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청관계
1. 개요
조선-대한제국과 청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2. 역사
2.1. 조선의 대여진 정책
급진적 신흥유신과 결탁하여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의 고조인 이안사는 타가차르 왕가의 분봉지 오동에 자리잡고 천호장과 다루가치로 임명되었다. 그 아들 이행리는 오동의 고려, 여진 민호를 이끌고 영흥 일대로 남하하여 그곳의 여진, 고려 세력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여진 세력들을 가별초로 거느렸다.[2] 이러한 고려계 몽골 군벌이라는 배경을 지닌 조선 왕실은 건국 이후에도 여진 부족들에게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왕자의 난으로 여진 부족들과의 관계는 혼란에 빠졌으며, 조사의의 난에 여진 세력가들 일부가 가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이 무렵 영락제의 초유 등도 양자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결국 올적합의 김문내(金文乃)의 경원부 침공을 계기로 이성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여진과의 우호적 관계는 마침내 완전한 종언을 맞이했으며, 조선의 방어선은 경원에서 경성까지 몰렸다. 이에 조선은 수차례에 걸쳐 이들을 정벌하거나 입조와 수직(授職) 등의 변경 정책을 사용했다.[3] 방어선 진퇴 문제와 수직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태종의 사후, 세종대에는 동맹가첩목아와 이만주의 행보 그리고 4군6진을 개척에 맞물려 두만강 인근 향화인들 외에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오도리, 올량합인들을 대상으로 수직 정책을 대거 확대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맹가첩목아의 아들인 동창(童倉)을 시작으로 여진 수장들은 부족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 그리고 경제적 목적에 따라 명과 조선으로부터 이중수직을 받기도 하여 조선과 명의 속국관계의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은 기존의 5진과 새로 개척한 6진의 변경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두만강 유역 여진 부족들을 번리화(藩籬化) 하고자 했으며 많은 부족들이 조선의 폭력성과 경제성에 순응하여 복속했다.[4]
조선의 수직 정책은 여진 부족들에게 통교권을 의미하게 되면서 명의 위소 정책과 함께 유력 여진 수장에게 통교권이 집중되어 여진의 성장을 촉진하였으며,[5] 이렇게 여진 수장들은 조선과 명의 대여진 정책을 이중적, 다층적으로 활용하며 초피 등을 통해 공적, 사적 무역을 확대했다. 이때 건주여진은 요동과 만포를 통해, 두만강 유역의 번호달은 5진 지역을 통해 초피를 파는 대신 우마와 철물들을 받아왔으며, 초피 교역으로 여진인들에게 조선 북부의 철물이 유출되자, 여진인들은 철제 무기와 농기구를 사용하게 됐으며, 반대로 조선 북부의 군사력, 농업력은 쇠퇴했다.[6] 이때 실질적인 변경 정책의 기조는 이전과 같은 양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이나, 조선의 유교화가 심화됨에 따라 16세기에 접어들면 여진인에 대한 기록은 점차 소략해진다. 조선 조정의 위정자들의 무관심으로 《조선실록》에서 연산군대부터 이전에 여진 부족들을 세분하여 기재했던 것과 달리 여진 부족들을 야인(野人)이란 표현으로 뭉뚱그리기 일수였다.[7] 이런 조정의 무관심 속에서 변장과 수령들이 침탈의 대상을 민호에서 번호들로 확대하여 여진 수장들을 탄압하자, 선조대에 이르면 1583년 회령의 니탕개의 난을 시작으로 1594년 순응적이었던 온성의 번호들까지, 광범위한 이탈과 반란이 발생했다.[8] 한편 압록강 방면의 여진 부족들은 선조 잔반기 폐사군 방면에서의 여진 부족들을 축출하거나 온하위를 대상으로 벌인 군사행동을 제외하면, 조선 조정과 큰 마찰없이 만포진을 통해 관계를 맺는 정도로 그쳤다.[9]이계손(李繼孫)·여자신(呂自新)·이맹현(李孟賢)은 의논하기를, "야인의 성질이 본래 교활하고 간사하므로 비록 여러 모로 깨닫도록 일어주더라도 듣고 따르기를 즐겨하지 아니할 것이니, 은혜와 신의로써 회유하여 복종시킬 수 없습니다.
2.2. 누르하치의 흥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상황은 다시 한 번 빠르게 변화하는데, 바로 누르하치의 굴기였다. 그는 1588년 건주여진을 통합하여 칙서 500여 통을 확보함으로써, 이듬해 명으로부터 도독첨사를 제수했으며, 1595년에는 용호장군(龍虎將軍)이라는 직첩을 받았다. 조선은 건주여진 부족들과의 호시와 개시 관할 구역을 명과 분점했었으나,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모두 정복하고 1601년 해서여진의 하다(Hada) 마저 병합하면서 조선에 서신을 보내어 직첩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이중수직을 받는 여진인이 16세기 중반 이래 사실상 자취를 감추고, 임진왜란으로 종주국 명과의 관계가 밀접해진 국제정세에 따라 인신무외교의 원칙을 준수한다는 명분으로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식량난에 시달리던 누르하치는 대신 양곡을 빌리겠다는 타협책을 제시하였으며, 조선 측도 건주여진과의 충돌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1613년까지 해마다 만포에서 수백~수천여 명의 여진인들을 구휼했다. 또한 누르하치에게 복속한 안추라쿠(anculakū) 내하(內河, dorgi birai golo; 동량북)의 로툰(lotun)대해서도 무산을 진으로 승격하고 개시하는 방법을 통해 변경의 안정을 도모했다.[10]
누르하치는 1605년 만포첨사에게, 1607년에는 선조에게 보낸 서신에서 건주등처지방(建州等處地方)의 왕을 자칭하고 건주좌위의 인신도 대체하면서 명의 위소제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군주로 군림하고 있다는 늬앙스를 풍기면서도, 이성량이 경질된 것이나 조선의 대명보고를 의식하여 명에 대한 조공을 재개하는 한편, 조선과는 허례에 불과하긴 했지만 번호규례(藩胡規例)를 준수해주며 오갈암 전투를 통해 우라(ula) 세력을 축출한 회령 방면으로 초피무역을 추진하였으며 녹봉을 지급받았다. 광해군과 장만 등은 비록 흉폭하긴 하나 우라를 통해서 건주여진을 견제하고자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를 수집했으나, 1613년, 누르하치가 우라를 친정하여 국성을 함락하고 버이러(beile)인 부잔타이는 예허(yehe)로 망명함으로써, 대여진 정책은 완전히 일원화 됐다.[11]
1616년 정월, 누르하치는 겅옌 한(genggiyen han)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사르후 전투 직후인 3월 21일, 천명(天命, abkai fulingga) 2년(1618년)이라는 독자적 연호와 함께 후금국의 한(amaga aisin gurun-i han)과 천명금국한(abkai fulingga aisin gurun han)[12] 을 자칭하며, 자신을 조선국왕(solho han)과 대등하게 설정한 국서를 보내어 통교를 요구했다. 광해군은 후금과의 교섭을 통해 난극을 타개하고자 하였으며, 신료들과 달리 비록 속국관계와 그에 따른 사대관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누르하치와의 직접적인 대화에 중점을 두었다. 누르하치는 이외에도 4월 4일 칭한(稱汗)은 물론 명을 남조(南朝)라 지칭하는 서신들을 보내왔으며, 1621년 3월과 6월에는 각각 만주국 한을 자칭하며 광해군을 너(si)라고 지칭하거나, 만포진이 아닌 의주로 발송하는 '''조서'''를 보내왔다. 조정은 회신은 절대 불가하다고 반발했지만, 광해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서를 받은 것에 대해 개의치 않으며 대화를 강조했다. 그는 즉시 차관을 파견하여 회신을 우호적으로 할 것을 명하는 한편, 회신에 반대하는 비변사 당상들을 세상 물정도 모르는 선비라고 질책했다. 광해군의 독촉에 비변사는 마지못해 그에게 동의했으며, 마침내 누르하치를 '후금국 한 전하(殿下)' 지칭하고 후금과의 신의를 강조하는 답신을 보냈다.[13] 1622년 10월 광해군이 신료들의 반발을 무릎쓰고 국서를 회신하고, 11월 모문룡 휘하 명군을 가도로 이주시킨 이후 1622년 10월 및 조선과 후금 간 긴장관계는 개선되었으며, 누르하치는 요서 공략이 집중했는데, 이런 형세는 정묘호란 발발 직전인 1626년 12월까지 지속되었다.[14]비변사가 아뢰기를, "호차(胡差)가 나오면 그 문답할 말을 투서 및 박규영(朴葵英)이 가지고 갈 글의 뜻으로 참작하여 가감하고, 별증(別贈)을 후하게 주어 반드시 환심을 얻도록 하되, 아주 상세하고 신중하게 하여 중국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뜻을 원수(元帥)·찬신(贊臣)·(의주 부윤에게) 치유(馳諭)하여 (어설프게 잘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 적이 바야흐로 (용천에 명 감군어사가 이끄는) 수병(水兵)이 나온 것과 우리 나라가 중국 장수를 대접해 주고 있는 데 대하여 크게 노여워하고 있으니, 이번 문답 때 대답할 말을 상세하게 지시하여 주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광해군은 능양군과 서인에 의해 배명(背明) 행위 등을 했다는 이유로 폐위됐으며, 정변으로 성립된 인조 정권은 명 황제의 책봉을 받기 위해 매달리다시피 하는 것은 물론 모문륭 휘하 명군에게 물자를 쏟아 붇는 등 강한 친명 노선으로 회귀하였다. 다만 요서 전선에 집중한 후금이나 명 모두 조선에 대해 징병과 같은 무리한 요구를 가하지 않았기에 이 국면은 한동안 지속될 수 있었다.[15] 그러나 1626년 누르하치의 사후 홍 타이지를 대표로 하는 분권 통치 체제의 권력 투쟁 가운데 아민(amin)의 주도로[16] 가도의 모문룡 휘하 명군에 대한 원정이 단행됐으며, 1월 14일 의주를 완전히 점령하고 남하를 거듭하며 조선에 먼저 화친을 제의했다.[17] 조선과 후금은 3월 3일과 18일 각각 강도맹약과 평양맹약을 맺었으며, 후금은 누르하치 이래로 갈망한 조선과의 국교를 체결하여 명 질서를 교란시켰다. 후금은 형제맹약에 따라 '한 집안'이라는 표현을 통해 조선을 구속하고자 했다.[18]
강도맹약 이듬해부터 세폐, 개시 등의 경제적 현안, 피로인 속환 등의 문제를 두고 신경전은 있었으나, # 교섭을 통해 점진적으로 정비되어 나아갔다.[19] 때문에 1633년 명, 조선, 차하르 세 세력 가운데 어느 곳을 먼저 정벌하는 것이 좋겠냐는 문제에 대한 제장들의 진주를 보면, 조선은 스스로 귀부하거나 언제든지 쳐서 복속할 수 있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20]
2.3. 영원한 신의를 맹세하다
그러나 1634년 릭단 칸의 사후, 홍 타이지는 차하르의 유민들과 함께 대원전국옥새를 취하고 연맹관계에 있던 몽골제부와 제왕들에 대한 군주권을 강화하고, 인열왕후 한씨에 대한 조문을 명분으로 47인의 사신단을 파견하여 조선이 홍 타이지의 황제 존호를 올리는 데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1636년) 2월 초 2일에, 호부 승정(boigon-i jurgan-i aliha amban) 잉굴다이는 "조선의 왕(solho-i wang)에게 이런저런 말을 전하라"라고, 마푸타는 "조선의 왕의 부인이 죽은 것에 대한 장례의 도리로 조문하러 가라"라고 하며 사신으로 보냈다. 그와 함께 국내의 여덟 호쇼이 버이러(hošoi beile)의 사신, 외번(tulergi gurun) 49 지방 버이러들의 사신이, 한(홍 타이지)에게 (올릴) 존호(amba gebu)를 정하게 하려는 연유로 조선의 왕에게 방문하여 의논하러 갔다.
《만문노당》 천총 10년 2월 2일 기사.
조선 측은 접대인들이 후금 사신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일체 소홀히 접대하였으며, 숙위 금군이 장막 뒤 밤낮없이 감시하게 한 것에 후금 사신단은 크게 놀랐으며 # 조정의 척화 분위기를 감지하자, 쫓기듯 한양을 떠나버렸다. 3월 1일 인조는 척화의 뜻을 담응 하유를 내리며, "강약과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한결같이 정의로 결단을 내려 그 글을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 충의로운 선비는 각기 있는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은 종군을 자원하여 다 함께 어려운 난국을 구제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하였다.[21] # 이 글은 귀환하던 후금 사신단에게 탈취되어 침략의 빌미가 되었다. 인조 정권은 내부적으로 교서를 내리면서도 화친을 이어가기 위해 재차 사신을 파견했으나, 이들이 4월 11일 홍 타이지 존호식에서 배례를 거부하면서 홍 타이지의 친정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22]제관이 말하기를, "인신의 처지로 군상(君上)에게 글을 보내는 법은 없다. 인국 군신간에도 일체 서로 공경하는데 어찌 감히 대등한 예로 글을 보낸단 말인가."라고 하며 물리치고 보지 않으니, 용호(잉굴다이) 등이 얼굴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우리 한께서는 정토하면 반드시 이기므로 그 공업이 높고 높다. 이에 안으로는 8 고산(高山, gūsa)과 밖으로는 제번(諸藩)의 왕자들이 모두 황제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자, 우리 한께서 ‘조선과는 형제의 나라가 되었으니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각각 차인을 보내어 글을 받들고 온 것이다. 그런데 어찌 받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하고, 서달(西㺚; 외번 몽골)이 일시에 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천조가 덕을 잃어 북경만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들은 금국에 귀순하여 부귀를 누릴 것이다. 귀국이 금과 의를 맺어 형제국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금한이 황제 자리에 오른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처럼 굳게 거절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제관이 군신간의 대의로써 물리치자, 용호가 성이 나서 고산 등의 봉서를 도로 가져가며 말하기를, "내일 돌아가겠다. 말을 주면 타고 갈 것이고 주지 않으면 걸어서 가겠다."라고 하였다.
인조는 화친이 단절됐음을 알았지만, 교섭의 끈을 놓지 않으려 6월, 맹약이 깨지게 된 원인이 조선에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격문을 작성하여 9월 통역관을 통해 청과 접촉을 시도하나, 청 측은 조선이 대명전쟁에 원병할 것, 척화신과 왕자를 인질로 보내는 등의 요구 조건과 함께 수락하지 않으면 친정이 있을 것이라 협박했다. 그러면서도 존호식에서 조선 사신이 구타를 당한 일 대해서 청 측이 "자못 후회하고 있다"거나 일종의 간첩 역할을 하는 통역관에게 12월 25일까지 사신을 보낼 것을 요구했으며, 조선인 피로인과 병사들을 활용하여 대명전쟁에서 홍 타이지의 동생 아바타이(abtai)가 전사했다거나, 청 측이 대명전쟁을 준비하며 조선과는 화친을 바라고 있다는 정보를 흘렸다.[23][24]난 조선국(coohiyan gurun)의 변심을 조사하여 알았기에, 그가 대비를 마치기 전에 내가 앞지르고자 하여 천지(abka na)에 고하고 다시 전쟁을 시작한 게 이것이다.
《구만주당》
청군은 철저한 준비 끝에 최후통첩의 17일 전인 12월 8일 압록강을 도하하여 조선을 기습했으며,[25] 남한산성으로 도주한 조정은 농성 50여 일도 안된 1월 21일 청의 연호와, 표문의 형식을 갖춘 봉표 칭신의 예를 이행했으며, 25일에는 최후통첩과 함께 홍이포의 위협이 있었다. 신하들의 압박과 군심의 이반이 심화되는 가운데 강화도가 단 하루만에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조는 1월 30일 쪽색 옷을 입고 서문으로 출성하여 홍 타이지를 대면하여 삼궤구고두례를 행했다.[26] 종전 직후 청은 인조의 질자들을 심양으로 끌고갔으며, 때때로 인조의 입조나 소현세자의 왕위 계승 의향을 흘리며 인조를 압박했다. 또한 왕자들과 함께 척화신 세 명도 잡아갔으며, 삼공, 육경을 비롯한 고위 신료들의 질자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하여 조선의 군신을 모두 길들이고자 했다.[27] 심지어 잉굴다이, 범문정(范文程) 등이 1차 심옥, 2차 심옥 등을 일으키거나 정명수가 영의정 이하 조선 고위 신료 11명을 참살한 후 별연을 요구하기도 했다.
청은 조공에 있어서도 이전부터 조금씩 바치도록 했던 세폐(歲幣)를 매해 1만 석을 강제로 바치게 했다. 물론 세폐미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1639년 요동에는 기근이 벌어지자 대명 약탈전을 준비하던 청은 조선에게 세폐미 1만 석 중 품질이 나쁘다는 이유로 2,250석을 재차 요구했으며, 1640년에는 그 무렵 청에게 완전히 복속된 경흥 대안의 천여 명의 둔전민들을 구휼하도록 했다. 다만 그해 청은 세폐미를 1천 석으로 감면해주었으나, 2년 뒤 홍타이지가 송산전투를 일으키면서 조선에게 그해(1642년)부터 1646년까지 바쳐야 할 쌀 5천 섬을 한달안에 조공할 것을 요구했다.[28]
1644년 북경을 정복하고 수탈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속설이 있지만, 청은 입관과 함께 식량사정이 더욱 급해져서 소현세자를 통해 겨울 전에 5천 석을 조공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듬해 2월에는 무려 '''20만 석'''을 요구했다가 10만 석으로 감면해주었다. 조선은 전국에서 300척의 배와 7천여 명의 인원을 모아 곡물을 지급해야 했다. 이 대대적인 수탈은 1645년 청이 강남을 차지하자 2년 뒤 세폐미를 1백 석으로 감면해준 끝에 종언을 고했다. 일찍이 유례가 없는 수준으로 당시 조선의 조공 마련 비용은 호조 재정 규모 따위는 압도적으로 초과하는 것이었으며, 조정은 백성들에게 결포를 걷어 먹막대한 대민 폐해를 초래했다.[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말기까지 조청관계에서 조공으로 인한 조선의 부담과 소득품의 가치를 비교했을 때 조선은 국가재정상 연평균 전 20만 량 이상의 손실을, 칙행시에는 40만 량에 달하는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30]
입관과 함께 청 입관 후 소현세자가 귀국하자, 소현세자로 나타난 과도기적 의례의 층위가 점차 사라지고 명대에 준하는 의례가 구축됐다.[31] 1653년 명의 속국이었던 류큐가 입조하면서, 호부 중심의 대조선 외교는 예부 중심으로 단일화되고, 비정식적 교섭에서 중심 축을 담당했던 정명수는 파면되었다. 청은 류큐에게 류큐국왕지인(琉球國王之印, lio cio gurun-i wang ni doron)을 발급하기 직전, 만문만 각인된 조선국왕의 인장을 대체할 만한합벽 인장을 조선에 하사했다. 그리고 이를 기준으로 류큐 이래 속국에 모두 만한합벽 인장을 발급하고 북경(연행)에 속국 사신에게 예부연(禮部宴; 명대 상마연)과 회동관연(會同官宴; 명대 하마연)을 베풀도록 하는 규정이 확대, 변용됐다.[32]조선국왕이 올린 표주(表疏)를 읽어보니, 인전(印篆)이 단지 청자(淸字: 만문)만 있고 한문(漢文)은 없으니, 예부(禮部)에 명하여 즉각 청한(淸漢)을 겸한 전문(篆文)으로 개주(改鑄)하여 국왕에게 내리고 국왕의 신민들로 하여금 누구나 다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하라.
병자호란에서 패전하여 속국이 된 조선 위정자들 시점에서는 현실의 성패를 중시하는 권도(權道)보다는 명분을 엄격하게 견지하는 경도(經道)인 의리를 지키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는데, 역대 오랑캐의 왕조들의 운세가 100년을 넘지 못했다는 이야기에 따라 의리를 지키면 희망은 반드시 찾아온다고 믿었다. 이제 그들에게 의리는 형이상학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 이유를 보증하는 신념이자 희망을 담보한 가치였다.[33] 이러한 가치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는 점차 이념화되어갔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북벌론이 부상하여 효종의 군비 강화 정책이 추진되었다.주문(奏文)에 의하면 (조선은) 왜국과 서로 미워하여 성을 수축하고 병사를 모으며 기계(器械)를 정돈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 말이 한 두 번이 아니고 너의 선왕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릇 얼마인지 모른다 ······ 이로부터 보건대, 성을 수축하고, 병사를 모으고, 기계를 정돈하는 일은 본디 왜국과는 상관없는 일이고, 오로지 짐을 어려움에 빠지게 하고자 할 뿐이다. 네가 이미 기망하고 교묘하게 속여 은혜와 의리를 저버렸으니 짐은 그에 대비할 따름이다.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효종의 즉위 후 친청파였던 김자점은 실각했으며, 남명과 일본 세력들의 연계 등의 요인으로 효종의 군비 확충은 청의 감시와 견제를 받으며 진행되었다. 그런데 효종과 송시열이 북벌을 추진하던 1650년대, 식량난에 허덕이던 러시아의 자유민 카자크들이 송화강변까지 내려오자, 새롭게 닝구타총관으로 부임한 샤르후다(šarhūda)가 카자크 격퇴 작전을 위해 조선에 요구하여, 1654년과 1658년에 각각 150명, 250명 규모의 함경도 관내에서 소집한 조총 부대가 활약했다.[34] 다만 조선은 청의 삼엄한 견제와 시비 속에서 북변 방어를 구실로도 군비 확충에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결국 군사력 증강은 국왕의 호위와 한양 도성에 대한 수비 그리고 일본 견제를 명분으로 삼았던 만큼 삼남 지역에 국한되었다.[35] 북벌론은 지지부진했지만 효종과 송시열은 《밀물지교》를 통해 안민을 기본으로 한 군사력 확보의 구체적인 계획까지 거론했다. 그러나 그 즈음부터 종기가 악화된 효종은 1659년 5월 4일 죽어버렸다.[36]
2.4. 오랑캐에서 대국으로
강희 전반기 삼번의 난, 대준가르 전쟁, 대만의 동녕 등으로 청 내부가 소란스럽자, 비록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윤휴 일파 등에 의해 북벌론이 재차 부상했다. 그러나 1683년 강희제가 친정에 나서 대만을 정복하고 해금령을 풀자, 이후 조선은 표류 한인을 통한 강남에 대한 정보 수집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강희제도 마찬가지로, 1685년, 87년 숙종에게 소 무역 중단과 월경인 채삼 문제로 각각 벌은[38] 1만 냥과 역대 최고액인 2만 냥을 부과하도록 했으나, 이제 더이상 조선을 의심하고 견제할 필요성이 사라졌다.[39]
1696년, 숙종이 폐위된 장희빈 소생의 이윤을 세자로 삼자, 강희제는 “왕과 왕비가 오십이 될 때까지 적자가 없어야, 비로소 서장자를 왕세자로 세울 수 있다”는 《대명회전》의 조문을 들어 책봉을 불허했다. 숙종은 황제가 책봉을 불허했대는 소식에, 정부사와 서장관 등을 삭탈관직에다 문외출송하고 재차 사신을 보냈다. 이들은 제독 등에게 뇌물을 쓰려했지만 통하지 않자 숙소 앞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곡을 하며 처지를 알리기도 했다.[40]
1712년 백두산 정계비 설치 당시 강희제의 태도는 과거와 같이 강경하게 속국을 통제하려는 종주국 군주의 모습은 아니었으며, 대조선 정책은 매우 유화적으로 변했다. 이는 대만의 정씨 세력과 남명 정권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것에 대한 자신감으로 보인다. 백두산 정계 당시 우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의 양보로, 조선은 천지 남쪽을 강역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42] 그러나 목극등이 두만강의 수원을 잘못 비정하여 경계표지물이 잘못 설치되었으며, 실무자들은 재량에 따라 두만강 발원지까지 표지물을 이어 설치했다. 조선은 청 측에 공사가 시작된 사실만 전언하였으며, 내부적으로는 이듬해 실무자들의 재량에 따른 추가 설치 공사를 추인하였다.[43] 조선을 의심하지 않은 목극등은 자신의 정계가 옳으며, 조선측이 자신의 의도대로 표지물 공사를 진행했으리라 믿었다.[44] 강희제를 이은 옹정제와 건륭제도 강희 후반과 마찬가지로 공손한 조공국에게 보다 관대한 처우를 내리는 여유를 가졌다. 성경을 비롯한 동북 변경의 지방 관료들은 조선인의 범월을 차단하고 국경지대를 지키기 위해서는 초소 설치와 같은 비롯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지만 두 황제는 조선국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들의 요구를 물리쳤다. 그들에게는 오랜 속국의 절의를 확보하는 것이 보편군주의 위상에 부합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45]
건륭연간에 이르면, 숭덕 원년에 무력을 통해 칭신한 조선이 외번 몽골과 함께 명 질서에 대항하는 청 질서의 일원으로서, 그 국왕 인조가 호쇼이 친왕보다 상석에 배치받은 전례를 계승하여, 반차에 있어서 조선 사신들은 류큐, 싸얌(톤부리 왕조), 란쌍(ລ້ານຊ້າງ, 루앙프라방 왕조)보다 우대받았으며, 조선에 파견하는 청의 칙사들은 모두 3품 이상의 기인으로 확립됐다.[46][48] 더나아가 1780년대 이른바 '진하 외교' 과정에서 영송, 연회를 통해 조선 사신들의 건륭제와의 대면 접촉이 증가함은 물론이요, 아예 건륭제가 사신들에게 조선국왕의 안부를 구두로 묻거나, 정조의 득남을 걱정하고 기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조선 사신들은 건륭제가 시제나 운을 띄어주면 그에 맞추어 시문을 지어 올려 은상을 하사받기도 했다. 조선 사신들의 시문 실력을 통해 건륭제는 천자의 공덕을 표상하는 문명교화를 보증했으며, 덕분에 《청고종실록》에서 조선은 수차례 가장 공손하고 믿을만한 외번, 번병으로 거론될 수 있었다.[49]상이 이르기를, …… 무릇 대국이 외국에 대해서 특별히 우대하는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대(事大)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정성을 다하는 것이 본래 당연한 일인데, 더구나 지금의 황제가 아국(我國)을 대하는 것을 생각하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라고 하니,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황제가 아국을 우대해 준 것이야말로 보통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건대 60년 동안 태평스러운 정사를 펼친 것은 진(秦), 한(漢) 이래로 있지 않았던 일인데 필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청이 대륙을 제패하면서 조선은 사직과 국가의 안위가 청과 직결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비록 임시방편에 불과하나 청과의 우호적 관계를 증진시켜야 한다는 인식을 가졌으며, 정조대에 이르러 조정에게 청은 이제 오랑캐보다는 대국 내지는 상국으로 여겨진다. 정조에게 사대란 별다른 은덕이 내려지지 않아도 외국(속국)이 마땅히 정성을 다해야 하는 일이었으며 거기다 건륭제의 각별한 후대를 받은 것을 더하여, 외교 전술을 넘어서 신의와 공경적 태도로 청을 인식했다. 건륭제와 조선 사신 간의 시문 짓기를 전유한 방식으로, 정조대 청사들은 정조에게 시문을 진헌했으며, 이를 통해 동국(東國)을 통치하는 조선국왕의 덕과 교화를 보증해주었다. 한편으로 대명의리는 정조에 의해 철저하게 예(禮)와 사(史)의 차원에서 다양하게 실천됨으로써 대청 외교의 현실과 충돌 없이 공존하며 현실에 적응해 나아갔다.[50] 이후 청의 성세를 경험한 사인들에 의해 친청 성향을 띄는 북학론이 대두했으며, 19세기 전반 많은 식자층은 더욱 적극적으로 청의 실재와 성세를 인정하였다. 그들은 하늘의 관점에서 이적과 중화가 균등하며, 중화의 복수성과 상대성을 인정함으로써 화이분별의 논리를 분석하고 해체했다. 동시에 지나친 대명의리론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는데, 숭정 연호의 사용에 대한 것이나, 청과의 군신지의를 강조한 것이다.[51]
19세기 초반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 발생하자, 북경 조정은 그 여파가 동북 지역에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군사를 파견하여 경계 순찰을 강화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했으며, 이를 속국에 대한 가경제의 은덕으로 묘사하였다. 조선 역시 청이 요구하는 의례에 따라 청군을 접대하고 북경에 사절을 보내어 소방(小邦)의 변고에 대한 황제의 위덕에 감사함을 표명했다.[52]조선은 본조에 신복(臣服)하는 것이 가장 공순한데, 이번에 조선에 토적이 발생하여 무리를 불러 모아 성에 웅거하여 약탈하고 있다. 지금 조선에서 장차 초포(剿捕)할 정황을 알려왔으니 이를 소홀히 여길 수 없다. ······ 조선은 오랫동안 번봉(藩封)을 지켜왔으니 마땅히 넉넉하게 돌보아야 할 것이다. 루청은 유지를 받들어 곧 그대로 처리해야 마땅하다. 이를 (웅악부도통) 루청(Luceng)에게 전하고 아울러 (성경장군) 허닝(Hening) 등에게도 알게 하라.
2.5. 천조의 속국 지키기
아편전쟁으로 청이 영국에게 패전하고 남경조약 체결하여 유럽 국제법 질서의 일원이 되자, 조선도 그 영향을 받게 된다. 남경 조약으로 청과 조선의 수직적 관계가 곧바로 무너져 갔다는 속설과 달리 당시 《만국공법》은 봉신국(Vassal State)과 조공국(Tributary State) 같은 수직적인 질서도 포괄하고 있었기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53] 청과 마찬가지로 조선은 국제법 질서에 익숙하지 않았음에도, 1845년 영국의 벨처 함장 이끄는 사마랑호(Samarang)가 약 7주간이나 조선 해안을 측량하자, 북경의 예부에 자문을 보내어 인신무외교의 법도와 지정학적 중요성을 들어 난징조약에서 개항된 다섯 항구 외에 교역이 금지되는 항구[禁斷之地]에 자국을 포함시켜줄 것을 요청했으며, 이에 도광제는 흠차대신 키옝으로 하여금 영국을 설득했다.[54]
1866년 병인양요가 발발할 당시 조선 사신들에게 번방의 소식을 접한 청은 《만국공법》에 따라 조선이 청의 오랜 속국이었다고 주장했으며, 판단을 유보했던 프랑스 정부도 청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1871년 청일수호조규 체결할 때 청은 직접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으나 조선을 '소속방토(所属邦土)'로 간주했으며,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당시 조선(고려)를 청일수호조규상의 소속방토라고 지칭하여 일본 측은 조선을 자주지방(自主之邦)으로 명시하면서도 종주권을 부정하지 못했으며, 일각에서는 일본이 조선과 대등하게 조약을 맺을 필요가 없다고 보기도 했다.[55]
그러나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이나 주영청국공사 증기택(曾紀澤)[56] 등을 필두로 한 외교가에서는 일전에 프랑스의 벨로네가 총리아문의 언설을 통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부정한 것이나, 조일수호조규 당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명시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환을 두려워 했다.[58] 그들은 영국령 인도 제국, 독일의 연방국가(federal state) 체제, 스위스와 벨기에의 공동보호 사례 등을 인용 내지는 변용하여 조선에 대한 종주권 강화를 추동했다.[59] 외교가의 추동이 있은 후 청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을 대등하게 설정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조선이 속방(Dependent State, Semi-Sovereign State)임을 조약에 확실히 명시했으며, 같은 해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직후에도 미국에 속방조회를 자국이 종속국(dependency)임을 분명히 했다.[60]
청이 고문관과 군대를 파견하여 내정에 간섭하는 것에 염증을 느낀 김옥균을 필두로 한 급진 개화파는 청불전쟁으로 청의 시선이 분산된 틈을 타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키지만, 일본의 배신과 대원군의 귀환을 우려한 고종의 배반으로 자주 독립을 실현하지 못했다.[61] 1885년, 청은 무역장정에 따라 원세개를 상무위원으로서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임명했으며, 그는 러시아의 남진에 대한 임기응변으로 4차례 가까이 조선국왕의 활동을 규제하여 상무위원으로서의 역할을 범람하기도 하기도 했다. 이에 이홍장은 1886년 9~10월 천진회담에서 속국 조선의 군현화와 감국(監國)을 파견이 없을 것임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고 이홍장-라디젠스키와의 협약(천진협정) 초안에서는 조선국왕의 자주지권(自主之權)을 명확히 보장하기도 했다.[62] 한편으로는 대미사행(對美使行)을 통하여 조선이 자주국임을 나타내려한 고종에 대응하여 1890년 신정왕후 조씨 조문 칙사를 파견하여 고종이 두 번이나 도성에서 나와 사신들을 영접, 환송하고, 청 황제의 칙서에 목례 후 무릎을 꿇고 배례를 행하며 조의문을 경청했으며, 자신은 서문을, 청사에게는 정문을 내어주고 사신들이 머무는 관저 초입에서 영빈관까지 걸어갔을 뿐만 아니라 기타 접대에 있어서도 사신들을 우대하게 함으로써 열강들을 상대로 청의 종주권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1893년 8월 조선이 청에 대한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여 각국 공사들에게 조선의 속국 지위가 마침내 명확히 관철되었다.[63]
조선 왕조의 폭거에 반발한 민중이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고 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하자, 조정 내에서 본격적인 청군 차병 논의가 시작되었고, 1894년 4월 28일 고종은 신하들에게 의견을 묵살한 채 차병 의향을 원세개에게 알렸으며, 원세개와 소통하던 차병론자 선혜청 당상 민영준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도 사직을 수호하여 군국을 보존해준 것을 상기하면서[65] 이틀 뒤 그의 윤허를 받아냈다. 마침내 조선은 차병을 요청하는 공문을 조회했다. 이에 따라 청은 아산을 통해 군함을 곧바로 상륙시켰으며, 천진조약을 통해 이 사실을 일본에도 알렸다.[66] 당시 관군의 승전보에 조선 조정은 청군을 상륙 중단을 요구하고 함대가 아산 해안에 출몰했을 때 상륙을 허가하지 않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 다만 이홍장은 청군의 움직임을 핑계로 일본 군대가 조선에 주둔할 빌미를 자단하고자 최대한 청군의 움직임을 자제시켰으며, 전주화약 이후에는 조선군에게 뒷처리를 맡기고 조선에서 군대를 빼려 했다.[67]원세개가 4월 30일 밤에 전보를 보내어 아뢰기를, “좀 전에 조선 정부의 문서를 받고 열어 보니, …… 임오년과 갑신년에 폐국에서 두 차례 내란이 일어났을 때 모두 중국의 병사들이 대신 평정해 주었습니다. 이에 전의 사례에 의거하여 청컨대 번거롭더라도 귀 총리(總理, 원세개)가 신속하게 즉각 북양대신에게 전보를 보내면 참작하여 몇 개의 부대를 보내어 속히 와서 대신 토벌케 하고, 아울러 폐국의 각 병사들로 하여금 군무(軍務)를 따라 익히게 하여 앞으로 수비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고자 합니다. 사나운 교비들이 섬멸되기를 기다려 즉각 철수를 청할 것이며 감히 계속 머물러 지켜 주기를 청하여 천조(天朝)의 병사들이 외지에서 오랫동안 피로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청컨대 귀 총리가 조속히 적절하게 조력할 방안을 강구하여 급박한 형세를 구원하기를 절실하게 기다립니다."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불식하고자 한 일본군은 발빠르게 한반도의 군사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청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한양에 입성하여 경복궁을 점령했다.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군국기무처로 하여금 무역장정을 폐기했으며, 일본은 마침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홍범 14조를 공표하여 조선이 자주국임을 선언하기도 했다. 4월경 청은 일본군에게 패전하였고, 이에 따라 양국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은 청의 종주권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주국으로 선언됐다. 12월 고종은 "이제 우리의 자주, 독립의 큰 위업을 확고히 세우고 온 나라 백성들에 게 널리 알리노라"라고 윤음했으며, '독립협회'가 창립되면서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문 건립 등이 이루어 졌다.[68]
2.6. 조선의 동립(東立)? 독립?[69]
1896년 2월 아관파천을 끝내고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청과의 조약체결에 따른 국교 회복도 포함되어 있었다. 청일전쟁으로 청과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어 있었는데, 고종은 자주 독립 의식을 분명히 하기 위해 청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대등한 조약 체결을 하고자 했다. 조선은 저자세로 청 상인 보호를 위해 파견되어 있던 당소의(唐紹儀)를 집요하게 설득하여 조약을 체결하고 했으나, 청은 국교를 회복할 경우 통상장정을 체결하여 통상관계를 수립하되, 수호조약 체결, 사절 파견, 국서 교환 등은 하지 않음으로써 속국 지위를 유지하고자 했다. 당소의는 러시아 제국과 일본에 의지하는 조선의 처지를 지적하고, 조선의 자주를 인정하는 청일 간의 강화조약의 한 절이, 조선과 청이 대등한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일본과 러시아 정부의 손을 빌어 당소의를 압박하자, 청은 당소의의 주선 하에, 한국 측에서 북경으로 사신을 파견하기 전에 의약전권대신(議約全權大臣) 서수붕(徐壽朋)을 조선주재 흠차대신으로 삼아 한양에 파견했다. 그는 “대청국 대황제는 대한국 대황제에게.....”로 시작되는 국서를 전달했으며, 마침내 한청통상조약이 체결되어 대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했다.[70]
한청통상조약 교섭 과정에서 대한제국 여론이 두만강 대안의 간도의 영유권을 확보하고 한국민들을 보호하여 자주권을 표출하자는 방향으로 쏠리자, 대한제국 정부는 1885~87년 공동감계를 거치며 토문감계사 이중하가 ‘두만’과 ‘토문’은 동의어라는 근거를 확인함에 따라 철회하고 지방민의 허언으로 간주한 토문강 국계설을 다시 꺼내들어, 백두산정계비를 조사하는 등 간도 분쟁을 재개했으며, 러시아의 동삼성 점령을 틈타 1902~4년 동안 이범윤과 서상무(徐相懋)를 각각 북간도와 서간도(강북)에 시찰, 관리라는 명분으로 파견했으며, 그들은 무력 분쟁을 주저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교수동삼성조약(交收東三省條約)을 무시하고 동삼성의 군사력을 증강하는 러시아가 동삼성을 아예 병탄할 것을 우려하여 청 측과 협상을 추진하기도 했다.[71] 또한 1900년 압록강 하구의 대황초평의 갈대 예취권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72] 러일전쟁 이후 한국과 일본이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러시아의 대항마로써 일본을 우호적으로 보고 있던 청은 한국의 보호국화에 따른 망국을 차분하게 받아들였으나, 1907년 일본이 간도 한국민의 보호를 명목으로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설치하여, 1904년 6월 지방관원들이 체결한 선후장정으로 잠시나마 매듭지었던[73] 북간도 분쟁을 재개하면서 한국의 보호국화는 일본의 동북 침략의 매개로 이용되는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됐다.[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