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게임의 역사
1. 개요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 정의하는 '비디오 게임'이란, 컴퓨터가 사용자의 입력을 받아 정해진 규칙에 따라 처리하고, 그 과정이나 결과를 출력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게임이다. 비디오 게임은 글자나 그림, 소리만으로 출력될 수도 있지만, 많은 비디오 게임이 영상표시장치를 이용한 시각적 출력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최근의 많은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시각적 표현이야말로 게임의 백미이고, 우리의 눈을 얼마나 즐겁게 해주느냐에 따라 게임의 가치가 달라진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지만, 게임의 본질적인 정의를 생각해봤을때 "비디오 게임"이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조작했을 때 그 결과를 컴퓨터가 스크린에 표시해주는 프로세스를 거치는 모든 게임을 통칭한다고 볼 수 있다.
기타로 배우는 게임의 역사[1]
2. 시대별 비디오 게임의 역사
2.1. 1940년대 ~ 1960년대
아마 최초의 비디오 게임이라 하면 1972년 아타리에서 오락실용 아케이드 게임으로 내놓은 <PONG>으로 알고 있거나, 나이가 좀 있는 분들은 이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비디오 게임의 역사는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47년 미국에서 텔레비전 기술자로 일하던 토머스 골드스미스(Thomas. T. Goldsmith Jr.)와 에슬 레이 맨(Estle Ray Mann)이라는 사람은 특허청에 '음극관 놀이 장치(Cathode Ray Tube Amusement Device)'를 제출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레이더 디스플레이에서 착안한 이 장치는 2차 세계대전을 주제로 미사일을 여러개의 손잡이로 제어하여 목표에 맞추는 간단한 방식의 게임 구동기였으며, 슈퍼컴퓨터 NIMROD를 통해 플레이하도록 제작되었다. 이에 앞서 님로드는 미사일의 궤도 계산을 위해 제작된 수학적 전략이론게임인 NIM을 플레이하도록 만들어진 기기였으나, NIM은 디스플레이로 화면을 출력하는 방식이 아니었던 데다가 놀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군사용 프로그램적인 성격이 강했으므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음극관 놀이 장치"를 최초의 게임으로 보고 있지 않다.
이후 1952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교수였던 알렉산더 더글러스(Alexander S, Douglas)라는 사람이 박사 학위논문의 실례로써 틱택토를 컴퓨터상으로 구현한 <3목두기>(Noughts and Crosses)를 개발했지만, 연구 목적을 바탕으로 만든 게임이라 조용히 잊혀졌다.
역사상에 등장한 최초의 비디오 게임은 1958년 뉴욕 동부에 위치한 원자력 연구시설인 브룩헤븐 국립 연구소에 재직중이던 윌리엄 히긴보섬(William Higinbotham)이라는 사람이 만든 <테니스 포 투(Tennis for Two)>로 알려져있는데, 히긴보섬은 연구소를 방문하던 손님들이 지루해하는 것을 보고 첨단기술을 이용한 유희를 통해 이들을 접대하면 괜찮은 반응을 보이겠다는 생각에[2] 연구소에서 신호 계측에 사용하던 5인치 아날로그 오실로스코프에 간단한 회로와 간이 조종기를 연결하여 전시용으로 이를 개발하였다고 한다. 말인즉슨 대중을 겨냥해 제작한 최초의 게임은 '''상업용 목적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지금 기준에서 보자면 쬐끄만 화면에 도트 몇 개 돌아다닐 뿐인 게임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물건이었지만, 당시 기준에서는 신선하고 획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발명이었으며 연구소에서는 연구자의 발명품에 특허를 취득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연구소 윗선과 동료 연구자들도 히긴보섬에게 특허 신청을 권유했다, 허나 당시 이미 몇 가지 특허를 소유한 학자였던 히긴보섬은 무슨 이유에선지 게임에 대한 특허 취득은 신청하지 않았는데, 이 결정이 훗날 개임개발 시장에서 자칫 저작권 분쟁으로 일어날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자유로운 인디 게임 개발환경의 구축에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허나 비록 전시용으로 제작되었다고 해도 "원자력 연구 시설"에 설치된 <테니스 포 투>의 주 플레이 연령층은 정부나 관련 협력 단체에서 나온 불특정 다수의 중년 아저씨들이나 연구소 동료들이었으며(...) 이들을 제외하면 일년에 단 두번 있는 연구소 방문의 날에 잠깐씩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는 것이 전부였기에 한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테니스 포 투>가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를 제작한 랄프 베어가 퐁이 오디세이에 포함된 탁구 게임을 표절하였다며 아타리의 놀런 부슈널에 소송을 걸 때 히긴보덤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이 게임을 언급하면서 알려지게 된 것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 항목에서 다시 서술하도록 한다.
그 뒤를 이어 게임성의 발전이라는 업적을 이룬 것은 스티브 '슬러그' 러셀의 <우주 전쟁(Space War)>이다. 1961년 여름 경에 미국의 MIT에는 PDP-1이 보급되었는데 이 PDP-1이란 물건은 키보드와 모니터를 갖춘 최초의 컴퓨터 였다. 같은 해에 MIT에 재학중이던 연구직 공대생[3] 인 스티븐 러셀은 이 12만 달러짜리 PDP-1 컴퓨터의 성능을 시험해 볼 방법으로써 PDP-1를 통해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의 개발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그의 해커팀과 함께 게임의 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컴퓨터는 천공 카드나 테이프로 입출력 했지만 이 컴퓨터는 '모니터'를 갖추었기에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러셀은 CRT모니터에 움직이는 그림을 표시하게 하여 인터렉티브한 게임을 즐길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던 것. 당시 유명 SF소설 작가였던 에드워드 엘머 스미스(E. E. Smith)의 작품에 빠져있던 러셀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게임을 기획했고. 동아리 멤버들도 이에 찬동해서 게임 개발은 순항에 오른다. 그렇게 6개월 만에 <우주 전쟁>의 첫번째 버젼이 탄생했다. 점 모양의 미사일을 발사해 서로를 맞추는 게 목표인 2인용 대전 슈팅 게임으로, 오늘날로 치면 아레나 형식의 슈팅게임에 가장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당시 러셀이 몸 담고 있던 해커 동아리인 TMRC(Tech Model Railroad Club)는 이후로도 러셀의 작품을 바탕 삼아 게임을 계속 업데이트해 나갔는데. MIT의 수많은 학생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업고 수많은 공대생들이 자발적으로 갈려넣어진 결과(...) 어떤 사람은 중력 옵션을 넣었고, 어떤 사람은 배경인 은하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조이스틱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최초의 조종 장치를 만들기도 했고, 급기야 로켓이 시스템 영력을 벗어날 때를 대비한 경고 시스템과 함께 공간이동을 통한 탈출 옵션 등의 유저 친화적 인터페이스까지 업데이트되었다. 주변에 몰린 구경꾼들이 너무 많아 여러 대의 모니터를 추가로 연결해 사람들이 플레이 하는 게임을 구경하는 지경이었다고(...) 컴퓨터 한대의 가격이 12만 달러였던 시절 게임에 대한 관심만으로 이루어낸 첫번째 게임산업 환경의 기틀인 셈이다.
이렇듯 <우주 전쟁>은 MIT에서 큰 인기를 끌었지만 러셀 역시 히긴보섬처럼 이 게임으로 돈을 벌지는 못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컴퓨터가 보편화된 시대도 아니고 러셀 자신도 <우주 전쟁>에 대한 권리 문제에는 전혀 관심 없었기 때문. 다만 <우주 전쟁>의 뛰어난 작품성은 이후 나오는 모든 게임에 큰 영향을 끼쳤고. 훗날 게임회사 아타리를 창립하게 되는 놀런 부슈널에게 큰 감명을 주어 그가 게임산업에 뛰어들게 되는 계기가 된다.
2.2. 1970년대
1972년은 게임의 역사에 역대급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졌던 해로, 우선 미국의 군수품 업체 소속 엔지니어이자 발명가였던 랠프 헨리 베어(Ralph Henry Baer)는 TV에 추가장치를 달아 게임 시스템을 구현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곧 시제품 제작에 착수하여 1968년 비디오 콘솔의 첫 프로토타입인 "Brown Box"를 개발하게 된다. 이 발명을 눈여겨 보고 베어에게 접근한 것이 당시 TV 제작 업체였던 마그나복스 사로,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72년, 마그나복스 사는 "오디세이"라는 이름으로 브라운 박스를 가정용 게임기로 상용화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이자 1세대 콘솔인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로. 지금도 게임의 역사에서 첫 번째 게임기로써 길이 화자되는 기기다.
이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는 항목을 참조해보면 알겠지만, 약 40개의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 그리고 콘덴서, 저항기 등의 순수한 아날로그 회로만이 적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TV화면에 표시 가능한 퍼포먼스라고 해보았자 움직이는 점 몇 개 표시하는 것이 고작이라 당시 오딧세이의 상품 박스 안에는 "오버레이"(Overlay)라는 이름의 게임의 배경역할을 하는 투명한 셀로판지와 게임에서 사용할 실제 소품인 게임 머니와 칩, 기타 게임의 보조용 레이아웃 보드가 동봉되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점수 계산도 플레이어가 직접 종이에 써서 셈해야 하는 조악한 물건으로 보이겠지만, 의외로 컨트롤러에 리셋 스위치를 넣는 등의 현대적 특성도 보여주었으며 보조 기기로써 소총 형태의 광선총을 지원하는 게임도 있었다고.
허나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는 당시 약 '''100달러''' 정도의 고가로 판매되었으며, 마그나복스의 대리점에서만 파는 소극적인 마케팅으로 인해 고객들은 오디세이가 마그나복스의 텔레비전에서만 작동된다고 생각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마그나복스 사가 게임기에 TV를 끼워 팔아먹으려는 상술로 소비자들에게 비춰지게 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아타리가 가정용 퐁 박스에 흑백이나 컬러 어떤 텔레비전에서도 동작한다고 표기하게 만든 계기가 된다. 이런 소극적인 마케팅 작전의 결과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의 최종 판매 집계는 약 33만 대 정도의 저조한 판매량을 기록했고, 해당 게임기는 1975년에 단종된다.
사실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는 게임 내적으로의 발전보다는 게임 외적으로의 발전을 많이 이끌었다고 볼 수 있는데, 마그나복스 사는 75년 오디세이의 생산을 종료한 뒤에도 아타리와 콜레코, 액티비전 등과 같은 회사들에게 특허 소송을 걸어 승소함으로써 게임에 대한 저작권의 개념을 확립하는데 일조했으며, 이때 아타리 사의 "PONG" 게임과 관련하여 랠프 베어가 제기한 소송에서 상술했던 "테니스 포 투" 게임의 개발자인 윌리엄 히긴보섬이 법정에 출석함으로써 비로소 세계 최초의 게임에 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법적 분쟁들은 후에 1985년 닌텐도가 제기한 마그나복스의 특허 무효 청원 소송을 패소시키고 마그나복스가 닌텐도로부터 로열티를 받아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개발자였던 랠프 베어는 비디오 게임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2006년 미국 국가 기술상을 수상했으며, 베어 본인도 IEEE의 평생 명예 회원으로 추대되는 명예를 누였다. 그가 직접 개발했던 브라운 박스의 프로토타입은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또한 1972년은 놀런 부슈널이 게임 제작사 아타리를 설립하고, 곧이어 최초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게임으로 기록된 <퐁(PONG)>을 출시하여 엄청난 판매고를 올린 한해이기도 하였다. <퐁>은 탁구를 모방한 2인 전용의 게임으로 당시로써는 최첨단인 "화면 상단에 점수계산 표시"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었으며(...) 이후 <퐁>은 인기에 힘입어 가정용 기판으로도 이식된다. 같은 시기에 이미 비디오 게임에 대한 특허를 갖고 있었던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의 개발자 랠프 베어가 PONG이 마그나복스 사의 몇몇 게임들을 표절했다는 이유를 아타리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역으로 부슈널은 그 특허를 70만 달러에 사들이겠다는 제의를 했다. 베어는 게임 열풍도 잠깐 지나면 시들시들해질 거품이라고 생각해 부슈널의 제의를 받아들였지만 이미 알다시피 게임 산업의 성장은... 다만 아타리에서 <퐁>에 대한 로열티 명목으로 베어에게 일정금을 지급했기에 그의 입장에선 별 손해는 없었다고.
이렇듯 적절한 분쟁 처리와 <퐁>의 열풍에 의해 성공한 아타리를 보고 고무된 많은 사람들이 게임개발 산업에 뛰어들었으며, 이후 2000년대에 이를때까지 퐁과 같은 아케이드 게임은 그야말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일본으로 확장한 아케이드 시장은 독특한 자체적 변형을 보임으로써 훗날 소위 "문방구(오락실) 게임"이라 불리는, 아케이드 게임 시장을 주도할 개발 환경을 구성할 준비를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78년 타이토에서 개발한 슈팅 게임인 <'''스페이스 인베이더'''>. 슈팅 게임 역사의 계보 제일 윗쪽 부근에 위치한 바로 그 게임이다. 이러한 게임시장의 급성장에 따른 문제는 결국 1976년에 일어났다, 게임제작과 게임시장 환경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던 워너브라더스 사가 <퐁>을 통해 증명된 비디오 게임의 비즈니스성에 눈이 먼 나머지 놀런 부슈널에게 접근하여 아타리를 2700만 달러에 인수해버린 것. 부슈널 쪽에서도 사업의 확장과 용이한 마케팅 접근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게이머가 아니라 사업가였던 워너측 경영진과 게임 개발자인 부슈널은 잦은 충돌을 벌일수밖에 없었다. 결국 경쟁 개발사 입사 금지라는 조건까지 내걸고 부슈널은 아타리를 떠났고.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가 사라진 게임계에는 전후무후한 최대급 병크가 찾아왔다.
2.3. 1980년대
1983년, 게임계 최대의 재앙인 아타리 쇼크가 발생하였다. 자세한 사항을 적기엔 여백이 부족하니 항목 참조.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개나소나 게임산업에 뛰어들어 너나할것 없이 저질급 게임과 콘솔들을 양산해 시장에 물량을 부어넣은 결과 소비자들의 불만이 곪아오르다 한방에 터져버리면서 스스로 쌓아왔던 "게임"이라는 문화 콘텐츠에 대한 신뢰와 게임 산업의 시장 기반을 말아먹은 사건이다. 그런데 왜 굳이 아타리 쇼크라고 불리냐면, 이 대재앙의 시발점이 된 게임과 소비자 불만폭발의 계기가 된 게임이 바로 아타리 사의 게임이었기 때문. 더구나 이 게임들은 각각 아타리 2600 전용의 <팩맨>과 <E.T.>로, 인지도라면 알아주는 게임들이었다(...) 심지어 <E.T.>는 아타리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으로부터 직접 판권을 사온 물건이었다. 아타리가 스스로 개척한 게임시장을 스스로 말아먹어 유종의 미를 거둔 셈.
이렇게 게임시장은 가루로 산화하여 역사의 한편으로 사라지는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훗날 양대산맥이라 불릴 닌텐도와 세가가 이 시기에 게임시장에 뛰어들어 혁신적인 시도에 많이 도전함으로써 가까스로 게임 시장은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그래도 병크가 불거진 게임들이 모두 공장 찍어내기식 물량이 문제가 되었던 가정용 콘솔 버전이었던 덕분인지, 상대적으로 아케이드 게임 시장은 타격을 덜 받아 게임계가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상황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나온 대표적인 걸작들이 바로 '''갤러그''', '''스트리트 파이터''', '''더블 드래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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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시작은 바로 1983년 7월 15일, 일본의 닌텐도가 카트리지 교환식 8비트 비디오 게임기를 출시한 사건이었다. 출시한 게임기의 정식 명칭은 '패밀리 컴퓨터(Family Computer)'였으며 이후 패미컴으로 불리게 된다. 1883년 화투 및 트럼프 제작으로 시작해 장난감 회사로써 성장하던 닌텐도는 급변하는 시대상에 맞추어 전자오락 산업의 성장성에 주목하고, 패미컴을 선두로 게임시장에 야심차게 진출하였으나 마침 아타리가 싸놓은 똥으로 인해(...) 게임에 대한 여론은 영 좋지 못한 편이었다. 아타리 쇼크의 영향으로 당시 세간에 팽배하던 "비디오 게임은 해악"이라는 인식에 맞서, 닌텐도는 미국시장을 겨냥해 패미컴의 상표명을 NES(Nintendo Entertainment System)로 변경하고 캐릭터 등을 추가하여 아이들에게 친숙한 느낌이 들고 "건전"해보이는 인식을 심는 방향의 접근을 택했다.[4] 이러한 접근법은 얼마전까지 아타리의 저질 포르노 게임들을 아이들에게서 떨어트려놓아야 했고, 행여나 들켜서 이게 뭐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응 이건 두사람이 같이 춤을 추는거란다^^"라고 둘러대야만 했던 부모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또한 닌텐도는 게임기에서 게임에 필요한 부분 이외의 기능은 모두 없애서 성능을 극대화시키고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를 중시하였으며, 당시에 아케이드 시장을 이끌어나가고 있던 몇몇 회사를 세컨드 파티로 영입했다. 또한 먼저 시안을 테스트해서 일정 이상의 퀄리티인 게임만 닌텐도 라이선스와 개발 허가를 주는 방식을 도입하는 등 전체적인 게임의 퀄리티를 높여서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다시 살려내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게임개발 업계에서 주로 사용되는 서드파티 제도로, 닌텐도는 아타리 쇼크로 거의 사장된 가정용 게임기 업계에 충분한 관리만 따르면 게임도 명품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서드파티를 통해 증명한 셈이다.
이 패미컴이 게임기의 뜻을 새로 정의할 정도로 굉장한 기기였던데다 역시 믿고사는 닌텐도! 급의 게임 품질관리의 결과, 닌텐도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하는 쟁쟁한 시리즈 라인업들은 거의 모두 패미컴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85년도 '''슈퍼 마리오브라더스'''를 시작으로[5] , 86년도엔 '''젤다의 전설'''과 '''악마성 드라큐라''', 87년도에는 '''록맨'''과 '''파이널 판타지''' 까지. 이전까지가 게임시장의 태동기였다면 80년대부터는 게임의 태동기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닌텐도의 독주를 막기 위해 많은 회사들이 품질 관리와 서드파티 운영을 중심으로 한 게임 산업의 재구축에 들어갔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1985년 10월 일본의 세가가 자국 내에서 출시한 세가 마크 III(SG-1000 Mark III/Sega Mark III/セガ・マークIII)라는 게임기다. 이전부터 게임 제작사로써 인지로를 확립하고 있었던 세가는 1978년부터 미국의 비디오 게임 회사 고블린과 제휴하여 게임 기판의 제작과 아케이드 게임의 유통을 맡기 시작, 비디오 게임 분야에도 진출을 시작했는데, 이러한 환경과 여건 속에서 개발된 세가 마크 III는 비록 성능상으로는 패미콤을 압도했으나. 이미 닌텐도가 구축해놓은 엄청난 서드파티와 시장 장악력에 밀려 패배하게 된다. 세가 내부에서도 사업 초기에는 가정용 콘솔은 아케이드 콘솔 다음으로 세컨드로 치는 인식이 많았을 정도로 시장관리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이후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 세가는 1986년 6월 세가 마크 III를 케이스와 이름만 바꿔 세가 마스터 시스템(영어: Sega Master System)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출시했고, 이는 이미 패미컴이 짱먹고있던 일본과 북미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대히트를 침으로써 세가가 가정용 콘솔의 중요도를 재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세가는 다시 가정용 기기의 개발에 착수. 단 2년 뒤인 1988년 10월 29일에 메가드라이브, 북미명 세가 제네시스로 불리는 게임기를 발매한다. 이는 세가가 야심차게 준비한 계획에 따라 16bit cpu를 장착한 게임기. (79년도에 출시된 인텔리비전이후 10년이나 지나서 나온 16bit 게임기지만) 다만 액션 게임과 슈팅 게임 주류의 게임 발매와 세가의 홍보에 입힙어 출시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북미시장의 과반수를 점유하는 저력을 보이며, 닌텐도가 나란히 서기 이전까지는 게임시장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린 게임기로 기록되었다.
한편 북미의 PC 게임은 아타리 쇼크에서도 살아남았다. 1982년 등장한 8비트 컴퓨터인 코모도어 64가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가정용 PC 시장을 휩쓸었고, 그 이전에 등장했던 Apple II와 함께 북미 PC 게임 시장의 양대 하드웨어로 등극, PC 게임의 8비트 시대를 이끌었다. 아타리 쇼크 이후 닌텐도가 등장하기 전까지 짧은 기간 동안 콘솔 게임의 수요가 상당수 PC로 흘러갔고, 북미 게임 제작사는 대거 PC로 게임을 출시했다.
PC는 당시 여러 하드웨어가 있었지만 어느 하드웨어도 닌텐도식의 서드파티 룰을 강요하지 않았고, 아타리식의 출시 룰을 강요하지 않았다. 즉 PC 게임 제작 환경은 제작사에게 가장 큰 자유가 주어진 시장이었다. 품질 관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저질의 게임이 나올 가능성이 컸지만, 반대로 하드웨어 제조사의 간섭으로 저질 게임이 나올 수 밖에 없는 환경을 강요하는 일도 없었으므로 양질의 게임이 나올 가능성도 컸다.
이런 자유로운 환경은 명작급의 게임이 대거 출시되는 결과로 나타났고, PC 게임은 북미 게임 시장의 한 축을 당당히 차지하게 된다. PC 게임은 기본 인터페이스가 키보드였기 때문에 콘솔과는 다른 영역을 점차로 개척해 나갔다. SSI사는 워 게임을 모티브로 한 각종 전략 게임 시리즈를 내놓으며 전략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를 개척했고, 게임 제작자 윌 라이트는 맵 에디터에 도시 건설 요소를 집어넣은 심시티를 내놓으며 건설&경영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를 창시했다. RPG는 울티마 시리즈,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 등의 수많은 명작이 나오면서 JRPG와는 차별화된 WRPG 장르를 구축했고, 어드벤처는 시에라를 세운 켄 윌리엄스와 로베르타 윌리엄스 부부가 최초의 그래픽 퍼즐 어드벤처 게임인 미스테리 하우스를 내놓으며 북미식 퍼즐 어드벤처 장르를 개척했다.
또한 1980년대 말 PC, 거치형 콘솔, 휴대용 콘솔, 아케이드 등등 기종을 뛰어넘어 전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킨 퍼즐 게임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테트리스다. 1984년 소련의 프로그래머 알렉세이 파지노프가 만든 테트리스는 우연한 기회에 세상에 알려졌고, 당시 존재하던 거의 모든 기기에 이식되면서 전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닌텐도도 게임보이용으로 테트리스를 출시했고, 게임보이 사상 최고의 판매량(3500만장)을 기록했다.
한편 한국에서는 1988년 하이콤이 설립되면서 게임시장에 대한 관심이 알음알음 일어나기 시작했다.
2.4. 1990년대
1990년의 게임의 역사는 11월 경에 닌텐도에서 패미컴의 후계기인 슈퍼 패미컴을 발매하며 시작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이후 본격적인 3D 주류의 5세대 게임기가 등장하면서 최후의 16비트 게임기이자 최고의 16비트 게임기라는 칭호를 갖게 될 이 게임기는 닌텐도의 서드파티가 가진 노하우와 그래픽, 사운드 모두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사양에 입힙어 2D 게임 제작수준의 절정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받게 된다. 이때 닌텐도가 보여웠던 그래픽, 도트 애니메이션의 미려함이나 게임성, 게임 사운드 제작능력은 후일 자사의 휴대용 게임기 게임보이 어드밴스에 슈퍼 패미컴의 게임들을 그대로 이식했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정도의 완성도를 보이는 수준이었다. 오늘날 게임 컨트롤러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LR버튼 또한 이때 닌텐도가 슈퍼패미컴에 처음 시도하여 그립감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PC 게임도 1990년 전후를 기점으로 8비트에서 16비트로 넘어간다. 이 무렵 16비트 PC인 IBM PC XT 호환 컴퓨터가 저렴한 가격으로 가정용 시장으로 내려오면서 8비트 시대는 저물고, PC 게임 시장은 IBM PC 호환기종 + MS-DOS 환경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콘솔에 비해서 미려한 그래픽과 사운드를 보여주지는 못했는데, 이것은 IBM PC가 원래 사무용이었기 때문에 그래픽은 "그림만 나오면 된다" 수준이었고, 사운드도 역시 "소리만 나면 된다"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PC 게임은 삑삑거리는 PC Speaker 사운드에, 그래픽은 최대 4색의 CGA 그래픽이었다. 이 문제는 1993~4년 무렵에 멀티미디어 PC라는 개념이 나오면서 PC의 사양이 VGA 카드, 사운드 카드, CD-ROM 드라이브 기본 장착으로 변경되었고, 이로 인해 슈퍼 패미컴 급의 그래픽과 사운드 구현이 가능해지면서 따라잡게 되었다.
90년대 들어서는 한국에서도 게임산업이 성장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게 되는데, 먼저 1992년 삼성전자에서 국내용으로 메가드라이브용 콘솔게임 우주 거북선을 출시한다. 비록 1988년에 발매되어 89년도에 메가드라이브로 이식되었던 타이토 사의 타수진의 이미테이션 게임이었지만, 그래도 당시로썬 몇 안되는 국내 기술로 자체 개발된 해외 콘솔용 게임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었다. 다만 판매량은 고만고만했던지라 삼성전자는 이후 게임개발 부문에서는 소원한 태도를 보이는 대신 스토리 오브 도어, 신창세기 라그나센티, 라이트 크루세이더, 알렉스 키드 등의 메가드라이브 작품들을 한글화하여 게임산업에 대한 관심은 아직 식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참고로 우주 거북선의 당시의 권장 소비자가는 36.000원이었다고.
1992년 4월 20일에는 한국에서 대대적인 홍보를 업고 소프트액션 사에서 폭스 레인저를 출시한다. 폭스레인저는 최초의 상업용 PC게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국산 게임 중 판매량 1만 카피를 달성한다. 폭스레인저의 성공은 한국 게임의 상업성을 입증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후 무수한 개발사들이 생겨나며 한국 PC 패키지 시장의 붐을 만든다. 뿐만 아니라 폭스 레인저는 PC 통신을 통해 초반 스테이지를 즐겨볼 수 있는 데모 버전을 국산 게임 최초로 배포함으로써 게임 마케팅에도 신경쓰는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최종 판매량 2만 5천장이라는 기록을 세울 수 있었고, 이러한 폭스 레인저의 인기에 힘입어 소프트액션은 폭스레인저 2편과 3편, 그날이 오면 시리즈를 출시하였다. 또한 92년 말에는 자사에서 자체 패러디 게임인 "박스 레인저"를 내놓았는데, 이 게임도 국내 최초의 자사 패러디 게임이자 음성출력 지원 게임이라는 기록을 가진 게임이다.
이렇게 한국에서 게임산업 시장이 발돋움하는 동안, 1993년에는 아타리 쇼크로 유명한 아타리가 아타리 재규어라는 64비트 게임기를 출시하였으나... 이미 아타리 쇼크와 이후 이어진 몇차례의 인수합병으로 인해 아타리는 명운이 많이 기운 상태였고, 더구나 당시 아타리 재규어가 경쟁해야만 했던 5세대 게임기들의 라인업에는 저 유명한 세가 새턴, 닌텐도 64, 플레이스테이션 등이 있었다. 비록 이전 세대이긴 하지만 성능깡패 네오지오도 2000년까지 살아남았다. 이 네 콘솔들로 인해 재규어는 일본 게임기들에 밀려 묻히게 되고, 같은시기에 699달러라는 까무러칠 만한 가격의[6] 3DO라는 공통 규격의 게임기와 경쟁하는 신세가 된 끝에 실패하게 된다. 해당 게임기는 총 500만 대가 판매되었고, 사람들이 기억하는 아타리 최후의 단말마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아타리의 최후의 단말마조차도 무색하게 할만한 게임이 하필 1993년에 나왔으니... 바로 현대 FPS게임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드 소프트웨어의 '''둠'''이었다. 진보된 3D엔진과 4인 네트워크 플레이 지원, 그리고 FPS게임 플레이의 기틀을 재정립한 구성으로 무장한 이 게임은 폭발적인 인기를 몰고왔고, 10개월 뒤 후속작인 둠 2: 헬 온 어스가 발매됨으로써 아타리고 나발이고 뭐고 그냥 1993년은 둠의 해로 기록되었다.
이렇듯 둠의 열풍은 실로 엄청나서 사람들이 회사건 집이건 컴퓨터 앞에서 틈만 나면 이걸 붙잡고 있느라 회사 임원들이 골머리를 썩을 정도였다. 심지어 둠의 발매 5년 뒤에 출시된 모 인간 vs 에일리언 vs 프레데터 전략게임의 스텝롤에도 개발진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준 공로를 치하하며 둠이 당당히 적혀있을 정도였다. 한편 이렇게 둠에 취한 직장인들 가운데에는 13년간 마이크로소프트 사에서 근무하던 어느 풍채좋은 프로그래머도 있었는데, 한낱 게임이라 생각했던 둠이 당시의 윈도우OS보다 더 많이 실행된다는 통계를 보게 된 그는 게임산업에 도전할 결심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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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2월 3일, 일본의 소니에서는 독자 규격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을 출시하였다. 원래 닌텐도와 소니의 개발 합작 기기로 기획되었던 플레이스테이션은 90년대 초 슈퍼 패미컴용 CD-ROM 확장 장치의 개발에 있어 개발 주도권을 놓고 일어난 불협화음을 원인으로 닌텐도 사가 계약을 중도파기하면서 프로젝트가 공중분해당할 처지에 놓였으나, 소니 측에서 계속해서 독자적으로 비디오 게임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를 설립, 협력 프로젝트였던 슈퍼패미컴용 CD드라이브를 뜯어고쳐 내놓게 된 것이 바로 플레이스테이션이었다. 닌텐도의 통수에 대한 소니의 복수라고 볼 수 잇는 셈. 플레이스테이션은 종래까지 닌텐도가 고수하던 롬 카트리지 교환 방식과 차별화된 CD-ROM과, 고성능 32비트 프로세서에서 나오는 성능 및 3D그래픽 구현능력을 무기삼아 빠르게 시장 인지도를 넓혀나가기 시작했으나, 불운하게도 곧이어 세가가 1994년 11월, CD롬을 채용한 세가 새턴을 출시하면서 자연스레 선경쟁구도가 형성되었고. 이후 2, 3년에 걸쳐 세가와 소니는 가격인하로 점철된 영혼의 맞다이를 벌였다. 양 진형 모두 개발 컨셉이나 서드파티의 규모 등이 비슷비슷했기에 경쟁 초기에는 2D진영인 새턴이 승리할 것이라 많은 이들이 예측했으나, 점차 3D가 게임시장의 주류가 되고, 새턴이 복잡한 설계상 가격 인하가 어려워 적자 판매가 계속된 데다가, 결정적으로 세가 새턴이 먼저 하드웨어적인 한계를 맞음으로 인해 싸움은 결국 PS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러한 경쟁의 결과 소니는 2006년까지 플레이스테이션을 1억 249만 대나 판매하게 된다.
한편 94년도에는 몇가지 슈퍼패미컴 전용 소프트의 발매 이후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던 실리콘&시냅스(Silicon & Synapse)라는 이름의 한 게임사가 회사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사명을 바꾸기로 결정하는데, 이게 바로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이다. 이후 블리자드 사는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성공으로 입지를 굳혀나가고, 96년도에는 핵앤슬래쉬 RPG의 아버지인 '''디아블로''' 1을 발매, 메이저 게임사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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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6월 23일에는 후발주자 닌텐도에서 64bit 게임기인 닌텐도 64를 내놓음으로써 잠시 게임시장은 새턴 vs 플스 vs 64의 3각 구도를 보였으나. 먼저 새턴이 뒤쳐지고, PS와 닌텐도 64의 경쟁 구도가 굳혀지게 된다. 닌텐도는 같은 게임기를 1996년 9월 29일에 북미와 캐나다에 동시 출시하는 등[7]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으나, 플스보다 더 우월한 성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롬 카트리지 방식을 고수한 덕에 플스가 보여준 동영상 컷신과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했고, 계속된 닌텐도의 갑질에 지친 상당수의 서드파티들이 소니측에 붙어버렸으며, 협력계약 파기로 인해 슈퍼패미컴 시절의 고품질 사운드칩을 공급받지 못하는 등의 악재가 겹쳐 결국 플스의 아성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물론 닌텐도 64는 플스와의 경쟁에서 한발짝 뒤쳐졌을 뿐, 전 세계적으로 보면 상당한 판매량과 시장 점유도를 확보한, 결코 실패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게임기였으나, 기존의 닌텐도가 기록하던 기록과 비교했을때 차이는 분명히 존재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닌텐도는 몇년간 앉아있던 비디오게임 시장의 왕좌를 소니에게 내주게 된다.
다만 이 시기는 치열한 경쟁이 진행되긴 했어도 경쟁의 두 축 모두 개념이 재대로 잡힌 개발사였기 때문에, 아타리 쇼크때처럼 게임의 질이 다같이 떨어진다던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가 90년대 비디오 게임의 황금기로, 지금도 3D게임의 기틀을 확립한 불세출의 명작으로 화자되는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와 '''슈퍼 마리오 64''', 잠입액션의 대명사가 된 '''메탈기어 솔리드''', 게임에 몰입해 자살하는 사람까지 속출했을 정도의 흡입력과 스토리텔링을 보여준 '''파이널 판타지 7''', FPS게임 발전 과정에 있어 기념비적 작품으로 화자되는 '''007 골든 아이''', 그리고 스타폭스 64, 닌텐도 올스타! 대난투 스매시브라더스 등. 게임 좀 한다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작품들은 모두 이 시기에 나왔다. 여담으로 이중 슈퍼마리오 64는 96년도에 최초의 게임관련 수상인 GOTY상을 수상받음으로써 이후 게임웹진과 평가단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받은 상을 집계하여 게임의 인기에 대한 척도를 세운다는 개념이 시작되었다.
PC는 이 무렵 상당히 큰 전환기를 맞게 된다. 1993년 인텔이 펜티엄 CPU를 내놓으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2년 후인 1995년 마이크로소프트가 Windows 95라는 새로운 OS를 내놓고, 뒤이어 1996년 윈도우 환경에서 게임 환경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DirectX API를 내놓으며 윈도우 OS의 게임 시대를 열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3dfx Interactive 내놓은 Voodoo 그래픽 칩셋은 PC에서도 본격적으로 3D의 문을 열어젖혔다.
한편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서서히 한국도 온라인 게임 강국으로 발전하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91년도에 해외에서 출시된 최초의 MMORPG인 네버윈터 나이츠 이후로 등장한 수많은 mmorpg들의 출시를 통해 온라인 기반의 대규모 RPG가 붐이 되려는 조짐을 읽은 국내 개발자들은 1996년 4월 5일 대한민국 최초의 1세대 PC MMORPG인 바람의 나라를 넥슨에서 출시, 이후 리니지와 더불어 20년이 넘도록 유저들에게 사랑받게 된다. <단군의 땅> 등의 초창기 텍스트 머드(MUD) 게임에 최초로 그래픽을 도입한 바람의 나라는 곧 그 플레이성을 인정받아 1998년 7월, 북미에서 서비스를 시작한다. 참고로 바람의 나라는 대한민국산 게임들 중에서 최초로 해외 서비스를 시작한 게임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람의 나라를 공동 작업했던 넥슨의 김정주 회장과 송재경 대표는 서로간의 불화 끝에 바람의 나라가 서비스를 시작하기도 전에 송재경 대표의 퇴사라는 사태를 맞게 된다. 이후 1998년 9월, 엔씨소프트는 아이네트에서 이직해온 송재경 대표를 중심으로 바람의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조상님격의 1세대 PC MMORPG인 리니지의 서비스를 시작한다. 바람의 나라가 한국적 정서와 친근감을 내세워 인기몰이를 하였으므로 송대표는 바람의 나라와의 차별화를 위해 리니지의 컨셉을 서양식 판타지 풍의 RPG를 기반으로 당시 대학가에서 유행하던 D&D에 영향을 받아 로그라이크 게임 NetHack을 벤치마킹하고, 또 지역의 PC방들과의 적극적 연계를 통한 시장공략을 시도했는데, 이게 게임시장에 먹혀들어 이후 엔씨는 리니지의 서비스를 한국, 중국, 일본, 북아메리카, 홍콩, 대만 등으로 확장할 정도의 성공을 거두게 된다. 리니지는 이후 한국게임의 역사를 바꿀정도의 흥행을 이끌어 대한민국의 온라인 게임 산업의 전성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특유의 중독성과 사회문제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이 두 원로급 1세대 RPG은 만화를 원작으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북미에서도 MMORPG의 개발은 계속되었다. 바람의 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메리디안 59와 더 렐름이 출시되었으나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그러다 1997년, 울티마 시리즈의 멀티플레이 버전인 울티마 온라인이 출시되면서 인기몰이를 시작하게 된다. 울티마 시리즈의 특징인 자유도를 MMORPG에 잘 녹여내면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그러다 2년 후인 1999년, 기존의 머드 게임을 집대성하다시피 한 989 스튜디오의 에버퀘스트가 등장하여 큰 인기를 끌었고, 이 게임에서 처음 선보인 탱딜힐과 어그로 시스템은 향후 MMORPG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1998년은 스타크래프트와 하프라이프의 발매로 인해 게이머들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던 한해이기도 하였다.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와 밸브 코퍼레이션이라는 각각 94년과 96년에 출범한 이 두 게임회사는 당시만 해도 워크래프트 시리즈와 디아블로로 인해 이미 갓리자드로 통칭되던 중견 게임사와 신생아나 다름없는 밸브 코퍼레이션이라는 인식이었고, 하필이면 밸브 사의 첫 작품 vs 블리자드의 야심작이라는 대결구도였기에 너나할것 없이 밸브의 불운에 대한 연민과 블리자드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으나... 발매 후 결과는 하프라이프의 승리였다. 물론 두 게임 다 게임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이고, 쉽사리 우열을 가리기 힘든 인기를 누렸지만 다소 마이너한 감이 있는 RTS에 비해 대중은 FPS라는 게임의 장르를 2.5D에서 3D로 끌어올린 신생기업 밸브의 위대한 업적에 한표를 던졌다고 볼 수 있다.
다만 RTS라는 장르의 특성상 스타크래프트는 하프라이프에 비교하기 무안해질 정도로 장기간 인기를 누렸는데,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대한민국에서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되새겨보아도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 가능하므로 짧게 적는다. 사실상 e스포츠라는 개념을 성립시킬수 있게 해준것이 바로 스타크래프트라는 점과, 디아블로 1에서 시도한 배틀넷 시스템을 재정리해 스타에서 멀티플레이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답은 나온 것이다.재미있게도 이후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와 밸브 코퍼레이션은 몇가지 게임의 발매 시기가 겹쳐 뜻밖의 대결구도 형성을 몇번 더 겪게된다.
또한 98년 말에는 바이오웨어와 인터플레이 엔터테인먼트의 합작으로 서양 CRPG의 전설이 되는 '''발더스 게이트''' 1편이 발매되었다. 이또한 당시 RTS와 유사한 탑뷰 형식에 D&D 최신판이었던 포가튼 렐름 세팅을 적용한 스토리로 인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이듬해에는 유통을 맡았던 삼성전자에서 개념번역을 마치고 국내에도 발매되었다. 이미 97년도에 자사의 개발 스튜디오인 블랙 아일 스튜디오에서 발매한 '''폴아웃''' 1편을 성공시켰던 인터플레이는 BG의 성공에 고무되어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같은 해에 폴아웃 2를 발매하여 호평을 이끌어냈으며, 이 작품을 시작으로 바이오웨어와 블랙아일 스튜디오, 그리고 후일 블랙아일 스튜디오의 주요 구성원들이 퇴사후 설립하게 되는 옵시디언 엔터테인먼트는 이후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 -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 - 아이스윈드 데일 시리즈 - 네버윈터 나이츠 시리즈 -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로 이어지는 서양 RPG의 계보 구성을 주도하게 된다.
2.5. 2000년대 이후
2013년 11월 15일, 일본 소니의 8세대 비디오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 4가 399.99 달러의 가격으로 북미에 출시된다. 2013년 11월 22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엑스박스 원을 북미에 출시한다.
2010년 기준으로 보면 콘솔게임 시장(287억 달러)의 규모가 온라인 게임(157억 달러) 시장 보다 130억 달러 정도 더 컸다. 하지만 2014년에 그 차이가 30억 달러로 줄어 들었다. 또한 모바일 게임은 시장규모가 2014년 110억 달러를 달성하여 향후 온라인 게임과 콘솔게임의 50%에 이를 성장세를 보여줬다.
3. 유형별 비디오 게임의 역사
3.1. 콘솔 게임의 역사
3.2. 세대별 분류
3.2.1. 가정용 게임기
- 편의상 하이브리드 게임기를 포함한다.
3.3. PC 온라인 게임의 역사
3.4. 핸드폰, 스마트폰 게임의 역사
4. 국가별 비디오 게임의 역사
5. 관련 자료
한국 게임의 역사
History of video games
6. 관련 문서
[1] 이후 아래에서 언급할 어지간한 유명 게임들을 거의 다 다루고 있다. 테트리스, 슈퍼 마리오 시리즈, 젤다의 전설 시리즈 등.[2] 그 당시에는 컴퓨터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별로 좋지가 않았다. 퍼스널 컴퓨터라는 개념도 아직 없었을 뿐더러 컴퓨터는 탄도학 연구와 같이 살상무기의 개발에 쓰이는 기계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 실제로도 윌리엄 히긴보섬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했었던 과학자들 중 하나였으며 게임을 만든 이유도 연구실 안에서 과학자들이 행하는 노력들이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것들이란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3] 인공지능연구소 소속 연구직으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4] 닌텐도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패밀리 컴퓨터는 이름으로 분류가 되어 오피스 용품이나 가전/전자 제품으로 분류되어 백화점 매장 변두리에 놓여야 했지만, 엔터테인먼트를 이름에 내걸음으로 연말시즌의 가장 핫 아이템인 장난감으로 분류할수 있었고 각 매장의 적극적인 서포트를 받았다. 이 때만 해도 외판원들이 적극적으로 매장마다 발품을 팔며 물건을 홍보하고 전시 계약을 하기위해 치열한 투쟁을 했었던 시기였다.[5] 다만 마리오 시리즈는 첫 작품이 83년도에 아케이드 기판으로 출시한 마리오브라더스였다. 즉 차기작이 되는 셈.[6] 네오지오도 만만치 않으나 성능이 좋은탓에 가격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7] http://en.wikipedia.org/wiki/Nintendo_64[8] 2013 해외콘텐츠시장 동향조사 (전체)