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무치시
- 위구르어: ئۈرۈمچى (Ürümqi 혹은 Ürümchi; 위륌치)
- 중국어: 乌鲁木齐 (Wūlǔmùqí 우루무치), 정자체: 烏魯木齊
- 몽골어: ᠥᠷᠥᠮᠴᠢ / Өрөмч (Örömch 우룸치)
- 카자흐어: ٴۇرىمجى (Úrimji 위름즈)
- 한국한자음: 烏魯木齊 (오로목제)
1. 개요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수부(행정중심지). 인구는 2017년 기준 351만 9600명으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주도이다.
인구가 적은 중국 서부 지역에서 가장 큰 대도시이며,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중북부에 위치해 있다. 참고로 인구 100만 이상 도시 중 세계에서 가장 바다와 멀리 떨어진 곳이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황해는 물론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이자 사실상 내해인 카스피 해도 한참 떨어져 있다.
우즈베키스탄 호레즘 주의 도시 우르겐치와는 다르다.
2. 명칭
언어별 명칭은 상단 기재 참조.
도시의 원래 이름인 '우룸치'는 오이라트 몽골어로 좋은 목초지라는 뜻으로, 1954년 도시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도시 이름의 공식 영문 표기가 병음 표기가 아닌 'Ürümqi'인 것도 이러한 어원에 따른 것. '우루무치'는 현지어명인 '우룸치'(몽골어) 내지는 '위륌치'(위구르어)를 한자로 다시 음차하여 전사하고 그 한자를 다시 한어병음으로 표기한 발음으로, 말하자면 로스앤젤레스를 Luoshanji(뤄산지)라고 표기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내에서는 우루무치라는 표기가 일반적으로 쓰이고, 외래어 표기법 용례집에서도 도시의 이름이 우룸치가 아닌 '우루무치'로 실려 있다. 오히려 중국 내의 조선족들이 이용하는 사이트에서 원래의 발음에 가까운 '우룸치'라는 표기가 사용되는 편.[1]
3. 기후
우루무치의 기후는 냉대와 건조 기후의 중간인 스텝 기후에 속해 있다.
위도는 북위 43.5도에 위치하며 이는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높은 위도이며 시카고보다도 위도가 높다. 남한은 커녕 북한보다도 위도가 높은지라, 한반도의 그 어떤 곳보다도 고위도이다. 오히려 유럽 국가들과 위도가 비슷할 정도다.
따라서 겨울이 매우 춥다. 철원군이나 모스크바보다 매서운 추위가 불어닥친다.[2]
1월 평균기온 -12.6℃이며 7월 평균기온 23.7℃ 연평균기온 6,9℃ 로 전형적인 스텝 기후대이다. 여름은 생각보다 덥진 않다. 가끔 매우 더운 날이 나타나지만 이도 낮 한정이고 밤에는 춥다. 열대야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막이라서 더울지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서늘한 편이다. 물론 그래도 낮엔 40도까지는 치솟는다. 그러나 습도가 낮아서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하며, 밤에는 기온이 급강하해 이때 진짜 얼어 죽는 사람도 생긴다. 역대 최저기온은 -42℃이며 최고기온은 42℃이다.
여름의 습도는 낮지만[3] 겨울의 습도는 80% 정도로 매우 높은데, 겨울 기온도 매우 낮은데 습도까지 높아 '''온몸이 떨리는 추위'''를 경험할 수 있다.
4. 역사
4.1. 우루무치 건설 이전
우루무치가 소재한 준가리아 분지 지역은 본래 이란계 기마민족인 스키타이 즉 샤카족이 살던 지역으로,[4] 이후 월지족이 근방에 투르판 분지에 자리 잡았다. 한서에는 이 지역 근방에 차사국(車師國), 윤대(輪臺) 등의 도시 국가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중 차사국의 속국이었던 인구 2천의 동차미국東且彌國이 오늘날의 우루무치에 비정되는 장소에 위치해 있었다 한다.
그리고 이들 준가리아 분지의 스키타이계, 토하라계 국가들은 대부분 흉노 부족 연맹의 지배를 받았으며 잠시 한나라가 흉노를 제압한 후 영향력을 행사하다 한 멸망 후 유연 등 유목민들의 지배를 거쳐 튀르크계 종족 돌궐의 땅이 되었다.
4.2. 베쉬발릭
돌궐 역시 위구르 제국에 무너지고, 이 일대는 위구르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우루무치 근교 오늘날의 창지 회족 자치구 내에 위치한 베쉬발릭(别失八里)은 위구르 칸국의 주요 다섯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위구르 제국은 마니교로 개종한 후 베제클리크에 고분을 건설했으며, 이후 키르기스에 멸망한 이후 위구르 난민들이 근교 투르판 분지에 고창회골을 건국한다. 위구르 제국 시절부터 주요 도시였던 베쉬발릭은 고창회골의 하절기 수도가 되었다. 고창회골의 중심지 투르판 분지는 여름에 지나치게 더웠기 때문이다. 이후 이 일대에는 카라 키타이와 몽골 제국이 들어왔으며, 차가타이 칸국이 이 지역을 장악했다.
4.3. 우루무치 건설 이후
근세 이 일대 주인은 오이라트인으로 바뀐다. 남쪽 타림 분지에는 차가타이 칸국에 이어 티무르 제국과 모굴리스탄 칸국 등의 튀르크계 이슬람 국가들이 연신 들어선다. 오이라트의 후예 준가르는 전쟁 포로들을 데려와 농사를 짓게 하고 석조 요새를 쌓았는데 이는 오늘날 우루무치와 쿨자 등 도시의 기원이 된다. 우루무치라는 도시의 명칭은 오이라트 몽골어로 ''' ~아름다운 목장'''이라는 뜻이다. 명나라 때 기록에도 등장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투르판 같은 지역에 비하면 중요도가 낮은 지역이었다
18세기 중엽 만주족의 청이 건륭제 연간에 이 지역을 정복하고 숙적 준가르인들을 추방/학살한 이후 공백지가 되었다. 준가르는 이미 하미(쿠물), 투르판 일대를 강희제 때 빼앗기고 준가리아 및 코코노르라 부르던 칭하이성 일대만 남은 상태에서 결국 청나라, 그리고 청과 동맹을 맺고 철천지 원수 준가르를 갈아버리려고 한 외몽골의 할하 부족들에게 비참하게 망해버렸다.
이때 건륭제는 준가르가 몰살한 외몽골 할하 부족들의 원수를 갚는단 명목으로 준가르에 대해 일종의 제노사이드를 벌였다. 외몽골의 경우야 외할하 부족들이 존재했고 이들이 보돈노르 회맹에서 만주족 칸에게 충성을 맹세했기에 괜찮았고, 칭하이 역시 쓰촨 성에서 이주한 한족들과 티베트인들 그리고 회족들이 있었으나 천산북로 일대는 일부 전쟁포로로 잡혀온 무슬림 농노들(타란치) 외에는 말 그대로 무주공산이 되어 버렸다.
근처 타림 분지에 사는 카자흐인이나 키르기즈인 등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다시 이 지역을 점거할 것을 우려한 청나라는 이 지역의 목초지를 농경지로 유지해 유목민들의 활동을 억제할 목적으로 1759년 남쪽에 있는 타림 분지에 있던 위구르족과 간쑤성에 있던 회족, 알타이 지역 일리 일대에 살던 카자흐족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여 공백지가 된 이곳에 식민했다. 이들은 준가르 족이 데려온 타란치[5] 들이 가꾼 농장들을 확장시켰다.
건륭제의 명으로 1763년 적화(迪化, Díhuà 디화)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고[6] 성벽이 건설되었으며, 만주-몽골 팔기군 상당수가 이 지역으로부터 군량을 보급받았다. 이 중 몽골인으로 구성된 몽골팔기는 준가르 멸망의 일등공신으로 준가르가 사라진 후에도 계속 이 지역에 남았다. 도시는 무슬림들이 사는 구역과 한족들이 거주하는 한청으로 구분되었는데 한청에서는 관우를 숭배하는 사원을 비롯해서 여타 다른 청나라 도시와 다를 것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때 코칸드 칸국의 야쿱 벡이라는 야심가가 스스로 에미르를 자처하며, 이곳에 예티샤르라는 칸국 이슬람 국가를 세우고 위구르 등 튀르크계 부족들을 이용해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회족들과 야쿱 벡 군대 간의 전투가 벌어져 함락되었다. 웃긴 것은 전투 당시 회족들에 의해 우루무치에서 쫓겨났던 한족, 만주족들이 야쿱 벡 군대에 합류해서 우루무치의 회족들을 공격하였던 것. 청나라의 명장 좌종당이 이곳을 원정하자 회족들은 별 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고, 좌종당은 여세를 몰아 야쿱 벡 정권을 붕괴시키고 신장 대부분 지역을 수복하였다. 야쿱 벡은 탈레반처럼 강경 이슬람 신정을 펼치는 바람에 모든 종교에 관대했던 튀르크인들의 신임을 잃으며, 앞뒤가 안 맞는 정책으로 회족들의 협조를 받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이 그래도 같은 튀르크라고 동맹 관계이긴 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좌종당에 의해 1884년 신장성이 설치되면서 우루무치는 신생 신장성의 성도가 되었다. 천산북로에서 수도 역할을 하던 도시는 쿨자였으나, 청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국경이 변경되면서 국경에 위치한 쿨자 대신에 천산북로의 경제 중심지이던 우루무치가 신장성 전체의 성도가 되었다.
신해혁명의 혼란기를 틈타 우루무치를 관할하던 한족 관리 양쩡신이 신장성을 장악했다. 양쩡신은 회족 출신 사병 2천여 명을 이끌고 예전에 동료이자 상관이었던 다른 한족 관리들을 제압한 후에, 위안스카이로부터 신장성 도독으로 임명받았다.
양쩡신의 암살 이후 현실 감각이 전무한 진수런이 이곳을 지배했다. 전임자 양쩡신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화폐를 함부로 찍어내는 일은 자제했으나, 진수런은 화폐가 찍어내면 다 돈이 되는 줄 알고(...) 마구 찍어내서 인플레이션으로 신장성 경제를 파탄냈다.
1933년 4.12 디화 정변이 일어나 천중으로 지배자가 교체되었으나 성스차이가 이들을 모두 처형하고 회족 군벌 마중잉의 공격을 격퇴한 후 지배자로 등극한다. 성스차이는 '''신강왕''' 내진 '''서북왕'''이라 불리던 인물로 이 지역을 반독립국처럼 만들어 소련에 충성을 맹세하고 사실상 영주처럼 군림했었다. 중일전쟁으로 내몽골 등 서북에 몽강국이 들어선 직후에도 성스차이가 다스리던 신장성은 전혀 영향 없이 혼자 태평했다. 그는 소련과 장제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4년, 장제스의 개입으로 성스차이도 축출되고 중화민국 즉 국민 정부의 소속이 된다. 이후 동투르키스탄 제2공화국이 우루무치를 점거하고 이후 중화민국이 국공 내전에서 패전하면서 1949년 신생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이 세워진 이후 도시의 이름은 오이라트 몽골어 이름에서 따온 현재의 우루무치로 개칭되었다. 디화라는 표현을 민국 시절에 썼기 때문에 소련과 친소련 성향의 소수 민족 공산주의자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4.4. 2009년 우루무치 유혈사태
5. 민족 구성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주도지만 주민의 대부분은 한족으로, 2010년 기준으로 인구의 75%가 한족이다. 한족들은 중국 각 내륙지역에서 여기로 이주한 이주민들이다.
원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위구르족은 12%에 불과하고, 그 외 소수민족으로 회족(9%)과 카자흐족(2%), 키르기즈족, 우즈베크족 등 타 튀르크 종족들 그리고 몽골인, 일부 러시아계 중국인 등이 거주한다. 우루무치 시 역사에서는 회족들이 여러모로 큰 기여를 하였으며, 이 때문인지 시 근교에는 창지 회족 자치주(昌吉回族自治州)가 위치해 있다.
몽골인과 회족, 러시아계 중국인을 제외한 나머지 소수민족은 거의 튀르크계 혈통이다. 이 중 카자흐, 키르기즈, 우즈베크 등의 종족은 이웃에 자기 민족의 독립국이 있기도 하다. 우즈베크인과 위구르인은 터키어 차가타이 방언대에 속해 언어가 비슷하지만 서로 통하지는 않으며, 반대로 같은 터키어 킵차크 방언대에 속하는 카자흐와 키르기즈는 서로 언어가 통한다.
이곳의 몽골인들은 러시아에서 이주한 칼미크인들의 후손들로 몽골어의 오이라트 방언을 써서 외몽골의 할하 몽골인이나 내몽골의 차하르 몽골인과는 좀 차이가 있고 스스로를 할하/차하르 인과 철저히 구분한다.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족과 소외되어 있는 위구르인 간의 시위 혹은 테러 등의 충돌도 종종 일어났는데, 2009년 7월 위구르인들이 분리 독립을 요구하면서 대규모 유혈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때 중국은 계엄령 선포를 시사했으나 실제로 하진 않았고 대신 무장경찰부대를 보내 1주일간 밟아서 진압했다. 2008년 이웃 티베트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도 비슷하게 진압한 적이 있다.
위구르인들은 근처에 차로 두 시간 반 정도 걸리는 투르판 분지가 전통적으로 위구르인의 본거지이다 보니,[7] 적지 않은 수가 거주하고 있다. 애초에 우루무치가 상업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도 위구르인들의 투르판 분지와 카자흐인들의 일리 강을 연결하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6. 교통
중국 중심부인 동쪽의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으로 가는 철도는 매우 활발히 운행되고 있다. 이래 봬도 특쾌열차로 광저우 및 선전시, 그리고 새로 건설된 유창샤고속철도를 이용해서 홍콩 구룡반도 홍콩사이까우룽역으로도 연결된다.
특히 최근에 중국의 대륙 철도망 확장계획인 8종8횡 계획의 하나로 유창샤고속철도가 간쑤성 란저우시에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우루무치 시까지 1776km의 고속철도 구간이 연장/완성되어 교통이 크게 좋아졌다.
이 노선은 우루무치 시가 서쪽 종점으로 동쪽으로 칭하이성 시닝시(青海省 西宁)와 간쑤성 란저우(甘肃省 兰州)시에 연결되고 거기서 허난성 정저우시(河南省 郑州) 를 거쳐 동쪽 종점은 장쑤성 롄윈강시 (江苏省 连云港)까지 고속철도 노선으로 연결된다.
물론 유사시 중국 무장경찰부대 소속 폭동진압 경찰기동대 병력을 신속히 투입하려는 목적도 있다. [8]
한편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인 알마티로 1,374km 구간을 달리는 국제열차가 매주 월, 토요일 주 2회 양 도시에서 각각 출발한다.
지하철은 우루무치 지하철 참조.
공항은 우루무치 디워푸 국제공항 참조. 한국에선 가끔 대한항공 전세기가 뜨는데 소요시간이 6시간으로 중국 노선 중 최장거리이며 거의 타슈켄트나 알마티 등 타 중앙아시아 노선이나 싱가포르, 발리, 자카르타 등 중거리 동남아시아 노선과 맞먹는다.
참고로 인천국제공항에서 이스탄불 공항으로 가는 터키항공과 대한항공 터키 노선이 이 도시 근처 상공을 질러간다. 이후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의 아스트라한을 거쳐 흑해를 통해 이스탄불 공항에 내린다.
7. 문화
스포츠의 경우 중국 농구 명문팀 신장 플라잉 타이거즈의 연고지다. 그리고 축구가 인기있어 축구팀 신장 톈산 쉐바오가 있다. 이 팀은 중국 을급 리그에 소속되어있다. 축구를 잘 못해도 사랑만은 대단하다.
이 지역 한족들의 경우 상당수가 청나라 말 산시성과 쓰촨성, 간쑤성 등 주변에서 올라온 빈농 출신들이었다. 티베트도 비슷하게 쓰촨성의 빈농들이 대거 이웃동네인 티베트로 이주했다. 회족들은 우루무치 건설 초창기부터 대거 이주하였으며 우루무치가 신장의 상업 중심지가 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근처에 차로 두 시간 반 거리로 위구르인들이 모여사는 투르판 분지가 위치해 있고 위구르인 식민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위구르 영향도 큰 편이다.
신장의 역사를 저술한 제임스 밀워드 박사에 따르면, 시내에서 한족들이 카자흐인들이 대중 교통 이용이 서툴다고 대놓고 깔깔거리고 비웃는 등 나중에 굴러온 돌 주제에 다수인 한족들의 텃세(?)가 심한 듯 하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친소 군벌 성스차이 정권 시절 세워진 소련식 건축물들도 꽤 남아 있다.
무슬림 소수민족 청년층의 경우 아예 하루 다섯 번 예배를 모스크에서 열심히 드리면 집단교육수용소로 잡혀간다. 중국 당국에서는 모스크 출입을 제한하는 편이다. 모스크에서는 금요일마다 현지어로[9] 설교(쿠트바) 진행 후 합동예배를 진행하는데 이마저도 당국의 감시가 심하다. 라마단 금식도 제한을 받는다.
[1] 사실 이는 중국 내 다른 지명도 마찬가지로,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중국 내 지명 표기는 거의 대부분이 병음 표기만을 따르지만, 정작 중국 내에서는 한자 지명은 한국 한자음으로 읽고 외래 지명은 'Harbin → 할빈'처럼 비교적 원어에 가깝게 읽는다.[2] 추위로는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도 한 가닥 하는 편으로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만 해도 추운 도시로 악명 높으며,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도 겨울에 꽤 춥다.[3] 강수량의 대부분이 이때 집중되는데도 습도는 낮다.[4] 한무제가 장건을 사신으로 보내 동맹을 맺으려 했던 오손도 스키타이계 왕조다. 이 스키타이인들은 백인종으로 붉은 머리의 푸른 눈을 하고 있었기에 외양으로도 쉽게 구분이 가능했다.[5] 준가르 족이 전쟁 포로로 잡아온 한족, 키르기스, 카자흐인으로 된 농업 노예 집단[6] 차츰 교화시킨다는 뜻. 타이베이에도 여기서 따온 길 이름인 디화제가 있다.[7] 고창회골 문서 참조[8] 참고로 1989년 천안문 6.3 항쟁 이후 중국은 절대 현역 인민해방군을 시위진압에 투입하지 않는다!!! 천안문 트라우마 때문. 대신 시위진압이나 무장강도, 테러, 인질극 등 특수범죄 진압용 부대인 무장경찰부대를 투입한다. 홍콩은 홍콩 경찰 PTU 기동대가 이 역할을 대신하고 마카오도 마카오 치안경찰 기동대가 이 역할을 맡는다.[9] 이슬람 모스크의 금요 예배 설교는 아랍어가 섞여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