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아시아나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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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대기업이다. 금호고속과 금호산업, 그리고 아시아나항공이 주요 계열사이다. '''금호(錦湖)는 창업주 박인천의 호'''이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공평동에 소재하고 있다.[2] 교보생명그룹, 삼양그룹, 대상그룹, 쌍방울, 하림, 부영, SM그룹 등과 더불어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금호고속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며 이후 건설기업인 금호산업, 석유화학기업인 금호석유화학, 그리고 금호타이어 등의 계열사를 추가하면서 사세를 확장했고, 제5 공화국 시절 제2 민항사 사업자로 선정되어 아시아나항공을 설립하여 한때 재개 10위 안에 드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창립 60주년이 되던 2006년 대우건설을 무리하게 인수한데 이어 2008년 대한통운까지 시세보다 높은 가격으로 인수하며 10조원 이상의 자금을 쏟아부은 후유증으로 재무구조가 크게 악화되며 그룹이 부실화되었고, 결국 워크아웃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 경영실패의 여파로 경영권 분쟁 등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후 석유화학 부문의 계열사들이 금호석유화학그룹으로 계열분리 되었으며, 2018년 금호타이어를 중국 국영 타이어회사 더블스타에 매각하고 2019년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아시아나항공을 이사회에서 매각하기로 결정하여 금호고속과 금호산업만 남기고 대부분 매각될 예정이라 재계서열 80위로 추락이 현실화 될 것으로 보였으나, 코로나19 사태로 HDC 현대산업개발의 인수가 무산되어 아직까지는 재계서열 17위를 유지 중이다.
2. 기업정신
- 경영목표
- 21세기 세계 초일류 기업 (1996~2002)
- 업계 최고 1등의 기업가치 창출 (2002~ )
- 기업이념: 1996년 제정.
- 세계 일류의 가치창출 기업, 종업원과 함께 가꾸는 기업, 이웃으로부터 사랑받는 기업
- 핵심경영방침: 2002년 제정.
- 윤리경영, 인재경영, 합리경영, 전략경영, 기술경영
- 슬로건
- 아름다운 기업 아름다운 사람들 금호아시아나
- 사가: 작사/작곡은 김도향이 맡았다.
보라 눈부신 태양은 매일 떠오르고
우리 젊음은 여기에 새로움을 만든다
고객을 들어라 저높은 곳으로 미지의 세계로
무한한 지혜와 끝없는 용기로 우리 꿈 만들자
나가자 금호 우리의 꿈 우리미래
나가자 금호 온 세상에 펼쳐가자
3. 역사
창업주는 박인천이다. 박인천은 일제강점기 때 순사 시험에 합격하여 순사로 일하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퇴직금으로 포드 디럭스 세단 2대를 구입하여 1946년 광주에서 택시 운수업인 '''광주택시''' 를 세웠다. 이어 1948년 광주여객자동차(현재의 금호고속)을 설립하여 버스 운송업을 시작했다. 광주를 기반으로 하여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제법 큰 버스 회사로 성장했지만, 1960년대까지는 지역의 수많은 버스 회사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기업이 급성장하게 된 것은 1971년 호남고속도로의 개통 이후이다.
당시 코리아그레이하운드[3] 가 미국 본사로부터 튼튼한 중고 대형 버스들을 들여와 호남 지역의 버스 노선을 장악해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광주고속은
- "고객의 안전을 위해 서행"한다는 주장을 널리 홍보하는 방식으로 맞불을 놓았고
- 호남 지역의 노선은 광주-광양[4] 이 4시간 걸렸을 만큼 도로가 불량했던 데다, 아직 만(MAN) 엔진[5][6] 이 나오기 전이라, 어느 회사건 버스를 한 번 운행하고 나면 반드시 정비를 거쳐야 했는데, 광주고속에서는 이 버스 정비에 사활을 건 수준으로 밤샘인력을 투입해 어떻게든 버스 운행 횟수를 채우거나 늘려나간다.[7][8][9]
- 콩나물 시루 같은 촘촘한 좌석 + 일부 노선은 30분 이상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고속을 타는 충성심 강한 지역사회 고객들의 성원이 더해져 난적 중앙고속과의 경쟁에서 승리, 호남의 고속버스 노선에서 대세를 점하게 된다.
그는 1954년 귀속재산 전남도시제사를 불하받아 섬유사업에 진출했고, 1959년 학교법인 죽호학원을 설립하면서 육영 사업에도 손을 뻗고 1960년 삼양타이어를 설립해 1960년대 후반 자동차 수요 증가에 힘입어 타이어 사업을 주력사업으로 키웠다. 그 후 1967년 금호건설의 전신인 제일토목건축을 설립하여 건설업에도 뛰어들었지만 이 부문은 운수업만큼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고, 장남 박성용 대에 이르러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되었다. 뒤이어 1970년 일본합성고무(JSR)와 합작해 '한국합성고무'를 설립해 석유화학사업에 진출하고 1972년 종합무역상사 '금호실업', 1973년에 금호전자 및 모빌코리아윤활유공업을 각각 설립 후, 1974년에 광주투자금융을 설립하고 극동철강공업을 인수하기도 했으며 1976년에 마포전기까지 인수했다. 그러나 1979년 제2차 오일 쇼크로 어려움을 겪자 금호실업은 금호산업과 금호전자를 합병했고, 1981년에 금호전기가 분가했다. 같은 해에는 출자관리부를 금호실업에서 분리해서 그룹 참모조직 '회장 부속실'로 개편해 그룹 총괄체제를 구축했다.
1984년 박인천이 타계한 후, 자녀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찍지 않고 2세대가 지분을 골고루 나눠 가져 돌아가면서 경영권을 행사하는 독특한 후계 방식을 취했다.[11] 2세대 중 장남 박성용(2대 회장, 1984~1996), 차남 박정구(3대 회장, 1996~2002) 시절에는 형제 상속이 잘 실천됐다.
서울대를 나온 장남 박성용은 수완과 처신에 능해, 승계 후 사세를 키우는 데에 성공한다. 먼저 1984년에 금호실업과 삼양타이어를 통합해 '(주)금호'를 출범시킨 후, 금호건설을 광주고속에 합병시켰다.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제2민항사 설립을 추진한 정부 시책에 호응해 전국 최대 규모의 고속버스 운송 회사로 성세를 구가하던 금호그룹이 제2민항사로 선정되고, 본격 대기업으로 도약하는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이에 힘입어 1988년 12월에는 '아시아나항공'을 설립해 보잉 737-400으로 서울(김포) - 부산, 광주 간 국내선 취항을 개시했다.[12] 1991년 금호개발이 '광주패밀리랜드'를 개장해 서비스업에도 손을 뻗었다.
1986년 8월부터# 2006년 1월까지 붉은 사각형 안에 음각으로 K의 사선 획이 그려진 로고를 썼으며, 금호고속, 금호속리산고속 버스 옆면 도색의 회색 부분이 바로 구 로고의 흔적이다. 오래 된 금호아파트 외벽에서도 볼 수 있다.
1990년대에는 건설 호황이 이어지면서 마침내 금호건설이 흑자로 전환되었고, 이어 금호건설의 규모가 커지자 광주고속이 금호건설을 관리하던 상황이 역전되어 1993년에는 광주고속이 '금호건설'로 법인명을 변경했고, 1995년에 (주)금호가 미국 허츠 사와 제휴해 렌터카 사업을 시작했다.
1996년에는 박성용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자 2남 박정구가 그룹을 이어받아 2002년까지 이끌었다. 1997년 외환위기로 이듬해 구조조정을 단행해 계열사를 정리했고, 1999년 금호타이어가 금호건설을 합병해서 금호산업을 출범하여 그룹의 지배 구조를 개편했다. 2004년 1월 1일, 금호그룹에서 금호아시아나그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2006년 2월, 그룹 창립 60주년을 맞아 오늘날 알려진 '윙 로고' 새 CI를 선포하였다.
박인천 창업주의 3녀 박현주는 복합 조미료 "미원"으로 유명한 대상그룹 명예회장 임창욱과 결혼했다. 임창욱 명예회장이 수사와 건강악화로 경영일선에 나서기 힘들자 지주회사인 대상홀딩스 부회장직에 올라 경영일선에 나서며 재계 여걸로 불린다. 두 사람의 장녀인 임세령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과 1998년에 결혼하지만, 2009년에 이혼했다.[13]
3.1. 형제공동경영 체제의 종말
창업 2세 4형제 중 둘째인 2002년 박정구 3대 회장이 먼저 세상을 뜨면서 3남 박삼구가 2002년 4대 회장에 취임하고 2004년에 그룹명을 ‘금호아시아나그룹’으로 변경하였다. 이 때 첫째 박성용 2대 회장이 동생들과 함께 ‘형제공동경영합의서’를 작성했다. 초기 합의서에는 그룹 회장직은 65세까지이며 최장 10년을 넘기지 않을 것, 회장직은 4가계 합의로 추대할 것, 4형제가 그룹 지분을 동일하게 보유할 것 등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2005년 장남 박성용 명예회장이 뒤이어 작고하자, 박삼구 4대 그룹회장이 합의서를 수정하기 시작한다. 우선 ‘65세, 최장 10년’ 조항이 삭제됐고, 그룹 회장에 대한 4가계 의견이 엇갈릴 시 다수결원칙과 연장자 의견에 따른다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2006년 수정안에서는 그룹 존속 위해 그룹 분할, 해체를 금지한다는 조항을, 2008년 수정안에서는 합의서 위반 시 소유 주식에 해당하는 금액 50%를 다른 가계에 보상한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합의서가 수정될수록 형제간 골은 깊어가고, 심지어 2008년 수정안에는 박찬구 회장이 서명 날인을 하지 않았다.[14] 이 갈등은 어디서부터 이해해야 할까?
박삼구 4대 회장이 그룹을 이끌던 2006년, 창립 60주년을 맞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건설업을 주력 사업으로 성장시킨다는 크고 아름다운 기치 아래 당시 종합시공능력 평가 1위의 초 우량 건설회사였던 대우건설의 주식 72.1%를 무려 6조 4255억 원에 인수한다.[15] 천문학적인 인수금액을 감당하기 위해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가 2조 9천억 원의 대부분을 금융사에서 차입하고, 나머지 액수는 연기금과 사모 펀드 등 재무적투자자(FI)를 통해 조달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FI들로부터 주식에 대한 의결권을 위임 받는 대신 3년 뒤인 2009년 FI 보유 주식을 주당 3만 4천 원에 되사는 풋백옵션을 체결하였다.
바로 이 과정에서 3남 박삼구 회장과 4남 박찬구 당시 화학부문 회장이 갈등을 빚게 된다. 박찬구 회장은 유동성 위기를 우려해 대우건설∙대한통운 인수 반대 목소리를 냈지만 묵살당했고, 2009년 우려가 현실화되자 금호산업 주식을 매각하고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매입했다. 이로 인해 ‘형제공동경영합의서’ 상 동일지분 보유 항목이 위반되긴 했으나, 4가계 합의 룰을 깨고 독단적인 경영으로 합의서를 무력화했던 건 박삼구 회장이었으며 주식 매입은 금호석유화학까지 유동성 위기가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는 게 박찬구 회장 입장이다.[16] (박찬구 회장 입장문 전문, 현재 재무건전성을 보면 금호석유화학 분리는 박찬구 회장의 신의 한 수)
다시 금호의 대우건설 인수 상황로 돌아가 보자. 2008년 대침체로 세계 경제에 공황이 찾아와 증시가 추락한다. 세계적인 불경기 속에 풋백옵션 행사 시기가 다가오는데, 건설업 불경기로 대우건설의 주가는 3년 전인 2005년 11월 인수계약 체결 당시의 약 1만3천원에서 오히려 1만원 전후로 하락해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채무부담을 가중시켰다. (주당 3만4천원에 도달하지 못할 시 금호그룹이 그 가격에 투자자들의 주식을 모두 매입해야 함, ) 채무불이행에 의한 부도를 맞을 위기에서 2009년 12월,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는 워크아웃을 신청하고, 금호석유화학과 아시아나항공도 자율협약에 돌입하게 된다.
결국 대우건설을 인수해서 10대 재벌에 들겠다는 박삼구의 야망은 새우가 고래를 먹는 정도의 무리수가 아니라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완전히 폭망해서, 채권단에게 박삼구의 지분까지 뺏기는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3.2. 금호석유화학그룹 계열 분리
채권단 자율협약에 돌입할 당시만 해도 금호석유화학은 차입금이 2조 2,307억원, 부채비율은 498%에 달했다. 그러나 금호석유화학은 업계 호황 하드캐리로 2010년과 2011년 역대 최고의 실적을 내고, 역대 최고 신용등급인 A-를 달성했으며, 2012년 11월 기준 부채비율을 189%까지 끌어내리는 등 경영정상화를 준수하게 달성하며 2012년 말 자율협약을 졸업했다. 2011년에는 독자적인 비전인 ‘VISION 2020’을 선포하고 실질적인 분리 경영을 이어갔으나 공정거래위원회 기준으로는 계속 금호아시아나그룹 소속이었다. 2015년 12월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공정거래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금호석유화학 계열분리 소송에서 승소하며 금호석유화학은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법적으로도 완전히 분리되었다.[17]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공정위를 상대로 '승소'한 것이 소송과는 아무 관련 없는 금호석유화학에게는 호재로, 승소한 금호아시아나에게는 부채가 늘어난 영 좋지 않은 방향으로 작용하는 상황이다. 어찌됐건 박찬구 측에서는, 무리한 대우건설 인수 같은 일을 벌여 회사를 이 지경으로 만든 형과 거리를 두는 데 성공해 한숨 돌리는 데 의의를 두는 듯.
3.3. 짧은 전성기와 몰락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06년 건설업계의 강호 대우건설을 인수하는 것을 시작으로, 2008년에는 물류 운송의 강자 대한통운까지 인수하였다. 이를 통해 2007년부터 2010년 까지 한진그룹을 제치고 재계 7위에까지 뛰어올랐다. 이로 인해 박삼구 회장은 '''승부사''', '''마이더스의 손'''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이 M&A들이 결국 그룹을 어렵게 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대우건설 인수 건은 형제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었던 무리한 M&A로, 결국 유동성 위기와 구조조정, 그리고 형제의 난을 불러오는 최대 요인이 되었다.
대우건설은 재무적 투자자들이 시가의 배 이상의 가격으로 옵션을 행사하자 인수자금을 마련할 수 없어 회사 자체를 매각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한국산업은행에서 재인수하였다. 그러고도 자금이 모자라서 현금이 잘 들어오던 대한통운 역시 CJ그룹에 매각했다.
가정이지만, 무리하게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모두 인수하지 않고 한 기업만 인수하여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면 한진그룹과 본격 물류기업 라이벌 구도를 유지하거나 한 발 앞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대우건설은 우리나라 건설업의 Big 5로, 대우건설을 보유함으로 금호그룹은 삼성, 현대, 대림, GS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막강한 초대형 건설사를 발판으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크게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존의 금호산업 건설사업부(금호건설) 역시 국내에서는 수준급의 대형 건설사였지만, 기업 규모와 기술력, 국내외 인지도는 대우건설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대한통운 또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물류회사로, 택배사업 이전부터 기업물류부문에서 상당한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오히려 아시아나항공의 항공물류와 연계한다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오히려 기존 사업과의 연계를 감안한다면 비주력 사업인 건설 보다는 물류 쪽에 투자하는 것이 사업 포트폴리오 상으로 더 유리했다.
이 무리한 인수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보유현금이 많았던 대한통운의 현금을 빼내오기 위해서 배당·유상감자·보증·대여 뿐만 아니라 대우건설의 자산을 무리하게 투입하였고, 몇몇 계열사의 지분을 대한통운에 '''비싼 값'''에 매각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뒷탈이 난다.
제일 먼저 렌터카시장 부동의 1위였던 '''금호렌터카'''가 있었다. 당시 렌터카 업계 시장점유율 20%로 1위인 금호렌터카와 5%로 3위인 대한통운 렌터카사업부는 비용을 절감하고 시장지배력을 공고히 한다는 명분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진정 그러한 목적이었다면 그냥 대등합병하면 될 것을 굳이 기존 금호렌터카 법인에서 유일한 사업부인 렌터카 사업부를 대한통운에서 인수하는 식으로 해서 3073억원의 현금이 지출되었고,# 합병에 반대하는 주주들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여 6960억원을 추가지출하였다.@ 이후 껍데기만 남은 기존 금호렌터카 법인(금호알에이시)은 회사채투자자들에게 소송을 당했고,@ 1000억원을 조기상환했다.@ 한편, 통합 금호렌터카 신법인은 KT에 3000억에 매각되어@ KT렌탈로 또 사업부가 흡수합병되었고[18] '''KT금호렌터카'''라는 브랜드로 영업하였는데, 이를 다시 1조2백억원에 롯데그룹에서 인수하여 브랜드명이 '''롯데렌터카''' 로 바뀌었다.
다음으로 금호산업 터미널부문을 떼내 '''금호터미널'''이라는 신설법인을 일부러 만들어서 대한통운에 2190억원에 팔았는데,@ 위에서 설명했듯이 대한통운이 CJ그룹에 팔리면 그 자회사인 금호터미널도 덩달아 팔려, 그룹의 시조인 금호고속까지 흔들릴 판이라 대한통운을 매각하기 전에 금호터미널은 재인수하였다. 그러자 터미널 부지를 활용한 유통업 확장을 노리던 롯데그룹은 대한통운 매각전에서 금호터미널이 빠지자 아예 발을 빼버렸고, 순수하게 물류사업에만 관심있던 포스코 등 다른 원매자들은 인수가격이 하락하는 효과가 있어 / 롯데와 경쟁관계인 신세계는 롯데가 발목잡힌 상황을 환영하였다.
아스공항(현 아시아나에어포트)(240억원), 아시아나공항개발(550억원) 역시 물류 산업을 통합하여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명분 하에, 실상은 대한통운의 현금을 빼오기 위해 팔았다. 그런데 이 회사들은 아시아나항공의 지상조업사들로 항공사 운영에 반드시 필요한 회사들이라 애초에 팔면 안 되는 것이었다. 결국 금호터미널과 마찬가지로 대한통운을 매각하면서 되사왔다. 그런데 문제는 2008년 대한통운을 인수했을 때 아시아나항공과 대우건설이 반반씩 지분을 인수하였는데, 대한통운 매각 당시에는 이미 대우건설을 매각한 이후였기 때문에 이미 결별한 대우건설이 대한통운의 1대 주주자격으로, 이 3개회사 주식에 대해서, 샀던 가격 이하로는 못 판다고 나와서 결국 더 비싸게 주고(금호터미널 2,190억원→2,555억원, 아시아나공항개발 550억원→677억원, 아스공항 240억원→383억원) 사와야 했다.@@
그 외에, 전국에 4개소의 철도와 도로운송을 연계한 복합화물물류터미널을 운영하는 한국복합물류라는 회사도 대한통운에 1652억원에 팔았는데,@ 이 회사는 대한통운과 같이 CJ그룹으로 넘어갔다.
또한 금호생명은 한국산업은행에서 인수하여 KDB생명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산업은행 민영화정책으로 산은금융그룹의 계열사가 되어 안전히 운영하나 싶었는데, 박근혜 정부의 민영화 취소결정과 이후 산은의 몸집줄이기/공적자금회수정책으로 2019년부터 매각 추진중이다.
금호종합금융은 우리금융지주에서 인수하여 우리종합금융이 되었는데, 우리은행 민영화 작업으로 인해 앞날을 담보할 수 없는 상태이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주)의 최대 주주였다. 경기가 좋을 때만 해도 계열 건설사에서 복합 터미널로 재개발 한다고 떠들었었는데, 보유 지분 1,486,236주(지분율 38.74%)전부를 사모 펀드 '''SEBT투자'''에 2000억원에 매각하였다.@ 결국 당시 알짜 매장이었던 인천점이 위치하였던 인천종합터미널 부지를 롯데에 빼앗긴 신세계그룹에서 강남점마저 뺏길까봐 우려하여 센트럴시티에 이어 인수하였는데, 매각가보다 200억이 오른 2200억에 인수하였다.
결국 대한통운과 대우건설을 매각하면서 어찌저찌 상황이 수습되나 했으나, 이번에는 '''금호고속'''[19] 을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려서 그룹을 재건하겠다고 하고 있다(...).[20] 사실 살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박삼구 회장과 그 장남 박세창 전무가 차근차근 은행관리로 넘어간 회사들을 하나씩 인수해서, 그걸 담보로 돈 빌려서, 다시 다른 계열사를 인수하고, 다시 담보 잡혀서 돈 빌려서, 다른 회사를 인수하는 방식의 반복이다. 그 와중에 땡빚을 낼 담보가치를 올리기 위해, 우량 비상장 계열사는 자산가치평가를 박하게 하여 헐값에 오너지분율이 높은 회사에 넘기기도 하고, 아시아나항공의 기내식 납품사업권을 담보로 금호홀딩스에 돈을 빌려준 기내식 공급업체에게 기내식공급을 맡긴 게 잘못되어 아시아나항공 기내식 공급부족 사태가 벌어지고, 분식회계가 적발되어 감사의견 한정을 받아 주식이 거래정지가 되기도 하는 등 회사를 되찾는다는 명분을 앞세운 오너 일가의 욕심때문에 막대한 액수의 금융비용 및 제세금을 지출하여 회사에 손해를 끼치고, 투자자와 고객들에게도 광범위한 피해를 끼치고 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오너 3세들이 대우건설 인수로 인한 손해를 벌충하기 위하여 자본잠식 상태의 부실 기업 지분을 계열사에 떠넘기고 그 매각 대금으로 우량 계열사 지분을 사들이는 엽기적인 행태가 드러나서 검찰 수사를 받기도 했다.금호가 오너 3세들, 부실 계열사에 손실 떠넘겼다.
결국 무리한 인수와 매각 등의 경영 악화로 2019년 4월 15일 '''아시아나항공 매각을 결정했다.''' 아시아나항공이 매각될 경우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곧장 중견기업으로 강등되게 된다.[21] 한때 재계서열 '''7위'''까지 올랐던 재벌 대기업이 이젠 자산이 5조가 안되는 '''중견기업으로 몰락하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대우건설 인수실패 후 계열사를 분리시켜 독립한 동생 박찬구 회장의 금호석유화학그룹은 시장의 호평에 힘입어 준대기업으로 정착하며, 두 그룹의 입장이 뒤집히게 되었다.
아시아나항공이 매각된다면 사실상 금호그룹에 남는 것은 금호고속과 금호산업 단 둘뿐인 셈이다.
2019년 말부터 전 세계와 항공업계를 뒤엎은 초대형 악재가 터진 시점에서 당시의 금호그룹 입장에서는 이를 감당할 수 없었겠지만 위험이 닥치기 바로 직전에 HDC그룹에 나름대로 제값 받고 넘길 수 있었기에 나름 다행인 듯 '''했으나''', 2020년 4월 29일 HDC그룹은 아시아나 인수를 무기한 연기하였고 2020년 9월 11일에 인수가 무산되며 상황은 다시 오리무중이 됐다.
아시아나항공의 매각이 불발되면서 매각 대금으로 유동성을 해결하려고 했던 금호고속이 자금난에 빠지게 되었고 산업은행의 주도하에 금호고속은 채권단 관리 체제로 돌입했다. 산업은행이 투입한 지원자금으로 당장 급한 불은 끈 상태이지만 추후 금호고속 마저 매각되거나 부도를 맞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자구책이 절실한 상황이다. 일단 금호리조트를 매각하기로 결정했으며 그룹내 가장 큰 부동산 자산인 광주 유스퀘어도 개발후 매각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밝히면서 정말 몰락에 가까운 상황에 처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이 거론되는 상황에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20년 12월 8일 그룹 내 컨트롤타워인 '''전략경영실을 해체했다.''' 이 것은 사실상 '''금호그룹을 해체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결정인데, 이미 계열사들을 총괄 경영할 오너 일가들이 경영진 자리에서 물러섰고 아시아나항공을 비롯한 항공부문을 전부 매각하면 그룹 내에는 사실상 금호고속과 금호산업 둘만 남게되어 기업 규모도 대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추락하기 때문에 그룹의 의미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금호고속과 금호산업은 각자 경영으로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정리하자면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인수는 그룹과 두 회사 모두에게 큰 상처로 남게 되었다. 무리한 인수합병이란 평가는 사실 결과론적인 해석일 수 있다. 인수 당시의 경제는 전에 없는 호황이었으며, 글로벌 금융위기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금호그룹은 이후 지금까지 내리막길을 걷게되었고, 금호그룹이 대한통운을 인수하기 위해 부족한 자금력에 대우건설을 끌어들여 결국 과거 대우그룹의 상징과 같았던 대우센터빌딩을 매각하게 되어 대우건설의 자산가치도 크게 떨어지게 만드는 결과만 낳았다.
여담으로, 한때 재계서열 1위 였던 대기업이었다가, 현재는 중견기업으로 추락한 현대그룹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다만 현대그룹은 계열사 분리 독립 이전까지 회사 경영에 그렇게 큰 문제는 없었고, 창업주 자녀들의 경영권 분쟁과 그로 인한 핵심 계열사들이 분사하여 그룹이 쪼그라든 것이고[22] , 이쪽은 그냥 회장 및 경영진이 방만경영을 했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
4. 본사
현재 종로구 공평동 센트로폴리스 A동 7개층(20층 ~ 26층)을 임대하여 본사로 사용하고 있다. 자금난에 빠진 아시아나항공의 유동성 자금 조성을 위해 기존 신문로 사옥 건물을 2018년 5월 도이치자산운용에 4180억원에 매각하였고, 2019년 1월 종각역 부근의 센트로폴리스 A동으로 이전했다.
20층(표시층 22층): 아시아나항공[23] , 금호티앤아이
21층(표시층 23층): 아시아나IDT
22층(표시층 25층): 금호리조트, 아시아나IDT
23층(표시층 26층): 금호건설, 아시아나세이버
24층(표시층 27층): 금호건설
25층(표시층 28층): 금호건설
26층(표시층 29층): 금호아시아나
4.1. 옛 사옥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에 위치한 '''옛''' 금호아시아나 본관. 현재는 '콘코디언(concodian) 빌딩'으로 이름으로 바뀌었다.
2008년 이전까지는 종로구 새문안 교회 옆에 있는 건물(현 크레센도 빌딩)을 사옥으로 사용하다가 길 바로 건너편에 새 사옥(현 콘코디언 빌딩)을 지어 2008년 9월부터 2019년 1월까지 사용했다.[24] 2005년 착공하여 2008년에 완공되었는데, 특징은 미디어파사드로 외벽을 장식하였다.[25]
금호그룹의 현금 마련을 위해 입주한지 10년만인 2018년 5월 도이치자산운용에 4180억원에 매각되었다.
이후 금호그룹은 광화문과 종로 인근에서 새 본사 건물을 알아보았는데, 옛 사옥인 당시 대우건설 빌딩(현 크레센도 빌딩)으로 들어가는 것을 고려하다가 2019년 1월, 신축된 센트로폴리스 A동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금호그룹이 대우건설에 이어 대한통운까지 인수했던 전성기때 입주했지만 그 후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모두 매각하였고 그룹 자체에도 계열분리와 유동성 위기까지 겪게 되면서 결국 입주 10년만에 이 건물까지 매각하게 되었다.[26] 참고로 사옥 바로 옆에 흥국생명 본사가 있는데, 여기엔 그 유명한 조너선 브롭스키의 조각상 '''"망치질 하는 사람(Hammering Man)"'''이 있다. 옆에 있는 금호아시아나는 이 것 때문에 풍수적 문제를 지적받았고 풍수적 이유때문에 그룹에 위기가 닥쳤다는 의견이 있다.(...) #
5. 역대 그룹임원
- 창업회장
- 박인천 (1984~ )
- 명예회장
- 위창남 (1995~1996)
- 박성용 (1996~2003)
- 박삼구 (2009~2010)
- 회장
- 부회장
- 박성용 (1979~1984)
- 박정구 (1994~1996)
- 박삼구 (2002)
- 박찬법, 신훈 (2006~2009)
- 김성산, 이원태, 박홍석 (2015~ )
- 회장 부속실장
- 박정구 (1981~1984)
- 박삼구 (1984~1991)
- 박찬구 (1991~1998)
- 비전경영실장
- 박찬구 (1998~2003)
- 전략경영본부장
- 오남수 (2003~2010)
- 기옥 (2010~2011)
- 박홍석 (2014~ )
6. 계열사 목록
6.1. 현존
- 금호고속: 그룹의 모체가 된 회사이며, 현재 금호그룹의 지주회사다. 1984년 금호건설을 합병했다. 1993년 재편되어 금호건설 고속버스 사업부가 되었다. 1999년 금호산업으로 합병된 뒤 2006년 금호터미널과 금호기업의 합병으로 탄생한, 금호홀딩스와 합병하였다. 이후 금호홀딩스는 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다. 금호고속 자체는 2012년 매각되어 그룹에서 분리되었다가, 2017년 채권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금호홀딩스가 인수했다. 2018년에는 금호홀딩스가 금호고속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오너 일가가 71.2%를 가지고 있다.
- 금호산업(금호건설): 금호고속과 함께 그룹의 양대 계열사였다. 한때 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73년 금호실업이란 무역업체를 시초로 1981년 금호산업, 1984년 삼양타이어를 각각 합병했고, 1996년 금호타이어로 사명을 변경했다가 1999년 금호건설을 합병 후 건설, 고속버스, 무역, 타이어, 렌터카 등을 총괄했다. 그러나 2001~2002년 두 차례 렌터카와 건설부문을 금호개발에 각각 넘기고 2003년 금호타이어, 2006년 금호터미널 및 금호리조트, 2011년 금호고속을 각각 분사해 사실상 건설 부문(금호건설)만 남게 되었다. 2009년 워크아웃으로 채권단에 넘어갔으나, 2016년 다시 금호그룹에서 인수했다. 금호고속이 지분 45.17%를 가지고 있다.
- 충주보라매
- 제2외곽순환고속도로
- 아시아나항공[A] : 1988년 국내 두번째 국적항공사로 성장하여 이전까지 대한항공의 독점 시장에서 복수 민항체제로 전환되는 계기를 맞았다. 그러나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자금난으로 인해 금호아시아나그룹 이사회가 매각을 결정하여 HDC현대산업개발에 매각을 하였으나 인수작업이 진행도중 코로나사태로 인한 경기불황과 인수작업 지연으로 무산되었다. 아시아나항공과 에어서울, 에어부산, 아시아나IDT, 아시아나세이버, 아시아나에어포트, 금호속리산고속, 금호고속관광, 금호리조트 9개 회사 모두 다시 금호아시아나그룹 계열사를 유지하고 있다.
- 금호아시아나 문화재단: 1977년 설립되었다. 문화예술계를 지원하는 비영리 기업으로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구체적인 규모 등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으며, 실제로는 인력장사를 하며 아시아나항공의 하청 일감을 몰아받아 박삼구 회장의 돈줄로 이용되고 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 산하에 2010년부터 생겨난 이른바 "케이 계열사"들을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의 지상업무를 맡는 하청업체들이지만 정확한 규모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 아시아나항공 매각이 확정된 후 실직 위기에 처하게 된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소속 하청 노동자 2000여명이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투쟁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한 현대산업개발은 무려 1144%에 달하는 아시아나항공의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구조조정 실시를 암시하고 있어 금호재단 소속 하청 노동자들의 고용 승계는 난항을 겪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죽호학원: 중고등학교를 운영하는 학원 재단으로 알려져 있지만, 역시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과 마찬가지로 아시아나항공의 인력 하청을 담당하는 케이 계열사들을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거나 그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 금호중앙중학교
- 금파공업고등학교
- 금호고등학교
- 금호중앙여자고등학교
- 케이지: KG, 통근버스 등 육상운송 서비스
- 케이아이: KI, 부동산 관련
6.2. 분가/분리한 기업
- 금호전기·모빌코리아윤활유공업: 조명기기 전문 회사 및 윤활유 업체. 1978년에 금호그룹에 편입된 후 박인천 초대 회장의 동생 박동복[29] 이 경영하던 회사로, 1981년 분리 후 그의 아들 박명구[30] 가 경영중이다.
- 삼화교통: 1973년 박인천의 큰사위인 배영환에게 경영권 승계.
- 유승무역: 1998년 분리 후 이듬해 '서울화인테크'로 변경됨.
- 대의산업: 신양파크호텔 및 무등파크호텔 운영사로, 1995년 계열분리 후 2002년에 파산됨.
- 금호엔지니어링: 2002년 계열분리 후 2005년에 '동호'로 사명을 변경했으나, 2014년에 파산됨.
6.3. 해산/매각
- 경일토건: 구 경일건설. 1996년 금호산업개발에 합병됨.
- 광우교통: 1975년 광주고속에 합병됨. 1977년에 설립된 광우고속과는 다르다.
- 광주자동차공업: 1974년 광주고속에 합병됨.
- (구)금호고속: 2011년 금호산업에서 물적분할된 업체. 2017년 금호홀딩스(현 금호고속)에 합병됨.
- 금호고속관광(초대): 구 세광관광-광주고속관광. 1992년 동성관광에 합병됨.
- 금호고속관광(2대): 구 동성관광. 1998년 매각됨.
- 금호기업: 2016년 금호터미널에 합병됨.
- 금호리조트: 1989년에 설립된 리조트사업 계열사. HDC현대산업개발의 아시아나항공 인수가 무산되고 대한항공으로의 흡수통합이 결정된 후 모회사인 아시아나의 유동성 확보를 위해 2021년 2월 23일 금호석유화학에 매각.
- 금호렌터카(현 롯데렌터카): 금호산업-(구)금호렌터카-대한통운 산하를 거쳐 2009년 물적분할된 법인. 2010년 KT에 인수된 후 렌터카사업부문을 인적분할해 KT렌탈에 넘기고 '금호렌터카글로벌'로 변경했다가 2013년 청산됨. 2015년 이후로 롯데에 인수된 상태다.
- 금호몬산토: 구 KM화학-금호쉘화학. 2002년 금호석유화학에 합병됨.
- 금호부동산중개: 1996년 청산됨.
- 금호사옥: 광화문 본관빌딩 소유주로, 2018년 도이치자산운용에 건물을 매각하고 청산함.
- 금호산업개발: 구 동호기업-북일건설. 1999년 금호개발에 합병됨.
- 금호생명 (현 KDB생명): 1996년에 인수했다가 2010년에 다시 내놨다.
- 금호섬유: 구 명천기업. 1985년 청산됨.
- 금호알에이시: 구 금호개발-금호렌터카. 2008년 렌터카사업부문을 대한통운에 양수한 후 2011년 청산됨.
- 금호운수: 1980년 매각됨.
- 금호인베스트: 박삼구 회장이 금호타이어 인수 자금 마련을 위해 설립한 회사. 2017년 3월 박삼구 회장의 개인회사로 설립되었다가 4월 그룹에 편입되었으나, 박삼구 회장이 금호타이어 인수 포기를 선언하면서 2017년 12월 청산되었다.
- 금호전자: 구 동남전기 안양공장으로 '제스퍼 텔레비전'을 생산했으나, 1980년 (구)금호산업에 합병됨.
- 금호캐피탈: 구 금호주택할부금융. 2001년 금호종합금융에 합병됨.
- (주)금호 스폰지사업부: 1993년 대종스폰지(현 금호화성)에 매각됨.
- (주)금호 철강부문 (현 YK스틸): 구 극동철강공업-금호산업. 1984년 한보그룹에 매각되어 한보종합건설에 합병됐다가, 1996년 (주)한보로 이관된 후 이듬해 한보사태로 부도나 2002년 일본 야마토공업으로 분할매각됨.
- 금호케미칼: 구 미원유화. 2001년 금호석유화학에 합병됨.
- 금호타이어: 2003년 금호산업에서 인적분할된 후 2009년에 워크아웃을 선언했다. 산업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에서 가지고 있었다. 박삼구는 여러 차례 "금호타이어 인수를 통해 그룹 재건을 마무리해야 하는 마지막 과제가 남아 있다"라며 인수 의지를 밝혔으나 실패하고, 2018년 중국 국영 타이어회사 더블스타에 매각되었다. 박삼구가 이 회사를 다시 사들이려는 과정에서 아시아나항공 기내식 공급부족 사태가 촉발되었다.
- 금호텔레콤: 1999년 독립 후 '에버텔'로 변경했으나, 2010년 폐업됨.
- 금호특송: 구 서울고속화물. 1994년 동서배송운수에 매각되어 '일송택배'로 변경했다가 1998년 이후 회사가 사라짐.
- 금호페이퍼텍: 구 조일제지. 2006년 아세아그룹에 매각된 후 '아세아페이퍼텍'으로 변경됐다가, 2012년 아세아제지에 합병됨.
- 금호화순리조트: 구 대한리조트. 1998년 금호개발에 합병됨.
- 금호EQS컨설팅: 1999년 금호개발에 합병됨.
- 남일건설: 구 원일기업. 1996년 금호산업개발에 합병됨.
- 대한통운 (현 CJ대한통운): 2008년에 인수했다가 2011년에 다시 내놓았다.[31] "대한통운" 만 매각하는 것으로 그 산하의 다른 계열사는 제외였다. 금호그룹이 대한통운을 보유하고 있었을때 대한통운의 현금을 빼오기 위하여 금호터미널, 한국복합물류, 아시아나에어포트, 금호렌터카 등의 회사를 비싼 값에 매각하였었는데, 대한통운의 재매각시 금호렌터카는 KT에 매각하였고, 다른 자회사는 분리하여 아시아나항공으로 재인수되었다. 그래서 대한통운이 가진 금호터미널 부지를 눈독들이고 인수전에 참여하였던 롯데는 나중에 빠지고,# 그 대신 현대로지스틱스를 인수했다.
- 대한통운국제물류: 2008년 대한통운에 합병됨.
- 대한통운터미날: 2009년 청산됨.
- 동아생명: 2000년 금호생명에 인수합병됨.
- 마산항제4부두운영: 2008년 금호아시아나그룹에 세트로 편입된 후 2011년 CJ그룹에 매각됨.
- 삼양타이어 제사사업부: 구 전남제사. 1973년 삼양타이어공업에 합병된 후 1976년에 공장 부지를 매각함.
- 삼진고속버스: 1973년 광주고속에 합병됨.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대주주였으나, 2013년 신세계에 지분 매각되었다.
- 신인천관광: 1993년 매각됨.
- 울산항만운영: 2008년 금호아시아나그룹에 세트로 편입된 후 2011년 CJ그룹에 매각됨.
- 의료법인 송광의원: 구 (의)광주의원. 1988년 청산됨.
- 인천공항외항사터미널: 2002년 지분매각 후 2016년 폐업됨.
- 제일특송: 1991년 금호특송에 합병됨.
- 진양개발: 골프장 진주CC 운영업체로, 1998년 금호개발에 합병됐다가 2001년에 동성여객컨소시엄으로 분할매각되어 '진주개발'이 됨.
- 충일건설: 1990년 아시아나항공에 합병됨.
- 한국도로관리: 2009년 금호개발상사에 합병됨.
- 한국복합물류: 2011년 CJ그룹에 매각됨.
- 한국복합화물터미널: 1999년 금호개발에 합병됨.
- 한국합성고무공업: 1985년 금호화학에 합병됨.
- 한남고속버스: 1974년 광주고속에 합병됨.
- 호남고속버스: 1972년 광주여객자동차에 합병됨.
- 호남복합물류: 2007년 한국복합물류에 합병됨.
- 화인소재공업: 1997년 유승무역에 합병됨.
- 게이트고메코리아: 아시아나항공이 40%를 보유한 기내식 공급업체. 아시아나항공 기내식 공급부족 사태와 연관이 있다.
- 케이에이: KA, 지상여객 서비스
- 에이큐: AQ, 항공운송지원 서비스
- 에이에이치: AH, 외항사 여객서비스
- 케이오: KO, 수하물 및 기내청소
- 에이오: AO
- 케이알: KR, 정비관련 서비스
- 케이에프: KF, 청소 및 방제
7. 오너 일가
7.1. 호남 기업?
금호그룹의 인식과는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호남기업으로 인식되는데, 금호그룹이 호남을 기반으로 대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 금호그룹의 모체인 광주여객은 60년대까지 지방의 흔한 버스 회사였지만, 1971년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된 후 호남 지역 고속버스 노선을 1위로 '''과점'''하는데 성공하면서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여기에는 호남 지역민들의 성원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던 것. 때문에 금호그룹이 호남 지역사회를 지원하는 모습이 뜨뜻미지근하거나,지역 출신 인재 채용 부문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듯한 모습을 보이면, 호남 주민들이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렇게 그룹의 모태가 호남 지방에서 시작되어 성장한 연유로 호남 기업으로 분류되지만, 금호그룹 측에서는 호남 기업만으로 인식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업의 규모 자체가 대단히 커져서 향토기업이란 타이틀에 큰 의미를 두기 보다는 고르게 시선을 분배해야 할 필요성도 있기 때문. [32] 또한 재계서열 기준으로 보자면 호남을 대표하는 기업은 부영그룹이다. 단지 이쪽은 금호에 비해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을 뿐.
- 이제는 단순히 광주택시로 시작했다는 이유로 금호아시아나그룹을 호남 기업으로 보기에는, 현재 그룹의 매출과 채용 규모가 지역에 큰 영향을 준다고 보기 어렵다.
- 무엇보다 지역사회에서 기여할만한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다. 호남 지역에서 일자리 창출에 크게 기여하는 기업들은 광주의 기아자동차, 전주의 현대자동차 공장, 익산의 하림 공장 내지 여수 석유화학 단지 내에 있는 GS칼텍스, 금호석유화학, 여천NCC, 대림산업 등이다. 본사가 광주에 있는 금호타이어도 호남 지역 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있지만, 금호타이어는 2018년도 이후로 금호아시아나 품에서 떠나 중국의 더블스타로 경영권이 넘어가 버려 지금은 안타깝게도 그룹과의 연관성이 없는 남의 기업이 되었다. 또한 계열사인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제5공화국 시절 서울항공으로 시작하여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성장했기 때문에 호남 지방과 연관이 적다.
- 그리고 운수회사 시절, 사세를 확장할 때 9 ~ 12개월씩 임금을 체불하고 다시 그 돈과 융자금을 합해 신규계열사(예, 삼양타이어)[33] 를 설립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지역사회에서 인심을 많이 잃었다.[34]
결국 삼양사, 교보생명에도 거절당한 호남권 프로야구단은 해태제과에 인수되면서 해태 타이거즈가 된 것이다. 이후 해태 타이거즈를 매각할 당시에도 금호그룹에선 전혀 나서지 않았고 대신 광주광역시에 제조공장이 있는 기아자동차(현대자동차그룹)에서 인수해서 기아 타이거즈가 되었다. 만에 하나 금호 타이거즈가 되었어도 금호의 재무 상황이 나빠지는 모습을 보면 주인이 또 바뀔 운명이었을 것이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03년에 서울 연고의 프로축구단을 창단하려했으나 광주-전남권의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창업주의 5남인 박종구가 지역색이 다른 이명박 정부 하에서 舊 교육과학기술부(現 대한민국 교육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2차관을 지내고, 자회사인 아시아나항공이 에어부산을 만드는 등 그룹 차원에서는 적극적인 듯. 이 때문에 호남 연고의 프로 스포츠 관련해 그룹측의 지원은 지역민들의 기대치가 그리 높지 않다.
다만 스포츠 문제의 경우엔 다른 이유도 있긴 하다. 본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창업주인 박인천 회장부터 현재까지 주로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예술 분야에 대한 투자 및 인재 육성에 노력을 기울인 대신 상대적으로 프로 스포츠 분야에는 관심이 적은 편이었다. 한때 금호생명에서 WKBL 팀을 운영했던 게 거의 전부였고 이마저도 한국산업은행에 인수되어 운영하다가 OK저축은행의 위탁 운영을 거쳐서 BNK금융지주로 매각되어 부산 BNK 썸이 되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학교법인인 죽호학원에 소속된 광주 금호고등학교(운암동 소재)는 광주 FC의 U-18 유소년클럽이다.
8. 문화 예술 영재 육성 지원
문화 예술 분야 중에서도 특히 클래식 분야에 대한 후원은 상당한 수준이며 체계적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문호 박성용 회장이 상당한 수준의 클래식 애호가였던 것이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는 영재 육성에 관심이 많았기에, 최근에 두각을 나타내는 재능 있는 한국인 신예 음악가 치고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후원을 받지 않은 이가 거의 없을 정도다. 서울의 舊 본사 건물[35][36] 과 광주 서구 광천동 유스퀘어 안, 그리고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에[37] 금호아트홀이라는 실내악 홀을 만들어서 싼 값에 좋은 연주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특히 매년 영재들을 심사해서 이곳에서 연주 기회를 제공하고, 그 외에 각종 지원을 한다. 광화문 금호아트홀에는 심지어 박성용 회장이 생전에 매번 앉던 좌석이 따로 있다. 치우쳐 있는 곳이라 이른바 VIP석도 아니고 오히려 싸게 팔 가능성이 높은 자리지만 연주자는 잘 볼 수 있어서 매니아들이 좋아할 만한 자리이다. 그러나 광화문 금호아트홀은 2019년 4월 30일부로 폐관예정으로, 클래식 뮤지션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다만 연세대 금호아트홀 건립 때는 그룹이 부실로 휘청거리고 있는데, 개인의 명예를 위해 모교에 수십억을 투자하는 것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도 많았다.
또한 워낙 몸값이 비싸서 수지타산이 안맞아 대한민국에는 못 데려오고 있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을 성사시켜 정기적으로 오게 만든 것도 금호아시아나그룹이었다. 티켓 값이 최고 45만원이어서 올 때마다 욕도 많이 먹고 있지만 워낙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이니 그래도 표는 다 나간다. 문제는 개런티가 워낙 세서, 그래도 약간 적자가 난다 카더라. 오죽했으면 박성용 회장 장례식에 재계보다 음악인들이 조문을 더 많이 왔을 정도였다.[38]
[1] 2021년 02월 23일 현재 접속 불가능[2] 2008년에 광화문 인근 신문로(종로구 신문로2가)에 사옥을 신축하여 사용하고 있었으나 2019년 건물을 매각하고 종각역 인근의 오피스 빌딩인 센트로폴리스로 이전하여 고층부 7개층을 임대 사용 중이다. 그러나 아시아나 항공이 매각되면서 임대 규모도 절반 이하로 축소될 것으로 예측된다.[3] 1969년 코리아나관광진흥이 미국 그레이하운드와 50:50 합작으로 설립한 고속버스 업체. 1978년에 중앙고속에 인수되었다.[4] 1990년대 들어 고속도로 정비 후 1시간 거리로 간주되고 있다.[5] 대우중공업에서 독일 MAN 社로부터 라이선스를 얻어 생산한 엔진. 힘도 좋고 잔고장이 적어서, 이 엔진을 단 새한-대우 버스가 출시된 후부터, 정비 비용 및 시간을 절감한 운수회사들이 비로소 제대로 이익을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6] 특히 5공화국 출범 후에는, 정부 방침으로 버스 엔진이 MAN엔진으로 통일되기에 이른다.[7] 아시아나항공의 마법사식 기재운용의 기업문화가 이 시점에 싹트고 있었다.[8] 이 무렵의 중앙고속은 제휴를 맺은 미국 그레이하운드 사의 영향으로 회사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을 나름 준수하고자 노력하는 회사였다고 한다. 노동자 인권은 개나 먹는 거인 줄 알았던 시절에 보기 힘든 훈훈한 풍경이었지만, 이를 본 금호고속의 어느 임원은 "니들은 우리에게 안 되겠구나."라 말하며 일종의 공략지점 및 활로를 찾았다는 후문.[9] 이러한 분위기가 지금도 계속되는 것인지, 중앙고속은 여전히 괜찮은 복지와 직원처우를 자랑하는데 비해 금호는 썩 좋지 않다.[10] 동부고속, 한진그룹과 더불어 운수 업체가 대기업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한다. 다만 버스 회사 경영 노하우나 실적은 금호 쪽이 더 나았기에, 한때 모 한진그룹 임원이 '''"비행기 1대 값도 안 되는 것들한테 (버스 회사 실적에서)뒤지고 있다"'''며 한탄한 적도 있다는 후문이다.[11] 버스 차장이 자녀에게 표를 안 받고 승차 시켰단 소식이 들어가면 자식을 호되게 야단쳤다는 일화가 있다.[12] 참고로 아시아나항공의 첫 국제선 취항은 1990년 1월 10일 서울(김포)-도쿄(나리타) 노선 취항이다.[13] 즉, 임세령은 박인천의 외손녀, 박삼구의 조카가 된다.[14] 류현정, 공동경영합의서와 금호家 '형제의 난', 조선비즈, 110623[15] 당시 국내 일반기업 M&A사상 최대 규모. 심지어 당시 대우건설 인수 적정가를 3조 원 정도로 예측하고 있었는데 박삼구가 엄청나게 지른 것 때문에 뒤에 일어나는 사단이 발생한다.[16] 무엇보다 박삼구의 도를 넘은 갑질에 박찬구가 분개하여 항의하자 대판 싸운 적도 있었다.[17] 류형열, 대법원, “금호아시아나와 금호석유화학은 다른 기업 집단”[18] 이후 금호렌터카(2대)는 '금호렌터카글로벌'이란 청산법인이 됐다.[19] 금호산업주식회사 고속사업부.[20] 다른 계열사도 아니고 하필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시초이자 상징인 금호고속을 희생시키겠다는 뜻이라서 내부, 외부 양쪽에서 논란이 있다.[21] 애초에 아시아나항공 인수 후보군이었던 신세계그룹은 정작 금호고속 인수를 원했던 모양. 한화그룹은 아시아나항공보다 정비공장이 있는 대한항공 인수를 원했다고.[22] 그룹의 모태인 현대그룹의 위상이 축소된 것일 뿐 범 현대가에 속한 그룹들은 여전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재벌 중 하나이다.[23] 아시아나항공의 서울분사무실이다. 일부 부서만 있을 뿐 진짜 본사는 김포국제공항 인근 오쇠동 아시아나타운에 있다.[24] 기존 사옥은 서울역 앞 대우센터빌딩 매각 후 대우건설이 사옥으로 사용하다가 2019년에 을지로4가 써밋타워로 이전했다.[25] 사진에 보이는 쪽이 아니라 뒤쪽이 미디어파사드이다. 그래서 해가 진 후 서울광장에서 광화문 방향을 바라보면 미디어파사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한때 금호그룹의 손에 있었던 서울스퀘어(구 대우센터빌딩)에도 미디어파사드가 있다.[26] 저 건물은 금호산업이 건설한 것으로 매각 당시 콜옵션을 행사해서 다시 구매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A] A B HDC현대산업개발에서 인수작업을 진행하다 코로나사태로 인한 경기불황과 인수작업 지연으로 인한 재정난 악화로 인수가 무산되었다.[27] 옛 코오롱고속이 이 회사와 동시에 서술되어 있었는데 금호고속으로 합병됐기에 이 회사와 관련이 없다. 코오롱고속 또한 코오롱그룹이 아니라 이미 떨어져 나간 방계회사였다.[28] 출처: http://www.mediasr.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946[29] 그의 호를 딴 금파공업고등학교가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다. 바로 옆에 금호고, 금호중앙여고, 금호중앙중이 있다.[30] 재벌 가문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엔지니어·발명가 출신 경영자다.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전자공학과(1978학번)에 입학해 학사·석사·박사 학위까지 받았다.[31] 인수전 막바지에는 친족간인 CJ그룹과 삼성그룹마저 참여하면서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급의 치열한 인수전을 보여주었다. 당시 CJ에서는 삼성증권에 인수 관련 자문을 맡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삼성SDS에서 포스코와 협력하여 인수전에 뛰어들더니 삼성증권에서 인수자문을 철회해버렸다. 삼성증권에서 갖고 있던 CJ의 정보는 어디로 갔을까? 덕분에 CJ측에서는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었고, 시장에서는 포스코+삼성의 승리를 기정사실화 했었는데, CJ측이 분노파워로 가격을 무려 5000억원씩이나 높게 써내는바람에 인수에 성공하였다,[32] 사실 대표적인 호남기업이라고 하기엔 애매한게 오늘날 전라북도에선 금호의 영향력이 광주/전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33] 금호타이어 전신.[34] 동종업자였던 한진그룹 조씨 일가 역시 자사 직원들을 그다지 후대하지 않았지만, 이쪽은 주로 미군들을 상대하며 성장했고 결정적으로 사세를 확장한 것도 월남전 때 현지 미군 및 파월한국군 사령부의 지원 하에 일을 맡았던 데에 힘입은 것이었다. 또한 전쟁 통에 중간중간 미군 물자를 전용하는 것도 가능했던만큼, 굳이 직원들 월급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되었던 것. 당시는 군에서 귀국 box나 손망실 처리 등으로 미군이 지원해준 양질의 물자들을 국내에 비공식적으로 반입하는 상황이었기에, 이런 부분까지는 파월사령부에서 큰 제재를 가하지 않았던 덕분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35] 위에서 설명한 인수합병시 하필 이 건물을 대우건설에 배정했고 그 결과 현재는 이미 남남이 되어버린 대우건설의 본사가 되었다. 음향에 신경써서 워낙 실내악 전용 공연장으로 제대로 만들어 놨기 때문에 대우건설 쪽에서도 방빼를 시전하기 어려웠고, 덕분에 대우건설 본사인데 3층만 금호아시아나가 쓰는 불편한 동거가 이어지고 있다.[36] 참고로 대우건설은 원래 서울역 앞 대우빌딩을 가지고 있었고, 금호그룹에 인수된 이후에도 가지고 있었으나, 금호그룹이 회사 사정이 나빠지면서 대우빌딩도 모건스텐리에 팔아치웠고, 대신 금호그룹 사옥을 대우건설에서 받아왔다. 산업은행에 팔릴 때에도 사옥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여튼 舊 대우그룹의 자존심 같았던 대우빌딩을 모건스텐리에 빼앗긴 것 때문에 대우건설 직원들이 금호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를 바득바득 간다고 한다. [37] 이쪽은 현재 그룹 회장인 박삼구가 연세대학교 동문회장이라 기부금을 출연해서 만들었다. 광화문에 있던 원래 금호아트홀과 구별을 위해 이쪽은 금호아트홀 연세라고 부른다.[38] 스포츠 캐스터로 유명한 임용수가 바로 금호아시아나그룹과 연이 있다. 성악과를 졸업한 후 1993년 금호그룹에 입사했다. 당시 맡은 직책은 금호그룹의 사회공헌 사업 중 하나인 클래식 음악 후원 재단의 직원으로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