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조선)/평가
1. 정도전 제거 관련
일부에서 나오는, 신권(臣權) 중심 정치 질서를 세우려던 정도전을 죽이고 전제군주제를 세워 조선의 정치 선진화를 늦췄다는 비판은 무리한 이론이다. 애초에 정도전의 신권주의는 일단 이론적으로는 역성혁명과 유교적 이상주의를 적절히 조화시킨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군사부일체 즉 임금과 신하는 어버이와 자식 사이와 같다는 유교식 서열론에 비추어볼 때 유교에 역행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사문난적의 내용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유교에는 서열론과 동시에 정명 사상이라는, 말하자면 "제 역할 못하는 윗대가리는 거기 앉을 자격 없음."이라는 파격적인 사상이 공존한다. 대표적으로 맹자가 하 > 상 > 주의 왕조교체를 긍정했고, 정도전도 자신의 고려 > 조선 왕조 교체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논리를 폈다는 것은, 언젠가 조선에 암군이 튀어나왔을 때 그 역성혁명을 긍정해야한다는 모순이기도 하다. 또한 정도전 자신도 이상주의자로서 도덕성과 경제 능력이 합쳐진 완벽한 "유학자 관료"가 정치 권력의 TOP이 되어야 "민본부국"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정도전은 왕의 권력을 재상에 임명하는 것으로 축소시키고, 그 외의 모든 권력을 재상에 집중하여 일종의 전문경영인 같은 정치 체계를 갖추어야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정도전이 주장한 "재상중심주의"다.[1]
정도전 본인도 자기 손으로 만든 유교 국가 조선에서 자식이 아버지를 제치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반유교적 발상이 정말 완벽히 통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재상으로서 정도전의 권력이 가장 강력했을 때에도 당시 임금이던 태조 이성계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자기 주관대로 다 밀어붙여서 했으니 전제군주제 운운하려거든 이방원을 탓하기 전에 한양 천도나 세자 책봉 같은 국가 중대사를 자기 맘대로 처리한 태조 이성계부터 탓해야 한다.
또한 권력이 재상에게 집중된다는 것은 재상이 왕 이상의 권력을 틀어쥔 권신이 된다는 의미인데, 과연 왕이 이런 재상을 마음대로 임명할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문제가 된다. 능력과 도덕성을 겸비한 사람이 재상이 되어 큰 권한을 갖는 게 바람직하다고 하지만, 그러한 사람을 자유롭게 재상으로 임명하고 또 그 재상을 감독할 권한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왕 본인이 강력한 왕권을 보유해야 하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역사상으로도 왕 이상의 권력을 쥔 권신들은 종종 그 권력을 자기 자신과 자기 파벌의 세력을 확대하고 정적을 숙청하는데 사용했으며, 조선 후기의 역사를 보면 왕이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조차 신하들의 교체는 집권 붕당에 대한 숙청을 통해서만 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정도전 본인부터가 "권력을 탐하지 않는 관료"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전제군주제란 것은 기본적으로 군주에게 걸리는 제도적 제약이 거의 없음을 일컫는 것인데, 강력한 왕권을 가졌음에도 자신을 견제할 수 있는 사관과 간관이라는 시스템을 확실히 정비해서 제동을 걸 수 있도록 한 임금이 바로 태종 이방원이다. 군주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되 폭주하지 않도록 신하들이 견제할 수 있는 제도를 확립한 왕을 가지고 권력이 강력했다는 이유로 전제군주제 운운하는 것은 우를 범하는 것이고 언어도단이다.
더구나 그것을 기초로 하여 다음 세종 대에서 역사상 왕권과 신권이 최상의 조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리고 정치 체제는 상대적인 것이지 그 안에 우열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왕권주의가 강력해서 폭군이 등장했다는 낭설에는 신권이 강한 귀족 국가였던 고려의 충혜왕이라는 훌륭한 반박 증거를 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지 못했다면 세종대왕이 뛰어난 업적을 남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거'''다.
2. 세조와의 비교
행적의 유형은 매우 비슷하나, 평가는 명백히 갈린다. 이 부분은 세조(조선) 문서와 같이 보면 좋다.
본인보다 정치적인 상관이었던 혈육의 목숨을 빼앗은 점,[2]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6조 직계제를 시행해 의정부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는 공통점 때문에 태종은 손자 세조와 자주 비교되고는 한다.
하지만 그 내막과 실상, 결과를 자세히 살펴보면 태종을 세조와 비교하는 게 오히려 실례다.
태종이 제거한 이방석의 경우 태조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는 하나 '''둘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가 첫째 부인의 장성한 형들을 제치고 후계자가 된''' 모양새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책봉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수백 년이 지난 현재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구설수에 오르는데[3] 한 개의 대기업조차 그래서는 아니 되거늘 한 나라의 왕조는 오죽할까? 하물며 유교적 가치를 건국 이념으로 세운 조선에서는 어떠했겠는가? 심지어 당시는 건국 초기라 정통성 면에서 잡음이 나올 가능성을 최대한 줄여도 모자랄 때였다.[4]
단, 이미 언급된 것과 같이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단순한 두 번째 부인이 아니라 정식으로 왕비로 책봉된 '''당시까지도 살아있던 국모'''였다. 또한 이방번이 세자가 되지 못한 점은 혼인 관계 탓도 있었다. 이방번은 정양군 왕우의 딸과 혼인을 했는데, 만약 이방번이 세자가 되면 이성계는 왕씨 가문과 사돈을 맺은 격이 되기 때문에 신료들이 반대를 했다. 즉, 이방석은 이성계가 유별나게 아껴서 세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왕후의 아들 중 가장 결격 사유가 적으면서도 나이로도 많은 편에 속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이방석 문서 참조. [5]
왕이 된 다음의 행보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자신이 조직의 보스이고 두 차례나 되는 왕자의 난을 통해 반대파들을 쓸어버린 태종은 기본적으로 가진 월등한 능력과[6] 힘, 공적(그 자신이 왕조 메이커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증명이 되었다.)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중앙집권과 왕권강화를 추구했고 공신들도 너무 크기 전에 적당히 권력에서 멀어지게 하였으며, '''결국에는 외척들과 공신들을 모조리 숙청하여 세종이 다스릴 기반을 확고히 마련했다'''.
하지만 '''세조는 그 자신이 조직의 보스이기보다는 대표였을 뿐이고 당장 계유정난을 통해 집권하는 통에 사방이 적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라 자신을 따르는 공신들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당장 옆에 단종을 복위시킨답시고 사육신, 생육신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밖에서는 이징옥의 난이나 이시애의 난 같은 것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다. 이시애의 난은 중앙집권화로 인한 권력 상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토호의 난이지만, 이징옥의 난은 아예 자신을 대금 황제라고 칭하며 독립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했다.[7]
태종이 간관과 사관의 행동에 크게 제재를 가하지 않은 것은 굳이 크게 손을 안 대어도 왕권이 단단했기 때문이고, 세조는 이렇게 안 하면 반대파들이 자신을 허수아비로 뜯어먹거나 세조 자신이 했던 것처럼 아예 폐위를 시킬지도 모르므로 억제와 제재를 가할 수밖엔 없었다. 경연을 폐지한 것도 그 중 하나.[8] 사실 경연을 좋아한 왕은 얼마 안 된다. 웬만한 호학의 군주가 아니고서야 경연은 짜증만 나는 자리이기 때문. 조선 역대 왕들 중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태조는 경연을 조금 느슨하게 하려고 했다가 역관광 당했고, 연산군은 좀 하다가 경연 폐지, 광해군은 연산군보다 더 안 했고[9] 현종은 건강 핑계로 경연을 자주 하지 않았다.[11] 세조의 경우 경연은 폐지했어도 세자의 교육인 서연은 지속했고, 성균관 유생과 무신들에게 끊임없이 배울 것을 권했다. 당장 옆에서는 사육신, 밖에서는 이시애의 난 같은 게 벌어지는데 경계를 안 할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 태종은 이미 반대파들을 쓸어낼 대로 쓸어내버린 다음이라 거기서 더 쓸어낼 필요도 없고 어지간히 공격받아도 그걸 빌미로 자신을 끌어내릴 반란 분자도 없었기에 굳이 쓸어낼 필요도 없어서 간관은 물론 사관들에게 스토킹에 가까운 간섭을 받고, 본인도 간관과 사관을 혐오하는 성향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사관의 언론 활동을 통한 대신 견제를 목적으로 사관들을 인정하고 대신들로부터 보호해 준 것이다. 다만 태종도 공신의 부정부패는 상당히 봐줬고[12] 간관과 사관의 경우 자신이 원한 목적이 아닌 방향에서 너무 나대면 어느 정도는 제어를 시도했다. 그래서 태종 시기에 곤장을 맞거나 유배되는 간관들도 있었다.
2.1. 계유정난의 부족한 명분
그러나 단종은 조선 역대 왕들을 통틀어서 '''가장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군주'''였고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은 조선 시대의 성공한 정변들 중 '''명분의 정당성이 가장 빈약한 정변'''이었다. 그만큼 사육신과 생육신, 조의제문 그리고 후대의 김종서와 단종에 대한 동정적인 평가에서 볼 수 있듯 사대부들의 전반적인 지지를 얻기 어려웠으며, 아예 이징옥의 난을 시작으로 단종복위운동같이 세조의 찬탈에 반기를 시도가 계속 벌어졌고, 이런 혼란을 틈타 말년에는 이시애의 난까지 일어났다. 참고로 세조 시절 처음으로 등용된 사림의 거두 김종직이 세조의 계유정난 소식을 듣자말자 극도로 분노하여 곧바로 조의제문을 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림들에게도 세조의 정변은 굉장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 속에서 지지기반이 빈약한 세조는 공신 집단에 권력을 집중시키고 이들과 자신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신 집단의 우두머리격인 한명회를 쳐내고 공신들을 태종처럼 모조리 대량숙청한다? 아무리 세조가 술자리에서 터프한 모습을 보이며 공신들을 쥐락펴락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건 술자리에서나 끝나는 일이고, 구체적인 상황까지 온다면 당장 '''세조의 권좌부터 불안해진다'''. 따라서 세조 치세 때 선을 넘을 정도로 함부로 행동하던 홍윤성도 양정처럼 대놓고 왕좌를 건드리는 선만 넘지 않으면 넘어가주는 게 공신 집단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는 유리한 것이다. 실제로 세조가 한명회와 신숙주에게 구체적인 압박을 가한 것은 이시애의 난 진행 과정에서 새로운 공신 집단을 양성하려 할 때였다. 사실 기록에서 그들과의 계속된 인생관계를 본다면 세조는 딱히 한명회나 홍윤성을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견제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나 싶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빈약한 지지기반 탓에 더 더욱 공신들에게만 의지하는 구조가 고착화'''되자 '''세조의 권위는 당연히 태종과 비교가 부끄러울 만큼 약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공신들의 권력남용을 견제하기는 커녕 달래야만 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중 가장 문제가 심각한것이 세조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커버하기 위해 '공신전'을 남발한 것인데''', 이 공신전은 법제상으로는 몇 대 지나고 나면 회수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회수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2.2. 세조 - 공신 견제 실패
'''세조의 공신들은 조선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비교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장기간 동안 권력을 독점'''했고(세조 때부터 그 손자인 성종 때까지 신숙주·한명회·구치관·홍윤성 같은 세조의 공신들이 여전히도 권력의 핵심으로서 활동했다.) 견제받지 않는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명제처럼 그 부패와 권력남용이 매우 심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한명회 같이 비리를 저지른 나쁜 사람은 관둔 것은 물론 홍윤성 같은 조선 희대 사이코패스 인간 백정[13][14] 도 전혀 처벌하지 않았다.[15] 덕분에 세조 11년(1465년)에는 관찰사 김진지가 좌의정(구치관) 이외의 '''모든 당상관(3품 이상)들에게 싸그리 뇌물을 돌리고 받았다가''' 걸리는 초대형 비리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때도 세조는 죄질이 비교적 가벼운 증뢰자인 김진지만 처벌하고 죄질이 매우 나쁘고 1순위 처벌 대상인 수뢰자들은 처벌하지 않는 등 공신을 관리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홍윤성 같은 경우 세조 시절 '''평안도 군량미 30만석을 혼자서 다 횡령'''하는 미친 짓을 벌였는데도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는 조사의의 난에서까지 맹활약하며 태종의 옹립을 도운 최측근이었던 이숙번을 단지 거만하다는 이유로 숙청해버리고(죄목이 진짜로 거만하다는거였다.) 기타 다른 공신들과 외척들까지 모조리 숙청해버린 할아버지 태종과는 크게 비교되는 부분으로서 결과적으로 세조의 이런 공신 관리는 '''자신의 공신들을 권신집단들로 만들어버리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물론 시간이 지난 뒤에는 세조 자신도 너무 커져버린 공신들이 걱정되었던지 남이나 구성군 같은 신공신들로 한명회나 신숙주, 권람 같은 구공신들을 견제할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대실패하였고, 그 탓에 입지가 더더욱 강화된 구공신들이 권신들로서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성종 시절에는 '''세조 본인의 바람과 반대로 신권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일이 너무 커져버리고 말았다'''.
2.3. 세조 - 원상 문제
대표적으로 성종 즉위 이후부터 시작된 '''원상(院相)'''은 조선시대 국왕이 정상적인 국정 수행이 어려울 때 재상들로 구성된 임시로 국정을 의논하던 관직으로서 국왕이 병이 났거나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국정(國政)을 의논하기 위하여 원임(原任)·시임(時任)의 재상들로 하여금 승정원에 주재하게 한 임시관직이었지만, '''세조의 공신들로 구성된 원상은 1467년부터 1476년까지 무려 10년간 지속됨으로서''' 왕권을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굉장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다.[16] 원상(院相)
2.4. 신권 견제 관련
결과적으로 '''세조와 공신들의 대결은 공신들이 성종 시절까지에도 상당기간 동안 국정을 좌우함에 따라 공신들의 완승으로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세조의 할아버지인 태종과는 굉장히 크게 비교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공신 세력들을 1차로 싹쓸이해버린 인물이 바로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이었다는 사실'''은 세조가 남긴 권신 집단들이 자신의 증손자대까지에도 그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겠다.
어찌 되었든 세조의 이런 취약한 공신 관리는 핵심 공신들을 모두 숙청하고 외척 세력들과 공신 세력들의 힘을 최대한 억눌러서 모조리 토사구팽시키고 후대까지 강한 왕권을 확립한 태종과는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으로서 '''태종과 세조의 반정에 대한 평가가 서로 엇갈리는 가장 큰 이유들 중 하나'''가 되게 된다.
2.5. 조선군 문제
한편 조선군은 초기부터 문제가 있었다. 태종 15년(1415)에 조정에서 정군에 지급하는 봉족의 수를 경작 면적과 인정(人丁)의 많고 적음에 따라 지급하도록 하였는데[17] 봉족은 정군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있었다보니 아예 정군이 봉족에게 자기가 할 일까지 떠넘기는 행태까지 벌어지게 된다. 오죽하면 태종이 1407년에 “정군이 자기가 배를 타지 않고, 능력을 불문하고 봉족을 시켜 대신하게 하니, 적(賊)을 만나면 모두 배 밑바닥에 엎드려서 손도 쓰지 못하고 죽게 된다.”고 군역 운영상의 문제점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정군의 수가 차츰 줄어드는 것이 보이자 세종 23년(1441)에는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의 구분 없이 건강한 자를 택하여 정군으로 삼고, 솔정(率丁)의 수에 따라 봉족을 주도록 하여[18] 전력누수를 막으려 했으나 결국 그것이 안 되어서 세조 10년(1464)에 조선초기부터 실시한 봉족제(奉足制)를 보법(保法)으로 바꾸어 시행하면서 종래의 봉족을 보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세조 시절에는 조선의 최전방이라 할 수 있는 평안도의 군사력과 창기병들이 쇠퇴하게 되었는데, 일단 조선 전기의 기본적인 전략은 '기병을 동원한 전투'와 이를 보조하는 '화약 병기'였다. 고로 조선 전기의 기본적인 전략은 2가지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창기병이 6, 궁기병이 4에 달할 정도로 창기병의 비중이 더 높았는데, 세조 이후부터 궁기병 위주로 개악이 이루어지게 된다. 태종 때 길주도 찰리사 조연의 북방 원정, 세종 때 파저강 토벌, 또 세종 때 파저강 토벌만 있는 게 아니라 수천 규모로 여진족이 평안도를 자주 침범하는데, 그때마다 조선은 전사자 교환비 1:10 정도를 낼 정도로 여진족의 침입을 잘 격퇴하고 심지어 압록강을 넘어서까지 심심하면 후두려패고 다녔다. 세종 때 올량합이 2,700 기병으로 평안도에 침범할 때도 격퇴하고 곧바로 창기병으로 추격해서 섬멸했을 정도.[19]
여기서 잠시 조선 초기의 북방 지역 전력을 언급하고 가자면, 1421년(세종 3년) 7월 5일에 평안도 병마 도절제사가 평안도의 군사 수를 파악해서 조정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평안도 지역의 조선군 전력은 일종의 전시에 소집, 동원되는 예비군 전력들 까지 모두 합산하여 대략
이정도 수준으로 정리된다.평안도 조선 기병 : 20,203
평안도 조선 보병 : 44,196
평안도 조선 수군 : 13,186
평안도 조선군 총합 : 77,585명
평안도 군량미 비축 현황 : 태종 100만 석 세종 60~70만 석 유지
당시 조선이 명나라의 정치 변동(정난의 변)이나 여진족의 침입과 맞물려 평안도에 지속적인 군비 확장을 투자하는데, 세종 때에는 60~70만 석의 군량미를 꾸준히 유지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고, 평안도 조선군이 세종 재위 3년에는 기병 2만과 보병 4만, 수군 1만을 포함해서 무려 7만에 달했을 정도였다. 사실상 조선군 전력들은 현대의 대한민국처럼 북쪽 최전방에 상당수가 배치되어 있던 셈이었다.
그리고 함경도 6진에도 조선군 정예 기병이 주둔해 있었는데, 사실 함경도는 땅이 척박하고 기병들을 유지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라서 함경도 기병은 세종 기준으로 9천에서 1만 명 수준에 불과했다. 뭐 어쨌든 평안도와 함경도에 기병 3만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사실 대부분은 창기병으로서 이렇게 태종 때부터 양성된 창기병이 세종 때에도 계속 조련되는데, 태종 때 장창과 중창 연간 생산력이 2만 개에 달할 정도였다. 참고로 태종 때 연간 환도 생산량은 약 9천 개.
2.6. 세조 - 군수품 감축
하지만 세조 때 평안도로 보내던 군수품을 감축하고, 평안도의 군사력을 2-3만 수준으로 엄청 감축해버린다. 이때 세조가 핑계를 댄 원인은 "중국 사신 때문에 평안도의 신민이 힘들어한다."는 거였지만, 이거는 사실 세종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무슨 이유이든 간에 어쨌든 군사력은 감축됐는데 문제는 세조는 여기서 더 나아가 기병 전력들의 대부분을 궁기병화 시켰고, 이후 여진족과의 전투에 있어서 더는 예전과 같은 확고한 우위를 점하기 힘들게 되었다. 결국 세조 이후 이러한 관행들 때문에 조선군이 원래 창기병(충격력)+백병전(팽배수)+화약(화기) 위주 부대에서 자꾸 궁수 위주로만 가니깐 조선군의 전력이 굉장히 약화되었다는 비판이 나오게 되었다.
다만 세조 시절은 조선의 군사들 중 '''활을 잘 쏘는 병졸이 무려 30만'''이나 되었던데다가 '''정예는 10만'''에 '''용맹한 군사는 3만'''[20] 이라고 양성지가 말하는 기록이 있어서 세조 시절은 조선의 국력이 가장 강할때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선대 왕인 태종 ~ 문종때 역시 조선의 국력이 가장 강할 때였으며 '''태종 ~ 문종 때 역시 군사가 30만 이상'''이었는데다가 또한 세조 때 조선의 국력이 강할 수 있었던 것도 선대 왕들의 군사적 업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21] 거기다가 양성지가 말했던 저 기록이 사실은 세조의 궁기병 위주의 국방정책을 비판하기위해 세조를 돌려 까는 것이라는 반론이 있는데다가 훗날 조선군이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 중 상당수를 세조의 군제 개악이 제공했으므로 세조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행위는 자제해야 할 것이다. 세조 시절 조선군이 단순히 30만이라 운운을 하면서 그 수가 많음을 그대로 믿으면 조선 말기에도 조선은 110만 대군을 가진 군사강국이었다고 우길 수 있다.
세조 역시도 지금 군적에 올라온 병력은 무려 40만이 넘는데 그 중 쓸만한 병사는 채 10만도 되지 않는다며 본인 스스로도 답답해 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세조는 조선군의 약화에도 큰 기여를 하였는데, 가장 최악의 사례로 '''그동안 비축해온 화약들을 대량으로 폐기처분한 사례'''가 있다. 태종 때 6천 근(약 4000kg)에 달하던 화약 무기 재료인 염초가, 세종과 문종 두 시대를 거치면서 무려 10만 근까지 양성되는데... 세조의 공신들이 염초 2만 근을 마음대로 처분해서 사적으로 이득을 취했고, 세조가 3만 근 정도를 바다에다 그냥 버려서 폐기처분해버렸다(...). 이렇게 그동안 비축해온 염초를 대량으로 폐기한 이유는 반란군들이 사용할까봐 우려 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2.7. 무기 체계
또한 형 문종이 화차를 개발하는 등의 조선 전기까지의 무기 체계 발전을 약화시킨 것도 바로 세조다. 총통위의 폐지로 화포 개발이 약화된 것은 물론 세조 때 조선군의 인사 고과가 철저히 궁시 위주로 재편시켜 창검술의 운용이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조선군의 화력 뿐만 아니라 백병전 능력까지 떨어뜨려 버린 셈이다. 다만 화력은 당대 여러 기록들이나 군사 무기 분야 편제를 봐서 당시까지는 그렇게까진 멸시되진 않은 듯 하다. 그러나 세조때 조선군의 근접전을 담당하던 팽배수들을 모두 천역화시켜버린 이후 조선군의 백병전 능력은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어 임진왜란 시기가 되면 근접전투 기술 자체가 거의 실전되어버리고 명군이 주력이 되어야 했다.문종 때까지 세계적인 수준에 있었던 화약 병기는 15세기 후반, 즉 단종 때부터 혼란한 국내 정세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화기의 개발에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반대 세력이 화기를 반란에 이용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기의 발달은 현상 유지에 머물면서 오랜 기간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특히 세조대의 소극적 화기 개발은 부대의 편제에도 영향을 주어 총통군이라는 화기 부대마저 해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이러한 총통군의 해체는 곧 화기의 전술적 운용을 퇴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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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가 세조는 부사관에 해당하는 군 계급을 날려버리는 실책도 저질렀다. 조선 초기부터 존재하던 갑사가 부사관과 비슷한 군 계급이었는데, 세조가 오위 도총부를 만들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리면서 사실상 없게 되었다. 말단 부대를 통제하고 지휘할 부사관이 없으니 전투 시 장군이나 장교가 전사하거나 사기가 조금이라도 꺾이면 일선 부대가 순식간에 와해되는 건 당연하다. 이는 성종대에 조선군의 약체화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게 만들었다.
2.8. 보법
특히 군사적인 부분에서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 보법이다. 이전에는 봉족제에 따라 군사 1명당 조호가 병종과 빈부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되었다. 평균적으로 3명이 한호를 이루되, 토지 소유의 빈부를 기준으로 의무자의 재산에 맞추어 부유한 집안은 1정을 1호로, 가난한 집안은 5정을 1호로 배정하고 부유한 이가 군역을 지는 경우에는 조호를 지급하지 않는 식으로 각 가구의 경제 사정에 맞추어 유연하게 책정되었다. 그런데 세조 때 보법이 시행되면서 호가 아닌 인정을 기준으로 계산하는데다가 1명당 2정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는 군역을 번거로운 조사와 산정 과정 없이 간단하게 부과하고 군사의 수를 크게 늘릴 수는 있었지만 보인이 맡는 경제적 부담이 심각하게 커진다는 문제점이 있다. 특히 이전에는 가계 수준에 맞추어 유연하게 책정되던 군역 부담이, 세조의 보법 이후로는 일률적으로 인정을 기준으로 하게 된데다 이전보다 부담 자체도 커져서 보인들이 이를 감당할 수 없게되어 이를 피하려고 유망이 빈번해졌다. 경제적인 지원이 사라지자 군역을 실질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정병 역시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조 말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정예병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라져 갔다. 팽배수와 중기병의 비율이 낮아진 것(세조시절 창기병 축소와 궁기병 위주의 개악이 이루어졌다.)은 조선중기의 군사력이 약해진 이유였는데,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고려 공양왕시기 과전법을 실시하여 이전까지 개인에게 분급되었던 수조권을 모두 국가에서 회수하여 관료들에게 관품에 따라 18등급으로 수조권을 분급하여 경제적 기반을 보장해 주었다. 다만 이러한 조치는 수조권에 한한 것으로 본래부터 개인이 소유한 토지는 재분배 대상이 아니었으며 대상도 전국단위에서 경기로만 한정하였다.
2.9. 토지 개혁
토지를 개혁했지만 근본적으로 화폐경제체제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토지중심 경제체제였고 미래에서 오지 않는 이상 강압적인 힘으로라도 쌀본위나 곡물본위제도를 채택한다거나 세조가 밀어붙인 전폐(...) 같은 걸로 화폐경제를 돌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므로 힘있고 권력있는 자들은 과전법으로 받은 토지를 국가에게 돌려주지 않고 수신전, 휼양전 같은 예외적으로 일부 토지를 한시적으로 가질 수 있는 제도를 이용, 편법으로 상속을 하였고 이로인해 토지겸병이 점점 심해지게 되었다. 1/10 과세 원칙을 정하여 1결당 최대 2석(石)까지만 수취하도록 했던 것도 지키지 않고, 수조권만 주었는데 아예 토지를 소유해 버리는 건 덤.
문제는 그저 토지 문제로만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태종시기부터 관료들의 수를 늘리다보니 관료들에게 땅을 지급해 줘야 할 토지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여기다 세조가 공신전을 남발함에 따라 이 급격하게 늘어난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점점 그 대상이 큰 폭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기존 체제로는 정규군의 병력 수요조차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 까닭은 기본적으로 세조 이전의 조선의 군사체계는 양인개병제가 아니라 엄연히 말하면 전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왕실과 국가소속의 세병제에 가깝다. 일부에서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부병제라고 하는데 이는 틀린 것으로 부병제는 개병제와 모병제의 절충안으로 전국의 가호에게 국가에서 토지를 지급하거나 소유권을 확립시키는 대신 '''평등하게''' 병력을 차출하는 제도다. 괜히 방효태가 사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지역사람들 다 죽였는데 내가 어딜가냐고 한탄한게 아니라는 것. 수나라는 나라를 이렇게 전국단위로 고구려 원정에 갈아넣다 국가를 망가뜨렸고 뒤이은 당나라 역시 무리한 고구려 원정으로 국력을 대차게 갈아먹고 토번과의 전쟁에서 고전했으며 고구려와는 전혀 상관없는 당의 서북지역에 고구려인들을 데리고 와야 했을 정도로 기미체제가 붕괴하고 말았다. 당이 요동성 전투나 주필산 전투 등지에서 드러나듯이 자기 역사를 왜곡해서 넣은 덕분에 제대로 알긴 힘들지만 1차 전쟁에서 요동성과 백암성에서의 야전이 있었고, 2차 전쟁 당시엔 김인문 열전에도 "고구려 인들의 저항이 매서웠고 오히려 당군이 보급에 문제가 생겨 위기에 빠졌다."라고 나와있다. 더군다나 662년 시점에서는 누방 도행군 지휘자인 정명진과 부장 양사선, 패강 도행군의 지휘자인 임아상의 사망이 확인된다. 당나라 35군을 편제한 6개 도행군 가운데 2개가 사령관을 잃고 1개는 무력해지며 2개는 전선을 이탈한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연개소문은 사수로 나아가 방효태의 당군과 대회전을 펼쳐 전멸시켰다. 일부사람들이 고구려는 야전에서 수와 당의 군대를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남아있는 기록만으로도 반박이 가능하다. 이에 비해 세병제는 죽어도 흔히 고려에서 말하던 군반씨족 위주로 손실이 발생하는 것이라 전면적인 부병제보다 손실시 발생하는 타격은 적지만 병호로 걸린 사람들은 평생+대를 잇는 군복무로 엄청나게 부담을 주는 제도였다.
어쨌든 지정된 군호에서 병사들을 차출해 병력 수요를 채웠는데 군호로 지정된 사람들이 장비와 보수 마련자금의 재원인 곡식을 재배할 만한 땅을 관료들에게 지급하면서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이러면 자금을 대어줄 봉족들도 같이 사라져버리는 건 덤. 이 문제는 세종 말기와 문종시기를 지나며 심화되었다. 병력충원의 큰 축인 양반사족들은 힘들기만 하고 얻어지는 것은 없고 손해만 줄창나는 군역을 하느니 문관으로 진출하는 것이 몸도 덜 상하고 정신건강에도 좋고 주머니 사정에도 이롭기 때문에 세종 말기 쯤에 이르러선 옛저녁에 군기피 현상으로 대다수가 발을 뺀 지 오래였다.
2.10. 결과
이렇게 되면 왕권은 떨어지고 신하들의 세력이 커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세병제의 장점은 팽배수와 중기병 같은 훈련만으로는 기르기 힘든 병종들을 비교적 수월하게 수급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러면 병력 수급이 점점 힘들어진다. 물론 근접전을 수행할 장검류들을 든 도수가 있지만 이들은 기존 오위체계 내에서도 팽배수를 지원하도록 되어있지 이들이 도펠죌트너처럼 일선에서 싸우는 역할이 아니었다. 창병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근접전 무기가 아니라 조준하고 찌르고 활이나 쇠뇌를 휘두르듯이 휘둘러 근접한 적에 저항하는 비소모성 원거리 무기에 가까워서 이들에게 근접전을 맡길 수도 없었다.
2.11. 창병 육성
창병들의 육성도 쉬운 게 아닌 게 굳이 창병 문서로 갈 필요도 없이 세조 사후 조선 중기인 1625년에 경기도 속오군에 화포수(火砲手) 3000명, 장창수(長槍手) 1000명, 대검수(大劍手) 1000명씩을 조직하기 위해 무기를 조달하려고 했지만 10년 뒤인 1635년에도 창대로 쓸 목재 조달이 되질 않았다. 조총(조선군에서는 조총병이 화포까지 맡은 듯 하다고)들이나 장검들은 어떻게 조달이 되었는지 별 큰 언급이 안되었지만 창은 전혀 그렇지 못했는데, 대놓고 구굉이 장창 1000개를 만드려고 하는데 자루가 없어서 자루로 쓸 만한 나무를 구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 경기도의 참나무는 너무 무거워 들 수도 없어서 가시나무나 종가시나무를 대신 써야 하는데, 그럴만한 나무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식물의 특성상, 같은 품종이라 해도 자라는 환경에 영향을 받아서 좋은 목재가 나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게 더 문제. 창을 제대로 만들 경우 창대로 쓸 재료의 문제(아무 나무나 쓸 수 없다)와 제작 난이도 문제(가운데에 심에 쓸 목재와 주변부에 결합할 부품 등)로 인해 후대에 등장할 총보다도 비쌌다. 조선기준 조총가격이 3.5석일 때 창대가격만 2석이었다.
그리고 창병도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이, 공격력을 가진 질량 벽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절대 진형을 흐트리면 안 되었다. 즉 피할 수 있는 화살이나 투창, 도끼, 단검들을 맞고 죽을지언정 절대 진형을 흩뜨려서는 안되었다. 타 병종과 달리 창병은 진형을 흩뜨리는 순간 그 존재가치가 거의 0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 기예로 잔뜩 창술을 익힐 수 있겠지만 전장터에서 창이 요구하는 포지션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었고 개인 기예로 익혀봤자 어지간해서는 다른 무기들에게 취약했다. 오죽하면 일본에서도 칼이 없으면 봉을 들고 봉이 없으면 주먹으로 싸우라 했다. 무로마치 시대의 부상 주요 원인, 보병이 기병에 상대 할 때의 팁.
실제로 선조도 피난 중 명군에게서 장창을 받아보고 장창을 만드려고 하였는데, 장창으로 만들 목재 재료가 부족하다(구득할 방법이 없다)는 보고를 받고 대나무의 대를 이용한 창을 쓰라할 정도였고, 인조도 조선에서는 창이 요긴한데 우리나라에서는 대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일이 매우 형편없으니 각별히 정밀하게 만들어 정벌하는 데 쓰는 것으로 삼으라는 말을 할 정도.
이전 정권을 규탄하며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세조도 이 문제는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현직 관료에게만 수조지를 분급하도록 하고, 사망한 관리의 아내나 자녀에게 수조지를 상속하던 규정을 폐지하는 직전법을 실시했지만 국가가 지는 부담이 가중되는 속도만 늦춰졌을 뿐이다. 토지 수조권 분급의 원칙에 근거하였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더군다나 여기서 손을 더 대었다가는 가뜩이나 전조 말기부터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느라 권력을 빼앗긴 각지의 토호들의 불만이 높아진 상황에서 중앙관료들까지 합세하면 이징옥의 난[22] 이나 이시애의 난 같은 것이 어디서 얼마나 다시 발생할지도 몰랐으며, 당장 단종 복위 운동이랍시고 사육신과 생육신이 벌어지는 판에 계유정난 같은 일이 다시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세조 본인의 약한 지지기반 탓에 더 손을 대고 싶어도 댈 수가 없었던 것이다.
2.11.1. 병력 수요 증가
그리고 그 스스로도 4군 6진같은 새로 영토를 확장한 지역에 전가 사변같은 북방 사민 정책을 시행하고 원주민들의 지지도를 올리기 위해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지 않고 그 지역의 토호를 토관으로 임명했으므로 이들에게 중앙정부의 힘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도 병력의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경진북정, 정해서정 같은 원정을 자주 하다보니 병력의 수요는 점점 늘어났다. 결국 보법을 실행해 이전시기 군호지정 같은 것이 아닌 양인개병제로 바꾸어서 3명 단위로 묶어 1명은 정군, 나머지 2명은 보인으로 돌아가면서 군 복무를 하도록 해 정규군의 수를 13만 5천 정도로 불렸다. 인사고과에서 활을 중요시하기 시작한 것도 덤. 이렇게 하면 숙련도는 개나 주는 꼴이 되어버리지만 당시 조선에게 필요한 것은 소수의 숙련된 무사집단이 아니라 성능은 낮지만 원할 때 원할 만큼 움직여줄 대규모의 전쟁기계들이었다. 그래서 숙련도가 중요한 팽배수와 중기병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즉 3차 포에니 전쟁 이후의 로마나 3세기부터의 로마처럼 재원은 부족해지고 반란 등으로 병력수요는 이전시기보다 더 늘어났으므로 임시 방편으로 돌려막기를 추구한 것이 세조의 정책이다.
게다가 세조 이후 성종이 다시 등용한 사림파들이 기득권층으로 변질되어 이로 인해 양인이 감소하여 군인층이 붕괴되기 시작하고 팽배수들이 각종 역사에 동원되면서 점차 양인들 사이에서 기피되고 천인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신량역천으로 변질되어 팽배수들은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결국엔 성종 대에 이르러선 대간이 화차가 낡았다고 버리자고 해서 버리거나, 병선들이 썩고 있다는 윤필상의 보고가 들어오기도 했다. 특히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자 정군들이 보인이 지어야 할 부역까지 지게 되면서 군사들은 보인에게 받은 비용으로 사람을 사서 대역시키는 방식이 점차 퍼지게 된다. 결국 1541년 중종 36년에 수포제가 시행되어 군역 부담자에게 번상가를 포로 일괄 징수해서 그 비용으로 군인을 고용하게 된다. 이후 양인 장정들은 대부분은 1년에 군포를 2번 내는 납포군으로 변환된다. 국가간의 전면전 없이 지속된 오랜 평화로 인해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조선군 중 전력을 유지하던 부대는 중앙군으로는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를 포함한 금군(禁軍) 수백 명과 오위 중 중위에 해당하는 의흥위(義興衛)에 속하는 갑사 수천 명, 지방군으로는 1만 남짓한 하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수군[23] 과 평안 함경 지역의 북방군 수천 명에 불과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도 세조도 6조 직계제 말고도 나름대로의 업적이 있다. 식읍을 폐지했다는 것과 향, 소, 부곡민 문제를 다 마무리 지었다는 점, 그리고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과전법을[24] 직전법으로 바꿨다는 점에서는 업적이 있다. 그리고 간경도감을 설치해 불경을 간행했으며, 원각사와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만들어 수험생들을 열받게 하는 업적을 세웠다. 그리고 원상제라고, 재상들이 승정원에 항상 출근해 세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게 하는 일종의 대리 서무제를 실시하기도 했고, 상평창을 부활시켰으며, 팔방통보라는 전폐(화살촉 화폐)를 유통시키려 시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세조는 중앙집권제의 확립을 마무리 지어서 이시애의 난이라는 부작용이 있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 시기에 들어 조선은 전국에 수령을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유교 정치의 근간을 이룰 율령인 경국대전의 편찬을 개시했다. 그리고 규장각이라는 왕을 위한 싱크탱크겸 재교육 기관을 만들기도 했다. 이 규장각의 경우 사림이 얼마나 싫어했는지 세조가 죽자마자 폐지되었으며, 먼 훗날 정조가 다시 만들기 전까지 재건되지 않았다. 그리고 총통위가 사라졌지만 일부에서 말하듯이 화약무기를 억압하는 것이 아닌 각 부대가 알아서 사용하게 하였다.
2.11.2. 총론
하지만 태종과 세종 때부터 필사적으로 비축해온 화약들을 대량 폐기하고 세조의 총통위 폐지 이후부터 조선의 화약무기 발전이 크게 정체된 것 또한 엄연한 팩트이자 실정들이다. 세조 시절 집현전이 없어졌다고 해서 집현전의 기능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세조의 국정 운영에 핵심이 된 공신들은 세종이나 문종 시절처럼 집현전 출신의 테크노크라트들이 아닌 계유정난 과정에서 공을 세운 공신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집현전이 세종 시절 만큼의 위상을 가지거나 집현전 출신 테크노크라트들이 조정의 핵심 인재들로 활약 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세종대왕과 문종은 국가 시스템을 굉장히 중요시한 임금들로서 시스템을 만드는데 크게 집중을 하였지만, 세조는 그런 시스템의 통치를 굉장히 싫어하였고 결과적으로 그가 본인의 공신들과 함께 마음대로 통치하는 구조를 만들어버림에 따라 세종과 문종 시절 확립된 시스템들이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국 이러한 세조의 행보들이 결과적으로 후대의 왕권 약화에도 크게 기여함에 따라 세조 본인의 할아버지인 태종이 남겨준 왕권강화의 유산들 또한 세조 이후부터는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즉, 태종과 세조를 비교한다면 세조 그 나름대로는 태종처럼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그 자신의 근본적인 한계로 못 한 것이다. 결국 '''세조는 개인의 능력이나 국가의 백년대계를 바라보는 안목 등에서 여러모로 태종과는 반대되는 경우였던 셈'''이고, 태종이 강한 왕권을 남겨준 것과는 달리 역으로 왕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후대의 평가 또한 할아버지인 태종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평가를 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1] 재밌게도 이런 정치체계는 근대 민주주의 국가가 흔히 채택하는 입헌군주국과 흡사하다. 물론 정도전 본인이 미래인이라서 민주주의까지 간건 아니고, 그가 모티브로 한 것은 주공단, 관중, 제갈량 등 유능한 재상이 국가 운영을 주도하던 시기다. 이것을 아예 조선이란 나라에서 시스템화하고자 한 것.[2] 태종은 동생이나 '''세자'''인 이방석을 세조는 조카이나 '''왕이자 상왕이던''' 단종을 죽였다. 흥미롭게도 위계서열상 자기보다 낮은 상대를 죽였다는 것도 같다. 다만 종법질서로 따지면 태종은 이방석보다 꿇릴건 전혀 없었지만 세조는 자기 조카가 하필 전왕이자 자기 형인 문종의 자식인지라 순위가 낮았다.(정확히 따지고 보면 세종 사후를 기점에서 계승 순서는 문종(적장자)-단종(적장손)-세조(차남)이다.)[3] 만일 재벌 그룹의 회장이 장성하고 능력이나 인품에도 결격이 없는 형들을 제쳐놓고 막내아들에게 그룹을 물려준다고 가정해보자. 더군다나 그 막내 아들은 열 몇 살짜리 어린아이라면 이게 과연 합당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조선시대 기준으로 보면 이는 책봉 당시만의 문제점으로 실무적인 면만으로 보면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석은 친정이 가능한 나이이며 아들도 있었다. 이 때를 기준으로 보면 어거지만 좀 쓰면 말도 안 되는건 아니었던 것이긴 하다. 책봉 당시가 문제라서 그렇지.[4] 이 떄 왕씨 몰살이 일어났는데 이것도 이씨 왕조의 정통성 문제가 걸려있어서였다. 그도 그럴게 제대로 된 선양을 받아 건국한 것도 아니고 정변을 일으켜 찬탈한 것도 아닌 애매한 계승이었기 때문[5] 다만 문제는 이런 상황을 초래한 것도 이성계인데 이방번은 물론 그 위의 자식들까지 보면 하나같이 권문세족 등 힘있는 가문과 결혼시켰는데 이는 당연히 정략결혼이다. 즉 이성계가 정략혼을 통해 자기 가문의 이익을 보려고 그렇게 한건데 막상 왕이 되고 보니 이방석 뺴곤 결격이라며 쳐냈으니 당연히 다른 아들들 눈에는 토사구팽으로 보였을테니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이 사단을 만든 원흉은 이성계다.[6] 문과급제를 했기에 실력은 보증되어있고 관료생활도 해 보았기에 정치적인 묘리를 잘 알고 있었다.[7] 다만 이징옥의 난은 의문이 있는게 정말 조선으로부터 독립한 분리주의적인 반란인지 아니면 죽을 순 없으니 한번 개겨보기나 하자는 반란인지 명확하지 않다. 일단 대체적으로는 후자에 무게가 실리는 편[8] 참고로 태종은 경연을 없애지는 않아도 게을리했는데 그래도 태종이 과거급제까지 할 정도로 학식이 높아서인지 아니면 왕권이 세서인지 몰라도 사냥에는 마구 물어뜯던(그럴만도 한게 사냥에 드는 국가적 소모가 어마어마하다.) 간관들도 경연을 게을리 한다고 뭐라 하지는 않았다.[9] 연산군은 그래도 한 횟수가 세 자리는 되지만 광해군은 10여회 정도...[10] 경연을 하다가 신하들 실력이 자기를 가르칠 수준이 못 되어서 경연을 폐지하고 자기가 직접 인재를 길러내는 초계문신제를 만들었다. 조선사에서 호학군주지만 경연을 없애버린 드문 예시[11] 반대로 호학군주이거나 정통성 문제가 있던 세종, 성종(이쪽은 10대 시절 조강, 주강, 석강을 여름에도 꼬박꼬박 했고 홍귀달이 야대까지 하자고 해서 야대까지 했다!), 중종, 효종, 영조, [10] 는 경연에 열심이었다.[12] 이는 아들은 세종과도 유사하지만 세종은 능력있는 자들의 부정부패에만 끝없이 관대했고 관대한 만큼 부려먹었다.[13] 홍윤성은 청탁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투덜댄 삼촌을 때려 죽였다는 야사가 있을 정도라서 같은 훈구파 신하들끼리도 '살인마 정승'이라고 야사에 기록하였다.[14] 실록에서도 홍윤성이 정승이 되자 홍윤성의 고향에서 축하 선물로 노비 2명을 보냈는데, 노비가 튼실치 않다며 노비들을 고른 나계문을 때려팼고, 그것도 모자라 나계문이 자기 땅에 심어 가꿔놓은 나무를 모조리 베어갔는데, 급기야는 홍윤성의 종의 남편인 김돌산이 나계문을 패 죽여버리기까지 했다고 기록돼 있다.[15] 물론 태종과 세종도 일부 측근의 비리를 봐주긴 했지만, 태종은 왕권에 위협이 될 수준은 모조리 칼같이 숙청했고, 세종은 일단 전모를 모조리 밝혀서 잡을 놈 잡은 후 유능한 놈만 봐주고 정말 노비처럼 부려먹었다. 그리고 정말로 능력이 있던 이들은 맞았다. 황희는 부패관료지만 명재상임에는 두말할 것 없었고, 조말생은 뇌물 받은 걸로 하마터면 사형당할 뻔하기까지 했지만 행정 관료로는 탁월했고, 박연은 여러 구설수에 오르긴 했지만 그래도 당대에 음악에 대해서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 반면에 세조는 비리를 제대로 밝힌 것도 아니고 대국적으로 정치적 관용을 베푼 것도 아니었다.[16] 이 시기에 얼마나 왕권이 약화되었냐면 예종 시기에는 사관들이 원상들에게 밉보일까 싶어 '''대신들에 대해 비판한 기록을 지워버렸고'''(들통이 나서 처음 한 민수는 서연관이었던 것 때문인지 장 100대에 제주도 유배, 민수와 공범인 사람과 민수와 같은 방식으로 기록을 지운 원숙강은 사형당했다.) 성종 시기에는 대간 중 하나가 원상제 폐지를 건의 하자 '''동료 간관들이 몰려가서 그만두라고 겁박했고'''(대간의 역할이 대신들 견제인데 그 대신들 중 우두머리격인 원상들에 대해 이토록 친화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왕권이 약했다는 거다.) 그게 드러나는 통에 사헌부가 갈려나갔다.[17] 태종실록 15년 11월 11일.[18] 세종실록 23년 6월 8일.[19] 올량합 여진족 2,700 기병을 평안도 여연성에서 아군이 포위하여 물리치다. 앞은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 기록된 부분이다.[20] "우리 나라의 인민(人民)은 무려 1백만 호(戶)나 되는데 그 중에서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이고, 정예(精銳)한 병졸이 10만 명이며, 용감한 군사가 3만 명입니다." 출처.[21] 문종 때 3군의 12사를 5사로 개편하면서 병력이 증강되었다.[22] 이건 단종때 벌어졌다.[23] 남도 지방의 수군은 왜구들의 침입이 빈번해 비교적 충실한 군비를 갖추고 있었다.[24] 과전법은 자리에서 물러나면 반납해야 하는데 휼양전, 수신전 명목으로 사실상 세습되는 폐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