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방송/역사

 


1. 설립 배경
2. 개국
3. 1960년대, 무명 방송국
4. 1970년대, 방송왕국 TBC
5. 1980년, 폐국직전 상황
6. 주요 편성 프로그램
7. 언론통폐합과 폐국의 비극, 그리고 31년동안의 휴방기
8. JTBC 개국
9. 관련 자료


1. 설립 배경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이 정치를 한번 해 보려고 했지만 이건 좀 아니다는 판단을 하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선택한 게 언론사업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김규환[1]이 설립한 RSB 라디오서울과 김용우가 설립한 DTV를 인수하여 TBC는 탄생한다. 그리고 1965년 만들어진 회사가 중앙일보다. 참고로 국제신보를 소유한 럭키그룹도 TBC 경영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사업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사업에서 철수했다고 한다.[2][3]

2. 개국


동양방송의 전신인 RSB 라디오서울의 개국방송. 목소리의 주인공은 최계환 아나운서.
RSB 라디오서울로 개국하였으며, 1964년 5월 9일 정오부터 출력 20kW, 호출부호 HLKC, 주파수 1380kHz로 전파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후 1964년 12월 7일 DTV라는 이름으로 서울 충무로 1가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으며 서울 TV가 개국한 후 5일 뒤인 12월 12일 부산 대교동 1가에서 동양방송 부산국이 개국했다.[4] 호출부호와 채널은 서울이 HLCE 채널 7번이었고 부산은 호출부호 HLKE 채널 9번이었다.[5] 1965년 8월 3일에는 방송국의 이름을 JBS로 바꾸고 1965년 12월 7일 중앙일보와 함께 중앙매스컴센터(현재 중앙일보 사옥)로 입주한다. 하지만, 사세가 커지고 삼성의 투자가 계속 되면서 각자 독립해 있던 라디오 방송과 텔레비젼 방송이 합병, 1966년 7월 1일을 기점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TBC 동양방송'''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6] 이후 재정난에 시달리던 서울FM을 인수, 1966년 8월 15일에는 동양 FM을 개국하며 FM 라디오 방송 시대를 열었다.[7]
본디 개국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방송이다. 라디오 방송을 개국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무선국 설치 가허가[8]를 받은 김규환[9]이 이재형을 회장으로, 삼성그룹이병철과 럭키금성의 구인회 그리고 조병학을 이사로 추대하여 서울방송주식회사 를 1963년 6월 25일 경기도 인천시 용현동 287번지[10]에서 설립했다. 설립 이후 1963년 7월 18일 서울 중구 동자동[11]에 준비사무실을 마련하여 본격적인 개국 작업에 착수했는데, 방송기재 도입을 위한 외화를 배정받지 못해 개국 준비가 수월치 못했다고 한다. 겨우겨우 인천국제복음주의 방송국[12]에서 쓰던 중고 송신기를 3만달러에 인수해 직접 수리해서 쓴다. 당시 일하셨던 분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기자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밤을 새워가며 정비하고 시험해 보는 것으로 바쁘게 움직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역부족이었는지 결국 방송을 위한 기기들을 직접 생산해 사용하기로 하고, 가허가 기간도 1964년 8월 31일까지 연장한다.
이후, 1963년 12월 24일 경기도 시흥군 서면 철산리 37번지[13]에 송신소를 완공하고 나흘 뒤인 12월 28일 시험전파를 발사했는데, 이는 최초 가허가 만료일 3일 전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또 발생한다. 본디 가허가는 출력이 10kW였으나, 송신출력이 20kW인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에 사옥을 1964년 1월 6일 서울 태평로1가 동양화재 사옥[14]으로 이전하고[15], 체신부에 출력변경 및 호출부호 변경을 신청한다. 이것에 대하여 허가가 떨어진 것이 동년 3월 12일이었다.[16] 이후 시험방송을 시작했으나, 또 다시 문제가 발생한다. 1380kHz의 RSB 라디오서울 송신탑과 1230KHz의 DBS 동아방송의 송신탑 사이의 직선거리가 고작 700m밖에 되지 않아 혼신이 많이 생겨 방송이 잡음때문에 거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17] 이러한 문제로 인해 개국 후 1964년 6월 9일 주파수를 640kHz로 바꾸게 된다.

3. 1960년대, 무명 방송국


당시 사회 분위기 상으로 기업이 방송국을 개국한다는 것은 사회 발전에 일조하는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동양방송과 함께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한 중앙일보 보다 비판적인 논조에서는 벗어나 있었다.[18] 개국 초기에는 연극 대본을 중심으로 한 단막극이나 외화를 중점적으로 방영하면서 주어진 방송시간을 때우기도 하였다. 자체 제작하는 프로그램의 편성을 늘리기에는 개국 초기인데다가 이 당시에 TV가 사치품의 대명사로 손꼽힐 정도로 귀했기 때문에[19]TBC 개국 당시에 광고수입이 그리 많지 않아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개국 초기부터 KBS에 비해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국영방송이던 KBS에서 볼수 없었던[20] 새로운 프로그램의 개발, 종합편성의 시행, 해외 프로그램의 과감한 도입 및 방영 등의 편성 정책을 개국 초기부터 적용했다. 또한 당시는 드라마가 생방송으로 진행되던 시절인데, '''TBC에서 최초로 녹화장비를 들여와 국내 첫 녹화 드라마를 제작하게 된다.'''[21] 다만 녹화는 가능하지만 편집이 불가능해서 생방송처럼 촬영하다가 NG가 나면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했다고 한다...[22] 이 때문에 최초의 일일연속극을 제작했다고는 했지만 첫 작품만 찍고는 관두었다고 한다. 일일연속극을 다시 찍게 된것은 편집이 가능한 녹화기가 들어오고 KBS에서 일일극을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대응차원에서 같이 일일극을 편성하기 시작한 1970년대 들어서의 일이다.
위에 서술되어 있듯이, 방송국 이름도 여러 번 바뀐 것 또한 신생 방송국의 불안정함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이 불안정을 모기업의 빵빵한 지원으로 곧 안정을 찾아가나 싶더니 동양방송 사상 전무후무한 흑역사를 하나 찍게된다. 바로, 사카린 밀수 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삼성은 엄청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에, 이러한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이 힘을 합쳐 창업주 구하기에 온 힘을 쏟은 것. 다른 언론사들은 모두 삼성을 비판하고 사건의 진상을 보도하기 바쁜데 유독 중앙일보와 동양방송만 삼성을 쉴드치는 보도만 했다. 이 때문에 한 동안 보도 부문에서는 동아방송 등에 크게 밀리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23]
그나마, 개국 초기부터 열정을 쏟던 '쇼쇼쇼'등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과 연속극 등은 갓 태어난 듣보잡 방송국에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후발주자였던 MBC에서 대형 쇼 기획[24]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면, 동양방송은 '쇼쇼쇼'를 필두로 도회적인 느낌의 쇼 프로그램과 다양한 형식의 공개방송을 진행함으로써 시청률 잡기의 각축을 벌였다. 또한 국내방송사 최초로 전속제를 도입, 연기자를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한다.
또, 당시 홍진기 회장이 내세웠던 전략이 최고의 인재, 최고의 시설, 최고의 대우 였는데 이 때문에 KBS나 여타 라디오 방송국에서 많은 인력을 스카우트 했다고 한다. 재밌는 점은 이런 전략이 세월이 흘러 JTBC에서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4. 1970년대, 방송왕국 TBC



1971년 1월 9일 방송된 드라마 <아씨>의 마지막회 방송 중 끝부분. '아씨'역의 김희준, 그 옆은 여운계.[25]
1970년에 들어서면서 TBC는 그야말로 파리가 날렸다고 한다. 1969년에 MBC가 개국하면서 드라마PD들을 엄청 쓸어가면서[26] 이후 TBC는 역으로 KBS PD들을 대거 스카우트했고, 사활을 걸고 제작한 드라마 <아씨>가 시청률 70%라는 초대박을 친다. 이 드라마는 우리나라 최초로 100회를 넘긴 연속극이자, 최초로 에필로그 방송[27]을 한 기록도 있다. 당시 인기가 어느정도였냐면 '아씨'가 방송될 때 물을 꼭 잠그고, 문단속과 불단속을 잘 하라는 경고방송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씨>를 계기로 TBC 드라마는 연속극과 시리즈 사극으로 연결되는 드라마왕국이 되었으며, 체계적인 전속배우 관리로 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1971년 9월에는 창립요원인 김덕보(1917~1989)가 사장이 되었다. 그는 향후 9년간 사령탑에 서서 TBC의 전성기를 만드는 데 공헌해왔다. 1974년 12월 21일에는 중앙일보와 통합하여 상호명도 '(주)중앙일보·동양방송'으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비난도 많았다. 드라마들의 인기는 좋았으나, '매일연속극', '수요연속극', '주말연속극' 등 드라마에 평일 몇 시간 안되는 방송에 대부분을 할애하다시피 한 편성에다가 KBS에서 일일연속극 <신부 1년생>을 편성한것을 시작으로 일일극이 범람하게 되었는데 막장드라마스러운 설정이나 내용의 드라마들도 상당수 편성된 덕택에[28] 언론들의 비난을 엄청 받기도 했다.[29] 중간중간 광고를 한 것은 당연한 일. [30]
1974년에는 오일쇼크로 인해 전 방송사가 그랬듯이 TBC도 불황을 맞이하는데, 아침방송[31]을 폐지하는 등 방송시간이 주는 바람에 프로그램을 대거 정리,개편 해야만 했고, 거기에다 기업들의 광고가 확 줄어서 당시 CM제작부[32] 직원들을 타 부서로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TV수상시 대수가 크게 늘어난 덕택에 불황은 얼마안가 끝났고, 그 이후로도 폐국직전까지 TBC에만 광고가 몰리는 현상이 일어나는등 경젱 방송국인 MBC나 DBS, CBS같은 여타 라디오 방송국에 비해서 광고판매는 잘되었다고 한다. 다만 광고영업수익만 놓고 보면 높은 시청률과 인기에도 불구하고 TBC 40억, MBC 57억으로 MBC에 오히려 뒤쳐젔다. 다만 이는 방송권역의 차이를 봐야하는데, MBC는 지역방송사 설립 및 재휴를 통해 전국네트워크화를 '''KBS보다 빨리 이룬 반면에''' TBC는 수도권 일부와 영남권 일부에서만 시청이 가능했다. 오히려 더 적은 방송권역을 가지고 이만큼의 수익을 거둔것이 대단한것이다.

<쇼쇼쇼>를 기반으로 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선 끊임없이 신인가수들이 배출되었다. 조영남이 TV데뷔 무대로 윗옷을 벗고(!!) 누워서 노래를 불렀다고 늘 이야기 하는 무대가 바로 '쇼쇼쇼'의 무대다. 남진이 제대 후 복귀무대를 가진 곳도 '쇼쇼쇼'였다.[33]
뉴스에서도 <TBC 석간>[34]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앵커'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사 프로그램 <봉두완의 동서남북>[35]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타 방송을 압도하기 시작했다.[36] 중앙일보와의 보도연계는 물론, 70년대 초반 서해방송, 전일방송 등 지역방송과의 협동관계가 자리잡으면서 나타난 시너지가 보도부문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더불어, TV방송을 하고 있던 방송국 중에서 정부의 목소리만 대변하던 KBS 뉴스의 딱딱한 진행[37]과 아직 개국 초기여서 보도부문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MBC와 달리 동양방송은 현재 우리가 보는 형태의 뉴스를 일찌기 시작해[38] 타 방송국보다 세련된 보도방송을 진행했다.
여담으로, 당시 정부에서는 TBC를 동아일보와 DBS와 함께 야당 언론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경영진이나 기자들이 자주 남산에 불려가는 일이 허다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라디오는 '여,야,여,야' TV는 '여,여,야,여,여,야'로 보도하라는 지침을 사내에서 만들었을 정도라고 한다.
다만, 코미디 프로그램은 동양방송이 휘어잡지 못했는데,[39] 이유는 MBC <웃으면 복이와요> 때문이었다. 구봉서, 배삼룡을 비롯하여 60년대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코미디언들과 연출진들이 대거 포진해 있던 MBC에 맥을 못췄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옷지 못할 해프닝 을 만들기도 하는데, 바로 1973년 12월에 일어났던 '배삼룡 납치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MBC의 대우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하던[40] 배삼룡에게 동양방송이 웃으면 복이와요의 연출진과 더불어 배삼룡을 영입하고자 무려 백지수표를 제시한 상태였고, 이를 막기위해 MBC의 직원들이 당시 배삼룡이 진행하던 동아방송의 공개방송 녹음현장에서 난투극을 벌이며 배삼룡을 서로 납치하려 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배삼룡은 '웃으면 복이와요'에 3주 정도 출연을 하지 않았지만, MBC에 잔류하였다.[41] 동양방송은 그야말로 흑역사를 새로이 써버린 사건이었다. 이후 웃으면 복이와요의 PD이던 '''김경태'''가 친정인 TBC로 복귀하고[42] 서영춘이 영입되면서 '''<고전 유모어극장>'''이 만들어지는 1976년까지 동양방송에는 제대로 된 코미디 프로그램이 없었다.
위에 상기한 여러가지 인기프로그램 때문일까? 70년대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동양방송을 빼고서는 방송에 대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동양방송의 판이 되어버렸다.

5. 1980년, 폐국직전 상황


1980년, 새로 들어선 정권은 상업방송사들의 자율성을 제한할 목적으로 [43] 방송의 건전성 강화라는 명목아래 이원홍 방송협회장[44]의 주도로 교양강화및 오락편성제한 정책을 펴게 된다. 이 때문에 당시 많은 오락프로그램이 통합되거나 사라졌고,[45] 신설하더라도 건전한 내용[46]을 담은 오락프로그램을 만들게 된다. 또 3개에 이르던 일일드라마 블록도 1개로 줄였다.[47] 오락프로그램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TBC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드라마에서 계속 두각을 드러내고, 쇼쇼쇼등 인기 쇼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잘 해쳐나가는가 싶었으나, 그해 11월, 모두다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렇게 정부지침에도 동참하는 등 정권에게 밉보이지 않으려 나름대로는 노력한 듯하다.[48] 그런데도 폐국이 된 이유는 일부 정권비판적 논조 때문인데, 1978년 박원훈 중앙일보 기자 강제해직 사건을 계기로 6월 7일 중앙일보 기자들과 함께 '삼성그룹으로부터의 편집 및 제작의 자유 확보' 등을 담은 결의문 7개항을 발표해 이를 관철시켰고, 1979년 YH 사건을 타 방송사가 방송하지 않을 때 TBC는 경찰의 신민당사 강제진압 현장을 뉴스에 '''몇 초간'''이라도 송출했었다.미디어오늘 기사에 따르면 경영진 쪽은 정부와 잘 부딪히지 않으려 하는 듯한 모습이지만, 기자들은 비교적 그렇지 않았던듯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봉두완과 강용식 등 당시 TBC 보도국 구성원 중 일부는 민주정의당에 입당했고, 특히 강용식은 폐국 전 KBS로 이직해 보도국장으로서 땡전뉴스 제작을 총지휘했다.[49] 그리고 비록 방송은 되지 못했으나 5.18 민주화운동 때 광주의 시위현장을 카메라에 담은 적도 있었다.[50] 또한 동서남북 등 일부 시사프로그램에서 야당 인사가 나와서 정권비판 내용을 일부 내보낸 적도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정권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 판단했던 듯 한다. 또한 당시 잘 나갔고, 규모가 컸던 TBC를 강제 종방시키면서 타 언론사들이 정부에 충성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었다.[51]

6. 주요 편성 프로그램


지금의 SBS마냥 주로 쇼·연예 등 예능 프로그램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시청률은 거의 그쪽으로 몰려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채널이 1개 뿐이었고 관변보도와 교양, 시사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던 KBS와 후발주자 격인 MBC를 누르고 시청률 1위를 달렸던 방송사였다. 이런 점들과 함께 화질도 방송 3사 가운데 가장 우월했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화질을 비교하면 TBC > MBC >>> 넘사벽 >>> KBS 순이었는데 이런 화질 차이는 방송 통폐합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지다가 컬러 방송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방송국 간의 차이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지라 제대로 된 사회고발 탐사보도 프로나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은 거의 전무했다. 사실 이 시기에도 KBS의 카메라 초점, TBC에서 카메라의 눈이라는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편성하기는 했어도 정치문제에 대한 리포트를 제대로 낼수 없었고, 주로 사회에 대한 고발이나 계몽적인 아이템을 다루는 정도에 그쳤고, 정권홍보적인 아이템을 쓰기도 했으며 이는 1980년대 중반까지도 이어진다. 탐사보도 프로그램에서 본격적으로 정권비판적인 소재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뉴스비전 동서남북이 방송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물론 덕분에 타 신문사들에게 막장 드라마(혼외정사, 통속적 애정행각, 고증오류 등), 중복편성 등의 시비거리로 신나게 까이기도 했다. 물론 실제로도 시청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지금보다 성 관념이 훨씬 엄격했던 시절인 만큼 막장도는 지금보다 훨씬 덜하긴 하지만) 연속극에 자극적인 장면을 넣거나 일일연속극을 매일 3회씩 편성했으며, 중간광고가 폐지된 다음부턴 1시간짜리 주간극을 광고수입(토막광고, 자막광고[52])의 감소를 막기 위해 두 번에 나누어서(...) 편성하는 꼼수도 벌였다.[53] [55][56][57]
하지만 경쟁사인 MBC도 딱히 다를 바는 없었고, 심지어 광고가 폐지된 KBS에서도 이런 식의 편성을 하기도 했다(…).[59] 물론 이면에는 광고쟁탈전이 숨어있었다는건 공공연한 비밀. 어쨋거나 정부에서도 공익성 강화를 명목으로 1973년에 (스포츠 중계, 문화예술 실황프로그램을 제외한) 중간광고가 금지되었고 1978년에 프로그램 광고 편성비율을 기존 10%에서 8%로 줄이기도 했다.[60]
관영방송의 성격상 유연성이 떨어지는 KBS와 후발민방으로서 자금력이 다소 떨어졌던 MBC와 달리 자금력이 탄탄했고 정부의 통제[61][62]에서 상당히 자유로웠던 TBC가 프로그램의 질, 실험성 면에서 타 방송사를 압도했기 때문에 시청률이 높았던 것이다.
드라마에선 70년대 초반부터 '아씨' 같은 히트작을 터뜨려 주도권을 잡고, 70년대 중반부터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리던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와 남자배우 노주현, 한진희 등을 내세워 타 방송사를 압도했다. 이순재, 이낙훈, 강부자, 여운계, 사미자 같은 든든한 연기파들이 뒤를 받쳤고, 당시 동양방송 이사로 근무했던 이건희 전 회장은 특히 조연배우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어 이들을 방송사의 기둥으로 만들어두는 것이 드라마 제작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전투, 도망자, 6백만불의 사나이, 뿌리, 원더우먼,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 등 화제의 외화들(지금으로 말하면 미국 드라마)도 TBC를 통해 방영되었다. 배한성, 양지운 같은 성우들이 TBC를 통해 스타성우가 되었다.
보도에서도 인기 앵커맨 봉두완 등을 앞세워 관영방송인 KBS와 MBC를 눌렀다. TBC 석간이라는 9시 메인뉴스가 방송3사 중에서 시청률 1위를 달렸었다.
오락프로그램의 대명사 격이었던 쇼쇼쇼도 TBC의 간판이었다. 동양방송이 텔레비젼 방송을 시작하면서 역사를 같이 한 한국 쇼 프로그램의 파이오니어로서, 초대 MC 후라이보이 곽규석[63]을 시작으로 마지막 3대 MC 허참과 정소녀까지 거의 20여 년간[64] 장수했던 프로그램이었다.
스포츠 중계에서도 대한민국 최초로 해외경기 위성 중계[65]를 하거나 메이저리그 월드 시리즈를 녹화중계하거나, 프로레슬링 중계를 통해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켰다거나 고교야구 중계를 통해 고교야구 붐을 일으키는 등 선구적인 노력을 많이 했고 나중에 KBS의 간판 스포츠 캐스터가 되는 아나운서들 중에서는 TBC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유수호 아나운서. 또 월드컵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시절에 1974 서독 월드컵을 수도권 한정 독점 녹화중계를 하기도 했다.[66]
황금박쥐[67], 요괴인간, 우주소년 아톰, 짱가, 그레이트 마징가, 그렌다이저, 독수리 오형제, 딱따구리 등 화제의 애니메이션도 TBC의 전파를 탔다. 그러나 일련의 애니 르네상스는 TBC 폐국 2달 전인 1980년 9월 1일부터 사회정화운동의 일환으로 한국방송협회가 발표한 '방송자율정화방안'에 명시된 폭력성 만화영화 금지 정책에 따라 SF 애니들을 싸그리 퇴출시키고 <원탁의 기사> 같은 명랑물로 도배함으로써 깨져버렸다.[68]
다만 이런 애니메이션은 당연하지만 대부분 미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한 작품이었다.[69] 사실 동양방송에서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끌자 한일합작으로 황금박쥐를 제작한 경험과 자본을 바탕으로 국산 애니메이션 제작을 계획했는데 수지타산이 안 맞아 접어야 했다(…). 사실 국산 TV 애니메이션은 1987년에 떠돌이 까치, 아기공룡 둘리 등이 제작되면서부터 방영되기 시작했고,[70] 그것도 수지타산이 안맞는지[71][72][73] 2000년대 초반까지도 대다수 애니메이션이 미국이나 일본 수입작이었다. 사실 딱히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물론 국산 애니메이션을 1987년에야 제작했다는 점에서 KBS를 까야하는건 맞다.
또한, 일본NTV와 제휴관계를 맺어 위에 서술된 황금박쥐 이외에도 NTV 및 계열방송국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을 들여와 방송하기도 했으며, 1972년에는 당시 NTV의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던 '스타 탄생(スター誕生!)'[74]의 첫 해외 녹화방송을 동양방송에서 공개녹화로 촬영해 방송하기도 했다.#[75][76]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신문사인 중앙일보와 방송사인 TBC를 합친 언론사업을 그룹의 주력사업으로 보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같은 계열사인 제일제당의 식료품[77], 삼성물산제일모직의 의류, 신세계백화점, 삼성전자, 동방생명 등의 광고를 계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에서 만들어서 중앙일보와 TBC를 통해 내보내고, 중앙일보와 TBC는 안정적인 광고수입을 얻는다는 식으로 시너지 효과를 내며 삼성의 언론사업은 순항했다.[78]

7. 언론통폐합과 폐국의 비극, 그리고 31년동안의 휴방기


이 기간 중 회사 분위기가 매우 격양돼 있었기 때문에 보안사 요원도 마음대로 출입하기 어려웠다. 종방하는 날은 통분으로 사옥 전체가 난리였다. 당시 무교동이나[79]

서소문에[80] 나가면 술집마다 온통 아는 사람들이었다. 기자들은 일단 KBS로 가도록 되어 있었고 관리직도 상당수가 삼성계열 직원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서로 석별의 정을 나누느라 술을 더 마셨다. 술값도 1인당 100만~200만 원 정도가 들 정도였다.

- 당시 중앙매스컴 기획실에서 동양방송 종방 준비작업에 참여했던 J씨의 증언. 원 출처: <한국일보 정치 비사 발굴 시리즈 실록 청와대 - 빼앗긴 서울의 봄(한국일보 정치부 엮음)>. 한국일보사/한국문원. 1994. p.261[81]

'''언론통폐합 최대의 희생양이 되다.'''
통폐합 직전 70년대 말은 그야말로 동양방송 천하였다. '여배우 트로이카'를 앞세운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을 필두로 그야말로 대한민국 방송계를 다 해드셨던 방송국이 바로 동양방송이었다.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컬러TV방송을 준비해 오던 동양방송은 컬러TV방송용 기자재 도입은 물론 실제로 쇼쇼쇼에 컬러 비디오 카메라를 투입, 촬영하여 방송하기도 했다.[82]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신군부의 언론검열이 서슬퍼런 와중인 1980년 7월 서울특별시에서 열렸던 미스 유니버스대회[83]의 모든 행사를 미국 CBS와 함께 실황중계를 KBS 대신 진행하게 된다.[84]
또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방송 스튜디오를 한 곳으로 모으고, 드라마 및 쇼 프로그램을 더욱 수월하게 제작하기 위해 당시로써는 동양 최대 규모였던 여의도 신사옥을 1979년 말 준공하여 1980년 7월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으며[85] 동양방송에서 자체적으로 1979년 11월부터 1년 주기로 'TBC 세계가요제' 를 열었다. 1979년 12월 1회, 1980년 11월 2회까지 개최된 불운의 가요제였지만 참가국과 가수는 수준급으로 당시 대한민국 내 단일방송사가 제작하여 개최한 가요제 중에서는 단연 탑이었다. 1979년 1회 그랑프리는 일본의 여가수 오오하시 준코[86]로 현재 기록에 남아있는 내한 일본가수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을 가진 가수일 것이다. 1980년 2회 그랑프리는 모잠비크의 슈디가 'Ecstacy'[87]라는 곡으로 두번째이자 마지막 그랑프리를 차지한다. 참고로, 그랑프리를 차지한 슈디의 친척이 당시 모잠비크 전 대통령이라 대회가 끝나고 동양방송에 축전을 보냈는데, 대회가 끝난 후 열흘 뒤에 통폐합이 되어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는 말이 있다.[88][89]
이처럼 주요한 이벤트와 뚜렷한 성장이 1970년대 말 가속화되어[90] 1979년에 극에 달하는데, 중앙매스컴 입장에선 1979년은 참 각별한 해였을 지도 모른다. 중앙매스컴 창립된 지 15년이 되던 해여서, 두 언론매체가 같이 북극탐험이나 아프리카 오지탐험 같은 해외 다큐멘터리도 제작했었고, TBC 측은 새 건물을 지었고 해외 네트워크를 강화하던 한해였다.[91] 국내 행사의 경우도 1970년대 말부터 진행되던 TBC 젊은이의 가요제[92][93], 코미디 부문도 고전유모어극장의 성공으로 인해 1979년부터 전속 코미디언을 선발하기 위하여 'TBC 개그콘테스트'[94]도 진행하게 된다.
이같은 뚜렷한 확장세는 당시 사회 분위기가 1980년대에 대한 기대감이 무르익던 시기여서 그랬을 지 모르지만, 이 때 동양방송은 말 그대로 '정점'을 찍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것이었으나, '세계가요제', 컬러TV방송, 여의도 신사옥 모두 아래 서술될 언론통폐합에 의해 한 순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반면 언론 부문은 그렇지 않았는데, 여느 언론사와 마찬가지로 신군부의 검열로 군부 입맛에 맞는 것만 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종방 때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다 1980년 7월 부터는 TBC가 곧 없어질 수도 있다는 소문이 언론계에서 돌았다고 한다.[95] 그런 상황속에서 8월에 여의도 사옥으로 완전이전 했고, 그해 11월에는 올 것이 오고 말았다.

1980년 11월 29일 내일의 프로그램 소개영상

1980년 11월 30일 방송된 'TBC 가족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의 오프닝 및 방송 일부. 언뜻언뜻 비치는 출연진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자.
1980년 11월 전격 시행된 언론통폐합에 따른 신문-방송 겸영 금지 조치에 따라 동양방송이 KBS로 흡수통합되면서 17년 동안 한국 방송계 정상위에 있던 멀쩡한 방송국이 한순간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 폐국 전인 11월 12일, 보안사로 끌려간 이병철 삼성 회장과 홍진기 중앙매스컴 회장은 2층 조사실에서 수사관의 강압에 따라 자필로 포기각서를 쓰고 TBC를 내놓아 버리고 말았다.[96]
당시 분위기를 짐작해 볼 만한 에피소드가 몇 가지 있는데, 고별방송 녹화 때 출연진, 연출진 할 것 없이 많이 울었다고 한다. 고별 방송이었던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97]에서 여성 무용단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출 때 흥겨운 분위기와는 달리 관객과 출연자들의 얼굴은 완전 굳어 있는데 동양방송의 고별방송이 있기 며칠 전, 보도방송 중지를 당한 기독교방송의 마지막 뉴스를 진행하던 여자 아나운서가 울면서 방송한 게 신군부에게 찍혀서 만들어진 <고별 방송에 관한 지침>에 따라 어떠한 감상적 멘션도 자제하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98] 당시 현장에 있던 제작진과 출연진들도 '울지 말고 웃지도 말고 NG 내지 말고 녹화합시다.'라고 말하며 서로 다독여가며 녹화에 들어갔지만, 그래도 눈물은 멈출 수 없었으니... TBC 고별방송에서 맨 처음으로 노래를 부른 가수 이은하가 자신의 히트곡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을 부르던 중 대성통곡을 하게 된다. 당시 영상자료를 보면 알겠지만 처음에 감정을 잘 다스리는가 싶더니 노래가 절정으로 갈 수록 흐느끼며 목이 메었고, 끝에 가서는 아예 가사를 말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다. 이것이 신군부에게 찍혀 '''3개월 방송 출연금지'''를 당한 적이 있다. 이때 KBS가 신군부에게 아첨하기 위해 의견서를 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평소 소속감이 전혀 없는 가수들로 하여금 울면서 노래하도록 연출상의 유도를 함으로써 장내를 숙연 내지는 애상에 쌓이게 했을 뿐더러 시청자에게 최루작용을 함으로써 일부 국민감정에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었음 (중략) 정책을 오도하고, 저속했던 상업방송을 애써 미화하려고 애쓴 이들 프로그램의 연출자, 구성자, 일부 연기인에게는 새로운 방송풍토에서 작업을 할 수 없도록 단호한 조치가 필요한 것으로 사료됨.

원 출처: <합수부 사람들과 오리발 각서 : 80년 신군부의 언론사 통폐합 진상(김기철 저). 중앙일보사. 1993. p232.

실제로 KBS는 '일부 연기인'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잊지 않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당시 동양방송 전속 코미디언이었던 최용순과 전속 탤런트였던 강부자도 우는 장면이 그대로 방송되어 이후 KBS 프로그램에 잘 나오지 못하는 등 한동안 곤욕을 치러야 했다. 당시 이 프로그램을 연출했던 연출자의 증언에 따르면, 녹화가 끝난 뒤 보안사령부에서 테이프를 압수하겠다고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지인의 집으로 테이프를 들고 가 숙박한 뒤 방송 직전 주조정실에 넘겼다고 한다.[99][100][101]
또한, 녹화 현장에 이병철 당시 삼성그룹 회장이 방문하여 연기자들을 위로하였는데, 연기자들이 훌쩍훌쩍 울고 있는걸 보고는 '이렇게 울면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고 말하며 안타까워 했다는 일화도 있다[102]
한편, 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허참과 정소녀 및 상당수 TBC 고별방송에 출연했던 TBC 방송인 및 연예인 상당수는 다음 날 12월 1일[103] 저녁 7시 40분부터 밤 10시까지 방송되었던 KBS2 'KBS 새가족'이라는 특집 버라이어티 쇼에 출연했다.[104] 허참의 인터뷰에 따르면, 전날까지 잘 있던 자신의 직장이 한순간에 사라져 너무 허탈하고 마음이 아픈데, 그 다음날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웃으며 축가를 부르며 진행했다고 회상했다. #
해당 프로그램은 이후에 동양방송이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과 후대에 보여주기 위해 컬러로 제작 하였으며, 해당 프로그램의 오프닝부터 약 15분가량 되는 분량의 영상이 온라인(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105] 이 고별방송을 끝으로 동양방송은 TV 방송을 마감했다.
[image]
위 장면은 저녁 메인 뉴스인 'TBC 석간'의 마지막 날 방송 중 나온 것이다. 이후 동양방송 출신의 직원들 중 상당수는 강제해직을 당하면서 이들 중 5공 정권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던 해외 방송국으로 아예 일자리를 옮기거나 미국으로 이동해 식당을 경영하는 사례도 있었으며,[106] 동양방송 소속의 방송인, 성우들도 하루아침에 일자리가 없어진 건 마찬가지여서 대부분의 방송인들이 KBS로 강제이직당할 수밖에 없었다.[107] 그리고 같이 근무하던 관리직원들 역시 삼성그룹 계열 기업으로 각자 흩어져 버렸다. 그래도 TBC 출신들은 KBS출신에 비해 눈치를 잘보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KBS 사장들이 TBC 출신을 선호했다고...
TV에 비해 가려진 게 없지 않아 있지만, 동양라디오 진행자들도 정말 안타까운 상황에서 고별방송을 맞이했다. 이날 동양라디오에서 내보낸 마지막 뉴스 프로그램이었던 '뉴스 기상도'의 맹관영 아나운서가 중간에 울먹거리며 진행하는가 하면, '밤을 잊은 그대에게'[108]의 DJ였던 황인용 아나운서의 애절한 최후의 콜은 인구에 회자가 될 정도였다.[109][110]
참고로 이건희 전 회장도 동양방송을 통해 삼성그룹에 입사했다. 상술했듯이 언론사업을 그룹의 주력 사업 중 하나로 본 이병철은 이건희에게 TBC와 중앙일보, 이밖에도 중앙개발동방생명을 맡길 계획이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혹자는 전두환의 언론통폐합 덕분에 결과적으로 삼성그룹이 언론과 금융 대신 전자분야를 키워 지금의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가 되었다는 드립도 치지만 당한 입장에선 과연(...)
1990년, 몇몇 MBC 지방계열사의 주식 원상회복 판결에 편승한 중앙일보는 그해 11월에 KBS에 TBC를 돌려 달라는 소송을 시도했으나 1991년 11월에 1심에서 패소했다. '신군부의 강요로 방송사를 강제로 빼앗겼다'는 이유였지만 민법상 취소권 행사기간은 강박상태에서 벗어나서 '추인할 수 있는 날'로부터 3년인데, 법원은 '추인할 수 있는 날'을 6.29 선언이 있었던 1987년 6월로 판단했고 따라서 1990년 6월에 이 3년 기간이 도과되었다고 판단하여 1990년 11월에 제기된 소송을 기각했다.[111] 이후 1994년 항소심, 1996년 대법원 상고심에서도 패소 판결을 받았다.

8. JTBC 개국


2009년에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미디어법 개정에 따라 신문-방송 겸영이 허용되면서 휴방 31년만에 후신인 JTBC로 재개국되었다. 비록 종편이라 TV채널만 개국해서 예전 동양방송 시절처럼 라디오 방송과 연말시상식은 못 하고 TV채널만 지상파 7번[112]에서 케이블 채널인 15번[113]이나 18번[114]으로 변경되어 방송중이다.

9. 관련 자료




[1] 김윤환김태환 전 국회의원의 형. 동양통신(현 연합뉴스)에서 근무했었다.[2] 이후 럭키는 1971년부터 한국문화방송 부산TV국을 인수해 '부산문화텔레비전방송'으로 바꾸어 10여년간 운영했다.[3] 당시에는 삼성이 전자사업을 시작하기도 전이고, 양가에서 서로 사돈관계도 맺는 등 지금의 라이벌관계와 비교하면 비교적 관계가 좋은때였다.[4] 부산동양방송은 동양방송의 유일한 직영 지역국이었고 개국 당시에는 국내 방송 사상 최초로 탄생한 지역 민영 TV 방송국이었다.[5] 다만 부산 TV는 1972년 채널을 7로 바꿔 서울과 채널 번호를 맞추게 된다.[6] JBS에서 TBC로 이름을 '급하게' 바꾼 것에는 한 가지 이 존재하는데, 당시 사용하던 JBS의 이름이 KBS의 당시 한글 이름이었던 '중앙방송국'과 혼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윗분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중앙방송국이던 KBS의 한글 공식 명칭이 현재의 한국방송공사로 바뀐 것은 1973년이다. 참고로 현재 JBS는 일자리방송이 사용하고 있다.[7] 동양 FM은 1970년 2월 1일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FM 스테레오 방송을 시작하였다.[8] 가허가 일자는 1962년 12월 31일이었다. 호출부호는 HLCZ, 주파수 1380kHz, 출력 10kW였다.[9] RSB 라디오서울 개국 후 사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곧 홍진기로 사장이 바뀌게 된다.[10]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소성로 24. 인하대학교 정문 건너편 SK 송강주유소 자리다.[11] 현재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자동[12] 지금의 극동방송이다. 1956년부터 1967년까지 인천에 있었다.[13] 현재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철산 우성아파트 단지 주변. 우성아파트에 현재 'KBS우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 아파트 단지 일대가 옛 TBC 시흥송신소, 언론통폐합 이후 구 KBS 개봉송신소로 통폐합되기 이전의 구 KBS 시흥송신소 터였기 때문이다.[14] 현재의 서울파이낸스센터 자리[15] 이 때 럭키그룹이 경영에서 손을 뗀 것으로 추정된다.[16] 호출부호가 본디 HLCZ였으나 이때, HLKC로 바뀐다.[17] 동아방송의 송신소 위치는 현재 남부순환로 개봉역 인근 광복교 옆에 있었다.[18] 당시 기성 언론과 다르게 탄탄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 공격적인 중앙일보의 마케팅은 종종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19] 공식통계로 전국의 TV수상기수는 3~4만대 안팍이었다. 물론 당대 TV보유자 가운데서 비싼 시청료를 안내기 위해 등록을 회피한 가정의 비율이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5만대를 넘기지 않았으리라고 추정된다. 1965년 당시 한국인구가 2853만명에 가구수는 500만 안팍이었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TV를 보유하면 (난시청 지역이 많았던 시절임을 감안해도) 잘사는 부유층이었다는 얘기이다.[20] 사실 개국 초기 KBS-TV의 편성은 대체로 HLKZ-TV의 재탕에 국정홍보채널인 KBS라디오의 모습을 섞었다 봐도 무방하다.[21] 개국 특집극인 <초설>이라는 작품이었다.[22] 때문에 하필 마지막 장면에 NG가 나서 처음부터 새로 찍어야하는 상황도 많이 생겼다고 한다. 어떨 때에는 방송시간이 임박하는 바람에 다시 찍지도 못한 채 막판 NG장면이 그대로 전파를 탄 적도 있다(...).[23] 동양방송에서 근무했던 분들도 이 때 이야기는 꺼린다. 그만큼 흑역사 ...[24] 예를 들면 윤복희 귀국 리사이틀 공연 녹화중계, 해외 유명공연 녹화 중계 등[25] 참고로 이 당시 여운계는 30대 초반이었다. 즉, 이것은 노인으로 분장하고 연기한 것.[26] 표재순 당시 부장도 MBC로 이직하면서 당시 TBC에 잔류한 PD들은 김재형 정도만 제외하면 모두 조연출급 밖에 남지 않았다.[27] 253회 마지막회 때 드라마 종반부에 출연진 및 연출진들이 나와 드라마에 대해 잠시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가졌다.[28] 사실 대놓고 식의 불륜경쟁을 벌이기 시작한것은 MBC 개구리 남편때부터이지만 TBC도 같이 경쟁에 뛰어들면서 불륜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들을 상당수 편성한 것은 사실이었다.[29] 물론 신문의 시기심 어린 질투가 있었기도 했다. TV수상기 대수가 1970년대 이후로 부쩍 늘어나면서 TV광고가 신문광고를 추월하기 직전에까지 가자 TV방송을 견제한 것.[30] 사실 이때 과도하다 싶을정도로 모든 방송국이 드라마와 쇼에 열을 올렸다. 오죽하면 드.쇼 편성이라는 용어도 나왔었다. 이때는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드라마를 13개까지 볼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처럼 60분이 넘는 드라마는 없었다. 드라마를 가장많이 방송할때는 하루에 3개,4개도 방영했다.[31] 당시 건강정보와 요가,뉴스쇼,요리프로그램등을 방송했었는데, 정작 인기있었던 것은 드라마 재방송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재방송을 시청하지 않는 이상 드라마를 다시 볼 길이 없었기 때문에 재방송 마저 놓친다면 그건 해당회차를 영영 못본다는 소리가 된다. 더군다나 테이프 재활용이 당연시 여겨지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더더욱.[32] 1981년 이후로 한국방송광고공사가 출범하면서 방송사와 미디어렙이 분리됐기 때문에, 광고회사에서 제작한 광고를 방송국에 제공하는 방식이 되었지만, 당시는 그런거 없고 기업들이 방송국에 직접 의뢰해서 방송국에서 직접 제작한 광고를 내보냈고,광고모델도 TBC소속 탤런트들이 했다.[33] 쇼쇼쇼가 단순히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쇼는 아니었다. 코미디언들이 나와서 간단한 콩트를 하기도 하고, 사회자인 곽규석의 원맨쇼와 동양방송 출신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또한 TBC소속 무용단의 무용도 중간중간 나왔는데, 당시 이 무용도 수준이 높아서 꼭 라스베이거스쇼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고 한다. 쇼쇼쇼에서 무용단 특집을 해서 1시간동안 무용공연만으로 프로그램을 했을정도이다.[34] 현재는 <JTBC 뉴스룸>이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35] 당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여 육영수여사가 챙겨들을 정도로 인기가 있던 방송이었다고 한다.포맷은 토론 프로그램이었는데, 당시 김영삼 등을 비롯한 야권인사들이 자주 출연했다고. [36] 패티김이 연예활동은 한국에서 하고 생활은 미국에서 하는 것을 두고 봉두완이 '''"여러분, 또 왔습니다"'''라며 패티김의 귀국을 비꼬는 멘션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걸 훗날 연예지들이 서태지의 해외 음악작업을 악의적으로 비꼴 때 그대로 써먹었을 정도. 이 때가 TBC 폐국으로부터 13~14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37] 아나운서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원고를 딱딱하게 읽어내려가는 초기 보도형태와 같았다. 북한 조선중앙TV의 '보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38] 다만 앵커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도입한것은 1972년도로 MBC보다 약 1년 6개월 정도 늦다.[39] 사실 쇼쇼쇼를 제외한 오락부문은 상대적으로 MBC에 밀리는 편이었고, 때문에 쇼쇼쇼를 제외한 오락프로램들은 대체로 오래가지 못했다.[40] 배삼룡의 증언에 따르면, 구봉서와 배삼룡 모두 절친한 사이인 동기였으나, 구봉서가 먼저 MBC에 영입되었다는 이유로 구봉서의 출연료가 자신보다 높고, 평상시 대우가 다르다는 것에 힘들었다고 한다.[41] 잔류를 택한 이유가 인상적인데, 배삼룡이 웃으며 복이와요에 모습을 보이지 않자 박정희 대통령이 MBC에 배삼룡의 거취에 대해 직접 물어봤고, 이를 MBC가 배삼룡에게 반협박조(본인은 그렇게 느꼈다고 한다.)로 '윗분께서 당신을 웃으면 복이와요에서 보고 싶으시다는데 이렇게 돈 몇푼에 가시려구요?'라고 말하자 어쩔 수 없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대우는 물론 그 전보다 더 좋아졌다고.[42] 김경태 PD는 TBC AD로 방송계에 입문했다가 1969년 개국한 MBC-TV에 스카웃되어 공전의 히트를 친 웃으면 복이와요를 만들면서 스타 PD로 발돋움했다.[43] 물론 이전 정권에서도 가요계 재정비정책과 7시,8시,9시 고정 편성정책 등 제한이 있긴 했었다. [44] 당시 방송협회장직은 KBS 사장이 겸임했다.[45] 예를 들어 매일밤 11시 방송되던 '쇼는 즐거워'가 폐지되고, 수많은 코미디 프로그램이 '토요일이다! 전원출발'로 통합되었다. 드라마 블록도 대거 정리되었다. 물론 당시 방송들이 지나치게 상업적이고 오락적이었던 문제를 보완한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46] 사실 말이 건전한 내용이지 사실상 국가 정책홍보에 도움이 될 만한 프로그램을 많이 하라는 소리였다.[47] 대신에 월요일 심야에 전설사극과 금요일 심야의 금요연속극(김수현 작가가 대본을 쓴 것으로 알려진 '아롱이 다롱이'가 이 시간대 방영된 유일한 드라마다.) 을 신설했다.[48] 심지어는 전두환이 체육관선거에서 당선된 날에는 박종세 아나운서가 나와서 전두환을 "하늘이 내리신 대통령"이라고 찬양하는 특집방송도 했었다(...)[49] 당시 박종세 아나운서 해설의 고교야구 중계를 시청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하필 바로 이어서 방송된 주말 오후 5시뉴스를 보게되는 바람에 일이 커져버렸다는 후문이다.[50] JTBC 개국 당시 공개했던, 통제구역에 모셔진 그 필름들이 바로 5.18 민주화운동 관련 영상이었다.[51] MBC같은 대형방송사는 물론(사실 MBC는 박정희 시절부터 정권 비판적인 목소리를 잘 내지 않는 경향이 있긴 했다. 당시 워낙 보도부문보다 오락이미지가 강한 것도 있기도 했고, MBC가 정권 비판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된것은 80년대 후반 방송민주화 이후부터 이다.)이고 소위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당시 주류 언론들이 땡전뉴스, 전두환 찬양 보도 일색으로 돌아서는 계기가된다.[52] 당시에는 프로그램 도중에 하단에 자막을 통해 광고를 띄웠었다.[53] 78년도에 방송된 주말연속극 <시집갈때까지는>의 경우,낮에 한번, 저녁때 한번으로 나누어 방송하는 지금으로선 기상천외한 편성을 하기도 했다.[54] 당시 MBC에서 방영했던 수사반장같이 인기 주간극이 아닌이상 1시간짜리 드라마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55] 후술할 정부의 제재 역시 일견 납득이 갈 수도 있는 것이, 당시 방송 환경 기준으로 1시간짜리 드라마 편성은 정말 엄청나게 긴 것이다.[54] 보통 이 시기의 드라마 편성은 20분, 심한 경우 10분,15분 정도로 짧았다.[56] 동양방송이 한창 잘나가다가 외압에 의해 간판을 내리기까지의 10년간은 오일 쇼크로 인해 국가적 차원에서 에너지 절약을 부르짖던 때이고, 이를 구실로 텔레비전의 아침 방송이 무기한 중단되었던 시기이다. 지금 같은 다채널 종일방송과 다르게, 텔레비전 채널에 국한해서 보자면 오로지 지상파 3사만 있고 그조차도 하루에 방송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봤자 하루 중 저녁~밤 6시간에 불과한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광고가 늘어가니 윗분들 입장에서도 이래가지곤 버틸 수가 없다고 느꼈을 듯.[57] 하나의 프로그램을 1,2부로 나누어 사실상 중간광고를 넣는 형태는 2017년부터 부활했다.[58] 뉴스 시간대가 밤9시로 굳어진 것도 이때이다. 그 이전에는 KBS만 9시에 뉴스를 편성했고, TBC와 MBC는 밤 10시에 뉴스를 편성했다.[59] 다만 중복편성의 경우는 얘기가 다른데 1976년 정부 당국에서 공익성 강화를 목적으로 평일 저녁 6시에 어린이 프로그램 저녁 7시대에 가족프로그램 저녁 8시에 드라마와 캠페인 밤 9시에 보도프로그램을 (의무적으로) 편성할것을 지시했고[58] 당연히 때가 때인만큼 방송국에서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이런 지시를 받아들였다. 다만 그 이전에도 맞불편성을 하는 일은 꽤나 있었다.[60] 참고로 이 규정은 1994년 KBS 1TV의 상업광고 폐지에 따라 복구되었다.[61] 물론 완전히 자유로웠다는 얘기는 아니다. 연예인 이름을 한글화하는 조치에 동참하기도 했고, 중간광고를 폐지했으며 TV프로그램에 외래어가 너무 많아 순화해야 한다는 박정희의 지시에 따르기도 했고 1976년도에 시간대별 편성지시에 동참하기도 했다. 다만 프로그램 제작면에서는 확실히 KBS보다 자유로웠던건 사실.[62] 외래어순화에서는 타 방송사에 비해 자유로웠다는 것이 1978년 TBC 해변가요제에 나갔던 항공대의 스쿨밴드 '런웨이'가 같은 해 MBC 대학가요제에서는 '활주로'(...)로 바꿔서 출전했다.[63] 원로 코미디언. 사회를 10년 넘게 봤다. 2대 MC는 전국노래자랑 초대 MC인 위키리(본명 이한필)와 정윤희였다.[64] 쇼쇼쇼는 언론통폐합 이후에도 약 3년 동안 심야시간에 방송되었다. 쇼쇼쇼의 인기가 워낙 좋아서 폐지를 시키지 못해 시청률이 떨어지는 심야시간대로 시간을 옮겨 방송한 것이다. 언론 통폐합 이전 쇼쇼쇼는 프라임 타임이라 일컬어지던 매주 토요일 밤 9시에 방송되었었다.[65] 그 당시에는 '우주중계'라고 불렀다.[66] 지방은 KBS가 일부경기를 중계했다.[67] NTV계열의 YTV에서 제작했는데, 이 때 최초로 한일합작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 자세한 설명은 항목 참조[68] 단, 1981년을 기점으로 폭력물이 슬금슬금 올라오면서 씨알도 안 먹혔다.[69] 국산 작품도 방영하긴 했는데 자체제작은 당연히 아니고 '''극장판 애니메이션 재방'''이었다.[70] 단 이들은 본방 당시에는 정규 편성이 아닌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다. 정규 편성으로는 방송된 경우는 달려라 하니가 최초다.[71] 당시 방송사들 재무제표를 보면 매년 수백억원씩 흑자를 기록하고 광고판매율이 90%를 넘던 상황이었다. 해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여유가 없었던건 아니었지만, 60분짜리 드라마 한편 만드는 것보다 30분짜리 애니메이션 한편 만드는 게 제작비가 훨씬 더 들었다. 그래서 방송사 입장에서는 매년 매출액이 크게 늘었다 해도 애니메이션 제작에 별로 구미가 당길리가 없긴 하다.[72] 더군다나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정부 당국이 극장판 애니메이션에 신경을 쓰느라 TV 애니메이션에 대한 지원이 부족했기도 하고, 국산 애니 제작을 안한다 해도 쿼터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던 시기라 크게 제재조치 먹을 일도 없으니 크게 욕먹지 않는 선에서 드문드문 제작했던 것. 참고로 쿼터제가 처음 마련된 건 2000년이고 현재와 같은 쿼터제가 적용되기 시작한 건 2005년이다.[73] 여담이지만 삼성도 후에 잠깐이나마 애니메이션 제작에 뛰어든 적이 있었긴 했다. 바이오캅 윙고가 삼성에 의해 제작된 대표적인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나 돈이 안 되었는지 얼마 안가 사업을 접었다. 한편으로 삼성의 방계 그룹인 CJ그룹도 애니메이션 제작에 어느정도 관여하고 있기는 하다. 제작량이 그리 많은건 아니지만 애니메이션 쿼터제 덕분인지, 아니면 투니버스를 소유하기 있기 때문인지 어쨌든 삼성과는 다르게 사업을 지속적으로 진행 중.[74] 이 방송을 통해 모리 마사코, 사쿠라다 준코, 야마구치 모모에 등 기라성같은 가수들이 데뷔했다.[75] 해당 내용은 일본 위키백과 동양방송 항목에 서술된 내용이다.[76] 이후 상호 제휴관계를 상실한 닛폰 테레비는 1991년 sbs와 새로 제휴관계를 맺었으며, 대신 2011년에 tv 아사히가 JTBC 출자에 참여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77] 아래의 달동네 오프닝 영상의 제공자막에서 3번째 참조[78] 현재는 CJ계열 채널들이 이러한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79] 동양방송 개국 당시 첫 연주소가 있던 곳으로, 지금의 태평로1가에 자리했었다.[80] 1965년 12월에 이전하여 중앙일보와 사옥을 나눠 썼다. 지금의 중앙일보-JTBC 본사 사옥.[81] 한국일보 출판부에서 발간한 한국일보 정치 비사 발굴 시리즈 - 실록 청와대 시리즈가 1992년 12월에 궁정동 총소리, 1993년 12월에는 지는 별 뜨는 별, 1994년 9월에는 빼앗긴 서울의 봄 총 3권으로 출간하였다.[82] 실제로 1976년 이후 동양방송 관련 자료를 보면 컬러로 제작된 영상을 꽤 볼 수 있다.[83] TBC는 그 이전에도 미스 아시아 대회를 중계하는 등 미인대회 중계에 꾸준히 관심을 보여온 듯 하다.[84] 당시 KBS도 1970년대 초부터 컬러방송 준비를 진행하였으나, 동양방송에 비해 기자재나 스태프의 수준격차가 커 결국 국내 실황중계방송사로 선정되지 못한다.[85] 현재의 KBS 별관.[86] 제1회 TBC세계가요제 그랑프리 수상 이후 1979년 12월 15일에 방송된 쇼쇼쇼에 게스트로 출연하였다.[87] 사랑의 절정이라는 말로 번역되었고, 민해경이 나중에 이 곡을 리메이크한다.[88] 1980년 2회 가요제 때 게스트로 당시 일본의 인기아이돌이었던 핑크 레이디가 공연을 했으며 이는 최초의 내한 공연을 가진 일본아이돌인 셈이다.[89] 1980년 제 2회 대회때 조용필이 금상을 수상했는데, 원래는 조용필의 점수가 제일 높았다고 한다. 대회 전야제 때 조용필이 한오백년을 불렀을 때 심사위원들이 모두 인상 깊게 지켜봤는데 '국내 가수에게는 그랑프리를 주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어서 금상을 받았다고 한다.[90] 물론 안좋은 측면이 없지 않다. 드라마는 막장의 끝을 달렸고, 무분별한 쇼프로그램 제작으로 당시 언론에서 대차게 까는 등 언론과 방송국 사이에 치열한 기싸움이 있던 때이다.[91] 특히 유럽에 있는 방송국들과 네트워크를 강화한다.[92] MBC 대학가요제와 같은 대학생 중심의 가요제였다. 본디 1978년부터 열리던 '전국 대학생 경연 축제'라는 행사에 껴 있던 해변가요제대학가요제에 자극을 받아 가요제의 이름이 젊은이의 가요제와 합쳐져 이름이 바껴 진행되었다.[93] 언론통폐합 이후 이 행사가 규모가 커져서 그 유명한 국풍81로 바뀌어 진행된다. 물론, 국풍81에서 같은 이름으로 가요제가 진행되었고, 여기서 탄생한 스타가 이용.[94] 최양락이 이 프로그램으로 코미디언에 도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 언론통폐합 크리로 방송국이 없어지는 걸 보며 원통해했다는 일화가 있다.그는 이순재, 강부자 선생님보다 자기가 더 많이 울었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95] 하지만 설마 없어 지겠느냐며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박정희 정부때도 방송국에 전화가 오거나 남산에 사장님들이 끌려가는 일들이 종종 있긴 했어도 방송국이 없어지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그냥 해직정도로 끝나겠거니 생각했다.[96] 이때 TBC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삼성이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국제그룹같은 사례를 생각하면 더더욱...[97] 녹화는 1980년 11월 27일에 진행되었으며, 1980년 11월 30일 밤 9시 30분부터 2시간동안 방송되었다. 사회는 당시 쇼쇼쇼를 진행하던 허참, 정소녀 그리고 박종세 아나운서였다.[98] 이후 동아방송등 대부분의 폐국된 방송사의 거의 웬만한 고별방송은 사전 녹화로 방송을 했다.[99] 당시 연출자였던 조용호씨 증언이다.[100] 재미있는 점은 이은하씨가 한참 뒤인 JTBC 개국 후, 신년특집 패티김쇼에서 패티김씨와 듀엣으로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TBC 고별방송 당시 울면서 불렀던 바로 그 곡)을 다시 불렀다는 것이다.#[101] 허나 이를 가볍게 씹어먹는 일로, 언론통폐합 당시 KBS에 넘겨줘야 했던 자료들을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관계자들이 안 주고 빼돌려 31년간 중앙일보 창고에 보관해놓은 정황이 jtbc 개국 기념 다큐멘터리에서 드러난 사건이 있다. 다만 중앙일보 관계자들도 이런 게 여기에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비밀에 부쳐져 있었기 때문에 보관이 원활하지 못했고, 정말 안타까운 점으로 대부분의 녹화본(베타맥스 테이프)이 '''손상되어 복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당대 방송 사료가 얼마 없는 것이다.[102] 사미자 씨가 JTBC개국 축하 프로그램에서 증언한 일화다.[103] 이 날부터 KBS-1TV에서 본격적인 컬러TV방송이 시작된다. 1970년대 중반부터 컬러TV방송을 준비했던 동양방송 관계자들에게는 맥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104] 참고로 이 방송은 흑백으로 진행되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KBS-2TV와 MBC-TV의 컬러방송이 12월 22일에 시작되었던 탓이었다.[105] 1970년대 후반 김병률 창업주가 연 패션전문 매장이자 패션 브랜드. 1981년 (주)뼝뼝이란 독립법인이 되어 1980년대 중반 '유선실업'으로 변경했다가 1987년에 부도났고, 1992년 국제물산에 브랜드가 넘어간 후 그 법인명도 '뼝뼝'이 됐다가 1996년 폐업됐다.[106] 31년만의 귀환 TBC의 황인용 전 DJ 증언.[107] 그러나 KBS에서 적응이 어려웠던 직원들은 그나마 민영색채가 강했던 MBC로 옮기거나, 사무직이나 영업직들은 타 신문사, 삼성 계열사로 옮기기도 했다.[108] 언론통폐합 이후 KBS 제2라디오에서 방송했다가 1991년 5월에 종영되는데 그 이유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오락 위주에서 생활 정보로 전환하려는 당시 KBS의 프로그램 방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1992년 10월 8일에 가을 개편 때 부활되어 지금도 KBS 제2라디오에서 방송되고 있다.[109] TBC가 KBS로 넘어가기 직전 TBC가 최후로 방송했던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밤을 잊은 그대에게는 23시부터 익일 1시까지 진행됐지만 이 날은 자정을 기점으로 TBC의 전파 송출을 중단해야 했으므로 1시간 단축 방송을 해야 했다. 황인용 아나운서가 울먹이면서 말했던 최후의 콜은 다음과 같다. "끝으로 동양방송의 호출부호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는 육백 삼십 구 킬로헤르츠… HLKC… 동양방송입니다…" 여기서 들을 수 있다.[110] 2011년 제작, 방송된 다큐멘터리 31년만의 귀환 TBC에서 황인용은 자신 같은 DJ로써는 통곡을 쏟으며 우는 방법밖엔 없었단 상황으로 비참했던 당시의 심정을 말했고, 이순재 또한 여의도 신사옥에서 '여의도 시대에는 하나의 텔레비전 전기다, 우리는 새로운 창조를 시작해내보자'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몇달 뒤 폐국당한 것을 보고 큰 희망을 가졌었는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고 표현한 바 있었다.[111] 비슷한 시기에 서울경제, MBC 전 주주들, 합동통신 전 사주 등도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가 실패하였다.[112] 현재 KBS 2TV [113] IPTV 기준[114] LG헬로비전(구 CJ헬로비전)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