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역사
1. 개요
우크라이나 역사는 키예프 공국에서 시작되어 현대의 우크라이나 독립(1991년), 그리고 오렌지혁명과 유로마이단에 대해 설명한다.
2. 고대
고대 그리스인 역사가들이 보리스테네스 강이라고 불렀던 오늘날의 드네프르 강 유역은 동유럽의 대표 평원지대이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기원전 330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종족들이 나타나 모계 사회를 가진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정착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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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세기 무렵 스키타이족이 이 지역의 원주민 킴메르족을 몰아내고 정착했다. 때마침 고대 그리스인들도 기원전 8세기부터 흑해 연안에 여러 식민 도시[1] 들을 건설하면서 이 지역과 교역을 하게 되고, 보리스테네스 강 유역의 정착한 스키타이인들에 대한 역사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흑해 해안가에 식민 도시들을 건설한 그리스인들은 이들에게 올리브와 포도주가 담긴 항아리를 팔고 밀을 구입해서 식량이 부족했던 아테네에 수출하였다. 그리스산 물산은 스키타이족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는지 오늘날의 키예프, 하리코프, 폴타바 등에서 그리스 도자기들과 그리스 드라크마 화폐가 발굴된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 보리스테네스 강 유역의 스키타이인이 노예로 붙잡혀 아테네로 팔려가는 일도 생겼는데, 아테네인들은 이들 스키타이인들이 유달리 피부가 희다고 기록했다.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스키타이족이 사르마티아인, 알란인에게 밀려나 몰락하면서 힘의 균형이 깨지고 그리스인들이 흑해에 세운 식민 도시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흑해의 그리스인들은 보스포루스 왕국을 중심으로 힘을 합쳐 흑해 무역을 지속하고 유목민들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서기 3세기 무렵에는 드네프르 강 일대에는 새로이 고트족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비옥한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세력을 키운 고트족이었지만, 새로이 아시아 초원에서 나타난 훈족의 침략을 받자 이들 대다수는 다시 드네프르 강 평야를 버리고 난민 혹은 침략자가 되어 당시 쇠퇴기에 접어들었던 로마 제국으로 이동한다. 훈족 역시 전염병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버리자 공백지가 되다시피 한 드네프르 강 유역에 '''슬라브족'''들이 대거 이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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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세기 서로마 제국 쇠퇴와 멸망 이후 게르만족과 사르마티아인, 알란족이 서쪽으로 이주하자 고대 슬라브족인 베네디족(웬드족), 스클라베니족, 안테스족이 게르만족의 빈자리를 점거하며 중유럽과 남유럽으로 진출하였다. 스클라베니족은 '''슬라브'''라는 이름의 기원의 된다. 드네스트르 강과 드니프로 강 유역과 아조프 해 연안에 이르는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땅에는 얀테스족이 알란인, 사르마트족과 섞여 살았다. 6세기의 동로마 제국 역사가인 프로코피우스는 아바르족의 지배를 받는 슬라브족들은 외국인들에게 친절하고 이방인 손님들을 환대하며, 성격이 유쾌하다고 기록했다.
3. 중세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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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말부터 이 지역을 장악한 튀르크계 하자르 칸국은 이전에 우크라이나에 들어왔던 훈족이나 아바르족과는 다르게 일방적인 파괴와 노예화는 지양하고, 슬라브족들과 비교적 평화롭게 교역하였다. 이들의 전임자였던 아바르족들이 기회만 되면 동로마 제국에 슬라브족들을 이끌고 쳐들어갔던 것과 다르게 하자르 칸국은 흑해와 카스피해의 무역 거점들을 안전하게 유지하는데 신경을 썼다. 흑해 연안과 카스피해 연안은 2세기 가까이 팍스 하자리카를 누렸다. 하자르 칸국의 지배를 받게 된 슬라브인들은 꿀과 밀랍으로 세금을 납부했다. 하자르 칸국의 지배층인 아크 하자르인들은 혈통상으로는 슬라브인과 거의 동화되어 밝은 색의 머리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유대교로 개종했다.
모든 슬라브가 카간을 자칭한것은 아니지만 카간이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던 930년경 전까지는 확실히 카간이라 칭하는 슬라브족들이 아랍과 페르시아 사서에 남아 있다. 바이킹들의 여러 지역에 흩어지면서 무역,약탈 기지들을 개척했고, 이러한 과정 중에 바이킹들의 분파인 바랑인들이 세운 루스 카간국이 노브고로드에서 키예프로 거점을 옮기면서 키예프 공국이 나타났다.
3.1. 키예프 공국
바랑인 올레그가 882년 슬라브인들과 세운 첫 국가인 키예프 공국이 우크라이나의 시초다. 이 키예프 공국은 러시아의 시초이기도 하므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본래 한 뿌리다.''' 동로마의 포르피로게니투스 황제 시절 키예프 루스인들은 겨울에 벌목을 해서 만든 목재로 작은 배를 만들어 각기 특산물을 가지고 키예프로 집결한 후, 드니프르 강을 따라 함께 흑해로 내려간다고 했다. 키예프에서 집결했다가 한꺼번에 내려가는 이유는 페체네그족의 약탈과 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바랑인 스뱌토슬라프가 이끄는 키예프 공국이 10세기 사이에 하자르 칸국을 쳐부수고 장악하던 흑해와 북유럽을 잇는 하천 교역로를 정복하였다.
이 시기, 키예프 루스를 구성하던 공국들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 바실리우스 2세 재위 시절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1세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교회를 받아들인다. 이는 유대교를 믿은 하자르 칸국이나 이슬람을 믿는 불가르족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2] 같은 이웃 경쟁자들과 키예프 공국을 차별하려는 의도였다. 동로마 제국의 슬라브족 출신 선교사 키릴 형제가 대 모라비아 왕국과 불가리아 제1제국에 선교를 하면서 만든 키릴 문자가 나중에 키예프 루스에도 도입된다. 이 시기의 키예프 공국은 드니프로 강을 중심으로 스칸디아비아와 흑해를 잇는 교역을 바탕으로 상공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한 것은 물론, 압바스 왕조와 동로마 제국에서 직수입한 문물을 통해서 서유럽보다 더 발전된 문화를 자랑했었다. 불가리아어를 바탕으로 한 교회 슬라브어를 바탕으로 중세 초부터 중세 말까지 러시아의 연대기가 작성되었다.
그러나 키예프 공국은 체계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이나 행정 시스템이 잡혀있지 않았으며 안정되지 않은 왕위 계승권 문제로 잦은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앙집권은커녕 왕위 계승권이 안정되지 않았기에 왕위 계승권자들이 서로 다른 도시를 다스리며 내전을 벌이는 일이 흔했고, 흑해 연안의 쿠만인들과 같은 유목민들과 지속적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과정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가 없었다. 종종 야로슬라프 1세가 페체네그족 침략자들을 궤멸시키거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같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타나 키예프 루스를 재결합할 때도 있었지만, 흑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잇는 교역로가 쇠퇴하면서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키예프가 위치한 드니프로 강 일대의 '''비옥한 흑토 지대는 키예프 공국이 강성하던 당시에는 플러스 요인이었겠지만, 탁 트인 평야 지대인 특성상 유목민으로부터 방어하기 힘든 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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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이후 아크레, 야파 같은 십자군 도시들과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직거래를 시작하자 흑해 무역이 쇠퇴하고 키예프 공국은 전사집단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줄 수 없어 군사력이 약화되었다. 13세기 몽골 제국이 기운 키예프 루스를 침략하자마자 키예프를 비롯한 도시 대부분이 말 그대로 지워져버리고 말았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50만명 이상의 루스인들이 몽골인의 침략 과정에서 살해당한 것으로 추청된다.[3] 멀리 북쪽의 노브고로드 공국 이외의 주요 키예프 공국 도시들은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4. 중세
4.1.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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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3년부터 개시된 몽골의 침략 결과 수즈달, 리야진(랴잔), 키예프 등이 차례로 함락되면서 키예프 공국은 멸망했다. 키예르 루스 영토였던 곳 대다수는 몽골과 투르크계 타타르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타타르의 멍에라는 암울한 지배기에 놓인다. 타타르인의 멍에라고 부르는 이 시기 당시 모스크바 대공국 관리들의 주 일과 중에 하나는 세금을 늦게 내는 농민들을 거꾸로 묶어놓고 때리는 일이었다고 한다. 모스크바 공국의 중흥을 이끈 이반 1세의 '깔리타(돈주머니)'라는 별명이 나온 배경이 이와 같았다.
한편, 남서부 갈리치아, 볼히니아 지역은 몽골의 침략에 의한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볼히니아 지방은 카르파티아 산맥 기슭에서부터 벨라루스 인근까지 뻗쳐 있었다. 그보다 작은 지방인 갈리치아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북부 구릉지대를 따라 위치해 있었으며 과거 키예프 공국의 국경 지대에 해당했다. 이 지역은 공후들보다는 지주들의 힘이 더 막강했으며 폴란드와 헝가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직 볼히니아와 갈리치아가 키예프 공국에 속하던 시절인 1187년에 헝가리 왕이 이 지역을 정복하려다 실패했으며, 10년 후 볼히니아의 공후 로만 므스티슬라비치가 갈리치아를 합병하여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통일했다. 로만은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3세의 요청을 받고 쿠만족들과 싸워 연거푸 대승을 거두며 1201년 발칸 반도에서 쿠만인들을 축출해내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앙겔로스 왕조의 공주와 결혼한다. 로만은 1205년 폴란드인의 매복 기습을 받고 전사했다. 로만이 죽은 당시 큰 아들 다닐로는 겨우 세 살이었고 막내아들 바실코는 돌잡이 아기였다.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헝가리 국왕 안드라슈의 간섭을 받으며 다시 분열되었다.[4]
로만의 아들 다닐로는 이 와중에 이웃 지역 공후들의 궁정에서 떠돌아다녀야 했다. 다닐로는 이 와중에 일반 루테니아인 농부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현실 감각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과거 로만에게 충성했던 신하들에게 격려를 받으면서 자라났다. 다닐로는 1221년부터 1264년까지 재위하며 선정을 펼치며 볼히니아를 부흥시켰다. 1230년대가 되자 다닐로와 그의 형제들은 볼히니아를 헝가리로부터 탈환하였다. 다닐로는 세금을 감면하고 도시의 민회를 부흥시켰기에 언제나 루테니아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1245년 다닐로와 바실코는 헝가리 국왕의 사위인 갈리치아의 로스티슬라프 공을 격파하며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다시 통일했다. 갈리치아로 건너간 다닐로는 리비우 시를 건설하고, 그의 동생 바실코는 볼히니아를 다스리게 되었다. 다른 형제들의 경우와 다르게 이들은 통치권을 나누고 나서도 서로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지냈고,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하나의 나라처럼 운영되었다.
몽골 제국의 침략군이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파괴시켜려 들자 다닐로는 당장 무리하게 싸우는 방법 대신에 직접 가서 조공을 바치는 방법을 택하고 이 와중에 타타르에게 향하는 교황의 사절들과 합류했다. 다닐로는 루테니아인들이 가톨릭 유럽과 힘을 합쳐서 타타르인을 무찌르는 계획을 세우고 이 와중에 1253년 교황으로부터 왕위를 승인받는다.[5] 다닐로가 왕위를 승인받은 이후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의 이름은 '''루테니아 왕국'''으로 변경되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교황은 결국 다닐로에게 군사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고, 가톨릭에 대한 정교회 주민들의 반감으로 결국 교황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지만, 왕이라는 칭호와 루테니아 왕국이라는 국명은 계속 이어졌다. 다닐로는 키예프를 몽골인들로부터 탈환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타타르인들에게 계속 조공을 바치는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다닐로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 바실코도 형의 뒤를 따랐다. 볼히니아는 바실코의 아들이자 철학자인 볼로디미르 바실코비치의 통치를 받고 나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갈리치아 지방은 폴란드와 헝가리의 격전 끝에 결국 1387년 폴란드의 차지가 되었다. 헝가리가 갈리치아의 영토를 일부 떼어간 덕택에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루마니아에는 오늘날에도 루신인(Rusyns)이라고 불리는 소수 민족이 남아있다.
4.2. 리투아니아 대공국
루테니아 왕국이라는 말 때문에 오해할 수 있지만, 루테니아라는 말은 라틴어로 러시아에 해당한다. 오늘날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러시아 서부를 아우르는 어휘였다. 이러한 루테니아 전역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팽창 과정 와중에 흡수되었다. 당시 '''몽골인, 킵차크인들은 우크라이나 지역의 슬라브인들에게 공물을 부과하고 종종 쳐들어가서 노예로 팔 생각만 하고 관리를 안 하고 있었는데, 이 틈새를 노리고 리투아니아인들이 과거 키예프 공국의 영토 대부분을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이다.''' 리투아니아인들은 흑해 인근까지 타타르인들을 밀어부쳤는데 보르스클라 강 전투에서 타타르군에 저지당하기 전까지,[6] 영토를 계속 확장시켜나갔다고 한다.
리투아니아는 유럽에서 가장 늦게 기독교로 개종한 국가로[7]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 리투아니아인들은 오늘날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영토 일대의 루테니아인 정교도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 해방자를 자처하며 정교회 신도들을 동등하게 대우했었다. 튜튼 십자군이나 체계적인 파괴나 몽골인들의 무차별적인 노예 사냥에 비교하면 리투아니아인들의 침공으로 인한 유혈 사태는 애들 장난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리투아니아 공들은 루테니아의 기득권층의 특혜를 보장하였고 이에 호응한 많은 도시들에 리투아니아 군이 무혈입성했다.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가 폴란드의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을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1385~1386) 발트 토속 신앙을 믿던 다른 리투아니아인들도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명령을 내렸다.[8] 리투아니아인들이 발트 토속 신앙을 믿었을 당시에는 루테니아 지역의 정교회 주민들과 통혼하고 오히려 키예프 루스의 후계자를 칭하며 큰 마찰 없이 잘 지냈지만, 점점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인 지주들이 이주해오고, 리투아니아인 지주들이 폴란드 가톨릭화되면서 이후 일어날 커다란 불화의 씨가 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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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차크 칸국이 와해되면서 1430년 크림 반도를 위시로한 크림 반도 일대에 타타르인들의 크림 칸국이 독립했다.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들은 유목과 농업을 부업으로 삼고 슬라브인들이 사는 지역에 쳐들어가서 사람들을 납치해서 노예로 파는 일을 본업으로 삼았다.[9] 크림 칸국은 오스만 제국의 번국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대리전을 수행하는 역할도 병행했다. 키예프 공국이 멸망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지배가 시작된 이후에도 우크라이나 남부는 계속 타타르 세력의 노략질과 납치에 시달려야 했다.
15~16세기 벌어진 크림 칸국의 침략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일 때문에, 그리고 타타르족이 납치와 약탈만 주로 일삼고 정착을 시도하지 않은 바 때문에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에는 많은 공백지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크림 칸국의 전사들은 '''지주까지 싹 잡아가는 바람에 비옥한 드네프르 강 일대는 사람이 아예 살지 못해서 야생 상태로 복구'''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10] 코사크들은 이 공백지들에 정착하여 독자적으로 크림 타타르족들과 맞서 싸우며 성장해나간다.
멀찍이 북쪽인 모스크바 지역은 노가이 칸국이나 크림 칸국의 세력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리투아니아인들의 정복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타타르족의 눈치를 보면서 독자적으로 성장하여 러시아가 된다.
4.3.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이반 3세, 이반 4세 등 여러 유능한 군주들의 지도 하에 모스크바 공국은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며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 연합과 국경 분쟁을 벌이고, 그리고 타타르인들과 싸워나가면서 정교회 신앙의 수호자라는 정체성을 세운 상황이었다.
우크라이나인들과 러시아인들은 같은 정교회를 믿고 있었지만 상황이 많이 달랐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지주들은 같은 가톨릭을 믿는 농노들조차도 가혹하게 수탈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11]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일대에 정착한 폴란드인 지주들의 횡포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정교회 신자는 법원에서도 일방적으로 불리한 판결을 받았고, 교육이 가톨릭계에 집중된 이상 사실상 교육과 학문으로부터도 배제되다시피했다. 루테니아 사회의 지도층들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하나둘씩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루테니아 인 농노들은 처음에는 '''타타르족에게 노예로 잡혀가느니 농노로 사는 게 낫다(...)'''는 체념 하에 폴란드인 지주들의 횡포를 참았지만, 크림 타타르 세력이 코사크들에게 하나하나 박살나자 더 이상 폴란드 지주들의 횡포를 묵묵히 참고 견딜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폴란드인 악질 지주들은 눈치도 없이 루테니아 농노 한 가정당 '''일주일에 7~8일의 부역을 부과했다.''' 일요일날 정교회에서 예배보지도 말고 농노의 아내와 아이들도 함께 지주 땅으로 나와서 일하라는 소리였다. 폴란드 가톨릭 지주들의 횡포에 분개한 중부, 동부의 코사크들이 여차하면 루스 차르국에 구원을 청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루블린 조약을 통해 1569년 폴란드와 본격적으로 연방을 이루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거듭났다. 원래 우크라이나의 서부에만 국한되었던 폴란드 영토가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 와중에 많은 독일인과 유대인들이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방에 마름 혹은 잡상인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는 폴란드 귀족들이 정교회 루테니아인들이 재산을 모으고 부르주아로 발흥할 것을 두려워해서 생긴 현상으로, 정교회 농노들이 교육을 받고 상공업을 진흥시키면 나중에 배후의 루스 차르국과 힘을 합쳐 폴란드에 대항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폴란드에서 유대인들을 받아들인 이유는 인도적인 이유라기보다는 루테니아인들을 영원히 농노로 묶어두고자 한 악의적인 의도가 다분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지방 귀족들의 이익을 위해 도시민들의 곡물 교역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대농장을 경영하는 폴란드인 지주들은 직접 사람들을 고용해 비스와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수운체계를 이용해 그단스크로 곡물을 실어날랐고, 그곳에서 독일인 상인들이 곡물을 운송해 팔았다. '''사실상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제대로 된 은행 시스템과 상업망을 지닌 도시는 곡물 수출용 항구인 그단스크가 유일했다.'''
코사크들이 폴란드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킬 때는 언제나 광범위한 유대인 학살이 동반되곤 했다.[12]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전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 네덜란드와 더불어 개인 까지는 아니지만 정치 참여권을 가지고 있는 '시민'의 최소 단위인 귀족 마다 성문화된 종교의 자유를 누리던 나라였다. 우크라이나 일대에 가톨릭 교회의 침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에서 주도한게 아니라 타타르와의 전쟁으로 인해 공백지가 된 우크라이나 일대에 투기성 지주가 된 비소베비츠키, 자모지치, 코드키예비츠 같은 거대 귀족 가문들이 주도한거고, 이 와중에서도 오스트록스키 가문 처럼 끝까지 개종 안하고 오히려 정교회 신앙 보존에 치중하면서도 세력, 권력 등은 하등 꿀릴게 없는 가문들도 적지 않았다. 정교회를 의식적으로 차별했다기보단 반종교개혁 시대 조류에 따라 귀족가문들 사이 최고 교육 기관이 예수회 학교들이 되었고, 여기에 자연스럽게 정교회인들은 배제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여기에 맞서 정교회인들도 자체적으로 몽골-타타르에게 얻어 맞고 리투아니아에게 종속화되면서 자신들이 정신못차릴 사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서방 기독교의 제도적 우위를 카피하려고 했고, 이런 서방 가톨릭 세력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했던 정교회인들의 노력의 결산이 17세기 중반 신학자 페트로 모흘리야 주도 아래 키예프 총대주교좌 복구와 훗날 키예프-모흘리야 대학의 전신이 된 키예프 신학교 설립이었다.[13]
정리하자면 당시 우크라이나 정교회권 사회에 가톨릭 폴란드 침투는 일차원적인 식민지, 억압자의 구도가 아니라 이런 변화 자체가 가능하게 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자체의 미묘한 정교 관계의 틀에서 봐야 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는 계급간 차이가 강했지만 적어도 귀족 계급 내에선 동네 쩌리 잔반에서 나라 전반을 뒤흔들 대귀족 까지 평등하게 시민권과 참정권을 누렸고, 이런 귀족 공화국의 시민권 중에는 종교의 자유도 당당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이런 성문화된 참정권을 누리는 지배 계층만에게 한정 된 종교의 자유는 16세기 아우크스부르크 합의 이후에도 옆나라 신성 로마 제국에서 결국 무너졌듯이 실제 적용의 영역에서는 명백한 한계를 보였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에선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출신 귀족들의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어도, 가톨릭계 귀족들이 자신의 영지에서 종교를 강요하는 것 또한 막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피지배계층이 다수였던 현지 우크라이나 정교회도 바르샤바, 빌뉴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적어도 자신들은 핍박 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반면 이런 폴리투의 종교적 자유 덕분에 끝까지 개종 안하고 버티겠다는 정교회 귀족층은 나름 위기의식을 느껴 경쟁적 모방에서 신학교 신설까지 적극적으로 정교회권의 반격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그리고 17세기 중반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카자크 반란을 일으켰을 땐 이런 정교회의 이념적, 교회 조직적 재정비가어느 정도 성공한 덕분에 본격적으로 동슬라브 루스 민족의 정교회 신앙을 명분으로 내세워 반란을 일으키니 일시적인 처우나 자치권, 봉급 문제로 빨리 반란일으켜 빨리 진압 되었던 전시대의 카자크 반란과 달리 폴리투 연방령 우크라이나를 반쪽으로 쪼개버리고, 연방 자체에도 복구불가능의 엄청난 타격을 입힌 동유럽판 30년 전쟁이라 부를만한 규모의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다.
4.4. 코사크 헤트만국
폴란드인 귀족들과 루테니아인 농노들 사이의 종교 갈등은 폴란드에 재앙을 불러들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루테니아 지역의 영토를 잃어버린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정교회 탄압에 이에 따른 카자크 반란 그리고 뒤 이은 루스 차르국의 개입이었다.(대홍수 참조) 원래는 우크라이나의 카자크들은 크림 타타르와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폴란드 본토까지 보호해주는'''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한 대가로 반 독립적인 자치를 누렸고, 코사크가 아니었던 서부 우크라이나의 농노들도 타타르인들에게 납치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농노로 사는게 나을거라는(...) 체념 하에 가톨릭 지배자들에게 충성을 바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대귀족 슐라흐타들의 시대착오적인 가톨릭 강요 및 폭정이 이어지자 1648년 카자크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른바 대홍수라는 대재앙이 발생하게 되었다. 흐멜니츠키는 정교회 학교를 마친 후 키예프의 예수회 학교를 다녔지만, 철저한 정교회 신봉자였다. 우크라이나어, 중세 루테니아어, 교회 슬라브어, 폴란드어, 라틴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고 이런 지식 덕분에 그는 카자크 부대의 서기관으로 근무했던 인물이었다.
폴란드인들이 돈을 빌려서 유럽 각지에서 용병 14,000여명을 고용해 반격에 나서자 수세에 몰린 흐멜니츠키는 신종을 조건으로 루스 차르국에 지원을 요청하자, 루스 차르국은 폴란드 가톨릭의 압제로부터 정교도들을 해방시킨다 라는 명분으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지역으로 쳐들어왔다. 이들은 자신들이 해방자라고 주장하면서도 같은 정교회 주민들까지 마구 약탈하고 강간하고 다녔다. 이 와중에 스웨덴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몰다비아, 트란실바니아 등이 영토를 노리고 개입하고 흐멜니츠키가 크림 타타르족 용병을 고용하면서 규모가 몇 배로 커져 이른바 대홍수로 불리는 전쟁이 일어났다. '''흐멜니츠키 반란의 결과로 우크라이나는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서쪽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동쪽은 러시아가 지배하게 되었다. 키예프의 처음 협상과는 다르게 결국 러시아로 넘어갔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를 상실하고 동시에 곡물을 수출하던 비스와 강 수운 체계가 박살나면서 국부의 대부분을 상실하면서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우크라이나의 완전 장악 및 흑해 진출을 노린 러시아는 이후 크림 반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남부를 노리고 크림 칸국, 그리고 그 종주국 오스만 제국과 10 여 번에 걸친 전쟁을 벌여, 1783년 크림 칸국을 합병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동부 우크라이나는 완전히 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왔고, 가톨릭과 이교도 타타르들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준 러시아를 동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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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우크라이나를 장악하게 된 루스 차르국의 지도자들은 코사크들의 기대와는 다른 행보를 보여준다. 이들은 코사크들의 평등한 공동체 문화가 모스크바 귀족들의 농노제에 위협이 될 거라는 판단 하에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억압하고 코사크 공동체에 농노제를 순차적으로 도입시켰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표트르 대제는 코사크들을 징발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을 비롯한 여러가지 위험한 노역과 군역을 강제했는데, 요새 건설 등에 동원되었던 카자크들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모스크바에서 온 관리들이 밥도 잘 안주는 주제에 마구 때리고 갈궈서 대게 1/3에서 1/6 정도가 파견나간 장소에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현재도 우크라이나의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는 마제파가 칼 12세를 믿고서 대북방전쟁에 스웨덴편으로 참전해 러시아 제국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킨데는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다.
러시아 제국은 우크라이나의 돈 코자크들을 시베리아에 있던 투르크, 퉁구스계 국가들을 정복하는데도 적극 활용하여 시베리아로 넓은 영토를 단기간 내에 확장하는데 성공하였다. 시베리아와 쿠반 강에 있는 코사크인들의 정착지는 아직도 옐로우 우크라이나, 그린 우크라이나 등 우크라이나 출신 이산민들이 주로 정착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결국 중세 폴란드는 카자크 반란의 여파로 영토가 뭉텡이로 잘려나간 것을 시작으로 하여,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게 분할되면서 멸망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의 귀족들과 농노들 사이의 커다란 간극은 결국 망국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에서 발흥한 르네상스 및 여타 기술 발전이, 상공업이 부실하고 빈부 격차 문제가 심각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사회에 잘 뿌리내리지 못한 것이다. 갈리치아, 자카르파탸[14] 을 제외한 우크라이나 영토 전역은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폴란드 분할 참조
5.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는 크림 칸국을 멸망시키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같이 3차례에 걸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분할하면서 서부 우크라이나의 리비우를 중심으로 한 갈리치아의 서남부 5주, 자카르파탸 일대를 제외한 우크라이나의 거의 전역을 차지했다. 이 지역들은 오스트리아(이후의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차지했다.
러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키예프 루스의 후손들이 하나로 모였지만, 이미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의 문화는 언어부터 많이 달라져있었다. '''동부 우크라이나의 코사크인들은 러시아어를 쓰게 되고 크림 칸국의 침략과 폴란드의 압제를 러시아가 해방시켜주었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러시아의 한 부분으로 인식한 반면, 서부 우크라이나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 동안 당연히 러시아어를 쓸 일도 없고 서구식 민족주의를 배우며 러시아를 이질적으로 보게되었다.''' 가장 러시아의 지배를 덜 받은 갈리치아 지방은 우크라이나의 주류 교파인 정교회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라는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파가 다수를 차지한다.
폴란드 분할 이후 러시아 내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우크라이나어가 억압당하고 러시아식 농노제를 도입했다. 평등 사회에 기반을 둔 카자크 공동체는 붕괴되고 귀족화된 카자크 지도자들이 농노 카자크들을 지배하는 러시아식 사회 구조가 정착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에는 안정적인 병력 자원이 필요했다. 러시아인 징집 농노들은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서 전투력이 낮았기 때문에, 그 대신에 코사크 병사들이 선호되었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코사크들은 러시아 제국의 정예 기병대가 되어 러시아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코사크 기병들은 카프카스와 시베리아 일대에 병영 도시에 하나둘 정착하게 된다.
다른 한편에서, 리비우를 중심으로 한 갈리치아 일대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방치 하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이 우크라이나어로 민속 문학을 수집하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근간을 만들고 있었다. 중세 폴란드 시절 교역의 중심지였던 리비우 시에는 리비우 형제단이라는 우크라이나인 상공인 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폴란드 정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어 인쇄물을 발간하는 등 민족주의적 활동에 열심이였다. 리비우 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치하에서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중심 역할을 이어나갔다.
언어적 요인 뿐만 아니라 종교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는데, 폴란드 분할 이전부터 목소리를 내었던 리비우 형제단이 신경이 쓰이자 폴란드인들은 루테니아 정교회 신자들이 하나로 모여 폴란드 가톨릭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대책을 만들었다. 일부러 리비우 시의 정교회 신자들 중 일부에게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리비우 시내에서 다 쫒아내버리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거기에 폴란드는 브레스트 연합으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정교회를 전례는 정교회 양식이나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교회 등의 동방 가톨릭으로 재편하여 정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교황의 지배 아래로 귀속시켜 루테니아인들을 종교 문제로 서로 다투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이들을 서방 가톨릭 교회로 개종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이들 그리스 가톨릭 교회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합병한 이후 신앙을 버린 배교자라는 이유로 당국의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정작 우크라이나 서부 영토의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자들의 처지는 매우 좋지 않았다. 같은 가톨릭 교회임에도 서방 가톨릭 신자들은 라틴 전례를 따르지 않는 이단이라면서 그리스 가톨릭 신자들을 차별했으며 갈리치아의 폴란드인 지주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예전과 다를바 없이 이들을 착취했다. 그들을 착취하는 폴란드인 지주들과 빚으로 옭아매어 얼마 없는 땅까지 뺏어가는 유대인 대금업자들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증오는 엄청났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서부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은 척박한 토지에 과도한 인구, 거의 없다시피한 교육 수준, 원시적인 수준의 영농 기술,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지주들과 오스트리아 당국의 무관심 등 여러 요인들이 합쳐져 기근과 영양결핍과 열약한 환경으로 인해 만연한 질병, 또다시 그로 인해 저하된 농업 생산성이 다시 기근을 불러일으키는 등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는 곳으로 영국한테 쥐어짜이는 그 아일랜드와 맞먹는다고 할 정도로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갈리치아의 폴란드계 유력인사였던 스타니스와프 슈체파노프스키(Stanisław Sczepanowski)는 갈리치아의 현실을 고발한 자신의 저서에 이들이 다른 지역보다 음식은 절반 밖에 못 먹으며 일은 1/4 밖에 하지 못 한다고 기록을 남겼고 결국 가난을 견디지 못한 갈리치아의 농민들은 리비우나 크라쿠프 같은 대도시나 오스트리아 제국 내 다른 지역, 멀리는 미국이나 캐나다, 브라질 등 외국으로 빠져나갔다.
러시아 영토 내에서는 우크라이나인 자체를 차별한 건 아니었지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우크라이나어에 대한 탄압이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동부의 민족주의자 상당수가 그나마 직접적인 탄압이 덜한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로 피신하여 민족주의 활동을 이어가면서 우크라이나 서부는 반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 지방의 경제권은 오스트리아계 독일인이 장악당하고,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농노들은 기근과 과잉 인구에 시달리며 리비우 시에 빈민가로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빈곤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국가와 민족이 없어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민족주의적 사상을 키워나갔다.
우크라이나 동부에는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이주해오고 러시아식 농노제와 군사 문화가 뿌리내리는 동안, 우크라이나 서부는 폴란드인, 유대인, 독일인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유럽과 중부유럽의 사상과 문화가 급속도로 뿌리내렸다.
6. 근현대
1861년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해방령을 발표하면서 러시아 영토 우크라이나 지역도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맞았다. 드네프로 강 유역 흑토지대는 토양이 무척 비옥했기 때문에 여타 척박한 러시아의 다른 지방들과는 다르게 소출이 많았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우크라이나의 잉여 식량을 영국으로 수출한 후 그 돈으로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귀족들이 좋아하는 위스키와 맥주, 여타 사치품을 직수했다. 농노해방령이 시행되었지만, 우크라이나 농부들에게는 비교적 높은 토지세와 이자가 부과되었다.[15]
우크라이나 지방에 살던 농민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긴 했지만 어떻게 대응할 힘이 없었다. 이들은 정부에 항의하는 대신에 애들을 무작정 덮어놓고 많이 낳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당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농촌 공동체 미르는 각 가정의 인원수대로 땅을 분배했는데, 이 때 애가 한명이라도 더 많으면 더 많은 비율의 땅을 분배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몽골의 침략과 크림 타타르의 노략질 때문에 좀처럼 증가하지 못했던 우크라이나 인구는 이때 비로소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화에 휘말렸다. 러시아 제국은 전쟁으로 인한 물자부족으로 볼셰비키 혁명이 발생하면서, 독일에게 유리하게 국경선을 내준 후 휴전할 수밖에 없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대부분의 영토를 토해내고 공중분해당했다.(민족자결주의 참조)
이 때 우크라이나에도 다시 독립 국가가 들어설 뻔 했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이 지역은 잠시 독일의 괴뢰 정부인 우크라이나국이 들어서지만 곧 독일 제국이 패망한 뒤, 1차 세계 대전 및 러시아 혁명 시기에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으로 잠시 독립이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와는 다르게 민족주의로 한데 뭉치지 못하고 분열이 일어나면서 제대로 된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우크라이나는 (동)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으로 (공산국가는 아니다) 각각 분리독립을 이루고, 현 우크라이나 동부지방은 적백내전에서 백러시아에 가담했다. 동서 우크라이나는 곧바로 1920년에 통일을 선언하나, 막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폴란드 제2공화국은 친폴란드 우크라이나인들의 요청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갓 건국된 폴란드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독립해야 자국의 독립을 보장받는다고 생각했다. 이에 우크라이나의 공산주의자들이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당시 소비에트 연방은 없었다)에 도움을 청하면서 공산 러시아와 폴란드가 맞붙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키예프까지 들어온 폴란드군을 잘 물리쳐 이후 바르샤바까지 몰아붙였다가 선봉대가 두드려맞아 전멸하는 참패를 당하고 이후 밀려 1921년 리가 조약을 맺으면서 서부 우크라이나를 폴란드에 할양, 이곳은 다시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다. 남은 동부 우크라이나는 소련에 가입하여 한 공화국이 되었다. 이 복잡한 과정은 이 링크를 참고.
이 와중에도 볼셰비키·멘셰비키·사회혁명당·민족주의자·극우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고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계속 내전을 벌였다. 거의 비슷한 시기 우크라이나에서 멀리 떨어진 러시아 극동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도 자신들 관할 지역인 극동을 우크라이나국의 일부라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자세한 건 젤레나 우크라이나 문서 참고.[16]
러시아에 가까웠던 동부 우크라이나에서도 민족주의자들의 독립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들은 소련에게 철저히 탄압당했다. 당시 소련 국방장관인 레프 트로츠키는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자랐지만,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철저히 짓밟으면서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의 사투리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렇듯 러시아인들은 전통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다른 나라가 아닌 그저 자국 변방의 하나 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푸틴도 마찬가지. 이쪽에서는 역사적으로 근대 이전에 우크라이나 지방을 부르는 이름이 '소 러시아'라는 뜻인 말로로씨야(Малороссия)였다. 대부분의 우크라이나인들은 little 러시아라는 단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였으며 혁명, 내전, 독재, 탄압, 집단 아사, 학살의 피비린내나는 20세기의 상처 때문에 현대에 우크라이나 사람 앞에서 '소 러시아인' 따위 개드립 치다가는 종로에서 대남 도발 때 인공기 들고 응원하는 것만큼 빨리 다음날의 해를 못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우크라이나 탄압은 트로츠키와는 앙숙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스탈린이 추진한 집단농장화 정책 때문에 소련 전역에서 아사자가 대량 발생했는데, 피해는 특히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 집중되었다. 바로 1932년~1933년의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다.[17] 때문에 미국인들이 가진 대공황에 건 뿌리깊은 공포 이상으로 우크라이나가 기근에의 공포심은 크다. 현대 우크라이나의 반러감정의 직접적인 연원이기도 하다. '''소련에서 집단농장화 정책을 펼 때 가장 반발이 심했던 지역이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이었는데'''[18] '''기근의 피해가 유독 바로 그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 집중되었으니''', 일부러 소련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을 작정하고 굶겨죽였다고 의심할 만 했다.
동부 우크라이나는 제정러시아 시절부터 석탄의 주산지였는데, 스탈린의 무자비한 공업화 몰빵으로 엄청나게 산업화했다. 그러면서 이곳에 러시아인 인력이 다수가 이주해와서 살았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니키타 흐루쇼프도 러시아로 이주해온 광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독소 불가침조약에 따른 폴란드 분할 당시, 폴란드에 속하던 서우크라이나 지역은 소련이 합병한다. 소련은 서부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우크라이나 사회주의공화국에 편입시키면서 1921년 빼앗긴 영토를 수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한편 서부의 우크라이나인들은 2차 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에 협력하여 유대인들과 폴란드인들을 상대로 제노사이드를 벌였다. 폴란드의 경우는 민족적 탄압을 받고 있었고, 경제의 대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들에 대한 불만도 컸다. 이후 독소전쟁으로 독일이 전전의 폴란드 동부 영토로 밀고 들어오자 해당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이에 협력하여 해당 지역의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데에 적극 동참했다(...)
유대인들이 싸그리 절멸당한 후에는 1943년 봄부터 600년 가럄 함께 살아오던 볼히니아와 갈리치아 일대의 폴란드인들을 상대로 대량 학살을 벌였다(...)[19] 여기에다가 전후 서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전전에 40%에 이르던 폴란드인이 싸그리 현 폴란드 영내로 이주되면서 결과적으로 서부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전체 국토에서도 우크라이나인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 되었다. 물론 서부인들은 이런 소련의 지배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독소전쟁을 개전하고 우크라이나 지역을 독일군이 점령하고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를 설립하자 이들을 '''해방자'''로 환영했으나,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이 설립한 우크라이나 국민정부를 강제해산하였고, 수탈과 기아, 민간인 학살 등이 나오자 반독으로 돌아선다. 전쟁 기간 중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기로 독일과 소련 양쪽에게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때문에 전사자 포함, 약 700만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입었다.[20] 안습. 이후 2차 대전 말기인 1945년 우크라이나 국민위원회가 다시 독립을 따내지만, 명목상의 독립이었고, 소련에 재점령되었다.
2차 대전 뒤 연합국의 대지분을 보유한 소련은 폴란드의 항의에도 1939년 합병한 서부 우크라이나 영토를 확정했고, 대신 폴란드는 독일의 동부 영토를 할양받았다. 서부 우크라이나에 살던 사람들은 원래부터 대부분 우크라이나인이었기 때문에 폴란드에게 별로 명분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이 소련의 지배를 달가워한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이런 동부-서부의 다른 역사는 이후 큰 갈등의 씨앗이 된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서남부 5개 주는 우크라이나인이 전체 인구의 88.1%로 압도적으로 많다(단 리비우[21][22] 는 전쟁 전에는 폴란드계가 전체 시민의 2/3을 차지하긴 했다).
폴란드 영토에다가 종교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인데도 왜 반폴란드 성향이 강하냐면, 이 동네 일대가 2차대전 이후 영토, 인구 교환 때 까지 지주, 귀족 등 상류층은 폴란드인, 의사 같은 전문직은 유대인들이 다 해먹고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을 믿는 현지 동슬라브계 우크라이나인들은 대부분 농노 취급을 당했기 때문이다. 리비우에 살던 폴란드인들은 2차대전 이후 대부분 현재의 폴란드 영역으로 쫓겨났고, 남아있는 폴란드계 숫자는 타 지역보다 많지만 그게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하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의 폴란드계 자체가 원래 가장 우크라이나에 동화한 집단이다. 테르노필, 이바노프란키우시크[23] , 자카르파탸, 체르니우치)는 1939년, 또는 1945년까지 러시아/소련 땅이었던 적이 단 1번도 없었다. 이들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을[24] 거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배했고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의 지배를 받다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완전히 소련 영토로 들어왔다. 이들에게 러시아는 철저히 외부세력일 뿐이다.
반대로 몰도바 남쪽의 해안지대인 부자크는 이 때부터 우크라이나의 영역이 되었다.[25]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1954년에 우크라이나 출신자인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 소련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크림 반도를 러시아에게 받는다. 크림 반도의 인구는 110만명을 차지한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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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라는 민족적 개념은 폴란드와 러시아에 맞서고 탄압받으면서 성장했으므로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지역마다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키예프가 있는 내륙의 서부 우크라이나와 공업도시 하르키우(제2도시, 러시아어 '''하리코프''')와 항구도시 오데사(제3도시), 크림 반도 등이 속한 동부 우크라이나는 지지정당부터 민족, 언어 구성까지 제법 다르다. 그래서 서부 지방은 러시아에 이질감이 상당히 심한 반면, 러시아와 붙어있는 동부 일부 지방은 러시아어를 많이 쓰고 러시아에 대한 이질감이 적은 편이다.
우크라이나의 민족 구성을 보면 크림 반도만이 유일하게 러시아계가 50%를 넘는 지역(58%)이고 나머지 지역은 우크라이나계가 다수다. 2014년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우크라이나 동부의 도시 하리코프도 우크라이나계 48% 대 러시아계 40%로 반반이다. 물론 러시아어가 더 우세한 지역들이 동부에 꽤 있지만 그건 우크라이나계 가운데 러시아어 사용 인구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친러 성향의 우크라이나계 우크라이나인 일부나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일부는 자신을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한다.
서쪽에 있는 독일, 폴란드와 일단은 친하게 지내는 편이지만, 역사적으로 서부를 집어삼키던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서부를 잃어버린 자기들 땅이라고 여기기에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를 견제하고 있다. 대신에 폴란드는 이미 소련 지배에서 벗어난 우크라이나를 세계에서 최초로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이후 지금의 폴란드-우크라이나 국경을 인정했기에 여기는 동부 우크라이나와 크림 반도보다는 갈등의 여지가 적은 편이다. 무엇보다도 전후에 서우크라이나 지방에 거주하던 폴란드인들이 죄다 현 폴란드 영내로 강제이주되었기에 동부 우크라이나나 크림 반도처럼 민족자결주의 같은 드립을 치며 반란을 일으킬 껀덕지도 없다(...).
독일 또한 악랄한 소련과 폴란드로부터 우크라이나를 해방시켜준 구원자들인 줄 알았더니 소련놈들보다 더한 학살을 저지르고 간 일이 있어 좋게 보지는 않는다. 북쪽에 있는 벨라루스와는 사이가 나쁜데 벨라루스가 과거 키예프 공국으로 같은 동족이면서도 여긴 러시아 지배를 받아들인 편이기 때문.[27] 둘이 과거 키예프 공국 이야길 하며 서로를 옛 우리땅이라 까고,[28] 벨라루스는 친러시아(친러) 성향이니 우크라이나와 사이가 나쁘다. 한편 우크라이나는 구 소련 시절 벨라루스에 부득이하게 체르노빌산 낙진을 선물해줌으로써 빅엿을 먹여준 적이 있다.
이후 1991년에 소련에서 8월 쿠데타가 실패한 틈을 타서 소련이 붕괴가 되자, 우크라이나는 다시 1991년에 독립되었지만 경제적으로 그리 녹록하지 못했고 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초인플레이션과 부정부패등에 시달려야 했다. 1995년 대선에서 쿠츠마가 집권하면서 경제난은 진정되고 그제서야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했지만 부패문제는 여전하였고, 결국 집권말기에 민심을 잃는다. 이 와중에 야누코비치와 유셴코간의 대결로 대선이 치러졌는데 친러세력이 유센코가 당선을 우려하며 대대적으로 투표조작을 시전한 덕택에 2004년에 오렌지 혁명이 일어났고, 그렇지만 친서방 정권하에서도 사정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었고 내분까지 겹쳐 2010년 대선에서 친러정권이 들어섰지만 친러정권도 딱이 나은 것은 아니라서 지지를 상실해나가다가. 국민들이 다시 유로마이단을 일으켜 부패한 친러정권으로부터 다시 독립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문제들로 인하여 후유증을 겪고 있기도 하다. 친러 또는 러시아계 출신들이나 러시아인이 많았던 크림반도는 2014년,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되었고 다시 러시아에 편입되었다. (친러 시위, 유로마이단 반대 세력은 결국 역사적으로 앙금이 깊었던 지역감정 때문에 분리독립을 선언하여 노보로시야 연방이 나타났다. 그리고 내전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국제전으로 변하고 만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조금씩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는 듯 하다.
2010년대 들어서의 역사는 아래 문서 참조.
[1] 드네스트르 강 하구에 티라, 드니프로강 하구에 올비아, 오늘날 세바스토폴에 해당하는 케르손네소스, 테오도시아, 판티카파이온, 파나고니아, 오늘날 로스토프에 해당하는 타나이스[2] 이미 블라디미르 1세 시절부터 폴란드와 영토를 두고 다투기 시작한다.[3] 13세기 키예프 루스의 인구는 600~8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4] 헝가리 국왕의 짧은 갈리치아-볼히니아 지배는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왕국 건설로 이어졌다.[5] 중세 왕이라는 직함은 교황만이 공인할 수 있는 것으로, 다니엘이 교황에게 왕위를 승인받은 것은 러시아 역사에서 유일한 경우이다.[6] 이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우크라이나 동부에 해당하는 지방을 점령하는데에는 실패했다[7] 우크라이나 일대를 정복하고 나서 14세기 말엽에 이르러서야 기독교로 개종했다.[8] 리투아니아인들의 성공적인 정복 활동과는 별개는 리투아니아 본토는 튜튼 기사단의 침략으로 초토화되다시피 했었다. 튜튼 기사단을 완전히 무찌르기 위해 리투아니아인들은 폴란드인들과 힘을 합쳐 그룬발트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을 대패시키고 나서야 리투아니아 본토가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9] 이반 4세가 광기에 물들어 혼란에 빠진 와중에 크림 칸국에서 모스크바 시를 쳐들어가 10만에 달하는 처녀들을 노예로 납치한 일도 있었다.[10] 보통 노예 시장에서 수요가 많은 젊은 여성들을 주로 납치해서 수레에 실어가고, 아이들은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고 그 자리에서 말발굽으로 밟아 죽였다고 한다.[11] 폴란드를 방문한 프랑스인들 상당수가 귀족들이 프랑스보다도 더 세련되고 부유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한 번 놀라고, 농노들이 평생 목욕 한 번 제대로 안하고 정말 꼬질꼬질하게 항상 배고파하며 사는 모습을 보고 두 번 놀란 경험을 여행기에 기록했다.[12] 유대인 입장에서는 억울한 것이 당시 우크라이나 일대에 살던 유대인 중에 '''농노로 살던 유대인들도 적지는 않았다.'''[13]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후에도 폴리투의 정교회 학교는 교회 슬라브어를 중심으로 한 12~13세기 교육 커리큘럼을 수백년간 그대로 유지했으나, 키예프 신학교 설립 등을 필두로 교육이 크게 개선되었다.[14] 갈리치아는 오스트리아에 편입되었고, 자카르파탸는 10세기 이래로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으며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적이 없다. 자카르파탸가 애초에 우크라이나 영토로 편입된 것도 1945년 이후의 일이다.[15] 농노 해방령으로 인해 가장 이득을 얻은 지역은 바로 러시아령 폴란드의 폴란드인 농노들이었다.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폴란드 지주들을 압박하고자 농노 해방령 당시에 폴란드 지주들에게는 아주 약간의 보상만이 주어졌다고 한다.[16] 현재도 연해주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 중에는 우크라이나식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17] 적백내전 당시인 1921년~1922년에도 이미 1차례 대기근이 있었다고 한다. 1932년 대기근의 원인과 결과 논란은 문서 참고.[18] 우크라이나는 토지가 비옥하고 소출이 많아서 농부들이 절대 땅을 안 내놓으려고 했고, 카자흐스탄은 그 당시에도 유목 사회 전통이 강했다.[19] 폴란드 사학계는 이 당시 학살당한 폴란드인을 3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고, 다른 나라에서는 대개 10만명 전후로 추산하고 있다.[20] 이런 독일의 우크라이나 천시는 독소전 패배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도 지적받는다.[21] 폴란드식 이름으로는 르부프Lwów. 공작의 아들 '레오(사자)'의 이름을 따서 붙인 곳이라서 라틴어로는 레오폴리스라고 했던 도시다. 안 그래도 독일어로 뢰베Löwe가 사자인데, 정작 독일에서는 렘베르크(Lemberg)라고 한다.[22] 반폴란드, 반러시아 성향을 가진 극우 정당 자유당의 지지도가 높은데, 폴란드 코모로프스키(Bronisław Komorowski) 대통령이 서부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가 극우청년한테 계란을 맞았다.[23] 옛 이름은 폴란드의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포토츠키의 이름을 딴 스타니슬라비우였으며, 1962년에 작가 이반 프란코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었다.[24] 리비브, 이바노프란키브스크 같은 경우는 도시로서의 기원이 중세 폴란드 왕국이 세운 도시들이었다. 이 동네는 그 이후로 줄곧 도시 외곽의 농촌은 우크라이나인 절대 다수였던 반면, 시내의 전문직은 유대인과 독일인들이, 정치적, 사회적 엘리트들은 폴란드인들이 양분하며 공존했으며, 19세기에는 폴란드 민족주의자들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 양쪽의 핵심적인 활동 거점이었다.[25] 몰도바 공국은 오스만 제국이 점령했고, 이후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는데, 초기 독립 상태에서 이 해안 지역을 나중에 차지한 셈이라 반드시 자기 영토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민족 구성을 따지더라도 몰도바는 루마니아의 일부였다가 소련이 병합했으니(...).[26] 크림 반도는 2014년에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하여 우크라이나에서 벗어난다.[27] 표트르 대제가 코사크들을 탄압한 것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시초인데, 벨라루스는 일단 코사크들이 몰려살던 구역이 아니었다. 1863년 농노 해방때도 벨라루스 농노들은 러시아 제국에서 폴란드인 지주들을 몰락시킬 목적으로 가장 적은 토지세와 이자를 납부하면 되었던 반면,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토지의 많은 소출 때문에 가장 높은 토지세와 이자가 부과되었다.[28] 한때는 폴로츠크 공국과 키예프 공국이 서로 치고 받던 사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