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의 저주/사례
* 김성근, 김성근의 저주
KBO 리그의 유명한 저주 중 하나이며 김성근이 감독직을 맡았다가 경질된 후 그 팀이 암흑기에 빠지는 것을 일컫는 말인 김성근의 저주에 대한 각 구단별 사례 및 실상이다. 사실 김성근의 저주 자체가 대부분 본인이 팀을 파국으로 몰아넣고, 장기적인 리빌딩에 절대적으로 부적합하게 팀 운용을 했기 때문에 나오는 증상이다. 카페인의 힘을 빌려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고 해서 그 다음날 잠을 자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다. 물론 예전에야 대부분의 KBO 리그 팀이 주먹구구식 운영을 했고, 프런트가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근시안적이었고, FA제도가 없거나 미흡했던 만큼, 가용한 선수를 단기간 혹사와 강훈으로 우려내는 김성근이 야구가 그나마 통할 수 있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야구에서 그것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고, 본인도 SK 시절부터는 FA선수를 왜 잡아주지 않냐며 징징거렸다. 그러나 SK는 이진영을 제외한 모든 내부 FA를 잡았다. 그리고 한국야구에서 외부 FA는 특유의 보상선수제도로 인한 핵심선수유출과 막대한 계약금, 연봉 때문에 한국야구감독들은 내부 FA 단속은 몰라도 외부 FA 영입에 대해선 뒤에서 조용히 말하지 대놓고 요구하는 경우는 드물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불만이 있어도 겉으로나마 '구단 사정을 이해한다', '있는 자원으로 잘 해보겠다'라고 하는게 보통이다. 까놓고 말해 '''외부 FA 안 잡았다고 구단에 화내는 인간은 김성근밖에 없다.'''
아예 한화에 와서는 2년 간 200억이 넘는 돈을 FA에 쏟아 '버리며' 스스로 저주를 갱신하고 있다. 물론 자서전이나 각종 강연, 인터뷰에서는 항상 선수 '육성'에 대한 필요성과 책임을 강조한다(...). 그의 언행불일치를 보면 저주가 생길 만도 한 것이다.
김성근 5년 재임: 1984년~1988년
김성근 재임 5년 동안 선수층이 꾸준히 노쇠한 반면 신인선수들의 성장은 더뎠다. 김성근 재임 5년 동안 OB 베어스의 주전 선수들은 대부분 김영덕 감독 시절에 주전이었던 선수들이었다. 야수 김경문, 조범현, 신경식, 구천서, 유지훤, 양세종, 윤동균, 김광수, 박종훈, 한대화, 김우열과 투수 황태환, 박철순, 계형철, 박상열, 장호연, 강철원이 그들이다. 김성근 감독 첫해인 1984년 신인 윤석환, 김진욱, 최일언 투수 3인방과 외야수 김광림이 데뷔 첫해부터 주전을 차지했지만, 그 첫해를 제외하면 나머지 네 시즌 동안 주전으로 성장한 신인이 없었다. 그나마 김형석(85년 입단)과 박노준(86년 입단)이 1군에 기용된 신인이었지만, 김형석은 주전과 백업을 오가며 김성근 시절에는 확실히 주전을 차지하지 못했다. 박노준은 김성근 시절에 투타 겸업으로 기용되며 집중력 결여와 혹사로 결국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선수생명이 단축된 사례다. 박노준은 데뷔시즌인 86시즌에 타자를 겸하면서도 투수로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굴려지며 33경기에 등판해 110⅓이닝을 던져 5승 6패 7세이브(3위)를 거두는 혹사를 당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해에 혹사의 여파로 부상을 당했고 그 와중에도 김성근에 의해 굴려지며 ERA가 6점대로, 그 다음해는 18점대로 치솟아 결국 투수로는 더이상 쓸 수 없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타격부문에서도 대타로만 기용되며 이도저도 아닌 선수가 되고 말았다. 김성근 감독이 경질된 후 후임 감독이 된 이광환은 박노준을 타자 전업으로 전향시켰고 그러자 그해 바로 3할에 육박하는 성적을 내며 주전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선수시절 초기 혹사의 여파로 이후에도 부상이 반복되며 짧은 전성기 후 선수생활 후년에는 기나긴 부진을 겪다가 은퇴했다. 김성근 임기 후반기인 87~88 두 시즌 동안에는 신인선수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이처럼 김성근 시절 말년까지도 OB 베어스는 대부분의 주축 선수들이 원년부터 뛰어오던 선수들이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원년 이전에 실업야구나 대학야구를 거쳐왔기 때문에 김성근이 물러났을 때 선수층의 노쇠화와 부상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김성근 감독 시절 혹사당한 대표적인 인물로 윤석환을 들 수 있다. OB 베어스 역사상 손꼽히는 좌완 에이스로 꼽히는 윤석환은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1984년에 데뷔했다. 윤석환은 데뷔시즌에 맹활약 하며 그해 신인왕과 구원왕을 석권했으나 혹사의 여파로 이후 오랜 부상과 부진을 겪었다. 김성근의 마지막해인 1988시즌 윤석환은 마침내 부상에서 회복하여 부활에 성공하여 팀의 주축 투수로 다시한번 맹활약했다. 그러나 1988시즌 또다시 혹사를 당한 윤석환은 1989시즌부터 완전히 몰락하여 이후 반등에 실패하고 89~91시즌 동안 단 4승만을 추가한 채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1988년 김성근 대 이광환의 구단 내 파워게임에서 구단의 김성근의 재계약 불가 방침으로 자연스레 김성근이 팀을 떠나고 이광환이 차기 감독이 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지만, 해임된 김성근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자신의 파벌에 속해있던 OB 코치진들을 대거 태평양 돌핀스로 데리고 갔다. 때마침 청보 핀토스를 인수한 태평양 구단 프런트가 구 청보 시절 코칭스탭을 모조리 물갈이하려던 계획과 맞물려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코치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OB 베어스는 팀이 흔들릴 정도의 타격을 입는다.
후임 감독이 된 이광환은 '자율 야구'를 주장하며 그의 야구관을 팀에 이식하려 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결국 이광환 감독은 1990시즌 중반에 중도 사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간 그의 야구관은 3년 후 연고지 라이벌 LG 트윈스에서 통합 우승을 이루어 내며 대성공을 거둔다. 이광환의 자율야구가 LG에서는 성공했지만 OB에서 실패한 것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김성근 체제 하에서 혹독한 훈련과 스몰볼식 야구에 익숙해져 있던 선수들이 갑작스런 메이저리그식 자율야구에 적응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 보고 있다.
그러나 이광환 감독이 OB에서 실패했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김성근이 물려주고 난 팀에서 심각한 혹사 후유증과 노쇠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김성근 재임 5년 동안 신인선수는 발굴되지 않은 반면 선수층의 노쇠화와 혹사 후유증이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것이 이광환 감독 부임과 때를 같이하여 곪은 것이 터져버린 것. 김성근 시절 5년간 꾸준하게 혹사당한 윤석환, 최일언, 계형철 등 주축 투수들이 모두 부상으로 나가 떨어지면서 투수진에 커다란 공백이 생기고 말았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이광환 감독은 2년 연속 5위[1] 를 찍었는데 이는 김성근 감독의 마지막해 성적과 같은 것이었다. 이광환 감독의 후임인 이재우 감독도 부진한 성적을 보여준 끝에 91시즌 도중 경질된다.
김성근 2년 재임: 1989년~1990년
김성근 시절 태평양 돌핀스 전력의 핵은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신인 투수 3인방이었다. 1989년 김성근 감독의 부임과 동시 혜성처럼 나타난 이들 신인 투수 3인방은 무려 40승 10세이브를 합작하며 태평양 돌풍을 일으켰다. 그런데 태평양에서 김성근이 짤리고 나자 혹사의 후유증으로 투수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후임 박영길 감독은 첫해인 1991시즌을 맞이하면서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양상문, 박은진 등으로 주력 선발진을 꾸렸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김성근 시절의 혹사 여파가 나타나면서 1군 투수들이 하나둘 수술대에 올랐고 92~93시즌에는 투수진의 거의 대부분이 팀이 추스를 수 없는 수준까지 망가졌다. 특히 젊은 투수들의 피해가 심했다.
박정현은 김성근 재임 시절 단 2년만에 페넌트레이스 '''434 ⅓'''이닝을 던졌고, 준플레이오프 시리즈 단 한 번에 18 ⅔이닝을 던졌다. 89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이렇게 던지다가 결국 경기 도중 마운드에 주저앉아서 그대로 실려갔다. 김성근 2시즌 동안 도합 453이닝을 던진 그는, 이후 9년[2] 을 더 뛰었지만 겨우 600이닝을 더 던지고 은퇴해야 했다.
1987년 입단해 88년까지 단 20이닝을 소화한 데 그쳤던 최창호도 김성근 부임 시절 2시즌동안 '''420'''이닝을 던지는 엽기적인 혹사를 당했다. 그는 91년에는 숫제 233이닝을 던지며 이 부분 리그 1위까지 차지하지만, 이런 앞뒤없는 혹사는 결국 본인에게 독으로 돌아와서 92년 부상으로 나가 떨어졌다.
정명원도 김성근 시절 들어온 신인. 첫 해 139이닝을 소화하며 11승을 거두고 좋은 성적을 뽑아냈지만, 바로 부상으로 연결되었다(...). 이듬해 거하게 망가졌고, 이후 그의 커리어 대부분은 구원진에서 뛰며 작성하게 된다. 신인 때 혹사 이후 10년이 지난 98년이 되어서야 그는 전업 선발로서 재기할 수 있었다.
김성근이 경질된 직후 1991시즌 부임한 박영길은 팀 컬러를 타격 강화 쪽에 맞추려고 했으나 실패한 케이스. 박영길은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감독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타자들에게 장타를 강조하는 메이저리그식 빅볼 야구를 추구하는 인물이다. 1987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에는 팀타율 3할을 달성한 적도 있었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투고타저였던 1980년대에 팀타율 3할이란 건 어마어마한 기록이다. 1987년의 삼성은 KBO리그 역사상 공격력으로는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갈 팀으로 꼽히고 있다. 또한 투수진이 모두 혹사 후유증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박영길 감독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공격력 강화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짠물 돌핀스라는 소리를 듣던 태평양에는 박영길식 타격 이론을 소화할만한 타자 자체가 많지 않았고, 전임 김성근 감독의 선수들에게 지도했던 번트와 작전 위주의 스몰볼과 충돌하면서 성적 부진으로 이어진 것이다. 참고로 태평양은 역대 최악의 타선을 가지고 있던 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타자 출신 감독이 왔으니 흥할 수가 없었다. 사실 김성근의 스몰볼이든 박영길의 빅볼이든 태평양은 어차피 점수는 못내는 팀이었다. 단지 김성근 시절에는 리그에서 손꼽히는 역대급 투수진으로 부족한 공격력까지 메꿔왔을 뿐. 결국 박영길은 1년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박영길 감독의 후임으로 1992년 정동진 감독이 부임했으나, 위에 인터뷰에 나온 것처럼 김성근 시절 혹사 당한 선수들의 상태가 너무나 심각해 과감하게 주축 투수들을 모두 수술대에 보내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1992시즌과 1993시즌에 각각 6위, 8위에 머물렀지만, 마침내 투수 3인방이 재활에 성공하고 돌아오자 1994년 돌풍을 일으켜 인천 연고 프로야구 팀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오르게 된다.
김성근 2년 재임: 1991년~1992년
우선 김성근의 삼성 시절은 이만수, 강기웅, 류중일 등 기존 선수들과의 대립이 있었다. 김성근은 이만수 등 기존 선수들의 기량을 탓하면서, 기필코 우승을 하겠다는 명분으로 구단에 대체자원의 영입을 요청했고, 우승을 작정한 구단은 김성근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여 현금트레이드 등으로 영입한 베테랑 선수 7명을 포함하여 무려 15명의 선수를 보강했다. 그리하여 신경식, 조범현 같은 자기 제자들을 대거 영입되었다. 문제는 이들은 이미 기량이 쇠퇴해서 타팀에서 방출되거나 은퇴를 종용받던 선수들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김성근의 영입선수은 대부분 실패하여 팀 전력에 별다른 보탬이 되지 못했고, 팀 체질 개선에 실패했다.
게다가 김성길, 류명선, 오봉옥 등의 투수 혹사 문제까지 있었다. 특히 김성길 혹사는 엽기적인 수준으로 36살 노장 투수를 14번의 선발 등판을 포함해서 중간계투 겸 중무리 겸 패전처리로 마구잡이 등판시켜서 '''57경기 188이닝'''을 던지게 했다. 그리고 김성길은 구위가 확연히 떨어져서 다음해에는 거의 배팅볼러로 전락해버렸다. 투수혹사가 일반적이던 당시에도 김성근 감독의 김성길 기용을 정면 비판하는 신문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심지어 당시 유망주 투수던 허삼영을 집중적으로 혹독하게 훈련시켜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3] 하게 만들기도 했다.
즉 기존 선수와의 불화+선수영입 실패+투수혹사라는 3콤보가 합쳐져서 세대교체 실패와 팀케미스트리 악화를 불러왔으며, 최종적으로 팀을 556이라는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로 몰아넣었다.
김성래, 성준, 김상엽 등 주력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이 있었더라도 자기와 연관있는 선수들만을 기용하는 김성근의 운영 방식은 큰 비판을 받았으며, 해임 이후 삼성은 우용득 취임 직후 김성근 커넥션을 정리하게 된다. 조범현은 김성근이 해임된 1992년 시즌이 끝나고 방출되며, 신경식, 김성길은 정영규를 상대로 쌍방울로 트레이드 됐다. 그 결과 93년 삼성은 부상 선수들의 부활과 양준혁, 박충식 등 신인 플레이어들의 활약으로 준우승을 차지했으나, 김성근 재임 기간동안 실패한 세대 교체 문제 등이 문제되어 94년~96년에 삼성은 556의 침체기를 보내게 되었다.
이후 96년 백인천이 취임하면서 삼성은 대대적인 리빌딩을 단행했다. 이 무렵, 백인천은 기존의 노쇠한 김성래, 강기웅과 이종두, 김성현, 박선일을 정리하고, 이승엽, 김한수, 김태균, 정경배 등 젊은 선수들을 기용했다. 흔히 이만수도 이때 버려졌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백인천은 백업포수, 지명타자, 대타, 대수비로 이만수에게 기회를 줬다. 이만수가 방출당한 건 백인천 감독이 물러난 1997년 시즌 후다. 이 무렵 1루 이승엽, 2루 정경배, 유격 김태균, 3루 김한수로 내야진은 몇년간 고정되며, 외야진도 양준혁과 신동주, 그리고 트레이드로 영입한 김종훈이 지키게 된다. 모두 백인천 재임기엔 20대의 젊은 선수들이었다. 그 결과 취임 당시는 6위를 기록하긴 했으나 리빌딩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팀은 다시 강호로 올라설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김성근 시절의 삼성은 올드팬들에겐 556 암흑기보다도 더 야구보기 싫었던 시절로 기억되는데, 투수 혹사는 혹사대로 시키고 본인 사단만 기용했으며 성적은 성적대로 못냈기 때문.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올드팬들에게는 김성근이 '''선동열 보다도 못한 놈'''취급을 받고 있다. 선 감독은 그나마 2회 우승이라는 결과물이라도 어찌어찌 있었으나, 김 감독 시절은 세대 교체 실패+팀케미스트리 악화+팬심 악화+영 좋지 않은 성적이라는 콤보로 인해서 평가가 매우 박하다. 자세한 것은 김성근/지도자 경력 참고.
이처럼 김성근의 삼성 시절은 전형적으로 김성근 스스로가 자초한 저주였다. '''삼성에서 경질된 후 김성근을 찾는 팀이 아무도 없어''' 한동안 야인생활을 전전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보아도 삼성 시절 김성근에 대한 평가가 당대에도 얼마나 나빴는지를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이런 팀꼬라지를 3년 내내 본 산증인은 다름아닌 '''콩동님'''.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허파고도 이때 많이 배웠다.
김성근 4년 재임: 1996년~1999년
삼성 감독에서 경질된 후 이제 야구계에서 은퇴한 것으로 여겨지던 김성근이 돌아오게 된 것은 김성근과 친분이 깊었던 일본통 이용일 쌍방울 구단주 덕분이었다.
쌍방울 시절은 그의 팬덤에 의해 김성근의 능력이 최고로 발휘되었던 시기였다고 칭송되던 시절이다. 하지만 2016년 김성근 재임시절(1997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팀연봉총액이 리그 전체 1위였다는 사실이 새롭게 발굴되면서 쌍방울 시절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는 '헝그리 정신'으로 포장되었던 쌍방울 돌격대의 이미지가 많이 퇴색된 상태. 그래도 96년은 연봉 하위권이기는 했다.
1997년 모기업이 어려워지는 상황 속에도 김성근의 계속된 요청으로 쌍방울은 전력을 강화하며 페이롤 1위를 찍었고, 결국 이것이 쌍방울 모기업에도 부담을 주었다는 평가다. 1997년 재정위기를 겪던 모기업 쌍방울은 결국 1997년 10월 14일 부도처리된다.
그러나 모기업이 부도가 났지만 김성근이 언플한 것처럼 모기업이 구단에 대한 지원을 거의 끊은 것은 아니었다. 1998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예산은 페이롤 1위를 찍었던 1997시즌에서 비해 20% 삭감된 선에서 결정되었다. 지나치게 높아진 페이롤을 줄이기 위해 고액연봉 선수들을 타팀으로 트레이드로 보냈다. 그러나 선수유출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젊은 선수들을 지속적으로 충원했다. 투타의 핵심인 김기태와 김현욱은 여전히 98시즌에도 쌍방울 소속으로 뛰었다. 이 둘이 트레이드된 것은 1998년 시즌이 끝난 후다.
이 와중에도 김성근 감독은 김원형 빈볼 사건, 마운드 높이 시비 등 지속적인 사건사고를 일으키며 야구팬들의 비난을 받았고 팀 사기는 더욱 저하되었다.
마지막 시즌인 1999시즌 쌍방울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쌍방울 구단은 외국인 용병으로 마이클 앤더슨, 제이크 비아노를 영입하는 등 나름 팀 재건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몸값 비싼 김기태와 김현욱이 나갔지만 젊은 선수들을 대거 충원했다. 현대로 팔았던 김광림이 현대에서 방출당하자 다시 영입하기도 했다.
1999시즌 쌍방울이 2할대 성적으로 주저앉은 것은 김성근 체제 4년 동안 누적된 혹사와 마구잡이식 운용의 후유증이 곪아 터진 측면도 적지 않다. 1999시즌엔 남아있던 주축선수들이 줄줄이 줄부상을 당해 전열을 이탈하고 말았다. 조원우, 조규제, 김광림 등이 줄부상 당하며 전열에서 이탈했다. 조원우는 1999시즌에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팀내 최고 타율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김성근 감독 특유의 '''강훈련'''을 받던중 부상을 당하여 시즌아웃되었다. 이후 조원우는 2000년부터 복귀하여 선수 생활을 계속했으나 다시는 예전만큼의 타격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이 부상은 조원우의 커리어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김성근의 첫 외국인 용병이었던 두 투수는 김성근 용병 잔혹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두 외국인 투수는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김성근 특유의 기싸움으로 스프링캠프에 제외되는 등 불협화음이 일어났고, 투구폼 교정 등으로 마찰을 빚기도 했으며, 시즌 후에도 2군 강등을 반복하는 등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앤더슨의 경우 전년도에 LG 트윈스에서 마무리로 뛰며 20세이브를 돌파하며 가능성을 보였고 쌍방울에서도 시즌 초반 호투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김성근 감독이 이유없이 2군 강등과 1군 복귀를 반복하자 불만으로 표출하며 훈련에 무단 불참했다. 이에 김성근 감독은 앤더슨의 퇴출을 지시했고 앤더슨은 구단 사장에게 직접 전화해 억울함을 호소하기까지 했다. 결국 구단이 나서 중재하면서 사태는 수습되었지만 이후 앤더슨의 성적은 급격히 나빠졌다. 비아노는 시즌 시작 전부터 스프링캠프에 제외되더니 시즌 후에도 2군 강등과 1군 복귀를 반복하며 역시 좋지 않은 성적을 보였다.
1998년 12월 KBO에서는 김기태와 김현욱의 현금트레이드를 승인하면서 쌍방울에게 구단 유지를 위해 1999시즌 전반기 66경기에서 최소 승률 3할을 맞추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전반기를 3할 승률로 마치기 위해 조바심이 나있던 김성근은 1999년 6월 18일 남은 다섯 경기를 모두 이겨야 전반기 3할을 달성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 그날 경기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김성근 감독은 초유의 심판 폭행 사건을 일으키고 만다. # KBO는 김성근 감독에게 12경기 출장정지 및 벌금 200만원의 중징계를 내렸고, 쌍방울은 0.237의 승률로 성적으로 전반기를 마치게 된다. 결국 쌍방울 구단은 김성근 감독이 출장정지 징계 중이던 7월 올스타전 기간에 그를 경질했다.
결국 역대 최다패와 한 시즌 최소 관중의 굴욕을 맛본 쌍방울은 2000년 2월 해체의 운명을 맞이, 3월 SK 와이번스로 재창단하며 인천으로 연고를 정하면서 전주와 군산과는 영원한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김성근 1년 재임: 2002년
김성근의 저주와 LG막장 운영의 합작품. 팀이 아무리 망가지더라도 재건하는데 5년이면 충분하다. 5년동안 새대 교체를 못하거나 유망주들을 키우지 못한 것도 결코 작지 않다는 점. 삼성만 봐도 2556을 하면서 재건하고 강팀이 되었으며 역대 막장 감독 명단을 봐도 재건이 안된다면 그 후임도 막장 감독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암흑기 시절 롯데가 있다. LG의 비밀번호가 모두 김성근 탓으로 돌리는것은 김성근의 안티라고 보는 게 맞고 5년은 김성근의 책임, 그 이후는 이순철을 포함한 후임 감독들의 책임으로 봐야 한다.
정식 감독은 2002년으로 1년이지만 감독대행으로 2001년을 뛰면서 투수 혹사 논란이 있었는데 2001년은 신윤호가 144이닝(선발4)을 뛰며 성적으로는 이승엽을 밀어내고 MVP를 받을 뻔 했으나 이승엽에게 인기에서 밀려서 1차 투표에서 이겼지만 2차 투표에서 패배했다. 2002년엔 이동현을 순수 불펜으로 124이닝+가을야구를 던지게 하면서 엄청난 혹사를 했다. 결국 이 두 투수는 김성근 시절이 커리어 하이가 되버렸고......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와의 맞붙어 2승 4패로 준우승을 거둔 LG 트윈스. LG 프런트는 준우승을 거둔 김성근 감독을 경질한다. LG 구단이 김성근을 경질한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신바람 야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LG 구단과 대놓고 번트와 잦은 투수 교체를 가져오는 극단적인 스몰볼 야구를 추구했던 김성근의 야구관이 서로 상충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게다가 김성근 부임 기간 동안 LG의 성적도 딱히 신통치 않은 상황이었다. 김성근이 부임하기전 LG 트윈스는 8년 동안 단 한번을 제외하고 계속 4강에 진출했고 우승과 준우승도 몇 차례 거두었다. 2001년은 초기에 이광은 감독의 책임이 있다쳐도, 2002년은 시즌초 최하위를 전전하다가 후반기에 반등에 성공해 극적으로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시즌 초반에 보여준 극도의 부진 때문에 경질설이 나돌기도 했다. 김성근과 프런트 간의 갈등도 한 원인이었다. 2001년 시즌 후 최종준 단장이 물러나고[4] 유성민 단장이 부임, 2002년에 90년대 전성기를 이끈 단장 출신 어윤태가 사장으로 들어오며 본격적인 갈등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2002시즌 팀이 극도의 부진에 빠지며 최하위권에 머물자 어윤태 사장은 1994년 우승의 주역인 이광환을 차기 감독으로 내정하고 김성근을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갔으며, 시즌 중 김성근을 해임하려 했다. 그러나 여름부터 팀이 반등하면서 극적으로 4위를 차지하면서 경질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결국 한국시리즈 준우승 후 김성근을 해임하게 된다.
김성근의 후임으로 2003시즌 자율야구의 달인이자, 1994년 우승의 주역인 이광환을 감독으로 다시 영입했지만 6위을 기록했다. 시즌 후 이광환 감독은 2군 감독으로 내려가고 수석코치 이순철이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LG 프런트는 2003년~04년 팀의 핵심 선수였던 이상훈, 유지현, 김재현을 이적 혹은 은퇴를 시키면서 정리하게 되었다.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강제로 은퇴시키거나 김재현 각서 파동으로 인해 2004년 시즌 후 FA로 풀린 김재현을 SK 와이번스로 보냈으며 프랜차이즈 스타 이상훈 역시 SK로 트레이드된 후 본인에게 보장된 6억원까지 포기하면서 갑자기 은퇴했다.
2005년 LG는 3년 연속 6위라는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2006년에는 창단 첫 꼴찌를 기록하며 이순철 감독이 사퇴했다. 이후 김재박 감독을 영입하면서 2007 시즌에 5위로 올라왔다. 2008년 LG는 창단 이래 최저 승률과 팀도 2번째 꼴찌를 기록하고 말았다. 2009년 초반에는 2위로 올라가 김성근의 저주가 풀리나 싶은 듯 했지만 주전 포수인 김정민의 부상 이후 결국 7위로 내려가고 말았다. 그 와중에 조인성과 심수창의 불화, 이후 김재박 감독의 박용택 타율 관리에 대한 만행에 대해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LG는 롯데 자이언츠의 8888577에 버금가는 암흑기인 6668587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2010년에는 박종훈의 LG가 김성근의 저주를 푸나 싶었지만 초반부터 안 좋은 일만 겹치면서 현실은 시궁창. 결국 2010년 시즌도 6위로 가을야구는 완전 실패. 게다가 2011년에는 초반 1~2위로 잘 나갔고 4위로 떨어졌을 때에도 '''5위와 8게임차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낙하하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고 박종훈 감독이 시즌 도중 사퇴하며 기어이 '''666858766'''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말았다. LG 팬들은 박종훈 감독의 사퇴 후, 김성근의 저주는 김성근 감독만이 깰 수 있다며 마침 2011 시즌 중 SK에서 경질당한 김성근 감독을 모셔오자고 쌍마에서 릴레이를 펼쳤으나 결과는 김기태 수석코치의 감독 승격. 그리고 2012 시즌에도 전력 유출을 겪으며 가을야구에 실패 '''6668587667'''이라는 10년의 암흑기를 맞이하고 2013 시즌이 돼서야 비밀번호를 끊어내고 가을야구에 진출했다. 그리고 2014년에는 '''16년만에''' 2년 연속 가을야구 진출을 이루어냈다. 2015시즌은 시즌 내내 말아먹는 바람에 다시 암흑기가 찾아오나 했지만 리빌딩을 천명한 2016년에는 시즌 중반 8위까지 떨어졌다가 후반기 무서운 상승세로 2년만에 가을야구에 복귀했다.
김성근 5년 재임: 2007년~2011년
김성근이 집권하고 있던 시절에도 사실 혹사 후유증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김성근 감독 재임 3년차인 2009시즌은 주전 선수들이 줄부상을 겪었다. 시즌 중반부터 박경완, 김광현, 송은범이 차례로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고 채병용도 부상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김성근 감독이 출장을 강행시켰다. 이처럼 주전 선수들이 줄부상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SK의 워낙 두터운 선수층 덕분에 잇몸으로 버티며 2위로 시즌을 마감할 수 있었다. 전임 감독이나 후임 감독을 결코 칭찬하는 법이 없었던 김성근이었지만 SK에서 만큼은 전임 감독이었던 조범현이 어린 선수단을 잘 조련시켜놔서 자신이 팀을 정상으로 이끌 수 있었다며고 칭찬한 적이 몇번 있었다.
이듬해인 2010시즌 김성근은 전년도에 우승에 실패한 탓인지 독기를 품고 선수들을 굴리기 시작했다. 아직 부상에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김광현과 박경완 등을 땡겨 쓰며 굴린 결과 정상을 탈환에 성공했지만 이듬해에 그 후유증은 제대로 나타났다.
계속된 쥐어짜기의 결과 선수단의 노쇠화와 혹사 후유증은 더욱 깊어져 재임 5년차인 2011년에는 팀이 총체적 난국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김성근의 쥐어짜기도 효과가 없어서 시즌 내내 3위권 싸움을 하며 SK왕조 시절도 이제는 저물어간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시즌 중간에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고 엄청한 후폭풍에 휩싸였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이만수 대행이 팀을 반등시켜 2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특별한 전력보강 없이 선수단의 노쇠화가 계속되었고, 김성근이 저지른 혹사는 군데군데에서 아픈 비수가 되어 날라왔다. 당장 2009년 전천후로 투입되어 133이닝을 던지는 등 무지막지하게 굴려진 전병두는 이후 당겨쓰기 등으로 인해 어깨 부상이 더욱더 심해지며 2011년 말부터 1군에서 자취를 감췄고,[5] 채병용과 고효준은 30세가 될때까지 군문제도 해결 못하다가 군 팀 입단 가능 나이가 넘어버리며 뒤늦게 공익으로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떠났으며, 윤길현은 상무 입대에 성공했지만 혹사의 여파로 인해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 아예 국군수도병원으로 전출되어 재활에 전념해야 했다. 사실 김성근은 본인이 감독으로 있는 동안 선수들 군문제를 '''절대로 처리하지 않는다.''' 군대 가야 할 연령대가 넘어도 어지간해선 보내지 않으며, 수술이 필요한 선수도 최대한 다 재활로 묶어버린다. 전자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채병용과 고효준이고, 전병두가 2009년 이미 수술소견이 나왔으나 김성근이 지정한 병원에서 재활소견이 나온 뒤 2010년 5월 복귀한 것이 후자의 단적인 사례. 한화에서도 똑같이 그 짓을 하려고 하자 선수 본인이 감독과 야구 못하겠다고 은퇴를 선언하는가 하면, 다른 팀에서는 선수를 공짜로 주워가기도 하는 등 막장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화가 이미 선수단의 군문제로 오랫동안 시름을 겪은 팀이라는 점.
그리고 왕조의 핵심 불펜인 이승호와 정대현도 노쇠화가 뚜렸했지만 어쨌든 떠나버렸다.
타선에서도 박재홍, 김재현 등이 은퇴수순을 밟거나 이호준과 정근우같이 FA로 팀을 떠났고, 미래를 위한 유망주를 키우지 않는 김성근의 극단적인 성향 속에서 권용관과 최동수 등 미래와 맞바꾼 노장선수가 트레이드로 오는가 하면, 반쪽짜리 역할만 강요당하던 모창민과 이재원이 2010년 말 김성근을 따돌리고 구단과 상의해서 미래를 위해 군야구단에 입단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2009년 이후 SK 2군 내부에서는 김성근에 대한 불만이 쌓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김성근 감독이 SK에서 물러난 이후 이만수 체제 하에서 SK는 그 후폭풍에도 불구하고 2012년까지 2년 연속 준우승을 하며 연착륙에 성공한다. 그러나 2012시즌 초 일시적으로 6위까지 떨어졌을 때 역시 김성근 감독이 떠나니 별 수 없다는 김성근 팬들의 비아냥을 받았고, 또 밖에서도 김성근 원더스 감독이 이만수 감독과 SK 프런트를 맹비판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8월말 다시 2위로 치고 올라가자 김성근팬들은 '''부자는 망해도 3년 먹을 양식은 있다'''면서 김성근 감독님이 강팀으로 만들어 놓고 간 덕분에 이만수 감독이 2년 연속 준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태세를 전환했다(...).
이처럼 외부 전력보강도 없고 유망주의 1군 정착도 더디고 선수단 평균연령만 높아지던 2013시즌에는 이만수 감독의 운영능력까지 한계에 부딪히며 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러자 김성근 감독팬들은 드디어 김성근의 저주가 본격적으로 나타난다면서 반색했다.
2014시즌에는 더욱 답이 없는 상황에 처하며 시즌 중반 한때 8위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자 김성근의 저주가 고착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즌 막판에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주며 LG와 치열한 4위 경쟁을 벌였으나 아깝게도 포스트시즌 진출에는 실패하고 5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게다가 리빌딩의 전조까지. 아무쪼록 김성근이 쏟아부은 저주를 잘 막아내는 SK의 모습이다.
2015시즌에는 프로야구계에 복귀한 김성근 감독의 한화와의 대결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한화와의 첫 시리즈에서 '''스윕패를 당하며 3패를 깔고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김성근의 막장 운용과 투수진의 과도한 혹사에 대한 후유증이 나타나면서 한화에게 연일 위닝시리즈를 가져오고 마지막 시리즈에선 스윕까지 가져오는데 성공했다. 결국 '''한화는 SK에게 11년 연속 상대전적 열세'''를 허용하고 말았다. SK는 결국 가을DNA 버프로 인해 후반기에 치고 올라가 5위로 포스트시즌 막차를 타는데 성공, 한화와 김성근이 그토록 앵무새처럼 부르짖던 5강행을 빼앗고 가을야구를 하는데 성공했다.
2016년에는 시즌 전 FA 선수 유출로 불안하게 시작하더니 정작 시즌 들어서는 안정적인 4위 자리를 지켜내나 싶었지만 막판 '''9연패'''로 추락하면서 가을야구 실패하면서 노리타들의 조롱을 받았다.
트레이 힐만이 이끌게 된 2017년엔 지독한 불펜 불안으로 인해 후반기 추락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토미 존 수술로 재활에 들어간 김광현 없이도 문승원, 박종훈 등이 선발진 안착에 성공하는등 성과가 있었고 어찌어찌 5위로 마감하면서 일단은 가을야구는 성공했다.[6]
2018년에는 완벽하게 빅볼로 팀컬러가 바뀌면서 김성근의 색을 완벽하게 지웠다. '''그리고 14.5게임차를 뒤집고 2018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면서 김성근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염경엽 감독 1년차인 2019년 후반기부터 팀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하고 2020년에는 팀의 존속조차도 의심스러울 정도의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건 김성근의 저주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 차라리 김성근의 수제자인 양 자칭하고 다니는 염경엽이 만들어 낸 또다른 저주에 가깝다.
김성근 3년 재임: 2015년~2017년
저주를 선불로 받은 것도 모자라 경질되는 순간까지 듬뿍 받아낸 사례로 이유야 당연히 저주를 받은 팀 중 김성근 재임기에 유일하게 포시 진출에 실패한 팀(678)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성근이 잘린 후 이상군 감독대행을 거쳐 한용덕 감독의 철저한 관리야구와 선수 '''잠재력 극대화로'''[7] 전반기 단독 2위에 6위와 승차만 봐도 가을야구를 사실상 확정하면서 김성근의 저주를 막았다. 최소 5년은 KT와 꼴지 경쟁을 해야 할 것으로 봤던 예상과는 완전 다른 결과로 한용덕 감독을 명장 반열에 올려놓았다.
한화의 기대 이상의 성적에 노리타들이 양훈을 버리고 이성열을 데려오며 큰 그림을 그렸다느니 김성근이 승부욕, 악바리를 심어주고 가서 이제서야 터졌으니 한용덕이 김성근의 유산을 받았다는 온갖 개드립을 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송은범, 정우람 등 김성근이 영입에 영향을 준 선수들조차 사용법은 송진우가 가지고 있다 할 정도로 재임 시기에는 빛은 보지 못했고, 호잉, 서균, 정은원, 박상원 등 신진 자원들 역시 김성근 시절엔 1군에 없었던 선수들이다. 한마디로 김성근의 가르침을 딱히 받을 기회도 없었던 것.
그리고 놀랍게도 한용덕 감독은 시즌 최종전 NC전에서 78번째 승리를 수확하며[8] 자력으로 준플레오프 진출을 확정지었다. 허나 일부 삐딱한 야구팬들은 여전히 김성근 명장설을 주장하면서 1승3패로 넥센에게 패배하자 이제는 단기전에 안맞을 감독이라고 까고 있다. (...)
하지만 완전히 그 저주를 종식시키는 건 불가능해서 당장 팀 내부의 베테랑들이 버텨야 한다고 주문을 걸고 있다. 2014년~2016년 동안 외부 FA 7명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유망주들이 다 빠져나가서 주전과 백업간의 격차가 매우 커진데다 중간 세대가 단절되어 있어서 2019년을 기약할 수가 없다고 내부 FA 내야수 송광민(35) 외야수 이용규(33) 최진행(33)에게 통보하였다.
게다가 2019년 시즌에 삐걱거리는 것을 보면 유망주 트레이드에 대한 피해가 없다고 볼 수 없다. 다만 투수진이 문제라기 보단 타선이 문제라는 점에서 한용덕 감독의 베테랑들과 불화와 합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2018년 3위는 한용덕의 명장이고 2019년은 김성근 책임으로 돌리는 건 상당한 이중 잣대이다. 또한 김성근 시절에 트레이드, FA 보상 선수들의 2019년 상태를 본다면 모두 한화에 있었다고 순위가 과연 얼마나 반등할지도 코미디인 상황이다.[9]
아무튼 2019년은 9위로 마쳤고 이와 동시에 단장 자리에 계약이 끝난 박종훈 대신 정민철을 새롭게 앉혔는데, 정민철은 단장이 되자 장시환-지성준 트레이드로 엄청난 비판을 받았으며 2020년 시즌에 한용덕의 기우제식 운영과 투수-타자 동시 붕괴로 14연패를 찍으며 엄청나게 여론이 안좋아졌고[10] 6월 7일에 한용덕이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저걸 본 노리타들이 부활하여 준동하는 건 덤.[11][12]
그리고 2020년 한화는 김성근도 안했던 18연패까지 찍으면서 만인의 비웃음 거리가 되었다. 이후 10월 22일, 5경기를 남겨둔 채 트래직넘버가 소멸되어 10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다.
김성근의 추종자들이 곧잘 하는 소리가 김성근의 스몰볼은 팀 사정상 어쩔 수 없이 하는 거고 강타자들을 많이 보유한 팀이었다면 10년 롯데 같은 타격야구를 했을지 모른다는 소리다. 이 소리는 그의 마지막 팀인 한화 이글스의 팀 컬러와 2018년 한용덕 감독이 빅볼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반박 가능하다. 물론 실제로 전력이 약한 팀을 맡았던 적도 많았지만 이건 앞뒤 안재고 '''이 팀은 골 많이 넣으니까 공격축구한다'''하는 것과 똑같은 소리다. 무리뉴 시절 첼시는 득점력도 리그에서 손꼽힐 만한 팀이었지만 아무도 무리뉴보고 공격축구한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공격야구, 수비야구를 가르는 건 단순히 득점력이나 타율이 아니라 감독의 팀 운영 방법론과 육성과정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건 빅볼이 아예 불가능해서 스몰볼을 하거나, 어정쩡한 빅볼보다 스몰볼이 이기는데 효율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가는 소리다. 그런데 타고투저인 2010년대의 KBO에서 이건 그냥 멍멍이 소리고, 어설픈 팀배팅 하려다 마이너 내야 유망주들의 호수비에 쳐발린 2010년대 각종 WBC 참사에서도 증명된지 오래다. 당장 2017 시즌 KBO만 해도 빅볼이 전혀 되지 않아서 강제 스몰볼 테크를 타는 팀은 LG 하나밖에 없다. 애초에 LG 팀컬러 자체도 잘나가던 90년대에도, 비밀번호 탈출한 10년대에도 뻥뻥 때리기보다 분위기를 몰아서 산발적 안타로 이길 수 있는 최소한의 점수를 뽑고 나머지는 압도적인 투수력으로 메꾸는 팀이다. LG보다 종합적 타격생산성이 아래인 팀들도 파워가 있으면 일단 그 파워는 적극적으로 써먹고, 이를 통해 승리를 얻는 것이 효율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김성근은 삼성, SK(직전 2005시즌 홈런 2위, 타율 3위), 쌍방울(직전 1995시즌 타율 4위) 등 타격이 좋은 팀을 가지고도 스몰볼을 버리지 않은 감독이다. 프로스포츠에 조금만 관심있는 사람이면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닌 게 감독의 취향이란 건 팀 옮긴다고 바뀌는 게 아니다. 그 부분에서 좀 더 발전해갈 순 있어도 성향이 바뀌는 감독은 없다.
1. 개요
KBO 리그의 유명한 저주 중 하나이며 김성근이 감독직을 맡았다가 경질된 후 그 팀이 암흑기에 빠지는 것을 일컫는 말인 김성근의 저주에 대한 각 구단별 사례 및 실상이다. 사실 김성근의 저주 자체가 대부분 본인이 팀을 파국으로 몰아넣고, 장기적인 리빌딩에 절대적으로 부적합하게 팀 운용을 했기 때문에 나오는 증상이다. 카페인의 힘을 빌려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고 해서 그 다음날 잠을 자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다. 물론 예전에야 대부분의 KBO 리그 팀이 주먹구구식 운영을 했고, 프런트가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근시안적이었고, FA제도가 없거나 미흡했던 만큼, 가용한 선수를 단기간 혹사와 강훈으로 우려내는 김성근이 야구가 그나마 통할 수 있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야구에서 그것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고, 본인도 SK 시절부터는 FA선수를 왜 잡아주지 않냐며 징징거렸다. 그러나 SK는 이진영을 제외한 모든 내부 FA를 잡았다. 그리고 한국야구에서 외부 FA는 특유의 보상선수제도로 인한 핵심선수유출과 막대한 계약금, 연봉 때문에 한국야구감독들은 내부 FA 단속은 몰라도 외부 FA 영입에 대해선 뒤에서 조용히 말하지 대놓고 요구하는 경우는 드물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불만이 있어도 겉으로나마 '구단 사정을 이해한다', '있는 자원으로 잘 해보겠다'라고 하는게 보통이다. 까놓고 말해 '''외부 FA 안 잡았다고 구단에 화내는 인간은 김성근밖에 없다.'''
아예 한화에 와서는 2년 간 200억이 넘는 돈을 FA에 쏟아 '버리며' 스스로 저주를 갱신하고 있다. 물론 자서전이나 각종 강연, 인터뷰에서는 항상 선수 '육성'에 대한 필요성과 책임을 강조한다(...). 그의 언행불일치를 보면 저주가 생길 만도 한 것이다.
2. OB 베어스-5꼴꼴(578)
김성근 5년 재임: 1984년~1988년
김성근 재임 5년 동안 선수층이 꾸준히 노쇠한 반면 신인선수들의 성장은 더뎠다. 김성근 재임 5년 동안 OB 베어스의 주전 선수들은 대부분 김영덕 감독 시절에 주전이었던 선수들이었다. 야수 김경문, 조범현, 신경식, 구천서, 유지훤, 양세종, 윤동균, 김광수, 박종훈, 한대화, 김우열과 투수 황태환, 박철순, 계형철, 박상열, 장호연, 강철원이 그들이다. 김성근 감독 첫해인 1984년 신인 윤석환, 김진욱, 최일언 투수 3인방과 외야수 김광림이 데뷔 첫해부터 주전을 차지했지만, 그 첫해를 제외하면 나머지 네 시즌 동안 주전으로 성장한 신인이 없었다. 그나마 김형석(85년 입단)과 박노준(86년 입단)이 1군에 기용된 신인이었지만, 김형석은 주전과 백업을 오가며 김성근 시절에는 확실히 주전을 차지하지 못했다. 박노준은 김성근 시절에 투타 겸업으로 기용되며 집중력 결여와 혹사로 결국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선수생명이 단축된 사례다. 박노준은 데뷔시즌인 86시즌에 타자를 겸하면서도 투수로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굴려지며 33경기에 등판해 110⅓이닝을 던져 5승 6패 7세이브(3위)를 거두는 혹사를 당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해에 혹사의 여파로 부상을 당했고 그 와중에도 김성근에 의해 굴려지며 ERA가 6점대로, 그 다음해는 18점대로 치솟아 결국 투수로는 더이상 쓸 수 없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타격부문에서도 대타로만 기용되며 이도저도 아닌 선수가 되고 말았다. 김성근 감독이 경질된 후 후임 감독이 된 이광환은 박노준을 타자 전업으로 전향시켰고 그러자 그해 바로 3할에 육박하는 성적을 내며 주전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선수시절 초기 혹사의 여파로 이후에도 부상이 반복되며 짧은 전성기 후 선수생활 후년에는 기나긴 부진을 겪다가 은퇴했다. 김성근 임기 후반기인 87~88 두 시즌 동안에는 신인선수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이처럼 김성근 시절 말년까지도 OB 베어스는 대부분의 주축 선수들이 원년부터 뛰어오던 선수들이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원년 이전에 실업야구나 대학야구를 거쳐왔기 때문에 김성근이 물러났을 때 선수층의 노쇠화와 부상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김성근 감독 시절 혹사당한 대표적인 인물로 윤석환을 들 수 있다. OB 베어스 역사상 손꼽히는 좌완 에이스로 꼽히는 윤석환은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1984년에 데뷔했다. 윤석환은 데뷔시즌에 맹활약 하며 그해 신인왕과 구원왕을 석권했으나 혹사의 여파로 이후 오랜 부상과 부진을 겪었다. 김성근의 마지막해인 1988시즌 윤석환은 마침내 부상에서 회복하여 부활에 성공하여 팀의 주축 투수로 다시한번 맹활약했다. 그러나 1988시즌 또다시 혹사를 당한 윤석환은 1989시즌부터 완전히 몰락하여 이후 반등에 실패하고 89~91시즌 동안 단 4승만을 추가한 채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1988년 김성근 대 이광환의 구단 내 파워게임에서 구단의 김성근의 재계약 불가 방침으로 자연스레 김성근이 팀을 떠나고 이광환이 차기 감독이 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지만, 해임된 김성근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자신의 파벌에 속해있던 OB 코치진들을 대거 태평양 돌핀스로 데리고 갔다. 때마침 청보 핀토스를 인수한 태평양 구단 프런트가 구 청보 시절 코칭스탭을 모조리 물갈이하려던 계획과 맞물려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코치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OB 베어스는 팀이 흔들릴 정도의 타격을 입는다.
후임 감독이 된 이광환은 '자율 야구'를 주장하며 그의 야구관을 팀에 이식하려 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결국 이광환 감독은 1990시즌 중반에 중도 사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간 그의 야구관은 3년 후 연고지 라이벌 LG 트윈스에서 통합 우승을 이루어 내며 대성공을 거둔다. 이광환의 자율야구가 LG에서는 성공했지만 OB에서 실패한 것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김성근 체제 하에서 혹독한 훈련과 스몰볼식 야구에 익숙해져 있던 선수들이 갑작스런 메이저리그식 자율야구에 적응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 보고 있다.
그러나 이광환 감독이 OB에서 실패했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김성근이 물려주고 난 팀에서 심각한 혹사 후유증과 노쇠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김성근 재임 5년 동안 신인선수는 발굴되지 않은 반면 선수층의 노쇠화와 혹사 후유증이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것이 이광환 감독 부임과 때를 같이하여 곪은 것이 터져버린 것. 김성근 시절 5년간 꾸준하게 혹사당한 윤석환, 최일언, 계형철 등 주축 투수들이 모두 부상으로 나가 떨어지면서 투수진에 커다란 공백이 생기고 말았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이광환 감독은 2년 연속 5위[1] 를 찍었는데 이는 김성근 감독의 마지막해 성적과 같은 것이었다. 이광환 감독의 후임인 이재우 감독도 부진한 성적을 보여준 끝에 91시즌 도중 경질된다.
3. 태평양 돌핀스-568
김성근 2년 재임: 1989년~1990년
김성근 시절 태평양 돌핀스 전력의 핵은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신인 투수 3인방이었다. 1989년 김성근 감독의 부임과 동시 혜성처럼 나타난 이들 신인 투수 3인방은 무려 40승 10세이브를 합작하며 태평양 돌풍을 일으켰다. 그런데 태평양에서 김성근이 짤리고 나자 혹사의 후유증으로 투수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후임 박영길 감독은 첫해인 1991시즌을 맞이하면서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양상문, 박은진 등으로 주력 선발진을 꾸렸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김성근 시절의 혹사 여파가 나타나면서 1군 투수들이 하나둘 수술대에 올랐고 92~93시즌에는 투수진의 거의 대부분이 팀이 추스를 수 없는 수준까지 망가졌다. 특히 젊은 투수들의 피해가 심했다.
박정현은 김성근 재임 시절 단 2년만에 페넌트레이스 '''434 ⅓'''이닝을 던졌고, 준플레이오프 시리즈 단 한 번에 18 ⅔이닝을 던졌다. 89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이렇게 던지다가 결국 경기 도중 마운드에 주저앉아서 그대로 실려갔다. 김성근 2시즌 동안 도합 453이닝을 던진 그는, 이후 9년[2] 을 더 뛰었지만 겨우 600이닝을 더 던지고 은퇴해야 했다.
1987년 입단해 88년까지 단 20이닝을 소화한 데 그쳤던 최창호도 김성근 부임 시절 2시즌동안 '''420'''이닝을 던지는 엽기적인 혹사를 당했다. 그는 91년에는 숫제 233이닝을 던지며 이 부분 리그 1위까지 차지하지만, 이런 앞뒤없는 혹사는 결국 본인에게 독으로 돌아와서 92년 부상으로 나가 떨어졌다.
정명원도 김성근 시절 들어온 신인. 첫 해 139이닝을 소화하며 11승을 거두고 좋은 성적을 뽑아냈지만, 바로 부상으로 연결되었다(...). 이듬해 거하게 망가졌고, 이후 그의 커리어 대부분은 구원진에서 뛰며 작성하게 된다. 신인 때 혹사 이후 10년이 지난 98년이 되어서야 그는 전업 선발로서 재기할 수 있었다.
김성근이 경질된 직후 1991시즌 부임한 박영길은 팀 컬러를 타격 강화 쪽에 맞추려고 했으나 실패한 케이스. 박영길은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감독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타자들에게 장타를 강조하는 메이저리그식 빅볼 야구를 추구하는 인물이다. 1987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에는 팀타율 3할을 달성한 적도 있었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투고타저였던 1980년대에 팀타율 3할이란 건 어마어마한 기록이다. 1987년의 삼성은 KBO리그 역사상 공격력으로는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갈 팀으로 꼽히고 있다. 또한 투수진이 모두 혹사 후유증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박영길 감독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공격력 강화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짠물 돌핀스라는 소리를 듣던 태평양에는 박영길식 타격 이론을 소화할만한 타자 자체가 많지 않았고, 전임 김성근 감독의 선수들에게 지도했던 번트와 작전 위주의 스몰볼과 충돌하면서 성적 부진으로 이어진 것이다. 참고로 태평양은 역대 최악의 타선을 가지고 있던 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타자 출신 감독이 왔으니 흥할 수가 없었다. 사실 김성근의 스몰볼이든 박영길의 빅볼이든 태평양은 어차피 점수는 못내는 팀이었다. 단지 김성근 시절에는 리그에서 손꼽히는 역대급 투수진으로 부족한 공격력까지 메꿔왔을 뿐. 결국 박영길은 1년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박영길 감독의 후임으로 1992년 정동진 감독이 부임했으나, 위에 인터뷰에 나온 것처럼 김성근 시절 혹사 당한 선수들의 상태가 너무나 심각해 과감하게 주축 투수들을 모두 수술대에 보내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1992시즌과 1993시즌에 각각 6위, 8위에 머물렀지만, 마침내 투수 3인방이 재활에 성공하고 돌아오자 1994년 돌풍을 일으켜 인천 연고 프로야구 팀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오르게 된다.
4. 삼성 라이온즈-556
김성근 2년 재임: 1991년~1992년
우선 김성근의 삼성 시절은 이만수, 강기웅, 류중일 등 기존 선수들과의 대립이 있었다. 김성근은 이만수 등 기존 선수들의 기량을 탓하면서, 기필코 우승을 하겠다는 명분으로 구단에 대체자원의 영입을 요청했고, 우승을 작정한 구단은 김성근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여 현금트레이드 등으로 영입한 베테랑 선수 7명을 포함하여 무려 15명의 선수를 보강했다. 그리하여 신경식, 조범현 같은 자기 제자들을 대거 영입되었다. 문제는 이들은 이미 기량이 쇠퇴해서 타팀에서 방출되거나 은퇴를 종용받던 선수들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김성근의 영입선수은 대부분 실패하여 팀 전력에 별다른 보탬이 되지 못했고, 팀 체질 개선에 실패했다.
게다가 김성길, 류명선, 오봉옥 등의 투수 혹사 문제까지 있었다. 특히 김성길 혹사는 엽기적인 수준으로 36살 노장 투수를 14번의 선발 등판을 포함해서 중간계투 겸 중무리 겸 패전처리로 마구잡이 등판시켜서 '''57경기 188이닝'''을 던지게 했다. 그리고 김성길은 구위가 확연히 떨어져서 다음해에는 거의 배팅볼러로 전락해버렸다. 투수혹사가 일반적이던 당시에도 김성근 감독의 김성길 기용을 정면 비판하는 신문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심지어 당시 유망주 투수던 허삼영을 집중적으로 혹독하게 훈련시켜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3] 하게 만들기도 했다.
즉 기존 선수와의 불화+선수영입 실패+투수혹사라는 3콤보가 합쳐져서 세대교체 실패와 팀케미스트리 악화를 불러왔으며, 최종적으로 팀을 556이라는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로 몰아넣었다.
김성래, 성준, 김상엽 등 주력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이 있었더라도 자기와 연관있는 선수들만을 기용하는 김성근의 운영 방식은 큰 비판을 받았으며, 해임 이후 삼성은 우용득 취임 직후 김성근 커넥션을 정리하게 된다. 조범현은 김성근이 해임된 1992년 시즌이 끝나고 방출되며, 신경식, 김성길은 정영규를 상대로 쌍방울로 트레이드 됐다. 그 결과 93년 삼성은 부상 선수들의 부활과 양준혁, 박충식 등 신인 플레이어들의 활약으로 준우승을 차지했으나, 김성근 재임 기간동안 실패한 세대 교체 문제 등이 문제되어 94년~96년에 삼성은 556의 침체기를 보내게 되었다.
이후 96년 백인천이 취임하면서 삼성은 대대적인 리빌딩을 단행했다. 이 무렵, 백인천은 기존의 노쇠한 김성래, 강기웅과 이종두, 김성현, 박선일을 정리하고, 이승엽, 김한수, 김태균, 정경배 등 젊은 선수들을 기용했다. 흔히 이만수도 이때 버려졌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백인천은 백업포수, 지명타자, 대타, 대수비로 이만수에게 기회를 줬다. 이만수가 방출당한 건 백인천 감독이 물러난 1997년 시즌 후다. 이 무렵 1루 이승엽, 2루 정경배, 유격 김태균, 3루 김한수로 내야진은 몇년간 고정되며, 외야진도 양준혁과 신동주, 그리고 트레이드로 영입한 김종훈이 지키게 된다. 모두 백인천 재임기엔 20대의 젊은 선수들이었다. 그 결과 취임 당시는 6위를 기록하긴 했으나 리빌딩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팀은 다시 강호로 올라설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김성근 시절의 삼성은 올드팬들에겐 556 암흑기보다도 더 야구보기 싫었던 시절로 기억되는데, 투수 혹사는 혹사대로 시키고 본인 사단만 기용했으며 성적은 성적대로 못냈기 때문.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올드팬들에게는 김성근이 '''선동열 보다도 못한 놈'''취급을 받고 있다. 선 감독은 그나마 2회 우승이라는 결과물이라도 어찌어찌 있었으나, 김 감독 시절은 세대 교체 실패+팀케미스트리 악화+팬심 악화+영 좋지 않은 성적이라는 콤보로 인해서 평가가 매우 박하다. 자세한 것은 김성근/지도자 경력 참고.
이처럼 김성근의 삼성 시절은 전형적으로 김성근 스스로가 자초한 저주였다. '''삼성에서 경질된 후 김성근을 찾는 팀이 아무도 없어''' 한동안 야인생활을 전전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보아도 삼성 시절 김성근에 대한 평가가 당대에도 얼마나 나빴는지를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이런 팀꼬라지를 3년 내내 본 산증인은 다름아닌 '''콩동님'''.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허파고도 이때 많이 배웠다.
5. 쌍방울 레이더스-해체
김성근 4년 재임: 1996년~1999년
삼성 감독에서 경질된 후 이제 야구계에서 은퇴한 것으로 여겨지던 김성근이 돌아오게 된 것은 김성근과 친분이 깊었던 일본통 이용일 쌍방울 구단주 덕분이었다.
쌍방울 시절은 그의 팬덤에 의해 김성근의 능력이 최고로 발휘되었던 시기였다고 칭송되던 시절이다. 하지만 2016년 김성근 재임시절(1997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팀연봉총액이 리그 전체 1위였다는 사실이 새롭게 발굴되면서 쌍방울 시절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는 '헝그리 정신'으로 포장되었던 쌍방울 돌격대의 이미지가 많이 퇴색된 상태. 그래도 96년은 연봉 하위권이기는 했다.
1997년 모기업이 어려워지는 상황 속에도 김성근의 계속된 요청으로 쌍방울은 전력을 강화하며 페이롤 1위를 찍었고, 결국 이것이 쌍방울 모기업에도 부담을 주었다는 평가다. 1997년 재정위기를 겪던 모기업 쌍방울은 결국 1997년 10월 14일 부도처리된다.
그러나 모기업이 부도가 났지만 김성근이 언플한 것처럼 모기업이 구단에 대한 지원을 거의 끊은 것은 아니었다. 1998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예산은 페이롤 1위를 찍었던 1997시즌에서 비해 20% 삭감된 선에서 결정되었다. 지나치게 높아진 페이롤을 줄이기 위해 고액연봉 선수들을 타팀으로 트레이드로 보냈다. 그러나 선수유출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젊은 선수들을 지속적으로 충원했다. 투타의 핵심인 김기태와 김현욱은 여전히 98시즌에도 쌍방울 소속으로 뛰었다. 이 둘이 트레이드된 것은 1998년 시즌이 끝난 후다.
이 와중에도 김성근 감독은 김원형 빈볼 사건, 마운드 높이 시비 등 지속적인 사건사고를 일으키며 야구팬들의 비난을 받았고 팀 사기는 더욱 저하되었다.
마지막 시즌인 1999시즌 쌍방울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쌍방울 구단은 외국인 용병으로 마이클 앤더슨, 제이크 비아노를 영입하는 등 나름 팀 재건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몸값 비싼 김기태와 김현욱이 나갔지만 젊은 선수들을 대거 충원했다. 현대로 팔았던 김광림이 현대에서 방출당하자 다시 영입하기도 했다.
1999시즌 쌍방울이 2할대 성적으로 주저앉은 것은 김성근 체제 4년 동안 누적된 혹사와 마구잡이식 운용의 후유증이 곪아 터진 측면도 적지 않다. 1999시즌엔 남아있던 주축선수들이 줄줄이 줄부상을 당해 전열을 이탈하고 말았다. 조원우, 조규제, 김광림 등이 줄부상 당하며 전열에서 이탈했다. 조원우는 1999시즌에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팀내 최고 타율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김성근 감독 특유의 '''강훈련'''을 받던중 부상을 당하여 시즌아웃되었다. 이후 조원우는 2000년부터 복귀하여 선수 생활을 계속했으나 다시는 예전만큼의 타격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이 부상은 조원우의 커리어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김성근의 첫 외국인 용병이었던 두 투수는 김성근 용병 잔혹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두 외국인 투수는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김성근 특유의 기싸움으로 스프링캠프에 제외되는 등 불협화음이 일어났고, 투구폼 교정 등으로 마찰을 빚기도 했으며, 시즌 후에도 2군 강등을 반복하는 등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앤더슨의 경우 전년도에 LG 트윈스에서 마무리로 뛰며 20세이브를 돌파하며 가능성을 보였고 쌍방울에서도 시즌 초반 호투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김성근 감독이 이유없이 2군 강등과 1군 복귀를 반복하자 불만으로 표출하며 훈련에 무단 불참했다. 이에 김성근 감독은 앤더슨의 퇴출을 지시했고 앤더슨은 구단 사장에게 직접 전화해 억울함을 호소하기까지 했다. 결국 구단이 나서 중재하면서 사태는 수습되었지만 이후 앤더슨의 성적은 급격히 나빠졌다. 비아노는 시즌 시작 전부터 스프링캠프에 제외되더니 시즌 후에도 2군 강등과 1군 복귀를 반복하며 역시 좋지 않은 성적을 보였다.
1998년 12월 KBO에서는 김기태와 김현욱의 현금트레이드를 승인하면서 쌍방울에게 구단 유지를 위해 1999시즌 전반기 66경기에서 최소 승률 3할을 맞추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전반기를 3할 승률로 마치기 위해 조바심이 나있던 김성근은 1999년 6월 18일 남은 다섯 경기를 모두 이겨야 전반기 3할을 달성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 그날 경기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김성근 감독은 초유의 심판 폭행 사건을 일으키고 만다. # KBO는 김성근 감독에게 12경기 출장정지 및 벌금 200만원의 중징계를 내렸고, 쌍방울은 0.237의 승률로 성적으로 전반기를 마치게 된다. 결국 쌍방울 구단은 김성근 감독이 출장정지 징계 중이던 7월 올스타전 기간에 그를 경질했다.
결국 역대 최다패와 한 시즌 최소 관중의 굴욕을 맛본 쌍방울은 2000년 2월 해체의 운명을 맞이, 3월 SK 와이번스로 재창단하며 인천으로 연고를 정하면서 전주와 군산과는 영원한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6. LG 트윈스-6668587667
김성근 1년 재임: 2002년
김성근의 저주와 LG막장 운영의 합작품. 팀이 아무리 망가지더라도 재건하는데 5년이면 충분하다. 5년동안 새대 교체를 못하거나 유망주들을 키우지 못한 것도 결코 작지 않다는 점. 삼성만 봐도 2556을 하면서 재건하고 강팀이 되었으며 역대 막장 감독 명단을 봐도 재건이 안된다면 그 후임도 막장 감독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암흑기 시절 롯데가 있다. LG의 비밀번호가 모두 김성근 탓으로 돌리는것은 김성근의 안티라고 보는 게 맞고 5년은 김성근의 책임, 그 이후는 이순철을 포함한 후임 감독들의 책임으로 봐야 한다.
정식 감독은 2002년으로 1년이지만 감독대행으로 2001년을 뛰면서 투수 혹사 논란이 있었는데 2001년은 신윤호가 144이닝(선발4)을 뛰며 성적으로는 이승엽을 밀어내고 MVP를 받을 뻔 했으나 이승엽에게 인기에서 밀려서 1차 투표에서 이겼지만 2차 투표에서 패배했다. 2002년엔 이동현을 순수 불펜으로 124이닝+가을야구를 던지게 하면서 엄청난 혹사를 했다. 결국 이 두 투수는 김성근 시절이 커리어 하이가 되버렸고......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와의 맞붙어 2승 4패로 준우승을 거둔 LG 트윈스. LG 프런트는 준우승을 거둔 김성근 감독을 경질한다. LG 구단이 김성근을 경질한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신바람 야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LG 구단과 대놓고 번트와 잦은 투수 교체를 가져오는 극단적인 스몰볼 야구를 추구했던 김성근의 야구관이 서로 상충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게다가 김성근 부임 기간 동안 LG의 성적도 딱히 신통치 않은 상황이었다. 김성근이 부임하기전 LG 트윈스는 8년 동안 단 한번을 제외하고 계속 4강에 진출했고 우승과 준우승도 몇 차례 거두었다. 2001년은 초기에 이광은 감독의 책임이 있다쳐도, 2002년은 시즌초 최하위를 전전하다가 후반기에 반등에 성공해 극적으로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시즌 초반에 보여준 극도의 부진 때문에 경질설이 나돌기도 했다. 김성근과 프런트 간의 갈등도 한 원인이었다. 2001년 시즌 후 최종준 단장이 물러나고[4] 유성민 단장이 부임, 2002년에 90년대 전성기를 이끈 단장 출신 어윤태가 사장으로 들어오며 본격적인 갈등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2002시즌 팀이 극도의 부진에 빠지며 최하위권에 머물자 어윤태 사장은 1994년 우승의 주역인 이광환을 차기 감독으로 내정하고 김성근을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갔으며, 시즌 중 김성근을 해임하려 했다. 그러나 여름부터 팀이 반등하면서 극적으로 4위를 차지하면서 경질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결국 한국시리즈 준우승 후 김성근을 해임하게 된다.
김성근의 후임으로 2003시즌 자율야구의 달인이자, 1994년 우승의 주역인 이광환을 감독으로 다시 영입했지만 6위을 기록했다. 시즌 후 이광환 감독은 2군 감독으로 내려가고 수석코치 이순철이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LG 프런트는 2003년~04년 팀의 핵심 선수였던 이상훈, 유지현, 김재현을 이적 혹은 은퇴를 시키면서 정리하게 되었다.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강제로 은퇴시키거나 김재현 각서 파동으로 인해 2004년 시즌 후 FA로 풀린 김재현을 SK 와이번스로 보냈으며 프랜차이즈 스타 이상훈 역시 SK로 트레이드된 후 본인에게 보장된 6억원까지 포기하면서 갑자기 은퇴했다.
2005년 LG는 3년 연속 6위라는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2006년에는 창단 첫 꼴찌를 기록하며 이순철 감독이 사퇴했다. 이후 김재박 감독을 영입하면서 2007 시즌에 5위로 올라왔다. 2008년 LG는 창단 이래 최저 승률과 팀도 2번째 꼴찌를 기록하고 말았다. 2009년 초반에는 2위로 올라가 김성근의 저주가 풀리나 싶은 듯 했지만 주전 포수인 김정민의 부상 이후 결국 7위로 내려가고 말았다. 그 와중에 조인성과 심수창의 불화, 이후 김재박 감독의 박용택 타율 관리에 대한 만행에 대해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LG는 롯데 자이언츠의 8888577에 버금가는 암흑기인 6668587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2010년에는 박종훈의 LG가 김성근의 저주를 푸나 싶었지만 초반부터 안 좋은 일만 겹치면서 현실은 시궁창. 결국 2010년 시즌도 6위로 가을야구는 완전 실패. 게다가 2011년에는 초반 1~2위로 잘 나갔고 4위로 떨어졌을 때에도 '''5위와 8게임차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낙하하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고 박종훈 감독이 시즌 도중 사퇴하며 기어이 '''666858766'''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말았다. LG 팬들은 박종훈 감독의 사퇴 후, 김성근의 저주는 김성근 감독만이 깰 수 있다며 마침 2011 시즌 중 SK에서 경질당한 김성근 감독을 모셔오자고 쌍마에서 릴레이를 펼쳤으나 결과는 김기태 수석코치의 감독 승격. 그리고 2012 시즌에도 전력 유출을 겪으며 가을야구에 실패 '''6668587667'''이라는 10년의 암흑기를 맞이하고 2013 시즌이 돼서야 비밀번호를 끊어내고 가을야구에 진출했다. 그리고 2014년에는 '''16년만에''' 2년 연속 가을야구 진출을 이루어냈다. 2015시즌은 시즌 내내 말아먹는 바람에 다시 암흑기가 찾아오나 했지만 리빌딩을 천명한 2016년에는 시즌 중반 8위까지 떨어졌다가 후반기 무서운 상승세로 2년만에 가을야구에 복귀했다.
7. SK 와이번스-2265565'''1 - 극복'''
김성근 5년 재임: 2007년~2011년
김성근이 집권하고 있던 시절에도 사실 혹사 후유증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김성근 감독 재임 3년차인 2009시즌은 주전 선수들이 줄부상을 겪었다. 시즌 중반부터 박경완, 김광현, 송은범이 차례로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고 채병용도 부상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김성근 감독이 출장을 강행시켰다. 이처럼 주전 선수들이 줄부상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SK의 워낙 두터운 선수층 덕분에 잇몸으로 버티며 2위로 시즌을 마감할 수 있었다. 전임 감독이나 후임 감독을 결코 칭찬하는 법이 없었던 김성근이었지만 SK에서 만큼은 전임 감독이었던 조범현이 어린 선수단을 잘 조련시켜놔서 자신이 팀을 정상으로 이끌 수 있었다며고 칭찬한 적이 몇번 있었다.
이듬해인 2010시즌 김성근은 전년도에 우승에 실패한 탓인지 독기를 품고 선수들을 굴리기 시작했다. 아직 부상에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김광현과 박경완 등을 땡겨 쓰며 굴린 결과 정상을 탈환에 성공했지만 이듬해에 그 후유증은 제대로 나타났다.
계속된 쥐어짜기의 결과 선수단의 노쇠화와 혹사 후유증은 더욱 깊어져 재임 5년차인 2011년에는 팀이 총체적 난국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김성근의 쥐어짜기도 효과가 없어서 시즌 내내 3위권 싸움을 하며 SK왕조 시절도 이제는 저물어간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시즌 중간에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고 엄청한 후폭풍에 휩싸였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이만수 대행이 팀을 반등시켜 2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특별한 전력보강 없이 선수단의 노쇠화가 계속되었고, 김성근이 저지른 혹사는 군데군데에서 아픈 비수가 되어 날라왔다. 당장 2009년 전천후로 투입되어 133이닝을 던지는 등 무지막지하게 굴려진 전병두는 이후 당겨쓰기 등으로 인해 어깨 부상이 더욱더 심해지며 2011년 말부터 1군에서 자취를 감췄고,[5] 채병용과 고효준은 30세가 될때까지 군문제도 해결 못하다가 군 팀 입단 가능 나이가 넘어버리며 뒤늦게 공익으로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떠났으며, 윤길현은 상무 입대에 성공했지만 혹사의 여파로 인해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 아예 국군수도병원으로 전출되어 재활에 전념해야 했다. 사실 김성근은 본인이 감독으로 있는 동안 선수들 군문제를 '''절대로 처리하지 않는다.''' 군대 가야 할 연령대가 넘어도 어지간해선 보내지 않으며, 수술이 필요한 선수도 최대한 다 재활로 묶어버린다. 전자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채병용과 고효준이고, 전병두가 2009년 이미 수술소견이 나왔으나 김성근이 지정한 병원에서 재활소견이 나온 뒤 2010년 5월 복귀한 것이 후자의 단적인 사례. 한화에서도 똑같이 그 짓을 하려고 하자 선수 본인이 감독과 야구 못하겠다고 은퇴를 선언하는가 하면, 다른 팀에서는 선수를 공짜로 주워가기도 하는 등 막장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화가 이미 선수단의 군문제로 오랫동안 시름을 겪은 팀이라는 점.
그리고 왕조의 핵심 불펜인 이승호와 정대현도 노쇠화가 뚜렸했지만 어쨌든 떠나버렸다.
타선에서도 박재홍, 김재현 등이 은퇴수순을 밟거나 이호준과 정근우같이 FA로 팀을 떠났고, 미래를 위한 유망주를 키우지 않는 김성근의 극단적인 성향 속에서 권용관과 최동수 등 미래와 맞바꾼 노장선수가 트레이드로 오는가 하면, 반쪽짜리 역할만 강요당하던 모창민과 이재원이 2010년 말 김성근을 따돌리고 구단과 상의해서 미래를 위해 군야구단에 입단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2009년 이후 SK 2군 내부에서는 김성근에 대한 불만이 쌓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김성근 감독이 SK에서 물러난 이후 이만수 체제 하에서 SK는 그 후폭풍에도 불구하고 2012년까지 2년 연속 준우승을 하며 연착륙에 성공한다. 그러나 2012시즌 초 일시적으로 6위까지 떨어졌을 때 역시 김성근 감독이 떠나니 별 수 없다는 김성근 팬들의 비아냥을 받았고, 또 밖에서도 김성근 원더스 감독이 이만수 감독과 SK 프런트를 맹비판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8월말 다시 2위로 치고 올라가자 김성근팬들은 '''부자는 망해도 3년 먹을 양식은 있다'''면서 김성근 감독님이 강팀으로 만들어 놓고 간 덕분에 이만수 감독이 2년 연속 준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태세를 전환했다(...).
이처럼 외부 전력보강도 없고 유망주의 1군 정착도 더디고 선수단 평균연령만 높아지던 2013시즌에는 이만수 감독의 운영능력까지 한계에 부딪히며 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러자 김성근 감독팬들은 드디어 김성근의 저주가 본격적으로 나타난다면서 반색했다.
2014시즌에는 더욱 답이 없는 상황에 처하며 시즌 중반 한때 8위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자 김성근의 저주가 고착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즌 막판에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주며 LG와 치열한 4위 경쟁을 벌였으나 아깝게도 포스트시즌 진출에는 실패하고 5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게다가 리빌딩의 전조까지. 아무쪼록 김성근이 쏟아부은 저주를 잘 막아내는 SK의 모습이다.
2015시즌에는 프로야구계에 복귀한 김성근 감독의 한화와의 대결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한화와의 첫 시리즈에서 '''스윕패를 당하며 3패를 깔고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김성근의 막장 운용과 투수진의 과도한 혹사에 대한 후유증이 나타나면서 한화에게 연일 위닝시리즈를 가져오고 마지막 시리즈에선 스윕까지 가져오는데 성공했다. 결국 '''한화는 SK에게 11년 연속 상대전적 열세'''를 허용하고 말았다. SK는 결국 가을DNA 버프로 인해 후반기에 치고 올라가 5위로 포스트시즌 막차를 타는데 성공, 한화와 김성근이 그토록 앵무새처럼 부르짖던 5강행을 빼앗고 가을야구를 하는데 성공했다.
2016년에는 시즌 전 FA 선수 유출로 불안하게 시작하더니 정작 시즌 들어서는 안정적인 4위 자리를 지켜내나 싶었지만 막판 '''9연패'''로 추락하면서 가을야구 실패하면서 노리타들의 조롱을 받았다.
트레이 힐만이 이끌게 된 2017년엔 지독한 불펜 불안으로 인해 후반기 추락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토미 존 수술로 재활에 들어간 김광현 없이도 문승원, 박종훈 등이 선발진 안착에 성공하는등 성과가 있었고 어찌어찌 5위로 마감하면서 일단은 가을야구는 성공했다.[6]
2018년에는 완벽하게 빅볼로 팀컬러가 바뀌면서 김성근의 색을 완벽하게 지웠다. '''그리고 14.5게임차를 뒤집고 2018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면서 김성근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염경엽 감독 1년차인 2019년 후반기부터 팀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하고 2020년에는 팀의 존속조차도 의심스러울 정도의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건 김성근의 저주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 차라리 김성근의 수제자인 양 자칭하고 다니는 염경엽이 만들어 낸 또다른 저주에 가깝다.
8. 한화 이글스-39A
김성근 3년 재임: 2015년~2017년
저주를 선불로 받은 것도 모자라 경질되는 순간까지 듬뿍 받아낸 사례로 이유야 당연히 저주를 받은 팀 중 김성근 재임기에 유일하게 포시 진출에 실패한 팀(678)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성근이 잘린 후 이상군 감독대행을 거쳐 한용덕 감독의 철저한 관리야구와 선수 '''잠재력 극대화로'''[7] 전반기 단독 2위에 6위와 승차만 봐도 가을야구를 사실상 확정하면서 김성근의 저주를 막았다. 최소 5년은 KT와 꼴지 경쟁을 해야 할 것으로 봤던 예상과는 완전 다른 결과로 한용덕 감독을 명장 반열에 올려놓았다.
한화의 기대 이상의 성적에 노리타들이 양훈을 버리고 이성열을 데려오며 큰 그림을 그렸다느니 김성근이 승부욕, 악바리를 심어주고 가서 이제서야 터졌으니 한용덕이 김성근의 유산을 받았다는 온갖 개드립을 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송은범, 정우람 등 김성근이 영입에 영향을 준 선수들조차 사용법은 송진우가 가지고 있다 할 정도로 재임 시기에는 빛은 보지 못했고, 호잉, 서균, 정은원, 박상원 등 신진 자원들 역시 김성근 시절엔 1군에 없었던 선수들이다. 한마디로 김성근의 가르침을 딱히 받을 기회도 없었던 것.
그리고 놀랍게도 한용덕 감독은 시즌 최종전 NC전에서 78번째 승리를 수확하며[8] 자력으로 준플레오프 진출을 확정지었다. 허나 일부 삐딱한 야구팬들은 여전히 김성근 명장설을 주장하면서 1승3패로 넥센에게 패배하자 이제는 단기전에 안맞을 감독이라고 까고 있다. (...)
하지만 완전히 그 저주를 종식시키는 건 불가능해서 당장 팀 내부의 베테랑들이 버텨야 한다고 주문을 걸고 있다. 2014년~2016년 동안 외부 FA 7명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유망주들이 다 빠져나가서 주전과 백업간의 격차가 매우 커진데다 중간 세대가 단절되어 있어서 2019년을 기약할 수가 없다고 내부 FA 내야수 송광민(35) 외야수 이용규(33) 최진행(33)에게 통보하였다.
게다가 2019년 시즌에 삐걱거리는 것을 보면 유망주 트레이드에 대한 피해가 없다고 볼 수 없다. 다만 투수진이 문제라기 보단 타선이 문제라는 점에서 한용덕 감독의 베테랑들과 불화와 합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2018년 3위는 한용덕의 명장이고 2019년은 김성근 책임으로 돌리는 건 상당한 이중 잣대이다. 또한 김성근 시절에 트레이드, FA 보상 선수들의 2019년 상태를 본다면 모두 한화에 있었다고 순위가 과연 얼마나 반등할지도 코미디인 상황이다.[9]
아무튼 2019년은 9위로 마쳤고 이와 동시에 단장 자리에 계약이 끝난 박종훈 대신 정민철을 새롭게 앉혔는데, 정민철은 단장이 되자 장시환-지성준 트레이드로 엄청난 비판을 받았으며 2020년 시즌에 한용덕의 기우제식 운영과 투수-타자 동시 붕괴로 14연패를 찍으며 엄청나게 여론이 안좋아졌고[10] 6월 7일에 한용덕이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저걸 본 노리타들이 부활하여 준동하는 건 덤.[11][12]
그리고 2020년 한화는 김성근도 안했던 18연패까지 찍으면서 만인의 비웃음 거리가 되었다. 이후 10월 22일, 5경기를 남겨둔 채 트래직넘버가 소멸되어 10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다.
9. 그 외
김성근의 추종자들이 곧잘 하는 소리가 김성근의 스몰볼은 팀 사정상 어쩔 수 없이 하는 거고 강타자들을 많이 보유한 팀이었다면 10년 롯데 같은 타격야구를 했을지 모른다는 소리다. 이 소리는 그의 마지막 팀인 한화 이글스의 팀 컬러와 2018년 한용덕 감독이 빅볼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반박 가능하다. 물론 실제로 전력이 약한 팀을 맡았던 적도 많았지만 이건 앞뒤 안재고 '''이 팀은 골 많이 넣으니까 공격축구한다'''하는 것과 똑같은 소리다. 무리뉴 시절 첼시는 득점력도 리그에서 손꼽힐 만한 팀이었지만 아무도 무리뉴보고 공격축구한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공격야구, 수비야구를 가르는 건 단순히 득점력이나 타율이 아니라 감독의 팀 운영 방법론과 육성과정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건 빅볼이 아예 불가능해서 스몰볼을 하거나, 어정쩡한 빅볼보다 스몰볼이 이기는데 효율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가는 소리다. 그런데 타고투저인 2010년대의 KBO에서 이건 그냥 멍멍이 소리고, 어설픈 팀배팅 하려다 마이너 내야 유망주들의 호수비에 쳐발린 2010년대 각종 WBC 참사에서도 증명된지 오래다. 당장 2017 시즌 KBO만 해도 빅볼이 전혀 되지 않아서 강제 스몰볼 테크를 타는 팀은 LG 하나밖에 없다. 애초에 LG 팀컬러 자체도 잘나가던 90년대에도, 비밀번호 탈출한 10년대에도 뻥뻥 때리기보다 분위기를 몰아서 산발적 안타로 이길 수 있는 최소한의 점수를 뽑고 나머지는 압도적인 투수력으로 메꾸는 팀이다. LG보다 종합적 타격생산성이 아래인 팀들도 파워가 있으면 일단 그 파워는 적극적으로 써먹고, 이를 통해 승리를 얻는 것이 효율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김성근은 삼성, SK(직전 2005시즌 홈런 2위, 타율 3위), 쌍방울(직전 1995시즌 타율 4위) 등 타격이 좋은 팀을 가지고도 스몰볼을 버리지 않은 감독이다. 프로스포츠에 조금만 관심있는 사람이면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닌 게 감독의 취향이란 건 팀 옮긴다고 바뀌는 게 아니다. 그 부분에서 좀 더 발전해갈 순 있어도 성향이 바뀌는 감독은 없다.
[1] 1990년은 사퇴 당시 성적이 5위였다.[2] 정확히는 10년이지만 1993시즌은 일찌감치 시즌 아웃.[3] 1995년 은퇴 이후 허삼영은 프런트를 거쳐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되었다. 이 때의 경험을 토대로 '''선수 혹사를 최대한 지양하고 있다'''.[4] 사실 최종준 전 단장은 이광은과의 학연이 있었다. 하지만 부진하자 김성근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이광은을 쳐냈다.[5] 결국 5년간 1군에서 사라지며 재활만 해오다가 2016년 9월 은퇴를 선언했다.[6] 이후 감독이 된 염경엽은 강속구가 있는 문승원을 시즌 중 불펜으로 돌리고 싶은 유혹이 있었을텐데 꾸준히 선발 로테이션을 돌게 해준 힐만에 감사 인사를 표했다.[7] 대표적으로 3년 내내 밥값을 못했던 송은범.[8] 사실 같은 시간 펼쳐진 3위 경쟁팀 넥센과 삼성과의 경기에서 넥센이 대패하면서 이미 3위는 확정된 상태였다.[9] 근본적으로 한화는 한용덕 이전에 11년 간 가을 야구를 못 갔던 팀이자 역대 한국 시리즈 최다 우승 감독인 김응용조차 2년 연속 최하위를 한 팀이다. 이 정도면 내부적인 육성 문제를 검토 해 봐야 할 지경이다. 한대화/2012년 문서와 5886899678 문서에도 나와있듯 2군 구장이 건립된 게 2012년(...)일 정도로 한화는 육성의 ㅇ자도 모르는 팀이었고, 체질 개선을 10년동안 현장을 떠나있던 김응룡이 겨우 시도할 정도로 소위 '리빌딩'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문제는 일단 감독으로선 실패했으나 프런트 직원로서는 성과가 있는 박종훈이 2017년 단장으로 오면서 하나하나 풀어가고 있으니 최소 3~4년은 더 지켜봐야할 것이다.[10] 6월 5일 내야수인 노시환을 9회초 크게 지는 가운데 투수(!)로 내보내면서 비판 여론이 더 커졌다.[11] 노리타들은 2020년 한화의 붕괴가 한용덕 감독의 잘못된 시즌 운영-정민철을 위시한 프런트의 잘못으로 몰아가지만, 그렇게 된 원인은 김성근의 지분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김성근 재임 3년간 유망주였던 노수광, 오준혁, 최영환, 김민수, 조영우 등 FA 보상선수나 트레이드, 편법적인 육성선수 전환 등으로 인해 떠나면서 현 한화의 문제점인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중간 선수층의 부재가 심해졌기 때문이다.(이 중 노수광은 이태양과의 트레이드를 통해 돌아온다.) 차라리 저렇게 해놓고 비밀번호라도 끊었으면 좋았겠지만...[12] 물론 이건 한화 팬들의 시각이 듬뿍 반영된 것이고, 타 팀 팬들은 '언제까지 김성근 탓만 할 것이냐'며 비웃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