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성채
1. 소개
九龍城寨 / 九龍城砦[2]아편굴 투성이에 더럽고 쥐가 득실거리고 치외법권이며 무척 위험하죠. 홍콩의 "sin city"[1]
에요.
홍콩 구룡반도(九龍半島)에 있던 슬럼가.
'구룡성[3] '이라고도 불린다. 홍콩의 주요 언어인 광둥어로는 '''가우룽싱자이'''(gau2 lung4 sing4 zaai6)고, 표준중국어로는 '''주룽청자이'''(Jiǔlóng chéng zhài)다. 보통 구룡성채로 불렸지만 1993년에 철거될 당시 '''구룡채성'''(九龍寨城, 까우룽짜이씽)이라고 쓰인 현판이 발굴되면서 원래 이름은 구룡채성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냥 글자 하나 순서 차이다. 영어로는 '''Kowloon Walled City'''.
원래 구룡성채는 청나라가 영국을 막는 국경 요새였으나 홍콩이 영국으로 넘어간 뒤 여기만 청나라의 영토로 남아서 치안권이 붕뜬 치외법권이 되었고 그 결과 난민과 범죄 조직이 자리를 잡아서 구룡성채는 양조위, 금성무, 임청하, 왕페이 주연의 영화 중경삼림의 무대가 되었던 장소로 유명한 충킹맨션(重慶大廈, Chungking Mansions)과 더불어 한때 외지인들이 발을 들여놓으면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다는 '''홍콩의 양대 마굴'''이었다.
그러나 청킹맨션은 우선 홍콩 지하철 침사추이역 '''역세권'''으로 교통부터가 넘사벽으로 편하다. 단지 인도인/파키스탄인 비율이 높아 남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인종 차별 비슷한 감정 때문에 평가절하된 면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홍콩 경찰이 예전부터 직접 치안을 담당해서 구룡성채에 비하면 훨씬 안전한 서민용 숙박 공간이었고 이민국 + 경찰의 합동 단속으로 불법체류자는 모두 추방하고 범죄자는 전부 검거해 감옥으로 보냈다. 그래서 배낭 여행객들에게 추천될 정도다. 다만 충킹맨션 내의 숙박업소 가격은 주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고 하더라도 도심 한복판이라[4] 절대적으로는 여전히 높다. 그나마 인도인 / 파키스탄인들이 경영하는 숙소는 싸지만 인도 / 파키스탄 특유의 위생관념 부재로 손가락만한 바퀴벌레와 과자만 열면 몰려드는 개미떼, 그리고 여성의 경우는 위협을 느낄 정도인 험악한 분위기[5] 등으로 이쪽은 한국인은 잘 안 간다. 한국인이 잘 가는 홍콩인들이나 일본인, 대만인, 백인 등이 운영하는 숙소는 대체로 깔끔하나 당연히 깔끔한 만큼 비싸다.[6] 허나 유감스럽게 구룡성채는 일단 무정부 상태에 가까웠으며 교통도 아주 열악했다.
구룡성채와 비슷한 예로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폰테 타워,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구 콘피난사 금융센터(이 쪽은 헐렸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의 스캄피아 아파트가 존재한다. 공교롭게도 대한민국에 구룡마을이 존재하는데 구룡성채만큼은 아니지만 이곳도 불법 건축물로 형성된 빈민가이다. 사실 세계적으로도 고층건물 슬럼은 거의 보기 힘들다.
2018년 6월 1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817회에서 다뤄졌다.
2.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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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의 구룡성채 항공사진. 이때만해도 고층건물이 상대적으로 평범하게 솟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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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성채 철거 직전 항공 사진. 행정상 옆의 깔끔한 건물들은 영국령 홍콩 땅이고 저 지저분한 건물들만 계속 무주지로 남아 있었다. 구룡성채 주변의 판자촌은 이전에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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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사진. 왼쪽 구석에 코카콜라 사인이 보인다. 100년이 넘게 계속 중국의 일부로 지켜왔지만 서구화, 개방의 물결은 여기도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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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 빽빽한 건물들 사이로 비행기가 보이는 광경은 미디어 속의 홍콩을 묘사할 때 거의 필수로 나오는 클리셰이기도 했으나 성채와 카이탁 국제공항이 둘 다 사라진 이후 사라져 버렸다.
참고로 중국에 반환되기 이전의 향수로 이 광경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데, 막상 근처의 쿤통구민들에게는 아주 불쾌한 것이 저 둘이었다. 바로 코앞에 빈민가가 있지, 공항도 있지, 우범지대라는 인식+항공기 소음 때문에 아무도 이사 안 오려 해서 집값은 똥값이지 등. 실제로 쿤통구와 구룡성구 구민들은 성채와 공항이 사이좋게 중국 반환으로 날아가자 되레 환영하는 분위기였었다. 현재 쿤통에는 카이탁 국제공항도 없어지고 대규모 쇼핑몰과 사무 단지가 들어서는 등 분위기가 완전히 변했다. 참고로 지나가는 비행기는 캐세이퍼시픽 항공의 A33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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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후인 2009년 9월의 모습(구룡채성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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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구룡성채 주택가를 축소해서 만든 미니어처. 구룡채성공원 내에 있다(출처).
3. 역사
본래 구룡성채는 청나라의 요새로, 팔기군이 군대로 주둔하면서 홍콩의 영국군을 감시하던 요새였다.[7] 그러나 제2차 아편전쟁 이후 구룡성채가 있던 구룡반도까지 영국의 소유가 되었지만 구룡성채만큼은 중국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슬럼가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부터인데, 우선 요새였던 이 장소가 거주지가 된 것은 홍콩일치시기부터였다. 1941년 홍콩을 점령한 일본군이 구룡성채의 성벽을 헐어버렸는데, 1945년 일본 제국이 패퇴한 뒤에는 부랑민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하면서 거주구역이 되어버렸다. 여기까지는 상관 없는데 문제는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중화민국은 이 지역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1948년에 영국 관리들과 홍콩 경찰들의 진입 시도를 막아냈다. 그리하여 홍콩 식민지 정부가 관리할 수 없게 되었는데, 문제는 소유권을 주장하는 중국 국민당 정부도 관리를 거부하여 완전한 무법지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중화민국과 영국의 사이가 나쁘지 않아서 치안 공백이 곧 해결될 것 같았지만, 1949년 국공내전이 끝나면서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도주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 대륙을 차지하면서 구룡성채의 치안 문제는 더럽게 꼬여버린다. 상술한대로 영국 정부가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구룡성채를 관리해야 할 '''중국'''이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양립해버린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후 영국 정부는 1950년 1월 6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한다는 선언을 했지만 이번엔 중화인민공화국 측에서 수교를 거부했다. 중화민국은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실효성이 없었고, 영국은 중화민국과 중공 모두 개입을 거부하여 개입할 수 없었고, 중공은 홍콩 깊숙히 들어가있는 이 지대를 굳이 관리할 필요성을 못느껴서 관리를 포기한 상황에서 결국 구룡성채의 행정 관리 문제는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중일전쟁 및 제 2차 세계대전 때부터 부랑민이 몰리기 시작해 1950년대부터 중국 대륙에서 난민이 몰려오는 가운데 홍콩 정부에서 정착을 거부한 난민들이 구룡성채로 몰려들었다. 특히 대약진 운동같은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피난민들이 폭증했었다. 대약진 운동 당시 접경지에서는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홍콩에 밀입국하려는 본토 중국인들이 허다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관할 문제로 경찰들이 치안 활동을 못하니 온갖 범죄 행위들이 벌어졌다. 살인 사건이 벌어져도 어떤 경찰도 손대지 않는, 아니, 손댈 수 없는 진정한 무법지대였다. 예를 들어 마약 거래를 적발해도 홍콩 시민권자만 처벌할 수 있었다. 홍콩 경찰은 바로 코앞에 몽콕 경찰서 등의 경찰서 여럿을 두고 있었지만 있으나 마나였는데 성채는 소유권도 그렇고 삼합회가 판치는 곳이라 1960년대 당시 부패한 경찰들이 진입을 꺼렸다.[8]
이렇게 홍콩, 영국, 중국이 모두 관여하지 않는 상황을 '''3불관'''이라고 했는데 타이완 섬으로 도주한 중화민국 정부가 뒤늦게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영국 입장에서는 1971년 중국인민공화국이 유엔에 가입한 이후에 이미 중국본토와 국교정상화 협상을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더이상 대만 정부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자연히 성채는 소속이 분명치 않아 공중에 붕 떠버렸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도 홍콩 소방처의 도움을 받기 힘들었고, 환자가 생겨도 역시 홍콩 소방처의 구급차를 못 부르고 성채 내 병원에서만 취급이 가능했다. 의무교육도 제공되지 않아 구세군이 세운 유치원밖에 없었다.[9] 전기와 수도는 밖에서 무단으로 끌어다 쓰거나 자체적으로 우물을 판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충당했다. 배수관은 길거리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길을 가다가 노후한 배수관이 터져 갑작스러운 물폭탄을 맞는 경우도 있었다.
홍콩에서 가장 유명한 성매매업소, 도박, 아편굴, 헤로인, 무허가 병원, 무허가 한의원, 무허가 치과 등 불법 업소들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10] 사실 이들은 말이 무허가 의료인이지 중국에서는 중화민국 시절부터 정식으로 의료 활동을 해왔던 이들로 중국 대륙의 공산화와 문혁의 광기를 피해 도망쳤다가 홍콩에서 중화민국 의사 면허가 인정되지 않아 정식 개업을 못 하고 어쩔 수 없이 불법 영업을 할 수밖에 없던 이들이었다.[11] 즉 사전적 의미의 돌팔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정당하게 공부해서 정당하게 취득한 의사 면허인데도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휴짓조각이 된 역사의 희생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성매매업소나 도박장같은 범죄와 연관이 높은 업소나 불법 의료시설같은 업소만 있는 건 아니고 저렴한 인건비와 세금이 없다는 장점 아닌 장점 덕택에 사실 식품공장[12] 이나 의류공장, 플라스틱공장 같은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것도 구룡성채에 많이 들어서기는 했다. 물론 이것도 무허가였다.[13] 공장운영들이 잘 될지 의문이 들수가 있는데 그래도 식품공장의 경우는 위생을 나름 신경 쓴 편이었다. 한국에서 일반적 중국 이미지와 달리 이 곳은 그 당시 '''영국 땅'''인지라 식품공장에 문제가 있으면 제 아무리 치외법권이라도 짤 없었다. 더구나 저런 열악한 작업환경은 라이치콕이나 쿤통 등에 위치한 도심 공장들도 똑같았다. 단지 경제발전 등으로 점차 개선되었을 뿐이다.
이후 1970년대 들어 무허가 고층 건물들이 제대로 된 설계도 없이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슬럼화가 가속화되었다. 1975년에는 베트남 전쟁 때문에 보트피플로 전락한 베트남인들까지 대거 몰려들어 성채는 더욱 혼잡해졌는데, 특히 이들이 베트남 화교들이어서 화교계 삼합회가 토착 삼합회와 알력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984년 중영공동성명이 체결되어 홍콩의 중화인민공화국 반환이 결정됨에 따라, 영원히 치외법권일 것 같던 구룡성채도 철거 수순에 돌입한다.
이후 1986년에는 영국령 홍콩 정부가 중국 정부의 암묵적 동의하에 경찰을 동원하여 범죄자들을 싹쓸이했다. 그리고 구세군등 봉사단체의 마약중독자 갱생 운동과 이곳 주민들이 직접 만들어 활동한 자경단 때문에 치안도 향상되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영국 정부는 추가 논의 끝에 구룡성채의 철거를 1987년에 발표했다. 영국령 홍콩 정부는 27억 홍콩 달러를 들여 구룡성채에 살던 3만 3천 여 주민들에게 보상금으로 지급했다. 보상금이 적다며 불만을 품은 주민들도 있었으나 홍콩 정부는 1991년 11월부터 1992년 7월에 걸쳐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킨다. 당시 공식적으로 영국령 홍콩이 아닌 중국의 영토였지만 어차피 홍콩 전체가 중국에 반환될 예정이라 영국령 홍콩 정부가 구룡성채의 철거와 공원 조성 작업을 집행하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홍콩 경찰에 의해 철거 법집행에 들어간다.
철거는 1993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직전에 성채의 합법적 소유권자인 중국 정부는 '''탐험가'''들로 하여금 지도를 작성하게 하였다. 철거 작업은 1993년 3월 23일에 시작되어 1994년 4월에 완료되었다. 이로써 악명 높던 구룡성채의 주택가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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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성채공원
홍콩 정부는 이어서 이곳을 구룡채성공원(九龍寨城公園, 까우룽짜이씽공원, Kowloon Walled City Park)으로 조성했다. 공원 조성 작업은 1995년 8월에 완료돼 공식적으로 홍콩 정부의 시정총서(市政總署, Urban Services Department)의 '''관리''' 하에 들어갔다. 같은 해 12월 22일 영국령 홍콩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크리스토퍼 프랜시스 패튼에 의해 공식 개원하게 되었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이래 이 공원 일대는 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의 일부가 되었다.
4. 특징
구룡성채의 가장 큰 특징은 마구잡이로 지어진 건물의 숲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계획은 커녕 제대로 된 설계조차 없이 외부로 뻗어나갈 수 없는 상태에서 인구가 계속 늘어나는대로 자꾸자꾸 빌딩을 높이 세우게 되었다. 중심부에는 유치원과 양로원이 있었다. 중간에 고층빌딩이 푹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단층건물이 유치원과 양로원이다.
교육시설이 구세군 교회 부설 유치원밖에 없어 대부분의 아이들은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유치원은 단 2명의 교사가 있었다. 구룡성채의 유치원은 특이점이 있었다. 이는 유치원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의 아이들은 유치원 방 한켠에 잠을 재우고 다른 한 그룹은 밥을 먹인 뒤, 반대로 재운 그룹을 깨워 밥을 먹이고 미리 밥을 먹인 그룹은 다시 재우는 식의 교대작업(shift operation)을 하였다는 점이다[14] . 어쨌든 구세군의 구호 및 선교활동 등으로 구세군은 홍콩 내에서 현재도 존재감이 아주 커졌다. 모두가 꺼리는 무법천지 무정부구역에 들어가는 거 하나만으로 당시에는 목숨을 각오한 일이었다.
바로 옆에 악명 높던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이 있어 주변의 건물은 6층 이상 짓지 못하게 하는 규제가 있었지만 구룡성채는 영국령 홍콩이나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의 두 개의 중국도 법권이 미치지 않는 월경지대였기에 이러한 법률을 무시하고 최고 15층까지 올라가게 된다[15] . 이후에 카이탁 국제공항도 해체된 후 그 자리에 공원[16] 이 만들어졌다. 거기에 증축 및 개축을 반복하다 보니 미로와도 같은 골목이 생겨났고[17] 닭장처럼 빽빽한 아파트가 들어차서 대낮에도 햇빛을 못 보고 전등을 켜서 살아야 하는 곳이 되었다. 항상 어둡고 습기로 축축한 환경, 그리고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이 없어서 수도관이나 전기 배선 등이 천장에 늘어지게 되면서 특유의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다.
이런 독특한 환경 때문에 성항기병 시리즈 등 홍콩 영화 촬영지로도 많이 쓰였고 사이버펑크에 큰 영향과 게임 등에서도 간간이 등장하게 되었다.
무분별한 증축 및 개축의 결과 불과 0.03㎢의 잠실 야구장의 관중석 등을 합친 총 면적과 비슷한 면적에 무려 5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인구밀도로 환산하면 약 '''1,900,000명/㎢'''로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인구밀도'''를 가진 곳이었다. 철거된 후 최대의 인구밀도 타이틀은 구룡성채에서 인도 뭄바이의 다라비(Dharavi) 슬럼가와 콜롬비아의 산타크루즈 섬이 가져갔지만# 이쪽은 고작(?) 590,000/㎢ 밖에는 되지 않아서 비교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다.
참고로 1,900,000명/㎢의 인구밀도면 전세계 모든 사람을 제주도 2개 면적에 몰아 넣을 수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서울시 안에 '''11억 5천만 명''' 혹은 한반도 안에 '''4,196억 930만 명'''이 살고 있는 수준이다. 러시아는 무려 '''32조 4,900억 명.''' 물론 저건 아파트들을 빽빽하게 꽂아놓은 특수한 곳이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문제는 편의시설[18] 도 극도로 부족하기 때문에 구룡성채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저런 높은 인구 밀도의 구현은 불가능하다. 굳이 비유하자면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경계 모양을 따라서 20~40층짜리 빌딩들을 쫙 이어붙여 짓고, 그 안에 편의시설까지 마구잡이로 쑤셔넣어서 한 층 면적이 서울시 면적과 같은 초대형 건물을 지으면 비슷해진다.
대략적인 내부 생활상은 이곳으로.[19] 이곳도 참고해 볼 만하다.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 월스트리트 저널의 구룡성채 탐험
홍콩의 공영방송국 RTHK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갱장집(鏗鏘集)'에서 방영한 구룡성채 내부의 모습 및 생활상.
구룡성채 내부를 돌면서 320여 장의 사진을 찍고 32명을 인터뷰한 사진집도 있다. City of Darkness. 홍콩에서도 라이프스타일샵인 GOD의 일부 점포[20] 에서는 원서로 팔기도 한다.
구룡성채의 당시 실제 생활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도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독일어
월스트리트 저널의 영상에서는 구룡성채에 살았던 사람, 성채를 연구하는 사람, 구룡성채에서 영화를 찍은 사람 등등이 등장하며 단순한 기괴한 건축물 단지가 아닌 몇 만명의 사람이 살았던 공간으로서 구룡성채를 보여주고 있다. 상단의 구룡성채 탐험기 포스팅을 한 일본인 요시다 이치로 본인이 나오기도 하며, 일본 가와사키시에 구룡성채의 일부를 재현한 오락실도 나온다. 이 오락실은 일본의 미디어 대여 서비스업체인 GEO에서 운영하는 오락실 중 하나였다. 라인업은 여느 일본의 대도시에 있을 법한 대형 오락실과 비슷한 편이다. 점포 홈페이지. 한 여행 블로그의 소개 소개 영상(한글자막) 단, '''일본 오락실치고는 이례적으로 24시간 내내 18세 미만은 출입금지로 되어 있는 점포이므로 어린 유저들은 주의해야 하였다.''' 그리고 이 해당 게임센터조차도 2019년 11월 19일을 마지막으로 영업을 종료하였고. 그리고 이 건물조차 모티브처럼 철거되어 버렸다.# 상기 된 월 스트리트 저널의 18분 짜리 영상은 '''구룡성채가 잊힐까? 아니면 기억될까?''' 라는 자못 심오한 질문을 던지며 끝난다.
5. 관광 정보
침사추이 청킹맨션 앞에서 KMB 홍콩 버스 1번을 타서 구룡채성공원 정류장에 내리거나 MTR을 타고 쿤통선 록푸역에서 내린 뒤 남쪽으로 15분 정도를 가면 큰 공원이 나오는데 거기가 구룡채성공원이다.
2020년 마온산선 카이탁역이 개통하면서 카이탁역에서 가장 가깝게 됐다. 거리로는 가깝지만, 실제로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다. 카이탁역 주변은 재개발 중이라 카이탁역 출구에서 구룡성채까지 직접 연결되는 도로가 없으므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2020년 9월 29일 기준 아직 카이탁-구룡성채 간 홍콩 버스 노선은 안 생긴 상황이므로 버스 타고 가려면 록푸역에서 내려야 한다.
전체적으로 시대상은 청나라 말기 쯤, 구룡성채가 있던 역사를 볼 때 초창기에 가까운 분위기다. 공원의 관리사무소에 해당하는 곳이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오래된 편에 속하는 구룡성채의 유일한 흔적이다. 공원 내에는 당시의 역사를 보여주는 건물과 전시물이 남아 있지만 이에 대한 자료의 양은 없는 것보다는 나은 정도다. 센서를 이용한 전자 사진집이 구비되어 있으나 사진의 양은 많지 않다. 3개의 방에서 프로젝터로 사진을 영사해주는 수준 정도여서 전자 사진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벽을 따라서 구룡성채의 역사가 담긴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 게 그나마 남아있는 역사 자료이다.
공원의 전시 내용도 구룡성채의 탄생부터 철거까지 모든 범주를 다루고, 내용도 청나라 성채의 역사에 집중되어 있다. 초창기 구룡성채의 남문 유적 등은 잘 보존해놓고 전시하고 있다. 쓰레기 더미에 묻혀서 그렇지, 대포 등은 멀쩡히 보존되었다. 치외법권지라 발굴 및 관리를 못 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래 문단에 나오지만 유물과 달리 관련 문서 자료가 부실하고, 공원 내부의 유물 설명 수준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자료가 죄다 대만으로 넘어가서(...) 설명 자료에는 "이런 식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문장이 많다.
문서로 남아있고 관련 사진, 역사성 등을 지적하는 부분은 역시 현대 구룡성채, 즉 인외마경이 된 이후의 것들에 많다. 이 부분은 1980년대 홍콩 반환 협상 체결 이후 영국, 중국, 홍콩 3자가 철저하게 조사를 했기 때문에 이런 자료를 많이 전시했다.
흔히 홍콩 영화를 많이 본 사람들이 기대하는 구룡성채의 생활상 같은 건 프로젝터로 보는 사진 이상을 기대하면 안 된다.구룡성채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 게 다행이긴 하다. 구룡성채는 거의 홍콩의 흑역사 비슷한 곳이기 때문에 일부러 의도적으로 흔적을 싹 지운데다가 뭘 남기고 싶어도 '''부동산으로서 가치가 0에 수렴해서''' 남길 수도 없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청나라 시대 팔기군 주둔지로 시작한 첫 역사에 집중하는 게 낫다. 중국사 관련 지식이 있는 사람이면 오히려 이게 더 흥미로울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룡성채공원에 가면 초기 역사라는 팔기군 주둔지 관련 자료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청나라 멸망 이후 국권을 정식으로 인수[21] 한 건 중화민국이다 보니 관련 자료가 죄다 대만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진짜로 1970년대 및 1980년대 옛날 홍콩 영화에 나오는 성냥갑 아파트를 보고 싶다면 섹깁메이역 근처의 메이호 하우스(美何樓, Mei Ho House)가 더 나은 곳이다. 원래 1960년대 건설했던 초창기 정부 아파트를 유스호스텔 겸 박물관으로 개조한 곳으로 여기 가면 진짜로 옛날식 아파트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재현되어 있다. 더구나 여기는 지하철 역세권이라 찾아가기도 더 편하고 도심지인 몽콕하고도 도보로도 갈 만큼 가깝다.
안에는 간이식 매점도 있지만 기념품점 같은 걸 기대해서는 안 되고 그냥 구멍가게 수준이다. 아니 애초에 홍콩엔 기념품점이 따로 있는 곳이라고는 빅토리아 피크 정도뿐이고 나머지는 이렇게 구멍가게 수준의 간이식 매점뿐이다. 오히려 시내 문구점 같은 데에 기념품 비슷한 게 더 많다.
2015년 3월 쯤에는 구룡성채의 중심에 있었던 집 유적이 공사중이다 보니 볼 것이 거의 없었는데 당연히 시간이 흐른 현재는 완료됐다.[22] 유적지 흔적이라도 남아있는 포로 로마노나 콜로세움처럼 나머지를 상상으로 때우는 식의 구경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다 철거한 상태이다 보니, 구룡성채에 대한 관광을 목적으로 일부러 찾아가기에는 그리 매력적이진 않다.
참고로 구룡채성공원은 침사추이의 '''구룡공원과는 다른 곳'''이니 주의.[23]
6. 대중문화에서의 구룡성채
이곳의 슬럼 이미지는 사진집 '어둠의 도시(City of Darkness)' 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고, 수많은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풍경의 클리셰 중 하나는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에 착륙하기 전 저공비행하는 여객기가 배경에 등장하는 것이다.
- 후지와라 요시히데의 만화 권아에서 주인공 켄지가 여기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켄지의 중국 모험이 시작되는 장소다.
- 성항기병 1편과 2편, 아비정전의 장면 일부가 이 곳에서 촬영되었고 SF 소설가 윌리엄 깁슨은 뉴로맨서, 버추얼 라이트, 코드명J 등의 소설에 이곳의 이미지를 반영했다. 사이버펑크물에서 등장하는 슬럼가는 남미의 파벨라와 이 곳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
- 제이슨 본 시리즈의 2편인 본 슈프리머시의 소설편에서는 스토리상 중요한 장소로 나온다. 공각기동대의 홍콩도 이곳을 모델로 하였고 그 외 트라이건 맥시멈의 구룡성도 이곳을 모델로 한 곳이다.
- 풀 메탈 패닉!에서도 7~8권[24] 의 후반부 무대이며, 이 부분을 애니화한 풀메탈 패닉 TSR에서는 비중이 크게 증가했으며 특유의 분위기도 잘 살렸다. 주로 낮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 많다는 게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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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에서는 Numbers 미션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1968년 당시와 달리 그리 높지는 않았고, 그마저도 게임적 과장을 위해 더 높아졌다. 게다가 주민들이 컬러 텔레비전을 쓴다.[25]
- DES BLOOD3에서는 주인공 형사가 비밀조직 수사를 위해 구룡성채를 탐험하는데, 만약 게임 오버를 당하면 삼합회에게 검열삭제... 나리타 료우고의 엣사 대교 시리즈의 무대인 인공섬도 이곳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 격투 대전 게임 아랑전설 3&KOF의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야마자키 류지가 자신이 속해 있었던 조직의 보스를 잔인하게 처단한 후 도주한 곳이라는 설정이 있다. 실제로 KOF 97에서는 해당 장소가 배경으로 나오기도 했다.
- 특유의 난잡한 스프롤 형식의 도시와 네온사인들은 사이버펑크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공각기동대 극장판의 한 장면으로도 나오며 SAC에서도 비슷한 모습의 슬럼이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사이버펑크물인 PSYCHO-PASS의 슬럼가는 이 곳을 모델로 하는 듯 하다.
- 크라잉 프리맨에서 푸친란이 귀도 무라마사를 남편 대신에 가진 후에 칼에 걸맞는 실력을 키우기 위해 찾는 스승이 있는 곳이다. 페야산이 그녀를 말리면서 말하길 막강한 백팔룡 조직도 건드리지 못하는 곳이라고 한다.
- 1997년작 PS1용 호러 어드벤처 게임인 KOWLOON'S GATE -九龍風水傳-의 주 무대이기도 하다. 구룡성채에 헬게이트가 열려서 어둠세계의 구룡성채에 침식당하는 걸 막기 위해 분전하는 풍수사의 이야기를 다룬 게임인데, 특유의 약빤 듯한 센스로 인해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게임으로 취향에 따라서 카미게로도 쿠소게로도 평가받는다.
- 세가의 쉔무 2에선 홍콩의 아바딘, 완차이에 이은 세번째 구역으로 등장하는데 구룡성채의 안 좋은 부분들을 어느 정도 순화시킨 선에서 재현한 곳이다. 20층이 넘어가는 높은 건물들과 여기저기 폐허[26] 가 그대로 남은 곳에 주민들이 살고 있는 동네인데, 치우문의 하부 조직인 황천회에서 대다수의 지역을 점거하고 있고, 렌 우잉이 이끄는 헤븐즈가 황천회와 대립하고 있다. 야생남을 제외한 대부분의 스트리트 파이터들과 구룡성 여기저기에서 싸워볼 수 있고, 미니 게임 중 애프터 버너와 행온을 이곳에서 습득할 수 있는데, 행온은 찾기 어려운 곳에 숨겨져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모르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다. 잠입 액션, 대전 격투등 쉔무 2에서 가장 거칠고 화려한 활극을 즐길 수 있는 곳.
- 섀도우런: 홍콩에서는 구룡성채가 철거된 곳에 다시 슬럼가가 들어선다. 원래는 하층민 복지의 일환으로 지은 주거단지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슬럼화되었는데, 거의 지옥과 같은 곳으로 묘사되며 게임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풍수지리를 매우 중요하게 따지는 홍콩답게 풍수지리가 줄거리에 매우 밀접하게 엮여있다.
- DARKER THAN BLACK에서도 배경으로 등장한다. 흑의 계약자 외전[27] 에서 헤이와 인의 도피처 중 한 곳으로 나온다. 외전 1화의 차회 예고에서 '홍콩 구룡성' 이라고 언급되며 2화의 전반적인 배경 또한 구룡성채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 다음 웹툰 양말도깨비에서는 함박눈 마을의 모티브가 되었다. 물론 동화풍 웹툰이기 때문에 이곳만큼 무서운 곳은 아니다. 다만 다른 마을보다 범죄율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넘어진 사람을 봉변 당할까봐 무시하는 곳이니...
- 레진코믹스에서 연재되고 있는 웹툰 구룡특급에서 가상의 배경을 설정할 때 구룡성채의 일부를 차용하였다.
- 토마p의 구룡 레트로의 가사는 이 곳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추측된다.
- 바라카(영화)에 구룡성채의 외관이 잠시 등장한다.
- 블랙 블러드 브라더스의 전란을 좋아하는 흡혈귀 일족 쿠롱 차일드 일족의 발상지이다.
- 판타즈멀이라는 서바이벌 호러 FPS 어드벤처 게임은 배경이 구룡성채인데, 정확히는 텍스쳐나 레벨 디자인만 구룡성채풍이고 나머지는 로그라이크 스타일로 맵이 랜덤 생성된다. 하지만 원래 구룡성채가 배배 꼬인 미로투성이다 보니 저렇게 나와도 위화감이 없다.
- 장강명의 소설 호모도미난스에도 까울룽씽자이로 언급한다.
- 역습의 샤아에서 나온 홍콩의 모습은 이 구룡성채다.
- 구룡 제네릭 로맨스는 구룡성채를 모델로 한 가상의 지역에 사는 주민들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다. 다만 주인공 듀오가 일본인으로 설정된 점도 있고 해서 구룡성채가 무대인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불명.
- 영화 다운사이징에 모티브가 된 것으로 보이는 건물이 등장한다.
- 홍콩에서 만든 공포게임 홍콩실록의 배경이 구룡성채이다.
- 넷플릭스 오리지널시리즈 러브 데스 로봇 에서도 구룡성채로 추정되는 곳이 나온다.
- Warhammer 40,000의 하이브 시티, 특히 하이브 하층부와도 유사하다. 따지고 보면 코모라도 비슷하게 만들어진 곳이다.
- 만화로 보는 FGO에서 칼데아의 방이 서번트와 종회로 가득차자 오르가미에게 건설비를 받은 구다코가 칼데아를 마구 증축하는데, 여기서 오르가미가 "이렇게 구룡성같이 무계획적으로 쌓으면 나중에 큰일나는거 아니야?"라고 언급한다.
- 어플몬스터에 등장하는 사이버 구룡의 모티브이다.
- 섀도우런 리턴즈:홍콩 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정확히는 구룡성채가 있던 자리에 새로 세운 Walled City. 하지만 그마저 다시 슬럼화되었다.
[1] 제법 오래된 표현이다. 1930년대에 마피아의 소굴이었고 부정부패로 막장을 달리던 도시인 매사추세츠 린(Lynn) 지역의 별명이 신 시티다. 그 이후에는 라스베이거스의 별명으로 쓰이다가 후에 이것에서 모티브를 딴 프랭크 밀러의 만화 씬 시티가 연재되기도 했다.[2] 寨와 砦는 통자(通字)다. 당시 주민들도 성채복리회(城砦福利會, 일종의 상가 번영회)와 같이 城砦로 많이 썼다.[3] 이 흔적은 홍콩 행정구역 이름에 구룡성구라는 식으로 남아 있다.[4] 전술했듯 이래뵈도 역세권이고 청킹맨션 상가는 잘 나가는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다.[5] 불법 체류자들의 아지트로 쓰인 적도 있을 정도였다.[6] 생각보다 환경 좋은 블록에는 미국인들이 내부를 통째로 리모델링해서 자신들 살림집을 겸한 숙소를 만든 경우도 흔하다. 물론 비싸다.[7] 원래 설치 목적을 생각해보면 현재의 중국인민해방군 주홍콩부대와 미묘하게나마 연결되기도 한다.[8] 성채의 소유권이 강조되는 게 사실 염정공서 발족 전 경찰 조직이 부패했고, 부패한 경찰간부들이 삼합회와 유착해 일종의 핑계를 삼은 게 크다. 1980년 이후 성채 얘기가 싹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부패가 일소되면서부터 일이다. 당시 중국인들은 잘해야 경찰서장밖에 못 해서 서장직에 오르면 100% 한 몫 단단히 챙겨 퇴직할 생각만 했다. 홍콩 느와르라는 장르가 나온게 1950년대 및 1960년대 풍 이야기다.[9] 당시 선교사이나 중국인 목회자들에 따르면 유치원에서는 영어와 광동어 교육 및 기본적인 위생상식 등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표준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10] 개중에는 이 요소들을 짬뽕한 마약 치료소(...)도 있었다. 심지어 이 마약 치료소는 영국인 재키 풀린저(Jakie Pullinger)에 의해 운영되었다.[11] 당시 홍콩은 영국령인지라 당연히 영국의 의사면허가 있어야 병원 개업이 가능하였다. 현재는 반환 후 홍콩 면허가 발급되지만 영국 면허 의사도 자격을 인정한다. 정작 중국본토는 면허를 인정 안 한다.[12] 국수, 생선, 딤섬, 에그타르트 등의 식품 가공. 당시 홍콩 유명 레스토랑에 대부분 납품하였다.[13] 작업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쥐, 바퀴벌레가 돌아다니는 환경뿐만 아니라 쉬는 요일없이 매일 12시간씩 일해야 했다.[14] 구세군이 세운 유치원은 작고 열악했다. 교사는 단 2명, 창문도 없는 방에서 선풍기 하나가 전부인 환경이었다. 진짜 영국인 선교사나 중국인 목사들이 사명감만으로 운영한 곳이 맞다.[15] 당연히 엘리베이터는 없다. 아니 5층 이하 공옥(公屋)들은 구룡반도 한복판 집도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공간이 없어 짤없이 계단을 오르내린다.[16] 구룡성채에 관한 자료를 기대하고 간다면 실망할 것이다. 사진 몇장만 전시되어 있다.[17] 그래도 골목마다 이정표가 있었으며, 을지로가 인쇄거리, 철재거리 등으로 나뉘는 것처럼 구룡성채도 식당이 몰려있는 골목, 매춘골목, 공장골목 등으로 나뉘어있었다고 한다.[18] 구청, 주민센터, 경찰서, 소방서 등[19] 하단을 살펴보면 그냥 작은 마을 정도였던 성채가 어떻게 요새화 되었는지 볼 수 있다.[20] ex. PMQ점[21] 청나라 멸망 때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인 쑨원한테 주권을 양도하고 위안스카이가 청나라 황실의 안녕을 보존한다는 정식 문서를 체결하였다. 그래서 당시 청나라가 가지고 있던 자료는 국공내전 중에 싹 다 대만으로 가져갔다.[22] 2015년이 기준으로 잡힐 정도로 나무위키에서 홍콩 및 중국/대만 쪽은 업데이트가 잘 안된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유저들의 흥미도가 일본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다. 당장 역시 흥미도 떨어지는 유럽만 해도 업데이트가 잘 안된다.[23] '채성'이라는 글자가 없으면 십중팔구 침사추이 북부의 구룡공원을 지칭한다.[24] '끝나는 Day by Day'. 국내에는 '일상에 고하는 작별'로 번역되었다.[25] 상단 이미지에서 보이는 비행기는 보잉 747의 5번째 형식인 보잉 747-400인데 정작 작중 배경인 1968년엔 보잉 747은 최초형식인 -100형도 출시는 커녕 개발 중이었다. 또한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제이슨 허드슨이 들고 있는 총인 OTs-02 키파리스는 1972년에 개발되었으며, 키파리스에 달린 도트 사이트는 1975년에야 나왔다. 사실 게임 전체적으로 고증오류가 심각한데, 자세한 것은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고증오류 문서 참조.[26] 어느 정도냐면 고층건물 바닥이 여기저기 빠졌는데, 보수는 고사하고 그냥 길다란 나무 판자를 깔아놓은 게 다일 정도..[27] 2기 유성의 제미니에서 DVD/BD 영상특전으로 나왔다. 총 4화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