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지도자 경력
1. 개요
한때 약한 팀을 맡아 전력을 정비해서 중상위권까지 치고 올라가게 만드는 일이 많아 리빌딩 전문가로 인식되곤 했다. 하위권 팀인 태평양 돌핀스나 쌍방울 레이더스를 이끌고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것이 그 예로 언급된다. 또한 강팀으로 나가기엔 뭔가 어설펐던 SK 와이번스를 2000년대 후반 왕조 시대로 이끈 것도 있다.
하지만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같은 상위권 전력의 팀을 맡고도 성적을 내는데 실패하기도 했으며, 그가 맡은 팀들이 대부분 퇴임 전후부터 성적이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점과 혹사, 비매너 플레이 등 수 없이 많은 논란의 중심에 서있기도 하다. 즉 단기간에 팀의 자원을 최대한 쥐어 짜내어 단단히 뽑아먹어서 그가 떠난뒤 뼈다귀만 남긴다는 주장이다. 다만 만년 최하위를 단 한 해라도 벗어나는 것이 과제이던 팀을 단 몇 년간이라도 강팀으로 만들었는데 좀 혹사면 어떠냐는 지적도 있고, 심지어 중도에 모가지당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이 팀의 전력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고 변호하는 이들도 있다.
그동안 하위권을 기거나 침체기인 팀을 짧은 시간에 반짝 상위권으로 올린 실적이 있지만 그 대가가 만만치 않다는것 때문에 평이 극과 극으로 갈린다. 일부 팬들은 김성근을 감독으로 올린다는건 악마와의 거래와 똑같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은 그런 하위권 팀의 성적 향상도 사실은 김성근 부임과 동시에 모기업들이 통큰 투자를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성근 취임에 때맞춰 태평양, 쌍방울 그룹의 대대적인 투자가 있었다. 그나마 지금은 모기업이 통 크게 투자해도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2. 아마추어 시절
프로 리그가 생기기 이전엔 마산상고, 충암고, 신일고 감독과 기업은행의 코치 및 감독을 역임했다.
2.1. 마산상고 감독
마산상고 감독을 맡았던 사실은 최근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마산상고가 보잘 것 없는 성적을 냈기 때문인지 야신으로 추앙받은 이후 그의 이력서에 마산상고 경력을 쓰지 않았다.[1] 하지만 그의 대한 과거 자료들이 발굴되면서 마산상고 시절 감독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아들 김정준이 딱 그 시기에 마산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확인 사살되었다. 최근에는 강연에서 마지못해 마산 지역의 영업 차원에서 내려갔다가 잠시 맡은 거라는 식으로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기업은행에서 선수생활을 은퇴한 후 은행 소속의 여느 은퇴선수들처럼 은행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언어 문제 등으로 은행원 업무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마산출신이었던 이창현 기업은행 감사가 김성근을 마산지점으로 발령하여 자신의 모교였던 마산상고 야구부의 감독으로 일하도록 편의를 봐줬다. 이로서 김성근은 1969년 마산상고 감독을 맡으면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다. 덕분에 김성근은 기업은행 월급을 받으면서 동시에 마산상고 감독 월급까지 이중으로 받으면서 생활할 수 있었다.
마산상고 시절 선수들을 혹독하게 강훈련시켰다고 한다.
마산상고 감독을 맡고 있던 도중인 1970년 재일교포 선배 배수찬으로부터 기업은행 코치직을 제안받자 마산상고측과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바로 감독직을 그만두고 다음날 서울로 상경해 버렸다. 때문에 졸지에 마산상고 야구부 학생들은 감독을 잃게 되었고, 마산상고측은 갑자기 감독을 새로 구해야 하는 당혹스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처럼 마산상고와 좋지 않은 모양새로 헤어졌기 때문에 김성근은 NC 다이노스가 신임 감독 인선 과정에 있던 2011년까지 42년 동안 마산상고(현 용마고)를 방문하지 않았다. 관련기사이때부터 선수들을 지옥훈련으로 내몰았다. 선수들이 강훈련에 견디지 못해 쓰러지면 양동이의 물을 부어 일으켜세웠다. 선수들은 이런 김성근을 두고 "사람새끼가 아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 김성근은 "사실 그때는 선수들을 어떻게 가르쳐야하는지도 몰랐어. 무조건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선수들을 훈련으로 몰아넣었어. 그때는 내가 생각해도 심했어. 마산상고에서 가르쳤던 선수들 중 야구선수로 성공한 애는 없지만 그래도 이번에 한국시리즈 우승하니까 마산상고 출신 두세명에게 축하전화가 오더라고"라며 웃었다. 잡초승부사 김성근을 말한다 - 8. 지도자 첫발 독종감독이 되다
2.2. 기업은행 코치, 감독
같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절친한 선배였던 배수찬[2] 으로부터 기업은행 투수코치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1970시즌 투수코치로 일하다가 1971년[3] 기업은행의 감독이 되었다. 그런데 감독이 되는 과정에서 배수찬과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고 만다. 배수찬은 김성근이 거짓 정보로 자신을 속이고 자신이 맡았어야할 기업은행 감독 자리를 김성근이 가로챘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 이전에 배수찬은 김성근과 아주 절친했던 사이였다. 일본에서 사회인야구팀을 전전하고 있던 김성근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교통부 실업팀에 입단시켜준 이가 바로 배수찬이었다. 이듬해에는 김성근과 함께 기업은행으로 이적하기도 했다. 김성근이 오효순과 결혼을 하고 싶어했으나 한국말이 서툴어 고민하고 있을 때 직접 나서서 2:1로 장인과 술을 마시며 결혼을 설득했던 이도 배수찬이었다. 지방 마산상고에 있던 김성근을 기업은행 투수코치로 영입한 이도 바로 배수찬이었다. 이랬던 배수찬이 극도의 배신감으로 토로한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 보는 이들이 많다.
김성근에게 속아 감독 자리를 빼았겼다는 배수찬의 격분에 찬 주장에 대해서, 김성근은 오해일 뿐이라고 말했다. 배수찬은 1986년 사망했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은 미궁속에 빠져버렸다.
김성근이 본격적으로 감독의 길에 들어선 것은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역임한 기업은행 감독이다. 이때 한일은행 감독이던 김응용과 많이 대결해서 많이 졌다고 한다. 당시 한일은행은 호화멤버를 자랑하던 최강 팀.
2.3. 충암고 감독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야구 명문인 충암고 감독을 지냈다.
충암고 감독 부임 직후, 대구의 3대 야구명문인 대건고등학교[4] 가 야구부를 해체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바로 대구로 내려가서 대건고 야구부 18명 전원을 충암고로 전학시켰다.
같은 해인 1976년 서울의 철도고 야구팀도 해체되었는데, 역시 철도고에서도 다수의 학생을 데려왔다.
이처럼 김성근의 충암고는 세 개의 야구 명문고를 합친 막강한 전력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주축은 대건고 출신이었다. 1977년 당시 충암고의 주전 선수들 중 절반 이상이 대건고 출신이었다. 조범현, 기세봉, 이근식, 이태현, 이성수가 바로 그때 활약한 대건고 출신 선수들이다. 이런 막강한 전력을 이끌고 김성근은 1977년 봉황기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조범현은 MVP를 차지했다."충암 때 모인 아이들은 전부 대구에서 올라온 아이들이었고"
- 【한겨레TV 대담】 김성근 감독편
1979년[5] 절친이었던 김동엽과 만난 자리에서 야구명문 신일고 감독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김성근은 "내가 거기 가볼까나?"라고 말하며 신일고 감독 자리에 욕심을 나타냈고, 이에 김동엽이 신일고 교장을 직접 찾아가 김성근을 신일고 감독에 앉히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때문에 충암고와 신일고의 경기는 배반당했다고 생각한 충암고 선수들이 독기를 품으며 덤비는 통에 당시로서도 제법 과열된 양상이었다고.
2.4. 신일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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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부터 1981년까지 신일고 감독을 지냈다.
김성근은 충암고 감독이었던 1977년 황금사자기 8강전에서 신일고에게 패배한 후 신일고의 막강한 전력 큰 동경을 품게 되었다. 김성근은 2013년 고양 원더스 감독 시절에 한 인터뷰에서 이때 패배한 충격에 대해 생생하게 언급했을 정도였다.
1979년 신일고 감독 자리가 공석이 공석이 되자 김성근은 절친한 친구 김동엽에게 술자리에서 신일고 감독에 대한 욕심을 내비췄다. 이에 행동파 김동엽은 직접 신일고 교장을 찾아갔고 결국 김성근이 신일고 신임 감독으로 내정된다. 그러나 김성근은 아직 충암고와 2년이나 계약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법적 분쟁 끝에 김성근은 충암고와의 계약금을 뱉어내야 했다.
신일고 야구부는 1975년에 창단된 직후 1976년과 1978년 황금사자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신흥 야구 명문고였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1979~81년 동안 신일고는 4대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 황금사자기, 대통령배, 봉황대기에서 우승은 커녕 결승에도 한번도 진출하지 못했다.[6]
1981년 이재홍 건국대 진학 강요 사건이 언론에 터지며 여론의 지탄을 받으며 경질되고 말았다. 사실 당시 신일고는 성적 부진을 겪고 있던 김성근을 내치고 싶어했는데, 때마침 입시비리 사건이 터지자 곧바로 김성근을 경질한다. 당시 신일고 에이스였던 이재홍에게 연세대와 건국대에서 동시에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는데, 김성근이 이재홍에게 건국대로 진학할 것을 명했지만 이재홍이 이를 거부하고 연세대 입학을 고집하자, 김성근은 이재홍을 경기에 출장시키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의 파장이 커지면서 신일고 감독에서 해임됐다. 기량이 뛰어난 유망주를 입학하면 주위의 대학에 갈 실력이 되지 않는 동기선수도 끼워 입학시켜주는 관행이 있었는데, 마침 건국대가 이재홍을 영입하는 댓가로 신일고의 다른 동기생도 몇명 끼워서 입학시켜 주겠다고 제의해왔던 것이다. 김성근은 동기선수도 입학시킬 수 있는 건국대에 진학할 것을 요구한 것. 김성근 본인은 학생야구는 인성, 의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유망주 끼워팔기식의 입학관행은 부유층 자제의 편법적인 대학입학 방법의 하나로, 공부로 인문계 고등학교도 가기 어려운 부유층 자제를 운동부에 거액의 지원금을 내고 특기생으로 입학시켜 운동부에 이름만 걸어놓고 해당 운동부의 유망주가 끼워팔기 조건을 제시한 대학에 입학할 때 끼워서 입학시키는 것으로 악용되고는 해서 진의는 알 수 없다.[7]
3. OB 베어스 투수코치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OB 베어스의 창단 투수코치가 되었다. 당시 OB 구단 단장 겸 대표이사였던 박용민에 따르면, 구단 창단 당시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던 시절이었는데, 누가 전 신일고 감독을 투수코치로 추천하길래 김성근을 만나봤다고 한다. 직접 만났더니 무뚝뚝한게 말이 없어서 선수들을 잘 휘어잡을 거 같아서 그를 코치를 영입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김성근은 면접 과정에서 일본통인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에게 크게 신임을 얻게 되어서 당시 감독이었던 김영덕 조차도 김성근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되었다. 김영덕 감독은 김성근을 코치를 영입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구단 수뇌부가 김성근을 투수코치로 내정하자 김성근에게 직접 연락해서 "난 솔직히 말해 네가 싫어서 말 안 했다. 위에서 널 쓰라고 하니 어쩔 수 없어 말하는데 내일 한번 들어와 봐."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김영덕 감독과 김성근 투수코치의 관계는 냉랭했다. OB 투수 코치 시절 김성근은 김영덕 감독과 투수 기용 등에서 파워게임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성근이 올린 투수를 김영덕이 교체하자 경기 도중 가방을 싸 나가버린 일화는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4. OB 베어스 감독
1984년에 김영덕 감독에 이어 OB의 2대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이 과정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김성근은 자신이 삼성 구단으로 부터 감독 제안을 받았고, 당시 감독 김영덕에게 삼성 감독으로 갈것 같다고 보고 하자 김영덕이 삼성과 뒤늦게 협상하고 감독자리를 차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삼성 구단이나 김영덕 측의 설명은 또 김성근의 주장과는 다르다. 김성근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특히 삼성 구단이 결국 김영덕을 택했는데, 그렇다면 애초에 왜 삼성이 김영덕에 접근하지 않고 김성근에게 접근했냐는 것이다. 아무튼 이 사건에 관해서 당시에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김영덕이나 삼성 구단의 입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진 반면 김성근은 이후 계속 자신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아는 일이다. 어쨌든 덕분에 김성근은 OB 감독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OB 베어스 감독으로서 1984년부터 1988년까지 5시즌을 치뤘다. 원년 우승팀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5년이라는 긴 재임기간 동안 일관되게 중하위권 성적을 전전하자, 애초에 "한국에서 나오기 힘든 한팀 10년 감독을 만들겠다"라면서 감독의 장기집권을 팀의 방침으로 천명했던 박용민 단장조차도 막판에는 김성근을 성적으로 압박하다가 결국 경질 했다.
1984년 전기리그와 후기 리그에서 모두 2위를 차지하면서 PO에 탈락했다. 당시에는 한국시리즈만 존재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어이없게도 1년 전체 승률은 OB가 1위였다. OB를 부담스러워 한 김영덕 감독의 져주기 사건이 벌어진 것이 바로 이 때였다. 다만, OB도 해태랑 피장파장의 져주기 게임을 했다. 삼성-롯데가 표면화된 것은 우승 확정 경기라고 공중파 생중계가 있어서 그랬던 것. 1985년은 OB가 대전에서 서울로 연고지를 옮긴 첫 해로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5위로 역시 탈락.
플레이오프 시스템이 생긴 1986년 후기리그 1위로 플레이오프 진출했으나 삼성에게 패배했다. 이 당시 제도가 기형적이라서 전, 후기 리그 2위까지 PO자격이 주어지는데, 그 자격을 두 개 가진 팀은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그래서 전, 후기 2위였던 해태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1987년은 전기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만 해태에 패배했다. 모두 2승 1패로 먼저 기선을 잡고 내리 두 경기를 지면서 아쉽게 탈락했기 때문에 뼈아팠다. 1988년은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5위로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투수진의 붕괴가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다.
OB 감독 시절부터 특유의 마구잡이식 혹사야구를 시작했다. 다만 OB의 투수층이 비교적 두꺼웠기 때문에 태평양이나 쌍방울 시절에 비하면 혹사의 강도가 심한 편은 아니었다는 평이다. 윤석환의 경우는 김성근이 한국 야구 최초의 마무리 투수를 도입한 업적으로 치켜세워졌었는데, 사실 윤석환이 최초의 마무리 투수도 아닐 뿐더러 지금과 같은 1이닝 마무리 투수가 아니라 그냥 선발로 기용하지 않은 정도의 의미였다. 당시 윤석환은 경기 후반에 투입되어 3이닝 정도를 던지고 내려온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OB 베어스의 최초 좌완 에이스감이었던 윤석환은 데뷔 시즌 김성근의 혹사로 입단 1년만에 바로 부상을 당하고 오랜 재활과 부진의 시기를 겪었다. 결국 1988년 부활에 성공했지만 재계약을 앞둔 김성근의 무리한 혹사로 구원승으로만 13승 14세이브를 올리는 혹사 끝에 다시 부상으로 추락했고 더이상 재기하지 못했다. 김성근이 떠난 이후, 윤석환, 최일언, 계형철이 모두 부상으로 무너지게 되며 OB 베어스의 성적도 추락하고 만다.
임기 초기에는 일본통인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종신감독, 못해도 최소 10년 이상 재임할 거라는 얘기도 있었다. 총수 일가 출신인 박용민 단장도 "한국 풍토에서 나오기 힘든 한팀 10년 감독을 만들겠다."라고 천명하기도 했다. 박용민 단장은 김성근이 몰수게임 파동 등 사건를 일으킬 때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언론에 대고 직접 김성근을 감싸주었고 이 때문에 김성근은 몇 차례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 자신이 박용곤 회장 등 그룹 수뇌부와 직접 의논해서 일을 처리하려는 모습에 대한 프런트의 반감이 겹치고, 점차 프런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갈등이 빚어졌다.무엇보다 당시 OB의 프런트가 굉장히 일을 부지런히 하는 축이었기 때문인지도. 박용민 단장 역시 처음에는 김성근 감독을 무척 신임하고 그가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보호해줬지만, 임기 내내 성적이 나지 않자 결국 김성근에 대한 인내심도 바닥나 그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였다. OB 프런트가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밀었던 차기 감독 후보가 코치 시절 김성근과 갈등을 빚었던 이광환이었다.
OB의 타격코치였던 이광환은 김성근과 타격이론의 차이 및 식단에서까지 차이를 나타내며[8] 충돌을 빚어 갈등을 일으키는데, 프런트에서 일단 이광환을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를 보내는 것으로 갈등을 봉합했다. 하지만 1988년에 이광환이 귀국하면서 구단은 김성근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광환을 2군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선수 콜업 문제 및 처우 문제 등으로 인해 사사건건 갈등하게 이른다. 여기에 프런트가 은근히 이광환의 편을 들었다.
이 때의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세탁기 사건. 당시 선수들은 직접 빨랫감을 날랐는데 이광환 감독이 미국에서 본 것을 따라서 2군 연습장에 세탁기를 도입한다. 이를 알게 된 김성근 감독이 2군에 대한 특혜라고 판단하여 1군에도 요구하지만 프런트는 생트집잡는다고 거부한 사건인데, 결국 1군 선수들은 여전히 빨랫감을 나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성근 감독이 이광환 2군 감독보다 파워게임에서 밀렸다는 인식이 선수들 사이에 퍼졌다.
결국 재계약 제의를 못받은 핵심 원인은 성적이었다. 원년 우승을 일구어내며 화려하게 등장한 OB구단은 1980년대 프로야구에서 우승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이 높은 팀 중 하나였다. 그러나 김성근 재임기간 5년 동안 OB 베어스는 6~7구단 체제[9] 에서 줄기차게 4~5위를 찍음으로써 인내심 많던 OB 구단 수뇌부의 신뢰를 잃고 말았다. 당시 전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신생구단과 전구단 승수 자판기 삼청태(삼미-청보-태평양) 두 구단은 당연히 깔고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OB의 성적은 실질적으로 최하위권이었다. 김성근이 강팀에서 실패한 것은 삼성에서만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OB야말로 1982년 원년 우승팀으로 확실한 강팀이었다. 적어도 83년 우승을 시작으로 왕조를 일군 해태(감독:'''김응룡''')보다는 (김성근 선임 시점에서)훨씬 포텐셜이 높은 팀이었다. 이런 팀을 갖고 중위권도 못 지키고 허덕이고 있으니 구단 수뇌부가 안 자르는게 이상할 지경...결국 박용민 단장조차도 그에 대한 지나칠 정도로 오랜기간 지속된 신뢰를 거두고 재계약을 하지 않게 된다.
결국 1988년 시즌 종료 후 계약이 종료되면서 김성근은 팀을 나오게 되었다. 재계약 제의를 안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질, 해고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계약만료가 맞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감독에 올랐던 이광환 감독도 자율야구라는걸 이해 못한 선수들과 프런트 때문에 1990년 시즌 도중에 해임당하고 이후 1990년대 초 OB는 하위권으로 몰락하고 이후 김인식 감독이 부임한 1995년에 두 번째 우승을 하게 된다. 여기까지 이르는데 김성근의 저주도 한 몫을 했다. 쓰러진 불사조 박철순을 대신했어야 할 젊은 에이스 윤석환을 두 차례에 걸쳐 확실하게 갈아버린게 바로 김성근이므로...
5. 태평양 돌핀스 감독
1988시즌 후반기 OB 베어스에서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은 김성근은 평소에 거의 안면이 없는 기자들에게까지 일자리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하고 다니고 있었다. 당시 태평양 돌핀스 담당 기자였던 김수인의 회상에 따르면 평소에 친분이 없었던 김성근 감독이 어느날 갑자기 다가와 다정다감하게 말을 걸면서 “김형, 나 이번 시즌 끝나면 실업자되는데 어디 자리 한번 봐줘~”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태평양 그룹은 1988년 3월 9일 청보 핀토스를 인수하여 태평양 돌핀스를 창단했다. 태평양 그룹은 야심차게 야구판에 뛰어들었는데, 당시 그룹 수석 부회장이었던 신동관이 구단 사장을 겸임했을 정도였다. 태평양 구단 수뇌부는 청보 시절의 잔재를 청산하고 팀을 재편하기 위해 청보 시절 임명된 코칭 스태프를 물갈이할 계획을 가지고 후임 감독을 물색하고 있었다. 당시 태평양 구단에는 야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이들이 부족했는데, 신동관 부회장도 그랬다. 스스로 야구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음을 시인했던 신동관 부회장은 단 둘 뿐이었던 구단 담당 기자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김수인 기자였다. 이에 신동관 태평양 그룹 부회장은 구단 담당 기자인 김수인 기자에게 차기 감독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김수인 기자가 김성근을 떠올리고 그를 신동관 부회장에게 직접 추천하고 여러차례 다리를 놔 준 덕분에 김성근이 태평양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
아직 프로야구의 역사가 아주 짧을 때라 감독 경험이 있는 사람을 구하기가 무척 힘들던 시기였는데, 때마침 OB 베어스에서 5년이나 감독을 역임했던 김성근이 재계약에 실패하고 실업자로 나앉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김성근은 OB에서 계속된 성적 부진으로 임기 후반기 내내 경질설에 시달려 왔었고, 구단과의 불화로 야구계에서도 소문이 좋지 않았지만, 김성근은 5년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오랜 감독 경력을 갖고 있었던데가 일본에서 선진야구를 배운 야구엘리트였다. 김성근은 당시 태평양이 선택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김성근은 계약전에 일본어로 쓰여진 21개 조건을 들어달라고 요구했고[10] , 이에 신동관 부회장은 김성근과의 계약 철회를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수인 기자가 “사장님, 야구단을 제대로 만들겠다는데 웬만하면 다 들어주세요”라고 말했고, 다른 마땅한 감독 경력자가 딱히 없었기 때문에 김성근은 1억 2천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액 연봉으로 태평양과 계약을 맺었다.
OB 베어스에서 파벌 싸움으로 갈등을 일으켰던 김성근은 자신을 따르던 코치진의 영입을 요구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청보 핀토스의 잔재를 청산하고 싶어했던 태평양은 김성근의 요구를 수용하여 기존 코치 중 2군 코치 한명을 빼고 전부 경질하고 김성근 감독이 요구한 OB 출신의 코치들을 영입했다. 신용균 당시 수석코치, 최주억 작전코치, 그리고 이근식, 이종도, 박상열에 프런트의 정진구 차장(현 한국여자야구연맹 회장) 등이 그들이었다. 오늘날 소위 감독들의 코치 사단의 원조다. 김성근이 이렇게 자기쪽 코치들을 대거 빼가자 OB 구단은 김성근이 팀을 다 털어서 떠났다고 격노했다.[11][12]
최근에도 김성근 감독이 강연에서 태평양의 정신력을 끌어올린 예로 오대산 훈련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훈련 도중에 부상자가 속출해서 김성근 감독도 꽤 마음을 졸였던 모양이다. 훗날 SK 시절에도 김성근 감독은 부상자가 발생하면 시즌에 큰 어려움이 생긴다면서 오대산 극기훈련 같은 것은 다시는 안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래도 나오지만 구단은 이런 극기훈련의 실효성의 의문을 품으면서 극기훈련을 반대했다. 그러나 김성근은 '''선수들에게 비용을 내라고 하면서까지''' 훈련을 강행했다. 일부 고참 선수들이 이런 훈련이 무슨 효과가 있겠냐면서 반발하였다[14]
1989년 태평양이 오대산 훈련을 실시하고 나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돌풍을 일으키자, 이듬해인 1990년 삼성 라이온즈, OB 베어스, 롯데 자이언츠, 빙그레 이글스 등이 이와 유사한 혹한기 극기훈련을 따라하면서 혹한기 극기훈련 붐이 일었다. 하지만 정작 극기훈련을 처음 실시했던 김성근 감독은 소리소문 없이 혹한기 훈련일정을 2박 3일로 대폭 축소했다. 부상자 발생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극기훈련을 실시했던 다른 팀에서도 선수들와 코칭스태프들의 반발로 팀 조직력이 와해되고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의 부작용이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혹한기 훈련을 실시한 팀 중에 롯데를 제외하고 삼성, OB, 빙그레, 태평양 모두 전년도보다 성적이 떨어졌기 때문에 곧 이런 혹한기 극기훈련은 자취를 감췄다. 공포의 외인구단이 진짜로 가능하다고 믿고 있던 시절. 이광환 감독의 메이저리그식 자율 야구 이전 한국 야구의 한계로 곧잘 지적된다. 나중에 SK 감독 시절 김성근 감독은 '''하면 안 되는 훈련'''이었다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부터 꾸준히 하위권을 기록하던 태평양은 1989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돌풍을 일으킨다. 이는 청보 핀토스를 새로 인수한 '''태평양 그룹의 대대적인 투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태평양은 1988년 3월9일에 팀을 인수한 후 그해말 대대적인 팀 개편에 착수한다. 김성근을 감독으로 임명하고 그가 원한 코치들을 모두 영입하였고, 김성근이 요구한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이충우, 정영기, 천창호, 김한근, 이광길 등 베테랑 선수들을 영입했고, 시즌이 시작한 후에도 지속적인 트레이드로 선수를 보강했다. 김성근은 훗날 태평양을 ''''외인구단'''', ''''이팀 저팀에서 선수들이 모여든''' 오합지졸이었던 팀'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태평양을 자기가 잘 조련했다고 자화자찬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인데, 이 말은 그만큼 김성근 재임 기간 동안 타팀으로부터 많은 선수들을 영입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다. 이러한 구단의 대대적인 투자에 더해서 신인 투수 3인방인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이 동시에 터졌는데, 이 3인방을 혹사시키면서 성적을 쥐어짜낸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성근 감독은 이 3인방을 마구잡이로 기용(혹사)하여 그해 태평양의 65승 중 45승을 이 세 명이 합작하게 했다. 이 3인방은 선발로만 기용된게 아니라 선발, 불펜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기용되는 와중에 45승을 거둔 것이라는 점에서 1989시즌 김성근 혹사는 상당히 심각한 것이었다. 1989년의 포스트시즌 당시 박정현이 지나친 혹사로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간 것은 당시 많은 야구팬들에게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자세한 내용은 박정현 문서 참조. 이 3인방은 이듬해부터 바로 혹사의 여파로 부상으로 고전하며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고, 김성근 감독의 투수 혹사가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김성근의 태평양은 1989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야구계에 파란을 일으켰지만, 그해의 지나친 혹사의 여파로 시즌 후 신인 투수 3인방이 동시에 부상을 겪고 이듬해 부진하게 된다. 결국 1990시즌 태평양은 결국 7개팀 중 5위라는 하위권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OB 감독 시절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했던 김성근 감독은 1988년 오대산 극기훈련 후 태평양을 포스트시즌에 올려놓아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러자 여러 팀에서 김성근을 감독으로 영입하려고 구애하기 시작했다. 삼성, 롯데 등 다수의 구단에서 김성근 영입작전에 뛰어들었다는 등 온갖 찌라시가 난무했다. 실제로 삼성그룹 수뇌부가 김성근이 삼성의 정신력을 개조할 적임자로 보고 후임 감독으로 내정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 때문인지 김성근은 태평양에서 두 번째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구단 측과 사사건건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중 언론 등을 통해 바깥으로 드러난 굵직한 갈등으로는 혹한기 극기훈련 수당 지급 문제와 임호균 각서 파동이 있다.
첫번째는 훈련 수당 지급 문제이다. 김성근이 태평양 감독으로 부임한 직후 정신력을 개조해야 한다면 실시하고자 했던 혹한기 지옥훈련 실시를 주장했다. 그러나 구단측은 이런 전례없는 방식의 훈련 성과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결국 훈련을 반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김성근은 선수들에게 훈련비를 각출해서 극기훈련을 강행했다. 이러한 혹한기 극기훈련은 비시즌 활동 중지 기간에 이뤄진 것이었기 때문에 규정상 구단에서는 월급이나 수당을 줄 수 없었다. 프로야구는 2월부터 10월까지가 공식적인 활동기간이고, 연봉은 이 기간에 한정하여 분할 지급되는 것이 현재까지의 원칙이다. 즉 프로야구 선수는 이 기간 외에는 돈을 받지 않으므로 집단 훈련을 할 의무가 없고, 구단은 훈련을 하건 말건 돈을 지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수당 지급을 강력하게 요구했고 결국 구단이 거절하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그리고 이 와중에 같이 온 정진구 차장과 신용균 코치와도 사이가 멀어진다. 게다가 결국 구단으로부터 수당을 받아내지 못하자 위에 언급한 대로 이를 '''선수들로부터''' 받아낸 탓에 선수들의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훗날 선수협이 결성되면서 이 문제가 공식화되어서 선수들에 대한 비활동기간 훈련 금지 규정이 KBO에 의해서 지정되고, 수차례 재확인 되지만 김성근으로 대표되는 일선 감독들의 반발과 성적을 원하는 구단측의 입장으로 슬쩍 넘어가고 있다. 2000년대 비활동기간 훈련 금지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것도 김성근 감독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계기는 '''임호균 각서 파동'''. 구단은 삼미 시절을 상징하던 임호균이 노쇠하여 1988년과 1989년 통틀어 1승도 올리지 못하자 그를 방출하려 하였고, 김성근 감독이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였다고 김성근 감독 본인 스스로 주장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임호균은 김성근 감독 부임 전에 이미 스스로 은퇴를 결심했고, 구단 측도 이를 받아들이고 해외 연수를 추진하던 중이었다. 이 때 김성근이 노련한 리더가 필요하는 이유로 그를 붙잡은 것이었다.# 김성근 감독은 '''임호균이 시즌 동안 선발로 출장해서 5승을 하지 못하면 사임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게 된다. 각서 사건에 휘말려서 좋은 결말 나온 적이 한번도 없는 프로야구의 전례[15] 처럼 이 과정에서 프런트와 사이가 틀어진 김성근은 실력 때문이든 아니든 임호균을 '''단 한경기도 선발 출장시키지 않았다'''. 당연히 선발승도 0. 여기에 태평양의 순위도 5위로 하락하면서 김성근 감독이 계약 기간을 못채우고 잘리게 된다. 사실 당시에는 1989년 포스트시즌의 돌풍으로 김성근 감독의 몸값이 상한가를 치면서 삼성 등 여러 팀의 러브콜을 받고 있던 시절이라 김성근 감독이 팀을 옮기기 위한 꼼수로 각서를 작성했다고 하는 소문이 무성했다. 김성근 감독은 이러한 의혹을 전면 부인하면서 제자를 위해 자신이 희생한 것이라 강변했지만, 후에 임호균이 인터뷰에서 내막을 밝히자 김성근이 삼성 감독으로 가기 위해 임호균을 내서워 일부러 각서를 쓰고 잘린 게 아니냐는 의혹이 집중 재조명되었다. 어쨌든 임호균 각서파동 이후 김성근 감독은 OB 시절 경력까지 합해 프런트와 대립하는 감독으로 이미지를 굳힌다. 어쨌거나 김성근은 본인이 원했던 시나리오대로 경질당한 후, 며칠 후에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 부임했다.
김성근 개인팬들에 따르면 인천 올드 팬들은 인천야구의 꽃을 현대의 우승이 아니라 김성근의 태평양 시절로 보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인천 올드 팬들은 태평양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김성근 감독을 좋아했다고 말하고 있다. 허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김성근이 태평양에서 해임되자마자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 취임하자 당시 태평양 팬들은 김성근이 더 좋은 팀으로 옮기기 위한 구실로 각서사건을 만들었다고 보고 그를 맹비난했었다.
김성근 개인팬들은 김성근이 떠난 후 태평양이 다시 하위권으로 처졌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김성근 감독 첫해인 1989년 쥐어짜기 운영의 후유증으로 인해 김성근 체제 2년차인 1990년 태평양은 5위로 쳐졌다. 김성근 감독이 경질된 후 1991~1992시즌 동안 박영길, 정동진 감독이 거둔 성적은 5위, 6위로 김성근 감독 2년차와 별 차이없는 성적을 거두었다. 게다가 1991년부터 8개 구단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박영길 감독 시절의 5위는 김성근 감독 시절인 1990년의 5위보다 높은 상대등수이다. 게다가 박영길, 정동진 감독은 김성근 감독 만큼 모기업인 태평양으로부터 지원을 받지도 못했다. 당시 태평양 그룹 실세였던 신동관 그룹 수석부회장 겸 야구단 사장은 처음에 의욕적으로 야구단에 투자를 감행하여 김성근이 원한 코치진과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는 등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근이 프런트와 사사건건 마찰을 일으켰고 급기야는 김성근이 자신의 사무실문을 박차고 들어와 임호균 각서파동을 일으킬 정도로 관계가 험악해 졌다. 임호균 각서파통으로 야구판에서 김성근과 함께 신동관 부회장의 이미지도 실추되고 말았다. 이후 신동관 부회장은 야구단에 대한 투자를 멈추고 여자농구계에 투신하여 태평양 여자농구단에 주력했고 1995년 한국여자실업농구연맹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이 떠난 후 태평양의 성적이 급락했다고 말하고 다니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기술이다. 정동진 감독은 모기업인 태평양이 좋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1994년 태평양을 2위로 이끌기도 했다. 정동진 감독의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후 태평양 돌핀스는 1년을 더 버티지 못하고 현대에 매각되었다.
김성근 때 잘 나가던 태평양이 그가 떠나자 폭망한 것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미 김성근 2년차에 5위로 하위권으로 내려 앉았다. 김성근의 후임인 박영길 감독은 김성근과 반대 성향의 감독으로 80년대 빅볼 야구의 대표적인 감독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김성근 체제하에서 극단적으로 번트와 단타에 길들여진 선수들에게 단기간 안에 장타 위주의 그의 야구를 접목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영길 감독은 김성근의 혹사의 여파로 줄줄이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는 황폐화된 태평양의 투수진을 이끌고 김성근 2년차와 동일한 성적인 5위를 기록했으나, 성적 부진으로 1시즌 만에 경질되었다.
김성근 시절 1년차에 성적이 반짝 상승한 후 김성근 2년차인 1990시즌부터 1994년 정동진 감독이 태평양을 2위로 이끌 때까지 4시즌 동안 태평양이 침체기에 접어든 배경으로는 김성근 감독 1년차 시절 태평양의 부흥을 이끈 투수 3인방이 그해 지나친 혹사의 여파로 거듭된 부상으로 몰락한 것을 꼽는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1989년 플레이오프의 박정현의 혹사였다. 박정현은 1차전 14이닝 완투, 3차전 구원등판해 7이닝째 던지다가 당한 허리 부상으로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나갔다. 그 결과 1김성근 감독 재임 2년차인 1990년 태평양은 5위로 주저 앉고 말았다. 때문에 이 이후 김성근 감독 퇴임이후 팀의 하락세와 혹사논란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한참을 하위권에 머물던 태평양은 정동진 감독이 1994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서 잠깐 역대 최고의 성적을 내며 부활한 뒤 현대 유니콘스로 바뀌게 된다.
6. 삼성 라이온즈 감독
10여 년 뒤의 선동열과 함께 삼성 역사상 차악의 감독. 주로 올드팬들은 김성근 을,[17] 최근 팬들은 선동열을 차악으로 꼽는 경우가 많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애초에 둘다 까이는 행동들이 참 극도로 흡사하고 야구장에서 팬들을 몰아낸 건 똑같기 때문에 올드팬들은 어쨌거나 류중일 감독 이전 만년 준우승팀 삼성을 2년 연속 우승시키고 적어도 투수진과 타선을 리빌딩시키는 등 결과물을 만든 선동열을 '그나마' 더 높게 치고 최근 팬들은 김성근이 삼성 감독을 한 적이 있는걸 몰라서 김성근을 더 높게 친다. 어쨌거나, 역대 삼성 감독 중 차악으로 손꼽히는 감독으로 선동열, 서정환과 자웅을 겨루는 탑3에 속한다. 물론 부동의 최악의 감독은 3년동안 이해할 수 없는 경기 운용과 선수 혹사 등으로 인해 삼성을 밑바닥으로 밀어넣은 김한수다.
1989년 김성근이 태평양 돌핀스의 감독에 부임하여 오대산 지옥훈련 후에 1년만에 팀을 포스트시즌에 올려 놓자 삼성 수뇌부는 김성근을 삼성 감독의 적임자로 여기게 되었다. 당시 삼성 수뇌부는 뛰어난 전력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정신력이 부족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투수 코치 출신인 김성근이 리그 최강의 타선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뒤쳐졌던 투수진의 기량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1991, 1992년 감독으로 활동. 부임 첫해 3위, 이듬해 4위라는 성적을 찍었다. 하지만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 LG에 패배한 뒤 영입된 터라서 2년 연속 그보다 못한 성적을 내자 경질당했다.
'''특히 1992년 롯데 자이언츠와의 준 플레이오프가 결정타였다.''' 첫 경기인 신인 염종석과 성준의 맞대결에서 선발 4안타로 완봉패한 것은 성준 역시 완투를 했으며 염종석이 워낙 특급신인 포스를 보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칠 수 있었다. 하지만 3전 2승제의 2번째 경기에서 그해 7승을 거두며 부진했던 박동희[18] 에게 마치 전 경기의 데자뷰라도 보여주는 것처럼 '''2경기 연속 산발 4안타 완봉패'''로 무기력하게 탈락해버린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이런 경기들로 인해서 김성근은 8,90년대를 관통하는 '''큰 경기에 약해서 우승할 수 없는 감독'''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버리게 된다. 2000년대 SK 왕조를 경험한 최근 팬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과거의 편린이다. 실제로 야구계에서는 2000년대 들어와서도 '우승할 수 있는 감독'이라거나 '승운이 따르는 감독' 등은 따로 있다는 인식은 여전히 존재한다...특히 이희수나 류중일을 보면...
더군다나 '''우승이 아니면 어떤 것도 의미가 없던''' 삼성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경질 대상이 된 것이다.
여러 모로 김성근 감독에게도 흑역사다. 사실 전임 감독인 정동진 감독이 한국시리즈에서 졌다는 이유로 짤린 것을 감안하면, 2년 버틴 것이 용한 정도. 사실 김성근 감독이 3위로 첫시즌을 마무리하자 많은 언론들이 김성근 감독의 경질을 예측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래도 삼성 구단은 그간 감독들을 너무 일찍 경질했던 전통을 깨려는 시도였는지 김성근을 한번 더 믿고 1년 더 유임했다.
김성근 감독 본인과 노리타들은 당시 삼성 전력이 하위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사실과는 다르다. 김성근과 그의 팬들은 김성근의 능력을 부각시키기 위해 자신이 맡았던 거의 대부분의 팀들을 모조리 하위권이라고 깎아내렸다. 삼성 뿐만 아니라 야구 명문이었던 충암고, 신바람/자율야구를 내세우며 거의 8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LG, 페이롤 1위를 찍었던 쌍방울, 조범현 감독의 지도하에 신생팀으로 두 차례나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SK까지도 최하위권, 최악의 팀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노리타들은 김성근 감독이 맡은 당시 삼성은 80년대 후반의 전력하고 비교하면 내리막에 접어든 전력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성근 팬들은 어떻게든 그때 상황을 나쁘게 몰아가기 위해서 당시 삼성의 좋지 않은 지표들만 골라서 제시하기도 했다. 그들은 김성길, 유명선 정도가 실질적으로 에이스 역할을 했으니 김성근에게 주어진 전력은 준우승팀이 아닌 리그 중위급팀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1989년엔 팀방어율이 최하위권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1990년에는 팀방어율이 5위를 기록했다. 노리타들 말대로 투수진이 중위권이었음을 인정한다고 해도, 타선은 여전히 리그 상위권이었다. 노리타들은 김성근 감독이 맡기 직전이 1990시즌 삼성 팀타율이 4위에 그쳤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장타력의 팀답게 팀홈런은 여전히 1위를 기록했다는 점은 빼놓고 있었다. 팀타율도 1990시즌 일시적인 부진(?)을 겪었지만 1989시즌까지도 2위를 기록할 만큼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가 더더욱 야구에 만약은 없다는걸 간과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김성근 감독 부임전 상황을 최악으로 어떻게든 몰아가기 위해, 김성근 부임 직전에 이룬 한국시리즈 준우승도 폄하하고 있다. 한국시리즈에서 진출한 1990년에도 당시 준플레이오프 상대인 빙그레는 부상자 속출로 김영덕 감독의 유임을 둘러싼 잡음으로 시즌 막판부터 무너져내렸서 자멸한 것이고, 해태와의 플레이오프에서도 9회에 김용철의 외야플라이가 바람을 타고 넘어가 홈런이 되는 등 어느정도 행운이 겹친 결과라는 것. 당시 홈런을 맞은 선동열은 김용철의 타구만 보고 외야 플라이를 확신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있었는데 어...어...하다가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버렸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노리타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김성근 취임과 동시에 15명이나 대대적으로 전력을 보강한 삼성은 1990년의 삼성과는 전혀 다른 막강한 전력의 팀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언론들은 김성근이 맡게 될 삼성을 '''팀 사상 최고의 전력'''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1991년 시즌을 앞둔 삼성은 우승을 하기 위해 작정하고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하여 삼성 역대 최고의 전력, 우승후보 0순위로 꼽혔다. 김성근 감독이 원한 코치들을 모두 영입했을 뿐만 아니라 김성근 감독이 요청한 선수를 모두 싹쓸이로 영입해서 선수단 규모가 60명에서 75명으로 15명이나 증가했고 팀의 연봉 부담액도 2억 7천만원이나 늘었다. 특히 崔一彦(최일언), 尹錫環(윤석환), 申慶植(신경식), 李光吉(이광길), 許圭沃(허규옥), 曺凡鉉(조범현), 崔洪錫(최홍석) 등 타팀으로 부터 7명이나 '''현금트레이드'''로 대거 영입해서 '''팀 창단 이래 가장 완벽한 전력'''을 갖췄다는 평을 받았다.당시 기사 삼성의 엄청난 투자 때문에 1991년 2월 4일 무분별한 선수 확충을 자제하자는 KBO 사장단 회의가 열렸을 정도였다. 전년도 준우승팀인데다가 타팀에서 7명을 현금트레이드로 데려왔고 그밖에도 신인선수를 수혈하는 등 김성근 감독 부임과 함께 총 15명의 선수를 사다줬던 삼성의 프런트는 당연히 '''삼성이 우승 전력'''이라고 생각했고 우승은 커녕 '''가을 광탈'''을 했으니 짤리는 건 당연하다.
김성근을 옹호하는 입장의 사람들에게 '그럼 김성근이 삼성에서 잘한건 또 뭐가 있냐'고 물으면 별 대답을 못하는것도 사실이다. 패넌트레이스야 어떻게 됐든 1990년에 준우승을 한 삼성은 김성근 시절 3위, 4위로 성적이 계속 나빠지니 당연히 김성근을 내쫓고 다시 1993년 준우승을 한 뒤엔 556의 암흑기를 거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팀을 다시 포스트시즌으로 올린 감독은 백인천이고 궤도에 올려놓은 감독은 서정환이며 우승 팀으로 만든 감독은 김응용이다.
부임한 두 해 모두 단기전에서 롯데와 준플레이오프를 치렀으며 1991년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비를 맞으면 15회까지 완투한 롯데 박동희를 상대로 1회 구원 등판한 김성길을 15회까지 던지게 한 혹사는 당시에도 팬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 실제로 이 해 김성길은 계투와 마무리로 시작해서 선발까지 마구잡이로 등판했으나 이후 몰락하고 김성근 전 감독의 대표적인 투수 혹사 사례로 꼽힌다.
이 시기의 일화로 1991년 7월 14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대구 홈경기를 앞두고 우완 선동열과 좌완 김정수 둘 중 누가 나올지 모르자 일단 좌타자 일색인 오더와 우타자 일색인 오더 두 장을 작성한 다음 해태의 오더가 심판원의 손에 넘어온 것을 확인한 후, 배대웅 수석코치를 시켜 슬쩍 심판원에게 상대 선발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 의도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심판원이 선동열이라고 말해주자 배코치는 양쪽 뒷주머니에 나란히 꽂고 나온 두 장 중에서 선동렬을 상대로 준비한 우완투수용 오더를 꺼내려다 '''낌새를 챈 해태 김봉연 수석코치에게 붙들렸고''' 결국 두 장의 오더를 모두 빼앗겨 망신을 사고 말았다.
4월 페넌트레이스 벽두부터 '''10차례 안팎의 가짜오더'''를 작성하며 스포츠맨쉽을 던져 버린 이 일화에 대해 당시 언론들을 꼬리가 길어 잡힌 약삭빠른 잔꾀, 비신사적인 승부욕, 사기극과 같은 평가를 했다.[19]
이 시기까지는 전형적인 고전적 지도자로 홈런을 친 뒤 셀러브레이션이 과도하다는 이유로 선수를 질책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이걸 증언한 인물이 당시 삼성 선수이자 전 SK의 감독인 이만수. 이만수와 김성근은 이미 이전부터 마찰이 있었는데, 김성근의 이만수 팔꿈치 근육을 보고 사인을 알아차렸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삼성 시절 감독으로 부임하자 마자 이만수 때문에 삼성이 우승을 못한다더니, 곧바로 자신의 제자였던 조범현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하여 그를 주전 포수로 기용하면서 이만수 길들이기를 시도했다. 삼성 시절 이만수에 대한 홀대와 훗날 SK에서 구단의 차기 감독으로 내정된 이만수에 대한 대우와 SK 감독에서 물러난 뒤 이만수를 언급하며 "예의가 없다(???)"고 인터뷰를 하는 등 사실 사람인 이상 김성근 감독과의 관계가 좋을 수 없다. 이미 SK의 내홍의 뿌리는 8,90년대부터 깊어왔던 것.
하지만 주포 이만수를 주전에서 배제하고 조범현을 주전으로 기용하자, 삼성의 득점력은 눈에 띄게 감소했고, 결국 김성근은 이만수를 슬며시 주전으로 복귀시켰다. 또 한 때 김성근은 삼성 타자들 특유의 화려한 셀레브레이션을 질책하고 금지시켰는데, 이후 이만수의 성적이 대폭 하락는 바람에 다시 원래대로 셀레브레이션을 허용했다. 1980년대 프로야구를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그 당시 홈런을 친 타자들이 거의 '오도방정' 수준의 셀러브레이션을 하면서 홈으로 들어오는 걸 많이 기억할 것이다.
아울러 당시 노쇠한 조범현, 신경식과 같은 자기 제자들을 대거 영입했다가 이게 썩 성공적이지 못하면서 체질 개선에도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프랜차이즈를 은근히 홀대한다는 평도 있었을 정도니까. 뭐, 이만수는 홀대기미였지만 박승호는 상당히 중용했다.
여러모로 삼성 올드 팬들에겐 1차 암흑기인 556 암흑기보다도 더 야구보기 싫었던 시절로 기억되는데[20] , 투수 혹사는 혹사대로 시키고 성적은 성적대로 못냈기 때문. 어찌보면 445 시절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실제로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는 김성근 시절과 선동열 시절을 동급으로 치환하는 경우가 많은데, 공통적으로 투수가 지나치게 혹사당한데다가 경기가 계산대로 안 흘러가면 멋대로 경기를 포기하는 점, 프랜차이즈 스타 홀대 등을 이유로 들고 있다. 게다가 삼성 감독으로써 잘 하지도 못 했으면서, 류중일을 선동열이 만든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다는 식의 인터뷰를 하는 등의 사건으로 인해 선동열과 거의 한통속 수준의 취급을 받고 있다
또한 특유의 마음대로 올리기 때문에 타자는 기록좋은 선수가 없었고 투수는 그냥 혹사당했으며, 팀 케미가 무너졌고 팬심은 멍게 강점기 수준이었다는게 그 시절 삼성팬들의 평가.[21] 그리고 앞을 본 리빌딩은 커녕 오히려 늙은 제자들만 트레이드해와서 나이만 올라갔으며 팀 내외적으로는 스포츠 정신도 없었다. 삼성은 김성근이 나가고 그와 커넥션이 있던 선수들을 정리하고 난 뒤 우용득이 취임한 1993년 김성근 시절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팀이 되어 김성근때는 상상도 못한 준우승을 다시 했다.
실제로 강기웅, 김성래, 이만수, 류중일 등의 프랜차이즈 스타들과 불화가 있었고[22] 팀의 선수단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삼성의 수비 시스템을 갈아엎으려 하다 이것에 대해 몇몇 선수들이 반발했다는 설이 있었고, 김성근의 경질 이후 삼성의 수비 시스템은 류중일이 체계화시킨 매뉴얼대로 확정되었다는 점 때문에 류중일과 사이가 틀어진 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의 연장선에서 나온 추측이 라디오볼에서 사람 좋기로 유명한 모 감독이 김성근에 대해 강한 비토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사람이 류중일이 아니냐는 것. 다만 이 주장은 2013년과 2014년 국가 대표팀의 전력분석원이 다름아닌 김정준이라는 것 때문에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평소에 사이 안좋던 지도자들끼리도 국가대표팀 코칭스태프를 맡은 동안에는 휴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 진실은 저 너머에...당시 삼성 수비에는 역대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꼽히는 강기웅-류중일이 있었고 다른 내야수비도 리그 최정상급이었다. 아무리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해도 현상 유지만 해도 당시 리그 최정상급 수비이며 2014년 현재까지도 김성근이 바꾸려고 했던 그 삼성 수비 시스템은 리그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걸 바꾸자고 들었다는점은 당연히 삼성팬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들다.
이런 삼성에서의 흑역사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2000년에 김성근을 다시 불러서 한 시즌 동안 2군 감독을 맡겼다. 삼성이 김응용을 영입하기 전에 2000년 한 시즌만 김용희를 잠깐 감독으로 앉혔는데, 김용희를 견제하기 위해 불러들였다는 이야기가 있다.[23] 한편 2000년 삼성은 드림리그 3위를 했으나 매직리그 2위 롯데보다 승률이 높아서 준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일단 1군 감독 시절과 달리 이 시절은 무난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KBO 기념방송에서도 선수단과 프런트와의 마찰을 자꾸 이야기 하는걸 보면...본인도 삼성 감독시절은 마뜩치 않아하는 듯.
결론적으로 김성근의 삼성 시절은 위의 우승 전력이 아니었다는 일부 타 팀 팬들의 의견도 있긴 하나. 김성근 본인도 나이가 있는 자기 제자들을 기용하고 미친듯한 투수 혹사에 팬심도 부숴버리고 스타들과 싸워대며 팀 케미 박살도 냈고 위에도 나오듯 스포츠맨쉽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이길 수만 있다면 어떤 치사한 짓거리라도 다 하던 수준이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이후 556 강제 리빌딩 암흑기를 부채질했으면 했지 삼성에서 잘한게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훗날 자서전 《야신 김성근, 꼴찌에서 일등으로》에서 '삼성 선수들의 엘리트 의식 때문에 통제하기가 어려웠다'고 적어서 삼성팬들에게 두고두고 까였다. 게다가 1997년 부정배트 의혹 사건 때도 당사자인 LG 트윈스가 아닌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인 김성근이 공문을 보내어 전수조사를 의뢰하기까지 하는 등 악연에 가까운 행보들이 계속 이어져오기도 했다. 이는 삼성 팬덤이 반김성근, 친김응용 성향이 강한 원인 중 하나이다. 김성근 체제가 삼성 암흑기의 신호탄이였는데 반하여 김응용 체제는 21세기 화려한 삼성 역사의 신호탄이였으니 더더욱...
7. 해태 타이거즈 인스트럭터-2군 감독
삼성에서 짤린 뒤, 전국의 대학교와 고등학교를 돌며 아마 선수들을 코치하는 순회 인스트럭터와 프로야구 경기장을 늘 찾으며 경기를 분석하는 등 야인생활을 전전했다.
노리타들에 따르면 해태 김응용 감독이 김성근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그를 2군으로 영입했다고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김성근을 영입한 것은 해태 이상국 단장이었다. 여러 일화에도 나오지만 김응용은 김성근을 매우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인사권자인 이상국 단장이 김성근을 인스트럭터로 고용하겠다고 하니, 1군 감독이었던 김응용은 인스트럭터가 정식 코칭 스태프도 아니고 해서 굳이 반대 의견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 나중에 김성근이 삼성 라이온즈에서 2군 감독을 하던 시절, 김응용이 삼성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그때는 단번에 김성근을 경질했다.
김성근이 야인 시절 스포츠서울 객원기자로 현장을 돌고 있을 때 비행기에서 우연히 해태 이상국 단장과 만나 긴 대화를 나눴는데, 이것을 인연으로 이상국 단장이 그를 해태 투수 인스트럭터로 영입하게 되었다. 해태 김응용 감독은 김성근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김성근을 인스트럭터로 영입하겠다는 단장의 결정에 반대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인스트럭터로 4개월 일하다가 나중에 정식으로 2군 감독이 되었다. 훗날 해태에 들어간 이유를 묻자, "김응룡 감독이 해태에서 하도 우승을 많이 하자, 어떻게 그렇게 하는건지 궁금해서 갔다." 고 말했다.[24]
김응용은 호적상 1941년생인데 실제는 1940년생이다. 김성근은 1942년생. 하지만 김성근은 옛날부터 그를 '응용이'로 불렀다고 한다. 김응용은 선수시절 때 김성근의 그런 반말에 부아가 치밀었다고... 노리타들은 김응용과 김성근의 고교 졸업연도가 같기 때문에 동기생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김응용은 1940년생인 장훈과 친구로 지내는데, 김성근은 장훈을 선배로 모신다... 실제 호칭 문제로 김응용은 여러차례 김성근에게 불쾌감을 표시하고 시정을 요구했으나 김성근은 결코 고치지 않았다. 지도자가 되고 나서도 김성근과 김응용 감독은 위 삼성 감독 시절 부분에 언급한 이중오더 사건 등으로 서로 좋지 않은 관계였다. 김성근이 해태 2군으로 오고 나서도 단 둘이 밥을 먹은 것은 단 한번밖에 없었을 정도로 관계는 여전히 냉랭했다고 한다.
해태 타이거즈 문서에 따르면 해태 구단은 김성근을 2군 감독에 앉힌 바로 그해 1994년 처음 2군을 신설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해태 2군은 시설이 너무나 열악했는데 함평 논두렁 가운데에 컨테이너 몇개 박아 놓은 게 전부였다... 그래서 2000년대초 기아에 인수될 때까지 해태는 2군 시설이 없었다고까지 말하는 이들도 있다. 애초에 해태에서 2군은 주전들이 사고칠 때 유배.. 보내는 곳이었고, 해태그룹 자체가 3류 재벌이라 2군에 돈쓰는 걸 아까워해서 제대로 된 2군 구장도 없었을 정도였다.[25] 1군도 무등구장 지하에 쇠봉에 콘크리트 부어서 만든걸 역기라고 그것도 박충식이 트레이드 전 제대로 웨이트 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안습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2군은 더할 나위 없었을 터. 해태는 96년말 오랜 숙원이었던 2군 전용 구장과 기숙사 시설을 신축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IMF로 백지화되었다. #
이 시기 2군 감독인 김성근 밑을 거쳐간 신인 투수가 임창용과 이호준이다(...) 이들은 노랭이 해태에서 비교적 유망주 투수로 꼽혀서 일본으로 연수를 보냈는데 김성근 감독을 피해서 땡땡이를 쳤다고 한다. 유망한 강속구 투수였던 이호준은 1994년 데뷔 시즌에 투수로 8경기에 출장했으나 깃털직구라서 부진하여 2군에 내려가 김성근의 지도를 받게 된다. 김성근은 이호준에게 투수 자질이 보인다면서 집중 지도했으나 김성근의 조련은 실패로 끝났다. 결국 김응용 감독은 이호준을 타자로 전향시켜 1996시즌 타자로 1군 무대에 돌아오게 된다. 덕분에 이호준은 나중에 강타자로 터졌다.
임창용을 김성근이 혼자 키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해태왕조의 투수조련은 유남호 투수코치가 상당부분 공이 컸고 신인 투수를 처음부터 1군에 박아 놓고 키운건 김응용 감독이었다. 한화 감독 부임 후 드러났듯이 김성근은 투수를 망가뜨리기만 할뿐 키우지는 못한다.
1995년 해태에 입단한 임창용은 데뷔 시즌에 이미 김응용 감독으로부터 선동열보다 구위가 낫다는 평까지 받았을 정도로 1군에서 실력면에서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임창용이 맨날 친구들과 술먹고 놀아서 김응용 감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 김응용은 사생활을 바로잡으라는 의미에서 임창용을 2군으로 보냈다. 그러나 2군에 내려온 임창용은 머리 염색을 하지마라, 놀러 다니지 마라는 김성근의 지시를 무시하고 지냈다. 김성근도 못잡은 임창용의 사생활을 잡은건 이순철이었다. 김성근 말도 안듣고 염색하고 다녔는데 해태 군기반장 이순철에게 잡혀가서 조용히 참교육받고(?) 다음 날 머리를 빨아서 다시 나왔다고..
해태 2군 감독 시절 김성근이 당시 2군에 내려와 있던 노장 이순철에게 선수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머리가 길다, 염색하지 마라고 지적해도 안듣는다고 푸념하자 다음날 아침 선수단 전원이 염색을 지우고 스포츠로 머리를 깎고 도열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8.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삼성 라이온즈에서 경질된 후 잊혀져 갔다. 김성근이 팀을 맡으면 팀이 약팀으로 전락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 이제는 다들 감독으로 커리어가 끝났다고 생각하던 1996년 뜬금없이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으로 발탁되면서 야구계에 복귀하게 된다.
김성근을 쌍방울 감독으로 영입한 인물은 바로 일본빠였던 이용일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 대행이었다. 쌍방울 레이더스가 계속 최하위권을 전전하자 창단 이래 구단주 대행을 맡아 사실상 야구단을 책임져 오던 이용일도 이제는 상당한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장 쌍방울 그룹에서 자리보전를 보전하는 문제도 문제였지만 야구계를 대표하는 원로 중 한명으로 그간 쌓아온 명성이 점차 나락에 떨어지는 것도 문제였다. 물론 이용일은 나중에 결국 비리로 나락에 떨어지고 말았지만.... 어쨌든 당시 그리하여 선택한 인물이 김성근이었다. 혹사로 유명한 김성근이 단기적으로 팀의 전력을 올리는데 적임자라는 사실을 이용일은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김성근의 혹사로 팀이 망가질 것도 알았겠지만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진 이용일에게 팀이 장기적으로 망가지는 것 따위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이용일은 초기에는 쌍방울에서 비교적 웰빙 야구를 추구하면서 장기적인 전력 상승을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쌍방울의 전력 향상은 요원해 보였고 쌍방울이 올라가기 전에 자신이 옷벗을 위기에 처하자 결국 극약 처방을 하게 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일이 처음부터 김성근을 물망에 올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처음에 영입하려 했던 인물은 일본 프로야구 출신인 김영덕과 백인천이었다. 참고로 김성근은 일본 사회인야구 출신이다. 어쨌거나 모두 일본 야구 출신이고 선수 장악력이 높고 훈련 강도가 높으며 스몰볼, 작전 야구를 좋아하는 등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감독들이다. 그러나 김영덕은 김종희 한화그룹 회장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팀 감독은 맡지 않겠다고 말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다. 또 백인천은 삼성 감독 제의를 받았기에 당연히 거절했다. 결국 처음에는 선택지에 없었던 김성근에게 기회가 오게 되었다.
하지만 구단주인 이의철 쌍방울 그룹 부회장이 김성근을 원치 않았다. 쌍방울팬들은 연고지인 전북 출신의 감독을 원하고 있었고, 이의철 부회장은 팬들의 이런 바람대로 지역 출신 스타를 차기 감독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의철 구단주는 차기 감독으로 김봉연이나 김준환을 원했다. 이들은 전라북도 연고지 출신에다가 나이도 젊었고 이미 쌍방울에서 코치를 맡고 있어서 팀 사정을 잘 알고 있고 선수단 파악도 수월했다. 그러나 구시대적 야구관을 가지고 있었던 이용일은 혹사로 유명한 김성근이 쌍방울을 개조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쌍방울은 1991년 창단 이후 단 한 번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해보지 못하고, 꼴찌만 밥먹듯이 하던 약체 팀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사실 쌍방울의 전력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특히 타선에는 김기태, 박경완, 조원우 등 잠재력을 갖춘 젊은 중장거리 타자들이 많았다. 실제로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기 전해인 1995년 쌍방울은 팀홈런, 팀타율 모두 4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투타 부조화가 심각했기에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게 되었다.'''김성근 감독은 고집이 세고 아마추어 스타일로 선수들을 혹사시킨다는 비난도 많이 받지만 당시 쌍방울은 그런 감독이 필요했다.''' 나는 이의철 구단주에게 "제 판단으로는 김성근 감독이 적임자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 [출처: 중앙일보] [白球와 함께한 60年] (31) 쌍방울과 김성근 감독
게다가 앞서 말한 것처럼 다급해진 이용일은 김성근 영입과 함께 팀에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김성근 신임 감독에게 '''전해보다 네 배나 많은 15억을 스카우트 자금으로 배정'''하는 등 파격적인 지원을 해줬다. 풍부한 실탄을 가지고 비시즌 기간 동안 선수층을 착실하게 보강한 쌍방울은 1996년에 정규리그 2위를 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포스트시즌에서는 현질로 무장하여 창단 첫 해 돌풍을 일으킨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로 플레이오프에서 먼저 2승을 거두며 벼랑 끝까지 밀고 갔으나 결국 내리 3연패를 당하는 리버스 스윕을 당하며 돌풍은 멈추었다. 그리고 팀에서는 바람잡이 선발(...)에 이은 벌떼 야구로 사상 초유의 '''20승 구원투수'''가 나왔다. 사실 이 장면을 최초로 보여준 것은 1984년의 롯데였다. 다만 이 때의 롯데와의 차이는 쌍방울이 구원투수 김현욱을 결정타로 사용한 반면에, 롯데가 사용한 것은 선발 투수 최동원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어떤 점에서는 1984년 롯데의 최동원 활용법과 이후 해태에서 선동열을 마무리의 위치에서 위력병기로 활용한 것을 조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단 일반적인 구원투수 벌떼 전략과는 좀 다른 형태였다. 당시 선수진에 대해서는 쌍방울 레이더스 문서 참조.
구단 사상 첫 포스트시즌 진출에 연고지 내에서도 위상이 커졌는데[26] 이 때 이르러 전주시민들은 비로소 쌍방울 레이더스를 해태 2중대 팀이 아닌, '''우리들의 홈 팀'''으로 받아들였다. 쌍방울 시절부터 팀과 같이 해 온 박철호 SK 와이번스 전 홍보팀장은 김성근의 업적에 대해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 전주구장에 암표장사가 나타났다. 이거 하나로 충분하다."'''라고 회고했다.
전년도의 성공에 힘입어 1997년에 쌍방울 그룹은 야구단에 더욱 대대적인 자금 지원을 해줬다. 그결과 1997 시즌 쌍방울은 KBO 전구단 중에서 '''연봉총액 1위'''를 달성하며 '''돈질하는 구단'''의 면모를 과시했다.[27]교차검증 필요 이러한 돈질의 덕분에 1997 시즌 쌍방울은 김기태, 박경완 등을 비롯한 리그 최고의 강타선을 보유한 팀이 되었다. 당시 쌍방울의 기록을 보면 팀타율, 팀OPS 등 각종 타격 지표에서 리그 최상위권이었다. 김성근 감독이 전매특허였던 번트를 좀 자제했더라면 팀홈런 1위 달성도 충분히 가능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의외로 투수 조련가라는 세간의 명성과 달리 김성근의 쌍방울은 투수 력에서 큰 약점을 보였다. 이 와중에 김성근은 성적을 내기 위해 김현욱 등을 미친듯이 혹사시켰다. 이러한 쥐어짜내기식의 운영 끝에 정규리그를 3위로 마쳤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으나 역시 플레이오프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김성근 팬들에게 쌍방울 시절은 김성근의 능력이 최고로 발휘된 시기라는 평을 받는다. 김성근 야구의 진수는 SK 와이번스 때가 아니라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에 나왔다고 말한다. 훗날 김성근 본인도 자기가 맡은 팀 중 제일 애착이 가는 팀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망설이지도 않고 '''"쌍방울 레이더스"'''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상황에 맞춰 최대한의 능력을 뽑아내는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쌍방울 시절이라고 평한다. 일단 전주 야구장의 펜스를 높이고, 투수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면서 성적을 끌어올렸다. 고정된 선발은 없었지만,[28] 상황에 맞춰서 언더핸드와 우완 투수, 좌완 투수를 적절히 배합하면서 승리를 일궜다. 특히 홈 경기에 강해서 '''홈구장 17연승'''이라는[29] 대기록을 작성한 것도 이 시절.[30]
그런데 이러한 노리타들의 주장은 많이 미화되었고 사실과 다른 부분도 많다. 그들이 말하는 '''상황에 맞춰 투수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했다는 말은 '''일정한 보직없이 마구잡이로 투수들을 굴리며 혹사'''시킨 것의 포장일 뿐이다. 김현욱의 혹사 기록을 보면 김성근이 얼마나 막장으로 투수를 굴리며 혹사시켰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반박에 대해 김성근 팬들은 당시 쌍방울의 투수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벌떼 마운드(=마구잡이식 투수기용)를 운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클리셰를 반복한다. 또 당시 약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김성근이 투수를 적재적소에 기용하며 투수력으로 승리를 일구어냈다는 그들의 주장 또한 사실과는 다르다. 실제 쌍방울의 성적 향상은 주로 타선의 힘에 기인한 것이었다. 당시 쌍방울은 연봉총액1위에 걸맞는 막강한 타선을 보유했다. 당시 쌍방울의 팀타율, 팀홈런, 팀장타력 등의 타격지표는 리그 1~3위를 기록하고 있다. 김성근이 번트를 조금만 자재했더라면 팀홈런 1위도 충분히 가능했다는 평이 나올 정도다. 반면 투수력 부문을 보면 김성근 부임 이후 선수 보강이 많이 이루어졌고, 김현욱 등을 마구잡이로 굴리면서 혹사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쌍방울의 투수부문 지표는 여전히 좋지 않다.
또한 김성근과 그의 추종자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쌍방울의 가난함'''이 사실은 심하게 과장되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팀이 원정경기를 떠날 때마다 싸구려 여관방을 전전하고 스프링캠프도 제대로 못가서 전주 시내 공원에서 비닐하우스를 치고 훈련을 했다던지 동네 기사식당에서 외상음식을 먹어가며 시즌을 치뤘다[31] 고 하는데, 이시절 일들이 많이 부풀려져 있는 경우도 많아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확인해 볼 필요가 있고 사실이라 하더라도 쌍방울 선수들이 겪은 어려운 일화들은 IMF 이후 쌍방울이 부도가 나며 사정이 많이 어려워진 1998년 말~1999년 정도에나 해당되는 일이다. 고양 원더스 시절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친김성근 언론인 중 한명이었던 박동희[32] 가 김성근을 미화하는 논조로 작성했던 칼럼에서조차도 IMF 이전에는 쌍방울의 처우가 다른 팀에 비해서 별로 나쁘지는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김성근 감독이 성적을 냈던 첫 2년간 쌍방울 그룹은 야구단에 상당한 수준의 투자를 했다. 쌍방울 그룹은 만년 하위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김성근을 감독으로 영입함과 동시에 나름대로 야구단에 적극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당장 김성근의 영입과 함께 '''전년도보다 네배나 많은 15억원을 스카우트 자금으로 지원'''하여 김성근이 원하는 선수들을 충분히 영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적극적인 선수 영입 덕분에 김성근 체제 2년인 97시즌에 쌍방울은 '''페이롤(선수 연봉 총액) 1위'''를 기록했다. 당시 잘나가던 해태나 LG뿐만 아니라 '''그 돈질한다던 현대, 삼성보다도 페이롤이 높았던 것.''' 쌍방울 감독 시절 내내 김성근이 현대의 호성적은 돈질 때문이라면서 그토록 현대와 김재박 감독을 비난하고 폄하했던 것을 떠올면 참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IMF로 모기업이 부도가 났기 때문에[33] 쌍방울 구단의 존폐에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방만한 지출과 선수단 연봉관리가 이후 구단 해체 및 재창단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만든 것도 일정 부분 사실이다.
1997년말 IMF의 여파로 쌍방울이 부도를 맞은 이후에야 모기업의 지원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김성근과 그 팬들이 언플하는 것처럼 거지 수준으로 지원이 줄어든 것은 아니고, 전년도(97년)에 비해 20% 줄어든 수준이었다. 쌍방울이 전년도 페이롤 1위 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 지원이 박한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지원이 삭감되긴 했지만 조규제, 박경완, 김기태, 김현욱 등 고액연봉자들을 팔면서 지원금이 삭감된 부분을 어느정도 벌충할 수 있었다. 김성근 팬들은 주축 선수들이 모두 팔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의 신들린 지도력 덕분에 6위라도 했다고 말하지만, 선수 유출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구단은 유출된 선수보다 훨씬 더 많은 선수들을 새로 영입했다. 1998시즌에만 가내영, 김유진, 박정현, 박창현, 이근엽, 박계원, 이동수, 윤재국 등이 새로 영입되었다. 문제라면 김성근이 노장을 선호하고 젊은 선수들을 키울줄 몰랐다는 것. 1998년은 6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1999년에는 결국 최하위로 내려앉고 말았다. 7위와 승률이 2할이나 차이나는 압도적인 꼴지였다. 1999시즌 전 KBO에서는 쌍방울에게 구단 유지를 위해 최소 승률 3할을 맞추라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이것이 결국 김성근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반기를 3할 승률로 마치기 위해 조바심이 나있던 김성근은 1999년 6월 18일 남은 여섯 경기를 모두 이겨야 전반기 3할을 달성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결국 사상초유의 심판 폭행 사건을 일으키고 만다. # KBO는 김성근 감독에게 12경기 출장정지 및 벌금 200만원의 중징계를 내렸고, 쌍방울은 남은 경기에 내리 패하며 2할 5푼에도 못미치는 성적으로 전반기를 마감했다. 결국 쌍방울 구단은 7월 올스타전 기간에 김성근을 경질했다. 경질 당시 쌍방울의 승률은 0.224. 공교롭게도 후임인 김준환 감독대행도 똑같이 0.224의 승률을 기록했다. 그래도 상황이 나았던 전반기에 비하면 정말 팀이 공중분해되어가는 와중에 있었던 하반기에 팀을 이끌었던 김준환 감독대행이 김성근 감독과 같은 승률을 유지했다는 점은 어떤 면에서 대단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시즌 후 쌍방울 레이더스는 해체되었다.
한편 쌍방울 감독 시기는 과거부터 악명 높았던 김성근의 사사건건 시비걸기 행태가 과거보다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시기이기도 하다. 박재홍 부정타격 시비,[34] 부정 방망이 항의 사건, 마운드 높이 시비, 심판 폭행 사건 등 여러 형태의 창조적인 도발로 상대팀과 야구팬들을 짜증나게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김성근 감독의 커리어 내내 혹사와 관련된 무수한 일화들이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 쌍방울 역시 김현욱 등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수많은 감독팬들의 착각과 달리 야구는 결국 선수들이 하는 것이지 감독이 하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선수를 사서 써서 성적을 낸 것이라면 결국 그 성적은 돈과 그 돈으로 산 선수가 낸 것이지 감독이 낸 것은 아니다. '''그의 팬덤에 의해 김성근 신화라 불리는 1997년 쌍방울은 당시 돈질로 유명했던 삼성, 현대보다도 더 많은, 리그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으면서 3위를 기록했던 팀이었다.''' 그나마 모기업이 지원을 줄이자 '''꼴찌'''로 내려앉고 말았다.
9.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2000년에 삼성의 2군 감독이 되었다가 그해 말 김응용 감독이 취임하면서 1시즌만에 해임되었다.
애초에 김응용 감독과 그의 사단이 2000시즌부터 삼성을 맡기로 되어 있었는데, 일이 꼬여버리는 바람에 삼성 취임이 1년 후로 늦춰지게 되었다. 갑자기 일이 꼬여버리자 삼성 구단은 급히 2000년 1시즌을 위해 임시로 코칭스태프들을 꾸렸는데, 1군 감독에 김용희, 타격코치에 장효조, 2군 감독에 김성근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지도자로서 뚜렸한 실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또한 장효조와 김성근은 과거 삼성과 껄끄러운 인연이 있었다. 2000시즌이 끝나자 김응용 감독 사단이 삼성에 취임하면서 이들은 모두 경질되었다.
참고로 김성근은 2014년의 'KBO 특별기획 야구를 말하다' 방송을 통해 삼성 1군 감독 시절을 회상하며 당시의 선수단과 프런트를 싸잡아 비난하고, 삼성 구단에 대해서는 '감독을 감독답게 생각 안 하는 팀'이라 깠는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감독을 감독답게 생각 안 하는 팀'의 2군 감독 제안을 다시 받아들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김성근 다운 뒤통수를 치는 발언이었다. 참고
10. LG 트윈스 2군 감독-1군 수석코치-감독대행-감독
2001시즌을 앞두고 LG 2군 감독이 되었다. 이광은 LG 감독이 구단에 요청해서 영입했다고 한다. 이유는 분위기 쇄신. 그러나 이광은 감독과 김성근 2군 감독은 그전에 전혀 인연이 없는 사이였다고 한다.
김성근이 본인이 맡을 당시 LG 트윈스가 최하위의 약체팀이었다고 하도 언플하고 다닌 덕분에 그때 LG가 정말 약팀이었다고 잘못 알고 있는 야구팬들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김성근이 부임하기 직전까지 LG 트윈스는 1993년부터 2000년까지 1996년과 1999년 두 번을 제외하고 매년 꾸준히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나름 강팀'''이었다. 게다가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1997년과 1998년에는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거두기도 했고. LG가 최하위권의 약팀이 된 것은 김성근이 해임된 직후, 김성근의 저주가 시작된 2003년부터다. 노리타들은 일부 선수들의 노쇠화를 거론하며 김성근이 맡을 때 LG의 전력이 나빠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노리타들의 말과 달리 김성근 시절 LG의 전력은 상당히 좋았다.
김성근이 맡았던 2001~2002 시즌 트윈스의 주전 라인업은 다음과 같다. 조인성(포수), 서용빈(1루수), 유지현(유격수/2루수), 이종열(3루수/2루수), 권용관(유격수), 이병규(중견수), 김재현(좌익수/지명타자), 박용택(좌익수), 마르티네스(외야수), 양준혁(지명타자). LG 역대 최강의 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차례 우승과 2차례 준우승을 했던 90년대 중후반보다 전력이 더 좋다.
김성근 시절 'LG 삼총사' '''유지현'''과 '''김재현'''은 '''커리어하이'''를 찍었다. 또 '''3년 연속 안타왕과 골든글러브를 차지한 당대 최고의 외야수 이병규'''가 있었고, 선수협 파동의 여파로 '''전성기의 양준혁'''을 거의 공짜로 얻어 썼으며,[35] '''야생마 이상훈이 미국에서 복귀'''하고, '''대형 유망주 박용택이 가세'''했으며, 2000년 복귀한 서용빈도 2000시즌 하반기부터 기량을 회복하여 2001~2002년 2년 동안 쏠쏠한 활약을 하다가 군대에 가는 등 전력에 플러스 요인이 상당히 많았다. 이처럼 플러스 요인이 많았던 전력을 가지고 김성근은 LG에서 정규리그 6위(2001년)과 4위(2002년)를 기록했다. 노리타들은 정규시즌에서 이러한 부진을 모두 덮어둔 채 2002년 준우승만을 강조하며 "최하위권을 전전하던 LG를 일으켜 세워 준우승을 달성한 명장"으로 포장하곤 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직후 한 LG팬의 인터뷰 발언에서 당시 컨텐더팀이었던 LG 트윈스의 자부심과 큰 경기에 약하다는 김성근 감독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드러나고 있다.
김성근 재임 2년간 LG 타선은 매우 컨디션이 좋은 상태였다. LG는 선수협 사태의 반사이익으로 손혁 + 현금을 지불하는 대신 전성기의 양준혁을 해태에서 얻어왔다. LG에서 첫해인 2000시즌에 양준혁은 선수협 파동으로 인한 훈련 부족과 잠실 적응 등의 문제로 시즌초 1할대를 전전하는 극도의 부진을 겪었다. 그러나 시즌 중반에 타격감을 회복한 양준혁은 이듬해 김성근이 부임한 2001시즌 맹활약하며 리그 타율 1위를 찍었다. 'LG 삼총사' 중 김재현, 유지현은 김성근 시절 기록상 커리어하이를 찍는 등 기량이 만개했던 시절이었다. 서용빈 또한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과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등 연이은 사건사고로 오랜 공백 끝에 2000년에 가까스로 복귀한 후 군 입대 직전인 2001~2002년 두 시즌 동안은 전성기 만큼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활약은 했었다. 2002년 입단한 대형 신인 박용택은 입단 직후 하루에 공을 500개씩 던지라는 김성근의 무리한 훈련 방식에 이의를 제기했다가 김성근에게 찍혀서[36] 스프링캠프에서 중도에 짐을 싸서 귀국해야 했고 시즌 시작 후 첫 약 한달간을 2군에서 썩는 굴욕을 맞봐야 했으나, 1군으로 올라온 후 시즌이 끝날때까지 풀타임으로 출장하면서 3할에 육박하는 기록을 내며 팀에 크게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박용택은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MVP까지 차지하는 맹활약을 펼쳤고 덕분에 그동안 번번히 준플이나 플레이오프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던 김성근은 프로감독생활 18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병규 역시 김성근 부임 이전부터 3년 연속 안타왕에 오르는 등 맹활약을 했었다. 이처럼 김성근 재임 2년간 LG 타선은 신바람 야구의 대명사인 삼총사가 절정의 타격감을 보인데다가, 안타제조기 이병규와 리그 최고의 타격을 자랑하던 양준혁이 가세하는 등 4강권에 꾸준히 들던 전임 감독들 보다 더 좋은 상태였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체제 2년간 LG가 중위권(2002년) 내지는 하위권(2001년)을 전전했던 것은 김성근의 번트 위주의 스몰볼 야구와 마구잡이식 투수기용의 실패에 주원인이 있었다."나는 김성근 감독이 이번에 팀을 코리안시리즈에 올려놓은 것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고 보지 않는다. '''한번도 코리안시리즈에 진출해보지 못한 김성근 감독이 트윈스라는 팀을 만났기 때문에 준우승까지 할 수 있었던 것'''" "우리는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다"
LG 트윈스는 2001시즌에도 '''무난하게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것'''이라는 언론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무난하게 4강에 들 것이라는 언론 평가와 달리 2001시즌 시작과 함께 LG 트윈스는 최악의 부진을 보였다. 시즌 시작 열흘만인 4월17일 프런트는 특단의 조치로 이광은 감독의 10여년 선배인 김성근 2군 감독을 1군 수석코치로 임명하고 감독의 고유권한인 투수 운용 전권을 이광은 감독에게서 빼앗아 김성근 수석코치에게 위임했다. 이로써 LG 트윈스는 이광은 감독-김성근 수석 코치의 '1팀 2체제'가 한달간 지속되었다. 결국 5월 16일 이광은 감독이 경질되고, 김성근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임명되어 남은 98경기를 이끌었다. LG 트윈스는 그해 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37] 감독팬들은 시즌 초 이광은 재임 시절에 워낙 망쳐놓은 것(9승1무25패)이 크다곤 하지만, 첫 10경기를 제외하고 김성근이 투수 운용 전권을 가지고 한달간 '1팀 2체제'팀을 이끌며 오히려 이광은보다 큰 실권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이당시 저조한 승률에 김성근의 책임도 적지 않다. 훗날 노리타들은 2001시즌 LG가 4위 한화 이글스와 겨우 1경기 차이로 6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무척 강조하면서 포스트시즌에 아깝게 탈락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그해 LG는 꼴지였던 롯데 자이언츠와도 1경기차였다(...).[38] 8월까진 한화-KIA를 사정권에 두고 4위에 도전했지만 9월 중반까지 급추락하여 4위에서 멀어져 꼴찌가 된 상황에서 마지막 8경기 중 7승을 거둬 겨우겨우 꼴찌를 면한 것이다.
신윤호 혹사 문제는 당시에도 크게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김성근의 팬덤은 입단해서 7년동안 아무 활약도 없어서 곧 잘릴 예정이었던 신윤호가 그 때의 활약 덕분에 이후로도 프로에서 7년 더 연봉을 받고 살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고, 일리가 있는게 신윤호는 90년대 중후반부터 몇 차례나 숙소를 이탈해서 각종 사고를 치는 등 멘탈킹으로 명성을 떨쳤다. 결국 구단조차 포기했고 신윤호가 프로 밥을 계속 먹을 수 있었던 것은 김성근의 중용 덕분이 맞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혹사가 정당화 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2002시즌을 앞두고 감독대행 꼬리표를 때고 정식으로 감독이 되었다. 정식 감독이 된 김성근은 그해 겨울 혹독한 동계 지옥훈련을 시키며 선수들을 조련했다. 2002시즌을 앞두고 언론은 김성근의 LG 트윈스를 '''우승에 도전하는 팀'''으로 평가했다. 김성근 감독은 가능한한 빨리 70승을 달성하겠다며 거창하게 2002 시즌을 시작했으나, 정작 시즌이 시작되자 초반에 극심한 부진을 겪으며 최하위를 기록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때 경질설에 시달릴 정도의 위기를 겪었지만 여름부터 반등에 성공하면서 막판에 두산 베어스를 제치고 극적으로 4위를 기록하여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한다. 이후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를 통과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그러나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2승4패로 준우승에 머물고 만다. 참고로 김성근 통산 커리어에서 포스트시즌에서 2개 라운드를 통과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동안 포스트시즌만 나가면 번번히 광탈하여 포스트시즌에 약한 새가슴 감독이라는 오명을 들었지만, 2002년 포스트시즌은 이러한 불명예를 처음으로 극복했던 시리즈였다. 이후 SK 감독 시절에 한국시리즈를 연속으로 재패하면서 이런 이미지를 완전히 걷어내게 된다.
김성근은 훗날 자신의 언플과는 달리 당시 LG의 비교적 좋은 전력을 가지고도 정규시즌에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김성근이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던 주원인 중 하나는 외국인 용병 선수들과의 마찰이었다. 이미 쌍방울 시절인 99년 감독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외국인 용병을 맞이했던 김성근은 마이클 앤더슨, 제이크 비아노과 이해하기 힘든 기싸움을 펼치며 결국 최하위 8위를 전전했던 바 있다. 이후 LG 감독대행이 되면서 두번째로 외국인 용병을 거느리게 된 김성근은 역시 외국인 용병들과 숱한 트러블을 일으켰다. LG 감독대행 시절인 2001년 LG의 외국인 용병 타자는 댄 로마이어였다. 그는 이미 한화에서 외국인 선수 시즌 최다 홈런 기록를 기록하며 당시 역대 최고의 용병 중 한명으로 꼽히던 선수였다. 댄 로마이어는 베테랑 선수로서의 책임감과 팀에 대한 애착이 강한 선수로, 어린 선수들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기를 좋아하는 용병이었다. 그러한 로마이어를 두고 김성근 감대는 용병이 감히 주제넘게 코칭스태프의 권한에 월권행위를 한다면서 그를 퇴출시켰다. 시즌 전반기가 지나기도 전에 팀타점 1위 용병을 퇴출시키면서 그렇지 않아도 하위권을 전전하던 팀 전력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다만 로마이어는 당시 타점은 많았지만 성적이 전년도에 비해서 떨어진 상태였다. OPS가 0.821로 0.912를 기록했던 전년도에 비해서 타격성적이 확연히 한급 가라앉은 상태였고, 클래식으로 봐도 타율이 3푼 가량 떨어져 있었고 홈런도 시즌 절반가량 지난 시점에서 11개로 모든 면에서 성적이 한화 시절보다 한급 떨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코칭스태프의 눈에 났으니 퇴출이 전혀 이해가 안 가는 상황까지는 아니었다. 애초에 이전 한화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도 이 오지랖 문제로 짤려서 LG로 오게 된 것이다. 무리하게 시즌 도중 로마이어를 짜른 것은 실책일지도 모르나, 당시 로마이어의 행위는 한국야구 정서에서 굳이 김성근이 아니더라도 이해받기는 힘든 것이었다.
데니 해리거는 2000년 LG에서 17승을 거두며 팀내 WAR 1위를 차지했던 LG의 에이스였다. 그러나 2001시즌 들어 감독대행이 된 김성근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해리거가 시즌 초 부진하자 김성근은 그를 퀵후크 강판시켰고 이에 자존심이 상한 해리거는 덕아웃에서 글러브를 던졌다. 이에 김성근은 팀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해리거에게 2군행을 지시했고 구단측에 퇴출을 요구했다. 결국 퇴출되지는 않았지만 이후 해리거는 김성근 감독과의 트러블을 이어가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시즌이 끝나고 퇴출되었다. 물론 해리거의 부진은 김성근과의 마찰과는 별 관련이 없고, 전년도 126경기체제 하에서 225이닝을 먹으며 상당히 무리를 했기 때문에 퍼진 것이지 이걸 굳이 김성근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가 있고, 2군행도 본인의 잘못이다. 감독이 퀵후크를 했어도 그것은 감독의 권한이고, 미국이라고 퀵후크 하는 감독 없는것도 아닌데 덕아웃에서 글러브 집어던지면서 난동을 부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 이건 김성근이 아니라 다른 감독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2002년에도 김성근은 용병 투수 라벨로 만자니오와 갈등을 벌였다. 역시 시즌 중반 조기 강판되자 불만을 표출하며 항명을 하였고 김성근은 만자니오의 2군행을 지시했다. 그래도 만자니오는 포스트시즌에서 네 경기나 출전하여 활약하면서 준우승에게 크게 기여했다.
2002 시즌 종료 후 경질되었다. 김성근이 경질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가장 큰 원인은 김성근식 야구와 LG가 추구하던 야구관이 상충되었던 점이 꼽힌다. 번트와 잦은 투수 교체를 가져가는 극단적인 스몰볼 성향의 김성근식 야구는 '신바람 야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던 LG 트윈스의 야구관이 대척점에 있었다. 이에 대해 많은 팬들과 구단 관계자들이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구단주인 구본무 회장도 김성근 야구가 LG가 추구하는 야구와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직접 거론했을 정도다. LG 구단 프런트도 애초에 이런 문제점을 인식했기 때문에 2001 시즌 동안 끝끝내 김성근을 정식감독으로 승진시키지 않은 채 감독 대행의 신분으로 시즌을 마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2001 시즌이 끝나고 정식 감독으로 승진했지만 이내 사장과 단장이 바뀌고 말았다. 새로 부임한 어윤태 사장은 1994년 우승 당시 단장이었는데 LG 야구의 캐치프레이즈인 '신바람 야구'의 신봉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팀의 상징인 신바람 야구를 폄하하는 발언을 해가면서까지 번트 위주의 스몰 야구를 펼쳤던 김성근의 야구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 구단 수뇌부는 김성근의 지도력에 대해서도 신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성근은 2001 시즌 개막 후 열흘만에 급히 1군 수석코치로 임명되면서 구단으로 부터 투수 운용 전권을 부여받았고, 이어 한달 후에는 감독 대행이 되었다. 그러나 시즌을 6위로 마감했다.[39] 2002 시즌도 준우승으로 시즌이 마무리되긴 했지만 시즌 전반기 최하위를 전전하며 팬들을 크게 실망시켰고, 시즌 막판에 아슬아슬하게 4위를 차지하며 극적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만큼 구단 수뇌부에서는 김성근의 지도력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LG 트윈스는 김성근이 부임하기 전 8년 동안 7회 포스트시즌에 진출에 1회 우승과 2회 준우승을 거둔 강팀이었던 만큼 김성근 체제 하에서 2시즌 동안 거둔 성적표는 실패라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프런트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했던 LG 트윈스 구단의 특징과 프런트의 관여를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김성근 감독의 성향상 이들의 마찰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LG 프런트가 어윤태 - 유성민 체제로 바뀌고 난 후 프런트와 김성근의 마찰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프런트는 김성근을 정식 감독으로 앉힌 지 얼마 안 되어 방해 공작을 펼치는 등 슬슬 김성근 경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걸로 2001년 시즌 종료 후 FA가 된 양준혁을 안 잡고[40] 보상선수도 돈으로만 받은 것에서부터 시작, 신인 지명 역시 '''고영민, 조동찬''' 등을 거르고 실업 야구를 거쳐 상무에서 뛰고 있던 30대 코앞의 김우석을 2차 1라운드에서 지명하는 등 지명 삽질,[41] 외국인 선수 계약에 있어서 2001시즌 준수한 활약을 보인 투수들인 더그 린튼과 에프레인 발데스를 내보내고 은퇴를 준비하던 공갈포 톰 퀸란을 데려온 행동과 시즌 후에 당시 한화 이글스 감독이었던 이광환을 영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 등이 당시 김성근과 프런트의 대립을 보여주는 사례다.
2002년 말 김성근 경질설이 나돌자 과거 OB시절부터 구단주와 직접 독대해서 일을 풀어나가는 방식을 선호했던 김성근은 자신의 거취와 관련하여 구본무 구단주에게 직접 이야기하기 위해 구본무 회장의 개인 스케줄을 알아내어 골프장에 직접 찾아 가기도 했다. 그러나 구본무 구단주는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한 김성근의 돌발 행위를 매우 언짢아 했다는 후문이다.
이렇듯 김성근의 표면적인 해임 이유는 우승 실패였지만, 실제로는 2002시즌 초반 극도의 성적 부진, 팀의 이념과 상반되는 김성근의 극단적인 스몰볼 성향, 계속된 프런트와의 갈등, 구단주의 의향 등 여러 문제가 얽혀 있었다.
LG 팬들 역시 김성근에 대해 대체로 우호적이지 못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 특히 김성근의 번트 위주의 스몰 야구는 '신바람 야구'를 캐치프레이즈로 삼았던 골수 LG 팬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김성근이 기록한 6위, 4위라는 성적도 김성근 이전 8년 동안 최소한 4강 이상은 해줬던 LG 팬들에게는 성에 차지 않은 것이었다. 2002시즌 초 LG가 최하위권에서 머물자 김성근의 경질을 요구하는 팬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시즌 후반에 반등하여 치열한 4강 싸움을 벌였지만 여전히 팬들은 잠실구장에 현수막을 걸고 김성근의 해임을 요구했다. 그해 포스트시즌에서 팀이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거두었을 때도 많은 팬들은 감독 교체를을 원했다.
2002년 겨울 김성근이 해임되자 많은 LG팬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훗날 노리타들에 의해 상당히 윤색된 이야기들이다. 물론 실제 김성근을 지지했던 팬들도 있었으나, 김성근에 비판적인 팬들도 무척 많았다. 김성근의 해임 소식이 전해지자 팬들은 논쟁을 벌였고, 일부 팬들은 잠실 야구장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기사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항의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조차 '''김성근의 해임 자체는 찬성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굳이 시위에 나선 이유는 '''김성근을 경질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지만, 다만 갑작스런 '''경질 과정 자체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LG 할머니'라고 본인을 밝힌 심계순(72)씨는 "트윈스야구와 김성근식 야구는 맞지않는다. 김성근 감독은 트윈스의 '신바람야구'를 없애려 노력했다. 트윈스와 맞지않는 감독을 해임시키는 것은 당연"하다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나아가 적지 않은 수의 LG팬들은 LG의 6668587667 암흑기의 원인이 김성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김성근 시절인 2002년 드래프트에서 고영민, 조동찬을 거르고 김우석을 1라운드에서 지명하는 이해할 수 없는 신인 지명을 하여 비판을 받았는데, 결국 김성근 시절에 지명한 신인들은 다 전멸했다. 또 재일교포 출신 이일의, 김성근의 애제자였던 심성보 등 김성근 라인에 해당하는 선수들의 편파 기용 문제도 붉어졌다. 결정적으로 신윤호나 이동현 등 2001 ~ 2002년의 주축 투수진 혹사와 신인 박용택 등에게 무리한 훈련을 강요하여 어깨 부상을 입게 하는 등이 비밀번호의 근본적인 원인이 김성근 재임기간에 발생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동현의 경우 은퇴 기자회견에서 많은 팬들은 2002년 당시 너무 많이 던져서 수술을 하게 됐다고 하는데, 김성근 감독님이 나를 그만큼 기용해주셔셔 성공할 수 있었다며 김성근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기도 했다.'은퇴' 이동현, "김성근 감독님께 너무 감사드린다"이 발표문에는 분명 "'''김성근 해임과 관련하여 저희 8개 동호인연합회는 구단의 의사 결정을 존중하며 감독 해임을 절대 지지한다는 것을 밝혀 두고자 합니다'''"라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을 해석하면, 8개동호인연합회는 김성근 감독 해임에 대하여 절대적 찬성을 보낸다는 의견이 분명히 나와 있다. (중략) 8개동호인연합회 회원들은 "구단이 이번 김성근 감독 해임에 대해 감독에 대한 예우를 지키지 않은 부분은 질타를 받아 마땅하다"라고 입을 모았다. "우리는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후임으로 이광환 감독이 부임했으며 프런트는 처음부터 후임으로 이광환을 준비했었다는 OB 시절의 악연이 반복되었다는 것. 또한 이광환 감독 부임 후 OB와 LG는 각각 암흑기를 겪는다. 다만 이걸 이광환의 무능으로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데 실제로 꼬여가는 상황은 이광환이 아니라 김성근 본인이 있었어도 해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서용빈, 유지현, 이상훈, 김재현 등을 정리하려는 의도 등은 상당히 윗선에서 진행되었고 이게 실제로 드러난 2003년 7월부터 이광환 감독은 이를 반대하다 시즌 후 2군으로 좌천당하게 된다. 김성근 감독의 성향상 역시 이광환이 겪은 것과 마찬가지의 길을 걸었을 가능성이 99%이다.
이후 김성근은 강연에서 2002년 한국시리즈 뒷이야기를 자주했는데...
이 사실을 안 친김성근 LG 팬들은 뒷목을 잡았다고...[42]2002년도는 이건 여러분들이 심각하게 들어야 되는 문제라고 보는데,
LG가 8회초에 2점 놓고, 4점 리드했어요, 그때. 4점 리드면 이기는 거예요, 거의 다,
8회니까. 그런데 4점 들어온 다음에 내가 번트 지시를 했다고. 그럼 번트를 하면,
보내기 번트를 시켰는데 '''써드 코치가 사인을 놓쳐버렸어요.'''
근데 거기서 번트를 성공했다, 한 점 들어왔으면 세상의 비난 무지 받았을 거예요.
근데 내가 냈다고, 냈는데, 코치가 사인을 놓쳐버렸어요. 놓치는 순간에 졌다 싶었다고,
나는. 이건 거짓말이 아니고, 내가 직감이 왔다고, 졌다 싶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9회에 뒤집어졌잖아요. 그 문제는, 그게 나한테 좋은 경험이 됐는데,
그때 그 한국시리즈가. 한국시리즈는 우승하는 게 목표지, 준우승이 목표 아니에요.
6차전에서 지든, 5차전이 되든 그런 건 별 문제가 아니에요.
7차를 어떻게 이기냐 하는 문제였지. 그때 이상훈이라고 하는 피쳐가 클로져였는데,
이상훈이를 내가 6차전에 써버리면 7차전에 쓸 토막이 안돼요.
그럼 7차전 못 이기는 거예요.
물론 흐름이 있으니까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지만, 승부라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거기서 번트를 대면 이상훈이 안 쓰고 7차에 갔으면 가능성이 있은 거예요.
번트 하나 실패하니까 졌다 싶은 거예요
마, 그때는 아쉬움이라고 하는 것은 큰 역전패, 마지막에.
그리고 혼신의 힘이라고 하는 걸 아이들에게서 봤고,
그때는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코리안시리즈, 3단계를 올라왔으니까,
지칠 대로 지친 한없이 지친 상태였어도 애들은 잘했지 않나 싶은데,
'''내가 야구장에서 눈물을 흘린 게 그때가 처음이에요.'''
뒤에 기대가지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사장은 지니까 기분 좋아서 김감독 수고했어''', 그러더라고,
'''그리고 결국은 자르더라고요.'''
아무튼 LG와 안좋게 헤어진 김성근은 이후 인터뷰나 강연에서 LG 구단을 디스하는 발언을 많이 하고 있다.
박영태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때 시즌이 끝난 후 롯데의 코치진인 박영태와 양상문을 영입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한다. 실제로 양상문은 2002년 투수코치로 영입되어 '''팀 투수진 재건에 공헌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김성근~이광환 시기만 한정해서 양상문은 나름 능력자였다. LG 투수진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도 그가 롯데 감독으로 가면서부터였다. 이 둘을 영입하려던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구단 내 입지를 강화하려 했던 모양인데, LG에 있던 기간의 코칭 스탭들은 가토 하지메와 양상문, 이홍범, 이철성을 제외하면 구단과 연관이 있던 코치들이었다. 또한 연장선상으로 2002년 시즌 중 박정태와 임경완의 영입을 타진했었고[43] 실제로 성사 직전까지 갔으나 무산된 적이 있었다.
11. 출장 코치, 치바 롯데 마린스 인스트럭터
자서전에 적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김성근은 자신이 LG에서 경질된 후 일본으로 건너갈 때까지 2년 동안 해설위원을 하면서 지냈다고 언플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김성근은 발음 문제 때문에 1979년에 동양방송에서 잠깐 해설을 하다가 잘린 이후 방송국에 소속된 정식 해설가로 활동해 본 적이 없고 다만 올림픽 때 임시로 해설을 맡은 적이 있었다. 이때는 2명의 해설진이 함께 했기 때문에 발음 문제를 다소 해결할 수 있었다. 올림픽 때 해설을 한 것을 가지고 노리타들은 저 언플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올림픽 때 '''2주간 몇 경기 해설을 한 것을 가지고 2년 동안 해설위원으로 일했다고 말한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노티타들의 주장이야말로 사실 왜곡이다."LG 감독에서 물러났을 때부터 SK 감독으로 다시 부임하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다. '''첫 2년은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 김성근 자서전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p.205
실제로 김성근은 2002시즌이 끝나고 LG 트윈스에서 해임된 후 2년 동안 주로 ‘'''출장 코치'''’ 알바 생활을 하며 지냈다. LG 감독에서 해임된 후 출장 코치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LG 감독에서 경질된 이듬해인 2003년 이영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성근 본인이 직접 밝힌 내용이다.
사실 출장 코치 알바 자체가 주로 비시즌 기간에 며칠 혹은 몇 주 간 맡게 되는 임시직이기 때문에 2년이라는 기간 동안 실제 인스트럭터로 일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며, 대부분의 시간은 백수로 지냈을 것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말이다. 본래 누군가의 이야기를 할 땐 해당 인물의 체면을 고려해 가장 그럴듯한 직함으로 해당 인물을 소개해 주는 것이 사회관례이다. 대표적으로 야구판에서는 감독에서 경질된 야인을 언론 인터뷰 때에는 '전 OO팀 감독' 등으로 보기좋게 소개해 주는 것과, 현재 백수라도 뭐 하고 있냐 물으면 '취업준비생' '취업 준비하고 있다' '공부하고 있다' 등으로 적당히 보기좋게 둘러대는 것은 일상적인 것이다.김성근 전 LG 감독(61)의 요즘 ‘직업’은 ‘'''출장 코치'''’다. 초등학교서부터 대학, 동호인팀에 이르기까지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제주도는 물론 일본, 방콕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도 자비를 들여 다녀온다.'''
김성근이 2년여 동안의 출장 코치 알바를 청산하게 된 것은 2005년 일본의 퍼시픽 리그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활약하던 이승엽의 전담 코치가 되면서 부터였다. 그런데 사실 인스트럭터 일 자체가 처음에는 그동안 김성근이 해오던 출장 코치 알바의 연장선상이었다.
당시 이승엽은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였으며, 일본 잔류와 국내 복귀를 놓고 고민하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이승엽은 의사소통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 치바 롯데의 바비 발렌타인 감독과 타격 코치 모두 미국인이었다. 때문에 이승엽의 담당 통역이 한국어를 일본어로, 타격 코치 담당 통역이 일본어를 영어로 바꿔 얘기했다. 그런데 담당 통역이 제 역할을 못해서 이승엽의 불만이 많았다.
결국 이승엽은 이런 의사소통, 즉 통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단에 요청해 김성근을 개인 전담 인스트럭터로 영입했던 것이었다. # 코치 대우로 주된 업무는 통역과 이승엽 본인의 멘탈관리, 훈련파트너 등이었다. [44] 당시 통역 문제와 일본프로야구계에서 문화적인 차이 등으로 고충이 많았던 이승엽은 한국어와 일본어에 모두 능통하면서 일본야구판에 대해서 해박한 사람을 찾았고 그 적임자로 김성근을 선택했던 것이다. 재일교포 출신 김성근은 한국에서는 일본 야구에 가장 정통하고 일본야구계와 인맥도 많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도 해서, 일본 야구인들이 함부로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반영되었을 것이다."의사소통 과정이 복잡했다. 그때 '''한국인 코치'''가 있었으면 싶었다"
- 이승엽
일본프로야구에서는 코치선발시 선수시절 및 코치 커리어를 매우 중요시하는데[45] , 상식적으로 자국보다 야구수준이 처지는 나라 인물에게 야구 코치를 한번에 정식으로 줄 리는 만무하다. 김성근의 일본야구 경험은 야구 비명문고인 가쓰라고 야구부 뿐이었고, 프로는 커녕 대학-실업야구 경력도 없는데다가, 일본에서 리틀야구팀 지도자도 한적이 없는데 그런 김성근이 비정규 코치나마 한번에 치바롯데의 코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승엽 덕택이 크다. 자기포장의 달인인 김성근 본인 조차도 이승엽이 없었다면 지바 롯데에 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이승엽의 의사소통 문제 때문에 고용되었던 만큼 김성근의 역할은 통역이 우선이었고, 그외에 이승엽의 훈련 보조를 해주는 정도였다. 타격 지도는 거의 하지 않았다. 자기 포장의 달인인 김성근 조차 '''이승엽에게 기술적인 지도는 거의 하지 않았다'''고 털어 놓았다.
그래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하술하듯 이승엽과 김성근의 일화 중 김성근이 직접 타격을 지도하는 것은 1군 코치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카메라에 김성근이 와서 잠바를 걸어 놓으면 거기에 이승엽이 와서 훈련을 했다는 일화가 있기 때문. '거의'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약간은 했다는 말이기도 하고. 기술적인 지도라기보다는 그냥 타격훈련시 공을 던져주는 훈련 보조를 하면서 폼이 무너지면 적당히 짚어주는 훈수 정도의 코칭이라고 부르기에도 안 부르기에도 애매한 그런 것이었겠지만, 아무 지도도 안 했으면 구단에서 제지해서 굳이 잠바로 카메라를 가려가면서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리그 우승 당시 중계 영상. 1분 5초~10초 쯤에 잠깐 얼굴이 나온다.
일본시리즈 우승 당시 중계 영상. 2분 22초 전후 쯤에 이승엽과 서로 부퉁겨안는 장면이 나온다.
나중에 김성근이 몰락하고 많은 야구인들이 김성근에 대한 지지 멘트를 철회했지만, 이승엽만큼은 이후에도 김성근을 챙기는 발언을 두어번 하여 논란이 된 적이다. 이를 두고 잔존한 노리타들은 "거봐라 이승엽은 아직도 김성근을 존경한다고 말하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헌데 위의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김성근과 이승엽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결코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피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였다. 김성근 언론플레이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김성근은 자신의 고용주에게는 무척 깍뜻하고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아첨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다. 물론 이는 비난할 일은 아니다. 처세를 잘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기에. 김성근이 비난받는 것은 대중들에게는 자신은 구단주에게 아첨할 시간도 없다고 언플해 놓고선 뒤에서는 구단주의 스케줄을 낱낱히 파악해가면서까지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어쨌든 그렇게 고용주의 심기를 잘 맞춰주는 김성근을 고용했던 이승엽만큼은 김성근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승엽이 팀내에서도 워낙 몸값이 있던 용병 선수였던 만큼 이승엽이 김성근과 함께 구단 훈련장에서 훈련하는 것에 대해 당시 치바 롯데 구단 측에서도 적당히 눈감아줬다.
이전 버전에서는 김성근이 등번호가 없는 유니폼을 입었다느니, 개인 통역에 불과했다느니 하는 거짓 음해가 쓰여있었는데, 분명 첫 해부터 구단으로부터 등번호 90번을 받았다. 당시 치바 롯데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 페이지 아카이브 김성근의 직함은 '팀 코디네이터' 로 이승엽이 사비로 고용한 것이 아니라, 이승엽이 구단에 요청해서 구단에서 채용한 직원이었다. 거물 용병이었던 이승엽의 전담 코디네이터로 일본측 소개에 따르면 코치 대우. 이만수의 화이트삭스 시절 불펜캐쳐와 비슷하며, 인스트럭터는 이른바 비정규 코치로 국내 구단에서도 주로 외국 야구 지도자들을 전지훈련 때 등 임시로 몇개월간 봉급을 주고 고용하는 형색으로 국내 구단에서도 꽤 많이 채용하고 있다. 하는 일은 다르고 1년 내내 채용했다는 점이 다르지만 일반적인 인스트럭터가 계약직이라면 김성근은 이승엽 계약기간 내의 무기계약직 코치같은 느낌으로 채용된 것.
결론적으로 채용 과정에 있어서 이승엽의 낙하산이라는 비판이나, 인스트럭터를 코치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비판은 가능할지언정, 그가 이승엽 개인고용 통역사네 하는 것은 거짓이고 분명 첫해부터 구단에 고용된 코칭스태프는 맞았다. 노리타가 미운 건 알겠는데 거짓말은 하지 않도록 하자.
12. 치바 롯데 마린즈 순회코치
지도자 생활하면서 외국에서 활동한 건 이 때가 처음이다. 뿐만 아니라 '''KBO출신으로서 NPB팀의 정식 코치가 된 최초의 사례.''' 이전까지 김성근의 일본 야구 경력은 약 석달 정도 사회인야구팀에서 뛴 것이 전부였다. 흔히 일본 사회인야구 하면 떠오르는 회사등록팀은 아니고, 업무시간에 업무를 다 보았다고 하는 등의 언급을 볼 때 클럽팀이다. 이 클럽팀은 일본 사회인 2부리그 같은 개념으로 진짜 한국의 실업야구와 거의 일치하는 회사등록팀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동호회인 쿠사야큐팀은 또 아니고, 일본야구연맹에 정식 등록된 팀으로 도시대항전에 나가기도 하며 이런 팀에서도 프로지명이 꽤 나온다. 소프트뱅크 마무리 모리 유이토 등. 애초에 진짜 돈 안받는 아마추어인 직장인 동호인 팀은 연식야구를 한다. 여러 증언과 시대상황상 수준은 높지 않았던 것 같지만 어쨌든 이런 팀에 소속되어 있으면 일본 야구 등록선수는 맞다.
여튼 김성근은 이승엽이 뛰던 2005년 시즌에는 치바 롯데의 정식 코치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팀 코디네이터로, 선수의 기술적 부분을 지도할 권한은 없는 비정규 코치였다. 치바 롯데의 정식 코치로 발령난건 이승엽이 퇴단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후인 2006시즌 1년 간이었다. 이때 받은 직함도 1~2군 순회코치(인스트럭터)이라는 임시직이었을 뿐 타격코치나 투수코치, 주루코치와 같은 정규코치는 아니었다.[46] 치바 롯데 구단의 발표에 따르면 1,2군을 돌아다니며 유망주를 발굴, 육성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직책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2군에서 선수들에 조언하는 역할에 그치는 제한된 보직이었다. 다만 이 이승엽 전담 인스트럭터로 일하던 2005년 롯데가 구단 역사상 31년 만의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게 되는데, 이때 1군 선수진 사이에서 함께 우승의 기쁨을 누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김성근이 자랑스럽게 말한 니시오카 츠요시를 죽탱이 날려서 교육시켰다는 둥의 일화는 일본 코치-선수문화로 볼때 신빙성이 있다. 당장 오가타 감독이 선수 싸대기 날려서 여론악화로 경질된 것이 불과 2019년이다. 하물며 10년도 더 전에야 말해서 무엇하랴.
일본 코치들은 한국처럼 코치-선수가 사제 관계로 엮이는것이 아니고, 현역 때 200승을 하든 3000안타를 쳤든지 간에 아무리 스타출신 코치라도 선수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는 간섭하는 것이 금기시되는데, 2, 3군은 다르다. 기술적으로 완성된 취급을 하는 1군과는 달리 2군과 3군은 코칭스탭이 먼저 지도를 해주기도 하며, 애초에 롯데가 김성근을 아예 정식 코치로 고용한 것도 김성근의 이런 선수의 세세한 폼을 눈여겨보고 작은 문제점들을 잘 짚는 점을 높이 샀기 때문에 주로 2군 선수들 원포인트 코칭을 해주라고 정식 코치로 승격시킨 것이다. 또한 이런 지도 과정 등에서의 폭력은 어느정도 용인되는 경향이 있다. 그게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런 문화가 만연했기에 김성근이 니시오카를 때렸다는 이야기가 신빙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다. 뭐가 잘났다고 남 때렸다는 거짓말을 하겠는가? 타케하라 나오타카나 오마츠 쇼이츠처럼 선수 본인이 김성근과 매일같이 특타를 했다고 먼저 밝히는 경우도 있고, 그런 이유에서인지 이 둘, 특히 오마츠 쇼이츠는 2019년까지도 김성근을 존경한다고 밝혔다.
여한튼 김성근의 자서전에 따르면 치바 롯데 시절 보고 느낀 것을 통해 완전히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김성근으로 변신했다고 주장한다. 체계적인 일본의 프로야구 시스템을 통해 시야가 확장되었으며, 메이저리그 1000승 감독인 바비 발렌타인의 지도법을 보고 아구관이 넓어져 그 여파로 엄청난 양의 공부를 소화했다고 한다. 2007년 SK 감독으로 부임하고 난지 얼마 안 돼서의 인터뷰를 보면 '''바비 발렌타인을 자신의 제2의 야구 인생을 알게해준 고마운 스승으로 생각'''한다고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지도자로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는 눈을 갖게 되었고, 수많은 야구 전문서적과 재활의학서적까지 독파하게 된다. 당시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냐면 하도 오래 앉아있는 바람에 치질이 생겨 오랜기간 고생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일본에서의 시간은 김성근을 선진적인 지도자로 변신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 전까지는 약팀을 강팀으로 만드는 능력은 있으나 우승까지는 힘든 감독 정도였지만, 이 때의 체험을 통해 완전히 다른 지도철학을 보여주게 되었다고 그와 그의 팬들은 주장했다.
사실 이말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김성근 한국에서 일본야구통으로 행세해왔지만 실제로 김성근은 일본에서 제대로 야구를 배워본 적이 없었다. 일본 프로야구 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고교시절에도 전문적인 선수를 길러내는 사립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여 공립학교에 다니며 강가에서 돌멩이를 던지며 훈련했던 것이 거의 전부였다.[47] 사실 '''김성근이 유일하게 제대로 야구 교육을 받은 것은 부산 동아대에서였다.'''
언론과 팬들에게 보다 열린 마음으로 대한다든가, 매일 타순을 변화무쌍하게 조정한다든가. 훈련방식도 위의 태평양 돌핀스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무조건 많이 굴리면 장땡이라는 사상에서 벗어나, 선수 개개인의 강약을 분석하고 부족한 부분을 효율적으로 보강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분석해서 접근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언론과 팬에 대한 자세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자세히 보면, 이후 SK 와이번스 부임시절 김성근 감독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 못지 않게 긍정적인 기사도 많이 쏟아지는 편인데, 팀의 호성적과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언론플레이와 자서전 등을 간행하면서 자신의 팬기자들[48] 을 양성한 덕분이다.
다음은 당시 상황을 회상한 내용이다.
'''"LG 감독에서 물러났을 때부터 SK 감독으로 다시 부임하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다. 첫 2년은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매 경기 꼼꼼하게 메모하면서 양 팀의 경기를 정리했다. 신기한 것은 내가 경기 '안'에 있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바깥'에 있자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다. 큰 변화였다. 야구를 보는 시각이 확장됐다. 시야가 넓어지니 여유가 생겼다. 더 큰 단계의 승리를 염두에 둘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지바 롯데 코치 생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메이저리그 1000승 감독인 바비 발렌타인 감독을 만난 일이다. 그는 한국의 감독들과는 달랐다. 내가 놀란 것은 야구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는 경기장에서 자기감정 표현에 무척이나 솔직했다. 워낙에 튀는 발언과 다양한 표정으로 메이저리그에서도 유명했던 사람이다. 지바 롯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그의 표현방식이 지나친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는 진지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가 가진 긍정적인 에너지가 놀라웠고 그것이 팀의 분위기를 바꿨다. 모든 선수들이 인사를 잘 했고 밝고 활기찬 분위기에서 훈련을 했다. 결코 훈련이나 경기 운영이 대충대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할 것은 제대로 지키면서 활력있는 플레이가 펼쳐졌다. 나중에는 나도 적응해서 팀의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상술한 내용은 김성근 자서전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챕터 4, 205페이지에서 발췌하였다. 언플과 자기 미화의 달인 김성근의 자서전인 만큼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이미 첫 문장인 2년 동안 해설위원을 했다는 말부터가 거짓말이다. 위에도 나와 있지만 그 2년 동안 김성근은 정식으로 방송국에 해설위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없고, 출장 코치 알바를 하면서 야인 생활을 했다.'''"언젠가부터 시야가 좁아지면서 많은 것을 놓친 것이 아닐까, 반성하게 되었고 야인으로 지낸 5년의 세월이 나를 가르쳤다....나는 야구를 즐기는 방법을 배웠고, 야구장 안에서는 냉철했지만 그 밖에서의 생활에는 여유가 생겼다. 청바지도 즐겨 입게 되었으며 원정 경기를 가면 청바지에 모자를 쓰고 MP3 플레이어의 이어폰을 귀에 꽂고 걷기도 하게 되었다...난 이때 비로소 야구가 '생활'에서 '인생'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성찰이 있고 끊임없는 배움이 있고 더 넓은 시야, 세계 야구라는 큰 틀에서 일본 야구, 한국 야구, 아시아 야구를 생각하게 되었다."'''
김성근은 이때 선진야구를 현장에서 접하면서 기존의 야구관에 칼을 대고 더욱 발전했다고 자평했지만, 실상은 김성근은 일본에서 돌아온 후에도 언론플레이와 팬서비스로 경기장 밖에 자신의 편을 만드는 법[49] 을 배운 것 외에 야구적인 측면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발렌타인 감독 역시 인맥이나 언론 플레이 능력이 뛰어난 반면 신인 육성에는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가 말년에 추락을 거듭했는데 현재 김성근 야구도 답습하고 있다.
13. SK 와이번스 감독
2007년에 SK 와이번스의 감독에 취임한다. 인천에서의 정착을 위해 결국 필요한 것은 '''성적'''이라는 점을 깨달은 SK 쪽에서 과감하게 영입했다고 한다. 사실 김성근 자신의 회고로는 "이래가지고 어떻게 야구하냐"는 말이 이만수 수석코치 입에서 나왔을만큼, 팀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50] 하지만 SK는 해체된 쌍방울의 안습한 전력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전임 조범현 감독이 단기간에 팀을 추스려 창단 4년차인 2003년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삼성과 KIA를 연속으로 스윕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비록 준우승에 그쳤으나 당시 최강팀이었던 현대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간 바 있고, 2005년에도 3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51] 2006년에도 4강 후보였으나 선발진 붕괴와 용병 문제로 탈락하는 등 당시 상위권 전력을 갖춘 팀이었다. 그러나 이런 선수들의 기본 전력만 믿고 방심하거나, 다소 느슨하게 플레이하는 것을 다잡고, 선수들을 조련해서 더 나은 기본기와 많은 연습량을 통해 수비력과 기동력의 향상을 이끌어낸 것은 김성근 감독의 공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최정, 정근우, 김강민 등의 유망주들을 국가대표급 선수로 성장시킨 것은 김성근 감독의 조련이 큰 역할을 했다...고 그의 팬덤들은 주장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많다. 이들은 이미 김성근이 감독이 되기 전부터 이미 정상급의 기량을 보이며 SK의 확고한 주전선수로 자리잡은 상태였다. 때문에 굳이 공을 묻자면 '''조범현 감독이 키웠다'''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52] 물론 젊은 선수들이었던 만큼 김성근 감독 시절에 기량이 더욱 향상된 것은 사실이다. 어쨌거나 2015년 한화 이글스에 부임한 후 보여줬듯이 '''김성근은 선수를 키우지 못한다'''. '''SK 시절에도 김성근이 키운 선수는 아무도 없다'''.[53] 그의 사생팬들이 김성근이 키웠다고 주장하는 김광현은 사실 고교 3학년 시절인 2006 쿠바 청소년 세계선수권에서 MVP를 받으며 그 기량을 세계에서 인정받은 선수였다. 그는 데뷔 전부터 류현진과 같은 활약이 확실히 된 괴물 신인이었다. 이 외에도 김성근이 선수를 키우지 못한다는 비판은 SK 시절에도 많이 제기되었다. 이런 주장이 제기될 때 마다 그의 팬덤들은 SK 스카우터가 무능해서 김성근 감독님이 키울 신인을 발굴해 내지 못했다면서 스카우터에게 화살을 돌렸다. 어쨌거나 김성근 재임기간 동안 신인선수들이 발굴되지 못한 관계로 SK 선수층의 노령화가 심각했고, 김성근이 SK에서 경질되던 시점인 2011년 중반 김광현과 최정이 각각 투수조와 야수조 막내였다(...)
어쨌든 강훈련과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원숙해진 투수 운용을 바탕으로 2007년 정규리그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구단 최초이자 김성근 감독 생애 최초로 한국시리즈 우승이자 통합 우승을 경험하게 된다.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다니엘 리오스의 투구를 앞세운 두산에게 초반에는 고전했지만,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2패 후, 4연승이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역전 우승에 성공했다. 4차전의 선발 김광현과 시즌 내내 부진했던 김재현, 가을동화 전설을 쓰기 시작하는 조동화의 활약이 빛났던 경기.
김성근 감독의 야구가 막강하다는 평을 들은 것은 2008년이었다. 시즌초 로이스터의 롯데가 돌풍을 일으키며 선두를 질주하자, 잘나가던 로이스터 감독에게 시비를 걸며 도발하기도 했지만, 이내 롯데가 3위권으로 내려오고, 이후 SK는 남은 정규시즌 내내 독주하면서 선두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2008년 2위 두산과의 승차는 무려 '''13게임'''. 126경기 기준으로 최다승인 83승을 기록하면서 역대급 강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도 다시 두산을 만나 1차전을 내줬지만, 내리 4경기를 잡으면서 우승. 다만, 김성근 감독 자신이 소망하는 아시안시리즈에서는 일본시리즈 우승팀인 세이부 라이온즈에게는 승리했지만 어이없게도 대만의 퉁이 라이온즈에게 참패하면서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2009년에는 시즌 전 이진영의 LG 트윈스 이적, 시즌에 들어서면서 박경완, 송은범, 김광현이 부상으로 이탈하고, 채병용이 부상에 시달리는 등, 온갖 악재 속에서 8월 한 때 3위까지 밀려났지만, 후반기 막판 20경기에서 기록한 성적이 '''20전 19승 1무'''. 19연승을 기록하며 프로야구 최다 연승 기록을 세우면서, 우승 매직넘버 단계에 있던 KIA 타이거즈를 '''턱밑까지 추격하여''' 1위 KIA와 반게임도 되지 않은 승률차이로 정규시즌 2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PO에서도 두산에게 먼저 2패를 당했지만, 내리 3연승을 기록하면서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한국시리즈에서는 KIA와 7차전까지 가는 사투를 벌인 끝에 결국 끝내기 홈런으로 패배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이때 SK 와이번스 선수단은 채병용 등 선수생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혹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투혼을 보여줬다. 참고로 정규시즌 19연승 기록은 이듬해까지 이어지면서 총 22연승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2010년에 채병용, 윤길현이 군입대를 했지만, 에이스 김광현의 복귀와 정우람, 이승호, 전병두, 고효준의 강력한 좌완 불펜(스윙맨)을 앞세워 시즌 내내 선두를 지키고 정규시즌 우승에 성공. 이어 삼성 라이온즈 상대로 4전 전승으로 완승을 거두면서 3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팀 통산 세 번째 우승 및, 개인 통산 세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이로써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해태와 타이기록) 기록을 세웠다. 또한 '''인천예수'''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 시기.
이전까지 김성근 감독은 포스트시즌에서 유독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큰 경기에서 약한 감독이라는 평이 있었는데, 2002 LG의 준우승으로 이런 평가를 어느 정도 불식시키더니 '2007, 2008, 2010년의 SK의 우승으로 새가슴 감독이라는 평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2011년 시즌 김광현, 송은범의 부상으로 인한 부진, 뛰어난 외국인 투수영입에 실패했음에도 그의 쌍방울 시절을 연상케 하는 스윙맨을 최대한 활용하는 투수운용으로 시즌초 선두권을 달렸지만 전병두 등 계투진의 혹사 여파와 정상호, 박경완의 부상으로 프로 입단후 포수경험이 거의 없던 최동수를 지속적으로 포수로 기용하는 극단적인 용병술이 실패하면서 7월에는 결국 3위로 떨어진다. 게다가 시즌 중 재계약 문제로 프런트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2011년 8월 17일 이번 시즌까지만 하고 SK 감독직을 그만 두겠다고 공개 발언을 하였다. 계약 만료 시즌에 스스로 시즌 중 재계약 거부 선언을 하는건 매우 이례적인 일. 관련기사.그리고 다음날인 8월 18일에 바로 '''구단에서 경질되었다.'''. 본인 말로는 감독 인생 동안 '''12'''번 째 해임...
당연히 야구계와 SK팬들은 뒤집어졌다. 일각에서는 이만수 2군 감독을 차기 감독으로 밀려는 SK그룹 상층부의 태도와 거듭된 간보기에 질려서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폭탄선언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2007년 SK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부터 프런트에서 그의 사단도 아니며 원하지도 않은 이만수를 수석코치로 부임시켰고, 타 팀 감독의 계약기간이 3년인데 반해 2년 단기 계약을 맺었으며, 2007 시즌 초 홈구장 만원사례 따른 팀의 간판인 것처럼 대규모 팬티 퍼포먼스를 벌인 것을 볼 때, 프런트의 의도에 따른 2년 후 차기감독이 이만수인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상 외로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2연속 우승을 하며 최고의 성과를 거뒀고 그에 따라 2009년 3년 재계약을 하였고 구단 내 김성근 감독의 영향력도 커지게 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재계약 후 2009 시즌 준우승, 2010 시즌도 1위를 질주하는 시즌 중반 이만수 당시 수석코치를 2군 감독으로 보내고 프런트와 마찰을 빚으면서 이를 차기 재계약을 위한 이만수 코치에 대한 견재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54] 재계약 후 당시 구단 사장의 막걸리 야구 발언이나 김성근 감독의 이진영 등 FA 유출과 소극적인 영입태도에 대한 구단에 불만을 나타내며 프런트와 감독간 파워게임을 하는 듯한 이상기류가 흘렀다.
2011 시즌 직전 넥센 히어로즈 김성근 감독처럼 계약 마지막 해였던 김시진 당시 넥센 감독과 일찌감치 2014년까지 3년 재계약을 맺었고[55] 김성근 감독은 언론에 이 사례를 들면서 언론 인터뷰를 통해 '''프런트측에 계약 종료 전 재계약을 압박했는데''' 프런트는 공식적으로는 시즌 및 계약종료 후 재계약 결정[56] 한다고 했지만 재계약을 위해 김성근 감독과 만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만수 2군 감독의 양해문제 등 재계약 협상과정에서도 갈등이 불거져 김성근 감독은 이 과정을 언론을 통해 불만을 터뜨렸고# 2011년 8월 17일 SK와이번스와 재계약 포기선언을 하며 구단측에 불만을 터뜨렸다.#
호성적의 최소한의 척도인 포스트시즌 진출 경력이 없는 김시진 감독의 재계약을 생각하면 감독 부임 기간에 우승 3회, 준우승 1회를 거둔 김성근 감독의 계약 종료 전 재계약 요구는 정당해 보이나, 연봉 미계약 선수는 훈련 분위기를 해친다며 스프링캠프 제외할 정도로 팀워크를 중시하면서 본인 계약에 관한 갈등은 시즌 중에 언론에 지속적으로 흘리면서 팀분위기를 어수선하게 하는 내로남불적 행태를 보였다. 프런트 측도 김응용, 선동열, 김인식 감독의 장기부임한 감독들의 재계약 사례를 보면 계약종료 후 재계약은 했어도 계약 마지막해 내부적인 계약여부 결정 및 언론 발표가 있었던 것을 볼 때 계약에 대한 모호한 태도는 매끄럽지 못한 일처리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어쨌든, 이러한 김성근의 재계약 포기 발언 다음 날, SK 프런트는 김성근 감독을 전격 경질하고 이만수 2군 감독을 감독대행으로 임명해 남은 시즌을 꾸려가겠다고 발표했다. 그래도 올해까지는 김성근 감독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나아가 김성근 감독이 마음을 돌려 재계약 할지도 모른다고 희미하게나마 기대했던 감독팬들은 '''프런트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게다가 경질 통보를 '''문학구장'''에서 받았다는 기사까지 떴다!!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문학구장에 출근한 순간 해고통지를 받고 짐을 챙겨 경기장을 떠나야 했다고 한다. 김성근 감독의 아들이자 같은 팀 김정준 코치의 말에 따르면, 김감독은 재계약 포기선언을 한 날 밤에 머리를 짧게 깎고 와서 "앞으로 남은 경기는 잘 치러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강성 감독팬들의 분노는 문학구장 소요 사태로 이어지게 되고 나아가서는 이만수 감독과 프런트에 대한 비토 여론으로 발전하고, 김성근 감독만의 악성 팬덤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경질 상황을 김성근 감독의 입장에서 요약한 박노준의 칼럼이 있다. 김성근 감독 경질 왜?
게다가 김성근 전 감독과 SK 프런트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이유에 대해서 김성근 전 감독 입장에서의 인터뷰에서 나오면서 아마도 SK 프런트의 수뇌부가 건재한 이상, 김성근 감독이 SK 와이번스로 재부임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SK 와이번스와 후임 이만수 감독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난을 하면서# 국내외 타 프로구단과의 계약을 의식하는 행보를 보였으나 좌절되고[57] 후술하는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 감독으로 부임한다.
과거 김성근 감독이 나간 후 OB와 LG는 암흑기를 걸었는데, SK는 김 감독이 2011 시즌 중간에 나간 후 4위까지 쳐졌지만 이만수 감독대행 아래에서 그 해 준우승을 했다. 이만수가 정식 감독이 된 2012 시즌에도 준우승을 차지하였지만, 이후 2013, 2014년에는 각각 6위와 5위를 기록하며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고, 이만수 감독은 계약만료로 팀을 떠났다. 이는 김성근 감독과 후임 감독간의 지도력 격차 때문인지 김성근 감독의 본인 부임시 성적 최우선의 투수혹사와 2군 황폐화, 근시안적 선수 운용에 따른 부작용 때문인지 논란이 있었다. 사실 논란 자체가 팬덤파워에 불과하다. 기록상으로 보면 부임시 뛰던 주력 투수들이 모조리 실종된 상태임이 금방 드러난다.[58] 이전에는 전자의 의견이 우세하였으나 김성근 감독이 2015년 한화 이글스에 부임 후 보인 행태로 인해 후자가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하여튼 여기까지는 여러가지 논란이 있으나 명장이라는 말에는 부정할 수 없는 실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타팀 팬들도 SK를 강하기는 하지만 너무 노잼야구, 쪼잔한 야구라서 꼴보기 싫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었다. 어쨌거나, 강팀을 운영하는 명장이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했었다.
현재 SK 와이번스 팬들의 김성근 감독에 대한 감정은 "전병두 등 과도 있지만 어쨌든 SK 왕조라는 좋은 추억을 안겨준 고마운 감독."정도다. 단 이들은 현재 한화를 맡고있는 김성근 감독에 대해선 비판적인 입장.
14.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 감독
이후 2011년 12월 5일 고양 원더스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독립리그 팀 감독을 맡은 감독은 그가 처음이다. 고양 원더스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이 있긴 하지만,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여러 선수들을 프로구단으로 진출시키고 5할 이상의 승률을 유지하는 등 활약을 펼쳤다.
프로에서 방출되거나 미지명된 선수들로 호성적을 거두면서 높은 평가를 받은 데다가 각종 자서전 출간과 그를 미화한 프로파간다 영화 개봉으로 소외받은 약자들의 편에서 재기를 돕는 존경받는 사회적 리더로 이미지 메이킹하여 그의 개인팬층을 확산되고, 정치권 등에서 그와 사진찍기 위해 찾아오거나, 리더십 강연 요청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청와대에서도 강연을 하고 강연 수익으로 인한 세금만 수 억원을 납부할 정도.
하지만 실상은 상술하였듯이 고양 원더스 부임 전과 부임 후에도 늘 국내외 프로구단 감독으로 부임을 노리고 있었고, 재능기부 및 봉사로 비춰진 세간의 인식과 달리 고양 원더스에서도 '''연봉 2억원에 기사 딸린 외제 관용차량 지원''', 자신의 사단코치 대부분 기용할 수 있어 프로구단 감독 수준의 대접을 받고 일했다. 게다가 데럴 마데이 등 외국인 투수 5명이 전체 시즌 경기이닝의 대부분을 맡은 것이 밝혀지며 긍정적으로만 비춰지던 그의 고양 원더스 시절이 재평가되었다. 승리와 감독 개인의 명예에 집착해서 독립야구단 본연의 창단목적인 육성을 도외시한 승부 중심의 운영을 했다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승리 집착이야 선수들이 승리하는 만큼 다른 구단 눈에 띄고 다시 프로에 입성할 확률이 높아지니[59] 그것까지는 넘어갈수 있다 치더라도.. 도저히 그 넘어갈 수준에서 끝나는게 아니란게 문제 2014시즌 원더스 주요 외국인 등판일지[60]
2012년 8월 27일 한화 이글스 한대화 감독이 경질되면서 언론과 한화 팬들 사이에 하마평에 오르내리기도 했고 실제로 기사도 많이 터져나왔으나, 8월 29일에 고양 원더스와 2년 재계약을 맺으면서 이 하마평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정확히는 한화 이글스에서 감독제의가 왔었고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김승연 회장의 아들이 직접 모셔오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이에 김성근 본인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지만 김성근 본인의 요구사항 중 하나가 한대화 감독을 시즌 끝까지 유임해달라는 것이 였는데 한화 프런트가 이를 어긴 탓에 무산되고, 결국 고양 원더스에 잔류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김성근 본인의 주장. 하지만 한대화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김성근과 한대화의 악연을 생각하면 그냥 김성근의 언플일 가능성이 높다. [61] 2015년에 한화 감독에 부임하여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이 때 이 발언도 재평가 되고 있다.
2014년, 이 상황이 다른 팀에서 다시 또 반복되었다. 그러나 LG의 경우는 상극이 될 가능성이 있는데, 이미 한번 좋지 않게 떠난데다 경험 많은 베테랑과 수비를 중시하는 김성근의 성향상 2군을 폭격 중인 팀 내 유망주들의 1군 정착에는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4년 8월 28일 고양 원더스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계약이 종료되었다.(자동재생 주의) 벌써부터 주목을 받는중. 9월 11일 고양 원더스의 해체가 발표되었다.
김성근 감독의 13번째 감독 생활은 이렇게 끝나고만다. 김성근 감독 본인은 경질과 야인 생활의 반복이 익숙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런트와 마찰없이 팀이 통채로 와해되어서 감독직을 내려 놓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한다. 쌍방울의 경우는 와해 단계까지 왔지만 그 전에 명목상 경질이다. 그리고 10월 25일 고양원더스 해체 한달여 만에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부임한다.
위에서 언급한 과도한 외국인 투수 운용은 물론 프로로 간 선수들이 거의 대부분 살아남지 못하면서 고양 원더스는 안 좋은 의미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15. 한화 이글스 감독
'''이건 야구가 아니다 - 고바야시 세이지'''
15.1. 2014년
김성근/2014년 문서 참조.
15.2. 2015년
김성근/2015년 문서 참조.
15.3. 2016년
김성근/2016년 문서 참조.
15.4. 2017년
아무래도 계약 끝날때까지 계속할 모양.이었으나. 이날 저녁 상반된 기사가 나왔다.. 경질될지 그룹에 재신임받아 17년에도 한화 감독을 맡을지는 한화 구단측에서 공식적으로 입장을 내놓지 않아 불명이었으나...
11월 3일 공식적으로 유임이 확정되었다. 한화, 김성근 감독 유임 공식 발표.. '박종훈 신임단장 부임'
5월 23일, 감독직 사의 기사가 발표되었다.
또 지저분하게 뒷처리를 하고 사라지는 모양새다. 발단은 이 짧디짧은 속보에서 시작되었다. 구단과 감독 본인의 입장이 기사마다 다르다. 구단이 자신을 떠밀어냈다는 투의 어디서 많이 본 기사가 떴다. 누가 썼겠는가, 당연히 이들이 해당 기사마다 세력 과시 중이다. 애초에 경질이었다면 내부 회의에, 수석코치에게 눈 앞에 닥친 경기를 부탁하다시피 하다가 거절 당하고, 경질된 감독의 소재를 파악하기까지 했겠는가? 거의 장강훈의 기사에 대략의 토막이 입맛에 맞게 녹아있다. 결국 한화 프런트만 나쁜 놈이 되었다.
한화의 눈물겨운 타협시도를 다룬 기사.
또 다시 이렇게 극단적으로 끝냈다. 애초 장강훈의 지원 사격인 경질기사가 오인 사격으로 김성근을 끝장 낸 셈. 사실 김성근은 그 동안 프론트를 협박할 때 사퇴쇼를 자주 벌였던 사람이다. 그리고, 경질 배경은 바로 구단주가 '''한화 이글스의 그 간 성적을 보고, 대노해서 전격 경질을 결정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2017년 문서 참조.
16.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고문
2018년 시즌 소프트뱅크의 '코치 고문'으로 영입되었다. 일단 구단에서 정식으로 영입한 것은 맞지만, 정식 '''지도자 직책은 아니다'''. 보통 고문, 자문, 인스트럭터, 코디네이터 등은 지도자 경력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삼성 구단이 김한수로 감독을 교체할 때 전임 감독인 류중일에게 고문 직책을 주었지만 일반적으로 이것을 지도자 경력에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김성근 본인 또한 삼성 감독에서 경질되었을 때 이와 비슷한 직책에 앉은 적이 있었다. 김성근 경질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당시 삼성 구단은 김성근에게 '총감독'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하지만 아무도 총감독을 김성근의 지도자 경력으로 보지 않는다.
일단 소프트뱅크의 구단주이자 재일교포의 정신적 지주인 손정의 회장의 의중이 크게 작용한 것을 알려졌다. 자신의 정체성을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재일교포라고 규정한 바 있는 손정의 회장은 자신이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일본에서 차별받으며 살고 있는 재일교포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을 정도로 재일교포 사회에 큰 애정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손정의 회장은 재일교포로서 모국으로 돌아가 가장 성공한 인물인 김성근을 상당히 상징적인 인물로 보고 있으며 그의 의중에 따라 소프트뱅크에 고문이라는 자리를 만들어 영입했다는 것.
소프트뱅크 현지에서 김성근은 주로 3군 코치들에게 조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선수 지도 권한은 없다'''. 선수들에게 직접 조언을 건네는 것은 금지사항이다. 시즌 초 김성근이 2~3군 선수에게 직접 조언을 했다가 소프트뱅크 프런트로부터 제지당한 바 있다. #
2020년부터는 1군 코치 고문으로 승격됐다. 호크스의 쿠도 키미야스 감독이 김성근과 많은 얘기를 해보고 싶다고 요청했다고. 사실 2019년 시즌 말부터 1군 훈련에 동행하는 등 기미가 보였다.
일단 현재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김성근의 야구관과는 정반대의 야구 이념을 가지고 있는 팀이다. 김성근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선수들의 웨이트 트레이닝에 극도로 부정적인 것으로 유명했고 이 때문에 선수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 야구 스타일-웨이트 트레이닝 경시 항목 참조. 하지만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김성근의 철학과 정반대로 일본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팀으로 유명하다. 모든 선수들에게 개인 웨이트 트레이너가 있을 정도로 웨이트 트레이닝에 집착하는 팀이다. 다르빗슈는 소프트뱅크가 10년째 일본을 평정하고 있는 이유가 다름 아닌 웨이트 트레이닝 덕분이며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한 피지컬의 힘으로 타 팀을 압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르빗슈 자신도 신인 시절부터 소프트뱅크 원정 갈 때마다 호크스 웨이트룸에 찾아가 코치들에게 비결을 전수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소프트뱅크 팀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현재의 자신은 절대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2018년 이후 문서 참조.
17. 역대 감독 성적
시즌 종료 후 쌍방울은 김성근 경질 당시와 똑같은 0.224의 승률로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77]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를 통과한 것이 이 해의 일이다.[78] 경질 당시[79] 경질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