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한국군
1. 현행 각 군별 군복
본 문서는 주로 한국군 군복의 역사와 변천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므로, 현행 한국군의 군복에 대한 내용은 다음 문서들을 참고할 것.
2. 역사
2.1. 근대 이전
철과 가죽 또는 나무 등 여러가지 종류의 재료들로 만든 보호복이었다. 이때는 군복이라기 보다는 각 부대별 내지는 지역별로 상황에 따라서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나중에는 갑옷을 입어도 죽는 건 같아서(무기가 너무 발전해버려서) 면제배갑과 흔이 아는 구군복을 입었다. 보통 고려시대부터 무관들은 철릭을 입었다. 그래서 권위를 위해 장수들의 경우 여전히 갑옷을 입었다. 다만 총알도 막게 하기 위해서 갑옷의 무게가 매우 무거워졌고 그런 만큼 비싸져 많이 보급되지는 못했다. 사극에 지겹게 나오는 포졸복은 사실 평시에 입던 근무복이라고 보면 된다.
2.2. 대한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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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 육군 졸급 병사. 구한말엔 군복제가 상당히 급격하게 바뀌었는데 1907년 군대 해산 직전에 착용하던 군복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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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의 훈장(위) 군모(왼쪽)과 견장(오른쪽).
기병 병과의 예복은 특이하게 프랑스식 케피 모자에 영국식 레드 코트를 입은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튜닉의 컷은 프로이센의 울란 기병대가 착용한 울란카다. [2] .
병과마다 색이 다른데, 검은 바탕에 빨간 소매·옷깃은 보병. 빨간 바탕에 녹색 소매·옷깃은 기병. 검은 바탕에 유록색 소매·옷깃은 군의.
참고로 장교들은 위관급일 땐 수술이 없는 계급장(견장)을 달다가 참령이 될 때부터 계급장에 수술이 달린다. 이 계급 이상부터가 우리가 대한제국 군복 하면 흔히 생각하는 예복을 입는다.
대원수 예복은 '''황제가 입는 예복'''이다. 보면 알겠지만 디자인상으로 위의 예복들과는 차원이 다른 클라스다.(...)
위 예복이나 전투복 말고도 동계 피복인 폴로코트 형태의 검은 동코트도 존재했다. 후술할 의병들 사진 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군의 전투복 역사는 길게 보자면 대한제국 시절의 별기군 제복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개항 초 일본이 그러했듯 서양식 제복을 흉내낸 것으로 1895년(고종 32년) 4월 9일 칙령에 의해 최초 육군 훈련대의 보령과 장교들만 착용하였으나, 같은 해 9월 5일에는 칙령 165호로 육군 모두에게 착용하도록 하였다. 그뒤 1897년 육군복장규칙에 의해 제정되어 이어 5월 22일에는 칙령 제24호로 이를 세분화하여 대례장, 군장, 예장, 정장, 상장의 5종으로 전반적인 정비를 이루었다. 이때부터 대한제국 문관의 관복은 특이하게 생긴 오얏꽃무늬 예복이었고 무관의 관복은 대한제국 군복으로 정해지게 된다.
허나 1907년 8월 일제의 강압으로 군대가 해산되면서 제대로 된 정규 군복의 역사는 잠시 끊겼고, 이들 중 일부가 일본의 강제해산에 저항하여 탈영하거나 의병활동에 참가했기 때문에 초기 의병들 옷 중에는 이 옷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달 후인 10월 1일 그대로 친위대로 남아있는 군인들 한정으로 칙령 제26호 육군복장제식으로 최종 개정되었다.
여담으로 이 대한제국 군복은 한국인들의 기억 속엔 별 관심도 없는 군복이지만, 이때의 군복이 진짜 멋있었다면서 그리워하는 의견도 꽤 존재한다. 사실 알록달록해서 너무 눈에 띄는 현 사관생도 예복과는 달리 대한제국 군복의 디자인의 차분한 검정색 바탕에 강렬한 붉은색 디자인과 화려한 금색 단추와 실이 자아내는 형언할 수 없는 간지폭풍은 개천 이래 역대 한국군 역사상 최고 디자인의 군복이라 할 만하다.
군복의 모델은 일본군 군복을 기초로 하고 있으나 일본 군복 또한 프로이센 군복을 기초하고 있었고, 이후 러시아와 프랑스 군복의 영향을 받았다. 다만 군복은 대한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국내에서 생산된 것이 아닌 해외에서 위탁형식으로 생산해 수입하거나 아니면 부대내에서 직접 생산하게 되어있었고 그나마 1900년 4월 17일 육군 참장이었던 백정기가 올린 12조의 상소문중 국산물산 장려와 재정낭비를 막기 위해 국내에서 생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1903년 1월 18일 군부대신이었던 신산선의 건의로 장관, 영관, 위관의 복장중 상장만 생산이 되었다.
계급장은 견장에 태극과 별의 색깔, 개수 등을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여기 참고 그 외에도 위의 대한제국 육군참장 군복처럼 소매에 대각선의 수장, 모자 장식선, 칼라장, 바지 측선으로도 구분이 되었다. 줄의 갯수는 1줄(참위)~11줄(대원수).
2018년에는 풀 세트가 보존되어 있었던 대한제국군 진위대 장교 군복이 후손에 의해 기증되었다. 황희의 후손으로서 위관급 장교로 근무했던 황석(1849∼1938)이 착용했었던 군복으로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으며, 설립이 검토되고 있는 대한제국 무관학교 기념관에 보존될 예정이라고 한다.
러일전쟁 이후 개정 상복에 대한 블로그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전투복에 해당하는 상복(常服)이 일본군 군복처럼 황갈색으로 변경된다.
대한제국 경무청 경찰 제복에 대한 블로그
2.3. 항일기
한국 역사에서 가장 어둡고 힘든 시기에 항일 무장 투쟁 독립운동가들이 입었던 군복. 6.25 전쟁 때의 군복과 함께 선조들의 피로 얼룩진 가장 애틋한 군복들 중에 포함된다.
2.3.1.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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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서 오른쪽에서 4번째에 있는, 검은 동코트를 입고 검은 정모를 쓴 의병이 눈에 띈다. 저건 사실 대한제국 군복으로, 상술했듯 군대해산으로 전부 강제로 옷을 벗게 된 군인들이 크게 반발하면서 의병들의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대한제국 군복은 의병의 제식 군복은 아니었다. 본인들이 갖고 있는 전투에 유리한 옷 중 가장 좋은 옷이기 때문에 입은 것. 의병은 제식 복장이 없었고 위 사진처럼 그저 전투하기 편리한 제각각인 옷을 알아서 마련해서 입었다. 심지어 무기도 토종 화기인 화승총부터 대한제국군의 신무기인 게베어 1871까지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결국 의병들도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 실패로 남한대토벌이라는 역습을 맞고 사실상 해체. 뿔뿔이 흩어진 의병들은 만주로 건너가 이제 그냥 의병이 아닌 독립군이 되어 이번엔 통일된 제식 복장과 무기로 일본군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게 된다.
2.3.2.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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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결사대 장교 군복[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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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결사대 사병 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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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결사대 사병 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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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결사대 완장. 보통의 완장과는 달리 팔에 끼우는 방식이 아니라 박음질 해서 붙이는 방식이다.
의병의 정신을 계승한 독립군 부대들은 만주지역에 분포하였는데, 경술국치로 인하여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잃음으로써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는 정상적인 생산라인이나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로 인해 기존 의병을 비롯한 독립군 부대들의 무기나 복장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군복이 갖는 위엄과 소속감, 나아가 충정과 결의를 다지기 위한 도구로써 군복을 제작하고 착용하였다.
독립군의 군복은 완벽히 보존된 것은 현재로써는 없다. 독립기념관 5관에 전시된 독립군 군복, 그러니까 바로 위의 사진으로 기재된 군복은 실물이 아니라 고등경찰기록 제 34101호의 글과 35383호의 글, 삽화를 기반으로 제작한 것이다
1920년대 초반까지 잔존했던 독립군은 조선식 옷을 개조하거나, 중국[4] 군경, 군벌의 군복을 모방하거나, 소련군 군복을 착용했다는 기록[5] 이 있고, 일본군 군복 역시 상당수 모방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군벌 군복과 소련군의 군복을 착용한 이유는 만주지방에서 구하기 쉬운 군복이었고, 일본군복을 착용한 이유는 '''피아식별을 어렵게 해서 교란한 뒤 섬멸하기 위해서''' 착용하였다. [6]
다만, 사진 상의 독립군 군복은 일본군 군복의 형식이라기 보다는, '일본군 군복을 모방한 중국 군벌의 군복' [7] 에 더 가까운 형상이다.[8] [9]
위 사진의 군복을 착용한 독립군이 활동하던 시기는 1920년대이고, 동시대 일본의 군복인 45식 군복[10] 과 매우 흡사한데, 이는 당시 중국 군벌들 상당수가 45식의 형태를 모방해 사용하였고, 이가 독립군 세력에도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쑥색(또는 짙은 초록) 바탕의 군복, 어깨에(긴 쪽이 어깨 앞뒤로 가도록) 부착하는 붉은색 견장[11] , 스탠딩 카라 형식의 옷깃, 카라 가운데 부분의 붉은 카라장[12] [13] 이 있는 등, 45식 군복과 매우 유사하게 생긴 것이 특징이다. 다만, 왼쪽 팔 부분에는 대한제국의 국화인 오얏꽃(李花)과 별이 그려진 5각형 형태의 표식을 완장 형태로 부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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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교과서에서 봤을 법한, '청산리 전투 직후 촬영된 독립군'으로 알려진 사진.
맨 앞에 앉아있는 인물은 김좌진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맨 앞 김좌진 장군 군복의 카라장과 견장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데, 사진이 희미한 흑백이어서 견장의 도안은 알기 힘들고 부착된 모습만 대강 파악할 수 있지만, 김좌진 장군 뒤에 정렬한 군인들 중 앞줄 오른쪽 두번째와 세번째 군인이 입고 있는 군복에서 스탠드 카라 형식의 목깃은 명확하게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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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위 자료의 특징들로 미루어 보아, 이 당시 독립군들은 일본군의 45식 군복을 모방한 중국 군벌의 군복을 들여오거나 복제 생산 하고, 독립군 고유의 표식과 계급체계를 적용하여 착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모의 형태로는 인민모 또는 뉴스보이 캡의 형태 내지는 크라운형 정모 종류의 모자를 썼고[14] , 가운데에 초록색 바탕의 저시인성 태극기를 부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에는 독립군 부대들이 산발적으로 활동을 하였으므로 앞서 말한 이유를 제외하면 딱히 독립군 나름대로의 군복을 확립할 이유가 없었고, 독립군의 규모는 일본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규모인데다가, 주 활동 무대도 국내가 아닌 만주지방이었기 때문에 산업적 인프라가 높지 않아 대부분 적은 수의 미싱기와 포목을 이용하여 가내생산식으로 제작 및 보관[15]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의 군복은 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의 존재가 사실상 미미해질 때 까지 유지되어 소규모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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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의 꿈속에 회상되는 김좌진 장군이 이 옷을 입고 있다.
2.3.3. 광복군
중산복에 오스트리아식 야전모를 착용한 군인들이 광복군 장교들이다.[16] 맨 앞줄 가운데 검은색 중산복을 착용한 사람이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이고, 그 왼쪽에 옅은 색 중산복을 착용하고 부츠를 신은 사람이 바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이다.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가운데)과 부관인 왕계현 정령(왼쪽), 3지대 지대장 김학규 장군(오른쪽)의 사진이다. 정복 차림에 구두를 착용하였으며, 왼쪽의 전투모를 쓴 왕계현 정령을 제외하면 전부 정모를 착용하고 있다.
전투복 차림의 광복군 대원들. 오스트리아식 야전모, 샘 브라운 벨트[17] , 부츠를 착용하였다.
독립군 이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경우 엄연히 복제 규정이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중산복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 국민당군의 복제와 흡사한 방식을 따르고 있었으며, 모표나 몇가지 부분[18] 을 빼면 대부분 국민당군 군복과 별 차이가 없었다. 국민당국 군복은 손문이 만든 중산복(인민복)과 별 차이가 없는 흡사한 형태였으며[19] , 인민복은 중국 공산당군의 제복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제국이 전시체제로 돌입한 뒤 국민들에게 보급된 국민복은 가쿠란을 비롯한, 당시에 흔히 볼 수 있던 제복을 모태로 만들어졌는데, 이 제복들은 손문이 만든 중산복의 모태가 된다. 이로인해 광복군 군복과 국민당군 군복과 인민군 군복과 일제시대 국민복은 디테일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비슷해보이는 결과를 낳는다. 광복군 군복 고증자료
모자로는 정모와, 국민혁명군의 전투모에서 영향을 받은 오스트리아식 야전모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며, 정모는 비전투시에 착용하였고, 오스트리아식 야전모는 대부분의 상황(평시 또는 전시)에서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장구류에 관해서는, 비전투시에는 단화, 또는 구두를 신은 것으로 보이며, 전투시에는 각반을 착용한 후 단화를 신거나, 부츠를 신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탄약, 권총집을 거치 및 휴대하기 위해 샘 브라운 벨트를 착용한 대원들의 사진 자료가 많이 보인다.
계급장의 경우 사병 및 부사관은 ''''八'''' 모양의 기둥형 계급장을 왼쪽 상박 팔뚝에 부착하였다. 부사관용은 사병용과 달리 계급장 밑에 작은 별이 들어가 구분되었다. 장교는 좌우 대칭 등변사다리꼴에 윗면이 곡선 모양으로 되어 있는 탈부착식 견장형 계급장[20] 을 어깨에 부착하였다. 이 견장형 계급장이 조선인민군 계급장과 같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직사각형에 가까운 오각형, 또는 육각형인 조선인민군 계급장과는 달리 광복군의 장교용 계급장은 말 그대로 사다리꼴이다. 또한 계급체계의 기원도 다르다. 광복군의 견장은 대한제국 시기의 계급체계를 따와 표시를 한 것이지만, 인민군 견장은 소련의 것을 바탕으로 만든 견장이다.
국민혁명군 육군의 전투복은 해외 사이트에서 생각보다 싼 가격으로 판매중이므로, 고증에 맞고 싸게 재현할 길이 있는 분야이다. 가격은 좀 높지만, 인면전구공작대가 착용한 영국 육군의 정글 그린색 열대 전투복도 구할 수 있다.
2.4. 현대 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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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국방경비대 시절
해방 후 국방경비대 초창기 시절에는 재고가 많이 남은 옛 일본군복을 입었다. 즉 일제강점기부터 복식이 정해져있지 않던 의병을 제외한 한민족의 대부분의 군사조직(독립군 포함.)은 모두 일본군과 거의 비슷한 군복을 착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땐 정모에 있던 일본 육군 마크를 대한민국 육군 마크로 바꾸는 등 일본군 부착물을 대부분 한국군 부착물로 바꿔버리는 등 차별화를 꾀했다. 한편 이를 알 리가 없는 한 일뽕이 일본군 전투복 입고 국방경비대 군복이라 우기는 병크가 일어나고 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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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국방경비대 사병용, 오른쪽은 참모용이다.
이후 미군의 지원을 받으며 위와 같이 미군 군복과 일본군복이 섞인 양상이 나오게 되었는데, 하의는 조퍼스(당꼬바지)와 일본식 부츠(사병들은 일본식 붕대각반+전투화)를, 상의는 미군식 아이크 자켓을 착용한 게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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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복, 근무복, 정복을 한꺼번에 겸하는 군복으로, 전투복으로 쓰일 땐 넥타이를 하지 않고 아이크자켓 안 셔츠의 카라를 개구리전투복 카라처럼 풀어헤치고 허리엔 일본식 탄띠를 찼으며 근무복이나 정복으로 쓰일 땐 넥타이를 하고 일본식 샘브라운 벨트를 찼다. 즉 아이크자켓은 방상외피 겸 정복 상의 역할을 둘다 했다(...).
2.4.2. 대한민국 국군 창군 이후 ~ 6.25 전쟁
곧 46년부터 원조물자의 하나로 들어온 단색 미군 군복을 각종 표지만 한국군용으로 쳐서 입기 시작했고, 그 상태로 6.25 전쟁을 치르게 된다.6.25 전쟁 당시의 국군 사진 6.25 전쟁 당시에도 물자가 부족해 (특히 개전 초기)당시의 사진을 보면 일본군 군복과 장비가 미군 장비와 혼용되어 사용되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심지어는 ''' 무장친위대 군복까지 존재했다.'''[21] 특히 일본군 군모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의외로 많이 사용되었다. (6.25 전쟁 당시의 일본군 장비, 군복의 사용) 그 외에도 광목천에 물을 들여 만든 국산 작업복이나 국산 방한복같은 국내에서 생산된 물자들도 많이 사용되었다.[22] 이후 54년에 들어서야 처음으로 한국군 전용 전투복의 규격 등이 정해지고, 관련체계가 정비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양새는 미군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23] 이후 상세한 변동은 아래쪽에서.
2.4.2.1. 전투복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의 제식 전투복은 M43 HBT였다. 1941년 나온 일종의 작업복으로 이후에 디자인의 간소화와 피복 색상의 변화[24] 를 거쳐 2차대전 전쟁 기간 중에 거의 대부분이다시피 보급되어 있던 것이다. 한국군에는 1946년 9월 1일 국방경비대가 이전까지 쓰이던 일본식 전투복을 폐지하고 이 HBT로 바꾸기 시작하면서 쓰이기 시작하였다. 제주 4.3 사건과 여순사건에도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아주 흔한 피복이었다. 한국전 개전 직전이 될 때쯤엔 모든 병력에 보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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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쓰이던 M50/51 야전상의. M41이나 M43도 쓰이긴 했지만 이게 가장 많이 쓰였다. 특히 M51 야전상의의 경우 색상이나 무늬만 바꿔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피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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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O같은 정보부대는 무장친위대의 오크리프 위장패턴 전투복을 입었다고 한다. 제일 오른쪽에 서있는 대원을 보면 왼쪽 팔뚝에 붙은 나치 독수리 휘장까지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게 보인다.
2.4.2.2. 동계 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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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바스토뉴 공방전 에피소드하면 생각나는 멜튼 울 오버코트를 한국군도 입었었다. 이 피복은 이미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정복에만 착용하고 전투복용으론 야전상의에 밀려 도태되어가는 물건이었으나 전쟁 동안 많은 생산량으로 인한 재고가 너무 많이 남게 되어 한국군에게도 전달된 것이다. 사병용은 우리가 아는 롱코트였고 장교들에겐 밑단을 싹둑 자른 하프코트가 지급되어서 구별되어졌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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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보급된 오버코트 중에선 카키색이 아닌 한국식인 국방색으로 로컬라이징 된 것도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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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카로는 M1941이 가장 널리 쓰였다. 상술한 울코트가 너무 무겁고 불편해서 나온 물건으로 면으로 만들어 비교적 가벼워서 큰 인기를 얻었다. 스키파카보다는 트렌치코트나 야전상의에 가깝게 생긴 디자인이다. 가장 널리 쓰였으며 역시 색상과 무늬만 바꿔 현역으로 뛰고 계신 피복 되시겠다. 장진호 전투 때 미 해병대가 이걸 입고 찍힌 사진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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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941보단 나중에 나온 물건으로 M1951이라는 스키파카도 있는데 춤추는 대수사선에서 아오시마 슌사쿠가 입고 나와서 유명해졌으며, '''일명 아오시마 코트란 이름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아이템.''' 안감을 여러 가지로 바꿀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당시 현역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지만 정전 이후 생산이 되지 않는 아이템이다.
2.4.2.3. 방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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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존재했다.''' 플라스틱판을 넣은, 방편복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한국군에는 잉여 물자를 받으면서 섞여 들어와 지급된 것으로 보이며 전쟁 후반기에 간간히 보인다. 상당히 가벼워서 미군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인기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당시 한국군의 반응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휴전 후에 한국군은 이 방탄복을 전부 회수하여 경찰용으로 지급했던 것으로 보아 이 방탄복에 만족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에 베트남전 당시 M55, M69 방탄복이 보급되기 전까지 한국군은 방탄복을 쓰지 않게 된다.[26]
2.4.3. 휴전 이후~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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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이후에 쓰인 전투복은 그 이전까지 쓰이던 HBT를 1973년까지 계속 사용하게 된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M1951 필드캡에서 리지웨이캡으로 바뀐 것이 큰 특징이다. 상세한 것은 전투모 문서 참고.
HBT 전투복과 근무복이 둘다 민무늬인데다 둘다 금속 계급장을 써서 구별 불가능하지만(...) 자세히 보면 전투복은 견장대가 없고 근무복은 존재한다. 우리가 전투복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 중 하나인 견장대는 1973년 꽤 늦게 나오게 된다. 근무복의 경우 베레모가 나오기 전 근무모만 착용 가능했던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엔 전투모, 정모 관계없이 착용 가능했던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투모나 근무모나 그게 그거인 디자인일 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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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정복 색상도 흑갈색에서 벗어나지 않은 듯하다. 다만, 이건 의외로 흑색의 동예복일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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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이천시 특수전사령부 충성회관 역사관에서 촬영된 단색 전투복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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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특수전사령부의 전신인 제1공수특전단의 경우 초창기인 1958년~1960년까지는 일반 카키색 전투복을 입었다가, 1961년~1963년 동안에는 덕헌터 패턴(58패턴 덕헌터)의 위장 커버올(이천 특수전사령부 역사관에서는 '원피스형 특전복' 이라는 이름으로 분류)을 입었다.(# @) 사진은 1961년 5.16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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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는 작업복이라고 하는 민무늬 전투복을 착용하였다.
일반 민무늬 전투복이랑 다른점은 손목을 조절할수가있고 주머니가 덮개가 각지다는 점이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육군등등에서는 리프철모피를 사용했지만 해병대는 덕헌터,큰무늬 철모피를 사용해서 다른점을 볼수가 있다.
이 민무늬 작업복은 해병대가 60년대 부터 90년대 구형 3군통합복을 입기 전까지 계속 착용했다.
2.4.4. 베트남 전쟁 및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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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이 터지고 대한민국 국군이 월남에 파병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HBT가 너무 덥다는 의견이 지적되면서 더운 인도차이나 기후에 맞춘 정글복이 나오게 된다.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 나오는 특유의 후줄근한 전투복이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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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육군 파병부대는 상술한 정글복을 입었지만 월남에 파병한 해병대 청룡부대는 한국형 덕헌터 패턴의 전투복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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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이천시 특수전사령부 충성회관 역사관에서 촬영된 충정복의 사진)
특전사는 1961년~1963년까지는 민무늬 전투복 위에 덕헌터 패턴(58패턴 덕헌터) 위장 커버올을 겹쳐 입었고, 월남 파병때에는 덕헌터(58패턴)[27] , ERDL, 타이거스트라이프 등 현지에서 사제로 조달한 다양한 전투복을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월남 파병 종료 후에는 덕헌터 패턴의 조약돌 무늬를 일그러뜨린 일명 '충정복' 을 입었다. 이 패턴의 전투복은 이라크, 에티오피아 등 중동, 아프리카 국가에도 수출되었으며, 그래서 서구권 밀덕들에게는 'noodle pattern camo'로 알려져있다. 특징으로는 바지 밑단 양옆에 지퍼가 달려있어서 고무링을 할필요가 없었는데, 실제 착용예를 보면 대부분 고무링을 차고 있다. 이러한 디자인은 초창기 공수특전단에서 착용하던 원피스 위장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충정복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 특전사가 착용하고 온갖 말 못할 범죄와 패악질을 저지른 역사 때문에 매우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하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이천의 특전사 사령부 역사관에서도 충정복(1972년~1981년 형)을 충정복이라 부르지 않고 '''개구리색상 특전복(...)''' 이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얼버무려 부르고 있는 걸 알 수 있는데, 이쯤되면 사실상 특전사에서도 충정복은 '''이름을 말하면 안 되는 복장'''으로 흑역사 취급받고 있는 수준.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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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충정복은 독사복으로 교체되는데, 위 사진의 주인공은 5공수특전여단 소속으로, 1982년에도 이렇게 충정복과 독사복 패턴 위장무늬 전투모를 혼용한 사진도 존재하는 걸 보면 충정복과 독사복이 상당기간 혼용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당시의 특전사에서도 내심 찔리기는 했던 모양인지, 실제로 그 시대에 특전사에서 군생활을 했던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5.18 이후에도 아직 물량이 많이 남아 있었던 나머지 충정복은 공수교육생 훈련용 혹은 생존 훈련장 훈련용 등 대민 접촉이 없는 훈련 때에 입는 훈련복(즉 CS복) 용도로 사용하는 식으로 소모되었고, 대민 접촉이 많은 부대의 부대원들이나 훈련·외출·외박 나가는 부대원들은 이미지 때문에 착용을 자제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었다고 한다.
특전사 외에도 1970년대~1980년대 기갑병과 역시 충정복을 지급받았는데, 전차 승무원을 위한 충정복 패턴 야전점퍼, 충정복 패턴 원피스형 승무원복 등을 지급 받았다. 또한 1979년 8월의 민방위 훈련을 담은 대한뉴스 제 1253호-수도권 민방위 훈련 동영상에서는 수도경비사령부 기갑병과 BGM-71 TOW 운용병들이 일반형 충정복을 입은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특전사 위장복이 독사복으로 변경되면서 기갑병과에는 독사복패턴 복장이 지급되지 않자, 일부 간부는 사제독사복을 구매하여 착용하였다고 한다.
충정복은 무릎덮댐, 엉덩이덮댐, 팔꿈치덮댐 등 실용적이었다.(특이점으로 발목부근 지퍼가 있다.) 이후에는 무릎덮댐 등이 생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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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중반~후반동안 잠시 해병대와 UDT 등 해군쪽 부대에서 착용한 레오파드 위장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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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조선의 관모인 사모에서 영감을 얻은 반깡통모도 처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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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되어 위세를 부리면서 대통령경호실 및 배속된 군 병력들에게 독자적인 정복을 지급하였다. 기본 디자인은 육군 장교 정복과 같지만 부착물을 다르게 하고 샘 브라운 벨트를 찼는데 샘 브라운 벨트 때문에 나치스 친위대를 모방했다는 소문이 났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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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도방위사령부) 병력에게는 수도 서울과 대통령을 지킨다는 자부심을 주고 거북선을 만드신 충무공 정신을 본받아 국가에 충성을 다하라는 의미로 거북 등껍질 무늬가 새겨진 유신복을 지급하였다. 이 패턴은 시가지를 무대로 전투를 벌이는 수경사의 특성에 맞춰서 제작되었는데, 이런 패턴은 위장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것이 아니라 눈에 혼란을 주기 위함인 듯 하다. 일각에서는 적의 시야에 혼란을 주어서, 부대의 인원수를 파악할 수 없게 하기위해서라고도 한다. 유신복은 오로지 수경사에만 지급되었고, 그 이외의 국군의 그 어떤 부대에도 지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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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월남전이 끝나갈 때쯤 국군은 새로운 전투복을 내놓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전투복에 견장대가 생기게 된다. 일반 병력에게는 충정복 등 위장복을 쓰지 않고 민무늬 전투복을 계속 지급한 것은 1970년대까지 유럽이나 미국도 그랬듯이 위장복은 특수부대의 상징이라는 이미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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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당시 병역의무를 마치면 지금의 전역복 비슷하게 '예비군전투복'이라는 명칭의 위장복을 딱 한 벌 지급했다. 사진은 이 당시 예비군들의 모습. 현역에 비해 모든 장비가 뒤떨어지는 당시 예비군이지만 전투복만은 현역보다 더 나았던 셈이다. 하지만 아래에 나오는 '김일성 만세' 사건 때문에 1990년도에 폐지되고 현역때 전투복을 전역복으로 주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2.4.5. 제5공화국 시절
전투모의 경우 전투모가 반깡통모에서 야구모자로 바뀌었다는 점 외엔 큰 차이가 없다.
특수부대의 위장복은 미군의 영향을 받아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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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도인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해군 정보부대에서 사용한 타이거 스트라이프 패턴 위장복이다.(해군 정보부대는 밑에 DPM유사패턴외 해병대 벽돌무늬 위장복,특전사의 충정복,UDT의 해마복등등을 착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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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당시 정보부대에서 사용한 위장복이다. 사용한 붓으로 그은듯한 DPM위장패턴과 비슷한 디자인이다.
특이하게 영국위장패턴 스타일에다가 위장패턴 종류만 조금씩 다른게 3~4가지가 있다.
이후에는 통합되어서 아래의 투톤어반 위장복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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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이천시 특수전사령부 역사관에서 촬영된 독사복의 사진)
특전사의 경우는 1980년대 초반에 충정복을 폐지하고, 미군 우드랜드 BDU의 영향을 받은 '독사복'을 도입하여 3군 통합 위장복 도입 때까지 사용하였다. 참고로 이 독사복 위장패턴은 3군 통합 위장복에 비해 많이 진하고 어둡다. 무릎 덮댐,엉덩이덮댐등등이 생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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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DT의 경우는 미군 ERDL 위장복 패턴을 변형한 '해마복'을 사용하였다. 위장패턴의 느낌이 약간 흐릿하다. 특전사의 독사복이 정식 인가된 위장복인 것과 달리 해마복은 착용이 묵인된 부대피복이었다.
특이하게 전투복 스타일이 정글 퍼티그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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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의 경우는 '큰무늬' 또는 '벽돌무늬'로 불리는 위장복을 사용하였다. 이 또한 정식 인가된 위장복이 아니라 착용이 묵인된 부대피복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에는 작업복이라는 민무늬 전투복을 입지만 큰 훈련이나 행사 등에는 위 위장복을 착용하고 나왔다.
전투복 디자인은 허벅지 부근에 담배주머니가 있는것도 있고 건빵주머니가없는것도있고 담배주머니가 없는등등 전투복 디자인이 은근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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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경호실 배속 병력은 미군 전투복처럼 상의를 내어입고 상의 아랫부분과 바지 옆에 주머니가 추가된 '엘리트복'이라는 전투복이 지급되었다.
2.4.6. 1990년대 후반~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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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대한민국 국군은 1990년대부터 꾸준한 연구를 거듭해 온 결과, '''1996년 마침내 한국형 우드랜드 패턴 위장무늬 전투복을 개발해내는 데에 성공한다.'''
위에서 4번째 사진처럼 초기형은 많이 어둡고 갈색은 거의 고동색이였고 초록색은 어두운 녹색이였다.
후기형은 우리가 많이 익숙한 밝은국방색,갈색등등으로 밝은위장패턴,단추,재질등등 개량이 되었다.
이후에는 신형 국군 통합복으로 변경되었다.(특전사, 해군특수전전단,해병대, 항공구조사 등은 각각 다른 전투복으로 변경되었다.)
기타사항으론 특전복,기습복,해군특전복등등은 위장무늬는 똑같지만 주머니 모양,담배주머니 추가되는등등 디자인은 부대마다 차별화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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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CCT,SART등등에서는 작전복으로 더 진한 패턴의 독사복을 위장복으로 사용했다.
상의는 5포켓이고 하의는 특전복과 비슷하지만 특이점으로 허벅지 부근에 작은 칼주머니가 있다.
이 피복은 최소 2000년대 후반까지 존재한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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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일부 부대는 이런 군복을 90년대 말부터 2000년 중~후반까지 사용한걸로 추정된다. 저 첫번째 사진은 2000년도 이전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푸른 빛이 도는 회색,검은색으로된 투톤시티어반 위장패턴 군복을 입었다. 현재는 디지털화된 군복으로 변경되었고 최소 200X년도 이후에 디지털 군복의 보급이 시작된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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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03년까지 파병부대가 착용한 사막6색 전투복이다.
초창기에는 미군처럼 4포켓+무릎덮댐등등 미군 전투복과 비슷하고 무늬가 약간 어두웠고 자갈돌무늬가 적었다.
상록수부대부터 국군 전투복처럼 2포켓으로 변경되고 다산,이라크파병 초창기당시 위장무늬가 밝아지고 무늬가 많아졌지만 얼마지나지않아 사막4색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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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년초반~08후반까지 파병부대가 착용한 사막4색 전투복이다. 보다시피 국군 통합4색을 사막4색으로 변경한것이다.(여담으로 외국군들이 카페오레 데저트라고 했다고 한다.) 이 전투복은 후에 일부 유격대에서 CS복으로 사용되었다.
08년후반까지 착용한뒤 사막4색을 픽셀화한 사막픽셀로 변경되었다.
2.4.7. 2010년대
2010년대 들어서 기존의 개구리 무늬 전투복이 사라지고 디지털 무늬로 바뀌었다.
그외 군복 패턴참고
3. 분류
군인복제령에 의하면 군복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한다.
- 군모: 예모, 정모, 전투모, 특수모
- 제복
- 군화: 단화, 전투화, 특수화
- 계급장: 정장, 약장, 군모장, 견장, 수장
- 표지장: 모표, 휘장, 정근장, 완장, 상장, 명찰, 견식, 금장, 장성급 장교 표지 및 특수복에 다는 표지
- 예식도
- 특수군복
군인의 복장의 구분과 차림새는 원칙적으로 다음과 같다.
2017년 4월 말부터 이런 식의 개정안이 예정되었다. 실제 공포 시기는 같은 해 9월 29일.
3.1. 군용속옷
전군 공통이다. 단 여기서 서술한 내용은 전적으로 남군의 것이므로 여군용은 여군 보급품 문서를 참조할 것. 기타 내용은 브레이브맨 문서 참조. 링크 참조
전군 공통으로 군인의 경우 군용으로 생산된 군용반팔런닝 & 군용삼각팬티를 입게된다. 최근에 나오는것은 런닝 & 팬티 모두 60수 실켓원사로 만들어져서 품질도 좋아졌고 웬만한 저가형 사제속옷보다 좋다. 짝퉁하고 헷갈리지 말자… 진품의 경우 군용반팔런닝은 상의 밑단부분에 계급과 이름쓰는 태그가, 군용삼각팬티의 경우 팬티 앞부분에 계급 & 이름쓰는 태그가 각각 붙어있다.
군용반팔런닝과 군용삼각팬티는 군별로 색만 다를 뿐 동일하다. 육군은 국방색 & 황토색, 해군은 감색, 공군은 흰색을 지급 받는다.군복쪽에서는 미군의 그것보다 떨어진다는 소리를 듣지만 군용속옷의 품질에서 만큼은 미군의 군용속옷보다 훨씬 부드럽다. 2005년 이후 60수로 바뀐 이후에는 더더욱 그렇다.
현재는 위에 더해 디지털 무늬 면티, 스포츠 소재 반팔티, 드로즈 팬티, 사각 면팬티가 지급되고 있다.
3.2. 기타 집단
3.2.1. 사관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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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해/공군사관학교 생도 근무복
짙은 녹색이 육군사관학교, 검은색이 해군사관학교, 파란색이 공군사관학교이다.
육사 근무복은 녹색 하의에 검은색 상의로, 이 사진에서 생도들 대부분이 근무복 위에 점퍼나 스웨터를 입고 있는데 유독 한 생도만 동근무복만 입고 있어 튀어보이는 것이다. 스웨터를 입은 생도들의 근무복 옷깃을 잘 보면 그 생도와 마찬가지로 상의가 검은색임을 알 수 있다.
3사 생도의 경우 장교용 근무복과 동일한 근무복을 입는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육사 생도들도 장교용 근무복을 그대로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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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 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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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사관학교 예복[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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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사관학교 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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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3사관학교 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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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간호사관학교 예복
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한 사관학교에는 제복이 존재한다.위에 것들 보다는 근대적 느낌이 풍기는데 대한제국 군복을 기반으로 제작되었기 때문. 육해공사나 국간사의 경우는 4년, 육군3사관학교의 경우는 2년 동안 입게 되지만 일반적인 제복과 예복이 같이 지급된다. 보통 학과출장 때는 일반적인 제복을 입지만 각종 행사나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치를 경우 예복을 입은 상태에서 행사에 참여한다..
그런데 육군사관생도와 공군사관학교 정복은 구조가 특이하다.
- 상의가 단추가 아닌 지퍼식으로 되어 있다.[31] 그런데 진짜 특이한 이유가 뭐냐 하면 지퍼의 방향. 아래에서 위로 채우는 일반적인 지퍼상의와는 정반대로 위에서 아래로 채우는 구조로 지퍼가 달려있다. 이유인 즉 생도제복을 츄리닝 상의처럼 지퍼를 반만 채워서 입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또한 지퍼를 옷 하단에서 결합할 때 필연적으로 고개를 숙이게 되는데, 사관생도가 고개를 함부로 숙이면 안된다 하여 지퍼를 옷 상단에서 결합하도록 했다고 한다. 가입교 훈련 때 적어도 두 번은 듣는다.
- 바지에 앞주머니가 없다. 이유인 즉 입수보행을 막기 위해서이다.
반면에 해군사관생도의 평상 제복은 해당 군 장교 정복·근무복과 구조가 같고 부착물만 다르다. 예복은 3군 모두 구조가 동일하다.
생도 각자의 사이즈에 정확히 맞춰 제작했기 때문에 소위 임관 후에는 집에 가져가고 반납받지 않는다.
3.2.2. 학군사관후보생
몇몇 잘못 알고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학군단의 제복은 단복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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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학군사관후보생 단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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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해병대 학군사관후보생 단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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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학군사관후보생 단복.[32]
육군과 공군 학군사관후보생의 제복은 모자와[33] 와이셔츠의 색깔만 다를 뿐(육군 흰색, 공군 파란색) 구조나 디자인이 동일하고 해군과 해병대 학군사관후보생의 제복은 해군/해병대 장교의 정복, 약복을 그대로 카피했다.
이 단복은 졸업 후 임관할 때 반납하는 품목이 아니다.
3.2.3. 사회복무요원
사회복무요원은 기초군사훈련 3주(2021년부터) 후 이등병 계급을 달고 사회로 배출되기 때문에, 훈련소 퇴소 시 새 전투복 1벌을 지급해 준다. 경우에 따라서는 훈련 1~2주차에 바로 지급하고, 이것을 CS복과 달리 A급으로 구분해서 휴일용으로 입게 하기도 한다. 이유로는 종교행사 때 현역과 마주치게 되는데, 꿀리지 말라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있는데, 반대로 정작 현역 훈련병들은 CS복을 입고 오기 때문에 명찰 오바로크까지 되어 있는 사회복무요원 훈련병들 A급에 기가 죽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걸 입고 예비군훈련을 받으면 된다. 물론 훈련소를 수료한 사회복무요원이 예비군훈련을 받게 되는 것은 최소 1년 8개월 후이니 그 때 받은 그 군복이 맞지 않거나 어디에 짱박아 놨는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개구리 예비군 마크도 나눠주는데 오바로크 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재미있는 점은 군복을 입고 전역하는 전역자와는 달리 훈련소 수료자는 군복을 입고 집으로 가지 않는다는 거. 보통 3주 전에 입고 온 사복을 그대로 입고 가기 때문. 사실 훈련소 퇴소일 자정까지는 법적 신분 상 군인이기 때문에 입고 가도 상관은 없다. 단, 육군훈련소의 경우 부대 내 사병이 퇴소식 당일 계급장과 사단 마크 떼고 수료자들과 섞여 나갈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퇴소자들에게는 사복을 입게 한다. 게다가 군사경찰대가 우글거리는 터미널 같은 곳에서 개구리도 없고, 사단 오바로크도 없고 계급장도 없는 군복을 입고 다니는 짓은 매우 귀찮은 사단을 유발할 수도 있다. 실제로 한 소대장(교관)도 "너 군사경찰한테 잡혀서 훈련소로 다시 반송되고 싶으면 한번 전투복입고 집 가봐" 라고 이야기 하기도 했다. 육군훈련소 외에도 일부 지역방위사단(구 향토사단)의 경우 군복을 입은 채 수료식을 진행한 후 즉시 퇴소하는 경우가 있다. 모 사단의 12년도 11월 입대자들은 수료식 후 생활관에 복귀해서 30여 분을 기다려서야 개인 소지품을 넣어둔 가방을 받아 퇴소한 바 있다.
좀 특이한 예로 산림청 근무요원은 2017년 근무복 통일 전까지는 전용 리자드 패턴 전투복을 근무복으로 입고 다녔다.#[34] 국가정보원 근무 요원은 시티어반 패턴 전투복을 근무복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려져 있다"인 이유는 기밀유지를 요하는 근무지 특성상 언제부터 도입했으며 그 이후에 교체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알 길이 없기 때문. # 참고로 2020년 기준으로 국정원에는 사회복무요원이 더 이상 배정되지 않는다.
3.2.3.1. 사회복무요원 제복
자세한 것은 사회복무요원/유용한 정보 문서를 참고.
3.2.4. 의무소방대
소방공무원/제복 문서 참조.
3.2.5. 의무경찰
경찰공무원/제복 문서 참조.
4. 이런저런 얘기거리
4.1. 앞가리개의 정체
전세계 군대의 전투복 중에서 현재까지 한국군만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채용하고 있는 의복 장식이다. 한국 군대에서는 춘추동에 전투복을 착용 시 앞가리개를 꼭 채워야 한다. 그리고 여름[35] (정확히는 6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에는 더위를 이유로 앞가리개를 풀어야 한다.[36] 따라서 용도만 놓고 보면 마치 보온용이라 생각하기 쉽겠지만 국방부의 설명에 따르면 위장 시 가슴 피부 노출을 막는 장치라고 한다.
하지만 국방부 의도와는 다르게, 일부 부대에서는 지휘관이나 부대방침에 따라서 전시 전사자의 한에 넋을 기리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으로[37] , 앞가리개 단추를 채우는 것을 금지하는곳도 있다.
이러한 앞가리개의 본래 정체는 2차대전 당시 미군의 '가스 플랩(Gas flap)'이었다. 목부터 셔츠 하단까지 이어진 가스 플랩은 화학가스가 전투복 목과 단추 틈으로 침투하여 피부가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도입되었지만, 1960년대 중반 OG-107 전투복의 세 번째 개량형부터는 제거되었다. 이는 화학신경 가스의 발전으로 인해, 더이상 전투복 수준의 방어복으론 가스를 방어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38]
그러나 한국전을 거치며 공여된 미군 전투복의 가스 플랩을 국군은 목을 가려주는 미관상의 용도로 이해하였고, 그 결과 지금까지 용도불명의 앞가리개가 국군 전투복에 남아있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군의 앞가리개는 목부터 셔츠 상단까지 밖에 가려주지 않아, 본래의 화생방 용도로는 전혀 사용할 수 없다.
4.2. 사실 아무 때나 입을 수 없다
군복 및 군용장구의 단속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전역 후(예비군훈련 등 제외)에는 전투복을 포함한 각종 군복이나 군장구류 등을 착용할 수 없고, 이를 위반하면 처벌을 받으나, 사실상 지켜지지 않는 규정이다. 가을에 벌초 한다하면 때타도 상관없다며 군복바지에 워커 신고 오는 친척들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니... 일반인은 그다지 관심이 없으니 크게 이슈가 될 일이 없고 예비군 때문에 무작정 바깥에 군복 입고 다니는 사람을 잡기도 애매하다. 물론 군에서 작정하고 잡겠다고 하면 예비군의 경우 소집 통지서 및 예비군 훈련만 확인하면 바로 걸러낼 수 있으니 못하는건 아니고 굳이 단속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안 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2020년 들어 일부 군사 컨텐츠 유튜버가 디지털 전투복을 입고 촬영한 영상이 고발이 들어가 기소유예를 받는 경우가 생겼다.
정확히는 법제상에 현용 한국군 및 동맹군인 미군 등의 전투복을 포함한 군복과, 이와 비슷하게 생긴 유사군복 및 유사군장구류를 이유없이 입고 다니면 안 된다고 되어있다. 관련된 범죄 사건이나(국군인 척 하고 안심시킨 뒤 사기 등의 범죄를 저지른다거나) 북한 무장간첩 등과 구분하려고 1973년에 제정된 법. 때문에 '현용' 한국군용 혹은 미군용 등이 아닌 전투복[39] 이나 더 이상 현용으로 쓰이지 않는 구형 전투복[40] , 하의나 상의 정도를 밀리터리 룩으로 입는 것에는 이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서바이벌 게임이나 코스프레 행사 등은 미리 신고하고 할 경우 '행사용'으로 간주되어 역시 적용되지 않는다. 다만 행사 전이나 끝나고 나서는 옷을 평상복으로 갈아입으면 된다.
4.3. 내게 맞는 군복 사이즈 찾기 - 군용 피복류 표기법
과거엔 전투복과 같은 군용 피복류 사이즈를 1호, 2호, 3호 식으로 1호부터 10호까지 분류하여 숫자가 클수록 작은 사이즈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부터 '피복류 국방규격'을 전면 개정하여 과거 1호, 2호식의 분류가 아니라 '90M160' 과 같이 새로운 분류로 규격을 전면 개정했다. 개정된 [국방규격]에는 피트(fit)성 분류에 따라 피복류의 표기를 다르게 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고피트성으로 분류된 전투복류와, 중피트성으로 분류된 야전상의만 서술한다.
4.3.1. 전투복, 훈련복류 (고피트성)
고피트성인 전투복류는 상의는 '가슴둘레-성별-신장(키)'로 분류한다. 남군용 전투복중에 가장 작은 사이즈인 '90M160'의 경우 '가슴둘레 90cm - 남성용 - 키 160대'라는 표식이다.
전투복 하의의 경우 '허리둘레-성별-신장(키)'로 분류한다. 남군용 전투복중에 가장 작은 사이즈인 '70M165'의 경우 '허리둘레 70cm (28인치) - 남성용 - 키 165대'라는 표식인 셈이다.
4.3.2. 야전상의, 우의, 점퍼류 (중피트성)
중피트성인 야전상의류의 경우 '성별-가슴둘레-키구간'으로 분류한다. 키구간은 '소, 중, 대, 특' 4개 분류로 나뉘며, 남군용 야전상의 중 가장 작은 사이즈인 'M90소'는 '남성용 - 가슴둘레 90cm - 작은키'라는 표식이다.
4.3.3. 특수 사이즈 표기
여군용이나 특제 사이즈의 경우 성별표기가 다른데, 여군용은 '85W155'처럼 'W'이 붙는다. 예를 들어 전투복 상의의 경우 '85W155'는 '가슴둘레 85cm - 여군용 - 키 155cm'이고 라벨에 한글로 '여군용'이라는 표식이 추가로 붙는다. 덧붙여 85W155사이즈는 전투복 상의중에 가장 작은 사이즈이며, 야전상의의 경우 'W85소'가 가장 작은 사이즈이다.
가슴둘레 110대부터는 특제사이즈인 'S'라는 표기가 붙는데, 현 규격상 가장 큰 전투복 상의는 '125S180'이며 야전상의는 'S125특'이다.
2013년 국방부가 전투복 치수 규격을 다시 개정할 계획이라고 언론에서 밝혔다. 그러나 기본적인 표식방법은 크게 바뀌지 않을 듯. 당분간은 이 규격이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4.4. 예비군복에 '김일성 만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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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역사가 있는데, 1987년 '김일성 만세' 무늬 사건이 벌어져 1990년 초에 완전 퇴출되는 사건이 있었다. 찾아낸 게 대단할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일화.
지금이라면 어떻게 저게 '김일성 만세'냐며 코웃음치며 끝날 일이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를 보여주는 일화다. 심지어 '붉다'라는 말 자체도 함부로 말하거나 노래 가사에 넣으면 '공산당 찬양'이라면서 금지곡이 되고 잡혀가던 시대다.
참고로, 과거 고등학교 교련 수업용 훈련복 위장무늬는 글자를 가지고 도안된 경우가 많았다. 해당 제작사 이름이나, 해당 학교, 고등학생을 뜻하는 한자 高 등등.
4.5. 하복?
원래 전투복엔 하복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하/동 구분 없이 여름엔 긴 팔을 걷어올려 입고 다니고들 했었는데… 원래 천이 얇고, 뒤집어 안감을 자세히 보면 바둑판 무늬가 새겨진 간부용 전투복이 2004년 7월 입대자들부터 1벌씩 지급되기 시작했다. 2007년 4월부터는 두벌씩 지급. 그간 은근히 두꺼운 '동복'으로 여름을 나야 했던 것과 비교하면 비약적인 개선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불편함은 디지털무늬 신형전투복을 처음으로 지급받던 2010년대 초반 군번도 똑같이 이어져(...) 디지털무늬 하복없이 “사계절용”으로만 전투복을 지급받았다. 더군다나 해당 사계절용 디지털 군복은 구형 얼룩무니 전투복 동계보다 더 두꺼웠던지라 여름에 각종 애로사항이 꽃피었고, 부랴부랴 2013년도 중반부터 구형 얼룩무늬 전투복 하복과 비슷한 개념의 하복이 별도로 지급되기 시작했다. [41]
일단 하복의 경우 동복과 비교해서 굉장히 가벼운 이유로 아무래도 교육&훈련용으로 선호받지만, 두께가 얇은 만큼 내구력이 부실하여 자주 꿰메입는 일이 발생한다고. 게다가 예상치 못한 문제로 전투복 한벌(보통 동복)을 A급으로 빼놓게 되니 겨울에 전투복을 빨 경우 하복을 입고 근무를 나가야 하는 지옥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덕분에 전투복 빨래를 함부로 할 수 없는 불편함이 생겼다.
4.6. 윗도리 좀 꺼내 입으면 안 되나요?
신형전투복이 지급되는 지금이야 전투복 상의를 내어 입게 되어있지만 개구리 군복 시절에는 육군 규정상 유격 훈련 중을 제외하면 전투복 상의를 하의 속에 넣어서 입어야 했다. 물론 병장, 고위 부사관, 그리고 예비군은 상의를 꺼내입길 즐겨했다. 이 경우 짬을 먹은만큼 좀 규정에 버팅기고 싶은 심리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상의를 바지 밖으로 내어 입는 것이 기능상으로도 우수하다. 상의를 넣어 입고 군장 착용시 허리띠 위에 바로 탄띠를 두르게 되는데, 여기다 완전군장 배낭까지 메게 되면 허리에 가해지는 피로와 압박이 상당하다. 상의를 내어 입게 되면 허리띠와 탄띠 사이에 한겹 완충재를 대는 셈이니 그런 기능성 면에선 더 낫다. 실제로 미군 연구결과에 의하면 허리에 가해지는 하중을 10~20% 사이 수준으로 줄여주고 기온이 높아지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각개전투 등의 구르고 뛰는 훈련 시 상의를 내어입는 편이 바지 속으로 흙 등의 이물질 유입을 막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71~73년 사이엔 기능성 문제로 상의를 내어 입는것이 정식 허가되기도 했었지만. 결국 다리가 짧아 보이고 불량해 보인다는 높으신 분들의 어이없는 논리로 73년에 폐지되어 무려 40년이 지나고서야 다시 내어 입게 되었다.
미군 장군들도 금색 버클에 검정 유광가죽으로 만든 장군용 벨트가 있다. 사실 한국군 장군벨트가 미군 장군벨트를 본따 만든 것이다. 야전 훈련 시에는 일반 탄띠를 차지만 부대 행사 시에는 ACU 전투복 위에 장군용 벨트를 차며, 이 벨트는 상의를 빼입어도 상의 위에 차기 때문에 한국군 장군들이 벨트를 드러내기 위해 상의를 넣어입는다는 군대 속설은 틀린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시상황을 가정한 훈련에서 번쩍번쩍한 표적을 달고 나오는것은 절대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국방일보 기사에 의하면 기능상의 이유로, 그간 여러 번 상의를 꺼내입게 해달라는 청원이 상부로 제출되었지만, 여전히 '단정치 못하다'는 이유로 묵살당했다고. 그러나 2006년 특전사에 지급된 신형 특전복이 처음부터 상의를 내어입는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등, 드디어 차세대 전투복부터 내어입기 방식으로 채택되었다.
그렇다고 상의를 넣어입는 것이 꼭 케케묵은 구식은 아닌 것이, 타국 군의 경우 러시아군은 2018년 현재 평시 영내근무 때는 전투복 상의를 바지 안에 넣어입고 훈련이나 전투 등 군장 착용시에만 상의를 바지 밖으로 꺼내게 한다. 영국군도 20세기 말까지는 전투복 상의를 바지 안으로 넣어서 입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대신 영국군은 탄띠가 바지 허리띠를 겸한다. 미군도 1980년대 BDU가 제식 채용되기까지는 전투복 상의를 바지 안으로 입고 다녔고. 전투복 상의를 바지 밖으로 내어서 입는 것은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병력에게만 한정적으로 지급된 '정글 퍼티그' 전투복에만 허용되었었다. 그도 그런 것이 그 더운 곳에서 상의를 바지에 넣어입으라는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지. 1971~73년까지 전투복 상의를 바지 밖으로 내입도록 한 한국군 복장규정도 미군의 정글 퍼티그를 베트남에서 보고 유래된 것이다.
참고로 전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라는 이스라엘군은 복장 규정이 없다. 군복만 걸치고 있으면 어떻게 입던 아무도 상관 안한다. 대부분 넣어 입기는 한다. 이스라엘군이 군복을 바지에 넣어 입는 것은 영국군의 영향이라는 설이 있다.
2013년부로 예비군도 현역과 마찬가지로 상의를 빼고 입을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42] 훈련의 효율성과 신형 전투복을 입는 현역과의 형평성을 위한 것이라고. 그런데 이에 대한 반응 중 '이젠 상의를 넣어 입어야겠군'이 있다.
개구리 군복 마지막 세대조차 예비군이 끝난 지금에 와서는 완전히 옛날 얘기가 되었다.
4.7. 적외선 위장
적외선 위장의 원리란, 가시광선 영역에서 단색 전투복보다 위장패턴이 들어간 전투복이 시각 분산효과로 위장이 더 잘 되는 원리와 동일하다,[43][44] 적외선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일반 염료로 염색한 원단은 위장패턴 존재여부와 상관없이 하나의 단색으로 보여지며 주변 환경에 어울리지 못하여 돋보이게 된다. 이를 해결하고자 위장패턴을 구성하는 각 색상을 특수염료로 나염해 적외선 반사값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 같은 개념은 냉전 당시 미소 양측의 야간투시경이 점점 발전을 거듭하게 되자 감시수단에 대한 대응으로 발전하여 미군 BDU의 우드랜드 패턴에도 적용하게 되었고, 각 선진국들도 동일한 개념을 채용하게 된다.
적외선 위장 염료에는 내구연한이 있는데, 빨래하면서 물이 빠지면 옷에 염색되어 있던 염료가 감소되면서 위장효과가 저감되기 때문이다.
구형 전투복을 처음 받게 되면 통칭 '짬내'라 불리는 냄새가 났는데 이는 주로 폴리에스터 계열 합성섬유에 의한 냄새로 추정되며, 적외선 위장 염료와의 관계는 아직 알려진 바 없다.
소설 데프콘에서 적외선 위장 코팅이 언급된 이후로 밀덕들 사이에서는 '적외선 위장 = 코팅'이라는 공식이 성립해 있으나 그 출처나 원리는 불분명하다. 그렇게 비실전적이라며 욕 먹는 다림질과도 별 연관이 없다.
4.8. 다림질
구형 전투복을 입던 시절에는 다림질해서 줄을 잡고 맞후임병들에게도 다림질을 해주는 관습이 있었다. 때문에 신병이 전입하면 전투복과 약복을 다리느라 다리미가 남아나지 않아 약복만 다려입고 나가면 되는 선임병들이 맞후임을 받은 병들에게 빨리 하라고 갈구곤 했다.
장교들은 오히려 줄잡기를 하지 않았으며 만약 줄잡기를 하면 '병사 같은 놈'이라는 욕을 먹었다.
신형 전투복의 경우 다림질을 금하고 있으며, 전투복 안에 포함된 사이즈 및 세탁법 표기란에 '다림질 금지'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심할 경우 군기교육대에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이야 약복 다림질은 해도 전투복은 다림질을 하는 사람이 없지만.
한때 다리미질이 적외선 위장 코팅을 벗겨버린다며 비실전적인 행위라고 욕을 먹었는데, 이는 상기한 대로 소설 데프콘의 영향이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이고 다리미질은 적외선 위장과는 별 연관이 없다. 최신 전투복 경향에 의하면 기본적인 방습/투습 기능은 물론, 사용군의 환경과 목적에 따라 방수/방충/방염/방오 기능 등을 다양하게 적용하기 위해 각종 기능성 원단을 사용하거나 특수약품처리를 하게 되는데, 이런 원단에 다리미를 갖다대면 성능저하가 일어나니 당연히 다림질을 금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어텍스 원단에 다리미 갖다대는 멍청한 짓 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신형전투복에는 기본적인 방습/투습 기능이 적용되었으니 다림질을 금지했지만 구형전투복은 위장패턴을 적외선 위장염료로 염색한 것을 제외하면 그런 기능 같은 거 전혀 없었다.
5. 관련 문서
[1] 비행고 작가 作. 참고로 군모를 보면 별이 아니라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이 있다.[2] 서양으로 치면 동양 옷을 만든답시고 흑립에 하카마 입혀놓은 셈(...)[3] 사진상의 군복은 천안 독립기념관 제 5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군복이다. 출처는 독립기념관 블로그.[4] 이당시 중국은 중화민국이었고, 중국 각지에서 각종 군벌들이 활개치던 상황이었다.[5] 홍범도 장군이 부대원들과 찍은 사진 중, 적백내전기 붉은군대의 튜닉을 입고, 부됸노프카를 쓴 부대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6] 독립군의 전투교리는 전력차 때문에, 전면전을 되도록 피하는 대신 지형지물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을 적극 활용하였는데, 이러한 전투교리와 더불어 적군과 비슷한 군복을 입고 피아식별이 어렵게 한 후 교란 및 섬멸하기 위해 일본군복과 비슷하게 만들어 졌다. 실제로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전투에서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군과 교전한 적들이 피해를 입은 이유가 교란으로 인한 일본군 부대끼리의 오인사격이라는 점에 있어서, 효과는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7] 특히 카라장의 형태가 중화민국 북양정부 군벌의 군복 카라장과 동일함.[8] 군복의 세로형 견장과 카라장의 모습을 보고 일본군을 연상할 수 있으나, 이러한 형식은 당시 군벌 대다수가 일본군의 군복 양식을 모방해서 사용하고 있었고, 사진상의 카라장은 일본군의 오목한 오각형이 아닌, 중국 군벌의 튀어나온 오각형 카라장과 동일하다. 당시의 기록들에도 중국에서 군복을 구입해 착용하였다는 기록이 많아 이쪽으로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다.[9] 이 문장에서 "'일본군 군복'이 아닌, '일본 군복을 모방한 중국 군복'"부분을 보고 '그게 그거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카라장의 형상이 다르다는 점이 '일본 군복을 바로 모방한 것'이 아니고, '일본 군복을 모방한 중국 군벌 군복을 보급 및 2차적으로 복제생산한 것'이란 사실을 더욱 명확히 한다.[10] 메이지 45년인 1912년에 제작되어 2차대전기까지 사용된 일본군복이다. 영화 암살 이나, 덕혜옹주에 나오는 그 군복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보면 된다. 45식 군복의 모습들. [11] 다만 특이하게 일본군식의 탈착형이 아니라 박음질 해서 고정시킨 것으로 보이는 견장이다. 견장의 외양에서도 차이점이 있는데, 일본군이나 중국 군벌의 견장과는 달리 독립군 장교 견장의 경우 견장 가운데에 태극문양과 같은 독립군 고유의 특징이 들어가 있는 등 차별화가 된 점을 알 수 있다.[12] 아마 일본군의 보병 병과인 붉은색을 따와 카피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군은 사실상 거의 대부분이 보병이었으니..[13] 다만, 앞서 서술하였듯이 일본군의 경우는 카라장이 안쪽으로 패인 5각형 형식으로 되어있지만, 독립군의 카라장은 볼록한 5각형인데, 이것은 당시 중국 군벌들이 사용한 형식과 동일한 모양이다.[14] 원래 크라운 형식의 정모이지만, 형태가 바로 잡아지지 않는 후줄근한 모습이어서 '사실상' 뉴스보이 캡 또는 인민모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15] 주로 민가나 동굴에 보관하였음.[16] 여군들은 개리슨 모를 착용한 것을 볼 수 있다.[17] 권총집이 달려있고 권총 무게로 벨트가 쳐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권총집 부위에서 권총집 반대편 어깨를 두르는 사선의 띠가 달린 벨트이다. 이 벨트가 만들어지게 된 일화가 하나 있는데, 1857년 영국령 인도에서 발생한 세포이 항쟁 기간 동안의 전투 도중, 부상으로 왼팔이 절단된 영국군 장교 샘 브라운 경이 군도를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자, 벨트에 군도를 고정시킨 채로 패용하여 남아 있는 오른손으로 군도를 바로 뽑아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하여 만든 것이 시초이다. 즉, 고안 당시에는 권총이 아닌 군도를 패용한 벨트가 쳐지지 않게 하는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것.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드라마, 사진 등의 매체에서 이 벨트가 '6.25 전쟁 당시의 북한군 장교들' 이나 '소련군 장교들', 2차대전의 '나치 장교들'이 착용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타 군이 사용하는 모습에 비해 압도적으로)많이 보여지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왠지 '사악한 군대'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사실은 독일군, 미군, 영국군, 일본군 등 2차대전기 추축군과 연합군, 냉전시기 공산권과 자유진영 가리지 않고 여러 군대에서 폭넓게 사용된 장구류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제4공화국 시대 대통령경호실에 배속된 군 장교들에게는 샘 브라운 벨트가 지급되었다.[18] 청천백일기 모표가 태극무늬로 바뀌고, 카라에 부착하는 금속제 계급장이 견장 형태의 계급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병과장을 카라에 부착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19] 옷의 외형 자체는 차이가 없고 계급장이나 병과 표식 등의 군용 부착물을 추가적으로 붙이느냐 안 붙이느냐의 차이가 있었다.[20] 대부분의 국가에 적용되는 전투복-견장 일체형 옷과는 달리, 광복군 견장은 소련군, 또는 인민군과 비슷하게 견장과 옷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21] 무장친위대 위장복의 경우는 정규군 보다는 KLO측에 주로 지급되었다. 문서 참조 [22] 6.25 전쟁당시의 국군 군장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고싶으면 기타자료들을 참고[23] 국군 육군 전투복의 변천사[24] 카키색에서 국방색(올리브 그린)으로.[25] 출처[26] #[27] 1961년~1963년에 입은 원피스형 커버올이 아니라, 일반적인 셔츠와 바지로 구성된 전투복 형태[28] 광주에 위치한 5.18 자유공원의 자유관에는 아예 이 충정복이 전시품으로 전시되어 있으며(다만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인지 위장패턴은 오리지널 충정복의 그것이 아니다), 정기적으로 광주에서 열리는 5.18 전야제의 재현 행사에서도 소품으로 충정복 위장 커버 헬멧과 충정복이 그대로 등장하기도 한다.(2006년 전야제 2010년 전야제) 다만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고증오류로, 5.18 당시 특전사의 정확한 복장은 일반 보병용 한국형 리프패턴 철모(충정훈련용 방석망을 붙인) + 충정복 조합이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이 복장을 (방독면을 제외하면) 거의 정확하게 고증했다. [29] 기록에 따르면 5월21일 광주에서 물러날때까지는 충정복을 착용하였으나, 마지막 5월 27일의 도청진압작전에 참여한 특전사는 일반 보병 복장(급하게 임시로 지급받은 복장이라 부대 마크나 표식 등이 없음)으로 위장하고 작전에 참여했고, 실제로 당시에 찍힌 컬러 영상기록들(출처 : KBS의 5.18 다큐멘터리 '80년 5월 푸른눈의 목격자, 힌츠페터')로도 확인할 수 있다.[30] 2014년 기준으로 바지의 옆줄이 빨간색으로 변경되었다.[31] 공군 여생도 정복은 단추식이다. 그러나 그것만 다를 뿐 다른 특징들은 타 생도 복장과 공유한다.[32] 2013년 한국교통대학교 학군단 창설 때의 사진으로 지금은 모자가 개리슨모로 바뀌었고 육군 학군단처럼 왼팔 어깨 쪽에 학군단 부대마크가 부착된다.[33] 현재는 개리슨모를 쓰고 있다. 베레모가 전멸한 것으로 보아 완전히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34] 국내생산품인 이 전투복은 원래 로디지아군 수출용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내전 이후 로디지아가 짐바브웨로 바뀌면서 수출이 중단되자 처치곤란이 된 남은 재고를 사회복무용으로 도입한 것이다.[35] 최근 하복에는 앞가리개가 없다.[36] 여군은 계절에 관계없이 항상 채워야한다.[37] 전시 사망할 경우 위로 하는 마음으로 앞가리개 단추를 채워주는 행위[38] 이전 문서에서는 미군에서 가스플랩이 없어진 이유를 미군이 티셔츠나 런닝 셔츠를 안에 입기 때문이라고 서술하였으나, 미군은 2차대전때 이미 티셔츠를 입었으며 안에 아무것도 안입고 다니는 일도 많았다. 미군에게 가스 플랩은 그저 화생방 수단이었지, 미관을 좋게 하기 위한 물건이 아니었다[39] 예를 들어 독일연방군에서 사용중인 플레크타른 패턴의 전투복의 경우 현용이긴 하나 한국군, 미군의 전투복이 아니며 디자인도 혼동의 여지가 없을 만큼 명백히 다르기 때문에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40] 신형 디지털 전투복 보급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현용이 아니게 된 구형 우드랜드 전투복이나, 그보다 더 오래 된 민무늬 전투복은 입고 다녀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41] 하복의 경우 기존 전투복보다 얇은것은 물론이고 좌우 팔에 달려있던 주머니가 삭제되어 기본적으로 소매를 접어올리기 편한 형태로 되어있다.[42] 이때는 아직 현역조차 개구리 군복이 남아있었으니 예비군은 당연히 전원 개구리였다.[43]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arm&no=842958[44]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arm&no=560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