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역사

 



1. 개요
2. 상고대
2.1. 바빌로니아
3. 고대
3.1. 신 아시리아 제국
3.2. 신 바빌로니아
4. 고대 말
5. 중세
6. 근세


1. 개요



이 문서는 이라크역사에 대해 다룬다.

2. 상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문명은 고고학이 체계적으로 발전하기 전부터 익히 알려져 있었다. 성경만 봐도 메소포타미아 문화에 대한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이 원래 살던 곳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이고 아브라함 일족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나게 되고 이집트에서 머물다가 가나안에 정착한 뒤로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등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장악한 강국들의 지배를 여러 번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메르 왕 명부에 기록된 대홍수가 바로 노아의 방주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설이나, 에덴 동산도 이라크 남부 일대로 추정하는 가설 등등 성경과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비교분석하는 연구는 근세부터 활발했다.
오늘날의 터키 동남부 차탈 회위크에서 시작된 농경 문화는 인접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상류 지부를 따라 오늘날의 이라크에 해당하는 하류 지류 일대까지 이어졌고, 이는 기원전 3500~2700년 해당 지역에서 문자가 발생되고 사용되는데 영향을 주게 된다. 자급자족 성격을 띤 촌락들은 서서히 도시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초창기를 우루크 시대라고 부른다. 농경은 메소포타미아 북서부에서 시작되었지만 도시국가들이 왜 메소포타미아 남동부에서 먼저 발전하였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지리적 위치와 관련한 설명이다. 우루크는 페르시아 만과 연결된 강 유역에 있었기 때문에 어업과 농업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었고, 이집트와 흡사하게 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했기 때문에 관개수로를 건설하고 이용하는 농경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관개농업은 여러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지역 내 공동체 의식도 싹트게 되었다. 이집트 나일 강의 범람은 범람 수위와 시기가 대체적으로 일정했던 것에 비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범람은 상당히 불규칙적이었고, 강 유역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관개시설을 건설하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했다.
당시 사용된 쐐기문자는 점토판 위에 얇은 갈대 줄기로 삼각뿔이나 쐐기꼴을 새기는 방식으로 표현된 설형문자였다. 처음에는 그림과 기호로 의미를 전달하는데 그쳤지만 이후 쐐기 문자는 발음까지 담아낼 만큼 압축된 형태로 발전하여 다양한 응용성을 갖추게 되었다. 쐐기문자가 기록된 점토판들은 해당 지역의 건조한 기후로 오랜 기간 보존될 수 있었고 근대 고고학자들의 발견과 연구로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기원전 2340년 셈족의 한 갈래이자 유목 민족이었던 아카드인 사르곤이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을 수메르 도시 국가들을 침략하여 페르시아 만에서 레바논 북부에 이르는 영역을 장악하고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한다. 아카드 제국은 기원전 2125년 멸망한다. 아카드 왕조가 쇠락하자 권력은 메소포타미아 남부 우르에 집중되었다. 우르는 아카드 왕조의 조세제도를 도입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이후 강의 물길이 바뀌고 관개시설이 무용지물이 되면서 우르 지역은 점차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로 변했다. 우르는 오늘날 이란인들의 조상 중 한 갈래로 추정되는 엘람의 침공을 받아 기원전 19세기 무렵 멸망하였다.

2.1. 바빌로니아



아카드와 우르의 멸망 이후 이 지역은 바빌론, 라르사, 에슈눈나 같은 도시 국가들이 패권을 다투었다. 기원전 1792년 제위한 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는 2m 길이의 현무암에 아카드어로 282개의 법 조항을 기록한 이른바 함무라비 법전을 제작한다. 왕가는 함무라비가 죽은 지 겨우 10여 년 만인 기원전 1750년 멸망하였지만 그가 제작한 성문법은 다른 지역과 문화권으로 금새 이식되었다. 메소포타미아 각지에서는 함무라비 법전의 다양한 역본들이 주해까지 곁들여진 형태로 발굴되고 있다.
아직 함무라비 법전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법전의 성격과 거리가 멀었다. 쐐기문자 기록을 검토해보면 함부라비 법전이 일관되게 결정적인 재판의 근거로 사용된 경우는 드물었고, 대개는 관습법에 의해 판결이 이루어졌다. 아직 당시의 법전은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고 올바른 법 집행을 추구한다는 의미에 그쳤었다. 당시 왕은 권력을 쥔 통치자인 동시에 백성을 보호하는 수호자였고, 법에 따라 공평하게 다스린다는 확신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함무라비 혈통이 끊긴 뒤에도 바빌로니아는 마르두크를 숭배하는 신앙을 보존하며 유지되다가 결국 기원전 1595년 흑해 너머에서 건너온 히타이트에게 멸망한다. 히타이트인들은 최초의 철기 사용자로서 인도유럽어족들의 고대 전차 사용법을 전수받아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석권하였고, 수백년에 걸쳐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한다.

3. 고대



3.1. 신 아시리아 제국



기원전 3000년경부터 알려진 고대 아시리아는 기원전 11세기 히타이트를 격파하고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장악한다. 기원전 10세기에는 영토를 더 확장하여 신 아시리아 제국으로 거듭났다. 아시리아 제국은 피정복민족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것으로도 유명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고대 아시리아인들은 수완 좋은 상인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전쟁에서 전면전을 가급적 피하려 노력하는 편이었으며, 아시리아 군대는 전투를 벌여 무력으로 적을 제압하기보다는 대규모의 병력으로 적군을 위협하여 자발적인 항복을 받아내는 전략을 선호하였다. 적군이 순순히 항복하지 않으면 방어가 허술한 마을을 쳐들어가 주민들을 갖가지 잔학무도한 방법으로 학살하고 땅에 소금을 뿌려 불모지로 만들었다.
아시리아 왕들은 자신들의 군사적 업적을 방대한 자료로 남겼다. 이들이 점령한 지역 중에는 메소포타미아 북서부 오늘날의 시리아 일대도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이들은 피정복민들 아람인들의 언어 아람어를 제국 공용어로 받아들였다. 이는 아마도 당시 아람 문자페니키아 문자의 영향으로 다른 지역의 그것보다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리아 일대의 언어였던 아람어는 신 아시리아 제국의 공용어가 되면서 이후 천 년이 넘는 기간동안 이라크 일대에서도 공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살만에셀 3세는 다마스쿠스를 정복하고 페니키아, 이스라엘에 조공을 받았는데 점령 과정은 검은 오벨리스크에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 오벨리스크에는 이스라엘 왕 예후가 허리를 굽혀 절하고 공물을 바치는 부조가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히브리 성서에 나온 이스라엘 사람이 그림이나 부조로 남은 유일한 경우에 해당한다.'''
[image]

3.2. 신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와 메디아의 연합군은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를 공략하고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상실하였다. 이후 아시리아는 과거의 적국이던 이집트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신바빌로니아에 대항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아시리아가 몰락한 지 4년 후 바빌론 군대는 시리아 북쪽 갈그미스에서 이집트 군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고 이후 팔레스타인에 대한 주도권을 이집트로부터 빼앗아왔다.
신바빌로니아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하지만 페르시아는 바빌로니아(칼데아)의 자치권을 상당부분 보장하였고, 칼데아인들의 자치는 알렉산드로스 제국, 셀레우코스 제국, 파르티아 시절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바빌로니아는 천문학이 발달한 것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는데, 고대 당시의 천문학은 날짜 계산, 강이 언제 범람할지 예측하는 것 이외에도 점성술과 연관되어 있었고 이러한 연유로 고대 헬레니즘, 로마 세계에서는 칼데아인이 점술가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기원전 5세기의 바빌론 천문학자들의 천문학 지식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이들은 지점(하지동지)과 분점(춘분추분) 그리고 태양과 달의 주기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또한 일식과 월식이 언제, 얼마나 큰 규모로 일어날 지를 예측할 수 있었다. 바빌론 천문학자들은 행성, 특히 금성이 뜨고 지는 시각을 계산하고 추론할 수 있었다. 일주일을 7일로 나누는 방식은 바빌로니아에서 그리스인, 유대인에게로 전수되었다.
오늘날 이라크 일대의 네스토리우스파 아람어 전례를 보존한 아시리아인들은 과거 아시리아 제국의 아람어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자신들을 아시리아인이라고도 칭하지만, 이 외에도 종종 자신들을 칼데아인이라고 칭할 때도 있다. 칼데아는 바빌로니아 일대의 이명이으로도 사용된다.

4. 고대 말



파르티아를 무너트리고 중동의 패권을 장악한 사산 왕조는 아르다시르 1세 제위 시기부터 고대 로마 제국의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 편으로 사산 왕조 군주들은 메소포타미아 하류 지역의 관개 시설을 대대적으로 보수, 개선하여 농업 생산량을 다시 끌어올렸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필요한 노동력은 로마 제국을 기습하여 납치한 사람들의 노예 노동으로 조달되었다.
동로마 제국 시리아 속주 일대에서 유행하던 기독교는 상술한 이유 및 교역을 통해 이웃한 같은 시리아어를 공유하던 사산 왕조의 중심지에도 급속도로 전파된다. 이라크 일대의 기독교는 네스토리우스파동로마 제국의 교리 차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기독교 신자들끼리는 문화적 유사성을 공유하였다. 사산 왕조의 중심지는 오늘날의 이라크 일대이긴 했으나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아람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페르시아인들보다는 동쪽 시리아 일대에 거주하는 같은 아람어를 사용하는 주민들과도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인들과도 교류가 적지 않았는데, 이때부터 저지대라는 의미의 이라크라는 지명이 생긴다.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 역시 이라크에 위치해있었다. 수도가 아라비아 반도와 가까웠던 점 때문에 이슬람의 흥기 이후 이 지역은 아랍인들에게 금새 정복되었고, 중심지를 상실한 사산 왕조는 급속히 몰락하였다.

5. 중세


이슬람 칼리프조카디시야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사산조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이라크는 이슬람의 영역이 된다. 아랍인들은 쿠파, 바스라 같은 중세 신도시들을 건설하였다. 우마이야 왕조의 중심지가 이웃한 시리아였다면 압바스 왕조의 중심지는 이라크가 되었다. 압바스 왕조의 신도시 바그다드가 건설되어 이라크는 이슬람 제국의 중추 지역으로써 번영을 누리게 된다.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마문은 그리스 철학과 과학 서적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후원하였고 바그다드는 한 때 세계 학문의 중심지로 명성을 누린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는 9세기 초 바그다드에 여러 번역본이 돌았고 유클리드의 기하학, 아르키메데스의 여러 저술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서적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라크 출신 네스토리우스파 신도였던 이스하크 이븐 후나인은 갈레노스히포크라테스의 두루마리 150여 편을 혼자서 번역했다고 한다. 압바스 왕조 초기 번성했던 이슬람 사변철학 학파 무타질라 학파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과학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였다. 바그다드에서 고대 그리스 학문만 연구된 것은 아니었다. 이슬람 문명 초기에는 그리스보다 페르시아와 인도의 과학과 철학 영향력이 더 컸으며, 이후 압바스 왕조가 쇠퇴한 이후 셀주크 제국이 바그다드 칼리프를 보호하고 예속시키는 과정에서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튀르크어족 사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압바스 왕조는 쇠퇴 이후 잠시 시아파 부와이흐 왕조 군벌들의 지배를 받다가 셀주크 제국의 보호를 받아가면서 연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 때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번역 사업도 지원이 감소하며 끝이 난다. 알 마문이 번역 사업을 후원하던 당시에도 바그다드의 보수적인 소상인들을 대표하던 한발리파의 시조 "이븐 한발"이 바그다드에서 무타질라파와 대립하다가 투옥되는 일도 일어났다. 외래 학문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일은 보수적인 율법학자들의 반대를 받았기 때문에 대규모 지원이 없는 이상 끊어질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후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이라크는 초토화 되고, 바그다드의 칼리프도 시해당한다. 몽골군의 조직적인 파괴와 약탈로 사막화되고 황폐화된 이라크는 일 칸국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이후 몽골계 잘라이르 왕조, 투르크계인 흑양 왕조백양 왕조가 이 지역을 차례로 지배하게 되었다.

6. 근세


시아파 12이맘파를 국교로 하며 강제로 수니파 무슬림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는 정책을 펴던 사파비 왕조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놓고 수니파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와 전쟁을 벌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라크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보급 문제로 메소포타미아를 완전 석권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 이 지역이 시아파 사파비 왕조로부터 위협을 받음과 동시에 이라크 일대가 몽골 제국의 침략과 파괴 여파로 약화된 것을 계기로 오스만 술탄은 직접 칼리파를 겸하게 되고, 이슬람권에서 이라크의 입지도 크게 감소하였다.
이후 사파비 왕조, 카자르 왕조의 영향으로 이라크 동남부의 아랍인들(이라크 인구의 60%)은 시아파가 되어 후대 이라크 내전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7. 근대



이슬람교의 예언자인 무함마드의 후손 가문인 하심 가문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메카의 지배계급이었다. 이들 중 후세인 빈 알리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에 아랍 독립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약속받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아랍의 반란를 선언하였다. 아랍 반란 직후 그는 통일 아랍왕국의 왕임을 선언했지만 연합국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영국은 1차 대전 후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을 프랑스와 함께 위임통치하기로 명시한 베르사유 조약을 맺었다. 후세인 빈 알리가 이에 항의해서 조약의 비준을 거부한 후 연합국의 지원이 중단되었다. 영국은 후세인의 차남 압둘라를 1921년 요르단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만들었고, 이라크는 1922년 후세인의 셋째 아들인 파이살을 국왕 파이살 1세[1]로 하고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는 형식적인 왕국으로 독립시켜 주었다.

8. 현대


이라크는 1932년 정식으로 이라크 왕국으로 독립한다. 1933년에 파이살 1세가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가지 1세는 6년 만에 사망, 손자 파이살 2세가 4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그런데 그때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마침 영국의 내정간섭에 지친 이라크의 민족주의자들은 정변을 일으켰고, 추축국에 가입하고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결과는 1달 만에 패배(...). [2] 영국은 그 후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키며 이라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였고, 이라크는 1948년에 와서 주권을 되찾는다.
1958년, 이라크와 요르단은 연합하여 아랍 연합 공화국처럼 '''아랍 연방'''이라는 국가를 만든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반란의 위기에 직면한 요르단후세인 1세 국왕이 이라크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를 기회로 이집트의 나세르가 주창한 '아랍 민족주의' 에 영향을 받은 압둘 카림 카심(1914~1963) 장군 중심의 자유장교위원회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이 무너지면서 이후 이라크는 왕정이 폐지되고 카심 장군을 총리로 하는 공화국 정부가 들어섰다. 카심 총리는 여성 차별을 금지하고 일부다처제를 금지하는 개혁정책을 취하는 여러 노력을 했다.
그러나 카심 총리의 공화국 정권도 내부 정치 분열을 조율, 수습하는데 실패하여 이라크의 국내 정세를 더욱 악화시켰고 1963년 바트당 주도의 쿠데타로 무너지고 카심 총리는 공개 총살형에 처했다. 68년 이후부터는 계속 바트당 독재가 계속된다. 1979년에 사담 후세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그 뒤로 후세인에 의한 철권통치가 이루어진다.
후세인의 군복 모습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후세인은 군 출신도 아닌 데다 쿠데타도 아닌 '''합법적인''' 권력 이양을 통해 대통령에 취임했다. 심지어 '''사담 후세인은 군 입대조차 하지 않았다.''' 후세인은 바트당의 말단으로 출발해서 자기 능력으로 내각 요직까지 오른 뒤, IPC국영화 과정에서 부통령에 취임하고 문맹퇴치 운동과 문화재 보호 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서 바크르 대통령을 제치고 이라크의 최고 인기 정치인이 된다. 1970년대 후반 바크르 대통령이 뒤늦게 후세인을 통제하려 했지만 이미 민심과 당심, 군부 지지까지 얻어버린 후세인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난 것.
대외적으론 바크르 대통령이 심장 발작을 일으키고 나서 건강을 이유로 합법적 절차로 정권을 이양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가 바크르 대통령 주변 요직은 후세인 쪽 파벌들이 장악하여 대통령의 입지가 매우 약해진 상태였고 훗날 나오는 여러 증언들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매형인 아드난 카이랄라 장군,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바트당의 인텔리인 아드난 함다니, 이복동생 바르찬 후세인, 타리크 알 아지즈, 사촌 알리 알 마지드 장군 등의 정권 핵심층과 엘리트들을 포섭하여 바크르 대통령을 퇴임하도록 강한 압력을 넣었다고도 한다.[3]
사실 후세인 집권 초기만 해도 이라크는 미국과는 단교 상태(1967년)였고 소련에서 지원을 받고있는 아랍 내 대표적 친소 국가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란에서 시아파 원리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상황이 변했다. 혁명 전 이란의 샤 왕조 붕괴를 위해 암약하던 사우디아라비아가 혁명과 함께 손을 떼는 것과 동시에 바톤 터치하듯 이라크가 이란에 대한 무력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8.1. 이란-이라크 전쟁


1980년, 이라크의 침공으로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결국 양국의 피폐만을 가져왔다. 이라크는 1984년, 미국과의 국교 회복과 함께[4] 이후 4년 동안 297억 달러에 이르는 거액의 군사원조를 받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8.2. 걸프전


1988년, 승리는커녕 쪽박만 깨진 형태로 이란과의 전쟁이 종결되자 후세인은 약이 올랐다. 결국 국내의 불만도 잠재우고 삥뜯기도 겸하여 90년에 쿠웨이트를 침공했다가 미국과 서방 세계는 물론이고 인근 아랍 국가까지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완전히 밑천까지 거덜내는데 이것이 바로 걸프전이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아버지 조지 H. W. 부시.
걸프전 이후 UN은 안보리결의 687, 688을 통해 후세인 정권의 손발 묶기에 나섰다. 특히 안보리결의 688은 시아파나 쿠르드족 보호를 명목으로 다수의 비행금지구역(북위 36도선 이북과 33도선 이남)을 설정, 이를 기회로 조지 부시는 이라크인들에게 후세인 정권을 전복하라고 선동하는 발언을 자주 했고 실제로 시아파나 쿠르드족 지역에서 봉기가 빈발했다. 하지만 막상 봉기가 일어나자 미국 정부는 이를 외면했고 서방 국가들도 나 몰라라 했다. 주변 아랍 국가들도 구경만 하는 판이었다. 정작 비행금지구역만 설정했을 뿐 지상군 이동에 대한 제한은 전혀 없는 반쪽짜리 규제였던 것이다.[5] 그렇게 봉기는 압살되고 애꿎은 희생자만 양산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서 후일 일어나는 혼란의 불씨만을 남긴 채 후세인 정권은 의연히, 계속 유지되었다.[6][7]
UN과 미국은 경제제재를 통해 후세인 정권의 고사를 기도했지만 후세인의 위세는 흔들림이 없었다. 군대는 살찌고 아이들은 굶주리는 판이었다. 돌이켜보면 역사상 경제난으로 물러난 독재자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물론 몇몇 혁명들의 원인은 굶주림 때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어떤 사이비 교단급으로 통치를 누가 봐도 답이 안 나올 정도로 엉망으로 하는 데다가 분위기가 제대로 무르익었을 때의 이야기고 대부분은 정해진 조건 안에서는 통치를 그럭저럭 하는지라 도리어 체제가 공고해지는 독재자가 더 많았다.

8.3. 이라크전


이라크는 국제사회에 국내 기아 문제를 어필하여 UN으로부터 석유 식량 프로그램(Oil-for-food program)이라는, 군수품을 제외한 생필품과 석유를 거래하는 유예를 얻었다. 이라크인의 생활고에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눈 먼 돈 폭발로 UN 내에서는 뇌물, 부정 의혹이 끊이지 않았고 이때문에 서방 각국은 서로를 질시와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 와중에 이라크가 핵 개발을 기도한다는 의혹이 국제사회에서 터져나왔다. 풍문 정도의 애매한 의혹이었지만 UN 사찰단은 이라크 영내에서 방해 받았고 의혹은 부풀려져 갔다. 미군은 제재를 목적으로 몇 번이고 공습을 감행했지만 효과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결국 9.11 테러가 발생하자 조지 W. 부시(조지 부시의 아들이자 미국 대통령)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병기를 만들고 있다'''" 고 주장하며 이라크를 위험주자로 지목하고는 싸울 의지도 별로 없는 나라를 조져버린다. 후세인이 1차 걸프전 때도 대량 살상무기에 화학무기, 생물무기를 가지가지 만들면서 쫓아냈던 UN 시찰단을 무역 봉쇄에 경제 제재라는 명백한 손실을 감내하면서까지 전쟁 발발 때까지도 계속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의혹을 크게 살 만 했다. 이는 이슬람 문화권의 자존심에 관한 문화적인 차이(집 안에 다른 남자를 들이지 않는다든가)에 기인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는데, 이라크도 국제 외교무대에서 말도 안되는 국룰을 우기는 아마추어는 아닐 것이고, 끝까지 사찰을 거부한 이유는 아직도 미스테리이다. 결국 전쟁 직전에서야 후세인은 사실상 사찰을 조건부 허용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는데, 대놓고 허용이 아니라는 마지막 자존심을 챙기려는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전쟁을 막을 수 없었다. 그 정도 애매한 것으로는 미국도 전쟁 중지의 명분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
여튼 어떠한 물적 증거 없이 정황적인 이유 하나만으로 이라크전이 일어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폭격이야 테러에 대한 응징과 차후의 안보를 위해서라고 정당화가 될 수 있다고 쳐도 이라크 침공으로 전쟁을 확대한 것에 대해 깔끔한 근거를 들 수는 없을 것이다. 후세인이 구린내를 슬슬 풍기고는 있었다지만 결국엔 누명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니 수도인 바그다드가 이슬람이 형성된 이후 세 번째로 비 이슬람 세력에게 점령당하는 수모를 당했다.[8] 처음에 이라크인들은 미군이 들어오자 성조기를 휘두르고 '예스 부시' 를 외치면서 열광했으며 전국의 후세인 동상과 초상화를 때려부수고 신발로 때리며 분풀이를 했지만 이라크 주둔 미군이 계속 '오인 공격으로 인한 부차적 피해' 를 내고 점령지의 문화와 상태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일방적인 행동을 일삼았으며 점령정책을 아주 개판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대혼란이 와서 미국 하면 이를 갈게 됐다.

우리는 미국에게 그렇게 쉽게 점령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이라크 쪽에서 말하자 조지 W. 부시는

이라크 사람들이 점령당하는 게 불쾌하다고 느끼는 것 같은데 저도 점령당하는 것은 싫습니다.

라며 공개석상에서 이야기했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에 벌인 짓을 보면 신발이 아니라 총알세례를 받아도 모자란 지경.
이 때문인지 이라크 국내에서는 미국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의견이 썩 좋지만은 않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함으로써 좋아진 점은 언론의 자유밖에 없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 후세인의 통치 자체는 어떤 사이비 교단보다 조금 나은 수준일 뿐 대체로 막장이었지만 해방자랍시고 들어온 미국과 그들이 이라크에 구현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혼란만 야기하자 그 반동으로 후세인이 차라리 나았다는 소리가 나오는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웃나라인 시리아의 아사드나 리비아카다피, 이집트의 무바라크, 알제리의 부테플리카,[9] 튀니지의 벤 알리가 말년에 반정부 시위와 혁명, 내전으로 정권이 붕괴되어 몰락하거나, 정권이 붕괴될 위기에 직면했던 것을 감안하면[10] 후세인이 설령 계속 정권을 유지했었어도 결국 반정부 시위가 터졌거나 다른 형태로 체제가 무너졌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후세인 본인도 당시에 60대로 접어든 상황이었기에 벤 알리나 무바라크, 카다피, 부테플리카처럼 노령기에 통제력을 상실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 뒷수습이 매우 애매하게 된 덕택에 지금 이라크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지옥의 경지로 빠져들었다. 특히 이라크군 자체는 금방 무너졌는데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이라크 연합국 과도 행정처(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 CAP)에서 수니파=바트장 잔당[11]이라는 괴이한 공식을 들이대는 삽질을 해대는 통에 직장에서 죄다 쫓겨나고 영향력이 축소되어 장기적으로는 시아파들 손에 도륙나게 생긴 수니파 주민들이 "이대로 몰락할 수 없다. 그럼 우리는 다 죽는다" 고 총칼을 들고 일어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기에 CAP의 온갖 삽질[12]이 겹쳐 반쯤 내전이 되어가는 상황 덕분에 미군만 죽어라 고생 중.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의 상황도 갈수록 악화되어 가고 있고... 덕분에 미군이 개발하려고 했던 무기들은 이라크 때문에 드는 비용 덕분에 전부 개발취소 크리[EX:]. 이 내전에 준하는 상황은 2004년에서 2005년 사이 절정이었고[13] 2008년까지 계속됐으나 결국 수적으로도 압도적이고 미국의 지지를 받는 시아파[14]가 최종 승자라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2009년 경 대부분의 소요 사태가 종결됐다.
2010년 9월 1일 미군은 공식적으로 이라크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2011년에는 전 병력이 철수하였다. 이라크에는 이행정부(Iraqi Transitional Government)를 거쳐 정식 정부[15]가 출범했고 군사, 경찰권도 정식 정부가 집행 중이다. 적어도 점령 기간에 비하자면 놀랄 정도로 사회적 안정도 회복했다. 하지만 전쟁 중에 파괴된 전기, 수도 등의 기간 시설 복구는 여전히 미흡하고[16] 미군 점령 기간 동안 뿌려진 사회적 지뢰들은 여전히 현 정부를 위협하고 있다. 정치가 이렇다보니 경제도 마찬가지여서 실업율도 제법 높고 다시 이런 요인들이 정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여전히 좀체 상황이 좋아지지 않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비해 이라크는 조금 낫다는 주장도 있다. 최소 정부가 자리 잡는 데 성공했고 국내 안정에도 성공해 지금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어떻게든 정상 국가로서 돌아가지도 않겠느냐는 희망적인 견해도 지배적이다. 다만 그게 언제가 될 지 모른다는 게 문제.
하여튼 미군이 철수한 지 며칠 안 가 2011년 12월 수니파 부통령인 알 하셰미가 구속조치당하고 그가 쿠르드인 지역으로 달아나면서 그의 소환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지는 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조선일보는 미군이 철수해서 그런 것이라고 미군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미군이 있어도 이런 종파 갈등은 빚어졌고 테러는 벌어졌었다. 정작 미군은 떠나고 싶어 안달이었으니. 게다가 새로 창설된 이라크 정부는 사태해결은커녕 무능하고 부패하기 그지없어 각종 문제를 해결도 못하고 그저 악화만 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8.4. 이라크 내전


이라크 내전 항목 참고.

8.5. IS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2014 ~ 2018

8.6. 이라크-시리아 이슬람 국가(ISIS, IS) 격퇴 이후


2017년 말 이라크 정부군이 시리아-이라크 국경지대의 ISIS 세력들의 토벌을 끝마치면서 사담 후세인 축출 이후 10여 년간 이어진 이라크의 춘추전국시대는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2018년부터 이라크는 국내 정치 및 사회를 정리하는 쪽으로 정책 가닥을 잡았다.
2019년 10월 2일, 바그다드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들이 나타나고 있다. 시민들은 정권에 치안 안정 및 개혁, 민생 문제 해결 등을 요구하고 있으며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
결국 2019년 11월 1일, 이라크의 총리는 결국 사의를 밝혔다. # 한편 이라크 시위의 주요 장소 중 하나인 타흐리르 광장이 있는데, 이 광장은 예멘, 이집트, 시리아에도 있으며, 이집트 혁명, 예멘 혁명, 시리아 민주화운동 등 시위도 이들의 광장에서 각자 나타났다.
바스라에서도 반정부시위대 1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보안부대가 반정부시위대에게 총을 발포하면서 하루에만 최소 7명이 사망하는 등 사망자가 300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반정부시위에서 1명이 사망한데 이어# 바그다드에서 있던 반정부시위에서 5명이 사망했다.#
반정부시위가 2달 동안 이어지면서 압둘-마흐디 총리는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이라크 남부의 유전지대인 나시리야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유전 시설을 점거해 이틀째 원유 생산이 중단됐다고 이라크 언론들이 보도했다.#
2020년 1월 8일에 이라크 내의 미군 기지 두 곳에 대한 이란의 미사일 공격 후 바그다드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이란을 비난하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반정부 시위가 다시 격화되면서 최소 10명이 숨지고 140명 가까이 부상당했다.#
이라크 민관 합동기구인 고등인권위원회는 2019년 10월 1일부터 넉 달 간 바그다드와 남부 지역 주요도시에서 벌어진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543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2020년 4월 20일에 이라크에서 남편의 잔혹한 학대로 여성이 사망하자 이라크내에서 여성을 향한 가정폭력을 범죄로 규정하지 않는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5월 6일에 이라크 의회는 무스타파 알 카다미 전 국가정보원장을 신임 총리로 승인하면서 내각이 구성되었다.##
5월 20일에 이라크 당국이 IS 지도부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카르다시를 검거했다고 밝혔다.#
이라크에서 IS가 다시 준동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6월 10일에 미군이 철수한 이라크 북부지역을 방문한 무스타파 알 카디미 총리는 IS가 두 번 다시 이라크를 점령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2021년 6월에 총선을 치른다고 발표했다.#
2020년 8월 3일에 IS에 의한 야지디족 학살 사건 6주기를 맞아 유엔본부에서 거행된 기념식에서 이라크 정부와 유엔의 대처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9월 6일에 바그다드에서 의대 재학생과 졸업생, 의료계 종사자들이 의료 시설·장비 확충과 예산 투입을 요구하면서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2021년 1월 21일(현지시간) 바그다드 중심부의 밥 알샤르키 지역에서 연쇄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해 최소 32명이 사망했으며 110명이 부상당했다. 이라크 군 당국은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1 #2
[1]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알렉 기네스가 분한 파이살 왕자가 바로 이 사람이다.[2] 사실 영국은 유럽 전선에 신경 써야 했기 때문에 이라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나, 이라크를 침공한 이유는 바로 이라크의 '''석유'''가 나치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에 값싸게 공급될 수 있기 때문. 이때 영국은 비시 프랑스시리아이란 제국까지 같이 조져버렸다.[3] 이 부분은 영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사담에서 재연하고 있는 부분이다.[4] 이때 미국의 교섭역이 '''도널드 럼즈펠드'''. 이후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의 텔레비전 토크쇼에서 이 국교 회복 교섭 당시 후세인이 럼즈펠드를 '''반갑게 맞이하며 포옹'''하는 모습을 틀어줘서 전미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적이 있다(...)[5] 이라크군이 비행금지구역을 침범하면 생각났다는 듯 찔끔찔끔 토마호크 공격을 해댔으나 봉기와는 무관한 정치적 쇼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나마도 마이클 무어 같은 사람들에게 제국주의적 전쟁놀음, 침략행위라는 욕을 먹어서 여의치 않았다.[6] 현재 이라크 시아파의 친이란 행보는 이때의 미국의 태도에 대한 배신감과 무관하지 않다. 차라리 원칙대로 시아파 주민들을 보호하고 이를 명분 삼아 후세인 정권을 엎어버렸다면 이란-이라크간 관계도 최악이고 미국 자신도 나름 전성기였던 시절이라 오히려 이라크를 쉽게 안정화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7] 다만 미국 입장에서도 이라크를 완전히 쓰러뜨릴 수는 없었던 것이 베트남전트라우마에서 채 벗어나지 못해서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었고 쿠웨이트의 회복까지는 주변국들의 합의가 이뤄진 상태였지만 이라크의 전복은 그렇지 않았으며 거기다 끝물이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소련이 유럽에서 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1개 군단을 차출해온 만큼 시간을 오래 끌어서 좋은 점은 하나도 없었다.[8] 첫 번째 점령자는 중세의 세계 깡패이던 몽골이고 두 번째는 영국에게.[9] 이 사람도 1937년생으로 이라크의 후세인 전 대통령과 동갑이다.[10] 그래도 시리아는 시리아 내전 당시 반군 세력들의 저항에도 아사드가 정권을 유지하는데는 성공했다.[11] 애시당초 바트당 세력은 수니파 내에서도 소수였고 민중의 신뢰를 철저하게 잃어버린 상태로 그 때문에 이라크군이 그렇게 쉽게 붕괴된 것이다. 반대로 시리아는 알라위파와 콥트 기독교인들이 철저한 아사드 지지 세력이기 때문에 저항에 투입되는 전력의 규모가 커서 개입하기가 그만큼 어렵다.[12] 이라크군 죄다 (무기 환수 없이) 내쫓아 무장세력 만들기, 박살난 병원은 그대로 두고 애꿎은 처방전만 만지작거리기, '''이라크 기업의 모든 예금과 부채를 무효로 하기''' 등등. 라지브 찬드라세카란의 책 <그린존> 참고.[EX:] RAH-66 코만치, 줌왈트급 구축함[13] 2005년 이후 미군을 제외한 타국군의 철수가 시작되면서 게릴라의 공격 대상은 미군으로 좁혀졌으나 미군을 공격하면 그 몇 배의 보복이 돌아오기 때문에 2006년부터 소프트 타겟에 대한 무차별 테러로 바뀐다. 결국 06년부터 민간인 사상자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게 된다.[14] 허나 미국도 시아파를 두고 고민해야 했는데 시아파 성직자 알 사드르를 비롯한 이들은 반미 투쟁을 계속 벌였다. 미국으로선 이들을 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 수백 만이 넘는 지지자와 민중들이 알 사드르를 지지하였고 알 사드르는 아버지가 사담 후세인의 독재 정치에 맞서다가 후세인 정권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살해당한 인물이라 반후세인파 인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다. 초반에는 상금을 걸었다가 되려 거리 곳곳에 알 사드르에 대한 상금을 취소하지 않으면 미군의 목 하나하나에 상금을 걸겠다는 시아파 성직자들의 분노 어린 반응에 결국 미국이 물러나 현상금을 취소했을 정도.[15] 내각제 정부로 각료가 43명이다.[16] 수도 바그다드에서조차 하루에 6시간만 전기가 들어올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