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호/2001년
1. 히딩크호의 출범
2001년 1월 3일, 핌 베어벡이 수석코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월 12일에 울산에서 첫 훈련을 가졌다.
이 첫 훈련에서 그가 계속 강조하는 '''강한 체력'''이 처음으로 언급된다. 이 과정에서 허정무호 1기 시절에 한국축구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것이라 여겨졌던 젊은 선수들이 무더기로 하차하는 충격적인 상황이 일어났다.
수비수 박동혁은 훈련 중 지쳐서 휴식을 요청했다가 바로 퇴소(...) 조치 당했으며, 좌영표 우진섭이라 불리며 천재라 칭송받던 박진섭[3] 도 순식간에 대표팀에서 삭제당했다. 이영표 역시 다시 후보로 강등되었을 정도. 단 이 와중에 가장 먼저 대표팀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젊은 선수는 올림픽 대표팀에도 승선한 바가 있지만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박지성이었다.
울산 훈련에서 히딩크와 베어백 코치는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는 대표팀 훈련을 보고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이후 유럽 축구의 선진적인 훈련 프로그램과 비디오 분석관, 충공깽의 체력 트레이너 등의 스탭을 합류시켜 한국대표팀을 전반적으로 개선해 나갔다. 이 때문에 한국 축구를 히딩크 전후로 나누어 평가할 정도. 국내 축구인들이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을 보고 놀랐던지, 이후에 선진 축구를 배우러 유럽 구단으로 연수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일종의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히딩크 이전의 국내전문가들의 평은 "한국의 선수들은 체력과 배짱, 뚝심 등 피지컬과 멘탈은 강하기 때문에 조직적인 팀 축구는 잘 해도 뒤쳐진 환경과 경험 부족으로 개인기와 기술이 부족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평이 '우물 안 개구리의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거의 최초의 계기라고 할 수 있다. 히딩크와 그의 스태프의 평에 의하면 한국 선수들은 기술력과 잠재력은 있어도 체력도, 멘탈도 약하고 뚝심도 없었으며 기본기도 부족했다는 것.
울산에서 훈련이 끝나고 대표팀은 홍콩 칼스버그 4개국 축구대회에 참가하여 노르웨이, 파라과이랑 각각 경기를 치렀다.
2. 칼스버그컵
2.1. 준결승 대한민국 2 vs 3 노르웨이
2.2. 3위 결정전 대한민국 1(6) vs (5)1 파라과이
1:1로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이겼다. 참고로 골키퍼 김병지는 파라과이전에서 예능성을 발휘했다가 히딩크에게 제대로 찍혔다. 이른바 '''윙병지'''라고 불리는 사건으로, 잡은 공은 골대에서 갑자기 드리블(!)하기 시작하더니 경기장 중간 쯤에서 파라과이 선수에게 볼을 뺏기고 만 것. 결국 히딩크가 2002년 월드컵에서 이운재를 주전으로 낙점한 이유도 안정성 때문이었다. 김병지가 돌발 예능만 벌이지 않았더라면...[4]
이후 히딩크호는 거센 비난에 휩싸였다. 심지어 2001년 초반, K리그 경기를 둘러보던 자리에서 한숨을 쉬었다고 기자들은 한국 프로축구를 비하했다며 1면[5] 에 실어가면서 정신없이 씹어 댔다.근데 평소에 그들만의 리그 운운하면서 K리그 씹어 댄 건 기자들이었다.(...)
3. 두바이컵
출전 명단
골키퍼 : 김병지, 이운재, 김용대
수비수 : 김태영, 심재원, 이민성, 홍명보, 김영선, 김현수, 이임생
미드필더 : 고종수, 박지성, 유상철, 이영표, 김상식, 박진섭, 서동원, 송종국, 신상우
공격수 : 김도훈, 박성배, 김은중, 서정원, 설기현, 안정환, 정광민
이 대회에서 가진 경기 중 모로코와 덴마크는 리그 선발팀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두 팀과의 경기는 A매치 경기로 인정받지 못했다.
3.1. 모로코[6] 전 (2001/2/08, UAE 알니자르 스타디움): '''1:1 무'''
전반 10분 모로코에게 선취골을 내줬다가 후반 종료 직전에 유상철이 동점골을 넣었다.
이 경기 전반에는 슈팅수가 0-7, 스코어는 0-1로 모로코에게 압도 당했다. 최전방에 김도훈, 섀도우 스트라이커로 고종수를 기용했지만, 상대 문전에 제대로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팀이 전반적으로 수비와 미드필더, 공격진의 구분을 찾지 못하고 선수들이 우왕좌왕했다. 이러는 사이 심재원의 실책으로 왼쪽을 뚫렸고, 페널티 지역으로 날라온 볼을 수비수들이 처리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사이 라치드가 오른발로 차 넣었다.
후반에 한국은 고종수를 왼쪽으로 배치하면서 다소 활기를 찾았으나 그럼에도 공격은 시원찮았다. 그러다 후반 43분 유상철이 페널티 아크 지역에서 혼전 중에 흘러나오는 볼을 강슛으로 때렸고, 이것은 상대 수비에 굴절되어 모로코 골대에 박혔다.
3.2. UAE전 (2001/2/11, UAE 알니자르 스타디움): '''4:1 승'''
이 경기는 모로코와의 1차 전에 비해 한결 나았다. 홍명보와 이민성이 버틴 수비진이 안정되었고, 수비라인에서 미드필드로 이어지는 패스가 잘 이어졌다. 여기에 홍명보와 이민성은 틈틈이 최전방까지 전진해 나가 공격수들에게 볼을 공급했고, 미드필드 좌우 날개를 맡고 있던 고종수와 송종국은 최후방 수비까지 커버 플레이를 잘 해냈다. 이날은 히딩크 감독이 정착시키려 했던 4-4-2 포메이션이 잘 돌아갔다.
득점은 UAE의 압둘라헴 주마가 전반 24분 선취골을 넣었지만, 전반 종료직전 송종국이 동점골을 기록하고, 후반에 유상철과 설기현, 고종수가 차례로 골을 터트려 홈팀을 대파했다. 김도훈은 이 경기에 어시스트 헤트트릭을 기록했다.
3.3. 덴마크전[7] (2001/2/15, UAE 알니자르 스타디움): '''0:2 패'''
히딩크는 이 경기 안정환과 설기현 유럽파 공격수들을 선발로 내세웠다. 전형은 4-4-2 대신 김도훈을 원톱으로 한 좌우로 안정환과 설기현이 포진한 4-3-3 포메이션.
이 경기 볼 점유율은 한국이 우위였지만, 측면 돌파만 고집하는 단조로운 플레이를 했다. 이런 한국을 상대로 덴마크는 끈끈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압박을 이용한 파워 플레이로 전반과 후반에 각각 한골 씩 기록하였다.
이 경기 한국 대표팀의 포백 수비는 개인기 부족과 덴마크의 강한 압박에 잦은 패스 미스를 일으켰고, 상대 공격수도 번번히 놓쳤다. 여기에 미드필드에서 공간 확보가 되지 않으니 공격력도 자연히 약해졌다.
이 당시 대표팀이 겪고 있던 유럽징크스를 깨지 못한 경기였지만, 이 경기의 덴마크의 플레이는 나중에 한국대표팀이 벤치마킹하게 된다.
4. LG컵 4개국 친선대회
출전명단
골키퍼 : 이운재(상무), 김용대(연세대), 최은성(대전)
수비수 : 김태영(전남), 이민성(상무), 이임생(부천), 강철, 최성용(이상 라스크 린츠), 서덕규(울산),
미드필더 : 이영표(안양), 박지성(교토), 김상식(성남), 윤정환(세레소), 송종국(부산), 고종수(수원), 하석주(포항), 서정원(수원),
공격수 : 김도훈(전북), 황선홍(가시와), 안효연(교토), 이동국(베르더 브레멘), 설기현(앤트워프)
고종수가 종아리 부상으로 제외된 가운데, 황선홍과 이임생도 부상으로 출전이 불발 되었다.
대표팀은 심재원(부산 아이콘스), 서동원(수원), 박성배(전북 현대)를 대타로 선발했다.
홍콩에서 예능(...)을 선보였던 김병지가 제외되고[8] 최은성이 새로 발탁되었다. 23세의 젊은 수비수 서덕규가 깜짝 발탁되었는데, 1월 울산 훈련에서 대표팀과 연습경기를 할 때 히딩크의 눈에 띄었다. 히딩크는 수비 능력이 좋고 과감한 플레이가 마음에 들었다고[9] .
4.1. 4강전 이란전 (2001/4/24, 카이로 인터내셔널 스타디움): '''1:0 승리'''
4.2. 결승전 이집트전 (2001/4/26, 카이로 인터내셔널 스타디움): '''2:1 승리'''
5. 컨페더레이션스컵
1998 월드컵에서 1-3 패배를 안겨준 멕시코를 울산문수축구경기장에서 코뼈가 내려앉았던 유상철의 결승 헤더로 2-1로 이기며 설욕했으며 호주까지 잡았지만 결국 4강 진출에 실패했다. 프랑스가 호주를 상대로 대충 경기를 하다가 패했기 때문이다.
결국 프랑스, 호주, 한국이 2승 1패로 동률이 되어 골 득실차가 밀리는 한국이 탈락했다.[10]
이때 일본은 준우승을 해서 히딩크호가 비난을 들었다. 하지만 일본은 상대적으로 쉬운 상대들인 캐나다나 카메룬 등이나 주전들이 모두 빠진데다 지역예선에서 칠레에 1-3, 파라과이에 0-1로 발리며 고전하던 브라질 따위(물론 1년 후 우승하지만 한국과 터키의 4강 이변에 가려져서 그렇지 당시 브라질의 선전을 예상한 사람들 역시 많지 않았다)를 상대했고 한국은 지역예선 돌풍의 주역인 호주, 북미 최강 멕시코, 세계최강 프랑스의 3연타라 비교는 어불성설이다. 여기서 한국은 북미 최강인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에 패배를 안겨주며 멕시코 상대 역대전적에서 다시 우위를 차지했고 멕시코의 엔리케 메사 감독은 안 그래도 지역예선 성적부진으로 간당간당한 판에 결국 자진사퇴했다(...). 멕시코가 이 대회에서 매우 부진한 경기력을 보였던 점도 우리에겐 불운이었다고 볼 수 있다.
5.1. 친선경기 카메룬전 (2001/5/25, 수원 월드컵 경기장): '''0:0 무승부'''
5.2. 조별리그 A조 프랑스전 (2001/5/30, 대구 월드컵 경기장): '''0:5 패배'''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린 개막전에서 당시 세계 최강으로 꼽히던 프랑스에 0:5로 대패했다.
레블뢰는 당시 지단과 앙리, 트레제게가 빠졌지만 당시 최고의 전성기로 접어들고 있었던 니콜라 아넬카, 실뱅 윌토르, 크리스토프 뒤가리 등 유로 2000 우승의 주역들이 건재했고, 미드필더 라인은 지단 다음으로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꼽히는 유리 조르카에프, 아스날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파트리크 비에이라와 로베르 피레스, 수비라인은 비센테 리자라쥐와 마르셀 드사이, 윌리 사뇰 등 최고의 진영으로 짜여있었다. 어찌보면 0:5 패배가 당연할 수도 있었다.
여담으로 박지성은 이 경기는 과거로 돌아가면 절대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기로 이 경기를 꼽았다. 이 당시에는 뭘해도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시 프랑스 팀이 축구를 굉장히 잘했다고 한다.
5.3. 조별리그 A조 멕시코전 (2001/6/1, 울산 문수 축구 경기장): '''2:1 승리'''
5.4. 조별리그 A조 호주전 (2001/6/3, 수원 월드컵 경기장): '''1:0 승리'''
첫 경기인 프랑스전의 0:5 대패로 인해 골득실에서 밀려 4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황선홍은 이번 경기까지 2경기 연속 득점으로 3경기 2득점으로 대회를 마쳤으며 대회 최다 득점자 7명 중에 포함되어 브론즈 슈를 수상하였다.
6. 8월 평가전
예비 엔트리
▲GK= 이운재(상무) 서동명(전북) 김용대(연세대)
▲DF= 이민성(상무) 심재원(부산) 서덕규(울산) 김정수(대전) 강철(전남) 윤희준(부산)
▲MF= 송종국(부산) 이기형(수원) 김도근(전남) 이을용(부천) 이영표(안양) 김재영(부산) 이천수(고려대) 유상철(가시와 레이솔) 전우근(부산) 한종성(상무) 최성용(라스크 린츠)
▲FW= 이동국(포항) 김도훈(전북) 안정환(페루자) 설기현(안더레흐트) 최태욱(안양) 황선홍(가시와 레이솔)
하석주, 홍명보, 고종수가 빠진 대신 이동국, 안정환이 사면(?)되어 히딩크호에 컴백했고, 그 외에 김정수, 윤희준, 전우근 등 K리그에서 두각을 드러낸 신예들이 처음으로 합류한다.
6.1. 체코전 (2001/8/15, 드로노비체 스타디움): '''0:5 패배'''
거기다 광복절, 유럽 원정을 가서 체코의 브르노에서 열렸던 체코전에 역시 0:5로 대패하면서 결국 '''오대영 감독'''이라는 오명이 붙었다. 당시 언론들은 비슷한 시기 오세아니아네이션스컵 우승팀인 호주를 3-0으로 이긴 일본(2000 아시안컵 우승팀으로 이 경기는 오세아니아-아시아 챔피언 슈퍼컵 대회였다.)과 견주면서 더 욕했다. 당시 세계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칭송받던 네드베드를 중심으로, 포보르스키, 로시츠키, 얀 콜러 등 내로라 하는 선수들이 총출동한 '''FIFA 랭킹 2위 체코 축구 국가대표팀 1진'''을 상대로 원정 가서 당한 것[11] 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안방에서 이긴 것을 비교하는 것은 어떻게 봐도 무리수거늘...
상당수 축구인과 관련 인사의 입장도 부정적이었다. 이주일은[12] "외국인 감독 하나 데려오면 뭐가 달라지나? 그 돈으로 유망주 육성을 해야지!" 대놓고 비난했고, 국내 축구 인사들 대부분 '쓸모없는 평가전은 그만 하고 단체 합숙하며 조직력을 키워야 한다'는 식으로 비난을 했다.[13]
당시 히딩크를 옹호한 사람은 훗날 붉은 악마의 중추로 활약한 극소수 축구 팬들과, 당시 기술위원장이였던 이용수, 프랑스에서 히딩크에게 거하게 털렸던 차범근 전 국가대표팀 감독, 그리고 정몽준 축협 회장과 축협 인사들 정도였다.
이런 온갖 비난과 헐뜯음 속에서도 그는 묵묵히 하던 일을 다했고 열심히 선수들을 물색하고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체코에 대패했을 땐 도리어 떳떳하게 "강호에게 크게 진다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다. 당신들은 대한민국 축구를 굉장히 수준 높다고 멋대로 착각하고 있다."며 씹어 주었고, 진실을 말해서인지 언론에겐 틈만 나면 비난받곤 했다.
7. 9월 평가전
7.1. 나이지리아전 (2001/9/13, 대전 월드컵 경기장): '''2:2 무승부'''
7.2. 나이지리아전 (2001/9/16,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 '''2:1 승리'''
최은성의 A매치 데뷔전을 이동국이 버저비터 결승골로 빛내주었다.
8. 11월 평가전
8.1. 세네갈전 (2001/11/8, 전주 월드컵 경기장): '''0:1 패배'''
8.2. 크로아티아전 (2001/11/10, 서울 월드컵 경기장): '''2:0 승리'''
8.3. 크로아티아전 (2001/11/13, 광주 월드컵 경기장): '''1:1 무승부'''
9. 12월 평가전
9.1. 미국전 (2001/12/9, 제주 월드컵 경기장): '''1:0 승리'''
12월에 있었던 조추첨에서 본선 상대가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로 결정되고 일정이 변경되었는데 2월에 예정되었던 칼스버그컵 참가를 취소하고 3월 유럽 전지훈련때 계획 중이던 포르투갈전도 당연히 취소하였다. 하지만 12월 9일 제주월드컵경기장 개장 기념으로 미국과 평가전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대로 치렀다. 아마 시간이 일주일 남짓 있었기 때문에 팀 구하기가 여의치 않고 어차피 2002년 골드컵에서 맞붙어야 하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한듯.
이 경기는 칼스버그컵 때 윙병지 모드를 보여준 김병지가 오랜만에 국가대표팀으로 돌아와 선발 풀타임을 뛰었다.
선발 라인업은 김병지-최진철,유상철,김상식-이을용,박지성,김남일,송종국-최태욱,황선홍,이천수였다. 눈여겨 볼것은 유상철이 중앙수비수로 자리를 옮기고 계속 중앙수비수로 뛰었던 송종국이 우측 윙백으로 옮긴것이다.
경기는 전반 20분, 수비수로 나왔던 유상철이 이천수의 크로스를 받아 헤딩으로 선취골을 넣었고 이것을 잘 지켜 1:0으로 승리하였다. 다만 여태 그래왔듯이 후반 중반을 넘어가면서 선수들의 체력이 눈에 보일 정도로 저하되었고 미국에 집중적으로 공격당했다. 파워 프로그램을 통한 체력 향상은 2002년 골드컵 때 처음 실시했기 때문에 이 경기가 그동안 대한민국의 체력 상태를 보여준 마지막 경기였다.
[1] 모로코 국내 리그에서 선발된 선수들로 구성되었다.[2] 덴마크 국가대표가 아닌 덴마크 리그 선발팀이었다.[3] 이 시절 박진섭은 올대뿐 아니라 국가대표에서도 주전을 차지하고 있었다.[4] 하지만 이후에 히딩크 감독의 말로는 그냥 이운재가 더 잘해서 뽑힌 거라고 한다. 월드컵 직전에 두사람의 기량이 너무 막상막하여서 고민하다가, 결국 컨디션이 비교적 좋은 이운재가 주전으로 출전하게 되었고, 이를 김병지에게 알리면서도 상당히 미안해했다고 한다.[5] 스포츠조선.[6] 모로코 국내 리그에서 선발된 선수들로 구성되었다.[7] 덴마크 국가대표가 아닌 덴마크 리그 선발팀이었다.[8] 9월에야 비로소 사면(...)되었다.[9] 하지만 서덕규는 박지성과 달리 마지막까지 대표팀에서 생존하지 못했다.[10] 참고로 당시 호주는 월드컵 예선에서 통가 22:0, 아메리칸 사모아를 '''31:0'''으로 이기는 등 기록적인 점수차를 세웠다. 특히 아메리카 사모아와의 경기는 현재까지도 A매치 최고 점수 기록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결국 플레이오프에서 나름 강팀인 우루과이를 만나 탈락한다.[11] 체코 축구 국가대표팀은 2017년에도 피파 랭킹이 20위권 안에 드는 강력한 팀이다. 이탈리아나 독일 같은 팀도 쉽게 못 넘어간다.[12] 코미디언이 무슨 자격으로 축구를 평가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주일은 학창시절 축구선수 출신이었고 많은 축구인과 막역한 관계를 지닐 정도로 축구에 매우 관심이 많은 열성 축구팬이었다. 타계 직전에 열린 2002 월드컵도 휠체어를 타고 직관했을 정도. 참고로 그와 가장 가까웠던 축구인은 춘천고 동창생이자 1980년대 명감독으로 명성을 떨친 박종환 감독.[13] 이 때에 차범근과 더불어 한국 축구 전설 및 화성시 송산동과 안용중학교를 한국 축구의 성지급으로 만드는 박지성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