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브 에이드
1. 개요
1985년 7월 13일에 개최된 대규모 록 페스티벌이다. 밥 겔도프, 밋지 유르가 에티오피아 난민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기획하였다. '범지구적 주크박스'를 콘셉트로 하여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 미국 필라델피아의 존 F. 케네디 스타디움[1] 에서 진행되었고, 일부 공연은 시드니의 시드니 엔터테이먼트 센터, 모스크바, 빈, 쾰른, 덴 하흐, 베오그라드, 도쿄, 노르웨이, 런던의 스튜디오에서도 이루어졌다.
Live Aid라는 이름은 반창고를 뜻하는 Band Aid에서 따와서 난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뜻에서 붙였다고 한다.
이 페스티벌은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실시간 위성 중계 텔레비전 방송으로, 약 '''15억 명의 시청자가 100여 개의 국가에서 실황 중계를 시청'''했으며 2014년에는 '''영국문화원이 조사하여 발표한 '지난 80년간 세상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사건 80가지'''' 중 50위로, 대중음악 분야에서 49위인 '마이클 잭슨의 삶과 영향력'과 함께 선정되었다.
2. 밴드 에이드
이 프로젝트는 1984년에 영국과 아일랜드 음악가들이 '밴드 에이드'라는 이름으로 발매한 자선 음반 '''Do They Know It's Christmas?'''에서 시작되었다. U2의 보노와 애덤 클레이튼, 듀란 듀란, Wham!의 조지 마이클, 폴리스의 스팅 등이 참여한 이 음반은 전 세계적으로 600만 장이 넘게 팔렸고, 빌보드 차트에서 13위,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들에서 1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보인다.
이것에 영향을 받아 미국의 뮤지션들이 마이클 잭슨을 중심으로 뭉쳐 'USA for Africa'라는 명의로 We Are The World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로니 제임스 디오를 주축으로 헤비메탈, 하드록 뮤지션들이 만든 'Hear 'n Aid'가 Stars라는 곡을 발표했으며, 캐나다에서는 브루스 알렌의 주도로 데이비드 포스터, 브라이언 아담스, 닐 영, 폴 앵카 등등의 뮤지션들이 'Northern Lights'라는 이름으로 모여 'Tears Are Not Enough'를 발표했다.
3. 공연
3.1. 웸블리 스타디움
정오에 웸블리에서의 공연이 콜드스트림 근위대의 God Save the Queen 연주로 시작되었다.[A][2]
U2의 공연은 '''자신들을 대중에게 각인시켰고, 스타덤에 올라가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원래는 'Sunday Bloody Sunday', 'Bad', 'Pride (In the Name of Love)' 이 세 곡을 연주할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보노가 Bad를 부르던 중 스테이지에서 뛰어내려 객석에서 한 여성과 춤을 추어서 Sunday Bloody Sunday와 Bad만 부르고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2005년 7월, 당시 보노와 함께 관중석에서 춤을 추었던 여성 관중은 보노가 자신의 생명을 구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객석에서 뒤의 사람들에게 밀려 곤란한 지경이었는데, 보노가 이를 보고 몸짓으로 가리켜 스태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스태프들이 이해하지 못하자 결국 직접 뛰어내려 그 여성을 도와 준 것이었다. 이 장면은 전세계에 생중계되어 많은 관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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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은 이 공연을 통해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전에도 11번째 정규 앨범인 The Works를 발매해 앨범을 UK 앨범 차트 2위에 올렸고 싱글인 Radio Ga Ga 역시 히트했지만,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곳의 인기는 예전만 못해보였고 아파르트헤이트 논란으로 시끄럽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공연으로 인해 엄청난 비난을 받았으며, 이 시기에 멤버들의 솔로활동이 잦았던 탓에 해체설 및 심지어 한물간 퇴물 취급이 파다했던 등 악재에 악재가 겹친 시기였다. 하지만 '''이 공연을 통해 한 방에 모든 논란을 불식시킨다.'''[3] 퀸은 약 20분간 이 무대에서 관중을 완전히 휘어잡았고, 전 세계에 보여준 그들의 퍼포먼스는 당대 아티스트 중 손에 꼽히던 그들의 열정적인 라이브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퀸의 폭발적인 라이브는 슈퍼스타들이 모두 모인 라이브 에이드에서도 하이라이트로 꼽혔으며, 이때 받은 대중들의 환대와 이어진 음반 매출 상승으로 퀸은 이제 끝물로 향해가는 왕년의 스타정도였던 세간의 평을 비웃기라도 하듯 현재진행형 세계적 록밴드로써의 위상을 다시 가져오게 되었다.[4] 2018년 개봉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이날의 무대가 재연되지만[5]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는 나오지 않는다.[6] 여담으로 이 때의 프레디 머큐리의 컨디션이 최악이였다는 낭설이 돌아다니는데 이는 절대 사실이 아니다. 84년~85년에 가졌던 어떠한 콘서트도 라이브 에이드에서의 컨디션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최상의 컨디션이였다.[7]
공연 기획자들은 적어도 한 명의 비틀즈 멤버, 그 중에서도 폴 매카트니를 참여시키고 싶어했다. 자녀들도 폴의 참가를 설득해 공연 참가에 동의했고, 마지막 순서 직전에 폴 매카트니가 공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술적 문제가 발생했다. Let It Be를 불렀지만 '''처음 2분간 마이크가 꺼진 상태'''였고, 결국 시청자와 경기장의 관중들이 그의 음악을 거의 듣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공식 DVD는 재녹음되어 정상적으로 나온다. 공연 영상
웸블리에서의 공연은 뮤지션들이 전부 올라와 밴드 에이드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을 부르는 것으로 끝이 났다.
3.2. JFK 스타디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플로리다 출신의 데이비드 와인스틴은 북동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주된 목적은 이번 미국 공연 부분을 담당하게 된 전설적인 공연기획자인 빌 그레이엄을 설득해 '''라이브 에이드에 출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연 10일 전 JFK에 도착해 정말로 빌 그레이엄을 만나게 된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의도를 설명한 후 학교에서 녹음한 자작곡들이 담긴 데모 테이프를 건네줬다. 며칠 후 빌은 결국 허락했고, 전문적인 음악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무려 오프닝 무대에 오르게 됐다. 그는 버나드 왓슨이라는 가명으로 밥 딜런의 'All I Really Want To Do'와[B] 자작곡 'Interview'를 불렀는데, 엄청난 긴장감 때문에 피크를 떨어뜨리는 등 계속해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 공연은 생방송에 나오지 않았지만 플로리다 지역방송인 WPLG의 뉴스 제작진이 지역민의 미담을 소개하는 코너를 위해 촬영해 공연이 보존되었다.[8][9]
1980년에 해체를 선언했던 레드 제플린도 다시 모여서 무대에 섰다. 이미 드러머 존 본햄이 질식사로 인해 사망하였기 때문에 시크 #s-3의 토니 톰슨과 제네시스의 드러머이자 솔로 가수로 유명한 필 콜린스가 나누어 연주해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때문에 필 콜린스를 드러머로 하여 레드 제플린을 재결성한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테디 펜더그라스는 그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가고는 하반신을 마비시킨 1982년의 교통사고 이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애쉬포드 & 심슨과 함께 'Reach Out and Touch'를 불렀다.
듀란 듀란의 공연은 훗날 2001년 공식 재결합 전까지 오리지널 멤버가 모두 참여한 마지막 무대였다. 'A View To A Kill'에서 사이먼 르 본이 삑사리를 내는 등 라이브 실력에서 비판을 받았다. [10]
JFK에서 진행된 마지막 공연 역시 모든 뮤지션들이 올라와 USA for Africa의 We Are The World를 불러 화려하게 끝을 장식하였다.[11]
4. 방송의 혁신, 문제점
이 공연의 방송은 '''방송계에서 가장 야심찬 모험'''으로 회자되었다.
유럽에서는 BBC에서 공연을 중계했고, 리처드 스키너와 앤디 커쇼의 진행으로 방송이 시작되었다. 다양한 공연 사이사이에 여러 인터뷰와 토크가 이어졌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방송은 모노로 제작되었지만[12] 라디오 방송인 BBC Radio 1에서는 스테레오 방송을 송출했다. BBC는 당시 유럽의 다양한 채널에 화질이 깨끗한 방송을 송출했다.
미국 중계는 ABC, 그 산하의 신디케이트[13] 조직인 오비스 커뮤니케이션스가 대부분 책임지고 있었고,[14] 독립적으로 케이블 방송 MTV가 같은 시각에 공연을 방영하기도 했다. MTV의 경우 스테레오로 방송을 볼 수 있었다.[15]
문제점은, BBC는 공영방송인 만큼 상업성을 배제하고 방영했지만 ABC, MTV의 방송에서는 광고와 인터뷰가 난무했다. 이 때문에 광고 시간 동안 방송이 되지 못하고 지나간 공연분량이 많았다.
ABC와 산하 신디케이션의 가장 큰 문제는 전체 방송의 특정 부분만 방영하기를 원했다는 점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마지막 3시간만을 원했다. 이로 인해 일부분을 다른 것으로 대체했고, 공연 분량을 편집했다. ABC 라디오 네트워크의 경우 지역방송을 군데군데 송출하여 공연의 많은 부분이 누락되기도 했다.
5. 한국 방송
한국에서는 MBC가 텔레비전으로 1985년 7월 14일 밤 9시 30분에 '세계는 한가족'이라는 프로그램명으로 녹화방송을 했다. 전체 공연을 다 보여줄 수 없었기에 자체적으로 3시간 분량에 맞춰 편집한 것이었다.
방영 당시 방송사가 문화공보부와 방송을 놓고 줄다리기를 했다는 일화도 있는데, MBC는 행사가 열리기 10주 전부터 이 콘서트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여 방영 계획을 세웠으나 나흘 앞두기 전까지 문공부에서 결정을 해주지 않아 제작진이 애를 태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국 11일 오전에 결정되어 13일 인공위성을 통해 실황을 중계받아 14일 밤 9시 30분 방송 시간까지 편성국, 제작국, 기술국 직원 20여명이 밤새워 제작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동안 웬만해서는 대한민국에서 볼 수 없었던 대규모 공연 중계였기에 해외음악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이 당시 공연 중계에도 꽤 여러 문제가 있었다. 당시 메인 MC는 차인태 아나운서였고, 김기덕, 박원웅, 이종환 등 해설 역할로 나선 팝 뮤직 전문 DJ들의 설명이 지나치게 장황하고 MBC 측이 각 기자들의 인터뷰 리포트를 무리하게 짜집기해 오히려 공연에 집중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심지어 차인태 아나운서와 팝 전문가들의 설명이 너무 길어 '''정작 시청자들이 들어야 할 노래 전주를 잘라먹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의 지나친 배경지식 설명은 1985년 당시에도 문제로 지적됐다. 또 지금 와서 보면 매우 이상한 것이 노래의 가사가 지나치게 장황하게 번역된데다가 자막의 타이밍도 거의 맞지 않았다. 특히 퀸 설명 자막은 대부분 사실과 다르다는 문제가 있다.[16] 아울러 이 당시 중계된 영상을 보면 일부 곡의 연주 장면이 빠져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금지곡으로 지정됐던 보헤미안 랩소디다.[17][18]
그리고 2018년 11월, 보헤미안 랩소디가 개봉하면서 국내에서도 퀸 관련 콘텐츠가 늘어나자 이 흐름에 편승해 # Queen 출연부분만 MBC에서 직접 고화질로 올렸고, 같은 해 12월 2일에는 아예 23시 55분부터 1시간 30분 분량으로 이 콘서트를 다시 화질 보정을 거쳐 단독으로 "특집 지상 최대의 콘서트 LIVE AID"라는 타이틀을 달고 배철수와 임진모 진행으로 재편집 방송했다. 또한 크리스마스 23시 10분에 모든 곡에 가사를 넣어서 재방송을 하였다. 33년 전 방송은 장황한 가사 자막과 엉터리 소개 자막이 나갔지만 이번 재방송에서는 자막을 최소화하고 당시 퀸이 연주했던 약 20분의 공연 장면을 전부 담았다. 하지만 이 재방송에서 의외로 인지도가 비교적 적은 가수[19] 는 나오는 반면, 유명한 가수들[20] 이 나오지 못한 사태가 발생했는데 이는 음향 상태 때문에 가장 좋은 기준으로 선곡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청률은 일요일 늦은 밤인데도 닐슨코리아 기준 4.1%를 기록하였다. 일주일 뒤인 12월 10일 밤 11시 10분에는 50분짜리 특집 다큐멘터리 '내 심장을 할'퀸'(Queen)'을 편성한 것은 덤. [21] 방송 직후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가 데이비드 보위, 엘튼 존, 조지 마이클 등 라이브 에이드 참가자들로 도배되는 등 퀸 말고도 다른 뮤지션들에게도 관심이 집중되었다. 특히 데이비드 보위의 경우 실검 1위를 차지했으며 멜론 검색어 순위에서 보위의 Heroes가 1위로 올라오기도 했다.
저작권 상의 이유로 MBC 온에어와 POOQ으로 시청할 수 없으며 TV와 DMB로만 시청 가능했다. 한때 MBC 온에어에서 MBC 뉴스를 누르면 시청이 가능했는데 전 프로그램 탐사기획 스트레이트가 끝나고 관계자가 스트리밍 종료를 안 해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다시 스트리밍이 막힌 상태.[22]
6. 모금
공연 동안 관객들은 모금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BBC에는 300대의 전화 회선이 연결되었고, 사람들은 신용카드로 기부를 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약 1억 5천만 파운드'''가 모였다고 알려져 있다. 2018년 현재 기준으로 이 금액은 '''약 6400억 원'''에 달한다.
아일랜드는 당시 불황의 고통 속에서도 1인당 기준으로 가장 많이 기부했다. 개인 기부금 중 가장 액수가 큰 기부금은 두바이의 부유한 가문에서 나왔는데, 그들은 한꺼번에 무려 100만 파운드를 기부했다. 현재 기준으로 이 금액은 약 42억 원이다.
7. 취입과 발매
7.1. 공식 DVD
밥 겔도프는 이 공연이 한 번으로 끝날 것이라 약속했고, 그래서 이 공연은 한참 동안이나 텔레비전 방영 목적으로 녹화되기만 했다.
겔도프가 공식 DVD의 발매를 결정한 것은 20여 년이 지난 후였다. 그 이유는 인터넷에 떠돌고 있던 수많은 해적판을 봤기 때문이라고.
밥 겔도프의 요청으로 ABC와 산하 신디케이프 조직은 원본 테이프를 삭제했지만 그 테이프를 삭제하기 전에 복사본이 스미스소니언 협회에 기증되었고, 협회는 복사본을 폐기하지 않았다. MTV는 방송을 위한 녹화분을 보존하기로 결정하여 보존하기로 결정하여 보관소에서 100개가 넘는 테이프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위에 나온대로 편집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온전한 공연의 대부분은 BBC가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DVD의 주요 소스가 되었다.
BBC와 MTV의 소스로 DVD 작업이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몇 개의 라이선스를 획득했다.
마침내 공식 DVD는 2004년 11월 8일에 발매되었다. 이 DVD에는 전체 16시간의 공연 중 겨우 10시간만 수록되어 있었다. DVD는 밥 겔도프의 회사인 우드참 주식회사에서 생산했고 워너 뮤직에서 발매했다.
공식 DVD의 많은 수의 음악들이 녹화 과정에서 마이크의 문제로 인해 대체되었다. 예를 들자면, 폴 매카트니는 전술했듯 녹화 당시의 실수로 인해 '''20여 년이 지나서야 스튜디오에서 Let It Be를 재녹음'''해야 했다. 밴드 에이드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 또한 같은 이유로 인해 공식 DVD에서 삭제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한 'We are the World'의 경우 공연 당시 마이크가 없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차후에 덧씌우기도 했다.
또, 공연 당시의 기술적 문제 때문이거나, 당시 촬영분이 없거나, 음악에서의 문제로 인해 DVD에 수록할 부분을 고르는 과정에서 상당수 팀의 공연 분량이 DVD 수록에서 제외되었다. 뮤지션의 사정에 관련된 문제도 있었다. 레드 제플린과 산타나의 경우 그들의 요청으로 공연 분량이 DVD에서 제외되었는데, 레드 제플린의 경우는 이전까지 알려진 바와 달리, 공연 분량이 계약 관계와 얽혀 있었다고 한다.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는 곧 발매될 레드 제플린의 DVD 수익을 기부하기로 되어 있고, 존 폴 존스는 뮤추얼 어드마이레이션 소사이어티와의 미국 합동 순회공연에서의 수익을 기부하기로 되어 있었다고. 그래서 발매 당시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
이 공연의 기획 의도에 맞춰, 공식 DVD의 판매 수익금도 역시 기부하고 있다.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는 재무부 장관으로 재직할 당시 이 DVD에 부과된 부가소비세를 기부에 쓰고, DVD 판매시 5파운드씩 추가로 모금하기로 결정했다.
2018년 9월부터 영상이 공식 유튜브 계정에 업로드되고 있다. 아마 한달 후 개봉한 보헤미안 랩소디를 노린 듯?
7.2. 해적판
전 세계에 방영되어 수십억 명이 시청했기 때문에 다양한 해적판이 녹화되었다. 대부분의 해적판들이 모노로 녹화되었는데, 당시에는 대부분의 VCR이 모노만을 지원하기도 했고 전술했듯 BBC와 ABC가 텔레비전으로 방송했을 때 모노로 방송을 송출했기 때문이다. 공연 후 약 20여 년간 수집가 시장에서 이러한 해적판들이 거래되었고, 최근에는 인터넷에도 검색만 하면 쉽게 나온다. 공식 DVD가 공연의 일부만을 수록하고 있기 때문에, 해적판은 현재 이 역사적인 공연을 온전히 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특히 공식 DVD에 수록되지 못한 공연 영상 중 몇몇개는 보거나 구하기 힘든데 상당히 비싼편.
8. 비판
2005년 6월, 폭스 뉴스의 진행자 빌 오라일리는 모금된 돈에 부주의했던 것을 비판했다.# 라이브 에이드로 모금된 금액의 일부는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의 군사 정부로 흘러나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대략적인 경위
9. 셋리스트
9.1. 웸블리 스타디움
9.2. JFK 스타디움
10. 여담
Tears for Fears, 빌리 조엘, 캣 스티븐스, 예스 등등은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결국 참가하지 못했다. 특히 캣 스티븐스와 티어스 포 피어스는 원래 공연에 참여도 할 예정이었다. 1977년에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1978년에 '유수프 이슬람'으로 개명한 후 첫 대중 공연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정 조율에 문제가 생겨 결국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티어스 포 피어스는 JFK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하기로 결정났으나 공연 당일 갑자기 조지 쏘로굿 앤드 더 디스트로이어스로 대체되었다. 이유는 투어 멤버 2명이 계약 만료로 인해 그만두었기 때문. 또, 재결합한 딥 퍼플이 참가 의사를 밝히기도 했으나 리치 블랙모어가 참여를 거절해 결국 무산되었다. 유리드믹스는 본래 출연 예정이었으나 애니 레녹스의 건강상의 문제로 불참했다.
당시 영국에서 수많은 이슈를 불러 일으키며 인기를 끈 인디 밴드인 더 스미스에게도 공연 제의가 들어갔지만, 보컬 모리세이는 '''영국 왕실의 전 재산이라면 그들을 충분히 먹여살릴 수 있다'''며 참가를 거부했다.
믹 재거와 데이빗 보위는 원래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합동 공연을 하기로 계획했지만 기술적인 문제로 불가능해졌고, 결국 데이빗 보위는 웸블리, 믹 재거는 존 F. 케네디 스타디움에서 각자 공연했다. 대신에 그들은 공연하고자 했던 'Dancing In The Street'를 후에 싱글 음반으로 발매했다.
필 콜린스는 웸블리 스타디움, 존 F. 케네디 스타디움 두 곳에서 모두 공연했는데, 이건 웸블리에서 공연을 마친 후 콩코드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듀란 듀란도 두 공연장에서 모두 공연하기로 했었으나, 계획을 취소했다.
밥 딜런은 공연을 마친 직후 "이 공연으로 모인 돈의 일부, 아주 조금을, 100만이어도 200만이어도 좋으니 미국 농민의 부채 탕감을 도와주기 위해, 은행에 빚을 지고 있는 농민들을 위해 써주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발언을 해 자기가 출연한 공연의 취지도 모르냐며 욕을 먹었다. 이 발언에서 영감을 얻은 윌리 넬슨, 존 말렌캠프. 닐 영은 팜 에이드(Farm Aid)라는 미국 농민들을 위한 자선 공연을 기획해 1985년부터 꾸준히 매년 개최하고 있다.
기획자 중 하나인 밥 겔도프는 공헌을 인정받아 1986년에 명예[29] 대영제국 훈장 2등급(KBE)을 받았으며, 또 다른 기획자인 밋지 유르도 공헌을 인정받아 2005년에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을 받았다.
이후 2005년 7월 2일에 밥 겔도프가 다시 한 번 기획한 대규모 록 페스티벌 '''라이브 8'''이 열렸다.
[1] 구조적 문제와 화재의 위험성 때문에 89년 폐장 후 92년 철거되어 그 자리에 웰스 파고 센터가 들어섰다.[A] A B 처음 여섯 부분만 연주했다.[2] 시간대 차이로 인해 시드니에서 공연한 Mental as Anything의 'Live It Up'이 첫 라이브 에이드 공연이 되었다. 공연 영상[3] 그리고 다음해인 1986년 매직 투어의 웸블리 공연에서 'Who Wants To Live Forever'를 부르기 전, 프레디 머큐리는 "많은 사람들이 저희 밴드가 해체될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엉덩이'''를 가리키며) '''그들은 여기로 말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며 불화설을 종식시켰다. 관객들의 웃음과 환호는 덤.[4] 라이브 에이드의 기획자였던 밥 겔도프와 엘튼 존은 이날 퀸의 공연에 대해서 '이 공연을 접수해버렸다'라는 표현으로 극찬했으며, 훗날 BBC에서는 '''락 역사상 최고의 퍼포먼스'''로 선정했다.[5] 심지어 펩시의 PPL까지 재연되었다.[6] 이후 블루레이를 출시할 때, 라이브 에이드 풀버젼 촬영분을 공개하면서 위 노래 촬영분도 같이 공개되었다.[7] Works 투어 최고의 컨디션으로 알려진 Sun city 공연도 에이드 만큼 고음이 쭉쭉 올라가지는 않는다. 투어 휴식기라는 이점과 짧은 공연시간으로 인해 컨디션 조절이 그다지 필요하진 않았을것이다.[B] A B 다만 정말로 불렀는지 알 수 없다.[8] 현재 그는 일반인으로 생활하고 있다. 틈틈이 만든 노래들을 본명으로 발표하기도 했다.[9] 그러나 공연 전체가 보존되었는진 확실하지 않다.[10] 이후 사이먼은 "나의 인생 최악의 공연"이라고까지 말했다.[11] 라이브 에이드의 마지막 공연은 다음날 영국 표준시 새벽 2시 11분에 런던의 한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클리프 리처드의 'A World Of Difference' 공연이다. 공연 영상[12] 1년 후 영국에서도 NICAM을 이용하여 BBC Two에서 첫 스테레오 방송을 개시한다.[13] 기업 독점 형태의 하나이다. 몇 개의 기업이 하나의 공동 판매소를 두고 가맹 기업의 제품을 공동 판매 또는 공동 구입을 하는 조직을 말한다.[14] ABC는 필라델피아에서 마지막 3시간만 중계하였고, 나머지 내용은 오비스 커뮤니케이션스가 담당했다.[15] 이는 FM방송을 이용한 것이며, 당시 미국에서는 오직 NBC만이 프로그램을 스테레오로 내보냈다.[16] 이 당시 차인태 아나운서는 퀸을 대학 동창끼리 만나서 결성한 밴드라고 했는데 사실이 아니다. 네 명 모두 전공이 다르며 나이도 다른데다 베이시스트인 존 디콘은 오디션으로 뽑은 멤버였다. 또 프레디 머큐리가 퀸의 리더라고 소개 자막에 써놨는데 프레디는 밴드내 영향력이 엄청나긴 했지만 프론트맨이었고 리더는 더더욱 아니었다. 또 멤버 전원이 솔로 음반을 냈다고 써놨는데 1985년 당시로서는 틀린 정보다. 존 디콘은 솔로 앨범이 없고 영화 OST 싱글 하나뿐인데 이건 라이브 에이드 공연 이후인 1986년에 나왔다. 이것 말고도 엉터리로 소개된 정보가 꽤 많다.[17] 보헤미안 랩소디가 금지곡에서 해금된 것은 1989년, 방송금지곡에서 완전 해금된 것은 1994년이다.[18] 당시 금지 사유가 노래 제목에 당시에는 공산국가였던 체코의 지명이 들어간게 이유였다고 한다.[19] 샤데이와 케니 로긴스.[20] 웸블리 스타디움 기준으로는 U2, 필라델피아 기준으로는 주다스 프리스트, 비치 보이스, 마돈나, 레드 제플린, 듀란 듀란, 밥 딜런 등. 특히 마돈나가 잘려나간 걸로 말이 좀 많았다.[21] 이 편성은 MBC 편성국에서 한 것이며 이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있는 예능PD 출신 MBC 모 국장은 당시 방송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업부서장이었다.[22] 그리고 그 여파로 라이브에이드를 틀어주던 울산MBC, 제주MBC 등 MBC의 지방계열국 온에어 서버가 터져나갔다.[23] 프랜시스 로시와 앨런 랭커스터가 학창시절 결성한 밴드 더 스펙터스(The Spectres)에서 시작해 특유의 부기 록 음악으로 꾸준히 활동하며 음반 차트 1위를 4번 달성하는 등 많은 인기를 끌은 밴드.[24] 더 잼의 리더였던 폴 웰러가 결성한 대표적인 소피스트 팝 밴드로, 브릿팝에 큰 영향을 미쳤다.[25] 공연의 기획자 밥 겔도프의 밴드.[26] 1980년대 초반 영국 최고의 히트 메이커로 자리 매김 했던 포스트 펑크 밴드인 아담 앤 더 앤츠의 리더이다. 별칭은‘마조히스트’.[27] 또 다른 공연의 기획자인 밋지 유르가 소속된 밴드.[28] 부드러운 하모니와 신시사이저의 전자음을 바탕으로 한 뉴웨이브 댄스 뮤직으로 많은 인기를 끌은 밴드[29] 외국인 대상 명예훈장. 밥 겔도프는 아일랜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