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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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인 특무대의 대장을 맡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관동군의 헌병 소속으로서 항일 무장세력을 토벌하다가 광복 이후에도 출세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는 점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데 앞장섰던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의 군인 버전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2. 일생
2.1. 일제강점기 및 광복 직후
김창룡은 1916년 7월 18일[3]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 인상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그리 풍족하지 않았다. 10살이 되던 해 덕성사립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영흥공립농잠실습학교에서 누에를 키우고 실을 뽑는 기술을 배우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직물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2년 만에 회사를 나와서 만주철도 신경역 직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2년 만에 철도 직원을 그만두고 일본인의 추천을 받아 만주 주둔 일본 헌병부대 군속[4] 으로 일하게 된다. 3년 동안 군속으로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41년 4월 일본 관동군 소속 헌병 교습소에 입소했고, 교습소를 수료한 후 1941년 10월 일본군 헌병 보조원이 됐다.
그의 업무는 소련과 만주국 국경지역에서 항일 인사를 감시하는 일을 맡았다. 사복을 입고 주요 인물들을 탐색하고 접근하는 것이 주로 그가 한 일이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임무 수행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예를 들면 중국 공산당의 거물 왕진리(王近禮)를 체포할 때 그는 중국인 거지로 가장해 왕진리의 가게 종업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왕진리의 신임을 사기 위해 경찰서 유치장을 7번이나 드나들었다. 덕분에 왕진리와 주변 중국인들조차 그를 ''''진짜 중국 사람''''으로 인식했다.
일제는 그의 활약으로 왕진리를 검거했을 뿐만 아니라 왕진리와 관련된 9개 항일 지하조직을 색출하고 50여 명을 검거했다. 이때가 1943년이었다. 그의 활약에 탄복한 일제는 바로 헌병 오장(하사)으로 특진시켰다. 그 이후에도 그는 1943년 9월부터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까지 '''불과 2년 사이에 무려 50여 개의 항일 조직을 적발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사복으로 갈아입고 바로 고향인 영흥으로 돌아왔다. 이때 영흥에서 소련군에게 친일부역 혐의로 체포당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했고, 이후 다른 지역을 전전하다 다시 친일 혐의로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거듭 탈출에 성공했다고 한다. 2차례 친일파로 체포됐기에 그는 한반도 이북지역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38선을 넘어 월남해 서울로 왔다. 도시전설에 의하면 하도 얻어터져서 폐인이 된 모습으로 넘어와 미군 경비병들이 놀랐다고 한다.
서울에서도 그는 마땅한 일을 찾지 못해 전전하던 중 마침 만주 일본군에서 안면이 있던 박기병을 만나게 된다. 박기병은 당시 3연대에서 소대장을 맡고 있었다. 박기병은 그를 국방경비대 5연대 일반 사병으로 입대시켜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병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다시 박기병을 찾아간 그는 3연대에서 정보하사관으로 복무했다. 그러던 중 만주군 대위 출신인 김백일의 추천으로 1947년 1월 조선경비사관학교[5] 3기로 입교해 그해 4월 소위로 임관했다.
이런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인물이 광복군 출신의 이성가 제1연대장(당시 소령)이었다. 우익 성향의 이성가는 중국에서 국민혁명군 소속일 때도 남의사에서 활동하며 곳곳에 암약하는 공산주의자를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했다. 그는 제1연대 내의 공산주의자를 솎아내기 위해 김창룡을 연대 정보주임 보좌관으로 발탁하고 정보소대 지휘를 맡긴다. 여기서 김창룡은 그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이병주 소령[6] 을 비롯한 연대 내 좌익 장병들을 대거 색출해냈다. 이후 여순 반란 사건을 계기로 숙군 작업이 본격화되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면서 김창룡에게는 출세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투철한 반공 이미지를 보이기 위한 오버스러운 행동에 대한 일화도 많다. 1947년 5월, 당시 서울에는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 경비병력으로 소수의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때 김창룡은 한 소련 군인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발견했다. 김창룡은 격투 끝에 소련 군인을 제압하고 필름을 압수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련은 난처해졌다. 미국은 소련 측에게 '정탐을 하러 왔느냐'고 따졌고, 김창룡의 이 행동은 군 수뇌부의 주목을 받아서 1948년 1월 중위로 진급하게 된다.
2.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2.2.1. 여순사건 당시 숙군 및 김구 암살 관여
이후 김창룡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대위로 진급했다. 8월 말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됐다. 그러던 중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여순사건 직후 이승만은 대대적인 숙군[7] 을 지시했다. 1946년 국군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실 군대의 '진입장벽'이 낮았다. 영어 한 마디만 할 줄 알면 장교가 될 수 있었고, 추천서 한 장이면 요직에도 손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당장 군대를 육성하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일본군 출신들도 쉽게 군에 들어갈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좌익 계열도 어렵지 않게 군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으로 14연대가 통째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승만은 군법무관이었던 김완용에게 "한 달 내로 빨갱이들을 다 잡아 죽이고 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때 김창룡이 실무자로 있던 육군 정보국 3과인 방첩과가 나섰다. 1948년 11월 11일 김창룡과 정보 요원들은 '''박정희 당시 소령을 체포하고 심문했다. 박정희가 체포됨으로써 군대 내 세력을 확장하던 남조선로동당 조직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49년 3월까지 방첩과는 불과 4개월 동안 1,500명에 달하는 이를 숙청했다. 당시 군 병력의 3%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실적 쌓기식 숙청이 됐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대부분의 경우 증거보다 자백을 받아내는 식으로 심문을 했고, 고문이 혹독하게 가해졌다.''' 자백을 한 뒤에는 연루된 좌익 인물을 대라고 또다시 고문이 이어졌다. 이 같은 방식으로 애매하게 숙청되는 인물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최남근 중령은 남한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동지들을 규합했다는 죄명이 씌워졌다. 최남근은 처형당할 때 애국가를 부르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자신이 억울하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항변한 것이다.
당시 숙군 작업으로 처형된 사람 가운데서는 이처럼 애국가를 부르거나,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거나,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외치면서 죽어간 사람도 있었다. 이후에도 숙군은 이어져 1949년 7월까지 4,749명이 처벌받았다. 숙군 과정에서 짧은 시간 안에 뛰어난 실적을 올린 김창룡은 1949년 초 소령으로 승진하고, 6월 육군 방첩대(CIC#s-1) 대장으로 임명되고, 7월 중령으로 승진했다. 불과 2년 3개월 만에 소위에서 중령까지 올라간 것이다.
김창룡은 애먼 사람만 빨갱이 딱지를 붙여 때려잡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남용한 치졸하기 그지없는 자였다. 1946년 김창룡이 이리 소재 3연대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할 당시 소대장은 일본군 하사관 출신 '''김도영'''이었는데, 어느 날 김창룡에게 야간 순찰 후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김창룡이 이를 어기자 김도영 소대장은 김창룡을 꾸짖으며 지휘봉으로 몇 차례 때렸다. 이 일로 김도영에 대한 앙심을 품은 김창룡은 육사 3기로 임관한 후 특무대 소속 장교로 근무하던 중 1949년 제주 4.3 사건 토벌 시 6연대 1대대장으로 출전한 김도영이 제주도 내 좌익 세력과 내통하여 토벌을 소홀히 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특무대에 무려 6개월 간 구금시킨 채 혹독하게 취조했지만 혐의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며 간신히 풀려났다. 이후 6.25 전쟁 도중에 부산지구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이던 김창룡이 부산 제2훈련소 부소장 김도영과 마주친 자리에서 '''"당신은 왜 이북으로 안가고 아직 여기 있느냐?"''' 라며 조롱하자 격분한 김도영은 권총을 뽑아들고 저 놈을 죽이겠다며 달려들어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면서 둘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김창룡은 또다시 논산훈련소 소장이던 김도영이 야당 인사인 신익희의 사주를 받아 훈련병들을 규합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고 모함하면서 그를 4개월 동안 구속수사 했고, 또 다시 무혐의로 석방되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장성 진급에서 미끄러진 김도영은 김창룡이 죽을 때까지 약 2년간 무보직으로 군생활을 하는 고역을 겪어야 했다.
또한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한 배후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다.# 안두희는 김구를 살해한 직후 경교장 주위에 있던 헌병들에게 체포됐다. 체포된 안두희가 끌려간 곳이 김창룡 앞이었다. 이때 김창룡은 안두희에게 '''"안 의사, 수고하셨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창룡은 이후 안두희를 끊임없이 챙겼다. 감옥에 있을 때 좋은 음식을 대접했고, 책 쓰는 것을 도와줬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김창룡은 안두희를 형무소에서 빼내 주었다. 안두희가 소위로 다시 임관할 때부터 대령으로 제대할 때까지 김창룡은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그래서 김구 암살의 배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2.2.2. 양민학살 및 간첩 조작
1950년 9월 28일, 이승만은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서울을 수복하자마자 김창룡을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합동수사본부는 북한군이 수도권 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당시 북한군에 협조한 '부역자'를 찾아내고 처벌하는 무시무시한 권한을 가졌다. 그뿐이 아니라 합동수사본부장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정치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1950년 10월 초부터 1951년 5월까지 김창룡은 숙군 때와 마찬가지로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부역자를 처벌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무부 치안국 자료에 따르면 1950년 말까지 검거된 인원만 15만 3,825명, 자수한 인원 39만 7,090명으로 '''총 55만 915명이 부역 혐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 가운데 서울에서만 1,298명이 처형됐다. '''그러나 진정으로 북한과 협조한 사람들은 이미 북한군과 함께 북으로 올라가고 없었다.'''
이에 따라 실적을 중시한 김창룡의 부역자 처벌은 여론과 정치권의 거센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합동수사본부는 어느 법에도 설치 근거가 없었다. 결국 합동수사본부는 1951년 5월 23일 해체됐지만, 김창룡은 이 시기 이승만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다. 김창룡은 1950년 10월 말에 대령으로 다시 승진했으며, 1951년 5월 15일 육군 특무부대[8] 대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35세였다.
이렇듯 엄청난 출세와 이승만의 신임을 얻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숙군과 학살, 부역자 처벌로 대부분의 좌익들을 소탕했을 뿐 아니라, 남아있던 좌익들도 북한으로 넘어가버려 이제 남한 내 좌익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됐다. 빨갱이를 때려잡을 기회가 줄어든 것이다. 그는 이 상황에서 기발한 돌파구를 마련한다. 이를 테면 '빨갱이가 없으면, 빨갱이를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1951년 한 무리의 청년들이 상복을 입은 채 관을 메고 지리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특무부 대장 김창룡은 이들이 관 속에 총기를 숨겨 놓고 지리산 빨치산에게 가는 것을 붙잡았다고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기분이 좋아진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여러분들, 김창룡 대령을 자식처럼 사랑해 주세요"'''라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그런 뒤 이승만은 국무회의장으로 김창룡을 불러들인 뒤 노획한 총기를 전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김창룡이 벌인 숱한 조작 사건 중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최초의 '빨갱이 만들기 작전'은 1950년 10월 그가 군·검·경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취임한 직후 일어났다. '''인민군 패잔병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를 삼각산 뒤편에 있던 주민들에게 쥐여주고 이들을 공산분자로 몰았고,''' 이들이 서울을 습격하려 한다고 꾸며 모두 죽인 사건이다. 이것이 소위 '삼각산 사건'이라 한다.
1952년 5월 24일 무장 북한군으로 보이는 일당이 임시수도 부산 금정산에 나타나 총격을 가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국군과 미군 병력이 밀집해 있는 임시수도 부산에 북한군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상 말이 안 되었는데, 사실 이 또한 김창룡이 조작한 사건이었다. 당시 김창룡은 대구형무소에 있는 무기수, 중형수들을 상대로 '큰 일을 치르고 나면 석방해 주겠다'라고 제안했다. 김창룡은 이 제안에 따른 형무소 재소자 7명을 북한군으로 꾸민 다음 부산 금정산에서 총격을 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이들 7명은 순식간에 사살당했다.
하지만 김창룡의 공작에 힘입어 이승만은 다음날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5월 26일 야당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통째로 납치한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켰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은 재집권에 성공한다. 그런데 김창룡은 자신이 이 사건을 직접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김창룡의 직속상관 김종평(육군 정보국장)이 그가 부산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았다. 결국 공은 원용덕 헌병사령관 등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공을 빼앗긴 김창룡은 김종평에 원한을 품고 있었고 이는 또 다른 조작사건으로 만들어진다.
1953년 김창룡은 '동해안 반란 사건'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동해안 속초에 있는 1군단에 이승만이 방문하면, 이승만을 저격하고 김종평 육군 정보국장이 군 병력 1000명을 동원해 부산을 장악해 정부 요인을 처단한 다음 조봉암 국회부의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엄청난 내용이었다. 나중에 군법회의에서 여러 증인들이 김창룡의 조작임을 증언하면서 사건은 커지지 않았지만, 김종평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53년 5월 김창룡은 육군 준장이 됐고, 이때부터 김창룡은 간첩 조작과 함께 권력 투쟁에 직접 개입하게 된다.
가장 먼저 타겟이 된 이는 '정국은'이라는 사람이었다. 당시 가장 영향력이 강하던 연합신문과 동양통신의 양사 편집국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정국은은 이범석, 원용덕 등과 함께 이승만 정권의 외곽 세력인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 출신이었다. 김창룡은 족청과 대립 관계에 있었고, 김창룡은 이러한 족청을 밀어내기 위해 1953년 8월 31일 정국은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정국은이 체포된 지 10일 만에 내각에서 족청 계열 장관 3명이 동시에 파면되고, 곧 자유당에서 족청 계열 거물인사 8명이 제명됐다. 김창룡의 반대 세력이었던 족청은 순식간에 권력에서 이탈했다.
족청을 제거한 김창룡은 다음 타깃으로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10] 를 삼았다. 김창룡은 이승만에게 '오제도는 빨갱이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이 사실을 듣자 오제도 또한 '아닙니다. 김창룡이 빨갱입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래서 김창룡의 오제도 검사 제거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박정희 역시 견제의 대상이었다. 1953년 박정희가 미국 유학을 떠나려 할 때 김창룡이 막았다. 당시 미국 유학을 다녀오면 그 이력이 쌓여 군대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있을 때 그를 잡아내고 심문한 사람이 바로 김창룡이었다. 김창룡으로서는 박정희의 출세를 막아야만 했다. 이렇듯 김창룡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일권과 상관인 강문봉 중장조차 그를 감당하지 못했다.
1954년 김창룡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논산훈련소장 김도영이 야당 국회의원 신익희의 사주를 받아 훈련병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구속하기도 했다. 김도영은 4개월 뒤 풀려났지만, 김창룡 때문에 번번이 승진의 기회에서 누락됐고, 변변찮은 보직도 맡지 못했다.
1955년 1월 심지어 김창룡은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 당시 김창룡을 사람들은 ''''이승만의 오른팔', '이승만의 양자''''라고 불렸다.
1955년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 역시 김창룡의 작품이었다. 김창룡은 1955년 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나재하, 김병호, 민영수[11] , 김재호, 김익중, 이범륜, 유성연, 김동혁, 김동훈에게 '이종태'라는 청년을 접근시켰다. 그는 이승만을 비판하면서 나재하 등에게 '이대로는 안 된다. 도탄에 빠진 국민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에 그들은 이종태에게 1955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 때 수류탄을 터뜨려 이승만을 죽여달라고 부탁했으며 수류탄 등을 지원했다. 결국 당연하게도 이 음모는 거사 직전 특무대에 발각됐다.[12]
그리고 이 사건을 납북된 조소앙이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식으로 엮어서 한때 조소앙이 몸 담았던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정치인들도 제거하려 했다.[13] 이 외에도 김수임 간첩사건 등 숱한 사건이 그의 손에 의해 조작돼 많은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55년 10월 김창룡의 횡포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정일권과 강문봉은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는 진해에 직접 찾아갔다. 그들은 "김창룡을 다른 부대로 보내거나 차라리 미국 유학을 보내 달라"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요청을 거부한다. 이 소식을 들은 김창룡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김창룡은 때마침 터진 원면[14] 비리를 활용하려 했다. 당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원면을 받은 장성들이 이를 시장에 되팔아 1억 원 이상의 부당이익을 취해 자유당 고위층에 상납했다고 한다. 김창룡은 이를 가지고 자신을 탄핵한 정일권, 강문봉 등 군 장성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이기붕조차 김창룡에게 '그만 들춰라'고 경고했지만 김창룡은 멈추지 않았다.
1955년 11월, 일제 경찰 출신으로 고문의 달인인 노덕술 헌병사령부 범죄수사단장(중령)이 파면됐다. 노덕술 또한 김창룡과 마찬가지로 이승만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군수물자를 빼돌린 정황이 포착됐고,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면서 파면되고 말았다. 이 사건도 김창룡이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 있는 노덕술을 제거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2.2.3. 권력투쟁 끝에 암살당하다
결국 1956년 1월 30일 아침, 김창룡은 출근하던 도중 골목길에서 특무대 출신 4명(허태영 대령, 신초식, 송용고, 이유회)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특히 이 가운데 주범인 허태영은 1950년 6.25 전쟁 때 김창룡이 방첩대(CIC#s-1) 대장을 맡고 있는 동안 특무대 마산파견대를 이끌었다. 이후 특무대 대전파견대장을 지냈을 정도로 김창룡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허태영은 법정 진술에서 김창룡을 죽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허태영은 이유회와 함께 1957년 9월 24일 대구 육군정보학교 야외훈련장에서 총살됐다. 총을 맞고 쓰러질 때까지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이승만은 김창룡의 죽음을 보고 받은 그날로 중장으로 추서했다. 사건 발생 4일 후인 1956년 2월 3일, 국군 최초로 국군장이 열렸다. 그날 하루 육해공군 전 군부대는 조기를 게양했고 장병들의 음주와 가무도 금지됐다. 김구가 죽었을 때 한 번도 조문하지 않았던 이승만은 김창룡 영전에 3번이나 조문하면서 진심으로 애통해했다. '''이승만은 조사에서 "김 중장은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것이며 충령의 공을 세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김창룡은 평소 개인의 영달을 위해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잡아들였으니 '''공산당 1명에 무고한 양민 10명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이 그의 손에 희생되었다.''' 김창룡이 취급한 사건들도 전부가 협박 공갈로 자백을 받은 것으로 '''대부분 허위 날조됐거나 침소봉대된 것들'''이었다. 한편 뒤켠에서는 살인, 약탈, 협박 등으로 군수품을 빼돌리고 밀수를 하는 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김창룡이 그간 모은 재산만 '''20억 원'''이다."
3. 평가
한 번은 김창룡이 잡아들인 수백 명의 영등포 특별부대 장병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사건을 담당한 이운기 법무관은 이들의 진술서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아 이상하다고 내게 문의해 왔다. 알아보니 김창룡이 부평을 순찰하는데 술집에서 조선인민군 노래가 울려 퍼져 즉각 술집을 포위해 잡아들이고 보니 특별부대 장병들이었다. 중대장이 무조건 한 곡씩 노래를 하라고 시켰는데 한 병사가 노래를 못한다고 극구 사양하면서 "아는 노래는 월남하기 전 이북에서 배운 노래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하라"고 해 생긴 소란이었다. 김창룡은 이들을 잡아들여 "친한 놈 이름을 대라"고 족쳤는데 그래서 수백 명이 검거됐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책임질 테니 무조건 무죄로 상신하라"고 했는데, 이 일로 이운기 법무관은 김창룡으로부터 '''"너도 빨갱이다. 꼭 잡아넣겠다"는 위협을 받았고''' 나(백선엽)와도 몇 달간 신경전을 폈다.
- 『실록 지리산』 중에서.
여순사건의 사례 때문에 숙군은 꼭 필요한 일이었으며, 당시 정황상 어느 정도 부작용을 감수하고 빨리 끝낼 수밖에 없었으나, 이 과정에 김창룡 개인의 권력욕이 개입해 '''억울한 피해자를 무수히 양산했다.''' 그래서 국군 원로들은 김창룡을 매우 싫어한다. 권력을 남용하고 군의 지휘계통을 무시한 데다 숙군 과정에서는 지나친 무리수로 억울한 희생자를 많이 만든 탓에 평가가 아주 좋지 않다."김창룡은 직속상관인 참모총장이나 국방부장관을 무시하고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따위의 월권을 자행'''했다. 비위사실의 보고내용도 사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김창룡은 정보를 군사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세력 확장에 이용'''했다. 그는 또 '''지휘관 사이를 이간시켜 장성들을 분열'''시켰다. 특무대는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군 지휘관들을 감시하는 데 열중'''했다. 특무대는 군의 암적 존재다."
특이점으로 첩을 둬가며 호의호식하는 고관들은 -> 감찰에 들어가 이삭 훑듯 여죄를 밝혀내가며 잡았다고 한다. 4.19 후 열린 재판에서 축첩, 재산 문제가 얽힌 고관 수가 당초 예상보다 적었던 건, 김창룡의 기여도(?)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뉴라이트 등 극우세력은 단순히 이 사람을 좋게 평가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그냥 찬양한다. 그의 무덤에 매 해 꽃도 바치고, 김창룡을 욕하는 건 종북 행위라고 우기는데, 심지어는 2011년 그의 전기를 출간하기도 했다.#
축구계 원로들 중에도 이 사람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들이 많다.[15] 네이트 김현회 칼럼에 축구대회에서 횡포를 부린 일화들이 소개된 바 있다.#
4. 대중 매체에서
- 2006년작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 등장하는 박창주는 이 인물에서 일부 설정을 따와서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 1998년에 쓴 이인화의 박정희 미화 소설 <인간의 길>에서는 악마사촌 고문 기술자로 나온다.
-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배우 김기일이, 1989년작 제2공화국에서는 백범 역 전문 배우 이영후가 김창룡으로 나왔다. 박정희를 전화기로 전기고문하는 장면 및 이후 박정희가 중요한 순간마다 그 광경을 떠올리는 장면이 묘사된다. 1993년작 제3공화국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김창룡은 중견배우 김영인이 역할을 맡아 연기했다.
- 1995년작 KBS 대하드라마 <김구>에선 배우 서상익이 연기했는데, 제1화 및 16화에서 안두희를 만나 "백범 밑에는 빨갱이들이 많아요. 큰 나무를 쓰러뜨려야 그 밑에 숨어 있는 빨갱이들을 자연스럽게 없앨 수 있다"는 대사를 해서 백범 암살의 배후라는 설정으로 나왔다. 이에 장녀 김미원이 명예훼손이라 주장하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걸었으나 1996년 1심, 1997년 2심 및 상고심에서도 패소 판결을 받았다.(대법원 97다19038)
- 선우휘의 '추적의 피날레'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악역 장군이 김창룡을 모델로 하고 있다. 대북 첩보를 자신의 권력장악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인물인데. 이 인물도 출근하다가 암살당했다.
5. 기타
- 원래 일제시대 스파이 양성학교인 나카노 학교를 나왔다는 말이 있다.#
- 안양 관악산 묘역에 있던 그의 비문은 이병도가 썼다. 이병도는 조문에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라고 적기도 했다. 비석은 후손들이 1998년 이장 당시 폐가 비스무리한 곳에 거의 버린 채로 방치했고, 이것을 정지환 기자가 충남 금산군 추부면 승마장 구석에서 찾아내 특종으로 보도하였다.
- 죽고 나서 안양 관악산에 묻혔다가 1998년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이에 대해 찬반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대전현충원 이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김창룡이 '반공투사'였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극찬하고 칭송했다. 그의 유족들도 공산화를 막기 위해 제일 공헌을 많이 했다. 민간인을 많이 죽였단 것은 헛소문이고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공산화를 막기 위해 제일 공헌한 분'이란 발언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뉴데일리에서는 김창룡의 행적을 뻥튀기해서 선전하고 있다. 2014년 현충일에는 진보단체인 서울의 소리에서 김창룡 묘 파묘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 훗날 김창룡의 아들이 육사에 지원했는데, 생긴 게 아버지를 쏙 빼닮아 숙군을 경험한 당시 육사 면접관들이 혼비백산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김창룡의 아들은 면접에서 탈락했다.
- 한반도에서 최초로 축구 야간경기를 연 기록도 갖고 있다. 1954년 전국체전에서 있었던 일인데, 본인의 팀이 유리한 상황에서 경기종료 3분을 앞두고 그라운드가 어두워지자 스무 대의 지프차를 불러 라이트를 켜고 경기를 속행시킨게 시초였다. 그런데 이마저도 그라운드를 제대로 비추지 못했고 결국 심판이 도망가는 바람에 재경기를 치러야 했다. 위 문단의 김현회 칼럼 참고.
- 그가 죽은 이후에 그의 가족들은 브라질로 이민을 가서 브라질에서 사업을 하고 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