 예멘 일대 외엔 그 영역 전체가 아케메네스 왕조가 다스리던 영역이었으나, 고려는 고구려가 정복에 실패했던 한반도 중남부를 모두 제패했다. 또한 사산 왕조는 끝내 이슬람 제국에게 버티지 못하고 망했지만 고려는 비록 부마국이 되었을지언정 몽골 제국에게도 망하지 않고 국체를 지켜냈다.

5. 무장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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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일러스트레이터 불나방님 블로그
고려시대에는 걸출한 무인들이 많이 활약했다. 이는 고려가 전쟁을 통해 건국된 데다 존속 기간 내내 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에서 군인의 수요가 컸고, 조선시대에 비해 문관과 무관의 구분도 약했다. 군대가 비대하다보니 격구수박과 같은 무술들이 국가적으로 성행했다. 정중부이의민도 무술 실력으로 왕의 눈에 들어 출세했다. 물론, 역으로 보자면 역사가 전쟁으로 점철되어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에는 무인과 영웅들의 활약만 기록되지만, 당대를 살아가던 민중들은 참으로 고생했을 것이다.
고려의 역사를 관통하는 전쟁만 꼽아도 엄청나게 많다. 건국기엔 후삼국 통일전쟁, 성종~현종대까지 이어진 거란과의 전쟁, 왕조의 최고 전성기인 현종 중기~인종 시기에는 여진 정벌, 인종 시기에는 1년 이싱 지속된 서경 반란(묘청의 난)이 있었다. 이후 고려의 암흑기였던 무신 정변의 발생부터 조위총의 난과 몽골의 침공, 말기엔 홍건적과 왜구의 약탈까지 내란과 외침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수백년간 평화가 지속되었던 조선과 대조적이다.
고려의 무인들이 어떤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수조지인 군인전을 기반으로 한 군반씨족설과 면세 혜택을 준 농민병들을 활용하는 부병제설로 나뉘었다. 이는 고려 시기 군제에 대한 소략한 기록이 두 가지에 모두 걸쳐있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경외군 혼성제설이라 하여 두 가지가 병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 개국공신 유금필은 출동만 하면 지던 싸움도 역전시키는 용장이었다.
  • 고려 2대 국왕 혜종은 통일 전쟁기에 직접 활약한 무인이었다. 그는 호위 무사 없이 맨주먹으로 자객을 때려잡은 적도 있다.
  • 2차 여요전쟁 때 양규는 맹활약을 벌인 장군이었다. 그는 1천여 명의 병력으로 6천 명의 거란군이 지키는 곽주성을 탈환했다. 단, 이는 거란군의 규모가 과장되었거나 성 안에 고려 잔존 병력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럼에도 대단한 전공임에는 틀림없다. 이후 소수 병력으로 거란군을 끊임없이 기습하여 3만의 포로를 구출해냈다.
  • 문종 때는 '유고'라는 절충군 대정이 활약했다. 그는 10명의 병사와 함께 저녁에 순찰을 돌다가 40여 명의 여진족 도적의 습격을 격퇴했다. 병사들은 놀라서 숨었지만 유고는 단기로 앞장서서 40여 인의 여진 도적들과 맞서 그들을 쫓아냈다. 이는 고려사절요 문종 3년(1049년) 6월에 기록되어 있다.
  • 여진전쟁 때 활약한 척준경은 한국사 최강의 무력을 지닌 맹장이었다. 그의 명성과 활약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 무신정권의 이의민두경승은 당대 최강의 무장들이었다. 둘 모두 수박의 고수였다. 궁궐에서 주먹으로 벽을 쳐서 힘겨루기를 한 일화가 정사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의민은 의종을 시해할 때 맨손으로 척추를 접어서 죽였다. 조위총을 토벌할 때는 눈에 화살을 맞았는데 그대로 적진으로 돌격해 적을 격퇴했다.
  • 경대승은 무신정권기에 이름을 떨친 장수였다. 그는 약관(20세)에 고려 왕실 친위대 교위에 임명되고 26살에 기해정변으로 정중부를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무엇보다 그가 집권할 때 무려 이의민이 그를 두려워해서 경주에 은거할 정도였다.
  • 김경손귀주성 전투에서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몽골군 진영을 들쑤셔 놓았다.
  • 승려 김윤후몽골군 장군 살리타이를 활로 저격해 사살했다. 그런데 김윤후는 자신이 살리타이를 쏘지 않았고 그때 자신은 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이는 만화 살례탑에서 그려진다. 물론 김윤후가 사살한 것이 맞지만 겸양의 뜻으로 한 말일 수도 있다. 이후 충주성 전투에서 노비군을 이끌고 70여일을 농성하여 몽골군의 맹공으로부터 성을 지켜냈다.
  • 합단적이 침입할 때는 원충갑이라는 장군이 활약했다. 합단적은 강원도의 치악(지금의 원주)까지 내려왔다. 이때 합단적의 지휘관인 카다안은 원주에 도착해 노략질을 해서 전쟁 물자를 얻으려 했다. 그 중 기병 50명은 치악산을 순찰하면서 소와 말을 약탈하고 있는데, 원주 별초 향공진사 원충갑은 보병 6명으로 기병 50명을 무찌른 후, 말 8필을 도로 빼앗는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원충갑은 치악성(원주성)에서 전투가 발발해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해있을 때 7명의 궁병으로 기병 400명을 모두 죽였다.
  • 원충갑과 더불어 흥원창판관 조신이라는 장수도 활약했다. 기록에는 '단지 공을 세우려고 성 밖에 나가 적군 1명을 베었고, 화살이 그의 왼쪽 팔을 관통하였으나, 그는 북을 치며 성 밖에서 항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합단적은 사기가 떨어져 물러갔다고 한다. 이때 조신은 합단적의 장수인 도라도의 머리에 칼을 꽂아 그의 목을 장창에 꽂았다. 이에 적은 모두 도망쳤다고 한다.
  • 충렬왕 때는 한희유라는 장군이 유명했다. 그는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 참전했을 때는 맨손으로 적의 칼을 빼앗아 적을 베었다. 카다안의 침입 때는 적군에 활을 잘 쏘는 적장이 있었는데 1장 8척(약 540cm)의 창을 휘두르며 적진에 돌입하여 적장을 죽였다. 그 후, 그는 장창에 적장의 목을 걸었다고 한다. 이에 적의 기가 꺾였다고 한다. 이 역시 전부 정사인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 참고.
  • 최영은 고려 말기 최고의 지휘관으로 꼽힌다. 원나라의 요청으로 중원에서 반란을 진압할 때 적들의 창에 찔리면서도 전투를 속행하여 그대로 승리하였다. 고려에서는 홍산 전투에서 입술에 화살을 맞은 채로 싸워 승리했다. 고려를 침공한 왜구들이 "머리 하얀 최만호"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는 기록도 있다.
  • 이성계신궁이자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지휘관으로 유명했다. 여러 외적을 격퇴한 전적이 고려사조선왕조실록 이외에 원사, 일본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에는 이성계의 지휘 능력만이 아니라 활 솜씨도 매우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이를 보면, 다소 과장이 있다하더라도, 활을 잘 쏘긴 어지간히 잘 쏜 모양이다.

6. 한국사 발전


고려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많은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이 사서들은 지금까지도 매우 중요한 한국사 연구 자료이다. 고려가 편찬한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고대 한국사의 기록은 매우 부실했을 것이다.

7. 다른 한민족 왕조들과의 비교



7.1. 이전 국가와의 비교




7.2. 조선과의 비교



[1] 이는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나라가 통일 후 겪은 부작용 및 재분열 이유와 비슷했다. 진나라 역시 통일 이전 전국시대 진나라 때부터 늘 하던 대로 통일 후에도 전국에 엄격한 법가적 통치를 적용한 것이었지만, 원 진나라 영토의 백성들과 달리 통일로 새로 얻은 나머지 6국 지역에서는 자신들의 전통과 맞지 않는 법가적 통치에 반발심을 가졌고 진나라 정부도 이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진나라의 법치든 신라의 골품제든 기존의 사회 제도 내에서 나름의 기득권을 축적해 온 기존의 신라인/진인들에 비해 피정복민으로써 새로 이 사회에 편입된 백제인/고구려인 및 육국인들에게는 그 제도를 '''그대로''' 적용한 것 자체가 일종의 차별로 작용했던 것.[2] 정복국 입장에서는 새로 편입한 영토와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당연히 요충지에 지방관을 파견해야 하고 당장 직전까지 전쟁하던 피정복국 귀족들에게는 반란의 위험성 때문에 보좌나 바지사장이나 낮은 자리 정도면 모를까 요직을 줄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귀족 대우를 거진 박탈하는 지경까진 잘 가지 않는다. 전후에 인구 증가 및 개발로 인해 증설되는 지방행정단위에 기존 기득권층인 중앙귀족만 쑤셔박으면, 기존 백제, 고구려 유민일 수밖에 없는 지방 호족들은 아예 그냥 국정 자체에 참여하지 말란 얘기밖엔 안 된다. 그리 따지면 고려는 어디 신라처럼 하고 싶은 유혹이 없었겠는가? 그렇게 하면 지방반란으로 인한 망국 외엔 길이 없는 걸 아니까 그렇게 못하는 거다. 그렇게 피지배국의 옛 유력자 출신들의 역량이 전후복구 등으로 인해 성장하는 것에 비해 차별이 존재해 파이는 모자란 상황에서 기후 등의 문제로 기근이라도 들어 맬서스 트랩에 걸린다면 그야말로 불안한 정국이 발생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이 완성되는데, 일반 조건이 그렇다 해도 그걸 고치거나 방지하는 걸 끝끝내 막아버린 신라 진골층의 자기만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변호되는 건 아니다.[3] 다만 동명성왕은 삼국 중 고구려 하나만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란 성격이 너무 강해 전국의 공감을 얻기 힘들었기 때문에 시대가 지나면서 공동 시조격 인물에서는 내려오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시조들 중 한 명 정도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4] 신라의 시조급인 박혁거세나 김씨 왕가의 시조급인 김알지/성한왕은 이렇게 한반도 전체의 시조급으로 숭상되었던 흔적이 없다.[5] 현대 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설의 실체를 부정하고 있지만, 고고학이고 뭐고 없었던 고려-조선 당시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6] 직역하면 '동명성왕의 옛 땅.' 고구려의 옛 영토를 의미한다.[7] 직역하면 '우리 가문의 푸른색 비단 이불.' 즉 고려의 가보란 뜻이다.[8] 태조 즉위 설화 중 하나인 '왕창근의 거울'에서 인용한 것이다. 닭은 계림(鷄林), 즉 신라를 비유하고 오리는 압록(鴨綠), 즉 압록강을 의미한다.[9] 소정방은 백제 - 나당연합군 전쟁에서 일정 성과를 끌어냈지만, 고(구)려 - 나당연합군 전쟁에선 대패하여 겨우 도망쳤다. 즉 제문과는 다르게 고구려에서 죽진 않은 셈.[10] 동명성왕의 사당은 서경(평양)의 장락궁에 위치했다.[11] 고려 전기 지배층을 본관별로 분석하면, 통일 전 옛 고려 지역 출신이 성씨의 수에 있어서는 전체의 62%, 고급 관료의 수에 있어서는 75%를 차지하였다.[12] 만약 고려왕조가 셋 중 어느 하나가 정통성에서 위라고 생각했다면 그 나라만 본기고 나머지는 세가나 열전에 넣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의 삼국시대를 다룬 삼국지가 바로 그렇고, 그 외에도 송서 문서의 내용과 같이 중국사에서 여러 나라가 존재한 시대를 다룰 때 누구는 본기에 넣냐 세가에 넣냐 하는 것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와 관련해 곧잘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똑같이 기전체 역사서를 편찬하던 한국사 왕조들도 이런 개념을 잘 알고 있었다.[13] 유명한 문인인 이규보도 시조로서의 동명성왕을 특별취급해 동명왕편을 썼던 사례가 있다.[14] 물론 고려 조정이 상시 위치하는 본수도는 개경이었으나 서경 역시 1년에 3달을 머무는 '또 다른 수도'의 위치였고(원의 대도-상도 시스템과 비슷하다.) 이는 '지방 부수도'격이었던 동경, 남경과는 분명 차별화되는 위상이었다. 다만 '제 1 수도'인 개경과의 위상 차이 또한 명확하였고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은 더 이상 수도라 부를 수 없는 그저 그런 '지방 3경'으로 추락하였다.[15] 그리고 어차피 고려의 건국 이후 발해가 곧 멸망해 고려가 발해 유민을 흡수함으로써 사실 상관없게 되었다.[16] 이 지역은 현재 북한의 사회문화적 중심지이기도 하다.[17] 심지어 요동은 농업 요충지로서도 부실했다. 바다 같은 완충지대 없이 대륙을 통해 시베리아 북풍이 그대로 들어와 겨울에는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지역이다. 제1차 요동정벌 때도 요동성의 군량을 실수로 태워버린 뒤 따로 식량을 얻을 곳마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동시대의 몽골 군벌이자 요동평야를 점유했던 나하추 또한 명나라와 적대하다가 교역이 끊기자 경제적으로 시달리다가 명군에게 결정타를 얻어맞자 못 버티고 항복한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도 명나라와의 교역이 끊기자 청나라에 기근이 들 판이었기 때문이다.[18] 장보고청해진[19] 물론 오늘날 한국의 영문명인 코리아의 유래가 고려인 점이나 고려가요 쌍화점, 벽란도 등을 볼 때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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