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일생

 


1. 정치 입문 전
1.1. 유년 시절
1.2. 언론인 시절
2. 정치 활동
2.3. 제18대 국회의원
2.5.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2.6. 정치재개 임박 (2015.12. ~ 2016. 1.)
2.7. 정치재개 이후 (2016.2. ~ )


1. 정치 입문 전



1.1. 유년 시절


전라북도 도의원을 지낸 아버지(순창군)로부터 태어났다. 전주시로 유학하여 전주고등학교(48회)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 재수로 입학해 졸업했다.[1]
당시 운동권으로 지냈다가 구금된 적이 있었으며, 아버지를 여의고 대학시절에는 서울에서 옷을 팔며 힘든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2]강제징집 되고나서 제33보병사단(현 제17보병사단) 사단 본부대 행정병으로 군 복무 후 육군 병장으로 전역했다. 우여곡절의 학업 끝에 1978년 문화방송(MBC)로 입사한 뒤 대학까지 졸업하여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2. 언론인 시절



'''△ 추억이 되어버린 정동영의 앵커 시절'''
문화방송에 입사한 뒤 기자를 거쳐 오른 뉴스 앵커[3]는 그의 대표적인 커리어라고 할 수 있다.
기자 시절에는 5.18 민주화운동에 현장 특파원으로 취재한 적이 있었지만, 취재 내용은 보도되지 못했다.[4] 주미 특파원으로 지내는 동안 1984년 웨일스 대학교 언론학 대학원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걸프전독일 통일 등 굵직한 사건을 현장취재한 적도 있었다. 물론 전두환을 찬양하는 흑역사도 있었지만 어차피 이때는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야했기 때문에 전두환을 비판하는 기사를 내는 거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1995년 12월 3일 전두환 구속 당시 MBC 뉴스데스크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 07년 대선때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당시 취재하던 도중에 구조활동을 방해했던 일로 한나라당 심재철에게 도덕성을 비판받은 적도 있다.#
귀국 후에는 뉴스 앵커로 지내면서 억압받는 언론 상황에서도 소신있는 보도로 언론인으로서의 자세를 보여주며 '''명품 앵커'''라는 별칭이 생겨났다.[5]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마감뉴스인 0시 뉴스 앵커로 재직했는데 언론인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정권에 반하는 보도를 하여 '여소야대' 정국이 되어버린 일은 유명한 일화.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2. 정치 활동



2.1.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 시절


1996년 김대중 당시 총재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뒤로는 정치인으로 완전히 전업하였다.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역 국회의원 오탄 대신 전주시 덕진구 지역구로 출마하여 전국 최다 득표(97,858표)를 달성하며 국회에 입성했다.[6]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16대 국회 당시 천정배, 신기남[7]과 더불어 새천년민주당의 정풍 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이자 동교동계 좌장이었던 권노갑 의원을 비판하며 퇴진 요구를 한 것.[8] 이 사건으로 정동영은 일약 민주당 내 개혁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된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때는 새천년민주당 경선에 참여했으며, 노무현으로 후보가 확정될 때까지도 경선을 완주하여 유력한 차기 권력으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대선 후에는 다시 천신정이 함께 동교동계 퇴진[9]과 민주당 쇄신론을 내세웠으며, 이는 신당 창당론으로 이어져 민주당 분당 및 열린우리당 창당의 주역이 되었다.
열린우리당 창당 후 김원기의 뒤를 잇는 두 번째 당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정동영은 노사모를 서서히 흡수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늘려갔으며,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을 급등시키며[10] 탄핵 정국 및 17대 총선을 이끌었으나, 젊은층의 투표를 독려하는 취지의 발언이 노인 폄하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미래는 20대, 30대들의 무대라구요. 그런 의미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아요. 꼭 그분들이 미래를 결정해놓을 필요는 없단 말이에요. 그분들은 어쩌면 이제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이니까... 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되고 20대, 30대는 지금 뭔가 결정하면 미래를 결정하는데 자기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잖아요.

- 국민일보 인터뷰 도중 발언

이 발언은 청년층이 정치에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도였으나 세대 갈등을 부추긴다는 오해를 살 수 있는 부적절한 표현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11]
결국 저 발언의 여파로 비례대표 후보에서 사퇴하였다. 선거 결과는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 확보로 끝났으나, 개헌선까지 가능하다는 전망에 비해서는 다소 미미한 결과였다.[12][13][14]
이후 통일부 장관을 맡으면서[15] 열린우리당 의장에서 물러난다.
2006년 다시 열린우리당 의장을 맡으며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지휘했으나 참패[16]의 책임으로 사임했다.

2.2. 제17대 대통령 선거


[image]
'''△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 정동영'''

'''"중산층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가족이 행복한 나라"'''

- 대선 당시 슬로건

2007년 대선시즌이 임박하자 당초 여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던 고건은 불출마 선언을 하고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는 치열한 경쟁끝에 이해찬손학규를 밀어내고 대선후보로 확정되었다.[17] 참고로 노무현 정부의 내각에 있었던 이력 때문인지 친노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정동영은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위한 경선 시즌 때까지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경쟁하던 관계였다. 이회창이 노무현과 당외경쟁을 했다면 정동영은 노무현과 당내경쟁을 했다.
다만, 경선 결과를 승복했고, 노무현 정권 탄생주역이기도 했으며, 노무현 정부가 정동영 장관을 다음 대권주자로 푸쉬를 해주고자 'NSC 상임위원장을 겸직하는 부총리급 통일부 장관'을 시켰다. 친노라고 하긴 좀 그래도 노무현 정부와 연합하고 지원을 받은 케이스다.
물론 이건 정권 중반까지의 이야기고, 정권 후반부에는 노무현 정부의 실책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18] 친노 세력과는 거리가 벌어지게 되었다.[19][20] 그 결과 노무현은 여당에서도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치달으면서 완전히 새가 되었으며, 이후로 정동영은 친노가 아닌 소위 비노로 분류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동영은 2007년 자신을 둘러싼 비노 논란에 대해 "공과 과를 모두 안고 갈 것이며, 구분은 무의미하다"라고 한 바 있다.해당 인터뷰.
경선을 통해 대통합민주신당 후보가 되어 본선에서는 한나라당이명박 후보와 경쟁을 하게 되었으나, 정부 여당의 지지부진한 지지율[21], 후보 단일화 실패, 뚜렷하지 않아 보였던 정책비전,유세 및 TV토론에서 BBK 주가조작 사건만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통에 전술한 모든 악조건들과 저놈의 지긋지긋한 BBK 주가조작 사건 소리 좀 안나게 하라는 유권자들의 요구 등 나쁜 쪽으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이명박의 절반도 채 되지않는 지지율을 기록하는 등 부진을 면치 못했다.
한편 이회창의 무소속 출마로 일부에서는 97년 대선과 같이 보수표 분산의 효과를 예상하기도 했으나, 이마저도 넘사벽이었던 지지율을 극복하지 못한 채 결국 이명박에게 밀리며 제19대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는 역대 대선 중 가장 큰 표차로서[22][23][24] 패배하는 쓴잔을 마시게 되었다. 보다 자세한 과정은 제17대 대통령 선거 문서 참조.
그리고 대선용으로 만들어졌던 정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은 얼마 안 가 유시민, 이해찬 등이 탈당하는 등 이미 예상 가능권 안이었던 시나리오를 맞게 되었고, 18대 총선의 참패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후신이던 통합민주당에서 여러 계파가 범람하는 단초가 되어버린다.

2.3. 제18대 국회의원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를 서울특별시 동작구 을로 옮겨 출마하였으나, 뉴타운 광풍 속에 정몽준에 밀려 패배했다. 총선 당시 서대문구 홍은동에 거주하고 있어서 서대문구 을 출마설이 나돌았었다. 서대문구 을에는 이명박의 대통령 취임으로 일약 정권실세로 떠오른 한나라당 정두언이 버티고 있었기에 당시 민주당에서 서대문구 을 공천신청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정동영이 서대문구 을에 전략공천되는 게 아니냐는 전망도 만만치 않았지만 동작구 을에 공천되었다. 그러자 한나라당은 당초 이 지역구에 공천할 예정이던 이군현을 경남 통영 고성에 공천하고 정몽준을 동작구 을에 공천하는 배수진을 쳤다. 결국 정동영에게 있어서는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 되고 말았다.
이듬해 보궐선거(김세웅의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인한 국회의원직 상실) 출마 뜻을 밝혔으나, 민주당 측에서는 공천을 하지 않았고 이에 반발하여 탈당한 후 무소속으로 전주시 덕진구 선거구에 출마, 민주당 김근식 후보[25]를 크게 앞서며 70%대의 득표율로 압승하여 국회 복귀에 성공했다.[26]
사실 공천 문제로 탈당했을 뿐 무소속으로 남아버리고 싶진 않았는지 당선된 뒤 복당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왔고, 공언한 대로 이듬해 복당했다. 참고로 정동영 폭행녀는 이때의 임기 말기에 벌어진 사건. 이 사건을 전후하여 이름하여 "정동영 죽이기" 논란이 불거졌다. 용산 참사 이후 정동영은 '''"현장왕"'''이라는 별명이 붙으며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다. SOFA 개정안 발의, ISD 반대 등의 행보를 보였다.[27][28] 대체로 노무현 정권의 정책과 친노인사들에 비판적인 진보진영에서도 정동영을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각종 집회며 이슈마다 현장에서 발로 뛰는 모습을 보인 덕분이다. 특히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이 강한 야권 지지층에게 정동영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과 사회적 불평등 해소를 위한 강력한 개혁적 성향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 면이 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지역구였던 전주시와 전라북도의 중요사업이었던 한국토지주택공사 유치와 10구단 유치에 실패하면서 지역 민심을 악화시켰다. 물론, 집권 여당과 청와대가 영남바라기였던 이명박 정부였고, 정동영 본인이 정부를 상대로 궐기대회를 열고 시위를 했다고 하지만 한국토지주택공사를 통으로 털리고, 10구단 유치마저도 실패하는 바람에 두고두고 비판 받을 정치적인 실책이 된 셈. 실제로 당시 전라북도와 전주의 분위기는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였고, 다들 지역 내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던 판국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LH 본사 유치를 두고 경쟁했던 경상남도 도지사가 같은 야당 소속의 김두관 지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참작의 여지가 더더욱 좁아진다. 이를 두고 당시 전북사람들은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냈던 정동영과 민주당 대표를 지냈던 정세균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29][30]

2.4.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통합당 내에선 당 원내 지도부를 해체하라고 압박하던[31] 정동영에게 험지 출마를 요구하는 여론이 있었고 이에 전주 불출마 선언을 하고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거구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당내 예비후보였던 전현희(당시 제18대 국회 비례대표 의원)와의 경선에서 승리하여 민주통합당 후보로 확정되었지만, 낙선했다.[32][33] 본선에서 40%에 달하는 득표력을 보여주었지만, 지역 관련 공약보다는 경쟁자였던 김종훈 후보와 한미 FTA나 북한 인권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데 집중한 게 패인이었다.# 때문에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지역 밀착 공약을 보강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34][35]

2.5.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2015년 1월 새정치민주연합 내부의 문제를 제기하며 탈당한 뒤 국민모임에 합류하여 4.29 재보선에서 관악을에 출마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고사하였지만 출마하게 되었고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관악을 지역구 국회의원에 무소속[36]으로 출마하였다. '''새누리당오신환 - 새정치민주연합정태호 - 진보 단일 정동영'''의 3강 구도로 선거는 진행되었고 여론조사에서 엎치락 뒤치락하는 양상을 보였다. 만일 당선된다면, 정동영으로선 정치적 부활을 이룰 수 있는 큰 분수령이 될 선거였다. 관악구가 전통적으로 야권 성향이 강한 편이지만[37] 위에서 언급했듯 정동영 본인의 잘못은 아니지만 선거구가 자주 바뀌는 철새 이미지[38]에다 무소속 페널티 (서울서 무소속 당선 사례는 전부 민주당이나 새누리당이 후보를 내지 않은 경우였다.) 및 야권 후보 난립[39][40] 등으로 불안한 전개를 해야 했다.
결과는 오신환 후보가 43.9%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되었고 정동영 후보는 2위를 기록한 새정연의 정태호 후보(34.2%)에 이어 20.2%의 득표율에 머물어 3위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선거 구도를 불리하게끔 만들어버린 참모진의 삽질 등 불리한 요소가 많았다지만, 거물급 정치인이 3위를 했다는 것은 타격이라 할 수 있고, 그로 인하여 신당 창당에도 차질이 생겼다.
그 후 중국에서 잠시 머물다 고향인 순창군에서 지내며 자숙기를 보내고 있지만,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나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제19대 대통령 선거 주자로 거론하기도 한다.[41] 천정배 의원과 더불어 야권신당 창당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모임과의 관계는 국민모임이 정의당과 통합하는 과정에서 배제된 걸로 보인다. 실제로 정의당의 주류 계파인 참여계의 정동영 전 의원에 대한 비토는 상당했다. 자세한 내막은 노동당 진보결집 기획단 간담회 7페이지 참고[42]
최근 야권의 자중지란에 몸값이 연일 상한가를 치며 주목받고 있다. '몸값상승' 정동영, 정계복귀 임박 [43]

2.6. 정치재개 임박 (2015.12. ~ 2016. 1.)


12월 20일,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정동영 전 의원이 머물고 있는 순창 복흥에 찾아가 복당을 요청했으나, '서로 다른 길에 서있다, 하지만 내겐 민주당, 야당의 피가 흐르고 있다. 형제라고 생각한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 아직 독자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지 않은 만큼, 향후 행보는 섣불리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
12월 29일, 이종걸 원내대표와 회동했다. # 이종걸 의원은 정 전 의원과의 회동에 대해 '(정 전 의원과) 전반적인 사회 개혁 문제들에 대해 얘기했다'면서 "(정 전 의원이) 대여 전선에서 새누리당의 '반 개혁'을 우리 당의 개혁정신으로 막아내는 게 야권 전체의 통합에도 큰 도움이 될 거란 긍정적인 얘기를 해줬다"고 밝혔다.
1월 2일, 천정배 의원과 회동했다. 천 의원은 이날 정 전 의원에게 이제는 호남개혁정치 복원에 적극 나서달라"고 요청했고, 정 전 의원은 이를 경청한 후 "숙고해보겠다"고 답했다. #
1월 9일, "통일국가·복지국가를 염원하는 시민 모임"에서 정 전 의원이 머물고 있는 순창군 복흥면을 찾아 "정동영 전 의장의 정계복귀를 촉구하며, 정동영은 국민의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1996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정계에 진출했지만 2016년에는 국민의 명령으로 정계에 복귀해야 한다" 면서 정 전 의원의 정계복귀를 거듭 촉구했다. # 성명서 전문 이에 대해 정동영 전 의원은 대안야당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정계복귀가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44]

2.7. 정치재개 이후 (2016.2. ~ )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합니다.'''

- 정치재개 선언에서

2월 18일 국민의당에 합류했다.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 소속으로 전주 덕진구에 출마할 듯.#
2월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테러방지법 강행, 제2의 유신독재 꿈꾸나"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국민들이 가장 불신하는 국정원이 아니라 사후 통제가 가능한 부처에서 대테러 업무를 관장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하고 상식적인 요구”라고 주장하며 '''테러방지법 반대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어느 정도 예상대로 전주시 덕진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상대는 자신의 정책 참모를 맡은 바 있었던 김성주 현 국회의원이다. 김성주 의원과는 정치적으로도 동지'였'으나, 같은 전주고등학교 - 서울대학교, 거기다가 학과까지 선후배 관계여서 더욱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하여 그동안 큰 관심이 모이지 않았던 전주시 덕진구가 2016년 총선 최대 관심 지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거 결과 47.7%의 득표율을 얻어 47.0%를 득표한 더불어민주당 김성주 후보에게 신승하며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 '정치적 후배' 김성주 꺾고 전북 전주 병서 4선 성공 또한, 당초 전북에서 국민의당 바람이 부진할 거라는 예측을 깨고 국민의당 바람을 주도함으로써 전북 영향력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열린우리당 의장이자 최대 계파의 수장, 부총리급 통일부 장관을 거치며 노무현 정권의 최고 실세 중 한 사람이었던 그가 선거 기간 중에 '친노 패권주의'와 '영남 패권주의'를 거론[45]하며 친노 세력, 특히 노무현 정권 비판에 앞장 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일부 비판이 있기도 하였다. FTA반성문을 쓸 정도로 노무현 정권의 실책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했음에도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측면이 없지는 않다.
[image]
'''△ 정동영 민주평화당 의원'''
전라북도에서 국민의당 바람을 주도했다지만 본인은 경쟁자였던 더불어민주당 김성주 의원을 상대로 989표, 득표율 0.75%p 차이로 더불어민주당 김성주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었기 때문에 정동영이란 이름값에 비하면 기대 이하의 성적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국민의당의 지지율이 정동영 합류 직후에 덕진에서 더민주에게 무려 20% 넘게 밀렸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주장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오히려 국민의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며 전북 지역에서의 절대 열세를 뒤집은 셈. 중앙일보가 2016년 2월 23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덕진에서의 국민의당 지지율은 20.4%에 그쳐 42.0%의 지지율을 보인 더불어민주당의 50% 수준에도 미달했다. 한편 해당 여론조사에서 정동영의 지지율은 정당 지지율에 비해 10% 이상 높은 반면 김성주 의원의 지지율은 정당 지지율보다 낮았다.[46]
또한 정동영이 출사표를 던진 전주병 지역구를 더불어민주당이 꼭 이겨야 할 전략지역으로 선정하고 맹비난을 퍼부었음에도 거둔 승리이기에 더욱 의미가 크다.

2.8. 제20대 국회


매일경제신문이 7월 1일 정동영 의원이 부인의 7촌 조카(...)를 보좌관으로 두고 있었다고 7월 2일 보도하였다. 이 인물은 정 의원과 20년을 같이 일했었던 사람으로 정 의원 아내의 7촌 조카라고 한다.# 이에 대한 댓글 반응은 본인 7촌도 아니고 아내의 7촌 조카까지 문제삼는 것은 어거지라는 반응이 많다. 기타 의원들은 멀다고 해봐야 6촌인데, 이쪽은 부인의 7촌으로 사실상 남이나 다름 없지 않냐는 의견. 다만 다른 의원들의 친인척 보좌관 채용 건으로 논란이 되다 보니 언론들이 경쟁적으로 보도를 하다가 이러한 것까지 보도하게 된 걸로 보인다.
근데 7촌 조카를 채용한 사실이 또 언론에 보도됐다. 아무리 멀다해도 2명씩이나 채용했으면 문제가 되는 게 보통이지만, 7촌 조카도 충분히 멀 뿐더러(...) '''독립운동가의 손자'''[47]여서 친인척 채용 논란에서는 까임방지권을 획득했다.
한편으로 아내의 7촌 조카 채용이 논란이 된 것에 대해, 국민의당이 기존 양대 정당들을 비판한 것에 대한 부메랑이라는 의견이 일각에서 있다.
'''7월 19일''', 4년 8개월 만에 본회의장에 올라 정부의 독단적 사드배치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정동영, 4년 8개월 만 본회의장 단상 올라 사드 배치 맹폭
이날 정동영 의원은 안보가 목적이라는 사드 배치로 인해 안보와 국익의 '두 마리 토끼'를 놓쳐버린 박근혜정부에 맹공을 퍼부으면서, '사드는 하나의 무기체계가 아니라 국민의 삶을 겹겹이 둘러싼 국제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구조를 뒤흔드는 문제"라며 '사드배치 이후 경제가 흔들리고 북한 비핵화의 문이 닫히고 평화통일의 길은 영영 멀어지게 된다면 아무리 대통령이 결정했다 해도 국민 대표인 국회가 초당적으로 지혜를 모아야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시대착오적 대결구도가 다시 한반도 주변으로 형성되는 것"이라며 "미래로 가야 하는데 왜 지구 상에서 한반도만 후퇴하는가"라고 박근혜정부의 이번 결정을 비판하며 사드 배치 철회를 적극 촉구했다. 이런 정 의원의 논리적이고 날카로운 질문에 황교안 국무총리는 한때 답을 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2017년 들어서는 전주시김제시의 통합을 추진했으나, 현재는 잠정 보류한 상태다. 전주시 문서 참고.
7월 11일에는 기자회견을 열어 2017년 8월 27일에 열리는 국민의당 전당대회의 당대표 경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8월 27일, 국민의당 전당대회 당대표 경선 내내 안철수 후보의 가장 강력한 당권 경쟁자로 거론되었으나 안철수 후보가 약 700여표 차이로 가까스로 결선투표 없이 당대표로 선출되면서 28.4%(2위)로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광주에 지역구를 둔 천정배 후보(16.6%, 3위)에게 거의 더블 스코어에 달하는 표차를 냈고, 국민의당의 지지 기반인 호남권, 특히 전북을 싹쓸이했다고 한다. 노선이 유사했던 천정배 후보의 득표율까지 합하면 45.0%에 달해 당내 非안철수 성향의 호남계의 새로운 얼굴이 될 가능성이 점쳐지는 중이다.
10월에는 안철수 대표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국민의당바른정당의 합당이 어그러지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개적으로 안 대표를 비판했다. 박지원 의원과 더불어 바른정당과의 합당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걸로 알려진 정동영 의원은 10월 26일 오전 가톨릭평화방송의 '열린세상 오늘! 김혜영입니다'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안철수 대표가 바른정당과의 합당과 국민의당 소속 시도당 지역위원장들의 일괄 사퇴를 무리하게 추진했다는 지적에 대해서 "여기에 대해서는 (안철수 대표가)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안철수 대표가 혹시 사퇴까지도 검토해야 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일각에서는 이런 리더십으로 지방선거를 치르겠느냐. 대표직을 물러나고 비상대책위를 꾸리라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지만 애초부터 안 대표가 등장한 것이 무리한 등판이었다고 생각한다"며 안철수 대표의 사퇴를 우회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인터뷰 전문
11월 3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이 뽑은 '2017 국정감사' 우수의원 20인에 선정됐다.[48] 경실련은 선정이유로 정동영 의원은 국토위 국정감사에서 후분양제 도입과 공공택지 매각 금지, 부영 특혜, 인천공항 헐값 매각 문제 등을 집중 제기했다"면서 "정책국감 속 빛난 우수의원 20인에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국정감사기간 중 박근혜 정부와 이명박 정부 당시 문제를 밝히고, 적폐청산을 요구하는데 앞장서며 최근 부실시공으로 논란이 된 부영주택이 박근혜 정부 시절 주택도시기금을 독식한 것과 이명박 정부의 인천국제공항 헐값 매각 시도 등을 밝히며 언론과 국민의 큰 주목을 받았다. #
2018년 2월 6일, 통합신당의 합류를 거부하며 국민의당을 탈당, 국민의당 개혁파가 추진하는 민주평화당에 합류했다. # 이날 공식 출범한 민평당은 창당선언을 통해 최저임금 ·비정규직·청년실업과 노인빈곤 등 민생현안 해결에 집중, 햇볕정책 계승·발전을 통한 남북화해와 한반도 평화 실현, 다당제 민주주의 실현 및 분권형 개헌 추진, 철저한 적폐청산과 국가대개혁으로 촛불시민혁명 완성, 지역·세대·성별·인종 등 차별없는 평등 사회 구현 등을 약속했다. # 초대 지도부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민주평화당의 대표급 간판인사로서 활약할 것으로 보인다.
2018년 2월 7일,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인터넷 댓글을 통한 여론조작에 정동영 의원이 정치적 희생양이 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국가 권력으로부터 정동영 죽이기 작업은 18대 대통령 선거를 불과 6개월 앞둔 지난 2012년 총선 때 진행됐다. 실제 정동영 의원은 8일 국회에서 전북기자 간담회에서 “MB 정부 당시 국군 기무사령부가 선거에 개입하고 노골적인 ‘정동영 죽이기’를 한 사실이 어제 한 언론을 통해 밝혀졌다”며 “국민 세금으로 국내 정치에 개입한 것은 참으로 경악할 일”이라고 말했다. 또 정 의원은 “2012년 기무사 요원이 사용한 것으로 확인된 계정에서 나를 비롯한 야권 정치인사들을 비난하는 댓글 3만 개가 확인됐다.”라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2012년 총선 때 ‘정동영 죽이기’ 댓글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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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영 민주평화당 의원'''
2018년 6월 13일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는 정의당교섭단체를 유지해야 하는 당의 사정상 자신이 직접 출마하는 대신, 지원 유세에 나섰다. 그렇지만,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하면서 그의 명성에 흠집이 났다. 지원 유세와 직접 출마의 정도는 감안해야겠지만 전북 전주시 병 선거구에서만 4선을 지낸 '전북의 맹주'라는 소리를 들었던 인물이었던 데다, 한때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그가 지원 유세에 나섰음에도 돌아선 민심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인 게 증명됐기 때문. 다만 지역구인 전주 덕진구에서의 민주평화당 광역비례득표율(10.11%)이 전주 완산구 광역비례득표율(8.93%), 전북 광역비례득표율(9.34%)를 모두 상회해 체면치례는 했다는 평이다.
민주평화당의 새 지도부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평화당 당권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대표적인 민주평화당 간판인사로 손꼽히는 현역 의원이고, 지난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당권도전에 실패했지만 건실한 2위 득표를 기록했으며, 제 17대 대선에서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를 역임해 대중적 인지도와 영향력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이번에 선출되는 대표의 임기가 21대 총선에 걸쳐져 있고, 민주평화당의 인지도가 낮은 상태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정동영처럼 무게감 있고 대중 인지도가 높은 거물급 인사가 당 대표로 선출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2.8.1. 민주평화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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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2018년 8월 5일, 민주평화당 전당대회에서 박지원-천정배 의원의 견제를 뚫고 '''68.57%'''의 압도적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21대 총선을 진두지휘할 민주평화당의 신임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번 당대표 당선은 지난 2006년 열린우리당 의장으로 당선된지 12년, 2011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수석 최고위원으로 당선된지 7년 만으로서 10여년 만에 다시 한번 중앙정치무대 전면에 복귀했다. 다시 중앙정치무대 전면에 나선 정동영 신임 대표 더욱이 현역의원 대다수가 유성엽-최경환 연대를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중량감을 갖춘 ‘강한 리더’가 필요하다는 압도적인 당심을 바탕으로 민주평화당 최고위 과반을 DY계가 차지하면서 당내 영향력과 존재감도 재확인 했다는 평가가 있다. 정동영, 당권 완전 장악
이날 정 대표는 당대표 수락연설에서 “생사 기로에 서 있는 평화당을 살리고, 힘없고, 돈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약자 편에 서라고 정동영에게 기회를 주셨다고 믿는다”며 선명 야당을 공언했다. '''“정의당보다 더 정의롭게 가는 것이 평화당의 목표” “민주당의 우클릭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겠다”'''라고도 했다. 정동영, 평화당 대표로 ‘11년 만의 귀환 돌아온 정동영 “10년 만에 국민이 준 기회”
당 대표 선출 다음날인 8월 6일에도 파격적인 '현장 행보'를 펼쳤다. 정 대표는 공약으로 내걸은 '''현장으로 달려가는 민주평화당'''이라는 구호에 걸맞게 6일 오전 희망버스 사건이 터진지 7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당시를 잊지 않고 부산 한진중공업 현장 최고위원회로 첫 공식 일정을 시작한 후 한진가족대책위 관계자들과 오찬을 가진 뒤, 인근 김해 봉하마을로 이동해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 참배했다. 저녁에는 상경해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차 시민분향소에 조문까지 마쳤다.
이날 정 대표의 행보에는 과거 야인시절 '현장왕'이라는 별명처럼 "현장으로 가겠다. 힘없는 사람의 편에 서겠다"는 자신의 말이 헛말이 아니라는 듯, 쌍용차 시민분향소에서 헌화·묵념한 뒤, 겉옷을 벗고 팔을 걷어부친 채 돗자리 위에 주저앉아 김득중 전국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과 40분 이상 대화를 나눴다. 정 대표는 40여 분 내내 주로 김 지부장, 이 위원장의 말을 경청했다. 시종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들었으며, 간간히 물을 마시는 외에 자신의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대중정치인의 현장행보와는 온도차가 느껴졌다는 평가다.
또한 정 대표는 중진대표의 노련함을 과시하며 현장행보 도중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축하 전화를 받은 사실을 전격 공개했다. 통화는 5분 정도였지만, 청와대보다 앞서 통화 내용을 공개하면서 정치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정 대표와 문 대통령 간의 통화는 선거제도 개혁, 협치내각, 개혁입법연대 등과 관련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
8월 29일 최저임금 개선 촉구 소상공인운동연대 집회에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 김동철 바른미래당 비대위원장 등 야당 대표들과 함께 참석해 현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의견을 밝혔다. #
2018년 9월에 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정당 대표로 참가해 방북을 했으나, 이해찬, 이정미와 함께 북한측과 잡아둔 회담 일정을 별도의 언질도 없이 일방적으로 어기게 되어 국민적인 비난을 사게 되었다. 이에 3당 대표측은 '일정에 착오가 있었다'며 해명했지만, 기자들도 이미 다 대기 하고 있었던 상황이고, 윤영찬 홍보수석이 이전에 직접 면담 일정[49]을 브리핑 하기도 해서, 1시간이 넘게 상대방을 기다리게 한 것은 일정 착오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스케줄 상 오해가 있었어도 차로 7~8분정도면 오가는 거리에 3당 대표와 그 수행원들 까지 시간에 대한 아무런 의사 전달도 하지 않았단 얘기도 돼서 의도적인 무시가 아니었냔 의심을 샀다. 실제로 이해찬 대표의 해명[50]을 보면 안동춘 부의장이 아니라 김영남 위원장과의 면담을 원했다고 하는데 김영남 위원장은 그날 문정인 특보, 박지원 의원과의 스케줄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3당 대표와의 면담은 어려웠다는 모양이다. 물론 회담 전체적으로 보면 분위기가 좋으니 회담 자체가 파토날 정도는 아니지만 다른 두 당 대표들과 마찬가지로 비판을 받고 있다.
위와 같은 불상사가 있기는 하였지만, 이날 회담에서 정 대표가 김 위원장도 서울에 오시면 환영받을 것이라 환담을 건네자 김정은 역시 정동영 대표에게 '아직 서울에서 환영받을 만큼 일을 하진 못했다'고 겸손한 화법으로 답하는 등 분위기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측에서도 선발대 기자의 취재를 제한한 것과는 달리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중 김정일을 만난 경험이 있고 개성공단의 산파 역할을 하여 위상이 남다른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제지하지 않고 깍듯이 예우까지 했다. 여담으로 이 내용이 나온 다른 방송으론 KBS스페셜의 평양 2박3일이 있으며, 해당 방영분엔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가 정동영 대표가 대동강변에 갔다왔단 얘기를 듣는 장면이 나왔다. YTN에서 공개한 사진과 KBS스페셜에서 방영된 부분에서 정동영 대표가 입고 있는 복장이 같은 점을 보면 시간적으로 바로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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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영 당시 민주평화당 대표'''
대표직에 오른 뒤 처음으로 치룬 선거인 2019년 재보궐선거에서 최명철 후보가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전주시의원에 당선되는 성과를 냈다. 당 대표로서 선거전략도 잘 짰지만 그의 지역구인 전주 지역이었던만큼 전주에서의 그의 영향력도 도움을 주었다는 평가다. 이후 정의당과 교섭단체를 재구성하자는 입장이었으나 당 내 논쟁 끝에 바른미래당 내 호남계와의 통합을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성공만 한다면 호남 내에서는 확고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나 당 내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인해 호남 의석이 줄어들어 민주평화당에는 오히려 손해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면서 다시 당내 분란이 일어났고, 결국 8월 12일부로 반당권파가 변화와 희망의 대안정치연대란 이름으로 분당수순에 들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그 비당권파가 소수도 아닌 10명이라 정동영을 포함한 4명만의 정당이 되어 정의당보다 작은 당이 되었다.
2019년 10월 25일에는 전북대 대운동장에서 개최된 열린음악회에 방문했다.

2.9. 21대 총선 출마


기호 3번을 달고 21대 총선에 출마했다.
3월 26일, 정동영 의원이 사실상의 공약으로 내걸고 집중적으로 중재하던 이마트 전주 에코시티점 입점이 확정되었다.# 특히 이마트가 경기부진으로 오프라인 매장을 축소하는 상황에서 입점을 이끌어낸 것은 정 의원의 강한 추진력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있다.#
공약으로 내건 전주시청/생명과학고 이전 관련해서 생명과학고 동창회 비대위측과 생명과학고 100주년 기념사업회, 전 동창회장간, 덕진구민간의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생과고 동창회 비대위측은 생명과학고 이전에 찬성한적이 없다며 반대하고 있지만, 생명과학고 100주년 기념사업회, 전 동창회장, 일부 덕진구민은 찬성하는 입장으로 보인다. 덕진구 인후동, 호송동, 진북동, 금암동 이들 주민들은 31일 전북도의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전주 시청사가 현재의 생명과학고 부지로 이전하게 되면 낙후된 인후동을 비롯한 금암동과 진북동, 호성동을 살리고 침체된 주민들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한편 생명고 동창회 비대위측의 반대성명에 일부 민주당 시도의원이 개입한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었다. # 또, 제시한 전주시청 조감도가 경북도청과 유사해 표절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서는 경북도청사를 참고했다고 홍보물에 분명히 기재했다고 밝힌 뒤 공론화 과정이 이제 시작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
공식선거운동 첫날인 4월 2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족이 “국민이 있어야 나라가 있다. 그 나라에서 피해자를 위하고 국민을 위하는 정동영 후보를 꼭 지지해주기 바란다”며 정동영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김성주 후보에 54,017표차(34.61%)로 밀리며 2위로 낙선하였다. 전북을 지지기반으로 둔 정치인 중 유일하게 집권여당 대선 후보를 지냈던 정 의원이 자신의 텃밭에서 패배한 만큼 그 의미는 더욱 남다르다는 주장이 있다. 정 의원은 낙선 후 자신의 SNS를 통해“전주시민에게 진 빚을 다 갚지 못하고 멈추게 된 점 가슴아프고 송구스럽다”고 밝혔으나 명시적으로 정계은퇴의 뜻을 표명하지는 않는 등 향후 행보에 대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 #
4월 20일, 20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면서 그 동안의 소회를 밝혔다. # 페이스북에 작성한 글이 정계은퇴를 암시하는 듯한 내용이어서 큰 화제가 되었었다. 그러나 4시간 이후 정계은퇴는 아니라고 정정하는 해프닝이 일어났었다. http://www.segye.com/newsView/20200420522434?OutUrl=naver


[1] 부친의 친일 의혹이 있었으나, 대선 당시 등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2] 과거 언론사 인터뷰에서 이 20대 초반 시절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운동권 생활 중에 잠깐 연애를 하다가 가난 때문에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져, 울면서 집으로 뛰쳐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근데 집에 들어온 뒤, 계속 눈물 흘리며 자본론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참고로 그 시대에 이 책은 금서였다. 물론 운동권에서는 다들 읽었지만. 참고로 정동영의 부인은 군대를 갔다 와서 만나 연애하다가 결혼한 것이니 이때와 무관하다.[3] 1994년 9월 ~ 1996년 1월 주말 MBC 뉴스데스크 앵커.[4] 2007년 대선을 계기로 알려지긴 했다. 몇 안 되는 당시 상황을 제대로 담은 자료 중 하나다.[5] 실제 연설과 토론에 상당히 달변이기는 하다. 언론인 경력이 정치인으로서의 커리어에 좋은 영향을 준 셈이다.[6] 시내를 직접 누비며 유권자들을 만나는 전례없는 방식을 취했다지만, 전주시에서 학력을 지낸 지역적 연고도 있었던 데다 호남이 민주당에게 몰표를 쏟는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본인 경쟁력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2009년 보궐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나와 12%에 그친 민주당 후보를 72.3% 득표로 크게 앞질렀다. 이어서 출마한 16대 총선에서도 같은 기록을 달성했다.[7] 속칭 천신정.[8] 이 일로 악연이 생겨 십수 년 뒤 정동영이 새정연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관악구에 출마할 때 역으로 권노갑이 야권을 분열시킨다며 강하게 비난하기도 한다.[9] 한화갑이 주 타겟이었는데, 재미있게도 한화갑은 정풍운동 당시에는 천신정에 동조했고, 이 때문에 정풍운동의 배후가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다만 한화갑의 참여는 권노갑과의 개인적 갈등도 어느 정도 있었고, 천신정이 한화갑을 공격한 것은 당 대표인 한화갑이 후단협 사태에 수수방관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10] 이른바 정동영 효과.[11] 정동영 본인이 60대가 된 지금도 정치를 하면서 정동영을 비꼬는 표현으로도 종종 등장한다. 다만 몇몇 웹사이트에서 정몽주니어처럼 정게할배, 노슬아치에 대한 글이 나올 때마다 '정동영 1승 추가'라는 밈으로 쓰이게 되고 있기도 하다.[12] 당시 추측엔 155석에서 180석. 최대는 200석까지도 전망하고 있었으며, 한나라당은 50석에서 120석으로 예상되었다.### 한편으론 저 발언이 없었어도 한나라당에 표를 주지 열린우리당에 표를 줄 일이 없는 노인층이 일찍 결집한 것뿐이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2017년, 제19대 대선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의 장인 영감탱이 발언에도 불구하고 60대 이상 연령층에서의 지지도 1위가 자유한국당인 것을 보면 정동영의 노인 발언도 단지 한나라당의 정치적 공격 빌미를 줬을 뿐 노인층의 투표에는 별 영향이 없었다는 게 증명됐다. 다만 영남권의 표심이 어느 정도 이탈한 것은 사실이었다.[13] 2012년 19대 총선에서도 민주당계 정당은 막말 파문으로 인한 큰 상해를 입었다.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민주통합당김용민노원구 갑 후보로 공천했는데, 그의 8년 전 성인 인터넷방송에서의 막말에 발목을 잡혀 전국적으로 지지율이 요동쳤고, 이명박 정부 심판 여론으로 단독으로 과반을 달성할 것이라는 기대에 크게 못미친 127석에 그쳤다. 김용민 자신도 노원구 갑에서 낙선하여 '''서울 동북부 권역(성북, 강북, 도봉, 노원)에서 유일하게 패배한 민주통합당 후보'''가 되었다.[14] 그리고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노인 폄하 논란을 일으킨 미래통합당이 역대급 참패를 당했다.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을 불문하고 총선에서 노인 폄하 논란을 일으킨 정당은 어김없이 국민의 혹독한 심판을 받았다.[15] NSC 상임의장을 겸직하는 통일부 장관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위상은 장관이 아니라 부총리급이었다.[16] 역대 선거 통틀어 여당(열린우리당)의 최악의 참패였다. 광역자치단체장 1석 / 16석, 기초자치단체장 19석 / 230석.[17] 다만 이때 박스떼기 논란이 생기기도 하였다.[18] 노 전 대통령이 고건에 이어 정동영을 저격한 데다 경선확정 후에도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애초에 당시 노무현 이미지 때문에 당에서도 지원을 꺼리기도 했지만.[19] 이후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 조문하러 갔다가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절은커녕 진입도 못 하고 쫓겨난 일을 보면 정동영이 친노가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솔직히 자기들과 직접적인 혈연도 없는 노무현 장례식장에 가서 본인들 멋대로 깽판을 치던 노사모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 노사모 사람들이 불과 노무현이 자살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실망했다며 비난하고 욕하던 그 사람들이었단 건 안 비밀. 참고로 비슷한 시간대에 조문 왔던 한승수 당시 국무총리도 노사모 회원들의 반발로 조문하지 못하고 돌아갔고, 정동영은 바로 그 다음 날 다시 방문하여 조문을 하긴 했다.[20] 2007년 10월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노무현은 정동영과 감정적인 충돌 외에도 정치인으로서 '스스로 만든 당을 깨고 정치 지도자에게 무슨 하자가 있어서 탈당을 시켜야 했느냐'며 원칙마저도 없었던 사람이라고 정동영을 비난하기도 했다. 이 인터뷰에서 노무현은 자신이 탈당한 것처럼 비쳐졌겠지만 실상은 당권파에게 쫓겨난 것임을 말하기도 했다. [21] 이 당시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당지지율은 11%밖에 안됐다.[22] 531만표차로 이명박에게 17대 대통령을 내줬다[23] 이명박의 경우 그의 서울시장 재직 시절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발언이 이슈가 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은 전혀오르지 않고 이회창의 지지율만 오르는 기현상 때문에 정동영후보측과 대통합민주신당은 이명박의 서울봉헌 발언 이슈화로 이회창의 지지율만 높아지자 이명박의 서울 봉헌 발언 이슈화를 포기해버리고 만다.[24] 또한 정동영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부활 이후 대선에서 서울에서 패배한 '''유일한 민주당계 정당''' 후보가 되었다. 주목할 것은 1987년 13대 대선부터 2012년 18대 대선까지 민주당계 정당은 13~15대 김대중, 16대 노무현, 18대 문재인 모두 서울에서 진땀승을 거두었는데 이명박은 직선제 부활 이후 대선에서 서울에서 승리한 '''유일한 보수정당 후보'''가 된 동시에 같은 기간에 치러진 대선에서 '''서울에서 가장 압도적 격차로 승리한 후보'''가 되었다.[25] 이후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송파구 병 지역구에 미래통합당 후보로 출마했다.[26] 이 당시 그가 내건 선거전 슬로건은 '어머니, 정동영입니다.'였는데 본인뿐만 아니라 무소속 연대를 결성했던 완산 선거구의 신건 후보까지 큰 표차로 당선시키며 압승에 성공했다.[27] SOFA 개정안 발의, ISD 반대 등은 3년 이른 행보였다.[28] 야권신당을 추진 중인 천정배 의원은 이를 두고 '''한국정치에 정동영 전 의원 만한 분이 없다.''' 라고 밝히기도 했다.[29] 다만, 지역구의 특성을 따진다면 정세균 의원은 전북 동부권인 무진장+임실이 지역구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책임이 덜하기는 하다.[30] 추락한 호남 정치권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당시 민주당 내에서는 민주당 주류였던 친노 진영을 중심으로 제기된 호남 후보 불가론과 PK 공략론이 강력한 공감대를 이루고있는 상황이었고, 그대로 호남정치권의 위상추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호남정치의 위상변화는 이후 20대 총선에서 호남정치복원론을 내세운 국민의당이 압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31] 이 시기에 노영민 당시 원내수석대표에게 정동영이 당을 망치고 있단 지적을 받자 '내려와, 이 새끼야'라고 욕설을 하며 싸움을 벌이려 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32] 경선의 경우, 전현희측은 정동영이 전략공천을 시켜달라고 가족당 지도부를 압박했단 언급을 하였고, 정동영은 그런 적이 없다며 모멸적인 언사라고 반박하면서 결국 경선이 된 형태였다.[33] 전현희는 험지인 강남에서 수년간을 지역구에 공들여왔으나, 당시 김어준과 주진우를 등에 업은데다 대선후보 등 여러 네임밸류를 가진 정동영이 초선의원을 압살하지 못하는 그게 더 말이 안되는 상황이긴 했다. 여담으로 김어준과 주진우는 당시에 한 불법 선거활동으로 고소당해 1심에 유죄판결을 받았다.[34] 강남구는 전반적으로 새누리당 성향이 강한 편이다. 지금까지의 전적을 보면 보수당이 자리를 내준 건 갑을 통틀어 3회뿐.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의석을 내준 적이 전혀 없었지만.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전반적인 야권강세도 있었지만 18대 국회 때부터 강남 을을 지역구로 낙점하고 8년 내내 지역구 활동에 힘써왔던 전현희 후보가 당선됐다.[35] 문제는 이로부터 3년 후인 2015년 관악구 을 재보궐선거에 무소속 출마하면서 자신의 동작, 강남 출마를 '당세를 확장하기 위해 희생하라는 당의 명령으로 차출됐다'고 왜곡한 것이었는데, 가뜩이나 그를 탐탁치않게 보던 당내 친노친문 성향 지지자들에게 큰 비난을 받게 된다. 거기다 이 독자출마 때문에 야권 표가 분열되어 관악 을에서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최초로 보수정당 후보(오신환)가 당선되면서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악화시킨건 덤.[36] 아직 국민모임이 창당을 안했기 때문에 무소속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37] 여당이 승리한 전적은 대선, 총선, 지방선거, 보궐선거를 통틀어서 단 3번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 보궐선거때는, 총선에 비해 새누리 후보 득표율이 10% 넘게 상승하고, 야권 후보 득표율이 10% 넘게 떨어졌다. 오신환의 공약 및 선거 전략이 상당히 먹혀서 이변이 생겨났지만, 야권 득표율을 합하면 54%가 넘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역의 색깔까지 변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38] 당내에서 험지출마를 요구하는 여론이 있었고 이에 지난번 선거의 동작구 선거구에 이어 강남구 을 선거구에 출마한 것이기 때문. 하지만, 본인의 의사가 확고했다면 덕진구를 지켰을 수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묘한 입장 차가 생길 수 있다.[39] 후보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났지만, 정동영이나 새정치연합의 정치적 입지가 달린 일이기에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새정치 측에서 단일화는 없다고 선을 그은 이유도 있고...[40] 뒤에 서술할 득표율을 보면 단일화에 성공한다 해도 득표율이 5~6%만 새어나가도 오신환이 자력으로 당선될수도 있을 터였다. 실제로 정동영 후보 출마전의 여론조사에서도 새누리가 앞섰다 (...) 야권 후보 난립은 어찌보면 결과적으론 새정연의 핑계(?)라고 볼 수 있다.[41] 그러나 잇따른 선거 패배의 타격으로 현황 지지율에서는 뒤처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만일 다음 총선에서 당선된다면 반등하겠지만 현재로선 사실상 레이스 아웃된 상태. 물론 현재는 정치활동을 하고 있지 않아 지지율이 낮지만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하여 언론을 타면 지지율이 꽤 오를 수 있다.[42] 이유는 간단하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참여계는 유시민 개인 지분이고, 유시민이 정계 은퇴한 지금도 어쨌든 그 영향을 받는다고 봐야 하는데, 정동영과 유시민은 열린우리당 시절에 엄청나게 싸워댔기 때문.[43] 문재인 대표에 이어 이종걸 원내대표, 박준영 전 전남지사, 천정배 의원이 정 전 의원이 칩거 중인 전북 순창에 잇달아 찾아와 러브콜을 보냈다.[44] 정계에서는 정 전 장관의 정계복귀가 늦어도 이달은 넘기지 않을 것이고, 빠르면, 그 시점이 오는 14일에서 17일 전후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45] 열린우리당의 창당 명분을 '전국 정당 수립'으로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년 4월 12일 오후 3~5시에 전북대학교 구정문에서 했던 국민의당 전주시 출마자 합동유세에서 친노 패권주의와 영남 패권주의를 강하게 비판했으며, 자신의 홍보책자엔 친노지도부가 호남정치인을 죽이기 위해 자신을 강남에 출마시켰다는 이야기도 게제했다.[46] 선거 공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공약한 대로 송천동 변전소 문제는 이전하기로 가닥이 잡혔다. 이를 두고 송천동 거주민들 사이에는 정동영이 확실히 힘이 있다는 평이 많다.[47] 정진호 지사의 손자.[48] 보수야당 소속 선정의원은 한 명도 없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49] 윤영찬/청와대 국민소통수석 : "정상의 움직임과 별도로 정당 3당 대표는 안동춘 최고인민회의부의장을 접견할 예정입니다."[50] "3당 대표만 별도로 (김영남 위원장을) 만나려고 했는데 스케줄이 안 잡혔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9/19/20180919016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