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평가와 영향력

 




1. 인지도
2. 음악적 영향
3. 정치적, 사회적 영향
4. 기타 영향
6. 비틀즈의 각종 기록들
7. 후대 및 선대 음악가들의 비틀즈에 대한 평가
8. 비틀즈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음악가들
9. 기타


1. 인지도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밴드'''이다. 마이클 잭슨과 더불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아티스트이며, 존 레논은 여기에 예수보다 비틀즈가 더 유명하다라는 말을 해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영국에서는 비틀즈를 가장 대표적인 문화 산업으로 띄워주고 있다. 프레디 머큐리, 반지의 제왕, 닥터 후, 프리미어 리그, 해리포터와 함께 영국 문화중 가장 유명한 상징 중 하나로 꼽힌다. 러브 액츄얼리에서도 영국 총리로 분한 휴 그랜트비틀즈를 영국의 대표적인 문화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2. 음악적 영향


  • 한 줄로 요약하면 초기 로큰롤에서 다채로운 록 음악으로의 진화에 기여하여 후대의 거의 모든 장르의 대중음악에 영향을 끼쳤다. 척 베리와 같은 아티스트들이 로큰롤이라는 신생 장르를 개척하고, 엘비스 프레슬리는 이를 세계적 주류 대중문화로 끌어올렸다. 이어서 등장한 비틀즈는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과 철학적인 가사, 앨범 전체의 통일적 구성, 타 장르와의 크로스오버, 예술성과 대중성의 조화 등을 통해 이성과의 연애를 주로 노래하던 로큰롤을 보다 다양하고 풍요로운 장르로 발전시킨 장본인이다. 이러한 성취는 록 음악의 각종 하위 장르들을 비롯해 대중음악의 여러 장르들의 탄생과 발전에 기여하고 영향을 주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로큰롤이라는 한 갈래 장르에서 포크 록, 사이키델릭 록, 쟁글 팝, 파워 팝, 프로그레시브 록, 브라스 록, 바로크 팝 등의 탄생에 직접적이고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 한 두 가지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하고 다채로운 사운드를 실험하고 융합했다. 심지어 화이트 앨범 단 한 장의 앨범만 봐도 로큰롤, 록, 팝, 하드록, 발라드, 사이키델릭, 블루스, 프로그레시브, 포크, 재즈, 컨트리, 스카[1], 펑크, 자장가, 헤비메탈, 아방가르드까지 이 모든 장르가 한 앨범에 들어있다.[2] 이 중 상당수는 그 당시엔 아직 해당 장르가 채 생기기도 전이었다.
  • 대중음악의 판도를 작곡가, 작사가, 연주자, 가수가 각각 따로 있는게 전형적이었던 기존의 시스템에서, 스스로 자작곡을 만들고 연주와 노래까지 자체적으로 다 하는 "록밴드"가 대중음악계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또한 록 음악이 대중음악의 주 장르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이후 1980년대 마이클 잭슨의 등장으로 "팝 음악"이 전성기를 맞이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 침체되어 있었던 로큰롤의 부활과 대중화, 세계화, 그리고 더 나아가 새로운 록 음악으로의 발전과 확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전까지 로큰롤에 대한 인식은 철없는 어린애들이나 듣는 시시한 유행가라는 인식 정도였다. 게다가 비틀즈가 등장하던 시점은 미국에서 기존 로큰롤 뮤지션들이 이런저런 사건/사고들과 새로운 아이디어의 부재 등으로 인해 활동을 멈춘지 수 년째 되던 상태였기 때문에 로큰롤은 한때(50년대 중, 후반) 반짝했다가 생명력이 이미 다 해버린 철 지난 장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3]. 그러던 중 비틀즈가 등장하여 대대적인 로큰롤 음악 열풍을 일으키며 많은 젊은이들이 다시 로큰롤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별도의 작곡자와 세션맨을 고용하지 않고도 열정과 재능만 있으면 돈 없는 청년들도 도전할 수 있는 음악이라는 인식을 주면서 수많은 로큰롤 밴드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게 됐고, 이런 많은 록밴드들이 생기면서 이후 다채로운 록 음악 르네상스가 열리게 된다. 또한 이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밑발판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 어떤 곡도 싱글로 발표되지 않은 Rubber Soul은 대중음악계에서 앨범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 된 최초의 사례로 여겨지며, 싱글 위주였던 기존 록 음악계를 앨범 위주의 작품 활동으로 판도를 바꿔놓았다. 비치보이스, 롤링 스톤스, 더 후, 킹크스, 버즈 등의 다른 주요 뮤지션들에게도 영향과 자극을 줘서 그 밴드들도 앨범 위주의 명반을 만들기 시작한 계기이자 기폭제가 되었다.
  •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앨범 중 하나인 페퍼상사콘셉트 앨범의 토대를 제시했으며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초로도 평가받는다. 히피 문화와 사이키델릭 록은 이 영향을 받아 1960년대 후반에 정점을 이루었다.
  • 이렇게 창작과 감상을 모두 "앨범" 위주로 바꿔놓으면서 록 음악계에서 앨범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강조한 비틀즈는 앨범의 커버아트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앨범 커버도 단순히 껍데기 표지가 아닌 하나의 예술이 되도록 한 것. 또한 앨범 커버에 전곡의 가사를 수록하는 시도를 처음 하였고, 대중음악의 문학적 성격을 고양시켰다.
  • "I Feel Fine"에서 역사상 최초로 '피드백' 전기기타 연주를 시도하였다. 또한, WahWah 페달의 이펙트를 앨범 녹음에 사용한 시도도 최초 세대이며, VOX사로 하여금 (당시로서는) 초고용량인 앰프를 제작하여 제공하게 한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다. 관객들의 함성과 비명으로 연주자가 자신의 연주를 들을 수 없는 최초 사례였기에 더 강한 앰프를 개발해야만 했으며, 음악 전장 회사들은 비틀즈에게 많은 프로토타입들을 제공하였다. VOX사의 특정 앰프 모델은 비틀즈 때문에 모델명에 Beatle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기도 했다.
  • "Norwegian Wood"에서는 최초로 인도 악기인 시타르를 도입하였고, 이후 시타르는 다른 록뮤지션들도 널리 사용하게 된다. 후에 "Love You To"에서도 사용되며 라가 록의 탄생에 기여했다.
  • 테이프 역회전을 사용한 사이키델릭한 사운드 실험 기법(백마스킹)을 싱글 "Rain"과 Revolver의 수록곡들에서 록 음악 사상 최초로 사용하였다.
  • "Think for Yourself"는 최초로 퍼즈 베이스(Fuzz Bass)[4]를 사용한 곡 중 하나이다.[5]
  • 1969년 1월의 옥상 공연은 기습적으로 대중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공연, 즉 게릴라 콘서트의 시초이다.
  • 전성기 시절, 미국 음반 시장의 약 40%를 차지하였고, 음반에 예술성을 부여하면서 음반 시장을 대형 산업화하고, 다차원화 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 최초로 야외 대형 스타디움 경기장에서 록 공연을 한 것도 비틀즈가 시초이다. 이후 다른 밴드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따라하면서 이런 스타디움 라이브 공연이 일반화 되었다.
  • 음악과 영상을 결합한 뮤직 비디오도 비틀즈가 최초로 시도한 것이다.[6]
  • 스쿨밴드에서 기존 곡들을 카피하며 연습 → 정식 록밴드 결성 → 소규모 클럽에서 공연하며 실력을 기르고, 카피곡에서 점차 자작곡으로 전환 → 데모 테잎에 곡들을 녹음해서 레코드 레이블에 오디션 → 데뷰 → 성공한 뒤 독자적인 레이블 설립. 비틀즈가 밟아온 이런 행로는 고스란히 롤모델화 되어 이후 모든 록밴드들의 전형적인 행로 패턴으로 정착된다.
  • 현악 4중주가 도입된 "Yesterday"는 팝 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이 커버된 곡으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곡 중의 하나로도 인정되었다.
  • 록을 기존의 로큰롤에서 여러 다양한 하위 분파가 존재하는 상위 음악이 되도록 만드는데 공헌했다. "Helter Skelter"는 헤비 메탈의 시조격인 곡으로 여겨지고 있고, "Everybody's Got Something to Hide Except Me and My Monkey"는 펑크 록의 원조격인 곡들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는 게 대표적 예.
  • 이런 이유들 때문에 기존의 "로큰롤"을 "록 음악"으로 발전, 확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존재로 평가받는다.[7]
  • 비틀즈가 직접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존 레논이 같은 부분을 겹치게 두 번이나 녹음하는 것(더블 트래킹)에 싫증이 나, 당시 레코딩 엔지니어인 켄 타운젠드가 ADT(Automatic Double Tracking) 기법을 발명했고, 이는 비틀즈의 정규 7집 Revolver과 그 후의 작품 뿐만 아니라, 다른 아티스트들도 이를 사용하게 되었다. 예로 핑크 플로이드의 데뷔 앨범과 지미 헨드릭스의 전 음반들.
  • 후대 밴드들중에서도 비틀즈의 영향을 받은 밴드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1990년대 브릿팝을 선구했던 밴드 오아시스가 있다. 밴드 보컬인 리암 갤러거는 자신의 집을 조지 해리슨이 살던 집 바로 옆에 지은 것은 물론, 머리 스타일과 안경까지 존 레논에 맞췄을 정도였다. 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였던 프레디 머큐리 역시 비틀즈의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을 동경하여 자신의 집에 조지 해리슨의 포스터를 붙여놓았다고 한다. 미국 펑크 록을 상징하는 밴드인 라몬즈의 경우, 아예 밴드 이름을 폴 매카트니가 함부르크 시절 쓰던 가명인 폴 라몬에서 따왔다. 비치 보이스브라이언 윌슨은 비틀즈의 음반에 자극을 받아 SMiLE 앨범을 제작했다. 러시아 록음악의 전설인 빅토르 초이 역시 존 레논의 광팬이었다.

3. 정치적, 사회적 영향


  •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에 큰 영향을 준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현대 역사가들과 소련에서 업무를 봤던 미국 스파이들은 모두 비틀즈가 냉전의 주된 요소인 사회주의와 제국주의[8]의 싸움이 덧 없음을 소련 사람들에게 일깨웠으며, 특히 소련 젊은이들에게는 보수적인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반항 정신을 키웠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무엇보다 소련인들에게 적으로 생각했던 1세계 국가에서도 아름다운 노래를 만드는 훌륭한 사람들이 문화의 주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줬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영국이나 미국은 저런 자유로운 음악 문화가 발전했는데, 소련은 왜 못하는가'라는 사고로까지 발전했다는 것.
  • LSD를 비롯한 마약의 대중화에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크게 기여했다. 비틀즈 이전까지만 해도 의약 용도나 극소수의 오락 용도로 쓰였던 마약류가 대중들에게 널리 퍼진것은 비틀즈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를 비롯한 마약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곡들의 영향이 컸다. 특히나 Rubber Soul 앨범은 마약의 영향을 받은 사이키델릭 정서를 대중들에게 널리 퍼트렸다고 평가받고 있다.
  • 종교적으로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 국가의 세속주의화에 영향을 미쳤다. 조지 해리슨힌두교로 개종한것과,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무신론자였던 점이 서구 기독교 사회에는 다소 파급적으로 다가왔다. 이에 반발해 이스라엘에서는 비틀즈의 공연을 취소시키고, 미국 남부 일부 지역에서는 비틀즈의 앨범을 불태우기도 했지만, 비틀즈로부터 시작된 세속주의, 반기독교 정신이 퍼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존 레논의 예수 발언은 꽤나 유명하다.
  • 히피 문화의 선구자였으며, 히피 하면 생각나는 긴 머리 역시 비틀즈의 긴 머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히피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반보수주의, 반체제, 아나키즘, LSD 등이 비틀즈에게서 가장 영향을 받았다. All You Need Is Love의 경우 사랑의 여름에서 히피 문화의 상징 곡으로 지정될 정도로 파급력 있는 노래였다. 히피 문화 외의 사회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으로 68 혁명이 있으며, 프라하의 봄에도 영향을 끼쳤다. 프라하의 봄 당시 체코 시민들은 공산당 보수파에 대항하는 의미로 Hey Jude를 국가처럼 부르고 다녔다. 한국에서도 존 레논은 아직까지도 아나키즘의 상징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진다.
  • 종합적으로 봤을때, 그 이전까지 철 없는 20대들의 일탈(평화주의, 여성주의, 아나키즘, 반 기독교 등)이라고 여겨지던 것들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밴드의 표방 이념이 되어, 철 없던 일탈에서 당당한 주류 사회 문화의 일종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 비틀즈의 사회적, 정치적 의의라고 할 수 있다.

4. 기타 영향


  • 1960년대 영국 정부의 세입에 큰 도움을 줬다. 비틀즈가 1960년대 세금으로 낸 수익금의 비율은 무려 96%(...)였다. 그리고 현재 비틀즈의 멤버중 하나였던 폴 매카트니의 재산은 한화 약 1조 5천억원이다. 조지 해리슨은 존이나 폴보다 받는 돈도 적은데 세금으로 다 뜯어간다고 이를 불평하는 곡인 Taxman을 작곡하기도 했다.
  • 비틀즈 멤버들이 LSD를 흡입한채 각본도 없이 즉흥적으로 연출한 영화 Magical Mystery Tour는 당대에는 극도로 혼란스러운 영화라며 혹평을 받았지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전위 예술 영화의 가장 훌륭한 형태라며 영화 학도 시절 이 영화를 보고 전위 예술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다며 호평했다.
  • 바가지 머리 역시 비틀즈가 크게 유행시킨 것이다.
  • 리버풀 경제에 크게 기여했다. 1980년대 마거릿 대처의 정책으로 영국의 디트로이트라고 불릴정도로 위상이 추락했던 리버풀은 비틀즈 관련 관광 사업을 여러개 유치해 문화 관광도시로의 다시 태어났다. 이러한 적극적인 도시 재생 정책의 결과, 리버풀은 현재 경제 성장률이 영국에서 가장 높은 도시이다. 이런 점이 고마웠던지 리버풀 시청 앞에는 비틀즈 멤버들의 동상이 있으며, 공항 이름도 "리버풀 존 레논 공항"일 정도이다. 2006년 리버풀 시의회에서는 노예 상인들의 이름을 딴 거리의 이름을 바꾸는 안건을 통과시켰는데, 유일하게 페니 레인 거리만 제외되기도 했다. 가난한 노동 계급에서 출발해 최정상급 아티스트가 된 비틀즈 멤버들은 리버풀 시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5. 비틀매니아


오아시스 같은 거의 숭배자 비슷한 수준의 비틀매니아는 물론 마이클 잭슨이나 라몬즈 같은 전혀 상관 없을 것 같은 음악가들조차 비틀즈에서 크던 작던 영향을 받았다. 오죽하면 한국 인터넷에서 떠다니는 말이 '''비틀즈는 갤주들의 갤주들이다'''일 정도. 자세한 사항 및 비틀매니아들의 목록은 항목 참조.

6. 비틀즈의 각종 기록들


  •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다. EMI에 따르면 2001년까지 10억 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산되었고 '베스트셀링 그룹'으로 기네스에 기록되었다. 영국에서 가장 많은 싱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9]
  • 가장 많은 빌보드 차트 1위 곡을 보유한 아티스트(20곡)[10] 등 수많은 타이틀을 갖고 있다.
  • 빌보드 차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11]
  • 미국 앨범 판매량 1위 - RIAA 확정치 1억 7800만 장.
  • 가장 많이 커버된 곡 - Yesterday. 1965년 8월 6일 발표된 이후 1986년 1월 1일까지 약 1600가지 버전으로 커버되었다. 2014년 2월 CBS News 보도 자료에 의하면 3천 명 이상의 아티스트가 커버했다 한다.
  • 가장 빨리 팔린 앨범 - 1 앨범이 2000년 11월 13일 발매 이후, 발매 첫 한 달 동안 1350만 장이 팔리며 발매 첫 한 달 가장 빨리 팔린 앨범이 되었다.
  • 최다 빌보드 차트 1위 곡/앨범 - 빌보드 Hot 100에서 총 20곡[12]을 1위에 올렸고 빌보드 200에서는 19개의 앨범이 1위를 차지했다.
  • 최다 UK 차트 1위 앨범 - 15개의 앨범을 1위에 올렸다. 싱글 차트에서는 17곡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두 번째 기록.
  • 한 해 최다 빌보드 1위 - 6개(1964년). 참고로 2위도 비틀즈로 5개(1965년)이다.
  • 빌보드 최장기간 1위 - 총 113 주 (약 2년 2개월)
  • 미국 내 최다 다이아몬드 인증 앨범[13] 보유 - 6장
  • 연속 기록들 - 영국 싱글 차트 연속 1위(11곡),[14] 영국 크리스마스 싱글 최다(3년, The Spice Girls와 동률이다. 빌보드 1위 3회 연속[15]
  • 동시 기록들 - 빌보드 차트 싱글/앨범 동시 기록(7개, U2와 The Monkees와 동률), 빌보드차트 Hot 100 동시기록(14곡), 빌보드 Hot 100 1~5위와 앨범 차트 1, 2위 동시 차지
+ 1964년 싱글 레코드 중 비틀즈 싱글 판매 비율 : 약 60%
  • 공연 횟수 : 캐번 클럽 (294회), BBC (275회)
  • 가장 성공한 듀오 - 레논-매카트니 문서 참고.
  • UK 차트에서 가장 오랜 텀을 두고 다시 1위에 오른 앨범 - Abbey Road. (49년 252일만에 1위 탈환.)

7. 후대 및 선대 음악가들의 비틀즈에 대한 평가


'''"역사상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록 아티스트로, 대중음악의 새로운 길을 열어준 밴드다."'''

AllMusic

'''"비틀즈의 사운드는 바흐의 푸가에 필적한다. 여러 가지 의미로 비틀즈는 금세기 최고의 작곡가다. 그들은 20세기의 슈베르트헨델이라 할 수 있다. 베토벤이 20세기에 태어났다면 비틀즈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레너드 번스타인

'''"음악에는 3B가 있다. 바흐, 베토벤, 그리고 비틀즈."'''

레너드 번스타인

'''"비틀즈는 대중음악과 진정한 음악의 위대한 개척자다."'''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슈베르트의 작품에 필적하는 곡."'''

― 노엘 로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She's Leaving Home을 평가하며

'''비틀즈는 대중 음악에서 어떤 주제, 어떤 음악적 아이디어든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롤링 스톤

아마, 이들보다 인기 있고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다른 밴드는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음악에서 승리했다.'''

Rate Your Music#

'''"이미 비틀즈가 오선지에서 가능한 모든 좋은 멜로디를 다 뺏어갔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좋은 멜로디가 나올 수 없다."'''

신해철. 과거 넥스트의 표절 논란을 해명하며.[16]

'''"비틀즈는 좋은 곡을 썼느냐를 결정하는 준거점이다. 그들의 곡을 참고하면 단순한 팝에서 보다 복잡한 음악으로 진화하는 데 걸린 시간을 따져볼 수도 있다."'''

노엘 갤러거

'''"영향력과 예술적 업적 측면에서 비틀스는 피카소, 헤밍웨이와 나란히 랭크될 것이다."'''

― 마크 허츠가드

''''비틀즈에게서 세월의 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들의 음악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은 불로(不老) 불사(不死) 불패(不敗)의 그룹이다.''''

임진모

'(생략) 비틀즈의 종말과 함께 1960년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하여 질문은 이어진다. 왜 그들이었나? 왜 델 섀넌이나 포 시즌스나 비치 보이스가 아닌 비틀즈였나? 이것은 어리석은 질문처럼 보이지만 적절한 것이기도 하다. 단 하나의 대답은 그들이 문자 그대로 ''''기적''''과도 같은 존재였다는 점이다.'

― 밥 스탠리, 저서 모던 팝 스토리 중에서

'''"200년 전에는 모차르트, 바흐의 음악을 들었겠지만 앞으로 200년 후의 사람들은 비틀즈의 음악을 듣게 될 것이다."'''

폴 매카트니

  • 그들의 등장은 20세기의 가장 큰 문화적 사건 중의 하나였고, 각종 사회적 현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1999년 타임지에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말론 브란도, 찰리 채플린, 파블로 피카소, 밥 딜런 등과 함께 선정되었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비틀즈를 "우리 시대의 슈베르트(the Schuberts of our time)"라고 칭하며 그들의 음악이 슈만의 음악보다 뛰어나다고 했고, 대중 음악을 클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며 대중 음악이 재평가받게 된 것이 비틀즈의 공헌이라고 했다. 로버트 그린필드는 "대중음악계에서 아무도 이보다 더 혁신적이고 창조적일 수 없을 거"라며 그들을 피카소와 비교했다.
  • 음악 평론가 임진모는 비틀즈의 의의을 이렇게 요약했다. - "비틀즈가 '20세기의 문화유산'으로 역사를 두텁게 장식하는 이유는 예술성을 낳은 창조적 무한 열정 때문이다. 그들은 성공 공식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향해 치열하게 달려갔다. 끊임없이 창의적인 음악, 새로운 음악, 대안의 음악을 찾아 아낌없이 실험하고 탐구했다. 비틀즈가 현재 진행형 뮤지션으로 지금도 살아있는 것은 그들의 음악 혁명 때문이다. 자기 혁신을 통해 음악 세상의 혁명을 이룩한 것이다. 비틀즈의 동의어는 음악 혁명이다."
  • 각종 매체의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아티스트' 류의 리스트에서 대부분 최상위에 위치해 있다.
  • '역대 최고의 명반' 리스트들에서도 비틀즈의 앨범들이 가장 많이 포함된다. 평론가들이 선정하든, 여러 뮤지션들에게 설문조사한 결과로 선정하든, 해외 음악팬들의 설문/투표에 의해 선정하든 다 마찬가지다. 그리고 비틀즈는 이렇게 여러 앨범들이 두루 명반으로 꼽히기 때문에 여러 비틀즈 앨범들에게 표가 고루 분산됨에도 불구하고 1위도 비틀즈의 앨범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8. 비틀즈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음악가들


  • 오아시스 멤버 전원 (특히 노엘 갤러거, 리암 갤러거) : 히트곡 이름과 멜로디도 비틀즈에서 따왔고, 리암의 경우 2000년대 초반에 아예 존 레논 코스프레를 했을 정도로 자타공인의 비틀매니아다. 리암 갤러거의 집도 조지 해리슨 바로 옆에 지은 것이다. Wonderwall부터 Don't Look Back In Anger까지 거의 대부분의 히트곡을 비틀즈존 레논에서 따온걸보면 단순한 팬도 아니고 그냥 아예 숭배자 수준으로 보이기도... 참고로 밴드 이름도 비틀즈맨체스터에서 처음으로 라이브 공연을 한 클럽 '오아시스'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다(...)
  • 픽시즈 : 스스로 비틀즈에게서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며 비틀즈를 칭찬한 바 있다. Wild Honey Pie를 커버하기도 했다.
  • 탠저린 드림 : 밴드 이름을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따왔다.
  • 에드 시런 :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팝 아티스트를 폴 매카트니라고 종종 말했다. 아예 어쿠스틱 기타로 폴경 앞에서 In My Life를 시연하기도.# 비틀즈 영화인 예스터데이에서도 본인 역으로 출연한걸 보면 비틀매니아인것이 확실해보인다.
  • 프레디 머큐리 : 종종 존 레논을 우상으로 삼으며 그를 찬양하는 말을 남기곤 했으며, 대학교 시절에는 기숙사에 조지 해리슨의 포스터를 붙여놓았을 정도였다. 1980년 라이브 공연에서 즉흥적으로 Imagine을 부르는 등 비틀즈의 곡들도 아주 좋아했다.# 게다가 그의 곡중 가장 유명한 Bohemian Rhapsody에서 쓰인 피아노는 A Day in the Life를 작곡할때 쓰인 피아노를 구입한 것이다.
  •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 가장 영향을 크게 받은 밴드로 비틀즈를 꼽으며[17] 비틀즈 팬인 것으로 보인다.
  • 라몬즈 : 밴드 이름이 폴 매카트니의 실버비틀즈 시절 가명인 라몬즈에서 따온 것이다.
  • 너바나 : 세계 최고의 앨범으로 The Beatles를 꼽기도 했다.
  • 벨벳 언더그라운드 : 페퍼 상사 앨범을 구토나는 앨범이라고(...) 마구 까는 바람에 비틀즈까라는 이미지가 있긴 하지만, 폴 매카트니를 대단한 작곡가라고 치켜세우고 스스로 벨벳 시절 비틀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며 비틀즈를 많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 핑크 플로이드 : 밴드 멤버들이 존 레논을 상당히 존경했다. 오죽 존경했으면 시드 바렛의 정신병 발병이 존 레논의 핑크 플로이드 비난 때문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다.
  • 레너드 번스타인 : 비틀즈를 베토벤, 바흐과 동급으로 놓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슈만의 음악에 필적한다고 극찬했다. 클래식 업종에서 일하면서 철없는 밴드로 여겨지던 비틀즈에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와 많은 관심을 보여 당대에 주목받기도 하였다.
  • 보노 : 비틀즈에 팬 레터를 쓴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2005년 폴 매카트니와 함께 콘서트를 나간 일이 있었는데 이때 상당히 들뜬 모습을 보여줬다.
  • 비 지스 : 비틀즈 곡을 커버하기도 하고, 아예 모리스 깁존 레논에게서 술을 배웠다. 특히나 Revolver 음반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사실 1960~70년대 이후 현대 대중 음악을 연주 하는 '''모든 음악가'''는 적든 많든 비틀즈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9. 기타


  • 음악 밴드에게 붙는 최고의 찬사가 비틀즈 이후로 가장 뛰어난 음악가이다. 달리 말하면 아무리 밴드가 뛰어나도 비틀즈와 동급이거나 그와 비슷한 수준이지 결코 비틀즈를 뛰어넘지는 못하는 수준이니 비틀즈의 벽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록, 팝 뿐만 아니라 메탈이나 힙합 등 상당히 많은 분야에서 비틀즈의 팬들이 많으며 "제2의 비틀즈"나 "비틀즈 이후 최고의 음악가" 평가를 받는 것을 좋아하는 음악가들이 많다. "제2의 비틀즈" 소리를 들은 밴드나 음악가로는 대표적으로 오아시스[18], 스티비 원더, 데이비드 보위, 방탄소년단 등이 있다.
[1] Ob-la-di Ob-la-da에서 레게비트를 영, 미 대중음악 최초로 사용했다. 다만 이 노래는 [2] 당시의 비평가들은 화이트 앨범의 정신없을 정도로 워낙 다채로운 사운드 때문에 비틀즈의 전작들에 비해 앨범의 전체적인 통일성이 없다며 까기도 했지만, 현대로 올수록 페퍼상사 등과는 정반대 의미에서의 명반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즉 페퍼상사가 앨범 통일성의 미학을 본격적으로 제시한 명반이라면, 화이트 앨범은 비틀즈 자신이 이루어냈던 '통일성'을 스스로 부숴버리며 정반대의 카오틱하고 다채로운 앨범의 매력을 보여준 명반이라는 것.[3] 오죽했으면 비틀즈가 데카 레코드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퇴짜를 주며 한 말이 '(일렉)기타는 이제 한물 간 악기이다.'이었을 정도. 지금 들으면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4] bass overdrive나 bass distortion이라고도 부름.[5] 정확히 말하면 제일 처음은 마티 로빈스의 Don't Worry란 곡의 세션에서 앰프 고장으로 우연히 디스토션된 베이스음이 그대로 녹음된게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그 뒤에 비틀즈의 러버소울 앨범에 수록된 "Think for Yourself"에서 폴 매카트니가 최초로 의도적인 퍼즈 베이스를 일관되게 연주함으로써 퍼즈 베이스 연주 기법이 확립되고 이를 계기로 다른 뮤지션들에게도 이 연주기법이 널리 알려지게 되어 이후 롤링 스톤스, 더 후, 제퍼슨 에어플레인, 슬라이 앤 더 패밀리스톤, 바닐라 퍼지 등의 밴드들도 여러 곡에서 퍼즈 베이스를 도입하게 된다.[6] 다만 비틀즈의 뮤직 비디오가 최초의 뮤직 비디오인가는 뮤직 비디오의 기준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대중음악에서 최초로 곡을 홍보하기 위한 영상을 촬영한 음악가는 비틀즈로, 1966년 'Paperback Writer/Rain' 싱글 발매 때 발표되었다. 당시 비틀즈는 스케줄 상 방송 출연과 공연을 하기 힘들었기에 대신 프로모션용 영상을 촬영했다. 이런 홍보용 영상이 아닌, 음악과 어울리는 하나의 단편 영화로서 '영상미'를 추구한 뮤직 비디오는 Bohemian Rhapsody가 최초이며, 이를 하나의 큰 성공의 길로 이끈 음악가가 마이클 잭슨이다.[7] 물론 비틀즈는 애벌리 브라더스, 척 베리, 리틀 리차드, 엘비스 프레슬리, 버디 홀리 등 선배 로큰롤 아티스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비틀즈 자신들도 인터뷰 등을 통해 이들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과 고마움을 아낌없이 드러냈다.[8] 동구권에서는 냉전 시기 제1세계 국가들을 제국주의 진영이라고 불렀다.[9] 정규앨범 판매량은 부진했던 편이다[10] 6년 동안 20곡을 1위에 올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괴물같은 기록. 영국에서는 17곡으로 21곡의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2위.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시절을 포함하여 그가 작곡하거나 공동 작곡한 32곡을 빌보드 정상에 올려 역사상 가장 많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한 사람이 되었다.[11] 싱글차트, 앨범차트 모두 해당된다.[12] 디스코그라피 문단에서도 언급했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다. Something이나 For You Blue 같은 곡.[13] 나라마다 기준이 다른데, 미국에서는 1천만 장 이상 판매 앨범을 말한다.[14] From Me To You ~ Yellow Submarine. 11곡 사이에 다른 가수들의 곡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싱글로 낸 곡들이 전부 1위를 했다는 뜻이다.[15] I Want To Hold Your Hand, She Loves You, Can't Buy Me Love. 64년 4월에 있던 일로, 자기들끼리 1위를 갈아치웠었다.[16] 표절해도 된단 얘기가 아니라, 새로운걸 찾기엔 이미 늦었다는 뜻이다. 음악이 예술의 영역이 되면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부터 시작해 이전 시대 수많은 작곡가들이 듣기 좋은 멜로디를 가져다 자기 음악에 썼고, 마지막으로 비틀즈가 듣기 좋은 멜로디를 바닥까지 싹 긁어갔기 때문에 후대 뮤지션들이 아무리 좋은 멜로디를 찾아도 결국 그 안에서 다 찾을 수 있고, 결국은 누구도 표절에서 자유롭기 어렵다는 뜻이다.[17] 참고로 비틀즈와 함께 라몬즈를 뽑았는데 이 밴드도 끝내주는 비틀즈 팬이다(...).[18] 영국 언론들이 하도 제2의 비틀즈라고 띄워줘서 비틀즈의 광팬인 퀸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가 "오아시스와 우리를 비롯한 그 누구도 제2의 비틀즈가 될 수 없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